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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음주의 역사지형도- 이재근

한국 복음주의 역사지형도- 이재근

2014-12-12 15:28:21


 

1. 프롤로그: 복음주의 정의와 역사, 20세기 세계복음주의와 한국복음주의

 

한국 기독교 역사를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를 해석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다루는 주제의 범위를 중심으로 보면 한국교회, 한국기독교, 한국종교사다. 한국과 같이 기독교 역사가 짧은 국가에서는 기독교 역사라고 하면 대개 교회사를 의미한다. 유럽과 같은 기독교세계(Christendom)을 겪지 않았기에 기독교가 거의 교회 안에 머물러 있고 교회 외부의 기독교 전통,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서적을 통해 다루는 내용을 보아도 서양권 기독교사 서적에는 교회와 더불어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회자되는 기독교사는 교회가 언제 세워지고 누가 전도자였고 교회는 언제 부흥해서 어느 지역으로 확장했는지 등의 내용을 위주로 다루고 있다.

 

세속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의 연대와 투쟁 등의 이런저런 관계를 겪은 유럽의 경우 교회뿐 아니라 교회와 연관된 사회의 모든 조직, 제도, 인물이 모두 학문의 대상이 된다. 미국은 헌법상 정교분리를 채택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기독교국가로 생각했을 정도로 기독교적인 국가였다. 따라서 미국 기독교사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주제와 범위의 폭이 넓고 다양하다.

 

종교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기독교를 기독교가 아닌 다른 문화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경향이 있다. 비서구 국가들은 처음부터 다원적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보면 한국의 기독교 역시 진공 상태에서 정착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유교, 불교, 도교의 3대 종교가 1500년 이상 주도적으로 한국인의 기층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고 기독교가 전파되던 시기에 동학, 증산도 등의 토착고유종교가 함께 등장하며 기독교와 경쟁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전파한 기독교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연관되어 변형된 형태로 정착했다. 새벽기도나 산기도 같은 것이 이러한 유형의 예이다. 실제로 기독교가 유대와 로마 제국 내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이방인 공동체에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문화와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전한 기독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를 종교사에 종속시킬 때에는 기독교 고유의 역사경험이 배제되고 그 가치와 의미가 흐려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사가 마크 놀(Mark Noll) 미국캐나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교회들이 신앙과 실천과 제도의 독특한 결합체를 발전시켜 왔다고 말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종교 경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본인(이재근 교수)의 관점은 교회사에서 몇 가지 요소를 취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기독교사의 관점이다. 기독교사로서의 기독교를 정치, 문화, 종교, 민족, 민중, 외교, 사회운동, 독립운동, 제국주의, 근대성 등의 한국사의 제영역과 한국기독교와의 연관관계, 세계기독교의 흐름과 한국기독교와의 관계성이라는 상호 관계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1: 선교사관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개신교 선교가 늦게 이루어진 데 비해 짧은 시간에 급성장했다. 1884년에 복음이 전파될 때 이미 공인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복음과 함께 간접선교, 즉 의료와 교육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80% 정도는 미국 선교사였고 이들은 주류 교단(감리교, 장로교)에 속해 있었다. 캐나다, 영국, 호주에서 들어온 선교사 역시 주로 주류 교단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재정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에는 일찍부터 학문을 할 수 있는 학자군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보수 기독교가 한국인을 우민화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그 결과 일찍이 영어와 서구 학문을 접하며 두각을 드러낸 미션스쿨 출신자나 기독교 선각자들이 세운 한국 학교를 다닌 사람들 중 일부는 선교사나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해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중 기독교 역사를 공부한 역사가로서 한국 기독교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백낙준 박사다. 백낙준은 파크 컬리지, 프린스턴 신학교, 프린스턴 대학, 예일 대학, 즉 미국 내에서도 최상위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1832년부터 1910년까지의 한국개신교 선교 역사(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였다. 그는 스승인 케네스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을 따라 기독교의 선교적 확산을 승리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라투렛은 19세기를 확장된 선교가 이루어진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로 보았다. 백낙준은 1929년 영어로 출판된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고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자초지종 선교사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기독교 역사 전체를 선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선교사관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백낙준을 비판한 이들은 백낙준의 기술이 주로 서구 선교사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 실제 복음 전파의 주역이었던 한국인의 경험, 고백, 공헌, 기여 등을 공정하게 기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낙준에게는 분명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백낙준은 연구 당시 미국에 문서 보관소(archive)도 없던 상황에서 선교사가 집, 친구, 교단, 선교 본부, 출신 교회 등에 보낸 편지를 모으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벼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는 상당하여 오늘날 연구자들도 그의 원전자료를 온전히 다 소유하거나 활용하지 못할 정도다.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면에서도 그는 한국 현대 역사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교육, 행정, 경영 등의 일을 해야 할 처지가 되면서, 그리고 해방 후에는 여러 정치활동에 참여하면서 학자로서의 역량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제자를 한 명도 양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대동아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이화여대의 김활란과 더불어 비행기 구매, 학도병 선전 등의 동원의 참여하면서 친일을 하게 된다. 개인 역량이 탁월했음에도 후학 양성 실패, 친일 등의 오점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2: 민족사관

 

백낙준 이후 한국인의 관점을 균형 있게 다루려는 노력이 오문환, 장정심, 채필근, 이호운, 김양선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전반적으로 자료 접근의 부족, 빈곤 등으로 인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한 시기가 1970년대이고 이 시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연세대의 민경배 교수였다. 민경배의 등장 시기에는 한국사 연구 전반에서 반성적 차원으로 당시 주류 사관이었던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사관이 정립되고 있었는데 이를 한국기독교사에 차용한 사람이 민경배였다. 민경배의 문제의식은 선교사 증언에 비해 수용자, 즉 한국 신자의 고백과 증언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민경배의 작업에는 한국 교회의 문제를 교회 내부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한국사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 민경배가 1972년 발간한 한국기독교회사는 기독교 학계와 일반 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서 민경배는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1974), 교회와 민족(1981), 한국기독교교회사 개정판(1982) 등을 연속으로 펴내며 연세대를 중심으로 민족사관학파라는 자신의 학파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백낙준과 비교했을 때 민경배의 업적은 후학을 양성했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교회와 민족, 즉 종교와 사회를 내연과 외연이라는 독창적인 원리로 파악했다. 즉 한국기독교사를 단순한 제도의 변천, 사건의 나열, 교회의 시간적 성장으로 보지 않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영적 힘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내연의 요소 민족 중흥과 국가발전이라는 외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한국 교회가 민족을 이끌어 간 주체적 힘으로 작동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는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경배의 역사관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일정한 반대를 받았다. 가장 큰 비판은 그의 역사관이 엘리트주의라는 것이다. 민경배의 기독교사 서술은 주로 의식적 선각자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민중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3: 민중사관

 

민경배의 시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크게 노력한 사람들은 민중신학자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신대의 주재용 박사다. 주재용은 한국기독교백년사-민중사관의 입장에서의 분석과 비판이라는 논문을 통해 민경배를 비판하였다. 주재용은 한국기독교사의 주체를 엘리트나 지식인 계층이 아니라 민중계층의 평신도, 무명의 헌신적 기독교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중신학자들은 역사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학파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전문 한국기독교사가가 아니기에 통사나 영향력 있는 종합 저술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민중신학과 당대의 여러 일반 학계의 신마르크스주의 담론 성장의 결과로 오늘날에는 보수 복음주의권 진영에서도 기성 제도나 목회자 중심의 일방적인 신학, 역사 서술에서 탈피하여 소외된 기층의 교인, 특히 평신도와 여성, 장애인, 소수자, 외국인 등의 입장에서 신앙과 신학을 조망하는 글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민중신학과 민중사관의 긍정적인 영향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4: 실증사관

 

이와 더불어 1982년에는 이만열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발족되어 어느 한 사람의 독점적 연구 성과에 매달리지 않는 공동연구라는 새로운 기독교역사 연구의 흐름이 나왔다. 이 흐름은 일종의 실증주의 사관을 확립했다. 원전이 없이는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만열은 숙명여대에서 해직된 후 합동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 과정을 하면서 한국교회사를 가르쳤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료를 수집하여 다시 돌아와 원전에 근거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는 1990년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발전하고 1997년부터 한국기독교역사학회라는 학회를 발족하여 이후 한국기독교역사학을 주도하게 된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서론에 의하면 이 학파의 연구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즉 종래의 연구가 지나친 무비평적 호교론에 치우쳤거나 자교파 중심주의로 흐른 것을 비판하고 발굴되지 못하거나 주목받지 못한 과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둘째, 연구의 영역을 단지 교회의 사건과 인물 안에 가두지 않고 인접학문, 즉 한국사, 종교학, 신학, 사회학, 인류학과의 학제 간 통섭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사 자료를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취급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미 해석된 2차 자료보다는 원본을 발굴하고 이 자료를 저자의 원래 의도와 문맥에 맞게 해석해내는 데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2, 3이 나오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5: 교회사관

 

앞선 네 가지의 연구방법론이 신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파의 울타리 안에서 신학의 한 영역으로 교회사를 다룰 경우에는 민족, 민중, 정치, 사회, 문화, 종교와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를 다루기보다는 특정 교파 교회의 성장과 교파 내 신학의 발전에 더 강조점을 둔 교회사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사를 쓰더라도 신학적 입장에서 쓰기에 교회사이거나 역사신학이 된다. 한국교회사를 쓴 김영재는 교회사는 기독교사와는 달리 교회의 역사와 신학이 하나로 결합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용자보다 전달자의 가치를 더 정통적이고 전통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백낙준의 선교사관의 지배적 영향 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교회사관은 자파 신학의 우월성을 전제하는 교회사 연구이기 때문에 실증적, 비평적, 객관적 연구가 어렵고 호교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한 교파의 전통에 깊이 몰입하기 때문에 연구의 객관성과 세밀함을 담지한다면 미시적 관찰을 통하여 창의적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선구적 연구자들을 통해 전수된 다양한 연구 방법론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갖고 한국기독교사 또는 교회사라는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다. 후속 세대의 과제는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서,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취합하여 새로운 세대를 위한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고 창의적인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세계기독교사관을 통해 보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사

 

본인은 여기에 쓴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이들의 장점을 통합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요 역사관과 방법론의 장점을 최대한 잘 취합하여 균형 잡힌 동시에 엄정한 역사해석을 근거로, 가능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역사해석을 구현하기를 소망한다.

 

- 선교사관: 복음을 전수해 준 선교사들과 그들의 출신 국가와 교회, 신학의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여, 한국기독교 탄생에 끼친 그들의 역할을 비중 있게 인정한다.

 

- 민족사관: 그러나 복음은 결코 진공상태에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처한 삶의 정황, 즉 그들의 문화, 종교, 언어, 사상, 민족의식, 기질, 사회구조 등의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정황 속에서 전달되어, 수용자의 주체적 해석과정을 통해 번역된다.

 

- 민중사관: 한편 기독교 복음의 시조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 사도행전의 원시교회, 거의 모든 역사상의 선교현장에서 충분히 드러났듯, 복음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용하고 체화한 계층은 언제나 바닥층 민중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 그리고 여성이었다.

 

- 실증사관: 또한 모든 역사는 기본적으로 해석을 전제하지만 이 해석이 특정 관점에 의해 지나치게 왜곡되거나 과장될 위험이 늘 상존한다. 원전으로서의 1차 자료에 근거한 연구는 필수적이며, 따라서 연구 결과를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실증사관의 원칙이 중요하다.

 

- 교회사관: 기독교는 개인의 신앙으로 시작하지만 그 신앙의 전수는 공동의 고백과 실천을 통해서만 담보할 수 있으므로 공동체, 즉 교회 없는 교회는 본질상 불완전하다. 따라서 교회의 신앙고백의 시공간적 구현으로서 역사를 바라보는 교회사관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위에 언급한 다섯 가지 연구 관점과는 차별되는 향후 강좌의 두 키워드가 있다.

 

먼저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 본 강좌는 처음 전수된 순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독교 전반을 지배하는 개신교의 정서를 18세기 이래 영미권에서 일련의 부흥과 사회개혁, 선교운동을 통해 부상하고 성장하고 확산된 복음주의라는 용어로 규정한다. 특히 한국기독교를 서구 선교운동을 통해 전파된 복음주의 기독교가 20세기 한국의 독특한 정치, 문화 상황에서 토착화, 상황화되어 탄생한 역사적 산물로 인식한다.

 

두 번째 키워드는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 오늘날 부상하고 있는 세계기독교학의 방법론을 따라 세계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경험한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위치와 의미를 세계기독교 전체 지형 및 한국현대사 전체 흐름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내는 것이 강연의 방향이자 목표다. 따라서 강연 중에 자주 선교 주체인 영미기독교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기독교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석이 등장하며, 동시에 다른 비서구 선교현장, 특히 중국 및 일본에서 성장한 기독교가 한국기독교와 어떤 점에서 유사한 연속선상에 있으며, 어떤 점에서 구별된 불연속성을 띠는지를 자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2 (복음주의) 기원: 초기 개신교 선교사의 정체성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 역사

 

한국에 들어온 초기 장로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원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형태를 잃었다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보수적이어서 제국주의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타협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보면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목적은 복음주의적인 교회, 즉 성경을 중심으로 회심, 십자가, 전도를 강조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원래 순수(purity)와 연합(unity)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이 두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양보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한국 선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난 사례다.

 

보통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해를 1884년으로 잡는다. 하지만 이전에 이미 한국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로스 역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미 한국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을 통해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의 손에는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이 있었다.

 

1884년에 조미통상조약을 통해 선교사가 들어올 기반이 형성되는데 이 때 처음 들어온 인물이 앨런(Horace Newton Allen)이다. 앨런은 외교관이자 의사로 들어왔고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앨런은 원래 1883년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지만 동료들과의 불화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권유로 1884년에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고로 미국 북장로교에서 공식적으로 파송한 첫 복음전도 선교사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84 12월에 조선 내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민비의 외척으로 주요 권력 인사 중 한 명인 민영익이 중태에 빠진다. 앨런은 서양의학 기술을 가지고 민영익을 치료한다. 갑신정변이 끝나고 국가에서는 기독교를 호의적인 종교로 보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미국 선교사들이 한결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국가에서는 병원을 설립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제중원이다.

 

앨런은 한국을 떠날 때까지 개인적으로 누군가에 복음을 전한 적이 없었다. 앨런은 직접 전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신중했다. 이런 점은 나중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열정과 상충하였다. 언더우드와는 직접적인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에 들어온 초기 개신교의 성격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Henry Gerhard Appenzeller) 들어온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교,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1899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온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교단의 역량이 탄탄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의 선교는 전도-의료-교육의 삼각형(triangle) 구조로 선교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세상을 거부하는 형태의 기독교가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질서와 체계를 강조하는 기독교였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중 약 80% 정도가 미국의 장로교단과 감리교단 출신이었다. 보통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전 세계 선교 역사에서 미국계 선교사와 영국계 선교사(호주, 캐나다 포함)의 비중은 비슷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미국계 선교사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전반적으로 미국적인 데에는 이러한 영향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장로교단의 교세가 우세한 것도 이례적인 현상이다. 미국에서 장로교단 교세는 침례교, 루터파, 감리교보다 작다. 장로교가 없는 나라도 많다.

 

원래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형성된 교파다. 그런데 스코틀랜드는 세계의 주류가 된 적이 없다. 19세기 후반 미국 개신교의 40%는 침례교, 40%는 감리교로 이루어진다. 미국과 같이 이민자로 이루어진 국가에서는 복음주의의 뜨거운 정서를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감리교도나 사람이 모이면 바로 교회를 형성할 수 있는 침례교회를 통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성공회는 미국에 정착하기에는 너무 세련되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 소수의 특권층으로 남게 된다. 장로교는 미국 내에서 후발 주자였다. 아무래도 스코틀랜드 이민자 중심으로 전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로교 역시 정적인, 즉 교리 중심적이고 지성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역동적으로 전파되기 어려웠다. 미국 내에서 장로교의 성장 기반은 약했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는 왜 17세기형 장로교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17세기형 장로교인이라면 애당초 선교사가 되지 않는다. 대개는 부흥 경험을 통한 회심을 한 이들이 선교를 했는데 이러한 정서는 원래 장로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복음주의가 갖는 뜨거운 회심이라는 정서를 공유하지 않으면 성공회건 장로교건 선교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를 갖고 선교를 한다는 것은 원래 장로교성, 엄밀한 의미의 개혁주의성을 일부 포기하는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는 장로교단에 속해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의 장로교인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감리교 선교사들과 동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16세기 유럽에는 오늘날과 같은 전도나 선교의 개념이 없었다. 유럽 전체가 기독교사회였다. 그렇지만 선교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이 일종의 선교운동이었다. 제네바에서는 브라질에 신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파송을 하기도 했다.

 

복음주의와 제1, 2차 대각성 운동

 

오늘날 복음주의를 말할 때 이는 흔히 영미 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된 신앙으로 본다. 이때 복음주의의 4요소는 성경주의, 회심, 십자가 중심주의, 행동주의다. 영미 부흥운동은 대개 1차 대각성과 2차 대각성으로 나누어 말한다. 1차 대각성 운동은 1730년대, 2차 대각성운동은 1790-1840년대에 나타났다. 3차 대각성 운동도 있는데 말하기가 불분명하다.

 

1차 대각성 운동은 영국에서는 감리교의 탄생, 미국에서는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부흥운동과 관계가 있다. 영국 감리교 내에서는 웨슬리(John Wesley) 그룹과 휫필드(George Whitefield) 그룹으로 나뉜다. 2차 대각성 운동에 기여한 사람은 미국의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프란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 에즈베리는 미국에서 감리교 부흥에 기여한 사람이다.

 

1차 대각성 운동은 영국과 미국 일부에서 일어난 운동이었고 소수의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것을 대각성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다. 하지만 2차 대각성 운동은 대규모 부흥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영국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호주와 캐나다에서도 일어났다. 1차 대각성 운동이 교회의 개혁이나 신앙을 깨운 것에 그쳤다면 2차 대각성 운동은 노예해방 운동, 금주 운동, 여성해방 운동 등 사회개혁 운동으로 나타났고 선교운동으로도 나타났다. 1차 대각성 운동 당시 에드워즈나 휫필드는 노예제도를 용인했고 웨슬리의 경우에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2차 대각성 당시 피니 등 부흥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예해방 등의 사회개혁을 외쳤을 때 여기에 반대한 사람들이 남부의 교인들이었고 특별히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이것은 피니 등이 인간의 자유의지 등에 대해 열려 있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러한 사회개혁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은 흔히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침례교인들은 주로 농부들이었고 생계 때문에 참여할 여지가 없었다. 장로교는 신파와 구파로 나뉘는데 구파는 개혁주의자, 신파는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사회개혁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예외 없이 신파였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교회가 나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신파로서 사회개혁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중에 선교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개혁된 사람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지 않고 지적 능력이나 영적 능력이 같다고 생각해야 유색인에게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이다. 1869년 이후에야 북장로교 안에서 신파와 구파는 하나가 된다.

 

에드워즈까지의 1차 대각성 운동을 어거스틴주의나 칼빈주의적인 참된 부흥으로 보고 2차 대각성 운동은 찰스 피니의 영향으로 인해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이고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잘못된 부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런 해석이 나타난다. 하지만 역사적인 다양한 문맥을 보면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아마 피니와 무디(D. L. Moody)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계기는 엄밀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주의자에 의해 형성되었다. 피니에 대해서 칼빈주의적 관점으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공헌이나 역사적 가치, 선한 영향력까지 모두 버릴 필요는 없다. 실제 피니의 부흥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발제를 시킨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반응은 피니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문구상으로 보면 어느 부분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같은 부분이 있지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식하며 살았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을 피상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었다.

 

무디는 세대주의자로서 전도운동을 한 사람이다. 무디의 전도운동에 장로교 신파의 지도자인 아서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이 합류한다. 피어선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이하 SVM)을 시작한다. 이 운동을 통해 교파와 관계 없이 헌신된 사람이 모여 선교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3, 4천 명의 선교사가 나왔는데 이 중 70% SVM 집회를 통해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교단의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지에 가서 타 교단 선교사와 협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초기 선교사의 유대관계는 매우 끈끈했다. 이들은 선교지에서 공통의 분모를 가진, 즉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복음주의자의 선교 방식은 여러 군데에서 비슷하다. 성경을 번역하고,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말씀을 전하여 개종시키고, 가슴의 종교를 형성한다. 그래서 각 선교지에서는 기본적으로 복음주의 신앙을 유지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3. (복음주의) 확장: 평양에 떨어진 성령의 불

 

한국 선교 초기 교회 성장의 이유

 

한국은 선교가 늦었음에도 다른 나라, 특별히 중국과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당시 나라가 위기인 상황에서 기독교를 대안으로 수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개화파 인사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개신교를 수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소수였다.

 

2) 이미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는 저변이 있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이 들어와 있었고 이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3) 한국 초기 기독교는 제국주의적인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면이 있었다. 기독교가 민족의식을 깨우는 대안이자 일반이나 러시아에 대항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상황과는 다르다. 중국의 민족의식 고취는 곧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기독교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4) 한국에는 기독교의 수용을 막는 저항적이고 조직적인 종교세력이 강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유교가 잠식하던 당시 조선을 일종의 종교적 공백상태로 보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5)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사이에 협력과 연합이 잘 이루어졌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에서의 선교 경험을 학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6) 한국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합하여 함께 갈 수 있었다. 3.1 운동 등에 기독교의 영향이 있다. 물론 기독교가 전적으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다.

 

7)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중국에서도 부흥이 있었지만 중국 전체와 비교했을 때 산둥반도 지역에만 해당하는 국지적인 부흥이었다.

 

8) 자립, 자치, 자전을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하게 했던 성경적이고 탁월한 선교 정책이 초기부터 시행되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시간, 환경, 지리적 요인이 작용했고 한편으로는 후발주자라는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선교지에서 일어난 미국 교회 갈등의 해소

 

한국에서의 선교는 선교사 간 협력이 아주 잘 일어난 사례에 해당한다. 이것을 미국 남장로교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의 역사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미권에서 제2차 대각성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개혁 운동이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노예제 폐지도 있었다. 영국은 1830년대에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노예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행사한다. 당시 미국 일부,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백인보다 흑인 인구가 훨씬 많았다. 미국 북부 지방에서는 노예 제도가 성경적으로 옳지 못하고 인권의 시각으로도 옳지 않다는 흐름이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수용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러한 시각이 계몽주의와 진보 사상의 세속적 인권 사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노예제가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기도 했다. 이것은 농업 위주의 남부 지역에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 해방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어 나타났던 일이기도 하다. 결국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북부가 승리하여 공식적으로는 노예가 해방된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남북 갈등은 심화되고 30년이 지난 1890년대까지 그 적개심은 남아 있었다.

 

한국에 1885년에 들어와 선교 개척을 했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91년에 첫 안식년을 가지는데 이때 아내의 고향인 시카고로 간다. 언더우드는 시카고에 머물면서 맥코믹 신학교에서 한국에 갈 선교사를 모집한다. 그리고 1891 10월에 밴더빌트 대학에서 열린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신학생 집회의 연사로 서게 된다. 당시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하고 막 에모리 대학으로 옮겼던 윤치호도 함께 연사로 선다. 언더우드는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전망으로 한국 선교를 소개한 데 비해 윤치호는 한국 선교가 고난의 길이 될 것이라 연설하였다. 이렇게 상이했음에도 한국으로 갈 선교사가 모집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 남장로회의 재정 부족으로 인해 파송할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의 도움을 받고 여기에 본인의 자금을 더하여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 제공한다. 그래서 레널즈(William David Raynolds)를 비롯한 소위 ‘7인의 개척자들이라고 불리는 남장로교 첫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제물포에서 맞이한 사람이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이었다. 이들은 1895년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며 선교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매우 절친한 관계를 형성한다. 당시 미국 남부와 북부의 적개심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한국 교회 초기 부흥의 동력은 네비어스 선교정책과 사경회

 

당시 한국 선교 정책이었던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이었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특징은 자치, 자립, 자전의 삼자원리다. 자치는 스스로가, 즉 현지인이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 자립은 재정적 독립, 자전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는 당연한 것 같지만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현지의 기독교인들은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선교사의 리더십을 유지하고 재정을 미국에서 충당하는 옛 정책을 사용한다. 당시 존 네비어스(John Livingstone Nevius)는 이를 반대하였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네비어스는 중국에서 실패했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1890년대 한국에서는 네비어스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네비어스의 정책을 만장일치로 수용한다. 당시 감리교는 옛 정책을 고수했다. 반드시 네비어스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네비어스 선교 정책을 채택한 장로교가 더 부흥하게 되었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열정이 많은 한국 사람에게 아주 잘 맞는 정책이었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불러왔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선교사들의 편지에는 한국 사람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당시 한국 사람은 기도, 선교, 전도, 집회에 열심이었고 재정 모금에도 헌신적이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 기독교 선교를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삼자원리로만 이해하긴 어렵다. 곽안련(Charles Allen Clark)은 네비어스 선교 정책과 더불어 사경회를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으로 둔다. 한국교회 부흥의 초기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흥이라는 이미지의 감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말씀을 배우는 사경회가 융성했다. 사경회는 지역별 성경학교와 신학교로 정착한다. 이 사경회가 네비어스 선교정책과 연결되면서 말씀을 배우는 교회를 형성했다.

 

아울러 한국교회가 자치를 하게 된 계기에는 부흥운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있기 전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교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디의 죄 고백을 시작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인 죄 고백과 참회가 나타났다. 이 부흥의 결과로 자치가 시작되었다. 부흥은 사람의 가슴을 깨우는 운동이지만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메시지가 계속되어야 했다. 선교 초기 단계에는 선교사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지만 언어의 문제로 인해 폭발적으로 전하지는 못했다. 이때 길선주나 김익두 등의 현지인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이후 실질적인 교회의 리더십이 한국 사람에게 이양되고 선교사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감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자전과 자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1907년은 대부흥과 더불어 한국에 최초의 독노회가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평양대부흥으로 일어난 리더십 이양이 독노회 설립과 함께 이루어졌다. 평양에 떨어진 불은 심장뿐만 아니라 조직도 변화시킨 것이다.

 

보론: 기독교와 의료(의료와 한국 초기 선교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앨런이 한국에서 수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영환을 치료한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 기독교 선교는 의료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전염병이었던 콜레라나 장티푸스가 휩쓸 때 한국에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이에 대해 서양 의학을 가지고 대처법을 제시해 주었다.

 

선교사들은 매우 헌신적이었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선교사 중 자녀나 아내가 죽지 않은 선교사는 거의 없었다. 초기 의료 선교사의 7-80% 3-4년 안에 사망할 정도였다(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중 3-40년 간 장기근속한 선교사는 복음선교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선교의 무기는 의료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있는 사람도 이러한 초기 선교사의 헌신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한다.

 

 

  

 

4.(복음주의) 분화: 기독교 민족운동과 새로운 신학의 출현

 

한국 개신교와 민족주의

 

왜 한국 개신교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빠르게 성장했는가. 그 한 요인으로 한국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민족주의와 개신교 전파가 엇갈린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국 민족운동 및 정치 지도자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개신교 유입을 곧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기독교 전파과정이 전혀 제국주의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등에서 나타난 제국주의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자강을 강조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의 힘을 입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려 하였다. 특히 개신교를 믿으면 영국과 미국과 같은 나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일본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와 서구 개신교가 결합한 것이다.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반적으로 분열 양상 없이, 한국인과 서양인 사이의 갈등도 (비교적) 없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갈등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민족운동과 개신교와 함께 가기는 했지만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의도와 개신교를 통한 민족 자강을 꿈꾸었던 사람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갈등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시기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하고 난 이후였다.

 

선교사들의 1차 목표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었다. 인권운동이나 해방 등이 1차 목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일본이 한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일에 대하여 같이 저항하고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국의 기독교는 많이 부흥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보기에 한국은 독립된 나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사실상 국권이 넘어간 이후 선교사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피할 수 없다면 서구 수준으로 올라온 일본에게 한국의 지배를 맡겨 한국도 발전하면 선교가 용이해질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이 나타났다. 일부 선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지지하기도 했다. 친일행적을 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이를 위해 신앙을 좀 더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장치, 제도, 행동을 유도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과 선교사의 갈등이 일어났다. 분화의 시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에서 나타난 부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다. 정치사회학적,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시각이 있다. 선교사들이 영적인 것,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국가적인 측면이나 일본이 저지른 악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의도를 가지고 부흥을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당시에도 선교사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편 초기 미션스쿨을 통해 성장한 기독교민족주의는 1905년부터 한국인이 세운 학교를 통해 더욱 토착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보창학교, 오산학교, 대성학교가 대표적인 학교였다. 이 무렵 여러 언론매체가 등장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1896 독립신문, 1904 대한매일신보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1903년에 창립된 YMCA를 구심점으로 청년 기독교 민족운동이 전파된다. 을사늑약 체결 후 수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기독청년들의 역할은 상당했다.

 

이 시기 활발했던 의병운동에 기독교인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의병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선교사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는 의병이나 의열 활동에 긍정적이었다. 일본 통감부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 김병록, 이동수, 김정익, 전태선, 조창호, 1900년대 국내 최대 항일 비밀결사조직 신민회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1900년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갈라지는, 특히 기독교 지식인과 선교사, 민중 기독교인 사이에서 갈라지는 현상이 시작된다. 이 분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일반 신자와 선교사, 그리고 교회 밖 활동을 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갈등으로 확산된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 중 더 많은 이들이 감리교인이었다. 상대적으로 장로교인들이 교회 안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였다.

 

3.1 운동과 개신교

 

3.1 운동은 기본적으로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이지만 일종의 종교운동으로 볼 요소도 있다. 일본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천도교, 대종교는 정식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독교는 애국 성향을 보이면 탄압받았다. ‘포교규칙에 따라 모든 종교단체 설립은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이후 검열을 받았다. 일본이 종교에 대해 대처할 때 효과적으로 사용한 정책은 교육법이었다. ‘사립학교법에 따라 일제의 교육규칙과 기준에 맞지 않는 학교는 폐교되었다. 재정의 한계가 있었던 기독교 학교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각지의 교회가 자체적으로 세워 운영하고 있던 소학교 상당수가 없어졌다. 1910년 무렵 829개에 달하던 종교계 사립학교는 3.1 운동이 진행 중이던 1919 5월에는 298개로 줄었다. 이 법은 종교만을 겨냥한 법은 아니었으나 종교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3.1 운동에 기독교와 천도교계 인사가 대거 참석한 배경에는 이런 요소도 있었다. 1910년 이후 선교사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는다. 선교와 외교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조직 차원에서 할 수는 없었다.

 

3.1 운동 예비 모임이 국외에서 조직되고 1919 2 8일에 일본유학생들이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종교지도자와 학생을 중심으로 반응이 나타나 종교학생 연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3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3.1 운동이 일어난다. 3 1일 이후 전국에서 계속해서 벌어진 크고 작은 시위에서 종교인, 특히 종교계 학교에 속한 교사나 학생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당시 시위 후 수감되거나 검거된 이들 중 최소 절반은 종교인이었고 이 중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인 비율은 17-22%였다. 천도교는 11-15%, 불교는 1%, 유교는 1-3%였다. 당시 총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이 1.5%에 불과했던 상황을 보면 이 비율은 놀라운 것이다. 교역자의 비율은 더욱 높았고, 피검된 여성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65.6%를 차지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모든 운동을 주도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3.1 운동에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토착화된 종교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3.1 운동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두 가지 입장을 가졌다. 일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 있었고, 참여하는 학생들이 희생당할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현실적 판단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그저 반대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선교사들에게는 분명히 저항하는 학생들의 희생에 대한 것도 염두에 두었다. 선교사와 학생들의 관계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실 1910년대 한국의 기독교는 정체 현상을 보였다. 1900년대 대부흥 시기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크게 성장했지만, 1910년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포기한다. 이 시기 기독교가 타계적인 경향을 나타내며 민족주의 성향이 많이 사라지면서 외면 받은 경향도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도 3.1 운동을 기점으로 다시 기독교가 반등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이후에는 확연히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인 사이에서의 리더십 이양이 이루어지고 역할이 나누어진다.

 

192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는 두 가지 유형의 신앙을 낳았다. 첫째, 주류 신앙으로서 초월적 경건주의 신앙이다.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 부흥사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 흐름에 경도되었다. 경건주의적 개신교 신앙은 3.1 운동 직후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가 가득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신앙은 1930-40년대에는 타계적이고 내세 중심적인 재림 및 종말론적 신앙 전통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계몽주의 신앙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지양하거나,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민의 수준을 높여 일제에 맞선다는 소위 민족개조론 유형의 소극적인 저항신앙이다. YMCA 등 청년학생단체와 기독교계 중, 고등, 대학교가 주축이 되었고 윤치호, 이상재, 신흥우, 김활란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교파교회 및 신학의 확립

 

1901년 감리교에서는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목사를 배출했고 장로교에서도 1907년 독노회 설립 이후 목사를 배출한다. 목회자 안수를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필요했다. 장로교는 1900년 이전부터 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교육하는 신학반’(Theological Classes)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는 1901년 이후 4개 장로교 선교회가 연합하여 전임 교수선교사를 임명하는 평양신학교로 재편된다. 감리교는 1905년 서울에 협성신학교를 설립함으로 공식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동양선교회가 1911년에 서울에 세운 성서학원은 오늘날 서울신학대학의 기원이다. 1908년에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도 1910년에 구세군식 사관학교를 세웠다. 1912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후원 하에 한국 최초의 초교파 신학 연구기관인 피어선 성경학교(오늘날 평택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교단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한국 기독교 지형을 지배한 것은 한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선교가 교단 중심으로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1920년대 이후 뚜렷해진다. 만약 장로교 신학교가 평양이 아닌 서울에 세워졌으면 신학 색깔이 상당히 달라졌을 수 있다. 교단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연합하는 것이 강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지역갈등이 작용하기도 했다. 1907년 이래로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 기독교 대 비서북지역 기독교의 분화가 나타나고 1920년대 이후 이것이 더욱 심화된다.

 

1920년대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비교하면 교단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두 학교 모두 성경신학을 가르치는 비율은 높다(감리교 25.5%, 장로교 38.5%).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성경신학을 중심으로 역사신학(16.8%), 이론신학(20.8%), 실천신학(18.7%) 등 신학을 가르치는 비율이 높았다. 또한 당시 장로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치던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성경해석을 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장로교 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장로교 신학교에 비해 감리교 신학교는 언어, 기초 인문 등을 가르치는 교양의 비율(46.6%)이 아주 높았다(장로교 5.2%). 당시 감리교 신학교는 영어, 일본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의 과목도 가르쳤다.

 

이런 이유로 감리교는 장로교에 비해 미국, 일본으로 유학가는 학생의 비율이 높았고, 그 결과 한국인에 의한 창의적 신학 작업도 먼저 이루어졌다. 감리교 유학생들은 새로 배워 온 내용을 소개하거나 창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감리교의 자유로운 신학 학풍 전개에 기여했다. 장로교 유학생들은 강한 보수주의 입장을 취하거나(박형룡), 온건한 개혁파라 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남궁혁). 그리고 장로교는 사역을 주로 교회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고, 감리교도 여전히 교회 중심이기는 했으나, ‘사회운동이나 연합기관 활동에서 장로교보다 더 열심히 참여하였다.

 

1920-30년대 한국교계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분규에는 교파 간, 교파 내부의 신학적 차이가 작용했고 한편으로는 지방색, 교권, 선교사와의 관계 등이 맞물려 있었다. 선교 초기 단계에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 정책은 선교사들이 협력하는 가운데 효과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리더십 이양과 역할 분화가 나타나고 1920년대 이래로 교세의 지역적 차이가 벌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한국 교회 분열의 요인이 되고 만다.

 

장로교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으로는 1934년 총회에서 다루어진 여권 문제 사건’(김춘배)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김영주)이 있었다. 또한 1935년에는 성서비평학을 사용한 주석인 아빙돈 주석과 관련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길선주는 당시 이 주석을 이단서로 정죄하였고, 선교사 곽안련은 개별 조사 후 관련 인사들에게 반성하는 의미의 각서 제출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는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장로교가 교단의 보수성을 공식화하고 내부의 진보인사를 배제하고 감리교와의 차이를 뚜렷하게 부각시켜 이후 연합 및 교류를 거의 철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후 교단 분열의 징조를 확인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신편찬송가 사건’, ‘기독신보 사건이 있었다. 신편찬송가 사건은 원래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사용하던 신정찬송가를 장로교가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장로교 실세 정인과가 만든 신편찬송가를 교단이 공식 사용하기로 결의한 사건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뿐 아니라 장로교 내 서북계와 비서북계의 긴장을 보여 준 사건이기도 하다. 기독신보 사건은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발행하던 기독신보 1933년에 한국인 최초로 사장에 취임한 전필순이 장악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비서북계인 기호지방(서울경기) 인사로 사장에 취임한 전필순은 기독교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진보인사였다. 전필순은 사장이 된 후 의도적으로 한국인 직원만을 채용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선교사를 배제하면서 조선예수교서회와의 관계가 나빠져 감리교를 배제하게 되고 진보인사의 글을 자주 실으면서 서북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서울과 영남을 중심으로 정치력과 주도권이 집중되어 온 한국에서는 서북 지역은 역사적으로 홀대받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외부 사상과 요소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에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증한 데에도 이러한 요인이 영향을 주었다.

 

정리하면, 1920년 이래로 나타난 한국 교회의 분열은 전통적으로 한국에 있었던 지역 갈등이라는 배경 하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의 갈등, 교파 사이의 신학적 문제, 교파 안에서의 지역 갈등, 선교지 분할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등에 의한 것이었다.

 

보론: 선교현지의 독립과 선교사의 활동,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한국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의 상황에 대처한 것을 두고 그들이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쉬워도 선교사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지혜로운 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선교사들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아쉽다는 입장을 가질 수는 있다. 종합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무조건 반민족주의자’,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공정한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개화파 지식인의 친일 행위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했을 때, 대표적인 사람이 윤치호다. 윤치호가 쓴 일기가 있다. 50년 분량의 일기가 남아 있다. 윤치호의 감정과 그가 이해한 시대적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윤치호는 분명 친일을 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맞다. 그런데 친일의 동기가 복잡하다. 일기를 통해 보자면 윤치호는 스스로 자신의 친일이 애국의 다른 방편이라 생각한 것 같다. 한국이 잘 살고 부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일본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진화론이라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었다. 윤치호는 서구화된 나라, 이상적인 체제와 질서를 갖춘 나라를 원했다. 윤치호는 처음에 일본에 저항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체념하고 일본의 수준에 올라야 한다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를 보통 친일로 평가하고 이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윤치호의 일기를 읽어 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다양한 해석의 틀로 신중하게 내릴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친일의 유형을 다양하게 구분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윤치호의 행적의 원인과 결과는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다.

 

 

 

5. (복음주의) 변절: 제국과 교회, 그리고 신사참배

 

일본 군국주의와 신도 강요

 

1930년대부터 일본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상하이 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진행되고 1945년 원폭에 의한 결정적 패배를 맞으면서 마무리된다. 이 시기에 일본은 한국 교회를 천황제와 신도주의에 협력하는 도구로 활용하려 하였다.

 

신도(神道, Shintoism)는 원래 고대 일본의 가미’(, )에 대한 신앙에서 기원한 것으로 토착신앙에 불교, 도교 등의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일본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인 듯하지만, 종교적인 요소를 세속적인 것과 결합시켜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종교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왔다. 신도는 일본 천황권이 강화되는 가운데 정교일치 유형의 조직적 신앙으로 발전하고 1866년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등장하며 근대 일본의 핵심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한국에 신도 사상과 천황제 숭배가 들어온 것은 1876년 개항 직후이다. 그러다가 1910년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국공립 지배 종교로서 강요되기 시작한다. 국지적으로 혹은 일본계 학교 중심으로 강요되기 시작한 신도는 1930년 군국주의가 대두하면서 전국적으로 강요되고, 이에 대한 거부자들은 강력한 처벌과 박해를 받게 된다.

 

이 때 중요한 세 사건을 꼽자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 태평양 전쟁이다. 1930년대 본격적인 군국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과 대만에 이어 중국을 잠식하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사이판을 점령하여 아시아권을 지배한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내선일체라는 사상을, 아시아권에서는 이를 확장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정치적, 군사적 흐름을 확장, 강화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용한 틀이 신도였다.

 

일제의 강압과 굴복하는 기독교

 

강압의 시작은 교육계였다. 교육계부터 접근하는 것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는 많은 아이들이 민족계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 대신 일본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10-30년대 사이에 교육법으로 인해 사립학교가 많이 사라졌을 뿐더러 3.1 운동의 실패 이후에 일본이 한국을 계속해서 지배하고 지배력이 더 강해졌기 때문에 민중은 이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사상통일을 위해 각종 행사를 열고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기독교계 학교는 초기에(1931-1933)는 일관되게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반대했다. 광주, 평양, 원산에 있는 학교들이 저항한 분명한 사례가 있다.

 

이에 일본은 더욱 강력한 제제를 시행한다. 이와 관련한 사건이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다. 1935 11 14일 평안남도 도내 공립, 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도지사가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당시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이 이를 반대한 것이다. 결국 일본 당국은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고 그 회답에 따라 학교장직 파면 및 폐교를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본 교육당국이 내세운 신사참배 정당화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고, 예배행위가 아니라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해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기며 강제하지 않는다.

 

일본의 적극적인 압박 이후 기독교 교육계 내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이 나뉘게 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천주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의 교파는 결국 일본의 주장을 수용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학교를 유지한다. 장로교 역시 1938 9월 총회 차원의 공식 결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장로교는 이와 관련하여 큰 혼란을 겪었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1938 5 교육인퇴를 결의하고 평양 3(숭실중학, 숭실대학, 숭의여학) 및 기타 학교를 잇달아 폐쇄한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1937 2월에 풀턴 성명서를 발표하여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하고 모든 선교계 학교를 폐교한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 역시 1936 2월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하고 1939 1월에 선교부 소속 학교를 모두 폐교한다. 신학적으로 온건한 자유주의를 유지했던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1933 9월 저항 이후에는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로 받아들이며 일제에 순응하고 학교를 유지한다. 이 그룹은 후일 기독교장로회로 발전한다. 역사적으로 1960-70년대에 독재에 저항했던 거의 유일한 그룹인 기독교장로회가 이 당시에는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찬성 논리는 제사 허용 논리와 비슷하다. 신사참배를 일찍 허용했던 교단이 후일 제사에 대해서도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교육계에 대한 압력으로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일반 사회로 퍼져 나가고 교회에도 여러 회유와 협박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1935년부터 교단별로 신사참배 결의가 이어진다. 1935 12월 안식교, 성결교, 1936 5월 천주교, 1938 9월 감리교가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다. 장로교 역시 1938 9월에 결의하는데 당시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세력을 장악하고자 사전 준비를 한다. 각 지역 경찰서장은 총대로 참석 예정인 노회 대표들을 만나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신사참배 논의에 대해 침묵할 것, 동의하지 못할 시에는 불참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시에 투옥할 것이라고 겁박했다. 결국 100여명의 정복, 사복 경찰이 검을 차고 지키는 가운데 신사참배 결의안이 통과된다. 선교사 브루스 헌트가 항의하다 끌려 나가는 사태가 있었지만 대체로는 짜인 대로 진행되었다.

 

이제 일본 당국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예배 순서에 동방요배(황궁이 있는 동방을 향해 절하는 행위) 등의 의식을 강요했다. 종말과 심판을 강조하는 설교와 찬송을 금지했다. 1945년까지 기독교 계열 각종 연합단체가 해산하거나 일본 본부의 지부로 편입되었다. 한국 내 교단 교파 역시 일본 교파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선교사들 역시 적성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안위를 위협받고 자국으로 철수했다. 떠나기를 거부한 소수 선교사들은 포로교환 형식으로 추방당했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였던 사람 중 많은 사람, 특히 지식인 대부분이 이 시기에는 친일을 했다.

 

소수의 저항자들

 

이런 와중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소수의 신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연대로 저항하였다. 거부운동의 유형은 소극적 방식인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 적극적 방식인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으로 나뉜다.

 

청원운동은 193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다. 총회 차원에서 진행되던 청원운동이 일본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고 1935년 이후 공식적으로 금지되자 이 운동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때 등장한 유명한 인물이 박관준(장로, 의사)이다. 박관준은 1939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요인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 저지를 호소하고 급기야는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투척하기에 이른다. 박관준은 이 일로 투옥되고 옥중에 병을 얻어 1945 3월 병원에서 사망한다. 당시 박관준과 동행하여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고 외치고 투옥되어 6년의 옥고를 치른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로 유명한 안이숙이다. 당시에 일본 정계 요인을 통해 청원운동을 한 사람으로는 김선두와 김두영도 있었다. 이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는 일본 정계요인들과 함께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 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사실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본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청원자 측이 이미 일제 식민통치를 인정한 상태에서 벌이는 운동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순교를 각오하고 종교탄압에 대항하여 문제를 폭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내에서는 교역자와 신도가 연대를 맺고 신사참배에 대해 조직적, 집단적 거부 및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심인물은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함남의 이계실 등이었고, 만주에서도 박의흠, 김형락, 김윤섭 등이 활약하였다. 당연히 일본의 탄압이 있었다. 1940년에 나온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이나 1940 9 20일 새벽에 실시한 조선 기독교도 불온분자 이제 검거령은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용학, 주기철, 최봉석, 최상민, 김윤석, 박의흠 등의 순교자가 나왔다. 크고 작은 신사참배 거부 항쟁은 전국 어디에서나 있었고 일본 경찰은 항쟁자에 대해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투옥된 사람은 약 2천여 명에 이르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의의

 

이상과 같은 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신앙 순결운동으로 교회사적 의미가 있다. 당시에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대체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은 임박한 종말론을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근거가 신앙의 요인이 강하기 때문에 이 운동을 단지 신앙 운동으로만 보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황민화 정책,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다는 면에서 민족사적 의의도 있다. 실제로 일본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민족주의자, 즉 체제 반대자로 규정하여 치안유지법, 보안법을 적용하고 불경죄로 처벌하였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활동을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룬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역시 민족주의 운동이나 독립운동으로 수용될 여지가 있다.

 

 

 

6. (복음주의) 분열: 교파분열의 아픈 역사와 새로운 시작

 

개괄

 

일제와 신사가 물러가고 난 후 한국 교회는 이전에 없던 분열과 분쟁을 겪는다. 신사참배 참여와 회개, 일제 잔재 청산, 지역 갈등, 신학적 차이, 교권 다툼, 선교모국 선교부와의 관계 등이 분열의 여러 원인이었다. 해방 전까지는 대체로 복음주의적 통일성을 유지한 집단이었던 한국 교회는 해방 후에는 신학, 체계, 조직, 지향성 면에서 다양하게 나눠진다. 그리고 새로운 교파들이 한국전쟁 이후 유입되면서 한국 교회는 다양한 기독교 교단과 소종파의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서구 기독교의 흐름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신의 분립은 1920년대에 있었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서 갈라진 장로교 그룹의 영향을 받는다. 기장의 분립은 1890년대부터 시작해서 1920년대까지 이어진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후 감리교, 회중교회, 장로교가 연합하여 형성된 캐나다연합교회의 영향을 받는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1940년대에 시작된 WCC와 연관이 있다. 북미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 의해 형성된 결과가 이후 한국 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고신의 분립

 

1952년 고신파 분립은 한국 개신교 역사 가운데 가장 먼저 일어난 교단 분열이었다. 해방 후 한국 교회 재건 당시 경남노회에는 출옥성도와 지지자, 적극적으로 친일한 목사들, 신사참배 강요에 큰 저항 없이 조용히 따랐던 대다수의 목사 및 신자의 세 부류가 있었다. 이 들은 신사참배 참여 목사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갈등한다. 출옥성도는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는 목회를 중단하고 참회하고 자숙하는 기간을 가질 것 등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실상 신사참배를 한 상황에서 이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요원했다. 오히려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가 통용되었고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교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존속한 것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그러던 중 1945 12월에 열린 경남노회 47회 정기노회에서 출옥목사 주남선이 노회장으로 당선된다. 같은 출옥성도였던 한상동은 주남선 및 박윤선과 같이 평양신학교의 보수신학과 정통성을 계승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46년에 박윤선을 교장으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한다. 이 학교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이하 OPC) 소속 선교사 브루스 헌트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이후 출옥성도와 그 외 사람들 사이의 갈등, OPC 선교사와 박형룡과의 갈등 등을 겪는다. 결국 교단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OPC 선교사가 교단의 통일성을 해친다고 판단하고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금하고 경남노회를 삼등분하는 안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출옥성도 지지자들이 저항하고 결국 1952 9월 진주에서 독자적으로 총노회를 구성하며 교단을 탈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탄생한 고려파(고신) 교단은 1956년에 6개 노회를 구성한 후 공식 총회를 조직했다. 당시 대부분 경남 지역에 집중된 350개 교회, 60여 명의 목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고신은 OPC 외에도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근본주의자 칼 맥킨타이어가 세운 국제교회조직)로부터 실질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기독교장로회의 분립

 

일제 당시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함경도 출신이자 평양신학교에서는 배제되었던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의 주도 하에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면서 신학교를 유지해 나갔다.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인 대부분은 친일 이미지, 신학적 자유주의라는 인식 때문에 조선신학교에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7 4 조선신학교 학생 진정사건이 발생한다. 보수적인 학생들이 조선신학교 교육이 근대주의 신학, 성경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 및 합리주의 신학에 물들었다고 판단하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 때 제시한 증거는 주로 김재준의 강의 내용이었다. 장로교 총회의 8인 심사위원회는 김재준이 정통신학을 버렸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인식했지만 박형룡은 김재준의 성경관이 파괴적 고등비평이자 신신학의 교리관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총회적 차원의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모은 한국 목사들은 미국 장로교(북장로교,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원 하에 1948 6월 장로교신학교를 설립한다. 교장은 박형룡이었다.

 

교단이 인준한 두 신학교의 합동문제가 계속 쟁점이 되자 1951 5월 장로교 총회는 두 학교 모두 인가를 취소하고 9월에 대구에 학교를 새로 세운다. 교수진 대부분은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들이었다. 이어 1952 4월 총회에서 김재준 면직을 경기노회에 지시하고 윌리엄 스코트(서고도)의 본국 송환도 결의한다. 여기에 조선신학교 출신에게 교역자 자격(강도권, 안수)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1953 4월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관련 인사 80여 명이 이전 총회 결의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53 6월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인사들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소재 조선신학교 강당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열고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립자조 정신, 세계교회 정신을 강조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가 이 총회 지지에 합류했다. 1954년에는 교단 명칭을 기독교장로회로 정하여 독립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소속 교회는 600여 개, 주로 참여한 사람들은 함경도 출신이었다.

 

고신과 기장이 갈라져 나온 것은 한국 교회의 해묵은 지역 갈등의 결과를 보여 준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선교 초기에 경쟁과 갈등의 소지를 줄이며 한국 교회 성장과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선교지 협약과 할당 정책의 부정적인 이면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의 분열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가 창립된다. 당시 창립총회에 참석했던 김관식은 한국 교회도 WCC에 가입하자고 요청하고 총회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WCC에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이내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는다. 박윤선은 WCC 가입은 정통교리에 대한 위반이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특히 1951년 경남법통노회 소속 교회의 후원을 받은 국회의원 22명이 WCC가 용공집단(공산주의를 용납하는 집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이 가져온 파급력은 막대했다.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 WCC 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 중 김현정, 유호준은 WCC가 건전한 교회 연합이라는 보고를 했고 명신홍은 WCC가 교리적으로는 혼합주의, 정치적으로는 용공이라는 보고를 했다. 1956 41회 총회는 에큐메니컬운동 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연구 후 보고하도록 했다. 연구위원회에는 WCC에 우호적인 한경직, 유호준, 전필순, 안광국과 적대적인 박형룡, 정규오, 박병훈, 황은균이 함께 속해 있었다. 이후 보고한 내용은 WCC에 선택적으로 참여하라는 권유, 즉 친선과 우호에는 참여하되 단일교회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WCC 지지 진영과 반대 진영의 갈등은 계속해서 심화된다.

 

그러던 와중에 총회신학교 3천만환 사건이 발생한다. 1953년 휴전 후 총회가 대구에 있는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부지 대금 3천만환을 사기당한다. WCC 지지 진영은 박형룡의 퇴진을 주장했고 WCC 반대 진영은 이에 반대하였다. 박형룡은 1958년에 교장직에서 물어난다. 1959년에는 경기노회 총대 사건이 발생한다. 전국 장로교 노회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경기노회가 두 진영으로 양분된 상태에서 총회에 파견할 총대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인다. 결국 WCC 지지 진영은 서울 연동교회에서, WCC 반대 진영은 승동교회에서 모여 각자 총회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교단이 갈라진 것이다. 이 때 교단은 거의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다. 이후 통합측은 오늘날의 광장동, 즉 광나루에 신학교를 세웠고(장로회신학대학교), 합동측은 한강로에서 신학교육을 하다가 이후 사당동에 새 건물을 세운다(총신대학교). 당시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는 모두 WCC에 가입된 교단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교사는 통합측을 지지했다. OPC ICCC와 관련된 소수의 선교사들은 합동측을 지지했다. 당시 장로회라는 이름이나 학교와 병원 등 대부분의 기반시설은 대다수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은 통합측이 받게 된다.

 

분열 이후에 합동과 고신은 재통합을 시도해 1960년에 통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지도부 인사의 지위 문제 등 갈등이 발생하여 다시 분립된다. 이때 고신의 세력이 이전보다 더 약해진다. 합동은 이후 교권과 관련한 부패 문제로 인해 계속해서 분열해 1979년 합동보수(2005년에 합동과 재통합), 1980년 개혁(오늘날의 합신) 등의 주요 교파 분열을 겪는다. 또한 합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100여 개의 독자 교단이 생겨났다. 현재 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약 200개의 교단이 존재한다.

 

감리교의 분열과 통합

 

감리교는 해방 후 세 차례의 분열을 겪으나 모두 재통합에 성공한다. 각각 1946, 1954 1974년에 분열을 겪지만 1949, 1959, 1978년에 각각 재통합한다.

 

1946년 분열은 해방 후 일제 잔재를 청산하며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45 12월 당시 재건파는 친일파 정춘수가 1939년 감독이 된 이래로 만든 제도와 규정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친일 행위에 가담한 이들은 1946 9월 특별총회를 개최하여 재건파에 저항한다. 이들을 복흥파라 부른다. 재건파는 소수였기에 교회를 장악하지 못했지만 평신도 청년운동가들의 통합 노력에 힘입어 1949년 재통합에 성공한다.

 

1954년 분열은 총리원파와 호헌파 사이에 일어났다. 1949년 재통합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될 김유순이 전쟁 중 납북되면서 1951 11월 류형기가 감독으로 선출된다. 류형기는 자격요건 중 목회 기간과 관련하여 시빗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선출되었다. 이후 1953년 총회에서 류형기는 다시 감독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감독 임기 관련법을 개정하자는 의견과 임시법으로 처리하자는 의견 사이의 법 논쟁이 벌어져 교단이 류형기 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된다. 이 때 쟁점이 된 것은 미국에서 보내 온 선교비 문제였다. 당시 류형기는 총회의 허락을 받고 이 돈을 무역업체에 투자했다가 막심한 손해를 보았다. 류형기는 자진 사의를 표했으나 감리교 실권을 쥐고 있던 총리원파의 설득으로 감독직을 회복하였다. 이때 반대하였던 호헌파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1955년에 단독 총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2차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1차 분열의 연장선에 있다. 총리원파는 주로 재건파 인사들이었고 호헌파는 복흥파의 연장선에 있었다. 총리원파는 주로 중부 지방 출신, 호헌파는 주로 북한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역 갈등의 성격도 있었다. 분열은 1959년까지 지속되지만 1959 3월에 경기도 출신 김종필의 감독 선출과 함께 2차 통합이 이루어진다.

 

1974년 분열은 호헌파와 성화파 사이의 갈등에 정동파가 가세하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갈등의 내용은 감독 선출을 위한 주도권 다툼이었다. 성화파 윤창덕이 1970년 감독에 당선되자 불만자들이 자신의 연회를 형성하고 급기야 1975년에 연합총회를 구성하여 새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1974 12월에는 호헌파 김창희가 감독이 되자 성화파는 갱신총회를 열고 자신들만의 감독을 선출했다. 감리교는 당시 네 계파가 자기 세력을 규합한 채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5 11월에 세 파가 연합하고 1978년에 나머지 하나와도 통합이 이루어져 오늘날 감리교는 하나의 교단으로 존재한다. 감리교 분열은 장로교와는 달리 신학적 이유의 분열은 없었다. 감리교가 비교적 자유롭고 포용적인 신학을 지향한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성결교와 침례교

 

원래 성결교는 교파가 아니라 영미권 감리교 계열에서 나온 성결운동으로 등장했다. 이 그룹은 자체적으로 선교회를 결성하여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교단을 만들고 한국으로도 유입된다(킬보른 선교사 1907 5월 한국 도착). 성결교는 조직적인 면에서는 자생교단의 성격이 있지만 신학적 특징 등의 기원은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다. 성결교는 해방 후 연합활동에 적극성을 보이며 1946년에는 WCC 한국지부격인 조선기독교연합회(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1955년에는 복음주의협의회(당시 전미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 세계복음주의연합[World Evangelical Fellowship, WEF]과 연결)에 각각 가입하여 중도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교단 내에서 에큐메니컬인 WCC와 복음주의권인 NAE를 지지하는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결국 1960년 총회에서 두 기관을 모두 탈퇴하자는 안을 두고 투표가 진행되었다. 결과는 탈퇴 보류였다. 이때 보수적 인사로 구성된 양기관 탈퇴안 재검토 지지파가 보수총회를 세우며 교단을 탈퇴한다. 그리고 1962 4월에 자신의 총회를 17회 총회로 선언하고 교단 이름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으로 바꾼다. 그리고 성결교신학교(오늘날의 성결대학교)를 세운다. 나뉠 당시 교세는 기성이 2/3, 예성이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비율은 오늘날에도 큰 변화가 없다.

 

한국에 침례교가 들어온 것은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Malcom C. Fenwick)에 의해서이다. 펜윅은 한국 전역을 누비며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다. 침례교는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그러다가 해방 후 1946 9월 교회를 재건하며 동아기독교회 명칭을 다시 사용하고 목회자 파송제를 청빙제로 바꾼다. 이때 이에 반대한 경북 예천 지역 10여 개 교회가 1947년에 대한기독교회를 설립하여 이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아기독교회는 미국 남침례교단의 후원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동아기독교회에서 주류파로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은 안대벽이었다. 하지만 미국 남침례교 한국 선교회는 안대벽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8년에 안대벽이 총회장에서 물러나고 교단 전도부장직을 맡게 되자 남침례교 선교회는 안대벽에게 불신임을 통보한다. 이로 인해 교단은 주류파와 비주류파로 나뉜다. 결국 1959년에 공식 분열이 이루어진다. 비주류파는 4월에 대전에서, 주류파는 5월에 포항에서 각각 총회를 연다. 대전총회는 기독교한국침례회, 포항총회는 한국기독교침례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남침례교의 지지를 받은 대전총회는 성장했으나 포항총회는 재정 문제로 큰 어려움에 처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통합을 추진하게 되고 결국 1968 4월에 재통합된 한국침례교연맹이 탄생한다. 그리고 1976년에 교단 명칭을 한국기독교침례회로 바꾸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교단의 등장

 

일제 강점기 한국 개신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대 산맥이 있는 가운데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가 소규모로,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이 미미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오순절교회, 루터교회, 나사렛교회, 퀘이커, 그리스도의교회 등이 들어온다. 모르몬교 등의 유사기독교 종파의 유입까지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고 다채로워졌다.

 

해방 후 가장 먼저 들어온 새 종파는 나사렛교회였다. 1948년에 미국 유학파 부흥사 정남수가 한국 내 일부 성결교 집단을 미국 나사렛교회와 연결시키면서 토대를 닦고 1954년 미국인 선교사 도널드 오언스가 내한하여 나사렛신학원을 세우고 이듬해 정식 교단을 발족했다. 현재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천안 나사렛대학교를 운영한다.

 

순복음교회의 원래 이름은 하나님의 성회. 1952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A. B. 체스넛(A. B. Chesnut)이 내한하여 흩어져 있던 오순절형 교회를 모은다. 그리고 1953년에 정식으로 교단을 발족한다. 순복음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용기인데 그가 개척한 천막교회는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성장했다. 순복음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주창했는데 이것은 영혼과 일상, 육체 모두를 온전하게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세례의 표적인 방언, 신유, 예언, 은사, 능력을 강조하고 경제적 풍요 역시 축복의 요소로서 강조한다. 198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 주류 교단, 특히 장로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가 복음을 왜곡하고 불건전한 은사와 표적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이단이나 사이비로 규정했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전례 없이 성장하자 오순절운동을 목회와 신학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났고, 1970년대 이후에는 많은 교회가 오순절화되는 은사주의 갱신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루터교는 1971 1회에 한국루터교회 총회를 열었다. 주로 루터란아워 라디오 방송과 컨콜디아 출판사, 베델성서연구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현재 한국에는 약 40개의 루터교회가 있다.

 

퀘이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친우회는 한국전쟁 후 구호사업 과정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1959년에 미국인 아서 미첼이 최초의 신앙집회를 열면서 공식 모임을 시작하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이윤구(적십자, 월드비전 대표 역임), 함석헌(말년에는 무소속) 등이 있다.

 

보론: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사건

 

한국 교회 100년 역사 가운데 세 가지 큰 사건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의 한국 교회 색깔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신사참배. 해방 이후 한국 교회 전반적인 분열 양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 오순절, 순복음 교회의 등장. 이후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 유형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7.  (복음주의) 부패: 자본주의와 독재 앞에 선 기독교

 

성장과 부패: 자본주의와 독재 앞에 선 기독교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기간은 1950년대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 신자수가 크게 늘어난 시기였다. 분열로 인해 각 교단 간 경쟁 체제가 형성되어 교인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급격한 산업성장과 독재의 시기에 자본주의 및 독재정권의 소극적 방관자 혹은 적극적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1. 성장: 현상, 배경, 원인

 

1960년대 개신교의 특징은 개척교회 수가 증가하고 각 교회가 급격히 성장한 것이었다. 1960년대 인구대비 2.5%였던 개신교 교인 수는 1970년에 10.1%, 1980년에 19.2%에 이르게 된다. 이후에는 성장세가 둔화되어 감소와 증가를 반복하여 1995년에는 19.7%에 이르게 된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천주교의 증가세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1985년에 개신교 대비 신자비율이 30%도 되지 않았던 천주교 신자비율은 1995년에는 37%, 2005년에는 60%까지 증가하게 된다.

 

많은 역사가와 사회학자는 1960년대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교회 성장의 배경에 분단 구조 및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즉 물량적 경제성장의 추진 및 결과가 있다고 분석한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야기한 생존경쟁과 배금주의는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각 개인의 인간성 상실을 낳았다. 전통적인 종교사회학 이론에 따르면 산업화가 진행 중인 도시사회에서 소외감과 정체성 위기를 느낀 이들은 소속감과 정체성을 회복시켜 줄 새로운 공동체를 찾는데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 종교 집단이다. 산업화 시대 한국 도시 상황에서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전통을 강조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불교나 유교보다는 서구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인상을 주면서도 공동체의 친밀함과 소속감을 강조하는 기독교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성장하였으나 상대적으로 도시에서 더욱 급속하게 성장한다. 도시 지역에 메가-처치(mega-church) 현상이 나타날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가난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현세적인 물질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고 설교하는 교회의 성장률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요인과 더불어 교회가 추진한 적극적인 성장 노력 및 효율적인 정책이 당시 시대 상황과 분위기에 잘 들어맞은 것도 성장의 요인이었다. 1970년대 이후 각 교단은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없이 거의 모든 교단이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교회 성장 운동에 돌입했다. 특별히 대형부흥집회는 한국 교회가 뜨거운 전도열과 동시에 외적 성장에 집착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65년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아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1974년 엑스플로 74 대회, 1977년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 초대형 전도집회가 등장했다. 각각 총 참석인원이 수백만 명에 달할 정도로 큰 외적 성공을 거둔 대회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전도 중심 대형집회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러한 집회가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한국 사회의 정치 갈등으로부터 사람들의 시야를 영적으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고 실제로 그 역할을 일정 부분 감당했다는 것이다.

 

대형집회 현상과 더불어 부흥회를 연례행사가 아니라 일상의 행사로 만들어 한국 기독교인의 타계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비주의 집착 신앙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기도원 현상이었다. 기도원 현상은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국인의 습성과 결합해 토착화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기도원은 역사적으로 여성의 활동이 제한적이었던 한국에서 여성이 자신의 신앙을 표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70년대 한국교회 성장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사상 중 하나는 교회성장이론이었다. 교회성장학은 1960년대 풀러신학교에서 도널드 맥가브란이 정립한 후 피터 와그너 등을 통해 확산된 이론으로 선교학의 한 주제였다가 독립된 영역으로 연구되었다. 원래 이 이론은 전도에 관한 사회현상을 사회학, 인류학적으로 연구하여 개종, 교회 성장, 선교의 외연 확장 등에 활용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단순히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매뉴얼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 이론의 기저에 있는 선교학, 사회학적 논의 대신 실용적, 실제적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데 관심을 두고 그렇게 소개되고 퍼져 나갔다.

 

오히려 실제로 한국 교회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사고는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기독교적으로 변형시킨 미국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의 목회 방식이었다. 인간의 희망을 강조하는 나긋나긋한 신학, 듣기 좋은 설교, 관계 중심적 전도 등으로 대변되는 이 방식은 오늘날 메가처치 현상의 기원이 된 소비자 중심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같은 류의 책도 이 연장선에 있다.

 

이러한 요소와 더불어 대학생과 청년의 신앙 각성을 도운 선교단체 역시 한국 교회 성장에 기여한 하나의 요소였다. 원래 선교단체는 19세기 미국 2차대각성 이래 사회참여와 선교를 목표로 등장한 자원단체(voluntary societies)에서 기원했다. 19세기 복음주의는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을 모두 강조하는 총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겪으며 보수 복음주의 단체와 진보 에큐메니컬 진영으로 나뉜다. 한국에서는 해방 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YMCA/YWCA 등의 진보 진영 선교단체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후 외국에서 IVF, CCC, 네비게이토(Navigators), 예수전도단(YWAM) 등이 도입되고, 한국에서 SFC, 죠이선교회(JOY), UBF, 한사랑선교회 등이 탄생하면서 한국 내 기독교 청년학생운동의 주도권은 보수 복음주의 단체가 쥐게 된다. 복음주의 선교단체는 주로 성경공부, 소그룹, 제자훈련, 찬양, 개인전도 등을 통한 복음을 개인적으로 수용 및 적용하는 특징을 가졌고, 당대의 독재와 반민주에 저항하는 일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이후 복음주의 학생운동 내에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1986년 기독교문화연구회 등 진보적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분화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보수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정치적 분화가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단체 중 CCC는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IVF는 진보적이다.

 

2. 부패: 자본주의와 독재 앞에 선 복음주의 기독교

 

1960-70년대 개발독재에 따른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 주요 도시마다 대규모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이들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들을 대상으로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농민선교에 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전도, 예배, 성경공부, 봉사활동 등을 목적으로 산업선교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들어 산업선교 지도자들은 노동자 교육,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조합 조직 지원 등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노동현실과 유리된 전도와 예배가 복음의 본질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68년부터 도시산업선교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이들의 활동은 정부 및 기업과 갈등을 겪었고 공산주의자, 소위 빨갱이로 취급되어 중앙정보부나 경찰 등의 공안기관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시 이들을 지원하며 국가의 폭력에 저항한 단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였다.

 

아울러 1972년 유신헌법 공표 후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인의 운동도 있었다. 1973 11월에는 NCCK가 인권선언을 채택하여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민주화운동 세력이 만나는 물꼬를 트기도 했고 1974 9월에는 기장, 예장 통합, 감리교가 각각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0-70년대, 이후 1980-9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인권탄압이나 폭력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교회 집단은 진보 에큐메니컬 진영이었다. 정치와 종교의 유착을 통한 혜택을 많이 입은 보수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는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세워진 정권에 대한 절대복종이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했다. 일부 양심 있는 인사들은 기도를 통해 통수권자가 바른 길을 가도록 하되 적극적인 사회변혁 활동에는 참여하지는 않는 소극적 저항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보수 진영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재정권이 행하는 폭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축복하였다. 대표적인 행사가 국가조찬기도회였다.

 

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에 국회 내 원내 조찬기도회로 시작되어 매년 진행하다가 197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꾼 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기독교가 국교도 아닌 상황에서 나타난 이런 현상에 대해 보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친 행위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단순한 종교행사는 아니었다는 것은 외국인의 시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당시 조찬기도회에서 활동하는 한국 관료 가운데에 뇌물 수수나 스캔들에 연루된 사람들이 있었고, 조찬기도회가 정교유착 및 부패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1970년대의 유신 찬양, 반공주의에 이어 1980년에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축복하기도 했다. 김준곤, 한경직, 신형균, 김신명, 김창인 등이 조찬기도회의 대표 인물이었다.

 

물론 1960-80년대의 교회의 모든 대외활동이 진보 에큐메니컬 진영과 보수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대립 구도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1981년에 김명혁, 손봉호 등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 조직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온건한 형태로 비판적 시국인식을 드러냈다. 1987 6월 민주화 이후 1987 12월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1989년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탄생했다. 이전의 대다수 복음주의 진영이 비정치를 주장하며 무분별하게 독재를 용인, 옹호했던 모습과는 달리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렇지만 1960-80년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폭발적인 교인 수와 부의 성장이라는 산업화, 도시화 시대의 축복이라는 열매를 따 먹으면서도 그 축복을 공평하게 누릴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당한 자에게 열매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근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데는 실패했던, 게다가 부패한 집단이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8. 에필로그: 쇠퇴와 다원화에 직면한 21세기 한국복음주의

 

쇠퇴와 다원화: 1990년대 이후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그동안 했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1880-90년대는 한국 개신교의 기원, 1900-10년대는 교회의 부흥과 확장, 1910-20년대는 교단의 분화 및 교파별 특징, 1930-40년대는 군국주의 시대 속에서 신사참배 및 투쟁, 1950-60년대는 과거 역사의 결과로서의 분열 및 개별 교단 및 교파의 형성, 1960-80년대는 폭발적인 성장과 부패를 다루었다.

 

1990년대와 새천년을 맞은 이후의 21세기 한국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 전반을 대표하는 특징은 쇠퇴와 다원화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 외부 진영에서 보았을 때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수주의 내부에서 나뉘어졌다는 점에서 이것을 다원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쇠퇴

 

1995년을 기점으로 한국 개신교 성장세에는 정체 현상이 시작되며 2000년대가 되면 개신교의 양적 쇠퇴가 분명한 현실이 된다. 1995년 이후 10년 간 통계적으로 큰 폭의 하락세를 겪은 것을 확인했고 지금도 이 하락세는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은 개신교인들은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특별히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드러내는 연령층은 20대와 그 이하의 유소년, 청소년층이다. 지난 10년 간 한국이 저출산국가가 되었다는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 젊은 층이 한국 개신교 신앙 전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이미 이러한 징조는 1980년대 주일학교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하였고, 이러한 추세는 현재는 30-50세 연령층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2050년 경에는 교회 구성원의 60-70%가 은퇴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교회의 교인 수, 특히 주일학교 청소년 층 감소의 결과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성장과 발전의 한 축이었던 선교단체(para-church)의 쇠퇴로 이어졌다. 기존 교회는 중장년, 노년층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층의 빠른 이탈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이 청년층인 대학 캠퍼스 선교단체에게 이와 같은 현상은 위기였다. 세속화, 다원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자란 20대 초반 대학생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는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사실상 지난 10년 동안에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캠퍼스 전도 활동 자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거나 접근방식을 바꾸었다. 1세대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사망, 은퇴 이후 새로운 세대가 이어받으면서 기존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조직 내부의 여러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세대가 바뀌면서 이전 세대의 열정적인 모습보다는 좀 더 지성적이고 점잖은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물론 복음주의 개신교의 쇠퇴 현상에 대해서는 보다 다각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역사에는 늘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쇠퇴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지 아니면 지속될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1990년대 이후 다원화의 세 가지 요인: 사회에 대한 관점, 교회에 대한 관점, 신학 전통

 

원래 한국 개신교 각 교단은 역사적으로 조금씩 다른 지향점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한국 감리교의 경우 원래 18세기 영국에서 감리교가 태동될 당시의 열정을 유지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미국 감리교가 추구했던 지식 추구와 사회적 지위 상승의 욕구를 결합한 형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국 장로교의 경우에는 선교국인 미국에서 발생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결과로 두 진영으로 분열된 역사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주로 가장 지성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추구했던 미국 장로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발생한 이 논쟁의 결과로 두 계열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는 이 중에서 주로 보수적인 근본주의 유산을 지지하는 방식을 취했다. 선교 본국에서 나타난 사건이 20세기 초 선교지 한국이라는 환경을 만나며 새로운 유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950년대 한국 개신교가 에큐메니컬 진보와 복음주의 보수로 재편된 후에도 한국 개신교인 대다수는 복음주의자로 자칭할 수 있을 만큼 초기에 전수한 보수적인 유형의 신앙을 공통적으로 유지했다. 또한 1990년대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 복음주의자가 반공, 반공과 연결된 친미라는 정치적 대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 한국 복음주의자에게 보수적 종교 성향과 보수적 정치 성향은 한 몸과 같았다.

 

하지만 1987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탄생 등의 정치, 사회적 변혁을 거치면서 복음주의권 내부의 다원화가 나타났다. 이 다원화를 크게 정치 및 사회관, 교회와 교회 외부 조직과의 관계, 신학 전통을 기준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정치, 경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1987년 전후로 의식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로잔언약 등 1970년대 영미권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영향 하에 기독교 신앙과 보수 정치의 일치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상당수 복음주의자가 한국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은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7년 대선 어간이었다. 더욱 결정적인 변화는 2002년 대선을 통해 드러났다. 당시 노무현은 젊은 층의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이는 보수 복음주의권에 속한 청장년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복음주의 교회 내 청년층과 노년층 사이에서 노골적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경험한 노년 세대는 여전히 사회주의 사상과 기독교 신앙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개발독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오류를 여러 수단을 통해 인식한 젊은 복음주의자는 오히려 정의, 평화, 통일, 화해, 상생, 공존 등의 가치가 역사적 복음주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에는 신학적, 신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인식을 지닌 복음주의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2) 기성 교회와 교회 외부 단체 간의 관계

 

1950년대에 처음 소개된 이후 캠퍼스 선교단체는 지역교회와의 관계 설정에 자주 애를 먹었다. 캠퍼스 선교단체의 대부분은 초교파적이고 교회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독립 단체들이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는 상대적으로 다른 교단에 비해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조했다. 따라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선교단체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2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 등장한 자원단체가 미국 장로교의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 사이의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구학파는 교회가 선교와 전도, 사회활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원단체의 존재를 반대했다. 하지만 신학파는 교회 외부 단체가 있어 교회가 직접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교회 정치나 직분에 대한 교파별 인식차는 장로교를 가운데에 놓고 보자면 퀘이커, 메노나이트, 침례교회, 회중교회는 상대적으로 저교회주의에 가깝고(퀘이커 > 메노나이트 > 침례교회 > 회중교회),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는 상대적으로 고교회주의에 가깝다(가톨릭 > 루터교/성공회 > 감리교).

 

한국 내에서 기성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의 갈등이 생긴 데에는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이후 선교단체 및 비교회 조직들이 더 세분화된 후 기존 교회의 정치 및 사회 성향에 비판적인 단체가 등장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러한 단체들이 기성 교회의 의혹과 적대감을 키웠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선교단체 외에도 교회 비판적 외부 조직이 상당히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활동가와 기성교회, 특히 기득권 목회자 사이의 적대감은 상당하다.

 

3) 신학 전통의 차이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일반적인 보수 신학에서 더 엄격한 유형의 16-17세기 개혁파 지향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16세기 칼뱅과 17세기 유럽대륙 개혁교회 및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엄격한 신조주의(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신조)에 근거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웨슬리파 복음주의자(일부 감리교인, 성결교인, 오순절 교인, 일부 침례교인)와 자신을 구별하려 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기보다는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칼뱅주의를 따르는 이들이 보기에 복음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출판물이 나오고 온라인을 통해 이들의 논의가 회자되면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앞선 논의를 종합하여 요약하면, 새로운 천 년을 맞은 2000년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서구 국가가 경험한 것보다 더욱 빠르게 진행하는 세속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한 교회의 쇠퇴 현상에 더하여 다양한 외부 사상의 유입과 자생하는 집단의 성장으로 인한 전례 없는 다원화를 경험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많은 전환점 있었던 것처럼 한국 교회 개신교 130년 역사 가운데에도 많은 전환점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만 대개의 전환점은 각 시대의 인간이 자신의 시대가 인류 및 교회의 종말이 될 것이라 예상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론: 역사가의 특징

 

역사가와 신학자는 차이가 있다. 신학자의 경우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이 입장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절대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역사가(특별히 교회사가)의 경우에는 교회와 신학의 성립 배경을, 즉 이면에 있는 맥락(context)을 본다. 변수에 따른 다양성, 사람과 환경을 보게 된다. 역사가로서 가지는 유익이 있다면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어난 사건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단지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옳고 그름에 대한 내용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일어난 사건의 변수와 상호작용을 본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고, 일어난 사건이 처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떠한 사건을 접할 때에도 이와 관련된 맥락을 고려하고 이면에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