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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창조 이야기

두 가지 창조 이야기

2016-05-29 22:42:12


   창세기에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등장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든 이야기를 한 후에 다시 2장 4절에서 인간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이 두 가지 창조 이야기는 내용도 다르고 창조주의 이름도 엘로힘에서 엘로힘 여호와로 바꾸었다. 그래서 문서편집설에 의하면 이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전승들이 편집과정에서 합쳐진 것으로 설명되거나 아니면 성경 자체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증거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을 의심의 해석학이 아니라 신뢰의 해석학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창조 이야기가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은 그 나름의 충분한 신학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2장의 창조 이야기는 1장의 창조 이야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창조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장에서 인간 창조는 맨 나중에 이뤄지며,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인간 창조가 가장 중요하고 천지 창조의 근본적 이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도 인간 창조는 특별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점은 더욱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해준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 인간 창조가 있기 때문에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 다시 자세히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에서 살게 하신 것을 말한 것이나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되 남자를 먼저 짓고 남자에게서 여자를 지으셨다는 추가적인 설명은 인간 창조와 관련하여 1장에서 언급되지 않은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계시를 더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일반적인 신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인 엘로힘이 사용된 반면에 창세기 2장에서는 엘로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의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신의 이름이 처음 주어지는 장면은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이다. 그런데 왜 창조 이야기에서 여호와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인가?  시간적인 순서로 보면 창조 당시에는 여호와란 이름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창조 이야기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2장에 엘로힘 여호와가 언급되는 이유는 1장에서 소개된 천지의 창조주 엘로힘이 바로 이스라엘의 신이신 여호와이심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는 바로 천지를 지으신 엘로힘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창조주 혹은 조물주라는 신개념은 사실 인류에게 보편적인 신관일 것이다. 그 신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몰라도 세상을 짓고 다스리는 창조자나 조물주라는 초월적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신관념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에서 계시되는 창조주로서 엘로힘은 보편적인 신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2장에서 창세기 저자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 그들을 선택하고 언약을 맺은 신이신 여호와가  바로 천지의 창조주, 조물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 창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2장에서 이스라엘의 신의 이름 여호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2장에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등장한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에서 보통명사로서 하나님이란 칭호는 모두 고유명사로서의 여호와란 칭호로 바뀌어져 있다. 그리고 3장에서 선약과 금령과 인간의 범죄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인간을 특별하게 지으신 분이시고 따라서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분,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근심하신 분이 모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일개 민족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시며 자신의 창조 목적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천하만민들에게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임을 창세기 저자는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창조 이야기는 모순 된 이야기거나 두 가지 서로 다른 전승을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 아니라 창세기 저자가 분명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일관되고 정교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창세기 1-11장이 인류의 기원이나 창조의 기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누구이시며 왜 이스라엘을 택하여 언약을 맺으셨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이스라엘 이야기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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