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and the Faithfulness of Paul[서평]- 김형태
2016-06-15 17:40:19
Book Review
Heilig, Christoph., J. Thomas Hewitt and Michael F. Bird, eds. God and the Faithfulness of Paul: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Pauline Theology of N.T. Wright. WUNT 2.413. Tübingen: Mohr-Siebeck, 2016. VIII + 833 pp. Pbk. US$194.00. ISBN: 978-3-16-153851-3.
하나님과 바울의 신실하심(God and the Faithfulness of Paul)은 독일의 유명 학술총서인 WUNT II 시리즈에서 나온 단행본으로 N.T. 라이트의 PFG(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를 연구, 비평하기 위해서 독일권과 영미권의 유명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공동저술한 책이다. 본 요약은 이 책의 Part I, 서문에 나오는 이 책의 편집자들 ( Michael F. Bird, Christoph Heilig, and J. Thomas Hewitt)의 요약을 발췌 번역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파트 I은 쉴리써(Benjamin Schliesser)의 에세이 “바울 신학들 사이에서의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이하 PFG)”를 포함하는데, 그의 에세이는 PFG를 비교적 최근의 바울에 대한 저작들 사이에 위치시키며, 본 책의 서문 역할을 한다. 쉴리써는 바울 신학 전체를 집대성하려는 최근의 굉장한 노력들 (예를 들어, 제임스 던, 토마스 슈라이너, 마이클 울터, 우도 쉬넬레)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이 모든 바울에 대한 작품들이 어떻게 저자들의 이론적 틀과 방법론적인 전제들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룬다. 쉴리써에 의하면, PFG는 루돌프 불트만의 신약신학의 유산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반응을 취한다. 여기서 라이트의 중요한 공헌은 “메시야 사건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의 단일한 이야기에 대한 바울의 재해석과 재진술”에 대한 그의 설명에 있는데, 쉴리써는 이것이 비록 “서사적 낙관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주 매력적인 고유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쉴리써는 그의 에세이에서 점점 더 서로 분리된 채로 표류중인 독일어권과 영미권의 신약학계 사이의 대화를 시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파트 II는 해석학으로부터 역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는 라이트의 방법론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위쉬마이어(Oda Wischmeyer)는 “독일의 주해적 관점으로부터 조망된 N.T. 라이트의 성경 해석학”에 대해서 씨름을 하는데, 즉각적으로 독일어권과 영어권 세계에서 생기는 바울 신학에 대한 구체적인 차이점들에 대해서 주목한다. 위쉬마이어는 또한 라이트가 세계와 사고체계와 신학의 상호작용 안에서, 또한 로마 제국의 배경 안에서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데 성공했다고 언급한다. 그녀에 의하면, 라이트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가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바울에 대한 목회적 교회론적 해석에 의해 촉발된 접근인데, 이 접근방식은 하나님과 메시야, 그리고 “재진술된 이야기”로서의 성경에 대한 “계속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작업하는 성경 해석학의 모델이다. 하지만 큰 그림으로서의 라이트의 분석에 의해 얻어지는 것들은, 때대로 개별적인 바울 본문들의 어떤 지점에서는 길을 잃게 되는데, 그곳은 그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이 조명하기에는 그 역량이 제한되는 곳이다.
로쉬(Andreas Losch)는 “라이트 버전의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서 썼는데, 비판적 실재론의 기원과 이를 둘러싼 논쟁들에 대해 주목한다. 라이트 자신의 주장과는 반대로, 로쉬는 라이트의 틀이 이 주제에 대한 벤 마이어의 작품과는 대체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라이트의 접근방식은 마이어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상당한 면에서 다르다. 로쉬는 라이트의 “사랑의 해석학”이 리처드 바부어의 인식론적인 관심들이나 화이트헤드적 개념의 상호관계성을 수반할 때, 이를 비판적 실재론의 유용한 변형이라고 간주하는데, 로쉬는 이런 식의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건설적인 실재론”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어할 것 같다. 요약하면, 로쉬는 라이트가 자신의 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명백하게 진술하는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바부어는 결코 라이트식의 비판적 실재론을 취한적이 없음이 유감이며, 이에 대해서 보다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테레사 하이리흐(Theresa Heilig)와 크리스토프 하이리흐(Christoph Heilig)는 PFG의 “역사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평가한다. 그들은 그의 접근이 “귀추적(abductive)”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 있다는 라이트 자신의 주장에 동의한다. 실제로 바울서신에서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정을 제공함으로써 등장하게 된 많은 “놀라운 사실들”을 종합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라이트의 역사적인 방법론은 C.S. 퍼스 (C.S. Peirce: 귀추법을 고안한 논리학자) 자신이 상상한 방식의 중요한 예로 간주될 수 있다. 여전히 그들은 더 많은 작업—라이트와 그의 비판자들 모두—즉, 각각의 추론적 주장에 대해서 각 항목별로 그것들이 가지는 설득력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행해져야 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라이트의 “가장 좋은 설명에 대한 추론”이 발견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설들 확인에 대한 질문에 까지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들은 라이트의 방법론이 베이스적 확정 이론(Bayesian confirmation theory)과 결합된다면 유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빛 아래에서, 라이트의 고유의 몇몇 공헌들 뿐만 아니라 그의 추론적 문제점들의 일부가 명확해진다.
베커(Eve-Marie Becker)는 “라이트의 바울과 사도행전의 바울: 누가-행전 연구에 영감을 받은 바울 주해의 비평”에서 비교 연구에 착수하는데, 이 연구는 라이트의 사도행전의 사용 혹은 사용하지 않음(Wright’s use or non-use of Acts)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녀는 라이트가 바울의 전기를 위한 역사적 자료로서 사도행전을 간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그리는 바울의 초상에 누가의 증언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한다. 라이트는 바울에 대한 누가의 묘사를 참조하는 대신에, 역사적 연구들과 서사학(narratology)으로부터 유도되는 초기 기독교 역사서술에 대한 누가의 신선한 통찰들을 대개 무시하는, 편견에 치우친 학계의 논의 속으로 자신을 제한시킨다. 베커는 마침내 바울에 대한 두개의 특별한 서사들을 지적하는데–겸손에 대한 바울적 개념과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의 바울—이는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에 대한 누가의 묘사가 바울 연구에 있어서의 현재의 경험적 근거들을 어떻게 강화시켜주는지, 혹은 어떻게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모이스(Steve Moyise)는 “바울의 구약사용에 대한 라이트의 이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라이트가 바울 서신에서의 구약(히브리어 성경 및 칠십인역) 사용이라는 논쟁적인 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특히, 모이스는 유배라는 신명기적 개념이 제 2성전기 유대교 및 바울에게 중요한 내러티브를 형성했다는 라이트의 주장에 주목하면서, 이를 비판한다. 모이스는 라이트의 이런 설명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라이트가 본질적으로 인유(allusion)와 반향( echo)에 호의적인데, 그 이유가 이들의 추정적인 특성이 라이트의 거대 서사와의 연결성을 상정하는 것을 훨씬 더 용이하게 해주기때문이라고 불평한다. 또한 그는 중요 거대서사에 대한 라이트의 강조의 이면에는 그가 바울의 주해와 특정 유대교적 주해 방법을 연결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비판한다.
화이트(Joel R. White)는 “N.T. 라이트의 서사 접근방식”에 대해서 논하는데, 그는 바울에 대한 라이트의 접근이, 이스라엘의 유배가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 1세기 유대인들이 거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거대한 이야기”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크게 특징적이라고 간주한다. 라이트의 바울은 이 이야기를 메시야 예수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또한 이를 그의 전체 신학의 서사 구조로 확립함으로써, 자신 만의 수정된 이야기를 제공한다. 화이트는 이를 흥미진진한 테제로 간주하지만, 이 테제는 방법론적인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이러한 고대 유대교의 거대 서사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와 바울이 실제로 그의 신학적 비전을 위해서 이를 전용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파트 III은 바울의 철학적, 정치적, 종교적 환경들과 연관된 세부적인 배경적 이슈들을 포함한다. 찰스워스 (James Hamilton Charlesworth)는 제 2성전기 유대교 역사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을 평가하기 위해서 “초기 유대교 사상에 대한 라이트의 패러다임: 시대착오의 회피?”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한다. 찰스워스는 바울을 고대 유대교 안에 위치시키려는 라이트의 노력에 대해서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 그가 대체주의 (supersessionism)를 극복하려는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러나 찰스워스는 동시에 유일신론, 선택, 종말론, 언약, 유대적 정체성, 유대적 연합들과 연관된 그의 제 2성전기 유대교 설명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또한 찰스워스는 불행하게도 그를 “기독교의 창시자”로 만들기도 했던, 바울의 천재성이 그와 고대 유대교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희생을 치르도록 오해되어서는 안된다고 서둘러 덧붙인다.
스털링(Gregory E. Sterling)은 그의 에세이 “지혜 혹은 우둔함?: 바울의 사상에서의 철학의 역할”에서 헬라 철학과 연관된 바울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을 평가한다. 스털링은 라이트가 바울과 연관된 특정 연구주제로 철학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서 찬사를 보낸다. 스털링의 판단으로는, 라이트가 바울이 헬라 철학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해서 추론하는 지점에서 그의 정점에 섰다고 본다. 더 나아가 그는 고대 철학에 대한 라이트의 요약—특히 스토아철학—이 정확하다고 평가하지만, 그의 요약이 몇몇 중요한 차원들을 생략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특히 헬라철학이 제 1 원리(혹은 신), 그리고 신과의 동화에 대해서 라이트가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스털링은 또한 중기 플라톤주의가 유대교적 주해전통의 한 요소가 될때, 더 충분히 언급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면서, 불행히도 라이트의 설명에서는 이것이 누락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털링은 기본적으로 라이트의 “논리”와 “윤리학”에 대한 언급들에는 동의한다. 그는 명제 형이상학(prepositional metaphysics)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플라톤적 해석을 지적함으로, “물리학”에 대한 라이트의 분석을 보충하길 원하는데, 이 둘은 모두 중기 플라톤 전통의 공헌과 관련이 있다. 라이트에 대한 그의 주된 비판은 라이트의 주해적 결론들에 있다기 보다는, 그런 결론들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배경들에 있다. 스털링은 라이트가 바울 서신에서의 철학의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그가 서신에 나타난 실제의 바울보다는 수사적으로 바울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라는 주제에 대해서, 행즈(James Constantine Hanges)는 “성지들과 성림들(groves)의 세계: 신들 사이에서 N.T. 라이트와 바울”이라는 글을 썼다. 행즈에 의하면, 라이트는 바울의 종교적 세계에 대해서 두 부분으로 구성된 제안을 한다: 첫째는, 사도 바울은 그의 제의적(cultic) 세계 속에서 충분히 묘사될 때만이 정확하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제의적 세계에 대한 “충분한 묘사”는 로마 제의적 형태(religiones)의 광범위한 영향이라는 것이다. 행즈는 제국적인 제의들이 대중적으로 강력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반면에, 고린도와 그밖에 지역에서 나타난 특수한 증거들은 로마의 제의적 형태들이 동쪽 지중해 연안의 헬라어권 세계의 복잡하고, 다중적인 형태의 제의적 세계에 미친 영향은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바울의 사고를 지배했던 것은 로마의 제국주의 같은 한 가지의 변치 않는 요소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종교적 공간에서의 움직이는 콜라주(복합물)였다고 제안한다. 물론, 로마제국이 이 영역에서 잠재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바울과 그의 동료 피지배인들이 그들의 시대를 끊임없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완전히 모든 로마적인 것들에만 사로잡힌 채로 보냈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
김세윤은 “바울과 로마 제국”이라는 그의 연구에서 PFG에서 발견되는 반제국적 묘사에 대해서 평가한다. 특이하게도, 김은 바울을 반제국적 메세지를 소유한 인물로 그리고 있는 라이트의 묘사에 설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김은 라이트가 관련된 본문들에서 바울이 로마의 “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용어들을 사용한 주 예수의 구원—소위, 최후의 심판에서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속, 부활의 삶, 혹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순응,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획득의 관점에서—을 제시함으로써, 어떻게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려고 했는지를 질문한 그의 비판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김은 또한 롬 13:1-7에서 라이트가 바울에게 부과하려고 했던 반제국적 유형을 분명한 곡해로 본다. 김은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라이트의 방식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반면에, 진짜 적들인 죄와 사망을 파괴하기 위해서 메시야가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의 왕권을 수행했는지에 대해서 라이트가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트 IV는 이 책의 중심을 차지하고, 여러 가지 영역들을 포함하는, 일련의 주해적 이슈들에 초점을 맞춘다. 타툼(Gregory Tatum)은 “PFG에서의 율법과 언약”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율법과 언약이라는 중요한 이슈를 다룬다. 그는 라이트가 유대교를 율법주의적인 종교로 그렸던, 끔찍하고 잘못된 캐리커쳐로부터 파생된 칭의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대체해서, 거대한 언약의 이야기의 관점에서 법정적 칭의에 대한 새로운 초석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라이트의 거대한 언약 이야기는 바울의 새 언약 언어 (예를 들어, 참여주의적 종말론)의 사용보다는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브라함 언약/상속자 개념 위에서 지어졌다. 게다가, 율법의 저주를 구속역사적으로 해석하는 라이트의 해석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 (pre-messianic Israel)을 단지 메시야가 오시지 않은 상태의 이스라엘(being pre-messianic Israel)이라는 이유로 비난한다. 또한, 초기 교회 분열의 요인으로 율법을 해석하는 그의 읽기는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율법준수를 폐지시켰다는 잘못된 전제에 근거한다. 결국, 타툼은 라이트의 전제와 접근방식이 바울이 언약과 율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한 그의 해석을 심각하게 뒤틀고 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린드하임(Sigurd Grindheim)은 PFG의 거의 심장이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그의 글 “선택과 이스라엘의 역할”에서 씨름한다. 핵심적으로, 그린드하임은 라이트가 바울의 선택에 대한 교리에서 순서를 잘못 정했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선택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택을 말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소명(역할)은 단지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교 경전들에서 보여주듯이, 바울서신에서도 이스라엘의 의무는 제의적인 것이나, 제사장 왕국이 되는 것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명해 보이는 나라로서 더 흔히 묘사된다고 결론내린다. 즉, 이스라엘은 메시야의 사역에 동참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역을 완성한 그를 예배함으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오랜 대화상대인 던(James D.G. Dunn)은 “내부자가 본 라이트버전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이라는 흥미로운 글을 제공한다. 던은 바울에 대한 새관점이 가져왔던 긍정적인 업적들이 (율법, 언약, 고대 유대교에 대한 보다 섬세한 설명) 샌더스와 던의 공헌은 그들이 제 2성전기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내러티브로서의 “유배의 종말”을 보지 못함으로써 반감된다는 라이트의 주장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안타까워 한다. 던은 라이트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비판자들을 공격하는 방식이 그가 바울의 신학 자체를 따라 해석하기보다는, 라이트 자신의 신학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을 사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결국 던은 PFG가 새 관점이 학계에 가져다 주었던 많은 훌륭한 인사이트들을 계승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새 관점 학파에 불충분하게 연합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새 관점의 지지자로부터 비판자로 돌아선, 슈툴마허(Peter Stuhlmacher)는 “칭의와 구속에 대한 N.T. 라이트의 이해”라는 그의 글로 PFG를 평가한다. 슈툴마허는 라이트의 접근방식 중 어떤 부분들,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바울 신학의 중심에 두는 것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슈툴마허는 라이트가 아브라함 이야기의 구원적 특성에 너무 과중한 짐을 부과한다고 믿는데, 그는 이 이야기가 바울 자신의 접근방식을 나타내기 보다, 실제로는 후대 랍비들의 견해를 적용한 것이라고 본다. 또한 그는 칭의에 대한 라이트의 진술들이 주해적인 가정들과 추정들로 짜여진 것이기때문에, 범주적인 실패로 끝나며, 그의 전체 기획에 대해서 중요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형일(Aquila H.I. Lee)은 “메시아니즘과 바울에서의 메시야: 예수로서의 그리스도?”에서 바울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을 다룬다. 그는 먼저 바울서신에서의 예수님의 메시아권(messiahship)과 이 주제에 연관된 더 넓은 학계의 동향에 대한 라이트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토론에 착수한다. 노벤슨(Novenson)의 최근 논문을 따라서, 이형일은 바울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가 이름도 아니고, 직위도 아닌, 명예로운 기술어(descriptor)였다고 믿는다. 그는 이러한 이해가 이 용어의 메시아적 의의를 더 잘 담아내면서, 실제 사용되는 용례에서 더 나은 의미를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이름 대 직위의 오랫동안 계속된 논쟁의 교착상태를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해소시켜 준다고 믿는다. 또한 이형일은 바울의 메시아권에 대한 이해를 “유일신론”보다는 “선택” 의 의미 아래에 두는 라이트의 주장이 기독론적인 몇몇의 중요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권을 “선택”의 우산 아래에 두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인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며, 하나님의 위격으로서의 예수님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형일은 라이트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바울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야적인 아들됨과 그의 영원한 아들됨(신성과 연관된)은 궁극적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제안한다.
휴이트(J. Thomas Hewitt)와 노벤슨(V. Novenson)은 PFG 전체에 걸쳐서 바울의 신학과 그의 유대적 세계관 둘다를 담지하는 라이트의 포합적인 메시아론을 평가하기 위해서, “바울에 있어서의 참여주의와 메시야 기독론”을 다룬다. 그들은 바울의 메시아권에 대한 이해와 연관된 “참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라이트가 일반적으로 슈바이처적인 접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반면, 바울이 구약본문을 그리스도적으로 주해하는 것을 강조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 (ground-up approach)”을 선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바울의 메시야 기독론이 부분적으로는 바울이 사용했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의 유명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오실 “씨”에 대한 아브라함적인 특별한 약속으로부터 해석된다고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바울의 메시야 기독론이 메시야 안에서의 “결속”에 대한 개념적인 배경을 제공해 주는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와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로부터도 부분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허타도(Larry W. Hurtado)는 “야훼의 시온으로의 귀환: 초기 고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기폭제?”에서 라이트가 가진 기독론의 독특한 면을 다룬다. 허타도는 야훼의 직접적인 현현이 성경 본문과 제 2성전기 유대 문헌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회복/구원에 대한 기대의 뚜렷한 한 부분을 형성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런 관점에서 라이트는 PFG와 이전 저작에서 예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역을 통해서 체현된 야훼의 직접적인 귀환이었다고 제안했고, 이것이 신약성경에 반영된 “고 기독론”을 위한 단서와 설명으로서, 초기 기독론의 발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첫 번째 단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허타도는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그는 유대 문헌에 대한 분석은 야훼의 종말론적인 현현이 전형적으로 신적인 위임을 받은 중개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기때문에, 라이트가 야훼의 종말론적인 현현과 야훼의 중개자를 날타롭게 대조하는 것은 의심쩍다는 것이다. 게다가, 몇몇의 바울 본문들은 야훼의 귀환이라는 주제의 사용은 예수님의 미래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지, 라이트가 주장하는 식으로 이 주제에 적용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초기 기독론의 기폭제가 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셨고, 그래서 그를 메시야로 확증시키셨으며, 또한 그를 승귀시키셔서 최고의 주재권을 주심으로 이제는 예수님이 이에 합당한 경배를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이 확신이야말로 신약성경에 반영된 다양한 기독론적인 주장들을 발전시켰는데, 여기에 야훼의 귀환이라는 주제의 사용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살펴봤을 때, 초기 기독론의 예수님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 중 몇몇 특징들은 문제가 있음이 밝혀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성령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오면, 레비슨( John R. Levision)은 “제 2성전기 배경에서의 성령: N.T. 라이트의 성령론에 대한 주해적 분석”에서 유대적 세계관을 바울이 재작업한 것에 대해서 라이트가 설명한 것들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레비슨은 라이트가 바울의 성령론을 특징짓는 제 2성전기 유대교의 세 가지 핵심요소로 보는 것이 쉐키나(하나님의 임재)와 성전과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레비슨은 라이트가 바울이 성령론에 있어서 가져온 가장 혁신적인 세 가지 요소들을 지적함으로 논의를 이어나가는데, 그것은 성령이 재정의한 선택의 개념, 성령이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쉐마의 본질을 수행하는 것—을 신자들이 할 수 있도록 한다는 확신, 그리고 급진적이고, 높은(high), 초기 성령론이다. 또한 레비슨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특히 어떤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을 살펴보는데, 그것은 믿음을 발생시키는 성령의 능력, 부활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 그리고 신자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고유한 능력이다. 레비슨은 대체적으로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몇몇의 부족한 부분들을 지적한다. 레비슨은 바울 성령론에 대한 라이트의 묘사가 사 63:7-14와 학 2:4-9, 그리고 사해 사본으로부터의 다양한 구절들을 고려했더라면, 더 적절하게 개선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이 모든 구절들은 바울의 성령론이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급진적인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슨은 성령으로 가득찬 성전은 쉐키나의 귀환을 의미한다는 라이트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바울의 성령에 대한 논의를 보다 확실하게 유대교 기반 안에 위치시킨다.
얀취(Torsten Jantsch)는 “하나님과 바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의 빛 아래에서의 연구 역사를 살피며”에서 라이트의 신론, 즉 하나님에 대한 묘사에 대해 탐사한다. 얀취는 라이트의 하나님 중심적인 로마서 읽기에 기초한 PFG의 두 가지 전제에 대해서 평가하는데, 첫째는 하나님 중심인 바울 복음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특징이다. 얀취는 바울의 담론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바울 서신의 신론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묘사하기 위하여 로마서의 몇몇 본문들을 조사한다. 이 과정 중에 그는 이 본문들에 대한 라이트의 해석들을 묘사하고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얀취는 로마서에 전시되고 있는 13개의 “하나님 중심적” 전제들을 요약한다. 얀취는 바울서신에서의 신론에 대한 라이트와 최근의 연구들 사이의 많은 동의점들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갈등의 요소도 있다.
PFG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울에 대한 “묵시적” 해석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는 것인데, 프레이(Jörg Frey)는 “묵시주의에 비신화화?: N.T. 라이트의 바울, 묵시적 해석, 그리고 해석의 제한에 대하여”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 프레이는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묵시적 해석”에 대한 논쟁적인 거부를 분석하고, 바울에 대한 라이트의 견해를 묵시주의에 대한 중립화라고 상정한다. 적절하게 이해되고, 이것의 넓은 다양성이 인지된 묵시주의는 라이트가 바울 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유대적 배경과 바울 사상의 근간으로서 형성해가는 “거대 서사”의 “아킬레스 건”으로 등장한다. 라이트의 작품 안에 드러나는 묵시주의를 중립화시키기 위한 네 가지의 기본적인 전략들 (상징적 해석, 사회-정치적 상황들의 참고, “언약적 세계관”으로의 통합, 그리고 “시작된 종말론”적 배경으로의 통합)을 묘사하면서, 프레이는 라이트의 해석을 예수와 바울을 묵시주의로부터 (즉, 제믈러와 불트만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오랜 해석의 역사 속에 위치시킨다. 프레이는 캐제만과 그의 추종자들의 해석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또한 라이트의 비판 중 일부에 동의하면서, 신약성경과 바울 논쟁 속에 있는 묵시주의적 개념에서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묵시적 사상의 다양성과 복잡성 안으로 최근의 새로운 통찰들 (쿰란 문서, 에녹 전통 및 다른 본문들로부터 발견된)을 적용시킨다. 프레이의 견해로는, 바울은 확실히 묵시주의적 신학자였으나, 묵시주의와 구원 역사(salvation history)사이의 양자택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 프레이는 라이트가 바울 사상에 있어 “세상의 종말”의 어떤 가능성도 부인하는 것이 그의 신학적 해석의 제한인지, 아니면 어떤 이데올로기의 결과인지를 묻는데, 이는 라이트의 바울과 실제 바울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지 않기 위해서다.
벨(Richard H. Bell)은 “개인적인 종말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라이트와 대화를 시작한다. 벨은 두 가지 면에 특히 초점을 맞추는데, 첫째는 이신칭의, 그리고 이것의 최후 심판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바울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이해이다. 벨에 의하면, 칭의를 받을 때 주어지는 판결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존재론적인 변화를 획득하는 “언어 사건(language event)”이므로, 결과적으로 최후의 구원도 보장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행위에 의거한 판결은, 신자가 받는 그들의 “보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후 5:10). 벨의 견해에서는 롬 2:1-6, 29에서 묘사된 판결은 다른 범주에 속한다. 또한 그는 롬 2:14-15의 경건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단순히 존재하지 않으며, 1:18-3:20의 전체 단락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는 없다는 논지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칭의에 대한 이런 논의의 많은 부분들이 라이트의 견해와는 다르지만, 두 번째 이슈, 즉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이슈는 비록 논지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결론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라이트의 견해와 유사하다. 벨은 “몸과 영혼”의 존재론적 이원론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물질에 대한 이원론이 아니라, 지상/천상 혹은 현상/실체에 대한 이원론이다. 공간과 시간 둘다를 초월하는 영혼은 그리스도 안의 참여를 설명할 수 있고, “물리적인 몸”과 “영적인 몸” (고전 15:44) 사이의 연속성을 제공해 주며, 하나님의 손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다.
라벤스 (Volker Rabens)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신실한 삶에 대한 이것의 영향들: 바울의 윤리에 대한 톰 라이트의 신실함에 대한 비평적인 분석”에서 PFG와 바울의 윤리라는 주제에 대해서 썼다. 신실함의 윤리적인 특징이 PFG에서 중심적인 주제이기때문에, 라벤스는 라이트가 하나님의 신실함이 인간의 신실함(즉, 윤리적인 삶)을 형성하고, 가능케하는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돌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라벤스는 이 세계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라이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라이트의 강조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개인적인 초점은 해법이지, 곤경(plight)이 아니다. 그리고 곤경에 대한 바울의 강조점은 “죄”와 “육신” 등의 외적인 권세에 대한 인간의 종됨에 있는 것이지, 내적인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라벤스는 “마음의 변화”를 통한 라이트의 인지적인 변화의 모델이 바울에 있어서의 도덕적인 변화의 여러 부분들 중에서 단지 하나의 면만 제공하며, 성령이 빚어가는 친밀한 관계가 부여해 주는 다이내믹에 대해서는 거의 신뢰를 주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라벤스는 바울의 윤리적인 목표들과 화해, 미덕들, 그리고 율법의 성취에 대한 열망들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에 대체적으로 동의하지만, 라이트의 고공비행하는 듯한 연구가 착륙에 실패할 때는 실천적인 도덕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라벤스는 신실함이 라이트의 구원론에 있어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의 윤리학에 있어서는 주변적인 역할만 하고 있다고 결론내린다.
파트 V (함의들)에서는 학계에서의 사상적 흐름들과 교회론적 공동체들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PFG가 가지는 보다 큰 의미들과 함의들에 대해서 다룬다. 조직신학자 맥고완(Andrew McGowan)은 “민족학(Ethnology)으로서의 교회론: N.T. 라이트의 PFG에 있어서의 교회”라는 글에서 PFG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놓는다. 맥고완은 라이트의 교회론을 일종의 “민족학”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제가 PFG의 가장 큰 챕터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책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중요한 주제이기때문이다. 맥고완은 교회(에클레시아)에대한 생각 중에서,특히 세 가지 면에 대해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과 목적 그리고 특성이다. 이들 중 첫 번째인 정체성은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에클레시아와 대체주의(supersessionism)라는 어려운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에클레시아를 새롭게 해석된 이스라엘로 보는 라이트의 의견에 넓게는 동의하는 반면에, 역사적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라이트의 최종적인 무죄판결 및 대체주의와 연관된 해석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라이트의 대답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다. “목적”에 대해서, 맥고완은 라이트가 교회론 아래에 구원론을 포함시킨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대해 논의하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보는 것(교회론을 구원론 아래에 두는 것)이 PFG에 대한 더 개연성있는 해석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맥고완은 PFG에서는 바울에 대한 많은 다른 해석들에 비해서 종교행위와 제의가 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는데, 공동체적 실천에 대한 이 같은 라이트의 강조는 무엇이 “교회”가 되는지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라이트가 이룬 공헌이 지금껏 저평가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크로슬리(James G. Crossley)와 에드워즈(Katie Edwards)는 그들의 글 “포스트모던 학문으로서의 PFG”에서 PFG를 이것이 속한 지성적인 환경, 즉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위치시킨다. 그들은 라이트의 PFG를 바울 신학계에서의 현대적인 문화적 풍토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본다. 특히, 그들은 포스트모던적 정황 속에서의 라이트와 PFG가 기능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 조사한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제적인 정황에 대한 내용도 일부 다루지만, 지난 40년 간의 정체성의 파편화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PFG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그것은 확고한 본질주의적 정체성이라는 라이트의 구성, 특히 “유대적인 것(Jewishness)”이라는 구성 속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그들은 라이트가 이해하는 바울과 연관된 고대의 “유대적인 것”의 사상적인 기능에 대해서 조사한다. 그것은 바울의 “유대적인 것”에 대해서 말함과 동시에, 초기 유대교에 있어서 “유대적”인 것으로 여기지던 것과 바울이 말하는 유대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함께 강조하는 라이트의 방식들을 포함한다. 그런 다음 크로슬리와 에드워즈는 라이트가 유대교의 중심 속에 있는 무시간적 핵심을 어떻게 전제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유럽의 전체주의적 정황 속에서의 20세기 유대교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라이트의 비판 속에서, 라이트의 거대 서사가 잠재적으로 어떻게 신권적인 전체주의의 형태를 다시 쓰고 있는지를 조사한다.
막키아(Frank D. Macchia)는 “성령과 사람 속으로 내주해 들어가시는 하나님의 귀환: 바울 성령론에 대한 N.T. 라이트의 해석에 대한 조직신학자의 응답”이라는 그의 연구에서 성령과 교회라는 주제들에 대해서 살핀다. 그는 라이트가 독자들이 오늘날 교회들의 증언에 대해서 보편적인 적실성을 가지는, 성령에 대한 필수적인 진리들을 인식하도록 도와준 점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감사를 표한다. 라이트가 귀환—성전으로의 하나님의 귀환, 땅으로의 성령의 귀환, 하늘로부터의 메시야의 귀환—을 해석할 때는 모든 피조물들이 이에 연관된다. 바울에 대한 그의 이러한 해석은 영성과 선교에 대해서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데,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의 다양한 차원들을 서로 엮어주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라는 더 넓은 지평에 대해 감사하도록 도전한다. 막키아는 바울에 대한 라이트의 비전이 새로운 인류를 출발시키기 위해서, 또한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만유 안에 깃든 하나님의 더 넓은 아젠다 안에 교회를 바르게 위치시킨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조직 신학자 엔스밍거(Sven Ensminger)는 “바르트, 라이트,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라이트가 칼 바르트와 대화하도록 이끈다. 엔스밍거는 바르트에 대한 라이트의 해석을 조사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주제로 이 두 사상가들을 비교한다: 첫째, 계시라는 교리에서 본 성경에 대한 이해, 둘째, 종교라는 주제, 셋째, 라이트의 작품들에서의 기독론적 암시들에 대한 몇 가지 고찰들. 결론부에서 엔스밍거는 또한 성서학과 조직신학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의견들을 제공하고, 성서학은 조직신학과의 적극적인 대화 속에서도 수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험프리(Edith M. Humphrey)는 “주교 라이트: 성례전적 의무와 성례의 역할”에서 PFG에 드러난 성례에 대한 라이트의 견해에 대해서 쓴다. 험프리는 PFG에서 라이트가 바울과 성례에 대해서 다룬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칭송한다: 첫째, 라이트가 바울의 사상과 실천을 1세기 안에 위치시키도록 노력한 점, 둘째, 언약에 대한 바울의 선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해석자들에 대해 비판한 점, 셋째, 신자들을 포합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강조한 점, 넷째,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강조한 점. 그녀는 라이트의 전반적인 접근방식(교회를 중심으로하는)과 그의 신학(창조주와 피조물을 분명히 구분하는), 그리고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그의 강조라는 견지에서 라이트의 작품을 탐색한다. 그런 후에 그녀는 라이트의 체계 안에서, 성례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 세상 속에서의 그들의 반문화적인 위치에 대해서 보다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하나님이 어떻게 현세적인 물질 세계를 구속하셨는가에 대한 바울의 이해때문에, 성례또한 하나님께 기원을 두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호소한다. 즉, 성례는 교회와 하나님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현장이며, 성례자체가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계시해 준다는 것이다.
슈나벨(Eckhard J. Schnabel)은 “복음전도와 교회의 선교”이라는 그의 글에서 라이트의 책이 선교와 복음전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지를 탐색한다. 슈나벨은 먼저 바울의 선교사역, 특히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을 때 하는 그의 선교적 설교와 그의 지리적 전략들, 지역 교회들의 설립,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의 선교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초점은 회심에 대한 개념과 실재인데, 이것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에 “회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는 라이트의 의견에 대해 논하는 것을 포함한다. 세 번재 초점은 복음에 대한 설명인데, 슈나벨은 라이트가 예수님의 메시야적 정체성과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이스라엘의 삼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이 가지는 중심성에 대해서 말한 것들을 추적한다. 동시에 그는 라이트가 말한 이 삼중의 “배경 이야기”를 무대 중심으로 올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세시대와 종교개혁 이후로 선교사들은 단지 미래의 천국을 위해서 “영혼들”을 수집하기 만을 원했다는 라이트의 비판에 대해, 선교와 복음전도의 정의를 논하면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으로 N.T.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주 저서인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FG)”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비평서인 “하나님과 바울의 신실하심”에 대한 요약소개가 끝났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각 학자들의 비평에 대한 N.T. 라이트의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단락은 이 책이 나오게 한 편집자들과 기고자들에 대한 놀람과 커다란 감사(enormously grateful!)로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보여준 관심과 기고자들의 때로는 날카로운 비평을 통해서, 자신이 새로운 각도에서 자신의 해석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아무쪼록, 우리나라에서 현재 진행 중인 N.T. 라이트에 대한 여러 논의들도 신학의 발전을 위해, 더 크게는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위해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작성자
김형태 [Ph.D Candidate at University of St Andrews,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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