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의 신학 [로마서 강해]-윤유석
2015-02-25 20:20:58
인간의 이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긍정이 널리 퍼짐에 따라 19세기 그리스도교계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엄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성서비평학'에 근거하여,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계시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려는 부류의 신학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정통적인 신학관에 반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성된 인간', '인간보다 조금 훌륭한 분' 정도의 역사적인 인물의 하나로 이해하려 하였고, 부활 사건 역시 '자연의 부활' 또는 예수의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예수에 대한 기억'으로 받아들이며 인간의 이성으로 신앙을 재단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조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이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가 팽배하던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던 과학 기술은 오히려 전쟁에 활용되며 역사상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고, 인간의 합리성과 윤리가 점차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 역시 전쟁 속에서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신학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빌헬름 2세의 전쟁 선포에 지지를 표하였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의 성명에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의 권위자였던 하르낙과 헤르만의 이름이 들어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헤르만의 제자였던 바르트는 이 일로 인해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실망하였습니다. 후에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라는 책을 통해 이성을 중심으로 신앙을 해석하려 하였던 이전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하나님과 세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개척하게 됩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윤리규범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예수의 삶이 주는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점이 이웃사랑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덕목들에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경건을 통해서도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단지 개인의 종교 체험을 기록한 문서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체험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듯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타종교나 세상의 도덕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뿐더러, 그리스도교가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이러한 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의 선한 마음과 도덕으로는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역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세상은 세상이다"라는 명제는 바르트가 이야기하였던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가운데서 자유주의 신학에 실망하였던 바르트는, 그 후 신학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의 만남과 로마서 연구를 통해 '세상적인 것(das Weltlic)'과 '신적인 것(das Gotliche)', ‘현존하는 것(das Gegenwartige)’과 ‘오고 있는 것(das Kommende)’ 사이의 간격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발전은 1919년에 발표된 ‘로마서 강해’ 제1판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이 인간의 죄성과 이기심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데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세계는 인간 역사의 진보와도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그는 매우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 세계는 죽음의 힘과 영의 힘 사이의 투쟁이며, 이 전투에서 인간은 '어느 쪽에 설 것이냐'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세계사의 주제는 개별자로서의 인간의 마음씨를 묻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객관적인 세력들, 즉 죄의 세력과 의의 세력 간의 투쟁이다. 이 세력들 중 어느 쪽의 지배하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개별자로서의 인간의 존재가 죽음으로 가느냐, 아니면 삶으로 가느냐가 결판난다.”
개인주의적인 경건의 노력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구조적 성격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바르트의 설명입니다. 그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죽음과 죄의 힘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인류 역사의 진보와 함께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19세기의 낙관적인 전망들은 세계대전의 발발을 통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르트는 이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으며, 전쟁 속에서 인간의 잔혹함과 악마적인 모습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로마서를 통해 그는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경건을 이루고자 하는 행동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 행위로 참된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은 결국 “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로마서 7:24)라는 탄식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인간을 죄로 부터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으며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생명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너무나 일반화된 이야기이지만, 자유주의가 만연하였던 당시의 신학계에서 바르트의 이와 같은 선언은 굉장히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바르트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계의 권위자였던 하르낙에게 “신학교 교직을 설교직으로 변질시켜버린, 학문적 신학 대신 부흥회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부흥 설교를 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삼고 있는, 매우 우려할만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세상의 진보에 의해 성립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이 세상을 구분하기 위한 노력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제1판에서 단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 앞에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법은 ‘우리 마음 가운데’있다는 점을 그는 또한 강조합니다.
로마서 강해 제1판은 세상을 부정하고 긍정하는 하나님의 변증법적인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 앞에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합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의 힘 앞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없고, 죽음의 힘은 오직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만이 정복된다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부정’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며 죽음에 봉헌된 인간 사이는 서로 깊이 단절되어 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도 이 단절을 넘을 수 없습니다. 바르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이성은 작고, 좀 더 큰 것은 알아도 참으로 큰 분은 모르고 있고, 파생된 것은 알아도 근원적인 분은 모르고 있고, 복잡한 것은 알아도 단순한 그분은 모르고 있는데, 즉 인간적인 것은 알아도 신적인 것은 모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극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긍정’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으며 신적인 것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삶으로 긍정되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을 선언하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안에는 부정과 긍정이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힘도,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힘도 하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은 그분 안에서 합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활동하실 때만이 무가치하고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은 그분의 신성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바르트는 이 사실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은] 정(Thesis) 속에서도 반(Antithesis) 속에도 계시지 않고 합(Synthesis) 속에 계신다.”
“하나님 안에만 합이 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이 합이 우리에게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르트는 예수를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씨’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점점 더 확장되어 전 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퍼져나갔습니다.
“육의 세계 한복판에 하나님의 세계의 영토가 생겨났다. 이 영토의 영역은 계속해서 커져 나가고 있다.”
하나님은 나라는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 세상에 있는 피안의 나라가 아닙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서·역사 속에서 성장하는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나라는 인간적인 방법과 역사적인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서 긍정되며 그 나라를 세우는 일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팔’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도구인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며 자신의 일들을 이룩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항하여 싸워야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계 제1차 대전의 혼란 속에서 바르트가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로마서 강해』 제2판은 제1판을 완전히 새롭게 집필한 책입니다. 바르트 자신도 “돌 하나도 처음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제2판에서는 그 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신학이 전개됩니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제1판이 자유주의 신학의 잔재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제2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그의 이러한 신학적 발전은 당시 세계 신학계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칼 아담스는 이 책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로마서 강해』 제1판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며 인간의 활동과 역사를 통해 그분의 나라가 이루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은 세상적인 모든 것들과 철저하게 부정하시는 분으로 설명됩니다. 제2판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 타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도서 5:2)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과 세상은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부정’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하는 변증법적 활동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을 무한히 ‘부정’하시며 그 어떤 세상적인 것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한때 바르트는 사회주의 운동과 같은 세상적인 사상들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위기 속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신성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그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문화나 역사도 하나님께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세상을 개혁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세상을 아무리 개혁해도 그것은 세상에 불과할 뿐,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과 종교, 문화를 연결시키고자 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는 죽음의 선(Todeslinie)이 있고, 빙하의 계곡(Gletscherspalte)과 극지역(Polarregion)과 황폐지역(Verwstungszone)이 존재합니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구원사라는 것조차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어떤 시간적인 것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역사 속에 자신의 나라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사를 통해 신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시간’과 ‘영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깨닫지 못한 오류라고 바르트는 지적합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역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은 교회 속에 존재하시지 않는다고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였던 바르트의 이러한 생각은 “안 된다. 어떠한 계약 신학(keine Foderaltheologie)도 있을 수 없다!”라는 한 마디로 집약되어 나타납니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세상이 하나님의 앞에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부정하고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흔적이며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긍정적인 모습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심판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성은 세상의 위기와 심판 그 자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 나타나는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 사상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과 더불어 당시 서구 사회의 위기의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정황 가운데서 신학적 노력을 통해 그 암담함을 해결하고자한 바르트의 노력은 『로마서 강해』 제2판에 깊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는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흔적일 뿐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는 분’, ‘연구될 수 없는 분’, ‘숨어계신 분’, ‘낯선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증언은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한 노력이었지만, 결국은 ‘좌절된 인간적, 언어적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은 신학자나 목사나 예언자나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고 그분의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근본적으로 위기에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코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긍정적인 모습들을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가지 곧 우리의 해야 한다와 할 수 없다를 알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가 전쟁을 용납하시고 고통과 슬픔을 내버려두시는지, 왜 구원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나누어두신 것인지, 우리는 아무런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성 자체를 뒤흔들어 버리는 것이 신성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는 폭군(Despot)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분의 의지와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들이 정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지옥에서 버림받은 자의 이빨 가는 소리도 선택받은 자의 찬양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의 이해와 생각을 모두 뒤집어 버리고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그 어떤 것으로서도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 속에 자신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나타낸다는 점에 바르트는 주목합니다. 그는 이것을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의 활동이 시간의 세계와 부딪히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마치 원이 직선과 접점에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이 시간과 만나게 되는 순간에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순간을 바르트는 ‘시간들 사이에 있는 순간’이라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설(Paradox)’과 ‘기적(Wunder)’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의 분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신앙 속에서 그분의 역설적인 계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세상의 역사의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이며,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적 역사가 아닌 ‘시간들 사이에 있는 역사(Zwischen den Zeiten)’입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시의 순간에는 파악되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역사로 부활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일 뿐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부활은 언제나 신화로 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제2판은 당시의 시대적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부정함으로서 하나님을 이 세상 밖으로 축출시켰다는 비판 또한 받고 있습니다. 후에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을 저술하며 하나님 속에 있는 인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트가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의 하나님이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전적 타자’였다면, 『교회교의학』에서의 하나님은 은총의 깊이와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전적 타자’입니다. 바르트는 자신의 평생 동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였고, 그 차이는 이렇듯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깨닫는 방향으로 더욱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돌프 불트만[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윤유석 (0) | 2023.05.08 |
---|---|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윤유석 (0) | 2023.05.08 |
칼바르트 [교의학 개요]- 윤유석 (0) | 2023.05.08 |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서평 (0) | 2023.05.08 |
칭의와 성화-박영돈 (0) | 2023.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