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경제윤리의 필요성
2016-06-15 18:10:33
하나님나라 경제윤리의 필요성
1.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물질적 부를 생산하고 분배하고 소비하며 축적하는 삶의 영역이 바로 경제영역이다. 경제영역은 하나님나라와 어둠의 세력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쟁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 눈을 팔게되면 결정적인 패배를 하게 되고 그만큼 하나님나라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영역이 하나님나라를 실현래 가는데 얼마나 중요한 영역인지를 제재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기 시대의 다양한 경제문제에 대한 올바른 기독교적 관점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으며 불의한 경제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상실해 버렸다. 결국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영역에서 하나님나라 정의를 실현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의한 경제구조를 강화하는데 일조를 해왔다.
2. 윤리(ethics)와 도덕(morality)는 모두 ethos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이 둘은 구별된다. 윤리가 보편성, 당위성, 절대성을 갖는 진리라면 도덕은 상대성과 시공간적 규범성, 사회전통적 관습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윤리로 이끌고 가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가 요구하는 것은 ethics에 가깝다. 그렇다고 도덕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윤리를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한계도 고려하여 morality도 고려한다. 예를 들면 모든 인간의 절대적인 평등은 윤리에 속하지만 노예제도하에서 순종은 도덕에 속한다. 빌레몬서의 오네시모의 경우는 노예제 자체를 반대하지 않으면서도(도덕을 고려하면서도)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대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윤리를 현실에 적용한 케이스다. 윤리가 이상이라면 도덕은 현실이다. 우리는 이 둘의 긴장 관계속에서 하나님나라 윤리를 연구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하나님의 공동사역이다.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관계 속에서 출발한다. 인간도 공동체적 존재로 출발했지만 현대 사회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파괴한다. 현대사회는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윤리가 다루는 영역은 나 자산과의 관계 및 나와 이웃과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윤리는 근본적으로 사회윤리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여살면서 사회를 이루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제도는 인간의 상황과 성격을 지배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제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강하다. 이 제도하에서는 이웃사랑의 실천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 사회제도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제도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사회제도가 변해야 할 필요성이다. 그래서 모든 윤리는 사회제도에 대한 평가로 귀결된다. 경제윤리는 사회윤리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나라 윤리의 실천을 위한 경제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님나라 경제윤리란 경제윤리를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성찰하는 것, 즉 실천, 사회과학, 사회철학 그리고 성경해석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경제영역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나라 경제윤리가 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며 나아가 일반 사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일반은총 차원에서 하나님나라 경제윤리의 근사치를 추구하여야 한다. 이런 논의는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사후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미리 예단할 수 없다. 꿈을 가지고 씨름해 보아야 한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는 함께 가야한다.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직시하되 꿈을 가지고 현실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교회가 경제윤리를 등한시해 온 이유들
1. 한국교회는 윤리적 실천을 산앙이나 신학보다 본질적으로 하위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윤리를 신앙의 자동적 결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곽선희 목사는 참 복음으로 나아갈 때, 구제와 사회봉사도 더불어 자연스럽게 늘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사회봉사를 앞세워 한국교회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것은 사회 앞에 아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사회, 정의, 인권을 외치는 것이 교회를 망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크리스천투데이 인터넷판 2009.1.23) 한국굫회는 물질에 대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은 축복을 강조할 때는 물질을 중시하면서도 사회의 경제영역에서 발생하는 물질 문제에는 무관심하거나 침묵한다.
2. 정교분리에 대한 왜곡된 이해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791년에 제정된 미국수정헌법1조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동 수정헌법 1조는 의회는 국교의 수립에 관한 혹은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법의 의도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 핵심은 국가가 입법권을 사용하여 특정 종교를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종교가 정치, 경제문제에 대해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포함한 것이 아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정교분리의 원래 정신에 의하면 국가는 교회가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서 국가의 잘못에 대해 예언자적 발언과 행동을 하는 자유를 막을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3. 근대사회가 열리면서 세속은 교회로부터 확실히 독립된 공간과 영역을 쟁취하고 교회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돌보는 것으로 밀려나가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과 맞물려 있다. 몰 마샬이 잘 지적했듯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종교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영혼의 구원과 맞물려있는 것이다. 그 자유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지 않는다. 이렇게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내적 영역으로 갇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오히려 성경의 원래 의도된 자라로 돌아가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이해한 것은 심각한 오류다. 성경에 대한 왜곡된 해석은 종교의 사사화를 부추켰다. 고질적 병폐는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요7:17)는 말씀은 진리를 분별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영국의 신학자 앤드류 커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기술적 주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행하고자하는 해석학적 순환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4.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다. 한국개신교는 초창기에 선교사들의 비정치성과 기독교인들의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정치의식이 매우 활발했다. 그러나 일제의 전제주의적 통치와 해방후 이어진 군부독재로 말미암아 독교인들의 정치의식은 억제되었다. 세계적인 냉전체제와 복한과의 대치상황 속에소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드는 것은 곧 계급투쟁의 용공분자로 몰리기 쉽상이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약자들의 고통을 끌어안고 정치 경제적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길이었다. 결국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왜곡과 함께 교회 안에는 정치 경제적 무관심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기독교인들의 중산층화와 교회의 사회적 신분의 상승은 교회를 기존체제를 옹호하는 주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현상을 보면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 경제윤리의 당위성
2016-06-15 20:25:15
1. 하나님은 단순히 복음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신다. 구약의 히브리 사상에서 정의는 관계라는 배경을 통해서 이해된다. 관계를 맺으면 당사자 사이에 그에 상응하는 상호간의 다양한 권리와 의무가 형성되는데 정의란 그렇게 형성된 권리가 그에 상응하는 의무의 수행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권리와 의무가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정의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에서 비롯되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덧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겐 하나님이 명하신 바를 실천해야 할 의무와 사명이 생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정의란 바로 그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 언약에 따라 신실하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덧입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히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적 행위는 중요하다. 루터는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여 믿음을 강조했지만 루터가 비핀한 행위는 중세교회를 부패시켜온 공로사상에 기초한 행위들이었다. 루터는 믿음의 자연스럽고 정당한 열매로 나타나는 진실한 이웃사랑의 실천을 경시한 것이 결코 아니다. 칼빈은 윤리적 실천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확심을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본회퍼는 믿음과 순종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설정하여 순종이 믿음의 뒤를 따라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믿음과 실천이 괴리되지 않고 건강하게 함께 자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2. 하나님나라 복음은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총체적 복음이란 영혼구원과 사회복음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다. 복음주의권에서 사회복음을 공적으로 선언한 것은 1974년 로잔언약이다. 물론 복음주의적 사회참여와 진보주의의 사회구원 사이에는 그 신학적 의미에서 여전한 차이가 존재한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진보적 신학자들과 달리 정의를 향한 사회적 변화를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총체적 복음은 이런 구분으로 인해 사회참여의 신앙적, 신학적 중요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창조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은 안간의 타락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구속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경제활동은 문화명령의 중요한 한 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불의한 경제구조와 제도들에 대해 중립을 지키거나 침묵하면 결과적으로 불의한 구조와 제도를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중립과 침묵을 지키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적인 정치 경제 구조 그리고 거기에 담겨있는 정당화 논리를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던져야 할 바른 질문은 경제 이슈와 관련해 참여를 할 것인가? 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이다.
3.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정의론에서 가장 근본적은 원칙을 제공한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존중하고 회복시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사회참여를 통해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누를 권리는 인간의 고유권리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경제영역이 중요한 이유기 여기에 있다. 경제영역이 정의로우려면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필요를 제공해줌으로 인간 고유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경제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사회란 바로 구성원 모두의 이런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사회이며 이는 경제영역과 매우 중요하게 연결된다.
4.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핵심 사명은 무너진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마태는 이사야를 인용하여 메시아는 이방에 공의(krisis)를 선포할 것이며 정의(krisis)가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마12:17-21) 여기서 공의 혹은 정의로 번역된 크리시스(krisis)는 구약의 미쉬파트(mishpat)에 해당하는 단어다. 예수 탄생의 의미를 갚이 깨달은 마리아는 메사아의 탄생으로 대역전의 역사, 즉 정의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노래하였다.(눅1:47-55) 이는 마리아가 메시아의 탄생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과의 정의로운 관계와 인간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를 모두 포괄한다. 이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과 이웃과의 관계를 정의롭게 세우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빈부의 극단적 양극화는 분명히 불의이며 하나님은 불의를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우신다. 예수는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저항하셨다. 스티븐 모트는 성경에서 빛은 어둠과 대항해서 싸우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힘을 나타낸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사야 9:2-7에 주목하여 빛의 역할은 바로 피흘리는 전쟁터에서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는 것이요 정의를 세우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정치, 경제체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개혁해 나가는 적극적인 사명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앤드류 커크가 잘 지적하였듯이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움직임은 적어도 로마의 기존 정치 경제질서에 도전하는 정치적 함의를 띠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발자 취를 따르는 제자공동체가 되려면 오늘 우리시대의 불의한 질서에 도전하는 그래서 기존질서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5. 성령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그 나라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분이시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강조한다. 이사야가 말하는 정의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는 것이며 후자의 핵심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악한 자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정치,경제적 실천이다. 이는 메시아를 통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고 그는 희년을 선포하며 하나님나라 정의를 실현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셨다. 오순절에 동일한 성령이 예루살렘 공동체에 부어졌고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나라 정의가 아름답게 실현되었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하나님나라 정의를 실현하는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성령의 부음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삶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불의가 가득하고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나라 정의에 관심이 없다면 그 성령은 가짜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은헤로 받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죄의 용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들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6. 교회와 세상 혹은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노예제도를 예로들면 바울은 사회적 질서에 근거해 노예제도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본질적인 면에서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형제로 대하라고 요구한 것은 그가 노예제도의 신앙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은 주인과 노예 모두의 하나님이며 그분은 주인과 노예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인과 노예가 평등한 존재임을 의미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관행에 비추어보면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사회적으로 확산된다면 사실상 노예제도는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리처드 롱게네커는 바울의 급진적인 사회사상은 적절한 토양과 환경위에 뿌려져 자랄 수 있도록 준비된 씨라고 말한다. 그동안 로마서 13장1-7절은 국가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결국 교회의 정치적 관심을 최소화하고 보수적 성향을 띠게 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역으로 생각하면 국가권력이 정의수호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권위를 부여한 하나님에게 거역함으로 스스로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핵심은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면 국가에 불순종하는 것이 권리일뿐 아니라 의미라는 점이다. 바울의 이런 관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치 경제적 무관심이나 사회질서에 대한 순응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7. 교회와 세상 혹은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리처드 니버는 5가지 모델을 제시하는데 그는 이중에서 변혁모델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변혁모델은 교회가 스스로 안에 머물러 있지말고 사회속으로 깊이 스며 들어가 형편과 은사에 따라 다양한 층위에서 적극적으로 변혁을 추구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교화가 스스로 온전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에 대한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소위 공동체주의자들은 교회론이 곧 기독교인의 유일한 사회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는 사회윤리를 따로 갖고 있지 않다. 이는 교회 자체가 사회윤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 의하면 기독교 정치 경제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성격을 띤 사회를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개혁하는데 있지 않고 교회가 참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있다. 영국의 신학자 밀뱅크는 이런 입장을 견지하면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시에서 이런 견해의 출발점을 찾는다. 이 입장에서 볼 때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생활공동체여야 한다. 이들의 논지에는 두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는데 첫째는 그들의 입장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신약 전체의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약성경 안에서 일반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존재 양식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라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현실에 직면하게 되며 그 안에서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의 근사치를 찾게 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절대적인 유토피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교회의 이런 역동적이면서 현실적인 과제를 간과한다. 둘째로 신앙공동체의 영역이 일반사회로 확대될 수록 공동체주의자들의 정치, 경제적 원칙은 자칫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제안의 수준에 머물기 쉽다는 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경제 정체적 원칙들은 작은 생활공동체에서는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작은 공동체를 어떻게 모든 사회를 포괄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급진적 공동체운동은 분명 필요하지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회의 유일한 존재방식이 될 수는 없다. 커크는 교회의 정의로운 사회적 실천은 교회를 진정한 생활공동체로 창조해 나가는 헌신과 더불어 불의한 정치 경제구조 하에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 구현에 헌신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나님나라 경제윤리의 방법론
2016-07-31 20:34:44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현실을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잘 성찰하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관점과 가치를 염두에 두고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경제 문제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그들을 적절히 종합해서 비판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현실에 대한 사회철학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분석 그리고 실천적 성경해석을 잘 하려면 셋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론과 실천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역동적 상호관계를 잘 파악하고 그 관계를 의식적으로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1. 이론과 실천의 역동적 상호관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세속적 영역과 신앙의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두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론과 실천은 실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또 그 관계를 어떻게 의식적으로 설정해야 바른 성찰과 행동에 이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4가지 입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이론주의, 사회적 실용주의, 실천우위론, 상호관계론이다.
이론주의
이론주의의 대전제는 이론이야 말로 세계의 완벽한 복제라는 확신이다. 이론을 제대로 섭렵하면 세상이 그 어떤 것으로도 덧칠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면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무시해야 하며 오직 개념과 이론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삶의 현장에서 오는 경험적 발견은 사실을 이해하는데 방해거리가 된다. 이런 이론주의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소위 "누수효과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면제는 이론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므로 만에 하나 이 이론에 반하는 다른 사실이 나타나도 절대로 누수효과이론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유경쟁시장에 맡겨두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곧 바로 바로 잡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시간이 흐르면" 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 아래 이론을 세우는 사람의 문제는 자신의 이론이 사실은 자신의 실천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있다. 이들은 대체로 폭풍우가 불어도 피할 곳이 있는 넉넉한 삶을 살고 있거나 앞으로 그런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론주의는 대체로 강자들의 무기다.
사회적 실용주의
사회적 실용주의는 이론주의와는 반대로 이론 무용론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경제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이론은 필요없고 사회현장의 체험이면 족하다. 사실에서 출발하며 출발점을 구체적인 사회현장에 두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삶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진리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실용주의의 가장 가까운 예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실용적 길은 오직 구제와 봉사라고 생각하는 입장일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데 사회과학적인 분석작업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유는 결정적으로 그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사회분석적 도구를 통해서 그들의 처지를 분석하고 그들을 그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구조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념적이라고 배척한다. 그런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이른바 거대담론의 노예가 되어버려 삶의 현장에선 별로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다. 케인즈는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비판한다. " 경제학자들이나 정치철학자의 사상이 갖고 있는 힘은 그들이 옳건 틀리건 간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훤씬 더 강력하다. 실용적인 사람들, 즉 자신은 어떤 지적인 영향력으로부터도 확실하게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보통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에 얽매에 있는 사람들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좋건 나쁘건 정말 위험한 것은 이권이 아니라 이론이다."
실천우위론
실천우위론은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을 인정하면서도 결정적인 면에서 실천에 우위를 두는 입장이다. 즉 이론에서 실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실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인데 해방신학자들이 선호한다. 이것은 해방신학지인 크로도비스 보프의 이론인데 이 이론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로 그는 이론과 실천은 구별되면서도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잘 설명한다. 즉 실천안에 이론이 있고 실천안에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장점은 실천이 신학적 성찰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는데 있다. 신학자도 삶 속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자리를 잡고 정치, 경제적 입장을 취하는데 그에 따라 신학적 성찰의 내용이 달라진다.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신학적 주제가 달라지고 신학의 목적이 달라진다. 보프는 이런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정해야 하고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적 혹은 신앙적 성찰을 할 때 중립성과 합리성을 주 장하지만 실상은 은밀하게 특정 이념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해야만 자신이 갖고 있는 입장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그에 대한 치열한 신학적 고민을 거치면서 투명하고 정직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보프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해는 장점은 있지만 보프의 문제점은 사회현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실천이 이론보다 앞선다고 주장함으로써 묘하게 실천우위의 입장을 천명한다는데 있다. 물론 그는 실천이 윤리적 차원에서 이론보다 더 가치가 있다거나 선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프는 인간의 생활, 존재, 그리고 실천에 의해 우리의 의식과 이론적 활동이 촉발되고 결정된다는 점만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그 역도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밀뱅크가 지적하듯이 보프는 실제의 영여과 지식의 영역을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적용한다. 즉 보프에게 실천, 신앙은 실제의 영역에 이론,신학의 세계는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이는 실천, 신앙에 비추어 이론, 신학은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프는 실제로 정치신학의 기본적 틀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 즉 구원, 계시, 은혜, 아가페, 믿음, 종교, 신학 등이 담고 있는 내용을 전면적으로 재해석한다. 보프의 주장이 가진 오류의 핵심은 실제의 세계와 지식의 세계를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실천, 신앙과 이론, 신학의 세계에 잘못 적용한 것이다. 신앙, 신학의 세계에선 셀제의 영역과 이론의 영역이 분리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보프는 이론, 신학으로부터 분리된, 즉 이론적 신학적 이해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믿음을 설정한 것이다. 보프의 정치신학적 틀에선 신학자이든 일반 그리스도인이든 어떤 실천이 구원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느 사랑의 실천, 신앙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본래의 역사적 실천과 분리된 최소한의 논리적 개념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 경제 영역에서 그 기준은 신학자 혹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사회철학적, 사회과학적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보프는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사회적 실용주의를 수영한 셈이 된다. 구원의 궁극적 기준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신학적 이론 즉 본래의 역사적 실천과 통합된 이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호적 관계론
상호적 관계론은 보프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지만 보프와 달리 분석적인 면에서 우선순위를 설정하지 않으며 실천은 실제의 영역으로 이론은 지식의 영역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정치,경제의 세계나 신앙, 신학의 세계에선 실천과 이론은 궁극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천은 이미 행동과 사도의 통합체이고 그 실천을 평가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신앙적, 신학적 개념도 이미 과거의 행동과 이론적 성찰의 통합적 결과물이다. 실천이 이론적 성찰이 존재하기 위한 물리적 조건이라면, 이론적 성찰른 실천이 존재하기 위한 정신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론적인 성찰과 실천적인 노력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하나로 융합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2. 신앙윤리적 성찰을 위한 도구들
신앙윤리적 실천을 위한 도구들은 사회철학적 성찰, 사회과학적 분석, 그리고 실천적 성경해석이다. 이들 사이의 관계도 모두 역동적인 상호관계이다. 이는 다른 도구들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하나의 도구를 완성한 다음에 다음 도구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도구엔 고유의 영역과 연구 규볌이 있는 것은 사링이지만 하나의 도구를 사용할 때 다른 수단들과의 역동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마침내 세 가지 도구들 사이의 만족스런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괴는 방법론은 초기의 균형, 불균형 그리고 다시 새로운 균형이이라는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진리에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철학적 성찰
사회철학적 성찰이란 경제윤리적 주제들,, 예컨데 사회정의 혹은 경제정의에 대한 원칙들을 세속 철학의 도구를 사용해서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철학적 도구가 필요한 이유는 첫째, 다원회된 사회에서 다양한 집단들 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이념적 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원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이념들 속에 함의된 찰학적 논의들을 섭렵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한 다음 그 결과를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설득력있게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흑인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은 정의 자유 평등 권리 등에 대한 사회철학적 이해가 확고했고 그 신념을 대중적 언어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 신념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 언어구사" 능력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일반대중ㄷ과 호흡하기 위해서는 기독적 가치와 신념을 일반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능력을 구비하는데 사회철학적 이해는 필수적이다. 사회과학적 분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사회철학적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양한 사회분석이론들 중에 하나를 택하고나 비판적으로 종합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 때 각 이론의 밑바닥에 있는 윤리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철학적 성찰은 사회과학적 분석과 실천적 성경해석의 도움으로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적 분석
사회과학적 분석이란 사회과학의 도구를 사용하여 정치 경제적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론적 과정을 말한다. 정치 경제적 현실은 정치 경제적 구조와 맞물려 있으며 이 구조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치 경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과학적 이론들과 씨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나타난 것이 경험주의와 신학주의다. 경험주의란 직접적인 경험과 그에 근거한 자료만으로 정치 경제적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그 누구도 이론적 틀을 통하지 않고는 경제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보프의 말대로 경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의식적으로 분석적 틀을 사용해 비평적 자세로 읽어내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분석적 틀을 사용해서 무비평적으로 읽어내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한편으로 신학주의는 오직 신학만이 정치 경제 현실을 참되게 충분하게 전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요없단 주장이다.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정의로운지 분별하는 작업은 성경만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어떤식으로 움직이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무엇이 정의로운지 알 수 있겠는가? 정의의 열매를 삶 속에서 맺어가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사회과학적 성찰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다. 현대 사회의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상대적 정의를 성취하는 것은 일반은혜로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인 사회과학적 븐석을 통해 정치 경제적 현실을 정확히 읽어내고 주어진 정황에서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현실적으로 어디까지 실현해 나갈 수 있는가를 판단하고 제시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근원적 담론으로서의 신학의 정체성을 타협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균형 잡힌 사화과학적 분석은 루터, 칼빈으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전통에 낯설지 않다. 사회과학적 분석을 통해 경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오히려 사회과학적 분석은 신앙윤리의 발전에 기여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회과학적 분석의 방법
사회과학적 분석에서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은 첫째는 정치,경제 이론들이 신학과 관련해서 어떤 위치를 갖는냐는 것이고 둘째는 정치, 경제 이론들의 다양성 문제다. 먼저 정체, 경제이론의 경우 신학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율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 경제이론의 방법론이 비록 무신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치, 경제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자율성은 상대적이기에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에 일반은혜와 같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정치,경제 이론들에 함의되어 있는 전제들과 그 전제들로 부터 도출된 결과는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정치, 경제 이론들의 다양성의 문제인데, 보프는 다양한 정치, 경제 이론들을 취사 선택하는 기준으로 윤리적 전제와 과학적 역량 두가지를 제시한다. 보프가 제시한 이 두가지 기준은 상호 역동적인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보프는 주류 경제학과 맥을 같이하는 기능주의적 이론들을 거부하고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대변되는 갈등론적 이론들을 선호한다. 왜냐햐면 보프는 마르크스 경제이론이 윤리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는 자들의 편에 서있으며, 역사적 정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르크스 경제이론을 선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프이 이렇게 단순하고 배타적인 선택에 우리는 유보적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정치경제 이론을 선택하고자 할 때, 경제정의를 중시하고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정치,경제적 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이론들을 선호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류 자본주의 경제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 경제학과 주류 자본주의 경제이론이 적잘하게 종합되어야 하는데, 그 종합의 형태는 세 가지 성찰이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성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실천적 성경해석
실천적 성경해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천에 신앙윤리적 밫을 던져주는 것이다. 성경해석학은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매우 복잡한 신학의 한 분과다. 왜냐하면 성경을 어떤 책으로 이해하고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성경본문에 대해 다양한 신학적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실천적 성경해석에는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확고히 해야 한다. 둘째, 성경 자체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바르게 만나야 한다. 셋째, 성경을 정치, 경제 영역에 적용하는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 정치, 경제 영역에서 전통신학이나 해방신학이나 실질적인 면에서 성경의 지고성을 인정하는데 실패했다. 전통신학은 정통실천에 대한 헌신없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 자체가 가진 급진적인 사회적 실천을 간과했다면 해방신학은 전통신학의 문제를 극복하려다 해방적 실천 속에 내포되어 있는 현대사회이론의 전제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간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성경 특유의 진리를 최소화하거나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가다머는 해석하고자 하는 본문의 의미는 두지평, 즉 본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만나 융합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고 역사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해석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씨슬턴이 잘 지적한 것처럼 해석의 과정을 두 지평의 만남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해석의 정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해석학적 나선을 통해 성경의 원뜻에 접근하는 해석을 추구해야 한다.
정치, 경제 영역에서의 성경 사용
우리가 성경의 원뜻을 찾고나면 그것을 신앙적 실천이 진행되는 정치, 경제 영역에 적용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이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첫째는 성경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기본적으로 말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정치,경제 영역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는 다양한 사회철학과 사회과학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발전시켜나가는데 좋은 자원이 되며 기독교 공동체가 일반 사회와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빛을 던져줄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에서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데 지침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패러다임들을 발견해서 창조적으로 적용햐여 한다. 라처드 보컴은 성경의 보편성은 성경의 특수성 안에서 그리고 특수성을 통하여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로, 성경이 교회와 세속사회에 각각 다른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지만 우린느 타락한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적 한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적 형편과 한계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씨름하시며 이끌어가시는 하나님님의 섭리에 동참해야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회철학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수단들을 사용해 세속화된 다원사회가 하나님의 기준을 향해 어느 정도까지 접근해 갈 수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론
그리스도인이 정치, 경제 영역에서 바르게 실천하려면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실천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실천적 성찰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이론과 실천의 바른 관계 설정이다. 이론주의나 실천주의를 벗어나 두 사이의 역동족 상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실천적 성찰의 구체적 모형은 사회철학적 성찰, 사회과학적 분석, 그리고 실천적 성경해석으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 성찰은 서로 역동적이며 상호적 관계성 속에서 이뤄져야 하되, 무게 중심은 실천적 성경해석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종합적인 성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환논리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인간에게는 실제를 이해하는데 해석의 틀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기록된 계시인 성경이 있을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한 신앙적인 체험, 성령이 함께하는 다양한 해석들 사이의 층실한 토론, 교회늬 전통적 가르침에 대한 깊은 성찰 등을 통해서 개관적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국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
2016-07-17 00:24:38
제목: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국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은 장구한 인류역사에서 지극히 최근의 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숨 쉬는 공기와도 같이 익숙한 경제체제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진 수많은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에 대한 진중한 반성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한국의 기독교는 친자본주의적 태도로 일관해 왔으며 자본주의가 가진 반신국적 요소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체제들이 완전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문제를 다 가지고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구조적인 것으로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을 갈수록 심화시키는 경제체제라는 점이다. 하기는 불평등의 문제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고질적이고 해결 가능성이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라는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지본주의는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임을 부정하고 인간을 개체적이고 개인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각자 도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가 붕괴되면 결국 자본주의도 붕괴될 수 밖에 없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물론 당시는 개발독재 시대라는 상황도 있겠지만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였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암울한 현실 가운데 그저 굴종하고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분연히 그 현실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람이 바로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은 사람들이 그저 감내하고 굴종하여 살아야 하는 현실 자체에 의문을 품었으며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보고 그 현실이 불법적이란 사실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그의 외침과 요구는 지극히 단순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합법적 요구였다. 그러나 당시에 근로기준법은 유명무실한 법이었고 고용자들과 공권력은 그 법을 지킬 의지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은 결국 죽음으로 항거했고 전태일의 죽음으로 암울한 개발독재 시절에 노동운동의 어두움 밤을 밝히는 한 줄기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전태일의 항거는 노동운동 이전에 억압받고 사람 대접받지 못하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노의 숫자라는 책은 전태일 사건이후 40년이 지난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나타난 각종 지표들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직시하게 한다. 이 책은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심회된 것은 1990년대 중후반 외환위기 기점이라고 지적한다.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금융 개방은 대기업의 팽창 욕구와 결합하여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고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심회되는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근본 문제점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발전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한국은 대기업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대기업들이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반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과 경제적 소외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본주의가 가진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인식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의 경제 윤리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자본주의와의 대결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윤리를 따라 삶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나라의 실현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이루어지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셨고 우리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경제 윤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숙고하고 나아가 그 윤리가 현대 자본주의와 관련된 함의와 영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성경적 준거 틀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구약 윤리의 기본 전제는 언약공동체이다. 구약 윤리는 언약공동체에서 출발하고 언약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희년 제도나 면제년 제도는 공동체의 경제적 불평등과 붕괴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실패한 자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적인 안전장치가 바로 희년이나 면제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가난 자체가 없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나 문제는 그 가난한 자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하고 그들에게 다시 시작하거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시장경제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의 존립을 위해서도 이런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확신으로 자본주의는 점점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시장을 강조하면서도 시장의 존립을 위해 경제적 실패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국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항 혹은 대안사회로서 살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경제적 불평등과 각자도생의 사회구조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극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구약의 희년이나 면제년 제도가 가진 정신이 보여주듯이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경제적 실패자가 존중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는 힘을 더해 주어야 한다. 적어도 교회 안에 들어와 그 구성원이 되면 노숙자가 되거나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주어야 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누가 굶는지 죽어나가는지도 알지 못한다면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바가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자격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 구성원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킬 수 없는 대형교회는 그 자체로 악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한 규모의 작은 교회들이 많은 건강하게 존재하고 그 교회들이 지역적 연대를 맺어나가는 교회 형태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두 번째는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건전한 시민운동단체나 정치정당들과도 손을 잡고 공동의 정책을 개발하고 실현하기 위해 연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경제 영역에서의 기독교 지성을 교회가 배출해 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시민단체나 정치정당들과 차별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만한 전문가,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청소년기부터 교회는 아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며 물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회에서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교육이듯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교육이다., 단순한 신앙교육이나 성경교육만이 아니라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성경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제대로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그 대안을 실천할 능력을 배양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중대한 책무가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자신이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이런 일에 사용해야 한다, 인재가 길러지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
셋째는 교회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다. 이것은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바른 정책을 실천할만한 정치가를 발굴하고 그 정당을 지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주의나 이권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분명한 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치 문화를 추구하는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 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정치권력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정치권력은 그 자체가 문제해결의 열쇠가 아니라 교회가 먼저 대안적 삶을 살고 그 대안을 사회에 제시한 것을 단지 실천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교회가 스스로 대안적 삶을 살고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정치권력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게 신실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악한 구조에 대한 저항의 삶이며 굴종을 거부하는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길은 손해를 감수하는 길이며 이 길은 심지어 경제적 실패자의 대열에 들어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이 길 외에 다른 편하고 좋은 길이 있을 수 없다. 대기업에 들어가서 그 체제 속에서 굴종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창업을 하고 경제적 연대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청춘을 대기업의 노예로 보내지 말고 수많은 건전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창업하여 더불어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모든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사실 교회는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차세대 인재를 키우고 그들이 연대하여 선한 기업들과 경제구조들을 만들어 내도록 지원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물적, 인적 자원들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정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걸어갈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오히려 험난하고 좁으며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을 도전하고 그 길을 함께 걸으려는 용기 있는 자들이 없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자본주의의 친구로서 비겁한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자본주의라는 음녀를 섬기게 될 것이다. 혼자서는 이 길을 걸을 수 없겠지만 믿는 자들이 함께 한다면 분명히 가능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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