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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전환기의 한국교회- 김동춘

전환기의 한국교회- 김동춘

2015-06-19 07:49:45


 

한국 기독교의 패러다임 변화

 

초창기 한국 개신교는 세속문화와 삶의 양식과 분리하려는 이원론적 분리형이 주된 흐름을 가진 지극히 이원론적이고 분리주의적 기독교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독재적인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변혁형 패러다임의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그 신학적 토대는 주로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이었다. 물론 이 당시 변혁형 패러다임을 주도한 그룹은 보수진영이 아니라 에큐메니칼 진영이었다. 이 때 한국 기독교는 사회참여적인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전도 중심의 복음주의권으로 극명하게 양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복음주의 진영도 로잔언약과 기독교세계관 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복음주의 신학의 계승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통합하려는 새로운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1974년 로잔언약과 기독교세계관은 그 성과에 대한 비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 사회참여와 문화변혁을 향한 동인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변혁형 기독교가 에큐메니칼 진영의 민중신학, 해방신학이라면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로잔언약이나 기독교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은 분리형도 변혁형도 아닌 적응주의 기독교이다. 적응형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과 세속적 관심사나 가치관을 대립시키지 않고 공존하면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형태인데 복음과 세속가치를 동시에 취하는 흐름은 적응형 기독교의 주된 특징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는 분리형에서 출발하여 변혁형과 적응형으로 그 패러다임이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원론에서 세속화로 이행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역설적인 것은 분리형 패러다임이 변혁형으로 이동하였으나 정작 한국교회에 엄습한 것은 적응형 패러다임인 것이다. 이원론을 극복하려다가 세속화가 안착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원론은 더는 극복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이원론에서 세속화 과정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적 구원은 저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세속적 소망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지금 여기서 누리는 물화된 형통과 유물론적 천국을 약속하는 세속화된 구원이 되고 말았다.

 

고대의 세계관이나 중세 크리스텐돔의 세계는 여전히 비세속화된 세계였다. 세속화란 세계를 신성한 힘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화된 세계관이 출현한 근대는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으나 군림하지 않는다는 말로 신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자연 질서의 자율성을 설명하려 하였다. 신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인간이 자리하고 인간은 자율적인 의지로 세계를 기획하고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중세의 크리스텐돔 세계가 종료되고 근대의 여명이 시작되자 종교개혁자 루터는 세속화의 현실을 두왕국론에 근거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다. 루터의 두왕국론은 영적통치의 영역인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속통치의 영역인 세상왕국으로 구분하는 성속이원론이지만 루터는 직업소명설을 제시하여 세속 직업을 신적 소명으로 설명함으로써 성스러움의 지평을 세속적 삶 전제로 확장시켰다. 루터의 두왕국론은 세상왕국을 그리스도의 통치권 밖에 위치시키고 지상나라의 자율적인 작동의 길을 터줌으로써 사실상 세속화론을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두왕국론은 교회와 국가의 이분법적 분리를 허용하면서 세속국가의 자율성을 해명하는 근대적 기독교 사회론이라고 말한 수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루터의 세계관이 이원론적 세계관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현실은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그러므로 인간은 초월 안에서가 아니라 내재 안에서, 즉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루터의 두왕국론이 구원론 중심의 세속화론이라면 기독교세계관은 창조중심의 세속화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보편적 세계통치를 강조하는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우주적 지평 그리고 종국에는 일반은총론을 통한 창조세계의 무한한 긍정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에서 모든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거룩한 소명이며 인간의 문화적 활동에 의한 세속적 삶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거룩한 세속성은 기독교세계관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준거점인데 그렇다면 기독교세계관은 세속화 현상에 대한 기독교적 용인이 아닌가? 기독교세계관은 창조의 관점에서 세상을 긍정하도록 인도하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기독교 세속화론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전근대적 세계관으로부터 세속화의 과정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초창기 시절처럼 분리주의적 존립방식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변혁주의 방식이나 적응주의방식을 택해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이원론에서 세속화로, 분리형에서 적응형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한국교회에는 구원에 대한 관념 또한 이원론적 구원론에서 세속화된 구원론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적응형 기독교에서 구원이란 천상의 구원과 함께 지상의 번영을 신적 축복의 약속을 포함하였으니 구원의 물질화,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구원관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영지주의적 혹은 가현설적 구원을 극복하는 측면이 있지만 세속화적 세계관이 가져온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마치 인간의 현세적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이나 인간 욕망에 응답하는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위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적응형 기독교의 세속적 유물론적 구원과 변혁형 기독교의 역사 참여적 구원론을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에 갇힌 교회에 두 가지 흐름의 대응방식이 제기되었는데 하나는 로잔언약으로 대표되는 총체적 선교론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 전통의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거세게 밀려오는 세속적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문화 변혁적 역동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적응형 기독교로 전환되고 말았다. 로잔언약이나 기독교세계관으로 이원론이 극복된 것이 아니라 세속화로 말미암아 자연히 이원론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원론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무한대로 긍정하는 세속적 세계관이 문제가 된다. 세속화는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며 과정이다. 교회는 세속화를 포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세속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세속화 현상에 직면하여 교회는 복음의 본질과 교회됨의 정체성을 재발견하여 세상 언어와 시대정신을 재해석하면서 그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

 

  

총체적 복음주의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복음전도, 영혼구원, 교회설립에 두는 복음주의 선교론과 인간화, 사회참여, 사회정의에 두는 에큐메니칼 선교론은 외형적으로는 1970년대까지 치열한 양극화의 긴장상태로 대립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에서 일기 시작한 근본주의에 대한 자성과 비판 그리고 60년대 이후 시민운동, 반전평화운동 등을 계기로 복음주의 진영은 사회 윤리적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 결과 1974년 로잔언약을 기점으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통합이라는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이제 양극화된 신학적 관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선교적 동향은 복음화와 사회정의의 결합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진영에 등장한 총체적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다.

 

복음주의 선교의 특징은 첫째 복음화의 대상, 과정, 목표가 개인의 차원이며 복음화는 구조를 변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인격에 관한 차원이란 점, 둘째는 복음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이지 정의, 평화, 인권, 사회악에 대한 수평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 셋째는 교회의 이식과 확장이란 점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전도를 최우선 과제로 부여하고 복음전도에 집중할 때 사회적 책임을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빌리 그래함은 로잔언약에 동참하였지만 그 역시 복음전도가 사회정의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역설하였다. 복음주의 선교관의 문제는 복음화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을 개인주의적, 교회주의적 차원에 국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세상의 선교가 아니라 교회-교회의 선교가 되어 선교는 서구교회의 팽창사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이에 반해 에큐메니칼 선교관은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교회의 선교에서 세계의 선교 혹은 사회선교로 지향함으로써 사회 참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교론, 타자를 위한 교회, 역사 안에서의 구원 등의 신학적 개념들이 중요하게 작용하며 wcc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관의 약점은 죄의 근원적 차원이 약화되어 사회적 억압과 착취로 정의되거나 구원을 사회정의나 역사 내에서 실현되는 사회, 정치적 해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복음이 영성화 되었다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복음이 현세화, 물질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개인 영혼과 개인회심을 강조하고 에큐메니칼은 사회구조와 사회구조의 전향을 강조한다.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의 회심에 전력하면 사회구조의 갱신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확신하며 따라서 교회의 외형적 증가를 통해 사회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진보적 에큐메니칼 진영은 인간내면의 죄성을 간과하면서 외부적인 사회구조의 개선만을 전능한 대답으로 확신한다.

 

로잔언약은 복음주의 선교관의 대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화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칼과 복음전도를 중시하는 복음주의 선교관 사이의 오랜 대립과 균열이 로잔언약을 통해 균형과 통합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사회 정치 참여에 대한 시대 상황 앞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자기 성찰적 고백서이자 합의된 반향이며 새로운 계기를 열어준 선언이었다. 로잔언약은 복음주의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서로 배타적으로 간주해 온 것을 참회하며 복음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이라고 선언하였다. 로잔언약은 복음전도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양극화를 해결하고자 했다. 로잔언약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상호 배타성을 배격했지만 동시에 이 둘의 동일화도 배격하였다. 로잔언약은 총체적 복음화를 천명하긴 했지만 양자의 관계를 구분하고 복음전도 우선주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로잔언약은 복음주의 전통을 따라서 복음화의 본질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로잔언약은 역사 안에서의 구원이나 해방으로서의 구원, 또는 구조악의 구속을 말하지 않고, 단연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죄인된 개인의 죄 사함과 그로 말미암은 인격적인 화해로서의 구원을 말한다. 로잔언약은 분명히 복음주의 선교관에 일대 방향전환을 가져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복음전도 우선주의를 견지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추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는 비판에도 직면한다.

 

로잔언약을 주도한 존 스토트는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정의를 복음전도보다 우선시하지 않았다. 스토트에게 총체성이란 어디까지나 복음전도를 우선하는 총체적 선교, 총체적 복음화이다. 그러므로 스토트가 말하는 총체적 복음에서 창조와 구속, 복음화와 인간화, 구원과 해방, 초월과 내재 같은 신학적 차원의 일치와 통합이 제시된 것은 아니다. 스토트에 의하면 복음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곳에만 존립하며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는 교회를 넘어 일반사회로 확장될 수 없다. 다만 교회 안에 표현되는 하나님나라의 영향력의 결과들이 어느 정도 세상으로 흘러갈 수 있을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스토트는 전통적인 복음화론을 견지하면서 복음전도 우선주의 입장에 서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을 추구하는 총체적 복음화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결국 스토트에게는 복음과 사회정의, 하나님의 정의와 세계의 정의, 구원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대위임령과 샬롬 및 사회정의의 상관성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존 스토트와 함께 로잔언약에 참여한 로날드 사이더는 복음전도와 사회책임을 동반자 관계로 보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구별되지만 동등하다고 말하며 스토트보다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통합적으로 결합하였다. 그래서 그는 개인적 죄를 넘어서는 사회적 죄를 언급하고 개인적 회심과 함께 사회적 회심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사이더 역시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를 구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개인과 삶의 영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점은 동의하지만 사회, 장치, 문화의 구원이나 복음화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복음화나 구원이란 어디까지나 죄인된 인간이 죄사함과 거듭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인격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사이더 역시 스토트와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전통이 지향하는 개인주의적 복음화 모델의 우산아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존 스토트나 사이더는 복음전도와 사회책임을 결합하는 총체적 복음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구원과 복음화에서 개인주의적 한계 안에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 복음주의가 복음과 구원에 대해 가진 근본적인 이해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주의가 구원을 개인주의적이고 인격적 차원으로 규정하는데서 기인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 우주적 하나님과 언약의 하나님, 세계와 교회, 일반은총과 구원은총, 칭의와 사회정의, 사회개혁과 중생을 명백하고 분리하고 있다. 복음주의 구원관은 개인주의적 모델을 가지고 영원과 현재, 영혼과 육체, 개인과 사회, 복음화와 인간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 교회와 세계 양자를 구분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양자의 연관성은 충분히 사고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기독교세계관

 

로잔언약이 교회의 선교적 관점을 복음전도에서 사회참여로 확장하려는 선교론적 동인이 주된 흐름이었다면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관점을 구원중심의 기독교에서 창조중심의 기독교로, 종교적 삶에서 세상 속에서 일상의 삶의 의미를 중시하는 기독교로 확장하려는 세계관적 동인이었다. 로잔언약이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적 방향에 선회점을 던져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세속적인 삶의 자리인 직업, 학문,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기독교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거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지는 못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선교론적 동인이 아니라 세계관적인 관점이 필요했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속영역으로 이끌어 내어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지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근본주의 기독교나 성장주의 기독교 그리고 총체적 복음주의 패러다임보다 한결 진일보한 흐름이며 더 포괄적인 전환점을 던져준 흐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세계관은 기독교는 구원종교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조망하여 개인의 경건생활이나 교회생활을 넘어 세속적 생활전체를 포괄하려는 일종의 삶의 체계이고 삶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세계관은 일상생활의 신학운동이다. 그러므로 기독세계관의 일차적인 과제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기독교를 삶의 총체로 보는 관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전 영역을 그리스도의 주재권, 왕적 통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통치에서 벗어난 영역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적 관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을 조명하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세계관의 출발점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신앙을 공적 삶과는 무관한 사적신앙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사적이고 종교적인 영역과 공적이고 일상적 영역을 이분화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세계관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분법으로부터 통합된 세계관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신앙이 단지 종교적 경건생활이나 개인구원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구현함으로써 복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확장되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복음주의 경향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는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셨다고 말하면서 종교적 개인주의나 경건한 내면성으로 후퇴하는 종교화된 신앙으로부터 세속성의 삶을 신앙적 의미로 새롭게 해석한 본회퍼의 사상과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세계관은 네덜란드의 신칼빈주의자인 카이퍼리안 사상체계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은 개혁주의의 다른 세계관인 루터의 두왕국론이나 카톨릭의 종합주의 세계관 그리고 아나뱁티스트의 대립적 세계관과 다르다. 독교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역동적인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서 출발하여 피조 된 세상의 타락을 적시하며 구속은 창조된 모든 세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구속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죄용서와 중생, 칭의일 뿐 아니라 전 피조세계의 회복이자 새 창조로 본다. 이렇게 기독교세계관은 창조중심의 세계관을 특징으로 한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틀에서 타락보다 구원을 구원보다 창조에 강조점을 두는 신학이다. 기독교세계관은 창조 시에 주어진 문화명령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명령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과 함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두 가지 위임령으로 본다. 기독교세계관은 창조는 문화와 역사의 발전을 향해 진행한다. 그러므로 구속은 죄에 대한 응급처방이 아니라 원래의 창조가 분화와 개현을 통해 발전되도록 의도된 것으로 본다.

 

기독교세계관은 타락을 설명하면서 구조와 방향을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조란 창조의 법, 창조의 본질을, 방향은 창조의 질서가 지향하는 지향점을 말한다. 구조는 타락에도 여전히 불변하고 선한 것으로 존속되나 방향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 혹은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창조-타락-구속의 내러티브는 창조로 형성된 선한 구조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왜곡되었는데 그것을 구속으로 변형하고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독교세계관은 타락에서 출발하지 않고 창조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타락을 신적형상의 소멸이나 박탈이 아니라 심각한 손상이나 왜곡으로 본다. 기독교세계관에 의하면 비록 타락으로 인간의 신적형상은 왜곡되고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신적형상의 잔존물이 남아있으므로 하나님의 창조법에 응답할 능력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기독교세계관의 특징중 하나인 일반은총론과 연관된다. 기독교세계관이 말하는 구속은 타락으로 왜곡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은 구속이 결코 개인구원이나 영혼구원이 아님을 강력하게 강조한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현재의 나라에서 구현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의 종말론은 세계멸절의 종말이 아니라 세계변형의 종말론이다.

 

기독교의 사회형성론에 이원론에 근거한 분리모델 그리고 두왕국론에 기초한 적응모델이 있다면 기독교세계관의 사회형성론은 그리스도의 왕적통치에 근거한 변혁모델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관은 우리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곳은 한 치도 없다는 카이퍼의 진술을 언제나 반복한다. 카이퍼리안의 전통 아래 형성된 기독교세계관은 종교와 삶을 분리하고나 영적영역과 세속영역을 분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영역과 피조물 전체를 그리스도의 왕적통치아래 둔다.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 경건이나 사적인 종교영역만 아니라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세계관은 일종의 공적신앙이다. 기독교세계관은 중세 가톨릭의 영역종합론이나 루터파의 영역공존론과 달리 그리스도의 보편주권사상을 기초로 하여 모든 삶의 영역이 본래적 규범적 원리에 의해 개현됨을 말한다.

 

기독교세계관이 가진 창조중심의 이론적 토대는 일반은총론이다. 일반은총이란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으로서 구원받은 신앙인이나 자연인 모두에게 개방된 보편적인 은총이다. 이 은총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연인의 양심이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인간사회의 도덕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며 죄 가운데 처한 인간의 문명과 역사가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일반은총론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이 퇴거하거나 중단되지 않고 여전히 그의 창조세계를 향한 섭리적 통리를 진행해 가신다는 것으로 신칼빈주의 세계관의 핵심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다. 신칼빈주의 세계관에서 일반은총론이 강조되는 이유는 신자든 불신자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신칼빈주의는 이 세상에서 일반은총의 활동으로 형성된 인간의 문화적 산물은 미래의 영과의 나라로 편입된다고 주장한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은 타락이후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의 본래의 창조능력 안에 존재한다고 본다. 카이퍼는 일반은총 안에는 영속적 작용과 진보적 작용이 있는데 전자는 죄를 억제하는 작용을 하고 후자는 인간 안에 내재된 잠재력이 발전 진보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속적 작용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라면 진보적 작용은 인간을 그 사역의 도구와 동역자로 삼아 진행하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동역 없이 죄를 통제하시지만 인간문명의 발전과 진보는 인간의 노력과 협력 및 독창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카이퍼에 의하면 인류는 역사 속에서 창조세계의 잠재능력을 개현해 나가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일반은총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카이퍼는 죄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는 퇴보하거나 정체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일반은총의 진보적 작용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관은 비극과 참상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현실을 간과한 진보적 낙관주의 역사관이다.

 

카이퍼는 자신의 영역주권론에서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이 사회의 각 영역 속에 각각의 고유한 법질서를 부려하여 유지되도록 하였으므로 각각의 영역은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자기 법칙성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 국가, 학교, 학문, 기업 등 삶의 모든 영역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영역주권론은 어떤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의 기능적 분화를 설정하여 두 영역사이의 독립성을 보장하려 했던 루터의 기독교사회형성 이론과 유사하다. 루터의 두왕국론이 종교와 국가의 고유한 영역의 분화를 준비한 근대사회의 분화 과정이라면 영역주권론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에 응답한 측면이면서 동시에 다원주의 사회에서 영역의 조화와 균형을 촉진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영역주권론은 삶의 각 영역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보장하는 사고체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실현을 현실 사회에서의 크리스텐돔의 문자적 실현을 추구하는 신정 정치적 착각을 불허한다. 영역주권론은 한편으로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이 미쳐야 한다는 하나님 주권 일원주의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 영역은 서로 침해받을 수 없는 고유한 주권에 따라 분화와 개현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다원주의 사회론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역주권론은 기독교세계관적 사회원리를 현실사회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문자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무모한 세계관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 대한 포용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완숙한 사회이론임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칼빈주의 세계관은 신정 정치적 하나님 주권신학이 아니라 세속화와 다원주의 사회에도 기독교 관점으로 세계를 해명할 수 있는 세계관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실현, 역사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증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사회적 섬김 등의 과제를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과제의 핵심은 사적종교로서 복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의 본질이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삶의 전 영역에서 구현되도록 하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실천적 과제를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보여준 개혁교회의 유산의 하나를 신칼빈주의 신학과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세계관은 한국교회가 이원론적 패러다임이 포섭되어 있던 시대에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성경적인 대안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세속화된 세계관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오늘날 한국교회에 기독교세계관은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과연 기독교세계관은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오늘날 상황에도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는가? 더구나 모든 창조가 선하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세계관은 적응주의적 기독교를 양산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또한 온 세상과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재권 실현을 확신하는 기독교세계관의 논리구조에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신정 정치적 승리주의가 도사릴 위험이 있다. 열정적인 기독교세계관 사고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 원리체계를 각 영역에 문자적으로 대입하려고 할 때 갈등과 분란의 우려가 있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이지 기독교의 세계지배나 교회의 세상에 대한 주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이지 그리스도인의 통치나 교회의 통치는 아니다. 또한 일반은총은 기독교세계관의 논리체계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도 되지만 반대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반은총의 과도한 강조는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긴급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죄된 현실보다 은총의 우위성을 강조할 때 구속의 긴급성과 불가피성이 약화될 수 있다. 우리는 선한 창조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창조한 세계의 심각한 타락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특히 오늘의 적응형 기독교 패러다임에서 죄와 타락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것을 중요하다. 일반은총을 강조하는 창조중심의 신학체계는 죄스러운 창조 현실을 긍정하게 함으로써 세속적 가치를 은총의 결과로 오용할 수 있다. 신칼빈주의 세계관이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추구하는데 반해 한국교회 안에서 기독교세계관은 학문, 문화, 윤리의 측면에서 신앙과 삶을 통합하는 틀로 이해되어 왔을 뿐 사회구조와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변혁원리로 논의되지 못했고 특히 현실 정치영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신칼빈주의 사상이 정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사회변혁의 실천적 모델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판이하다. 이는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수용한 주체들이 가진 협소한 신학적 사고와 신칼빈주의 사상의 사회 변혁적 측면에 대한 미온적인 이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비 정치화되었고 사회변혁을 위한 동력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해방신학

 

본회퍼를 비롯한 세속화신학, 하나님의 선교론, 정치신학 등에 영향을 받아 남미의 카톨릭 신학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역사에서 주체적 의식을 일깨우는 신학 작업을 한 것이 바로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은 70-80년대 한국기독교의 정치참여에 자극을 주었다. 해방신학은 남미에서 생성된 것이고 서구신학으로 부터의 해방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유럽의 신학전통과 차단되지 않고 소통하면서 해방신학 특유의 창조적인 색깔을 보여주며 다차원적 분야에서 해방을 부제로 확장해 감으로써 해방과 관련된 신학세계를 폭넓게 구축했다는 점에서 글로벌 신학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이나 복음주의권에서는 해방시학은 마르크스적 사회이념이나 불온한 신학사상으로 간주되어 배척하는 경향이 많았다. 어쨌든 해방신학은 한국의 민중신학과 함께 빈곤, 노동, 교육, 정치 영역에서 사회진보를 향한 변혁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을 분명하다.

 

해방신학은 해방을 단순히 사회-정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에 국한하지 않고 이를 기독교의 구원과 연결 짓는다. 그래서 해방신학의 주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구원과 해방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의 역사적 해방을 목표로 하면서 그것을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해방의 실천을 하나님의 구원활동과 연과지어 설명한다. 해방신학이 신학의 해방을 따져 묻는 이유는 모든 신학은 진공상태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계층적 이해집단의 사고가 그 배후에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학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기존신학이 가난한 자들의 관점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관점에 의해 형성된 신학이므로 기존신학으로 부터의 해방이 선결과제라고 본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억압된 자들이 겪는 고통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과제는 신학에 대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라 불의한 현실을 변혁하는 것이다.

 

사회구조를 압제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출발하는 해방신학은 신학의 탈 이데올로기화를 위해 불트만식의 비신화화처럼 모든 성경에 의심의 해석학을 도입하며 성경본문을 지배자의 관점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해방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기초한 계시로부터 출발하는데. 해방신학은 남미의 가난, 압제와 불의라는 컨텍스트로부터 신학을 시작한다. 해방신학은 계시된 말씀인 텍스트로부터 출발하여 역사라는 컨텍스트로 읽어가지 않고 거꾸로 컨텍스트로부터 시작하여 텍스트를 읽으며 그 텍스트는 다시 컨텍스트로 순환하는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신학 방법론을 취한다. 이러한 신학방법론은 계시 의존적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통신학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본문보다 상황이 중시되면 본문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전거에 불과하게 만드는 민중신학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

 

해방신학에서 하나님은 우주적 보편성과 신적 존재양식보다는 특정한 역사 속에 개입하여 해방하는 구원사역을 전개하시는 분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해방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역사는 보편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사로서의 죄스러운 역사이다. 그래서 해방신학에서 구속사와 세속사는 각기 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며 엮여나간다. 그리고 하나님이 현실사에 개입하여 그의 구원사를 전개하실 때 그는 누구보다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다.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해 항상 보편주의, 비당파주의적 사고를 대입해 왔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콘스탄틴적 국가교회로 변질되면서 체제 안정적이며 번영을 요구하는 지배계층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죄를 하나님과의 교제단절이라는 근원적 차원, 타인과의 교제 단절이라는 인간적 차원 그리고 사회적 불의와 구조악으로 표현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 차원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전통신학의 죄론과 유사하다. 그런데 다른 점은 전통신학에서는 근원적 차원의 죄가 인간적 차원의 죄를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반해, 해방신학은 인간적 차원의 죄야 말로 근원적 차원의 죄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해방신학은 죄를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으로 보는데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며 인간적 차원과 사회적 역사적 차원의 죄를 강조한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죄를 추상화시키는 것을 반대하므로 죄를 언제나 역사내적 실재로 규정한다. 해방신학은 어떤 신학보다 역사 안에 실존하는 구조화된 악의 실체에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해방자이신 하나님은 우상화된 힘들인 거짓된 신들과 대결하여 억압된 자들과 부자유한 자들을 자유하게 하고 해방하신다고 말한다.

 

복음주의 선교관에 의하면 복음전도는 죄된 세상에 있는 불신 영혼들을 교회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구원의 무대를 교회에서 세상으로 옮겨간다. 왜냐하면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 속에도 진행되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는 세속사 안에서 실현된다. 복음주의 구원관의 약점은 역사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구원활동을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주의 구원관은 개인구원과 인격구원의 차원에 머물면서 사회구원을 포괄하지 못하므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구원론적 맥락에서 포착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구원의 정신사적 차원이나 타계적인 차원을 반대하고 역사 안에서의 구원 즉 구원의 역사적 차원을 확보하는데 집중한다. 특별히 해방신학의 구원론에서 구원과 해방의 관계는 핵심적인 주제로서 그들은 역사 안에서의 해방으로서의 구원을 강조한다. 해방신학자들에게 구원과 해방,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역사상의 해방의 관계는 예민한 문제이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이 양자가 동일한 실재는 아니지만 역사적 해방이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성장도 없다고 말한다. 구티에레즈는 구원과 해방을 구별하고 있지만 양자의 관계의 연속성에 비중을 두고 해방을 구원의 한 차원으로 보고 있다. 해방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초월성보다는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해방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구원의 역사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구원을 물질화하는 것은 아니다. 구티에레즈가 강조하는 해방의 방향은 가난이 초래하는 비인간화된 역사와 불의한 사회구조를 변혁하는데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이 해방과정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데 초점이 있다.

 

해방신학에서는 죄용서와 거듭남, 칭의와 같은 개인구원을 거의 보이지 않고 역사 안에서 구원만이 주로 부각됨으로써 복음의 초월적 차원이 내재적이고 인간적 차원으로 격하되고 구원사는 세속사로 흡수되며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은 인간과의 수평적 차원으로 이동되고 있다. 데이비드 보쉬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문제점을 전반적인 복음의 위축이라고 지적하면서 해방신학도 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해방신학의 구원론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죄인에 대한 칭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의화론으로 직결된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가난이라는 인간 조건이 의롭다함을 얻는 근거로 작용됨으로써 전통적은 개신교 칭의론과는 다른 구원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신학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죄를 대신한 고난이 아니라 인간 역사에서 겪는 고난을 대신한 죽음으로 해석하고 또 고통 받는 이들의 고난을 예수의 대리적 고난으로 동일시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이 없이도 민중의 고난과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통해 구원과 치유를 가져온다는 의미가 된다.

 

  

대안주의 기독교

 

대안주의 기독교가 가진 전제는 첫째로 세상을 선한 창조질서로 긍정하지 않고 악마적인 질서로 봄으로써 교회와 세상의 극명한 대조, 대립의 이원성을 강조한다. 둘째는 그러므로 교회에만 소망이 있고 교회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나뱁티스트적 패러다임은 복음주의자처럼 복음 전파를 통한 세상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찾지 않고, 기독교 세계관처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사명으로 삼지도 않으며, 에큐메니칼 진영이나 해방신학처럼 세계의 변혁적 실천에서 사명을 찾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교회가 교회됨을 회복하여 교회의 본래성,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내는데서 그 해답을 찾는다. 아나뱁티즘은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기보다는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교회됨의 원형의 키워드는 예수윤리, 희년, 십자가, 급진제자도, 대안 공동체 등이다. 아나뱁티즘은 대안주의 기독교의 대표적인 흐름중이 하나이다. 아나뱁티스트인 하워드 요더가 예수의 정치학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윤리와 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에 획기적인 방향성을 던진 이후에 아나뱁티즘은 이런 대안주의 기독교의 주된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성공회 교인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나 총체적 복음주의자인 로날드 사이더, 짐 윌리스, 독일 국가교회를 반대한 게르하르트 로핑크, 인도의 복음주의 행동가 비샬 망갈와디 등도 모두 대안주의적 기독교의 흐름에 있다고 보인다.

 

교회주의적 기독교는 복음이 실현될 자리를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 가두어 버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세상을 향한 부르심을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교회라는 제도화된 종교적 틀 안에서 해소해 버렸다. 이런 교회주의 기독교를 극복하게 한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속 이원론을 허물고 세상 속에서 일상의 삶이 갖는 신앙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 내밀기는 하였지만 세상 구조와 질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주었지만 세상을 변혁시킬 실천적 대응능력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은 타락보다는 구원을 구원보다 창조에 강조점을 두고 세상을 선한 창조질서로 간주하여 지나치게 세상 긍정의 관점을 주었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의 왕적이고 보편적 통치를 강조하지만 그 통치가 아미 실현된 것만을 강조해서 그런지 아직 미완료된 그리스도의 통치와 구속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승리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세상에서 도피하지 말고 선한 창조의 세상을 긍정하라는 기독교세계관의 메시지는 때로는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세상 질서나 구조와 싸워야 할 논리적 구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대안주의 기독교는 세상에서 교회의 가치를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존재 자체에서 찾는다. 교회의 세상을 위한 가장 큰 봉사는 교회가 믿음의 실제를 보여주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패러다임을 교회론적 대안주의라고도 부른다. 교회가 세상 정서와 세상적 삶의 방식과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때 그것이 세상을 향한 강력한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 세상 구조를 변혁하기 보다는 도리어 교회가 교회다움을 드러내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이질성과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사회변혁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종의 대안사회로 보고 하나님의 통치는 세계 전체에서가 아니라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윤리가 지향하는 대상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은 전 인류가 아니라 제자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형성을 위한 전략으로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통해 대안 사회를 건설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사회, 경제, 문화적 가치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오히려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보여준 방식을 순종하는 급진적 제자도의 원리를 따라서 삶으로써 이 세상에 대안사회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를 대안사회로 이해하는 관점은 교회를 사회라고 정의하는데서 출발한다. 교회는 종교적 결사체나 종교적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위에 건설된 새로운 사회,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화되어야 할 하나님의 사회, 성경적 가치와 규범에 따라 대안적 질서를 창출해내어야 할 대안사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의 사회로 보며 신약의 교회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나타내야 할 사회적 존재로 본다.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고 대조되는 삶의 방식을 가진 대조사회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런 대조사회로서 교회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삶의 방식으로서 지배구조를 폐기하는 섬김의 공동체, 모든 종류의 폭력을 포기하는 평화의 공동체를 제시하였다. 세상 질서와 세상의 삶의 방식과 다른 교회의 대조성, 이질성을 말이 아니라 존재 방식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핑크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국가기관도 아니고 종교기관도 아니며 세상과 대조되는 질서로 부름 받은 공동체적 사회라고 주장한다. 신약에서도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는 영적인 종교운동가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사회를 세우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대립관계를 설정하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실현하는 대안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핑크는 그의 대조사회론에서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대치될 수 없는 봉사는 교화가 참으로 교회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로핑크는 대조사회라는 개념 외에 대항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교회의 새로운 실존방식이 세상에 도전하고 대항하는 기능을 한다는 의미이다. 대조사회가 세상과의 구별과 대비의 측면을 설명한다면 대항사회 개념은 교회의 대조성이 세상 질서에 대립하고 도전하는 측면을 설명한다.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형제인 노베르트 로핑크는 대조사회를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대안적 경제 질서로 제시하면서 구약의 이스라엘 가운데 요구되었던 희년법을 예로 든다. 그는 희년법은 축적된 사회 구조의 모순을 청산하는 사회-경제적, 생태적 프로그램인데 이런 급진적인 사회변혁 프로그램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에서 실현되어야 할 대안적 질서였다고 것이다. 그러므로 토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안에 대인적인 사회를 향성하여 세계를 변혁하시려는 일종의 사회적 구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제적 차원의 대조사회 개념은 하워드 요더, 아드레 트로끄메, 로널드 사이더 등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특히 복음주의자인 로널드 사이더는 가난한 자의 문제는 희년, 인식년, 십일조를 통해 경제적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성경적 교회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구속받은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대안적 교회론은 세상문화와 적절한 타협과 균형을 유지하는 두왕국론의 적응주의적 방식이나 세상 전체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 왕적주권론의 변혁주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 질서와의 대립, 대조 그리고 대항을 통해 대안사회로서의 교회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대안적 교회론을 간단히 이원론적 분리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안적 교회론은 세상에서 탈출하거나 세상을 도피하는 부정적인 분리가 아니라 교회가 세상 구조와 질서를 거부하고 대항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가시화하는 것을 세상 변혁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모트는 대안주의 전략을 비판하면서 교회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과연 세상의 관심을 끌거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또한 대안주의 전략만이 유일한 사회 변혁적 방법인가를 묻는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구조나 질서를 보완하고 잘 운영하면 더 안정적이고 현실성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구체적인 정의 활동이 없이 대안사회 건설에만 집중할 때 또 다른 교회주의적 게토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적 기독교

 

근본주의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경직된 교리 이해 때문에 그리고 성장주의 기독교는 대형화된 교회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을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포용하기 보다는 타자를 대하는 방식에서 폭력적이고 갈등을 유발하는 종교집단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복음의 절대성을 고백하는 것과 교회가 타자 앞에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똘레랑스와 다원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무례하고 경직된 태도로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시민적이고 공적영역에서 어떤 갈등을 유발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다양한 종교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공공의 법규도 존중해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유일신론적이며 군주신론적인 신앙체계 때문에 반다원주의적 특징을 띠어왔다. 특히 중세기독교의 크리스텐돔은 이질적 세계를 용납하지 않았다. 다원주의의 시발점이 된 근대이후 종교영역과 세속영영의 분화이후에도 기독교의 보편주의는 지속되었다. 그래서 서구의 선교역사는 복음화라는 명분아래 타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약탈하고 정복한 십자군적 선교이고 식민지적 확장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유럽의 반유대주의, 종교전쟁, 마녀사냥은 주류 기독교가 보여준 대표적인 배타성, 불관용의 사례일 것이다. 기독교의 다원주의에 대한 고민은 중세 보편주의 기독교의 붕괴라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제 세계는 크리스텐돔의 세계가 아니라 신앙과 계시의 원리와 별개로 자연법에 의해 운행되는 종교영역 밖의 세계가 되었다. 기독교의 자유주의 진영은 근대화 진행과정에서 등장한 세속화, 다원주의, 합리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였으나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 기독교는 신학적 사고의 다양성과 다른 주장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수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개혁주의 진영에 속한 기독교세계관 역시 불관용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복종해야 한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때로는 기독교적 관점외의 다른 주장이나 의견을 포용할 수 없는 논리적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영역주권론은 삶의 각 영역들이 서로 침해할 수 없는 독립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는데 이는 정치철학과 세계관으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은 불가피하게 기독교적 구원의 절대성과 배타성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은 단지 교리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 속에서 기독교의 보편성을 현실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로 나타난다. 특히 기독교의 유일지배를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려는 그룹에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기독교세계관 운동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세상, 복음과 공적사회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물론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것은 개인과 교회를 넘어 세상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보편적 진리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세계는 이미 세속화와 다원화가 진행되어왔고 이런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주의는 신앙과 사회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가져올 것이고 반대로 복음의 보편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개인의 주관적 신념이나 신앙집단 안에서나 통용되는 사적 진리로 위축될 것이다.

 

다원주의의 도전 앞에서 한국교회가 능동적인 응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다원주의와 관련한 논쟁이 결국 종교통합에 이어 종교혼합주의로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과 구원의 유일성을 붕괴시키고 종국에는 종교혼합주의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원주의를 곧장 종교다원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모든 다원주의가 다 종교혼합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는 결국 나와 다른 타자의 신념과 가치를 포용하고 관용하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다원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은 실재는 하나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는 다양성,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더불어 존재한다는 관계성, 그리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타자성이다. 다원주의에는 단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있음을 인정하는 서술적 다원주의와 존재하는 여럿이 다 각각 옳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규범적 다원주의가 있다.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 우월주의와 정복적인 태도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다원주의 논쟁에서 기독교 우월주의의 호교론적 태도가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특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은 필연적으로 유일성과 보편성 배타성을 갖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원주의 세계에서 복음에 대한 상대주의나 종교혼합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기독교 중심주의나 우월주의라는 주관적 안목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복음의 절대성과 배타성은 견지하면서도 타종교와의 대화와 유연한 관계형성을 이루는 방법을 발견하여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과 신성의 감지력을 심어 놓았다고 말하며 타 종교도 이방인들에게 두시는 햇빛이나 우로와 같은 일반은총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물론 우리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영역을 분명히 구별하여 타종교에서 발견되는 일반은총적 종교성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므로 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해선 안 된다. 그러나 적어도 타종교에도 그들이 추구하는 종교적 진정성과 가치를 인정하는 포용적 태도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규범적 다원주의는 아니지만 서술적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과 종교적 정체성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상호인정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다원주의에도 인류사회가 지향하여야 할 보편적 규범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므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관용은 무제한적이라기보다는 선별적인 관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후 소감]

 

 

저자는 기독교의 다양한 패러다임을 공정한 입장에서 소개해주고 있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나름대로 장점과 약점을 다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어느 패러다임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각 패러다임이 가진 강점을 활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 것 같다. 다만 적응형 모델인 루터의 두왕국론이 세속화론인 것은 동의가 되나 변혁형 모델인 기독교세계관도 세속화론이라고 보는 관점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라는 점에서 세상을 긍정하는 것이지 타락한 세상 자체를 긍정하거나 세상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이 한국교회가 적응형 패러다임으로 흐르게 한 동기를 제공했다는 저자의 역설적 관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 복음주의 진영은 로잔언약이나 기독교세계관의 영향을 별로 받지 못한 채 세속화 과정에서 북미의 번영신학이나 오순절 운동의 영향으로 적응형 기독교로 급속히 전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분리형 기독교도 북미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듯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적응형 기독교 역시 북미의 번영신학이나 교회성장주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1960-80년 에큐메니칼 진영이 주도한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은 한국의 주류진영인 복음주의권의 반발을 불러왔고 그래서 나중에 로잔언약이나 기독교 세계관이 복음주의 진영에 소개되었지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로잔언약이나 기독교세계관의 정신은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로잔언약이 총체적 복음화를 지향하지만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전히 복음주의의 전통을 따라서 개인적, 인격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탁월하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로날드 사이더는 로잔언약의 우산아래 있지만 보다는 좀 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통합한 신학자로 보인다. 특히 사이더는 인격이 회개할 때 사회구조의 변화가 초래된다는 로잔언약의 정신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동적인 변화가 아니라 회개한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사회적 함축성을 배우지 않으면 사회를 향해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지적한 점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회심한 개인이 많아지면 사회는 필연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변화된다는 낙관적인 사고는 남아공, 북아일랜드,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을 보면 의문점으로 남는다. 신앙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보수적정치관을 가진 사람은 인종차별, 인권, 빈부격차, 평화 문제에 별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는 정치관을 표명한다. 따라서 개인의 회심은 사회변혁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사이더는 경제정의를 말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입장은 해방신학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사이더는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인됨과 교회됨의 진정성의 표지라고 말하면서 구속받은 공동체는 경제적 코이노니아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더는 해방신학이나 신칼빈주의처럼 사회, 경제구조의 구속까지 나아가지는 않고 구속을 개인적 인격적 차원으로 이해하지만 메노나이트 공동체 출신으로 구원이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공동체적 구원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스토트와 마찬가지로 로잔언약의 우산아래 있는 사이더는 총체적 복음을 주장하지만 복음 그 자체에 또 성경이 말하는 구원 그 자체에 사회 정의적 차원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할 것이다.

 

신칼빈주의 사상이 복음주의와 크게 다른 점은 기독교를 구원중심으로 보지 않고 창조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이 바로 기독교세계관의 핵심일 것이다. 복음주의는 기독교를 구원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구원과 비구원이라는 이원론적 사고 그리고 구원자체를 절대화 목적화 하는 사고에 빠지기 쉽다. 로잔언약으로 대표되는 총체적 복음주의도 구원중심의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사회참여를 복음전도와 함께 강조했지만 그것은 복음우선주의에 사회참여를 덧붙인 것일 뿐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참여는 복음전도에 덧붙여진 의무일 뿐 복음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결과가 될 수 없다. 창조중심의 사고는 구원을 창조를 위한 과정이나 수단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창조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행위로서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창조-타락-구원이라는 내러티브는 하나의 통일된 유기적 내러티브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세계관은 복음을 창조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복음 진리의 공적, 보편적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은 복음주의의 사적 신앙을 극복하고 신앙의 공공성의 토대를 놓게 된다고 본다. 저자는 선한 창조를 긍정하는 기독교세계관이 세속화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기독교세계관이 긍정하는 것은 선한 창조이니 창조의 타락한 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속화된 현실 (기독교세계관식으로 말하면 왜곡되고 타락한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이 바로 구원의 실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기독교세계관이 신정 정치적 승리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기독교세계관은 중세의 크리스텐돔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발견하고 이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에 신정 정치적 승리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일반은총의 대한 과도한 강조의 위험성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비정치화된 점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정당하다고 본다. 사실 한국교회에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제대로 이해되고 전개되지 못한 것이 큰 문제라고 본다. 전통적 복음주의가 주류인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세계관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해방신학의 신학적 기여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면 첫째는 구원론이고 둘째는 죄론일 것이다. 첫째 해방신학은 구원을 개인적, 영적, 초월적 차원에서 역사내적 해방의 차원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구원에 대한 이런 관점은 매우 성경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출애굽 사건은 분명히 구원이 일차적으로 역사내적 해방의 차원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추상적이거나 개인적, 타계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역사내적인 사건으로서의 구원이다. 둘째 해방신학이 죄를 개인적, 영적, 인격적 차원에서 사회적 역사적 구조적으로 파악했다는 점 역시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고 볼 수 있다. 구약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적시할 때 그것은 종교적 개인적 죄뿐 아니라 사회적, 구조적 불의가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대로라면 해방신학의 기독론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되는 복음의 요소가 그들에게는 매우 약화된 것 같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고난을 가난한 자들과 억압자는 자들의 고난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나뱁티즘으로 대표되는 대안주의 기독교는 교회가 교회됨을 회복하여 교회의 본래성,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내는데서 해답을 찾는다. 그들은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기보다는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이원론에 기초한 분리주의 모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기적대로 분리주의에서 세속화되어 적응주의로 전환한 한국교회에서 대안주의 기독교는 세속화를 극복하는 패러다임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 세상 구조를 변혁하기 보다는 도리어 교회가 교회다움을 드러내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이질성과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사회변혁의 방법론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너무 순진한 것 같다. 개인의 회심이 사회변혁을 담보하지 못하듯이 교회의 정체성 확립이 자동적으로 사회변혁을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기독교세계관이나 해방신학과 같은 신학적 관점이 필요하지 대안주의 기독교와 같은 교회와 세상의 분리구조로는 어렵다고 본다. 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에로 들어서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지만 구약의 상황과 신약의 상황은 현저히 다르다. 구약이 분리주의 모델이라면 신약은 변혁모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규범적 다원주의는 아니지만 서술적 다원주의의 입장을 교회가 취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도전은 서술적 다원주의가 아니라 규범적 다원주의이다. 그것은 다른 종교 다른 가치관의 옳음을 인정하며 기독교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원주의를 포용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체계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은 보편성과 유일성이라는 가치를 견지하지 못할 때 그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것 보다 다원주의 사화에서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복음은 보편적이고 유일한 진리이지만 그것이 상태에 대한 독선적 배타적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섬기고 포용하는 태도로도 얼마든지 아니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의 보편성과 유일성을 기독교는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데 개혁주의 진영에 속한 기독교세계관 역시 불관용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복종해야 한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때로는 기독교적 관점외의 다른 주장이나 의견을 포용할 수 없는 논리적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세계관이 가진 논리가 반드시 배타적 독선적 태도를 유발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저자는 기독교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영역주권론은 삶의 각 영역들이 서로 침해할 수 없는 독립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는데 이는 정치철학과 세계관으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영역주권론은 각 영역 안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독립적인 주권이 있다는 것이지 각 영역의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