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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하나님나라의 비밀-스캇 맥나이트

하나님나라의 비밀 1장, 2장-스캇 맥나이트

2016-02-26 16:04:32


부제: 하나님나라 내러티브 그리고 교회의 비전과 사명: 지역교회의 급진적 사명으로 돌아가기

 

1 장 스키니진 스타일의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스키니진 스타일 관점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는 짐 월리스이다. 그는  개인구원과 사회변혁 모두를 포함하는 통전적 메시지로서의 복음은 하나님나라에 관한 복음이지 단지 속죄의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복음은 사회정의와 불가결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월리스에게 하나님나라는 개인구원에서 흘러나오는 사회정의 및 사회변혁과 상관이 있다. 또한 그에게 하나님나라의 일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일과 관련된다.  이런 스키니진 스타일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 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선한  사람들이(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공동선을 위해 공적 영역에서 행하는 선한 일을 의미한다.  결국 스키니진 스타일의 사람들이 보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하나님나라 라는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성서는 공동선을 위한 일을 결코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회운동가 제인 애덤스는 노벨 평화상을받은 최초의 미국 여성이었다. 그녀는 단호하고 가차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와 평화를 옹호했다. 제인은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교제라는 이상의 실현을 추구했다. 그녀는 사화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처럼 억압받고 무시당하고 주변화되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녀는 계급제로를 함축하고 있는 선행을 그만두고 보다 급진적인 의미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투쟁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녀는 예수의 도덕적 비전을 정의, 평화, 평등으로 이끌어 가도록 설계된 사회-정치저 승강장으로 사회화시켰다.  그녀는 예수의 비전은 세상을 정의와 평등, 평화로 재형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제인 애덤스에게 예수의 윤리는 세속적 유비들로 환원되며 예수 사건의 핵심들은(십자가, 부활, 구속, 중생, 교회, 심판 등)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조항들로 증발해 버린다. 그리고 문화는 기독교 신학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인간의 노력과 정치적 과정을 통해 구속될 수 있다고 간주된다. 결국 그녀에게 하나님나라의 일은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되며 선한 사람들이 공동선을 위해 공적영역에서 수행하는 선한 일이 된다.

 

 

2장 정장바지 스타일의 하나님나라

 

스키니진 스타일이 하나님나라를 공동선을 위한 공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행동으로 이해한다면 정장바지 스타일은 하나님나라를 인간 마음 안에서, 온갖 종류의 치유들 안에서, 그리고 공적영역에서 안에서 나타나는구속의 순간들로 축소시켜왔다.  정장바지 스타일의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와 관련해 두가지 질문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하나님나라는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과 하나님나라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은 하나님나라는 현재인 동시에 미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답은 하나님나라를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대답은 이론적으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게 만든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 정장바지 스타일의 대답은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에 있다고 대답한다. 구약성서에서 "나라" 라는 용어는 왕의 통치 그리고 그가 통치하는 영역, 두가지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가령 출애굽기 19장 6절(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라) 여기서 나라와 백성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단어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평행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라는 분명히 "한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가리킨다. 시편 45:6과 시편103편 19절은 나라가 통치와 영역 모두 가리킨다는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정장바지 스타일에게 하나님나라는 통치를 의미하지 영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구원하는 통치였다. 그래서 통치라는 단어는 구속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런 식의 결론으로 정장바지 스타일에게 하나님나라는 세상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와 능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속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어떤 장소나 공간이나 영역 혹은 경계와 왕과 성전을 갖추고 있는 어떤 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장바지 스타일에게 하나님나라는 지금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개인들을 구속하시는 추상적인 역학을 가리킨다. 그 결과 정장바지스타일에게 하나님나라는 아무데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게된다. 하나님니라는 구속이 발생하는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그것은 어떤 종류의구속인가?   정장바지 스타일에게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이 세상 속으로 깨치고 들어와 구원하고 회복시키고 화해시키며 치유를 일으키는 순간들로 요약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는 이런 방식은 너무 만연해 있고 너무 추상적이며 구체적 현실성이 너무 부족하다.

 

정장바지 스타일에서 역동적 구속이 나타나는 세번째 방식은 거의 스키니진 스타일과 유사하다. 그것은 구속을 문화적, 정치적, 지구적 측면의 공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이다. 정장바지 스타일에서 하나님나라 구속의 역학이 문화형성, 문화변혁에 관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들은 문화변혁이 곧 하나님나라 사역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칼 헨리, 앤디 크라우치, 제임스 스미스, 오스 기니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팀 켈러, 밀슬라브 볼프, 존 스텍하우스 등이다. 흥미로운 것은 헌터는 문화변혁에 동의하지만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그는 문화의 변화는 하향식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상향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좌파든 우파든 문화변혁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일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행동하는모든 복음주의자들은 문화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현명한 접근법은 공적 소동에서 물러나 신실한 증인이라고 부르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신실한 현존이라는 헌터의 전략은 오늘날 기독교 행동주의를 지배하는 변혁과 해방모델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보기에 문화를 변혁하려는 정장바지 스타일의 노력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능력에 훨씬 못미치는 목표일 뿐 아니라 이 문화라는 단어가 성서가 말하는 세상이란 단어를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예수는 세상을 변화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것은 일종의 세속성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었지만 타락으로 인해 구속되지 못하고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되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의 첫째가는 임무는 교회가 되는 것, 그래서 세상이 자신을 타락한 세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놀라운 말을 했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결코 반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었던 세상이 본래 되어야 할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이고자 하는 시도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3,4,5장- 스캇 맥나이트

2016-02-28 02:14:11


3장 하나님나라의 이야기

하나님나라에 대한 정장바지 스타일의 접근은 구속적 통치의 역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경우에 성서의 핵심 이야기는 개인들에 대한  것이고 각 개인의 위기는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 위기의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다. 반면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스키니진 스타일의 접근법은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그 세상의 목표에 참여하는 것이며, 아 경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대개 정의와 평화같은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장바지 스타일이나 스키니진 스타일은 각각 하나님나라에 대한 접근법은 다르지만 그 결과는 동일하게 어떤 사명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그 사명은 정장바지에게는 전도와 교회로 스키니진에게는 사회활동과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나라 신학은 반드시 성서적인 개념에 근거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의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성서안의 전통적인 구원 이야기의 모델은 창조(Creation)-타락(Fall)-구속(Redemption)-완성(Consummation)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CFRC A모델은 협소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성서를 읽는 것이라고 본다. 이 모델은 구약성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건너뛰고 이스라엘, 혹은 교회 혹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어떤 진지한 논의도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CFRC 모델은 그 초점이 개인구원에 맞춰져 있고 개별적인 구원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이야기기 개인 구원의 이야기로 축소될 때 우리는 성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고린도 전저 15장 3-5절에 명시적으로 언급하듯이 복음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복음을 나와 내 구원에 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복음의 이야기를 축소시키는 것이며 그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예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예수가 메시아, 왕, 주님 그리고 구주라고 선포한다. 복음이 예수에 관한 이야기라면 우리는 성서 전체의 이야기를 예수에 관한 혹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말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성서 이야기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서 이야기 전체는 우리를 예수에게로 이끌어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이야기이다. CFRC 모델은 구속하는 예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메시아, 왕, 주님이신 예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나라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CFRC 이야기는 성서의 보다 큰 이야기 속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성서의 보다 큰 이야기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추동하는 이야기이며 예수가 메시아, 주, 그리고 구주라는 복음의 선언에 주목하는 이야기이다.

 

보다 큰 이야기의 첫번째 부분(플랜A)은 아담에서 시작해서 아브라함을 거쳐 사무엘에 이르는 이야기다. 이 기간에 나타난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유일한 왕이시지만 자신이 택하신 백성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아담 및 하와와 공유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통치를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 이것이 타락 이야기의 핵심이다.  CFRC 이야기에서 구속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불순종과 원죄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구속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그들에게 부과된 임무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죄이다. 아담과 하와는 우주적 성전 안에서 만물을 통치하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혹은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의 타락은 이 임무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죄의 이야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을 대리해 통치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기보다 스스로 통치하고자 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항을 종결시키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더불어 은혜언약을 체결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다스릴 것을 명하신다. 이것이 CFRC 이야기의 구속을 발생시킨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보다 큰 이야기의 두번째 부분(플랜B)은 사무엘에 의해 인간 왕이 세워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같아지기를 그리고 하나님처럼 다스리기를 원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이 그들의 욍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최초의 인간 왕으로서 사울이 세워지고 다윗이 등장하며 인간 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다스려지는 이야기가 바로 플랜B 이야기다. 플랜B 이야기에서 신정, 곧 하나님의 통치는 사라지고 군주제가 등장했다. 언약들은 모호해졌고 왕이신 야훼는 먼 기억이 되었다. 하지만 오직 야훼 한 분이 다스리시던 때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엇고 그 기억은 언제가는 하나님이 다시 다스리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 소망은 다윗과 미래의 다윗 안에 내려져 있다. 인간 왕의 불충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고 비록 비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톰 라이트가 강조하듯이 그들의 포로살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포로살이는 언제 끝날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왕죄애 앉으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때 포로살이는 완전히 종식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보다 큰 이야기의 세번째 부분(수정된 플랜A)은 예수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플랜A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이야기라면 플랜B는 이상적으로 다윗이 통치하고 다윗 이후에는 어느 이스라엘 왕이 통치하는 것이었다. 수정된 플랜A 이야기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다시 통치를 시작하심으로 플랜A 로 되돌아오신 이야기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플랜B의 인간 왕의 통치가 아니라 플랜A의 하나님의 통치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다시 한번 이스라엘 안에서 신적인 통치를 시작하셨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수정된 플랜A는 메시아(왕을 의미, 또한 하나님의 아들(역시 왕을 의미)이라고 불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플랜A에서 처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통치를 세워가신다는 이야기이다. 요컨데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론적 주장이며 하나님나라가 지금 예수 안에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다 더 큰 이야기가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흘러 나오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다음 세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우리는 회심을 통해 세상에 관한 하나의 참된 이야기인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만과 자신의 삶을 지배하려는 갈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며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 왕을서 성부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 분 앞에 내려놓으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회심을 통하여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만약 예수가 유일한 왕이라면 우리는 왕이신 예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는 일과 동떨어진 별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왕이신 예수에게 복종하기 전까지는 공동선은 하나님나라에 별 소용이 없다. 둘째는 제자로서의 삶을 통해 그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심화시켜야 한다.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성서를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성서의 이야기에 의해 정복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이야기를 정복하는 동시 발생적 행위와 관련이 있다. 셋째 이 이야기는 제자로서의 우리의 삶은 하나님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에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는 그것이 출범한만큼만 오늘 우리의 세상에서 실현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은 본회퍼가 현재의 교회를 이상화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권고한 말과 동일하다. 그는 말하길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그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꿈을 사랑하는 이들은 비록 그 의도가 선한 것일지라도 결국 그 공동체의 파괴자가 된다고 했다.

 

 

4장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 하나님나라 사명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상황 안에 있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어떤 관점과 기억 그리고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에 있다. 바로 그것이 예수가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한 방식이다. 만약 하나님나라 사명이 하나님나라 이야기에서 흘러 나온다면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나라신학이 그것이 처했던 상황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사명 역시 그가 처했던  상황을 위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오직 우리가 처한 상황과 연관되어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추구할 때만 유효하게 작동된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상황에 의해 그리고 상화을 위해 형성되었고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이다.

 

예수가 처해 있던 상황 안에는 하나님나라 사명과 관련하여 서로 경쟁하는 다섯가지의 기본적인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것은 솔로몬의 시편에 나타난 바와 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전투, 마카비 가문과 열심당이 추구하는 거룩한 전쟁, 에세네파의 거룩한 후퇴전략, 바리새파의 토라준수의 열정, 사두개파의 현실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한 하나님나라의 방식은 이스라엘 안에 새로우 길을 열어 놓았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하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했다.  예수가 제시한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일은 당시에 경쟁하는 다섯가지 이야기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그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로 부터 흘러나왔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하나님나라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이끈다.

 

첫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상황과 연관된다. 예수는 그의 시대에 그의 시대를 위해 그의 시대를 향해 말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의핵심은 상황 속에서 성서를 읽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 시대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나라 사명에 대한 성서적 접근법은 무엇보다도 성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형성되고 나면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상황 속에 끼워넣는다.

 

둘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우리의 세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지배적인 이야기들과 맞서는 것이다. 상황은 언제가 그 자체의 완성을 위해 복음을 집어 삼키려고 한다. 따라서 상황적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유혹이 되는 동시에 도전으로 다가온다. 예수는 대안적인 하나님나라 비전을 가지고 자신의 시대의 지배적인 이야기들에 맞섰다. 에수는 하나님의 방법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문화를 논박했으며, 후퇴의 문화를 비판했다. 또한 예수는 율법을 준수하는 삶의 이야기를 논박했고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 열성을 덧붙이려는 열성을 피했다. 마지마긍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정치권력을 사용하느 길을 피했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자정치적 잠재력과 관계없이, 문화를 변혁시킬 가능성과 상관없이, 사회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과 상관없이 신실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의 대항 문화로서 우리의 세상에 맞서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대안 정치로 대안적인 이야기들을 반박하는 것을 의미하다. 예수의 세상에서 제자듫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성취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야기들에 맞섰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성취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에 반대하는 이야기들을 거부했듯이 우리는 무리 문화가 제공하는 세계관에 담긴 이야기들을 논박해야 한다. 그것들은 개인주의, 소비주의, 민족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모던적 부족주의, 그리고 힐링을 통한 구원같은 것들이다. 예수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 모두에서 작동하는 세계관은 권력의 세계관이다. 로마의 정치는 힘과 강압의 지배라면 예수의 정치는 타인을 위한 희생적 사랑과 섬김이었다. 예수의 정치는 로마의 정치를 반박했다. 로마의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시 한번 자신의 백성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 신학에서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말한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나라 신학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로 부터 왕이신 그에게 복종하여 하나님나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며, 그 이야기가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게 하여 우리가 그 이야기에 참여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또한 우리는 세상이 그 이야기를 말하며, 왕이신 그분의 왕권을 축소시키려는 온갖 우상숭배적 이야기들에 도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만약 우리 복음이 대항문화적이라면 하나의 공동체로서 교회 역시 모든 면에서 대항문화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예수의 도전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시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형성된 낯선 공동체에 충성하는 법에 관한 정치적 딜레마라고 말한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나라 이야기에 충성하는 것이다.

 

 

5장 하나님나라는 백성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하려는 주장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이다. 스키니진 스타일은 하나님나라와 동의어를 정의라는 단어에서 찾는다. 반면에 정장바지 스타일은 그 동의어가 구원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가 사용한 하나님나라라는 용어와 관련해 첫번째로 연상되는 것은 한 장소에 속한 하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었을 것이다. 나는 성서의 고찰을 통해 예수의 세계에서 하나님나라는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의미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나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왕의 지배를 받는 지정학적 백성을 의미한다.  그동안 수많은 성경학자들이 하나님나라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이나 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 매우 당황스럽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나라라는 용어를 이스라엘 백성및 그들이 거하는 땅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그동안 정장바지 스타일은 하나님나라를 땅에서 이륙시켜 순전히 종교적인 혹은 영적인 그 무엇으로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구속의 역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번성과 그 후손이 살아갈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  출애굽기는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 땅을 다스리고 그 땅의 경계를 지켰다. 포로살이는 야훼의 징계를 받아 그 땅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땅이 지속되는 한 이스라엘도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땅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궁극적 이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최종적 운명에 관한 성서의 이해를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시편37편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믿음을 보여준다.  예수가 하나님나라와 관련해서 사용했던 언어의 근본적인 지향은 땅과 그 땅에서 평화와 정의와 사람과 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 핵심을 이루는 이스라엘 이야기에서 나왔다.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 바로 이것이 구약성서가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구약성서에서 나라라는 단어가 구원이나 정의라는 개념으로 치환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 구약성서에서 나라라는 단어는 분명히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가리킨다. 나라가 오직 다스림이나 통치만을 의미한다는 그 어떤 주장도 성서와 확실히 배치된다. 한 세기 가까이 너무 많은 이들이 나라라는 용어를 마치 그것이 통치의 역학 혹은 구속의 역학이라고  부르는 것만 가르킬 뿐이지 왕이 다스리는 백성은 가리키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나라를 통치라는 개념으로 축소시켜왔다. 예컨데 신약학자인 D.A.Carson은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라라는 단어가 교회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나라의 영역은 통치이고 교회의 영역은 사람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와  유대문서의 증거에 의하면 나라의 영역은 통치로 축소될 수 없으며 백성까지 포함해야 한다. 백성이 없는 왕은 왕이 아니라 박물관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말은 옳다.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나라는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나라를 정의나 구속적 역학으로 축소시키는일반적인 태도에 즉각 도전한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 및 하나님나라 사명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 요점을 제시한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곧 왕이 다스리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에수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우리가 새로운 백성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을 보게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 백성은 교회인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획정한 후에야 하나님나라 사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나라 사명을 정의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발견이라고 주장한다.  한 세기 이상 교회 안에서 모방을 통해 습득되어 어느덧 하나의 문화적 요소로 굳어진 개념이 하나있다.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서로 완전하게 대립되며 우리는 교회에 작별을 고하고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6장- 스캇 맥나이트

2016-02-28 18:33:50


6장 교회 밖에는 하나님나라가 없다.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하는 내용은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가를 하나님나라 일이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그것은   교회의 일을 의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스키니진과 정장바지 스타일 모두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신약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도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장바지 스타일의 신약학자인 조지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만약 하나님나라라는 역동적인 개념이 옳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공동체지만 그 나라 자체는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다."  구약학자인 존 브라이트도 말하길 신약성서에는 가시적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리처드 니버도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렇게 정장바지 스타일의 성서학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학으로 축소시킨다. 또 한편 하나님나라에 대한 스키니진 스타일의 접근법의 배후에는 사회복음이나 해방신학적 주제들이 있다. 해방신학의 대변인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해방공간을 만들기 위해 분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대신 사회적 실천에 무게를 두고 교회를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경제적 해방이 도구로 재정의 한다. 그가 지적하는 관점은 교회의 비중심화를 전제한다. 그는 교회는 자신을 구원의 배타적인 장소로 여기는 것을 그치고 새롭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러하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같지 않다는 널리 퍼진 합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둘 사에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정장바지나 스키니진 스타일 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는 종종 윤리나 구속의 순간들로 바뀐다. 그러나 나의 주장대로 하나님나라가 필연적으로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면, 그때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백성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6-19절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등장한다. 베드로는 하나님나라의 비밀 중 하나인 그 나라의 참된 왕, 예수의 정체성을 꿰뚫어 본 최초의 사람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부여한다. 베드로가 얻은 특권은 누가 하나님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거나 배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천국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가리킨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가 현재의 교회(백성)를 미래의 하나님나라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는 베드로가 지금 교회에서 하는 일을 하나님이 미래에 그분의 나라에서 하실 일과 연결시킨다.  여기서 분명히  계시된 사실은 교회와 하나님나라가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나라가 하나의 백성이고 교회 역시 하나의 백성이라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현재 성취되어 잇는 하나님나라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교회 밖에는 하나님나라가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나라를 미래의 영광스러운 현실로 여기며 이 세상에서는 오직 그것에 대한 희미한 표현만 가능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우리는 교회를 주로 세상적이고 현세적인 맥락에서 보면서 거기에는 아무 미래도 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을 비교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영광스러운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속적이고 혼란스러운 현재의 교회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와 언약의 파트너로 택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대하시겠다는 깨어질 수 없는 언약적 약속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이스라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보일 것이다. 로마서에서(롬11:17-24)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을 이스라엘이라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갈람나무라고 칭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원래의 나무인 이스라엘을 찍어내고 새로운 나무인 교회를 심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를 대체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확대된 이스라엘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실패하자 그것을 기독교 교회로 대체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성서를 오독하는 것이다. 성서는 이스라엘을 교회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확대에 대해 말한다.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을 포함하기 위해 확대된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하나님나라다.

 

바울이 교회를 표한하기 위해 사용한 에클레시아는 히브리어 카할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공적인 모임을 가리킨다. 그에게 교회는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적이고 지역적인 모임이었다.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교회는 로마 제국내의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 확대된 이스라엘의 지역적 모임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바울이 살았던 그리스 세계에서 에클레시아는 시민들과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지역적인 정치모임을 가리켰다. 바울이 히브리어 카할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한 것은 유대적 용법으로 카할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음을 에클레시아락 부른 것은 그들이 모종의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자신들은 확대된 이스라엘로서 왕이신 예수를 섬기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모임이라는 주장이었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는 사회적 정치적 용어들이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에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대된 그리고 이제 그 세계로부터 나와서 그 세계와 맞서며 모여있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클레시아 라는 용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왕이신 에수 아래에 있는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 백성이 아닌 이들과 맞서고 있는 공동제를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하나님나라가 지금 존재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그 나라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해 단지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하나님나라는 종말론적 현실이자 현상인 것이다. 교회 역시 종말론적 현실지만 교회의 미래는 종종 무시되어 왔다. 하나님나라는 왕이신 예수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묘사한다. 그 하나님나라는 예수 안에서 이미 출범했지만 지금과 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하나님나라와 동일한 현실을 나타낸다. 확대된 이스라엘은 지금과 아직을 함께 갖고 잇는 하나의 종말론적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지금인 동시에 아직의 상태, 즉 부분적으로 구속되었으나 온전한 구속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 하나님나라와 관련해  말한 것은 교회와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상태에서와 아직의 상태에서 그 둘은 같다. 따라서 우리가 비교를 하려면 지금의 하나님나라와 지금의 교회, 또는 아직의 하나님나라와 아직의 교회를 비교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하듯이 지금의 교회와 아직의 하나님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하나님나라 이야기에서 직접 흘러나온다. 일단 우리가 그 나라와 교회에서 백성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하나님나라의 사명에 대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초점을 갖게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완성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다. 나아가 그 이야기는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반박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며 세상의 이야기를 반박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사명의 핵심에는 하나님나라의 백성, 즉 왕이신 예수의 교회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나라의 사명이다. 교회의 사명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교회는 제도권 교회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교회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나라는 미래의 영광일 뿐 아니라 그 영광스러운 미래를 향해 싸우며 나아가는 현재의 거친 현실이다.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지만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유토피아가 아닌 것만큼이나 거칠고 혼란스러운 현실 가운데 있다. 그러나 미래에 교회는 온전하게 하나님나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출범한 하나님나라와 지금 출범한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완벽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아야 한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나라와 교회 위에 이미 시작된 종말론을 올려 놓는다면 현재의 교회를 하나님나라로 여기지 말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참된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예수가 세우러 오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나라 사명을 형성한다. 구체적으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출볌한  하나님나라를  구체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에너지를 교회 공동체에 집중시키는 것이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과 협력해서 더 많은 정의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7장- 스캇 맥나이트

2016-02-28 20:29:04


7장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전까지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왕이신 예수에 의해 구속되고 그 아래서 교제하며 살아가도록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다. 요컨데 하나님나라에는 왕(예수), 다스림(예수의 통치), 백성(교회, 땅(예수의 백성이 살아가는 모든 곳), 법(성령의 능력을 통한 예수 따름)이 필요하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첫째, 교회의 사명으로서 하나님나라 사명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거처가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린양과 더불러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며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 사명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되는 것과 관련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을 교회와 연결시킨다면 그때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나라 사명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사명은 교회의 사명이며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사명이 발견되는 유일한 장소는 확대된 이스라엘인 교회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중재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교제 혹은 하나님나라의 정치역학이 되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하나님나라 그리고 교회라는 단어는 모두  정치와 직결된다. 교회가 정치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철저히 정치적이다.  하나님나라는 왕이신 예수 아래서 서로 교제하며 교회를 이루는 백성이다. 이런 교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예수의 정치역학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을 통해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구체화한다. 교회는 하나의 정치역학, 즉 새로운 예배, 새로운 법, 새로운 왕, 새로운 사회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정의,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증언이다. 하나님나라의 정치는 예수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살아냄으로써 우리가 사는 곳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곳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의나 평화가 가장 먼저 실현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대안적 정치역학으로서의 교회를 구현하는 일에 실패했으며 그 대신 정치권력을 이용하거나 문화를 변혁하기 위해 정치 과정을 이용하는 쪽을 택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바라는것은 먼저 그들이 속한 교회에서 현실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의 증언은 신뢰를 얻지 못한다. 그러 바람을 교회 안에서 구현하는 것이야 말로 교회에 필요한 유일한 행동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인 우리는 국가 권력이나 다수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승리를 하나님나라 사명과 동일시 하면 안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고 전해야 할 독특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다. 문화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둘을 동일시 할 때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셋째,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왕이신 예수 아래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왕이신 예수 아래서 살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집과 교회에서는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황제아래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 아래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기독교적 삶을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윤리는 오직 하나 예수가 왕이시라는 윤리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매우 실망스런 경향중 하나는 사람들이 정의 혹은 평화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초해 여려 문제들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려 한다는 점이다. 예수의 백성들은 정의와 평화를 성서에 기초해 정의해야 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평화인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결정한다. 오직 그런 기초 위에서만 정의/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이 구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서구 자유주의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뇔 뿐이다.

 

넷째,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지역교회의 교제를 형성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왕이신 예수의 교회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일은 교회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일을 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백성이며 교회 역시 백성이다. 왕이신 예수이 통치를 받는 백성은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것에 맞서서 증언하는 대안사회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정치 과정을 통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 하기 보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는 단순히 공적영역에서 선한 일을 지지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웅장한 실험실인 교회 안에서 선한 일을 먼저 구현하여야 한다.

 

다섯째,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이 세상에서 자유민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왕이신 예수의 통치를 받으며 교회라고 불리는 하나님나라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의 문화의 지배적인 이야기들에서 자유로우며 동시에 세상에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여섯째,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남나라 사명은 지역교회의 교제라는 상황 속에서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아래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세상의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 이야기의 일부는 예수가 욍이시며 자신을 대신할 하급 지도자들을 임명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급 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를 섬겨야하면 동시에 예수가 임명한 그 하급 자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곱째,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공적 영역에서 사랑에 의해 추동되어 선한 행실 혹은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와 관련해 제기한 주장으로 인해 나는 교회를 사회에서 철수시켰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나라 개념을 사회적 행동주의와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일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국가가 아니라 교회라는 주장이 반드시 세상에서 교회의 철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교회일 때 그 교회는 세상으 일이 제대로 개입할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서 철수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만약 교회가 세상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야말로 세상과 사회가 하나님의 세상과 하나님의 사회가 되기 위해 그리로 소환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현실이다. 내가 하나님나라 사명이 곧 교회의 사명이며 하나님나라 사명은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사회활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사회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것은 어떤 행동들에 하나님나라라는 단어는 적용함으로써 그  행동을 신성한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하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행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하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공적영역에서 벌이는 선한 일에 하나님나라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교회에 속한 단어는 세상에 적용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을 핑게삼아 교회를 축소시키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여덟째,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제자들이 그들의 소명에서 선교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소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장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가 갖고 있던 하나님나라 비전을 구현하는 장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신실한 현존을 통해 왕이신 예수의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직업은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향하게 할 때 소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세속적인 직업을 종교적인 직업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루터의 주장과 달리 우리 직업은 우리 자신의 왕이신 예수를 향헤 돌아서기 전까지는 소명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선을 위해 행하는 일들은 소명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관심의 초점을 세상에서 교회로 돌리는 정도만큼만 하나님나라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을 가리키고 그들을 교회하고 불리는 하나님나라 교제 안으로 인도하는 정도만큼만 하나님나라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나라의 사명이 복음을 통해 형성된 교회의 사명으로 보이는 정도만큼만 하나님나라의 사명인 셈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핵심에는 문화의 변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소명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가 만들어 내고 있는 특별한 문화 곧 교회,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나라 문화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나라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 곧 소명을 지닌 사람이 된다. 우리의 직업을 소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이다.

 

아홉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 사회복음, 해방 신학이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통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 영역, 그리고 사회적 행동이 갖고 있는 조직적 요소들은 하나님나라 사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선을 위헤 공적영역에서 행하는 선힌 일이다. 그것은 선한 일이지만 그 일이 곧 하나님나라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자연스런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사명은 그 뿌리를 교회에 내리고 있으며 왕이신 예수에 의해 창조된 도적적 교제와 비전으로 인해 공적 영역으로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공공선을 위한 행동주의는 전적으로 선핟. 그럼에도 그것이 그런 행동을 하나님나라 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선한 일을 만들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들이 지역교회라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애쓰는 일을 희생하면서 이런 종류의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선하지도 옳지도 않다. 우리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첫째는 교회와 하나님나라다. 그리고 그 다음이 사회와 문화와 세상이다. 사회적 행동주의가 교회를 밀어내거나 대체할 때 그것은 우리의 충성이 더 이상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우상숭배가 된다. 그러나 지역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활동이 세상 속으로 흘러넘칠 때 그것은 선한 일이된다. 바로 이것 하나님나라 선한 일이 세상으로 흘러 넘치는 것이야 말로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이 취해야 할 방식이다. 만일 그런 행동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되었다면 그것은 선한 일이기는 하나 하나님나라 일이 아니다. 만약 그 행동이 교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되었다면 그섯은 하나님나라의 사명이며 선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에 기초한 행동은 교회와 교화에 낓는 영향이란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때때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데 실패한다. 종종 이것은 하나님나라 사명에 대한 이해가 교회의 삶의 현실과 상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교회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의 삶의 현실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교회가 그런 요구에 미치지 못할 때 교회로서의 하나님나라가 들고 일어나 우리를  소환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사명을 이뤄나가게 한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하나님나라 이야기로 부터 흘러나온다. 그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맞추며,하나님은 그 역사의 초점을 왕이신 예수께 맞춘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왕이신 예수를 통해 왕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다른 모든 우상숭배적 이야기들을 논박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언제나 상황 속에서 표현되어 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상황이 배제된 보편적인 하나님나라나 하나님나라 사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어떤 왕국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왕국은 하나의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 사명이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것과 상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데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 백성을 형성하며 현세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은 교회다. 이것은 하나님나라 사명이 전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의 표현인 교회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것과 상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8장- 스캇 맥나이트

2016-03-01 14:24:48


8장 하나님나라의 왕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누가 그 나라의 왕인가? 라고 물었을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고 계시다는  메시지였으며 마침내 예수는 왕이 되신 하나님이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하나님은 왕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아들, 메시아, 주, 즉 왕이신 예수를 통해 다스리신다. 시편 154편 11-13절은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역동적 통치와 지배라는 진리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나라의 이런 요소를 강조면서 하나님나라는 주님없는 권력자들의 주인 행세를 끝장내는 하나님의 자신의 다스리심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응하시면서도 그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 자신의 기준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왕이 그 나라를 향해 하나님을 대표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편72편은 이상적인 왕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왕들이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습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호칭은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어떠함을 결정한다. 예수가 주님이라면 그의 나라는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백성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에 대한 3가지 칭호, 인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왕의 특성이 그 왕국 백성의 삶의 특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왕들은 그들의 왕국을 자신들의 이미지를 따라 형성해 나간다.

 

예수가 자신을 해석하는 칭호였던 인자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인자라는 호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나라가 의미하는 것과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조명해주는 예비적 지식이 필요하다. 여러차례 예수는 자신의 고양된 지위 및 재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나라와 예수 자신의 비범성 및 그의 심원한 통치권에 대한 인식으로 이끌고 간다.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사용한 호칭인 인자는 부활하고 재림할 것이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자이다.  예수가 자신에 대해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이야기는 바로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 계획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자신의 통치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자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데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신다.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다니엘이 말하는 인자는 분명히 왕, 즉 다윗을 닮은 미래의 왕이다. 이 인자는 고난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 곧 옛적부터 계신 이 앞에서 들림을 받고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예수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인자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그의 고난과 신원을 그의 통치에 대한 소명과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왕 혹은 로마의 황제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공관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사용했던 호칭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복음서 기자들은 자주 예수를 메시아라고 불렀다. 그들이 복음서에서 메시아라는 단어 를사용한 것은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구신지를 해석해 주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모두 예수를 메시아라고 여겼는데 특별히 주전 2-3세기부터 다윗 계열의 왕이라는 의미에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폭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 즉 메시아가 죽임을 당할 것이나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은 당시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표준적인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며 그 기대를 뒤틀고 파괴하는 말이었다. 마가복음 8장의 메시아에 대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는 메사아 개념에 대한 예수와 초대교회의 독특한 해석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메시는 다른 이들과 동일한 죽음을 죽었다가 부활해 모든 통치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스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메시아는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을 포함해 그의 동시대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메시아의 삶과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세 가지 호칭은 모두 동일한 기본적인 이야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오래된 하나님나라 이야기(A-B-A')가 각각의 칭호들 안에서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며 들려지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가 십자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를 통해 통치하신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왕국의 특성을 그 나라의 왕에게서 얻는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왕이신 예수가 십자가와 상관이 있는 나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자는 고난을 받았고 신원되었으며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었고 메시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는 메시아로 이해되지 않았다. 예수에 대한 이런 논의는 하나님나라 사명의 세 가지 의미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다 견고한 기독론을 되찾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사명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 사명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가 누구신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십자가에 달리신 왕이신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고 끝난다. 예수에 대한 세 가지 호칭들은 복음서 안에서 예수에 대한 핵심적 칭호일 뿐 아니라 각각이 하나님나라 이야기 안에서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변주들이기도 하다. 각각의 칭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만약 우리가 이 이야기를 숙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경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숙고할 때 우리가 말해야 할 첫 단어는 사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그 때 우리는 복음 전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나라의 참된 사명이 십자가에  의해 형성되고 십자가를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때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 속으로 들어가도록 새롭게 형성된다. 기독론이 사명을 형성하는 것이지 사명이 기독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호칭이 말하는 예수의 이야기 전체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될 때, 복음 전도 활동은 변화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나라 사명으로서의 복음 전도는 구원자이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를 선포하고 사라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핵심적 질문에 답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대한 그들의 대답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예수가 우리와 함께,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위해 죽었닥 고백한다. 하나님나라 기독론은 희망의 메시지를 통해 서구의 냉소주의에 도전한다. 하나님나라 기독론은 예수가 새 창조의 삶과 함께 죽음 저편에서 걸어나왔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사명을 위한 궁극적인 메시지는 죽음을 넘어서 새 창조의 삶으로 인도하는 부활한 예수의 삶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가 죽음을 정복한 것에 전적으로 근거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의 기독론에 근거한다. 그 기독론의 핵심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분은 우리 역시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고 훨씬 도발적으로 말했다. 하나님나라 기독론은  성육신적이다 그리고 기독론이 하나님나라를 형성하기에 하나님나라 사명 역시 성육신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하게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의 상황 속으로 존재론적으로 들어오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나라 상황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육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성육신적이어야 한다.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해 우리 자리를 떠나야 하며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다른 이들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변화되어야 하면 다른 이들이 살 수 있도록 죽어야 한다. 성육신적인 하나님나라 사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당신이나 나  혹은 우리가 그것에서 얻어내는 그 무엇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에수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사람들에게 구원얻는 방법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사명은 교회의 증언과 사랑스러운 삶이라는 상황 속에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나라 일이라고 부르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예수를 제시하거나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요 구주이며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이는 결코 하나님나라 사명이나 하나님나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일 수 있지만 그들의 일을 통해 예수가 왕으로 전해지고 선포되기 전까지 그것은 하나님니라 사명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9장- 스캇 맥나이트

2016-03-01 17:53:15


9장 구원이 분출된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는 오직 완전한 구원을 통해서만 온다. 그러기에 하나님나라 신학은 구속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나라 신학이 될 수 없다. 하나님나라가 구속과 분리될 때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되기를 그친 채 사회적 진보주의나 사회적 보수주의, 아니면 세상과 문화의 개선을 위한 움직임 정도가 된다. 하나님나라는 구속에 기반을 둔 현실이다.(눅 21:28-31) 우리가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의 일 그리고 하나님나라 사명에 관한 말을 하기 전에 구속이 필요하다.(요한 3:3-5) 하나님나라 백성은 구속되고 해방되며 구원을 얻은 백성이다. 정장바지 스타일은 하나님과 화해라는 영적 차원을 강조하다면 스키니진  스타일은 정의와 평화라는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구속은 영적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통전적 구원이다. 하나님나라가 나타날 때  구속도 나타난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을 무시한 채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나라의 구속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 죄 문제를 다루지 않는, 십자가에서 그 능력을 발견하지 않는, 예수를 유일한 중재자로 보지않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새 창조의 분출로 보지않는 그 어떤 구속 활동도 하나님나라의 구속이 아니다. 설령 그것이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그 자체로 선하며 공동선을 위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하나님나라의 구속은 영적이고 우주적이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구속과 함께 세상 속으로 깨치고 들어와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제도적으로, 해방시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세상을 우주적으로 구속한다. 예수에게 축귀사역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예비적 단계의 일이나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나라 그 자체였다.  하나님나라 구속은 죽음의 우주적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것이 물리적이든, 영적이든, 제도적인 것이든, 모든 죽음을 초래하는 포로상태에서 그들을 해방시킨다. 하나님나라의 구속의 능력은 그 초점이 예수에게 즉 그의 삶에, 그리고  죽음을 흡수에 버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진다. 부활한 예수가 성령을 통해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구속을 분출하신다.  스키니진 스타일은 하나님나라를 너무 자주 윤리로 귀착하는데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는 결국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정장바지 스타일은 하나님나라의 구속을 개인적 구원으로 축소시킨다. 기독교적 행동주의는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개인전도와 영혼구원에 전력한다. 이들에게 하나님나라 구속은 개인구원이고 하나님나라 사명은 오직 복음전도가 될 뿐이다.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나라 구속은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다. 이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이 양 극단의 견해와 대조되는 세 번째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이 견해는 하나님나라 사명의 세 가지 중요한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그 사명의 사회적 차원을 위한 자리가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증인으로서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그의 책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에서 로잔 언약에 나타난 존 스토트의 말을 인용한다. 로잔 언약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교회의 최우선적인 사명은 복음전도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개인구원의 는리적 우선성에 동의하면서도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 두 가지 모두를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사로 여길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논쟁에서 드러나는 영적구속과 사회적 구속을 맞세워 놓는 양극성은 교회는 단지 영적인 교제일 뿐이라는 가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예수가 교회를 세운 것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통전적 구속의, 사회적 차원은 무엇보다도 교회라고 불리는 사회적 현실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가지고 사회와 상관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만약 그들이 선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예수의 제자로서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행동, 즉 선한 일을 사회적 구속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구속을 세속적 가치로 바꾸는 것이며 하나님나라 구속이 갖는 영광을 타협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 백성들 가운데서 이뤄지는 다차원적 구속에 초점을 맞춘다. 구원은 죄에서 또는 바울이 말하는 아담적 상황(고전 15:20-23; 로마서 15:12-21)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또한 구원을 악한 자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다. 성서의 진정성과 사회과학의 경고는 모두 이 세상에 우주적이고 악마적인 세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어둠이 세력들과 마주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사명은 마귀로부터의 해방과 구속을 추구한다.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 세상의 적들은 보다 깊은 세력 즉 성사와 권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귀와 그 시대의 권세들에 대한 마귀의 영향이야 말로 진정한 적이었다. 하나님나라의 사명 곧 교회의 사명은 그런 권세들을 물리치기 위해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이 구속의 능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수 안에 계신 왕으로 선포하고 또한 왕이신 예수 안에서 교회라고 불리는 백성을 통해 구속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이 구속은 다중적이며 통전적이다. 사람들은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조직적인 악의 압제로부터 구속을 얻어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세운다.  하나님나라의 구속의 우주적 통전적 차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부당한 제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유혹을 받는다. 물론 이런 일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사명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이런 구속의 능력이 교회 안에서 먼저 분출되어야 한다. 정사와 권세에 맞서 싸우는 일은 무엇보다도 지역 교회 안에서 먼저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지역교회들에서 형성된 교제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구체화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위한 선한 일을 곧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여기는 유혹에는 마땅히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나라 사명은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나라 사명은 지금 여기서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 구속일 뿐이다. 우리가 문제투성이인 교회를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나라아 부르며 그것을 하나님나라와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여기서 다시금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출범하였지만 아직 온전하게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나라는 부분적으로 지금 여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미래에 존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이지만 오직 그 나라가 완성될 때 흠없고 순결한 존재가 될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구원은 세 가지  시제 모두로 표현된다. 즉 우리는 구속되었고, 구속되고 있으며, 구속될 것이다. 구원의 이런 삼중적 의미는 구원의 통전적 의미 및 하나님나라의 구속과 상관이 있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구속된 자들, 구속되고 있는 자들, 구속된 자들이라는 교회의 상황 속에서 통전적 구원을 제공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구속된 자들의 공동체를형성하나. 이런 종류의 구속을 제공하지 않는 그 어떤 사명도 하나님나라 사명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10장- 스캇 맥나이트

2016-03-01 20:12:07


 10장 하나님나라는 도덕적 친교다.

 

1세기 갈릴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나라 라는 용어는 왕, 백성, 땅, 율법이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전의 한 가운데는 율법이 있었는데 율법에 대한 순종이야 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특징을 이룬다.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나라 도래를 선포했을 때 그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율법을 제시한 것일까?  하나님나라는 왕이신 예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가 가르친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구속된 백성이다. 예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회심을 통해 예수의 다스림 아래 혹은 그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복음서 안에는 모두 7개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감에 관련한 예수의 어록이 등장하는데, 그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도덕에 달려있다.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탁월한 의를 지니거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겸손하게 어린아이처럼 되거나, 모든 종류의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재산을 포기하거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왕이신 예수께 순종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왕이신 예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는 지금 한 사람의 삶의 핵심적 헌신에 관해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핵심적 헌신이란 무엇이며 하나님나라의 도덕이란 무엇인가?  다음에 설명할 십자가, 의,사랑이라는 세 가지 단어는 하나님나라의 도덕적 친교의 특징을 이루며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정의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사명은 십자가와 의와 사랑라는 특징을 지닌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의 도덕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진술, 즉 그의 나라의 특성을 진술하고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진술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마가복음 8장 34절이다. 예수의 공동체로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자신들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난, 죽음, 낮아짐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부활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십자가의 삶이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도덕적 친교는 십자가 안에서의 친교다. 신약성서에서 십자가는 단지 속죄를 위한 희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의 규준으로 등장한다. 왕이신 예수 아래 이뤄지는 도덕적 친교의 첫 단어는 십자가다. 십자가가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상기시킨다. 예수의 추종자들의 도덕적 친교의 특성을 알려주는 두번째 단어는 산상수훈에 등징하는 "의"다. 예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축복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를 축복한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한다.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예수가 살았던 세상에서 "의"라는 단어는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 즉 율법을 준수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의는 무엇보다고 선한 삶을 의미한다. 소금과 빛은 모두 이 세상에서 착한 행실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근본 사명은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신실한 공동체로서 왕이신 예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 때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산상수훈은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윤리적 비전의 핵심이다. 왕이신 예수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율법을 수여한다.(마태복음 5:17-20) 이 본문에서 우리가 얻는 결론은 세 가지인데, 첫째. 하나님나라 율법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계시된다. 둘째,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위해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 예수는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온전한 형태로 율법을 표현하고 지속시킨다. 셋째,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나라 율법을 행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마태복음 5장은 왕이신 예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도덕적 친교 안에서 나타날 우리 삶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으로 살지 않는 세상에서 이것이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의"라는 주제에 주목한다. 하나님나라의 도덕적 친교는 의로운 삶,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 구별되는 삶이라는 특색을 지닌다.

 

예수는 두 가지 다른 배경 속에서(막12:28 ; 눅10:25) 율법을 사랑으로 환원시켰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발견된다. 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이런 집중을 예수 신경이라고 부른다. 이 첫째가는 계명은 예수가 만든 것이 아니라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4-9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18에서 흘러나온다. 요한복음 13:34-35에서는 사랑에 대한 강조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몇가지 새로운 주제들과 함께 나타난다. 예수는 사랑의 계명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새상은 그들이 세상과 맺어야 할 관계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사랑이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편향적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은 여러가지 덕들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덕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덕이다. 예수는 사랑을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핵심적 가치로 삼았다.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핵심이 예수신경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전가지 우리는 사랑이라는 하나님나라 사명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적 사랑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어떻게 보이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단호한 언약적 헌신이 있다. 그 언약적 헌신은 현존하고 함께 하며, 옹호하고 위하며,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향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두드러지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곧 교회와의 근본적인 관계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헌신이다.  창세기 12장 이후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그 언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성전에 임재를 통해 그리고 성육신을  통해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철저한 완성이라는 형태로 지켜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바로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하나의 언약공식으로 나타나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구절의 의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그 백성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단지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을 위하시는 것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나라의 현실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나라의 이야기(A-B-A')는 예수와 그의 나라 백성들 즉 확대된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완성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사람들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교회 안에서 왕이신 예수 아래 살도록 부른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왕이신 예수 아래서 살아가며 이것은 그들이 십자가와 의와 사랑을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새로운 친교, 즉 하나님나라의 도덕적 친교 안에서 살아간다. 교회들은 십자가와 의와 사랑이라는 특징을 가진 삶을 형성해야 한다. 하나님나라 윤리는 공동체를 위해 제시된 윤리이며 이것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십자가와 의와 사랑의 특징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우리를 십자가와 의와  사랑에서 나아가 평화라는 특징도 지닌다. 평화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의도를 포착하는 성서의 주요개념중 하나이다. 이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평, 그릭고 상호간의 화해를 통해 얻어지는 기쁨을 의미한다.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속적 평화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평화가 교회의 평화임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평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일차적인 방법은 세상을 세속성으로 부터 교회 안으로, 즉 참된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세속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정치 과정에 의존해 평화를 이루려는 콘스탄티누스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평화를 말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평화를 말할 뿐, 교회 안의 평화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특징을 이루는 샬롬이다. 먼저 우리는 지역교회의 친교 안에서 화평을 추구하며 서로의 화해를 이루어 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평화로 형성된 교회로부터 세상 속으로 평화를 흘려보내야 한다. 세상의 평화를위한 노력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근본적으로 어느 한 지역교회의 구성원들이 왕이신 에수의 다스림을 받으며 서로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과 관련되있다. 평화주의는 교회의 친교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 윤리다. 우리가 평화주의를 세상의 평화주의 프로그램으로 정치화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참된 구현으로서 교회를 중심에서 밀어내고 그것을 왕이신 예수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의 윤리로 바꿔버린다. 교회가 우선이고 세상은 그 다음이다. 교회가 평화를 누린다면 세상이 교회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교회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분쟁하고 갈등하면서 어째서 세상의 평화주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율법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에도 속한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보다 높은 것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런 도덕적 비전이 너무 낭만적이거나 이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런 불평보다 심각한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윤리를  공적 윤리로 치부하면서 예수의 비전을 서구 자유주의의 가치체계의 틀 속으로 밀어넣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콘스탄티누스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예수의 도적적 비전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를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들, 즉 교회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만유의 왕이시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식은 법이나 정치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구속을 통해서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은 구속을 얻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고 오직 그들만을 위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최선의 방법은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강압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대안적 현실을 증언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서구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인 돈과 소유의 문제를 건드린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이 십자가와 의와 사람을 따라 사는 것이라면 우리의 돈과 소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나라의 의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왕이신 예수께 그가 기르치는 것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우리가 함께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의 국면에서 돈과 소유가 문제가 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단계는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속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범을 제시한다. 십자가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나라 사명은 다른 이들을 위한 희생을 통한 자기 부인의 삶을 의미한다. 삽자가는 돈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실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십자가와 이웃 사랑이 소유의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예수께 바치고 물질에 대한 숭배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이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신다. 분명히 하나님나라 사명은 십자가, 의, 사랑이 우리가 자신의  소유와 돈으로 하는 일을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11장- 스캇 맥나이트

2016-03-01 23:43:47


 11장 하나님나라는 희망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하나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출범한 하나님나라는 언젠가는 완성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미래는 자석과도 같이 과거와 현재를 끌어 당긴다. 그렇다면 예수 자신은 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가?  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약성서의 비전에는 4가지 주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는 절정의 심판과 더불어 시작될 것이며 성대한 교제와 사회가 될 것이며, 완벽한 공동체로서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주제들이다.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첫 번째 이미지는 천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 즉 하나님나라 백성인 교회의 성대한 교제다.  이것은 대체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확대된 이스라엘이다.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 발생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일들은 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적인 것이었다. "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1-12)"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이방인들이 포함된 것으로 혹은 이스라엘의 여러 부족들이 성대한 교제를 위해 시온으로 다시 모여드는 것으로 묘사한다. 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비유의 중심 이미지는 잔치이다.(막14:25; 마22:2-14; 마22:8-10; 눅14:21; 눅14:23) 이 단락들에서 중심적인 단어는 교제다. 예수와 동시대인들에게 잔치는 하나님나라 현실에 대한 은유였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 본질은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풍성함과 안전함 가운데 서로를 축하하며 사귀는 교제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를 축하하는 교제 속에서 서로 동거한다.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두번째 이미지는 심판이다. 그동안 심판은 너무 자주 누가 하나님나라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어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에서 심판은 하나님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와 잘못된 것들을 끝장내시고 옳은 것을 세우시는 것과 상관이 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와 세상을 심판하고 보응하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심판이라는 주제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마25:31; 마13:41; 마13:43; 마20:21; 눅23:42; 마10:32-33)  우리는 예수의 심판 이야기가 이스라엘, 제자들, 땅, 나라 등과 의미심장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는 예수가 얼마나 자주 심판을 언급했는지 그리고 그 심판은 저 세상적이 아니라 이 세상적인지 알게 된다.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성서의 심판 주제가 정의를  세우고 불의를 타파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만 심판이 하나님의 징벌과 관련이 된다는 말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심판 이야기 속에는 징벌과 관련된 말들이 마치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잔뜩 새겨져 있다. (마13:24-30; 36-43) 이 징벌의 이미지는 파멸이고 멸망이며 동시에 구원이고 생명이다.  예수의 심판 개념은 하나님의 징벌적 심판은 어떤 이들의 생명을 파괴하지만 다른 어떤 이들을 위해서는 영생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는 어떤 이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마5:12; 마6:1; 마10:41-42; 막10:28-30) 이 구절들은 현세와 하나님나라 모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에 대해 상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가 보기에 우리의 삶은 보호 관찰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은  심판관이시다. 영생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에 대한 상은 지금 하나님나라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교제와,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동일한 공동체 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교제다.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세번째 이미지는 완전한 공동체이다. 예수의 공동체 사상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가 꿈꿨던 미래의 하나님나라가 유토피아(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리면, 지금 출범한 상태에 있는 하나님나라는 에우토피아(유토피아를 지금 이곳에서 구체화하려는 시도)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은 유토피아의 여러가지 개념의 맥락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유토피아 비전은 그 핵심에 메시아를 둔 신정정치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시는 신정정치다. 따라서 예수가 꿈꿨던 유토피아는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헤롯과 빌라도나 로마황제와 같은 그 시대의 통치자들에게 맞서는 반정치적(ANTI-POLITICAL)인 것이었고 세상의 정치적 법칙을 넘어서는 과정치적(HYPER-POLITICAL)인 것이었다. 예수는 미래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말하면서 시대의 끝이나 완성과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한다. 완성(CONSUMMATION)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쉰텔레이아(SYNTELEIA)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세상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드라마에서 모든 이전 시대들이 완성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현세에서 백배나 받을 것이고 다가올 시대에는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막10:28-30) 이 구절은 현세와 내세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미래의 하나님나라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때에는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원래 되어야 할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가 꿈꾸는 미래의 하나님나라는 오직 한분 하나님에 의한 통치 아래 정의, 평화, 사랑의 특징을 지닌 사회이다. 여기에는 강력한 왕이시며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중심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신약의 유토피아 비전은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백성의 완전한 공동체라는 웅장한 주제를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유토피아는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한 개인의 영원한 삶이 아니라 하나의 교제,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사회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나라 사명이 희망을 제공하는 이유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나라가 그런 희망을 발생시키는데 있다.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하는 식탁교제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구현했다. 그의 식탁교제 행위는 단순히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의 나라를 지금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 사명에 내포된 희망은 우리가 함께 식탁에 돌러앉아 먹을 때 발견된다. 요한계시록 5:11-14은 미래의 궁극적인 잔치의 모습을 그려준다. 만약 이것이 최종적인 잔치라면 우리의 식탁교제는 이런 잔치의 포용성과 보편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나라 사명은 심판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에 내포된 희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갈망할 때 나타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 사명은 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나라 질서의 수립을 통해 이루어질 희망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나라 사명은 수많은 악행자들이 그들이 행한 일로 인해 호출되는 것, 회개에 대한 희망이 지속되는 것, 언젠가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고 그것을 영원히 제거하시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유토피아가 지금 에우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부분적이지만 에우토피아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숨은 행위를 드러내시고 질서를 세우실 다가올 심판에 비추어 용서와 화해를 통해 그 질서에 기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서로 간의 교제를 만들어낸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사는 법을 배울 때 발견된다. 만약 최종적인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서로 간의 교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금 여기서의 교제는 당여히 그 최종적인 하나님나라를 예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보다 사회적인 모임를 만들어내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성대한  교제가 하나님나라의 핵심이라면 우리는 교제를 위한 기회를 확대하여 교회의 삶을 하나님나라 모임으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성서공부나 신학연구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보다는 서로의 삶을 나누는 여유로운 시간을 포함한 소그룹활동이 바람직하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미래의 하나님나라가 하나님과 백성들의 교제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이 유토피아라면 지금 그것이 발생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우리가 서로서로 더 잘 교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하나님나라 사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됨을 지금 여기서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의 복이고 둘째는 하나님나라의 교제를 통한 다른 이들과의 연합의 복이다. 교회의 혼란스런 삶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는 이 둘 중 어느것도 온전한 상태로 경험할 수 없지만 낙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유토피아를 기다리면서 에우토피아 안에서 살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나라 사명은 사랑이다.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안에서 기쁨으로 가득찬 영광을 제공한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12장- 스캇 맥나이트

2016-03-06 22:00:42


12장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주된 논지들

 

1. 유대교에서 하나님나라라는 단어는 구속이나 윤리가 아니라 국가와 이스라엘과 같은 단어들과 동의어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나라는 또한 왕, 통치, 백성 ,땅, 율법의 복합체다. 교회 역시 이런 복합체다.. 하나님나라는 종말론적이다. 즉 그것은 현재이자 미래다. 하나님나라의 미래는 최후의 심판과 의의 수립을 뒤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성대한 교제를 수반한다. 그리고 이 미래의 하나님나라는 지금의 하나님나라 삶을 위한 기조를 설정한다. 교회 역시 종말론적이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비교하려면 지금의 하나님나라와 지금의 교회를, 그리고 아직의 하나님나라와 아직의 교회를 비교해야 한다 이렇게 비교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교회이고, 교회가 하나님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예수가 구속한 사람들이다.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나라 백성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일은 오직 구속을 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세상이란 단어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요더는 세상을 구조화된 불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니버이후 세상은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에서 문화 만들기는 특별한 관심을 받는 기독교적 활동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구속해 교회 안으로 이끌라는 하나님의 소환 명령을 감추어버리는 가면으로 너무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나라 신학은 최후의 심판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안다. 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나라를 세울 그 심판을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갈망한다. 하나님나라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나라 일이 발생하고 행해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나라 사명을 수행하는 지역교회쁜이다.

 

 

2. 교회가 역사를 통해 받아온 유혹은 하나님나라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자신을 국가 혹은 문화의 세력들과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는 콘스탄티누스의 유혹이었다.  이 유혹은 윤리화, 세속화, 정치화의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대부분이 기독교 행동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사회복음이다  가장 주목할 것은 사회복음의 토대위에서 형성된 신학은 교회를 탈중심화시켜 정부의 진보적인 혹은 보수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양  진영은 모두 문화전쟁에서 콘스타티누스에게 굴복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치적 영역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따라 작동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러 오신 것이지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혹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왕의 특성이 왕국의 특성을 결정한다. 하나님나라는 왕이신 예수의 특성으로 인해 십자가 모양을 닮는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십자가를 닮은 의와 사랑의 삶이라는 특징을 지닌 도덕적 교제를 나눈다. 그리고 이 삶을 평화와 소유를 포함한 모든 삶의 차원으로 스며든다. 교회는 지역교회 안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듦으로서 세상에 개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공적행동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흘러넘침이어야 한다. 선한 일을 하면서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 비전을 따라 사는데 실패한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