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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언약,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나라

언약,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나라

2016-01-31 19:32:41


   언약이란 개념은 창조로 거슬러 간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처음 지으셨을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가진 존재로 지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는데, 형상이란 말 자체가 이미 다스림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히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창조시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임무를 가진 존재로 지어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언약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특별한 관계는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임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언약은 단지 관계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사람의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이기 때문에 그 다스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루어져야함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위임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함을 가르치기 위해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과 금령을 거역했고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의 이 실패는 사람 자신을 비롯한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엄청난 고통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이 순종하는데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피조세계를  다스릴 권세가 여전히 주어져 있었고 다스릴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통치권을 가진 존재인 사람이 그 권세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쓰지 않고 제 멋대로 사용한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세상과 피조세계 전체가 이제까지 고통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의 이 무법한 통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그 무법이 극에 달한 결과 노아홍수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사람이란 존재는 물론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 자체도 그 존재 의미를 상실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사람과 그의 무법한 통치아레 있는 피조물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을 노아홍수 사건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려던 창조계획을 포기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홍수사건 가운데서 노아의 식구들과 피조물들의 씨를 보존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남은 피조물들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심으로써 당초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아담을 통해서 이루시려던 그 창조계획 즉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 그런데 그 언약은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별처럼 많은 후손을 그리고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믿음으로 언약은 성립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여금 의와 공도를 지켜 행하게 하려함이었고 그들을 통하여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이 미치게 하려함이었다. 여기서 의와 공도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가르킨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 및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목적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통치를 구현할 공간으로 약속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에서 번성하게 하시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본격적인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의 약속은 이루어졌고 가나안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당초 아브라함 언약에서 의도하셨던 언약의 목적을 명백하게 공적으로 드러내신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킴으로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내산 언약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바로 언약관계를 규율하는 언약법이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 언약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율법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언약 상대방인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언약법으로서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문화된 뜻이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서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할 선택된 민족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맺은 직후에 발생한 황금 송아지 사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왔고 그것이 회복되는데 엄청난 고통이 따랐던 것이다. 이때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노아홍수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언약을 배반할 때 그들의 존재 의미는 상실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대채로 불순종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이방족속에게 짓밟히고 약속의 땅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목적은 가나안 땅에서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언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을 통해 이루어야 할 언약의 목적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왜곡된 선민의식은 언약의 목적보다는 언약 그 자체를 중시했던 잘못된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사명을 망각할 때 그들 자신은 물론 약속의 띵도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에게 짓밟히고 약속의 땅에서 쫒겨나 이방의 포로로 사로잡혁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계힉은 실패한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 목적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비록 사람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언제나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언약에 신실하셔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반드시 사람믈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경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한 사람을 만들어 내셔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언약에 신실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가운데 오신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바로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인해 오신 분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 그레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산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이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믜 창조목적은 사람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언제나 언약 상대방인 사람이었다. 아담이 그랬고 이스라엘이 그랬다. 그러나 이제 두번째 아담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는 언약에 신실한 아담으로서, 또한  언약에 신실한 이스라엘로서 하나님 앞에 섰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그 언약적 신실함을 충만하게 드러내셨다. 그의 십자가 죽음 안에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와 공의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만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따라 오셨으며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 사람의 언약적 신실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죽을을 통해 증명된그의 언약적 신실함은 아담의 언약적 신실함이며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그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며 동시에 사람의 언약적 신실함이다. 언약에 신실한 언약의 양 당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것이니 이제 하나님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드디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대표한 그리스도의 언약적 신실함은 이제 그가 대표한 언약백성의 신실함을 만들어 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왔듯이, 그리스도의 언약적 신실함은 그의 백성의 언약적 신실함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이미 하나님나라의 씨는 뿌려졌고 곡식은 자리기 시작했지만 추수 때가지 기다려여 한다. 추수때까지 그 곡식이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가라지와 싸우며 자라가야 하고 열매를 맺는 기간이 필요하다. 드디어 때가 되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이고 추수가 시작될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며 하나남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이란 밭에 하나님나라의 씨를 뿌렸고 그 씨가 자라서 결실할 때가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추수 때가 이르면 단호하게 추수가 시작될 것이다. 언약적 신실함이란 언약법을 지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바로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마침내 완전히 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의 언약백성이 언약법을 지켜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길이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