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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창세기의 내러티브

창세기의 내러티브

2015-09-25 01:03:36


 

창세기 1장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그 창조주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초월자가 아니라 사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창조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근거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이란 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계시한다. 이렇게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로 지으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중심일 뿐 아니라 천지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셨으며 만물의 주인이시지만 자신이 직접 만물을 다스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다.

 

창세기 2장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사람이기 때문에 2장은 사람의 창조에 대하여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두시고 그곳에서 다스림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런데 2장에서 부터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래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처음 계시된 것은 출애굽기 3장이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앞두고 있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2장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으신 들짐승과 각종 새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면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신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다스리는 행위를 대표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무엇이라고 이름을 짓는지 보고고 싶어 하신다. 만물을 지으셨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일은 사람에게 맡기시는 분, 이분이 바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시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하였는데 2장에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그것은 남자를 도울 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신 것이다. 남자의 일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일이므로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는 것은 바로 다스리는 일을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인격적이니 신분적으로 남자를 돕는 보조자가 아니라 다스리는 일에 남자의 동역자로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 따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나중에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남자로 부터 여자를 지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은 두 사람이 서로 협동하여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다스리는 일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스리는 일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다스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최소의 공동체인 가정의 목적도 다스림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인간관에는 외로운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없다. 인간은 창조로부터 공동체적 존재로 지어졌고 이후의 모든 출생도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의 관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공동체적 존재인 것이다. 공동체적 존재인 사람의 목적은 공동체를 이루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는 개별자인 개인들이 모인 단체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그렇듯이 생래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각각 만드시지 않고 아담으로 부터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면서 하와라는 존재가 자신과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운명적으로 결합된 한 몸임을 표현한 것이다. 2장에서 중대한 계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 금령을 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명령을 어길 때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경고가 덧붙여졌다. 죽음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불순종의 당연할 결과로 경고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때, 사람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 금령을 명하시고 엄중하게 죽음으로써 경고하신 것일까?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1장 26절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다스림의 권세는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위임하신 권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사람은 그 위임받은 권세를 권세의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뜻에 따라서 사용하여야 한다.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선악과 금령에는 그 열매를 먹지 말아야 하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금하셨다는 그 이유뿐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이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천지를 지으셨고 또 특별히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 이것이 창조 목적이며, 이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창조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말은 창조의 종말이 아니라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는 창조의 완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 3장

3장은 인간 역사의 분수령이 된다. 첫 사람이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써 이후 모든 인류는 심각한 파국에 들어가게 된다. 첫 사람을 범죄하도록 부추긴 존재는 뱀이었다. 성경은 이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하나인데 그 중에 가장 간교한 들짐승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였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어떤 악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이 모르셨거나 아니면 막을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창조 경륜 가운데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수하시고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사람의 불순종을 막지 않으셨고 사람을 불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순종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미 순종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는 자유는 물론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도 가진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뱀과 하와가 나누는 대화를 보면 하와는 선악과 금령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고 또 그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뱀의 유혹하는 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하와의 경우는 잘 보여준다. 에덴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그 나무들의 이름을 붙이신 분은 하나님이실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었고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마도 생명나무라는 이름은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이 악임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무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뱀은 전혀 반대로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한다. 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마치 지금 눈이 어둡다는 거짓된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다고 단언함으로써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선악과 금령을 범했을 때, 즉각적인 죽음이 임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즉각적으로 임하였다. 첫 사람의 범죄는 중대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는데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은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자기가 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심각한 훼손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관계의 훼손은 사람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이고 결국 인간은 그 존재 근거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육체의 죽음보다 더 본질적인 죽음인 것이다. 두 가지 관계의 훼손으로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창조 목적인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다스리는 일에 동역해야 하는 하와는 오히려 아담을 망가뜨림으로 사람은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고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에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결국은 수고롭게 일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땅을 다스려야 할 존재인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땅을 다스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스릴 자가 없게 된 땅, 순종할 대상이 없어진 땅, 이것이 바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땅은 더 이상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음으로 사람이 먹기에 좋은 나무대신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수고롭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수고의 결과는 오직 육체의 죽음뿐인 허무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창조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결국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했지만 악에게 압도되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세기 4장

남자와 여자로 부터 태어난 최초의 사람인 가인이 한 일은 살인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3장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범죄의 결과로 깨어진 사람간의 관계는 급기야 살인이라는 극단적 결과로 이어졌다.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공동체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르던 사람의 관계가 증오함으로 죽이는 관계로 무섭게 변한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분노였다. 가인이 분노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존재이지 분노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가인의 분노는 아담의 불순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분노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시며 그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가인의 후예들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 동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이런 능력은 다스리는 존재로서 사람에게 생래적으로 부여된 기능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기능을 주신 이유는 그 기능을 가지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능을 가진 가인의 후예들은 두 아내를 두고 사람에게 복수하고 죽이는 자들이 되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사용되어야 할 기능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사용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만드는 문화의 한계요 비극일 것이다.

 

창세기 5장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아담에게 셋을 아들로 주셨다. 5장에서는 아담의 계보로서 셋의 후예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만일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무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과 그 후예들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의 후예는 아예 아담의 계보에 나오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셋의 후예들도 이런 창조 목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비록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담 계보에 대한 기록은 자녀를 낳고 살다가 죽었다는 말만 반복될 뿐이다. 창조 목적을 따라서 다스리는 일은 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3장에서 일어난 본질적은 죽음의 결과일 뿐이다. 이미 존재 근거와 의미를 상실한 인간에게 남은 일이란 육체적인 소멸일 뿐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죽음은 인간이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을 짓누르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인간이 그 존재 의미를 다시 회복하는 길 뿐이다. 인간이 그 존재 의미를 다시 회복할 때 육체의 죽음은 더 이상 인간을 짓밟지 못할 것이다. 라멕은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롭게 일하는 자신들을 이 아들이 위로할 것을 기대한 것이었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범죄함으로 땅이 다스림을 받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오히려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수고롭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아담의 계보에 대한 기록은 절망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담의 계보 중에 노아라는 인물의 등장은 새로운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창세기 6장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할수록 사람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하였고 그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모든 계획은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악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의 타락한 상태를 슬퍼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결코 창조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행위를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사람의 범죄와 타락도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땅에서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다. 인간의 멸절은 이미 첫 사람의 범죄로 예상된 것이었다. 첫 사람의 범죄로 이제 사람은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 이는 사람이 그 존재 근거와 의미를 상실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 목적을 떠난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니시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어 바로 잡으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원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 사건은 단순히 타락한 인간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잡아 창조 목적으로 향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멸망에서 구하시기로 작정하신다. 성경은 노아가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였던 자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의인이라고 완전한 자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임박한 심판을 노아에게 알게 하셨고 그 심판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노아는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의로운 자이고 완전한 자라고 평가를 받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은혜는 값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믿음을 요구한다. 이런 것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이미 아브라함 이전에 노아로 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만 멸절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멸절시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사람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도록 창조된 것인데 이제 다스릴 사람이 멸절한다면 그것들도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사람이 존재 이유를 상실할 때,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다른 피조물도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듯이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만물도 사람을 떠난 독립적은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가 부패한 것을 보시고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다고 하시며 사람을 비롯한 땅에 거하는 피조물을 함께 멸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창세기 7장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로 함께 구원하신다. 사람만 구원하시고 그 사람의 다스림을 받을 다른 피조물들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사람을 구원한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다른 피조물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 사건으로 사람과 짐승을 심판하신 일이나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짐승들을 구원하신 일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다. 성경은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것이 노아가 당대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이유이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범죄하게 되었다면 노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다 멸절하였으며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나타난 홍수 사건은 세상을 바로 잡으시려는 하나님 창조 행위였다.

 

창세기 8장

홍수 사건이후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하나님은 홍수 사건 이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한 존재임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 그리고 계절의 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홍수 사건은 하나님이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을 바로 잡으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견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 목적을 포기하기로 하신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상을 바로 잡으시는 보다 근본적인 일을 하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 아닐까? 문제는 어려서부터 악한 인간의 마음이고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의 근본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므로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고치실 것이라는 암시로 불 수 있다.

 

창세기 9장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라고 명하신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 하신 목적은 바로 이 창조 목적을 이루라고 하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노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짐승들을 멸절하신 이유도 사람이 창조 목적에서 떠남으로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산 짐승을 사람에게 채소와 같이 음식으로 먹도록 주신 일이다. 4장에서 가인의 자손이 목축을 하였다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식물로 주시지 않은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신 것 같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을 명하셨다. 짐승의 피든 사람의 피든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짐승의 피를 먹거나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경우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이 교훈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사람이 다스리는 일에세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암시한다. 특별히 사람의 생명은 귀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실 것이며 땅을 멸한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과 그들과 함께 하는 생물에게 세우는 영원한 언약, 변치 않는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무지개를 그 언약의 증거로 세우셨다. 이렇게 다시금 홍수 사건과 같은 심판이 다시는 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 부터 악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악함을 고치셔서 다시는 땅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주받는 일이 없게 하시겠다는 엄중한 약속일 것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그것은 가나안이라는 별명을 가진 함이 노아에게 저지른 잘못이 지적되고 그 결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면 그 시대적 정황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었을 때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노아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일화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창세기 10장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아벳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홍수 후에 사람들은 다시 땅에 번성하게 되었고 그들은 여러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나 땅에서 살았다. 여기서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나은 후손들이 가나안땅에 사는 족속을 구성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셈의 후예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함을 암시할 것이다.

 

창세기 11장

11장에서는 온 땅에 언어가 하나이며 말이 하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0장에서 사람들이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나뉘어 살게 된 이유가 11장에서 나타난 바벨탑 사건 때문인 듯하다.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대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탑 하나를 쌓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가인의 후예들이 성을 쌓고 거기서 자신들을 위한 문화를 건설한 것과 같은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막으셨다. 다스리는 존재로 지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양한 문화 기능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이 기능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는 일에 사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악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장에서 이미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계보가 기록되었는데 11장에서 다시 셈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이어져 나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세워진 아브라함의 등장을 소개하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셈의 후예로서 그의 아비는 데라였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손자 롯, 그리고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데라에게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하셨지만 데라는 중도에 포기하고 하란에 머물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12장

드디어 성경인물 가운데 최대의 인물인 아브람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12장으로 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12장 이전의 소위 원 역사(primitive history)라고 부르는 1-11장은 창조와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원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 이전의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를 설명하는 역사인 것이다. 그 요지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을 통하여 온 피조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창조목적에서 떠나게 되었다. 온 인류는 죄에 빠졌고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이르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런 약속을 하신 것인가?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도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복을 받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이 온 세상으로 흘러가는 복의 통로 역할을 위하여 선택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신 약속, 그리고 노아 홍수 후에 하신 약속의 성취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시작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12장에는 기근으로 말미암아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아내를 빼앗기는 위험을 당하는 에피소드가 나타난다. 이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고대에 이방 민족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낯선 땅에 먼 곳의 나그네가 정착하여 산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며 아마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엄청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낯선 땅의 외로운 나그네 신세인 아브람에게 그 땅을 모두 주시겠다는 약속이나 한 점 혈육도 없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 역시 동일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람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말했을 것이며 아브람이 오고 오는 세대에 우뚝 선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것이다. 엄청난 약속은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믿음을 요구한다.

 

창세기 13장

롯이 아브람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도록 하나님은 정하셨는데 롯이 아브람을 떠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복을 떠나는 것이었다. 롯은 요단지역의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고 그 땅을 택했지만 아브람은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풍요로운 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아브람을 떠나 후에 아브람에게 다시금 약속을 상기시키신다. 비록 지금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나그네로서 우거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보이는 땅을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주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신다는 약속도 해주신다. 그러나 아브람이 이런 약속을 들을 때에 그에게는 땅 한 뙈기도 자식 한 명도 없던 때였다.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약속을 하신 것이다. 사실 아브람이 아비 데라가 가나안으로 오려다 포기하고 눌러앉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것도 하나님께 때한 엄청난 믿음이 요구되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앞이 보이지 않는 낯선 땅에서 힘겨운 삶 가운데 다시 확인시켜준 하나님의 약속은 더 큰 믿음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믿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언 피조세계에 성취되는 것이 바로 창조목적이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창세기 14장

롯이 거주하던 소돔성에 전쟁이 일어났고 롯이 적군에게 사로잡혀가고 그 재물도 노략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아브람은 조가 롯이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한 자 삼백 팔십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쫒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하여 냈다. 사실 이런 전쟁에서 가나안에 우거하는 나그네에 불과하던 아브람이 적군들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엄두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망설이지 않고 그 일을 감행하였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이 가진 믿음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그는 상황과 현실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을 가나안으로 부르시고 엄청난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멜기세덱이 한 말은 이 전쟁에서 아브람이 승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람이 전쟁의 전리품을 자기가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자기 힘이 강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5장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브람에게는 전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자기 집에서 길리운 자 중에 엘리에셀을 자기의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될 것이라고 그 약속을 다시금 확증하여 주신다. 그리고 아브람의 후손이 뭇별과 같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마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으며 나아가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약속이 없이는 믿음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의 믿음이 있는 것이다. 약속이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지만 믿음이 없이는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사람의 믿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부터 자신의 뜻을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신실하심)이라면 사람의 믿음은 사람의 의로움(신실함)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동(약속)에 대한 사람의 합당한 반응(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의로운(신실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종주권 조약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확증하신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엄중한 맹세의 표시였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사람에게 그 약속을 확증하신 것이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특별히 지으심으로 창조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약속을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날에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는데 사실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기 이전, 창조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근본적으로 언약적 관계로 출발한 것이다.

 

창세기 16장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아브람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래는 자기가 출산을 못하고 있으니 자기 여종을 하갈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었다. 사래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오해이며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브람이나 사래는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고 삶의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그 씨의 번성을 약속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만민에게 복을 베푸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17장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브람이 99세 때에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마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아브람의 믿음도 하나님 앞에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듯하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약속을 굳게 붙드는 사람의 신실함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씨와 땅의 두가지 약속을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여기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아브람과 아브람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씨와 땅의 약속은 그 약속의 성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씨가 그 약속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사람의 창조 목적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서 형성하실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 그리고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받을 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이고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에게 미칠 복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과 더불어 세우시려는 언약은 바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 언약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약속만이 나타났는데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언약을 지키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 편에서만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람도 약속을 지키라는 것인데 사람이 지켜야 할 약속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 편에서 지켜야할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명하셨다. 그러니까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과 세우는 언약에 참여하는 언약의 표징으로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렇게 하여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과 사람 편에서의 믿음(약속에 대한)으로 매우 쌍방적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언약의 표징으로서 하필 할례라는 형식을 요구하신 것인가? 그것은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을 확증하시려고 친히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피의 서약을 하신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15장에서 하나님이 피의 서약을 하신 것에 대응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도 할례라는 피흘리는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피의 서약에 대응하여 피의 서약으로 참여하라는 요구를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은 피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엄중한 피의 서약인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 언약을 배반하면 생명을 잃게 될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18장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이 사라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노쇠한 아브라함과 경수가 끊어진 사라 사이에 아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만큼이나 믿기 힘든 엄청난 약속이다. 17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으나 18장에서는 사라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두 사람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믿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셀 수 없을 정도의 후손을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하시려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후손을 주시고 또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심으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강대한 아브라함의 나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할 때,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의와 공도를 행함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 만민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빛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들도 이스라엘을 따라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창조 목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비록 노아의 홍수와 같이 전 지구적인 심판을 다시 행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본질은 노아의 홍수에서도 보듯이 단순히 죄악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창조 목적을 떠남으로 존재 의미가 상실된 사람에 대한 엄정한 판단이시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면하지 못한 것은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인이 없다면 이 세상은 존재한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할 의인의 나라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음으로 멸망하였지만 천 하만민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추기]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이 천하 만민에게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자식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도를 행하는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약속하시지만 그 약속을 사람의 순종을 통해 이루시길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은 임박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뜻밖에도 만일 소돔성읍이 의인 오십 명을 찾는다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시겠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결국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의인으로 열 명으로 말미암아 소돔성이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결국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과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듯이 하나님은 의인 열 명으로 인하여 소돔성을 용서하실 것이다.

 

창세기 19장

아브라함 이야기 안에서 롯에 대한 이야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롯은 사래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롯도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3장에서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게 되는데 결국 롯은 복을 떠난 것이었다. 그래서 14장에서는 롯이 사로잡혀가고 재물까지 노략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함께 멸망할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롯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신 것이다. 롯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듯이 장차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20장

아브라함은 12장에서 가나안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에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길 위험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네게브 땅의 아비멜렉에게 동일한 일을 당할 위험에 처한다.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듯이 이번에도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어 아브라함의 아내 일로 인하여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경고하신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롯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애굽의 바로나 네게브의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을 뻔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무조건인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천하 만민에게 국한될 것이며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천하에 누구든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추기] 애굽과 네게브에서 아브라함이 당한 일은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사는 아브라함의 삶이 얼마나 위태한 삶인지를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나안 땅에 왔지만 그곳은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무법천지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셨으며 아브라함을 위협한 그들에게 사망의 경고를 하셨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또한 저주하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에 왔지만 현실은 언제나 위태로웠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는 암담한 현실에서 아브라함이 붙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21장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드디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성경은 이 일이 여호와의 약속하신 대로 성취된 일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이스마엘을 비록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쫒겨남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나온 후손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기 때문이다.

 

[추기] 21장은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이 가시화되고 구체화된 대단히 희망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드디어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나고 이스마엘이 쫓겨남으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의 상속권은 견고해진다. 그리고 아베멜렉과의 조약사건은 이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위협 속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 비록 나그네 삶이지만 나름대로 자기 지경을 확보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씨의 약속이 가시화되고 땅의 약속은 아직 기다려야 하지만 위협을 받는 나그네 삶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듯하다.

 

창세기 22장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데 그것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천청벽력과 같은 명령이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한마디 토도 달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감행한다. 이것은 이전의 아브라함과 매우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씨와 땅의 약속을 주실 때 믿기는 믿었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하여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며 또 어떻게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고 작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믿음이고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우뚝 세워진 이유였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라고 인정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과 헌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납득되어야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납득 여부와 관계없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며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취해야 할 정당한 태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며 사람은 이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다스리는 권세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이 실패한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담은 바로 이것을 배워야 했으나 실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은 바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처럼 만물을 다스려야 할 사람에게 순종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아담이 실패한 지점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이루실 것을 맹세하신다. 그 약속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어 그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대적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하는 것이다. 아담은 그 대적에게 패배를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은 대적에게 승리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의 승리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준행하였기 때문이다. 약속이 없이는 믿음은 있을 수 없지만 믿음이 없이는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다.

 

[추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희망에 찬 21장의 모든 것을 일시에 원점으로 돌려버리는 것 같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씨의 약속이 이삭의 출생으로 겨우 가시화되었는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의지할 것은 이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뿐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실체임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7절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한다.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요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이삭이라는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사람의 믿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16-18절에서 다시금 이전  부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맹세로 다시금 확증하여 주신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이 독자로 아까지 않은 것,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것이 이 약속이 성취되는 이유인 것 처럼 말씀하신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확인시켜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며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속이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시며 그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분명한 진리이며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 진리를 잘 보여준다.

 

창세기 23장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매장할 소유지를 헷족속에게 사려고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와서 거주한지 오래지만 자기 소유의 땅 한 뙤기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땅을 사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전체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직도 아브라함에게는 사라를 매장할 땅 한 뙤기도 없는 상태였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아직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믿음으로 그 약속을 기다릴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이 경우는 잘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사람의 믿음을 요구한다. 그래서 믿음이란 약속의 성취에 대한 믿음이 동시에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땅을 헷족속에게 산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확보한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추기] 이삭의 출생을 통해 씨의 약속은 일차적으로 이루어졌고 아브라함은 자기 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눈으로 경험하였다. 그러나 땅에 대한 약속은 이미 하나님이 15장에서 말씀하셨듯이 400년 후에나 이루어질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아브라함은 결코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온 지경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지금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땅 한 뙈기도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막벨라 굴을 헷족속에게 돈을 주고 사며 사라를 거기에 매장할 뿐 아니라 나중에 자기도 거기에 매장된다. 가나안 땅에서 매장지를 사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장차 가나안 온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의 표현일 것이다. 비록 그 약속의 성취를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자신과 사라가 거기에 뼈를 묻고 그 약속을 기다리겠다는 결연한 믿음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이루어질 조각구름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부단히 현실을 넘어 약속을 붙들려는 몸부림이고 고민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것(현실)으로 행치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창세기 24장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이 맞이할 아내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만일 여자가 이삭의 아내가 되려고 가나안 땅으로 올 것을 거절할 경우라도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아브라함이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와 그의 후손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삭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이삭이 아내를 위하여 가나안을 떠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마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택하는데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이삭의 아내를 택하는데 분명히 어려움을 가증시키는 조건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사람의 지혜나 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으로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주시마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는 일도 순조롭게 이루실 것을 또한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리브가는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 이삭에게는 자기 사촌형제의 딸인 셈이다.

 

창세기 25장

드디어 아브라함은 백 칠십 오세에 늙어서 기운이 진하여 죽고 사라가 매장된 막벨라 굴에 그도 매장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가나안 땅에 사라도 아브라함도 뼈를 묻고 죽어서도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삭이 쌍둥이 형제인 야곱과 에서를 낳았는데 그 아이들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여호와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이삭에게 하셨다.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 에서가 이삭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 보리는 일화가 등장한다. 쌍둥이 형제인 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늘 관심을 자기고 있었고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장난 같은 일을 통해 이렇게 장자의 명분이 에서에게서 야곱으로 넘어갔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쌍둥이 형제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처음부터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에게 있었다. 장자의 명분이란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 일화는 보여준다. 장자의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에서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창세기 26장

흉년을 피하여 이삭은 그랄로 내려가게 됨으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지시하는 땅, 곧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거주하라고 명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와 땅의 복을 다시금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천하 만민이 이삭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순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받은 자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 역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빼앗기는 위기를 당하게 되고, 또 우물 문제로 그랄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은 물론, 이삭 역시 지극히 위험한 나그네 생활을 가나안에서 영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지만 현실은 여전히 험난하고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삭은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여호와의 약속을 바로 보았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고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창세기 27장

이삭은 장자 상속의 전통을 따라서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이삭의 축복은 야곱에게 주어지게 된다. 아마도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 주어졌던 여호와의 계시에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리브가는 이삭을 속여서라도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였는데 이는 야곱을 편애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마도 그 계시를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에서가 헷족속의 딸 두 명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던 것을 보아도 그는 언약 백성이라는 자각을 갖지 못한 자였던 것이다.

 

창세기 28장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이삭을 거처 야곱에게로 이어진다.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진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약속을 받는 자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에서가 그 약속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무관심한 자였기 때문이다. 이삭은 결국 이 진리를 수용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으로 이어질 것을 인정하게 된다.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또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밧단아람으로 가는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는 야곱이 약속의 땅을 당분간 떠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왔다면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야곱에서 나타나시어 그가 누워있는 땅, 고 약속의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삭에게 이어지고 다시 야곱에게 주어지지만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그리고 야곱에게도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 이스마엘과 이삭 이야기 그리고 에서와 야곱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약속이 주어졌을지라도 오직 믿음으로만 그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리가 이미 구약에 선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창세기 29장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하여 지내면서 레와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여 12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의 조상이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불러내시어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이 차지할 땅을 준비하셨다면 이번에는 야곱을 아브라함의 족속들의 땅으로 불러내시어 장차 약속의 땅을 차지할 씨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땅의 준비와 씨의 준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 즐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을 사용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그 약속을 믿는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분이심을 가리키는 호칭일 것이다.

 

창세기 30장

레아와 라헬의 갈등과 경쟁,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욕심, 이런 인간적인 욕망들조차도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사용된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보다도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과 갈등 차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신다.

 

창세기 31장

드디어 씨의 준비가 이루어지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조상의 땅 곧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는 야곱이 거기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을 하셨고 야곱은 서원을 통하여 그 약속에 반응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약속과 믿음이란 맥락에서 자신을 호칭하시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되 그 약속을 받는 자의 믿음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창세기 32장

야곱은 이제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가 홀로 가나안 땅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듯이 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벧엘에서 말씀하신대로 야곱에게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야곱이 직면한 근심은 에서의 복수였고 그래서 야곱은 에서의 손에서 건져주시길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였는데 야곱의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야곱의 씨름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야곱이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였고 그 사람이 축복하기 전에는 그를 가게하지 않았다. 이런 야곱에게 그 사람은 야곱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었다. 야곱은 나중에 자기가 날이 새도록 씨름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곳이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렀다. 여기서 야곱을 통하여 이루어질 민족의 이름이 주어졌으니 곧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었으니 이 두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여호와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약속을 붙들고 씨름하는 약속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씨름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야곱의 씨름이야기는 보여준다.

 

창세기 33장

야곱의 우려와는 달리 에서는 야곱을 반기며 환대하였다.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친 밭을 돈을 주고 산다. 그리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 헤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34장

디나의 강간 사건이 터지고 그로 인해 세겜 족속과 심각한 유혈사태가 발생함으로 야곱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정작 야곱이 걱정하던 것은 에서의 위협이었는데 이제 세겜에서 안정된 정착을 하려던 야곱에게 이런 갑작스런 위기가 닥친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35장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거주하라고 명하신다. 야곱은 벧엘에 이르러 그것에 제단을 쌓고 그 것을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금 약속을 상기시켜 주신다. 비록 디나의 강간이라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지만 그 일로 인해 야곱을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가게 되고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창세기 36장

에서 곧 에돔의 족보 이야기가 길게 기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비록 에서가 약속의 자녀에서 제외되었지만 이스마엘이 그러하였듯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에서에게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약속을 상속하지 못한 자들인 이스마엘이나 에서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세상적인 복을 받고 번성한 것을 보면 장차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그 약속에 참여할 천하 만민이 받을 복이 얼마나 클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창세기 37장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했다는 진술은 이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본격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에서의 낯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야곱에게 벧엘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이 새로운 이야기는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이 야곱의 족보이야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야곱의 족보 이야기는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야곱의 족보를 통해서 성취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야곱의 족보 이야기라고 말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온통 요셉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것은 요셉을 통하여 야곱에게 약속된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요셉은 꿈 이야기로 인하여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급기야는 애굽에 팔려가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비참하게 된 요셉의 신세를 통하여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요셉의 긴 이야기는 창세기의 마지막까지 어이진다. 그러므로 요셉 이야기의 주제는 요셉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야곱의 족보 이야기이다. 

 

창세기 38장

요셉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고 유다에 관한 이야기기 등장한다. 그리고 39장에서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왜 요셉 이야기의 중간에 뜬금없이 유다 이야기가 끼어든 것인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요셉 이야기는 야곱의 족보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족보를 세우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서 요셉 이야기를 하고 있듯이, 동일한 목적으로 지금 유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 이야기는 지금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는 야곱의 가족들이 처한 현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삭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아내를 취했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가나안 여인 중에서 아내를 취하고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야곱의 족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을 죽이시고, 유대의 아내 가나안 여자도 죽게 하셨으며 결국 가나안 여자의 소생을 통해서 야곱의 족보를 세우지 않고 다말을 통해서 유다의 후사를 이어가게 하셨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요셉을 통하여 야곱의 가족을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옮기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가나안 땅은 비록 약속의 땅이었지만 적합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그곳에 머문다면 유다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그들은 가나안 족속에 동화되어 흡수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옮기시어 때가 찰 때가지 그들을 기르실 것이다. 

 

창세기 39장

다시 요셉 이야기로 돌아가서 요셉이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려 그의 집 가정총무로 성실하게 일하게 된다. 그러나 좀 풀릴 것 같던 요셉의 운명은 다시 억울하게 옥에 갇힘으로 또 다시 바닥으로 내러간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온 것도 모자라 이제 억울하게 옥에까지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하였다고 말한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오고 더구나 애굽에서도 억울하게 옥에까지 갇힌 신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요셉이 형통했다는 것일까? 아마도 그 형통은 요셉이 누리는 개인적인 행복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형통일일 것이다.

 

창세기 40장

요셉이 옥에 갇힌 애굽 왕의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 과연 그 해석대로 일이 성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셉의 삶에 또 다른 반전이 준비되고 있다. 요셉은 이 일로 인해 전직이 회복된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을 옥에서 건져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다. 요셉에게는 아직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 시간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간이었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의지할 길이 없는 그런 길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창세기 41장

이 일로 부터 만 이년이 흘렀다. 그리고 바로가 꿈을 꾸었다.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비로소 술 맡은 자가 요셉을 기억해 내었다.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이 애굽 온 땅의 총리로 등장하는 전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요셉은 물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억울하게 애굽에 종으로 팔리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기가 막힌 긴 세월을 요셉은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통과해 왔다. 그 길고 고통스런 시간들을 통해서 요셉은 무엇을 배웠을까?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르치셨던 그 믿음을 요셉에게도 가르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훈련이 끝났을 때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은 요셉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신 것이다.

 

창세기 42장

이제 준비는 끝났고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일만 남았다. 기근으로 인하여 굶주리던 야곱의 형들은 유일하게 곡식을 살 수 있는 애굽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시므온을 인질로 삼고 자기 친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야곱이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베냐민을 데려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는 요셉은 죽었고 시므온도 잡혀있는데 베냐민마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43장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이 혹시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애절한 심정을 고백한다. 

 

창세기 44장 

요셉은 은잔 사건을 꾸며서 형들의 마음을 시험하였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인질로 잡히겠다고 자청하는 대목에서 요셉은 형들이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창세기 45장

그래서 요셉은 더 이상 그 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그 형제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알리고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요셉은 형들에게 그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았다고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하나님이 (야곱의 족보)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이며 야곱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자신을 먼저 보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에서 우리는 이제 요셉은 자신의 드라마틱한 인생행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 깨닫고 있음을 발견한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때는 도무지 알 수 없던 조각그림 같은 자신의 삶의 이야기들을 이제 요셉은 하나의 의미 깊은 그림으로 맞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았지만 자기를 이리로 보낸 이는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세웠다고 말한다. 

 

창세기 46장

요셉의 소식을 들은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으로 향하게 된다. 드디어 야곱 족속의 입(入)애굽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대로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족속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실 것이며 반드시 그들을 다시 인도하여 이 땅으로 올라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이 대목에서 야곱의 가족들의 이름이 하나씩 열거되면서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바로 애굽에서 번성하여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할 이스라엘의 모종 씨들이었던 것이다. 

 

창세기 47장 

드디어 야곱의 족속들은 요셉이 계획했던 대로 고센 땅의 라암셋에 정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족속은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다. 애굽 땅에 거주한지 십칠 년이 되었고 야곱은 나이가 백사십칠세가 되어 죽을 날이 가까웠다. 죽음을 앞둔 야곱이 요셉에게 한 유일한 당부는 자기가 죽거든 자신을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는 것이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인 것을 결코 잊지 않았고 비록 애굽에서 편히 살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성취에 대한 기대뿐이었다. 

 

창세기 48장

야곱이 병들었고 요셉은 자기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야곱을 문안하였다. 야곱은 요셉에게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엄숙히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야곱은 지금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번성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듯이 장차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이것이 험악한 세월을 거치면서 야곱이 터득한 삶의 진리의 전부였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면서 부른 하나님의 호칭은 더욱 의미가 깊다. 그는 ”내 조부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곧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이고 또한 자신을 평생 동안 기르신 하나님,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신실하셨듯이 자신에게도 평생토록 신실하셨다는 감격스런 고백일 것이다. 야곱은 바로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탁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축복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신실하게 행하심으로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곧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칭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한 것이다.

 

창세기 49장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야곱이 그들에게 주는 마지막 당부이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게 주어진 책망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그들에게 주는 경고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그들의 욕망을 지적하고 그것들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아무 희망이 없을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유다에게는 그가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이며 그의 손이 원수들의 목을 잡으며 그의 형제들이 그의 앞에 절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 주어진다. 특히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장차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지도적인 위치에 오를 유다지파의 운명과 관련될 것이다. 이어서 스블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에 대한 간단한 예언이 나오고 요셉에 대한 유다 못지않은 놀라운 예언이 나오는데 이는 유다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지도적 지파로 등장할 에브라임지파의 장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냐민에 대한 간단한 예언으로 야곱의 유언은 끝나는데 야곱은 다시금 자신을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선조들과 함께 장사할 것을 명한다. 그러면서 야곱은 그 굴이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이라고 확실하게 규정하면서 그 굴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에게 정당하게 돈을 주고 산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드디어 야곱은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둠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믿음은 그의 후손들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창세기 50장

요셉은 야곱의 명령대로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헷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로 삼은 곳이었다. 야곱이 죽은 후에 그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을 미워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들에게 한 요셉의 대답은 요셉의 일생의 의미를 요약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진술이었다. 요셉은 자신도 죽을 것이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을 돌보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자신의 해골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맹세시켰다. 드디어 요셉도 죽었다.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고, 요셉도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있는 한, 그들의 믿음도 살아서 그 후손에게 계승되어 갈 것이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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