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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갈라디아서- 톰 라이트

갈리디아인들에 대한 바울의 탄식(1:1-9)

2015-02-01 23:04:51


  바울은 세상을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이 하나님이 세상을 위한 계획을 한 분 유대인이신 예수를 통해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이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온  세상의 메시아, 곧 왕중의 왕으로 세우셨다. 이것이 바울 복음의  출발이다. 나아가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새로운 가족을 세우고 계심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 새로운 가족이란 메시아 안에서 아무런 차별도 장벽도 없는 한 가족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온 세상의 주님이 되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바울은 유대인들의 믿음대로  메시아가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면 그분에게는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차별없이) 어직 하나의 가족만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어 이루어진  그 가족에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이방인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이)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복음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유대인의 메시아, 예수가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선언이며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한 가족으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좋은 소식을 이방인들 곧 갈라디아인들에게 전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주장을 했다.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족의 일원이 되려면 마땅히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예수님을 기초로 한 가족을 세우려는 바울의 사도적 목적이 지금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회심과 소명(1:10-17)

2015-02-01 23:12:01


  아마도 반대자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복음을 왜곡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싸구려 복음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 본문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방식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울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이 메시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접했는지, 어떻게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한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하나님이 예수를 진정한 메시아, 곧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세상의 주님으로 계시하신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도인 바울의 생애와 사명, 그리고 존재 전체에 복음의 메시지가 새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베드로 방문(1:18-24)

2015-02-02 00:54:32


  아마도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수하에 불과하다는 소문울 퍼뜨리며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받은 복음의 메시지를 바울이 왜곡하여 이방인들이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변질시켰다고 모함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회심한 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이 예루살림 사도들의 제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사도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말하는 복음이 서로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에게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는 일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이 메시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통일된 가족으로 창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라디아의 위기 상황에서 바울이 교회의 통일성에 기여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독립성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독립적인 사도였지만 자신의 메시지는 그들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의 회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서 역사하심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에 도착한 선동꾼들이야말로 복음을 망치려는 장본인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에 굳게 맞서라(2:1-5)

2015-02-02 01:00:14


  구성원 대부분이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가 주요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할례는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고 남자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게 되자,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표지인 할례 문제가 심각하게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 문제는 유대교의 율법과 관련이 있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할례를 통하여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되는 가족으로 규정하므로 이방인 교회에서 할례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를 가르치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은 일을 거론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복음을 배우기 위해 거기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방 세계에 전하는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승인을 얻으려던 것이 아니라 당시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서 하나님이 메시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가족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도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의 거짓 주장에 양보하지 않으려고 다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할례 문제는 바울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진리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선포였다, 그리고  그분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면, 그분을 믿는 이들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하나의 통일된 가족을 형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고 분열시키는 할례는 이제 불필요한 것이다.

베드로, 야고보와 합의하다.(2:6-10)

2015-02-02 01:30:31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방인에게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을 사도들이 인정했다는 것과, 또한 자신이나 예루살렘 사도들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교회가 기둥으로 인정하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더해준 것이 없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꺼이 분업을 하기로 동의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첨가하지 않았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자신들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합의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사역에 예루살렘 사도들이 매우 만족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맞서다(2:11-14)

2015-02-02 01:45:16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안디옥 교회에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한 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친교의 가장 강력한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 할례가 가족의 정체성을 말해주듯이 식탁 교제도 그렇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나중에 물러난 문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것이 갈라디아에서 긴급하게 부각된 바로 그 할례 문제와 괸련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 하나에 대한 해석적 다툼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의 위선적 행동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에 반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칭의(2:15-21)

2015-02-02 02:07:23


  바울과 갈라디아의 선동꾼들 사이에 가로놓인 진짜 문제는 복음의 해석이나 유대교의 율법 문제에 대한 부분적 왜곡이나 일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메시아 안에서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것이었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바울과 베드로의 층돌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선동자들에게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바울이 열정적으로 호소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는 근본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바울의 결론은 19-20절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울의 핵심적인 논증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이전의 정체성을 버리고 메시아로 말미암은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충돌했던 문제는 누가 참된 이스라엘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메시아이시며, 그분이 신실하신 분이며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정체성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가 메시아에게 속하며 메시아에게 속한 자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 질문에 바울의 대답이 교회의 가장 유명한 신앙고백이 되었다. 그  대답의 핵심은 메시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고, 거기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바울은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 언약의 가족에 소속되었지만, 이제 메시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의 가족이 탄생하였으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할례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의 논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산 것이다. 우리가 메시아의 백성이고  메시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메시아의 신실하신 사랑이고 또 우리의 신실한 사랑이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우리의 신실한 사랑이란 자기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위해 죽게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즐거운 믿음의 반응이다. 믿음의 반응,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로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은 대개 "의롭다"와 " 의"(righteous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믿음이라는 표지를 정체성으로 지닌 전세계적인 한 가족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약속이었는데,  이제 그 약속이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의"는 복음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가족 정체성, 언약 구성원의 자격을 나타낸다. 이들이 바로 의롭다고 선언받은(declared righteous) 혹은 의롭다고 칭함받은(justified) 사람들이다. 나아가 "의"는 불의한 세상 전체를 감싸안고 치유하며 예수님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을 표현한다. 

 

   안디옥 사건에서 바울이 베드로에게 입중하려고 했던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이제는 율법이 규정하던 자신들의 옛 정체성을 버리고 메시아에 의해 규정된 언약 백성의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언약백성의 새로운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율법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만약 칭의(언약적 신분, 언약 구성원의 자격)가 유대교의 율법에 의해 이루어 진다면 메시아는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믿음(갈3:1-9)

2015-02-02 14:52:31


   바울은 무엇보다 갈라디아인들이 자신들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메시아의 가족에 속해있는가?  즉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속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할례를 받는 육적 이스라엘에 속해 있는가?  바울은 2장 마지막에서 주장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서 메시아 예수가 그들 앞에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 나타나셨는데 어떻게 육적 이스라엘의 가족에 속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 사실, 그리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가 된 사실, 이 두가지를 제시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 갈라디아인들이 믿게 된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갈라디아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중요한 것은 성령이 아니라 육체라고 그들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육체란 포피이고, 하나님께 맞서 반역하는 인간 실존의 전영역으로서의 육체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육체의 일들에 관여하는 유대교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시작과 지속은 믿음의 문제이다. 유대교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대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한쪽 편에 성령과 믿음을 그 반대 편에는 육체와 율법을 배열하고 있다.

  선동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참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려면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이미 복음을 믿는다면 그들은 이미 모든 면에서 아브라함의 참 자녀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내어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첫번째 약속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 덕분에 하나님의 언약에 속하는 신분을 획득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주어졌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는데 그 믿음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였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브라함이 지닌 언약적 신분의 표지라고 말한다. 이 둘을 함께 묶어 보면 축약된 바울의 논증이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으면 그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이며 그러므로 언약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인 믿음을 버리고 다른 방법으로 그 신분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없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에서의 구원(3:10-14)

2015-02-02 15:26:12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복음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는 바울의 말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모세를 제쳐놓고 곧장 아브라함에게 호소하는 것은 유대교 신학의 핵심 요소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교 전통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 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첫번째 가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나머지 세상에 전달해야 했다. 그것이 그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가족에게 어떤 일이 생겼고 그 결과 하나님의 계확과 약속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가족인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건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아브라함의 육신의 가족인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내릴 뜻이 있으시다. 그리고 약속의 전달자인 이스라엘은 실패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더 광범위한 뜻을 성취하는 과정에 있다. 이 조밀하고 짧은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의 선물을 통해이 문제의 양면을(이스라엘 자체의 문제와 이스라엘로 인해 발생한 문제) 모두 해결하셨는지를 보여준다. 바울이 보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일을 행하시는 방법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길을 가다가 넘어진 이유는 율법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을 무너뜨리는 유죄의 근거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민족들에게 유린을 당하고 강제로 추방되는 유배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마음에 두신 본래 계획, 즉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뜻이 좌절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건재하며 다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길이 장애물에 막힌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성경은 하나님의약속이 성취되는 다른 직행로가 있다고 말한다. 하박국서는 그것은 바로 믿음이며, 믿음이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비록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백성들을 넘어뜨렸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눈여겨 보라고 말한다. 신명기가 말한 저주를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가 당했다.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억압당하는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것이 로마 권세에 의해 처헝당한 십자가 죽음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이 받는 저주의 짐을 친히 지셨다.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주 문자적이고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하신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는 것을 막았던 장애물이 제거되고 자유로운 통행이 재개되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아브라함에게 시작하여 그의 가정과 그의 씨(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를 거쳐 모든 민족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곧, 아브라함의 복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열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애물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포기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마침내 언약이 새롭게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성령을 부어 믿게 하시고, 다시 바로잡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의 길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성령의 선물은 이스라엘의 자체의 문제와 (이스라엘의 문제로 인해 야기된) 온 세상을 향해 흐르는 촉복의 강물을 가로막던 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해결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씨 그리스도, 중재자 그리스도(3:15-22)

2015-02-02 15:55:55


  여기서 바울의 논지는 하나님이 (메시아 안에서) 자신의 뜻과 의향을 명백히 제시하셨기 때문에 그 뒤에는 어떤 논란으로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리한 점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이 그들 편에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본래의 언약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것이 변경되었다는 어떤 의혹도 있을 수 없고 율법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은 이브라함이 전세계적인 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그 가족은 출생이나 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믿음의 관점에서 규정된 하나의 가족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된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이 언제나 의도하신 대로 메시아 안으로 편입된 한 가족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뜻이었고 이는 하늘에나 땅에 있는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다는 것이다. 비교적 늦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율법도 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흔들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율법은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 사이를 연결하는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을 제거해야 할 해악으로 간주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완전한 오해이다.

   바울은 인류 전체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해 인류는 물론이고 온 우주의 문제를 해결할 처방을 찾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점도 바울에게 분명하다. 그런데 해결책을 전달하는 백성들 자체가 문제의 일부분이었다. 율법은 문제를 가진 그 백성들이 치료될 때까지 마련된 일종의 임시 격리소였다. 그러나 치료책이 나온 뒤에도 계속 율법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바울은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아브라함의 육신적 가족인 이스라엘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율법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일정 기간만 주어진 것이었다. 바울은 율법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약속하신 한 가족이 메시아와 함께 등장할 때까지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육신적 가족들이 처한 상태에 있었다. 나머지 다른 인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죄인이었으며 따라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만약 율법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이 성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런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임시적으로 격리하는 규제에 불과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유익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포함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는 표지판에 불과했다. 율법은 하나님이 마침내 메시아를 통해 약속을 성취하실 그 때까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런 역할을 하도록 (잠정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신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해서였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약속이 성취되었는데 이는 한 민족 집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바울의 논증은 로마서 3:21-26에서 말하는 내용과 아주 유사하다. 하나님은 믿음의 표지를 지닌 전세계적인 가족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이제 메시아 안에서 이 가족이 탄생했다. 갈라디아인들은 메시아요 주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가족에 소속되었으므로 그들이 온전한 자격을 얻기 위해 더 갖출 것은 없다. 만일 그들이 율법 아래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악속과 성취 사이의 중간 시기를 위해 마련된 격리용 규제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 될뿐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기독교 정경의 일부이다. 이런 점에서 의혹이 있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구약 성경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기독교의 이야기는 이브라함 때부터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격리 상태에 두기 위해 마련된 규제들은(율법은) 이제 한쪽으로 치워졌다. 그런 규제가 나쁘거나 사려깊지 못하거나 불필요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선하고 아주 중요하지만 이제 (약속을 성취하는)자기 사명을 효과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이다.

믿음의 도래(3:23-29)

2015-02-02 15:56:37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난 율법의 임무와 역할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은 이스라엘이 성장할 때까지 보살피는 보모의 역할과 같다고 묘사한다.  모세의 시대와 메시아의 초림 사이의 기간에 이스라엘은 아직 어린아이였고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이스라엘이 성장한 뒤에도 보모가 계속 같은 일을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스라엘이 마침내 하나님의 장성한 자녀가 되었다고 말한다.  메시아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마침내 성숙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약속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가 메시아의 신실하심에 반응하여 보이는 믿음은 민족적 배경과 상관없이 그가 온전하고 완벽한 하나니의 가족 구성원이라는 표지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26절에서 우리가 모두 메시아 예수 안에서 메시아의 신실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아의 백성에 속한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장성한 자녀가 되는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  바울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단어는 메시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 안에 이스라엘을 전부 망라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메시아 안에 있는 것, 혹은 메시아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공동체, 즉 새로운 왕의 가족, 메시아의 백성에 소속되는 문제이다.  세례를 통해 이 가족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세례는 메시아와 연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한 가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세례받은 이들은 메시아를 옷입었고 그들은 메시아의 가족이다.  그 결과 가족안에서 그들의 지위, 하나님 앞에 그들의 위치나 서로와 맺는 관계와 관련해 옛 시대의 차이는(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간적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자체가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앋는 지위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모두 메시아 안에서 하나라고(아무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3장 전체의 중요한 결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가족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이 마침내 메시아 안에서 한 가족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메시아에게 속하면 아브라함의 가족이며, 또한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 규정에 의하여 상속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3:15-18)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교회의 연합을 향한 열망과 직결된다.

아들과 성령(4:1-7)

2015-02-04 15:41:15


   이 본문에는 출애굽의 용어가 가득하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이후 40일 뒤에 시내산에 도착했고 여기서 율법을 받았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 유업의 땅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 율법의 종살이를 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것은 애굽의 관원들이 아니라 율법이었다. 그리고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오랜 약속의 성취와 전세계적인 한 가족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유월절이 오고 새로운 출애굽이 이루어졌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가 아니라 친 아들 메시아를 보내시고, 그분의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고 참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유월절 40일후인 오순절에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영, 자기 아들의 영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법적 지위에서는 물론이고 내적 존재면에서도 참 자녀로 변화시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유업을 마련하셨고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그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바울은 이것이 훨씬 더 깊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이방인 신자인 갈라디아인들이 우상숭배에서 떠나 그리스도 신앙에 이르는 순례 길이, 율법 아래의 어린아이 상태에서 그리스도 신앙에 이르는 유대인의 순례 길과 서로 짝이 맞는다는 것이다. 그래래서 바울은 출애굽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듯이, 한 분이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과 성령 안에서 이루신 행위를 통해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에게도) 자신을 알리셨다고 선포한다.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4:8-11)

2015-02-04 15:55:39


  이 본문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장면이 배경으로 놓여있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신을 예배하는 애굽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 안에서 나타난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 처럼, 그들은 이제 넓지만 심란한 자유의 세계를 바라보자 삶이 더 안정되고 정돈되어 보이는 세계로, 곧 종살이 인생으로 되돌아 가려하고 있다. 물론 갈라디아인들은 우상숭배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되려는 것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이 다시 종노릇하려고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 메시아가 오셨고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임하는 새로운 세계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교를 수용하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그들이 민족과 영토라는 자격조건을 메시아의 새가족이라는 자격 조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셈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은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획속에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 계획은 완결되었기 때문에 이전 단계로 돌아가려는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획속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독자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유대교의 절기를 준수하려는 문제를 거론한다. 원래 유대교의 절기의 의미는 하나님이 장차 성취하실 위대한 구속 행위를 미리 내다보는데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미래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유대교의 절기를 계속 지키려고 한단 말인가? 그들이 절기를 지키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신 위대한 구속 행위를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동안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쏟은 노력이 헛수고가 될까 두렵다고 말한다.

자녀들을 향한 바울의 호소(4:12-20)

2015-02-04 16:03:34


   이 단락은 바울이 신학적인 설명을 잠시 멈추고 사고의 흐름을 벗어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대목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갈라디아인들에게 행하신 일을 그들과 함께 경험하면서 형성된 우정, 가족애, 상호 유대에 호소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을 시험할 만한 것이 자기 육체에 있었지만, 업신여기지 않고 환영하였던 것을 회상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사람의 육체, 즉 할례받지 일이 바울에게든 누구에게든 문제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규정되는 신분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의 말씀과 능력에 마음과 삶을 열어, 복음이 자신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깨달았던 그 놀라운 경험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냐고 따져 묻는다. 바울과 갈라디인들을 이간시키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알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다시 해산의 고통을 느끼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자신이 그들에게 품고 있는 목표를 아주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그것은 메시아가 그들 안에서 형성되는 것, 즉  메시아의 삶, 즉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포용하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갈라디아 공동체 안에 다시 회복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4:21-31)

2015-02-04 16:40:56


   바울의 반대자들은 만약 갈라디아인들이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자녀, 곧 참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되려면 할례를 포함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마도 바울의 반대자들이 이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삭처럼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려면 갈라디아인들이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동일한 이야기를 가지고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그의 논증의 핵심은아브라함의 진짜 가족, 즉 이삭의 가족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어느쪽이 이삭의 가족이고 어느쪽이 이스마엘의 가족인가?  바울은 이미 앞에서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이 모세의 시대와 메시아의 도래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종의 상태에 두는 역할을 했음을 설명했다.(3:23-4:3) 따라서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이삭의 자녀들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자녀들을 낳는다고 말한다. 

 이 논증을 통해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육신의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 곧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삭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현재의 예루살렘이 이삭의 가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스마엘에 속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불청객이나 이류 시민이나 아브라함의 서출 가족이 아니라 이삭처럼 약속의 자손이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의 자유(5:1-6)

2015-02-04 17:02:47


  바울의 요점은 이것이다. 천년이 넘도록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나눈 교제는 율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율법은 언제나 엄격한 겨울의 통치였고 기다림의 때였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게 봄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세상에 침입해 들어옴으로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온 것이다.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유대인의 토라 전체를 지키기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헌신과 아무 갈등없이 양립할 수 없다. 그들이 메시아와 동행하려 한다면 율법을 고수해서는 안된다.  만약 율법을 고수한다면 그들은 메시아의 백성에 속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셈이 된다. 

  바울은 율법의 대안으로 등장한 기독교의 실체를 요약하여 제시하는데 그것이 5,6절이다. 5절에서 말하는 의의 소망이란 미래에 하나님이 모든 신실한 백성들을 의롭다고 선고하시는(justification) 그때, 즉 새 창조의 때(6:15)에 대한 갈망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이 공적인 지위를 받는 위대한 사건의 때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만약 미래의 소망이 헛되지 않다는 증거를 지금 여기서 원한다면 육체의 표지를 통해 얻는 지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얻은 새 생명에서 그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는 것도, 할례를 받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라는 육체의 표지가 있는지(유대인) 없는지(이방인)가 핵심이 아니고 핵심은 믿음이다. 바울은 이 믿음은 일련의 신념을 받아들이는데서 그치는 공허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타협에 대한 경고(5:7-12)

2015-02-04 17:06:12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육상 경기와 같다.(바울은 고전 9:24에서도 이런 표현을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멋지게 출발했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서 다른 말로 설득하면서 이들의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가 달린 문제였다. 만일 메시아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은 뒤이어 그 자체로 설득력있는 진리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선동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바울이 가르친 진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바울은 선동자들의 설득에 넘어가지 말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의 선동은 복음을 통해 갈라디인 교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바울은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 문제를 양보한다면, 다른 모든 것은 무사한 채 작은 오점만 생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누룩과 같이 복음 진리 전부를 변질시켜 놓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율법과 성령(5:13-21)

2015-02-04 17:42:2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다는 사실을 논증하는데 이 편지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 자유는 과거 이방 종교로 부터의 자유, 또한 유대교의 율법이 그 신봉자들에게 부과하는 요구로 부터의 자유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해방되었다. 그러나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그 자유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자유를 선용하려면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은 뒤에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바울이 내세우는 첫번째 요지는 자유가 사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초기 기독교의 핵심 계명중의 하나를 구약 성경에서 취하여 인용한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인데 바울은 이 계명이 모든 율법을 요약하고 있음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율법을 전부 포괄하는 이 계명을 지키는 방법은 할례를 받음으로 육체를 따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만약 할례를 받아 육체를 강조한다면 그들은 주변의 이방 세계와 똑같은 수준으로 전락한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 대안은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이끄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핵심 계명에 순종하여 더 바랄 나위없이 율법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이런 일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울이 자주 말하듯이 육체와 성령은 서로 거스른다. 이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어디에 있고, 우리의 가장 깊은 동기가 어디에서 나오며, 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 진정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육체와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전투장이므로 결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로 유대교의 율법, 특히 할례가 불필요하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율법으로부터 그리고 이방 종교로 부터 자유롭다면 성령의 동기와 능력은 그에 수반되는 행동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이방 종교로 부터 자유롭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자유롭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자유롭다. 그리고 이 자유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5:22-26)

2015-02-04 17:53:56


  바울은 육체와 성령을 대조하면서 육체에 대해서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열매라고 말한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목록에는 한 사람이 믿음과 세례를 통해 메시아 백성의 공동체로 들어올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바울의 비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든 사람들은 바울이 육체라고 부르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민족적이고 지리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간 가족에 소속된다.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19-21절에 나열된 육체의 일을 낳는 갖가지 욕구가 내재한다. 하지만 복음이 선포되면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새롭게 갱신되는데,  그 갱신의 첫 징표, 곧 그들의 소속을 나타내는 참 표지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백성에 속하는 이 자격은 죽음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여정에 그들을 참여시킨다. 이 죽음, 즉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을 통과할 때, 육체가 한 사람의 인격과 행동을 결정하는 삶이 끝나며 대신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여기 나열된 아홉가지 성품은 성령없이 우리의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이다. 그렇다고 이 과정이 우리의 사고나 의지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그것을 향하도록 설정해야한다. 그것은 그냥 편하게 앉아서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성령의 방향에 맞추라고 촉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맺고자 하시는 열매의 결과를 알고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묵상하면서 도덕적 노력을 기울여 성령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그들이 무턱대고 성령의 유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면, 유대교의 율법이 그들에게 어떤 유죄판결도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로 짐을 지라(6:1-5)

2015-02-04 18:40:01


  바울이 세운 공동체에서는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동등하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며, 모두가 동등하게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했다. 그런데 선동자들은 그런 공동체 대신에 분열의 유산을 남겼다. 바울은 앞에서 사람들이 성령의 방향에 맞추어 사는 삶이 어떤한 것인지 묘사하였는데 이제 바울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교회생활에 적용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율법을 진정으로 준수하기 원한다면 그것은 메시아의 율법이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로운 율법의 지위를 확보하여 모세의 율법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메시아의 율법은 사랑의 율법, 사랑과 겸손 가운네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율법이다. 바울은 메시아 예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듯이 그리스도인들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 안의 실질적인 후원(6:6-10)

2015-02-04 18:40:47


  바울은 돈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돈은 분명 우리  시대 만큼이나 그의 시대에도 민감한 주제였던 것 같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 내용은 교회의 사역과 생활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바울은 씨 뿌리는 비유를 하면서 성령의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육체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 전자가 교회 사역 특히 가르침과 복음 선포를 탄탄하게 하고 공동체를 세우는데 후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일상 생활의 수많은 쾌락에 자원을 허비해 버리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바울은 전자는 때가 이르면 반드시 결실할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거둘 것이 썩어질 것 밖에 없다고 말한다.

  돈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돈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이라는 것이다. 돈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위탁받은 것이다. 그래서 지혜롭게 사용하면 돈은 선한 결실을 낼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썩어질 것을 거둘 뿐이다. 바울은 지금 돈으로 할 수 있는 선한 일, 즉 개인과 공동체에 지속적인 혜택을 주는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육체에 씨를 뿌리는 것과 성령에 씨를 부리는 것의 대조는 이 편지의 핵심 주제와 분명히 관련이 있다. 육체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중 일부가 열심을 품었던 바로 그 일, 즉 할례 받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육체가 나타내는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결과는 파멸로 가는 길이라고 바울은 경고한다. 또한 육체에 씨를 뿌리는 것은 5:19-21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의 일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씨 뿌리는 이들이 그에 부합하는 결과를 거두둣이 육체와 관련된 행동의 마지막 결과는 죽음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성령에 씨뿌리는 이들은 영생,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침입해 들어왔고 장차 완성될 새로운 시대의 영생을 거둘 것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성령의 삶을 사는 사람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더 넓은 도덕적 삶에서 인내하며 견디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반드시 참된 결실을 거울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 자랑함(6:11-18)

2015-02-04 18:41:32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관을 펼쳐 보인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갈라디아를 넘어서고, 초기 교회를 넘어서서, 전 우주를향한 하나님의 풍성하고 포괄적인 목적을 지향하게 해준다. 메시아만 삽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십가가에 달려 죽었고 나아가 세상이 십자가에 달렸다. 갈보리는 역사의 전환점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우주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옛것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가 탄생했다. 이 새로운 창조 세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비롯되었으며 성령이 부여하신 새 생명과 함께 지속된다. 성령의 생명은 메시아에게 속한 모든 이들 안에 솟아나며 새로운 창조세계는 창조세계 전체가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 자녀와 영광의 자유를 공유할 때가지 지속될 것이다. 

  바울에게 십자가는 모든 것의 중심에 서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그의 생각을 이끌어 간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옛 세계가 종식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예수를 본 사람이, 십자가에서 이미 사형 선고된 가치관, 신분 표지, 세상적인 삶의 방식에 매달리려고 하는가?  중요한 것은 할례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위에 새로운 세계를 펼쳐놓았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그 축복, 새로운 생명, 미래의 약속에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이 초청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그리고 이삭의 진정한 가족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며 그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속에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한다.

  복음을 믿는 모든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이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 세계의 기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에 동참하여 그것을 세상으로 가져오도록 부름받았다. 갈라디아서의 결론은 복음은 사람에게 기원하지 않으며 메시아의 백성에 속하는 자격은 인간적인 범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은혜이며, 이 은혜는 뻗어나가 전 세셰를 포용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포용의 표지는 육체에 있는 흔적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임재와 기쁨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