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세워진 율법-존 웨슬리
2015-01-19 23:17:30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1)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Ⅰ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Ⅱ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Ⅲ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2)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은 앞에서의 설교 속에 밝혀져 있습니다. 즉, 첫째로는, 율법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방법으로서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비록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고, 복음을 확장한다는 구실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두 파괴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간에)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과 대치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성결의 필요성이 거의 없거나 또는 그 필요성의 정도가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성결의 필요성이 요청되겠지만믿고 있기 때문에 성결이 우리에게 거의 필요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인의 자유란 어떤 종류나 어떤 정도의 성결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선행이 아니라 은혜의 계약아래 있다는 것,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 는 진리를 외곡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이러한 사실들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비록, 원칙에서는 아니지만 행동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 때문에 성결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처럼 생활하거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떻게 보다 나은 방식을 따르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문제만이 남게 됩니다.
2. 실제로 우리는 낡은 의식적 율법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율법이 영원히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전체를 수립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완성하고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마치 우리가 의롭게 되는 조건인 것처럼 생각하여 도덕법 (너무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만)을 세우자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생전 의롭게 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직도 사도 바울이 의미한 바와 같이 '율법' 즉 도덕법을 '세우고 있습니다.'
Ⅰ
1. 우리는 첫째로, 도덕법을 따라 율법을 세웁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울 사도가 지상에 살 동안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전면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훈계하신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라도 말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게 하시오' 하는 말씀을 따름으로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가르치고 이것을 기록했던 그 옛날 경건한 성도들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비하신 주님의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비하신 주님의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숨김없이 말하게 될 때 언제든지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가르치심을 어떤 제한이나 유보함이 없이 사람들에게 선포함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율법을 수립하기 위하여 매우 분명한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혀 온 많은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즉 (나쁜 포도주를 가공하는 사람들처럼)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중들의 구미에 맞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불순하게 하거나, 뒤섞거나, 질을 떨어뜨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말씀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르도록 진리를 표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우리가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율법을 선포하게 될 때 교리에 따라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의 자비하신 주님과 사도들에 의해서 율법이 전해진 그 충만함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가 그 율법을 고도로, 깊게, 길게 그리고 넓게 공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을 충분하게, 그리고 문자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원리와 마음 속의 생각, 욕구, 의도에 유의하여 선포하게 될 때 비로서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3. 그리고 참으로 우리가 율법이 가장 심오한 중요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즉, 나무가 악하다면, 그리고 마음의 성향과 기질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면, 모든 열매, 즉 모든 언행은 계속적으로 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중요한 것 만큼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이해를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보다 열심히 율법을 전하게 됩니다. 즉,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영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고찰한다면 역시 '율법은 창조 때부터 시시대대로 숨겨져온 것 이라고' 진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감추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자랑스러운 지혜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록된 글로서는 물론 율법의 정신은 더욱 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더욱 더 어두워졌습니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우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유대민족에게 있어서도 거의 동일하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그렇게 즐겨 선포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로서 자신에게 대하여도 선고를 내리게 되는 것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똑같은 저주와 똑같이 지독한 무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크게 곡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들일지라도 주님의 끊임없는 질책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이 율법을 너무나 엄청나게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결함을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된다는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그들이 단지 컵의 겉만을 깨끗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실, 그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만 드리면, 즉 외적인 정확성만 기하게 되면, 공정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등한히 해도 내적인 불결함을 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중 가장 현명한 자들에게도 율법의 영적인 의미가 너무나 절대적으로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가장 유능한 랍비의 한 사람도 시편의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만일 내 마음이 불의를 즐거워한다면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내 마음 속에서만 그렇다면, 그래서 내가 외적인 죄악만 범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여기에 대해 개의하지 않으시며', 내가 외적인 행동으로 죄를 짖지 않는 한 주님은 나를 벌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4. 아! 그러나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단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소위 기독교 세계에서도 감추어져 있으며, 적어도 그들 대다수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인 의미는 아직까지 이들에게도 역시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암흑과 무지로 가득찬 캐토릭 국가들에 있어서만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개신교들이라고 불리우는 대다수에 있어서도, 그 율법의 순수함과 영적인 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율법은 종교의 능력이 아니라 형식만을 소유하고, 자신의 눈에서만 일반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의견으로만 의롭다고 생각해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종교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마음의 종교가 없이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먹이기 위해 나누어 준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게 될 때 그들은 더욱 더 화를 내게 됩니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있는 말을 참든지 간에 우리의 영혼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서 가운데 있는 모든 말씀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발견된 모든 약속 뿐만 아니라, 모든 경고들도 다같이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배하신 모든 축복과 특권을 선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유용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잠자는 자들을 일깨우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빈약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고, 또한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고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참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그가 마침내 완전해지고 결국 그가 그것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하도록' 하기 위해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다 선포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때 참으로, 아무런 비난도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의이신 주님을 증거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세상과 화해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세히 설명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가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는 그런 주님을 높이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모든 직능을 선포하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길을 위해 사람 가운데서 택함을 받고 사람을 위해 성별 된' 우리의 위대한 대 제사장으로서, 즉 '주님의 보혈로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고 지금까지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즉 그분의 말씀과 영으로써,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왕으로서, 즉 그의 피로 사신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의 은혜를 처음 회복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는 왕으로서, 그리고 '모든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할 때까지, 즉 모든 죄를 완전히 물리치시고 영원한 의를 가져올 때까지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Ⅱ
1.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성결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즉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간에 마음과 생활에 모든 종류의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믿음 자체, 기독교적인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택인 믿음, 하나님의 역사인 믿음까지도, 단지 사랑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계속 선포해야 됩니다. 이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지만 계명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에만 이런 명예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사랑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믿음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원한 비죤속에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은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과 직무는 여전히 같은 것이네.
그 불빛은 영원히 불타오르고,
그 불꽃은 소멸되지 않네.
죽음이 없는 승리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끊임없는 선함이 넘쳐 흐르고,
영원히 찬양을 받게 되네.
2. 매우 훌륭한 일들이 믿음에 대해 언급되어 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동참자는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은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사랑과 비교하게 되면 그 모든 우수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영광이 율법의 영광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아주 적적하게 피력한 것은 사랑의 영광이 믿음의 영광보다는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보다 우월한 영광 때문에 영광을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이 영광스럽다면 남아 있는 것은 더욱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사라지기 전에 있었던 믿음의 모든 영광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목적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제정하였던 아주 일시적인 수단입니다.
3. 모든 일을 삼켜 버릴 정도로 정도에 지나치게 믿음을 찬양하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이 사랑에 대치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의 본질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은 믿음 후에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욱 생각하십시오. 창조된 순간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천사들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평가되는 믿음을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신앙, 즉 예수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소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나 특수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는 믿음이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설자리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즉 위대한 사랑의 대양 안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로운 창조주로부터 즉시 이를 받아들여 존재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4. (많은 사람들이 교묘하고 그럴 듯하게 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일반적인 의미에서까지도, 낙원에서는 설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단편적이고 상세하지 못한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기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동행했던 것이지 믿음으로 동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성의 눈은 강하고 맑았기 때문에
(태양을 바라 볼 수 있는 독수리처럼)
그리고 총명한 천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가까이서 창조자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었다네.
그때, 아담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지금은 우리가 볼 수가 없고 그 얼굴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력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이 믿음의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5. 다른 한편,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믿음이 그 당시 불필요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는 죄와 죄인들에 대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필연적으로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하여 속죄의 행위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타락 이전에는 속죄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속죄에 대한 신앙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당시에는 모든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해졌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했기 때문에 사랑이 사람의 마음 속을 채웠고, 어떤 경쟁자도 없이 인간을 지배했었습니다. 단지 사랑이 상실되었을 때에만이 믿음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인간이 타락시킨 그 사랑을 인간에게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 응답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도록 계획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그 전에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구속적인 사랑에 대한 이 확신은 '여자의 자손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맺어질 때까지는 그 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6. 그런고로, 믿음은 사랑의 율법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해서 믿음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거나 그것의 당연한 칭송을 빼앗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면에 그것의 진가를 들어내고 믿음을 적합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지혜가 부여한 바로 그 자리에 믿음을 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본래적으로 창조되었을 때 그 속에 있었던 거룩한 사랑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수단입니다. 비록 믿음 자체는 어떠한 가치가 없을지라도(어떤 다른 수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목적,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세우는 목적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에 있어서 믿음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랑의 법을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사랑에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Ⅲ
1. 그리하여 셋째로, 이것은 자연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즉, 율법을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세우는 일입니다. 사실 이것 없이 다른 모든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교리로서 율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전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율법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영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들어 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모든 보화를 더하게 하여 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안에도 만약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가 전한 율법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가리로' 보다도 하나님 앞에 쓸데없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선포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직 우리의 파멸만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2.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의 마음 속에 율법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생애에 율법이 충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한 요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바와 같이 이러한 목적에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민첩하게 성결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꾸준히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더욱 더 세상에 대해 못박히고 세상은 우리에게 못박힌 바 됩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을 일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고착시키고 우리의 애정을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여 위의 것에 집착하게 합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믿음은 모든 의와 진정한 성결을 증진시키며,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룩하고 영적인 율법을 세우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인 것입니다.
3. 그리고 보다 특수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주님의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그렇게 강하게 이끄는 동기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확신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넘친 사랑의 원리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역시 생기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랑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에 근거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랑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관찰했던 바와 같이 사랑은 부정적인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하는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다른 계명이 있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 이웃에게 어떤 악행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시간과 기회가 있는데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종류와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4. 단지 외적인 면으로만, 믿음이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율법을 성취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게 하고 모든 악한 감정으로부터 율법을 께끗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서 깨끗하신 것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모든 욕구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악하고 과격한 감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육욕적인 마음 전체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이 완전하게 역사하게 된다면 모든 선과 의와 진리로 인간을 가득 채웁니다. 믿음은 사랑의 영혼에 모든 천국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속에 계신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빛속에서 걸어가게 합니다.
5.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능력을 사용함으로 우리 자신 속에 율법을 세우도록 노력 합시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빛을 마음 속에 회상하면서, 그 빛을 우리가 끄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때 우리가 성취한 것을 단단히 붙들도록 합시다.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파괴한 것을 다시 세우지 않도록 하고, 크건 작건 간에,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것,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것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시 계속하지 않도록 하고, 또는 크건 작건 양심의 가책이 없이는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도록, 하여 어떤 것에도 유혹을 받지 맙시다. 이전에 받았던 빛을 더 증가시키고 완전케 하기 위하여 이제 믿음의 빛을 첨가합시다. 주님께서 전에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보다 깊은 의미로, 보다 온유한 양심으로, 죄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전에 주신 은사를 확신하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가 기쁨을 가지고 영원한 두려움이 없이 이것들을 분명히 확고하게 바라보며 살아 간다면 우리는 쾌락, 부귀, 칭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물 위에 뜬 거품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것도 바랄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장막 속에' 있는 것 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6. '당신은 나의 불의에 대해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내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도래하는 그 때를 위해 뱀의 얼굴을 보고 피하듯이 죄를 보고 피하도록 하십시오. 죄가 당신에게 지금 심각하게 죄악적으로 보입니까! 이 죄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얼마나 흉악한 것입니까! 다른 한편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을 지금 당신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빛 속에서 바라다 봅니까! 그러므로 지금 당신 안에서 그 뜻이 성취되도록 하고, 당신에 의해서 성취되도록 하며, 당신에게 성취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더 이상 죄를 짖지 않도록 조심하고 기도하십시오. 또한 주님의 율법의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피하십시오. 태양이 어두운 곳을 비출 때 당신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티끌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이 당신의 마음 속에 비칠 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죄를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 모든 면에서 당신이 받아 들였던 빛을 따라 살기 위해 부지런히 행하십시오! 매일 매일 빛을 받으며,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 그리스도의 영, 그분의 생명,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더욱 더 받도록 열심을 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이미 얻은 모든 지식, 사랑, 생명,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이 목격함으로 삼켜진 바 되고 사랑의 법이 영원히 성취될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속해서 전진하고 거룩한 사랑 안에서 매일매일 성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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