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존 F. 캐버너
2015-11-07 18:39:28
1부 상품형식(The Commodity Form)
1. 인간이 가진 가치를 표현하고 향상시키는 한에서만 가치를 지녀할 상품이 인간의 가치 자체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상업주의와 상품이 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규정하다면, 인간은 그 소유에 따라서 그 가치와 목적이 결정되고 만다. 생산성과 시장의 논리가 궁극적 기준이 되는 세상에서는 인간적인 속성들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숭배하는 우상의 모습으로 전락한다. 상품을 숭배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며 남을 판단함으로써,인간은 자유와 인격을 앗아가는 거직 신을 창조하였다. 우상숭배는 참된 인간 관계를 없애고 인간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우상숭배는 삶의 목적을 국가나 소유, 기술,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축소시킨다.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주의적 삶이 삶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져 버렸다. 이제 상품형식은 복음이 아닌 복음이 되고 말았다.
2. 상품형식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생산과 마켓팅 그리고 소비다. 이런 가치들이 인간의 값어치와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조건짓는 윤리적 잣대가 되어버렸다. 더 많은 상품, 새롭게 개선된 상품만이 소비에 물든 인간에게 유일한 위안이다. 생산자와 판매자는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소비사회에서 소비는 단지 경제적인 요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중독이 되었다. 상품화된 인격은 공감능력, 자기 반성적 사유능력이 소거되어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나라와 공동체 이웃, 심지어 바로 우리 옆에서 애원하는 사람의 필요에 대해 응답하기는 커녕 그 필요를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을 이용해야 할 사물로, 정복해야 할 적으로 보는 습관을 부단히 형성한다. 더 이상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이웃을보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사물을 볼 뿐이다.
3. 인간성을 표현하고 인격체로서 우리의 가치를 높여 주어야 할 소유가 긍극적인 목적이 됨으로써 우리의 존재가치는 소유에 달려있게 되었다. 우리는 무한 성장의 경제에 의해 뒷받침되는 소비의 충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소비충동은 필요를 조작해서, 사물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으로 지속적인 소비를 조장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소비사회의 프로그램에 저항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우상에 의해 구정되는 쓰고 버리는 물건(상품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대체할 수 없는 인격체임(인격형식)을 깨닫게 해주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인간 실존의 인격형식이다.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졌으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는 곳이 바로 이 땅, 이 문화다. 우리가 경제적인 우상숭배와 거기에 종속된 노예 상태에 도전해야 할 것도 바로 이 땅, 이 사회이다.
2부 인격형식(The Personal Form)
6장 기독교 철학적 인간학을 향해
1. 인격형식이란 상호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인격체로 인식하고 소중히 여기는 형식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격형식의 가장 온전한 계시가 나타났다. 그러나 인격형식은 기독교의 특권이 아니다. 인격형식은 인간이 인간됨에 충실할 때 어디서든지 계시되며 나타난다. 문화라는 말은 한 집단이 그 실체를 표현하고 구현하는 모든 방식을 지칭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인간의 총체성의 일부다. 문화의 목적은 우리의 인간성을 드러내고 재확인하는데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일부인 문화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성의 단 한 가지 부분만을 표현하고 그것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될 때, 사람들은 문화를 섬기게 되고 문화는 더 이상 사람들을 섬기지 않게 된다. 궁극적 의미, 목적과 같은 범주가 인간의 필요나 목적, 혹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문화적 표현의 한 형태에 의해 규정될 때,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참으로 인간적인 문화는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해 역사를 경작하는 문화다. 그 문화는 인간의 영혼이 거하는, 친근하며 상징적인 초소이며 새로운 세대는 그것에 의해 억압받기보다 교육된다. 마침내 그 문화는 시간 속에 드러난 성령의 일반계시로서 거룩하다.
2. 신앙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행위이며 인간의 자유, 헌신, 언약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이 행위와 이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비록 문화 속에서 표현되고 구체화되지만 문화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처럼, 신앙은 문화라는 환경 안에서 자라나고 실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어떻게 문화 안에서, 참으로 역사적인 신앙인 동시에 문화적 명령이나 문화적 내재로 환원되지 않는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의 문화체계가 개인들에게 거부나 동화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게 되면, 그 체계는 더 이상 인간적인 체계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체계는 하나의 폐쇄적인 체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체계가 지닌 담론의 전 영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또한 그것은 인간을 객관화하고 비언약적인 실체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고 만다. 그럴 때 문화는 더 이상 인간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그 표현의 수단으로 삼는 문화가 되고 만다.
7장 구약성경의 하나님: 우상숭배와 언약
구약성경 이야기의 가장 놀라운 점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인간 말고는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타락하여 폭력과 불화와 분열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은혜의 언약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끈질기게 계속된다. 이 부르심을 받은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다. 그들의 역사는 정치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비인격적인 신들로부터, 불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죄로부터 구원의 역사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그들을 예속과 우상숭배로부터 이끌어내는 부르심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참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이었다. 하나님의 이런 언약적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십계명에 담긴 뜻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율법은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절망적인 의무를 나열한 법조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성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한다. 성경은 인간을 예속하거나 비하하는 모든 우상숭배로부터의 독립선언이다.
8장 그리스도의 삶 읽기
1.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반문화적이며 가장 혁명적인 문서다. 이 복음은 인간을 인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우리의 문화형식과 정반대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계시한다. 복음은 우리 문화체계가 인간을 인식하는 모든 범주들을 파괴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제시한다. 복음은 진정으로 인격적이고 해방적이며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고양시키는 인간성의 형식을 제공한다. 예수가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관계에 근거한 도덕적 본보기를 보여준다. 또한 이 시험은 권력과 인정, 도피, 마술에 대한 신뢰와 이것들의 유혹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존재론적 빈곤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우리의 참된 인격이 계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니체는 예수의 산상수훈이 권력의지를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교훈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권력과 부, 무력에 포위된 삶 속에서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대안적 왕국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했다. 산상수훈을 통해 그리스도의 나라는 실천되고 선포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게 해주는 메시지나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충격을 줌으로써 근원적인 선택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하지 않고 안전장치나 재산, 부를 택하는 것은 자유와 사랑, 인격을 포기하는 잘못된 선택이다.
2. 전능하신 하나님도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존중하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무력하고 가난해지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사랑받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기도 거부한다. 우리는 자신과 서로에게 환란의 종말과 파괴적인 자아상실을 초래한다. 자아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어느 하나를 사랑하는 것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를 내어주는 총체적 행위를 이루는 상호 관통하는 양상들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인격적이고 상호적이며 사회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용주의나 현실주의 심지어는 종교의 이름으로 “세상의 약자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그의 삶과 죽음은 인류의 수난이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짊어지셨다.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부터 도피할 때,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참 능력을 배반하고 만다. 이것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부인이며, 우리의 사랑스러움과 우리의 존엄성의 근원에 반하는 음모다.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는 먼 곳으로부터 오는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자신의 최상의 피조물인 인간과 같이 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끌어안았으며, 미완성인 우리의 배고픔과 고통을 몸소 느끼시고, 우리의 갈망과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잔을 마셨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하는가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선언이다.
9장 자본주의라는 우상과 그리스도
1. 복음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상품형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상반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온전하고 결정적인 계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곧 하나님과 인류가 만나 하나가 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는 그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온전한 계시이기도 하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알고 사랑하고 자유로이 창조하시는, 철저하게 인격적이며 관계적인 하나님에 관한 발전적인 드러냄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동시에 우리를 초월하여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언약의 삶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에만 그렇게 하신다. 이것이 인격형식의 기초다. 이 형식에서 인간은 대체될 수 없는 자유로운 인격체로 계시된다. 복음은 인간의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끌어안으며 살아가도록 하는 가치와 시각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이러한 가치는 상품형식의 가치와 그것이 주장하는 자기 정당화의 안정감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우리 삶의 각 영역마다 상품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는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모든 대립의 기저에는 근원적인 선택이 존재한다. 상품형식에는 인간이 사물로 계시되지만 인격형식에는 인간이 인격체로 계시된다. 상품형식에는 삶이 안정된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죽어 있지만, 인격형식에는 삶이 불안정하지만 살아있으며 자유롭다. 상품형식과 인격형식은 각 층위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이룬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이 둘은 인간에게 최종적이며 총체적인 충성을 강요한다. 우리는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을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 우리가 문화 속에서 기독교에 계시된 인격형식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문화의 복음”이 예수의 복음을 대체하는,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이고 철학적인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세계관으로서의 “문화의 복음”은 인간의 정체성을 왜곡시켜 인간성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부인하도록 만들었다. 문화의 복음은 사실상 무신론과 반인본주의이며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죄인 우상숭배다. 이런 우상숭배가 파괴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피조물됨, 즉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불안정한 자유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관점에 따라 만들어진 신,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예속된 존재로 만드는 신을 세우는 것은 자기소외의 행위이자 우리의 정체성을 박탈하는 행위이며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다. 상품형식은 우리의 자의식, 가치관, 인간관계를 지배와 자기과시의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반목을 일삼고 완성과 자기실현을 위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충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격형식 역시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미완결성으로부터 도망침으로써가 아니라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달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상품형식과 인격형식은 대립적이며 그 토대로부터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상품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 속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0장 우상숭배의 문화와 기독교적 실천
1. 그리스도는 인간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자 우리의 온전한 가능성에로의 초대이며, 본질적 소명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인류의 참된 정체성과의 연속성과 동일시를 통해 이루어졌듯이, 기독교 역시 그런 동일시와 초대로서 문화에 제시되어야 한다. 역사적 인간적 실체로서의 기독교는 문화 안에서 문화를 통해 실존하며 문화에 의해 지탱된다. 문제는 기독교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문화 안에서 문화를 통해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가시적이고 불완전하며 미완성인 사회적 문화적 구현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역사적 구현체인 기독교는 우상숭배적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소명에 충실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을 믿음의 핵심과 기초로 삼는 대신 그리스도인의 삶을 선포해야 할 특정한 문화적 환경 자체를 그 핵심과 기초로 삼게 되고 그 결과 교회는 문화적 정당성의 강력한 근원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 신앙의 본질과 인간의 부족함에 대한 인식에 뿌리내린 그 신앙의 의미 때문에 자기비판을 위한 근원적이며 영속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근거는 기독교가 그 자체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 그 구성원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2.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방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능성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만 해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과 신앙이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의해 촉진되거나 저지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문화의 환경과 조건까지 확장된다. 어떤 식으로든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적인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활동은 일부 전문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앙의 명령이다. 사회체제의 병폐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외적인 구조나 모든 제도적 가치관에 대해 비판하는데 몰두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변화와 성장이 지닌 유기적이며 발전적인 성격을 무시한 채, 무질서하게 구조를 부정하며 비역사적으로 혁명을 낭만화하는 것이다. 상품형식을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치환하는 것으로는 인격형식을 만들 수는 없다. 지각의 형식과 가치관은 인간의 역사성과 그 한계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구조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걸만한 가치 있는 싸움이다. 자유-구조에 대한 이원론에 대한 실천적인 해결책은 우리가 기독교적 사유와 실천 모두를 저해하는 다른 무익한 이원론을 종식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구조와 자유 중에서 그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으면서 그 둘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받아들이는 믿음과 실천을 통해 구조와 자유의 가짜 대립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
3. 인격형식을 기독교가 독점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기독교라고 해서 상품형식으로부터 안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상품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직하게 대면한다면 어느 것이 궁극적이며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최종적이며 권위 있는 해석인지 알게 될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자본주의가 가르치는 교리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재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아낌없는 사랑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인간의 삶을 사물화해가는 문화 속에서 우주의 인격화를 위해 싸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상품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비교할 때, 우리는 이 문화로부터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상품의 왕국에서 결코 편안함을 느낄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무언가 철저하게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수용하고 문화 속에서 이를 선포하는 일은 역사와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이상은 역사와 사회적 삶의 영역 속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11장 인격형식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실천
1.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은 우리 문화 속의 상품형식의 가치와 상충한다. 이러한 신학적 덕목의 실천은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이론적 체계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런 갈등과 우리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공동체와 사람들 안에서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동체 운동은 개인을 축소시키며 고립시키는 우리 문화에 맞서 공동의 신앙을 함양하는 동시에 개인으로 하여금 문화가 강요하는 규범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하는 삶을 나누기 위해 필요하다. 각각의 영역에서 공동체는 인격형식을 옹호하는 대항문화적 공동체로서, 분명한 집단적 의식을 바탕으로 믿음과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 관한 가장 근원적인 선택을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한 뜻으로 섬김과 자유, 정의를 이루는 일을 지향하는 공동체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스스로 깨어짐과 부족함을 인정하며 인격형식에 관한 비전을 사회에 제시하고자 할 때 공동체 이외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것은 기독교회에서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사용한 두 가지 특별한 수단과 전통인 기도와 성례전이다. 기도는 사회적 정치적 행위다. 기도는 상품형식에서 규범이 된 행위와 형식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 앞에 서는 훈련이며 사물의 거짓 약속에 의해 성취될 수 없는 우리의 존재와 열망을 확인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대항문화적인 행위가 기도하는 모든 과정의 특징을 이룬다. 기도는 대항문화적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정체성을 되찾는 행위이고 우리 삶의 소외와 상품화를 극복하는 행위다.
2. 기독교회의 전통과 실천 중에서 성례전은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성례전은 성경의 사용과 더불어, 가장 공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을 통해 교회의 내적 갱신과 자기비판의 원천이 되었다. 성례전은 우리 삶의 가장 친밀한 인간적 측면을 고양하고 기르는 행위다. 성례전의 특징은 인격, 헌신, 언약이며 인격형식에 대한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확인이다. 상품형식이 압도하는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는 성례전의 삶이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상품형식은 우리를 무디게 하며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망각하게 하고, 우리를 분리시켜 고립된 채로 서로 경쟁하는 개체로 만들어 버리는 반면에, 인격형식은 우리의 인격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 냄으로써 우리가 그 인격과 다시 하나가 되게 한다. 성례전은 인격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행위다. 성례전을 통해 우리는 예수-하나님-인간의 삶에 참여한다. 성례전은 우리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의 인격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궁극적으로 실현된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성례전은 상품복음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그 복음에 저항한다. 상품의 복음을 지배하는 두 가지 요소는 지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헌신에 대한 억압과 성의 사물화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상품형식에 저항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가정은 인간 삶의 가장 일차적인 영역으로서의 충실함,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 자기 용납, 친밀함 속의 성숙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주장이 거짓임을 폭로한다. 결혼과 독신은 정절의 두 가지 형태이다. 이 정절의 두 형태는 모두 인간의 조건과 그 온전한 약속을 증언한다. 하나는 친밀함 속에 다른 인격체에 대해 헌신하며 새로운 삶에 자신을 개방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형식을, 다른 하나는 문화적인 성 규범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서, 소유하지 않는 사랑과 사유화하지 않는 돌봄이라는 형식을 띤다.
12장 인격의 세계를 사는 삶
1. 국가정책이나 대중매체, 심지어 우리의 개인적 경험의 형성에 대해서 상품형식이 우리 삶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력은 압도적이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저항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총체성의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그런 위압감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인격적인 삶, 우리의 신앙, 우리의 노동, 우리의 기도가 모두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총체성,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삶은 다양한 부분들이 지닌 특수성 속에서 구체화되며 지탱된다. 그리고 부분들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은 총체성과의 관계를 통해 생명력과 의미를 부여받는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신비한 몸이 뜻하는 바다. 이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인격형식이 우리의 다양한 삶과 노동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실행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말해준다. 상품형식에 저항하는 다양한 방법은 우리 각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인격형식에 충성할 때 그 보편성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다.
2. 문화적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내적 삶에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가식과 치장을 벗고 생산과 소비, 통제의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지금 여기라는 단순한 현실에 대해 열린 자세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중심을 세우는 행위는 위협과 두려움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문화적인 압력에 대한 독립선언이다. 기도는 성공에 대한 우리 문화의 기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리스도 안의 인격형식을 드러내는 모든 인간의 표현에서는 이처럼 친밀한 관계를 중심으로 삼는 활동이 그 토대를 이룬다. 또한 이것은 상품형식에 대한 저항에서도 핵심을 이룬다. 기도는 관계 속에서 검증되며 가장 현실적으로 실천된다. 우리의 문화가 명령하는 경쟁과 개인주의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기적으로 모여 기도하며 토론하고 찬양하며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고립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3.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이 곧 소비에 대한 거부를 뜻하지는 않는다. 상품문화에 저항한다고 해서 사물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사물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사실 사물과 상품의 세상조차도 일단 사랑과 창조성, 동경에 의해 변화된다면 그 자체로서 인격화되며 심지어 성화될 수 있다. 모든 문화적 생산이 그런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소비하거나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 절제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선은 아니다. 모든 사물은 인간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인격적 근원으로 부터 분리될 때, 그런 식의 금욕주의는 차가운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며, 걷잡을 수 없는 쾌락주의만큼이나 진리와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사물이 고독과 관계라는 온전한 경험과 연결될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인격적 실존을 넓혀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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