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세계복음주의 지형도 -이재근
2014-12-12 15:40:00
2014년 6월 17일(화) 서울시 마포구 소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20세기 세계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라는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강사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복음주의 석학 브라이언 스탠리(Brian Stanley)를 사사한 이재근 박사(에딘버러대 Ph.D, 합동신대원 외래교수). 이 박사는 그동안 미국 IVP에서 나온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총5권)를 번역하여 한국에 영미 복음주의권 역사를 계속해서 소개해 왔으며 이번에는 시리즈 중 한 권인 브라이언 스탠리의 『복음주의 세계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기독교문서선교회 역간)를 번역하였다.
1주. 세계 복음주의의 지형도
복음주의의 정의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한국 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이지만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수주의로, 어떤 사람에게는 진보주의, 심지어는 복음을 떠난 신앙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한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영미권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교수들 간에도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우선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한다.그렇지 않으면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된다. 그래서 복음주의라는 말 앞에는 ‘미끄러운’(slippery) 혹은 ‘까다로운’(tricky)이라는 표현이 붙는다.
원래 ‘복음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간단하게 정의할 수도 있는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복잡해진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매우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사용했다. “복음주의를 말할 때는 몇 세기의 복음주의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복음주의 역사 개요
16세기에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먼저 선점한 그룹은 루터파였다.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 1:16-17을 가지고 이신칭의를 설명하며 이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개신교라는 표현은 오늘날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저항자)로 불린다. 하지만 루터파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세울 때 정한 이름은 독일어로 ‘Evangelisch Kirche’(Evangelical Church)였다.
교회사 가운데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많은 유럽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정착하며 자신의 교회를 세웠다. 루터파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교단 이름을 정할 때 사용한 명칭은 ‘Evangelical Lutherlan Church of America’(ELCA)였다. 그런데 이 교단이 19-20세기를 지나고 자유주의 논쟁을 겪으면서 여기서 “Lutherlan Church Missouri Synod”(LCMS)라는 보수교단이 갈라져 나왔다. 현재 미국 ELCA는 ‘evangelical’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진보적인 교회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의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라는 책은 『복음주의 신학입문』이라기보다는 『개신교 신학입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evangelical’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듯 복잡하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주의를 보수적이고 경건한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18세기 이후 영미 개신교 부흥과 관련이 있다. 웨슬리 형제(John & Charles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등이 주도했던 영국의 감리교 운동은 건조하고 예전적이고 위계적인 교회질서를 거부하고 가슴의 신앙, 민중의 신앙, 체험의 신앙을 주장하였다. 미국에서 같은 류의 운동을 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다. 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음주의 신앙이 최초로 형성되었다. 이것이 영국에서는 부분적으로, 미국에서는 지배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찰스 피니(Charles Finney), D.L. 무디(D. L. Moody),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등이 등장하였다. 19세기를 소위 ‘위대한 세기’(great century)라고 부른다. 이 당시에 선교를 나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자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러 선교가 크게 확장되고 복음주의 신앙이 전파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대결이 있던 시대이다. 성경비평과 진화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기독교 내부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지성주의의 영향으로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앙을 떠나게 되고 많은 대학들도 신앙을 떠나게 된다.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논쟁은 40-50년 정도 이어지고 1920년대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다다른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갈라져 나오게 된 시점이 1929년이다. 이를 기점으로 근본주의는 미국 기독교 내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고립되게 된다. 근본주의자들은 현대주의자들에게 패하고 학교라는 준거를 잃고 자신만의 신학교를 따로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40년대가 되어 근본주의 내에서 “원래 기독교는 이렇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게토화되지도, 반지성적이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젊은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20-40년대에는 세상 학문과 세상 학교를 거부하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면, 그 이후에는 성경을 철저히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세상 학문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 헨리(Carl Henry)나 헤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일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복음주의가 반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신복음주의’(new-evangelicalism)라고 한다. 풀러 신학교, 트리니티 신학교, 고든콘웰 신학교가 이러한 흐름에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활동을 위하여 만든 언론이 바로 크리스채너티투데이(Christianity Today)다. 여기에 재정적 지원을 한 사람이 빌리 그레이엄이다. 물론 빌리 그레이엄은 신복음주의자라고 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여기에는 공헌하였다. 지금은 이것을 굳이 신복음주의라고 하지 않고 그냥 복음주의라고 한다.
수용된 정의: 데이비드 베빙턴의 사각형
이하 내용 역시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20세기가 되면서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이전까지는 복음주의 정의가 영미권 내에서 있었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복음주의라는 말은 초교파적인 말이고 특정 신학 전통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주의라는 말 뒤에는 ‘운동’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이 적합하다. 변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주의는 활동성이 있고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한 바운더리를 정해 놓는다. 이에 관한 학자들의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 중 복음주의에 관한 합의된 정의를 내린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베빙턴(Davin Babington)이다. 베빙턴이 내린 정의에 대한 반론도 있었지만 그의 정의는 마크 놀(Mark Noll),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브라이언 스탠리 등의 학자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 수용된 정의를 ‘데이비드 베빙턴의 사각형’이라 한다.
베빙턴의 네 가지 사각형은 성경주의, 회심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행동주의다.
1) 성경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2) 회심주의는 ‘회심을 강조하는 것’인데 여기서의 회심은 종교를 바꾼다는 개종의 의미와 마음을 돌린다는 의미를 포괄하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믿게 되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인 사람이 마음을 돌이키는 갱신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독일 경건주의와 18세기 영미 복음주의는 관련이 깊다.
3) 십자가 중심주의는 ‘복음 전도에서 선포되는 핵심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거슬러 올라가면 대속의 문제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죄와 타락의 문제를 지적하게 된다. 소위 4영리라는 것이 오늘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것이 복음주의의 전형적인 전도방식이었다.
4) 행동주의는 ‘복음을 통해 회심한 것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되어서 그 사람도 회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전도와 선교를 매우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복음이 전파되고 사회가 갱신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까지의 복음주의는 이처럼 총체적이었다. 이 시기까지는 복음 전도와 사회 변화 사이의 분리가 없었다. 금주 운동, 노예 해방 운동, 부분적인 여성 권리 신장 운동 등이 나타났다.
특별히 행동주의와 관련하여, 다른 종류의 개신교 신앙은 행동주의적이지 않았다. 특별히 국교화된 곳에서는 정통은 잘 지켜져 왔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없었다. 남아프리카의 개혁교회나 미국 남부지역의 장로교 신학은 신학적으로는 탁월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 신학이 노예제도 등 비인간적인 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행동주의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 열심히 나가고, 헌금 열심히 내고, 교회생활 열심히 한다는 면에서는 행동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일면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가 갖고 있던 행동주의와는 다르다.
베빙턴이 정의한 복음주의의 네 가지 요소 중에서 나머지 세 개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성경주의’다. 나머지 세 요소는 성경에서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변증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양상이 바뀌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신앙고백을 확인해 보면 1항이 ‘성경 66권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과 행함의 규범이 된다’라는 내용으로 대동소이하게 나온다.
강의 도중에는 존 스토트와 같은 영국 복음주의자, 미국 내의 복음주의 지형도, 베빙턴의 복음주의 정의의 범주, 복음주의와 미국 역사, 사상 및 활동과의 관계, 복음주의적 기준에서의 한국의 기독교 운동 등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이 교수는 교회사가로서의 식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복음주의와 미국 역사에 관한 설명이었다. “1940년대에 근본주의권에서 신복음주의자들이 이탈한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신근본주의로 규정하고 연대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배타주의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지만 내부로는 계속 연대한 후 정치에 참여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제리 폴웰(Jerry Falwell) 등의 기독교 우파 운동이다. 이 흐름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2주. 영미 복음주의는 어떻게 세계기독교로 부상했는가
“20세기 중반 이후 복음주의의 중심축은 비서구권으로 넘어갔다.”
복음주의 역사 연구의 시작
20세기 들어 복음주의 신앙을 가장 지적인 형태로 보존한 단체가 있다면 IVF다. 그리고 학문적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에 기여한 사업 중 하나가 출판업이다(IVF의 출판사는 IVP). 영국 IVP는 미국 IVP와의 협력 하에 2002년도에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출판을 기획하였다. 미국의 1730년대 1차대각성 시기를 복음주의의 태동기로 보고 이후 300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획이었다. 이를 위해 스코틀랜드 스털링대학교의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과 미국 노틀담대학교의 마크 놀(Mark Noll)을 시리즈의 총편집자로 위촉하였다. 베빙턴과 놀이 총서를 기획하면서 초빙한 학자는 잉글랜드 오픈대학교의 존 울프(John Wolffe),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학교의 제프 트렐로어(Geoff Treloar),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의 브라이언 스탠리(Brian Stanley)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일반 학계에서도 권위 있는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기획을 통해 복음주의 역사 가운데 인물, 사건, 사상 등에 따라 시기를 분류하여 적임자에게 집필을 맡기고 한 권씩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 마크 놀이 쓴 제1권 『복음주의 발흥』(The Rise of Evangelicalism)을 시작으로 2005년 데이비드 베빙턴이 쓴 제3권 『복음주의 전성기』(The Dominance of Evangelicalism), 2007년 존 울프가 쓴 제2권 『복음주의 확장』(The Expansion of Evangelicalism), 2013년 브라이언 스탠리가 쓴 제5권 『복음주의 세계확산』(The Global Diffusion of Evangelicalism)이 출간되었다. 제프 트렐로어가 쓸 예정인 제4권 『복음주의 분열』(The Disruption of Evangelicalism)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로 기획 및 출간하고 있는 책 중 1-5권이 이에 해당한다.)
선교를 통한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파
세계화라는 말은 주로 정치, 경제 영역에서 많이 쓰인다. 하지만 한 지역의 신앙이 전세계적으로 유행이 된다는 면에서 복음주의 역시 세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주의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다가 18세기 부흥운동을 기점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복음주의가 등장한다. 이 복음주의 신앙은 영국의 제국주의 진출과 함께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퍼졌다. 이 과정을 ‘선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제국주의적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이 이용되기도 했지만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선교와 제국주의라는 주제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세속화
역사라는 것은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 시점을 정해서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틀을 세우고 제대로 된 논의를 하기 위해서 특정 시점을 잡는데 그러한 시점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이다. 20세기에는 세계적인 충격을 준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러한 시점 중 하나다. 즉 20세기를 가르는 가장 큰 기점을 1945년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45년 이후 서구권에서는 더 이상 기독교 세계라고 할 수 없는 세계가 나타났다. 신학에서는 위기신학이 등장하였다. 신학을 긍정적으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한다. 사상의 큰 변혁이 일어났다. 인간의 재능과 힘을 자랑할 수 없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전까지 있었던 ‘기독교세계’(Christendom)라는 관념은 붕괴되었다. 이 기독교세계라는 관념은 313년에 시작되었다. 전세계적 현상은 아니지만,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유렵에서 기독교세계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세계라는 것은 어원상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Christ + Kingdom)라는 뜻인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어거스틴주의, 루터파, 칼빈주의 등 주류 개신교 내에서는 기독교세계를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보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313년 이후의 '콘스탄틴적 기독교'를 두고 기독교의 순수성은 끝났다고 보는 아나뱁티스트도 있다. 여하간 313년 이후 유럽 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가 되었다. 그 안에서 정치와 종교 간 우위권을 다투는 일이 계속해서 있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손을 놓은 적은 없었다. 이 흐름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
(표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하지만 313년 이후 기독교의 순수성은 끝났다고 보는 아나뱁티스트도 있다." 라는 문장을 "이와 반대로 313년 이후의 '콘스탄틴적 기독교'를 두고 기독교의 순수성은 끝났다고 보는 아나뱁티스트도 있다."로 수정합니다. - 편집자 주)
하지만 (정확하게 이 연도라고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1945년을 기점으로 기독교세계는 붕괴한다. 유럽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기독교인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특히 1968년을 기점으로 기독교세계는 완전히 붕괴하여 유럽에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성장할 수 없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물론 아직도 유럽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제도적으로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물려받기는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일 뿐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냐 물었을 때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유럽은 더 이상 기독교국가가 아니다. 교회가 문을 닫고 이슬람 사원이나 클럽 등으로 변하는 예가 이러한 양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맑시즘 등의 급진적 사상이나 축구 등의 스포츠가 종교를 대체하게 되었다.
미국의 세속화
미국의 변화는 유럽과는 다른 면이 있다. 유럽은 실제적으로 미국보다 세속화가 빠르지만 그럼에도 전통을 유지한다는 면에서는 계속해서 기독교적인 색깔을 갖는다. 태어나면서 종교세를 국가에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기독교 신앙이 내면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명목상으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버리기는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은 유럽보다는 덜 세속적인 국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법적인 면에서 보면 미국은 처음부터 기독교 국가였던 적이 없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선언한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국교를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정헌법 제1조에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특정 종교 교파를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체계에서는 없었던 종류의 서구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그 기원이 세속적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미국을 하나님의 선택받은 국가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미국은 스스로 기독교 국가를 표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기원이 세속적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세속화가 유럽보다 늦추어진 것은 미국 역사 가운데 많은 부흥(부흥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흥은 세속화의 물결을 적절하게 제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신학적 자유주의와 세속적 무신론의 영향으로 지성적 영역에서 기독교인들이 발언할 수 없게 된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을 갖고 고립되어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후에 근본주의권 내에서의 반성으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신복음주의 운동이 있기도 했지만 이것이 미국의 신앙을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지켜냈다고 볼 수는 없다. 유럽의 세속화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역시 세속화는 대세가 되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 지형의 변화
1945년을 기점으로 서구 기독교가 무너졌지만 이를 뒤집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비서구기독교가 등장한 것이다. 비서구기독교의 등장속도를 통계로 보았을 때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에서 일어난 것 이상으로 크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인 수가 급증하여 서구권 기독교인 수를 앞지른 것이다.
(※ 이재근 교수가 강연을 하며 화면을 통해 제시한 “대륙별 기독교 인구 및 인구대비 기독교인 비율 변화” 자료에는 1800년 대륙별 기독교 인구는 유럽(러시아 포함) 1억 7170만(91.8%), 북아메리카 1490만(92.0%), 남아메리카 560만(35.0%), 아시아 840만(1.4%), 아프리카 430만(4.8%)이었다. 1900년에는 유럽 3억 6820만, 북아메리카 6000만, 남아메리카 5900만, 아시아 2080만, 아프리카 880만이었고 2008년에는 유럽 5억 5640만(76.7%), 북아메리카 5억 3020만(95.0%), 남아메리카 2억 2040만(66.4%), 아시아 3억 5500만(9.1%), 아프리카 4억 2370만(47.7%)이었다. 오세아니아 지역은 화면을 통해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 교수는 통계에서 서구권 기독교 인구비율이 높게 나온 이유에 대하여, 이 통계가 교회에 등록된 명부를 가지고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제도적으로는 기독교적인 많은 서구권 국가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제 기독교인의 수는 통계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즉 이 점에서는 제도적으로는 기독교적이지 않으면서 복음전도와 개인적 회심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로 들어오는 비서구권의 통계가 서구권의 통계보다 실제 상황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통계로 나타난 것 이상으로 비서구기독교의 약진이 두드러진다고도 볼 수 있다.)
1800년에는 전형적 기독교인(Typical Christian)이라고 하면 영국에 있는 (백인) 29세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전형적 기독교인은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여성일 것이다. 백인이기보다는 흑인, 남성이기보다는 여성이다. 2000년 동안 있었던 현상을 뒤집는 일이 지난 50년 사이의 역사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비서구권으로의 이동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의 『신의 미래: 종교는 어떻게 세계를 바꾸는가?』라는 책이 있다. 필립 젠킨스는 미래학을 하는 학자인데, 자신의 주제를 기독교와 연결지어 작업하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The Next Christendom』(다음 기독교세계)이다. 유럽은 더 이상 기독교세계가 아니다. 필립 젠킨스는 여기서 ‘다음 기독교세계’로서 비서구기독교에 주목을 하는 것이다.
비서구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1970년대부터 나왔다.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라는 역사학자가 있다. 마크 놀은 그에 대하여 “20세기 후반의 모든 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앤드류 월스는 비서구기독교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전세계에 제시한 학자다.
그는 원래 옥스퍼드 출신의 학자이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로서 1970년 시에라리온에 파송을 받는다.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신학교에 가서 교수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전공은 초대교회사였다. 그런데 그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큰 딜레마를 겪게 된다. 그는 옥스퍼드나 에든버러에서 배웠던 체계를 가지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월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해하는 방식, 세계관, 토대가 달랐던 것이다.
앤드류 월스가 성장했던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 분위기는 지적 정합성을 강조하고 세상의 상식선에 타협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나 영적 체험 등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초대교회에는 분명히 기적이 있었지만 이후 서구의 시각에서 기적은 합리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월스가 교회사를 가르칠 때 아프리카 사람들은 기적과 같은 부분을 좀 더 강조하면서 받아들였다. 월스가 강조하고자 하지 않은 부분을 아프리카 사람들은 강조하여 받아들이고 정작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덜 강조하며 받아들였던 것이다. 월스의 고민은 초대교회와의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20세기의 학문적 틀을 가진 선교사들이 전하는 기독교가 현대의 아프리카 교회보다 오히려 덜 성경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계몽주의의 등장 이전에 서구 사람들은 영적 존재와 기적에 대해 믿었다. 하지만 계몽주의 이후 서구인들은 더 이상 그러한 것을 믿지 않는다. 성경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옴에도 잘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인 것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내용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실제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를 경험하며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스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선교사를 그만두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에버딘 대학교에서 비서구기독교연구소를 세운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종교학자 및 시에라리온의 학생, 나이지리아 및 가나 학자들을 초빙하여 집단연구를 시작한다. 이것이 비서구기독교학의 시작이다. 문헌을 찾아내고, 통계 및 문헌을 만들어내어 아카이브(archive; 기록 보관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에버딘 대학교의 재정 문제로 인해 문을 닫고 에든버러 대학교로 넘어와서 정착한다. 그러면서 이 연구는 학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크 놀 같은 학자 역시 월스의 연구를 보고 기독교 흐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다.
비서구기독교의 복음주의적 특징
앤드류 월스가 경험했던 기독교는 어떠한 기독교인가. 그 기독교는 우리의 기존 사고방식과는 관계 없는 이단적 기독교인가. 귀신, 영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가난, 질병,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체험적 신학. 이것은 이단적 신학이 아니다. 오늘날의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이러한 것은 미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것이 오히려 성경적 기독교와 가까울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1)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2) 체험과 감정을 중요시하고, 3) 십자가를 강조하며 삶의 눈물과 고통을 감싸 안고, 4) 행동하는 신앙, 즉 뜨겁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결국 월스가 경험했던 사람들은 복음주의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 이후에 유럽은 더 이상 선교를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도 믿지 않을뿐더러 다원적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에 회의를 품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도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선교를 하지 않게 되었다. 선교한다는 것은 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고 이는 현대 유럽인들에게는 무례한 행동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전해졌던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가 아니었다. 18세기 이래로 이어진 복음주의는 19세기 세계 선교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19세기 내내 선교사들은 세계 각지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것을, 회심을 경험할 것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을, 열심히 전도할 것을 가르쳤다. 1960년대 이후 유럽 선교사들은 모두 선교지를 떠나게 되었지만 이미 오랜 세월 선교지에서 가르쳐 내려온 것이 있었다.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뜨거웠다. 그리고 오히려 유럽을 전도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것이 필립 젠킨스가 말하는 핵심 중 하나다. 유럽에 있는 기독교가 복음주의 신앙을 포기했을 때 복음주의 신앙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복음주의 신앙의 세계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에 있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을 여전히 유지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계 복음주의 기독교의 선교는 역사적으로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고 다시 미국에서 영국으로의 역선교(riverse mission)가 일어나는, 즉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19-20세기를 거치며 세계적인 선교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복음주의 신앙이 전파된 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역선교가 이루어진다. 현재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많은 선교사는 흑인이거나 아시아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선교가 발생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통신혁명, 교통혁명, 영어의 세계화, 이민의 증가 등의 요인이 있다.
보론: 한국 선교에 관해 이해할 때 주의할 점
한국에서 일어나는 선교운동은 세계 선교학에서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다. 한국의 선교운동은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선교운동이 세대주의 신학과 결합하게 되면 교회보다 이스라엘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한국에서 유명한 것은 백투예루살렘 운동이다.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에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복음의 서진’이다. 가장 서쪽에 있는 이스라엘을 복음화하기 위해 동쪽에 있는 나라를 활용한다는 생각도 여기서 나온다. 이스라엘을 복음화하기 위한 나라로 중국을 설정하고 그 중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한국을 설정하는 것이다.
현대 선교학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전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흐름은 한국이나 중국이 아니다. 오히려 남쪽(남반구)에 있는 기독교화된 국가들이다. 예를 들어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대륙) 사람들을 복음화하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 즉 아프리카의 무슬림 지역과 세속화된 유럽을 복음화하는 것이 목표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사람들은 전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지만 대륙 내에 있는 명목화된 로마가톨릭 신자들을 복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대륙 내에 전도할 사람이 많기 때문에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지금 (외부로 선교를 나가는) 통계를 보면 한국의 선교사들이 전세계로 진출하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타나는 흐름은 하나의 국지적인 흐름이고 전세계적인 선교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3주. 20세기 영국과 미국의 사뭇 다른 복음주의 발전 양상
미국 복음주의의 역사적 발전
1945년, 즉 전쟁이라는 분수령을 기점으로 해서 세계의 사조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분수령이 되는 정확한 기점은 1947년이다. 당시 미국 내 근본주의 진영이 고립되어가고 공격적으로 바뀌는 것에 대하여,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라는 반성을 하는 젊은 근본주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가서 학문과 지성과 문화를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이 젊은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을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고 부른다.
당시 북침례신학교 교수였던 칼 헨리(Carl Henry)는 1947년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라는 책을 썼다. 원서 제목은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현대 근본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다. 제목을 통해 칼 헨리가 의도한 것은 근본주의적 신앙의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에 대하여 진취적인 기독교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교수가 되기 전 칼 헨리는 이미 보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는데 당시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일반 학계를 기피하고 성경학교나 아주 보수적인 학교에서만 공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칼 헨리는 복음주의가 보수주의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학문적으로도 지적 정합성이 있고 시대를 선도하는 학자들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일반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으며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칼 헨리와 함께 활동한 사람으로 해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가 있다. 해롤드 오켕가는 보스턴에 있는 파크스트리트교회(Park Street Church)의 담임목사였다. 해롤드 오켕가는 칼 헨리 등의 후원을 받아 전미복음주의협회(NAE, National Association Evangelicals)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ACCC(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로 대변되는 근본주의 진영과 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로 대변되는 에큐메니컬 진영을 모두 반대하였다.
칼 헨리와 해롤드 오켕가는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후세대를 키우기 위해 1947년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한다. 이 기관은 처음에는 복음주의학문연구소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 라디오 전도자 찰스 풀러(Charles Fuller)가 개입하여 자금을 지원하면서 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찰스 풀러는 이 학교의 이사장이 된다. 풀러 신학교에는 찰스 풀러(창립자이자 이사장), 해롤드 오켕가(총장), 칼 헨리(조직/윤리), 해럴드 린셀(Harold Lindsell, 교무/역사), 윌버 스미스(Wilbur Smith, 변증), 에버릿 해리슨(Everett Harrison, 신약) 등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후 조지 래드(George Ladd) 같은 사람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복음주의 운동을 전파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바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지성적인 복음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복음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빌리 그레이엄은 처음에 YFC(Youth For Christ) 간사로 집회를 시작하고 이후 1948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 협회(BGEA, 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창설하였다. 이후 1949년 LA집회(국내), 1954년 런던집회(해외), 1955년 뉴욕집회(에큐메니컬 협력) 등을 성공적으로 이루며 세계적인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빌리 그레이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빌리 그레이엄이 다른 사람보다 차별화되는 것은 그가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무디(D. L. Moody) 등 선배 전도자를 포함하여 지구상의 누구보다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이크, 건축, 방송기술, 위성 등의 매체 관련시설 발달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특별한 점은 20세기에 외부에 노출된 수많은 전도자(부흥사) 중에 이례적으로 재정적, 성적, 윤리적 스캔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부흥사들이 스캔들로 무너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이 신복음주의 운동의 언론 역할을 한 것이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다. 당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목표는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당대의 이슈를 무시하지 않고 학문적 변증을 할 수 있는 글을 만들어내고,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복음을 제시하고 초교파적인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었다.
영국 복음주의의 발전
‘신복음주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미국 20세기 기독교 역사 가운데 나온 용어다. 영국에서는 미국과 달리 분리하는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온건하고 균형적이다. 역사적으로도 영국 성공회는 중도적 입장을 취해 왔다. 교단 내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신학을 하면서도 교단 내에서 공존한다. 전쟁 이후 복음주의권 내에서 자유주의적 복음주의 세력이 이탈하고 50년대 이후에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지적이고 세련된 복음주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영국 복음주의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존 스토트(John Stott)와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다. 1950년 6월 올소울즈교회(All Souls Church) 교구 사제로 취임한 존 스토트는 1956년 『근본주의와 전도』(Fundamentalism and Evangelism)를 출간한다. 영국판 신복음주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스토트는 교회와 사회의 중심부를 침투하는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균형 잡힌 형태의 전도를 말하고 있다. 제임스 패커는 1958년에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여기서 근본주의는 미국식 근본주의가 아니라 역사적 정통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 복음주의에서의 성경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책의 논지다.
영국 복음주의는 영국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장로회를 중심으로 발달했지만 비국교도의 흐름도 있다.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은 성공회의 개혁이 너무 온건하고 중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국교도로 남아 있었다. 종교개혁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나온 것인데 영국 내에서 기존 질서를 지키면서 개혁을 하기를 원하는 성공회와 달리 청교도들은 좀 더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비국교도들은 제도권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나 국가에 대한 저항과 같은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했다. 이러한 개혁 성향은 19세기 이후 진보적 사상을 빠르게 수용하는 것으로 작용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와 18세기 초기 복음주의를 이끌었던 감리교와 청교도 그룹은 20세기가 되면 복음주의 내에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진보적 그룹이 된다. 영국 내에서 진보그룹이 모였던 청년학생단체인 SCM(Student Christian Movement)가 있다. 영국에서 IVF가 활동했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가 비국교도에게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SCM은 계속해서 비국교도 중심으로 활동하며 IVF의 대척점의 위치에서 신학적 진보로 남아 있게 된다.
비국교도 중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는 조금 예외적인 현상이다. 1960년대 영국 복음주의의 대표주자는 비국교도인 로이드 존스와 성공회인 존 스토트였다. 당시 영향력이 컸던 것은 로이드 존스였다. 로이드 존스에 대해 분리주의자라는 평가가 있지만 1940년대까지만 해도 로이드 존스가 분리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복음주의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대표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50년대를 지나면서 로이드 존스의 영국 교회 인식에 변화가 생긴다. 1950-60년대는 영국에 진보사상이 밀려 들어오던 시기였고 로이드 존스는 영국 복음주의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게 된다. 결국 1966년 2차 복음주의자회의에서 로이드 존스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기존 교단에서 분리해 나와 새 교단을 만들자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의 생각에 반대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이 존 스토트다. 이로 인해 복음주의권 내에는 분열이 일어나게 되고 로이드 존스는 영국 내에서 고립되고 만다. 로이드 존스의 유산은 설교를 통해 살아 있지만 교회론적 영향력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영국 복음주의의 흐름은 존 스토트가 주도하게 된다. 존 스토트는 영국 내에서 여러 기관을 통해 인재를 키워 나가며 성공회가 학문적으로 탄탄하고 지적으로 정합성 있고 문화적으로는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영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몰락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영국 복음주의 신학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한국, 미국, 영국 내에서 각기 다를 것이고 앞으로 각각 달라질 수 있다.
영국 복음주의 성경연구
영국(잉글랜드)에는 주류교단인 성공회가 있고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에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 학자들을 배출해 내는 옥스퍼드(Oxford), 케임브리지(Cambridge), 더럼(Durham) 등의 학교가 있고 IVP나 성서유니온 출판사가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통로를 계속해서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로 중 하나가 종교개혁 시기의 성경번역가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의 이름을 따서 만든 틴들성경연구회(틴들하우스)다.
1938년 IVF에서 성경연구회가 시작되고 1942년 연례 신구약 연구강연이 만들어진다. 이후 1944년 틴들하우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생기고, 1945년 틴들성경연구회가 생기는 과정을 통해 복음주의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그룹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시기 관심 주제는 “잉글랜드에서 복음주의는 어떻게 반계몽, 반지성 딱지를 뗄 수 있을까?”였다. 영국 내에서도 이 시기에 미국과 같은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발달하게 된 것이 성서학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성경 중심’이라는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19세기 이후 교회에 들어온 성서비평학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F. F. 브루스(F. F. Bruce), W. J. 마틴(W. J. Martin), 하워드 마셜(Howard Marshall), N. T. 라이트(N. T. Wright), 데이비드 브러턴 녹스(David Broughton Knox), 레온 모리스(Leon Morris), 그레이엄 스탠턴(Graham Stanton), 조지 래드, 브루스 메츠거(Bruce Metzger) 등. 이 사람들의 배경에는 모두 틴들성경연구회가 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대학의 박사과정에는 약 80명의 학생이 있다. 80명 중 약 60명이 미국 학생이다. 미국의 일반대학교 종합대학원 박사 과정에서는 복음주의권 학생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더럼 등의 학교를 찾아 영국으로 가는 것이다. 미국의 복음주의권 신학 교수 중 많은 사람이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 학문적 기반을 만든 사람들이 바로 틴들성경연구회 사람들이다. 현재 영국의 교회는 유럽 전체의 세속화의 흐름에 따라 교인이 줄어드는 상황이지만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위상은 여전하다.
미국의 상황: 성경관에 대한 갈등
현재 풀러 신학교는 설립 당시 기대했던 신학교의 모습과는 다르다. 선교, 상담 등이 대학원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신학의 위상이 약화된 측면이 있고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나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의 실용적 선교학이 학교를 주도하게 되면서 학문적으로 순전한 형태를 지니는 것이 어려워지고 은사주의나 신사도 운동 등이 기복신앙의 형태로 학교로 들어왔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더욱 큰 원인은 1960년대가 되면서 풀러 신학교가 복음주의의 무기인 ‘성경 영감’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1947년 해롤드 오켕가가 초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시작했던 풀러 신학교는 1954년에 에드워드 카넬(Edward Carnell)을 2대 총장으로 세운다. 에드워드 카넬 역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1959년에 출간한 『정통신학론』(The Case for Orthodox Theology) 및 논문에서 근본주의를 비판한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이 때 그레셤 메이첸(Grasham Machen) 역시 비판했다는 것이다. 칼 헨리나 해롤드 오켕가는 근본주의를 비판하긴 해도 그레셤 메이첸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레셤 메이첸은 복음과 지성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면에서 근본주의자로만 불리기는 애매한 면이 있다. 그런데 에드워드 카넬은 그레셤 메이첸을 비판하며 그가 가진 신학 체계나 교회론 체계를 비판했던 것이다. 풀러 신학교가 보수적이면서도 학문적으로 탁월한 모델로 삼았던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와 그레셤 메이첸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모델을 비판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62년에 찰스 풀러의 아들인 대니얼 풀러(Daniel Fuller)가 스위스 바젤 대학(Universität Basel)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와 교감이 된다. 대니얼 풀러는 복음주의자라고 보기에는 성경관이 애매하였다. 그리고 1963년 데이비드 허바드(David Hubbard) 총장이 취임하고 난 후 풀러 신학교는 이전의 성경관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된다. 1964년에는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졌던 부총장 해럴드 린셀이 사임하게 된다. 내부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72년에 풀러 신학교에서 신앙선언문을 개정할 때 “성경은 신앙과 실천의 유일 무오한 법칙”이라는 구절만 남겨 두게 된다. 완전영감, 축자영감에 대한 구절을 삭제한 것이다.
1976년 해럴드 린셀은 『교회와 성경 무오성』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원제는 『The Battle for the Bible』이다(한글 번역서 제목이 원서 제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해럴드 린셀은 이 책에서 풀러 신학교 사람들을 일일이 거명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1978년에 제임스 패커, 프랜시스 쉐퍼와 함께 「시카고 성경무오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을 내놓는다. 하지만 사태를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1983년에는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로버트 건드리(Robert Gundry)를 제명하는 사건이 있었고, 1985년에 남침례교단(Southern Baptist Church)에서는 보수적이지 않은 계시관을 가진 학자들을 학교 밖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지금도 남침례교단은 미국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 중 하나다.
신복음주의를 외치며 나왔던 풀러 신학교는 이러한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이전과 같이 복음주의를 선도하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현재 초기 풀러 신학교의 흐름을 계승하는 학교는 미국 내에서 트리니티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고든-콘웰 신학교(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와 같은 학교다.
4주. 영미 복음주의는 계몽주의와 어떻게 지내 왔는가?
계몽주의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영어 표현에는 내재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이미 성경에 나타나 있다. 창세기 1장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는 표현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 그리고 상식철학파(Philosophy of Common Sense)의 토머스 리드(Thomas Reid)나 듀걸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등이 등장한, 북부의 아테네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지역에 있는 한 공공도서관 입구에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쓰여 있다. 도서관은 계몽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데, 18세기 에든버러가 세계 계몽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할 때 도서관에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새긴 것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RenéDescartes)에 그 기원이 있다. 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의 재편이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은 신본주의 체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로 대변되는 사고체계는 인본주의 체계다.
계몽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이성의 시대
2) 세상의 모든 것을 주체(인간)-객체(사물) 구조로 분석한다.
3) 기계론적 인과율을 도입한다.
4)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5) 종교적, 주관적 편견이 배제된 객관적 지식을 발굴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모든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이 사실적, 가치배제적, 냉정,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6) 세상의 모든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라 인식한다.
7) 사람을 신, 자연, 운명에서 해방된 자율적 개인으로 규정한다.
계몽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
이 계몽주의 체제 아래에서 기독교는 살아남기 위해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응의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1) 이성을 기독교의 적으로 보고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경건과 경험과 감정에 근거한 신앙을 추구한다.
2) 기독교 신앙을 공공화하지 않고 사유화하여 스스로 고립시킨다.
3) 계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을 취한다. 신앙을 과학화해서 저항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일반적으로 ‘변증학’이라고 일컬으며 구 프린스턴(Old Princeton)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나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 등이 대표적이다.
4) 이성에 의한 세속화를 수용하자는 흐름이 있다.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나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등이 나타난다.
복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 적대적 동반자?
일반적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과 계몽주의를 조화시킬 수 없을 것 같지만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 수용, 일부 타협 모두 이미 형성된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 안에서 나타났다. 즉 근대 기독교 역사는 계몽주의와 적대적 동반자 관계를 이루고 있던 것이다. 신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학을 하기 위해 일반적인 방법론을 배우고 그 틀 안에서 신학을 한다.
복음주의의 시작은 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부흥운동은 감정적, 체험 중심적이고 지적 운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복음주의가 계몽주의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복음주의 시기(1차 대각성 및 감리교 운동)는 무의식적인 계몽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신앙에서의 감정의 위치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이성적이었다. 에드워즈 자신이 이미 이성적 이해를 강조하는 칼뱅주의자였다.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 웨슬리 형제(John & Charles Wesley) 역시 부흥의 주역이었지만 그 자신은 옥스퍼드(Oxford)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절제되고 세련되고 질서 있는 부흥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복음주의가 세계적으로 전파된 시기인데 이 계기를 만든 것이 선교운동이다. 그런데 이 선교운동 역시 계몽주의 사상 아래에서 나타났다. 현대 서구 개신교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선교는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적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캐리의 모토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시도하라.” 였다. 이 시기의 선교는 선교가 갖는 순수한 신앙의 요소가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계몽주의가 갖는 사고방식의 종교적 표현으로서의 선교이기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세기 후반 아서 피어슨(Arthur Pierson)은 D. L. 무디(D. L. Moody)와 함께 선교집회를 하며 집회에서 결단하는 사람들을 해상으로 선교 모집을 한다. 이러한 집회는 학생자원운동(SVM)으로 연결되고 아서 피어슨은 학생자원운동의 총재가 된다. 이 학생자원운동은 1888년에 시작되어 1920년대까지 미국에서 매우 강력한 선교운동의 원천이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의 70% 정도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결단하게 되었으며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의 많은 수가 80% 정도는 학생자원운동 출신이었다. 아서 피어슨이 1888년에 했던 중요한 구호 중 하나는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였다. ‘이 세대’라고 했지만 아서 피어슨의 구상은 1900년 이전까지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의 기저에 있는 것이 계몽주의였다. ‘우리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수많은 자원단체(voluntary [para-church] societies)가 등장한다. 20세기의 수많은 선교단체의 뿌리가 19세기에 나타났다. 노예해방, 성경번역, 금주, 주일학교, 문서선교, 고아원, 장애인, 폭력가정 지원, 정신병자, 해방노예 귀향 등의 사회선교단체 및 수많은 지역별, 교단별, 성별, 특수목적별 해외선교 단체가 등장한다. 이러한 자원단체의 활동에는 ‘내가 스스로 자원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선언’이 담겨 있다. 이 역시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신학적 차원에서 대각성운동을 보는 사람은 1차 대각성 운동은 칼뱅주의적 부흥이었고 2차 대각성부터는 인간이 스스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상,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적 혹은 신인협력적인 운동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평가는 일견 맞는 부분이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인 성취라는 면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고 실제 2차 대각성 운동에는 그런 측면이 나타난 활동이 있었다. 세상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자원단체운동이 있고 그 정점에 선교운동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계몽주의의 인간중심적 사상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 유행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에 인간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계몽주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영미 개신교 복음주의 변증학의 배경
변증학은 기독교 신앙을 지적, 이성적, 합리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이다. 변증가들이 20세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도 변증가가 있었다. 당시 변증가들이 이용한 방식은 헬라(그리스) 철학을 이용한 것이다. 20세기의 많은 변증가들은 계몽주의 시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계몽주의를 이용했다. 물론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변증을 통해 ‘전도’를 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변증학이 미국과 영국에서 나타난 양상은 조금 다르다. 미국에서 변증의 역할을 했던 사람은 신학적으로 개혁파 혹은 칼뱅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구 프린스턴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로 이어지는 신학자들이다. 영국에서 변증학을 주도한 복음주의자 그룹은 성공회(Anglican Church) 그룹이다. 미국에서의 변증학은 논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분리적인 성향을 갖기도 하고 칼뱅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지주의적인 성향도 있다. 영국에서의 변증학은 목회적이고 설교적인 성향이 강하다. 존 스토트(John Stott)의 책은 지적으로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성공회적이고 목회적이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변증서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선교적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변증을 해낸 사람이다.
미국에서의 칼뱅주의 변증학의 원천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구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나 벤자민 워필드 등의 신학이다. 당시에는 칼뱅주의 신학교가 아니더라도 이들의 책을 교과서로 쓸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또 하나의 원천은 네덜란드 개혁파 계열이다. 미시간(Michigan) 지역에 정착하여 교회, 학교 등을 건설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이식할 수 있었던 이 사람들의 특징은 칼뱅주의적 신앙을 가정과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적용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가정과 교회에서 신앙고백적 교육을 받으면서 교육기관을 통해서는 사회에서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을 갖춘 학생을 키우려고 하였다.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앨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등의 지성이 네덜란드 개혁파들이 세운 칼빈 칼리지(Calvin College)를 통해 나왔다. 네덜란드 개혁파 사람들은 복음주의권 내에서 숫자는 매우 적지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의 변증가들: 반틸, 카넬, 헨리, 쉐퍼, 플란팅가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역시 미국 칼뱅주의, 개혁파 계열에 속하는 사람이다. 반틸은 복음주의권 내에서도 다른 학자들에 비해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반틸의 변증학을 ‘전제주의적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이라 한다. 반틸에게 있어서 프린스턴 신학의 증거주의, 명제주의적인 변증은 계몽주의 아래에 있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19세기 변증학이 계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계몽주의를 빌려온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전제주의 변증학의 핵심은 타락한 인간 이성에 중립적인 영역(공유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의 합리성을 찾아 논증하려는 전통적 증거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가톨릭의 변증학은 잘못된 것이다. 반틸에게 있어서 기독교 변증은 불신자, 가톨릭, 아르미니우스주의 등의 잘못된 체계는 기독교의 체계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두어야 성립할 수 있다. 반틸은 그레셤 메이첸(Grasham Machen) 사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을 장악하였고 많은 복음주의자가 이 영향 아래 들어오게 된다.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 역시 반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에드워드 카넬(Edward Carnell)은 침례교 신학자로서 휘튼 칼리지에서 고든 클락(Gordon Clark)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코넬리우스 반틸을 사사했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와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진으로 합류하게 된다. 카넬은 1950년대 이후 성경의 명제들이 그 자체로 진리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영적 반응을 보일 때 진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레셤 메이첸 및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보수 복음주의 주류 계열에서 이탈하였다. 카넬은 성경 무오성에 대한 풀러 신학교의 기존 입장을 부분적으로 이탈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다.
칼 헨리(Carn Henry)는 미국 신복음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휘튼 칼리지에서 고든 클락을 사사했고 윌리엄 젤레마(William Jellema)와 코넬리우스 반틸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근본주의권에 대해서는 반대하며 풀러 신학교의 창립멤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초대 편집장이 된다. 그가 쓴 6권짜리 『신, 계시, 권위』(God, Revelation, and Authority)는 20세기 복음주의권의 신학대작이다. 하지만 칼 헨리는 변증학보다는 근본주의에 저항한 사람, 신복음주의 운동의 창시자이자 인도자로서의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즉 그의 『신, 계시, 권위』보다는 『현대 근본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한역서 제목은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세속 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대중 변증가로 알려져 있다. 쉐퍼의 인생은 세 단계(근본주의자/문화변증가/은퇴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쉐퍼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정통장로교단(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이 갈라지는 일이 생긴다. 쉐퍼는 근본주의자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의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와 성경장로교단(Bible Presbyterian Church) 교단에 합류한다. 그리고 ACCC/ICCC(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의 파송 선교사로 유럽에 가게 된다. 쉐퍼가 유럽에서 선교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근본주의적인 방식의 기독교는 유럽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쉐퍼는 스위스 라브리(L'Abri)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고 문화변증을 하게 된다. 쉐퍼의 대중적인 변증은 주목을 받았지만 전문적인 학자들이 보기에는 허술한 면이 있었다. 말년에 쉐퍼는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근본주의와 회귀하는데 신우파 운동과 관련하여 정치에 참여하면서 젊은 사람들의 지지를 상실하게 된다.
앨빈 플란팅가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함께 복음주의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 세속 철학계에서도 인정받는 네덜란드 개혁파 철학자로 개혁파 인식론의 학문적 신뢰성을 보증하는 데 공헌한 학자다. 조지 마스덴, 네이선 해치(Nathan Hatch), 마크 놀(Mark Noll)과 같은 역사가와 더불어 복음주의자의 학문적 수준을 보여 주었다.
영국의 변증가들: 뉴비긴, 루이스
레슬리 뉴비긴은 원래 잉글랜드 장로교인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선교사로 인도에 파송된 후 1947년 남인도교회 창립 주교 중 한 명이 된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의 전신인 세계선교연맹(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총무, 세계교회협의회 세계선교화 분과 총무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여한다. 그런데 1968년 웁살라 대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식적으로 구원의 개념 중 회심의 개념을 포기하고 구원을 인권의 문제로만 귀속시키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총체적 복음을 제시하는 복음주의자로 부분적 전향을 하게 된다. 뉴비긴은 1974년 영국으로 돌아와 서구문화의 세속화를 바라보며 이것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뉴비긴은 지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계몽주의의 허약함을 지적하는 방식의 변증을 하였고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C. S. 루이스는 원래 비신앙인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연구원 시절(31세)에 회심을 하는데 그 자신은 이를 ‘마지못한 회심’(reluctant conversion)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중세 및 현대 영문학의 신비적인 상상력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는 시도를 한다. 즉 합리적 논증보다는 상징과 은유에 담긴 메시지를 활용하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나니아 연대기). 루이스는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한 적이 없고 성공회 내에서도 고교회주의자(High Church)에 해당한다. 루이스는 영국에서도 유명했긴 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복음주의자에게 20세기 최고의 인기작가이자 변증가로 등극하게 된다.
5주. 총체적 복음주의의 분기점이 된 로잔 언약
복음주의 사회성의 스캔들?
1994년에 마크 놀(Mark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Evangelical Mind)이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을 통해 마크 놀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칼 헨리(Carl Henry)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자들이 반지성주의를 깨뜨리려는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이 ‘스캔들’이라는 용어를 빌려 2008년에 『복음주의 정치 스캔들』(The Scandal of Evangelical Politics)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지적하는 것은 (신)복음주의가 근본주의의 반문화적 성향에 대항하며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여전히 반문화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복음주의의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19세기 말부터 1940년대까지의 기간은 복음주의가 생명력을 잃은 시기였다. 19세기 복음주의 부흥기는 선교운동으로 인해 기독교가 확장되던 시기였고 낙관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복음과 사회 문제를 분리하지 않았다. 복음을 듣고 내면만 점검하던 시기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 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금주, 노예제 폐지, 성경번역, 문서선교, 고아원, 장애인, 폭력가정 지원, 정신병자, 해방노예 귀향, 여성권리, 문맹퇴치, 의료선교, 교육선교 등 사회 개혁에 있어서도 소홀하지 않았다.
20세기 복음주의가 원래 복음주의가 가졌던 총체적(holistic)인 특징을 잃어버린 데에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논쟁이 크게 작용했다. 근본주의자들은 모든 종류의 ‘사회에 대한 관심 및 참여’를 자유주의 및 사회복음과 동일시하였다.
사회복음을 구체화한 사람은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enbusch)다. 원래 독일 루터파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독일계 북침례교 목사로 자란 라우센부쉬는 헬스키친(Hell's Kitchen)이라는 지역에서 빈민가 사역을 하면서 복음의 사회성에 대한 인식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1891년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리츨(Albrecht Ritschl)과 하르낙(Adolf von Harnack)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하려는 신학적 시도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사회복음신학』(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1917)이다. 사회복음의 핵심은 “기독교인됨의 의미는 가난을 영속화하는 경제구조의 개혁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구원은 인간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성경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라우센부쉬가 이 책을 쓰던 시기에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상기 언급했듯) 당시 근본주의자들은 ‘사회’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경계했던 것이다. 이러한 복음주의 사회성의 스캔들은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까지 계속된다.
복음주의자의 반성과 변화
이와 관련해서 복음주의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두 연도가 있다. 하나는 칼 헨리가 『현대 근본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을 쓴 1947년, 다른 한 해는 로잔대회가 열린 1974년이다.
원래 칼 헨리의 『현대 근본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의 내용은 「릴리저스 다이제스트」(Religious Digest)라는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었다. 하지만 이 칼럼이 실리지 못하고 결국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의 핵심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복음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점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무조건 진보주의적인 것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해럴드 오켕가(Harold Ockenga) 역시 “교회에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진보적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며 칼 헨리를 지지하였다.
칼 헨리가 이런 이야기를 배워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미국 내에서 노예문제 등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북침례교 소속이었다는 배경이 작용한다. 또한 칼 헨리가 1940년대에 보스턴대학교에서 박사과정으로 사회윤리를 전공했을 때 그의 지도교수인 에드가 브라이트먼(Edgar Brightman)은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학자였다(그의 노년 때의 또 다른 제자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칼 헨리는 보수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현안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비록 칼 헨리 등의 활동이 있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매카시즘 열풍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반공주의에 대한 반발과 유럽에서의 사회운동의 영향이 미국에서 나타나게 되면서 사회적인 목소리가 증가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디시전」(Decision)의 편집자인 셔우드 워트(Sherwood Wirt)는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양심』(The Social Conscience of the Evangelical)이라는 책을 쓰기도 한다.
복음주의권 내에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냈던 사람 중에는 짐 월리스(Jim Wallis)도 있다. 짐 월리스는 당시 매우 보수적인 신학교였던 트리니티 신학교 재학 도중 자퇴하지만, 재학 시절에 동료 6명과 더불어 「더 포스트 아메리칸」(The Post-American)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베트남전, 인종, 가난 문제 등을 다룬다. 이 신문은 1975년 「소저너스」(Sojourners)로 이름을 바꾸고 복음주의권 밖으로 확산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 이후 짐 월리스는 꾸준한 저술활동을 하고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2005년도에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s)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하여 짐 월리스는 미국의 진보적 복음주의자의 대부로 서게 된다. (이후 2013년에는 공동선[Common Good]을 주제로 『하나님 편에 서라』[On God's Side]라는 책을 출간한다. - 기자 주)
짐 월리스 외에도 복음주의 사회과학자 데이비드 모버그(David Moberg)는 1972년에 『대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19세기 복음주의 사회 참여 전통이 20세기에 와서는 거부당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1973년에는 로날드 사이더와 급진적 제자도 전통에 속한 50명의 복음주의자가 ‘복음주의 사회 관심 선언’(A Declaration of Evangelical Social Concern)을 하게 되고 칼 헨리가 이를 지지하기도 한다. 이 선언문은 ‘사회 행동을 위한 복음주의자’(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의 강령이 된다.
복음주의자의 구제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정착시킨 선구자로는 밥 피어스(Bob Pierce)가 있다. 십대선교회(YFC) 선교사로서 한국전쟁을 경험하기도 했던 밥 피어스는 전쟁을 겪으며 인도주의 활동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고 1950년에 ‘월드비전’(World Vision)이라는 구호단체를 세운다. 이 단체는 현재까지도 활발한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미국에서와 같이 사회성에 관한 문제를 복음주의권 내에서 크게 제기할 필요는 없었다.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았고 복지국가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선교적 관심과 구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1959년도에 난민 구호를 위한 기금을 만들었고 이것이 1968년에 복음주의연맹구호(The Evangelical Alliance Relief) 기금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으로 주로 영국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69년도에 창설한 샤프츠베리 프로젝트(Shaftesbury Project)는 영국 도시에서 나타나는 사회 문제를 복음주의적으로 다루었다.
총체적, 전인적, 전세계적, 전교회적 복음주의 신앙고백서로의 로잔언약(1974)
1974년에 열린 로잔 언약은 당시부터 이미 한국에서 회자되었지만 많이 알려지거나 적용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이제 와서 당시 논의가 되살아나고 이를 계승하는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에는 로잔 언약이 한국에 소개되었어도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로잔 회의는 어느 날 갑자기 열린 것은 아니다. 1966년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주최로 베를린세계전도대회가 열린다. 이 전도대회의 핵심은 대위임령을 실행하기 위한 의도였고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웁살라 대회가 열리는데 여기서 구원을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구원으로 정의한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복음 전도에 중점을 둔 전도운동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기획위원회로 잉글랜드 성공회 출신이자 호주 성공회를 이끄는 잭 데인(A. J. Dain)을 회장으로,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의 레이튼 포드(Leighton Ford), 미국 IVF의 폴 리틀(Paul Little),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해럴드 린셀(Harold Lindsell) 등을 위원으로 세운다.
그리고 전세계에 공식적인 초대장을 보내 참석 여부를 묻는다. 그런데 전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이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탐탁치 않게 반응한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일종의 폄하 의식이 깊이 없는 대회, 지나친 대규모 및 호화 숙소, 미국인의 정복 기질, 자만하고 천박한 말잔치, 좁은 신학, 돈잔치 등의 우려로 나타난 것이었다. 특별히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 대회가 좀 더 학구적이고 제3세계를 품을 만한 대회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던 와중에 잭 데인이 결국 존 스토트를 설득해 내고 많은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1974년 7월 16일부터 25일까지 스위스 로잔의 팔레드볼리외 호텔에서 150개국 135개 교단 2473명의 인원을 가지고 대회가 열리게 된다.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비서구세계에서 왔고 참석자 절반의 나이가 44세 이하였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참석자 중 여성이 7.1%에 불과하고 평신도가 10% 미만이었다는 것은 한계였다.
로잔대회의 특수한 주제라고 하면 미전도종족과 사회정의 및 급진제자도를 들 수 있다. 미국 풀러신학교 그룹의 랄프 윈터(Ralph Winter),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등이 주창한 미전도종족 개념과 선교에 대한 것은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될 만한 것은 사회정의 및 급진제자도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남미의 복음주의자 그룹, 미국의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영국의 짐 펀턴(Jim Punton) 등의 기여가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서구기독교 출신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규정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서구 기독교인들이었다. 세계 기독교의 판도는 이전부터 바뀌기 시작했지만 공식적인 목소리가 나온 것은 1974년이다.
비서구 기독교인으로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르네 파디야(RenéPadilla)다. 에콰도르 침례교인으로 IVF의 국제단체인 IFES의 부총무였다. 로잔대회에서 르네 파디야는 복음을 값싼 은혜, 소비자에게 최상의 가치를 보장하는 시장상품으로 축소시킨 미국식 문화기독교는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복음화를 수학적 계산으로 축소시켜 실용적, 공리주의적으로 만들어버린 교회성장운동을 비판했다.
또 다른 인물로는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가 있다. 페루 침례교인으로 캐나다 IVCF 대표였던 그는 대개는 영적으로 이해되었던 누가복음 4:18-19의 나사렛 선언에 대해 물리적, 사회적 의미를 포함한 전인적 이해를 촉구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자유와 더불어 자유롭게 된 심령은 경제, 정치, 사회적 압제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인간의 갈망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미국 자본주의가 남미를 착취하던 상황에서 등장한 해방신학의 논의와 유사한 것이었다.
푸에르토리코 침례교인인 올란도 코스타스(Orlando Costas)는 문서를 통해 ‘심층전도’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이는 복음을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현 세대의 사회-경제구조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올란도 코스타스는 미국 복음주의의 남미 선교는 제국주의 문화의 경제 이익과 연결된 부패한 산업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의 존 가투(John Gatu)는 이미 1971-1973년 사이에 서구 선교사업에 대한 사망선언(moratorium)을 요청했고 이 이슈를 로잔 대회에서도 전달했다. 1950년대에 동아프리카 부흥이 있은 후에는 선교지-피선교지 사이의 지도권이 선교사에서 현지인으로 이양되었는데 그것이 동아프리카 지역의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체적인 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결국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선교대회는 점점 이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존 스토트는 로잔언약 입안위원회 의장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에서 여러 의견을 조율하는 데에 크게 공헌한다. 복음전도의 우선순위를 강조하면서도 급진적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의 중요도 역시 크게 향상시킴으로서 광범위하게 만족할 만한 대안을 도출해낸 것이다. 존 스토트는 로잔세계복음화계속위원회(Lausanne Continuation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에서도 미국인의 보수반동에 대응하여 로잔언약의 더 넓은 선교 개념, 즉 전인(holistic) 정신을 계승하도록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1974년 이후의 복음주의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대회 직후의 평가는 영국과 미국에서 엇갈린다. 영국에서는 존 스토트의 탁월한 조정 능력과 외교술에 대하여 ‘성공회적 중용의 승리’라는 평가가 있었다. 여기에는 잭 데인의 탁월한 운영능력과 지도력, 섬김으로 영국인의 태도 변화에 기여한 것도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미국의 평가는 달랐다. 로잔언약의 확장된 선교개념에 대한 방어적 자세를 취한 것이다. 해럴드 린셀, 피터 와그너, 빌리 그레이엄을 중심으로 나타난 이러한 반응의 요지는 세계복음화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것과 진보적 신학의 확산에 대한 우려였다.
로잔 대회 이후 이를 계승한 대회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멕시코시티 대회(1975), 파타야 대회(1980)에서는 로잔언약에서 주장했던 많은 내용은 축소되고 미전도종족이 주요 주제가 된다. 이후에 그랜드래피즈(1982) 대회에서 로잔언약의 내용은 어느 정도 회복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로잔 Ⅱ라고 할 수 있는 1989년 마닐라 대회에서는 더욱 확장된 형태로 회복되어 마닐라 선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로잔 Ⅲ인 2010년 케이프타운 대회에서는 로잔언약의 내용이 확대 및 강화되고 실천적인 적용점까지 제시된, 상당한 분량의 내용으로 케이프타운 서약이 작성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2014년에 로잔대회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로잔대회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중요한 것은 “로잔언약 이후 복음주의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 사회행동과 사회복음은 더 이상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둘째, 선교와 전도는 같은 말이 아니다. 선교는 훨씬 넓은, 총체적 개념이다. 셋째, 복음주의는 더 이상 서구 북반구 백인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적인 개념이 되었다.
6주.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은 세계복음주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오순절이라는 현상
세계기독교학 탄생 이후 10년이 지나고 오순절은 연구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기독교 전체 지형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유형이 오순절이기 때문이다. 1900년만 해도 스스로를 오순절 신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에는 최소 5억 명 이상의 인구가 자신을 오순절 신자라고 하였다. 서구에서는 오순절에 대한 신학적, 종교적 연구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문화적 연구 등 광범위한 연구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아직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오순절 운동에 대한 몇 가지 정의
우선 오순절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고전적 의미의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가 있다. 이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와 성령세례의 증거로서의 방언이다. 주로 1900년대(1901-1910)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이 있다. 오순절과 은사주의 운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이라는 것은 성령세례와 방언을 강조하면서 등장한 하나의 교단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등에 속해 있으면서도 방언을 받는 등 은사주의 갱신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은사주의자다. 주로 1960년대 이후 등장한다.
교회사학계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은 이상의 두 가지인데, 오늘날 한국 교회 상황과 연관지어 더 정의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한국에서 많이 회자되는 말 중에 제3의 물결(The Third Wave)라는 말이 있다.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회성장학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가 이 용어를 썼다. 와그너는 오순절 운동이 세 단계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첫 번째 물결이 1900년대의 오순절 운동, 두 번째 물결이 은사주의 운동이다. 그리고 이후 1980년대부터 나타난, 풀러 신학교와 연관되어 있는 일단의 현상에 대해 제3의 물결이라고 하였다. 당시 풀러 신학교의 존 윔버(John Wimber)는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통한 영적 전쟁, 치유, 축귀 등을 강조한 표적과 기사 운동을 벌였다.
피터 와그너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과격해졌는데 그의 활동이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쳐 한국 교회 내에서 가장 시끄럽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신사도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이하 신사도 운동)이다. 일반적인 개신교 신학에 의하면 성경 시대 이후 계시는 종결되었다고 보고 따라서 계시를 받는 통로인 사도와 선지자 역시 종결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는 여기에 반대하여 오늘날에도 신약 시대의 사도와 선지자가 있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도적 종교개혁이 우리 시대에 일어났다고 본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기원
한국에서는 오순절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주로 19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아주사(Azusa)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기원이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와 관련한 연구가 활발히 있었다.
우선 (흔히 알려져 왔던) 미국 기원설이 있다. ‘영미 감리교 - 성결운동 - 오순절 신앙’의 계보를 따르는 이 설은 감리교 운동에서의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성결운동이 있고, 이 성결교리의 발전된 형태가 성령세례 교리라고 본다. 성령세례 교리는 성령세례라는 경험을 통해 방언을 받는 것이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1906년도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흑인 성결운동계열의 윌리엄 세이무어(William Seymour)라는 한 전도자가 찰스 파햄(Charles Parham)의 방언 성령세례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세이무어가 아주사에서 이에 따라 예배를 할 때 열광적인 현상이 나타났고 이 현상이 퍼져 나가면서 1914년 공식 오순절 교단이 탄생하게 된다. 이를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또는 순복음[Full Gospel])라 한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의 연구는 이에 반대하는 결과를 내놓았다. 바로 다원 기원설(multiple origins)이다. 오순절 운동이라는 것이 단지 하나의 교파의 탄생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1905-1907년 인도 묵티, 1907년 평양, 1908년 만주, 1909년 칠레 발파라이소, 1914년 코트디부아르 황금해안, 라이베리아 크루족, 1910년대 노르웨이, 중국, 베네수엘라 등에서 아주사에서의 일과 비슷한 부흥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주사에서의 오순절 운동이 뒤이은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보기 어렵다. 실제로 당시의 언론, 통신 수준을 보았을 때 1906년도 아주사 부흥이 다른 곳으로 알려지기 어려웠다. 미국 내에서도 1950년대까지는 미국 복음주의자의 절반은 아주사 거리에서의 오순절 운동을 모르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중요한 것은 1900년대에 나타난 기독교 현상을 서구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1907년을 오순절 운동으로 분류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하다. 오순절 운동의 핵심은 방언인데 선교사들의 증언에서 방언에 관한 내용은 찾기 어렵다.)
오순절 운동의 특징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회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시각 중에 오순절 운동을 동방과 서방 기독교가 갈라지거나 카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온 것에 준할 정도로 큰 운동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큰 변혁은 아니고 개신교 안에서 나타난 작은 혁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이는데 그것은 오순절 운동이 기존의 개신교 복음주의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오순절 운동은 복음주의의 네 가지 요소(성경주의, 회심주의, 십자가중심주의, 행동주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이 은사를 말하고 추가적 계시를 말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버리거나 자신들의 예언이 성경보다 탁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성경을 가지고 예언과 방언을 판단한다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성경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회심을 뜨겁게 강조한다는 면에서 회심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순절주의자들이 비록 가벼워보일지라도 끊임없이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십자가중심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울러 가장 열심히 전도하는 교파 중 하나가 오순절이라고 보았을 때 행동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음주의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면서도 오순절 운동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는 성령세례와 그 증거로서의 방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은사중지론과 은사지속론 사이의 논쟁이 있다. 은사중지론에 따르면 신약성경 시대 이후 사도와 선지자는 중지되었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예언, 치유 등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성령세례에 있어서 은사중지론자들은 중생과 동시에 성령께서 우리를 구속시키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본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여기에 반대하는 은사지속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완전한 복음’(순복음, full gospel)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제2, 제3의 성화,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나 방언 등의 성령 세례와 은사의 발견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하나님의 성회 다음에 생긴 큰 순복음 교단으로 포스퀘어 가스펠(Foursquare Gospel)이 있다. 한국에는 ‘복음교회’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포스퀘어(foursquare, 정사각형)는 예수 그리스도의 네 가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의미는 각각 영혼 구원자, 질병의 치료자, 성령을 약속하고 주시는 분, 장차 오실 왕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동안 개신교가 질병 치료자,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평등주의다. 개신교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카톨릭에 비해 평등하다는 것이다. 카톨릭의 사제주의에 대항해서 개신교는 전신자제사장(일반적으로 만인제사장이라고 알려져 있다)을 말한다. 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이 보기에 전통적인 개신교는 아직 인종, 성별, 학력, 신분, 국적 등으로 나뉘어 있고 평등하지 않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여기에는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개신교 교단의 흑인 대부분이 오순절 또는 은사주의 교단으로 소속을 바꾸었다.
넷째, 오순절 운동의 특징은 민중의 신앙이다. 이것은 구전종교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서나 문자, 학문을 통해 이루어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간증, 이야기, 노래, 경험의 형태로 감정이 고양된 채로 여성 노인을 통해 전달되었다. 여성 노인들 가운데는 문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성경을 외워 이야기체로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 형태로 전해지는 복음은 파급력이 있었다.
이것은 오순절 운동이 탈계몽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기독교가 지성주의, 합리주의, 텍스트주의적이었다고 한다면 오순절 운동은 여기에서 탈피하여 낭만주의, 경건주의, 체험주의, 감정주의적 요소를 갖는다.
한국과 관련지어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이다. 요한삼서 1:2 구절을 가지고 ‘영혼이 잘 됨’같이 ‘번영’하고 ‘강건’하라는 것이다.
은사주의가 한국 교회를 휩쓴 현실적 요소 중 하나는 음악이다. 이전에 앉아서 부르던 찬송과 달리 1980년대에 CCM이 여러 종류의 밴드용 악기와 함께 들어오면서 찬송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의 예배당은 음향시설이 강조되고 예배당 건물 구조, 좌석 배치 등이 공연장처럼 바뀌게 된다. 한국에 영향을 준 단체는 오순절 교단 출신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m)의 예수전도단(YWAM), 영국의 은사주의 그룹인 스프링 하베스트(Spring Harvest, 이를 한국에 소개한 사람이 하 스데반이다), 마라나타(Maranatha), 호산나 인테그리티(Hosanna Integrity), 빈야드(Vineyards) 등이 있다.
오순절 운동의 분화
오순절 교단에도 다양한 양상과 분화된 많은 요소가 있다. 하나로 묶어서 다룰 것이 아니다.
북미 오순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회가 1943년 전미복음주의협회(NAE)에 가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미국 복음주의 체제에 어느 정도 편입되면서 원래 오순절 운동이 가진 원시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은 사중복음을 주장하며 상기 언급했던 포스퀘어 가스펠 교단을 만든다(1927년). 양태론적 일위일체(성자 강조)를 주장했던 유일파(Oneness)도 있다. 그 외 늦은 비(Latter Rain) 운동,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와 순복음실업인회의 화물숭배신앙,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의 번영신학, 캐서린 쿨만(Kathryn Kuhlman)의 비방언 신유, 베니 힌(Benny Hinn)의 성령의 기름부으심(anointing),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 등이 있다.
비서구지역의 오순절 운동이 나타내는 특징도 있다. 비서구지역에서는 초기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자립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토착화된 신앙을 수립한다. 특별히 1960년대 이후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에서 철수하면서 탈식민지화된 상황에서 자치 기독교를 수립한다. 토착기원기독교(African Independent/Initiated/Instituted Churches, AICs)가 형성된 것이다. 이를 가리켜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Ethiopia) 신앙이라고 부른다(사하라 이남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에티오피아였다). 나이지리아의 알라두라(Aladura, 기도의 권세자들 즉 예언자) 기독교, 남아공의 줄루족 아마나사렛 기독교, 케냐 마사이족의 카톨릭 은사주의자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콩고의 시몬 킴방구[Simon Kimbangu]의 토착화된 형태의 기독교도 분화의 한 종류로 간주할 수 있었는데 근자에는 시몬 킴방구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칭한다고 한다.)
남미에서는 친미 오순절주의가 기독교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 카톨릭을 제외하고 남미의 개신교를 이야기할 때 남미를 지배하는 개신교를 로잔 언약과 관련지어서 반미 혹은 진보적 복음주의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순절주의는 신학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번영신학으로 발전하기 쉬웠고 자연스럽게 친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은사주의 기독교의 분화 양상은 어떠한가. 미국에서는 은사주의 기독교가 기존 교파에 침투할 때 복음주의권이 아니라 성공회 고교회파 예전주의(Anglo-Catholics)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예전은 카톨릭과 비슷한 고교회주의인데 은사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영국에서는 은사주의가 성공회 저교회파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심이 된다. 영국에서 등장한 은사주의 운동으로 알파코스(Alpha Course)가 있다. 알파코스는 일종의 전도, 갱신 프로그램이다. 성공회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잡기 위한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영국 내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는 대개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한국에서는 알파코스가 신사도운동과 결부되어 변질된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성공회 저교회파 복음주의와 더불어 침례교 계통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복음주의적 은사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 내에서 비국교도로서 유일하게 복음주의적인 라인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침례교도인데 이는 은사주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회 복음주의의 대부격인 존 스토트(John Stott)는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에 대해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오히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가 성령론 부분에서 열려 있는 입장을 취한다.
오순절 운동의 평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를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면서 성령을 재발견한 신학적 유산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잠자고 있던 정통을 깨워 갱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한국에서는 오순절주의를 반대하는 두 종류의 평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 그룹이다. 오순절주의의 번영신학과 기복신앙이 사회참여를 막았고 교회를 부패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혁파 그룹이다. 오순절주의가 계시와 교리, 질서를 무너뜨렸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보면 오순절 운동은 계몽주의 기독교 이후에 강하게 어필한 포스트모던 기독교라고 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프리모던(pre-modern, 전근대) 문화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 운동이 초대교회를 회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초대기독교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재탄생이라는 것이다.
오순절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 내에서 새로운 요소를 재발견 혹은 창조해 내면서 전체 기독교 지형을 뒤바꾸었고, 사실상 이 운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하고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중의 몇 가지 질문과 답변
1. 오순절 운동이 비지성적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학력이나 신분이 낮다는 평가는 부당한 것이 아닌가. 이것을 오순절 운동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가.
- 답변: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오순절 운동이 처음 등장했을 때 참여한 사람은 사회 하층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교회가 제도화될 때 교회 내부의 구성원도 바뀌게 된다.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이 등장했을 때 처음에는 성공회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감리교가 100년 정도 지나게 되면 원래 성공회가 가진 특징을 갖게 된다. 여기서 감리교의 원시성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 19세기 성결운동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두 세대 정도가 지나고 다시 감리교 사람들처럼 된다. 그리고 애초의 성결운동을 이은 흐름이 (영미) 오순절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 운동이 처음 시작할 때에는 사회 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1940년대 중반 오순절 교단 중 하나님의 성회는 전미복음주의협회에 가입한다. 기성교회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방언에 대한 강조도 초기처럼 많이 하지 않는다. 복음의 원시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된다.
2. 한국의 경우 손기철 장로 등 인텔리층에서도 방언 등의 성령 체험을 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성령 체험을 갈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적 구조와 오순절 신앙 사이의 평형이 깨지는 것이 아닌가.
- 답변: 손기철 장로 같은 경우는 오순절주의자라기보다는 은사주의자다. 이런 사람들은 세련된 장소에서 세련된 형태로 은사주의 운동을 한다. 오늘날의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초기 오순절 운동 시기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기성교회 내에서 갱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오순절 운동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사주의는 기존의 오순절 운동과 차이가 있다.
3. 현대 예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과 선을 긋는다고 할 때 어디에서 그어야 하는가.
- 답변: 개인적으로는 오순절의 흐름과 관련하여 CCM이 많은 청년들의 신앙을 깨운다는 면에서 교회에 준 유익이 크다고 생각한다.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는 복음주의권 내에서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배제하면 우리의 형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사도운동은 예언이나 사도성을 주장한다는 면에서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자신이 받은 특정 계시나 예언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거나 이를 가지고 교회를 정죄하거나 사람을 판단하거나 미래를 결정하는 등의 현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지적을 해야 한다. 여기서 선을 그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신사도운동의 특징 중 하나가 종말론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종말론이 이스라엘의 회복 등과 연결되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해서도 친이스라엘 편향을 갖게 한다. 이러한 폐해는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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