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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목격자의 증언으로서의 복음서- 리처드 보컴

목격자의 증언으로서의 복음서- 리처드 보컴

2016-02-12 20:34:02


서론

 

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가 예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기에 기본적으로 신뢰할 만한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음서를 통해 발견한 예수가 진짜 예수가 아니라, 복음서 이면에 정말 신뢰할 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가들이 재구성한 예수가 진짜 예수라는 생각을 대중화시킨 것은 이른바 "역사적 예수 탐구"였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신앙은 그 믿음과 예배의 대상인 예수를 복음서 밖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본 적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복음서를 역사이자 신학으로 읽으며 그 안에서 예수를 찾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서는 결코 나뉠 수 없는 사실과 의미의 통합체로 받아들여 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역사 속의 예수와 신앙의 대상 그리스도는 하나이자 같은 예수라고 주장하면서 복음서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옹호했다.

 

2. 나는 "역사 속의 예수" 및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상당히 논쟁적인 용어를 "증언을 통한 예수"라는 용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나는 예수를 보여주는 복음서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가장 유용한 범주가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증언은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신학적인 용어다. 증언에는 역사와 신앙, 사실과 의미가 어우러진다. "증언을 통한 예수"라는 용어를 통해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와 가장 가까이 있었을 뿐 아니라 후에 자신들이 증언한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이 받아들인 인물로서의 예수다. 만약 이런 나의 주장이 옳다면, 이것은 복음서에서 발견한 예수가 진짜 예수라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확신을 회복하는데 크게 도음이 될 것이다. 사실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을 구현한 것이라는 관점은 현대 이전 주류 기독교 전통에서 복음서를 이해하던 관점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지닌 100년 동안 신약학자들로부터 그렇게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나는 복음서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논거들을 제시함으로써 그동안 신약학자들이 이룬 합의에 도전하고자 한다.

 

 

학계의 지배적인 패러다임- 양식비평

 

1. 내가 논박하려는 학계의 지배적인 관점인 양식비평은 20세기 초반에 불트만과 디벨리우스를 비롯한 일단의 독일학자들로 부터 유래했다. 이들은 복음서에 포함된 전승의 각 구성요소가 지닌 문학적 양식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에 중점을 두고 연구했다. 이들은 예수를 목격한 자들의 역할을 초기에 국한하고, 이후에 이루어진 구전 전승에서는 더 이상 목격자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전승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 구전을 통해 이루어진 작자 미상의 전승이다. 그래서 초기 양식비평가들은 공동체가 지녔던 창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 공동체들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당대의 상황과 관련성에 관심이 있었고 그 결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상당히 자유롭게 전승을 차용하고 더 많은 자료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복음서 전승은 예수라는 인물 자체보다는 초대교회애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에 대해 그 어떤 신뢰할 만한 것을 말한다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일부 다른 학자들은 구두전승 사회에서 중요한 전승은 매우 충실하게 보존되었다는 관점을 견지했지만 그들 역시 익명의 공동체를 통한 오랜 전승 과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복음서를 연구해 왔다.

 

2. 그러나 예수의 목격자들이 전승 형성에 기여하지마자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자취를 감추었을리가 만무하다.  당시에 열두 제자와 같은 주요 목격자들은 매우 잘 알려져 있었고 아마도 자신들이 직접 기여한 전승의 살아있는 출처이자 전승의 권위있는 보증인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예수의 제자들 뿐 아니라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목격자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사건이 일어난지 20년이 지난 주후50년경에 글을 쓰면서 부활하신 예수가 500명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나타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중에 대다수가 지금도 살아있다고 말한다.(고전15:6)  이러한 증거는 양식비평가들이 잘못 이해하던 부분을 보여주는 한 예일 뿐이다. 몇몇 학자들은 양식비평 패러다임을 심각하게 비판하면서 양식비평이 구전전승이 전해지고 형성되는 방식을 설명하는데 부적절한 모델을 적용했다고 지적했다. 나는 이제 양식비평이란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복음서 전승을 이해하는 방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목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뒷받침하는 근거.

 

1. 복음서를 최초로 듣거나 읽은 사람들은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을 구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 쟁점은 복음서의 문학적 장르가 무엇이가 하는 점이다.  최근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복음서와 가장 유사한 고대 장르가 전기란 견해에 동의한다. 당시 독자들은 복음서를 전통과 방법에 있어서 고대 역사 기록과 매우 유사한 전기로 생각햇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역사를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역사는 목격자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어야 했다. 좋은 역사 기술은 직간접적으로 목격자의 증언을 포함한 것이어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대인들은 진정한 역사는 목격자들이 여전히 주변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쓰여진 당대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복음서가 사건 발생후 목격자들이 남아있는 기간 안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당시 독자들은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을 구현한 글이라고 생각했고 그 목격자가 누구였는지를 암시하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2.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재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개인의 이름과 그 이름이 사용된 방법에 대한 상당히 많은 고대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 자료들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으로서 신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에 이름이 나오는 방식을 살펴보면 그간 설명되지 않던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비중이 작은 인물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처리되는데 그중에서 몇 명의 이름이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예수께 고침을 받은 모든 이가 익명으로 처리되는데 왜 아이로와 바디메오의 이름은 언급되었을까?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하신 예수를 만난 두 제자 중에서 왜 누가는 글로바의 이름만 언급한 것일가? 왜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름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인 알렉산더와 루포까지 언급했을까? 왜 누가는 세리장  삭가오와 바리새인 시몬의 이름을 언급했을까? 이 현상을 설명하는 한가지 가설은 이렇게 이름이 언급된 사람들 대부분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복음서에 기록된 자신의 경험을 증언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3. 그러나 복음서의 상당 부분이 목격자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예수의 사역 전부 혹은 많은 부분을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들이 있어야 마땅하다. 사도행전 첫 장에서 언급되는 열두 사도가 바로 그런 목격자들의 명단일 것이다. 열두 사도는 예수의 목격자들 중에서도 공식적인 조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러나 누가의 내러티브는 열두 제자 이외에도 그 자격요건을 충족시키는 이들이 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누가는 자신이 처음부터 복격한 이들을 통해 주어진 전승을 기록했으며 나아가 자신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에도 이 같은 목격자의 자격요건이 언급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라는 목격자의 자격요건은 분명 초대교회에서 통용되었을 것인데  이는 목격자의 증언에 의존했던 고대 역사 기록이 중요하게 여긴 자격요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열두 제자의 이름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이들이야 말로 예수를 목격한 자들로서 공식적인 자격을 갖춘 이들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복음서의 내러티브에는 열두 제자가 현장에 있지 않아 목격자가 될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죽음, 장사, 빈무덤을 발견한 사건 등, 열두 제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와 같은 장면들은 복음서 내러티브에서 매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 장면의 목격자가 열두 제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구레네 사람 시몬이나 그의 이야기를 마가에게 전달한 두 아들일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 여성 제자들인데 그중 세 사람(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의 이름은 신증하게 선정되어 보존되었다. 이 세 사람은 십자가 사건 때, 시체를 매장할 때, 빈 무덤 앞에 모두 있었다. 복음서에 이들의 이름이 보전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목격자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4. 복음서들은 "목격자 증언의 인클루지오" 라는 문학장치를 이용해 그 이야기의 출처인 주요 목격자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마가복음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제자의 이름과 가장 마지막에 언급되는 제자의 이름은 바로 시몬 베드로다. 마가복음에서 베드로의 이름은  가장 많은 등장하며 내러티브의 진행과 별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 사실은 마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로서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목격담에 광범위하게 기초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2세기의 파피아스는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일했고 베드로가 증언하는 복음서 전승을 받아서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식비평가들은 이런 주장을 묵살했다. 왜냐하면 양식비평적 방법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익명의 구전 전승과정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마가와 마찬가지로 누가 역시 베드로의 이름을 동일하게 시작과 끝에 배치한다. 그러나 누가는자신이 가진 자료를 사용하여 베드로에 대한 언급을 마가와는 다르게 배치했는데 이는 누가가 마가의 문학적 장치를 인지했고 그것을 차용했다는 좋은 증거다. 누가복음에서 독특한 점은 여인들의 이름이 누가 내러티브의 커다란 부분을 둘러싸고 인클루지오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는 누가 복음 특유의 자료들이 요안나, 수산나,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에서 왔음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인클루지오라는 문학장치를 공장히 미묘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요한복음은 처음과 끝에서 익명으로 그려진 한 제자를 목격자로 제시한다.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로 표현된 익명의 목격자는 바로 요한 자신이다. 요한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증언이 베드로의 증언보다 더 통찰력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직접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5. 전통적인 견해와 같이 요한복음의 저자가 열두 제자가운데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면 몇가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그것은 마가복음에서 열두 제자가 등장하는 전승과 요한복음이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베드로 및 세베대의 두 아들과만 등장하는 전승과  요한복음은 더욱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관 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열두 제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그 내러티브가 열두 제자의 공식적인 증언임을 자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요한복음 내러티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제자들은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다른 제자들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서에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은 인물들(도마, 빌립, 마르다, 베다니의 마리아 등) 혹은 아예 등징하지 않는 인물들(나다니엘, 니고데모, 나사로)이 눈에 띈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범위에 있던 제자들 즉 사랑받는 제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목격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난다.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많은 부분이 공관복음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유는 이런 가정으로 타당하게 설명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훨신 더 사색적이고 해석적인 복음서다. 요한은 예수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공관복음 저자들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파고든다. 그런데 왜 목격자라는 사람이 사실 그대로에 대한 기록보다는 자신의 기억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담은 복음서를 쓴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랑받는 제자인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의 의미를 해석하고 발전시켜 예수에 대해 증언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할 만큼 예수와 관계가 가까왔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단순히 신학적인 내용을 예수의 말에 갖다 붙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관복음의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눈에 띄게 침묵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기독론적 쟁점에 매우 세밀하게 촛점을 맞춘 복음서로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요한은 예수의 공생에 처음과 마지막에서 제자들이 부활 사건 후에 예수가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하고 그제야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복음서와 목격담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이 아니라 한 목격자가 보혜사의 영감을 통해 자신이 본 바에 해석을 덧붙인 기억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6. 복음서의 구전 전승은 명백하게 목격자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식비평가들은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오 설화 문학의 전승 방식을 복음서에 적용했는데 이것은 심각한 오류였다. 그들은 익명의 공동체 전승, 공동체가 지닌 통제되지 않는 창의성, 공동체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관심 등을 상정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복음서는 구전 전승이 아니라 구전 역사에 해당한다. 구전 역사는 구전 전승보다는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억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대 세계에서 구전 역사는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종류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구전 전승의 일반화된 법칙을 구전 역사와 같이 한 세대 안에 일어난 현상에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글보다  말이 우세한 구두 사회에서 창의적으로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 설화와 달리 보존에 중점을 두고 다루어진 역사 전승은 분명하게 구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구두 사회에 속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에 대한 전승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중시했고 그 전승을 충시하게 보전하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렸다고 판단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에 대한 전승의 가장 중요한 수호자로 여겨진 이들이 바로 전승을 실제로 목격한 자들이었다는 것은 맹백한 사실이다. 아직 목격자들이 남아있을 때 복음서 저자들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보존되도록 글로 옮겼다. 그래서 전승의 권위있는 출처이자 수호자로서 목격자의 역활이 이어질 수 있었다.

 

7. 그렇다면 복음서 전승이 지닌 역사로서의 신빙성은 싱당 부분 목격자의 기억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그 목격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기억하는 내용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신뢰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목격자들은 독특하고 흔치 않은 사건, 중대하거나 무언가 특징적인 사건, 감정적으로 몰입한 사건일수록 잘 기억한다. 이런 기준으로 복음서에 나온 이야기들을 본다면 그 사건에 깊이 관여한 목격자들의 기억은 충분히 신뢰할만 하다. 둘째, 통상적으로 사건의 세부사항은 정확하게 기억되지도 않고 말할 때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사건의 요지는 대개 정확히 기억된다. 복음서에서 동일 사건을 다루는 평행본문을 바교해 보면 세부사항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건의 요지는 정확하게 기억되고 보존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 사건을 정확히 기억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억을 얼마나 자주 시연하는에 달려있다. 잦은 시연이야 말로 복음서 목격자들에 대해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정할 수 있는 요소다. 그들은 목격한 그 시점부터 자기들의 이야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양식비평가들은 복음서 내러티브에 비유, 선포, 병 고치는 기적 등과 같은 양식이 나타난 것은 전승 공동체가 이런 양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들은 목격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위해 전승을 사용한 많은 익명의 교사와 설교자들에 의해 복음서 전승의 개별 단위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억의 심리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억은 항상 스스로 사건을 구조화한다. 목격자가 처음으로 목격담을 말하기도 전에 기억은 이미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양식은 목격자가 처음 몇차례 이야기를 말하는 동안 더욱  다듬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 전승을 전달하는데 사용된 다양한 관습적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공동체의 용법이나 창의성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목격자들로 부터 이 모든 것이 기인했다고 본다면 아무 어려움이 없다.

 

 

역사적, 신학적 범주로서의 증언

 

1. 지금까지 역사적 증거를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복음서를 대체로 목격자의 증언으로 평가할 수 있음을 보았다. 이 사실은 복음서 저자들이 나름대로 자료를 구성해 냈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고대 세계의 모든 역사가처럼 그들도 개별전승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엮었고 복음서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신학적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전해들은 전승을 왜곡한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증언이란 범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증언이란 증인 자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아는 입장에 있다고 가정한 어떤 사람이 그의 말만 듣고도 우리가 그의 증언을 믿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하는말이다.

 

2. 그러므로  증언에 관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필수적인 사항은 인간이 무언가를 알기위해 증언에 의존하는 것은 정상적이고도 적절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 타인이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는 당연히 우리가 들은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증언을 대할 때 의심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경우,그것을 믿을 만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우리에게 없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증언은 인식, 기억, 추론 만큼이나 지식을 얻는 근본적인 수단이다. 증언은 그 자체의 속성상  신뢰를 요구한다. 이 신뢰가 무비판적일 필요는 없지만 대개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은 증언 전체를 믿을지 말지에 대한 일반적인 추론이다. 증인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만약 어떤 증인이 믿을만하다고 판단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증인이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증언은 부분적으로만 믿거나 부분적으로만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증인만 서 있던 위치에 마치 우리 자신이 서 있었던 것처럼 가정하고 우리가 직접 증언의 진실 여부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증언에 일정하게 의존하지 않고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증요한 영향을 미친다. 양식비평적 방식으로 역사속 예수를 재구성하려면 전승에 포함된 모든 개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를 개별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양식비평은 전승에 포함된 대부분의 개별 단위가 각각 구전 전승 과정을 통해 복음서에 전해졌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여부의 검증은 개별 단위 하나하나에 적용되어야 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세미나가 취했던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은 증언밖에 없다. 어떤 증언은 믿고 어떤 증언은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각 복음서의 개별 단위가 아닌 복음서 전체가 얼마나 신뢰할만한 가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3. 증언에 대해 고려해야 할 두 번째 중요한 사항은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이 특별히 가치있다고 여겼던 증언은 우연히 지나가던 구경꾼의 목격담이 아니라 사건이 깊이 관련된 사람의 증언이라는 사실이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건에 연루된 내부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내부자들은 자신이 목격한 사건의 영향을 받으며 그러므로 그 사건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므로 증언의 요소 가운데 의미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건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도 그 사건이 자신에게 미친 의미와 중요성을 빼고는 결코 그 경험을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관여된 참여자의 증언은 꼭 필요하다.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 그것도 역사상 많이 반복되지 않는 사건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예수의 삶, 사역, 죽음, 부활 등은 적어도 그 증언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류의 사건이었다. 이례적인 사건은 사건에 깊이 관여한 참여자의 증언을 요구한다. 나는 바로 이러한 증언이 복음서에 담겼다고 믿는다.

 

4. 이런 종류의 증언에는 사실과 의미가 함께 내재되어 있다. 매우 중대한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은 그 사건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말로 표현하게 되어 있다. 폴 리쾨르는 증언의 분리할 수 없는 두 측면은 준경험적 측면으로서 감각을 통한 증언, 즉 목격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증언의 내면으로 증인과 증언의 상호작용에 대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차원에서 믿을 만한 증인은 단순히 정확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증언의 의미와 그 의미가 요구하는 바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는 복음서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증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목격자들은 자신이 목격한 것과 계속 상호작용함으로서 사건의 중대함에 대해 권위있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증언의 이런 측면은 특히 요한복음과 같이 예수에 대한 깊은 해석이 담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복음서를 증언으로 읽는 시도는 본문 이면에 있는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이런 접근은 복음서를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목격자의 증언으로서의 복음서의 양식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을 위해서나 신학을 위해서나 증언은 복음서를 읽는 적절한 범주다. 목격자의 증언은 사건의 내부로부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목격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발견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목격자들의 증언은 "역사속 예수"와 "신앙의 예수" 라는 오래되고 식상한 이분법 대신에 역사와 신학이 상충하지 않고 하나로 만날 수 있는 범주로서 "증언을 통한 예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