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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광장에 선 기독교-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미로슬라브 볼프

2015-11-06 18:11:43


광장에 선 기독교미로슬라브 볼프

1. 나는 공적인 삶에서 모든 종교를 배제하려는 세속주의적 입장과 특정 종교가 공적인 삶을 지배하는 종교적 전체주의의 입장 모두를 반대하여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종교가 세상에서 배제되는 위험과 특정 종교가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위험 모두가 극복되어야 한다. 다양한 정치질서는 기독교 신앙과 병립할 수 있다.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장치적인 기획으로서 다원주의를 포용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세상을 고치려는 예언자적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이때 기독교 신앙이 공적 영역에서 제기하는 주된 주제는 인간 삶의 번영과 공공의 선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인간 번영을 위해 일하는 방식은 자신들의 종교적 비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세상에 실현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예언자적 역할은 세상을 고치기 위하여 인간의 번영을 위하여 그리고 공공선을 위하여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며 기독교 정체성을 말과 행동으로 세상 속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당면한 도전은 신앙의 기능장애를 피하고 인간의 번영을 하나님과 긍정적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실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일하심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자 세상의 희망이며 그래서 종국적으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한 인간을, 한 문화를 변영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전이다.

 

4.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고쳐야 한다는 책임감과 공공선을 통한 섬김은 예언자적 종교로서 기독교 특유의 기질이다. 하지만 미래에 그러한 영향력을 권력의 핵심에서 발휘하기보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펼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멀든 가깝든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수많은 행위자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 현실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서 인간의 번영과 공공선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의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하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고 유연한 네트워크이다.

 

5.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다 같이 추구하는 정치적 과제인 자유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 다양한 종교적 인생관을 수용하려는 시도 속에서 등장했다. 공공의 문제에 종교적 신념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을 정교분리 이론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이런 자유주의는 자신이 택한 신앙대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자유주의는 더 이상 자유주의가 아니다. 종교가 대중의 광장을 떠나든지 밀려나든지 광장은 비어있지 않다. 그곳은 곧 세속주의라고 불리는 보편적 현상으로 채워진다. 종교적 이성을 공적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고 정교분리를 철저히 시행할 때 세속주의는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등장한다.

 

 

6. 공적인 토론에서 종교적 이유를 배제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는 공통의 관점을 가진 공동체 정치에 집착한다. 그러나 서구 국가들은 그러한 공동체 시대를 벗어났으며 이제 국가는 다수의 종교와 다양한 인생관을 수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자유주의 정치체제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광장에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 다원적인 세상에서 종교의 주된 사명은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희망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7.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한 다원주의적 해석은 자유민주주의가 종교에 부여한 역할과 잘 부합한다. 자유민주주의가 특정 종교관을 사적 영역으로 밀어낸 것처럼 다원주의적 해석 또한 특정 종교관을 특정문화에서 발생한 우연한 특징으로 끌어내린다.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주의는 모두 종교들이 갖는 특이성을 배제하려고 한다. 다원주의는 종교의 다양성을 그 자체로 용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성을 축소해 내재적인 통일성을 모으려 하는데 있다. 이들은 거창한 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 종교를 그 안에 집어넣고 각 종교를 단지 특정한 문화 속에서 나타난 사례로 만들어 버린다.

 

 

8. 기독교 신앙을 배타적으로 해석하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갈등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적 영역에서 모든 종교를 배제한 세속사회를 만들거나 아니면 기독교가 공적 삶을 지배하는 종교적 전체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종교적 전체주의에 반대하면서 정치적 기획에서 다원주의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공적 신앙(PUBLIC FAITH)- 미로슬라브 볼프

2017-05-12 01:37:32


볼프의 문제 제기

 

1.  볼프는 기독교는 예언자적 종교로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여 개인적 삶과 문화에서 어그러진 모습을 바로잡고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로 번성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세상을 고치려는 하나님의 행위였고 고로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세상을 고치려는 예언자적 신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볼프가 보기에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세상과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것이 볼프의 관심사였다. 먼저 볼프는 기독교가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에 놓인 위험(극단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계몽주의 이래 기독교를 공적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세속주의의 위험이고 ,둘째는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승리주의적 혹은 패권주의적 위험(기독교 전체주의)이다. 볼프는 이 양극단을 모두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중세의 크리스텐덤을 경험한 이후 계몽주의를 거처 근대로 접어들면서 세속주의의 도전에 직면했는데. 이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중에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내면화, 타계화하는 도피적(순응적) 반응이라면 다른 하나는 과거 크리스텐덤으로 돌아가려는 퇴행적(반항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볼프는 이 두가지 반응이 모두 피해야 할 극단이라고 본다. 

 

2. 볼프는 기독교 신앙의 기능을 상승기능과 회귀기능으로 구분하였는데 상승기능이 신과의 만남을 위해 위로 올라가는 기능이라면 회귀기능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삶에서 실천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볼프는 이 두 기능에 장애가 각각 나타날수 있는데 특히 회귀기능의 장애로 신앙의 나태함과 신앙의 강요 두가지를 제시한다. 사실 상승 그능과 회귀기능은 설명의 편의를 위해 구분된 것이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 두 기능은 항상 같이 작동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 작동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볼프가 지적한 회귀기능의 장애의 원인은 사실 상승기능의 장애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상승기능의 장애가 회귀기능의 장애를 초래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볼프가 제시한 회귀장애 두 가지 중에서 나태함은 일종의 도피적 반응이라면 강요는 퇴행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볼프의 해법 제시

 

1. 볼프는 다원사회에서 기독교는 많은 행위자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는 과거에 비해 이제 주류가 아니라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런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번영이라는 공공선을 추구하면서 다른 행위자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볼프는 기독교는 다른 행위자들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볼프는 다원사회에서 기독교는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에 완전한 적응도 불가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동시에 세상과 관계를 맺고 대화하는 것이다. 이는 친구로서 서로 생산적으로 토론하고, 적으로서 파괴적으로 싸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한편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원사회의 다른 행위자들과 대화할 것인가? 사실 기독교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세상과 대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기독교 역사는 잘 보여준다. 세상 변혁을 강조한 신칼빈주의가 오히려 세상에 동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다. 성경이 말한대로 기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당하려면 먼저 자신이 빛과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져야 하는데 기독교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과 동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변혁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교회변혁없이 세상 변혁이 없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교회됨을 강조하는 후기 아나뱁티즘의 신학적 통찰은 주목할만 하다. 기독교는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상과 대화할 것인가?  볼프는 이 주제를 그의 다음 책 "행동하는 공적신앙(PUBLIC FAITH IN ACTION)"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2014-07-07 17:51:55


<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세미나> 4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2014 7 10 100주년 기념교회 교육관

 

1.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욕을 먹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이제는 왠만해선 그런가보다 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비판의 수위는 임계점에 다 달았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막말과 교회 안에서의 간증이 공영방송을 통해 여과없이 방영되면서 교회는 자신들의 속살을 그대로 공론장에 노출시켰다. 이제는 성난 시민들이 교회의 언어를 그들만의 언어로 용인하려 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몰상식하고 반인륜적인 언어로 고발해 버린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던 우리들의 언어와 사유가 이제는 공론장에 그대로 민낯을 드러냈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적실성과 타당성을 요구받게 되었다. 사적언어와 공적언어의 경계가 무엇이냐, 혹은 교회가 사적인 영역이냐, 공적인 영역이냐는 가치판단은 뒤로 하고, 이제 더 이상 신앙의 내적 논리와 언어가 공론장의 비판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증후다. 세속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 하는가? 수많은 가치와 이념들이 투쟁하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언어는 어떻게 자신의 독특성을 지키면서 가치를 전도시킬 수 있을까?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속화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신정주의적 통치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존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직면한 위기이자 볼프의 문제의식이다.

 

2. 볼프의 문제제기는 이렇다. “어떻게 종교가 공적인 영역을 자신의 주장에 따라 전체화시키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종교를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시키려는 세속적인 입장을 거부할 수 있는가?” 여기서 중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세속적 다원주의 사회이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서 서로의 가치와 생각을 존중하며 조화롭게 공존해야할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볼프의 말처럼 기독교는 이제 현대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내부로부터, 그것도 단편적으로 행사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사회 참여의 결과에 대해서는 통제할 능력이 없다”(125)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가 사회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진리를 전달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진리를 전달하느냐?’를 고민해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 예언자들이 왕을 향해 준엄한 목소리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한 왕이 회개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다.

 

3. 그렇다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자산 가운데 공적인 영역에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볼프가 제시하는 것은 성서의 지혜 전통이다. 성서가 말하는 지혜야 말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모든 문화와 전통 가운데서도 쉽게 접근 가능한 인류 공통의 가치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지혜란 모든 사람에게 아주 깊은 차원에서 적용되는 특별한 종류의 진리다. (149)

 

신앙의 지혜는 보편 진리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는 있지만 이 지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 (150)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세상과 나눌 때, 다시 말해 기독교의 진리 체계가 가장 보편적인 형식으로 정형화된 지혜를 공적인 영역에서 타자와 공유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그리고 어떻게 나눠야 할까? 볼프는 지혜가 마치 선물을 주는 행위와 같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의 모든 관계와 활동은 사고파는 교환관계로 고착화되어 있는데, 이는 정작 가장 은총을 충만하게 경험해야 하는 종교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선물은 값없이 베푸는 무조건적인 은총이다. 사랑과 용서는 이러한 지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이 은총을 몸으로 체화시켜 겸손함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지혜를 나누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를 통해 기꺼이 회개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지혜가 매력적이고 합당하고 유용한 것임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 우리는 지혜를 나누는 자로서 지혜가 가진 권능과 지혜를 받을 사람들의 진실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168)

 

4. 볼프에게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목소리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근거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나태함과 강요라는 신앙의 기능장애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기독교는 자신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 속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목표는 기독교 공동체가 많은 행위자 중 하나가 된다는 현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서 있든지  주변부든, 중심부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디 있든지  그곳에서 인간의 번영과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120)

 

기독교는 하나의 문호 혹은 문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무화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 나는 신의 도덕적인 율법이 보편적으로 유효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율법은 사람들의 의지에 반대되지 않는 유효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이 땅에 부과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01)

 

사회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신앙은 공공 생활에서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로 존재하면서 인간의 번영에 대한 자신들의 비전을 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하여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202)

 

 

5. 롤즈로 대표되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정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신념들은 무지의 장막으로 가리고, 오직 절차적 정의에만 충실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때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이나 인간관, 사회적 가치를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볼프가 월터스토프의 논의를 통해 밝혀냈듯이 공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배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오히려 어긋나는 것이다. 독특한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을 공적 영역에서 거론하지 않으면서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양심의 자유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와 같은 기능들을 차단하고 순수한 절차적 정의만을 허용한다면 그 영역에서 우리는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의 정체성은 생각보다 두꺼운 것이고, 그것은 좀처럼 벗겨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볼프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영역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이러한 정체성 형성에서 찾는다.

 

6. 볼프는 정체성의 형성이 차이와 경계를 통해 항상 비판적으로 재구성된다고 말한다. 볼프는 초기 저작부터 꾸준하게 소통과 대화의 신학을 추구했는데, <삼위일체와 교회>에서는 동방정교회와 가톨릭 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에큐메니칼 교회론을 제시했고, <배제와 포용>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타자를 통해 끊임없이 연결되고 재구성되는 자아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변 문화와 역동적으로 주고받으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구성된다. (141)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네트워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문화 전체와 혹은 폭을 좁혀서 그 문화의 지배적인 힘고 관계를 맺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다만 한 문화 속에 존재하면서 그 문화의 여러 측면을 받아들이고, 변화시키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만 있는 고유하고 배타적인 문화적 영토, 즉 언어, 가치, 관습과 합리성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주어진 문화 속에서, 문화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이질적인 것을 계속해서 도입하는 것이다. (137-138)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과 경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정체성이 결국 수많은 타자를 통해 구성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삶은 공동의 가치와 질서를 보다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드는 것, 즉 인간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전 존재를 통해 세상에 참여하고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7. 신앙의 내적 논리와 언어가 공적인 영역에 진입하려 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는 자신의 고유한 기독교 전통과 언어를 상실하면서까지 세상과의 소통과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신학이 소통과 번역의 과정이 거쳐야 한다면, 이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특수한 종교 전통과 거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실천들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의 장으로 편입되기 위해 보다 추상적인 단계로 축약되거나 축소될 위험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와 특징들이 삭제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위탁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추상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 공동체에 대해서 정직하지도 않고 비판적인 태도도 아니다. 이러한 태도가 공론장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며, 학문의 영역에서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전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두 가지 근본적인 신념 즉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종교적 정체성은 통과할 수 있는 경계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러한 신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의 목소리는 고유한 그리스도인의 목소리가 되고 다른 많은 목소리를 그 안에 담을 수 있게 되며 또 다른 목소리가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 나올 수 있다. (188)

 

8. 노무현의 참여정부 이후 시민사회운동이 활성화되고 자연스럽게 대중집회와 시위는 그 이전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덩달아 기독교도 이러저러한 정치적인 집회를 시청앞 광장에서 개최했다. 한기총의 대표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며 사학법개정 반대집회로부터 시작해서 차별금지법 반대집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교인들을 동원해가면서 공개적인 정치집회를 치뤄 냈다. 이러한 정치집회의 적실성을 논하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잠시 뒤로 하고, 그동안 한국교회의 사회적 아젠다가 얼마나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쳤는지, 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기독교의 공적 가치가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충분한 토론과 비판의 무게를 견디어낸 여론이었는지를 묻고 싶다. 오늘날 많은 공공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공적인 논쟁과 끊임없이 연결시키면서도 이를 가능한 기독교 전통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한 것처럼 공론장에서 여론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대화 당사자들이 진정성 있는 대화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비판적 이성의 해방적인 능력을 함께 공유해야만 한다. 한국교회는 과연 이러한 공론장의 기본적인 토론의 규칙과 정서들을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했는지 묻고 싶다.

 

9. 과연 한국사회에서 광장에 선 기독교는 과연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 있게 전달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할 수 있을까? 또 광장에서 의사소통을 통해 도출된 합의와 결론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반추하고 비판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국교회가 철저한 개혁과 쇄신을 이루길 소망해 본다. 그리고 볼프가 그 길목에서 작은 징검다리가 되길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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