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 [교의학 개요]- 윤유석
2015-02-25 20:13:13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개신교는 물론이고 가톨릭에서까지도 주저 없이 칼 바르트(Karl Barth)를 이야기할 것이다. 현대신학은 바르트와 함께 출발하였으며 바르트에 의해서 방향이 잡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바르트는 고등비평학에 의해 공격받은 성서의 권위를 재확립하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신정통주의 신학의 흐름을 이끌어내었다. 또한 그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자신의 교의학 전면에 내세워 이전의 어느 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신학 체계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계시론’, ‘신론’, ‘예정론’, ‘화해론’ 등 그리스도교 교의학의 핵심적인 영역에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들을 이루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르트는 20세기 초의 두 차례 세계대전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는 나치 시절 히틀러에게 대항한 독일고백교회의 지도자적 인물로서, 전 세계 개신교 교회를 향해 나치와 싸울 것을 호소하였던 개신교 저항운동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초기작인 『로마서 강해』 제1판 및 제2판과 그의 신학을 집대성한 『교회 교의학』이다. 특히 『교회교의학』은 바르트 신학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전체 13권, 총 9250면으로 이루어진 대단히 방대한 저서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에 있어 바르트가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들에 접근하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서는 쉽지가 않다. 엄청난 분량과 내용의 난해함으로 인해 위의 저작들만을 다 읽는 일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바르트는 이 작품들 외에도 수많은 강연을 하였고 논문도 대단히 많이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평가받는다.
『교의학개요』는 바르트가 독일의 본(Bonn)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옮긴 책이다. 그는 이 강의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의 순서에 따라 자신의 교의학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바르트의 다른 주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얇은 분량임에도 전체 바르트 신학을 대략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이미 사도신경 자체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삼위일체적인 고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믿는 바를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바르트는 이 간결한 신조의 내용을 따라가며 각 구절들마다 그의 교의학의 중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물론 이 책만으로는 바르트가 신학사적으로 이룬 여러 성과들을 다른 신학들과의 비교를 통해 부각시키는 어렵다는 아쉬움은 있다. 바르트가 다루는 주제의 폭과 논의의 깊이가 상당한 반면, 이 문제들의 배경이 되는 여러 신학적 배경들은 책 속에서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분량에 비해서는 바르트의 핵심 사상들이 잘 요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바르트의 『교의학개요』을 통해 그의 신학이 지닌 의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이러한 평가에는 당연하게도 그리스도교 내에서 바르트가 이룩한 신학적 혁명성에 대한 논의가 포함된다. 그러나 나는 신학적 사고로서 바르트의 사상이 지닌 의의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호소할 수 있는 바르트 신학의 철학적 가치 역시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바르트의 신학을 철학으로서 재해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이 글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인간학적으로 해석하길 거부한 바르트 신학의 면모를 ‘이해’의 문제와 관련해서 살펴볼 것이다. 바르트에게서는 인간 주체의 선입견을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타자성에 대한 경험이 강조됨으로써 ‘이해’가 주체를 붕괴시키는 사건으로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사고는 바르트 신학의 세계 해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타자성에 우위를 두는 바르트의 신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주체의 조건과 상황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는 주체의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있었던 계약과 선택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가능해진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세계 해석이 그 근본에서 무한한 사랑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함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바르트 신학에 대한 철학적 재해석의 근거
바르트 신학을 철학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월권이라 비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르트는 결코 그리스도교가 철학으로 해석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신학에서 신학이 철학화되는 경향을 극렬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이다.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수용하여 성서를 실존론적으로 이해하길 시도하였을 때, 틸리히가 철학의 물음에 대답하는 신앙으로서 문화신학을 제시하였을 때, 바르트는 이들의 신학이 이웃학문들을 곁눈질하며 비틀거리고 있다고 비난했다.1 바르트는 신학을 인간의 경험과 신념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확고히 세우고자 한 학자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바르트의 신학이 지닌 핵심적인 특징들 중 하나였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을 철학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이 글은 시작부터 이중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는 “철저히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바르트가 어떠한 철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반대로 바르트 자신으로부터는 “철저히 철학을 거부한 그가 어떻게 철학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와 같은 비판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비판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철학적’이라는 말이 어떠한 의미인지 해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바르트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할 때, 그의 신학은 철학의 다양한 분야들 가운데서도 ‘철학적 해석학’의 한 체계로서 읽혀질 것이다. 나는 바르트 신학이 그 자체로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신학 체계라고 생각하지만 해석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을 때 더욱 풍부하고 호소력 있는 함의를 지닌 사상이라고 믿는다. 해석학적 관점으로 바르트 신학에 접근한다는 이야기는 다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해석학이란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의 체계인 동시에, (2)존재론적인 탐구로서 “이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학문을 통칭하여 의미한다.
‘신학(Theology)’이라는 학문 자체가 이미 일종의 해석학이다. 신학은 단순히 신에 대한 사변적 탐구에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대해 답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 때문에 신학은 정신분석학, 종교현상학, 철학적 인간학 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담론 속에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며, 그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과 갈등하는 다른 해석들과 경쟁한다. 바르트 신학 역시 이와 같은 신학 일반의 특성상 해석학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 특별히 바르트의 경우는 영원 이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기규정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라는 주제를 통해 창조세계에 대한 강력한 긍정의 해석을 시도한다. 바르트 신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을 통해 인간존재의 의미, 창조세계의 의미, 영원한 사랑의 의미가 드러난다. 나는 바르트가 제시하는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이 호소력 있는 사상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해석학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세계 안의 여러 대상들에 대해 개별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인간, 사회, 윤리, 자연, 타자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개별 해석학들은 그들 나름의 해석 근거와 방법 등을 지니고 있다. 그 해석의 원리들은 해석을 통해 세계 전체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가령 인간존재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할 경우 그 이해의 구체적인 내용에 앞서서 “이해하다.”라는 과정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된다. 먼저 이해에 대한 해명이 있고 난 다음에 여기에 근거하여 해석을 위한 체계를 세울 수 있다. 구체적인 이해 내용에 선행하는 이해 자체에 대한 고민은 개별 해석학에서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항상 모든 논의의 밑바탕에 전제될 수밖에 없다.
이해 자체에 대한 이 고민은 더 이상 올바르거나 잘못된 이해를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문제이며, 철학적 해석학의 탐구는 근본적으로는 이 지점을 향한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20세기에 지향성 개념을 바탕으로 후설이 현상학을 정립한 이후로 대상세계가 우리에게 자연과학적 실재로서가 아니라 ‘의미’로서 주어진다는 점이 철학적으로 중요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세계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우리의 이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며 다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세계를 객관적인 지점에서 바라보고 이로부터 철학의 문제들에 대해 보편타당한 답을 이끌어내려는 방식의 시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철학은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해석학들 사이의 경쟁을 중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모든 개별 해석학들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구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자연과학적 세계 해석에 근거한 근대철학의 논의들을 비판하고 다양한 해석들의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해의 근본 지평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을 철학적 해석학으로 읽는 것은 비록 바르트 자신의 의도에서 벗어난 시도라 할지라도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다. 신학 자체가 세계에 대한 해석학이며, 이러한 해석학으로서 바르트 신학 역시 근본에서 이해의 문제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 해석에 반대하여 근대적 인간학의 틀 속에 들어올 수 없는 성서의 내용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해석학적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바르트에게 이해란 철저하게 텍스트 앞에서 내가 지닌 기존 입장과 사고가 부서지는 경험이다. 주체의 상황과 믿음을 텍스트에 투영시켜서 텍스트를 나의 맥락 속에 안전하게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진정한 의미의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이해는 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들어오는 텍스트로서의 타자 앞에 개방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이해의 방법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세계에서 살아나가는 방식 그 자체이다. 바르트가 초기작인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 ‘전적 타자(Der ganz Andere)’로서 하나님을 주장하여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연신학에 반대한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주체의 지평을 부수는 타자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의 타자성을 주장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학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배경: 아래로부터의 신학에 대한 반발
20세기 초 여러 신학자들은 당시 사상계를 주름잡았던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과 같은 분야들의 성과를 신학에 접목시켜 현대적인 감각의 신학 사상을 전개시키려 하였다. 신학자들은 새로운 학문적 경향들이 그리스도교에 제기하는 여러 의문들에 대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더러, 동시에 그 학문들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오늘날에 재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현대신학이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참신하고 폭넓은 논의를 전개시킬 수 있었던 것 역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학문적 발전들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성서비평학의 발달은 성서 본문을 연구하는 데 있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방법들을 제시해주었고, 비슷한 시기에 칸트의 영향을 받은 독일 관념론 철학 역시 교의신학에 자극을 주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종교학의 발전, 무의식의 발견, 실존주의의 등장, 현상학 운동,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같은 새로운 사상들이 학문계에 한꺼번에 등장하면서 신학적 논의들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신학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보았을 때 바르트는 꽤 보수적인 신학자에 속한다. 바르트는 현대의 학문들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를 설명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와 같은 경향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바르트는 말 그대로 ‘신학자’이다. 그는 현대의 학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은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노력도 아니며 현대사회를 위한 세계관을 제공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전체 신학 여정을 통해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만을 중심으로 삼는 신학을 전개시키고자 한다. 다른 현대신학들이 신학 밖의 학문 분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현대사회에서 신학이 지닐 수 있는 의의를 모색하였다면, 바르트는 성서와 그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끊임없이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태도는 우리에게 의문을 남긴다. 바르트와 만나는 독자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바르트에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신앙의 문제를 두고서 그와 대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신앙인에게 바르트 신학이 던질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른 신학들이 다양한 학문 영역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길을 모색하고 있는 반면 바르트 신학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르트 신학은 단지 그리스도교라는 울타리 속에만 머무르는 담론일 뿐인가? 오늘 우리가 바르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바르트가 오늘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 먼저 바르트가 왜 이러한 신학적 성향을 견지하였는지에 대해 신학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바르트 신학에 이르기까지의 배경에는 여러 철학적 배경들과 시대적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정통신학의 내용들을 옹호하는 바르트의 입장은 얼핏 편협하고 극단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자기 시대의 신학과 사회에 대한 바르트의 치열한 고민 결과이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신을 설명하는 아래로부터의 설명 방식을 특징으로 하였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태도 속에는 신앙을 내면화하려는 경향과 윤리에 대한 강조와 인간을 바라보는 낙관주의적 전망과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바르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실천적인 영역에서까지도 어떻게 실패하게 되는지를 직접 목격하였던 신학자였다. 세계1차 대전 당시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 바르트의 스승들이자 당대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던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를 극복하고 자기 시대에 다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세우기 위해 이전 세대와 동시대가 제시하는 수많은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의 의의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신학사적인 배경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록 바르트가 철학자는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신학은 당대의 철학적 사조들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그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했을 지라도 그의 신학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시대적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은 근대철학의 출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대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코기토(Cogito)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의심할 수 없는 모든 지식의 근거로 ‘생각하는 사물(res cogitans)’인 인간을 철학의 출발점에 올려놓았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선언은 단순히 그 자신의 개인적인 통찰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철학의 전반적인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근대철학의 중심적인 탐구는 인식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대상에 관해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철학자들이 더 이상 외부세계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도 그 세계를 매개함으로써 받아들이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근대철학에서는 의식 활동을 하는 인간이 외부세계 전체의 확실성을 근거 짓는 자로서 출현한다.
이전까지 존재하는 것들의 제1원인으로 여겨져 왔던 신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 근거를 인간에게 두는 지위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데카르트에게서부터 나타난다. 데카르트의 신은 비록 존재의 순서에서는 인간보다 앞서지만, 인식의 순서에서는 인간의 자기의식보다 이후에 위치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생각하는 사물’로서 인간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조차도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이렇듯 신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인간 의식에 둠으로써 데카르트는 이후의 신학이 인간학적으로 변모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신은 점차 근대 철학자들이 상정한 인간학의 틀을 통해서 재단되어진다. 인간의 이성, 도덕, 종교체험, 자유 등이 신을 근거 짓는 지평으로서 제시되었다.
인간으로부터 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은 칸트(Immanuel Kant)에게서도 발견된다. 바르트 이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규정하여 우리가 이성을 통해 의미 있게 다룰 수 있는 영역인 ‘현상’과 그것을 넘어서는 ‘물자체’를 엄밀하게 구분하였다. 인간 이성이 감성형식인 시공간과 지성형식인 범주를 간과한 채로 물자체의 영역에 관해 직접 말하고자 하는 시도는 ‘독단’으로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전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주제들로 다루어지던 ‘신’, ‘세계’, ‘영혼’이라는 주제들은 더 이상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논의 가능하지 않은 것들로서 분류되었다. 다만 칸트는 이를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곧 윤리적인 영역에서 인간에게 요청되어지는 이념들로서 자리 잡도록 하였다. ‘최고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에게 무한한 도덕적 진보의 노력이 요구되므로 ‘영혼의 불멸성’이 필요하며, 또한 ‘최고선’에 따라 세상을 운영하고 선과 악을 보상할 수 있는 ‘신의 존재’ 역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듯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인식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대신 윤리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상정해야 한다고 제시함으로써 ‘신’과 ‘윤리’라는 영역을 밀접하게 결부시켜 놓았다. 칸트에게서 하나님은 최고선에 의거하여 윤리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분, 최고선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활동하시는 분으로서, 곧 최고선 자체로까지 기술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윤리의 근거이자 윤리 자체로 이해함으로써 칸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내용들 또한 윤리적인 견지에 입각하여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이후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스며들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파악해 보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들로 나타났다. 예수는 뛰어난 도덕교사로서 이해되어졌으며, 성서의 내용들은 도덕적 교훈들을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리츨(Albrecht Ritschl),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같은 이들의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윤리 종교로서 설명되었다.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계에서 등장한 또 하나의 위대한 신학자로서 자유주의 신학의 또 한 축을 근거지운 인물은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였다. 칸트가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신앙을 바라보았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의 낭만주의의 영향에서 신앙을 이해하였던 인물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내면적 경험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내면적 경험에 대해 슐라이에르마허는 다양한 명칭으로 설명하는데, 『종교론』에서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혹은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고 이야기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절대 의존의 감정”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또한 이러한 입장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 경전이나 교의가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내적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신학 역시 이후 자유주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영향 아래에 있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를 들 수 있다.
교의학의 영역에 칸트와 슐라이에르마허가 끼친 영향을 빼놓을 수 없듯이, 성서 해석의 영역에 있어서도 필수적으로 지적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특징짓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서비평학이었다. 계몽주의 이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시도되며 발전한 학문들 중 하나가 바로 성서비평학 분야이다. 18세기와 19세기 무렵에는 다양한 성서 사본들의 발견과 본문비평 방법들이 발전됨에 따라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성서가 결코 완전무결한 책이 아니라 수많은 오류와 인간적인 흔적들로 가득하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게 되었다. 구약의 내용들이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들도 보였으며, 복음서들은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전하고 있고,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도의 저술로 알려졌던 책들 중 일부가 위작이었다는 사실들 또한 밝혀졌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회의 오래된 믿음을 포기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 생각은 19세기 말 독일의 종교사학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종교사학파 신학자들은 성서 또한 특정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종교 텍스트로서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 비교하였을 때 절대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보았다.
근대철학으로부터 시작된 인간학적인 학문 배경들로 인해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아래로부터 그리스도교를 해명하려는 경향을 띄고 있었다. 성서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텍스트일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경험과 인식과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이루어져야 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 안에서도 성서를 윤리적 가르침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내면적이고 종교적인 감정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지 등을 두고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모든 논의들은 인간학적인 사고방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의 최고선, 종교적 직관과 감정, 자유의 이념, 이성의 영원한 진리 등에 대해 감추어 놓은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헤겔주의자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가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다.”라고 말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낯선 하나님의 발견: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20세기 초에 들어와 여러 분야에서 근본적인 비판을 받게 된다. 각각의 비판들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등장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종교학에서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종교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에 반대하여 ‘누멘적인 것(Numinose)’의 개념을 주장하였다. 교의학에서는 칼 바르트(Karl Barth)를 중심으로 하는 ‘변증법적 신학’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출현으로 성서의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간과할 수 없는 질적 차이가 강조되었다. 자유주의 신학 내부에서도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신약성서의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 개념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기존의 인간학적 성서 이해에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이와 같은 종교학적, 교의신학적, 성서신학적 성과들은 ‘낯선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었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각 연구들은 서로를 견제하거나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들 모두 성서의 하나님이 결코 기존 자유주의의 인간관 안에 제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바르트를 비롯한 학자들은 성서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틀로는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당황스러운 내용들, 그 해석 틀에서는 간과되어 왔던 내용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성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근대적인 윤리관과 종교관을 성서에 투영시키는 방법으로 성서를 평가하게 되면 진정으로 성서가 말하는 내용 자체에 주목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비판이었다.
개신교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였던 오토는 성서의 하나님이 “두렵고 떨리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통해 다양한 종교전통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하고 표현한 기록들을 조사하여 ‘성스러움(Heilige)’이 ‘윤리’나 ‘선(善)’과 같은 영역과는 별개의 감정임을 밝혔다. 성서를 비롯한 여러 종교전통들은 신을 만나는 경험을 으스스하고 섬뜩한 느낌 가운데서 매혹을 느끼고 빠져 들어가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오토는 이러한 종교적 체험의 감정을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as)’라고 표현하였으며, 이를 한 단어로 ‘누멘적인 것’이라고도 이야기하였다. 그렇다면 만일 오토의 주장에 따라 성스러움을 이루는 본질적 감정을 ‘누멘적인 것’이라고 할 경우, 성스러움이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윤리적인 영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된다. 누멘적인 것의 요소인 ‘두려운 신비’, ‘매혹성’, ‘어마어마함’, ‘장엄성’ 등은 칸트의 생각과 달리 ‘최고선’을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 다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는 구별되는 아주 낯선 체험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 오토의 주장이었다.
바이스와 슈바이처는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 해석 방법에서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 이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이르렀다. 리츨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가 칸트적인 의미의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를 칸트의 ‘목적의 왕국’에 상응하는 윤리 공동체의 실현으로 보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 나라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적인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반면 바이스와 슈바이처는 근대적인 윤리관을 예수에게 투영시킨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러한 하나님 나라 이해를 비판하며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자신의 선언들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예수가 주장하였던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개념은 현재적이고 내면적인 윤리공동체의 실현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순간에 실제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적인 통치가 실현되어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유대 민족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대단히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근거하고 있는 믿음으로써 근대적인 윤리관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자유주의 신학 비판 역시 오토, 바이스, 슈바이처 등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신학 안에서 간과되었던 성서 안의 낯선 하나님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제2판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라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바르트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속에서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전적 타자’로서 세상의 모든 기준들을 부정하시고, 철저하게 심판하시며, 세상을 위기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로마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윤리나 종교 체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 모든 세상의 것들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인간성을 뿌리부터 뒤흔드시는 하나님, 도무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신학적 성과는 오토, 바이스, 슈바이처처럼 단순히 성서 속에서 ‘낯선 하나님’의 면모를 밝혀내었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르트는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석학적 문제에 접근해 들어간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주체의 해석 틀을 전제하고서 성서를 그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였다는 점에서 심각한 해석학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20세기 초 여러 분야의 학문들이 밝혀낸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라는 텍스트 자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였으며, 단순히 근대적인 사상들을 옹호하기 위한 자료로서 성서를 그들의 맥락에 따라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비판되었다. 이 때문에 이제 어떻게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것은 텍스트 해석학적인 의문으로서 해석의 방법론에 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올바르지 않은 해석은 무엇인지,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점에서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제2판 서문을 통해 이렇듯 텍스트 해석학으로서 성서 해석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로마서 강해』 제1판이 출간되고 난 후 자신의 『로마서』 해석으로 인해 일어난 논쟁에 답하며 자신의 성서 해석의 근거들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의 주저인 『교회교의학』을 통해 ‘성서’와 ‘계시’를 구분함으로써 텍스트 해석을 넘어선 이해의 존재론에까지 이르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가 아니며, 진정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서는 계시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적 증언일 뿐이며,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계시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진정한 문제는 “역사적 텍스트로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즉, 타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자신을 알려온다. 자신을 스스로 알려오는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인간 주체의 미리 전제된 해석적 틀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정당하지 못하다. 이러한 해석은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원하는 면모들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해 내고자 하는 시도이며, 따라서 주체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한 우상을 만들려는 시도에 비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서는 이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신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문제된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이해 일반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해석 틀에 국한되기를 거부하는 존재이듯이 모든 타자들은 주체의 해석 틀을 거부한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는 곧 주체가 자신의 기대, 믿음, 추측을 투영시켜서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실패였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의 극복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해석학의 출현이 될 수밖에 없다.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바르트의 고민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철학적 해석학의 문제의식의 한 가운데 있다. 바르트 신학은 자신을 알려오는 타자를 이해할 때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타자는 우리에게 어떠한 요구로서 찾아오는지와 같은 해석학의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근거로서 삼위일체론 : 주체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타자에 대한 묘사
주체의 해석 틀에 근거하여 타자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타자가 스스로 말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이것은 단지 주체 자신의 모습을 타자에게 덧씌우는 일이며, 주체에게 미리 전제된 것을 타자에게서 다시 발견하는 일에 불과하다. 바르트는 근대신학이 바로 이와 같은 잘못에 빠져서 그들이 전제한 인간학적 이상을 성서의 하나님에게서 찾아내려 하였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한다.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건은 인간 주체의 해석 틀 안에 국한되어 일어날 수 없다. 만일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하나님는 스스로를 주장하시기 위해 인간 주체의 해석 틀을 파괴시키며 찾아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 제2판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기(Krisis)’로 표현한 이유이다. 진정한 하나님, 살아 있는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자신을 타자로서 주장하시는 분이시므로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신다. 따라서 그분은 ‘전적 타자’로서 모든 인간 적인 것들에 대해 심판과 진노를 선언하시는 분, 인간을 위기에 빠뜨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아무도 있을 수 없다는 『로마서』의 내용을 이와 같이 해석함으로써 모든 인간에 대해 ‘전적 타자’로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 점은 바르트의 후기 신학인 『교회교의학』에서까지 본질적으로는 변화되지 않는다. 물론 바르트는 후기에 이르러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스스로 거부하며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함으로써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을 일으키는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타자성에 대한 철회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신학적 발견이다. 인식론적으로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으로부터 알려질 수 없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은혜로우시며 인간의 편에 서 계시며 인간을 무한히 긍정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 타자 개념은 사실상 바르트의 후시 신학까지도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인간학적 하나님 해석을 거부하고자 한 것이 바르트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었으며, 이제 그의 신학은 이 자리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자신의 미리 전제된 이해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스스로가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원칙에 자신의 모든 신학적 근거를 둔다. 여기서 바르트 신학의 가장 혁명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계시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를 해명한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토대로 자신의 모든 신학적 체계들을 전개시켜간다. 이러한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19세기의 신학들과 대비시켜 보았을 때 명백하게 부각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삼위일체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이 교의를 모순될뿐더러 불필요한 내용으로 생각하였다. 삼위일체를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 전체의 마무리돌(Schlußstein)로서 중요하게 생각한 슐라이에르마허조차도 이 주제를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었을 뿐 삼위일체가 전체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반면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문제를 신학의 가장 첫 부분에서 계시의 문제와 관련시킴으로써 모든 신학이 삼위일체를 바탕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르트는 그 이전까지의 신학 체계들을 한꺼번에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축을 마련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인간의 차원으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원칙적으로 부당하며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 가능하다. 인간은 계시 앞에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놓인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며, 또 그 계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 계시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계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며, 계시의 내용도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자(Offenbarer)’와 ‘계시(Offenbarung)’와 ‘계시됨(Offenbarsein)’ 사이에는 긴밀한 일치가 존재한다. 계시는 순전히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여기에는 다른 인간적인 요소가 끼어 들어갈 틈이 없다. 바르트는 이렇듯 계시의 ‘주어’, ‘술어’, ‘목적어’의 구조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체성을 발견한다.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사건의 묘사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제 내용과 상관없는 관념적인 교의가 아니다. 또한 삼위일체는 성서의 단편적인 본문을 뒤져서 발견될 수 있는 신학의 잡다한 부분들 중 하나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바르트는 계시론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으로써 ‘삼위성 안의 일체성’과 ‘일체성 안의 삼위성’을 체계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양태론적 해석과 종속론적 해석을 비판하는 훌륭한 신학적 근거로서 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모든 신학의 출발점에 대한 고백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간에게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계시가 해석되도록 주도하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이르려는 인간의 노력이 무능력할 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바르트의 계시론에서 인간의 역할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점은 반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바르트 신학의 강점이기도 하다.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제한된 인간 주체의 맥락을 찢고 들어오셔서 스스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우리의 폐쇄적인 세계에서 안주하지 못하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곧 타자 일반에 대한 경험으로 확대될 수 있다면, 실재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경험으로 여겨질 수 있다면, 바르트 신학은 놀라운 함의를 지닌다. 이것은 주체의 예상을 계속해서 어긋나가며 주체를 당혹스럽게 하는 타자에 대한 경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에서는 이러한 타자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외부 세계의 모든 대상들은 주체의 인식에 매개되므로 주체가 미리 설정한 인식의 질서 속에서 자리 잡아야 했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의 주체는 자신의 인식에 근거하여 세계에 대한 법칙을 세울 수 있었으며 세계 전체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반면 바르트에게서는 이러한 주체에 대항하여 주체의 질서에 갇히지 않은 채 오히려 그 질서를 무능력하게 하고서 자신을 계시하는 타자에 대한 경험이 신학의 제일 첫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바르트는 그 자신이 미처 깨닫지는 못했겠지만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 같은 현대철학자들의 타자 이론에 앞서서 이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주장을 신학적인 방식으로 개진시킨 셈이 된다. 타자는 우리가 세운 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우리가 끊임없이 이전에 속해 있는 세계를 넘어서게 한다. 타자는 결코 완결된 질서 속에 포착되지 않으며, 타자로서의 실재 전체 역시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여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계속해서 발견하도록 만든다. 실재는 형이상학적 체계나 자연과학적 법칙 안에 담기지 않는 무한한 타자성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가 믿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교의학개요』의 서두인 제1-4장까지의 내용에서 자신의 교의학이 지닌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교의학’이라는 학문분야의 과제를 설정하며 사도신경의 제일 첫 고백인 “내가 믿습니다(Credo).”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말씀해 오시는 분이시다. 신앙이란 인간 주체의 자기 내면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스스로를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인식이며 고백이다. 이후에 전개될 바르트 신학의 내용들은 서두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이 내용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회교의학』 Ⅰ/1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지는 계시론과 삼위일체론 역시 『교의학개요』에서는 “내가 믿습니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책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서두에서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구과제” 바르트에 따르면 ‘교의학(Dogmatik)’이란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때그때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 타당하도록 성서의 규준에 맞추어 신앙고백의 인도를 받아 해명하는 비판적인 학문이다. 교의학의 주체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선교할 것을 위탁받았으며, 이 복음의 선교는 교의학이 연구하는 대상이자 사실이다. 그러나 교의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의 선교를 다룬다고 하여서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며, 인간 역사의 오류와 한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교의학을 내세울 수는 없으며, 다만 자신이 ‘자기가 깨달은 인식의 그때그때의 입장’을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세상 속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선포한다. 이때 교의학은 주석(Exegese)과 실천신학 사이에 위치한다. 교의학은 복음 선교의 유래나 방법과도 관련이 있지만 이것을 직접 묻지는 않고, 오히려 ‘지금 여기서(hic et nunc)’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Was)’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구는 교회의 근본이자 내적 생을 지어주는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도록 하는 ‘성서의 규준’에 맞추어 일어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비록 성서의 권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교부들의 증언을 비롯하여 교회 안에서 권위를 얻은 ‘신앙고백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교의학은 ‘비판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신뢰이다.” 교의학은 복음의 선교 과정에서 지금 여기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묻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을 믿습니다.”라는 교회의 고백에서 그 속에 들어가는 “……을”이 무엇인지가 교의학의 핵심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교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어야 한다. 이 대상이 결코 인간 주체 자신의 체험이나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르트는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한 만남이 문제된다. 그 고백문에는 ‘내가 ……을 믿습니다.’라고 쓰였다. 이 ‘을(an)’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 ‘크레도’는 이 ‘을’, 곧 신앙의 대상을 설명하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주체적 신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사도신경은 이 처음말 ‘내가 믿습니다.’하는 것 밖에는 신앙의 주체적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뒤집어진 때,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행위나 사람에게 일어나는 체험의 충동을 웅변했을 때, 또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에 관해서는 침묵하였을 때는 결코 좋은 때는 아니었다. 신경은 주체의 행위에 대하여 침묵하며, 객관적인 신조를 말함으로써 가장 좋게, 깊게, 완전하게 우리와 관계있는 것, 우리가 반드시 되어야 하고 행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성구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잃는 자는 그 생명을 도로 얻으리라 하는 말이다.”1
바르트는 여기서 그가 이후에 보다 자세히 설명할 하나님의 영원 이전의 결의와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자유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다. 이 내용은 사실상 바르트 신학 전체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믿습니다.”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한 증언이다. 그 하나님은 영원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기로 결의하신 하나님이시며, 결코 인간을 비참함 가운데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우리와 함께 계신 은혜로운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진다. 바르트는 “신앙은 인식이다.”라는 두 번째 설명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여기서 잠시 소개한다. 이것은 그의 계시론에 대한 간략한 요약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듣는다. 따라서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2라고 설명한다. ‘계시자’와 ‘계시’는 여기서 일치한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내고 있다.
“이러하다는 것을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은혜롭다.’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교 사상의 중심 개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은총의 말씀이다. 어디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하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듣게 하시는 분을 지시하고, 신조의 둘째 항으로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참 하나님, 참 인간이신 분이시고, 임마누엘,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다.”3
이렇듯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물로서 주어진다. 이 선물은 우리에게 고귀한 자유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계시자’와 ‘계시됨’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영원 이전부터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의하신 하나님, 인간과 함께 하시며 결코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여 있으며, ‘악’이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거부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극복된 ‘무(無, Nichtige)’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해방된 자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로서 발견하고 신뢰하게 되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계시를 계시되게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에게 일으키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할 능력을 갖춰있다는 것을 아무리 변호한대도 우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소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등장하여 와서 우리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와 만나고 이 만남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우리 쪽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4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를 얻어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자유를 누리며 감사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를 신뢰한다거나 다른 법칙, 권위를 신뢰한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법칙이나 권위들은 운명적인 형태로 인간을 구속하는 반면, 신앙은 이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진정한 안정은 우리 편에 서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게만 있다.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약속을 신뢰한다.
바르트는 신뢰로서의 신앙을 네 가지 요소로 풀어낸다. 신뢰란 “이를 반대하는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배타적으로, 전적으로”5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이성’과 같은 인간적 근거들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므로 바르트에게서 철저히 거부된다. 따라서 신뢰는 인간적 조건이나 상황을 배제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다. 또한 신앙이란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최후의 결정적인 결단이므로 ‘단 한 번’이 문제시된다. 진정한 신앙은 한 번의 결단으로 그 뒤의 내 모든 생 전체를 좌우하며, 일시적인 한 순간의 상태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더 이상 인간적인 다른 진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포기이므로 ‘배타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은 삶의 특정 영역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그분의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전적인’ 신뢰이다.
“신앙은 인식이다.” 바르트는 이 항목에서 자신의 계시론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그는 우선적으로 신앙이 불가해한 가르침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인식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이때 ‘이성적이’라는 말은 신앙의 내용을 논증으로 증명될 수 있다거나 추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신앙이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신비체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와 교회의 고백을 통해 선포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때 신앙을 깨닫는 일이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이념이나 철학적 가치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생래의 능력, 오성(悟性)과 감성에 의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나은 경우에도 최고의 존재, 절대의 본질, 순수 자유 능력의 이념, 만물 위에 있는 존재 같은 것이다. 이 절대 최고의 것, 이 궁극적이고 가장 심오한 것, 이 ‘물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적 사고, 인간적 창안이 가진 직관과 제한된 가능성에 속한다. 이것을 인간은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로 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들 때에라야 생각되고 인식될 수 있다.”6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신다는 원리를 명백히 주장한다. 계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조명하여 계시를 깨닫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조명이 있고, 사람의 의식의 전달이, 또 이 교사의 인간 교육이 독특하게 일어날 때 성립한다.”7 바르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이 내용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대체 인식될 수 있을까? 사실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통하여 인식된다는 것이 참이고 현실적이므로 하나님은 인식될 수 있다. 이 사실이 일어날 때 인간은 자유로이 가능하게 또 유능하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한 신비이지만 하나님 인식은 전혀 그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움직여지고 방향이 작정된 인식이다.”8
바르트는 그리스도교적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지(知, Wissen)’와 그것을 포괄하는 보다 깊은 차원의 ‘지혜(知慧, Weisheit)’를 구별한다. 라틴어로 둘은 ‘사이엔티아(scientia)’와 ‘사피엔티아(sapientia)’로 구별되며, ‘사피엔티아’는 그리스어 ‘소피아(sophia)’에 유래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에서의 ‘지혜’란 증명 가능한 것이라거나 철학적 논증의 결과에 대한 앎이 아니다. ‘지혜’는 ‘실천적인 지’로서, 우리 삶 전체를 이끌어주는 통찰, 곧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앎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앙이 인식이라는 말의 의미는 신앙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후 논의되듯이, 인간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영원 이전부터 자신을 사랑하시기로 결의하셨으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앙은 고백이다.” 신앙을 통해 하나의 결단이 내려진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인간 차원의 응답이 생겨나는 것이다. 신앙하는 인간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복종함으로써 응답한다. 이렇게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시간 중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실현하고, 완수하도록 만듦으로써 신앙이 있는 곳에는 역사가 일어난다.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가 생기며, 이 공동체를 통해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의 신앙을 공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전한다. 이렇게 해서 신앙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뢰와 인식을 공적인 영역에서 고백함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바르트는 세 가지 형식의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을 이야기 한다. 첫째로 교회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말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교회 자신의 말이란 바로 성서의 언어를 비롯한 특수한 교회의 용어이며, 바르트는 이를 ‘가나안의 언어’라고도 표현한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단순히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가나안의 언어’로만 신앙을 고백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언어는 교회 밖의 일상적인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불경건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도 이야기한다. 또한 그는 나치 당시 복음주의 교회들이 교회 밖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였으므로 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바르트가 「바르멘 신학선언」을 작성하여 전 세계 교회가 나치에 대항해서 싸우도록 이끈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주장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셋째로 교회는 “현실에 부합하는 행위와 태도 가운데”9 고백해야 한다. 바르트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두 번째 형식과 구별하여 신앙인들의 고백이 특정한 영역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전 인격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사도신경의 첫째 항: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높은 데 계시는 하나님” 바르트는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는 사도신경의 첫 번째 항을 ‘높은 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간략히 요약한다. 이 표현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전적 타자’로서의 면모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신앙 밖에서 ‘신(神)’이라고 불리는 여러 존재자들 중 하나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체험과 개념들로부터 ‘신’을 찾고자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인간적 해석 틀에 제한되기를 거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해석 틀을 부수며 자신을 스스로 알려오는 타자이다. 바르트는 인간학으로부터 신에 대한 견해들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모든 입장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이 개념적으로 추구하여 발견한 것의 완성, 최종, 최고, 최선의 완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른 때 하나님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것 대신에 등장해 와서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제외하고 홀로 진리라고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모르면 그리스도교회가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은 스스로 추구 발견하지 못한 실재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찍 찾아보지 못하고 어느 귀가 듣지 못하고 어느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못한 것,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라고 바울은 이 사실을 말했다.(고린도전서 2:9)”1
‘높은 데 계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나타내고 있다. 바르트는 “높은 데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있어지어다.”라고 이야기하는 『누가복음』 2:14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인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는 『전도서』 5:2의 구절을 변형하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Gott ist im Himmel und du auf Erden).”라는 말로도 하나님의 타자성을 표현하였다. 그분은 전적 타자이기 때문에 주체가 결코 손아귀에 쥘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주장하며 그를 우리에게 알려 오실 때에야 일어난다.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높은 데 계신’이란 말은 그는 우리와 우리의 최고 최심의 감정 노력 직관을 다 초월해 있고, 인간 정신의 산물 중에 가장 우수한 것까지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첫째로 그 분이 우리에게 설정되거나 인간의 성향이나 가능성에 일치하는 일이 없고 어떤 의미로서도 바로 자신 속에 근거를 두고, 그같이 현실 존재를 하신 분이란 것을 의미한다. 또 그가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느끼고 생각하고 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항상 자기를 통하여서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그대로 인간에게 향하시고 자기를 인간에게 주시고 알게 하신다.”2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괴리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면서도 인간의 편에 서 계시며 인간을 긍정하신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시도를 비판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높은데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고 우리의 것으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참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자기에게로 인도하신 분이시다.” 3이 점에서 바르트는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동시에 ‘하나님의 인간성’을 주장하는 신학자이다. 이것은 이후 사도신경의 두 번째 항목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스스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을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사변적 증명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질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기에 우리의 기대나 추론을 부수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려 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의 증언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타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바르트는 이 점에서 성서가 한 번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논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 아니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에게 인간 주체의 모습을 덧씌워 우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 때문에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으로써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추측에 따라 만들어낸 신들의 모습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로우시다. 이러한 자유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바르트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자유’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때의 ‘자유’와 ‘사랑’조차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개념들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둘째 개념은 성서적인 것일지라도,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자유이시다. 무엇이 자유이며 무엇이 사랑임을 우리는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4
바르트는 ‘유일신 신앙’ 역시 하나님의 타자성과 관련하여서 설명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단순히 숫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전적 타자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분은 다른 비교대상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유일하신 분이시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오는 계시만이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 이 호칭이 인간적인 아버지 개념을 하나님께 투영시킨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론해 내려는 시도로서 비판 받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부성(父性)으로부터 참된 부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바르트는 『에베소서』를 인용하며 “천지 가운데 모든 부성이 그에게서 나왔다.”5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자신을 설정하셨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존재양태를 통해 자신을 ‘성부’와 ‘성자’로서 설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이미 영원한 부성이 있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표현은 그가 우선적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내적인 본성이 시간 속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창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영원 이전의 결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하셨고, 그 결의에 따라 시간 속에서 활동하신다. 바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한 것이 지금 우리를 위하여도 그같이 되기 원하시고 그의 영원에서 가진 존재대로 우리를 위하여 계시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부성에 힘입어──자유로운 은총에서 함이지 자기의 생업이기 때문이 아니게──우리의 아버지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이 진리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알아낼 수 없다.”6 “하나님의 본성에서 참된 것이 시간 중에서 참이 된다.”7 따라서 피조 세계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을 뿐(factus) 그에게서 출생한(genitus) 것이 아니므로 엄격히 말해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없다. 하지만 성부는 피조물들의 근거인 성자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성자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한에서 그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성 역시 인간 주체의 전능 개념을 전제하고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물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힘이시며, 모든 피조물들의 기저, 규준,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시며 모든 것들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식의 철학적 언술로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유력하고 전능하다고 일컬어지면서 하나님의 전능과는 아무 상관없는 많은 힘이 있다. 우리는 이것으로 보편적 개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8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세 가지 항목으로 설명한다. 이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항목이 전능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첫째로 하나님의 힘은 무력(無力)하지 않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 위에 계신다. 어떠한 권력들도 하나님과 경쟁할 만한 것들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들 권력들에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힘은 결코 ‘권력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권력 자체’라고 불리는 것과 대립하여 계신다. 바르트의 세 번째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두 항목과 달리 보다 심도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모든 지배권이나 구체적인 권력(potentia)의 총화로 이해하는 태도를 우려한다. 그는 바로 히틀러가 하나님을 “전능한 분”이라고 곧잘 불러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조건적인 자유와 절대적 가능성 속에 있는 ‘권력 자체’란 혼돈이며 악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은 ‘혼돈과 공허(tohuwabohu)’의 힘을 몰아내어 버리셨다. 이와 같은 점을 통해 바르트는 아무런 제약 없이 역동성만을 지닌 ‘권력 자체’가 결코 하나님의 전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과 대립하여서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악’이자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거부하신 ‘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한 힘은 이와 같은 권력을 전복시키시며 권력자들을 무너뜨리시는 데서 나타난다. 개념적으로 구별하자면 하나님의 힘이란 무차별적인 가능성으로서의 힘인 ‘포텐시아(potentia)’가 아니라 법에 근거한 힘인 ‘포테스타스(potestas)’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경우 하나님의 전능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하시는 사랑의 힘이다. 바르트는 나중에 이 내용을 사도신경 두 번째 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다.”라는 고백과 연결 짓는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치고 하늘에 오르기 전 “나에게 천지간에 모든 권세가 주어졌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말은 그가 무의미한 권력 자체를 제한 없이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권력 자체를 분쇄시키고 ‘무’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것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전능이란 그가 인간을 구원하시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힘을 지니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능은 “하나님이 둘의 제곱을 다섯으로 만들 수 있는가?”와 같은 유치한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르트는 이러한 힘이 무의미한 힘일 뿐만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며 지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무력이라고 지적하며 이 힘이 하나님과 대립해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은 악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랑의 힘의 충만함이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고백은 다른 종교와 신화들에서 신을 창조주로서 일컫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신을 창조주로 묘사하는 데서 그리스도교나 이방종교나 비신앙인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르트에게서 이러한 생각은 인간적 추론으로부터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도출해 내려는 잘못된 시도라고 비판받는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창조된 하늘과 땅’을 믿는다는 것도 아니고, ‘창조’라는 사업을 믿는다는 것도 아니며, 바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창조 사건의 주어인 이 ‘창조주’가 누구이신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므로 “창조하였다.”라는 술어의 공통점만 가지고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다른 종교와 신화의 창조주와 동일시하여서는 안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 세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자연신학의 시도를 거부한다.
바르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와 성서의 『창세기』를 구별한다. 이 내용은 그의 『교회교의학』Ⅲ/1에서 매우 상세하고 뛰어난 방식으로 비교 분석되지만, 『교의학개요』에서는 간략히 ‘신화(Mythus)’와 ‘사화(Sage)’의 구분만이 소개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무시간적이며 영원한 질서를 다룬다. “생과 사의 문제, 잠을 잠과 깸의 문제, 출생과 사망, 조석 주야의 문제 같은 무시간적인 것이 신화의 제목이다.”9 신화가 말하는 세계는 언제나 이미 있었고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세계의 한계를 ‘창조’라는 이름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이것은 생성과 소멸의 반복되는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 ‘창조 신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점은 바르트뿐만 아니라 20세기 최고의 종교학자 중 하나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또한 주장하는 내용이다.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신화』라는 저서에서 신화의 이야기들이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원형적인 질서를 표현한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신화가 이러한 특징을 지닐 경우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신화에 속한다고 볼 수가 없다. 『창세기』는 세계의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질서를 나타내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 시간적이며 변화하는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고대 근동의 신화와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이 점에서 서로 완전히 대비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시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때 『창세기』가 증언하는 역사는 우리의 역사적 인식(Historie) 밖에 있는 원역사(Geschichte)이므로 이것을 과학적으로나 역사비평적으로 추적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신화가 세계의 무시간적 질서를 말하고자 하고, 성서가 하나님의 시간적 활동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닌 것으로서 구별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이 때문에 『창세기』의 내용을 ‘신화’가 아니라 ‘사화(史話, 역사 이야기)’라는 뜻의 독일어 ‘자게(Sage)’로 분류한다.
바르트에게서는 자연신학이 거부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창조주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부각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에 근거해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비애와 행복이 교차된 세계는 흐릿한 거울이 될 뿐이다. 이 거울에 대하며 우리는 낙관적으로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결론지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일월성신이나 자신에게서 진리를 연역해 내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우상이었다.”10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창조는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 밖에 연장되어 나가 시간 내에 이루어진 한 유비(analogia)이다.”11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성부와 성자로 설정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자가 되심으로써 창조 세계에 속해 있는 피조물이 되셨다. 즉 영원 이전에 하나님은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결의하셨다. 창조는 이 결의가 시간 가운데 시행되어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든 창조 세계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한 영원 전의 결의 통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피조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창조주와 창조 사건을 발견한다. 스스로 피조물이 되신 하나님을 통해서 그가 자신 외의 다른 존재자들을 기쁘게 허용하셨음을 보게 된다. 또한 피조물이 되신 하나님이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가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maja)’라는 이름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현실적인 실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창조가 순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자기 밖의 타자에게 현실성과 존재를 자유롭게 부여하셨다. 사실 하나님은 고독하시지 않으시므로 창조 세계를 전혀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와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하신 창조에 대해 감사할 뿐 여기서 우리 자신의 공로나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 피조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세계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다거나,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왔다는 주장들은 성서가 말하는 창조와 어긋난다.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세계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원리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io)’가 의미하는 바이다. 자유롭게 존재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생겼으므로 세계는 아무런 자신의 내적인 원리 없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게 ‘무’가 만방에서 폭발해 나온다. 피조물 자체는 자기를 구속하거나 보존할 수 없다.”12
모든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긍정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한 영원 전의 결의에 따라 시간 가운데 활동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창조된 모든 것은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이다. 하나님은 ‘악(惡)’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악과 같이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힘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거부하신 ‘무(無, Nichtige)’이다. 이름 그대로 이러한 ‘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만약 ‘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름 붙이고 일종의 실재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부정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는 힘이라고만 해야 한다. ‘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긍정을 통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거부로 인해 ‘무’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근거를 가지게 된다. ‘무’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은 것이라는 제3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창조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영역 곧 죽음, 죄, 악마, 지옥 등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고 그의 창조에서 제외된 것, 거기 대하여 하나님의 부정을 선언한 것이라 함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악의 실재가 있다면 이것은 제외당한 부정당한 실재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것을 선하게 지으시고, 그것을 지나간 뒤에 남겨 둔 실재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은지라.’ 선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았고 피조적 존재를 가지지 않았고, 그것을 만일 보통으로 존재한 것으로 친다면 또 존재치 않은 것이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정 선언’의 무게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힘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 속에 암흑을 찾아서는 안 된다.”13
‘무’는 창조세계에 역설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있다는 것이 참 모습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없을 때 가려지게 된다. 이때 피조물은 존재하지도 않는 ‘무’의 힘에 의해 억압당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를 주시지 않았고, 오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긍정 속에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분리시키길 원하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반역이며 ‘무’의 힘이 세상 가운데 활동하는 사건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창조를 이야기하는 바르트 신학은 얼핏 관념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내용들은 심오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성서적이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그가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자기 속에서 결의하셨고,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2000년 전 유대 땅에 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뒤 부활하신 역사적 인물을 넘어선다.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영원 이전의 약속이다.
또한 하나님의 부정 선언으로서 ‘무’에 대한 논의 역시 결코 관념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이 점은 『창세기』 1:2에 ‘혼돈과 공허’로 번역되어 등장하는 ‘토후와보후(tohuwabohu)’라는 단어의 고대 근동신화적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이 단어의 어원이 되는 ‘테홈(tehom)’은 혼돈의 물을 의미하며, 바르트가 앞서 ‘권력 자체’라고도 표현한 무제약적인 힘을 상징한다. 고대 근동신화들에서 ‘창조’는 신들이 이 혼돈의 힘과 싸워 이김으로써 이루어진다. 성서가 이러한 신화적 상징들을 차용하고 있다면, 『창세기』 1:2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를 자신이 거부하시는 무의 힘으로부터 지키신다는 의미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바르트는 이 내용을 『교회교의학』Ⅲ/1에서 『창세기』 1:2를 주석하며 상세하게 다룬다.
뿐만 아니라 바르트는 그리스도론을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신학 체계들에서 이루어진 여러 구분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혁명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 세계 안의 ‘일반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특별 계시’로 구분되지 않는다. 창조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지어졌으므로 창조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지옥에 떨어질 자를 각각 예정하셨다는 칼빈(Jean Calvin) 신학의 이중예정론도 무너진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폭군이 아니시다. 예정이 존재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사랑과 구원의 예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은 이후 칼 라너(Karl Rahner)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등의 학자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과 ‘만유구원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하늘과 땅” 사도신경에서 쓰인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니케아-콘스타티노플 신경이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에 대응한다. 고대 근동과 성서의 세계상에서는 세계는 커다란 종 모양이었다. 이때 하늘은 ‘궁창(rakia)’이라는 것으로 덮여 있다고 생각되었다. 궁창 위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으며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본원의 하늘이 있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말하는 ‘하늘’이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인 대기층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는 피조적 세계이다. 이 세계 자체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운 신비를 자아내는 세계로서 경탄의 대상이다. 반면 ‘땅’은 인간이 접촉하며 살아가는 세계,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의 세계인 ‘땅’은 하늘 아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세계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는 암묵적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둘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그는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은 피조물 전체가 집중하여 오며 동시에 자신을 초월해 나가는 피조물 안의 한 장소이다.”14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인간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찬송 받으시길 원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의 의미이며, 기초이며, 목적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 이전의 계약을 상기시킨다.
“이는 우리가 계약이라고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말하자면 이차적인 것이나 후에 부가된 것이 아니고 계약은 창조 그것과 같이 오래다. 피조물의 존재가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 맺음이 시작되었다. 존재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계약에서 밝히 나타나며 유효하게 되는 하나님의 활동을 따라 하나님의 의도를 이미 보여주는 한 존재한 모든 것은 인간을 목표로 질서지어져 있다. 계약은 창조와 같이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이것보다도 더 오랜 것이다. 세계가 있기 전 천지가 있기 전 하나님의 칙령과 결의가 있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상하게도 참되고 현실로 되어진 인간과의 교통을 유지하려고 일으킨 이 사건을 고려하고 있다. 우리가 현 실재와 피조물의 의미를 묻고 그 기초와 목적을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체결된 이 계약을 생각하여야 한다.”15
영원 이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의에 따라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이 결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시겠다는 결의였다. 그리고 이 결의에 따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피조물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다.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사랑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증언해야 할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의 실존 중에서, 창조물의 안에와 그것 위에 반드시 일어날 사실을 가리키는 징표와 지시와 약속이 되며 곧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과 공재(共在)와 교통이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둘의 통일이 되는 것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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