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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김근주

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김근주

2016-06-04 18:40:05


 

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서론

구약 성경은 여전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정경이다. 오랜 세월동안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책이었고, 사람의 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고백되어온 책이다.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되 사람이 되신 것처럼,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전적으로 사람의 글이다. 이러한 성경의 특징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진술을 오늘 우리가 이해하고 적용할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이방 민족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외국인 가운데 종을 취하라는 말씀,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사람들마다 달리 말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깨닫기 어려운 책으로 만들지 않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며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우주 창조를 둘러싼 성경의 진술 역시 그러한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본론

 

1. 신학적 신앙적 문헌으로서의 구약 성경

 

1.1. 하나님의 영감으로서의 성경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ESV “breathed out by God”; NRSV “inspired by God”)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디카이오쉬네”)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여기서 “성경”이 가리키는 것은 당시 초대 교회가 읽던 헬라어 구약 성경인 칠십인역(LXX)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점은 이 책을 읽을 때에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정의로운 삶으로의 훈련에 유익하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점점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예수를 오래 믿었음에도 여전히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함을 이야기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죄악을 당연하게 여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온전한 삶으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성은 글자나 단어의 무오류성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실천적인 삶으로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신약 기자들은 구약 인용에 있어 자구적인 인용에 거의 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첨가(가령, 히 10:17과 렘 31:34), 삭제(가령, 사 40:3과 막 1:3), 변경(가령, 행 4:25-26과 시 2:1-2)하거나 부정확하게(가령, 막 1:2-3과 사 40:3, 말 3:1) 인용한다.

 

1.2.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런 점에서 성경은 근본적으로 신앙적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그들을 부르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영광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격려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명확하게 전달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표현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헤세드”)과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사랑, 정의, 공의를 우리가 살아가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 땅에 행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알고 그를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가 구약을 비롯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구약 속에 드러나는 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의 행하심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경 읽기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공의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때, 이 깨달음은 그 읽는 자를 바로잡으며 의(“디카이오쉬네”=“쩨다카”)안에 자라가게 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

 

1.3. 성경의 배경으로서의 역사

성경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진리를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이러한 성경의 진리는 지금으로부터 수 천년 전의 상황과 맥락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 점에서 성경은 ‘역사적’이다. 이 표현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역사적으로 틀림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 열왕기나 역대기를 ‘역사서’라고 분류하지만, 이 책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전달하는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책들은 특정한 신학적 목적을 위해 쓰여진 책이며, 그 목적을 위해 당시의 기록자들이 구한 자료들을 해석하고 취사선택하여 배열하였다. 이 책들이 역사를 다루지만 이 책들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열왕들의 연대를 정확히 확립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근거가 되는 성경 본문 자체가 서로 충돌되는 연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는 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구약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역사 진술을 가리켜 ‘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역사 진술을 통해 하나님과 그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들은 구약 문헌을 가리켜 ‘신학적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트램퍼 롱맨, 이안 프로반 등).

시편이나 욥기 같은 문헌의 경우, 그러한 ‘신학적 역사’조차 발견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글들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 곤경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며 부르짖은 글들인지라, 그 안에서 어떤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진술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문이 아닌 글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신학과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 쓰인 책인지라, 그 내용에서 실제의 일어난 역사를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본문은 역사를 전달하고 싶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배경이 되는 역사나 과학과 연관되어 보이는 진술에 초점을 두는 것은 구약에 대한 부당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배경에서 어떤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구약 본문을 오늘까지 의미있게 존재하게 만드는 요인이지 않다. 역사라는 배경은 구약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2. 본문의 신성화와 문자적 읽기

그러나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고백하고 있는 구절을 오해하면서, 어느결에 교회는 구약에 진술된 모든 진술들이 과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 타당하거나 근거가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 본문에 쓰여진 글자에 대한 이러한 신성화는 해당 본문의 문학적인 쟝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성경 본문을 극단적으로 신성시하게 되면, 사실 본문이 법전의 형태이든 이야기의 형태 혹은 시문으로 쓰여졌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레위기와 창세기 같은 책에 쓰인 진술이나 시편에 쓰인 진술이나 그저 절대 불변의 타당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쓰여진 본문의 표면적인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여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 견해들이 형성되는 경우들이 허다했다. 이상의 논의를 생각하면, 구약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근거들을 발견하려고 하거나 과학적인 사실에 대한 증거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2.1. 문맥과 쟝르에 대한 고려로 충분한가?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문맥에 따라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지만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령, 창세기 1장에서는 여러 번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땅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고(창 1:28; 9:1),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창 9:19)든지, 노아의 후손들은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흩어져 머물렀다(창 10:5)는 언급들은 온 땅에 흩어져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한 곳에 모이려는 이들을 흩어 버리신 바벨탑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창 11:1-9). 그러므로 창세기의 본문들을 그 강조되고 반복된 표현을 따라 읽는다면 인종간의 분리와 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읽을 여지가 있게 된다. 그래서 인종분리에 대해 창세기의 내용들이 실질적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분명 하나님은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서로 다르게 지으셨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이 말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충실하게 따르다 보면, 인종대로 언어대로 흩어져 살아야지, 함께 모이면 안된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전반부의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흩어짐’은 핵심적인 주제라고 여겨진다.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함과 각각의 아름다움이 서로의 흩어짐과 분리를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 본문은 일체의 섞임에 대한 반대 이론으로도 활용되면서 인종 차별과 인종 격리의 근거로 사용될 여지가 생긴다. 이것의 대표적인 경우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이다.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등으로 분류하였으며, 인종별로 거주지 분리, 통혼 금지, 출입구역 분리 등을 통해,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 지향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백인들의 지배, 흑인과 기타 인종에 대한 차별이 핵심이었음을 온 인류가 목격하였다. 문제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이해와 이러한 해석이 맞아 떨어지며, 남아공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화란 개혁주의 신학 역시 원칙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 읽기가 해로운 것을 말할 것도 없지만, 문맥에 대한 고려 역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적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가령,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시 19:5-6)라는 구절은 명백히 천동설을 알려 준다. 그래서 중세까지의 교회는 천동설을 하나님의 진리라고 여겼다. 지동설이 제기되었을 때에 이를 심판한 이는 다름아닌 교회였다. 루터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대해 확고하게 성경을 내세우며 반대하기를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칼빈 역시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 위에 놓을 것인가?”라고 단언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중세 교회는 시편의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받아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루터나 칼빈의 경우 본 구절의 앞 뒤 문맥을 고려한다 해도 여전히 동일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문맥에 대한 고려로도 그들의 잘못된 결론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시편이 ‘시’라는 쟝르임을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를 ‘다큐’로 읽을 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싯구를 쓴 시편 기자는 육안으로 관측된 대로 실제로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2.2. 이데올로기 비평

그러므로 쟝르에 대한 고려나 문맥에 대한 고려가 수 천 년 전에 쓰여진 구약을 잘못 읽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 모두를 취했음에도 오늘 우리네 교회 어디에서도 야곱의 결혼을 가리켜 규범적인 사항이라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근거는 문맥이나 쟝르에 대한 고려이지 않다. 그것은 그러한 결혼을 고대적인 관습이라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을 보고서 IS같은 무지비하고 말도 안되는 폭력 집단이 아니라면 기독교인이 전쟁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을 완전히 짓밟아야 한다고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여러 번 반복된 진멸에 대한 명령을 볼 때 규범적인 본문이라 여길 법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라는 사고에 기반해서 구약 본문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사고방식에 기반하여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의미로 이를 ‘이데올로기 비평’이라 부를 만도 하다. 사실, 창세기 10-11장에서 강조되는 ‘흩어짐’을 인종 분리 정책에 적용하는 것이 부당함을 판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비평’이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는 이 기본적인 생각이야말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가르침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좀 더 생각해보자.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어느 계명이 큰 지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를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다(마 22:37-40).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을 가리켜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이르시기도 하셨는데(마 7:12), 바울이 온 율법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하는 것(롬 13:8-10; 갈 5:14)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구약의 핵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달리 표현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약에 나타난 여러 본문을 평가하고 이해하는 기준이요 규범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3. 창세기와 우주 창조

이제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보려는 것은 우주 창조에 대해 창세기와 구약의 견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들의 나이를 합산해서 아담이 대략 6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견해가 17세기에 생겨난 이래, 20세기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 좀 더 세련되게 이론화되어 이른바 ‘창조과학’ 운동으로 미국 근본주의 계열에서 새롭게 부각되었다. ‘창조과학’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열정 그리고 역사 비평을 반대하며 성경의 영감과 문자적 이해에 대한 강력한 주장이, 어느 정도의 과학적 지식과 결합하면서 꽤 큰 파급력을 가지고 확산되었다. 이 가운데 성경에 대한 열정과 확신에 대해 아무런 비판할 것이 없되, 역사 비평에 대해 오해와 그 반대 급부로서의 문자적 이해에 대한 집착은 성서학계에서 거의 동의를 끌어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전문적이지 못한 과학 지식은 과학자 집단에서도 지지를 거의 얻어낼 수 없었다. 그 점에서 사실상 ‘창조과학’ 운동은 신학과 과학 두 분야 모두에서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나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독교인은 명백히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믿는다는 것이 창세기의 진술이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처음에 발생하고 변화되고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한다고 믿는 것과는 완전히 별 개의 문제이다. 이 글이 문제 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창세기를 지구와 인간의 유래에 대한 과학적 진술로 이해하는 ‘창조과학’이다.

 

3.1. <창조 기사 논쟁>에 나타난 창세기 이해

<창조 기사 논쟁>(새물결플러스, 2016)은 창세기 1-2장을 어떻게 이해할 지에 대해 다섯 명의 구약학자들이 각각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각각의 견해에 대한 나머지 학자들의 논평이 차례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리처드 에이버벡(Richard E. Averbeck)은 1-2장이 실제의 창조 기사로서 고대인의 관찰에 입각한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을 형성한다고 여긴다. 월튼(J. H. Walton) 역시 창조 기사가 육안으로 관측한 사실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대 세계의 과학을 반영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월튼의 경우 창세기 1장이 기능에 대한 서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에이버벡은 이를 7일 과정으로 묘사한 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원하신 7일짜리 패턴을 위한 유비라고 보며, 고대 이스라엘조차 이 도식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의 한 주간을 유비로 보는 것은 콜린스(C. J. Collins)나 롱맨(T. Longman)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토드 비일(Todd S. Beall)은 창세기를 쟝르상 역사 내러티브로 보면서 문자적으로 읽을 것을 주장한다. 그는 아예 신화로 여기든지 아니면 문자적으로 읽든지 두 가지 방법이 일관된다고 여긴다. 이 부분은 그의 핵심적인 오류이다. 문자적인 의미를 저자가 의도했다 할지라도, 그 문자적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것이며, 저자가 관측하고 발견하고 깨달은 바를 그 시대의 표현으로 전달한 것이다. 오늘날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비일은 본문이 말하는 문자적 이해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타당하다고 여겨버린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내러티브라면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태세이다.

창세기가 계시라는 이해로 인해, 그는 창세기가 배경으로 동원하는 세계관을 그대로 오늘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일에게 이러한 문자적 읽기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근거는 신약 기자들이 창세기를 그렇게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며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비일은 성서 자체에 의해 성서 해석을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과학에 의해 좌우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일과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성경을 과학적으로 읽으려는 입장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적 읽기를 단행한 후, 그것이 그대로 지구와 우주의 생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간주한다. 성경에 대한 문자적 이해가 우주 생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볼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과학과 안 맞으면 큰 일 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이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그들은 과학을 최대한으로 숭배하는 ‘과학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존 콜린스는 1-2장이 우주 생성론을 말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과 인간의 삶과 사랑, 섬김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 세상, 그리고 그들 자신을 돌아볼 기반을 형성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스는 창세기 본문이 지닌 신학적 의도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는 이 본문이 고대 사람들에게 문자적으로 읽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날을 유비로 읽지만, 정작 아담의 역사성을 강력히 주장한다는 것은 비일이 지적하듯 그리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다.

트램퍼 롱맨은 1-2장이 비유 언어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하면서 저자와 독자 모두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콜린스와 비슷하게 롱맨은 이 본문이 하나님, 인간, 세계에 관해 풍성한 교훈을 준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본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일이 주장하듯, 신약과 교부 문헌 그리고 오늘까지도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롱맨은 간과한다. 그래서 롱맨은 역사적 아담이 실존 인물일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만, 바울이 아담을 실존 인물로 여겼다는 피터 엔즈(Peter Enns)의 주장에도 반대한다. 롱맨에게 창세기는 ‘신학적 역사’라는 쟝르에 해당하며, 이 용어는 객관적 사실 규명과는 무관하게 신학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서의 역사 사용을 의미한다. 비일은 이런 식의 용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당연히 비꼰다.

존 월튼은 고대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본문을 읽을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에서 진화의 증거를 찾는 것이나 “바라”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읽는 것 모두를 배격한다. 그는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소통 방식으로 쓰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는 고대의 우주관과 연관하여, 무엇인가 창조된다는 것은 기능이 생겨나고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물질 우주 존재론이 아니라 기능 우주 존재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은 물질이 이미 존재하지만 기능이 부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긴다. 그에게 있어서 ‘만들다’는 ‘제 기능을 하게 되다’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겠지만, 그에게 있어 창세기 1장은 물질의 기원이 아니라 기능의 기원을 이야기한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기능에서 물질로 옮겨간 까닭을 그는 헬레니즘의 영향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는 고대 근동이 우주와 성소를 연결시키고 있으며, 성소를 확립한 이후에 안식을 누리는 것과 창세기의 안식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7일은 ‘우주적 성전의 취임식을 나타내는 7일’이며, 이 본문에서 실제의 우주 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읽는 것 자체가 본문과는 거리가 먼 시도가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에덴은 성소이며 아담과 하와는 제사장으로, 사람의 기능을 보여주는 “원형적 대표자”이다.

그러나 에이버벡이 비판하듯, 기능적 창조에 대한 그의 풀이는 본문이 자명하게 말하고 있는 바를 애써 달리 생각하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고대 근동에서 우주 창조와 성소 창조를 연관시키는 문헌으로 그가 제시하는 모든 문헌 증거들은 본문 자체에 성소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존재하지만, 창세기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글에 나타나는 우주-성소 모델을 주장하지만, 이 두 사람은 헬레니즘 세계 안에서 유대 신앙을 보편화하기 위해 애썼던 이들임을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과 창세기를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요세푸스와 필로의 시대에 그리 멀지 않던 초기 교회 교부들의 물질 창조 견해를 부당하다고 비판했던 것과는 모순되는 태도인 것이다. 나아가 월튼은 헬레니즘이 고대 근동적 세계관을 다 지워버렸다고까지 선언했다! 레벤슨(Jon D. Levenson)을 인용하면서 이사야 66장 1절에 있는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성소라는 언급도 끌어오지만, 이 본문 역시 하나님의 안식할 처소라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

에이버벡과 비일을 제외한다면, 콜린스와 롱맨, 월튼은 창세기에서 지구 생성에 대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세기 본문은 신학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한 본문이다. 비일의 경우, 그러한 신학적 읽기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문자적 읽기 자체도 전적으로 존중한다. 이들의 견해는 나름의 일관성이 있지만, 에이버벡의 경우 한편으로는 문자적으로 본문을 읽고 다른 한편 7일 패턴 같은 경우는 문자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깨어진다. 그 경우 어떤 것은 문자적으로 읽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그는 네 개의 강에 대한 언급이 이 본문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표지라고 여긴다. 그에 대해 롱맨 같은 이는 반대한다. 그렇지만, 창세기의 저자와 독자가 에덴을 에이버벡이 주장하듯 실제 역사로 읽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저자는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어딘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점에서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를 주장하는 토드 비일의 견해는 흥미롭다. 그야말로 소수의 구약학자들만이 비일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지만, 적어도 그의 해석은 일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일관되게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풀어간다. 그에 비해 어떤 학자들은 어떤 본문들은 문자적으로 풀고 어떤 본문들은 상징이나 비유로 풀어간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흔들린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이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비유적으로 읽었을 것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비일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책 2부 7장에 실린 주드 데이비스의 글은 토드 비일의 해석을 지지하면서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지구 창조’를 제안하기도 한다. 비일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는 중요한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신약 성경과 이후 교회의 구약 이해이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과 교부들이 구약을 문자적으로 읽었다면 오늘 우리가 달리 읽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이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묻는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실제로 창세기는 세상이 7일만에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상징 혹은 비유 언어가 쓰였다고 롱맨처럼 주장할 근거가 그리 객관적이지는 않다. 가령 7일이 상징이면 첫째 날의 빛은 상징인가, 아닌가? 첫째 날의 빛이 상징이면 넷째 날의 두 광명은 상징인가, 아닌가? 그 점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저자와 창세기의 내용을 듣는 청중과 독자들은 명백히 세상이 물리적인 7일 동안 창조되었다고 믿었으리라 여겨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창세기의 주장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과 신약 안에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판단하는 내용들도 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내용도 있다. 세상 창조에 대해 창세기 저자가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창세기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비일과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주장하듯, 신약 기자들은 구약을 문자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 기자들의 그러한 견해가 우리가 지금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견해이지 않다. 가령 신약 기자가 이사야서 1-39장 부분과 40-55장 부분을 모두 이사야의 글로 인용한다 하더라도(가령, 요 12:38-41에서의 사 53:1과 6:10 인용), 그것이 이사야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정답으로 보아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표현은 초대 교회 당시 유대교의 이사야서 저자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아가, 예수께서 요나와 니느웨 사람에 대해 인용하셨다는 사실이 요나서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문자적 이해에 기반하여 세상이 물리적인 7일에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창세기의 진술을 지구와 인간의 나이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저자의 의도가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지만, 창세기 저자가 물질적인 7일 창조를 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창세기는 고대인의 인식과 세계관, 고대의 구체적인 역사와 일상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창세기가 고대인의 세계관과 인식을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은 창세기가 추상적 진리의 모음집이 아니라 살아있는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의 역사 현실에 결부된 책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이 롱맨이 사용하는 ‘신학적 역사’라는 다소 애매할 수 있는 표현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세기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그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의 인식과 세계관을 통해 창세기가 세세토록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가 부르신 백성의 삶이다.

비일과 같은 이들의 도전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일관되게 읽을 필요성을 제기한다. 창세기가 의미하는 바를 그 배경이 되는 우주관과 역사적 상황의 틀 안에서 문자적으로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창세기의 그 어떤 부분도 간과되거나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고문헌학을 전공하는 것이 아닌 한, 그 시대와 배경과 틀 안에서 창세기가 의도한 바를 오늘 달라지고 변화된 우리 시대의 상황과 틀 안에서 풀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창세기 전체를 신학적으로 읽을 필요가 생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는 창세기의 신학적 읽기의 필수적인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3.2. 구약과 창조 신앙, 하나님 나라

창조 신앙은 우리의 근본적인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온 세상을 지으셨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 글에서는 실제로 구약 성경과 이후의 역사에서 창조 신앙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답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세상을 지으셨음을 굳게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그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고난 가득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의 가장 첫머리에 놓인 창세기 1-2장은 힘있는 열방의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적인 존재이며, 노동을 통해 그 통치를 구현하는 존재임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이 본문은 우주와 사람에 대한 고대인의 지식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 그가 지은 사람에 대한 영원한 진리를 선포한다.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주 창조에 관한 본문들도 본질적으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구약에서 우주와 천지 만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본문의 대체적인 특징은 시 혹은 시 형식으로 배열된 기도, 축복, 저주, 선포라고 할 수 있다(가령, 창 49:25; 신 33:13-16; 수 10:12; 삿 5:4-5; 욥 3:3-9; 9:5-10; 36:26-33; 37:1-13; 38:1-41:34 등). 우주 창조를 언급하는 문학 형태가 시라는 점은 구약에서 우주 창조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역할을 통해 절망과 체념 속에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다가올 궁극적 변화의 날을 소망하고 꿈꾸게 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그 무수한 예들 가운데 몇 가지들이다.

 

3.2.1. 시편 8편

시편 8편은 창세기 1장을 시로 풀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창조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8편 자체에서는 애매하지만, 8편이 놓여 있는 자리를 고려하면 이 시는 고난 가운데 불려진 창조 찬양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많은 대적에 둘러 싸여 있으며(3편), 사람들로 인해 욕을 뒤집어 쓰고(4편), 신실함이 없는 원수들로부터 건져 주시기를 구하고 있다(5편). 자신이 마치 사망 중에 처해 있는 것 같은 곤고함을 느끼며(6편), 사자 같이 물어 찢으려고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처해 있다(7편). 8편은 이러한 현실을 일러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 같은 자신과 “원수들과 보복자들”로 표현되는 대적들로 대비시키면서(시편 8:2),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손가락으로 하늘과 달과 별을 만들어 하늘의 궁창에 고정하셨다고 표현한다(시편 8:3).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우주를 볼 때, 시편 기자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주신 영광과 존귀가 참으로 큼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환난 가운데 있는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의 위로와 찬양의 근거이다.

 

3.2.2. 시편 148편

세상과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을 호출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령하는 이 시편은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하늘의 하늘”, “하늘 위에 있는 물들”(시편 148:4) 그리고 땅과 땅 속에 있는 ‘깊은 바다’(“테홈”; 시편 148:7)가 시편 기자가 생각하는 세계이다. 야훼께서 명령하시므로 이 모든 세계가 지음 받았고, 하나님이 이들을 영원히 세우셨으며 폐하지 못할 명령으로 정하셨다고 선언된다(시편 148:5-6). 이 시편에는 용들과 바다 같은 고대 괴물도 호출되며, 불과 우박 같은 자연 현상과 짐승과 가축, 기는 것 같은 생명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들과 고관들과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까지 여호와 찬양에 호출된다.

이처럼 구약에서 자연 현상이나 우주, 천문이 언급되는 기본적인 맥락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찬양이다. 특히 148편은 146편부터 150편에 이르는 시편집의 마지막에 놓인 할렐루야 찬양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지막 다섯 개의 시편들은 시편집 전체의 결론부에 위치하면서 탄식과 신음으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야훼 찬양을 강력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야훼를 찬양하라는 할렐루야 마무리가 가능한 근본적인 까닭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이다.

시편집의 마지막 다윗 시편인 138-145편의 중심 내용이 다윗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사람의 고난받는 현실이며, 그에 대한 대답은 144편과 145편에 있는 왕의 통치 그리고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다. 할렐루야 시편을 시작하고 있는 146편 역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과 소망을 삼은 이의 복에 대해 언급하면서(시편 146:5), 마지막 절에 야훼 즉위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훼께서 다스리신다’는 선포를 지니고 있다(시편 146:10). 146:6-9은 왕이신 야훼의 통치를 표현하는데 145:18-19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편 146:6-9)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되심이야말로 시편의 마지막 부분이 도달한 지점이며, 시편 찬양의 본질이다. 시편의 이러한 흐름은 시편 전체를 왕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들의 찬양으로 이해하게 한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묵상과 찬양은 온 땅 가운데서 왕으로 좌정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대와 고백, 찬양을 본질로 한다.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심판, 갇힌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유, 의인들과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보호하심에 대한 고백과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시편의 창조 찬양은 지극히 신학적이다. 148:3-6에서 보듯, 고대 이스라엘의 우주 이해에 기반하여 우주와 하늘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왕되심과 통치를 선언하며 찬양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시편집이 최종적으로 형성된 주전 2-1세기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지닌 시편은 온 우주를 바라보고 온 천지를 바라보며 결코 세상의 왕들에게 굴복하고 세상 질서 안에서 체념할 것이 아니라, 왕이신 여호와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찬양하라 선포한다. 5절은 야훼께서 명령하시니 그것이 ‘창조되었다’ 증언한다는 점에서 창세기 1장을 이 시편이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되고 고백되었다.

이를 생각하면, “하늘의 하늘”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에 대해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 본문을 보면서 “해와 달”을 향해 찬양을 명령한다 하여, 오늘 우리는 해와 달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명체라고 증명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에 대해서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7절은 “용들과 바다”를 호출한다. “용”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탄닌”이고, “바다”는 “테홈”이다. 탄닌은 구약에서 종종 언급되는 태고적의 괴물이되(욥기 7:12; 시편 74:13; 이사야 27:1; 51:9),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언급된다(창 1:21). “테홈”은 땅 아래 있는 바다(창세기 7:11; 8:2; 49:25; 신명기 33:13; 욥기 38:16; 잠 8:28)를 가리키며, 땅 아래 있는 바다인 테홈 위에 산들이 뿌리를 내린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시편 104:6; 잠언 8:27). 무엇보다도 테홈은 창세기 1장에서도 언급된다(창세기 1:2). 그러므로 “용과 바다”에 대한 148:7은 이 시편이 창세기 1장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이 탄닌과 테홈이라 불려지는 어떤 태고적의 존재를 입증하는 본문이지 않을 것이다. 구약에는 이뿐 아니라 “레비야탄”과 “라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이를 들어 이들 괴물의 존재를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심판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시편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시편 가운데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선포를 지닌 몇 개의 시들이 있고, 이들을 가리켜 ‘야훼 즉위 시편’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앞에서 언급했던 혼돈의 괴물(얌, 레비야탄, 탄닌, 라합 등)과의 싸움이라는 고대 세계의 신화적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온 우주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통치의 견고함을 노래한다. 그분은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위혐적인 권세들을 제압하시고 승리 가운데 좌정하신다. 이러한 야훼 즉위 시편들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왕되심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그의 나라가 종국에 마침내 온 땅에 임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시편들은 종말론적인 전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시편들에서 심판하시러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 21절에서는 아예 그 “탄닌”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언급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온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내용일텐데, 이 시들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모든 나라 가운데에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편 96:10)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편 96: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시편 97:1-2)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편 98:9)

이 시들이 언급하는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바, 시편 146편 6-9절에 나오는 찬양과 매우 흡사하다. 천지와 바다와 온 세상을 불러내어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재판장으로 온 세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외침이 없어서 야훼 즉위시편으로 분류되지 않는 94편에도 이점은 일관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세상의 재판장이라 부르고 있으며(시편 94:2), 이 시에서 주의 백성, 주의 소유인 이들은 과부와 나그네, 고아와 동일시되고(시편 94:5-6), 여호와께서 그의 소유요 백성인 이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니(시편 94:14), 그의 재판은 의로 돌아간다(시편 94:15).

이 점이야말로 이 시들이 노래하는 재판과 통치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구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통치와 연결하여 이해되지 않으면 그 핵심적인 의미를 잃게 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 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시편 96:11-12)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시편 98:4-6)

아울러 다음과 같은 찬양 역시 하나님의 통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시편 67:3-4)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불의를 극복하시며 억압받는 자를 신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행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노래하는 야훼즉위시편들에는 야훼께서 행하실 공평과 정의, 진리에 대한 언급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백성들의 찬양의 내용이다.

성경의 구절들에서 과학적인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고, 주어진 현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성경 구절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도 그 자체로 완전히 틀린 방법이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라는 점에서, 이 핵심적인 메시지를 위해 구약 기자들이 그들 시대의 가치관(종과 여자에 대한 언급들)과 우주관을 사용한 것을 두고 마치 그것도 본질적인 진리의 하나인 양 판단한다면 그것은 본문 자체를 도리어 파괴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창조 과학이 구약 본문을 과학적으로 다루기 위한 문자적 접근이었다면, 노예제 찬성과 여성 안수 금지, 독재 권력에 대한 순종 등은 성경 본문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문자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 우리는 공동체와 더불어 본문을 다룰 때 본문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사고방식, 전제가 되고 있는 틀 같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영이라 여겨질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판정하기 애매한 것들도 많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본문에 대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medium)를 구분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러한 ‘매개’ 부분은 버려도 된다는 의미이지 않다. 대개의 경우 구약 성경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개는 ‘역사’이다. 이를 통해 구약의 가르침과 선포가 허공 중에 있는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실제 현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매개가 보편타당한 진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땅과 노동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오늘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우리의 삶은 토지 자체에 매여 있지는 않다. 그 점에서 희년법은 가난의 대물림 방지와 공동체적인 책임이라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오늘 우리 시대의 상황에 적용되어야지, 이것을 문자적으로 오늘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의 하늘”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3.2.3. 아모스

주전 8세기 이후 예언자들의 외침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고백을 아모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은 아모스 첫머리에 놓인 “지진 전 이년”(아모스 1:1) 언급과 연관된다. 아모스서 곳곳에 지진 현상을 연상시키는 표현들이 있다. 무엇보다,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는 언급(아모스 8:8)은 이러한 지진 현상을 가리킬 것이다. 이렇게 땅이 솟아오르니, 상아궁들이 파괴되고 큰 궁들이 무너지며(아모스 3:15), 여호와의 명령으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질 것이며(아모스 6:11), 곳곳에 시체가 많을 것이고(아모스 8:3), 제단 곁의 기둥 머리와 문지방이 움직이니 건물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아모스 9:1). 아모스서에는 예언서들에서 잘 볼 수 없는, 온 천지를 뜻대로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언급들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 역시 지진 현상과 연관하여 땅과 바다를 뜻대로 좌우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시니라”(아모스 4:13)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아모스 5:8)

앞서 살펴보았던 아모스 8장 8절과 유사하면서도 확장된 다음 구절은 이 점을 훨씬 더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 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아모스 9:5-6)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부귀 영화에 취하여 가난한 자들을 짓밟는 이들이 서 있는 땅을 솟아 오르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게 하실 것이다. 아모스서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언급(아모스 4:11)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가난한 자를 짓밟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올라가게 만들었고(창세기 18:20-21; 19:13; 참고. 예레미야 23:14; 에스겔 16:49),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집어 버리시듯이(창세기 19:15), 이스라엘을 뒤집어 버리실 것이다(아모스 4:11). 소돔과 고모라에 쓰인 ‘뒤엎는다’는 히브리말 동사(“하파크”)가 아모스서에서 다섯 번(아모스 4:11; 5:7,8; 6:12; 8:10) 쓰이기도 했다(소선지서의 경우 호세아 7:8; 11:8; 요엘 2:31; 요나 3:4; 스바냐 3:9; 학개 2:22에도 쓰였다). 그러므로 아모스서의 지진은 불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 그 모든 영광을 세우고 교만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들은 세웠고, 하나님은 무너뜨리신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랑하고 교만하였으되, 온 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땅을 만지시니 그 땅이 솟아 올라 모든 자랑과 영광을 낮추어 버리신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과 확신이 온 땅에 가득한 죄에 대한 심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짓밟고 불의가 횡행한 현실과 절기와 제사의 풍성함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모스 5:7)이었다. 여기에서 ‘바꾸다’로 번역된 단어가 앞에서 본 ‘(소돔을) 뒤엎다’에 쓰인 단어이다(아모스 5:7 해설을 참고하라). 이스라엘이 정의를 뒤엎어 버리니, 하나님께서는 지진으로 이스라엘을 뒤엎어 버리실 것이다.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는(아모스 5:8) 창조주 하나님은 땅을 만지셔서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께 대한 신앙고백은 정의와 공의를 내던져 버린 그 땅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아모스서는, 천재지변을 겪을 때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여호와 신앙과 권력이 결탁하여 예배와 종교 의식은 넘쳐나는데 세상 가운데 가난한 자의 고통은 커져만 가고 있지는 않은지, 제사는 풍성한데 정의와 공의는 내던져 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의한 세상을 뒤엎어 버리실 것이다.

 

3.2.4. 무로부터의 창조

흔히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고백된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에는 이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서로는 주전 2세기 후반에 쓰여진 마카베오 하서를 들 수 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박해로 순교를 목전에 둔 어머니와 일곱 형제의 순교 장면을 다루고 있는 7장에서, 이 어머니는 죽어 가는 아들들을 격려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 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가톨릭 성경 마카베오하 7:22-23).

마지막으로 막내 아들이 남았을 때에도,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순교를 격려한다.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 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가톨릭 성경 마카베오하 7:28-29).

이 부분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고백이 박해와 순교의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무로부터의 창조는 핍박과 박해를 직면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것이다.

 

결론

창조에 관한 대다수의 본문이 시의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스라엘의 찬양의 중심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창조에 대한 본문이 모두 비유이며 상징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온 세계가 삼층 구조로 이루어졌고,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께서 질서 있게 창조하셨음을 글자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것이 구약이 기반하고 있는 고대적인 세계관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아온 역사 안에서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겪을 때마다 이러한 고대적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우주와 세상 창조를 기념하고 노래하였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온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아무리 광대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행하심 앞에 무너지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여호와의 주권과 통치에 대한 찬양이며,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고 버티며 걸어가는 힘이 되었다.

구약에 나타난 창조 이야기는 구약 백성들이 살아간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 점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창조에 주목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 다르지 않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 어떤 강력한 세력도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배우는 것이다. 구약 예언서들은 철저하게 당시에 실제 일어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구약 예언은 허공 중에 선포된 추상적이고 ‘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 속에 일어나는 강력한 제국과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예언들은 제국을 영원한 실체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 백성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며, 그 모든 변화의 원천에는 온 땅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며 주관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계심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땅의 세력에 좌우되지 않고, 그 세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구약 예언이 ‘역사적’이라는 것은 실제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설명했다는 의미이지 않다. 구약 예언은 그런 ‘역사책’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책’이지도 않다. 역사에 기반한 구약의 창조 이야기와 예언이 ‘역사적’인 것은 실제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강대국의 패배와 붕괴, 역사 안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궁극적인 변화와 회복을 꿈꾸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구약성경과 창조신앙- 김근주

2017-04-16 18:39:18


1.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쓴 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요구한다면 성경이 사람이 쓴 글이란 사실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디모데후서 3장16-17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의미는 글자 하나하나의 무오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선한 일을 할 능력을 갖추게 함을 의미한다. 예레미야 9장 24절은 여호와를 아는 것은 여호와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과학이나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본받게 하려는 책이다. 성경의 진리는 수 천년 전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통해 전달되었고 그 점에서 성경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의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으로 틀림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전달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성경은 특정한 신학적 목적을 위해 쓰여진 책이며 그 목적을 위해 당시의 기록자들이 자료들을 해석하고 편집했다. 그래서 구약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역사 진술을 가리켜서 신학적이라 말할 수 있다. 신학적 진술이란 표현은 그러한 역사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구약문헌을 가리켜 '신학적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트럼프 롱맨, 이안 프로반 등)

2.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 기록이 역사적 팩트와 맞지 않다고 해서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어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근거를 발견하려고 하거나 과학적인 사실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려는 시도들은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성경의 문맥과 장르를 고려하야 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하나님이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 하셨다는 구절은 그 문맥을 볼 때 각기 그 종류대로 편만하게 흩어져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화란 전통을 가진 남아공 교회는 이 구절을 인종을 차별하는 "아파르헤이트"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 또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시19:5-6)라는 구절은 중세 내내 천동설을 지지하는 구절로 인용되었고 중세까지 교회는 천동설을 하나님의 진리라고 여겼다. 중세 교회는 시편의 장르가 "시"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이런 문자적 해석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 싯구를 쓴 시편 기자는 육안으로 관찰한대로 실제로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되, 그 당시의 세계관/우주관에 기초하여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시회와 세계에 기반한 표현을 그 시대와는 달라진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당연히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성경의 모든 진술에는 전하고자 하는 바(원관념)와 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전달 수단(보조관념,vehicle)이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구약에 수없이 사용되는 전쟁 모티프는 비히클이다. 이를 통해 명료하게 표현되는 원개념은 죄에 대한 결연한 단절과 심판일 것이다. 이런 본질을 간과하고 전쟁이라는 비히클을 우리 현실에 문자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면 무시무시한 참상이 발생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구약의 핵심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말하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약본문을 평가하고 이해하는 기준이요 규범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비히클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비유적, 수사적 맥락도 있고 신화적, 세계관적 맥락도 있다. 가령 "여호와는 나의 바위"라는 표현에서 바위는 비히클이고 원개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일 것이다. 이런 수사적 맥락의 비히클은 비교적 큰 문제없이 식별이 가능하지만 신화적, 세계관적 맥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는 고대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런 세계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과학적 팩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과학적 사실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세기 1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우주관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하고 조화로운 창조를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고대 중동과 이스라엘의 우주관은 비히클이지 본질이지 않다. 본질은 창조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조화롭다는 진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관이나 바울의 여성관도 비히클로 보아야지 본질로 보면 안된다. 

 

4.  토드 비일은 창세기를 장르상 역사 내러티브로 보면서 문자적으로 읽을 것을 주장한다. 그는 창세기를 아예 신화로 여기든지 아니면 문자적으로 읽든지 두 가지 방법이 일관되다고 여긴다. 그러나 문자적 의미를 저자가 의도했다고 할지라도 그 문자적 의미는 저자가 관찰하고 발견한 바를 그 시대의 우주관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오늘날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토드 비일이 창세기의 문자적 이해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비일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창세기가 배경으로 동원하는 세계관을 그대로 오늘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일은 이러한 문자적 읽기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신약 저자들이 창세기를 그렇게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인용했다는 점으로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비일은 성경을 성서 자체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과학에 의해 좌우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일과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누구보다도 성경을 과학적으로 읽으려는 입장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과학과 안 맞으면 큰 일나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한다.

 

5. 리처드 에이버백이나 존 월튼은 창세기 1-2장의 창조기사는 고대인의 관찰에 입각한 우주론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윌튼은 창조에 대한 서술이 기능에 대한 것임을 강조한다. 콜린스, 롱맨 , 에이버백은 모두 창조 기간을 7일로 묘사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한 주간으로 이뤄진 고대적 삶의 패턴의 유비라고 본다. 존 콜린스는 창세기 1-2장이 우주 생성론을 말한다고 보지 않고 창세기 본문이 가진 신학적 의도에 집중한다. 그러나 콜린스는 이 본문이 고대 사람들에게는 문자적으로 읽혔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콜린스는 창세기의 날을 유비로 읽지만 정작 아담의 역사성은 강력히 주장하는데 이 점은 비일이 지적하듯 그리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 롱맨은 창세기 1-2장이 비유언어로 가득하다고 말하면서 저자와 독자 모두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롱맨은 신약과 교부 문헌 그리고 오날까지도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롱맨에게 창세기는 신학적 역사라는 장르에 해당하며 이 용어는 객관적 사실 규명과는 무관하게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서의 역사 사용을 의미한다.

 

6. 존 월튼은 고대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창세기 1-2장을 읽을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에서 진화의 증거를 찾거나 무로부터의 창조를 읽는 것 모두를 배격한다. 그는 고대인의 우주관이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소통빙식으로 쓰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며 고대의 우주관에서 무엇인가 창조된다는 것은 기능이 생겨나고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 1장은 물질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기원을 이야기한다고 여긴다. 그는 우주와 성소를 연결시키고 성소를 확립한 이후에 안식을 누리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창세기의 안식과 연결시킨다. 월튼의 성소 이론은 타당성이 있지만 문제는  그가 인용한 고대 근동의 문서들과는 달리 창세기에는 성소에 대한 명시적 구절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요세푸스와 필론의 글에 나타나는 우주-성소 모델을 주장하지만 이 두 사람이 헬레니즘 세계 안에서 유대 신앙을 보편화하기 위해 애썻던 이들임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주장과 창세기를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콜린스, 롱맨, 월튼은 모두 창세기에서 지구 생성에 대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들에게 창세기 본문은 신학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한 본문이다.

 

7. 토드 비일의 경우, 이러한 신학적 읽기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문자적 읽기 자체도 전적으로 존중한다. 그야말로 소수의 구약학자들민이 비일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지만, 적어도 그는 일관되게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에 비해 다른 학자들은 어떤 본문들은 문자적으로 읽고 어떤 본문들은 상징이나 비유적으로 풀어간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흔들린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이 창세기 내용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비유적으로 읽었을 것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비일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일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는 중요한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신약성경과 이후 교회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상징 혹은 비유 언어가 쓰였다고 롱맨처럼 주장할 근거가 그리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창세기의 저자나 당시 독자들이 창조기사를 문자적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창세기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비일과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주장하듯, 신약기자들은 구약을 문자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기자들의 그러한 견해가 우리가 지금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견해이지 않다. 예를 들어 바울은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할 것을 촉구하였고(고전11:2-16), 남자가 머리를 기르지 않는 것은 본성이 가르치는 것(고전11:14)이라고 말하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친다.(고전14:34)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런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지 않고 해석한다. 창세기의 저자는 세상이 문자적으로 7일만에 창조되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의 의도가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지만, 창세기 저자가 물질적인 7일 창조를 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진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창세기는 고대인의 인식과 세계관, 고대의 구체적인 역사와 일상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는 책이다. 다시 말해, 고대 이스라엘의 우주관은 비히클이지 성경이 이야기하는 본질이지 않다. 물론 창세기가 고대인의 인식과 세게관을 비히클로 사용했다는 것은 창세기가 추상적 진리의 모음집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의 역사 현실과 결부된 책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세기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그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의 인식과 세계관을 통해 창세기가 세세토록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가 부르신 백성의 삶이다. 그럴 때 창세기가 진술하는 진라는 오늘날 구체적 역사와 세계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본질적으로 해당될 것이다. 

 

8.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와 더불어 본문을 다룰 때 본문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시고 방식, 전제된 틀 같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영이라 여겨질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판정하기 애매한 것들도 많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모든 본문에 전하는 메시지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비히클을 구분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러한 비히클을 버려도 된다는 의미이지 않다. 대개의 경우 구약 성경이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비히클은 "역사"이다. 이는 구약의 가르침과 선포가 허공 중에 있는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실제 현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히클 자체가 보편타당한 진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땅과 노동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토지에 기반한 농경 사회에 기반한다. 그러나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우리의 경제 생활은 토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희년의 현대적 적용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문자적으로 우리 시대로 가져올 수 없다. 그 점에서 희년법은 가난의 대물림 방지와 가난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메시지가 오늘 우리 상황에 적용되어야지 이것을 문자적으로 오늘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의 하늘'과 '하늘위의 물들'에 대한 창세기 1장의 표현에 대해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