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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전도와 탕자 이야기

전도란 무엇인가?

2015-11-20 20:40:06


    우리는 어떻게 전도해야 할까? 전도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과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왜 예수가 자신의 죄를 인하여 죽임을 당했으며 예수와 자신의 관계는 무엇인가라고 그들은 반문하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죄 문제와 어떻게 관계되는 것인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왜 자신들에게 구원이 필요한지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도"를 전하는 일, 즉 전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전도가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전하려는 "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고 이 "도"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도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믿음에 있다. 특별히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서 지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간에 선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전도의 근본 전제이다. 그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이것이 전도를 위한 근본 토대이고 전제인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절대자나 조물주 등 초월적 존재에 대한 종교성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가진 선험적인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그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예외없이 하나님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서 전도는 출발하는 것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전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서사를 제공한다. 이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먼 곳으로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죽을 고생을 하다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겠다고 생각한 것이나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아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인 것은 모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뗄에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없었다면 아들은 돌아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버지도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도와 관련하여 생각해본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용납하여 주시는 일은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간에 이미 존재하는 선험적인 관계에 기인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그 관계는 인식을 하든 못하든, 경험을 하든 못하든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기독교가 고백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신앙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독교는 전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도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 믿음은 모든 인간은 창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하듯이 인간의 현실은 하나님을 떠나서 고난에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이다.  탕자가 고생하는 하는 이유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듯이 사람이 허무하고 고난스런 삶을 사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또한 탕자가 고생을 끝내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듯이 사람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탕자 이야기에서는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기다렸지만 찾아나서지는 않았고 아들이 스스로 돌아오기만을 가디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난 아들을 적극적으로 찾으시는 아버지로 묘사한다. 적극적으로 찾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자기 생명을 다 바치는 그런 아버지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해야 할 "도"란 바로 자기 생명을 바쳐서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같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란 자기 아들을 찾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탕자 이야기에서 고생하던 아들이 스스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해줄 것을 기대하고 돌아왔다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의 도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찾으려는 아버지의 사랑이요 지극한 헌신인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지극한 사랑, 넘치는 자비가 나타난 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해야 할 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목메어 부르시는 부르심이요 자기 아들을 향한 사랑의 부르짖음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애절히 부르시고 안타깝게 부르짖으신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그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부르심이 응답을 요구하듯이 십자가의 도는 반드시 회개와 믿음을 요구한다. 그 도를 듣고 회개하거나 믿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는 굴러온 복을 발로 차는 사람이요 스스로 죽을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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