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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빌립보서의 내러티브

빌립보서의 내러티브

2017-01-24 00:58:42


빌립보서 1장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없이 지내며(10잘 하반부) 하나님의 정의의 열매가 가득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기도한다.(11절) 문제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은 첫째로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풍성하게 됨으로(9절) 둘째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알게됨으로(10절)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위해 이 두가지를 간구한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 그들중에는 좋은 뜻으로 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하고 다투면서 전파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이므로 바울은 기뻐한다고 말한다.(18절) 바울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이 존귀함을 받으시길 소원한다.. 인간 역사의 악과 실패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울의 역사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은 자신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하다고 말하는데(21절) 이것이 바울의 삶의 자세고 삶의 형식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게한 것일까? 그것은 바울의 소명의식이다. 바울은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소명의식에 따라서 살았다. 소명의식이란 왕이신 예수 메시아에 대한 헌신이다. 이런 삶은 엄청나게 힘든 삶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판단했고 그에게는 무엇이 그리스도에게 유익이냐는 점이 중요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27절) 그것은 빌립보 교회가 한 정신,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함께 싸우라는 것이다.(27절) 구체적으로 이 싸움은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27절) 대적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적하는 자들은 로마제국으로 볼 수 있다. 빌립보 교회가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은 황제숭배 사상이 만연한 로마제국에서 반대와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고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표징이라고 말한다.(28절) 그들이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라고 말한다(29절).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직면한 싸움이 바로 자신이 하는 싸움과 동일한 투쟁이라고 말한다.(30절)


빌립보서 2장

이렇게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적 공동체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들이 같은 생각,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2절) 서로 격려하고, 사랑으로 위로하고, 성령으로 교제하고 서로 동정하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한다.(1절) 이것이 메시아적 공동체의 생활방식이다.  세상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과 허영으로 하며, 자기 일만을 돌보지만 바울은 메시아적 공동체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반대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주라고 말한다. 전자가 로마제국의 원리라면 후자는 메시아적 공동체의 원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메시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이루어진다고 바울은 말한다.(5절) 메시아 예수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셨다.(8절) 세상의 정의는 폭력으로 이루어지나 하나님의 정의는 순종으로 이루어진다. 예수에게 주어진 지고한 권세는 바로 이 순종을 통해 주어진 것이다. (9-11절) 바울의 결론은 빌립보 교회가 예수의 순종을 배우라는 것이다(12절)


빌립보서 3장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여러번 반복한다. 그는 이런 반복이 절대 번거로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빌립보 교회에게 안전하다고 말한다.(1절) 바울은 자신이 고난 중에 누리는 기쁨을 그들도 누리기 바란다. 성령이 주시는 이런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할 바가 없다는 것이다. 2절부터 이 편지의 본론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아브라함 전통에서 유래하는 할례는 오랜 세월동안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바울은 메시아 공동체에서 할례 전통을 주장하는 것을 엄청나게 큰 문제로 인식했다. (2절)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은 할례가 유대인 공동체의 표징이 된 것처럼 메시아 공동체에 들어가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메시아 공동체에 들어오는데는 어떤 조건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할례든 무엇이든 육적인 기준을 조건으로 메시아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으로 메시아 공동체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9절).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 공동체는 인간이 가진 어떤 특권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조건으로도 차별하지 않는 공동체였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메시아 공동체의 입교 조건이 아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든 유대인에게든 율법을 메사아 공동체의 입교 조건으로 삼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차별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메시아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구약에서도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오는 조건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고 율법은 그 공동체의 규율로서 주어진 것이지 공동체에 들어오는 조건은 아니었다. 아브라함 전통에서 유래한 할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에 그 선택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신 것이지 할례가 선택의 조건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바울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개라고 멸시했고(2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18절)이며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말한다.(19절) 바울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자들이며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바울은 메시아 공동체의 시민권은 하늘에(이 땅이 아니라) 있으며 그들은 장차 메시아가 주실 부활의 영광을(수치의 영광이 아니라) 기다린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4장

다시금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한다.(4절)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없는 것을 간구하고 주신 것을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인데 이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의 모든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게 배운 것, 받은 것, 듣고 본 것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명예로운 것, 덕스럽고 칭찬할만한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런 것을 실천할 때 평화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10절 이하에서 헌금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빌립보 교회가 헌금을 통해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고 협력한 일을 칭찬한다.(14-15절) 바울은 그들의 헌금이 아름다운 향기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라고 말하며(18절)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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