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신학이란 무엇인가?- 칼바르트
2015-01-27 19:49:56
개신교신학의 근원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은폐되었다가 신약성서의 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의 문서안에서 밝히 드러났으며 그 후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고 수용되었다. 개신교신학은 복음 안에서 스스로를 알리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에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곳, 바로 그 분이 신학의 근원과 규범이 되시는 사건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바로 개신교 신학이 존재한다. 이런 개신교 신학의 성격에는 다음 네가지 특징이 있다.1
1. 개신교신학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찬양하거나 어떤 신학 형태를 취한 후 자기가 신적지혜와 가르침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복음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향할 때 신학은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그런 일을 도무지 주장할 수 없게된다. 오히려 개신교신학은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영예를 다른 모든 신들 앞에서 밝히 드러내시는 저 신적 결단과 행동으로부터 사고하고 진술한다. 따라서 개신교신학은 바로 자신의 대상에 의해 규정되는 겸손한 학문이다. 2
2. 개신교신학은 인간의 실존, 믿음, 이성이라는 세가지 하위 전제와 함께 작업하며 이 세가지가 개신교신학에 전제된다. 그러나 이 세가지 전제들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 개신교신학의 대상인 복음의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 실존과 관계하시며, 실제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인간에게 깨우치고 부르시며, 그와 함께 실제로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능력을 총체적으로 요청하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신교신학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성의 예시라는 상위 전제 아래서 사고하고 진술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학은 실존, 믿음, 이성이라는 저 하위 전제들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학문이다. 3 다시 말해 게신교신학은 자신을 대상에게 일임하며 그 결과, 대상에 의해서 하위 전제들로 부터 언제나 자유로워지는 학문이다.
3. 개신교신학의 대상은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며 역사 안에서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신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동시에 소유하신다. 그러나 개신교신학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시는 바탕인 그 역사를 반복할 수 없으며, 현재화하거나 선취할 수 없다. 개신교신학은 그 역사를 자신의 고유한 사역에 의하여 등장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역사 과정 안에서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실 때, 개신교신학은 그 앞서 가는 과정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뒤따라야 하며, 자신의 인지, 숙고, 진술안에서 자기 자신도 살아 있는 역사 과정의 특성을 가져야 한다. 개신교신학은 바로 이 관점에서 현저하게 비판적인 학문이다. 다시 말해 개신교신학은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위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학문이며, 결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학문이다.
4. 복음의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 안에 폐쇄된 어떤 고독한 신이 아니시며 모든 타자로 부터 분리된 어떤 절대적인 신이 아니시다. 개신교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높이 계시지만 또한 낮아지신다. 그분은 비천함 가운데 높으시며 인간에 대한 그분의 회피할 수 없는 부정은 그분의 긍정 안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분은 참으로 복음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말씀의 하나님이시다. 복음적인 개신교신학은 그분의 이러한 은혜로운 긍정, 그리고 인간에게 친근하신 하나님의 자기 알림에 힘써 대답한다. 이렇게 개신교신학은 바로 인간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관계하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인간인 인간과 관계한다. 우리는 개신교신학이 복음적 신학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잊지 말고 강조해야 한다. 개신교신학은 복음적 신학이며 어떤 비인간적인 신을 향한, 그래서 율법적인 신학이 아니다. 복음적 신학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관계된다. 개신교신학이 이런 대상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어떻게 감사하는 학문, 그래서 기뻐하는 학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각주 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중심이 내 자아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바르트는 신학에서는 자아 중심을 나사렛 에수의 인격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다.
각주 2
바르트는 일반 학문의 중심은 이성을 가진 주체로서의 자신인데 신학에서는 이 중심이 상대화되고 역사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중심의 사유방식에 물든 인간 특히 이성중심의 학문에서 중심축을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학문의 토대를 흔들었고 바르트가 배척받은 이유도 이것이..
각주 3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객체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인데 그러나 바르트는 신학에서는 나의 주관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은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내가 주체가 되어 말씀을 객체로 인식하는 사유방식으로 부터 자유를 의미한..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중심이 내 자아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바르트는 신학에서는 자아 중심을 나사렛 에수의 인격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일반 학문의 중심은 이성을 가진 주체로서의 자신인데 신학에서는 이 중심이 상대화되고 역사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중심의 사유방식에 물든 인간 특히 이성중심의 학문에서 중심축을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학문의 토대를 흔들었고 바르트가 배척받은 이유도 이것이다. 바르트는 신학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 이것이 신학이 말씀에 응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객체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인데 그러나 바르트는 신학에서는 나의 주관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은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내가 주체가 되어 말씀을 객체로 인식하는 사유방식으로 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가 없는 겸손한 신학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학문이라고 말한다.그래서바르트는 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보는 자유인데 이것은 신학의 대상에 의해 주어진 자유라고 말한다. 바로 이 자유때문에 개신교 신학은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근본행위는 순종이며, 특히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학의 근본행위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이성이 중심이 된 학문의 관점을 뒤집고 신학의 방법 자체도 신학의 대상에 의해 창조된다고 강조한다. [본문으로]
02.신학의 자리[말씀]-칼바르트
2015-01-27 20:54:43
신학의 자리는 신학의 내부로부터 지시되고 신학의 대상에 의해 필연적으로 지정되는 출발점[말씀]을 뜻한다. 신학 그리고 신학의 모든 각론은 바로 그 출발점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학은 그 자체가 말, 즉 인간적 대답이다. 그러나 신학 자체의 대답하는 말이 신학을 신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을 듣게 하고 대답하게 하는 말씀이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신학은 말씀과 함께 서고 넘어진다. 말씀이 신학 안에서 인지되고 신학이 그 말씀에 대답할 때 신학은 겸손하고 자유로운 학문이 된다. 그러나 신학에는 겸손과 자유 이상의 것이 문제가 된다. 신학적 사고와 진술이 가지는 말씀에 대한 근원적 관계에서 그 두 개념은 아직 허약하다. 어떤 인간적 사고와 진술이 말씀에 대답함으로써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규칙을 자명하게 필요로 하게 되어, 그 결과 그 규칙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에 대답하는 인간적 사고와 진술 자체가 그 말씀의 창조 행위를 통해 비로서 불러내어지고 존재하게 되고 활동적으로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후의 모든 것을 그 자체 안에 포괄하면서 시작하는 신학의 근본행위(순종)이다. 말씀은 신학에 규칙을 준 뒤 그 다음에 신학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처음에 신학의 근거를 놓고, 건립하고, 그 신학을 무로부터 존재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부르신다. 따라서 신학의 자리는 언제나 바로 그 말씀 앞에 위치한다.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성의 한 가운데서 모든 인간을 향해 말하셨고, 말하시고, 말하실 말씀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와 닿은, 인간을 위한, 인간과 함께 하는 말씀, 곧 그분의 행동의 말씀이다. 그분의 행동은 무언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말씀하는 행동이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을, 즉 인간과 맺은 계약의 행동을, 또 그 계약을 수립하고 유지하고 실행하고 완성하시는 역사안의 행동을 열어보이신다. 하나님은 계약의 우선적 파트너이신 하나님 자신을, 즉 인간의 하나님이신 자기 자신을 열어 보여주신다.2 또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인간이 계약의 상대편 파트너임을, 즉 인간이 하나님의 인간임을 열어 보이신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계시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인간이 되는 계약, 그러한 역사, 바로 그러한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술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말씀들로부터 구분한다. 바로 그 말씀이 신학의 창조자이시며 이 말씀을 통해 신학에게 자리가 지정되며 과제가 부여된다. 개신교신학은 이 은혜와 평화의 계약에 관한 말씀에 봉사할 때 존재할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완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말씀하셨고, 아직도 말씀하시고 재차 말씀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 부터 유래한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수성 안에서 보편적으로 선포된다. 그 복음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수립하시고, 유지하고, 실행하고, 완성하시는 은혜와 평화의 계약에 대한 말씀이며 그분과 인간들 사이의 친근한 교제의 말씀이다. 이 말씀, 곧 역사의 말씀을 개신교신학은 언제나 새롭게 인식해야 하고, 언제나 새롭게 이해해야 하며, 언제나 새롭게 진술해야 한다.
계약의 역사는 어떤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 그 하나님은 한 인간 종족을 인류 전체를 위한 모범으로 만들어 그분의 백성으로 만드신다. 그분은 바로 야훼이시고 그 백성은 이스라엘이다. 그 백성은 하나님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맞서 싸우는 자이다. 계약은 바로 그 하나님 그리고 바로 그 백성의 함께함이며, 양자의 공통된 역사 안에서의 함께함이다. 기이하고 모순에 차 있지만 그 역사는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과 속되고 불충실한 백성 사이의 끊임없는 만남, 대화, 연합에 관해 명확하게 말한다. 그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의 계약의 성취를 말하지만 인간 편에서의 성취는 말하지 않으며, 그래서 아직은 계약의 완전한 형태를 말하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돌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점에 도달한다. 3 이스라엘이 맺었던 옛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약이 된다. 거룩하고 신실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의 거룩하고 신실한 인간적 파트너를 등장시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한 분을 그 백성의 한가운데서 인간이 되도록 하셨고, 바로 그 한 인간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완전히 수용하셨으며, 아버지가 아들과 결합하듯이 그 인간과 결합하셨고 하나님의 신적 자아가 바로 그 인간과 동일하게 예시되도록 일치시키셨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의 실존과 등장, 사역과 말씀 안에서 완성된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또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이 인간 안에서 거주하시고 행동하시고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완성되었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맺은 계약에 완성된 형태를 주셨다는 것, 바로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의 종점에서 말한다.4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5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넘어서는 한 사건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인간과의 연합으로 낮아지신,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유 안에서 은혜로우신 참 하나님과, 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고양된,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유 안에서 그분에게 감사하는 참 인간 사이의 합일의 사건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 한 분 안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이었고 또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목적에 도달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계약이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의 중재자로 파송하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개신교신학의 과제는 내용적, 외형적으로 완전한 형태의 이 말씀을 은혜와 평화의 계약으로 인지하고 이해하고 진술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특수하게 이스라엘의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이며 그리고 바로 그분 안에서 세상의 구원자로서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개신교 신학이 들어야 하고 응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전체의 말씀이다. 전체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결합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혹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외면한 인간, 그러나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된 인간과 맺은 계약의 말씀이다. 만일 개신교신학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분리하여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 때 그 신학은 전체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말씀의 진리를 놓치게 될 것이다.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통일성 안에서 말해진 말씀,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말해진 한분 하나님의 말씀이다. 양자의 연속성과 통일성 안에서 그 말씀은 로고스이며 신학은 그 로고스를 들어야 하며, 그것에 관해 진술해야 한다.
각주 1
신학은 예외없이 말씀 앞에 서야하는데 성서신학도 자칫하면 말씀에서 떠날 수 있다. 바르트는 근본주의도 자유주의도 말씀 앞에 서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로고스라고 말한다. 이것 때문에 근본주의는 바르트가 말씀과 성경을 일치시키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태초에 있었던 것은 성경이 아니라 로고스였고 이 로고스가 육신이..
각주 2
바르트는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없는 노예적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대상이 되어주셨다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간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며 인간이 하나님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주셨듯이 말씀이 인간의 대상이 되어 주시므로 신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보고 경험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다.
각주 3
바르트는 인간의 모든 역사와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앞에 다 포괄된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안에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다 포함되고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은 일반적인 구속사적 관점과 다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영원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세계사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안에 포괄되고 성취된다..
각주 4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인간의 불충실함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 사건이다. 신학은 바로 이 인격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기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제자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
각주 5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의 사역의 의믹가 무엇인지를 아는데 필수적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이며 정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해하여여 한다.
각주 6
신학의 자리는 말씀이며 말씀은 곧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신학은 바로 이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 중심성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가 중심이 아니라 신학의 대상이 중심이며 신학의 대상이 신학을 규정한다.
- 신학은 예외없이 말씀 앞에 서야하는데 성서신학도 자칫하면 말씀에서 떠날 수 있다. 바르트는 근본주의도 자유주의도 말씀 앞에 서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로고스라고 말한다. 이것 때문에 근본주의는 바르트가 말씀과 성경을 일치시키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태초에 있었던 것은 성경이 아니라 로고스였고 이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태초에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 오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 분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격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은 자기 중심적인 자유에 기반한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말씀은 선포되며 공동체는 아멘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로고스라는 것이며 이 로고스는 행동하는 말씀이고 또한 말씀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없는 노예적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대상이 되어주셨다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간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며 인간이 하나님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주셨듯이 말씀이 인간의 대상이 되어 주시므로 신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보고 경험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인간의 모든 역사와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앞에 다 포괄된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안에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다 포함되고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은 일반적인 구속사적 관점과 다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영원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세계사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안에 포괄되고 성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고 특수한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인간의 불충실함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 사건이다. 신학은 바로 이 인격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기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제자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창조의 역사이며 전 역사에 깊은 충격을 준 사건이다. [본문으로]
-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의 사역의 의믹가 무엇인지를 아는데 필수적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이며 정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해하여여 한다. [본문으로]
- 신학의 자리는 말씀이며 말씀은 곧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신학은 바로 이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 중심성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가 중심이 아니라 신학의 대상이 중심이며 신학의 대상이 신학을 규정한다. [본문으로]
03.신학의 자리[증인들]- 칼바르트
2015-01-27 22:02:20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유일무이하고 탁월한 지위를 갖는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탁월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 때문이며, 그들이 부르심을 받고 전투적으로 대비했던 특수한 봉사 때문이다. 그들은 말씀의 증인들로서, 최초의 증인들인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이며 신약성서의 사도들이다. 그들은 계약의 역사와 동시대적 증인들이었으며, 그것에 더해 그 역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증인들이었다.1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발생한 하나님의 행동을 보는 자, 그리고 그 역사 안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었으며, 그들이 보았고 들었던 바로 그분에 의해 이제는 말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능력을 얻었다. 개신교신학은 그들의 증거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룬다. 개신교신학은 말씀의 직접적 지식을 얻지는 못하지만 증인들을 크게 신뢰하면서 간접적 지식을 얻는다.2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그 역사 안에서 야훼의 많은 서로 다른 형식의 약속들을 들었으며 또한 그분의 계명, 판결, 위협을 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혹은 정치적인, 때로는 낙관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인 생각, 의견, 명제들을 말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외쳤다. 그것은 불충한 인간 파트너에 대해 지속적으로 신실하셨던 계약의 하나님의 우월한 음성이었다. 증인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역사 안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야훼의 말씀을 각각 자기의 시대적 문제 그리고 자신의 교육과 언어의 지평 안에서 그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도록 만들었으며 후세대들의 기억 안에 문서로 남기도록 만들었다. 개신교신학은 이 구약성서 문서들의 증거를 듣되,다만 신약성서적 증거의 서곡에 불과하다고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진지하게 듣는다. 왜냐하면 신약은 구약안에 잠재해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 인식을 소홀히 하는, 그래서 공허한 공간 안에서 다만 신약성서 쪽으로만 향하는 어떤 신학은 언제나 골격위축의 질병에 위협을 받게 된다.
개신교신학이 주목해야 할 촛점은 물론 신약성서의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3 이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의 목적이며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이다. 사도들이 보았고 들었고 만졌던 것은 계약의 완성이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일한 인간적 파트너인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등장 안에서 완성되었다. 사도들은 그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옛 투쟁이 극복되고 제거된 것을 보았으며, 그분의 생명 안에서 한 새로운 인간, 즉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투쟁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4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께서 파송되신 것처럼 세상 안으로 파송되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사도들에게 예수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화해의 행동의 역사 그리고 행동을 계시하는 권능의 말씀의 역사였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예수의 구속사와 계시사를 앞서는 어떤 역사도 사도들은 알지도 못했고 그것은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라는 어떤 이중적 예수를5 신약의 문서들로 읽으려는 시도는 역사비평학적으로도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작업 오류임이 틀림없다. 개신교신학이 성서적 증거에 대해 갖는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신학은 예언자직 그리고 사도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 응답에 관계된다. 성서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지했고, 그 말씀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그들의 직관과 사고방식 안에서 인간적 언어로 증거했던 사람들이었다. 개신교 신학은 그들이 증언한 문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루어진 인간적 사고와 진술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2. 그러나 신학은 예언자직도 아니고 사도직도 아니며 그들과 비교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을 말씀을 다만 이차적으로 성서적 증거의 반사와 반향 안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의 자리는 저 최초의 증인들 옆의 동일한, 혹은 비슷한 높이에 위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 응답을 말씀에 대한 직접성 안에서6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3. 신학의 자리가 성서적 증인들의 자리보다 높이 위치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다. 신학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서적 증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저 최초의 증인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후대의 위대한 신학자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다.7
4. 신학의 자리는 성서의 자리보다 낮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오히려 성서의 증인들이 신학자의 어깨너머로 보며 신학자의 공책을 수정하는 것을 즐겁게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증인들이 성서의 핵심이 되는 바로 그 한분에 관련하여서는 신학자들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5. 신학의 핵심중 한가지는 다른 모든 신학의 신들과는 경이롭게도 구별되는 복음의 하나님을 친숙하게 아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 앎은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이미 현존하지도 않으며, 어떤 신학자의 정신적 혹은 영적 가방안에 담겨진 적도 없다. 그 앎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친숙하게 아는 것을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신학은 성서로 부터 유래하고, 언제나 새롭게 성서로 나아갈 때 그러한 자신의 대상을 얻는다.
6. 신학은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단음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많은 다성의 증거를 듣는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성서의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또한 구약과 신약의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들도 그러하다. 이러한 차이의 본질적인 원인은 그들이 증거하는 바로 그 대상의 서로 대비되는 성격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차이의 원인은 계약의 역사 안의 다수의 소리들 모두가 세부적인 것 그리고 가장 세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운동하는데 있다. 그 다수의 소리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교제, 대립, 연합의 역사 안에서 다양한 소식을 전한다. 증인들의 학교인 성서에서 신학은 물론 한분 하나님을 만나지만 그러나 그분의 존재, 행동, 계시의 풍요로움 안에서 만난다. 개신교신학은 영원히 풍요로우신 하나님의 앎이며 그분의 계획들, 길들, 판단들이 넘쳐흐르는 충만함속에 있는 그분의 오직 하나의 비밀을 알아간다.
7. 개신교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적 증거 안에서 언제나 새롭게 인지하고 언제나 새롭게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 말씀에 응답한다. 개신교신학은 성서 안에서 연구하며 본문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지 질문한다. 본문들의 전적인 인간성 안에서도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반사와 반향이라는 것은 어디서도 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새롭게 제시되고 들려지고자 하며, 언제나 새롭게 밝혀져야 한다. 이같이 솔직하고 개방적인 질문과 함께 신학은 성서에 다가간다. 성서의 중심에 놓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이며, 그 증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본문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은 계속해서 발견되고 해석되고 인식되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이 없이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바로 그것이 탐구되어야 한다. 성서적 증인들은 그러한 연구의 대상으로서 신학을 만나며, 그때 성서가 신학을 만난다.
각주 1
예수님이 부활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이 일어난 이 40일은 특별한 40일이었다. 이것은 쇼킹한 사건이다.여기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최초의 증인들이다. 증인들이 목도한 예수의 인격이 바로 말씀이고 신학은 바로 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각주 2
바르트는 공동체의 사명은 최초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다시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전도이고 설교라고 한다.
각주 3
바르트는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으며 이보다 더 큰 증언이 없다고 말한다.
각주 4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투쟁의 역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투쟁의 역사로 변하였다고 말하면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인간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안에 구현되었다고 한다.
각주 5
바르트는 신약성서의 최초의 증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외에 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전격적으로 변한 것이다.
각주 6
바르트는 말씀은 성자사역으로 보았고 말씀에 접근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보있다. 바르트에세 신학이 말씀의 직접성에 접근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각주 7
우리 자신을 증인들의 위치에 세우면 안된다. 우리가 증인들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더 잘안다고 하면 안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 예수님이 부활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이 일어난 이 40일은 특별한 40일이었다. 이것은 쇼킹한 사건이다.여기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최초의 증인들이다. 증인들이 목도한 예수의 인격이 바로 말씀이고 신학은 바로 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공동체의 사명은 최초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다시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전도이고 설교라고 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으며 이보다 더 큰 증언이 없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투쟁의 역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투쟁의 역사로 변하였다고 말하면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인간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안에 구현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신약성서의 최초의 증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외에 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전격적으로 변한 것이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말씀은 성자사역으로 보았고 말씀에 접근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보있다. 바르트에세 신학이 말씀의 직접성에 접근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본문으로]
- 우리 자신을 증인들의 위치에 세우면 안된다. 우리가 증인들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더 잘안다고 하면 안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본문으로]
04.신학의 자리[공동체]-칼바르트
2015-01-28 22:16:44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의 증인들을 향한 신학의 자리는 어떤 공허한 공간이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 위치한다.1 이 공동체는 이차적 지위의 증인들로 사용되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위탁한 사람들이다. 말씀이 이들을 부르실 때 저 일차적 증인들의 합창이 부른다.공동체는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그와 함께 즉시 이차적 지위의 증인들로서 세상 안에서의 말씀의 증거자로 부르심을 받고 깨워진 사람들이다. 신학의 자리는 바로 이 공동체의 특수한 기능 안에 위치한다. 성도들의 공동체는 믿음의 단체, 그리고 증인들의 결속단체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믿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2 여기서 공동체의 한 특수한 봉사가 등장하는 데 그것은 신학이라는 특수한 기능이다. 공동체의 믿음과 말함 사이에서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사고, 그리고 그 말씀을 말로 표현하는 올바른 방법에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 질문이다.3 이 진리 질문은 외부로 부터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로 부터, 더 나아가 위로부터 공동체와 믿음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제기된다. 진리 질문은 말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수성 안에서 올바르게 언어로 표현했는가? 4그래서 공동체가 이차적 지위의 증거자라는 책임을 선한 양심으로 수행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신학은 그 자체로서 근본적으로 공동체에게, 더 나아가 기독교 전체에게 필연적 사명으로 부과된 작업이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은 증언에 관련해 저 진리 질문의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들 각각은 이미 신학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언제나 새롭게 진리를 향한 질문이라는 시험하는 불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기독교적 증거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시대에도, 어떤 인물의 어떤 입으로도 신뢰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세상 안에서 깨어 있어 자신의 사명의 과제를 의식하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신학에 관심을 가진 공동체가 된다. 5 공동체 안에는 신학적 학문 연구, 학설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공동체 안의 다른 공동적 기능들의 질서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특수한 활동이다. 다시 말해 신학적 연구와 학설은 자기목적적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기능이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이다. 만일 신학이 어떤 높은 신분으로서 하나님, 세계, 인간 그리고 어떤 다른 것, 예를 들어 역사학적 관심사에 몰두한다면 그 신학은 신학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6 또한 만일 신학이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려고 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이 오늘의 공동체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늘 그들의 증거, 오늘 그들의 믿음에 봉사해야 한다면, 그 신학은 고대와 근세의 전승으로 부터 유래해야 한다. 신학은 전승의 지반 위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며 전승 안에 있지 않은 어떤 다른 곳에서 과제를 완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의 공동체는 어제의 공동체로 부터 유래했으며 그들로부터의 전승이 오늘의 공동체의 진술들을 우선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의 특수한 과제는 그 전승에 대한 비판적 과제이다. 신학은 전승에 의해 규정된 공동체의 선포를 진리 질문이라는 시험하는 불에 노출시켜야 한다. 신학은 전승의 신앙고백을 수용한 다음, 그것을 성서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 대상, 내용에 의해 시험하고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공동체의 신앙은 맹목적 동의와는 다른 지성을 찾는 신앙의 특성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신학은 오늘의 공동체 그리고 그 조상들과 함께 나는 믿는다를 말한다. 그러나 신학은 또한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 되려면 다음 세가지 요점이 중요하다.
1. 직접적 증인들은 공동체와 공동체적 봉사의 척도가 된다. 신학은 이 문제에 있어 교회의 모든 신앙고백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던 성서를 계승한다. 성서는 1세기 공동체가 그들에게예언자적, 사도적 증거들로 주어졌던 많은 문서들 중에서 최종적 합의에 의해 완성되고 분류된 문서들이다. 전승된 정경은 신학이 우선적으로 단순하게 감행하는 작업가설이다. 그 결정적 이유는 신학은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로서 저 조상들의 믿음의 행위를 함께 수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신학은 알기 위해 믿는다. 신학은 그 당시 및 이후에 정경으로 승인된 모음이 어떤 점에서 참으로 성서인가 하는 것을 통찰하고 이해하려고한다. 그 문서들을 정경으로 승인했던 전승의 결정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려는 결정은 저 문서들의 내용을 인식할 때 내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인식은 저 작업 가설의 실행, 다시 말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적 증거가 신구약성서의 본문 안에서 실제로 인지될 수 있는지를 본문에 질문하는 것을 뜻한다.
2. 공동체의 생각과 말은 여러 갈래로 뒤얽힌 길고 혼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가 낯선 목소리의 유혹을 거부하고 새롭게 근원으로 되돌아왔던 문서들이 개신교 공동체의 교리들, 신앙고백들이었다. 만일 공동체가 그러한 투쟁의 문서들의 전승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고 다만 오늘의 진리 질문에 집착해서 그 전승을 주목하고 존경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신학은 더 이상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신학은 앞선 시대 교회의 어떤 교의도, 어떤 고백문도 검증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근원적으로 측정하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수용할 수 없고 또 수용해서도 안된다. 진지하게 진리 질문을 하는 신학은 어떤 축조된 신조들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소위 전승에 충실하다는 어떤 완고한 정통주의의 명성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그와 같은 정통주의 보다 더 나쁜 이단은 없다.7
3. 공동체를 규정하는 전승에 신학의 역사도 속한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공동체는 행운이든지, 불운이든지 어제의 신학들로 부터 유래하고 또 무엇보다도 신학 자체도 그러하기 때문에, 신학은 어제의 신학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신학은 이해하기 위해 믿으면서, 어제의 조상들의 음성들을 특별히 주의해서 듣고, 그 중 좋은 것을 해석하고, 그 음성들의 의문들을 언제나 다시 숙고하고, 그 다음에야 새롭게 수용하고 바르게 정립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아들딸들이 내일은 열광적 재해석자가 될 수도 있고, 또 아마도 선배들을 징벌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럴 때 마치 선배들의 약점과 오류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저작은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각주 1
공동체는 우리 말로는 교회에 해당한다. 독일교회는 개신교 교회를 카톨릭 교회와 구분하여 공동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공동체와 연결되어 증인들의 증거를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증인들의 자리에 세우면 안된다. 바르트 신학에서는 일차적 증인과 2차적 증인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2차적 증인의 사명은 1차 증인처럼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지는 것..
각주 2
공동체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각주 3
일차적 증인들에게 들은 것을 다움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공동체의 본질적 사명이며 이것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 진리 질문이다.
각주 4
성경의 계시 자체의 진실성과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공동체의 정당한 진리 질문이 아니다. 공동체의 진리 질문은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제대로 언어로 표현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진리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것이 신학의 의무라고 말한다.
각주 5
진리 질문을 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신학에 관심을 갖게된다. 진리 질문은 공동체가 말씀의 선포를 제대로 하는지 검증하는 것이며 이 진리 질문으로 검증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신학이다.
각주 6
이것은 신학이 증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한눈을 파는 것이다. 이런 신학은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 아니다. 신학의 본래 과제는 공동체의 가르침이 증인들의 증거에 밎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각주 7
공동체의 교리들 신앙고백은 계승하되 해석학적 순환이 필요하다. 바르트는 완고ㅓ한 정통주의는 이단보다 더 나쁘다고 지적한다.
- 공동체는 우리 말로는 교회에 해당한다. 독일교회는 개신교 교회를 카톨릭 교회와 구분하여 공동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공동체와 연결되어 증인들의 증거를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증인들의 자리에 세우면 안된다. 바르트 신학에서는 일차적 증인과 2차적 증인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2차적 증인의 사명은 1차 증인처럼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지는 것이 아니라 1차 증인들의 증언을 공동체와 성경을 통해서 듣고 자신의 삶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공동체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본문으로]
- 일차적 증인들에게 들은 것을 다움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공동체의 본질적 사명이며 이것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 진리 질문이다. [본문으로]
- 성경의 계시 자체의 진실성과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공동체의 정당한 진리 질문이 아니다. 공동체의 진리 질문은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제대로 언어로 표현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진리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것이 신학의 의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진리 질문을 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신학에 관심을 갖게된다. 진리 질문은 공동체가 말씀의 선포를 제대로 하는지 검증하는 것이며 이 진리 질문으로 검증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신학이다. [본문으로]
- 이것은 신학이 증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한눈을 파는 것이다. 이런 신학은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 아니다. 신학의 본래 과제는 공동체의 가르침이 증인들의 증거에 밎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공동체의 교리들 신앙고백은 계승하되 해석학적 순환이 필요하다. 바르트는 완고ㅓ한 정통주의는 이단보다 더 나쁘다고 지적한다. [본문으로]
05.신학의 자리[성령]-칼바르트
2015-01-29 00:42:43
앞에서 개신교신학의 자리를 규정하기 위해 살펴보았던 명제들은(말씀, 증인, 공동체) 그 자체로는 매우 명확하며 또한 서로 연관되면서 서로를 확증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나, 세부적으로나 무전제의 명제들이었다. 1 그 명제들은 내부적 현실성과 진리의 바깥에 있는 어떤 점으로부터는 유도될 수가 없다. 또 그 명제들은 자연과 인간들, 혹은 인간 정신과 역사를 지향하는 어떤 일반적 학문의 결과들을 전면에 갖지 않으며, 배후에 어떤 철학적 기초도 갖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 명제들은 하브리서의 멜기세덱 처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엄청난 권능이 그 명제들 안에 숨어 있으며 그래서 그 명제들을 다만 내부로부터 근거하고 조명하는 것인가? 신학은 그 명제들이 서술하는 자리, 외부로부터 보기에는 다만 공중에 뜬 것으로 보이는 자리로 이주하고,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가?
순전히 개신교신학의 자리를 서술하기 위하여 감행된 그 명제들은 모두 순수하게 신학적 내용만을 가지며, 오직 신학적으로만 보증될 수 있으며, 오직 신학적으로만 주장되고 이해될 수 있다.2 신학적 실존의 권능은 저 명제들 안에 은폐되어 있는 권능이다. 우리는 자칫 그 권능이 우리 자신에 의해 전제되는 권능이라거나 신학 자체에 의해 전제되는 권능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3 만일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어긋나고 틀리게 될 것이다.4 신학은 자신의 명제들의 근거, 정당성, 목적 설정을 위해 전혀 아무것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외부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이고, 내부로부터도 그러하다. 만일 신학이 자신의 명제들에게 전제를 부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신학이 스스로 그 명제들을 자기 자신을, 또 자신의 작업을, 보증하려고 의도하며 또 그렇게 보증할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신학은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버리는 셈이 된다. 오히려 모든 내적, 외적 보증의 전제들을 포기하는 것이 신학으로서는 잘하는 것이다. 5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전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람에 의해 쉽게 처치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명제들 안에 은폐되어 있는 권능, 주변 세계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공동체에 봉사하는 신학에게도 은폐되고 파악되지 않으며 처치 불가능한 권능에 대해서 말할 때 신중해야 한다. 그 권능은 신학적 명제들이 말하는 것 안에서, 구속사와 계시사 안에서, 성서적 증인들의 들음과 말함 안에서, 그들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의 존재와 행동 안에서, 그리고 그 권능에 대해 말하는 신학작업 안에서도 현재하고 작용하는 권능이며 신학보다 철두철미하게 우월한 권능이다. 그 권능은 모든 자의적인 전제들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든다.6 왜냐하면 그 권능은 다른 모든 인간적 보증들의 자리에서 확실성을 창조하는 권능이기 때문이다. 그 권능은 바로 창조적 권능이기 때문에 어떤 위대한 신학의 대가라도 그 권능에 손댈 수 없다. 그 권능은 신학 내부의 어떤 신학 공리가 아니며 신학자가 필요하거나 좋아해서 붙잡거나 혹은 놓아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만일 신학자가 자신의 신학 작업의 알을 품으면서 그 권능의 바람소리를 듣는다면, 자신의 명제들이 그 권능에 의해 결정되고 통치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권능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 권능의 사역을 뒤따를 수 있을 뿐이며 앞서지는 못한다. 그 권능은 주권적인 권능이며 신학적 명제들 안에 은폐되어 있는 권능이다.
그와 같이 주권적으로 작용하는 권능의 성서적 이름은 루아흐(숨, 호흡), 프뉴마(영)이다. 양자 모두는 움직이는 그리고 움직이게 만드는 공기, 숨, 바람, 또한 폭풍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열어 보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을 향해 개방시키시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자유의 영이시다. 니케아 신조에 따르면 이 영은 거룩하신 영, 주님, 생명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그 영 자신도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동일하신 한분 하나님이시다. 영이신 그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또 화해자로서, 계약의 주님으로서 행동하신다.
오순절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큰 일, 곧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역없이 직접 이해하도록 말할 수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영의 발현과 고취의 결과 삼천명의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였다. 7 바로 이 성령은, 그 영의 돌입과 추진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것에 대한 그 영의 증거는, 그리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일깨우고 생성시키는 그 영의 권능은, 세상 안의 그리스도교를, 또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말씀의 증인들인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능하게 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었으며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신다. 성령은 이 일을 아무도 저항할 수 없도록 하시면서 행하신다.
복음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자유롭고 비판적이고 기뻐하는 학문인 개신교신학은 오직 성령의 권능적 영역 안에서 그것이 가능해지고 현실적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때 개신교 신학은 성령론적 신학이 되며, 성령만이 진리이시며 성령만이 홀로 진리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신다고 말하는 용기있는 신학, 성령을 신뢰하는 신학이 된다. 신학이 어떻게 신적 로고스에 대한 인간의 말이 될 수 있는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그렇게 될 수 없다. 다만 성령이 신학 위에 그리고 신학에게 오시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 신학은 성령을 막거나 지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만 기뻐하면서 그분을 뒤따를 뿐이다. 신학이 주님의 영의 신선한 공기를 벗어나 어떤 다른 공간으로 스스로 미혹되어 추방될 때, 그때 신학은 성령이 없는 신학이 된다. 그 어떤 나쁜 것도 성령없는 신학보다 더 나쁘지는 않다. 성령없는 신학이 되는 일은 다음 두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첫째는 신학이 성령의 조명, 권고, 위로에 자기 자신을 두려움없이 그리고 아무런 유보없이 내맡기려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성령에 의해 모든 진리로 인도되기를 거부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모든 육체와 또한 신학 위에도 부어진 성령께 자신의 연구, 사고, 가르침을 통해 합당한 영예를 올려 드리기를 거부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때 신학은 역사화되면서 혹은 심리학화되면서, 혹은 합리주의적 혹은 도덕주의적 혹은 낭만주의적으로 되면서 혹은 교의학적이 되고만다. 8 둘째로 어떤 신학은 마치 성령을 전세 내어 소유한 것 처럼 성령과 관계할 수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며, 마치 성령이 인간이 발견해서 길들인 어떤 자연력인 것처럼 취급한다. 9 이런 어리석은 신학은 성령을 자기가 잘 알고 있고, 처치 가능한 명제로써 기계적으로 전제한다.그러나 전제되는 영은 성령이 아니며 또 그러한 영을 전제하는 신학은 성령없는 신학일 수 밖에 없다.
성령의 바람은 그것이 불고자 하는 쪽으로 불며, 성령의 현재와 행하심은 언제나 자유로우시며 언제나 우월하시며 언제나 아무 댓가없이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령은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공동체와 신학을 자유 안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생명의 권능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잃은 신학은 오직 성령만이 도우실 수 있다. 그분은 거룩하시며 주님이시며 생명을 창조하는 자이시고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그 신학이 성령 자신을 수용할때까지 다만 기다리시며, 그 신학이 새롭게 돌이킴으로 그것으로부터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받고자 하신다. 그 후에 성령께서는 신학이 성령없이 스스로 옳다고 주장했던 죽은 명제들을 다시 살려내어 빛 가운데로 옮기신다. 또한 도우시는 성령께서는 그 신학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것의 자의적 전제들을 깨닫고 의식하도록 하신다. 그 다음에 성령을 향한 탄식과 부르짖음과 기도가 있는 오직 그곳에 성령은 새롭게 현재하시고 활동하신다. 10 개신교신학은 빵도 물고기도 갖고 있지 않으나 그들에게는 둘 다를 가지고 계시면서 신학이 그것을 간구할 때 주실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시다. 그러므로 개신교신학은 전적인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다. 또한 개신교신학은 전적인 무전제성 안에서도 확고하게 지탱되고 유지된다. 왜냐하면 개신교신학은 저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에 의심없이, 또한 자만도 없이 굳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신학이 아니라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이시다.
각주 1
무전제라는 말은 인과율이 없다는 것이고 으는 학문적 근거가 없다는 의미이다. 신학의 자리로서 제시한 명제들은 자아가 중심이 된 학문적 근거를 자질 수 앖고 그 명제들의 근거는 어직 성령이시라는 의미
각주 2
신학의 명제들이 성령외에 다른 근거를 찾으면 신학은 망하는 길이다. 시실 존재 자체도 무전제성이고 무인과율이다.
각주 3
이런 오류의 사례로는 믿음 지상주의, 자기 획신주의, 문자주의, 자유주의 신학, 역사신학, 심리신학, 문화신학 등이 있다.
각주 4
신학적 권능의 출처는 오직 성령이시다. 성령외에 다른 것을 전재하면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이 된다.
각주 5
하나님이 그 대상이 되는 신학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전제가 없어야 한다.
각주 6
성령의 권능은 자의적은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신학은 성령에게 순종하여야 하며 성령에 순종하는 신학은 오직 성서의 증인들이 증거한 것을 주석해 나가는 일에 몰두한다.
각주 7
이들이 받아들인 말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실리셨다는 증거였다. 오늘날 교회는 부활의 진리는 말하지 않고 온갖 다른 얘기만 한다.
각주 8
혹은 신학이 과학적, 영성적, 저항적, 폭력적이 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원래의 말씀을 벗어나면 성령없는 신학이 된다.
각주 9
이런 경우의 사례는 문자주의이다. 이것은 더 위험한 성령없는 신학이다.
각주 10
신학이 으지할 유일한 대안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자아를 부정하고 자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중심이동을하는 것이 신학의 자라라고 말한다. 말씀, 말씀의 증인들, 증인들을 계승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모두 성령이라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 무전제라는 말은 인과율이 없다는 것이고 으는 학문적 근거가 없다는 의미이다. 신학의 자리로서 제시한 명제들은 자아가 중심이 된 학문적 근거를 자질 수 앖고 그 명제들의 근거는 어직 성령이시라는 의미 [본문으로]
- 신학의 명제들이 성령외에 다른 근거를 찾으면 신학은 망하는 길이다. 시실 존재 자체도 무전제성이고 무인과율이다. [본문으로]
- 이런 오류의 사례로는 믿음 지상주의, 자기 획신주의, 문자주의, 자유주의 신학, 역사신학, 심리신학, 문화신학 등이 있다. [본문으로]
- 신학적 권능의 출처는 오직 성령이시다. 성령외에 다른 것을 전재하면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이 된다. [본문으로]
- 하나님이 그 대상이 되는 신학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전제가 없어야 한다. [본문으로]
- 성령의 권능은 자의적은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신학은 성령에게 순종하여야 하며 성령에 순종하는 신학은 오직 성서의 증인들이 증거한 것을 주석해 나가는 일에 몰두한다. [본문으로]
- 이들이 받아들인 말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실리셨다는 증거였다. 오늘날 교회는 부활의 진리는 말하지 않고 온갖 다른 얘기만 한다. [본문으로]
- 혹은 신학이 과학적, 영성적, 저항적, 폭력적이 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원래의 말씀을 벗어나면 성령없는 신학이 된다. [본문으로]
- 이런 경우의 사례는 문자주의이다. 이것은 더 위험한 성령없는 신학이다. [본문으로]
- 신학이 으지할 유일한 대안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자아를 부정하고 자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중심이동을하는 것이 신학의 자라라고 말한다. 말씀, 말씀의 증인들, 증인들을 계승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모두 성령이라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본문으로]
06.신학의 실존[놀람]-칼바르트
2015-02-03 11:34:22
신학의 자리를 규정하는 무전제적 명제로 인하여 막상 신학 자체는 현실적, 인간적 삶의 한 요소로 정당하게 취급되지 못하였으며,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도식 혹은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은 언제나 역사이며, 인간적 생물의 살과 피로 된 실존과 행위가 일으키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신학자에게로 향한다.
신학이 한 인간에게 접근하고 그와 접촉하고 그의 내면으로 진입해서 그 사람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지금 개신교신학의 실존적인 것에 접근하고 있다.1 신학의 자리를 규정하려 했던 앞에서의 시도와 비슷하게 여기서도 여러개의 동심원과 함께 시작하는데 최외곽의 동심원이 놀람이다. 모든 신학적 인식, 연구, 사고의 시작점에는 또한 모든 신학적인 말의 시작에는 대단히 특수한 놀람이 있다.2 그 신학이 겸손하고 자유롭고 비판적이고 기쁨에 찬 학문이며 언제나 새롭게 된다면 그러하다. 그러나 놀람이 없다면 신학은 뿌리에서 부터 병들 수 있다.
여기서 신학적 실존의 한 요소로서 말하는 놀람은 일시적으로 이상하고 낯설고 새로운 현상에 대한 깜작 놀람, 혹은 질문과는 다른 그 이상의 것을 뜻한다. 그런 놀람은 처음에는 놀라다가 조만간 틀림없이 더이상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학을 행할 때 엄습하는 놀람은 다른 종류다. 신학의 대상 앞에서의 멈춤과 질문, 즉 놀람은 이런저런 관점에서 그 사람을 방치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놀람이 언제나 더 커지도록 만든다. 이런 놀람이 그에게 정말 일어났다면 그때 그는 철두철미 영원한 유일회성 안에서 놀람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다.3
놀람은 기적으로 부터 온다. 신학을 시작하게 된 사람이 첫 걸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적과 관계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신약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원칙적으로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며, 형식적으로는 일종의 위급경보의 기능을 한다. 신약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이 의도적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놀라움을 불러 일으킬 때, 그 놀라움은 어떤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된 현존재 질서의 예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칙적으로 새로운 것의 경보를 울린다는 것은 분명한다. 신학을 행하는 자는 그 놀라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4
그러나 기적은 임마누엘 역사에 대한 성서적 증거의 한 요소일 뿐이다. 기적 이야기들은 임마누엘 역사의 진행 안에서 그 역사도 또한 발생했음을 보고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적 이야기들은 그것에서 시작하여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움의 표징일 뿐이며 새로움 자체는 아니다. 기적의 표징을 통해 일깨워진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막상 성서가 말하는 본래적이고 결정적인 새로움은 지나칠 수 있다. 본래적, 결정적 새로움은 새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5 구약성서가 예고했고 신약성서에 따르면 저 한 분 안에서 발생한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성취와 완성, 이것이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 자유로운 은혜, 수수께기 같은 긍휼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투쟁하는 악한 이스라엘 그리고 반역하는 인간 종족 전체를 수용하셨다.6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바로 그 한 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순종, 일하심, 삶과 죽음 안에서 도래하고 이미 뿌리내려 작용하는 하나님나라이며, 그분 안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발생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성서적 증거에 따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새로움은 이스라엘 역사를 종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7 이것이 인간에게 알려지고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때, 그는 가장 깊은 근원에서 철저하게 영원히 유일회적으로 놀라움에 사로잡힌 인간이 된다.
신학의 대상에 대한 놀람은 그 놀람에 사로잡힌 나에 대한 놀람을 포함한다. 나는 성서가 증거하는 기적과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 모든 기적들은 다만 그 현실성에 대한 위급경보를 울리는 것일 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놀라움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의 기적에 직면해서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놀라는 일에 비추어 평가될 때, 나는 더 이상 잘 알려진 내가 아니며 어떤 타자 어떤 이방인이 된다. 나의 실존이 바로 그 놀라움의당위성과 필연성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나의 실존이 누구나 알고 있고 잘 알려진 평이한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씀의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 즉 은혜가 최고로 구체화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8 신학과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놀라움을 넘어서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놀라움을 깨닫게 된다면 그는 신학외에 다른 어떤 일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각주 1
바르트가 말하는 실존이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아 중심의 타락한 실존이 아니라 성령이 고쳐서 새롭게 만듦으로 진리를 알고 자유케 된 실존이다.
각주 2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놀람의 사건이다. 바르트는 놀람을 상실한 신학은 뿌리가 병든 신학이라고 강조한다.
각주 3
바르트는 이런 놀람에 사로잡힌 사람이 바로 신학자라고 말한다. 이 놀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방문하신 사건이요 하늘이 열린 사건에 대한 놀람이다.
각주 4
바르트는 성서적 기적들의 의미는 근존적으로 언제나 도와주고 더 나아가 구원하는 변화들이라고 말한다. 신학자의 놀람은 이런 기적과 관계되지만 이것은 진정한 놀람이 아니라 이차적 놀람이라고 지적한다.
각주 5
나사렛 예수라는 시 인격에 놀라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새 인간에 대한 놀람이야 말로 영원한 놀람이며 유일회적인 놀람이다.
각주 6
하나님이 패역한 인간과 하나가 된 사건 ,이것이 바르트 화해론의 중심이다. 바르트는 이것이 기적중의 기적이고 놀람중의 놀람이라고 말한다.
각주 7
바르트는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분리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각주 8
바르트는 신학과 신학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은혜인데 그것은 신학자가 자신이 우주적 사건에 연결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바르트가 말하는 실존이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아 중심의 타락한 실존이 아니라 성령이 고쳐서 새롭게 만듦으로 진리를 알고 자유케 된 실존이다. [본문으로]
-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놀람의 사건이다. 바르트는 놀람을 상실한 신학은 뿌리가 병든 신학이라고 강조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이런 놀람에 사로잡힌 사람이 바로 신학자라고 말한다. 이 놀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방문하신 사건이요 하늘이 열린 사건에 대한 놀람이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성서적 기적들의 의미는 근존적으로 언제나 도와주고 더 나아가 구원하는 변화들이라고 말한다. 신학자의 놀람은 이런 기적과 관계되지만 이것은 진정한 놀람이 아니라 이차적 놀람이라고 지적한다. [본문으로]
- 나사렛 예수라는 시 인격에 놀라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새 인간에 대한 놀람이야 말로 영원한 놀람이며 유일회적인 놀람이다. [본문으로]
- 하나님이 패역한 인간과 하나가 된 사건 ,이것이 바르트 화해론의 중심이다. 바르트는 이것이 기적중의 기적이고 놀람중의 놀람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분리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신학과 신학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은혜인데 그것은 신학자가 자신이 우주적 사건에 연결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07.신학적 실존[당황]-칼바르트
2015-02-04 22:58:54
거리를 두고 즐기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관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어떤 대상에 대한 안락하고 흥미로운 혹은 매혹된 숙고나 명상일 수 없다. 하나님의 기적이 객체의 대상이 될 때, 객체는 주체에게 최후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1 그 기적은 성서적 의미의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에 몰두된 사람을 놀라움에 사로잡힌 주체로 만들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기적과 마주쳐 당황한 자가 된다.2 신학자는 신학의 대상과 대면하는 자이다.3 그런데 신학의 대상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그 대상으로 부터 멀어지거나 고립되는 자아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상은 그를 찾으며 그에게 관여한다. 그 대상은 그를 습격하며 체포하고 그를 지배한다.4 이렇게 객체는 주체에 대해 끊임없이 우위를 점하며 주체를 소유하신다. 그레서 그 사람은 원하든 원치않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단히 그 대상에게 매료되었을 뿐 아니라 그 대상과 마주쳐 당황한 사람이 된다.
1. 신학자는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평범하게 실존한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인지되는 말씀과 대면하고 있으면서, 알든지 모르든지 그 말씀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그가 속한 세계를 향해 있다.5. 그 말씀은 그 세계의 모든 곤경보다 더 깊은 곤경이며, 모든 약속 보다 무한하게 더 높은 약속이다. 그 말씀은 인간의 존재 전체 위로 내려지는 판결과 심판의 말씀이며 또한 인간과 맺은 은혜의 계약의 말씀이며,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의 말씀이다. 신학자는 지나치게 자만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비탄에 빠지는 이웃 피조물들 중에서 특별히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필연적이고 당위적으로 위치시켜야 하는 사람이다. 그가 오늘의 인간으로서 오늘의 세계 안에 실존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필연적으로 그로 말하게 하시며 그와 접촉하여 만나시며 그의 마음속에 찔림을 불러 일으키신다. 이 세상속에서 말씀과의 마주침으로 당황한 자, 그가 바로 신학자이다.
2. 신학적 실존은 필연적으로 이웃인간적이며 기독교적이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성서의 증거를 통해,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함께 부르심을 받고 함께 유지되는 공동체 안의 실존이다.6 그래서 신학자도 기독교라는 공동체안에서 의롭게 또는 불의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신학자는 그가 어디에 있든지 진리 자체에 의해 선택되고 진리의 계시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백성의 한 지체이다. 그러한 그에게 진리 질문의 과제가 주어진다. 그 공동체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 것도 신학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가차없이 그의 문제가 된다. 주님은 모든 상황안의 그리고의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인들 위에 계시면서 보잘것 없는 신학자를 그가 공동체 안에서 수행하는 기능 안에서 방문하신다. 바로 그 신학자에게 심판이 내려진다.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말씀 안에서 내려지는 심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한 약속이 높이 들려진다. 그것은 공동체가 그 말씀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다. 공동체안에서 말씀과의 마주침으로 당황한 자, 그가 바로 신학자이다.
08.신학적 실존[의무]-칼바르트
2015-02-05 15:24:41
놀람이 사람을 신학자로 만드는 첫째 요소라,면 당황은 둘째 요소이다. 놀람, 당황, 이런 요소는신학자가 신학에서 마주치는 대상의 독특한 활동성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이 강렬한 마주침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에게 어떤 것을 요구한다. 신학의 대상인 그분은 신학자를 두발로 일으켜 세워 자유롭게 만들고1 선사받은 그 자유를 사용할 것을 요청하시고 명령하신다. 이것을 우리는 사람을 신학자로 만드는 셋째 요소인 의무라고2 부른다. 개신교신학의 대상이신 복음의 하나님에 의해 의무를 진다는 것은 밝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또한 엄격한 일이며, 고양시키는 일이지만 또한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다. 이제 신학자에게는 그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자유를 발생시키는 일이 기대된다. 그는 행동해야 한다. 그는 마땅히 행해야 하는 그것을 당연히 할 수 있으며 그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한다.
신학자의 놀람에서 시작되고 신학자의 당황하는 실존과 밀접하게 연결된 의무 부과는 총체적인 일이며 그의 현 존재 전체를 포괄한다. 그의 실존은 그의 특수한 기능에 의해 어떤 의무를 지게된 실존, 다시 말해 어떤 특수한 자유를 선사받아 그 자유의 특수한 사용을 요청받는 실존이다, 그래서 그는 특정한 종류의 인지, 연구, 사고 진술을 하도록 자유롭게 되었고 또 요청을 받는다. 그런데 이 특정한 인지, 연구, 사고, 진술은 신학자 자신이 고안하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학에 고유하게 특징적인 방법론, 다시 말해 신학의 내적과제에 상응하는 외적 절차의 규칙화다. 그것은 신학자가 놀람 그리고 당황한 실존을 넘어서서 앎과 고백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을 내디뎌야 할 때 따라야 하는 법칙이다. 신학자가 신학적 주제에 계속해서 충실하려면 그는 그 특정한 종류의 성격을체득해야 하고 충분히 연습해야 한다3. 그것은 신학에 고유하게 특징적인 방법론이며 유일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짐을 지우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방법이며 법칙이다. 그가 신학의 대상을 향할 때, 그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의 학문적 방법과 법칙을 존중하면서 실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성의 규칙과 특성은 무엇인가?
1.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은 하나이며(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것은 단조로운 사역이나 단성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적 증거들의 다양성이 예시하는 것처럼, 살아 계신 한분 하나님의 사역은 많은 충만한 형태들에 있다. 그 사역과 말씀의 중심성은 바로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의 현실성과 계시이다. 신학적 학문의 대상은 모든 각론들에서 충만함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며, 또한 그 충만함 안에서도 오직 하나인 사역과 말씀이다. 그 대상은 바로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유대인의 왕이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대변하시고 또 인간들을 한분 하나님 앞에서 대변하시는 분이시며, 기대되었고 오셨으며 이제야 비로소 올바르게 기대되시는 종,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4그분으로부터 나와서 그분을 향해 나아갈 때, 신학적 앎 즉 믿음의 지성은 말씀과 사역의 많은 부분들을 균등하게 하거나, 획일시하고 동일시하는 앎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모으고 중심을 향해 결집시키는 앎이된다. 신학적 앎에서는 이러한 주시, 묶어 봄, 통찰이 중요하다5. 언제나 새롭게 파악되어야 하는 중심,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고 배치하는 저 중심은 우리가 취급할 수 있는 어떤 구성적 원칙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권능안에서 부활하셔서 활동하시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성, 즉 진정한 신학적 앎의 첫째 기준은 그분과 함께 모으는 앎이며6 모든 생각,개념, 말을 그분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을 향해 집결시키는 앎이다.
2. 신학의 대상은 사역과 말씀 안에 계신 복음의 하나님이시다. 이 대상과 신학적 앎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주님과 종의 관계이다. 그 대상은 철저히 우선적으로 등장하며 신학적 앎은 다만 그를 뒤따르며 복종하며 순응한다. 그 대상 즉 복음의 하나님께서 먼저 신학적 앎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그분이 신학자에게 하나님을 알아채고 숙고하고 진술할 의무를 부과하시고, 또 그렇게 할 자유를 주시며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 안셀름의 표현대로 신학적 앎의 체계와 필연성은 그 대상의 체계와 필연성을 향해야 히며 이 순서가 역전되어서는 안된다. 그 앎은 어떤 시대나 상황으로도 초대받지 않으며, 주도권을 잡으려는 어떤 일반적인 직관, 개념, 상, 언어규칙등에 의무를 지지도 않는다. 신학적 앎은 그렇게 수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규칙의 배후에는 특정한 철학과 세계관이 있어서, 그 개념을 수용할 때 반드시 신학 자체의 중심 문제가 손상되는 댓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오직 대상에만 무조건적 의무를 지면서 그 대상에 의해 완전히 열리고 운동하는7 주시, 사고, 진술을 요청받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학은 대상으로부터 즉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으로부터 주어지는 논리, 변증법, 수사학을 질문해야 한다. 시대정신에 굴복할 때 신학의 진보와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시대정신 앞에서도 기쁨의 결단을 하면서, 고양된 결단에 따라 신학 자체의 법칙을 따르는 앎으로 나아갈 때, 진보와 개선이 기대될 수 있다. 신학은 인간적 인지력, 판단력, 언어능력을 어떤 젠제된 인식론의 조건없이 다만 순종안에서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자유를8 예증한다. 이때 순종은 신학의 대상이 즉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살아계신 성령의 생명력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신학에게 요청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의 신학적 통각보다 앞서는 대상의 우선성은 진정한 신학적 앎, 즉 믿음의 지성에 대한 두번째 중요한 기준이다.
3.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은 특정한 높낮이(낙차)를 갖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은 특정한 우위와 경향 안에서 역전될 수 없는 방향을 갖는다. 이제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구약과 신학의 본문들 안에서 이중적인 것이 문제가 된다9. 그것은 인간에게 표현된 신적인 긍정과 부정, 복음과 율법, 은혜와 심판, 생명과 죽음이다. 신학자는 이 양자 모두를, 즉 저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고 함께 숙고하고 함께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이 양자의 높낮이를 오인하거나 부정하거나 침묵해서는 안된다. 이 양자의 관계에는 우선적인 것과 나중의 것이 있으며, 위와 아래, 많은 것과 적은 것이 존재한다. 이 양자는 어떤 상호보완이나 병존하는 것이 아니며 그곳에는 평형이 아니라 고도의 비평형 상태가 존재한다. 여기저기에 있는 이러한 비평형 상태 안에서 신학은 저 이중적인 것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정은 하나님의 부정과 동일한 가치와 무게로 대면할 수 없으며 하물며 그분의 부정이 긍정보다 앞서거나 부정안에서 긍정이 사라지는 일은 더욱 있을 수 없다. 신학자에게 로마서 7장이 로마서 8장보다 더 친숙하고 더 중요하고 더 사랑받는 일은 공개적으로든 비밀리에든 일어나서는 안된다. 지옥이 천국보다 더 불가결하고 흥미로운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교회사 안의 죄와 잘못들이 우리 모두에 대한 죄의 용서보다 더 긴급하게 제시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죄의 용서의 빛에서 그 잘못들을 보고 이해하는 과제가 더 긴급하다. 양자를 동일한 무게의 균형안에 넣거나 혹은 그 순서를 거꾸로 만들면 안된다. 진정한 신학적 앎의 이 세번째 기준은 신학의 대상의 내적 경륜이며, 하나님의 긍정의 부정에 대한, 복음의 율법에 대한, 은혜의 심판에 대한 우위이다. 신학이 기쁨의 학문이 되려면 신학적 앎의 이 세째 기준을 존중해야 한다. 신학자는 가장 깊은 내면에서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믿음의 지성으로서의 신학자의 앎이 신학의 대상에 의해 주어지는 이 높낮이 질서 안에서 진행될 때, 신학자는 만족을 발견할 것이며,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공동체와 세상 안에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각주 1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같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동글안에 있는 상태와 같다. 복음이 자유를 준다. 동굴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북음이 주는 자유이다.
각주 2
그러니 이 의무는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으로 부터 자유함에서 나오는, 즉 자아의 감옥에서 나오는 해방에서 나오는 의무이다. 다시 말하면 동굴안에 있던 자가 동굴밖의 사건을 보고 동굴 밖으로 나오는 의무를 말하므로 이 의무는 곧 자유이다. 동굴밖을 보여준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이다.
각주 3
신학적 주제, 곧 예수 그리스도에 충실한 신학을 하는 것은 선택과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체득과 연습의 문제이다.
각주 4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의 중심이며 그분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각주 5
신학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하여야 한다.
각주 6
신학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신학의 중심을 혼동하면 안된다. 예수 그리시도를 중심으로 신학이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은 하나님과 함께 모으는 자가 아니라 흩는 자가 된다.
각주 7
신학의 대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각주 8
40일의 소식을 듣기전에 인류는 죽음안에 갇혀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인류를 자유를 얻게되었다. 신학은 바로 이 자유를 표현하는 학문이다.
각주 9
바르트는 40일의 복음을 헤겔식으로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빛이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한다.
-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같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동글안에 있는 상태와 같다. 복음이 자유를 준다. 동굴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북음이 주는 자유이다. [본문으로]
- 그러니 이 의무는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으로 부터 자유함에서 나오는, 즉 자아의 감옥에서 나오는 해방에서 나오는 의무이다. 다시 말하면 동굴안에 있던 자가 동굴밖의 사건을 보고 동굴 밖으로 나오는 의무를 말하므로 이 의무는 곧 자유이다. 동굴밖을 보여준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이다. [본문으로]
- 신학적 주제, 곧 예수 그리스도에 충실한 신학을 하는 것은 선택과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체득과 연습의 문제이다. [본문으로]
-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의 중심이며 그분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본문으로]
- 신학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 신학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신학의 중심을 혼동하면 안된다. 예수 그리시도를 중심으로 신학이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은 하나님과 함께 모으는 자가 아니라 흩는 자가 된다. [본문으로]
- 신학의 대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본문으로]
- 40일의 소식을 듣기전에 인류는 죽음안에 갇혀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인류를 자유를 얻게되었다. 신학은 바로 이 자유를 표현하는 학문이다. [본문으로]
- 바르트는 40일의 복음을 헤겔식으로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빛이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3.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에게 문제가 되며, 세상 안의 공동체에게 문제되는 것은 신학자 개인적 실존에도 문제가 된다.그것은 그 신학자 위에 내려지는 심판 그리고 그에게 향해진 은혜이며, 그의 포로됨과 해방이며, 그의 죽음과 생명이다.7 이 모든 것은 진리 질문 안에서 최종적으로 신학자 자신에게 적중한다. 이것은 먼저 세상과 공동체에 적중되고 최종적으로 신학자 개인에게 적중된다. 만일 심판과 은혜가 먼저 세상과 공동에게 관계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신학자 자신에게도 적중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자의 존재는 오직 세상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신학의 대상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신학자가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도망가는 개인적 삶을 산다면 그런 삶에서 자유롭고 열매가 있는 신학적 사고, 연구 진술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런 신학은 아무 소용도 없다. 신학의 대상인 살아계신 그분은 신학자 전인과 관계하시며 그래서 가장 보잘것 없는 신학자의 사적인 개인의 삶에도 관여하신다. 자기 개인의 삶안에서 말씀과의 마주침으로 당황한 자, 그가 바로 신학자이다.8
각주 1
객체가 주체를 지배하고 선택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만만 제자들에게 부활의 중인이 되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각주 2
여기서 당황이란 갑자기 공이 날아와서 맞은 사람의 모습을 가리킨다.
각주 3
대상과의 대면은 용서받은 죄인이 감히 고개를 들도록 허락받아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대면이다.
각주 4
예컨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접한 제자들은 더 이상 관람자가 아니라 그 사건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는다.
각주 5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립적 관계란 있을 수 없다. 온 세계도 공동체도 개인도 하나님의 도끼 아래 놓여있다.
각주 6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마주친 나의 실존은 공동체 안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은 도끼 아래 놓여잇다.
각주 7
신학자의 실존은 이미 의인이지만 아직도 죄인이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결과를 해결하신다는 하나님의 작정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각주 8
결국 신학자가 마주치는 당황은 세상과 공동체와 신학자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약속의 말씀에서 온다.
- 객체가 주체를 지배하고 선택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만만 제자들에게 부활의 중인이 되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본문으로]
- 여기서 당황이란 갑자기 공이 날아와서 맞은 사람의 모습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 대상과의 대면은 용서받은 죄인이 감히 고개를 들도록 허락받아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대면이다. [본문으로]
- 예컨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접한 제자들은 더 이상 관람자가 아니라 그 사건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는다. [본문으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립적 관계란 있을 수 없다. 온 세계도 공동체도 개인도 하나님의 도끼 아래 놓여있다. [본문으로]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마주친 나의 실존은 공동체 안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은 도끼 아래 놓여잇다. [본문으로]
- 신학자의 실존은 이미 의인이지만 아직도 죄인이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결과를 해결하신다는 하나님의 작정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본문으로]
- 결국 신학자가 마주치는 당황은 세상과 공동체와 신학자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약속의 말씀에서 온다. [본문으로]
09.신학적 실존[믿음]-칼바르트
2015-02-05 17:16:39
신학의 대상에 근거되어 있고, 그 대상으로부터 출발해서 신학에 몰두하는 사람을 엄습했던 것은 놀람, 당황, 의무였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 엄습의 사건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어떻게 한 인간은 그 대상에 의해 심각하게 당황한 사람이 되는가? 어떻게 그는 그 대상에 의해 진지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가? 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가 신학의 자리를 규정하는 명제들의 무젠제성을 인정해야 했듯이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문제의 중심에 근거된 난제 앞에 선다. 우리는 이 난제를 간과하거나 가볍게 취급할 수 없으며 또 어떤 논증을 통해, 나아가 어떤 기계적인 신을 도입해 그 난제를 제거하려고 시도해서도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체계를 취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오직 저 사건만을 가리켜야 한다. 그 사건은 신적 그리고 인간적 자유 안에서 무전제적이며, 신학자의 실존이 파악하거나 또 설명할 수 없이 발생하는 사건이다. 즉 신학의 대상이 어떤 사람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고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실제 그가 신학자로서 살고 연구하고 사고하고 읽고 실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바로 이사건이 믿음이다.
믿음은 단순히 그 대상을 긍정하는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며 의무를 부과하는 그 신학적 대상은 그 누구도 진술하거나 추측하거나 명제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믿음은 가설적이거나 문제성 있는 지식일 수 없으며 오히여 본래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엄격하고 가장 확실한 앎이다. 또한 믿음은 특정한 신학적 명제들과 교리들을 듣고 이제 자기가 스스로 아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 권위를 참된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 질문으로 부터의 태만한 도피이며 그러한 맹목적 신앙의 결단과 행동은 지성을 찾는 믿음이 아니라 지성을 희생시키는 믿음이며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의 냄새를 풍긴다. 1
1. 어떤 사람은 예수의 믿음이 현재하고 실현되는 사건을 직접 체험하고 성취한다는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의 삶 안에 신성을 등장시켜야 하며 우리 안에 신성을 창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교의 믿음이지 기독교적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적 믿음은 믿는 대상과의 만남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연결되어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믿음과 믿음의 대상을 동일시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2. 또한 신학의 본래적 대상을 추방해 버린 뒤, 믿음을 존재적 중심개념으로 삼고 마치 믿음이 구원의 참된 사건인 것처럼 믿음을 신학적 주제로 격상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교회의 신조 안에서 '나는 믿는다'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보다 앞서는 본래적 신앙고백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믿음은 신학적 학문의 대상이나 주제가 아니다. 물론 신학의 대상은 믿음을 요청하시지만, 믿음이 믿음의 사고와 믿음의 진술들 안으로 스스로 용해되는 시도는 허락하지 않으신다.
믿음은 신학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조건이다. 기독교적 그리고 신학적 실존에 바로 그 특수한 구성적 사건이 믿음이다. 믿음의 사건에는 정말로 현실적인 어떤 것이 일어나며 진행되며 발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사람 중 특정한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심으로, 그 인간은 자유롭게 되고 계속 자유롭게 된 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바로 그 말씀을 세상을 위한, 공동체를 위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말씀으로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세상과 자기 백성과 또 한 개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술들을 기쁨과 함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자기 힘으로 행하는 자는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적 권능의 말씀에 압도되고, 하나님에 의해 그런 행동으로 깨워지고 새롭게 창조될 때뿐이다.
그러므로 그 신뢰하고 순종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말씀에 기원을 두며, 바로 그 말씀을 향하면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그 인간의 고유한 행동이 된다. 그의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그 행동으로 부르심을 받고 능력을 얻으면서 긍정하고 신뢰하고 순종한다. 그러므로 그때 그가 어떤 열광주의에 도취되어 행동한다는 상상은 배제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때 그는 일상의 인간적 정신 안에서 인간적 이상, 인간적 의지, 또 인간적 감정 등을 사용하면서 행동한다. 이렇게 그는 인간적으로 규정되고 제약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다. 사역과 함께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만나시면서 그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변화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고 그 사람이 그것을 행할 때 그는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바로 그 근원 및 대상 안에서 믿음의 구체적 윤곽을 갖춘 내용을 얻고 소유한다. 다시 말해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지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이 된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지성주의적이기만 한 지식이 아니다. 지성을 찾는 신앙은 물론 겸손해야 하지만 그러나 또한 진리 질문을 계속 추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새롭게 사건으로 발생한다. 신학의 대상이 한 사람을 취하시며 그가 신학적으로 인식, 연구, 사고, 진술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사건은 그와같이 파악될 수 없고 또 이해될 수 없이 발생한다. 이런 믿음에 대해 몇가지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1. 믿음은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2. 이런 표현은 이교적 믿음에는 적용될지 모르지만 기독교적 믿음에는 적용될 수 없다. 믿음은 오히려 확고하고 확실한 약속을 용감하게 그러나 냉철한 정신으로 붙잡는 것이다. 이 붙잡음은 성령의 현재와 행하심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성령은 인간을 믿음을 향해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시며 대단히 현실적인 증거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 붙잡음은 결코 강제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행동이다. 붙잡음의 행동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하신 은혜에 저절로 이어지는, 인간편에서 감사하는 자발적 응답일 뿐이다.
2. 믿음은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역사이다. 믿음은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도신경의 표현에 따르면 오히려 어떤 것 안에서 믿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복음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여러가지 교리들 그리고 더 많은 것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각각의 항목에 대한 소위 깊은 신앙심이 아니라 그 모든 서술어들의 주체이신 그분을,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바로 이 믿음은 지성을 찾는 신앙에 의해 매일 아침 새롭게 발생할 수 있다.
3. 자신에게 믿음이 있으며 자기에게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오히려 믿지않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믿는 사람은 자신의 이성과 힘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고백한다3. 그는 성령의 부르심과 조명에 의해,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래서 자신에 대해 놀라면서, 또한 자신 속에서 지속적으로 고개를 처드는 불신앙과 직면하면서, 다만 그 믿는다는 것을 행할 뿐이다. 그는 "나는 믿는다"고 하지 않고 오직 "주여 믿음없는 나를 도와주소서"의 간구와 함께 말할 뿐이다. 그러나 믿음이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을 향해 또 살아계신 성령의 권능을 향해 마주 세워졌을 때 그는 더이상 자신의 불신앙을 핑게댈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이미 주어져서 그가 잘 알고 있는 자유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믿음 자체는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 오직 믿음은 저 대상을 향해야하며, 언제나 또다시 향해져야 한다4. 그는 바로 그 대상을 믿도록 자유롭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자유안에 있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현실적 효력이 발생하는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당황스런 마주침으로 인도되고 의무를 지게된 그는 이제 신학 작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각주 1
바르트는 잘못된 믿음의 사례를 예시하는데 그것은 세속적 믿음, 맹목적 믿음, 긍정적 사고의 믿음, 그리고 영성과 믿음을 혼동하는 믿음이다.
각주 2
자기확신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각주 3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산을 옮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약한 믿음도 열매맺는 하나님 인식과 신학을 가능하게 하고 또 작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각주 4
믿음은 신학의 주체를 자기 중심에서 신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옮기는 것이다.
- 바르트는 잘못된 믿음의 사례를 예시하는데 그것은 세속적 믿음, 맹목적 믿음, 긍정적 사고의 믿음, 그리고 영성과 믿음을 혼동하는 믿음이다. [본문으로]
- 자기확신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본문으로]
-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산을 옮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약한 믿음도 열매맺는 하나님 인식과 신학을 가능하게 하고 또 작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 믿음은 신학의 주체를 자기 중심에서 신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옮기는 것이다. [본문으로]
10.신학의 위기[고독]-칼바르트
2015-02-12 22:59:16
신학 작업은 첨부터 그리고 진행되는 모든 부분과 세부사항 안에서 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기쁨에 찬 학문이라고 말했지만 그 표현은 현실적인 신학적 실존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 긴장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 신학은 인간이 뻐를 묻을 수 있는 최고의 일이기는 하지만, 신학자가 대단히 심각한 역경속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사실은 부정되어서도 침묵되어서도 안된다. 놀라움에 사로집힌, 마주쳐 당황하는, 의무를 지는,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신학자에게 의문이 몰려온다.
신학과 관계하는 사람은 즉시 그리고 언제나 또다시 불가피하게 고독속으로 내몰린다. 이것은 대단히 주목할만하고 또 악명 높게도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다. 신학자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중심 문제를 일종의 은둔 상태에서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 안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교회 안에서도 그러하다. 신학적 관심사나 신학적 과제와 노력은 이 세상의 일들로 부터 고립되어 있다. 그 고립을 인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우선 그 고립이 신학의 본질에 철두철미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신학의 본질로 부터 멀리 떨어져 소위 공공성이 배제된 외진 곳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 곧 신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세상의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인류 전체 상황의 가장 극단적인 변혁이자, 모든 인간에게 관계되는 그 변혁의 계시다. 그러므로 그 계시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포괄적이며 일반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립된 신학적 실존이란 비정상적인 사실이라고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폴 틸리히는 신학을 철학으로 대표되는 타학문들과 더 나아가 문화 그 자체와 연결하고, 거꾸로 문화, 철학, 타학문들을 신학과 연결하려고 시도하였다. 틸리히는 양자를 질문과 대답의 끊을 수 없는 상관 관계 안에서 통합하려고 했으며, 타율과 자율의 이원성을 신율이라는 사고의 단일성 안으로 지양시키려고 했다. 틸리히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신학자는 마땅히 철학자가 되어야 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학의 고립을 해결해 보려는 이런 혹은 비슷한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도는 신학이 자신을 다음과 같이 오해하고 처신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 시도는 타락 이전의 시대로 대답하게 되돌아간 뒤, 마치 자신이 낙원의 신학인 것 처럼 착각한 것이다. 둘째 그 시도는 예수의 처음 오심과 마지막 오심 사이에서 지속되는 현재 시간을 대담하게 건너뛴 뒤, 마치 자신이 완성된 신학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셋째, 그 시도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을 가장 대담하게 초월한 뒤, 마치 자신이 원형적인 신학, 다시 말해 어떤 신적인 신학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신학이라고 알고 시도하는 것은 낙원의 신학도 아니며, 완성의 신학도 아니고, 또 신적인 신학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학은 아직 눈이 멀어 있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앎으로 조명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보편적 계시의 영광을 직접 보면서 작업할 수 없는 자들의 신학이며, 도상에 있는 피조물의 모사적 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순수한 희망에 불과한 꿈이 있다면, 철학적 신학 혹은 신학적 철학이라는 이념이 그것이다. 그 이념 안에서는 신적 및 인간적 앎의 원칙적 구분이 사라지며 또한 근원적, 종말론적 앎과 현재적, 인간적 함의 사실적 구분이 사라진다. 이 이원적 구분이 철학과 신학 상호간의 개념적인 통합을 통해 사라진다.
물론 우리는 모든 학문들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 학문적 성취들의 근원과 목적 안에서 통일된다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어느 정도의 사변적 재능과 욕망에 의해 비교적 쉽게 성취되는 값싼 통합의 명제는 포기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서 신학자는 다음 사실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신학에는 원형적 신학과 모사적 신학이 있으며, 낙원의 신학 내지 전지적 이해의 신학과 도상의 신학이 있다. 양자는 서로 다르며 신학자의 문제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인식, 사고, 진술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일반적 인식, 사고, 진술은 결코 신학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자신에게 선사된 그 새로움의 인식을 주변 세계의 다른 인식들과 , 혹은 주변 세계의 인식들을 신학 자신의 고유한 인식과 통합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에서 신학의 특수성과 상대적인 고독은 비록 많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수용되어야 한다. 신학자에게 불가피한 고독을 피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신학은 고독을 자신에게 이유가 있어서 주어지는 위협의 한 형태로 여기고, 품위를 갖추고 즐겁게 참고 견뎌야 한다.
놀람, 당황, 의무를 경험한 신학자에게 가장 힘든 것은 넓은 복도에서, 그것도 공동체 안의 복도에서 너무도 많은 동료 신학자들 사이에서 혼자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신학자는 그가 개인적인 환각 증세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소리를 때때로 듣는데, 그는 이것을 비그리스도인들 혹은 신학자이기를 강하게 거부한즌 사람들로 부터 듣지만 또한 신학자를 신학자로 만드는 저 전율을(놀람, 당황, 의무의 경험) 실제로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듣는다. 그는 공동체 안팍에서 함께 놀라움에 사로잡히는 사람, 함께 당황하게 된사람, 함께 의무를 질 사람을 찾아보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이떻게 이것이 신학자의 실존을 의문시하지 않겠으며, 신학 그 자체를 위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학자는 그것을 믿음 안에서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다른 자극적인 인간적 경험들과 저 전율(놀람, 당황, 의무)을 구분하는 "근본 관계"인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물론 그에게 믿음의 동료들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회집인 기독교 공동체의 진정 한 구성원은 온세상에서 믿는 자가 자기 혼자뿐이라고 해도, 그래도 정말로 믿으며 반드시 믿어야 하고 믿으려고 하며 믿게 될 사람이다.1 이런 믿음이 없이는 신학자가 될 수 없으며, 공동체와 세상 안에서 신학자로서 기능을 성취할 수 없다. 어떤 저명한 신학자라고 해도, 사고하고 진술할 때에 사실상 자신의 믿음의 고독을 다만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한 신학자를 언제나 또다시 고독속으로 내모는 것은 신학을 종사하는 사람에게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특수한 신학적 사고이며 자신만의 특성을 지닌 믿음의 지성이다. 신학자가 신학을 수행하려하고 그 작업의 결과들이 통속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의 지성적 입장은 일반적 인식, 사고, 진술의 흐름에 역행하여 헤엄쳐야 하며, 그때 느껴야 하는 상대적인 고독을 참고 견뎌야 한다.
신학은 주석, 교회사, 교의학일 뿐 아니라, 언제나 또한 윤리학이다. 윤리학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약속과 함께 말해지는 실천적 개념들을 취급한다. 그런데 이 개념들이 세상과 교회안에서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소원, 견해, 노력들과 일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이 예상된다. 신학은 바로 이 영역에서 질문하고 대답할 때, 보통은 갈등의 상황 안에 놓이게 된다. 신학은 물론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신학의 주제는 새로운 우주안의 새로운 인간2이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그 핵심에서 이미 비판적이며 더 나아가 혁명적인 일거리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자신의 사고와 진술을 실천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과 도무지 호응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의혹의 눈길을 받으며 소수자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다만 소수의 귀에 들려질 뿐이고 그 윤리학은 지붕위의 외로운 새(시102:7) 처럼 적지 않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신학이 신학 자체에서 시작되는 운리적, 실천적 동요 때문에 세상의 자녀들 사이에사도 또한 경건한 자들 사이에서도 대체로 인기를 못얻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학을 진지하게 수행하려는 사람은 이 점에서도 반드시 고독을 참고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각주 1
이런 믿음의 출처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40일 사건에 대한 경험으로 부터 나온다.
각주 2
이 새로움은 40일 사건과의 만남을 통해 죽음의 동굴에서 나온 부활의 새로움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하나된 인간이다.
11.신학의 위기[의심]-칼바르트
2015-02-12 23:00:19
신학을 위협하는 두번째 형태는 의심이다. 이것은 고독보다 더 위협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 위협에는 두가지 국면이 있는데 첫째 국면에서 발생하는 의심은 신학 작업 전체의 본성에 속하지만 극복될 수 있는 위협이다. 그러나 둘째 국면에서 발생하는 의심은 신학 작업 전체에 대해 극복될 수 없는 위협이다. 그래서 두번째 국면의 의심에 대해서는 고독과 마찬가지로 오직 "참고 견디라" 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첫번째 국면의 의심은 신학이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직면해서 받은 사명으로부터 계속 진리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데서 나온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계시의 내용을 질문해야 하고, 그 내용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들의 의미를 계속 새롭게 탐구해야 하며, 그 내용의 진리와 현실성을 언제나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이 의미에서의 의심은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신학자에게 계속하여 제시되는 과제이다. 신학 안에 자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두말할 필요도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타당성을 얻으려면 수고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낙원의 신학이나 영광의 신학은 그런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지만 시간들 사이에 위치한 도상의 신학, 모사적 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신학 작업이 행해져야 하며, 공개적으로 질문되어야 하고 또 의심도 해야 한다. 최고로 필요하고 또 적법한 의심이 겪는 이러한 고난은 명백하게도 신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 의심은 극복될 수 있다. 이 의심은 최고로 필요하고 또 적법하지만 이로 인해 신학자가 겪는 고난은 명백하게도 신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그러나 이 의심은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의 둘째 형식은 많이 다르다. 신학 작업의 실행에 필연적인 질문들의 한 가운데서 이런 의심이 생길 수 있고 또 실제로 생긴다. 신학적 수고가 의미있다는 사실은 자동적으로 자명하지 않다. 신학의 대상에 대한 저 임마누엘 역사 그리고 그 역사의 계시와 인식에 대한 의심은 올바른 것인가?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 안에서 존재하시고 사역하시고 말씀하시며 성령의 내적 증거란 정말로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증거가 정말로 우리로 하여금 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존재, 사역, 말씀을 확신하도록 만드는가? 이런 의심은 "아니오"라는 부정이 아니라 다만 예와 아니오 사이의 흔들림과 방황, 곧 불확실성이다.1
의심의 둘째 형식인 이런 불확실성은 신학 그 자체와 대립한다. 이 불확실성은 신학적 질문 자체의 필요성과 의미에 관련해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며, 로고스를 탐구하는 신학을 근거하고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의 행위에 관련해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며, 신학 작업의 자유와 관련해 당혹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이 어떻게 신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물론 둘째 형식의 의심은 인간이 현재 세계의 시간 안에서 신학을 하는 동안에만 신학을 위협할 수 있다. 현재 세계 안에서는, 시간들 사이의 중간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은헤를 확신하는 그리스도인과 신학자가 여전히 죄인으로 머두는 시대에서는 그 의심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사역 및 말씀과의 관계 안에서의 흔들림과 방황, 불학실성, 당혹감은 지금 여기서 우리의 실존을 덮고 있는 모호한 이중성에2 매우 잘 상응한다. 신학 자체를 위협하는 의밋이 생기는 이유와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한가지 나쁜 상황을 지시한다. 그것은 공동체, 그리고 그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성취된 해방의 소식에 충분하고 완전하게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그 자유를 사용해 저 의심을 몰아내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학의 내부에서 신학을 위협하고 냉각시키고 분열시키는 의심의 이유와 종류에는 다음 세가지가 있다.
1. 이 시대를 계속해서 지배하면서 하나님의 사역 및 말씀과 경쟁하는 권세들 및 권력들의 진군에 직면할 때, 신학에 대한 의심은 강하게 일어날 수 있다. 바울이 자랑했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날 다툼이 있는 국가적 연합의 힘에 비교한다면, 또 세계 경제, 자연과학, 그것이 근거한 기술, 그리고 에술이나 스포즈 유행, 고대와 근세의 합리주의적, 도덕주의적 혹은 비도덕적 이데올로기 등의 힘과 비교한다면 무엇일 수 있을까? 인간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권력들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만일 신학자가 그런 세상의 권세들에 압도되어 신학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리거나 신학의 의미와 가능성을 의심한다면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하야 한다.
2. 의심의 근거는 신학자를 둘러싼 공동체에, 즉 그가 알고 있는 교회의 형태와 선포의 취약성, 분열성, 왜곡성 등에 놓여 있을 수 있다. 공동체 내적으로 세 교단(루터파, 개혁주의, 재세례파를 가리키는 듯)은 각각 배타적 계시의 주장과 함께 등장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상대화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공동체 외적으로는 십자군 전쟁, 종교전쟁, 유대인 박해, 마녀 화형식, 이교도 재판, 노예문제, 여성문제,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한 기독교의 다양하고 끈질긴 오류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 밖에도 오늘에 이르기 까지 기독교의 경직된 일면성, 비관용성, 피상성, 행위없음, 규율부재, 무의미성 등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은 불확실해지며 싫어지지 않는가? 그곳에서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의 배후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의심하게 되지 않는가? 그때 신학 작업의 기쁘고 결실먖는 전제인 "나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의 고백은 어떻게 되는가?
3. 셋째로, 신학자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그를 압도하는 세계가 아니고 그를 압도하지 못하는 교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내면적 혹은 외적 생활 태도가 지닌 구성적 결함이다3. 이 결함은 어떤 그리스도인도 어떤 신학자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악명이 높다. 그것은 신학자가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이원론적으로 두 왕국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혹은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그는 신학의 대상에 의해 규정된 신학적 사고, 진술, 행동의 곁에 저 대상이 규정하지 않는 혹은 자신이 자의적으로 규정한 어떤 사고, 진술, 행동을 함께 허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성령과 긴장 관계에 돌입한다. 그는 믿음의 인식 안에서 살지만, 다만 어떤 경계선 안에서만 그 믿음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학자가 다른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고 신학에 너무 몰두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신문, 소설, 예술, 역사, 스포츠에도 또한 어떤 인간에도 관심을 갖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신학 작업에만 관심을 가지면 신학적 주제가 관심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과잉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거나 잘못 대한다.
신학자는 자신이 본성을 거스리는 타락한 의심자이며 또한 자신이 의심의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했음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특별히 두번째 형식의 의심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안에는 없으며 오히려 무 안에 있다. 우리는 의심한다는 이유에서 자신이 진실되고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을 진심으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신학자는 의심에 직면헤서 절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의심이 자체의 공간을 갖는다 해도, 그리고 그 공간이 어떤 사람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시대의 공간이라고 해도, 그것은 한계가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의심을 제거할 수는 없다 할지라고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야 하며 참고 견뎌야 한다.
각주 1
이런 의심은 무의미, 혹은 허무함에서 생기는 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허무란 있어서는 안된다. 하무는 마귀의 유혹이고 병든 사고이다.
각주 2
모호한 이중성은 신학자의 실존이 여전히 동굴속에서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각주 3
신학자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의미한다.
12.신학의 위기[시험]-칼바르트
2015-02-12 23:14:15
신학을 위협하는 공격은 밖으로부터[고독], 그리고 안으로부터[의심] 오지만 또한 위로부터도 온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위협이 바로 시험이다. 신학 작업의 결과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의 타오르는 불곷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한다. 신학의 위협에 대해 지금까지 말했던 모든 것은 시험 아래서의 숙고와 비교한다면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학이 위로부터오는 시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불행한 일 가운데 최고로 불행한 이른 신학 작업이 이런 위협을 받는 일이라는 사실을 신학자 자신이 가볍게 여기서나, 때로는 알아채지도 못하며, 언제나 또다시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1
시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착수하고 진행시키는 그 신학 작업으로부터 떠나 버리시는 사건이며, 그 사람의 행위 앞에서 그를 외면하고 얼굴을 감추시는 사건이며, 성령의 현재와 행하심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사건이다. 반드시 나쁜 신학에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볼 때 좋은 , 나아가 최고의 신학 작업에도 이 일은 일어난다. 모든 것이 정상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심각하게 비정상일 수 도 있다. 물레방아는 돌아가지만 방앗간은 비어있고, 돛은 펼쳐졌지만 배를 움직일 바름은 불지 않으며, 우물이 있고 송수관은 연결되었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다. 학문은 있으나, 그 대상의 권능 안에서 조명되는 앎은 없다. 깊은 종교적 신앙심은 있으나, 하나님께서 불붙이신, 그래서 스스로 타오르는 믿음은 없다. 발샣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사고되고 진술되는 것에 대하 침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사건, 하나님께서 침묵으로써 말씀하시는 사건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가장 끔찍한 일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기는 커녕 예감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신학의 시험 안에서 발생하는 그것은 충분히 발생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것도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지지와 후원을 요구할 자격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때, 그것은 자의적이거나 변덕스런 기분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의미를 갖고 있다. 신학은 그것이 죄고의 것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는 죄가 있고, 불완전하며, 더아가 도착되어 무에 빠져있는 인간의 작업이며, 어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서 겨우 바르고 쓸모있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선택 안에서 버리시며 부르심 안에서 도한 결별도 하시고 제거도 하신다. 신학적 작업이 하나님과 사람 안에서 바르고 쓸모 있게 되는 것은 오직 그것들 모두가 언제나 또다시 불 가운데를 통과할 때다. 신학적 작업은 언제나 세롭게 이 불에 노출되어야 하며 그 불을 뚫고 통과해야만 한다. 오직 그때 남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교회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불을 통과하는 것이 시험이다. 이 시험 곁에서는 신학 안에 놓인 가장 깊은 고독도, 신학을 병들게 하는 가장 극단적인 의심도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신학자는 전체 노선에서 자신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그때에야 비로서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오직 이 사실을 즐겨 받아들일 때, 신학자도 또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
1. 신학 안에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 신학이 자신이 작업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혹은 비판적인 개념들, 언어 형식들, 구성들을 비유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체와의 동일성으로 사용하려고 할 때, 신학은 신적 로고스를 신학적 유비2 안에 감금하며 오히려 그 유비를 하나님의 보좌에 등극시켜 경배하게 된다. 그런 혼동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마땅히 믿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사이에 불일치가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일치 관계를 견딜 수 없으시기 때문에, 신학자와 그의 신학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하신다.
2.신학이 온갖 종류의 인간적 허영심으로 추진되는 경우에 심판을 면하게 어렵게 된다. 우리 중 누가 제일 큰가? 허영심을 최고로 키워서 가장 큰 자가 되려는 저 열심은 신학자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나름대로 정당한 염려와 약간 관계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진리가 통치해야 한다는 염려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신학이 이 염려, 그리고 다만 시험에 들게 하는 인간적 자만심과 자기 칭의의 영역 사이의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침범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그 영역에서 어떻게 진노하지 않으실 수 있으며 다만 침묵으로써 임재하지 않으실 수 있는가?
3. 신학은 본성상 이론적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시험에 들고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론 작업 안에서 신학자는 공간, 시간없이 사색하고 명상하고 연설하면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 사이의 구체적 상황을 너무 쉽게 시야에서 놓친다. 신학적 실존과 오류와 혼동,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한 신학 밖의 세상과 인간들 사이에는 경악할 만한 불일치가 있다. 신학은 일종의 사치스런 일이 아닌가? 우리는 신학과 함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저 큰 곤경의 그림자 안에서 신학은 시간이 너무 많아 유유자적하는 듯이 보이지 않는가? 3
4. 신학은 자신에게 가장 본질적인 과업의 관점에서도 비난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시험을 당할 수 있다. 신학이 사실상 교회를 알맞게 인도해서 교회의 봉사를 촉진시켰던 것이 몇 번이나 되는가? 오히려 신학이 얼마나 자주 교회를 잘못 인도하고 교회의 봉사를 방해했던가? 신학이 성서를 해석하면서 어던 낯선 것 나아가 정반대의 것을 성서안에 주입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신학이 "화 있을지어다!" 라는 말씀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 아래 위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신학에게는 혹시 예수 그리스도에게가 아니라 오히여 적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심판의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4
진정한 신학적 위기는 잠재적으로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신학 위에 드리워지는 위기다. 그러므로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면서 올바르고 쓸모있게 만들어져 가는 수 밖에 없다. 신학적 위기가 다만 마귀에 의한 것이라면 사태는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미귀의 위협은 신학적 고독과 의심 정도여서, 완전히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될 만 하다. 하나님의 시험은 신학자와 그의 놀라운 작업을 향하신 하나님의 행동 내지는 은혜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 행동의 순간은 경악할 정도로 가혹하지만, 그러나 신학자와 신학 작품을 구원하며 순화시킨다. 이 뜨겁게 사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도피란 있을 수 없다. 그 시험은 오직 참고 견딜 것을 요구한다. 이 시험을 참고 견디지 못할 경우 신학은 기쁨의 학문이 될 수 없다.5
각주 1
가장 가혹한 위협이 시험이다. 신학교 신학의 대부분이 하나님이 떠난 신학이다. 이런 위협을 알고 신학을 해야 한다.
각주 2
이것이 철학적 신학의 오류이다.
각주 3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한 것이다. 신학은 자신의 한계를 느껴야 한다.
각주 4
바르트가 가장 강력하게 비난한 대목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 문자주의, 신개신교주의 등은 하나님이 떠나 버리신 신학이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신학이라고 비난한다.
각주 5
시험은 하나님의 불이다. 신학은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13.신학의 위기[희망]-칼바르트
2015-02-12 23:14:40
"참고 견디는 것" 이것이 신학을 위협하는 세가지 형식(고독, 의심, 시험)에 대한 우리의 대책, 아니 더 낫게 말하자면 해법이었다. 이제 이 노선에서 우리에게 허용된 것 아니 명령된 것은 신학 안의 고독, 의심, 시험을 마주하는 저 가혹한 참음과 견딤이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지 숙고하는 일이다. "참고 견디라"는 해법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일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 긍정적인 곳을 향하게 된다.
신학이 관련되는 곳에서 핍박은 회피되거나 제거될 수 없고, 우리는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신학 그리고 신학적 실존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저 세가지 위협 안에 있고, 시간이 지속되는 한 언제나 어디서나 그 위협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신학자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세 가지의 특이하고도 날카로운 불쾌감이 주어지며, 신학은 그 불쾌감 안에서 착수되고 실행될 수 밖에 없다. 신학자는 그것을 다만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다. 많은 핍박이 없이는 신학이 있을 수 없으며, 또 그 핍박 안에서 약간의 용기가 없이도 신학은 있을 수 없다. "참고 견디라" 는 말은 이런 이중적 의미에서 이해된다.
신학의 위협과 핍박은 희망을 자신의 곁 혹은 뒤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이 희망이야 말로 신학 작업을 향한 지치지 않는 추진력이다. 신학자가 그 핍박을 참고 견디는 과정중에 신학 작업은 희망과 함게 수용되고 수행된다. 신학은 모든 내용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현실성 그리고 신학 자신보다 철저히 우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바라보면 작업한다. 말씀의 진리는 신학에게 주어지지만 신학보다 철저히 앞서면서 주어지고,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신학의 미래가 되며, 신학의 손에 잡히지 않으며, 신학적 사유와 진술의 처리 능력 안에 들어오지 않으며, 그래서 신학자가 그 진리를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위탁받을 수 없다.
그러나 신학은 인간의 행위이며, 그래서 자명하게도 필연적으로 의문시되고 위협을 당한다. 그러므로 이 행위에 붙들린 사람이 고독해지고,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또 바로 그 위험에 찬 현실성과 진리로 부터 오는 시험과 굴욕을 당하고 비난받고 정죄당하는 일이 없을 수 없게 된다. 신학은 이 세가지 위협이 자신과 또한 모든 타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에 불평할 수 없다. 이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우월한 사역과 말씀을 향할 때,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으로부터 모든 육체 그리고 모든 인간적 사고, 의지, 행동이 고소되고 정죄되고 극단적으로 공격받는다는 사실, 또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불꽃 안에서 먼지와 재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인간적 사역과 말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게 된다.
신학이 인간의 다른 모든 작업들과 함께 자신의 작업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세우며, 오히려 무전제로 그 시험에 넘기고 굴복시키며, 주어진 위협에 몸을 사리거나 반항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시험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기뻐하며 시험의 돌입을 참고 견딜 때, 비로서 신학은 쓸모 있는 것이 된다. 바로 이것을 행할 때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 및 말씀과 자신과의 만남이 현실적이고 참된 것임을 예증하게 되며,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와 인류의 한 가운데서 자신의 적법한 자리를 갖고 봉사하게 된다. 신학이 모든 육체 그리고 세상 전체와 연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굴복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희망이 신학에게 주어진다. 은혜가 심판의 비밀이며, 은혜가 희망으로 현재한다. 신학은 은혜에 참여할 지분을 갖고 있으며, 은혜 안에서 신학은 자신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일반적인 사람들과 대립하실 때, 그 고통스런 대립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권고 그리고 인간과 세계 전체의 희망이 숨어있다. 신학자가 생각하는 어떤 사상, 그가 감행하는 어떤 명제는 그 신학자 자신을 깨워서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인간 최고의 의지와 사역도 전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신학자에게 반드시 깨우져 주어야 한다. 신학의 그 특별한 희망은1 신학의 특별한 위협이다.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신학자는 고독, 의심, 시험에 의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두드러지게 고난을 받는다. 신학을 수용하면서 당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을 참고 견딜 때, 바로 그 신학자 자신은 하나님께서 너무도 특별하게 찾고 치료하고 구원하시려는 그 사람이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모든 인간적 본질과 모든 신학적 본질 전체는 어떤 의도도 명분도 존속도 가질 수 없으며, 그 앞에서는 오직 먼지와 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그분의 사랑의 불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적 신학적 본질에 대한 그분의 심판의 대립성 안에는 그분의 은혜가 은폐되어 작용하며, 그 은혜는 게시됨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또한 인간적 사역과 말의 희망이 되시며 약속과 추진력도 되신다. 아무것도 희망할 없는 상황에서 희망하는 바로 그곳에서 이제야 비로소 올바르게 하나님을 향한 희망이 생성되며 이제야 비로소 그분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물이 던져진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극단적 위협은 다만 상대적이고 절대적이 아니며, 그래서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위협이다.
개신교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극단적으로 위협을 받는 인간적 사역이다. 그 인간적 사역은 그분의 판결과 심판 아넹서 잃어버려진 것이며,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며, 오히려 목적에 도달하기 오래전에 이미 좌초하며,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찾으심, 치유, 구원에 대한 희망 안에서 추진된다. 신학의 대상인 복음의 하나님 그분이 바로 신학을 위협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신학을 위협하시는 동시에 신학의 희망이시다. 그분이 신학을 가장 깊은 곳에서 부끄럽게 만드신다. 그러나 신학의 희망이신 그분 그리고 그분을 향한 희망은 바로 그 신학을 결코 수치를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 희망을 복음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관점에서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시며 모든 인간적인 또한 신학적인 본질을 불사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이시다. 그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지식과 행위는 다만 침몰하고 몰락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신학의 대상이라면, 그리고 그 신학이 복음적 개신교 신학이라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학의 대상이 되신다.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인식이라면, 그것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실행된 인간에 대한 심판의 그늘 안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학자가 고독, 의심, 시험의 핍박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는 그분과 무슨 관계에 있겠는가? 2
그러나 그 회피할 수 없는 부정 아래 깊이 은폐된 긍정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의 의미, 즉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이며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계약의 성취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화해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시고 계시하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 그리고 그들의 본질과 행위에 대한 심판을 완전하게 실행하셨다. 심판자이신 그분 자신이 심판당해야 하는 자들의 자리로 내려가시고 그 자리에 서시며 자기 자신을 그들의 해방을 위해 심판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골고다에서 실행된 심판은 비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며 더 나아가 새 창조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동일한 신실로서 상응하는 인간들, 평화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의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자유럽게 된 인간들의 새 창조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안에서 행동하시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게서는 치명적인 위협도 되시지만 그러나 또한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신학적 본질을 살리는 희망도 되신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신학을 가능하게 하고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그분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다. 신학자가 이것을 굳게 붙든다면, 그때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면서 동시에 영광의 신학일 수 있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바라보는 희망의 신학이다.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미 계시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모든 피조물들 그리고 또한 신학과 신학적 행위에 세롭게 계시된다. 신학의 총체적 위협 안에서 신학의 희망이 되시는 그분을 바라볼 때, 신학자들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함께 머리를 들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안다3.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발생한다. 신학은 깊이 경악하며 작업하지만 또한 깊은 생명을 맛보며, 깊은 굴욕 안에 있지만 또한 그분을 통해 그리고 그분을 뒤따름 안에서 깊은 위로를 받는다. 그때 신학은 단단한 반석 위에 있게 되며 주님께 대한 신학자의 희망이 그의 신학적 행위 안에 은폐되기 때문에 신학자는 고독, 의심, 시험으로 인해 참고 견디는 일을 기꺼이 하게 된다.
각주 1
이 희망은 부활의 희망이며 신학의 허무를 이기는 희망이다. 부활의 희망만이 진찌 희망이며 올바른 희망이다.
각주 2
신학자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신학자의 삶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각주 3
산다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며 초현실중의 초현실이다. 그것은 우주적 대사건이다. 바로 여기에 세상을 넘어선 진짜 희망이 있다.
14.신학적 작업[기도]-칼바르트
2015-02-17 18:24:57
신학적 작업이란 신학이 수행하고 만들어 내고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신학 작업의 첫째 근본적 행위는 기도다.1 신학 작업은 기도와 함께 시작되고 기도를 동반해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기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신학 작업의 특별한 성격이다. 신학 작업은 그 일 자체가 이미 기도이며 그 일의 행동은 모든 차원, 관계, 운동 안에서 기도의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올바르고 쓸모있는 신학 작업은 주변의 교회와 세상의 삶에 열려 있는 창문을 가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는2 창문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신학 작업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으로부터 빛이 비치도록 열려 있다. 이 빛으로 열려있지 않는다면 신학자가 성서 메시지를 잘 듣고, 신조들과 교부들과 동료들의 음성을 잘 이해하고 또 필요한 만큼 자신을 개방해서 그 결과 비교적 올바르고 중요한 통찰과 진술로 나가려는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질로 부터 조명되지3 않은 채, 다만 어떤 인간적인 영역에 갇혀 덫에 잡힌 생쥐처럼 맴돌게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신학자가 자신의 작업 전체에서 아무리 열정적으로 노력했다고 해도, 또 비록 그 작업이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갇혀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 작업은 위를 향해서는 닫혀있는 그래서 위로부터 빛을 받을 수 없는 공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신학자는 자신의 믿음의 지성의 성취를 위한 총체적 노력을 단번에 외면하고, 신학의 대상 그 자체로 향해야 한다. 여기서 안식일 사건이 발생할 수 있고 또 발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시작이다. 신학자가 사역과 말씀 안에서 그의 주님, 심판자,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의 앞에 서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분명히 새길 때 기도는 시작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 큰 위협과 함께 그러나 보다 더 큰 희망으로 신학자에게 다가 오신다. 기도는 신학자가 통치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할 때 시작된다 이것은 그가 신학 작업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작업에 결실맺지 못하는 부분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며, 그 작업을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의 빛 아래서 행하려는 것이다.
신학 작업의 대상은 중립적이거나 어떤 절대적인 사물이 아니라 인격적인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사역하시며, 그 사역은 곧 그분의 말씀이시다. 신학 작업의 과제는 바로 그 한분 곧 사역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듣는 것이며 그리고 자기 자신, 교회, 세상 앞에서 들은 바 말씀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그 한분의 말씀이 어떤 중립적인 공고가 아니라 오하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사, 더 나아가 교제의 바판적 계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강조해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 사건이다. 그 말씀은 오직 이러한 말 건넴으로써 말해졌고, 그렇게만 인지될 수 있다. 오직 말 건넴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은 진리의 말씀이며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인간적 사고와 진술은 다만 그분의 말씀에 대한 대답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어떤 사고나 진술일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인간적 사고와 진술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물이 아니고 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진술이 어떤 신적 사물 혹은 신적인 대상에 관계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2인칭으로 부르시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진술이 3인칭에 관계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관한 잘못되고 비본질적인 사고와 진술일 수 밖에 없다.4 이것은 신학 작업이 본래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예배 행위의 형태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학작업은 하나님을 향한 외침, 즉 그분께 그리는 기도로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나-너 관계의 문제를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인간이 된다.) 깊이 숙고하고 날카롭게 눈앞에 두지 않는 신학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잘못된 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학은 하나님께서 오직 행동하고 말씀하시는 주체로서만 신학의 객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숙고하며, 그래서 암묵적,간접적으로 반드시 마주 보고 하는 말인 탄원 즉 기도일 수 밖에 없다.5
신학 작업은 아떤 경우에도 이미 완결된 질문들, 결과들을 배경으로 출발할 수 없으며 오히려 매일 매시간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6 신학의 학문성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신학자가 성경의 증거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시대 성도들의 공동체의 결속 안에 있다고 해도,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만이 그분의 자유로우신 은혜 안에서 신학의 대상이 되시므로, 신학의 대상으로부터 오는그 위협은 너무나 강력해서 신학자가 딛고 설 발밑의 근거를 치워버리신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지금까지 작업되었던 모든 의지, 모든 지식, 모든 방법들을 손에서 떠나 보내며, 다시 한번 용광로에 넣으며,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넘겨 드리며 통채로 희생제물로 바쳐야 한다. 이러한 자발적 양도를 언제나 새롭게 실행할 때, 신학은 참으로 자유로운 기쁨의 학문일 수 있다. 신학은 자신의 대상을 향해 무장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 앞에서 두려움 없이 무장해제하고 항복할 때, 즉 기도하는 수고 안에서 실행될 때 비로서 건강할 수 있으며 오직 그때에만 언제나 또다시 건강하게 된다. 신학 작업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관한 인간적 질문과 대답의 형식, 찾음과 발견의 형식으로진행된다. 그러므로 신학 작업이 실행되려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향해 열리도록 만드시며, 또 하나님 자신을 인간을 향해 열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셔야만 한다. 신학 작업이 이 은혜의 간구로 시작하고 그 간구에 의해 진행되며, 그 간구로 언제나 또다시 되돌아 갈 때 그 작업은 실현 가능성 있는 전망과 함께 수행될 수 있다. 그 간구를 통해 인간의 보이지 않는 눈과 들리지 않는 귀가 그분의 사역과 말씀을 향해서 열리게 되는 기적이 발생된다. 그러나 보다 더 큰 기적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 그 사람의 눈과 귀를 바켜가지 않으며 오히려 다가와서 열어주신다는 사실이다.7 신학 작업의 전과정에는 하나님의 이런 이중적 행동의 사건이 필요하며 그래서 이중적 간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학 작업은 성령의 오심의 간구로 부터 그리고 그 간구 안에서 살아간다. 신학의 모든 질문, 연구, 숙고, 명제들은 다만 그 간구의 형태들일 뿐이다. 신학 작업이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봉사하는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 간구를 들으실 때뿐이다.
각주 1
신학작업의 첫째 행위가 기도인 이유는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내가 신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신학의 주체는 언제나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니미이시다. 그러므로 신학작업은 기도를 동반해야 한다.
각주 2
40일 사건이 가장 직직접적인 빛이 들어오는 천장의 창문이다. 왜냐하면 신학 작업은 바로 이 40일 사건에서 비추이는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각주 3
40일 사건이 신학자에게 열어주는 눈과 귀가 신학적업에 가장 본질적인 조명이다.
각주 4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을 2인칭으로 관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YADA)는 것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대하고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각주 5
이것이 안셀름의 지성을 찾는 신학의 근본전제였다. 그는 신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즉 전체를 하나의 기도로 전개한다.
각주 6
신학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학문이므로 언제나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조직되어서는 ㄹ안된다. 신학은 말씀에 봉사할 뿐이다.
각주 7
40일사건과 우리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이 있다. 부활 사건은 문학과 예술 너머에 있는 사건이다. 40일 사건의 빛은 죽음을 건너온 말씀이고 사역이다. 이 빛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 신학작업의 첫째 행위가 기도인 이유는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내가 신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신학의 주체는 언제나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니미이시다. 그러므로 신학작업은 기도를 동반해야 한다. [본문으로]
- 40일 사건이 가장 직직접적인 빛이 들어오는 천장의 창문이다. 왜냐하면 신학 작업은 바로 이 40일 사건에서 비추이는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40일 사건이 신학자에게 열어주는 눈과 귀가 신학적업에 가장 본질적인 조명이다. [본문으로]
-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을 2인칭으로 관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YADA)는 것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대하고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이것이 안셀름의 지성을 찾는 신학의 근본전제였다. 그는 신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즉 전체를 하나의 기도로 전개한다. [본문으로]
- 신학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학문이므로 언제나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조직되어서는 ㄹ안된다. 신학은 말씀에 봉사할 뿐이다. [본문으로]
- 40일사건과 우리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이 있다. 부활 사건은 문학과 예술 너머에 있는 사건이다. 40일 사건의 빛은 죽음을 건너온 말씀이고 사역이다. 이 빛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본문으로]
15.신학적 작업[연구]-칼바르트
2015-02-17 18:25:23
기도 안에서 수행되는 신학 작업이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진행하는 인간의 내적인 영의 운동이라면 연구하는 신학 작업은 외적이고 수평으로 진행되는 영혼과 몸의 운동이다. 신학 작업은 이 양쪽 요소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안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기도없는 연구는 눈먼 것이지만 연구없는 기도 또한 공허하다. 연구는 주어진 앎의 과제를 추구하면서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노력이다. 이제 누가 연구자인지 아닌지, 특별히 신학의 연구자이니지 아닌지의 과제가 생긴다. 연구자에게는 성서가 증거하는 그리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제시되며, 그에게는 복음을 통한 특정한 앎의 과제가 제시된다.1 그 앎의 과제가 제시되지 않았거나 혹은 그가 그 과제를 철학자, 역사가, 심리학자의 것과 혼동한다면 그는 연구자이기는 하지만 신학의 연구자가 될 수는 없다.
신학 연구는 학생들과 선생들의 직접적인 혹은 문서적인 만남이며, 의미있는 함께 함이다. 학생이 선생들을 거술러 올라가면 저 특정한 선생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목적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직접적 증인들이다.2 신학 연구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저 직접적 증인들의 학교에 속해 가르치고 배우는 행동의 포괄적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강의,세미나 강독, 혹은 책을 통해 주고받는 수업은 다만 이차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신학 연구는 저 학교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 연구는 저 모든 앞서 갔던 연구자들과 논쟁하기 보다는 오히려 의기투합하는 쪽으로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앞선 연구자들이 거쳤던 길을 뒤따르면서 그들을 양육했던 저 원천을 향하는 것이며, 그들이 옳든 그르든 굴북했던 저 규범을 향하는 것, 즉 그들의 근원적인 증거를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 연구는 중심적 대화와 부차적 대화로 이루어진다. 중심적 대화 안에서 연구자는 자신보다 앞섰던 이들이 행했던 것처럼,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세상과 현재 공동체와 공동체의 한 지체인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을 직접적으로 질문한다. 또한 부차적 대화 안에서는 연구자는 자기보다 앞선 신학적 인물들을 통해 지금 자신이 기대하는 대답에 관련된 앞선 이들의 성서 주석과 교의학을 통해, 그들의 역사적, 실천적 연구들을 통해 필요한 가르침과 연구과정에 주어지는 경고들을 간접적으로 받는다. 신학 연구가 중심적 대화와 부차적 대화 안에서 진행될 때, 양쪽 대화는 지속적으로 올바르게 구분되어야 하며 또한 올바르게 결합되어야 한다.
신학 연구중 단연 첫째는 명백하게도 성서적,주석적 과제이다. 물론 이것은 신학 연구의 중심적 대화와 당연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적 메시지의 인지, 이해, 주장은 연구작업의 근본 과제이지만 신학 작업의 부차적 전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성서 본문들을 읽고 설명하는 것은 중심적 대화와 구분되는 별개의 문제다. 신학은 우선 특별히 구약성서 및 신약 성서의 학문이다. 신구약 성서는 에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근원적이고 독특한 증거의 목소리를 그들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예로부터 전해진 규범과 원천으로 인지하고 선포했던 문서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독창성,다양성,통일성 안에 담긴 그 목소리를 매 시대마다 새롭게 인지해야 하며 저 본문들을 매 시대마다 새롭게 읽어야 한다. 성서신학과 모든 역사비평학에 당연히 공통되는 전제는 성서 본문들도 역사비평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3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본문들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알려지고 사용 가능한 모든 역사 비평학적 보조수단, 규칙, 척도들을 성실하게 적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작업의 또 다른 전제는 성서적 본문들은 다른 보통의 문서들 곁에 특별하게 존재한다는 전제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전제는 그 밖의 역사비평학에 의해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신학적 주석작업에는 본질적인 전제이다. 성서적 본문들은 다른 역사들의 한가운데서 발생한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한 증거와 선포로 읽히고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어떤 공허한 공간이 아니라 오직 예언자적, 사도적 증거를 통해 근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봉사하면서 작업하며, 그 안에서 예언자적,사도적 증거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 본문들에 다가간다.
신학연구의 둘째 과제는 부차적 대화와 관련된 것인데 그것은 역사(교회사,교리사, 신학사) 연구이다. 이것 없이는 성서주석과 다른 신학적 영역의 연구도 실행될 수 없다. 교회사는 역사 안의 교회들이 가졌던 이론적,실천적 삶의 표현들과 신앙고백들 또 그들의 신학을 연구한다. 그리고 또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공동체적 삶의 근본요소였던 그리스도교적 인식을 간직한 역사의 길을 연구한다. 물론 그 역사 전체는 세속사이고 세계사이며 그래서 일반 역사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될 수 있지만, 그 역사는 특별한 주제들에 의해 형성된, 다시 말해 바로 그 역사의 기원이 되는 성서적 메시지에 의해 형성된 한 부분이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역사는 신앙과 불신앙의 역사이며 잘못된 신앙과 미신의 역사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부인한 역사이며, 복음을 왜곡하고 갱신한 역사이며, 에수 그리스도께 대한 부분적 순종과 거부의 역사이다. 역사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연구자의 눈이 저 거대한 사건의 세부요소를 하나도 놓쳐서는 안되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꿰뚫고 그 사건의 가장 구체적인 주제를 흔들림없이 응시해야 한다. 이 주제를 알지 못하고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사를 이해하고 서술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신학적 역사학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주님의 첫 재림(부활)과 마지막 재림 사이의 중간 시대에 있는 공동체의 역사를 자신이 선택한 철학적 이념을 해결의 실마리로 삼아 정복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신학적 역사학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서, 또한 역사의 한 곳을 전적으로 칭송하거나 혹은 전적으로 실격시키는 일을 거부하면서,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그 사람들이 생각했고 말했고 만들어 냈던 것 자체가 스스로 말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신학 연구의 세번째 분야는 소위 조직신학으로서 그 주제는 교의학과 윤리학이다.4 조직신학은 어떤 경우에도 한 특정한 개념을 기초로 전개되는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체계를 건립하거나 선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공동체를 통치하는 것은 어떤 개념이나 원칙이 아니라 오직 성서가 증거하는 그리고 성령을 통해 살아 운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앞선 시대의 인식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연구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말씀이 그때그때마다 스스로 제공하는 내적인 맥락, 통찰력, 일목요연함 안에서 정규적으로 숙고되어야 한다. 교의학과 윤리학은 포괄하거나 재단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오하려 성서 주석학이나 교회사처럼 열려있는 그리고 열어주는 학문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정규적 교의학과 윤리학은 작업하는 현재의 매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래적 숙고를 기대하고 희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면서 그 말씀 자체가 처방하는 질서,형식,기술, 목적성 들을 굳게 붙들며, 바로 이 질서를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의 공동체의 인식의 길에 제시하고 적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규적 교의학과 윤리학은 자유롭게 사고하며, 공동체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각각 주어지는 자유 안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라고 요청한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바로 그 정규적 질서에 대한 끊임없는 새로운 인식이며, 그 질서에 근거된 자유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확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천신학은 공동체의 실천 즉 선포로 건너가는 학문이다. 실천 신학의 특별한 문제영역은 언어사건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성서와 교회사 안에서 증거되어 알게 된, 그리고 현재의 자기 제시 안에서 숙고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인간의 말이 세상에 봉사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고유한 자유와 능력 안에서가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도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말씀의 선포자가 말씀을 지시함으로써 그 말씀에 봉사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언어의 문제이다.5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언어가 되려면 선포의 근원이란 관점에서는 최고로 비범하게 그러나 선포의 목적이란 관점에서는 대단힌 평범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선포는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권위적 발언의 성격을 가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말건넴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그 언어는 축제적인 동시에 일상적으로, 성스러운 동시에 세속적으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말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과 일반 사람들 안으로 말해야 하며, 중심적으로 주석과 교의학의 가르침을 받지만 동시에 형식적으로는 각각의 때에 필요한 심리학,사회학, 언어학의 재치를 섞어 넣은 언어이어야 하며, 가나안의 언어인 동시에 또한 애굽과 바빌론과 현대의 일상 언어이어야 한다. 그 언어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 인간 안으로 진입하는 말씀을 지시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로 부터 후자에 이르는 낙차 큰 경사 안에서 말해질 수 밖에 없으며, 이 순서는 역전될 수 없다. 그러나 후자없는 전자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전자없는 후자도 없다.
각주 1
신학자가 앎의 과제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부활의 빛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각주 2
신학연구는 최초의 증인들로부터 이어지는 선생과 제자의 만남이다.
각주 3
역사 비평이 곧 자유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성서는 다른 문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문서라는 전제가 없는 역사비평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각주 4
조직신학은 성서신학(과거)과 실천신학(미래)을 연결하는 신학이다. 이 세분야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각주 5
이것은 언어를 뛰어넘어 언어 저편에 있는 40일 사건을 어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한 것인가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 신학자가 앎의 과제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부활의 빛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본문으로]
- 신학연구는 최초의 증인들로부터 이어지는 선생과 제자의 만남이다. [본문으로]
- 역사 비평이 곧 자유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성서는 다른 문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문서라는 전제가 없는 역사비평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본문으로]
- 조직신학은 성서신학(과거)과 실천신학(미래)을 연결하는 신학이다. 이 세분야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으로]
- 이것은 언어를 뛰어넘어 언어 저편에 있는 40일 사건을 어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한 것인가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16.신학적 작업[봉사]-칼바르트
2015-02-17 18:25:51
신학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다. 신학자는 하나님 말씀의 높은 존엄 앞에서 시중들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이와같이 신학 작업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목적점을 지향하면서 그곳에 집중하는 작업이다. 신학 작업이 기술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보다 앞선 특별한 직무라고 해도 그것은 다만 봉사 곧 "디이코니(시중을 드는 하인)이어야 한다. 신학은 마치 예술이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듯이 신학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학을 수행할 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학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신학 작업은 반드시 말씀을 최종적이고 본래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안의 이런 저런 관점에서 알려지고 숙고되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학 안에서 섬김의 봉사를받아야 한다. 이 사실을 시야에서 놓친다면 그 신학 작업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세상과 공동체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봉사하며 또 그분께서 말씀 안에서 말을 건네시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신학은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신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의 관계에서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자에게 봉사를 요구할 때, 그 말씀은 신학자가 말씀 자체를 손에 넣거나 교회 안에서 우쭐대며 행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학자는 신학의 대상을 장악해 버린 셈이 될 것이며 그때 대상은 신학의 대상이기를 그치며, 신학자의 노력 전체는 무의미하고 헛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문제와 관련해서 바르게 아는 자는 말씀이 그들을 다루는 것이며 그들이 말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씀에 신학자가 봉사해야 하는 것이지 말씀이 신학자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 작업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의 사역이 자유로우신 은혜의 사역인 것처럼, 이 사역과 함께 말해지는 그분의 말씀도 역시 자유로운신 은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그분의 공동체도, 신학도 그 말씀을 점유하거나 흉내내거나 반복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말하는 말씀은 서로 구분된다. 전자가 후자로, 후자가 전자로 실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생각될 수 없다. 인간의 선포 행위 안에서 발생할 수 있고 또 발생해야 하는 것은 그 말씀의 통고이다. 그 통고 안에서 말씀 자체가 반사되고 방향을 울린다. 설교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말씀의 통고이며, 바로 이것이 일반적인 봉사의 의미이고 신학적 봉사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신학의 특별한 섬김은 설교와 달리 교육과 상담에도 기여한다. 이 봉사의 사명은 진리 문제를 제기하거나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직접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선포 전체에 대한 이차적 등급의 증거로서 그 선포를 지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사하는 깨끗한 거울이 되며 가장 밝게 울리는 반향이 되는 것이다. 신학은 공동체의 온갖 사업들과 시설들이 하나님 말씀에 봉사하도록 다양한 목소리로 공동체를 깨워야 한다. 또한 신학은 지속적으로 공동체가 선포와 말씀의 결합을 생각하도록 해야 하며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과의 결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도록 용기를 주어야 한다. 공동체가 세상에 통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세상 안에서 통용되고 그리고 공동체 안으로 침입해 오는 어떤 유사 말씀들이 아니다. 그 말씀은 인간에게 향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유로우신 은혜의 말씀으로서 인간에게 가장 진지하고 궁극적으로 와 닿는 말씀이다. 이 사실이 공동체의 행위, 방임, 진술, 침묵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불분명해지고 나아가 부인되는 경우가 있다. 공동체는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임을 명확하고 명시적으로 이해하고 또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공동체의 선포는 중심과 윤곽을 잃게 된다. 신학은 선포가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로 그 구체적인 말씀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또한 교회의 선포가 정규적이려고 한다면 경사가 큰 높낮이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의 낙차, 하나님의 밝은 생명으로부터 집합적 개인적 인류의 어둠안으로 기울어진 낙차다. 신학은 이 낙차 운동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며 공동체에게 그 운동이 믿음의 지성의 법칙과 자유임을 각인시키고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교회의 선포는 한편으로 주제의 지나친 다양성과 건강하지 못한 확장성(자유쥬의적 이완과 분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일면성과 협소성(교단적, 성서문자주의적, 제의적 협소성과 융통성 없음) 때문에 병이 들 수 있다. 신학은 이런 위협에 대항하여 집중과 개방을 경고해야 한다. 또한 교회의 선포는 개인적 편견은 물론이고 지역적,국가적, 계급과 인종적 전통들과 자명한 편견들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는다. 신학은 이런 편견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적 메시지의 순수함을 지켜야 하며 그 메시지의 교회 일치적, 전체 교회적, 보편적 의미와 특성을 보존해야 한다, 신학이 행하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도전들이 있다. 왜냐하면 신학은 비판적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신학적 봉사의 지원이 없음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진리 질문이 필연적으로 잠자게 되는 경우이며, 그 결과 진리 자체가 그리스도교로 부터 분리되는 일이다. 이렇게 교회의 공간 안에서 신학의 책임은 막중하며, 교회가 자신의 공간 안에서 신학을 진지하게 수행해야 할 책임 또한 막중하다. 신학 작업이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라고 할 때,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또한 세상에 대한 봉사다. 공동체의 사명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 작업은 이것을 넘어서서 세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봉사할 수도 있는가? 예를 들어 신학 작업이 예술, 정치 혹은 학문에도 필요하며, 어떤 것을 말해야 하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신학자가 아니라 그 문제에 각각 관계가 있는 사람만 의미있는 대답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 고려될 수 있다. 신학이 몰두하는 대상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교회밖의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로 인식될 수는 있다. 아마도 공동체의 선포와 관계가 없지 않으면서, 공동체 주변의 세계 안에서도 하나님의 어떤 사역과 말씀이라는 중심 문제에 대한 분명하거나 불분명한 지식이 있고 또 해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때 종합대학 안에 신학대학이 존재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의미있는 현상일 수 있다.
17.신학적 작업[사랑]-칼바르트
2015-02-17 18:26:18
신학의 자리의 원칙이 성령이시며, 신학적 실존의 원칙이 믿음이며, 신학적 위기의 원칙이 희망이라면 신학적 작업의 원칙은 사랑이다. 만일 이 원칙이 신학의 필수적 전제조건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신학이 행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해도 차가운, 열매 없는, 죽은, 좋지 않은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오직 성령만이, 오직 믿음만이, 오직 희망만이 그리고 오직 사랑만이 영원하다. 사랑은 신학 작업의 근본조건이다. 그것은 신학의 대상으로부터 신학에게 다가오며, 그 대상으로부터 신학이 수용해야 하며, 신학이 오직 대상의 자유롭게 하는 권능 안에서 행할 때만 성취되는 근본조건이다. 신학 작업은 오직 이 원칙의 지배 아래서만 약속을 가지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사역일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신학 작업이란 헛된 논쟁과 헛수고에 불과하다. 신학 작업은 오직 사랑이라는 자유로운 은사를 받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일 때, 좋은 작업으로 착수되고 진행되고 목적으로 인도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이 칭송하는 에로스적 사랑은 원초적 본능의 갈망, 압박, 충동, 추구를 뜻하는데, 에로스는 이것들 안에서 자기주장, 자기만족, 자기실현, 자기성취 등을 추구한다. 에로스는 자신을 위해 타자를 획득하고 그 타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추구한다. 학문적 에로스는 동일한 갈망인데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활력으로서 그 안에서 인간적 인식은 대상들을 마주하고 인식하며, 그 대상들을 자신과 결합시키고 그렇게 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향유한다. 이런 학문적 에로스가 없다면 신학 작업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 작업도 인간적,지상적인 운동이며 또한 육체적 하부구조에사도 인간적 생명력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주장과 자기성취를 위한 에로스는 객체를 갈망하는데 이 에로스는 압도적으로 하나님만 혹은 압도적으로 인간만 개체로 삼으려고 하면서 이 양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했다. 고대와 중세의 학문적 에로스가 주로 신중심적 방향을 취했다면 근세 이후 데카르트에 의해 규정되는 학문적 에로스는 인간중심적 방향을 추구했다. 신학자가 신학의 대상의 지배를 받지 않고 대상에 의해 추진되지 않는다면 신학은 이렇게 양자 사이를 비틀거리며 떠돌 수 밖에 없다. 이런 일은 신학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문적 에로스의 본질에서 온다. 그래서 학문적 에로스가 신학의 영역에서 하는 일이란 신학의 대상을 다른 대상들과 계속해서 혼동하고 바꾸는 일뿐이다. 에로스가 신학 작업의 동기가 될 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추구되거나 혹은 인간을 위해 인간이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신학을 수행하는 주체의 가장 깊은 관심사, 즉 그 주체의 자기사랑에 의해 선호되고 인식될 뿐이다. 이런 종류의 자기사랑이 신학 작업을 좋은 것으로 만든다든가, 그것 없이는 신학 작업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신약성서적 단어는 아가페이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맥락들에 따르면 아가페는 에로스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이 분명하다.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아가페의 사랑도 타자를 향한 총체적 추구이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에 있어서 사랑의 근원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유한 필요성이 아니며 오히려 자유이다. 이 자유는 그에게 다만 선사될 뿐이며, 그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낯선 것이며, 어떤 전적으로 새로운 자유 곧 타자를 향한 자유이다. 그는 타자에 대해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이유에서 혹은 자기주장과 자기성취의 수단으로서 타자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는 오직 그 타자 자신을 위해 타자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타자를 자신을 위해 획득하거나 소유하지 않으며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의 자유를 존중한다. 아가페의 사랑도 어떤 추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흥미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대한 주권적 추구다. 사랑하는 자의 것이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주권성을 목표로 향한다는 점에서 아가페의 사랑은 주권적이다. 물론 신학 작업에 대해서도 에로스적 상위 질서는 생명에 관계되며 필수적이다. 신학 작업 안에서도 인간적 인식 주체의 저 관심이, 그 주체가 자신의 고양을 위해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적 활력이 억압되거나 소멸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 작업에서 에로스는 주도적이 아니라 다만 봉사하는 동기에 그쳐야 한다. 신학 작업에서 대상을 지배하려는 에로스적 갈망과 욕망은 대체로 처음에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에로스는 전혀 다른 한 시도(선사받은 아가페)와 마주하면서 퇴각하며, 그 다른 시도에 의해 정화되고 통제되고 변형되며 마침내 그 다른 시도와 통합된다. 그러므로 신학 작업에서 학문적 에로스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해도 그 에로스의 통치만큼은 신학 작업의 미래에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신학을 지배하는 사랑은, 인간적 인식 주체와 그의 에로스에 의해 신학 작업 안에서 인식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부터 새롭고 낯설게 등장하는 아가페여야 한다.
신학 작업의 대상은 하나이다. 그 대상은 신학이 온갖 가능한 깊고 높고 넓은 곳에서 방황하고 흩어지는 것을 금지한다. 또 그 대상은 신학이 한때는 하나님쪽으로 다른 때는 인간 쪽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금한다. 신학의 대상은 한분이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즉자성 혹은 고립성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분 참 인간과의 결합 안에 계신다. 또 신학의 대상은 한분이신 참 사람이다. 그분도 역시 고립되어 계시지 않고 오히려 한분 참 하나님과 결합되어 계신다. 신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성취의 역사이다. 이 역사 안에서 영원히 유일회적으로, 크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고유한 자유 안에서 작은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기까지 내려오시고 낮아지셨으며, 작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크신 하나님의 인간이 되기까지 자신을 버려 헌신하셨다. 신학적 인식의 대상은 바로 이런 계약의 사건이다. 그 안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을 인간과 결합시키는 완전한 아가페 사랑이 발생했다.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그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 왜냐하면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되 인간 자신을 위해 사랑하였으며 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 자신을 위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원적 자유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선사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이다. 그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지만, 그 내려오는 권능 안에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아가페이며 그 양자는, 아니 그 하나는 동일한 주권성 안에 있다.
신학적 인식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즉 저 완전한 사랑이라면 오직 그 사랑만이 그 인식을 지배하고 형성하는 원형과 원칙일 수 있다. 신학적 인식은 대상과 결코 동등하지 못하며 오히려 대상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적절한 인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속박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온갖 종류의 에로스가 같이 끼어든 혼탁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 도상의 신학은 지금 여기서 서든지 가든지 그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신학적 인식, 즉 진리 질문을 신학적으로 제기하고 대답하는 일은, 그 인식이 거울과 같이 되어 저 완전한 사랑의 생명성과 통치력을 눈에 보이게 드러낼 때 최고로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신학적 인식은 자신의 어떤 소원, 명제,요청 안에서가 아니라, 오직 대상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원형으로서 주어진 그 사실을 승인하고 확정하는 가운데 성취된다. 신학이 저 완전한 사랑에 종속되고 그것을 따르고 모든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할 때 신학은 겸손하고 자유롭고 비판적이고 기뻐하는 학문이 된다. 신학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신학자가 보증할 수 없다. 이것은 신학자가 성령, 믿음,희망을 얻거나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학 작업의 이런 결정적 전제가 바로 신학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작업 전체에 걸쳐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먼 곳을 바라보도록 요청된다. 에로스는 어떤 형태와 힘에 의해서든 모든 사람에게 이미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가페는 모든 시대와 모든 공간의 각각의 사람과 신학자에게 다만 선물로 주어질 수 있을 뿐이며 선물로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아가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이 오셔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에 있다. 만일 우리가 어디서 그 사랑을 찾아야 하는지 알기만 한다면, 그 사랑을 향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약간의 앎을 얻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땅에서 신학자들이 오고 가며, 신학이 한때는 밝았다가 또 어두워져 간다고 해도, 저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성취가 발생한 그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문다. 이 완전한 사랑이 올바른 신학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조건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 사랑에 못 미쳐서 탄식하게 될지라도 그것을 모르는 것 보다는 낫다. 우리의 신학 작업은 모든 경우에 바로 그 사랑을 궁극적으로 알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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