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제임스 D.G.던
2014-12-31 19:41:11
프롤로그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가 시작한 새로운 운동이 진정으로 세계적이며 지적으로 일관성있는 종교가 되도록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의 각 세대마다 바울의 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바울에 대한 새관점"이라 부르는 연구에 비추어 볼 때 바울신학의 전면적인 재 진술을 새롭게 시도할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다. 에드 샌더스가 재진술한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기독교 신학내에서 전통적으로 재구성해 놓은 유대교 사이의 예리한 대조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조상 때부터 내려온 종교와 바울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무엇을 믿었는가에 촛점을 맞추게 되면 바울의 신학이 그의 유대적 유산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분석이 시초부터 편파적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렇게 촛점을 맞추면 바울의 종교와 그의 조상들의 종교가 서로 이반되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들의 경우에는 편지라는 성격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이는 잘 알려진 저자가 매우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잘 알려진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의사 전달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들의 신학적 힘은 그 서신 수신자들과의 대화로서 지닌 성격과 깊이 읽혀있다. 그 서신들은 그 구체적인 대화들의 한쪽 편의 결과이며 그 주제들은 최소한 당시의 상황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바울 신학은 역사 분석과 상황에 대한 적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신의 논지의 흐름을 따라가고 바울이 의도하는 뉘앙스를 집어낼 수 있을만큼 그 구체적인 사실들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논지를 정당하게 인식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 백년동안 기록된 신약의 다른 문서들보다는 사실 바울의 서신이 우리에게는 그의 신학을 저술하기가 더 나은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은 아주 다양하고 저작성이 확실하므로 우리가 바울신학의 입체적인 모습을 세우고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 신학은 각 개별 서신들의 신학을 다 합쳐놓은 것 이상일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그 총체 이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서신서들 자체가 그 서신서들 이면에 까지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층 충만한 신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서신들을 충실하게 해명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신학을 재구성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와 그의 독자들이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을 비중있게 다루어야 한다. 바울신학을 기술하려는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바울이 그 논지들에 답변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자신의 해명이나 논지의 관점에서 그것을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바울이 반박하고 있는 일부 독자들의 논지들에 대하여 어느정도라도 인지하지 않고서는 바울의 어느 특정한 논지나 강조점의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바울 신학의 하부구조를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이야기로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의 이야기가 있고, 그 다음에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신학의 실체는 바로 그의 서신서들이 증명해주는 여러가지 다른 이야기들 혹은 수준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상호작용이 바울 신학에 역동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필자의 작업은 가능한 한 바울의 표면속으로 들어가 그의 눈을 통하여 사물을 보며 그의 사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울의 사상의 흐름에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그 사상과 대화를 시작하는데 가장 좋은가 하는 점이다. 로마서는 바울의 사상과 대화하는데 좋은 준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로마서는 바울과 그의 교회들과의 역사적 교류와 발전 과정에 덜 개입하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특질을 가진 서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서는 신학에 대한 교의적이거나 체계적인 논고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야말로 바울이 자신의 신학에 대해 기록한 가장 지속적이고 사려깊은 진술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성숙한 신학을 파악하고 그것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면 로마서를 바울 신학에 대한 우리의 진술을 형성할 일종의 받침목으로, 또한 우리의 덜 중요한 여러가지 악기들을 튜닝해주는 기준이 되는 코드로 취하는 것 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
우리는 바울 신학을 서술하는 과제를 위하여 세가지 차원에서 대화 모델을 설정하였다. 첫째는 가장 깊은 차원인 심층부의 차원인데 이것은 당연시된 모든 것을 포함하여 바울이 조상들로 부터물려받은 확신들이다. 둘째인 중층부의 차원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한 체험이고 가장 직접적인 차원인 표층부는 바울신학의 개인적인 대화의 성격이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내용들이었다. 바울 신학의 표층 차원은 그가 편지를 쓴 교회 구성원들과의 대화들인데 그런 대화들을 통해 표현된 신학은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라 신학화의 과정으로서 역동적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바울 신학은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진 대화였기 때문에 각 차원들의 균형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심층부의 차원
바울 신앙은 많은 부분이 그의 조상들의 신앙과 경건안에 머물러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조상들의 신앙과의 결별이 아니라 그 성취로 생각하였다. 물론 그의 신앙의 실천은 조상들의 신앙의 실천과 다른 모양을 띠게 되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다른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신학이 제2 성전 유대교의 네가지 중요한 기둥들인 유일신론, 선택, 토라, 성전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한 분 주님으로 높이 들리우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한 분으로 고백된다. 유일신론은 예수로 말미암아 더 한층 분명하게 정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은 단순히 창조주 심판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신학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한 분 하나님이며 유일신론은 최후의 준거점이었다. 바울신학에서 핵심개념인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다. 바울에게 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에 의해 지칭된 행위와 과정의 일부였다. 바울이 이신칭의라는 기본원칙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가 아니였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이스라엘에게 이신칭의는 그들 신앙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서 9-11장의 통렬한 진술은 바울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것은 특별한 선민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이야기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정의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정의된다는 것, 바울은 이런 근본적 확신을 토대로 삼아 자신의 신학을 펼쳐나간 것이다. 물론 바울의 복음은 그의 동료 유대인들의 이해에 도전하였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그런 특별한 지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의 결과이며 또 그 선택이 이스라엘과 이방들의 관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이스라엘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 신학의 주된 줄기중 하나는 율법과의 씨름인데 바울 신학에서 율법의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울법의 여러 다른 기능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죄를 정의하고 범죄를 단죄하는 율법의 첫번째 기능은 바울 신학 전체에 걸쳐 일관된다. 둘째로 율법은 믿음으로향하게 하는 것(믿음의 법),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의 의거하여(그리스도의 법) 성령을 따라 행하는 행위의 척도이다. 이런 이해는 율법이 마음에 씌여질 것이고 새 마음과 새 영이 주어질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소망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을 율법의 이 기능을 계속해서 온전하게 긍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점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서술할 때 율법의 긍정적 역할을 보존하고 바울 자신의 신학화에 그토록 근본적이었던 바울이 물려 받은 유산과의 대화를 재개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 신학에서 분쟁의 대상이 된 것은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인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치리하는 사회적 기능이었다.
바울은 이 기능이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수행된 한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런 주장은 율법의 자리에 그리스도를 앉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결국 바울이 율법들을 구별하여 어떤 것들을 긍정하고 어떤 것들은 폐기하거나 평가절하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울이 폐기하거나 평가절하한 율법은 이스라엘을 이방과 구별시키는 특징을 가진 율법들(할례, 음식법, 절기법)과 그리스도께서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 법(성전법, 제사법)이었다. 바울 신학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율법의 기능은 죄의 앞잡이로서의 율법의 역할이다. 이것은 단순히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넘어서 죄의 권세에 이끌려 실제로 범죄를 야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능인데 바울은 율법에 그런 역할을 돌리는 것은 율법을 죄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율법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한 요지는 율법 자체는 생명의 세력도 아니고 사망의 세력도 아니며 단지 율법이 더 큰 세력이 죄의 권세나 성령에 의해 제어될 때만 사망의 수단이나 생명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통적 신앙중에서 전적으로 혹은 거의 폐지되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성전이다. 성전과 제사제도 거룩과 정결 같은 범주들은 바울 신학의 요소들로 여전히 사용되지만 오직 공동체화되고 탈신성화된 형태로만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제2 성전기 유대교에서 네번째 기둥의 촛점이 성전에서 성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며 이런 변동이 랍비 유대교의 출현을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바울도 성경을 토대로 자신의 신학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으며 성경에서 자신의 주된 개념들과 용어들을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다시금 바울 신학을 진지하게 다루고 그 신학과 대화를 하려면 바울의 신학 및 기독교 신학이 이스라엘의 성경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중층부의 차원
바울 신학의 중층 차원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된다. 바울 신학은 그의 회심을 지렛목으로 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이스라엘이라는 차원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다른 방향을 향하여 나아갔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는 바울 신학의 성장과 완숙의 과정에 계속하여 중심축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계속하여 바울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분별하고 판단하는데 중심적인 판별기준으로 작용하였으며 바울이 과거로 부터 물려받은 인정된 토대위에 세운 것이 제대로 정렬되어 있는지를 재는 다림추였다.
그리스도는 바울이 조상들에게 받은 유산을 좀 더 분명히 정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토라와 성경이 그 자신 및 교회의 신앙과 삶에서 지니는 여러 차원의 의미들을 평가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잣대였다. 바울에게 토라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으로서의 율법이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그리스도, 인간의 원형으로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의 특성을 규정하는 자로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는 토라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리는 척도로서 또 그리스도의 법을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성경도 마찬가지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바울이 나중에 구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던 베일을 벗겨주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바울의 전 신학의 지렛목 역할을 하였다. 바울에게 성경을 보는 눈을 뜨게 해준 것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바울이 믿고 전했던 분은 성경의 그리스도였다. 요컨데 우리는 바울 신학의 두 차원, 두 이야기가 이스라엘 이야기와 그리스도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둘 간의 상호작용은 바울 신학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전자는 후자를 압도하지 않고 후자는 전자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중심성은 그의 유산을 분명히하고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하는데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바울 신학의 모든 것을 꿰는 실이며 촛점을 잡아주는 렌즈이고 하나의 통일체로 엮는 접착제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였으며 이런 묵시론적 시각, 이런 종말론적 변화는 바울 신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을 만들어 내었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관계의 변화, 미래와 현재의 관계의 변화를 통해서 개인의 역사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감점과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끝점 사이에 매달려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전망내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바울은 이것을 초대 교회의 전승에서 물려받았으며 자기 신학속에서 독자적으고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울 특유의 기독론적 계기가 된 것이다. 바울의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미 행하신 일로 인하여 종말런적이었다. 요컨데 바울에게 기독교는 그리스도이다. 바울의 신학을 서술하거나 바울과의 대화를 계속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3) 표층부의 차원
바울이 도입한 핵심 용어들은 모든 기간 내내 기독교 신학을 형성한 가장 혁신적인 특징들이다. 무엇보다도 복음, 은혜, 사랑이란 말이 그것이다. 이 세 단어는 기독교 특유의 용법을 통해서 다른 단어들로는 불가능한 기독교의 범위와 성격을 요약하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 세단어의 기독교 특유의 용법은 모두 전적으로 바울에게 빚진 것이다.
바울의 신학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요소들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인간 실존의 영적 차원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극히 물질주의적인 생물학과 인류학에 근본적인 도전을 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창조와 구원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바울의 인식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가 아니라 그가 창조한 피조물과 인간에 대한 관계속에서 알려지게 되고 인간은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만 스스로를 잘 알 수 있으며 인간과 인간 사회는 서로 얽혀 서로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에 대한 바울의 이해에(자신의 피조물 및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서 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인간의 책임으로서의 의)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울이 주장한 이신칭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을 신적인 권리로 착각하고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축복에 참여할 소망이 없다고 본 인종주의 또는 협소한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칭의를 개인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추구하는 것으로 본 전통적 가르침을 통해 오랫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던 바울의 가르침의 한 차원이다. 이신칭의가 말하려던 것은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게 오직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었다.
바울 신학에서 나타난 특징은 말로 명로하게 표현된 신학과 아울러 체험된 신학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체험과 합리성, 영과 이성을 상반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바울이 말로 명료하게 표현하고자 했고 독자들도 그 실존적인 진리를 깨닫고 살아갈 수 있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은 그와 그의 개종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체험했던 것이었다. 체험된 신학과 말로 표현된 신학간의 상호작용과 연관성은 바울 신학에서 그 핵심적 요소로 여겨져야 한다.
바울의 교회론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는 매우 강력하다. 이 이미지는 교회에서 개인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 사역의 다양성, 권위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시시한다. 바울은 교회들이 적대적인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또 두 세게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여 효과적인 행동준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상호존중을 바탕으로한 신뢰, 책임을 수반한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던 사랑에 호소함으로써 교회의 갈등과 파닫을 수숩하고 거듭하여 연합을 시도하였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상아탑속의 신학이 아니라 자신이 전도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씀으로 신학을 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의 신학 작업은 언제나 실제적인 일들과 인간 관계의 작은 일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신학은 처움부터 끝까지 일상 생황의 열쇠인 복음의 뜻을 밝히고 일상에서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인 답게 살게 하려는 시도였다.
[평가]
저자는 샌더스에 의해 촉발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측면에서 바울 서신을 새롭게 읽고 해석하고 있다. 특히 그의 해석방법은 바울과의 대화 모델인데 여기서 저자는 세 가지 차원의 대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바울 신학의 하부구조를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이야기로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보고 그 위에 중층부는 예수의 이야기가 있고, 그 다음에 표층부로서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의 이런 해석 방법론은 바울 서신을 좀 더 포괄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바울 신학의 하부구조인 심층부의 차원을 많이 강조하는데 이는 아마도 샌더스의 새관점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바울 신앙은 많은 부분이 그의 조상들의 신앙과 경건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조상들의 신앙과의 결별이 아니라 그 성취로 생각하였다고 주장한다. 제2 성전 유대교의 네 가지 중요한 종교적 기둥이 유일신론, 선택, 토라, 성전인데 저자는 바울 신학도 이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던의 입장은 이런 심층부의 차원들은 바울 서신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공리와 같이 바울과 독자들 사이에 공유된 전제라고 보는 것이고 이런 근본전제를 간과하고 바울 서신을 해석하면 바울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바울신학을 구약계시와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바라보려는 것이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 계시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관점일 것이다.
저자는 바울 신학의 중층 차원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그는 바울 신학은 그의 다메섹 회심을 지렛목으로 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방향전환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는 차원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다른 방향을 향하여 나아갔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는 계속하여 바울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분별하고 판단하는데 중심적인 판별기준으로 작용하였으며 바울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인정된 토대위에 세운 것이 제대로 정렬되어 있는지를 재는 다림추였다는 점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바울이 조상들에게 받은 유산을 좀 더 분명히 정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바울신학의 하부구조인 4대 기둥들이 여전히 바울 신학의 기초이지만 바울은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 계시를 통하여 그것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정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중심성은 그의 유산을 분명히 하고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해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울 신학의 모든 것을 꿰는 실이며 촛점을 잡아주는 렌즈이고 하나의 통일체로 엮는 접착제라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바울신학의 중층부인 그리스도라는 렌즈는 하층부인 유대교의 핵심 유산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저자는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였으며 이런 묵시론적 시각, 이런 종말론적 변화는 바울 신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을 만들어 내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저자는 바울 신학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중심성이 바울신학의 하부구조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 기초하면서 그것의 방향을 정립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바울신학의 표층부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은 바울의 신학 작업이 선교 목적을 위한 편지로 이루어진 사실을 잘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울 서신들의 경우에는 편지라는 성격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는 잘 알려진 저자가 매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잘 알려진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의사 전달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바울 서신들의 신학적 힘은 그 서신 수신자들과의 대화로서 지닌 성격과 깊이 읽혀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서신의 논지의 흐름을 따라가고 바울이 의도하는 뉘앙스를 집어낼 수 있을 만큼 그 구체적인 사실들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논지를 정당하게 인식할 소망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저자는 바울 신학이 가진 심층적, 중층적, 표층적 차원의 균형 있는 대화를 통해 점 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바울 신학에 접근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런 접근 방법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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