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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윤유석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윤유석

2015-02-25 21:01:22


 

  어느 부활절 날, 한 친구가 저에게 예수의 부활이 왜 중요한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부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당황하였습니다.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그 사건이 ‘기이한 일’을 넘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제가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승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사건이라 대답해주기는 하였지만, 아무래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시었다고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한 ‘신’이 인간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셨다는 이 십자가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교회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신앙의 가장 놀라운 진리라고 전합니다. 예수가 당한 고난과 죽음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신앙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부활 사건’은 십자가의 고난에 가리어서 상대적으로 잊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구원과 죄사함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고, 예수의 부활은 그것을 조금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 정도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문에 한국 교회에서 부활의 의미와 가치는 단순히 그리스도가 ‘죽음’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생명의 능력으로 극복해내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부활을 ‘기적’과 ‘신비’로 받아들이지만, 그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나름대로 공부해보면서, 저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모진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이 세상을 향한 놀라운 힘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갔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에 많은 감동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더니 그 모든 설교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항상 부활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야기하였고, 부활에 대한 증거는 곧 그리스도교 복음 자체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한 예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다 고소를 당했을 때, 그 사건을 맡은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복음 내용을 요약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바울과 논쟁을 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종교에 관한 것과 예수라는 어떤 죽은 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자가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사도행전 25:19)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본 생생한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들의 삶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의 사건이었고,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의 몸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근거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새로운 삶의 힘과 원동력을 예수의 부활로부터 얻었고, 이 부활을 전파하기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던 것입니다.

 

요즘 저는 이러한 부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며 몰트만의 신학을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조명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한 종말론적 희망과 신앙인들의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참여를 강조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희망의 신학’,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고찰합니다. 그 중에서도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부활 사건을 종말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신앙의 희망을 통해 사회 참여적 신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예수 부활의 의미

몰트만은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사건의 실재와 더불어 일어서거나 혹은 넘어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처럼 신앙에 있어서 부활 사건은 굉장히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에 비해 많이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건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만큼은 신앙인이라면 대다수가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 신앙인들은 정작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분명 부활이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왜 중요한 의미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명쾌하게 답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서는 몰트만의 견해를 중심으로 부활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부활을 자신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아 ‘희망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몰트만의 신학에서 부활은 ‘변증법적이고 종말론적인 약속의 사건’입니다. ‘변증법적’이라 한 것은, 그의 부활에 대한 신학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적인 모순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예수의 동일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은 ‘사망과 생명’, ‘멸망과 구원’, ‘부재와 임재’, ‘유기와 영광’이라는 양극단의 상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상황, 이 극한의 대립이 바로 ‘전적인 모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몰트만은 이 모순을 관통하고 있는 예수,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다시 부활한 예수가 동일한 예수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불연속성에 연속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종말론적인 약속’이라는 표현은 부활이 구약성경의 약속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분은 계시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였고,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로 그의 인격 안에 자신의 약속을 구현함으로써 스스로를 보증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 바로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킴을 받은 예수의 모습 속에는 이 세상의 새로운 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 아래 있는 이 세상 만물의 미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의 희망 신학은 이 근본적인 두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의 모순성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현재의 실재’들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의 모순관계로 바라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는 이 땅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짊어지고 ‘현재 실재’의 아픔과 동일시되는 존재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현재 실재’를 표상하며 십자가 위에서 심판받은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태복음 27:46)를 외쳤을 때, 그는 이 땅의 모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저주받으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가 이제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와 연합한 몸이 되었던 이 세상의 만물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미래를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와 ‘부활한 예수’가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조명됩니다. 이 ‘동일성’은 몰트만의 종말론 이해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연속성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부활 사건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새로운 미래의 약속이지만, 하나님은 ‘이 세계’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완전하신 그 미래를 여십니다. 이 동일성에 근거하여, 몰트만은 십자가의 예수와 부활의 예수가 동일한 존재이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왕국은 ‘이 세상과 또 다른 세계’가 아닌 ‘이 세계’의 새 창조로 완성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에 대한 몰트만의 해석은 ‘신정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교회의 사명’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주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먼저 ‘신정론’이란 이 세상의 고통과 악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신학 이론입니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몰트만은 이러한 신정론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불의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의 약속’으로 바라봅니다. 몰트만에 따르면, 부활이란 악과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이 땅이 새롭게 창조될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이 세상의 현재에서 나타나는 고통과 아픔과 절망과 슬픔 등의 모든 부정성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저항’이며, 하나님은 이를 통해 마침내 이 땅에 이루어질 완전한 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불의한 세상에서의 현재를 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희망하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몰트만은 이렇듯 부활을 종말론적 관점을 통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이 나타내고 있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가 현재 세상의 발전으로부터 나올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재창조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라고 말합니다. 죄와 고통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종말론적 부활 이해는 현재에 대한 대안으로서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몰트만은 예수 부활의 의미가 현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에서는 신빙성을 상실하며, 반대로 현재의 불의와 고통을 폭로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지탱해 줄 때만이 진정성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 점에 몰트만의 종말론적 부활 이해의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묵시적 종말론은 사실 현재 세상의 고통과 슬픔과 죄악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나님의 정의가 결국은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만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설명이 자칫 현실의 불의를 우리가 마지막 최후의 날까지 참도록 만드는 억압의 수단이 되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행복한 내세를 기약하며 현실의 삶을 무기력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민중의 아편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종말론은 니체나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오히려 이 종말론적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여와 현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종말론적 미래는 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 맞서 그것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적인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그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의 실천적 특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교회의 사명’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신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이를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약속하시는 분이시며 그러한 미래를 희망하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미래를 향한 ‘희망’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존은 세상의 현재 모습이나 인간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아니며, 오직 다가올 미래를 향한 희망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현재는 하나님께 상응하지 않고, 하나님은 현재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하나님은 현재의 불의와 고통에 반대하는 희망을 우리 가운데 일으키고 그것을 지탱함으로서 자신을 입증하십니다. 즉 그분이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만이 가능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잠정적으로 미래를 향한 우리의 희망 속에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이 희망으로, 교회는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향한 역사적 운동 과정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 몰트만의 설명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 받고 죽임당한 예수와 영광과 능력으로 새롭게 부활한 예수가 동일한 존재이듯이, 그 예수가 표상하고 있는 세상 역시 동일한 세상입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미래는 현재 세상의 전적인 대안으로서 이 땅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새로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세상’의 도래가 아닌 ‘이 세상’의 신적인 변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몰트만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희망이란 내세적 종말론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내세적 종말론은 희망을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내세의 세상에 두어 현실을 도피하고 정당화 하는 데 기여합니다. 그러나 몰트만이 이야기 하는 희망이란 바로 이 세상 현재 실재의 약속된 미래 방향으로의 변화입니다. 다시 말해 불의와 고통이 가득한 이 땅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직접적으로 체험되어지는 불의한 현재와 부활을 통해 약속된 하나님의 미래 사이에서 모순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거리감으로 인해 신앙인들은 현재 속에서 종말론적 미래의 방향을 찾으며 그곳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미래에 대한 예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 왕국의 예기들을 실제로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불의, 슬픔, 고통과 타협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약속된 미래의 관점에서 의와 자유가 이 현실 가운데 실현되도록 부추기는 원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이러한 세상과의 저항을 통해 그 스스로를 입증하게 됩니다. 희망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의 진정성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활의 신빙성

어렸을 적,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읽었던 몇몇의 책들에서는 요세푸스·수에투니우스·타키투스 등 로마 역사학자들의 기록,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언, 당시 시대적 정황, 현대의 의학 지식들 등을 총동원하여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역사적 실제 사실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이 연구들은 나름대로의 신빙성도 있어서 어린 제게는 그 책들이 믿음의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 전도를 할 때면 이런 자료들을 잘 외어 두었다가 이야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실제 사건이었음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을 역사학자들이 다룰 수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역사 속에서 유비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근대 역사방법론이 전제하고 있는 모든 경험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전제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부활 사건이 단순히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증명해 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사실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던 신기한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의 역사적 근거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은 올바른 역사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 발견되었을 때도 그것을 무시한다면, 분명 이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단순히 부활이 역사가들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없다’의 문제를 떠나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부활을 살피려 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여러 ‘기이한 사건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설인을 보았다는 사실은 ‘기이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기이한 사건을 연구하여서 실제로 히말라야에 설인이 살고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해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재미있는 일, 신기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 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가 밝힐 수 있는 사실은 부활이 실제 ‘일어났다, 일어나지 않았다’까지입니다. 어쩌면 역사가들은 역사적 증거들을 통해 부활을 실제 사건으로 증명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증명된 역사적 부활은 히말라야의 설인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기이하고 놀라운 일로 남게 될 뿐입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든 역사적 사건발생의 질서를 초월해 있는 종말론적 새로움의 사건으로 바라봅니다. 그에 의하면, 부활이 역사 속에서 유비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단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신기한 사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향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은 오직 미래만이 부활의 유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활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역사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이고 희망적인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께서 종말의 날에 이 세상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때에야 분명하게 확증 될 것이지만, 잠정적으로는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 현재의 역사 속에서 실천적인 능력을 보임으로써 증거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미래의 왕국을 향한 부활의 약속은 현재의 불의한 세상 속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통해 스스로를 입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부활의 신앙으로 현재의 고통과 악에 맞서 비판적으로 대항함으로 그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확보하고, 종말의 날에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로 끌어들여와 보임으로 그 나라를 증명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몰트만의 부활 이해는 부활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논의를 꼭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부활이 이렇듯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예기들을 창조하고 있다면, 부활 사건의 유비가 전무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몰트만은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만약 죽음의 역사 안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유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성령과 성력의 영향의 범주 안에는 부활의 유비들이 존재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 안에서 부활의 경험적 형태를 찾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세상에서 선포되는 불경건한 자들의 칭의, 신앙의 경험, 불확실성 속에서의 확실성, 죽음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경험 등이다.”

 

몰트만의 후기 저서들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창조를 보여주는 잠정적인 예기들과 그 예기들을 만드시는 성령의 활동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는 부활 신앙의 설명 가능성에 대해서도 더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부활이 유비들은 미래의 새 창조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은 희망을 통해서 이해될 때 그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급진적 희망으로서 그리스도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 땅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희망하고, 그 희망으로 실천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희망은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몰트만은 1960년대에 근대 시대에 이르러 희망이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세속 운동으로 옮겨가 버렸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서구 역사 안에서 발생한 커다란 균열이었습니다.

“세상의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세상의 미래를 기대하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희망의 신학』에는 ‘희망이 반드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몰트만의 고민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긍정적인 미래를 희망하는 낙관주의에 우려스러워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그의 신학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 유대교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흐의 철학에 굉장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블로흐는 자신의 저서 『희망의 원리』에서 무신론적인 희망을 통해 성경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비종교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희망의 상징, 역사 속에 내재되어있는 자기 초월적인 힘의 투사라고 보았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est Bloch)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블로흐와 몰트만의 차이는 ‘희망은 세계에 내재되어있는 가능성들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아니면 미래를 창조하는 초월자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발견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없이도 진정한 희망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부정성을 극복하는 희망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블로흐는 희망이 모든 ‘아님(not)’을 ‘아직 아님(not yet)’으로 바꿈으로써 부정성을 극복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현재의 ‘가난의 상황’을 ‘아직 부유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바꾸어서 새로운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러한 희망이 ‘아직 아님’으로 될 수 있는 ‘상대적인 부정성’들 밖에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가능성들이 사라지고 완전한 좌절과 무기력 속에 있는 상황, 죽음의 절망과 같은 ‘절대적인 부정성’ 앞에서 블로흐의 희망은 아무런 힘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이 바로 이렇듯 절대적인 무 가운데서 유를 창조해내는 희망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대 부정성을 ‘아직 살지 못한 상태’라는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죽음 속에는 생명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도 새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초월적인 희망이십니다. 인간적인 희망의 원리가 이를 수 없는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은 언제나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상황은 단순히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잔여물로만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고, 희망이라는 것 자체를 아무런 의미 없이 만드는 가장 궁극적인 부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으로 출발합니다. 이 희망은 삶의 궁극적인 부정인 죽음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으로 다른 모든 부정의 상황들까지도 극복해 내며,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가운데 다른 모든 희망들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죽어가는 희망들을 살립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희망 안에서는 버림받아 남겨지는 존재가 하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보를 향한 인간의 모든 운동은 이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들과 그 운동으로 아무런 희망을 줄 수 없는 자들을 과감하게 잊어야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바로 그러한 가장 낮은 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을 향해 희망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급진적인 희망이었고, 부활의 희망은 실제로 다른 어떤 것으로도 견딜 수 없는 가장 극한의 상황에 있는 자들을 지탱해주었습니다. 희망은 콜로세움의 사자들 가운데서도, 세상의 조롱과 박해 속에서도, 권력자들의 억압과 약탈에도 신앙인들 저항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우리에게 부활 신앙의 희망이 가져다주는 그 힘을 통해 이 땅의 불의와 고통과 맞서며 정체된 희망들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신뢰하는 종말론적 희망을 의지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