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의 내러티브
2016-05-13 17:21:42
신명기 1장
호렙에서 가네스 바네아까지는 열 하룻길에 불과하지만 출애굽2세대가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모세는 출애굽한지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주신 명령을 다시 선포하고 있다.(2-3절) 모세가 이 선포를 하고 있는 장소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이 마주 보이는 모압 평야였다. 이제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있는 것이다.(5절) 애굽 1세대는 전부 광야에서 소멸되었고 ,모세는 지금 출애굽2세대를 향하여 과거를 회고하고 있는데 그 주된 회고는 정탐꾼 사건이었다. 출애굽1세대는 가네스 바네아에서 벌어진 정탐꾼 사건으로 인해 광야에서 소멸될 수 밖에 없었는데, 모세는 바로 이 사건을 출애굽2세대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대부분의 출애굽2세대는 아주 어렸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모세는 출애굽2세대에게 1세대가 겪었던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간곡하게 권면하려는 것이다. 모세는 정탐꾼 사건을 회고하면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는데 이런 호칭은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시에 정탐꾼 사건이 언약의 상대방인 이스라엘의 언약적 배반인 것을 가리킬 것이다.(19-46절) 여기서 특이한 것은 모세가 정탐꾼 사건을 회고하면서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마치 출애굽2세대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언약배반의 사건인 정탐꾼 사건의 당사자가 출애굽1세대일 뿐 아니라 동시에 지금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출애굽2세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1세대의 죄악에 출애굽2세대도 연루되었다거나 책임이 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출애굽1세대와 출애굽2세대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출애굽1세대와 출애굽2세대는 모두 동일한 언약백성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출애굽1세대의 언약배반에도 불구하고 출애굽2세대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는 것은 결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인한 것이다.
신명기 2장
정탐꾼 사건이 먼 과거의 회고라면 출애굽2세대가 가네스 바네아를 떠나 세렛 시대를 건너 요단 동편으로 향하는 여정에 대한 회고는 가까운 과거에 대한 회고다. 전자가 출애굽1세대와 관련된 회고라면 후자는 출애굽2세대가 직접 경험한 일에 대한 회고다. 그 회고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이야기는 에돔, 모압, 암몬 땅을 지날 때 그들이 길을 내주지 않더라도 그들과 싸우거나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출애굽2세대는 길을 우회하여 요단 동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에돔 땅은 하나님이 에돔의 조상 에서에게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이고, 모압 땅과 암몬 땅은 그들의 조상인 롯에게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이었다.(4-23절) 둘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길을 막는 헤스본 왕 시혼 및 바산 왕 옥과 싸워 이스라엘이 대승한 사건이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이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니지만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을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25절-3장11절). 모세가 출애굽2세대를 향해 이 두 사건을 회고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주 오래 전에 에서와 롯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스라엘이 그들과 싸우서 그 땅을 빼앗는 것을 막으셨다면, 하나님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확실한 일임을 모세는 이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백성이 아닌 에서와 롯에게 하신 약속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언약벡성인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인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에서 이긴 이야기도 마친가지다. 이스라엘의 앞 길을 막는 아모리 족속을 이기게 하시고 약속하지 않았던 그들을 땅을 주셨다면, 가나안 족속을 이기게 하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실 것을 너무도 당연하고 확실함을 모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장의 회고가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충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2장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1장과 2장에 나타난 두 회고에는 이스라엘의 언약배반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두 이야기가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다.
신명기 3장
이어서 모세는 뜻밖에 얻게 된 요단 동편 땅을 므낫세, 루우벤 ,갓 지파에게 기업으로 배분한 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역시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하고 출애굽2세대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땅도 이렇게 이스라엘의 일부 지파에게 주신다면 하물며 약속한 땅을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한다. 왜냐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12-22절)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출애굽2세대 때문에 자신에게 진노하심으로 자신은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름다운 땅을 보지 못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이나 그 책임을 출애굽2세대들에게 돌리려는 의도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염려와 근심을 나타낸 것이다.(23-29절) 광야40년 동안 이스라엘의 패역함과 언약적 불순종을 질리도록 체험한 모세이기에, 그는 광야에서 보다 더 심각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할 이스라엘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출애굽2세대를 향한 모세의 간곡한 교훈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비록 자신은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출애굽2세대가 자신의 교훈을 따라 그 땅에서 언약벡성다운 삶을 살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모세는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4장
그러므로 모세는 자신이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이 듣고 준행하라고 명령한다. 그리해야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얻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하셨지만 약속의 땅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출애굽1세대의 정탐꾼 사건은 이 진리를 잘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언약백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는 언약적 삶을 살게하기 위함이다. 모세가 지금 규례와 법도를 다시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출애굽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함이다.(1-5절) 이스라엘이 그 규례와 법도를 지킬 때, 그것은 여러 민족 앞에서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 될 것이다. 이방의 족속들이 이스라엘이 준행하는 규례를 듣고 말하기를 이 위대한 나라는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듣고 행할 때, 그들은 이방나라들이 알지 못하는 지혜와 지식을 가진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6-8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에서 언약을 맺으시며 가나안 땅을 주시는 목적이다. 하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고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도구로 삼으시려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창12:2-3) . 그러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후손인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해야 한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민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18:17-18) 그래서 모세는 기도할 때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하시는 큰 나라가 이스라엘 밖에 어디 있으며,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이스라엘 외에 어디있으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이기에 모세는 이스라엘은 스스로 삼가며 그 마음을 힘써 지키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고 그것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그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당부한다. (7-9절) 그러면서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던 장면을 회고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언약을 하나님이 돌판에 친히 쓰신 십계명과 동일시한다. 엄밀히 말해서 언약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십계명은 이 관계맺음에서 비롯된 언약법이므로 언약과 언약법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모세는 언약과 언약법을 동일시 함으로써 그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광야에서 주신 모든 규례와 법도는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전제로 하여 주신 것이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그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 공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약속의 땅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10-14절) 이어서 모세는 십계명 중에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특정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이미 경험한 바알브올 사건에서 보듯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형상화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나안의 바알이든지 아세다롯이든지 이방신의 특징은 예외없이 그 신을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이신 여호와는 형상화될 수 없는 신이시다., 그래서 형상화가 엄격히 금지된 것이다. (15-19절) 물론 하나님이 모든 형상화를 금하신 것은 아니다. 성막제도와 제사제도는 이스라엘 종교의 정교한 형상화다. 그러나 이 제도들이 형상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였다. 모세는 다시금 자신이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기 못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출애굽2세대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모세는 만일 그들이 형상을 만듦으로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며, 그 땅에서 쫒겨날 뿐 아니라 이방에 흩어져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21-28절) 모세는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비록 이스라엘은 환란을 당하더라고 종국에는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의 말씀을 청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희망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다. (29-31절) 모세는 다시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에게 친히 임하시어 언약을 맺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요 여호와 외에는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살게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은 없는 줄 명심하고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때, 이스라엘은 복을 받고 그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게될 것이다.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32-40절) 이어서 모세가 요단 동편에 도피성을 설치한 사실을 짧막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원래 도피성 규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시행해도 되는 것이지만 모세는 미리 요단 동편 땅에세 이 규례를 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 아닌 곳에서도 규례와 법도를 준행해야 한다면 약속의 땅에서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이다. (40-43절)
신명기 5장
이제 4장 44절부터 모세의 본격적인 고별 설교가 시작되고 이것은 28장 마지막까지 길게 이어진다.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출애굽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행할 율법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 설교의 중심은 율법이고 증언이며 규례와 법도라고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모세가 율법을 선포하는 장소가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 그리고 바산 왕 옥의 땅을 빼앗은 요단 동편이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지금 이스라엘 출애굽2세대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시점임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약속하시 않은 땅도 주셨다면 약속한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래서 모세 설교의 핵심은 가나안 땅에 어떻게 들어갈 것이냐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율법에 순종하는 언약적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이르길 자신이 지금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신이 지금 선포하는 율법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을 때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세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지금 출애굽2세대의 조상들 즉 출애굽1세대와 세운 것이 아니라 오늘 살아있는 출애굽2세대와 맺은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의 어느 특정 세대와만 맺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고 오는 모든 세대와도 맺은 언약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모세는 그 언약을 상기하면서 출애굽2세대에게 그 언약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당시에 출애굽2세대는 대부분 어렸거나 태어나지 않았지만 모세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에 그들도 동참한 당사자들임을 말하고 그래서 그들에게 시내산 언약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세는 바로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졌던 십계명을 선포한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의 핵심이 바로 십계명임을 의미한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서 나온 언약법이기에 그것은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무엇인자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대표하는 선언이다.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행동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먼저 선포되고 이어서 주어지는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언약적 신실함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시므로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정신인 것이다. 처음 3가지 계명은 사실 하나의 계명을 구성한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신실함의 출발이며 토대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이어지는 여호와를 형상화하지 말라는 명령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은 이 첫번째 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이방신들의 특징은 거의 예외없이 그 신을 형상화하며 자신들의 복을 구하기 위해 신들의 이름을 반복하여 불러대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안식일 계명은 그 조건절의 내용이 출애굽기와 다르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으므로 이스라엘도 안식해야 한다고 한 반면에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므로 이스라엘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 계명의 조건절의 내용이 달라진 것은 아마도 출애굽2세대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그러니까 모세는 지금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출애굽2세대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으로서 출애굽 사건을 안식일 계명의 조건절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출애굽기 16장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질 때이다. 이 때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고 그 대신 제6일에 갑절의 만나를 거둘 수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먹고사는 문제가 이스라엘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신앙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죽어라고 일해야먄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던 고대 근동의 열악한 삶의 여건에서 일주일에 하루를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에 아마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 계명은 단지 휴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안식일 계명의 조건절로 출애굽 사건이 언급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인도하여 내셨다면 당연히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1,2,3,4 계명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당한 반응으로서 요구되는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5,6,7,8,9,10 계명은 어떠한가? 그 계명들의 공통점은 언약 공동체 안의 이웃에 대한 신실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 윤리 이전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언약적 신실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과 동일한 차원에 있음을 의미한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듯이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은 이웃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웃에 대해 신실하지 않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마지막 10계명에서는 탐심을 금하고 있는데 이것은 율법준수가 외적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임을 시사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시내산 언약과 언약법에 대한 모세의 선포는 언약법 준수에 대한 간곡한 당부로 마무리 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들어가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율법을 지켜 행하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하신 도를 행해야만 그들이 살 것이요 복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며 가나안에서 그들의 날이 길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6장
모세는 출애굽2세대에게 시내산 언약을 회고하면서 그 언약의 핵심인 십계명을 선포했다. 그리고 출애굽2세대에게 자신이 말한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비록 모세는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자신이 가르친 규례와 법도가 바로 출애굽2세대가 그 땅 들어가서 지켜 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규례와 법도를 지켜 그들의 날이 장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율법을 지켜 행할 때 그들의 날이 그 땅에서 장구하며 번성하게 될 것이다.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이며 그들이 그것을 행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그들을 통해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 그리고 언약의 핵심인 언약법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울법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한 것이며 그 언약은 지극히 인격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이지 복종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발적으로 율법을 행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이고 바로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날 때 바로 하나님나라가 그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서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하는 이유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며 설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 이것이 바로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유일하고 강력한 동력이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가 유일하시다는 의미는 단순한 숫자적 유일의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언약적 의미의 유일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는 배타적인 상호 사랑을 전제한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타적으로 사랑하시며,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근본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언약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고 행동이며 삶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명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지켜 행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유일한 언약관계에서 출발하여(4절) 그 다음이 하나님 사랑이며(5절), 하나님 사랑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새기고 행하는 것이란 의미다. (6-9절)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스라엘이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시란 사실이다.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대표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스라엘도 언약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역사를 기억한다면, 즉 여호와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섬겨야 하며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지면에서 멸절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후일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켜 행하라 하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 바로 가나안 땅에서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항상 복을 누리고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의 의로움, 즉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7장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해야 하며 그들과 어떤 화평의 언약도 맺지 말아야 하며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유혹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사 갑자기 이스라엘을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진멸이 경고되고 있는데, 이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는 것은 곧 언약백성으로서 언약 배반이며 결국 언약백성으로서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제단을 헐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조각한 우상들을 불살라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상 만민 중에서 하나님이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로 하여금 우상으로 가득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고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족속에 대한 철저한 배제는 이스라엘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 불기피한 배제였다. 이스라엘이 바르게 세워져야만 그들을 통해 만민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족속에 대한 철저하 배제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적 배제라고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신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도구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계명을 지켜 행할 때 그들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것이나 그들이 불순종할 때 진노하시는 것은 모두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여호와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인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혹은 미워한다든지 하는 것이 언제나 율법과 관련됨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이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즉 언약에 신실하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관건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살아야 할 언약적 삶이다. 이스라엘은 과연 자신들이 가나안 족속을 쫒아낼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하거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그런 염려와 두려움 대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역사와 거기서 나타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과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신명기 8장
모세는 출애굽2세대에게 반복하여 하나님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하라고 가르치면서 광야 40년 세월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모세는 광야 40년이란 세월이 단순히 출애굽1세대에 대한 징벌이 이루어진 허무한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낮추시며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지 여부를 시험하신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의 세월은 참으로 팍팍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거주할 집도 없고 먹을 양식과 물도 없는, 말 그대로 광야이기에 거기서 이스라엘의 생사는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을 수 밖에 없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로 그들을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상징이었으며,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이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뿐임을 알게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광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땅이다. 그러나 그곳에 골짜기든지 신자든지 시내와 분천이 흐른다는 것은 그곳은 물이 저장되지 않는 땅이므로 농사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달렸음을 의미한다. 그곳은 비옥한 땅이지만 애굽처럼 강이 흐르고 있어서 항상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늘에서 제 때 비가 와야만 먹고살 수 있는 땅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먹고살 수 도록 하시는 것이다.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며 재물이 풍부해질 때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모세는 반복해서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당부한다. 여호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잊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일에서 나타난 그분의 언약적 신실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의 인도하신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나타난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이스라엘은 잊지 말고 이스라엘도 여호와께 언약적 신실함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다면 이스라엘도 가나안 족속과 마찬가지로 멸망을 당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여부는 그들이 현재적으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사는데 있는 것이지 이미 맺은 언약에 달린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언약은 현재의 언약적 삶을 위한 것이다.
신명기 9장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 족속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스라엘은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서 가시며 그들을 쫒아내고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알 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의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의 악함때문이다. 광야 40년의 세월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목이 곧은 백성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드러낸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황금송아지 사건을 거론한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직후에 벌어진 이 사건은 언약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언약 배반의 행위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려고 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가 전적으로 언약적 신실함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언약 배반은 곧 자신들의 존재의미의 상실을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그리고 출애굽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거론하며 여호와께서 진노를 거두시길 간구하였는데, 이는 언약 회복의 희망이 오직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신명기 10장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다시 언약을 회복하셨다. 6-9절 사이에는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듯한, 아론이 죽은 이야기 그리고 레위지파를 세워 여호와를 섬기게 한 일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는 아마도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파괴된 언약이 하나님의 자비로 전격적으로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 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요구는 이스라엘을 강압하거나 그들에게 굴종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발적인 순종을 기대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될 것이며 그들이 받은 복이 천하만민에게 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 방식인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천하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목을 곧게 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 여기서 마음의 할례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원래 할례란 언약의 증표로서 육체에 행하는 것이었는데 모세가 그 육체의 할례를 마음에 행하라고 한 것은 결국 언약을 잊지 말고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음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자신이 언약백성임을 자각할 때 그에 걸맞는 언약적 삶도 가능한 것이다.
신명기 11장
이 부분은 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모세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결론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가 주신 규례를 항상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의 명령을 항상 지키는 것이 동일시되고 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그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 즉 출애굽 사건과 광야에서 인도하신 일을 잊지말고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은 한마다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행하신 신실하신 행동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규례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당한 반응으로 요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언약적 신실함인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언약적 신실함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행하여 다시 언약적 사랑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킬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한 땅을 주실 뿐더러 그들이 그 땅에서 장구하고 복된 삶을 살게하실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 가나안 땅은 물론 이스라엘이 방황하던 광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땅이지만 그 땅은 애굽과 달리 물이 저장되지 않는 땅이다. 그렇기에 그 땅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한 때에 내리지 않으면 풍요를 누릴 수 없는 땅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애굽과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지해야 하는 땅이다. 광야에서는 물론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의 삶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돌보심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애굽과 같은 땅이 아니라 가나안같은 땅을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삶이 전적으로 여호와께 달려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만일 이스라엘이 마음에 미혹되어 다른 신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이요 땅이 소산을 내지 않으므로 이스라엘은 속히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겨야 하며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랑하고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한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백성들을 두려워하거나 그 땅을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시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신실하게 행할 때 또한 사랑으로 갚아주신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는 지극히 쌍방적이고 역동적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신실함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에 복과 저주를 두신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지만 반대로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할 것이다. 복이든 저주든 그것은 모두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다. 복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라면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인 것이니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그리심 산과 에발산에서 자신이 선포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한다. 이는 모세가 자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자신이 선포한 복과 저주를 이스라엘이 기억하고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기를 바란 것이다.
신명기 12장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26장까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법도와 규례가 주어지고 있다. 모세는 자신은 비록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출애굽기에는 20장에서 십계명이 주어지고 21-23장에 걸쳐 세부법이 주어지고 있는데 세부법은 별다른 법이라기 보다는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샘플로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과 더불어 세부법도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있다. 여기서 모세는 신명기 4장에서 출애굽기 20장에서 주어졌던 십계명을 다시 반복하여 출애굽2세대에게 선포한 후에 이제 12장부터는 십계명에 근거한 세부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출애굽기에서 세부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인데 반해 여기 신명기에서는 그렇지 않고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법에 근거하여 자신이 연구하고 생각해낸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세부법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세부법이 모세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미 명령하신 법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모세가 그 법정신을 따라서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가를 깊은 숙고끝에 가르친 것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법의 출처는 하나님이지만 그 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은 사림이 구체적인 상황으로 그 법 정신을 가지고 들어가 적용하는 일이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모세는 12장에서 십계명의 1,2,3 계명과 관련된 구체적인 적용과 실천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인다. 첫째로 모세는 가나안 족속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산당과 그것의 주상들을 파괴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 것을 파괴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에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여호와를 섬겨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두번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택하실 한 장소에서 예배드릴 것을 제시한다. 수시로 이동을 해야 하는 광야에서는 성막이 이동식 천막 형태로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예배와 제사가 이루어졌지만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하게 되면 성막도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되어 위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세는 그곳의 구체적인 장소를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을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모세의 제안은 가나안 땅에서도 여호와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일은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제사를 위하여 그곳에 가는 일이 거리상의 문제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제사를 드리는 일과 관계없이 고기를 먹고 싶을 때는 각 성에서 가축을 잡아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고기를 피채 먹는 것만은 금했다. 여기서 주어진 상황에 맞게 율법을 매우 현실적이고 유연하게 적용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나안족속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않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결코 그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신명기 13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벌어질 수 있는 일로 예상되는 것이 자칭 선지자나 묵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가나안 족속의 영향을 받아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자들일 것이다. 모세는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그런 자들은 반드시 죽여서 공동체 가운데 악을 제거하라고 단호하게 명한다. 설령 그들이 형제나 자녀나 아내나 친구일지라도 불쌍히 여겨 덮어 숨기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만일 그런 자들의 유혹에 어느 한 성읍이 넘어가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 성읍 전체를 진멸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앞에 신실한 언약백성으로 사는데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한다면 이스라엘은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세는 언약을 배반하는 이런 악에 대해서는 대단히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는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셨으로 이스라엘도 여호와께 신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명기 14장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자녀요 여호와의 성민이며 지상 만민 중에서 여호와가 자기 기업으로 택한 백성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아마도 이것은 가나안족속들의 죽은 자에 대한 애도방식이었던 것 같다. 모세는 그들의 애도 방식을 따르지 말라고 명하면서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면에서 가나안족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족들의 모든 풍습을 배척하고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모세는 레위기 11장에서 주어진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규례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지켜 행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정하고 부정한 짐승의 규례는 이스라엘의 먹고사는 일상의 삶에서 구별된 삶을 살게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 듯 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기에 그 자체로 선하다. 어떤 짐승이 그 자체로 정하고 부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정하고 부정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구별하기 위해 정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아닌 가나안족들에게 그런 구별은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자기 소견을 따라서 먹고 마시며 살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근거한다. 이스라엘이 어떤 것은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식물 자체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선악과 금령이 그랬듯이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 그것 외에는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먹는 문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가나안족들과 구별하시며 그들에게 언약백성으로서의 순종을 가르치시려고 한 것이다. 이어서 모세는 십일조 규례를 가르친다. 가나안에 정착 후 이스라엘은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 그러나 사실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다. 레위인은 생후 1개월된 남자를 계수하여 이스라엘의 생후 1개월된 장자의 수와 일치시킨다. 그리고 레위인이 부족한 경우는 그 부족한 수만큼 속전을 바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레위인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여호와께 봉사의 직무를 행하는 존재이며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께 전적으로 바쳐진 존재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인의 존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에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는 십일조를 내어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지지해야 한다. 그래서 모세는 반복하여 레위인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매 3년 끝에는 추가로 십분의 일을 더 내어 레위인은 물론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먹이라는 규례가 주어지는 점이다. 이런 것을 보아도 십일조의 정신은 종교적 규례 이전에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공동체 규례임을 알 수 있다.
신명기 15장
매 칠년 끝에는 면제하라는 면제년 규례는 레위기 25장에서 주어진 안식년 규례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인다. 아마도 모세는 안식년이 희년 규례로 발전한 것을 보면서 안식년 규례를 면제년 규례로 발전시킨 것 같다. 그러니까 면제년 규례는 하나님이 직접 주신 규례가 아니라 모세가 안식년의 법정신을 따라서 안식년을 면제년 규례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희년 규례가 그렇듯이 면제년 규례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 가난해지더라도 그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하는 하나님나라 공동체인 것이다. 면제년의 정신은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는 것이며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꾸어주는 것이다. 땅에서는 가난한 자가 언제든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문제다. 히브리 종에 대한 규례로 면제년 규례와 그 법정신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으로 팔리는 것도 결국은 가난의 문제다.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히브리 종을 해방해 주어야 하면 빈손으로 가게하지 말고 후하게 주어 내어보내야 한다. 가난으로 인해 동족에게 종으로 팔린 신세가 고착된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결국 신분제 사회로 고착될 것이고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등한 관계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면제년 규례든 히브리 종의 규례든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공동체로 유지되고 발전되는데 필수적인 규례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신세에서 건져 내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맺은 언약공동체인 것을 기억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난으로 인해 종살이 하는 자들이 업세 해야 한다.
신명기 16장
이미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주어졌던 3대 절기 규례에 대한 가르침이다. 유월절은 특별히 출애굽 역사와 직결된 축제로서 이 축제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연스레 자신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 곧 초실절에서 일곱 주가 지난 절기기 칠칠절이다. 이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대로 힘을 다하여 예물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이 날에는 가족과 노비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여야 한다. 칠칠절 규례 역시 출애굽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복을 주어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유월절이 출애굽 자체를 기억하는 절기라면 칠칠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에 감사하는 절기일 것이다. 초막적은 한 해의 모든 소출을 마지막으로 거두어 들인 후에 지키는 절기로서 칠칠절과 마찬가지로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기는 절기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번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깨 나아오되 각 사람이 받은 복을 따라 힘대로 드려야 한다. 그러니까 이 3대 절기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두 모여서 여호와 앞에 나아와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공동체 축제인 셈이다. 이 3대 절기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있다. 유월절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공동체 축제라면 칠칠절과 초막절은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언약적 자비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언약축제인 것이다. 결국 3대 절기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을 표현하는 공동체 축제라고 볼 수 있다.
신명기 17장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가장 우려되는 일이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일월성신에서 절하는 자가 공동체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다. 모세는 단호하게 그런 자들을 죽여서 공동체 가운데 악을 제거하라고 명한다. 그들은 언약을 배반하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언약에 신실한 공동체로 유지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를 죽일 경우라도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판결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분쟁이 생겼을 경우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들의 판결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제사장이 왕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되 제사장을 통해 그 판결을 주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스리는 왕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그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나라와 구별되는 점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후 다른 민족들의 영향을 받아 왕을 요구할 경우를 예상하고 있다. 그럴 경우에 왕은 반드시 히브리 동족중에서 세우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왕된 자는 이방 민족의 왕들 처럼 병마를 많이 두거나 아내를 많이 두어서는 안된다. 그가 반드시 할 일은 율법을 자기 옆에 두고 읽어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며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해야 한다. 그러니까 설사 이스라엘이 인간 왕이 세워졌다고 하더라도 그 왕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 율법의 규례를 따라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왕이 있든 없든 제도에 관계없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은 오직 여호와뿐이시다.
신명기 18장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택하여 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항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한 지파다.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된 지파다. 그러나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보다 특별하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라 레위지파는 곧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지파일 뿐이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된다. 이스라엘 전 지파의 장자들의 수와 레위지파의 일개월 이상된 남자의 수를 동수로 맞추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도를 보여준다. 레위지파에게 기업이 주어지지 않고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헌신한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여호와께 전적으로 드려진 존재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업이 주어지지 않은 레위지파를 지지하는 일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레위지파의 존재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은 그들이 그 땅에서 언약공동체로서 언약적 싦을 살게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그 민적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특히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니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그 땅에서 쫒아내신 이유는 바로 그런 가증한 일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은 그런 자들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자들 그들 가운데 세워주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세우지 않은 거짓 선지자들도 일어날 수 있으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말을 분별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간주되어 한다.
신명기 19장
도피성 규례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될 것인데 그 취지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비의도적인 살인에 대한 배려로 주어진 것이 도피성 규례다. 그러나 의도적 살인의 경우에는 도피성 규례가 적용되지 않는다. 도피성 규례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단순히 개인에게 적용되는 윤리가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적 윤리임을 잘 보여준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공동체가 어떤 노력과 준비가 필요한지를 이 규례는 잘 보여준다. 사람에게 죄를 정할 때도 한 사람이 아닌 두 세 증인의 증언으로 확정하는 것이나 위증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역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떻게 공동체 가운데 실천할 것인가를 보여준 사례이다. 이렇게 구약의 계명들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 이전에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예민하게 적용되어야 할 규례들이었다.
신명기 20장
적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군대의 지휘관이 전쟁에 참여하기에 적당치 못한 사람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은 전쟁에서 승패가 사람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의 도우심에 달린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이런 규례는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면 과연 전쟁에 참여할 자가 있을 자가 남아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규례도 도피성 규례와 마찬가지로 억울한 죽음을 방지하려는배려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새 집을 짓고 낙성식도 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 이런 자들이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관련하여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는 명령은 충분히 납득이 되지만 유독 가나안 족속에 대해서는 화평이 아니라 진멸을 명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진멸을 명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이스라엘이 본받음으로 여호와께 범죄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르지만 남녀노소와 심지어 가축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문으로 남는다. 유독 가나안 족속에게만 이런 가혹한 진멸을 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에 어긋난다는 우리의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 오경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는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관련이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과 다른 구별된 민족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며 이런 이스라엘을 통해 장차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가나안 족속의 진멸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가나안 족속에 대한 차별이거나 그들이 다른 족속보다 특별히 더 악하지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의 죄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고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선악과 사건이나 노아홍수 사건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사건 등은 사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을 이루는데 있지 인간의 생명 자체가 긍극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신명기 21장
살인자가 밝혀지지 않는 살인사건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거짓증거하지 말말라는 계명을 공동체 안에서 예민하게 적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범인이 잡히지 않은 살인 사건은 응당 억울한 죽음일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는 원한이 맺인 사건일 것이다,. 이런 사건이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다면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의심과 원망으로 인해 공동체 내부에 갈등이 초래될 것이 당연하다. 이 경우는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을 대표해서 자신들이 이 피를 흘리지 않았고 살인자를 본적도 없다는 공적인 증언을 제사장 앞에서 해야한다. 그리고 암송아지의 목을 꺾음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대신하게 된다. 만일 그 성읍 장로들이 거짓증언을 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성읍 전체는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 증언이 참되다면 비록 살인자는 밝혀지지 못했지만 억울한 죽음의 원한이 공동체 갈등으로 증폭되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 22장
아내의 순결의 문제나 강간이나 간음에 대한 규례 역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다시금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개인의 윤리나 도덕 차원이 아니라 언약공동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워나길 것인가의 차원임을 발견하게 된다. 간음이란 문제 역시 나 개인에게만 적용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복잡다단한 상황 가운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냐는 문제인 것이다. 아내를 미워함으로 아내에게 처녀가 아니라고 누명을 씌우는 경우, 실제로 아내가 처녀가 아님이 밝혀진 경우는 합법적인 부부 간에 해당한다. 간음의 경우도 그것이 성읍 안에서 일어난 경우와 인적이 드문 들판에서 일어난 경우를 구분하여 판결하고 상대 여자가 약혼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도 판결이 달라진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 삶에 실천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고 예민할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인간 삶의 자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신명기 23장
여호와의 총회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특별히 3대 절기에 중앙성소에 모이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대표하는 성인 남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자나 사생자는 언약백성에서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단언하는데 반해 애돔이나 애굽 사람들은 허용되고 있다. 이런 차별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압이나 암몬 못지 않게 에돔이나 애굽도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괴롭게한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아마도 그 결정적인 차이는 이어지는 4-5절의 설명에서 암시되듯이 암몬과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고 결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을 섬기게 유혹함으로써 언약을 배반하도록 만들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놀라운 것은 비록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거부되었지만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에돔이나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인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천하만민에게 미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총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인 것이다.
신명기 24장
이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경우에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삼을 수 없다는 규례가 등장한다. 이혼도 허용되고 재혼도 허용되지만 이혼 한 후에 재혼 한 경우는 다시 전 남편과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혼한 아내가 재혼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전 남편과 다시 결합하는 것은 허용되었을 것같다. 이 규례의 핵심은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 경우 전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런 일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이혼과 재혼에 대한 이런 규례는 아마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적 신실함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반영한 규례인 듯 하다. 이혼한 아내가 재혼을 하지 않은 경우 전 남편과의 언약관게는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재혼한 경우는 그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혼 그 자체는 언약의 중단이지만 재혼은 언약의 파기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혼으로 인해 언약관계가 중단된 경우는 다시 회복될 수 있지만 재혼으로 인해 언약관계가 파괴된 경우는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혼은 다른 언약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전 남편과의 언약은 파괴되고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혼한 여자는 전 남편과 다시 결합하여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규례는 남녀관계에 대한 실용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언약관계에 신실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규례라고 볼 수 있다. 결혼, 이혼, 재혼 등 남녀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한 번 맺은 언약관계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신실해야 함을 이 규례는 잘 가르쳐준다. 이어지는 규례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배려할 것을 엄중하게 명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정의 차원이기 이전에 언약공동체 안에서 이뤄져야 할 언약적 자비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를 이미 체험하였기에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약한 자들에게 언약적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종되었던 일과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속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명하신다.(18절) 그래서 먹고사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맷돌을 전당물로 잡아서는 안되며(6절) 이웃에게 꾸어줄 때에 꾸는 자가 전당물을 선택하도록 하여야 한다.(10-11절)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의 품삯은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어서는 안된다. (15절) 특별히 객이나 고아나 과부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17-21절)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22절)
신명기 25장
여기서는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로서 죽은 형제의 아내를 아내로 취하여 죽은 형제의 자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소위 형사취수법이 등장한다. 물론 이 경우는 죽은 형제가 아내가 있는데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규례는 혼인이나 재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손을 이어 그 가족의 혈통을 잇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인 것이다. 이것은 가족의 유지와 함께 기업의 유지와도 관련된다. 만일 죽은 형제가 아들이 없다면 죽은 형제의 기업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죽은 형제의 아내가 같은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의 남자와 재혼을 한다면 역시 기업 분배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행하도록 엄중히 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죽은 남편의 형제는 공동체 내의 수치를 감수할 각오라면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명예를 중시하는 고대 근동에서 공동체 내의 수치를 감수하고 까지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신명기 26장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토지 소산의 첫 수확을 거두었을 때, 그들은 그 맏물을 중앙성소로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단에 드려야 한다. 이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이스라엘의 감사함의 표현일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땅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처음으로 수확한 곡식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9-10절) 그런데 이렇게 첫 수확 곡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아뢰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400년 역사를 회고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언약적 신실하심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수확한 곡식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행위로서의 감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 그리고 가난한 나그네와 함께 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누고 즐거워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공동체 안의 레위인과 객과 과부와 고아를 먹여 배부르게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다. 약육강식과 강한 자의 독식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나안 땅에 새롭게 세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는 오히려 가난하고 약한 자가 부하고 강한 자와 더불어 먹고 즐기며 화평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한다면 즉 명하신 대로 다 행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26장은 12장부터 시작된 세부법이 끝나는 마지막 장이다. 그래서 26장이 언약법의 수여를 모두 마친 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서로를 향한 다음과 같은 쌍방간의 언약적 선포로 마무리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 나는 너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 여호와다. 그러므로 오늘날 너희에게 이 명령과 규례를 좇아 행하라고 명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할지어다.
이스라엘: 여호와는 우리와 언약맺은 하나님이시오니 우리가 주의 모든 길에 행하겠사오며 당신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켜 행하고 순종하겠나이다.
하나님: 나 여호와는 너희에게 약속한대로 너희를 나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를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게 하여 너희가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약속한대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신명기 27장
이제 모세의 언약법 제시는 모두 끝났고 남은 것은 언약 예식이다. 그런데 모압 언약을 완결짓는 언약예식은 오단을 건너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압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달리 약속의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압 언약은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며 따라서 그 언약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시내산 언약이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광야에서 체결되었다면 모압언약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뤄지는 언약의 갱신이다. 그래서 모압언약을 완결짓는 언약 예식은 요단을 건넌 후에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언약체결 예식에서 선포되는 핵심 선언은 9절과 10절이다. 모압 언약 예식을 행함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백성이 되었고(9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해야 한다.(10절)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은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언약 관계에 기초한 언약법이 된다. 언약체결 예식은 이스라엘의 지파가 각 6지파씩 나뉘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각각 저주와 복을 선포하고 백성들이 아멘으로 응답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율법을 기록한 돌이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산에 세워지고 29장에서 언약체결의 모습은 에발산에서의 저주 선포가 강조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출애굽이후 이스라엘의 지속적이 불순종의 역사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반영된 것인 듯하다. 그런데 선포되는 저주의 내용은 십계명에 기반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과 섞여 살 때 범하기 쉬운 죄를 중심으로 기술된 것 같다. 특히 강조되고 있는 죄들은 당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가장 흔하게 일어났을 것이고 그래서 특별히 저주의 목록에 우선적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신명기 28장
여기서는 축복의 짧은 목록(1-13절)에 이어 저주의 긴 목록(14-65절)이 등장한다. 이 저주와 축복의 목록은 아마도 27장의 언약체결 예식의 일부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축복의 목록은 축복의 목적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백성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백성으로 세워질 때 바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이유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세워 자기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고(9절) 천하 만민이 이스라엘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10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이뤄지려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9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모든 저주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15절).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겨 악을 행하는 것은 여호와를 잊는 것이고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다.(20절) 저주의 목록은 길기도 하려니와 그 내용은 잔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저주는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고 절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으로 돌아와 순종하는 백성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열심에서 나오는 언약적 징벌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심으로 그들이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언약백성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저주를 내리지 않으실 것이고 다른 이방족속들처럼 내어버려 두실 것이다. 그러므로 저주의 목록의 잔혹함과 심각함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반영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심각함과 그들의 완악함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이다.(58절)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지는 것은 그 땅에서 언약백성 다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었다고 할지라고 불순종한다면 그들을 그 땅에서 망할 것이며 그 땅에서 뽑힐 것이다.(63절)
신명기 29장
이렇게 해서 모압 언약에 관한 모든 말씀은 끝이 났다. 그래서 29장 1절은 신명기 4장 44절에서 시작된 모압 언약의 모든 율법 선포가 끝났음을 말하고 있다. 이 모압 언약은 호렙에서 출애굽1세대와 세우신 언약 외에 모압 땅에서 출애굽 2세대와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다. 모압언약의 언약의 말씀은 모압 땅에서 세워졌지만 그 언약예식은 약속의 땅에서 이뤄짐으로써 그 법적인 효력은 약속의 땅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큰 시험과 이적괴 기사를 눈으로 보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당시에는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3-4절) 그것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바로 광야 40년의 시간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심으로 그들의 옷이 낡아지지 않게 그들의 신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만나를 주심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러니까 출애굽의 이적의 의미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다는 사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깨닫게 된 것이다.(5-8절) 그러므로 이제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다 알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9절)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는 목적은(12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 맹세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맹세였다.(13절) 그러므로 이 언약과 맹세는 출애굽 2세대와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있지 않은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에게도 세우는 것이다.(14-15절)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리고(25절) 다른 신을 섬기고 절한다면(26절) 그들은 저주를 받고 그 땅에서 쫒겨날 것이다.(27-28절) 하나님의 율법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났으니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함이다.(29절)
신명기 30장
이렇게 복과 저주를 진술한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복과 저주를 기억나게 하려한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될 때 그들은 이 복과 저주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1절) 그럴 때 이스라엘은 절망하지 말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한 모든 재앙은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할 때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며 흩어진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3절) 그리고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 땅에서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5절) 또한 하나님은 돌아온 그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베푸심으로 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함으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6절) 문제는 이스라엘이 먼저 돌아와야 한다. 이스라엘이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시면 품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언약을 떠난 이스라엘을 저주하신 하나님은 또한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언약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결코 싫어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결코 어려운 것도 이스라엘이 미치지 못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11절)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12-13절) 오직 그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가까이 있으며 그들의 입에 있고 그들의 마음에 있으므로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1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데 있고 이것은 곧 그들이 언약에 신실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과 복 그라고 사망과 화를 이스라엘 앞에 두셨으며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을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19절) 그 선택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며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20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바,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다.
신명기 31장
모세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지만 (2절)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널 것이다.(3절)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먼너 건너가실 것이란 말은(3절) 약속을 만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열심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할 일도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그 약속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백성들의 믿음을 통해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하거나 가나안 족속 앞에서 떨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6절) 출애굽 1세대가 실패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요단을 건너 그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율법을 지켜 삶으로써 하나님나라 백성다운 삶을 건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매 칠년 면제년의 초막절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모인 가운데 율법을 낭독하라고 명령한다.(10-11절) 이 율법을 듣고 배움으로 그들은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 이것이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미래는 비관적으로 제시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그 땅에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고 하나님을 버리고 언약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6절)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실 것이며 얼굴울 숨겨 보이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 때 이스라엘은 말하길 이런 재앙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할 것이다(17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재앙이 내린 것이다. 그 재앙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언약적 징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재앙이 닥칠 때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그 결과 재앙이 내린 것임을,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노래를 지어 가르치게 하심으로 그 노래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되게 하라고 명하신다. (19절)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함으로 수많은 재앙과 환란을 당하게 될 때, 그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이 되어둘 것이다(20절)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기억함으로 자신들의 언약 배반으로 재앙이 임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전 오늘 이미 그들의 생각하는 바를 아시며 그들이 언약을 배반할 것도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오늘 이토록 열심히 모세를 통해 율법을 가르치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차피 이스라엘의 미래가 불순종으로 배반할 것이라면 오늘의 이런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오늘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순종을 명하심으로 또 다가올 재앙을 대비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심으로 미래에 이스라엘이 재앙을 당했을 때 그 재앙의 의미가 무엇이며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게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기에 역사 가운데 들어와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인간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인간은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계시해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 엎어지고 자빠지는 고통을 통하여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의미가 여기에 있고 신약 교회의 역사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는 하늘과 땅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데(1절) 이는 하늘과 땅으로 하여금 이 언약의 노래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인데, 그 교훈은 미치 하늘에서 땅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2절).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때,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고 화답해야 한다.(3절) 왜 하나님이 위대하시냐 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반석이시고 그가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완전하고 정의롭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이다(4절).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는 어리석고 지혜없는 백성이다.(5-6절) 하나님은 온 세상의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자기 분깃으로 택하시고(8-9절) 그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인도하시고 먹이셨다.(10-13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기고 잊어버렸다.(15-18) 그러므로 하나님을 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 얼굴을 숨기시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다.(19-25)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진멸하시거나 포기하시지 않는다.(26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27절) 비록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으나 이스라엘이 실족하기 까지 내버려두지 않으신다.(35절)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신원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36절) 그리하여 마침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줄 알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복수하시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41절) 그때 모든 민족들은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승리를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여 주실 것이다. 이렇게 모세의 노래는 끝난다.
신명기 33장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은 야곱이 죽기전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야곱이든 모세든 그 축복은 단순히 민족이나 혈육에게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믿음의 축복이었다. 그래서 그 축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며(2-3절) 언약법으로서의 율법을 주신 일을 먼저 언급함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율법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가진 가장 으뜸되는 보물이다.(4절) 율법은 이스라엘을 억합하기 위해 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보배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보물인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에 대한 축복이 특별히 강조되는데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율법에 순종하여 사는 일에 레위지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부모 형제를 떠나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키는 일에 헌신된 자들이다.(9절 사실 레위 자피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된 자들이다. 그래서 레위지파의 1개월 이상된 남자의 숫자와 이스라엘의 장자의 숫자를 일치시키는 규례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레위지파의 임무는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온전한 번제를 주의 재단 위에 드리는 것이다.(10절) 모세의 축복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다는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시려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며(26절) 이스라엘의 파난처가 되시며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시다.(27절) 그러므로 풍요로운 이 땅에서 이스라엘은 안전하 거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다.(28절) 이스라엘은 이렇게 복있는 백성이다. 왜냐하면 천한 만만 가운데 이스라엘처럼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 없기 때문이다.(29절)
신명기 34장
모세는 요단을 건너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구석구석 다 보여주신다.(1-3절)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모세는 비록 자기는 못들어가지만 이스라엘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땅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이기 때문이다.(4절) 모세의 염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언약을 배반할 일이었을 것이다. 모세는 자기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부패하여 율법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재앙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31장 29절) 모세는 자신이 살아서도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거역하였는데 하물며 자신이 죽은 후에는 얼마나 더 그리할까 염려했던 것이다.(32장 27절) 그러나 모세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그 하나님께 맡겼을 것이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광야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약속의 땅에 인도하셨듯이 동일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언약을 배반할지라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도하시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택하신 목적을 이루실 것을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되 것을 기대하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역할을 다 감당하고 죽는다. 그러나 그는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을 믿고 소명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갈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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