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연구의 목적과 방법
2014-11-13 23:39:14
1.연구의 목적
1517년 이후의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는 운동을 다루는 것이다. 운동사를 다루는 보조적 수단이 인물사, 사상사, 조직사이다. 조직사는 눈에 보인다. 그러나 운동사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조직은 덩그라니 남아 있지만 어느새인가 운동은 없어지고 죽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인물사, 사상사, 조직사는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역사를 이루는 운동사를 다루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역사를 이어갔던 지도자와 따르는 사람들 혹은 스승과 제자들이 이룬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다루는 것이 목적이다. 조심할 것은 지도자와 스승만이 운동의 역사가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과 제자들을 동시에 생각하여야 한다. 루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틴 루터를 이어간 멜란히톤을 생각하여야 하고 또 칼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베자 그리고 그 이후에 사람들 나타났던 하나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사람만 보면 우리는 점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이어서 보면 이것이 바로 운동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운동은 흐름이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물속에 흘러가는 한 사람은 떠 내려가는 것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물 전체의 흐름을 아는 것이 사실 쉽지 않다. 이 때까지 교회사라고 하면 교회라는 조직체를 의미하기가 쉽다. 그래서 장로교 역사, 감리교 역사, 이렇게 할 때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도들의 아주 예민한 모임(예를 들면 웨슬레가 모였던 속회) 속에서 했던 대화의 실제, 그들의 가진 느낌, 그 속에 터져 나오는 힘, 이런 것들은 조직 가운데 포함되지 않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뿐 아니라 사람들로 이어진 그래서 전체를 파악하는 쉽지않은 도전을 해야 한다.
역사를 다루는데는 기여한 인물들의 역사, 기여한 사상들의 역사 그리고 기여한 조직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운동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강물의 흐름 자체, 이것이 운동사이다. 인물, 사상, 조직은 이 강물의 흐름에 떠 내려가는 어떤 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인물사, 사상사, 조직사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이 수단을 통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더 이 강의의 목적을 강조하고자 한다. 인물사, 사상사, 조직사를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려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이다. 역사를 인간의 일로만 설명할 수 없듯이 역사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역사라는 도화지를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다. 역사 가운데 인간이 하는 일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강조하면 초역사주의가 되고 그 반대가 되면 인간의 모든 일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나 인간에게 역사를 맡기시고 역사를 진행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물사, 사상사, 조직사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운동사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이 운동사 강의를 통해서.....
첫째, 하나님나라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언약적 원리로 진행된다. 언약원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호 작용이다. 역사를 연구하여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미 주어진 원리인 헤세드와 에메트를 가지고 역사를 평가하려고 한다.
둘째, 역사 비판능력을 배워야 한다. 언약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세상 역사도 평가하려고 한다. 하나님나라와 세상역사는 구별할 수 있으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상 역사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셋째, 인물, 사상, 조직도 연구하지만 그런 것을 초월한 그 시간 공간 속에서 이것들이 가지는 의미의 총체성을 알아야 한다. 왜 독일과 스위스에서 먼저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나중에 화란과 영국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청교도 운동은 대륙에서 일어난 개혁이 뒤늦게 영국에 들어간 것인데 왜 종교개혁이 도버해협을 건너는데 100년이 걸린 것일까? 이런 것들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아야 한다.
넷째, 하나님나라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상황의 시점은(시작기, 개혁기, 완성기, 쇠퇴기)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수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언약적 행위로서 이 주어진 상수에 따라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2.연구의 방법
2.1. 역사로서의 성경
흐름이 흘러가는 것을 파악하기가 참 쉽지않다. 동영상 촬영을 한다면 뭐가 떠냐려가는 것은 보이겠지만 단면은 파악이 안되는 것이다. 단면과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보려면 단층 촬영도 동시에 하여야 하는 것이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런데 이 흐름을 파악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하며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바로 역사로서의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 가운에 역사로 주어졌다. 특히 성경속의 역사 다룸은 단순히 역사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보통 여호수아부터 에스라 느헤미아까지를 역사서라고 하는데 사실 오경도 철저히 역사서이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지에 섰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역사로서의 성경을 이야기 할 때 성경 전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역사서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시대의 단층 촬영을 하고 그 흐름을 이어갈 것인가를 명백히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의 성경훈련이 운동사를 공부하는데 결정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역사로서의 성경, 이것이 우리의 한계를 넘어갈 갈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역사로서의 성경을 보는 기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원리 즉 언약적 충성과 언약적 사랑이다. 이 두가지 축으로 역사를 평가하게 될 때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잇는 힘이 생긴다. 단순한 사건 위주의 역사, 인물 위주의 역사, 사상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하나님은 어떻게 지키셨으며, 이스라엘은 어떻게 지키지 못하였는가 이런 관점으로 성경의 역사가 신약 까지도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역사서란 개념이 있지만 성경자체가 역사기록이다. 역사서 뿐만 아니라 오경도 역사이다. 성경에 예언서, 시가서, 역사서, 오경 이런 장르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역사서외에도 성경은 어디나 역사의식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더 명확하게 역사서를 가진다. 구약의 여호수아, 왕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아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 사도행전, 계시록이 역사서 범주이다. 모든 역사 연구자에게 당혹한 것이 역사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어떻게 역사를 평가할지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서 아주 선명한 판단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이 명확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적 헤세드와 에메트이다. 이것이 언약적 원칙이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이 원칙을 따라 진행되었다. 우리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500년 교회 역사를 판단할 때도 이러한 성경자체의 판단 원칙을 따를 것이며 또한 성경연구를 통해 역사를 판단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당신나라를 언약백성을 통하여 진행시키는 역사가 운동사이다. 인물사, 조직사, 사상사에 비하면 운동사는 자칫하면 주관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완전히 객관적인 것은 없다.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학문이 논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논리자체가 완전한 것도 아니다. 주관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성경자체의 기준을 가지고 역사를 평가하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평가 기준을 가지고 교회사를 평가하는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 성경역사와 교회사의 연관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역사는 역사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평가한다. 성경의 역사평가 기준은 선명하고 분명하다. 그 기준은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과 언약백성간의 언약적 자비와 공의로 진행된다는 것이고 세상나라는 하나님나라의 보조적 역사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평가할 때 과거의 이미 고정된 사실인 역사는 미래를 평가하는 것 보다 쉽다. 운동사는 역사학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에 의해 진행되는가? 이것을 찾아 내려는 것이다. 종교개혁들 운동사는 16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종교개혁 운동의 흐름에서 인간들이 의도하지 않은 공통된 방향과 목표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라토렛은 기독교 역사를 하나님나라의 확장(expansion)으로 정의하며 중세기의 막힌 것이 터져나온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설명하였다. 16세기가 중세의 곪은 것이 터져나온 것이라면 17세기는 내면화, 체계화를 통하여 그것이 정리되고 발전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운동사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전체 계획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역사의 진행 원리인 언약적 자비와 공의는 성경역사 가운데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호수아 23, 24장은 이스라엘의 여리고 전투 승리후에 주어진 지독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이것은 하나님나라 역사의 정점에서 이스라엘의 교만과 타락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의 선포이다. (수23:15-16 언약원리에 따른 역사진행 , 수24:19-20 언약적 질투) 그 다음에 하나님나라 역사의 최저점인 사사시대 말기에는 소망의 메시지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가 제시된 것이다. (삿20 역사의 최저점을 기록, 삿 21:25 왕제도의 기대 ) 또 다시 역사의 최저점에 이른 왕정시대 말기에 언약적 위로가 나타나는데 (왕하25:27-30 여호야긴 재등극 ; 마1장- 여고냐가 예수님의 조상이 됨) 이것은 다윗언약의 모체가 되는 시내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윗언약을 완전케 하시리라는 언약적 자비에 대한 소망이 부어진 것이다. 다시 역대하 36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B.C 610; 첫포로-540;첫 귀환 ; 70년)은 언약적 자비에 기초한 하나님나라 재건의 소망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역사寶庫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 운동사 전개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것을 교회사 연구에 투사할 수 있다. 운동들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백성의 신실한 언약적 반응을 통하여 진행되는 하나님나라 전체 역사의 흐름을 발견하자.
2.2. 인물 그리고 원리, 조직
인물 그리고 원리, 조직을 통해서 하나님나라 역사의 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나라에서 사람, 비젼, 조직, 물질의 순서를 따라 중요도가 낮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순서와 중요도를 따라서 하나님나라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2.2.1. 인물들의 역사를 연구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이전과 이후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을 위해 역사적 지도자, 제자도를 연구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예를 들면 루터의 경우, 루터 이전에 루터에게 박사학위를 준 칼슈타트가 있었고 루터에게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과 바울이 있었다. 특히 바울은 루터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초였다. 그리고 루터 이후 멜랑히톤으로 이어지는 루터교 정통주의를 보아야 한다. 인물들의 역사를 연구할 때 이렇게 선생이 있고 제자들이 바톤을 이어받는 흐름을 보아야한다. 이 흐름을 알게될 때 운동사의 물줄기의 큰 흐름을 알게 된다. 루터가 있던 수도원이 어거스틴파 수도원이었고 루터가 어거스틴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영향을 받은 것과 이후 멜랑히톤을 거쳐 루터정통주의로 고착화되는 과정을 함께 연결하여 보아야 한다. 운동사를 공부하면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나라 역사에 미치는 인간의 부정적 영향을 보게된다. 하나님의 행동하심과 인간의 반응으로 진행하는 역사의 흐름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16-20세기에 걸친 5대 종교개혁을 보면서 이 흐름의 마스터플랜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이 5대 종교개혁의 흐름을 보면 이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명한 마스터플랜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을 위하여 우리는 한 인물만 아니라 그 다음 인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아야 한다.
2.2.2. 하나님나라 원리의 전개사
이것은 소위 사상사인데 하나님나라 역사에서는 원리의 발전역사, 원리의 역사적 전개를 의미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책 십자가의 신학에서 루터 시대에 가졌던 문제가 영적인 피곤감 그리고 윤리적 타락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원리적 혼동이었다고 지적한다. 루터가 집요하게 싸웠던 문제가 원리에 대한 문제였다. 원리에 대한 혼동을 해결하게 될 때 율리적 타락과 영적 피곤함을 해결할 수 있는 기초가 주어진다. 1990년부터 한국에 내적 치유와 영성 운동이 나타났지만 이것이 곧 피곤하게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영성의 시대인데 그 영성 자체에 가장 근본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는 원리가 선명하게 될 때 이런 피곤감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늘 기도하는 하나님나라의 구성요소인 사람, 비젼, 조직, 물질중에서 비젼에 해당하는 것이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루터라는 사람, 그리고 그가 찾았던 원리, 이 두가지인 70%가 전체적인 종교개혁의 상황을 만든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처절하게 본질문제로 싸웠던 루터, 그가 싸웠던 근본 내용 이 두가지가 합쳐지니까 이것들이 허물어져있는 로마카토릭을 붕괴시킬 수 있는 그런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루터교 목사 대부분이 히틀러에게 굴복하였는데 이것은 루터 당시의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와 관련이 된다. 루터는 대단히 이원론적으로 교회와 정부를 구분하였으며 독일농민전쟁에 반대하며 정부가 그들을 진압하도록 허용하였다. 루터는 안정적 삶을 위하여 국가의 필요를 주장하였으나 로마교회처럼 교회가 정부에 간섭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 결과 루터교회는 정치변화에 무책임 하였고 이후에 역사 현장에 무기력한 루터 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독일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루터는 로마 카톨릭처럼 교회가 정권을 장악하면 타락할 것을 우려하여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이원론에 빠져 반대로 정부가 교회를 집어삼키는 경우는 생각하지 못하고 말았다.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막지 못한 원인은 500년을 거슬러 독일 농민전쟁 대한 루터의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2.2.3. 조직의 발전사
조직의 역사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사람, 비젼, 조직, 그리고 돈,,, 아래로 갈 수록 눈에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만 실제 그 마음속에 무엇이 형성되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이다. 조직사를 우리는 연구해야 한다.
웨슬리 운동이 발전되면서 미국이 독립되는 시점에 웨슬리가 쿡과 에즈버리는 미국에 super intendent 로 파송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미국에 가서 교단을 만들고 스스로 비숍, 주교가 된 것이다. 웨슬레는 운동체인 society로 끝까지 남으려고 했는데 쿡과 에즈버리는 웨슬리의 말을 듣지 않고 교단화하여 안수를 주고 목사를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것니 미국 감리교의 시작이다. 또 영국에서는 챨스 웨슬 리가 존 웨슬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몇 사람에게 안수를 주는 사건에 발생하였다. 이것이 운동이 조직화되는 징조이다. 조직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닌데 이것이 society라는 조직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소사이어티라는 조직은 좀 느슨하고 해체되기 쉬울 것이다. 운동의 능력이 빠졌을 때는 이것이 해체될 것이고 해체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웨슬 리가 교단화 하지 않고 끝까지 소사이어티라는 운동체로 남으려고 했던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문제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조직이 운동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조직의 가치를 우리가 20%로 이야기 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연구할 때 역사로서의 성경과 함께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의 역사 그리고 원리의 전개사, 조직의 발전사를 보아야 한다. 루터가 죽고난 뒤에 루터교가 정통화되고 칼빈도 죽고 난 뒤에 칼빈주의가 되면서 정통화가 주장되었다. 정통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확증하자는 가운데 만들어 지는 것이다. 문제는 정통을 주장하는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삶이 썩어 빠지고 죽어 나자빠진다는 것이다.
운동에서 하나님나라를 늘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조직체보다 공동체로 이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조직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웨슬레의 예를 보면 웨슬레 운동은 후대에 조직으로 발전되었는데 1774년에 웨슬레에 의해 미약하게 시작된 감리회 Methodist society가 10년뒤에 15,000명이 되었고 미국의 독립과 영국의 감리회의 성장에 따라 영국에서는 토마스쿡과 에즈버리를 감리회 전체의 감리사로 세웠는데 이들이 스스로 디노미네이션의 수장이 되어 감리교회의 주교, 감독이 되었다. 웨슬레는 디노미네이션을 반대하였으나 쿡과 에즈버리는 목사 안수체제를 갖추고 디노미네이션을 조직화하였고 이것이 감리회에서 감리교회로 바뀌게 된 계기이다. SOCIETY는 운동형태인데 이것이 교회가 되면서 조직체가 되고 그 안에 운동성격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조직에 의존하면 운동의 근본적 정신과 원리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웨슬레는 끝까지 소사이어티를 고수하고 디노미네이션을 반대하였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역사
2014-11-13 23:40:27
3. 하나님나라 운동의 역사
3.1. 정의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정해진 방향대로 진행된다. 종교개혁의 운동사를 보면 이것을 절실하게 께닫게 된다. 16세기부터 21세기 까지의 종교개혁의 역사들이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해신 방향을 따라 진행된다는 것을 보면 볼 수록 느끼게 된다.16세기부터 21세기 까지 무려 600년을누가 마스터 플랜을 가질 것인가? 이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잇는 것이다. 각 시대의 종교개혁들이 이어져 내려가는 연결고리를 보게될 것이다. 궁극적인 것은 이 연결고리를 통하여 긍극적으로 우리가 21세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역사를 이어서 우리 후손들이 주를 기리고 나아갈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찬송가중에 미래에 대한 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전에 현실적 역사 형성 이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지금 종교개혁들 운동사를 연구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1세기이후에 어떠한 것들이 펼쳐질 것인가를 배우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나라를 진행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그 계획이 역사속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속에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을 따라서 움직이는데 이것이 역사속에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하나님나라의 운동의 역사라고 정의한다. 마스터 플랜을 그 당시는 모르나 교회사 오백년을 잘라보면 안다. 시80편은 출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사사시대의 400년 역사를 총정리하여 언약 원리를 따라서 평가헌 것이다.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이 어떻게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려는 것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역사이다.
3.2. 중요성
그 어떤 것 보다도 하나님나라 운동 역사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지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이다. 창1:26-28에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는데 이 명령을 인간이 사단에게 굴복당하는 바람에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주님이 오심으로 이것을 회복하시는데 사람들인 예수님이 오신 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운동사는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개인 역사가 아니라 개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중요하다. 칼빈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칼빈을 통해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 의도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 어거스틴이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리고 베자로 이어갔다. 그런데 후대에 칼빈주의와 루터란은 동일한 시대패턴을 형성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17세기의 정통주의 시대이다. 이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이 하나님나라의 더 깊은 차원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 싸움을 한 것이다.
3.3 이 운동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사람들
루터와 칼빈이 동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어거스틴과 바울이다. 루터에게 박사학위를 주었던 칼 슈타트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다 영향을 미친 사람이 에라스무스인데 그가 훈련을 받았던 것은 Devotio Morerna 현대적 경건의 학교이다. 그리고 루터와 칼빈을 이어간 멜란히톤이나 베자,, 이렇게 연속된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물처럼 흘러가는 이 흐름속에서 누가 물꼬를 어디로 방향을 돌렸는가를 전체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인물사인데 이것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역사에 필요한 도구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3.4. 이 운동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원리들의 전개사
예를 들면 18세기 부흥운동의 주역인 휫필드나 웨슬리는 영국의 성공회 출신인데 휘필드가 미국에 건너가서 교제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드, 플레링 하이즌, 길벗트 테넌트 이다. 이 사람들은 다 칼빈주의자들인데 이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휫필드는 칼빈주의적 감리교도가 되었고 알미니안적 감리교인 웨슬리와 대립하게 되고 결국 관계단절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끼리의 만남, 헤어짐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여러가지 발전 이런 것들을 끊어지지 아니하고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람들속에 들어 있는 것이 사상, 또는 원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시대의 부흥운동의 특징은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휫필드, 웨슬리, 진젠도르프 최고의 신학자들이었다. 그저 단순히 안수하고 병 고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문제든지 원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신학적 토론이 가능한 학자들이 현장 가운데 뛰어들어 일으킨 부흥운동이었다.
3.5 이 운동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조직의 발전사
초대 감리교가 어떻게 조직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왔던가를 그 속에서 볼 수 있다.
3.6. 이 운동의 핵심으로서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을 영어로 form 형식을 교정한다는 의미로 reformation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이 사실은 적합하지 않다. 혁명을 revolu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새롭게 폭발하듯이 터져나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종교개혁이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reformation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사는 단순히 16세기의 종교개혁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각 시대마다 하나님나라 진행에 있어서 무너져 가는 것, 내리막길로 가는 것을 다시 세우고 올리는 운동이다. 그래서 이것은 형태 form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vitality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다른 이름을 쓴다면 revitaliza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가 이렇게 새롭게 올라가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준비가 되어야 한다. 작년말(2006) 기독교 지도자 100인의 모임에 가보니 Transform the world 라는 주제하에 여러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인 준비가 하루이틀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주장을 한 것이 18세기 중엽인데 실제 노예제도가 폐지된 1833년까지 거의 10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존 웨슬리, 존 뉴톤, 윌버포스이라는 이 세 지도자의 준비와 엄청난 내용적 발전이라는 이 익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이 transform the world를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이 질문에 되돌아온 대답은 그저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만일 기도외에 다른 인간의 노력을 하는 것은 인간의 의가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만 기다리는 것이 가장 의로운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적주의(quietism)인데 이 정적주의가 개신교를 망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된다. 인간은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기다리면 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오늘 내가 너희의 하나님됨을 볼지어다 여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동요하지 말고 두려워 말고 확신 가운데 머무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해야할 것인 언약적 원리 가운데 서서 잘못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지 팔짱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속에 정적주의, 이것이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으로서 종교개혁은 revitalization 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들 운동의 개관
2014-11-13 23:43:51
4. 종교개혁들 운동사
4.1. 종교개혁의 정의
종교개혁들 운동이란 하나님나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여기 생명이 총체 생명이다. 18세기 미국의 1,2차 대각성 운동을 revival로 표현하였는데 Revival이란 단어가 오염되어 가지고 한번 반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것은 사람들속에 심령은 새로워지나, 삶이 변화되며 또한 그것이 한 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기 위하여 사람들이 길러지고 조직과 체제가 다 갖추어진 가운데 출발하지 못할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
리포메이션 Reformation은 형태를 다시 조정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외적 형태만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용어자체가 하나님나라 운동사를 표현하는데 충분치 않다. 근본적으로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리바이벌 Revival 이것은 영적각성, 부흥이란 의미인데 이것도 부적합한 표현이다. 16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5대 종교개혁의 흐름을 정리하는 용어로 Revitalization이 좋겠다. 이것은 새롭게 생명을 주는 요소, 총체성을 지향하는 요소를 담아 표현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결국 하나님나라의 총체성을 향한 자각을 통하여 점점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2. 하나의 종교개혁이냐 다수의 종교개혁이냐?
우리가 종교개혁들 운동사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것에 불과하다.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계속하여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기초한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절대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17세기의 후예들이 16세기를 절대화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고 이것은 교회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16세기 이후 계속적으로 종교개혁이 있는가? 우리 선배들이 주창한 바,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사람들은 개혁을 16세기를 답습하여 동일한 내용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사단의 속임이다. 이래서 한때 하나님나라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교회가 포기되고 하나님이 다른 민족교회를 쓰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 필요한 종교개혁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하이델베르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등 17세기의 산물은 16세기의 발견을 고정시킨 것인데 그 이후 사람들은 계속 이것을 읇조리며 그 당시의 역사적 산물이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한 것이다.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배들의 말을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4.3. 16세기에서 20세기의 종교개혁의 개관
16세기에서 20세기의 종교개혁을 미리 개관해 보면 제1차 종교개혁인 16세기는 로마 카톨릭과 투쟁한 외면적, 총체적 종교개혁이었다. 독일의 루터, 제네바의 칼빈 쭈리히의 쯔빙글리 잉글란드의 헨리8세, 스코틀란드의 존낙스가 당시의 주요인물이었다. 제2차 종교개혁인 17세기는 내면적, 총체적 종교개혁인데 내면의 죄와 투쟁하고 내면의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것이 었다. 영국의 청교도운동, 화란의 계속된 종교개혁 독일의 경건주의운동이 이 시대의 운동들이다. 제3차 종교개혁인 18세기는 종교개혁의 외적확대가 이루어진 시대인데 영국, 독일, 미국의 3대룩에 걸쳐 영적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의 진젠도르프, 미국의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 영국의 웨슬레가 중심인물이었다, 제4차 종교개혁인 19세기는 선교의 시대이다. 이것은 중세의 7-8세기이후 중지된 선교운동의 재개를 의미한다. 이 때 경험주의적인 영미 교회의 주도로 세계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험주의적인 영미교회는 총체복음에 무능하였고 그들이 전한 복음은 심령복음, 의료복음, 교육복음의 부분 복음이었다. 제 5차 종교개혁은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성령운동과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영성운동이다. 오순절 운동의 기초가 이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제6차 종교개혁의 시대인 21세기는 삼위일체신학과 인간존재의 공동체성과 역사성 신학에 기초한 삼위일체 운동, 언약운동, 공동체 운동, 역사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4.4 16세기 이전의 종교개혁은 없나?
기독교 국교화 이전의 박해시대에는 박해 자체를 견디는 것과 지나친 순수주의(도나티스트 등)를 극복하는 일, 이단들의 득세(신비주의, 영지주의 등)를 극복하는 일, 이 세가지가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기독교 박해이후 시기는 (4-15세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하는 이전의 싸움보다 더 힘든 문제가 대두되었다. 하나님나라의 범위가 커진 가운데 굉장히 어려운 싸움을 하게된 것이다. 갑자기 물꼬가 터졌으나 준비가 안됨으로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이 가운데 다시금 재활한 것이 수도원 운동이고 선교운동(7-8세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타락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분파들이 생기고 이것들이 박멸되는 기간들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새로운 Revitalization 재활이 나타나지 못한 가운데 드디어 곪은 것이 터져 나오는 16세기가 도래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개혁의 물결이 간간이 나타났던 것이나 16세기에 비로서 개혁의 큰 풍랑이 일게된 것이다. 롤란드 베이튼이 지적했듯이 루터의 위대함은 칭의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알버트 맥그라스도 루터는 중세동안 거의 잊혀진 칭의 문제에 도전하여 인간이 구원을 노력하던 중세시대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는데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16세기 이후의 세기들도 그에 못지 않은 개혁이 계속되었다.
4.5 16세기의 종교개혁
이것은 종교개혁의 첫 시작이다. 일종의 말뚝박기라고 볼 수 있다. 영역을 만들 때 먼저 말뚝을 박듯이 이런 개념으로 16세기를 생각할 수 있다. 17세기는 정지작업 그리고 18세기 이후는 집을 올리는 과정, 이렇게 일련의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의 단계들로 생각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로마카톨릭의 외적 체제에서 분리되어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설교, 성만찬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고 로마교의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함을 16세기 종교개혁 자체가 암시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수 많은 가능성이 열린 것일 뿐이다.
종교개혁들 운동사를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첫째, 세계관으로서의 토라 (공동체적 역사적 존재인 인간) 둘째, 공동체로서의 토라(세계관을 이루는 현실 공동체이며 열매로서의 공동체의 실체) 셋째, 운동으로서의 토라(변화를 시도하는 운동체로서의 공동체) 이 세가지이다.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계관과 그것을 실체화 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가 역사 가운데 어떤 운동을 일으켰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알트라스 맥그라스는 그의 책 십자가의 신학에서 중세기의 영적 피로감은 윤리적 타락이 아니고 교리의 문제였으며 이것을 루터가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라고 말한다. 교리의 문제가 해결되면 윤리도 해결된다. 영이 문제 해결의 기초이다. 근본적 원리에 기초한 삶이 아니면 오래가지 못한다. 오늘날도 삶과 윤리 이전에 교리와 신학이 항상 문제이다. 롤란드 베인턴은 그의 책, 종교개혁사 29페이지에서 루터의 책망의 타깃은 중세의 신학 자체였다고 정당하게 지적한다. 이것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오래갔고 깊이 갔다.(“루터의 원래의 외침은 승무원들에 대한 책망이 아니었다. 그가 반대한 것은 배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말하길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공격했지만 나는 교리를 공격한다고 한다. 중세 카토릭 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병페로서 카톨릭교 그 자체가 그의 공격의 표적이었다.”)
루터는 면죄부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이것은 교리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투쟁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루터는 무엇보다고 종교적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루터는 기독교의 변방지역인 슬라브 국경 근처의 오지에서 성장하였는데 그곳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무기력하고 쾌활한 기풍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다. 그곳 북방의 삼림지대는 여전히 드높은 나무들의 꼭대기를 통해 무한자를 발견하려고 하는 고딕인(Gothic man)의 본거지였다. 중세교회는 공포와 소망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먼저 지옥을 소개하고 연옥을 소망으로 제시하며 면죄부를 연옥탈출용으로 판매하였다. 이러한 중세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그리스도는 항상 루터에게 떠나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루터 개인이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위앞에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진실한 고민을 하였다. 중세에 하나님과 죄인의 간격을 메꾸는 방식은 수도원, 성례, 신비주의가 있었다. 실제 루터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간다. 중세기에는 보통 신자가 행할 십계명과 수도사의 전부포기의 길이라는 이원론이 있었다. 그 결과 수도사에게는 특별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공로사상에 따라 성인들의 잉여공로가 발생하고 이것을 교황이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루터는 문학석사를 받던 22세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성 안나에게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였는데 이것은 중세기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전형적인 길이었다. 마침 루터가 들어간 수도원이 어거스틴 수도원인 것은 진실된 고뇌를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라고 볼 수 있다. 수도원에서 루터가 어거스틴을 알게 되었고 바울을 발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의 인도이다. 인간의 신실한 행동, 이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섭리하신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일시적 평안을 누린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를 해결못한 채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이상한 반발심이 생기는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종교는 인간존재의 가장 중요한 면인데, 이런 점에서 루터는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인간이었다. 또한 루터는 1511년 로마 여행시 빌라도의 재판정의 성스러운 계단을 오르면서 중세교회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도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성례전은 죄를 통회, 자복하는 은혜의 수단이라고 하는데 루터의 근본적인 고민은 자기 자신에게도 인식되지 않고 감춰진 죄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기억력에 포착되지도 않아서 인식되지 않는 죄, 자존심과 붙어서 상부상조하는 죄, 이런 죄를 다 고발하기 전에는 성례 자체도 죄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루터는 발견한 것이다.
한편 중세의 신비주의는 인간의 노력을 전적으로 포기 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라고 가르친다. 그럴 때 신인합일로 인간의 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이 신화(godded)된다는 것이다. 루터도 이런 것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굉장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그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비참한 인간존재를 발견할 뿐이었다. 진실된 종교인으로서의 인간, 이것이 루터의 위대함이었다. 하나님의 구원과 유기라는 어거스틴의 이중 예정론에 대하여 루터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을 나는 사랑하지 못한다! 나는 신을 중오한다” 라는 신성모독의 말을 내뱉고 공포와 절망에 빠진다. 그는 기도하려고 했지만 티끌만도 못한 인간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유혹자의 방해속에 기도에도 절망하였다. 그는 고해 신부에게 자기의 고민을 고백했지만 오히려 고해 신부는 루터의 마음속의 근본투쟁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루터에게 병적인 자기 성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타인 봉사를 위하여 성서학 공부를 하고 설교자가 되라고 조언하였다. 루터는 처음에 이 조언에 한숨을 쉬었으나 결국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해신부는 루터로 하여금 자신의 밖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남을 섬기는 설교를 하라고 조언한 것인데 문제는 정작 성경공부를 통해 루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다. 1513-1515년 사이 첫 성서강의에서 루터는 시편 21편을 강해하던 중 충격적 내용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를 하신 것이었다. 무지개 위의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가 오히려 심판을 받는 충격적인 말, 이것이 루터에겐 소위 은혜롭고 감미로운 교환이었다. 심판받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모습을 통하여 루터는 우리를 위해 죄를 담당하고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에게 버리심을 당한 그리스도, 인간과 일체가 되고 동일시된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심판주가 오히려 심판을 받는 죄인이 되는 이 무서운 사실을 보게 된 루터는 기독교 천년역사상 십자가상의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장 명백하게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믿을 수 없는 경이는 엄위로우시나 동시에 무한히 자비로운 하나님애 대한 자계시였다. 죄인은 이 분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이것이 루터가 발견한 위대한 진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우리 시대인 21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세계관과 교리에는 각 시대마다 진리의 새로운 차원이 있게 마련이다. 16세기 당시에도 이 세계관 문제의 해결로 인해 독일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리고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교리(원리)에 대한 진실된 고민과 확신 그리고 원리에 따른 공동체 형성 그다음 운동이 일어나는 이 과정을 우리도 생각해야 한다. 루터는 인간의 본질 문제를 찾아서 자기 자신속의 치열한 투쟁을 끝낸 후 온 우주의 문제에 달려들어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내 안의 작은 마음이 해결되면 밖의 어떤 것도 두려워 않고 쳐들어 가는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종교개혁운동사들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4.6. 17세기의 종교개혁
17세기의 종교개혁은 16세기에 이어진 자연스런 결론이다. 16세기가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라면 내적인 것을 충실하게 하려는 것이 17세기의 종교개혁이다. 이 두가지는 반드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내적개혁은 외적개혁에 기초하에 이루어 진 것이다.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는 계속 로마카톨릭 국가로 남았지만 16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화란과 영국으로 파급되었다. 독일의 종교개혁에는 독일민족 근성의 영향으로 이원론적 구조가 유지되었으나 저지대에 사는 네델란드는 독일과 같은 게르만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그 결과 화란교회는 합리성과 일원론적 사고의 독특한 조합을 이루게 되었다.( 칼빈신학은 프랑스적 시고인 일원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요약하면 영국은 경험성에 바탕을 둔 일원론적 경향을, 네델란드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일원론적 사고를, 독일은 합리성에 바탕을 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의 종교개혁 역시 16세기의 이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루어졌다. 17세기는 내실화를 추구한 종교개혁으로서 심령부흥과 내면세계의 집착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죄와 죄성을 분석하며 존 오웬, 존 번연등을 중심으로 죄성과의 신랄한 투쟁의 열성이 일어났다. 인간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은 16세기의 외적 싸움만큼 치열했다. 청교도들이 추구한 내실화속에는 내면의 죄성과의 투쟁과 함께 가족과 사회속에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것도 포함되었다. 내면화, 내실화의 양면의 개혁이 진행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인도하심으로 16세기에 개혁의 말뚝박기를 하고 17세기에 정지작업을 한 것이다. 이 때 영국에서는 청교도운동,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운동, 네델란드에서는 NADRE REFORMATIE, 계속된 종교개혁 운동이(주로 경건을 강조) 일어났다. 여기서도 영국은 경험을 강조하였고 네델란드는 합리성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17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이 16세기 종교개혁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정통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국교회(16세기에 정치적 야욕으로 국왕이 개혁하다가 만 교회로서 전통과 경험을 중시함)는 청교도를 박해하였다. 영국국교회에 대항한 청교도 운동은 국교회의 정치적 야욕과 외적 의식주의를 공격하며 내적 종교개혁을 외쳤다. 국교도의 핍박속에서 청교도는 영국에 잔류하거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잔류파는 결국 국교에 합수되었고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는 어느정도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네델란드이다. 독일은 이원론적 합리론을 자기고 있지만 같은 게르만 민족이면서도 칼빈에게 배운 네델란드는 일원론적 합리론을 가지고 있는데 일원론적 합리론, 이것이 대단히 무서운 경향성을 가진다. 이것은 뭐든지 쌈박하게 밀어버리려고 한다. 17세기가 내면의 경건을 강조하였으므로 주관적, 경험적 심지어 신비적이 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경험과 경건을 추구하는 것이 여기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객관적인 것만 추구한다. 그래서 네델란드는 일찌감치 17세기의 종교개혁이 죽어버렸다. 이후 네델란드는 식민지에 16세기 종교개혁을 그대로 심었고 화란교회속에는 16세기에 대한 향수가 아직도 강하다. 결국 화란속에서 17세기 종교개혁인 내면적 경건운동은 압살당했고 그 이후 화란교회의 역사들은 전부 다 자유주의와의 싸움뿐이다. 그것은 모두 신학적 싸움뿐이고 총체적인 삶의 싸움이 없다. 이후 네델란드교회가 세계교회에 기여하는 것은 17세기의 신학적 정교함뿐이고 종교개혁 운동사에 기여는 전무하다. 독일은 17세기에 비텐베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루터 정통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할레Halle 대학을 중심으로 경건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터 정통주의는 신비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경건주의 운동을 핍박하였고(화란처럼 압살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합리성을 추구하는 독일에서 경건주의 운동은 꽃 피우지 못했다.
4.6. 18세기의 종교개혁
영국의 역사학자, 벨링턴은 18세기를 에반젤리칼리즘 시대라고 말했다. 에반젤리칼리즘이란 복음전파주의 혹은 복음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신학적 노선이라기 보다는 운동의 표현이다. 16세기가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외적인 독립의 시기라면 17세기는 내실 다지기의 시대이다. 그리고 18세기는 밖으로 폭발하는(explosion) 첫 시기였다. 네델란드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17세기에 계속된 종교개혁이 압살된 이후 이미 18세기 개혁에서는 탈락하였다. 화란교회는 신학적 기여는 했지만 더 이상 총제적 삶의 기여를 나타내지 못했다. 18세기 독일에는 경건주의에서 나온 진젠도르프 운동이 일어났으나 루터 정통주의의 핍박과 17세기 독일경건주의의 견제로 독일 전체에 영향을 주지못했다. 그 결과 독일교회도 19세기에는 세계교회에 기여하는 위치에서 탈락되었다. 한편 영국의 청교도 운동은 경험적 요소가 강했디 그래서 복음전파주의가 먹혀 들어갔고 영적 대각성 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국도 경험성과 칼빈의 영향 그리고 영국의 영향으로 복음전파주의가 득세하였다. 미국에서는 네델란드 출신인 프레링하이든이 조지 휫필드, 에드워드와 연합하여 운동을 일으켰고 이 때 복음의 일차확장과 거대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주목할 만한 것은 1720년 독일의 대각성 운동, 1730년 영국의 대각성 운동, 1740년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10년을 주기로 연속하여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대한 손이 세 대륙을 움직이고 계심을 절절히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이 시대는 본격적인 확장이 나타나는데 17세기에 교회속의 근본변화를 가져왔고 이제 18세기에는 그 변화가 외부로 향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복음의 불을 지르고 사람들의 영혼이 변화되면서 이차적으로 여러 가지 외적현상들이 나타났다. 17세기의 내적 확장이 18세기의 외적확장으로 발전될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4.7. 19세기의 종교개혁
네델란드는 17세기에 이미 탈락했고 독일은 18세기에 탈락한 가운데 영미 교회를 중심으로 외적 확장의 2단계 즉 선교시대가 전개된다. 이 시대에 네델란드, 독일은 선교에 기여한 바가 없다. 그들은 아예 선교개념이 없고 자기속에 갇힌 교회가 되어 버렸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였던 화란과 독일 두 민족교회가 하나님나라 역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탈락한 것이다. 그들이 신학과 사상에서는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 역사의 흐름에서는 아무 기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는 영국과 미국이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영국이 뛰어난 항해술로 선교에 기여를 하였는데 18세기 말에는 영국에 성서공회 Bible society가 나타났고 이때 영국과 미국에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나타나서 19세기 선교를 주도하였다.
4.8. 20세기 종교개혁
18세기의 첫 번째 확장, 19세기의 두번째 확장이 20세기 종교개혁의 징조를 보였는데 그것은 그러한 하나님나라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성자론 중심신학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고 성령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의 종교개혁과 자연스런 연결고리를 가진 것이다. 20세기 초반이 성령의 발견시대라면 20세기 후반은 자연스럽게 성령에 대응하는 인간의 영에 관심을 가진 영성시대였다. 성령과 영성의 시대인 20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합리성만 추구하는 화란신학의 기여요소는 더욱 없어지게 되었다.
4.9. 21세기의 종교개혁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이다. 21세기의 조직신학에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신학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의미한다. 이제 이러한 이론적 관심을 실천적 차원에서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19세기 까지의 성자중심신학 그리고 20세기 성령중심 신학에서 이제는 삼위하나님을 균형있게 보려는 신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 삼위하나님에 대한 균형있는 이해에 이를 수 있는 것인데 지금까지 개신교 신학은 인간 구원을 위한 기독론 중심이었고 신론은 삼위하나님의 공통요소에 대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성부론이 없고 인간구원을 중심한 성자론, 성령론, 교회론 이게 지금까지 조직신학의 구조였다. 그러나 이제는 성자, 성령, 성부 신학을 동시에 강조하는 삼위일체 신학이 21세기 신학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사실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그것을 확신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루터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100% 확신하였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하나의 진리일 뿐이지만 그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진리였고 이 진리에 대한 루터의 엄청난 확신이 16세기의 혁명을 일으킨 기초가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삼위하나님의 공동체 신학을 확신할 때 이것이 우리 시대의 혁명의 기초가 되고 교회를 개혁하는 놀라운 도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누구인가? 이것은 시대마다 주어진 중요한 질문이고 도전이다. 일일생활권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속에서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해졌다. 공동체 하나님과 공동체 인간의 상호관계의 신학으로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역사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역사에 정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운동사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동시에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며 놀라운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또 21세기 과제는 총체적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종교개혁의 방향이 하나님나라의 총체성을 향한 것이었다. 잊혀진 삼위하나님의 재발견과 함께 주목할 것이 총체복음이다. 이제는 일원론과 이원론을 모두 극복해야 한다. 이원론은 역사현상을 현상 보이는 그대로 설명하기는 편하나 역사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하며 일원론은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듯 보이나 역시 악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무능하다. 총체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주요한 과제가 일원론과 이원론, 양쪽을 다 극복하는 것이다. 토렌스 T.F.Torrance는 이원론은 사단적이라고 공격한다. 물론 우리도 일원론에 서야하지만 문제는 무책임한 일원론, 역사의 실제를 무시한 게으른 일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역사의 실제를 인정하면서 책임있는 일원론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지금까지 모든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이루어진 것이다. 화란교회의 교만은 16세기외의 모든 종교개혁들을 신비주의, 경험주의로 비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6세기 이후 이어진 종교개혁들 가운데 완전, 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을 엿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이라는 이 파도를 타고 올라가서 우리 시대의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책임있는 일원론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세분이 어떻게 하나를 형성하는가 이것이 신비 가운데 신비이다. 세 분은 완벽한 하나가 되시어 함께 인간을 만드는 결정을 하셨다. 문제는 이 세분이 인간을 만드심으로써 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세분이 하나된 것같이 인간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의도하신 것인데 인간이 독자의 뜻을 가지고 자기 길을 갈 위험한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을 배신할 수도 있는 신적 자유를 가진 인간존재 그러나 동시에 피조물의 한계로서의 인간존재라는 이중성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을 계시해준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때 나타난 위기가 선과 악의 이원론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악의 기원으로 오해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을 귀하게 만드신 것인데,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결정이 역사속에서는 시궁창 같은 이원론으로 오해된 것이다. 사단은 악이 왜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이 악을 창조한 것이라고 인간을 속이고 하나님을 비난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결정이 역사를 이원론으로 보이게 하는 위기를 만든 것이다. 역사 현상적으로는 이원론적이지만 삼위하나님의 위대한 일원론적 연출, 즉 역사를 통해서 이걸 다시 흡수하고 거짓된 이원론을 격파하시는 삼위하나님의 협력 사역 속에서 우리는 참된 일원론의 기초를 찾는다. 무책임한 칼빈주의적 일원론과 너무나 비관적인 루터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길은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고 역사에 뛰어드신 삼위하나님의 사역을 배우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도 장 담그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을 저신의 언약의 파트너로 삼으시는 엄청난 결정을 하셨다. 거짓된 이원론을 격파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참여 이것이 총체복음의 기초이다.
화란신학이 가지는 총체성과 우리가 가지는 복음의 총체성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도이벨트의 영역주권이론은 물질적 총체적과 정신적 총체성을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영적 총체성을 더하여야 한다. 화란신학은 영의 요소를 제거하고 합리적 요소를 따라 지,정,의,물질로 인간을 구분하고 합리주의 때문에 영적요소를 신비한 것으로 여겨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의 가치체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선명하게 구분된다. 화란교회는 정신과 물질세계에 동일한 가치를 둔다. 그래서 세속적이 되었다. 인간을 물질과 정신세계로만 보는 화란의 합리적 일원론에 의한 신학구조에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여 하나님과 관계하는 방식을 새롭게 개발하는 것이 언약신학안에서 가능하다. 언약신학은 삼위하나님이 삼원성 같은데 일원성되심, 이것이 어떻게 인간속에서도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삼위하나님의 일원성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perichoresis, 소위 상호내주라는 표현은 부적합한 표현이다. 차라리 하나님 상호간의 언약맺으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 법적이고 공적인 차원이 언약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하여 영 중심의 인간에서 공동체 중심의 인간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 형성을 통해 인간속의 풀 수 없는 숙제를 모두 푸는 기초를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종교개혁의 전망이다. 명백한 답변은 영의 시대를 통해 합리성의 굴레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외로운 군상속의 인간에게 직접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총체복음의 강력한 능력 이것이 하나님간의, 하나님과 인간간의, 그리고 인간간의 언약에서 나온다..
하나님나라 역사의 흐름과 지리의 관계를 항상 생각하라. 네델란드, 독일교회의 탈락 그리고 영국의 탈락 그리고 미국의 쇠퇴는 복음의 서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태평양 소위 극동속에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주도권이 태평양을 건너면서 하나님나라 바톤이 어떻게 넘겨질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시기적으로 21세기 종교개혁의 변화가 지리적 변화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21세기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개혁의 주도권을 잡게될 것이다.
종교개혁 여명기의 문제
2014-11-14 15:14:31
1. 종교개혁의 여명의 문제
1.1. 중세기 종교개혁/ 개혁운동/ 선 종교개혁
중세기 개혁운동의 근원지는 수도원 운동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의 한계는 그 속의 개인 변화에만 몰두하고 교회 전체의 변화로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로마교의 문제는 심판주 하나님과 은혜주 하나님에 대한 우선순위의 혼돈이었다. 루터의 역할의 위대성은 중세의 혼돈 가운데 은혜주 하나님이 우선임을 발견한 것이다. 거짓도 문제지만 혼돈도 문제이다. 거짓과 함께 혼돈도 사단의 전략이다. 은혜주 이전에 심판주 하나님, 이것이 루터를 두렵게 한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진실한 루터의 고민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것이다. 은혜주 하나님이 우선임을 확신한 루터는 자신이 죽기전에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길 고대하였다. 결국 교리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교리적 혼돈 가운데 있던 수도원 운동, 특별히 신비주의는 하나님나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원리적 문제에 대한 한계 때문이다. 수도원 운동과 달리 DEVOTIO MODERNA 즉 현대적 경건은 일반적 삶 속에서 경건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의 관심은 삶, 윤리의 문제였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는 이런 DEVOTIO MODERNA를 반영한 책이다. 그러나 그속에 여전히 우선 순위의 문제가 남아있다. 왜 그리스도를 본받는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 먼저인데, 이것이 없이 그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한다면 문제이다. 이 운동 역시 교리적 혼돈을 보여준다.
선 개혁운동의 기수는 존 위클리프와 요한 후스이다. 루터보다 백년전에 일어난 운동인데 사실 이들의 개혁내용이 루터에게 그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열매가 없었나? 나중에 루터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후스의 제자가 된 것을 고백하였다. 이 두 운동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익어진 시대”의 문제이며 하나님나라 운동의 섭리적 요소이다. 즉, 인간요소가 아닌 하나님의 요소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우리는 늘 “어떻게 할 것인가? 가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클리프와 후스도 하나님이 준비시킨 자기시대의 역할을 하고 간 것이다. 16세기가 하나님의 익어진 시대라는 증거는 루터 자신도 예상치 못하게 파급되는 운동들이다. 선 개혁운동이 지진의 징후라면 루터의 운동은 지각변동이라고 볼 수 있다. 16세기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익어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운동의 결과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익어진 시대의 차이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운동사에서 사상, 인물, 조직을 연구하지만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운동사의 흐름, 즉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막차를 탄 사람이고 선배의 덕을 본 것이다. 요한 후스가 없었다면 루터의 개혁이 불가능 했을 것이고 쯔빙글리의 취리히 사역이 없다면 칼빈의 제네바 사역은 꽃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 인물, 조직을 보기 이전에 역사의 흐름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2. 세계적 준비로서의 르네상스와 신대륙 발견
16세기 종교개혁의 준비시기에 선 종교개혁이 영적 준비라면 르네상스는 일종의 정신적 준비였다. 그리고 1492년 미 대륙의 발견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서진을 예고하는 물리적 환경의 준비였다.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의 특징은 그리스 로마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였는데 이것은 인간 심성 깊은 곳에 있는 본능적 심리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문제는 돌아간 과거가 히브리적 과거가 아니라 헬라적 과거라는 것이다. 1505년 로이힐린이 최초로 히브리 문법 책을 저술했고 루터가 이책으로 공부했는데 사실 이 책은 진정한 의미의 히브리어가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와 로마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서양인의 고향인 그리스와 로마는 철학, 문학, 역사, 신화(그리스) 그리고 법과 건축(로마)의 원천이었다. 르네상스는 이것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결국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두 사람의 철학의 주석이다. 그리스 로마에 뿌리를 둔 서양적 전통은 히브리 전통과 구분된다. 동방의 삼위일체와 서방의 삼위일체에 차이가 나는 이유도 서방과 동방의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동방은 관계를 중시하여 신비한 합일을 추구하는 한편 서방은 질서를 중시하고 역사 현상 자체를 진리 자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서방의 르네상스는 동방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동방의 책인 히브리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신약성경도 비록 헬라어로 기록 되었지만 그 내용은 히브리 사상을 담고 있다. 르네상스의 인물인 에라스무스가 신약성경을 번역 출간했지만 그것은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 로마식으로 이해한 것일 뿐이다. 서양인들의 히브리 사상에 대한 무지는 중세기 유대인 박해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중세 종교의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의 시대를 추구하였다. 중세는 인간이 소외된 이원론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가 종교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중세는 종교의 본질을 모르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과 종교의 껍질뿐인 시대였다. 그런데 르네상스는 중세 종교의 시대이기 때문에인간이 인간이 소외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종교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인간의 본질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도 실패하고 르네상스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런 피상적인 인간 이해 위에 껍데기 문화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르네상스적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고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의지하며 방황하는 현대 인간은 르네상스의 산물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본질이 이해가 안된 가운데 인간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중세의 종교는 본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점은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전부 르네상스의 아들이라라는 점이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도그마, 즉 교리나 원리에 대한 혐오를 가졌는데 이것이 대단히 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은 확정될 수 없다는 인본주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교황보다 더 중오하게 된다. 그렇다면 르네상스의 아들들인 종교개혁자들이 자기 아버지를 얼마나 극복했을까? 르네상스의 기초는 아덴이지 예루살렘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르네상스의 극복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이들이 성경연구에 몰두했지만 구약성경에 대한 근본적 존중이 과연 르네상스속에 있었을까? 사실 구약성경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는 20세기에 이르러 히브리 평행법의 발견이후 시작된 것이다. 유럽사람들은 평행법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는데 이것은 서방과 동방의 인식론의 근본적 차이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히브리 성경이 가진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를 이해 못한 가운데 성경연구를 한 것이다. 진정한 성경연구의 시작은 20세기 후반이라고 본다. 그 이전에는 전부 그리스 로마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한 것이다.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고대근동 문서가 발굴, 번역, 해석되면서 구약성경을 보는 서양적 시각을 반성하게 되었다. 1929년 우가릿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고대근동의 사람, 인식, 표현이 서양과 다름에 전율하게 되었다. 결국 르네상스의 아들들인 종교개혁가들은 희랍적 시각의 성경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1.3. 하나님나라 운동의 물리적, 환경적 준비인 1492년 미대륙 발견
이것이 오늘 강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중세의 타락은 공간의 타락이었다. 이미 유럽속에 복음이 전파된지 천년이 지나갔는데도 유럽의 기독교는 동방과 중국,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선교에 관심을 쏟지 않고 천년동안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유럽이란 작은 공간에서 안주한 것이다. 오히려 네스토리우스 등 이단들이 동방으로 진출하였다. 성경의 땅 끝 개념을 새롭게 생각 안하고 기독교가 유럽에 안주하는 중세 천년동안 유럽이란 공간이 타락한 것이다. 징기스칸 정복부대의 특징은 신속성과 네트워크였다. 당시의 세상의 그러한 신속함을 보면서도 중세의 기독교는 다른 곳에 가 볼 생각을 안했고, 그 타락해 버린 공간에 안주한 유럽의 기독교는 1492년의 신대륙의 발견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신대륙 발견후 15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야 겨우 청교도들이 수동적으로 영국 국교회의 핍박을 피해서 신대륙으로 피난을 가게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치와 돈의 야욕을 가진 세상사람들은 신대륙에 먼저 들어갔으니 인간적 욕망이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열망을 초월한 셈이다. 1492년 신대륙 발견은 하나님이 주신 세계사적 발견이었는데 이 길을 포기하고 유럽에 안주하는 타락된 공간속에서 곪아 터져나온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본다. 뒤늦게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들어간 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 영국 국교회의 핍박을 받아서 할 수없이 건너간 것이다. 왜 처음부터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신대륙으로 가지 않았을까?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고통이 영국에서 피 말리는 싸움보다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나님나라를 새롭게 만드는 절호의 찬스를 인간이 못쓰고 결국 하나님이 강제로 하셨고 그 이후 16-20세기에 걸쳐 하나님나라 역사가 폭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앞서 가지 못하고 세상의 인간들의 욕망을 뒤따라 감으로 선교사들이 식민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쓰 게된 것이다. 신대륙의 발견이 세계의 준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뒤늦게 깨달은 청교도들은 피난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미대륙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윌리암 펜의 이주가 오늘날 펜실바니아주가 만들어진 근본이 되었고 제세례파가 정착하는 기초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것은 늦은 것이다. 교회가 신대륙 발견 초기에 아메리카 인디언을 전도했다면 미국의 불행한 역사를 막았을 것이다. 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 중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주파는 어느정도 성공을 했지만 영국에 남은 잔류파는 이후 영국 국교회로 해체 흡수되고 말았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주파가 판정승한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영적 대각성이 준비된 21세기의 우리는 어떤가? “랙서스와 올리브 나무”라는 책에서 프리드만은 지구화, 세계화의 급격한 변화를 말하고 있다.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이 세계화의 가장 주요한 신호탄이며 그 이후 그로발 이커너미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1998년에 발발한 전 지구적인 경제적 위기는 10살짜리 어린 경제체제의 미숙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프리드만은 그의 책 “지구는 평평하다”에서 지구가 일일 생활권으로 되면서 이제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1492년 신대륙 발견의 사건에 비추어 볼 때 1989년과 1998년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은 인간의 총체적 삶의 문제이다. 그로므로 하나님나라의 개혁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사의 변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네트워크화된 세계속에서 욕망을 채우려는 기업가의 열정을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열정이 못 따라가고 있다. 17세기도 소극적 피난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서진으로 미국교회의 영향력이 중요해졌다. 16세기의 종교개혁가들은 1492년의 의미를 생각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 때 신대륙으로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 때도 돈과 권력에 혈안된 세상 사람들이 먼저 신대륙으로 갔다. 하나님 나라의 열정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갔나? 오늘날도 기업가들은 치열한 세계화 경쟁속에서 앞서 나가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환경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이므로 다시 요약 설명하겠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준비시기에 선(pre) 종교개혁이 영적 준비라면 르네상스는 일종의 정신적 준비였다. 그리고 1492년 미 대륙의 발견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서진을 예고하는 물리적 환경변화였다. 선(pre) 종교개혁은 중세와의 단호한 단절이며 원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우리도 언약신학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시대의 종교개혁운동의 영적인 준비가 될 것이다. 한편 16세기의 정신적 준비가 르네상스였듯이 오늘날 정신적 준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나마 16세기의 르네상스는 인간의 소망처럼 보였지만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속에서 하나님 없는 인간의 허무와 귀신들린 자의 울부짖음을 볼 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는 하나님나라의 총체복음을 드러내는대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다. 관건은 하나님나라의 물리적 준비에 해당하는 세계화의 문제이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나라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세계화를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절대적 기회로 생각하고 기업가보다 앞질러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총체복음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찾아야 한다. 국가를 초월하여 인간 삶의 각 영역을 지도할 실력있는 인물들을 교회가 길러내야 한다. 앞으로 민족국가 개념이 없어질 것이고 세계화를 기회로 삼아서 사성이 준비되고 전세계적인 안목을 가지며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사람이 지역과 영역을 섬기고 다스리는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나라 운동사를 인물, 사상, 조직을 넘어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의 운동사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가에 있다. 16세기 이후 지난 500년을 한묶음으로 꿰는 설명을 발견하고 이 설명을 가지고 21세기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나라 역사해석이 교회사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사에서는 1492년의 사건을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이 사건이 16세기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 그러나 17세기 청교도들이 피난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추구했던 쯔빙글리나 칼빈이 왜 신대륙으로 갈 생각을 먼저 하지 않았을까. 신대륙의 인디안 문제를 교회기 먼저 처리했더라면 미국의 실패와 오욕의 역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루터와 독일 교회의 종교개혁
2014-11-14 15:18:50
2. 16세기 종교개혁
2.1. 루터와 독일 교회의 종교개혁
루터는 자기 개인문제와의 씨름을 통하여 여기서 얻은 확신으로 교회의 문제를 처리하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면죄부에서 시작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본질적인 것으로 들어갔다. 1517년 면죄부 매매를 지적하는 10.31 만성절 전야의 95개 조항에서 그는 이미 면죄부외에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을 볼 수있다. 그는 교황의 착취에 대한 독일인의 분노, 연옥의 사죄에 대한 교황의 판단권에 의문을 나타냈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외에 교황의 면죄권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하였다. 이것은 결국 교회법, 교황, 교회 권위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진정한 교회는 예정된 자라고 주장하며 기존 중세기의 교회관을 포기하며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였다. 또한 7성례를 부인하고 세례와 성찬만을 오직 성경적 성례로 인정하였다. 7성례는 중세교회가 성례제도를 통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모든 영역을 성례를 통하여 장악하는 권리를 교회가 가지려한 것인데 이것은 중세교회의 거대한 종교적 음모속에서 만들어 진 올가미들이다. 이것을 루터는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지금도 로마교는 미사에(mass 대중이란 의미) 대하여 사제가 미사행위를 할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현재적으로 재현(actualization ;갈보리 사건을 재현)된다고 주장한다. 성찬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시간인데 사람들을 잡고 있으려는 로마교의 거대한 프로그램은 화체설로 성찬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실제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모두 어찌하든지 교회의 위엄을 더하려고 고안한 것이다. 루터는 이것에 반대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은 화체설과 비슷한 주장을 하었고 이것 때문에 종교개혁의 연합이 방해되고 루터는 다른 종교개혁가들에게 의심을 받게되었다. 이것은 루터가 가졌던 실재론적 전통때문이다. 실재론은 중세기 철학적 기초인데 루터는 이것을 그대로 성찬에 반영한 것이다. 쯔빙글리는 성찬을 단순히 상징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도 중세기 철학인 명목론이 반영된 것이다. 결국 중세기의 실제론과 명목론의 철학적 투쟁이 종교개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개혁자들의 연합이 실패하였다.
루터의 위대한 점은 현상적인 것에서 본질로 깊이 들어간 것이고 이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괴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루터의 고민은 개인에서 시작하여 교회 그 다음에 사회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약점은 사회문제였다. 루터라는 종교적 인간은 개인적 차원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루터의 실패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회문제에 대한 루터 교회의 치명적 실수는 루터의 후예들의 실패이며 이것은 500년전 사회문제에 대한 루터의 태도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다. 두려운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이 받는 은혜가 루터 신학의 강점이다. 출발점이 대단히 심오한 종교적 센스(체험)를 가지고 개인의 차원으로 대단히 깊이 들어가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한 개인의 구원의 출발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나라를 이 지상에 세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관적이었다. 루터 신학의 의 치명적 약점은 두왕국 이론이다. 루터는 공동체 형성까지는 갔지만 역사에 기여하는 역동적 주체로서의 개인과 공동체로는 못 나아갔다. 루터신학의 핵심은 십자가의 신학이다. 주님의 과거사역인 성자론을 중심으로 하면서 미래의 주님의 재림을 기대한다. 결국 과거와 미래의 중간이 아무것도 없다. 주님이 초림하신 후 재림 안하고 이천년이 지났는데 이 엄청난 공백을 어찌하겠는가? 현재 사역이 빠진 루터교는 선교개념이 없으므로 물리적 땅끝과 영역적 땅끝에 들어가는데는 속수무책이다. 그 결과 루터교는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그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소극적인 것으로 국한하고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터 개인과 루터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칭의 문제였다. 이것은 중세 교회의 혼동이었고 성경자체에서 나온 혼동이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비로 칭의 곧 구원이 주어진다는 메시지와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는 메시지의 두가지 모습이 다 나와있다. 중세기는 이 둘의 상관관계와 우선순위에 대한 혼동이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 에는 이 두가지 상관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려는 중세의 혼동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중세의 실패는 곧 신학의 실패였다. 중세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중세기 수도원 역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얘기하였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법적이고 공적인 관계를 얘기 못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신비적 관계인 신인합일만 얘기함으로써 중세의 신학적 혼동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을 힘입는 것이 인간의 노력보다 우선 순위라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의 자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의 전부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노력의 상관관계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다시 발하면 루터는 칭의의 구체적 내용과 의를 입은 후에 인간이 해야할 행위를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인간존재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 말은 사실 애매하고 헷갈리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먼저이고 인간의 노력이 나중인 것은 설명했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노력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17세기 개신교의 후예인 정적주의(quietism)는 하나님 앞에서 무동작, 무노력을 강조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으로 받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논쟁은 18세기로 이어진다. 웨슬레가 모라비안 집회에서 가슴이 뜨거워진 다음 진젠돌프를 찾아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하는 진젠둘프의 신학에 대해서 웨슬레는 반대하고 자신의 모임을 새롭게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진젠돌프 공동체는 웨슬레가 행위구원을 가르치므로 웨슬레의 모임에는 구원이 없다고 선포함으로써 웨슬레와 진젠돌프 공동체는 정식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웨슬레가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 감리회의 기초가 된 것이다. 물론 진젠돌프 자신은 역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교리적으로 헷갈렸고 그래서 공동체의 역사적 발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반면에 웨슬레는 인간의 완전성결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웨슬레의 약점은 마치 중세기 은총신학으로 돌아간 듯 완전성결로 가는 구름다리가 없다는 것이다. 웨슬레의 완전성결의 신학을 진젠돌프는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완전성결로 가는 구름다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 단계에 일어난 일, 즉 하나님과 언약맺음으로 주시는 법적인 지위 상승이며 그래서 완전성결이란 언약맺은 후에 천국시민 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이 점이 웨슬레는 선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완전성결로 가는 연결고리가 없게 되었고 로마교의 은총신학과 혼동된 것이다. 루터의 그 다음 문제가 신앙의 표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태도이다.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밑에 두고 상대화하는 로마교에 반대하며 루터는 Sola Scriptura를 주장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에스더서나 야고보서를 평가절하 함으로써 이미 형성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해 버리고 본인이 성경의 권위를 부여하려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였다. 성경을 쓰게 하시고 보존하시고 모으게 하신 것은 로마교가 주장하듯이 교회도 아니고 루터의 오류처럼 인간 개인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섭리이신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교황이 황제 역할을 하는 중세기 교황주의 (PAPALISM)와 황제가 교황 역할을 하는 황제 교황주의 (CAESAROPAPISM)속에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고민거리였다. 정치자체는 부정적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야 할 곳이다. 16세기 정치학에서 에라스무스나 토나스 모어는 국가기관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군주론을 쓴 마키아 벨리는 국가는 단순한 권력집단이므로 권모술수가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국가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식하였고 욕망덩어리인 인간을 조정하고 억제하는 것이 정치라고 본 것이다. 당시의 국제적 정치현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교황주의가 무기력해지면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다. 정치적 안정에 대한 열망이 내부적인 세력규합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이 민족주의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민족주의 체제로 가는 정치를 어떻게 볼것인가? 이것에 대하여 루터는 대단히 냉혹한 현실주의자의 태도를 취했다. 그의 두 왕국이론은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를 구분하면서 국가를 세상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는 수동적 기능으로 보는 한편,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나라인 교회가 세상 나라에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루터는 세상나라는 칼을가지고 악당을 물리치는 소극적 역할을 할 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다. 20세기 루터교의 대다수 목사가 히틀러 통치에 순종한 사실에 대한 이유는 루터의 정치교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거나 목사 개인들이 비겁했거나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목사 개인이 비겁했다면 한두명도 아니고 왜 루터교의 대다수 목사가 도매금으로 그렇게 되었겠는가? 그렇다면 루터의 정치교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롤란드 베인톤은 루터의 교리적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루터가 처한 상황이 루터의 말을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초대되었을 때 루터를 정치 반역자로 몰려는 사람들 앞에서 루터는 군주에 충성을 강조한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이 루터가 정권에 맹종한 것으로 오해했다고 말한다. 베인튼은 독일의 고백교회(개혁교회)도 히틀러에 충성하였으므로 그 문제는 루터교의 정치교리의 문제가 아니고 목사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또한 인간 개인을 강조함으로써 인간개인이 공동체적 역사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것에 매우 약했고 또한 성자론 신학이 대부분이고 성부론이 없이 주님 재림에만 집중함으로써 루터교에 선교신학이 없게 되었다. 이 땅과 역사에 대한(주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영역에 대한) 무지가 나치즘을 간접적으로 돕는데까지 갔다고 본다. 이런 신학이 대다수 루터교 목사들을 히틀러와 타협하게 만들고 무능하게 만든 것이다. 칼빈은 한 왕국을 주장했는데 왜 루터는 두 왕국을 주장했을까? 그것은 루터의 성경 이해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독일근성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칼빈이 구약과 신약의 하나됨을 지나치게 주장한 것은 일원론적 프랑스 근성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 결과 한 왕국이론을 낳은 것이다. 민족 근성이 성경을 보는 시각도 이렇게 다르게 만든 것이다. 이원론적인 루터교에는 구약이 율법이란 개념이 강해서 구약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물론 구약이 율법이지만 그러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는 가운데 독일 근성을 따라서 인간, 정치, 율법, 성경에 대한 이원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교에는 가족적 차원의 하나님나라의 모습만 나타난다. 한편 칼빈신학은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경륜의 발전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구약과 신약의 하나됨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구약처럼 총칼로 이루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신정정치의 교리라는 오해를 받았다. 민족근성이 이렇게 무섭게 역사 가운데 이루는 하나님나라를 다르게 만든다. 결국 루터교의 세상나라에 대한 무관심이 히틀러의 만행을 막지 못한 것이고 이것이 루터교의 책임이고 불행이다 이것은 루터의 두 왕국이론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 증발하고 타락한 역사앞에 속수무책인 독일과 러시아 두 교회의 모습을 본다.1
각주 1
칼빈주의 후예의 세속성의 뿌리가 아마 구약을 신약으로 그대로 가져오려는 태도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런 태도는 하나님나라를 외형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루터의 내면의 투쟁과 칼빈의 하나님주권이론이 결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칼빈의 역사적 책임의 근거가 하나님 절대주권에 근거한 현실 낙관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칼빈주의 후예의 세속성의 뿌리가 아마 구약을 신약으로 그대로 가져오려는 태도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런 태도는 하나님나라를 외형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루터의 내면의 투쟁과 칼빈의 하나님주권이론이 결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칼빈의 역사적 책임의 근거가 하나님 절대주권에 근거한 현실 낙관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적투쟁이 없는 역사적 책임 수행은 능력이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위선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쯔빙글리와 칼빈의 스위스 개혁운동
2014-11-14 15:24:49
2.2 쯔빙글리와 칼빈의 스위스 개혁운동
칼빈은 루터처럼 인간 개인의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지 않는다. 칼빈은 자기의 종교적 경험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개인적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중요한 관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서 전적부패한 인간이 하나님의 택자가 되어버린다. 루터가 말하는 개인과 칼빈의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강조점이 다르다. 칼빈은 이론적 인간을 루터는 실제적, 경험적 개인을 강조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나 칼빈은 하나님의 눙력과 주권을 강조한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칼빈은 하나님의 전격적인 주권행사를 말한다. 루터파운동과 달리 스위스 개혁 운동은 하나님나라를 세상에 이루는데 매우 적극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쯔빙글리는 쥬리히 시민 전체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간주하고 신정국가를 추구하였다. 칼빈과 쯔빙글리의 교회운동은 그런대로 공동체적 인간과 역사적 인간을 강조하였다. 문제는 신관인데 킬빈도 역시 성자를 강조하고 기독교 강교에서 사도신경을 따라서 성부하나님을 창조주로만 설명함으로 결국 성부사역이 불투명해졌고 그 결과 성부의 종말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될 때 생기는 약점은 우리가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가 가는 곳에 현실을 긍정하고 세속화된 태도가 나타나게 된다. 화란교회의 세속성의 뿌리는 이런 신학적 배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2.1 쯔빙글리의 개혁운동
쯔빙글리의 사역은 하나님나라 역사에서 일종의 세례요한의 사역과 같고 그 뒤를 이어서 칼빈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쯔빙글리와 칼빈의 역사를 분리하지 말고 연결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종교개혁 운동사에서 하나님의 그 시대를 향한 손길과 목표를 선명하게 보아야 한다. 스위스라는 나라는 독특하다. 스위스는 독일, 프랑스, 이태리, 오스트리아에 둘러싸여 지정학적 구조상 조그만 도시국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당시 제네바시는 16,000명 주민이 살고 있는데 6000명의 정치적, 종교적 난민을 받아들였다. 쯔빙글리가 사역한 취리히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수로 후일 칼빈의 제네바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제네바는 신학적 저수지이면서 종교적 피난처를 제공하고 난민들에게 훈련과 양육을 하였다. 그 결과 제네바는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런 흐름을 보려는 것이 운동사를 공부하는 의미이다.
쯔빙글리는 1529년의 마르부르크에서의 루터와의 이론 투쟁 결렬후 독일과의 연합에 실패하고 오시트리아의 1531 카펠 2차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하였으나 우리는 순교라고 본다. 루터는 쯔빙글리의 죽음의 의미를 두 왕국이론으로 본 것이다. 역사에 대한 쯔빙글리와 칼빈의 태도는 동일하였다. 쯔빙글리는 취리히 시민 전부가 하나님나라의 선민이라고 하였다. 쯔빙글리의 죽음은 세례요한 같은 장렬한 전사이며 순교이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개혁기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쯔빙글리가 황무지를 일군 사람이라면 칼빈은 씨뿌리는 역할을 한것이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하나님나라의 필요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쯔빙글리의 총체적 사역을 평가할 때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하자. 그는 1519년 취리히에서 공적인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516년 쯔빙글리는 이미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을 연구했고 바울 서신을 다 암송할 정도이다. 이것은 쯔빙글리가 사역의 기본적인 준비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의 사역은 시기적으로 1510-1516의 성령 사역기(축귀사역,치유사역) 1516-1519의 말씀 사역기(성경자체에 몰두) 1519-1531의 사회개혁 사역기(말씀을 실천하는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사회개혁 사역은 19세기에 주로 나타난 것인데 쯔빙글리는 이미 시대를 앞서간 격정적인 사람이었다. 쯔빙글리의 열정의 특징은 자기의 필요가 아니라 교회의 필요에 자기를 적극적으로 맞추어 갔다는 것이다. 적진의 성문을 돌파하는 것이 당시의 하나님나라의 필요이었는데 쯔빙글리는 성문을 돌파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칼빈과 루터가 하나님나라 필요에 수동적으로 내던져진 사람이라면 쯔빙글리는 하나님나라의 필요를 자기가 먼저 알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던진 사람이다. 물론 약점도 있었지만 쯔빙글리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신 종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하나님나라의 필요를 채우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살다간 사람이다. 천국에 가면 쯔빙글리를 먼저 만나보고 싶다. 칼빈은 쯔빙글리와 두터의 기초위에 16세기 종교개혁을 완성한 사람이었다. 루터는 죄인에게 찾아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강조한 반면 쯔빙글리는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느니라 하면서 능동적으로 뛰어나간 사람이다.
16세기에 에라스무스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는 르네상스의 황제라고 불린다.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적인 정신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들이 과연 에라스무스를 극복했을까? 에라스무스는 국제주의자이고 입은 매우 크나 행동에서는 무능하여 그는 고난 앞에서는 무릅을 꿇는 사람이다. 루터는 농민들의 문제 제기 방식이 폭력적인 것을 보고 농민들의 요구를 전부 다 반대해 버렸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스위스에 대한 충성심과 복음을 일치시켜 교회와 정치가 하나된 체계를 생각하여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이 바로 스위스의 용병문제였다. 쯔빙글리는 용병으로 돈을 벌어 사는 스위스의 용병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자신이 용병에 참여하여 그 타락상을 확인하였다. 용병은 망가진 몸, 엄청난 돈, 그리고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다. 돈 때문에 싸운 결과 정신과 몸이 망가지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적극 반대하였다. 루터의 경우 교회는 물리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군사력을 조국과 교회를 위해 사용 가능하다고 하였으며 취리히 시민과 하나님의 선민을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제네바에서 사역한 칼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쯔빙글리와 칼빈은 경륜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신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던 반면 루터는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려고 하였다. 결국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자들은 전부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외친 Sola Scriptura의 한계이다.
쯔빙글리 사역의 본격적 출발은 취리히 교회에서 1519년에 시작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신칭의, 면죄부 반대, 독신제도, 수도원운동 거부, 예전과 성례 축소화, 자국어 예배 등 루터와 매우 일치하였다. 쯔빙글리의 사역변화는 매우 진도가 빠르고 자연스럽고 루터보다 더 원리적, 실천적이었다. 그는 성상을 파괴하였으며, 사순절에도 고기를 먹게 하였고 심지어 교회음악도 금지하였다. 이것은 로마카톨릭이 성상과 음악으로 공간과 시간의 극적인 연출을 하려는 종교적, 외식적 행위를 반대한 것이다. 그는 예배는 영적 예배이지 육체적 교류는 아니라고 하였다. 쯔빙글리는 영적 얘배를 강조하며 성례도 상징적 표지와 기념물로 간주함으로써 교회에서 성찬과 세례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이런 교리가 칼빈을 통해 청교도에게 넘어간 것이다. 결국 예배 가운데 말씀 강해만 남게되었고 예배가 성경 주석시간과 같아짐으로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을 안하려고 하자 그는 법적으로 예배참석을 의무화하였다. 그가 신정정치 공동체를 추구한 것은 고대 이스라엘을 본 받으려는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신정정치를 추구하며 고대 이스라엘이 취리히이므로 취리히 시민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의 혼동을 보여준 한 사례이다. 16세기에 시작된 성경번역 시대는 동시에 해석투쟁의 시대를 열었다. 사단은 주무기인 거짓을 사용하여 진리에 거짓을 섞어 성경해석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과의 영적 전투, 이 전투의 핵심이 해석투쟁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스트리아와 로마교가 연합하여 북부 스위스의 개신교도를 압박하자 쯔빙글리는 북부 스위스와 독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헤세의 필립의 영지인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교리논쟁을 하였으나 성만찬 문제로 결렬되었다.성만찬을 루터는 중세철학의 실재론을 따라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고 쯔빙글리는 중세철학의 명목론을 따라 단순히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 다 중세철학을 대변하여 자기 주장을 편 것이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두 사람 다 중세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시대를 거꾸로 살았다. 루터가 양보하여 성만찬의 효력이 믿음이 없을 경우나 마술적 가능을 가진 것으로 믿는 것은 무효라고 인정하였고 쯔빙글리도 양보하여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의 영적교제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최종 합의문(Formula of concord)에 “오직 영적임재”라는 문구가 없다는 이유로 쯔빙글리는 사인을 거부하였다. 결국 쯔빙글리는 독일과 동맹을 맺지 못하고 로마교와의 1531년 카펠 2차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고 이후 스위스는 종교개혁에 불리한 조약을(로마교 영토에 전도하지 말라) 로마교와 맺게된다. 풍운아 쯔빙글리는 불꽃처럼 타다 간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무의미한 삶이 아니다. 그는 세례요한 같은 사람이다. 쯔빙글리의 기초가 없었다면 칼빈도 없을 것이다.
2.2.2 칼빈과 스위스 칼빈주의 운동
취리히 교회가 스위스의 첫번째 개혁교회라면 제네바교회는 두번째 개혁교회이다. 취리히 교회는 독일어권이었으나 제네바는 프랑스어권이다. 쯔빙글리와 칼빈사이에는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디. 칼빈은 온건한 반면 쯔빙글리는 과격하였다. 두 사람은 다 종교의 외적수단을 사용하는데 매우 제한적이었고 성찬을 영적교제의 통로로만 간주하고 음악도 시편찬송만 허용하였다. 화란교회는 시편찬송만이 영감된 찬송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찬송은 이류 찬송으로 간주한다. 쯔빙글리의 공동체 개념은 좁고 칼빈은 넓다. 그들이 일치하는 점은 성경을 사랑하였다는 것이나 쯔빙글리는 중세 명목론의 시대근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둘 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게 되었다. 루터처럼 신구약의 차이를 강조하면 구약은 죽게되고 영적 차원만 강조하게 되며 쯔빙글리나 칼빈처럼 신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게 되면 구약을 신약으로 그대로 가져오려는 시대착오에 빠지게 된다.
루터신학이 포괄적이고 총체적이지 못한 반면 칼빈은 모든 문제를 성경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문제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만 보려고 한 것이었다. 루터가 작센지방에 묶이고 쯔빙글리가 취리히에 묶인 반면 칼빈은 국제적이었다.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브라질에 선교사도 파견하였다. 특히 루터파는 1555년 아우구스브르키 화의 조약에서 로마교가 루터파를 인정하면서 루터교는 긴장이 풀리고 내적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칼빈은 능동적으로 국제적으로 나아갔으나 루터파는 독일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칼빈의 강점은 설명이 간결, 명쾌, 종합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27세에 썻다. 물론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칼빈주의가 국제적으로 퍼져나간 이유는 간결, 명쾌, 종합의 능력이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첨가된 것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인식이었다. 루터는 인간에 대한 비관이 너무 큰데 반해 칼빈은 인간에 대한 비관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낙관이 크다. 그 결과 칼빈은 교회의 세상에 참여를 단호하게 요청한 반면 루터파는 인간과 인간제도에 대한 비관으로 체념섞인 수동적 참여를 허용할 뿐이었다.1 한편 재세례파는 아예 교회와 세상을 철저히 분리하는 극단적 이원론의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칼빈의 신관의 특징이 나타난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내 죄를 사하신 하나님이었고 이것은 결국 인간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모든 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의 출발은 이신칭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역사가운데 능히 당신의 일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긍정, 이것 때문에 교회가 역사에 참여하는 힘을 얻는다. 재림에 대하여 재세례파는 날짜 맞추기식 이었으며 루터는 자기 생전에 재림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신속한 재림을 포기하고 어거스틴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는데, 재림은 역사의 발전단계를 거치다가 맨 마지막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명확한 미래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재림을 기다리며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나라 건설에 몰두하였고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하였다. 이 지상의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는 교회론이 대두하게 된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따라 선민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누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선민인지 분명치 않다고 하였고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뮌처는 영으로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확실히는 모르지만 신앙고백, 바른 생활, 성례전에 참여의 3가지 객관적 판단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칼빈신학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하심이다. 이 영원한 선하심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두려움을 내어 쫒으며 우리 행동을 선명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두가지 즉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와 언약적 공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단순히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고 언약의 파트너로 우리를 삼는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영원불변하시다는 이런 차원까지는 칼빈이 가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하심이 나타나는 근거가 칼빈의 이중선택론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선택과 영원한 유기의 선택이 그것이다. 영원한 구원의 선택론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확신, 기쁨, 감사를 누렸으며 자신의 염려에서 해방되었고 역사를 바꾸는 불굴의 영웅들이 나오게 되었다. 칼빈은 역사를 개조하고 거룩한 나라를 이 땅에 만들려고 작정하였는데 그 실체가 제네바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강조와 인간의 노력에 대한 강조에서 하나님의 예정, 선택의 문제가 나온다. 그런데 이 사실은 역사의 지평에서 이해가 될 수가 없다.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역사 가운데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이것과 예정이 함께 오게 되면 자칫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칼빈주의가 가지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 역사속에서 인간이 해야 될 것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 언약을 맺게되면 법적신분은 상승되지만 실제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내적인 투쟁을 하지 않으면 특별히 내면의 삶은 썩어 들어간다. 이것이 신학적 위선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투쟁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투쟁, 그 다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의 내적 투쟁이다. 그런데 이 내적 투쟁이 없이 사역에 뛰어 들어감으로 생기는 위선이 칼빈주의의 문제이다. 17세기 화란의 저항가들(Remonstrants) 중의 하나인 알미니우스도 칼빈주의자들속에 인간의 욕망이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생기는 위선을 본 것이다. 화란교회가 동인도 회사를 통하여 식민정책을 시행한것은 도둑질을 한 것이다. 16세기 화란교회가 저지른 온갖 도둑질의 기초가 내적투쟁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만 가지고 사역에 뛰어드는 신학적 위선이다. 화란신학은 단순한 외적 행동만 분석하고 내면세계의 분석이 없다. 신칼빈주의는 우리속의 내면투쟁을 하지 않고 이 세상의 삶에 타협함으로써 칼빈주의 보다 훨씬 더 현세적이 되어버렸다. 윌리엄 화렐이 여행하던 칼빈을 제네바에 붙들어 앉힌 후 칼빈은 아주 정교한 하나님나라를 제네바에 만들려고 하였다. 칼빈은 설교 도중에 웃으면 안되고, 사치를 금지하는 등 아주 사소한 것들 까지 법으로 규제하려고 하다가 결국 2년만인 1539년 제네바에서 추방된다. 그후 1541년에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는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강조하며 구약적 신정정치를 제네바에 이루여고 했다. 예정론을 거부하는 자는 추방했으며 영혼불멸과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사형당했다. 칼빈은 신약의 칼을 구약의 칼과 동일시 한 것인데 이렇게 외부적 압박을 통한 사회정화를 깨끗한 정화라고 보기 힘들다. 칼빈은 내적 강권력이 아니라 경찰적 강권력을 통하여 구약의 신정정치를 그대로 가져오려고 한 것이다. 개혁의 초기에 하나님나라 전쟁을 한 인물들은 말하자면 적진에 돌진하여 성문을 부순 사람들이다. 쯔빙글리는 그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강력한 확신으로 밀어부치는 사람이었다. 이에 비해 킬빈은 개혁을 총체적으로 완성하는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데 실패한 쯔빙글리와 칼빈의 한계를 넘어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지역과 영역에서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칼빈주의의 확장이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스코트란드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칼빈 당시 제네바는 1만6천의 시민이 사는 작은 도시인데 여기서 사람들이 신정정치를 배우고 각자 자기들 나라로 돌아갔는데 문제는 제네바시에 비해 사역의 규모가 훨씬 커진 것이었다. 신약과 구약의 상관관계에서 일치성을 강조하면 구약을 그대로 가져오게 되고 차이성을 강조하면 구약을 폐기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여기에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과 차이성의 이차방정식을 푸는 긴장이 필요하며 상황과 역사에 따라 이 방정식을 잘 풀어 적용하여야 한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 쪽으로 가 버렸고 이것이 가지는 심각한 문제를 알지 못하였다. 칼빈은 성경주석을 일생동안 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계속 고쳐서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이 칼빈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었다. 주석의 발전에 따라 기독교강요도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칼빈의 후예들이 이미 칼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그것을 텍스트북이나 결정판으로 생각하고 체계화 하기에 바빳다는 점이다. 오히려 칼빈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칼빈 신학의 타락의 징조가 보인 것이다. 문제는 칼빈이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강조하다 보니까 칼빈의 후예은이 구약속의 나타난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를 따라 칼로 정복하며, 입에 풀칠하고, 목숨 유지하고 이런 것에 바빳다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를 신약의 경륜으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신약의 탁월한 경륜이 악다구니 같은 현실속에서도 통한다고 믿고 가야 한다. 기독교 초기 300년의 핍박의 순교라는 위대한 증거가 있다. 이런 증거가 없더라도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가면 되는데 칼빈의 후예들은 구약을 따라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하나님나라가 세속화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가 칼에 칼로 대항한 것이 그 증거이다. 청교도인 크롬웰의 국교도와의 전쟁, 화란 오렌지공 윌리엄의 스페인 통치에 대한 독립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이 모두 칼에 칼로 대항한 예이다. 그들은 구약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찾았다. 결국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에 대한 해석의 문제였다. 종교개혁 이후로 성경에대한 해석투쟁의 시대가 열렸다. 사단의 근본적인전략은 거짓인데 이 전략을 최대한 구사한 것이 성경의 해석투쟁이다. 0-99% 거짓으로 승부하는 사단에게 우리는 100% 진리로 대항하는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죽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진리로 승리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가장 능력있는 전술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폭력 무저항이 아니라 죽음으로 승리한 주님의 전략을 쓰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성경해석의 태도 이면에 있는 것은 입에 풀칠하는 생존의 문제이나 그들은 이것을 수면위로 절대 표현 안한다. 이 위선을 까발려야 한다. 결국 관건은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죽기를 무서워 하는 마음의 문제이다. 칼빈의 후예들에게는 살아남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다.
프랑스를 보면 16세기 봉건체제가 봉괴되면서 정치적으로 민족주의를 통한 국가 형성이 시작되는 시기에 종교적 관심과 정치적 관심이 합치점을 갖게 되었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의 스펙트럼을 보면 극단적 일원론인 칼빈주의를 좌익으로, 극단적 이원론인 신비주의와 재세례파를 우익으로 놓으면 칼빈 자신은 중도적 좌익으로 루터파는 중도적 우익에 위치한다고 본다. 사람이 역사적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가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망각하는 신비주의와 제세례파는 순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역사를 망각하는 또하나의 세속주의일 뿐이다. 이것은 이원론속의 세속주의이며 역사를 망각하는 위선적 태도이다. 한편 칼빈주의의 일원론적 태도에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바꾸려는 모습은 있지만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속에 눌러 앉아 있으려는 세속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속에 살지만 동시에 역사의 종말과 개인의 종말을 소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첨예한 영역이 정치와 종교이다. 정치가 명예욕을 가지고 종교를 이용 혹은 배척하려는 전술에 종교가 속으면 안된다. 종교가 여기에 잘못 반응하면 종교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정치에 이용당하고 예속되게 된다. 프랑스의 루이14세는 절대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이런 정치적 야욕속에 종교가 고고하고 단호하게 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 왕들은 로마카톨릭과 연합하여 자국내 종교를 지배하며 자기의 왕권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개신교를 이단으로 핍박하는 프랑스 종교정책에 대항하여 개신교측은 1559년 파리에서 총회(general synode)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칼빈주의적 신조와 교회정치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 개신교는 이미 2000여 교회에 150만 신자로 성장하였다. 로마교는 주로 농부들이나 왕당파들인 반면 개신교는 주로 중소, 대도시의 상인들과 장인들, 일부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개신교가 계속 성장하니까 프랑스 왕은 1562년 1월 칙령을 발표하여 정해진 도시 밖에서 개신교의 교회설립과 예배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1562년 3월 로마교는 프랑스의 vassy에서 대규모의 위그노 학살을 자헹하였고 결국 위그노와 로마교 사이에 3차례 전쟁이 일어나고 양측이 다 잔학행위를 하게 되었다. 오랜 전쟁후에 맺어진 1570년 8월 평화협정에서 프랑스는 위그노에게 무장된 4개 도시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다시 1572년 8월 23일 파리에서만 위그노 1만명이 학살된 성 바돌로뮤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마침내 1598년 낭트칙령을 통하여 개인이 신앙으로 핍박받지 못하도록 되었고 이후 80년간 외적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685년 루이14세가 이것을 뒤집고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종교를 지배하려 하였다. 위그노 전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 속에서 평가해 볼 때 제네바 신정정치나 그것에 뿌리를 둔 위그노 전쟁이 정말 성경적인가? 이것이 신약성경이 원하는 것인가? 신약성경의 기록은 신약경륜이 시작된 극히 초기 단계의 기록일 뿐이므로 신약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의 후예들은 구약의 역사를 그대로 신약으로 가져오려고 한 것이다.(구약의 역사를 신약적 경륜으로 변용하여 가져와야 하는데) 그 결과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에게는 입에 풀칠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게 되었다.
네델란드의 경우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처음에는 루터교, 두번째는 제세례파 그리고 세 번째가 칼빈주의 영향을 받았다. 라틴계인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게르만계인 네델란드에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독특한 구조가 형성되었고 이 구조속에서 칼빈과 달리 청빈의 용기가 없는 칼빈주의 종교지도자들은 정치와 연합한 군대를 조직하여 스페인과 싸웠고 마침내 스페인에서 독립 후 오렌지공 윌리엄이 왕이 되었다. 정치가들의 관심은 종교에 있지 않고 종교는 그들에게 도구일 뿐이다. 원리에서 정치에 대해 근본적인 독립과 우위를 종교가 가져야 하는데 신구약을 일치시키는 신학때문에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게 되었고 칼빈의 제네바 신정정치가 고스란히 물려져 내려와 화란전체가 칼빈적 신정국가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화란사람들이 해외 식민지 개척에 몰두하였고 하나님나라의 정신보다는 구약적 개척정신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 가운데 안주하게 되었다. 문제는 17세기이다. 17세기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종교의 내면화이고 구체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경건이 요구되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화란에서는 지속된 종교개혁(nadre reformative) 운동이 일어났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을 핍박한 것은 왕이었다. 그런데 화란은 왕과 교회가 하나가 되어 교회속에 내면화, 경건운동을 압살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이 운동에는 그들이 용납할 수 없는 신비적, 주관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화란교회는 지속된 종교개혁(nadre reformative) 운동에 있는 신비적, 주관적 요소를 합리주의와 객관주의로 부수어 버렸다. 결국 화란교회에는 합리주의와 객관주의만 남게 되었고 그 이면에는 더러운 세상을 바라보는 세속주의가 있다. 화란신학속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있다. 외적으로는 절대 나타내지 않지만 그러나 실제 삶에 있어서는 돈에 집착하고 강대국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책략이 대단하다.
화란에서는 칼빈의 후예가 17세기 하나님나라 운동인 계속된 종교개혁을 압살하였고 영국에서는 영국 국교회가 청교도를 핍박하였고, 독일에서는 루터교가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핍박하였다. 16세기 하나님나라 운동의 후손이 17세기 하나님나라 운동을 핍박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현실이다. 또 18세기에는 독일 경건주의가 진젠돌프 운동을 비난하고 , 영국 청교도는 웨슬레를 비난하였다. 하나님은 16-17-18세기를 이어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일으켜 가시는데 사단이 뒤따라 가면서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의 후손이 17세기의 종교개혁을 치고 17세기의 종교개혁의 후손이 다시 18세기의 종교개역을 치도록 속이는 사단의 무서운 전략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영으로서 성령하나님을 만나고 영으로서 어두움의 영을 대적하는 영적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학문은 부분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과 영적 체계이다.
각주 1
원리에 충실한 화란교회는 칼빈의 일원론을 따라서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고 세상의 개혁에 의욕이 있었으나 실제적인 모습은 세상과 타협한 세속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에게 세상을 개혁을 만한 하나님나라의 준비된 씨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된다는 것은 강조하지만 자녀가 된 이후의 남아있는 죄성..
- 원리에 충실한 화란교회는 칼빈의 일원론을 따라서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고 세상의 개혁에 의욕이 있었으나 실제적인 모습은 세상과 타협한 세속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에게 세상을 개혁을 만한 하나님나라의 준비된 씨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된다는 것은 강조하지만 자녀가 된 이후의 남아있는 죄성과 부정적인 근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자 못함으로 그것들과의 내적인 싸움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무능한 모습을 나타낸 이유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들의 신학적 원리 자체에는 철저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강조한 칼빈신학을 따라서 구약의 물리적인 하나님나라를 신약에서도 구현하려고 추구하였기 때문에 역사상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실제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막연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에 반해 킬빈신학을 수입하여 장로교회를 형성한 영국 민족은 원리를 화란교회처럼 고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민족근성인 경험주의가 종교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원리는 칼빈신학이지만 원리적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종교적인 경험을 전통으로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첫째, 그들은 칼빈의 일원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국국교도와의 투쟁의 경험상 정치와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정종분리의 원칙을 교회안에 세워놓음으로써 아예 세상의 개혁을 포기하고 말았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자신들 속의 죄성이 남아있는 것을 실제 경험하고 칼빈신학에서는 가르치는 않은 죄성과의 내적투쟁에 열심이었다. 셋째는 은혜의 방편으로 칼빈신학은 말씀과 성례만 가르치지만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은혜를 체험하면서 기도를 은혜의 방편에 포함시킨 것이다. [본문으로]
16세기의 기타 개혁 운동들
2014-11-14 15:27:35
2.3 재세례파 운동( Anabaptist)
거짓 지도자인 로마카톨릭의 세례를 인정안하고 다시 세례를 받으라고 함으로 재세례파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재세례파는 침례교의 전형으로서 미국에서 남, 북 침례교로 꽃을 피웠다. 이들의 인간관은 인간 개인을 강조하는 것인데 루터보다 더 심하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로만 교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보고 교회와 세상의 분리를 통해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하여 교회를 정치,국가와 완전히 분리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신관에서도 극단적으로 성자 예수를 강조하고 동시에 극단적인 예수재림을 강조한다. 결국 루터보다 더욱 과거(예수 초림)와 미래(예수 재림)의 중간에 있는 역사를 썩어빠진 것으로 간주한다. 무력으로 싸워서 예수의 재림을 앞당기려 했던 과격한 재세례파 운동이 독일의 농민전쟁이다. 온건한 노선은 내면세계와 개인 윤리를 아주 강조하여 산상보훈을 문자적으로 지킨다. 미국의 아미쉬 처어치는 아나밥티스트의 후손들 중 순수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키는 순수는 격리가 아니고 확장이다. 하나님나라에서 순수가 중요하지만 순수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이 능력이 되어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국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된 것을 반대하여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미국에 처음부터 정종분리 원칙이 세워졌는데, 개인을 강조하고 사회나 정부에 대한 관심이 적은 미국 동부에 주로 거주하는 남,북 침례교도 정종분리 원칙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2.4 신비주의
신비주의 역시 인간 개인을 강조하며 삼위하나님보다는 단순히 일체되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강조한다. 신비주의 속에는 꼭 삼위가 있을 필요가 없고 그냥 개인이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삼위일체를 부인할 위험성이 크다. 신비주의는 교단을 형성하지는 않고 대단히 비조직적이다.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삼위구분이 없는 가운데 그냥 신과 만나는 신인합일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공동체와 역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신비주의는 종교끼리 다 통한다. 신비주의자들에게는 각 종교의 모습은 그저 껍질일 뿐이고 신비주의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다.
2.5 영국 국교회, Church of England
영국 사람들은 원리 추구에 늘 약하지만 실천에는 도사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원리는 궁극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실제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놀 줄을 모르는 독일사람과 달리 영국사람들은 노는 것을 좋아한다. 영국인은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다. 영국 국교회는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이면서도 예전적으로는 로마교의 전통을 버리질 못한다. 이것이 변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섬놈 근성이다. 원리가 안 맞아도 익숙한 전통을 버리지 못한다. 아일랜드는 영국보다 더 섬놈 근성이 지독하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도 영국근성을 따라서 흘러간다. 사실 17세기에 일어난 영국의 청교도 운동은 이미 16세기 대륙에 일어난 것이 뒤늦게 영국에서 나타난 것인데, 이것도 변화를 싫어하고 전통을 고집하는 영국근성 때문이다. 사제의 권위를 표현하는 로마교 방식인, 옷위에 후드를 걸치는 것을거부하는 청교도 목사들이 국교도에게 화형당한 것은 원리고 뭐고 이미 익숙한 대로 한다는 영국 근성이 영국 국교회에 나타난 명백한 사례이다.
영국사람들은 원리에 관한 논리를 세부적으로 펼치는 것이 불가능한 민족이다. 현실의 삶을 중시하는 섬 근성이 전통과 현실을 추구하는 영국적 민족근성을 이루었다. 정치적 야욕을 가진 왕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은 원리에 세밀하고 치밀하지 못하다. 교회의 수장이 왕이 된다는 수장령은 종교 체제는 그대로 놔두고 단지 교황 대신에 왕으로 대치하자는 것이다. 영국사람은 체제를 고수하려는 전통주의가 강하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통이 편한 것이고 편하면 좋은 것이란 식이다. 원래 영국민족은 세계를 섬길 수 없는 민족이다. 그래서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왕권확림을 위해 로마교와 대항하려고 개신교 교리를 가져온 나라이므로 체제와 외형은 그대로둔 채 신학만 받아들여 영국국교회라는 이상한 짬봉을 만들어 버렸다. 칼빈주의가 스코틀란드에 들어가서 정착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존 낙스이다. 그는 칼빈 신학을 제네바에서 배워 왔고 이 신학을 가지고 스코틀란드의 민족성 개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스코틀란드인의 야만속의 순수성을 정상적인 솔직, 근면 책임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오히려 뺀질이 근성이 강한 잉글랜드는 이런 변화가 힘들다. 영국과 스코트란드는 전통의 역사가 강하기 때문에 외형적인 작은 문제들 격파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청교도는 목사가 후드달린 옷을 입는 문제로 목숨을 걸고 국교도와 싸웠다. 로마교의 전통인 후드를 입는 그것이 원리에는 안맞는데 외형이 국교도의 맘에 드는 것이다. 이렇게 대륙과는 다른 차원의 치졸한 싸움으로 1520년부터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이 기간에 국교도와 청교도간에 업치락 뒤치락한것이다. 영국민족이 원리에 약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영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지역주의가 없다보니 명예혁명으로 왕권이 물러나면서 개인이 자기 신앙을 결정하는 종교의 자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2.6 결론
바울은 고전15장에서 자신이 전통을 극복하는 계시를 찾아갔듯이 사도행전 20:32에서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를 주와 말씀에 맡겼다. 후계자에게 밑긴 것이 아니라 주와 말씀에 부탁한 것이다. 바울을 따라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여기에 3번째 권위인 교회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역사가 쌓일수록 교회사가 도움이 된다. 물론 그 가운데 쓰레기와 다이아몬드를 구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사는 현재의 공동체가 누리는 것 보다 훨씬 탁월한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기준은 첫째가 주님이시고 둘째가 말씀, 셋째가 교회사, 넷째가 공동체이다. 이 네가지 터위에 교회가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기초를 세워보자. 교회사의 각 운동들을 평가하는 두가지 축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관점(성자-성령-성부)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점(개인-공동체-역사적 존재)을 사용할 수 있다. 중세기동안 곪았던 것이 한꺼번에 폭발한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 엄청나게 많은 유파가 형성되었는데 5대 유파로 대별이 가능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5대 유형이 대부분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관 그리고 성자 중심의 신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의 초기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운동사를 통하여 인물, 사상, 조직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방향과 실체를 파악하여야 한다. 또 교회사의 운동의 기여도를 인간 개인의 변화 그리고 교회공동체 형성 그리고 사회와 역사의 역동적 변화주체 이 3가지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7세기의 종교개혁
2014-11-14 15:28:57
3. 17세기의 종교개혁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데 항상 인간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꼬이고 늦어지게 된다. 17세기는 합리주의의 시대였는데 이것은 15세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정말 르네상스의 영향을 극복했을까 의심이 든다. 아마 그리스 로마에 돌아가려는 르네상스의 근본 정신은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르네상스의 아들인 합리주의가 17세기에 판을 칠때 16세기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합리주의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앵글로 색스족인 영국인은 원리에는 빵점인 민족이다. 그래서 16세기에 대륙에서 이미 마무리된 종교개혁을 영국에서는 마무리 못한 가운데 17세기까지 질질 끌고 온 것이 청교도 운동이다. 이에 반해 16세기의 종교개혁이 마무리된 화란과 독일(게르만족인 이들은 영국 민족과 달리 원리에 강한 민족이다.)에서는 17세기에 종교의 내면화와 총체화를 추구한 종교개혁이 이어졌는데 그것이 화란에서 일어난 ‘계속된 종교개혁 nadre reformantie’ 과 독일에서 나타난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화란교회와 독일교회는 모두 17세기의 합리주의의 도전속에서 합리성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17세기에 화란교회와 독일교회속에서 계시의 초월적인 부분은 그대로 믿되 나머지는 되도록이면 합리적, 이론적으로 구성하자는 정통주의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초월적 합리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화란의 합리성이 칼빈적 합리성이라면 독일은 루터적 합리성을 추구하여 게르만 민족적 사고체계를 발전시켰다. 화란속에서 정통주의에 도전하는 또 다른 이성주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정통적 이성주의에 반항하는 본격적 이성주의인 remonstrant 운동이었다. 이것은 계시의 초월적 부분을 아예 부인하고 전적으로 합리적 기초위에서 계시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정통주의와 remontrant운동의 싸움이 결판난 것이 1618년의 도르트 회의인데 여기서 알미니우스와 remonstrant가 정죄되고 정통주의가 승리하였다. 이어서 화란에서 일어난 운동이 계속된 종교개혁 nadre reformantie 이었는데, 종교의 내면화, 성령의 인치심, 종교적 열정 affection을 강조하는 이 운동을 화란의 정통주의는 신비주의로 낙인을 찍어 아예 초기에 싹을 죽여 버렸다. 이에 반해 독일의 정통주의는 경건주의 운동을 반대했지만 화란처럼 씨를 말리지는 않았다. 결국 화란 정통주의는 이성주의인 remontrant를 죽이고(사실 정통주의도 이성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내면화 운동마저 죽임으로써 더욱 합리화로 치달아 객관주의로 빠져버리고 메마른 전통과 신조를 고백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 결과 18세기 개혁운동에서 화란교회는 아예 탈락하여 버렸다. 한 시대의 도전의 껍데기만 보고 근본 내면을 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나라 운동을 억지로 죽여버린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후손들은 17세기의 합리주의의 도전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자꾸 세속 사회가 등장하는 길을 터 주었다. 합리주의가 숭배하는 이성의 신, 이것을 16세기 종교개혁 초기에 죽여야 했는데 이것을 제대로 처리못함으로 17세기에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3.1 화란의 계속된 종교개혁 Nadre reformatie
화란교회속의 Nadre reformatie는 종교적 진리의 내면화운동이며 종교적 실제적 삶의 운동이었다. 신론에 관한 시대의 흐름을 생각해 보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있었던 15-16세기가 유신론(Theism)의 시대라면 17세기는 이신론( Deism)의 세기였으며 18-19세기는 무신론(Atheism)의 시대이고 20세기는 신은 죽었다는 사신 신학(Death of God theology) 그리고 급기야 21세기는 신 개념 자체에 대해 무관심한 시대가 되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와 인식의 변화를 깨닫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가 사단의 이런 역사를 알고 돌파하는 자로 서려면 역사의 전체 흐름 가운데서 그 시대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가야한다. 15세기의 르네상스에 이어 16세기는 르네상스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17세기는 합리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신론의 시대이며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 (Enlightment, Aufklarung) 로서 이성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드디어 이성으로 종교를 공격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하는데 독일의 E, Lessing은 “Reimarus"라는 책에서 유대교에서 나온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기독교의 기초는 사기극이라는 당시에는 정말 무서운 주장을 하였다.
17세기의 네델란드의 상황은 영국이나 독일과 달랐다. 화란에는 칼빈주의자들이 세력을 가지고 정착하면서 더욱 당시의 시대정신인 합리성을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계시에 기초하지만 그 기초위에 세우는 구조물은 합리성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칼빈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알미니우스를 위시한 항거가들(Remonstrnants)이었는데 이들은 아예 합리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를 부차적 요소로 생각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 두 진영이 싸운 1681-1619년의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결과 도르트 신조와 하이델베르크 카테키즘이 나오게 되었고 이것이 화란교회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두 진영의 논쟁의 핵심은 예정론에 있었다. 예정론에는 타락 전 예정설과 타락 후 예정설 두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 되는 문제가 발생히고 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는 해결되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문제가 생긴다. 알미니우스는 롬8:29을 인용하여 예정이 아니고 예지, 즉 미리 아신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였다고 주장했는데, 예지란 하나님이 구원 받을 자를 미리알고 예정했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인간의 선택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만든 이론이다, 이런 이론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협력은혜설, 신인협동설(SYNERGISM ; 멜랑히톤이 주장)이다.
성경에는 역사내재적 요소와 역사 초월적 요소 두가지가 다 있다. 역사초월적 요소를, 인간이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계시에 주시는 이유는 이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그저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라는 것이다. 역사내재적으로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자비가 동시에 보인다. 그런데 역사초월적으로는 인간의 노력이 안보이고 하나님의 은혜밖에 안보인다. 문제는 칼빈주의는 지나치게 역사초월적인 것을 역사내재적으로 가져와서 이해하려고 했고 알미니우스는 정반대로 역사내재적인 것을 역사초월적으로 확대하여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역사초월적인 예정과 선택을 지나치게 역사내재적으로 가져오다 보니 선교에도 열정이 없었다. 역사초월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예정과 예지가 있을 뿐이지만 역사내재적으로는 명확하게 하나님의 초청과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5대교리인 TURIP(Total depravity 전적타락; Unconditional selection 무조건적 선택 ; Limited slavation 이중선택 ; Irresista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 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은 전부 다 역사초월적 요소이고 역사내재적 요소가 거의 없으므로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역사에서 인간이 할 일이 없어진다. 이런 신학의 배경은 로마교의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 노력이 혼재된 엉터리 신학속에서 인간의 노력을 없에 버림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려고 한 것인데 이것이 화란교회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력은 어떻게 되는가?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력을 얘기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로마교로 돌아가려는 것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선배의 치명적 약점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초청이 먼저이고 인간은 이 초청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역사내재적으로는 우리가 이 초청에 믿음으로 반응하여야 하는 요소가 분명히 필요하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전체는 역사초월적 요소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역사내재적 요소인 인간 책임이 명확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이나 항거자(Remonstrants)들이나 이성과 계시의 비중이 다를 뿐이지 다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교회가 17세기의 시대정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중세에는 토마스 아켐피스를 중심으로 경건한 삶을 통한 내면화를 주장한 현대적 경건운동 Devotio Moderna를 일으키기도 했던 화란교회였지만 17세기의 경건운동인 Nadre reformatie를 압살함으로써 화란교회는 18-19세기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주류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하나님나라 운동사에서는 인물사, 사상사, 조직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파도에 얼마나 편승하고 주도적으로 반응하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화란교회는 이런 흐름에 주도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17세기 이성의 시대를 극복하는 체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던 시도가 Nadre reformatie 인데 이들은 토마스 아켐피스등의 Devotio Moderna 현대적 경건의 후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삶의 문제에서 내면적 경건을 이어간 것이다. 문제는 킬빈주의가 이들 가운데 나타난 신비적, 경험적 요소를 추구하는것 그리고 성령의 내적 역사를 본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고 결국 칼빈주의는 시대를 오판한 것이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얘기해 놓고 실제는 돈을 좋아한다. 돈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성에 대한 싸움에서 이성에 대한 신뢰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Nadre reformatie를 압살해 버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화란교회는 교회역사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하나님나라 역사의 주류에서 탈락된다. 인간의 손을 떠난 이상한 하나님나라 운동의 흐름에서 칼빈주의자가 탈락한 것이다. 그 결과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의 청교도는 18세기 이후에도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어져 나갔지만 16세기 종교개혁에 주도적이던 화란교회는 18세기 이후 침묵하게 되었다.
3.2 독일 경건주의
17세기의 하나님나라의 요구는 경건한 내적인 삶을 통한 삶의 총체성이었다. 17세기 독일은 화란과 비슷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루터교정통주의인 Scholastic Luteranism, 즉 이성적인 책상신학이다. 그들은 성경을 기본으로 삼기는 하지만 경직되고 엄격하며 지적인 순응을 요구하는 고정된 교리해석 체계를 가지며 성례의 참여를 중요한 요소로 가르쳤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루터교의 모습이 되었다. 사단의 전략변화를 보지 못하고 옛날 교리만 붙들고 있게 된 것이다. 윌리스틴 워커는 그의 교회사 651페이지에서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합리주의 시대 사조와 맞서 투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합리주의의 영향을받았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중세기 스콜라주의보다 더 편협하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그 시대적 하나님의 요구가 경건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는데 필립 야콥스패너 (1635-1705)와 헤르만 프랭크( 1663-1727)가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주자로서 약 50년간 독일교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체험과 경험을 강조하며 감성(AFFECTION)의 우월성, 평신도의 참여, 세상에 대한 단절과 금욕을 주장하었다. 필립 야콥 스패너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화란의 Nadre reformatie 초기 인물인 빌름 떼이빙크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1670년초 최초의 경건운동인 “경건의 모임”을 시작하여 성경읽기, 기도, 주일설교에 대한 토론을 하며 경건한 열망, 개인의 경건추구 등 경건주의 운동의 원리를 세워나갔다. 당시 독일은 국가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스패너는 정부의 교회 간섭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옳은 비판이었다. 국가교회 형태를 가진 독일교회는 나중에 히틀러의 독재를 막지 못한 치명적 오류를 저질렀다. 그는 또한 성직자를 비판하고 그들의 윤리적 부도덕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성경연구의 새 길을 열기 위한 경건한 모임(교회안의 교회)을 조직하였고 교리에 대한 지적확인이 아니라 삶이 중요성을 강조하며 금욕적 삶과 청소년 교육을 주도하였다. 그 당시에는 이런 대안들이 혁명적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17세기의 종교개혁을 핍박하게 된 것은 사단의 전략에 넘어간 것이다.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루터의 정신을 다시 부활하려한 것인데 결국 스패너는 이단으로 몰렸다. 그는 신조가 아니라 성경을 강조했고 또 성경해석의 차이보다 경건한 삶의 실제를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크는 1686년 성경을 사랑하는 모임속에서 내적인 뜨거움을 체험하고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 후 스패너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1689년 헤르만 프랑크의 본격적 사역이 일어날 때 엄청난 영향과 소동이 벌어졌고 결국 그는 쫒겨나게 된다. 그는 할레Halle 대학에서 신학과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열정적, 독창적인 사람으로서 학문과 동시에 목회를 병행하며 그리고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는데 자금없이 무조건 기도할 때 독일 전역에서 헌금이 쇄도하였다. 그는 할레 대학에 성경연구소를 설림하고 선교열정을 불태웠다.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요한 알버트 뱅겔이 이어받아 18세기로 이어졌으나 18세기의 새로운 하나님나라 운동의 파도에는 편승하지 못하고 말았다. 16세기가 결별의 시대, 17세기가 내면충만의 시대라면 18세기는 흩어짐의 시대, 폭발 explosion의 시대이다. 17세기 경건주의의 후예인 진젠돌프는 18세기의 이 폭발하는 사역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17세기 경건주의 후예가 18세기의 진젠돌프를 또 핍박하였다. 결국 진젠들프는 비텐베르크 대학, 할레대학 양쪽에서 비판받고 추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진젠돌프가 루터교의 주교까지 올라가게 된다. 17세기의 하나님나라의 요구는 이성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성의 부인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제한된 역할을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었어야 했다. 슐라이에르마흐는 종교적 열망을 강조하지만 그속에 합리의 요소를 가져오면서 모든 신학적 자유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에 뿌리를 둔 서양문화 전체에서 합리요소를 극복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18세기 제3의 종교개혁
2014-11-14 15:30:46
4. 18세기 제 3의 종교개혁
4.1 시대적 상황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17세기의 이성의 합리성 인정에서 이성의 신격화로 발전된 시대이다. 이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이성적 토론이 아니라 이성 자체를 쓰나미로 덮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 수단으로 주신 것이 영적폭발이다. 이 세기는 은하수 우주를 발견한 시대이며 우주의 광대함에 압도를 당한 시대였다. 이 시대 철학자, 파스칼, 칸트, 볼테르는 모두 장엄한 우주의 신비에 압도당하였다. 그러므로 계몽주의는 이성을 얘기하면서도 신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대한 낙관론도 얘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얘기하였다. 19세기, 20세기에는 인간의 타락이 입증되면서 이성주의가 꺽어진다. 사단은 이성주의를 도구로 쓰고 이성주의가 쓰러지면 다른 도구를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사단을 공격해야지 사단의 도구를 공격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주적은 이성주의가 아니라 사단인데 이성주의를 공격하려고 이성을 사용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 다음 18세기에 다음 나타난 것이 종교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중세기는 교황청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16세기는 이성과 신이 혼재되다가 17세기는 이성이 주도히고 종교는 들러리를 서게 되었다. 17세기의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못하였다. 17세기의 인물, 코메니우스도 시대정신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드디어 18세기에는 종교에 대한 조롱과 공격이 나타났는데 먼저 권위의 기초인 성경을 공격하고 기독교를 사기극, 부활은 속임수로 간주하였다. 18세기는 성경의 이적을 이성적으로 해석함으로써 20세기 독일 비신화화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하나님은 거대한 운동인 영적대각성운동의 쓰나미로 사단의 계교를 덮어버릴 기회를 주셨는데 이것이 18세기의 리바이벌 혹은 어웨이크닝이다. 이 영적 대각성 운동이 독일의 모라비안 교도들(진젠도르프), 영국, 웨일즈,스코틀란드의 감리교(웨슬레) 그리고 뉴잉글란드(조나단 에드워드, 휘필드)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17세기의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우스는 이성의 비중이 다를 뿐, 둘 다 이성을 기초로 한 부류이다. 이 두 진영의 싸움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18세기로 넘어왔고 이것이 영적 대각성 운동의 연합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다이나마이트가 독일, 미국, 영국에서 동시에 폭발해야 하는데 이것을 막는 요소가 17세기의 해결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웨슬레는 휫필드와 진젠돌프의 중간입장에 있으면서도 양쪽과 다 반목을 하였다. 그 시대의 요구를 알고 그 요구에 부응하고 서야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웨슬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원리를 철저히 세우고 원리적으로 연합하는 것을 막은 것이 17세기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해결되지 못한 숙제 즉 이성의 문제였다. 진젠돌프와 웨슬레의 토론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 진젠돌프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안에 머물때만 완전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에서 더 나아간 정적주의(무행동주의, 콰이어티즘)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문제로 두 사람은 결별한다. 두 번째는 웨슬레와 휫필드의 문제인데 둘 다 영국 국교회 출신이다. 영국 국교회에는 신비주의, 로마교, 칼빈주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다. 휫필드는 국교회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 영향읋받아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지만 자신은 전도에 열심으로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휫필드야말로 진정한 칼빈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웨슬레는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신학적으로 알미니우스에 호소를 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17세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웨슬레는 17세기 알미니우스에 영향을 받은 셈이다. 결국 17세기 알미니우스와 칼빈주의의 싸움이 18세기에 휫필드와 웨슬레사이에 재현된 것이다. 결국 이성주의의 문제였는데 두 사람은 이 문제를 원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말았다. 진젠돌프는, 웨슬레, 휫필드는 모두 18세기에 주시는 뜨거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영적 대폭발을 준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인데 18세기의 새로운 사명을 모르고 17세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문제였다. 사단이 뱀처럼 이빨을 벌리고 있는 18세기의 도전에 이성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영적쓰나미로 덮쳐야 하고 알미니우스, 칼빈주의자의 눈이 아니라 성경을 그 시대의 눈으로 새롭게 보았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하였다. 21세기의 서양문화 자체가 내리막길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의 도전은 18-19-20세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18세기 제3차 종교개혁운동은 독일의 진젠도르프,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휫필드 그리고 영국의 웨슬레에 의해서 일어났다. 21세기가 되어갈수록 죄악이 죄악이 아니라 부분진리 자체가 죄악이 되어간다. 부분진리는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이다. 종교개혁이후 사단이 벌려놓은 해석투쟁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우리가 접하는 현실은 더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있는데 사단은 계속 부분적인 것만 보게하고 총체적이고 더 큰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얀 후스 Jan Hus는 1415년 이단으로 로마교에 의해 화형을 당한다. 1517년 루터의 주장은 얀 후스 Jan Hus의 주장과 동일하였다. 얀 후스는 죽었으나 그의 주장은 루터의 개혁을 통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루터주의도 17세기에는 독일 정통주의로 고착되었고 17세기에 얀 코메니우스 Jan Commenius의 경건주의를 핍박하였고 18세기에는 모라비안 교회를 핍박하였다. 이렇게 고착되어진 독일교회는 결국 20세기에 나타난 히틀러를 막지 못하는 최대의 실패를 저지르게 되었다.
4.2 독일의 진젠도르프 운동
우리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형성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인물과 조직과 사상을 통해 나타난 18세기 종교개혁의 한 흐름인 진젠돌프 공동체를 살펴보려고 한다. 진젠돌르프 개인(지도자)과 모라비안(Moroavian) 공동체, 이 둘의 상관관계는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진젠돌프 Zinzendorf 백작과 모라비안 교도의 운명적 만남은 역사상 탁월한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다. 진젠돌프는 코메니우스의 신학대전을 연구하여 이 책대로 교회 정치체제를 만들고 그 체제대로 모라비안 공동체가 형성도록 하였다. 300년동안 핍박받고 쫒겨 다니던모라비안 교도들과 진젠들프, 이 양자의 만남은 환상적인 것이었다. 모라비안 공동체의 탁월한 순회설교 시스템은 전형적인 21세기의 노마드적인 시스템이다. 토라도 순회설교 개념을 강력하게 도입할 것이다. 순회설교의 단점은 설교가 깊고 높지 못할 가능성은 있지만 외적 상황과 관계없이 그 속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교의 핍박속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을 고수하게 한 것이 그들의 탁월한 순회설교 시스템이었다. 진젠돌프(1700-1760)의 부친은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의 친구였다. 진젠돌프는 태어나자 마자 부친이 죽었고 경건주의자인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그는 스페너의 후계자인 프랑크가 운영하는 할레대학의 중고등 과정에 해당하는 페다고기쿰에 다녔고 그곳에서 프랑크의 열정에 반하게 되고 경건주의자가 되었다. 진젠돌프는 17-20세에 비텐베르크 Wittenberg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루터파 정통주의를 배우게 되는데 이로써 그는 영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와 함께 원리에 충실한 정통주의의 장점을 알게되었고 결국 이 두가지 경험을 통해서 자기 한계를 벗어나는 체험을 하게된다. 상반된 두 경험을 통해서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고 가슴이 넓고 발이 넓은 사람이 되었다. 원리나 실제 가운데 바르게 서 있으면서도 자기가 인식하는 하나님나라가 제한됨을 알고 그는 마음을 태평양처럼 넓게 열게 되었으니 이것이 진젠들프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20세에 공부를 끝내고 귀족들의 여행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여행중 예수 수난 그림을 보는 가운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하게 된다. 이렇게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된 공동체의 환상적인 만남이 탁월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3000명의 모라비안 공동체는 역사상 유래없이 300명의 헌신된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모라비안 교도의 지도자인 크리스챤 데이비드 Christian David 는 목수였는데 진젠돌프의 친구이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인 독일지역이 진젠돌프의 영지인 베델스도르프 Berthelsdorf이다. 1722년부터 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정식으로 진젠돌프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 1727년 8월 13일이다. 상처받고 도망다니던 모라비안 공동체가 진젠돌프를 만난 후, 지지고 볶는 5년의 세월을 지나 예배당 터가 진동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최초의 고백공동체가 되었다. 외적으로는 매우 힘들지만 외적도전이 내적문제를 해결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는데 그것이 죄를 고백하는 고백공동체가 된 것이다. 진젠돌프 공동체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유치할 정도로 강조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도와 찬양의 경험을 중시하였다. 아이들속에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며 성령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어서 진젠들프는 밴드를 조직하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 작은 공동체가 모여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루었고, 모라비안 공동체는 루터 교회안에서 작은 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회개가 이루어지고 성령이 부어진 결과 조직과 체제가 형성된 것이 진젠돌프 공동체이다.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찬 4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가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을 만나고 이들이 진젠돌프에게 선교를 간청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파송 공동체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으로 확신하였다. 전에는 살기 위해서 흩어지던 모라비안 공동체가 이제는 사역하기 위해 흩어지는 공동체로 전격적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결국 덴마크 국왕의 대관식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진젠돌프 공동체는 1727년- 1732년 파송공동체로 도버 L Dobber 와 니취만 D. Nitschmann을 선교사로 보냈고 1733년 데비비드 Ch. David 가 자비량 선교사로 오지의 어려운 상황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단순무식한 그러나 담대하고 무지막지한 선교를 하였다. 후일 진젠돌프를 이어간 지도자인 A.G.Spangenberg 스팡겐부르크 는 1835년 조지아주에 대규모 선교단을 파송한다.
진젠돌프 공동체로 인하여 작센주에서 영적 지진이 일어나자 작센주는 주민 불안을 이유로 진젠돌프를 추방한다. 그는 발틱해안으로 가서 운동을 계속하는데 1838-39년 그의 순회설교 시기는 마치 벼룩 뛰듯이 도망다닌 기간이었고 이 기간이 그의 사역의 조정기가 되었다. 1741년 진젠돌프는 웨슬레와 신학토론을 하는데 신학적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진제돌프 공동체와 웨슬레 공동체는 연합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진젠돌프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자신은 엄청난 노력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한편 웨슬레는 하나님 주권만 강조하고 자신들은 게으른 자 칼빈주의자들을 반대하여 인간의 노력을 중시했지만 웨슬레 자신은 하나님의 예정, 주권을 엄청 강조하였다.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될 때 하나님나라의 극단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1741년 모라비안들의 미국 정착촌은 베들레헴이라고 명명되어 신앙공동체로 시작되는데 나중에 경제공동체로 발전되고 미국내 모라비안 운동본부가 된다. 그리고 독일인 디아스포라를 위한 연합체인 성령안의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the Spirit)를 만들게 된다. 진젠돌프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자들을 하나님나라를 섬기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 바꾼 것이다. 그는 “ We do not work to live, we live to work”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1743년 유럽으로 건너가고 1747 작센당국에서 추방령이 해제된다. 진젠돌프가 추방당한 이 기간은 오히려 진젠돌프의 사역을 통하여 해외 전진기지를 개척하려는 하나님의 전략이었다. 진젠돌프 공동체는 1748년 드디어 루터교 안에서 인정되어 터를 잡게되고 이후 루터교안의 독립적 교회형태로 발전한다. 진젠돌프는 1749-55년 영국에서 지내면서 자기의 전 재산을 쓰고 빚더미에 올라 파산지경에 이르는데 모라비안 공동체가 이 빚을 감당하기로 하고 그들안에 이를 위한 조정국, 이사회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모라비안 교회의 정식 조직으로 발전된다. 진젠돌프는 1760년 5월 9일 역사에서 은퇴하지만 이미 조직적,신학적 기초가 든든하게 선 모라비안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고 스팡겐부르크가 지도권을 이어받는다. 스팡겐부르크는 대단한 현실감각과 뛰어난 조직력 그리고 차분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라비안 공동체는 이전의 진젠돌프 공동체의 특이한 것을 포기하게 되고 체제화하면서 근본정신이 약화된다. 그 결과 초창기의 열정과 헌신이 약해지면서 신앙공동체로 시작한 베들레헴 공동체는 서서히 경제공동체로 변하게 된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17세기 경건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심미적 예배를 추구하였는데 사변적 신학 토론을 싫어하여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벗어난 얘기들은 전부 다 죄악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들은 충만한 성가를 사용하여 설교와 찬송을 일치시키며 남자들의 군무인 홀리댄싱을 개발하였다. 또한 그들은 상호 권면을 중시하였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심지어 언어 유희까지 나타났는데 이것은 그들이 지역근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였으며 초대교회를 돌아가려는 강한 경향을 가졌다. 그들은 공동체적 삶을 통한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였는데 일하기 위해 산다고 할 정도로 노동을 강조하여 하루 평균 16시간을 노동하고 하루 3번 찬양과 기도 ( 새벽4-5시, 점심시간, 오후 9시)를 하였다. 그들의 노동은 개인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노동이었다. 주일 모임은 새벽6시- 오후 3시까지 긴 집회를 가졌다. 그들은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공동체로서 대부분 순회 설교자로 사역하였으니 그들은 정처가 없었고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집을 만들었다. 이런 여과기를 거쳐서 모라비안 공동체는 균형이 잡히고 견고하여졌다.
4.3 미국의 그레이트 어웨이크닝(영적 대각성)
1738년 혹은 1741-1742년에 1차 어웨이크닝이 일어났고 1800년에 2차 어웨이크닝이 일어났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다 영국에서 쫒겨운 사람들이고 못살아서 온 사람들이다. 이직도 미국인에게는 영국에 대한 향수가 있다(정통백인 WASP의 우월감)) 미국의 개척시대, 생존을 위한 고통의 시대에 하나님은 영적 폭발을 준비하셨다. 18세기 미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프레링 하이슨 Th. Frelinghuysen은 화란의 계속된 종교개혁의 후예이다. 그는 회개의 설교와 뜨거운 공적 기도 그리고 작은 그룹을 형성하여 기도와 말씀 공부를 하였다. 설교중에 감정적 격렬함에 대하여 뜨거운 반응도 나타나고 혹은 기존의 종교질서를 깨뜨린다고 반대도 나타났다. 그들은 감정주의 Emotionalism에 빠지는 경우도 생겼다. 그 다음에 윌리엄 테넌트 WIlliam Tennent 가 통나무 대학(log college)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프린스톤 대학의 전신이 된다. 그의 아들 길버트 터넌트가 프레링하이슨의 사역을 이어받아 체함적 신앙, menifested experience를 강조히였는데 이들이 주로 청교도 계통에서 신빛파(new light)를 형성하였는데 스코트란드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구빛파(old light)와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신빛파는 구빛파를 알미니안 주의, 유니테리언주의라고 공격하였다. 본격적인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가 주도한 영적대각성 운동인데 이것이 1739년에 뉴잉글랜드 전역에 확신된다. 이것에 휫필드가 동참하여 불지르고 다네게 된다. 불지르는 악동과 같은 휘필드의 설교로 개인의 변화와 공동체 전체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극단적인 현상도 생기는데 제임스 데이븐포 같은 사람은 장시간 준비없는 야단치는 설교를 함으로써 그 결과 분리파가 생겼다. 교회사 가운데 순수주의와 확장주의가 나타나는데 순수주의는 초대교회 당시 도나티스트파와 같이 배신자의 회심을 거절하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순수파가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순수는 반드시 확장으로 이어져 가야 한다.
대각성 운동이 1760년 경 종결이 되고 1799년부터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난다. 1차 대각성운동이 1760년에 종결된 이유는 미국의 독립운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종교가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운동이 영적운동을 종결시킨 것이고 정치가 중교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립운동에 사람들의 마음이 쏠리면서 영적운동이 종결된 것인데 이것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는 강한 전통 때문에 국가적 관심에 종교적 관심이 함몰된 것이라고 본다. 미국교회의 선교를 받은 한국교회도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종교속에 정치에 대한 포괄적인 원리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 대각성 운동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미국 영적대각성 운동의 주요인물이 조냐단 에드워드와 휫필드인데 휫필드가 대각성운동의 심장이라면 애드워드는 대각성운동의 마음이었다고 표현된다. 두 사람 다 칼빈주의자들이지만 화란 칼빈주의와는 달리 영국의 경험성을 가진 칼빈주의자들이고 이 사람들의 합작품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다. 먼저 조지 휫필드는 엄청난 언어 재능을 가진 사나이인데 이 언어재능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는 영성이 겸비된 탁월한 표현력을 가진 사람이며 자기 자신의 깊은 내적투쟁 가운데 들어갔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근본적 변화가 자신속에 있었고 지독한 훈련과 천성적인 언어재능과 낭낭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불지르고 다니느라 목을 너무 많이 써서 목이 부어올라 마지막 설교후 기도가 막혀서 죽은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선동가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할아버지를 이어 교회를 담임하였는데 그는 예일대 출신의 시인이고 철학자이며 언어재능도 탁월하였다. 에드워드는 칼빈주의 신학(청교도)에 철저한 신학자 였고 동시에 신비주의의 체험적 전승위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감정주의의 남용도 반대하지만 감정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는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영성이리고 표현함이 좋다) 이란 책을 저술하여 신앙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그는 1734-35년에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죄인들이여 여러분이 처한 위험한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 라는 설교에서 사람들이 탄식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미국의 영적대각성이 시작되었다.
4.4 결론
부흥운동의 성격에는 성령의 역사가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17세기에 나타난 성령의 내적역사가 18세기에는 영적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외적으로 확인이 되었고 그리고 19세기의 성령의 또 다른 외적사역인 선교운동을 거쳐서 20세기에는 부흥운동을 일으키시는 주인공이신 성령하나님 자체에 대한 인식이 시작된다. 18세기에 성령이 사용하는 도구로서의 지도자들의 나이가 특이하게 모두 20대였다. 물론 웨슬레는 나이가 좀 더 많았지만 결국 남성위주의 청년이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 가장 탁월하게 준비된 20대들을 사용하셔서 이후 40년간 사역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들의 대각성운동의 주요 수단이 설교였다. 우리가 종교개혁들 운동사를 개관하는 시각은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쳐다보지도 말자는 것이다. 물이 흐르고 넘쳐나는 것이 운동이다. 고인물은 썩어진다. 그래서 고인물이 된 화란, 프랑스, 독일 교회는 운동사 공부에서 제낀다. 고인물이 지나치면 썩게되고 온 세상에 악취를 풍기게 된다. 히틀러를 막지 못한 독일 교회는 고여서 썩은 물의 실례이다. 그들은 세상에 얼굴을 들지 못할 교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운동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교회의 최종목적이 생활공동체인 줄 알고 또아리를 틀고 있으면 다 고인물이 된다. 러시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정통교회라고 하지만 민족성의 한계를 그대로 가진 교회이다. 역사참여를 중시하느느 서방교회와 달리 초역사적 태도를 가진 동방교회는 고인물이 되어버렸다. 그 시대의 신학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보느냐를 보면 안다. 동방정교회는 삼위의 신비적 합일을 중시하나 서방교회는 수평적 합일이 아닌 수직적 상관관계를 중시한다. 서방교회 삼위일체 신학의 단점은 서열이 설명이 안된다는 점이지만 장점은 역사에 뛰어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동방교회는 신비적 합일을 예배중에만 체험한다. 그러나 교회당 밖의 러시아 황제나 정치의 부패앞에는 무능하게 되고 교회가 정치의 시녀가 되었다. 그 결과 교회가 정치와 역사에 간섭하고 기여할 줄을 모르게 되고 역사참여가 없어졌다. 러시아에 공산주의 본산이 형성된 이유도 교회의 역사 참여의 무능때문이다. 황제와 귀족의 부패를 교회가 막지 못하고 사단에게 넘겨준 것이다. 러시아의 부패의 책임은 러시아 교회이고 히틀러를 막지못한 책임은 독일교회에게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17-19세기에 이르러는 서서히 고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19세기 독일교회에는 운동은 없고 사상사만 나온다. 그 결과 독일교회는 역사속에서 무능해지고 히틀러의 출현을 막지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운동사 공부할 때 고인물 같은 교회는 볼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인물은 하나님이 제끼신다. 고인물은 타락하고 냄새가 난다. 독일교회는 운동사에서 루터 외에는 의미가 없다. 세상속에서 역할이 없는 독일교회 특히 18-19세기에 독일교회에 얘기할 것이 없다. 비참한 독일교회의 역사이다.
18세기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20대의 청년들을 운동의 지도자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의 탁월한 설교사역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중요 도구였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능력있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모임은 다 설교를 통해서 영감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3의 종교개혁의 시대인 18세기를 정리하면 독일, 영국, 미국의 3대륙에 걸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첫째, 진젠도로프를 통해서 독일적인 것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경건주의 요소를 갖지만 루터교를 떠나지 않고 이신칭의의 엄청난 확신을 가진 루터교의 기초에 서 있었다. 진젠돌프 본인은 성령의 지배받고 필사적으로 일했으나 독일교회의 신학에 근본적 도전을 하지 않았다. 진젠돌프 공동체의 성격은 철저한 전체적인 공동체이다. 진젠돌프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이고 특히 선교사역에서 막강하였다. 웨슬레의 경우 웨슬레 당시에는 공동체라기 보다는 운동체이고 웨슬레 사후에 감리교로 발전하였다. 공동체가 아닌 단순한 운동체의 경우 굉장한 동기부여와 통제가 필요하게 된다. 한편 미국의 운동은 방목하는 형태로서 공동체도 없고 조직도 없었다.. 우리가 배울점은 진젠돌프의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모두가 찬양하는 모습을 가진 진정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진젠들포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도 극복해야 한다. 그들은 미국에 있는 진젠들프 공동체의 브랜치인 베들레헴 공동체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가진 공동체의 폐쇄성을 보인 것이다.
둘째, 웨슬레를 통해서 영국적인 것이 나타났는데, 고교회 High Anglican의 전통과 격식을 따지고 경험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웨슬레는 대단히 영국적이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의 성격은 감독체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외적체제 혹은 공동체의 성격을 구분해 보면 무교회주의-개교회주의-총회주의-감독주의-로마교 주의( 교황주의)-구세군 체제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웨슬레는 감독주의를 취하였는데 좌측으로 갈수록 개인성이 강조되고 우측으로 갈수록 공동체성이 강조( 목표지향주의)된다. 화란교회도 개교회주의와 총회주의의 싸움에서 개교회주의를 주장하는 31조파가 분리었다.(네델란드 신앙고백 31조속에 교회의 개별성을 강조함) 어떤 체제를 취할 것인가는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말토예 공동체의 성격은 생활공동체가 아니다 우리는 전투공동체이고 운동공동체이다. 왜 전투공동체인가 이것은 언약적 관계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전투하시니 우리도 전투하는 것이다. 감독체제는 반 군대식이다. 군대식의 단점은 개인의 창의성이 죽고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면 내리막길로 간다는 것이다. 웨슬레는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그 안의 소사이어티로서 남으려고 했다. 그는 조직에 관심이 없고 운동이 관심사였다.
셋째, 휫필드와 에드워드 통해서 미국적 교회 모습을 드러냄 . 이들의 운동은 무조직 혹은 조직의 실패이다. 그 결과 불을 일으킨 것은 좋았으나 불꺼진 다음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네째, 우리 말토예 공동체는 첫째 배신의 제자도를 통한 사람 배출, 둘째 신학체계와 비젼의 확림, (특히 우리는 언약신학으로 통합적 신학수립이 가능하다는 강점이 있다. 물론 우리는 언약신학의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루터는 이신칭의를 절대적으로 확신하였고 이 확신이 로마교와 단연한 결렬을 가져왔다. 루터신학은 부분진리로는 절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총체진리로는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이다. 마찬가지로 언약신학도 우리 시대에는 절대적일 수 있지만 다음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는 하나님나라의 조직체 형성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새롭게 하여야 한다.1
각주 1
구세군이 지금까지 이어내려온 것을 보면 하나님나라에서 군대조직의 시스템이 타락하지 않은 증거이다. 군대식 조직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막연한 반감이 있으나 그러나 사실 민주주의는 사탄적이다. 구세군의 약점은 사회사업쪽으로 자신의 사역을 제한한 것인데 이것으로는 구세군이 유지되는 동기부여를 상실할 것이다. 신학적, 조직적 총체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자선에 대..
- 구세군이 지금까지 이어내려온 것을 보면 하나님나라에서 군대조직의 시스템이 타락하지 않은 증거이다. 군대식 조직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막연한 반감이 있으나 그러나 사실 민주주의는 사탄적이다. 구세군의 약점은 사회사업쪽으로 자신의 사역을 제한한 것인데 이것으로는 구세군이 유지되는 동기부여를 상실할 것이다. 신학적, 조직적 총체성을 상실하였 기 때문에 자선에 대한 성경적 동기부여가 약하다 [본문으로]
19세기 제4의 종교개혁
2014-11-14 15:34:09
5. 19세기 제4의 종교개혁
5.1 시대적 상황
제4의 종교개혁은 19세기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종교개혁의 3요소로서 교리의 새로운 발견 , 새로운 운동의 전개, 새로운 조직의 탄생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삼요소가 다 있으면 그 개혁은 오래가고 깊이 간다. 그러나 19세기 종교개혁의 특징은 교리의 새로운 발견이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챨스피니의 대각성 운동은 아주 과감, 직접, 선정적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교리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물론 성령론의 조짐이 19세기에 나타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시작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된 것이다. 19세기에 나타난 세명의 악당은 칼 맑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찰스 다윈이다. 이들이 19세기에 등장하여 줄기차게 20세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19세기의 종교개혁의 특징은 교리의 발견이 없이 운동이 진행되다보니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화려하게 불꽃은 퍼져 나가나 깊이가 없고 피상적이다. 예를 들면 선데이 스쿨도 주일 하루만의 교육을 생각하는 제한된 발상일 뿐이다. 교리를 새롭게 발견할 때 그 속에 있어야하는 전제가 역사적 정통기독교의 한계속에 있을 것, 성경을 새롭게 읽을 것, 이 두가지 이다. 새로운 교리에 기초하면 굉장히 건전하게 오래가는 운동이 되고 조직은 생명력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전의 교리가 교리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교리를 개발하여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역할을 창조에 국한시킨 사도신경부터 도전해야 한다. 창조는 삼위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고 삼위 사역은 신약에서 나누어져서 성자의 사역, 그 다음 성령사역, 그 다음 성부사역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사도신경은 창조사역을 성부만 하신 것으로 이야기 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부분적으로 말하는 사도신경 전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도신경은 성경이 아니므로 만고불변의 신경이 아니다. 사도신경도 그 시대의 교리일 뿐이다. 교리가 무엇인가? 성경에 대해서 생각하고 파악하려는 순간 교리가 되고 상대화된다. 그래서 새롭게 교리를 성경 가운데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신교회는 옛날 교리를 잘 받아서 후대에 잘 전달하자는 얘기만한다. 이미 교리가 다 나오고 성경에서 더 이상 나올 교리가 없는 것 처럼 말하니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5.2. 교회적 상황
회심, 적극적 사역, 성경중심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이 4가지가 19세기 에반젤리칼리즘, 즉 복음주의 시대의 중요한 기초였다. 회심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것은 자기 개인에게 다가온, 자기 개인이 다가간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각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즉시 단점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관적, 감정적이 될 소지가 있다. 이런 회심의 강조가 20세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 구원의 확신 신학이다. 말씀과 개인체험을 통해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가오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이란 개념으로 생각하게 되면 주관적, 감정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공적, 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결혼과 같다면 주관적, 감정적인 것은 일종의 연애관계이다. 하나님과의 연애관계는 관계 자체의 한계를 벗어난 경험을 해석할 수 없게 된다. 무지막지한 부정적 경험이 쳐들어 올 때 감정적, 주관적 관계는 반드시 신정론에 빠지게 된다. 도스트엡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보듯이 자유적인 사상과 종교적 체험가운데 끝없는 투쟁을 재현하게 된다. 결국 주관적, 감정적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으로 침체되고 구원의 확신과 불확신이 헷갈리는 감정에 빠지게 된다. 결혼의 책임은 일단 본인에게 있다. 진실된 결혼여부는 삶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어떠한 삶의 무게가 짓눌러도 견디는 가운데 결혼여부가 확정이 되어야 한다. 씨뿌리는 비유에 묘사된 두가지 삶의 무게인 유혹와 핍박을(이것은 사단의 당근과 채찍이다) 견딤을 통해서 언약을 확증하게 된다. 복음주의는 회심을 통해 모든 것이 단번에 결정되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회심후 감정적으로 헷갈리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언약이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며 이제 우리가 언약에 성실과 사랑으로 반응하는 가운데 언약이 발전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두 번째 엑티비즘, 즉 적극적 사역은 선교참여와 사회참여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형적인 앵글로삭슨적인 접근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닥치는 대로 뛰어드는 근성의 발로이다,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의 총체성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가운데 그저 현상의 책임을 느끼고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총체적이므로 총체적 접근을 하지 못하면 결핍된 것의 부정적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무엇이 우선이고 나중인지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19세기 종교개혁은 영미가 주도함으로써 영미의 민족, 사상, 행동 근성을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19세기 교회사를 주로 다루는 사람들도 영미 사람들이다. 유럽사람들은 19세기 선교역사를 중시하지 않는다. 유럽과 영미는 영원한 애증관계인 것 같다. 유럽 사람들은 자부심이 매우 대단하다. 제레미 러프킨은 제2의 드림인 아메리칸드림은 지나갔고 제3의 드림인 유로피안 드림이 온다고 주장한다. 19세기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영미에 의해, 20세기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미국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제 21세기에 하나님나라 운동은 서진을 하여 한국으로 오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운동의 흐름속에서 영미가 가진 한계를 잘 분석해야 한다. 영미는 같은 민족이다보니 민족성 비판을 잘 못한다. 영미의 민족성은 경험성, 주관성, 지엽성, 즉 비총체성이다. 그래서 영미는 액티비즘의 두가지 방향인 선교와 사회봉사(개혁), 이 두가지를 하나로 묶는 사상체계의 기초를 만들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이 두가지는 내적 에너지의 외적 폭발이라고 볼 수 있다. 에베소서는 교회는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하였다. 만유는 하나님의 엄청난 체계와 질서 가운데 있다. 이런 체계와 질서를 조직화한 사람이 도이벨트이다. 이런 총체성은 게르만 민족이기에 가능했고 한국도 가능하다. 하나님은 한국민족에게 경험적 요소와 체계적 요소를 다 허락하셨다고 믿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이기론이 그 예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만유가 교회의 밑에 복종하는 것,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만유가 교회안에 들어 올 때 가능한 구조이다. 교육문제도 스승이 누구이며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학교부터 만들려는 것이 영미의 생각없는 액티비즘이다.
세 번째는 성경주의, 비블리시즘이다. 이것을 우리는 귀하게 생각하지만 그 한계를 생각하여야 한다. 16세기의 솔라 스크립투라를 외친 종교개혁자들 조차도 성경의 어떤 부분을 자기 평가로 넣고 빼려고 하였다. 성경의 기준을 자기가 설정하려고 한 이것도 문제지만 성경을 삶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서만 연구 (특히 독일의 경건주의의 성경연구가 점차로 테이블 연구로 빠짐)하여 삶과 관계없는 머릿속의 연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도 성경의 전문성 연구에 조심해야 한다. 성경연구를 통하여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경험이 없이 성경을 파악하고 지식을 늘리려 한다면 비블리시즘의 타락에 빠지게 된다.내가 배운 말씀으로 가르치고 전도하고 변화시키는 체험이 없는 모든 종류의 성경공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성경공부를 통하여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꾸러 뜨리고 소망을 주는 것(가짜 소망이 아니라)이 필요하다.
네 번째는 십자가 중심주의, 크로스 센트리즘이다. 이것의 장점은 우리의 근본적 출발을 명백히 보여준다는 것인데 즉시 이 장점이 단점이 된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만 해석하려고 하여 구약에서도 전부 그리스도만 찾으려고 한다. 구약에 있는 기독론만 찾고 나머지는 다 버리려고 한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고 신약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강조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에서 주어진 유일성일 뿐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성령과 성부의 유일성을 동시에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자충족하신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생각 이것은 더 명확하게는 성자 중심주의이다. 신론은 삼위일체론이고 그 가운데 성자, 성령, 성부론이 나오는 것이다. 성자론이 강조될 때는 하나님나라 시작기이고 성령론이 강조되는 때는 하나님나라의 왕성기이며 성부론이 강조될 때는 하나님나라의 종말기이다. 신론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기초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채 뒤죽박죽된 것이 에반젤리칼리즘의 십자가 중심주의 즉 성자중심주의이다. 19세기에 탄생한 유명한 신학이 구속사 신학인데, 이것은 화란 ,미국 영국, 독일 전역에 나타난 성자중심주의이다. 에반젤리칼리즘이 구속사 신학과 연관이 되고 이것이 19세기의 운동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나라가 새롭게 시작된 후 그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발전시키지 못하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문제이다. 매일 시작만 하다가 볼일 다 보는 셈이다. 역사가 시작되고 이어서 풍성과 충만에 이르는 것이 세대를 걸쳐서 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 같다. 사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요소가 역사성의 문제이다. 역사를 이어 발전하지 못하고 그 다음 세대에서 내리막길을 간다. 역사를 이어서 살아가는 존재인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우리가 영적 존재라는 자각을 하고 사는 것이다. 영적 존재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공동체적 존재이다. 에반젤리칼리즘의 한계를 넘는 방법은 우리가 영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 역사적 존재로 자각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단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만든다. 사단이 영이듯이 우리도 영으로서, 사단이 공동체이듯이 우리도 공동체로서 또 대를 이어서 역사적 존재로서 사단과 싸워야 한다. 사단은 우리를 더 큰 공동체가 아닌 작은 공동체 아니면 개인으로 존재하도록 몰아 부친다. 사단과 싸우려면 우리는 거시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로서 제자도를 이루어야 한다, 결국 제자도는 역사적 제자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제자도와 배신의 제자도 이것이 사단과의 전쟁에 승리하는 이론적 기초이다. 사단의 계책을 역이용하여 승리를 이루신 하나님의 더 놀라운 계책속에 우리를 맡기고 가는 이것이 우리가 사단을 이기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영적, 공동체적, 역사적 존재의 자각을 포괄하는 것이 총체성에 대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총체성은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중심을 의미한다.
5.3. 19세기 제4의 종교개혁운동의 특징
에반젤리칼리즘, 이 비젼이 조직화 되는데 사실 19세기 비젼은 이전에 있었던 것이고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나타났는데 운동은 사람이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므로 주목해야 한다. 이론이 없더라도 운동이 있으면 된다. 그런데 운동이 일어나면 그것을 조직화 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조직화 하면 반드시 운동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운동과 조직의 역설적인 상관관계이다. 이 긴장을 어떻게 온전하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일으키는 운동는 몇 사람이 불지르는 것이 아니라 불지를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핑계대는 뺀질이는 이 운동에서 다 탈락하게 마련이다. 우리 운동은 초기단계에는 압살당할 가능성이 많다. 오직 정말 순수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이 운동을 이어갈 것이다. 운동의 항구화를 위해 훈련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런 시스템이 성경공부를 위한 시스템이 될 가능성이 많다. 훈련을 하고도 전도, 양육을 못하는 사람들은 다 나가야 한다. 그냥 나가서 만나면 되는데 안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이 먼저 불 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선생의 인정이나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 가짜이다. 이 운동을 조직화하려고 작정하는 것은 운동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운동 부대창설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운동과 조직의 역설관계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운동과 조직의 긴장을 푸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운동을 일으키고 조직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맺은 하나님이시므로 이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조직을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용기를 얻는 으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하고 언약에 사랑가운데 반응하면 조직화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래주머니라는 조직의 근본적 목표는 육체단련이다. 왜 육체를 단련하려고 하는가? 설교는 에너지가 가장 많이 빠지는 사역이다. 영적, 육적, 정신적 에너지가 총체적으로 나오는 것이 설교이다. 우리속의 모든 진액을 짜내는 것이 설교이다. 이것 아니면 다 가짜 설교이다. 이것을 위해 육체단련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운동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반응적 행위로서의 조직화는 긍정적이다. 언약적 반응은 완전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조직화 자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 안한다. 단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조직화이다. 고로 조직의 붕괴와 변화를 두려워 안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려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한번 해보는 것일 뿐이다.
5.4 미국 교단들의 문제
18-19세기에 들어서 국가교회 개념이 약화되고 사라진다. 국가교회란 한 국가가 한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루터교, 스코틀란드의 장로교, 화란의 칼빈주의, 영국의 성공회 등이 국가교회이다.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종교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주어진 이후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국가교회가 약화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종교의 자유개념의 확대인데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도 관계된 종교적 관용의 유포이다. 두 번째는 종교지도자들의 세속정치 권력에서 퇴조현상이다. 미국에도 국가 교회 개념이 있었다. 미국은 합중국, 즉 연합한 국가들을 의미한다. 영국도 스코틀란드, 웨일즈, 잉글란드가 합쳐진 것이다. 화란도 더 네댈란즈 복수로 표현하는데 니더, 즉 저지대 국가들의 연합체란 의미이다. 18세기에는 유럽의 국가 교회의 개념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각 주에 종교들이 있었으나 19세기 들어 미국의 각 주들은 종교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회중교회, 장로교회, 국교회 이런 교파들은 17세기에 형성되었고 이런 기존 교파, 교단들을 미국의 각 주가 택한 것인데 19세기에 이르러 무너진 것이다. 그 결과 초교단적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운동의 장점은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결과 복음전파와 영적각성에 도음이 된다는 것이다. 17세기의 교파들은 주로 교구주의인데 이런 것이 19세기에 파괴된 것이다. 초기에는 이것에 반발이 많았지만 복음이 교파와 상관없이 쳐들어 가는 긍정적 결과가 나타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새로운 종교적 그룹들이 형성된 것인데 이것이 감리교와 침례교이다. 운동의 결과 또 교단화 된 것이다. 교파주의와 교구주의를 극복하면서 생기는 현상이 프리 마켓 포 릴리전, 즉 종교에 대한 자유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자기 입맛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초기에는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경향이 다르고 그래서 다양한 하나님나라 형성의 기초가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의 주도자가 종교소비자로 넘어간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발전소에서 종교소비자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이다. 종교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종교가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런 패턴이 20세기에 발전되는데 이것이 종교의 타락을 가져게 된다. 종교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맞추어 주는 것은 결국 자기 귀가 가려워서 스승을 많이 두는 종교적 타락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시 교파주의로 복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을 교파주의로 묶어 놓을 수가 없다. 이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속에 시대와 관계없이 영원한 가치있는 종교적 운동을 창출하는 힘, 이것만이 모든 것을 보장한다. 교단도 교구도 조직일 뿐이고 운동을 일으킬 사람이 없으면 조직은 소멸하는 것이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점점 폐허화 되고 있다. 조직은 남아있는데 운동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운동의 조직화, 체계화의 약점이다.
19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종교그룹이 침례교와 감리교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20세기에 다시 조직화 되면서 운동이 죽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감리교인 숫자가 1770년에 100명, 1820년에 25만명, 1830년 50만명, 그리고 1844년에는 신자가 168만 525명이고 순회설교자가 3988명, 지역목회자 7730명이다. 그러나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 기간동안에 내부적 붕괴가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철저한 순회설교자들이었다. 웨슬레, 토마스 쿡, 에즈버리 모두 순회설교자였고 정주 목회자를 경계했다. 그러나 점점 정주 설교자가 많아지고 노매드적 기질을 상실하면서 고정목회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운동에 맞지 않고 전투적 교회의 모습에 맞지 않는다. 감리교에서 성결운동이 183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웨슬레 사역의 전반부를 강조하는 그룹으로 떨어져 나갔다. 웨슬레의 다양성을 포괄하지 못하고 주로 조직상의 이유로 떨어져 나간 것인데 운동체가 고정목회화 되면서 쇠약해진 것이다. 운동체가 조직화 되면서 외적형태는 비슷하나 사람의 마음이 고정화 되고 그러면서 그 안의 운동이 횡포로 보이고 분파가 막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종교개혁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운동은 창1:2의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뛰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본질이다. 조직은 장막과 같은 것이고 운동에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조직은 운동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부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습은 정말 절망적이지만 20세기를 이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거꾸로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기회이다.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역전시키는 것은 운동밖에 없다. 조직이란 도구를 가지고 어떠한 운동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웨슬레의 후예로서 조직을 가지면서도 운동을 일으킨 것이 구세군이다. 다만 그들의 운동이 사회사업에 고정된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총체적인 운동을 생각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학에서 출발한 것이고 다 결과물일 뿐이다. 신학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구세군은 실천신학의 끝자락만 붙들고 있는 것이다. 구세군 조직의 경직화도 있지만 구세군의 막강한 130년 역사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들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5.5 19세기 운동은 영국과 미국으로 나누어진다.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은 제2차 대각성운동이라 부른다. 제1차는 1730년부터 60년까지 영국에서 일어났으나 미국의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압도당하고 1800년대에 이르러 미국에서 조심스럽게 다시 일어난다. 당시 캠프 미팅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체험하게 된다. 그 이후 캠프미팅은 1795년부터 오랜 전통을 가지게 된다. 케쥬익 사경회, 스프링 하비스트 이런 것들의 출발은 2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켐프미팅에서 1만2천명까지 모이게 되고 설교에 엄청난 반응이 나타난다. 이 당시 간단하고 확실한 진리를 명백하게 설교했는데 설교를 듣다가 넘어지고 충격으로 떨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제도와 삶의 전제들이 극복되고 전 사회적인(아이들, 여성, 노인, 인디안, 노예)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캠프미팅의 조직화가 일어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이 챨스피니인데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이후 미국 복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사람은 그의 책 새로운 조처에서 언급한 방법을 선교에 사용하였는데 집회를 대중홍보하고 성령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집회가 평신도 지도력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이 당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앉게 한 고뇌하는 의자(앵셔스 벤치)가 너무 인위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챨스피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성실한 반응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이 당시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헷갈림이 있었다. 이제 이 문제는 언약신학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대각성 운동의 주요 인물이 피니와 무디이다. 이 두사람의 사역은 목회자가 아닌 보통 사람을 쓰신 하나님의 전격적인 작전이다. 무디는 1899년에 사망했는데 특별히 무디를 통해 선교운동에 적극 참여자가 많이 생기게 된다. 무디의 1836년 7월의 마운틴헬몬의 서약 집회에서 선교사 헌신자 100명이 나왔다. 무디는 감리교 평신도로서 가장 강력한 선교 조직가였다.이 때 와이엠시에이, 스투던트 볼루티어 무부먼트가 조직되었다. 여성 사역자 “샤롯데 문”은 남침례교에서 사역한 선교사 로서 버지니아 여성신학교를 나오고 1872년 중국선교사로 사역하였다. 그녀는 40년동안 아이들과 부인들 가운데 사역하였고 수많은 기사와 편지를 통해서 여성을 위한 선교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녀는 독신으로 지내면서 외로움의 군사들과 투쟁하였다. 당시는 여성 지도자에 대한 신학이 준비되지 않을 때이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극복하고 여성지도력을 세우는 길은 성 정체성의 극복이다. 우리가 영적 존재이고 이것만이 나의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일어난 두가지 중요한 운동이 옥스퍼드 운동과 클라팜 공동체운동이다. 웨슬레이후 영국에서 선교운동과 사회운동이 많이 얼어났는데 옥스퍼드 운동은 전형적인 영국적 운동으로서 전통을 사랑하는 운동이다. 교회를 전통의 회복으로 개혁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전통은 아예 초기 기독교, 주후 1-4세기의 전통을 연구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 연구를 통하여 영국 국교회가 순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오히려 로마카톨릭이 순수한 전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운동의 지도자인 존 뉴만이란 사람은 로마카토릭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여 로마카톨릭으로 1845년 10월 9일 개종힌다. 이 때 수백명의 성공회 사제가 함께 개종함하였고 그 후 뉴만은 극단적 교회지상권주의자가 된다. 이 운동의 특징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팜플렛 형태의 소책자 운동을 통하여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성공회에 남은 존 키블과 에드워드 퓨지 등의 옥스퍼드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일으키는데 그들은 영국국교회에 남아서 한 분파로 활동하면서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순수한 전통의 회복으로 개혁을 작정하면서 성서를 배격하고 고대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데 관심을 가지고 그 다음에 사회개혁, 빈민구제에 치중하였다. 이런 사람들의 선교지역이 한국이었고 성공회를 선교하였다. 성공회속의 여러 가지 분파가 있다. 자유주의부터 고교회주의 까지 다양한 분파가 있는데 옥스퍼드 운동은 고교회주의 운동이다. 전통은 무시할 수 없는 하나님나라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고전15장에 나타나 있듯이 전통에서 성경으로, 성경에서 경험으로, 경험에서 행하는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충정도 근성, 경북근성이 있듯이 지역마다 민족마다 젙통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어떻게 전통을 정상적 의미에서 살릴 것인가? 전통과 함께 다른 것을 균형있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클라팜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로서 목사가 없는 평신도 공동체이다. 정치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실제를 이루고저 한 위대한 공동체이다. 존 웨슬레의 노예제도에 대한 이론적 기초와 존 뉴톤의 회심 그리고 윌버포스의 변화라는 역사적 제자도가 클라팜 공동체의 기초이다. 국회에 남아서 국회를 변화시킴으로써 노예제 폐지라는 꽃을 피운 것이다. 단순히 노예제 폐지가 아닌 영국속의 모둔 정치적 악습들과 투쟁한 실제적인 삶의 공동체가 클라팜 공동체이다. 이것도 대단히 영국적이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속에서 하나님나라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관련된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 연관성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총체적 성경적 원리를 연구하고 준비하여 총체적 운동을 일으킬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이 주요하다. 클라팜 공동체의 신학적 배경은 웨슬레 신학의 브랜치이다. 웨슬레 신학은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하나로 만드는 더 큰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지 못함으로써 각 영역의 공동체가 하나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클라팜 공동체는 그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 사라져 버리고 역사를 이어 발전하지 못하였다. 개인의 역사적 제자도는 있지만 공동체가 역사성을 가지고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나라의 실용적 공동체는 되지만 총체적 원리적 공동체의 모습을 띠지 못한 한계때문이다. 옥스퍼드 운동과 클라팜 공동체 이것이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두 운동이다.
선교운동과 사회운동은 영미를 통틀어 나타난 것이다. 19세기 선교운동의 한계는 제국주의와 함께 간 것인데 이것도 총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민족근성의 문제이다. 선교는 외연의 확장이다. 종교적 진리의 외연을 확장하면서 근본적인 출발과 총체적 고려를 동시에 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이런 고려가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함께 간 것이다. 제국주의를 없애는 것을 우선 목표로 하지 않은 것, 문화선교라는 차원에서 유럽문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선교한 것이 다 이런 이유이다. 문화에 대한 건전한 비판으로서 기독교를 생각하여야 한다. 문화가 만들어 질때 문화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여야 한다. 선교운동과 사회운동에서 근본적 출발과 총체적 고려 이것이 안된 것이다. 선교운동에서 특수선교를 위한 성서공회가 만들어 지고 선데이 스쿨, 에스브이엠 등의 청년선교단체가 결성되었다.그 다음 사회개운동은 노예제도의 폐지, 퀘이커 교도, 모라비안 교도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반전운동, 중독교정 운동, 금주법 제정시도, 형법개정, 결투법 폐지 등이 있고 사회사업으로 감옥개량의 아버지로 불린 존 하워드는 교도소의 비참한 실태를 국회에 보고하고 감옥개량에 일생을 헌신한다. 여성 사역자인 엘리자베스 플라이는 여성수감자를 대상으로 사역하였고 수상, 로봇 필은 사형대상 범죄의 축소, 도둑체포권의 제한을 하였다.
19세기 산업혁명의 결과 인구과잉과 산업화 도시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 문제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도시빈민의 문제가 엄청나게 심각하였고 방적기 발명으로 실업문제가 대두되었다. 감리교의 프리미티브 메소디스트는 교육,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회개혁에 집중적으로 뛰어들었다. 영국에서 19세기에 칼 막스가 자본론을 썻고 그는 영국에서 첫 번째로 공산혁명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다. 영국 공산혁명을 막은 여러 이유중 하나가 사회개혁에 힘쓴 감리교의 횔동임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상업의 자유가 확장된 결과 아담스미스는 개인의 사업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라는 경제이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교인들은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지고 이것을 부인하고 목사들이 뛰어들어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였다. 미국에서 사회개혁에 유명한 신학자 월터 라우센 무쉬는 사회복음을 최초로 얘기한다. 사회복음은 복음의 총체성을 절감하고 나타난 운동이다. 교회가 자꾸 요구함에 따라 국가가 사회보장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 출판사 SPCK(Society for Christian Knowledge)가 1899년에 설립된다. 이것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이다. 이렇게 영미속에서 일어난 선교와 사회사업의 관심은 우리 믿음의 외연의 확장에는 중요하다. 그러나 두가지 함정인 근본적 기초 놓는 것과 총체적 준비에 실패하였고 그래서 그 이후에 교회의 건전한 모습이 나타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리빙스톤은 남들이 가보지 못한 지역을 간 사람인데 선교사로는 실패하고 탐험가로서 선교사의 길을 개척해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프리카에 리빙스톤이란 도시가 있고 그곳에 기독교인이 95%이다. 리빙스톤의 후계자인 스탠리는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하였다. 리빙스톤이 아프리카를 개척하면서 가져간 세가지 가치관은 문화, 상업, 기독교이다. 그들의 탐험은 서양문화 우월성을 확신하고 상업의 길 개척 그리고 기독교 전파이다. 영국제국의 근본적 관심은 땅의 확장과 상업을 통한 부의 창출이다. 그 땅의 기독교인이 이것을 막지 못한 것은 그들이 가진 진리가 부분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분진리는 결국 거짓이 된다. 교회는 만들지만 정책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기독교와 함께 들어간 서양문화와 사업적 욕심은 선교와 병존할 수 없는 반 기독교적인 것이다.
인도의 반란으로 영국 사람들이 몰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스펄전은 피의 복수를 갈구하는 더러운 설교을 했다. 자비와 긍휼을 외치던 자가 복수를 정당화하였고 실제로 처참한 보복의 역사기 시작되었다. 이것이 3C(culture, commerce, christianity)의 결합을 당연하게 생각한 영국 제국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이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에서 선교를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껍데기 뿐인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모습이다. 흑백논리로 스펄전 한 사람의 문제가아 니라 이것은 그 시대 전체의 시대근성이었다. 19세기에는 특별한 이론이나 논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만 외연의 확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새로운 교리의 발견이 없더라도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종교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제5의 종교개혁
2014-11-14 15:37:32
6. 20세기 제5의 종교개혁
20세기 초는 이제 제5의 종교개혁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 1914년, 1939년의 제1, 2차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은 교회의 무능을 철저히 드러낸 것이다. 사단의 이 무시무시한 전쟁를 막지 못한 무능은 19세기 교회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는다. 21세기는 더 심각한 환경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주어졌음을 믿는다. 19세기는 근본원리나 본질의 발견의 부족하였던 시대였고 20세기 들어 발발한 세계대전은 19세기의 멍청한 외연의 확장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19세기와 달리 20세기는 내적원리가 발견된 시대였다.
6.1. 일반적 상황
20세기의 가장 현저한 일반적 상황은 제1차, 2차 세계대전 그리고 공산주의의 수립과 붕괴였다. 1차 세계대전은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국가교회의1 Landeskirche ( state church)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는 시기였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는 프러시아의 왕이면서 프러시아의 교회수장이었다. 빌헬름2세는 전쟁의 호소를 교회속에 하였고 여기에 맞추어 지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전쟁은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 기회가 될 것이리고 주장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란 논법을 세웠다. 아톨프 폰 하르낙은 독일정치를 변호하며 왕을 위한 연설문까지 작성하였다. 제2차 대전당시 미국의 사회복음을 Social gospel 하던 이들도 동일한 맥락으로 전쟁을 지지하였다. 정신적, 신학적 붕괴를 가져온 양차 대전은 교회의 수치이다. 그런데 교회가 아직도 이 전쟁의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 영국, 미국의 교회이다. 교회가 전쟁을 막을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것은 이론적인 준비가 안되고 총체복음의 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로 되어가는데 대안을 생각하지못하는 이 무능한 교회의 죄악의 원인은 총체복음의 원리가 없는 것이다. 영미는 도대체 총체적으로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양차 대전은 교회의 총체적인 무능의 결과이다. 20세기에 이루어진 공산주의의 득세와 붕괴는 무섭고도 쓰레기 같은 실험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공산주의가 붕괴되었다. 공산주의 실험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것은 러시아 정교의 무능때문이다. 19세기 3대 악동중의 하나님 칼막스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의 문제였다. 세상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은 교회가 돈에 대해 위선했기 때문이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가운데 공산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속에 돈을 초월한 삶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모두 물질주의이다. 1989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세계가 하나로 되어가는데 교회가 이것을 자각하고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20세기는 양차 대전과 공산혁명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는 역사로 비참하게 점철되었다.
6.2. 정신적 상황
19세기의 3대 악당이 20세기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칼막스의 공산주의 ,챨스다윈의 진화론, 이들의 공통요소 2가지는 첫째, 인간은 철저히 신적 존재가 아니라 땅의 존재라는 것이다. 두 번쩨는 땅에 속한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욕망을 거침없이 충동질 한다는 것이다. 욕망을 입으로는 부정 하지만 실제 삶은 욕망을 따라 사는 위선을 가진 상태에서 이들은 인간의 욕망을 아예 까발린 것이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왜곡된 성의 추구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것은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물질욕구의 추구를 정당화 시킨 것이고 진화론은 동물적 존재로서 적자생존을 당연시 함으로 인간의 지배욕구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3대 욕망인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3대 악딩은 사단의 내세운 선두주자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드신 근본적인 것을 왜곡한 것이다. 하나님 없는 가운데 인간이 욕망을 추구하다 보니 왜곡되고 뒤틀린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세상처럼 절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용과 더 나아가 깊은 은혜로이런 것을 초월하고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기초위에 무서운 역사를 만든 것이 20세기 역사이다. 이론이 중요하다. 이론이 무서운 것이다. 이론은 건축물의 구조와도 같다. 일단 구조가 세워지면 부수기가 어려워진다. 르네상스-이신론-계몽주의-19세기 3대악당-20세기 사상체계의 변화속에 이성중심 체계가 붕괴되고 3대악동의 기초위에 20세기에 나타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것은 모든 가치관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으로서 악의 구조속에 쓰레기더미가 된 20세기 후반의 정신적 모습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주자인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초 여성해방론자인데 사단적 마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성의 해방과 자유는 우리가 영적 존재가 되면 자연히 해방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파괴를 통해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 자체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속의 정신체계의 엉망과 정신적 붕괴의 형태가 중독현상이며 중독은 허무를 잊기 위한 발악이다.
6.3. 교회적 상황
교회의 대안이 없고 세계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으로 무책임한 교회의 모습이다. 세상에 대한 책임에 19세기보다 교회는 더 둔감하게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를 기점으로 에큐메니칼 교회연합 wcc 이 시작되었고 1948 암스텔르담 대회에서 교회일치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는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안에 침투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1948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다종교회의로 변질되어간다. 그 취지는 종교 절대주의를 지양하여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이런 것이 전쟁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해결을 더 못하는 길로 간 것이다. 20세기는 이슬람과의 투젱이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슬람 문제를 알빈 토플러는 문명의 충돌이라고 해석하지만 사실 이것은 교회의 무능 때문이다. 한편 이 시대는 power encounter 능력대결을 통하여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절호의 챤스이다. 사도바울이 종교간의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딪혀서 승리하였듯이 내적인 능력으로 핍박과 고난을 같이 받는 파워가 중요하다. 이슬람 선교는 죽으러 가는 것이고 이럴 때 적이 정복되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로 정복하려는 발상은 사단의 속임이다. 그 다음이 나타난 것이 사회복음 social gopspel 이다. 이 접근방식이 대단히 공산주의적이 되어갔는데 이들의 관심은 결국 물질의 문제이고 물질주의인 공산주의와 손을 잡게되어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의 체제가 나오게 된다. 이들은 복음 자체를 근본적으로 포기하여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사회제도를 부순 것만을 중시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전제로 성경을 왜곡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기독교는 더 이상 전승되지 읺고 그 다음 세대가 단종되어 버린다.
조직과 시스템이 붕괴된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20세기의 종교개혁이 무엇인가?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혁명적인 도구가 첫째 성령운동이고 두 번째는 영성운동이다. 이 둘의 공통적 특징이 영이다. 영은 2천년 교회역사상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20세기에 제대로 꽃피지 못한 이 운동을 어떻게 제대로 이러받을 것인가? 이성이 붕괴되고 자신감이 상실된 채 쓰레기더미 위에서 헤메는 20세기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전제가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의 말로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될 때 인간이 누구인지도 알게된다는 것이다, 영으로서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예 성령하나님 자체를 알게된 것, 그리고 인간존재가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이성적 존재를 극복한 감성적 존재도 아니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영적 존재, 아니 아예 영이라는 자각이 20세기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한 세기를 종교개혁이라고 판단하는가 하면 첫째 새로운 원리의 발견, 둘째 운동이 일어나는 것 (조직, 시스템)이다. 20세기는 새로운 이론이 찬란하게 드러난 것이고 그 운동이 진행되다가 21세기로 넘어온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은 누구인가? 성자중심에서 성령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발견되는데 2천년이 걸렸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치료책으로서 성령의 시대,영성의 시대를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것은 21세기까지 넘어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사람들이 너무 집착한다. 신6:4의 유일성 uniqueness는 숫자적 유일이 아니고 관계적 유일이다. 차영배교수가 한 세분 하나님이란 표현은 탁월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아니라 세분이시다. 이 세분이 하나가 되신 것이다.이것은 앞으로 이슬람 선교와 유대교 선교에 매우 중요하다. 일신론이나 단일신론은 매우 위험하다.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세분으로 존재하시는 삼위하나님을 알게될 때 나의 중심성이 파괴 될 수 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교회사 가운데 성령논쟁으로 싸우다가 갈라진 것이다. 성령의 나오심 procession을 표현할 때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고 서방교회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filiogue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령논쟁을 통하여 서방과 동방의 지역근성이 나타난 것이다. 동방적 근성은 삼위의 교제 communion을 중시하여 성부에서 성자와 성령이 나오고 삼위가 교제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나이것도 엄격히는 완전한 교제가 아니고 성부가 위에 있는 구조이다. 이에 반해 서방적 근성은 삼빡하고 질서를 좋아하는 근성으로 하나님을 나란히 수직적으로 세은 것이다. 신학적 사고도 지역성을 극복하기 어렵다. 우리는 시대적, 지역적 사고를 극복한 신학적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위르겐 몰트만은 서방식 삼위일체론의 하이어라키가 인간사회 구조도 하이라키로 만들었다고 공격하며 동방의 삼위일체를 가져오려고 하였다. 이것은 영원과 역사를 항상 혼동하는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영원속에서는 세 분이 동일하고 하나가 되시는 것이다. 이 신비는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한다. 한편 경륜적 삼위일체는 세 분 하나님이 역사에 뛰어들면서 서로 언약을 맺고 각자 역할을 나누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가 열등한 것이 아니고 언약을 맺고 역사에 동시에 뛰어든 것이다.
영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역사가 증발되고 역사에 무관심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르겐 몰트만의 비판이 맞게 된다.
성령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신학적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사건을 터트려 버린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 바르트가 20세기는 성령시대라고 예언했는데 그 근거는 그가 밧볼 지역을 방문 당시 그곳에서 일어난 요하네스 불룸하르트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불룸하르트로 부터 듣고 받은 충격이다. 크리스토퍼 불룸하르트의 아버지 요하네스 불룸하르트는 1830년대 경건주의의 후예인데 그가 사역하던 밧볼이 독일의 성령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것은 독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20세기 초 오순절 운동,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 자체가 그들의 체험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애매모호했는데 이것은 불 같은 성령의 역사가 지나간 후 아무것도 없고 불 탄 흔적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불과 외적인 자취,결과를 추구하는 성향이 생기게 되었다. 성령의 가장 낮아지심때문에 성령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하나님이 이렇게 낮아지신 것을 보면 삼위하나님간의 언약이 평등언약이 아니다. 우리의 언약도 평등언약이 아니고 사역의 필요를 따라서 그 지위와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령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자체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이 자동적으로 어렵게 되고 성령운동이 은사주의로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록된 계시로 은사를 검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계시적 영성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령운동을 생각할 때 먼저 관계>존재>사역의 공식을 생각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성령을 볼 때 사역만 보고 존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언약관계 때문에 가장 낮아진 바람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에서 예수 사역이 기초놓는 사역이라면 성령 사역은 완성하는 사역이다. 예수사역이 제사장 사역이라면 성령사역은 왕 사역이다. 바람잡이 이면서도 실제로는 왕으로서의 사역, 이것이 놀라운 성령사역의 특징이다. 이것을 우리는 헷갈리지 말고 속지 말아야 한다. 바랍잡이 성령하나님은 늘 예수님만 높인다. 이런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성령을 오해하게 된다, 존 윈버의 빈야드 운동도 초기 오순 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이들의 치명적 실수는 성령의 사역에만 집중하고 성령의 존재와 성령의 관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을 오해한 것이다. 우리도 사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우리의 언약을 알아야 이 사역이 지속적, 역사적 사역이 될 수 있다. 첫 사역은 예수 사역, 두 번째 사역은 성령 사역, 세 번째 사역은 성부사역인데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사역이다. 왕 사역의 특징은 전 영역과 전 지역속에 하나님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왕 사역의 가장 위대한 기초이다. 우리도 성령 하나님처럼 제대로 왕 사역을 해야 한다.
6.4 영성운동
요4:23-24의 문학기법을 merism이라고 하는데 두 극단을 소개하여 총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사야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우리라는 표현도 동일한 문학기법이다. hendiadys란 문학기법은 차원이 다음 카테고리의 두 단어를 합쳐서 하나의 상을 만드는 것인데 예를 들면 시 42:4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이것은 기쁨과 찬송이란 두가지 서로 다른 카테고리의 단어를 합쳐서 기쁜 찬송이란 상을 만든 것이다. 요4:23-24 “영과 진리로” 라는 말을 해석할 때 영적 진리로 혹은 진실한 영으로 이렇게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실한 영으로,,라고 해석할 때진실한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가? 혹은 우리 영을 의미하는가?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배드리는자의 태도를 얘기하는 것이므로 성령이라는 해석은 무리이고 우리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낫다. 요한복음 동일 본문을 hendisdys 기법으로 해석하면 영적 진리라는 의미가 된다. 독자적으로 해석하면 영과 진리가 된다. 요4장은 예배받으시는 자와 예배드리는 자가 모두 영적인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제5의 종교개혁인 영성운동을 다루고 있다. 20세기 후반 영성 운동은 성령하나님에 대응하는 인간존재가 영적존재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인간 인식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전파시 동방으로 전파된 것이 도마가 전파했거나 혹은 네스토리우스(경교)의 전도 정도이고 그 다음에 러시아 정교회가 있었지만 이런 것들은 교회의 주류를 이루지 못하였다. 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역사현실에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님나라는 이상하게 서진하였고 그 첫 관문이 그리스였다. 그리스속에는 신화가 있다. 이것은 인간속에 있는 신에 대한 향수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가 로마로 오면서 신화적 요소가 점점 없어지고 나중에는 신적인 요소가 다 제거된 인간적 요소만 남게되었다. 중세 암흑기가 지난 후 근세부터 서양의 인간관은 인간을 육,지,정,의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였는데 그중에 가장 선두두자가 이성이었다. 이성은 르네상스, 이신론, 계몽주의그리고 3대 악동을 거쳐서 현대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성의 역사의 붕괴되고 모든 것이 거부되며 감성의 추구, 의지의 발휘, 육체자랑이가 강조되는 과정이다. 이런 가운데 인간인식의 근본적 혁명을 하는 기초가 인간 존재를 영으로 정의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존재인 인간도 영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영의로서의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인식으로 인간존재가 신적존재와 합치하는 가능성이 주어짐.
핼라시대의 효과적 복음인 요한 복음은 이방인을 향한 전도적 메시지가 강하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히브리인에게 익숙한 소피아 개념이 아니라 헬라인에게 익숙한 로고스 개념이라는 유혹적 개념으로 시작하였으나 요한은 처음부터 바로 로고스를 생명과 빛인 인격적 신적 실체로서 설명한다. 오늘날 지,정,의가 다 무너진 이 시대에 새로운 존재, 즉 영적 존재로서 인간이 하나님앞에 서게되는 이것이 너무나 놀랍고 탁월한 인간관이다. 성령운동과 영성웅동은 바늘과 실의 관계이다. 칼빈의 말처럼 신지식과 인간지식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운동이 영성운동으로 바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성령운동이 성령사역의 결과는 보이나 성령자체는 보이지 않음으로써 도구로 쓰인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잘못된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은사주의를 조심하여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나라의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성령운동의 치명적 약점은 성령의 음성은 남는데 성령의 존재가 보이질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망각하기 쉽고 교회마다 예수만 높이고 십자가만 걸려있다. 하나님 영과 만나는 존재로서의 영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자각과 함께 영성 Spirituality에 대한 본격적 거론은 1960년대 부터이다. 성령에서 인간의 영성으로서의 이전은 자연스러운 발전이다. 처음에는 성령을 강조하면 열광주의 감성주의로 비판받던 때가 있었다. 성령운동을 하는 여의도 오순절 교회는 영성운동과 성령운동을 겸하여 하는 발산동의 교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령운동자들은 성령의 외적 결과에 잡착함으로써 영성운동자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성운동자들의 결핍이 역사성과 현재적 공동체성이다. 그들이 현세 가운데 기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은 21세기에 나타날 운동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 두 운동은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드디어 21세기 즉 제6의 종교개혁인 공동체성과 역사성에 대한 자각을 여는 기초를 제공한다. 20세기의 영에 대한 자각이 21세기의 영적 공동체성과 영적 역사성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21세기제6의 종교개혁의 기초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성령에 대한 자각인데 성령에 대한 최초의 관심이 1054년 서방, 동방교회의 분리시 서방교회는 성령이 예수를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하고 동방교회는 그저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필리오케 filioque 논쟁이었다. 이후에 성령에 대한 관심은 없다가 21세기 성령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발견을 통하여 21세기는 자동적으로 삼위일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1세기 인간존재의 역사성과 인간존재의 공동체성이란 이 혁명을 일으키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가 삼위일체론이다.
각주 1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예민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면 정교분리의 위선에 빠지게 되고 아니면 중세 로마교처럼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거나 국가교회 형태로 세상이 교회를 지배하게된다.
-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예민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면 정교분리의 위선에 빠지게 되고 아니면 중세 로마교처럼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거나 국가교회 형태로 세상이 교회를 지배하게된다. [본문으로]
21세기 제6의 종교개혁
2014-11-14 15:46:08
7. 21세기 제6의 종교개혁
6.1 시대적 상황
6.1.2 정치사회적 상황
1880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전신국에서 지내기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영국 해군의 전세계에 깔아놓은 해저 케이블로 하룻만에 전세계 소식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21세기 속에서는 거리가 단축되어 지구안의 어떤 일도 하루안에 다 알 수 있는 통신발전을 통한 공간의 단축이 획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운송매체의 발달로 지금은 지구가 일일 생활권에 들어가고 있다. 공간의 통합, 이것은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욕망의 충돌로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 갈 가능성이 많다. 진보와 야만이란 책에서 20세기를 총정리하면서 진보는 소수에게 돌아가고 절대 다수에게는 야만을 경험한 시대였으며 21세기는 더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리고 거리의 통합은 역사의 통합을 초래한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박정희 시대는 정치가 경제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다국적 기업의 시대로서 기업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 국가는 지역성의 한계를가지나 다국적 기업은 지역을 초월하여 국가를 지배할 수 있다. 아마 삼성경제연구소는 삼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연구할 것이다. 이제는 국가단위가 아니라 경제블록이 더 중요해진다. 이제는 기업인들이 다니는 회의에 정치가가 따라 다닐 것이다. 전 지구가 하나의 국가가 되는 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세계통합의 길로 점점 가고 있다. 공간의 통합에서 역사의 통합으로 나아가면서 하나의 의미체계가 되어간다. 인간의 야심은 모일수록 커지고 욕망의 충돌로 거대 전쟁이 나타날 것이다. 21세기를 낙관할 것인가 바관 할 것인가? 역사의 종언을 쓴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대표적인 낙관론자로서 미국문화를 인류발전의 최종형태로 본다. 비관론자인 새무엘 헌탕턴은 문명의 충돌로 인한 전쟁을 예견한다. 이런 가운데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6.1.2 정신적 상황
포스트 모더니즘은 다른 말로하면 deconstruction 해체주의, 파괴주의이다. 뭘 파괴하느냐 하면 잘못된 권위, 주의 ,주장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뭘 하자는 무리를 전부 의심하고 해체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 많이 속았고 뭐 하자는 놈들 속의 잘못된 전제와 야심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해체주의의 긍정적 기여는 우상들을 다 때려부순 것이고 자기 자신도 부순 것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것은 진정한 권위도 부수려고 하는 것이다. 해체주의자 미셜 푸코는 인간역사를 광기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된 권위와 진실된 말씀의 능력만 가진다면 지금이 오히려 기회이다. 폐허위에 본격적인 건설이 가능하다. 현대는 이성, 지식의 종말시대이다. 지금까지 지식은 도구적 지식일 뿐이다. 그러나 이 종말의 건너편에 관계의 시대가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음을 기대한다.
6.2 교회적 싱황
중세교회, 종교개혁교회, 근세교회, 현대교회의 잔재들이 남은 가운데 어떻게 새롭게 해야할지 모르는 가운데 있다. 고대교회는 외적 핍박이 끝나고 국교화 되면서 외적타락이 발생하였다. 내적도전은 이단의 도전인데 초대교회에 이단과 투쟁하면서 정통교리가 세워지는 과정에 권모술수가 난무했는데 투쟁을 해나가는 방식의 부정적 요소가 지금도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세교회의 잔재는 중세교회의 놀라운 특징인 조직화인데 오늘도 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잔재는 16세기가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는 시작일 뿐인데 이것이 완성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로 타락이 시작되었다. 다시 시작해도 타락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근세교회의 놀라운 특징은 외연의 확장이다. 그러나 18-19세기 부흥과 선교는 내포의 충실, 충만이 없는 외연의 확장이었다. 내적 충만이 넘쳐난 외연의 확장은 깊고 넓고 오래 가나, 내포의 충실, 충만이 없는 외연의 확장은 매우 위험하고 부실한 결과가 나타난다.
현대교회의 잔재는 성령역사는 왜곡되고, 왕되신 성령하나님의 포괄적 통치를 체험하지 못한 가운데 외적인 몇가지에 잡착하며, 영성운동도 왜곡된 가운데 밖에는 쓰나미가 물려 오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 온갖 체험을 다하는 비 역사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
이런 속에서 제6의 종교개혁인 진정한 종교개혁은 공동체성의 확인과 역사성의 충만과 확인에 기초하여야 한다.
1) 공동체성의 확인 - 진정한 하나가 안되면 충돌,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다
2) 역사성의 충만과 확인 - 하나의 의미있는 체계로 가기위한 우주역사의 준비가 안되면 독재그룹이 생겨 세계를 속이고 지배하게 된다.
6.3 삼위일체론
영적 차원이 기초가 된 공동체성과 역사성 이것을 위한 기초로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은 마지막 시대에 쓸 수 있도록 아껴놓으신 초강력 진리이다. 물론 하나님은 고대에도 밝혀놓았지만 선배들이 못본 것이다.삼위일체가 2000년 역사상 제대로 안 다루어진 것이다. 선배들이 안 건드린 것이 결과적으로 21세기에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것이 되었다. T.F.Torrance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아다나시우스 이론에 근거한 삼위 하나님간의 상호내주, perichoresis 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 표현 보다는 삼위하나님간의 언약맺으심이란 표현이 탁월하다. 상호내주는 언약맺은 것이다. 그동안 삼위하나님간의 관계에 대하여 상태적 표현의 한계에 갇혀있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를 위해 남겨놓으신 진리이다.
다니엘 7장, 계4, 5장에 대한 추론에서 우리는 성령 사역의 신비, 즉 성령하나님의 위대한 트릭에 속지 말아야 한다. 신12장의 내가 내 이름을 두도록 택할 곳하나님의 위대한 트릭에 대하여 다윗은 성막 서원을 하였고 하나님은 다윗 서원을 당신의 서원으로 갚아주셨다. 성령사역의 트릭은 신12장 보다 더 놀라운 트릭이다. 사역은 보이는데 본질이 보이지 않는 성령의 트릭은 삼위하나님안의 언약관계 때문이다.
삼위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수직구조, 서열이 있는 이상한 구조로 관계를 형성하시고 역사의 무대에 첨벙 뛰어들어 오신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책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장하길 서양의 서열구조식 삼위일체론이 서양의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쳐서 서양사회속에 계급구조가 만들어졌다고 바판하였다. 그리고 이 신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하나님사이의 교제, communion 를 중시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를 통하여 계급구조의 사회구조를 바꿀 것을 제시하였다. 몰프만은 계급구조의 타파를 주방하는 민중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에 대하여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이들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환영하였다. 몰트만은 이것이 역사 가운데 주어진 우리의 희망이라고 하면서 소망의 신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수직구조, 서열이 있는 이상한 구조로 관계를 형성하시고 역사의 무대에 첨벙 뛰어들어 오신 것은 역사의 비참한 현장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를 닮은 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이 침투해 오신 것이다. 동방의 삼위일체론은 역사참여를 약화시킨다. 동방교회가 얼마나 역사참여에 무능했는지 역사가 증명한다. 서방의 삼위일체론의 위계질서는 대단히 자발적인 것이다. 빌립보2:5-11에는 동등한 분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한다. 우리가 빌2장을 성령을 행해서 응용할 수 있다. 성령하나님은 예수보다 더 낮아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 4장과 5장의 트릭에 속지 말고, 겸손히 숨으시는 성령하나님을 함께 찬양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위계질서의 구조로 역사 가운데 오시는가? 그것은 사단이 모방적 삼위일체론을 통한 위계구조를 가지고 거짓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것을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위계구조를 가지고 오셨고 그러나 지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종처럼 겸손히 섬기는 모습1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6.3.1 삼위일체론의 공동체성
내재적으로는 모두 다 동등하신 분인데 경륜적으로는 낮아지신 하나님, 내재적 삼위일체는 신비중의 신비이다. 그런데 경륜속에서는 위계질서를 가지고 나타나신다. 인간도 경륜속에서 한 때 스승역할하고 한때 제자역할을 할 뿐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복제인 제자도 구조는 경륜적인 인간관계이다. 세상속의 악한 하이어라키 구조를 부수기 위하여 삼위하나님은 자빌적인 하이어라키 구조를 가지고 역사 가운데 오신 것이다. 삼위하나님의 DNA를 가진 우리도 자발적으로 이런 구조를 가지되 지배하지 아니하고 으뜸이 된 자가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될 때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의 하아어라키를 부수게 될 것이다. 삼위하나님의 위계질서는 아주 혁명적 방식으로 역사가운데 오신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최고인데도 사실 성부는 교회사에서 뒷방 할아버지 취급을 당하시고 더구나 성령하나님은 제외되신 가운대 예수만 주로 찬양하였다, 내재적으로는 우리는 다 형제이고 스승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시나, 겸손하신 성자, 더 겸손하신 성령하나님을 본받아 경륜속의 위계질서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섬기고 섬길 때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사회의 악한 구조를 부술 수 있다. 인간 스승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그 빈자라를 채우는 제자도,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섬김이며 이것이야말로 사단의 지배적 체제인 가짜 삼위일체를 쳐부수는 길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의 대인들 처럼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큰자가 오히려 작은자를 섬기는 구조를 만들 수 있게된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공동체성이며 이것이야 말로 지구가 하나가 된 가운데 나타날 욕망의 충돌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6.3.2 삼위일체론의 역사성
21세기 역사의 혁명은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로 통일되는 것이다. 역사통합의 길은 삼위일체론의 역사성에 있다, 1번 타자로 첫 안타를 치고 나간 성자의 유월절 사역은 하나님나라의 모든 기초를 세우신 정교한 제사장적 사역이었다. 1번 타자 출루후 2번 타자는 성령하나님이시고 마지막 타자가 장막절 사역을 행하실 성부하나님이시다. 삼위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속에서 역사의 의미는 한분에게 잡중되지 않는다. 세분이 각각 선발, 계투, 마무리 타자이다. 중간이면 어떻고, 시작이면 어떤가? 팀웍에서는 희생플라이도 의미가 있다. 팀플레이로 시간차 공격을 해나가는 것과 같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역사성이다. 세계 역사의 통합은 정말 골치아픈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세계 역사통합의 길은 삼위일체론의 역사성 가운데 있다. 자신을 제물로 삼으신 제사장 사역, 왕인데 왕이 안보이는 성령의 왕 사역 그리고 성부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예언자 사역,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역사성의 개혁을 이루는 기초이다.
6.3.3 유일한 해법인 삼위일체론
삼위하나님의 사역의 그 철저한 공동체성과 역사성, 인간들이 이것을 배우는 것만이 공간과 역사가 통합됨으로 욕망의 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커진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법이다. 1990년 이후 삼위일체론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주석적 작업을 하지 않고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한 것들이다. 구약의 3대 절기는 삼위일체의 완벽한 주석적 접근이다. 진리가 먼저 발견되고 상황이 나중에 전개되는 이것은 교회가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부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이다. 상황이 더 벌어지기 전에 상황에 우리가 저극적 준비 개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21세기 제6의 종교개혁의 기수는 누구일까? 우리 말토예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시대에 발견한 진리로 최선을 다할 뿐이고 우리 자신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나아갈 것이다. 大尾
각주 1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
-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2-4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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