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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교회의 보편성과 분리주의- 김재성

교회의 보편성과 분리주의- 김재성

2014-11-07 16:22:07


  기독교는 기본적인 진리를 공유하고 있기에, 교회가 유한 복음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는 보편성이라는 본질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권능을 통해서 용서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풍성한 은혜가 넘쳐 흘러나가는 곳이다.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서 온 인류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시작된 곳이다. 오순절 날에 부름 받은 새로운 백성들, 하나님 나라의 은택들을 받으면서 참여하게 되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는 보편적인 신앙고백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흘러넘쳤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 2장부터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는 모습은 가히 놀라움과 파격적인 충격, 그 자체였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교회,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주일 날에 차별없이 한 자리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이다 (고전 16:2; 롬 16:16).

 

  교회는 한국 사회에 보편적 은혜를 전달했다. 구한말 조선시대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남자와 여자를 한 곳에 모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유교제도에 따라서 반상의 계급을 강조해오던 나라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교회가 드러낸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성격을 반영하고자 모든 사람들을 다 차별없이 용납하고 받아주었다.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를 새롭게 세우고자 할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뇌하던 문제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보편성의 원리이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도 교단과 교파 사이에 여러 종류의 갈등이 있지만, 그 근본에는 복음진리의 보편성이 교류하고 있다. 내적으로 흐르는 교통처럼 외적으로도 건전한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서로 형제우애를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교파와 교단의 우수성과 순결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교회들이 있다. 분리주의적인 지도자들은 오직 자신만을 추앙하고 흠모하도록 조작하고 있다. 보편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단적이고 사교집단적인 성격으로 전락해서 자기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선전하는 엉터리 주장을 하게 된다.  

 

 

 1. ‘보편적’이라는 원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인종적인 벽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계층과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개념이 규정되던 시대라서, 새언약의 공동체로서 등장하는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적합한 용어가 필요했었다.  성경에 담겨있는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그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성경 밖에서 채택되는 단어가 종종 있다. 보편성이라는 용어도 역시 성경에는 이 단어가 직접 교회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에서는 아직 교회를 “보편적”이라는 단어를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해서 증거하는 표현으로 채택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전체에게 관련된” 혹은 “모두, 일반적으로”라는 의미이다. “일부분” 혹은 “특별한” “분리된” 것에 대해서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교회는 지상의 모든 사람, 모든 계층이 다 포함된다는 의미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매우 풍부한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특수한 교회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오직 은퇴목회자만 모이는 교회라든지, 혹은 연예인 교회, 체육인 교회, 장애인 교회, 대학생 교회, 농어촌 교회 등등 어떤 특수한 직업이나 계층이나 상황을 반영하여 만들어지는 교회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몇가지 계기가 된 사건들이 있었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 “보편적” 교회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요한계시록 2장 8절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참된 교회를 표방하면서, 보편성을 잃어버리고, 특별하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만의 모임이라고 주장하였다. “분파성” “분리주의” “배도성” 혹은 “이단적인”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보편적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강조된 것은 초대교회의 박해상황에서 빚어졌다. 참된 교회를 염원하던 성도들은 거짓 교회와의 구별을 원했다. 로마 통치권이 강하게 미치던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서는 황제 디오클레시안 시대 (303-305)에 극심했던 기독교 박해를 견뎌내면서 생겨난 그룹이다. 순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박해시대에 배교한 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해가 오면 세상 권세와 타협하고, 평화 시대에는 기독교인 행세를 하려는 자들을 혐오하였다. 그러다 보니, 차별의식이 심화되고 말았다.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서는 박해와 배교자들이 발생하면서 매우 심각하였다. 신앙을 잃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해오던 성도들은 배교자들로 간주되는 자들과 타협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칼타고에서 어거스틴이 전면에 나서서 강력하게 분리주의적인 도나티스트들에게 논박을 가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과 대면하면서 심각성을 파악하였다.  이 논쟁이 거의 백 여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배도자들이 집례한 성례들이라도 회개한 자들이라면 유효하다는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예루살렘의 씨릴 (386년 사망)도 이미 교회의 보편성을 여러 측면에서 선포하고 주장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도나티스들에게 대해서 최대한 관용과 인내심으로 대하라고 주문하였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정통성에 도취되었던 무리들은 결코 일반 교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극단주의는 결구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주후 409년, 호노리우스 황제 시대에 칼타고의 마르셀리우스는 도나티스트들은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교회가 반드시 보편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서 모든 것을 좀 더 살펴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가 본질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서로 갈등과 대립을 벗어야 할 때이다. 

 

1-1. 어떤 장소, 어떤 사람들에게 속하는가?

 

참된 교회는 어떤 특수한 지역 사람들에게만 귀속되어지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교리에만 집착하는 것도 역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회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보편적인 교회”를 항상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구원의 보편성과 구원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개신교회에서는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말이나,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나 같은 의미가 된다. 

 

벨직 신앙고백서(1561) 제 27항을 보면, 매우 분명하게 보편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가톨릭 교회, 즉 보편적인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전적인 구원을 바라는 참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하나의 거룩한 회중이며 회합이다. 이 교회는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이시지만 신하된 백성이 없이는 왕이 되실 수 없으므로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교회가 때로는 사람들 눈에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교회를 광분하는 온 세상에 맞서도록 보존하시고 지탱하신다. 아합의 위험한 통치기간에도 그러셨으니 그 때 주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칠천명을 보존하셨다. 더구나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혹은 어떤 인물들에게 국한되거나 구속되어 있거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퍼져 흩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힘으로, 같은 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고 연합되어져 있다.”

 

1-2. 로마 교회가 “가톨릭” (보편적)인가?

 

일반적으로 세계 교회사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마치 보편적인 교회란 오직 로마 교회인 것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의 명칭이 로마 ‘보편적’ 교회라고 해서, 이름처럼 구성되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지구상 어느 곳이나 모두 다 포괄한다는 의미이자, “공간적 보편성” (spatial universality)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복음이 우주 전체에 퍼져나간다는 인식하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의 보편성을 숫자에 근거하는 보편성의 개념으로 지리적인 의미를 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교회가 널리 퍼져나갔다고 할 때에, 그 과정에서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유익하느냐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보편성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다거나 이미 정해진 상태에 대한 설명도 아니요, 역사적인 개념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보편성의 의미란 본질적으로 모든 시대를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요, 그 외적인 표현을 통해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에 비해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 로마 가톨릭 신학자 콩가 (Yves M. J. Congar, 1904?1995)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훨씬 더 영향력이 컸다. 교회의 본질을 다루는 보편성의 원리에서 그가 주로 주장한 것은 질적인 충만성과 완전성이었다. 보편성이란 양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질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할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의 보편성은 각각의 민족성과 문화들을 다 융합시키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루터와 칼빈의 것들도 수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들 종교개혁자들은 한쪽의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종교개혁은 보편적인 교회의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면서, 그래도 로마 가톨릭교회야말로 어느 한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아직 완전히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보편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각 국가별, 문화의 여러 형태에 대해서 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것은 곧바로 다양성을 넘어서서 다원화 (pluralism)로 연계되어지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콩가는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진영의 개신교 교회들이 새로운 보편적 교회를 향해서 서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콩가는 여전히 로마 교회의 입장에서, 그저 약간의 포용성과 수용적인 태도에 그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여전히 개신교 교회를 분리주의자로 비판하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 동조할 수 없는 것은 도리어, 제도적 통일성을 가지고 교회를 정치적인 집단화 하고 있는 자들의 심각한 이탈 때문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단지 조직적인 전통만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시대의 통치개념을 가지고 여전히 세계 교회에 왕노릇을 하고 있는 교황청의 모든 처신들은 가히 적그리스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속히 모든 정치적인 체제를 벗겨내고, 복음으로 돌아가는 순수성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로마 제국의 권세와 권력이 영원하지 못하고 무너졌듯이, 로마 교황청의 정치력이나 지도력도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전 세계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을 뿐이다.

 

2. 보편성의 성경적 기초

 

교회의 보편성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여 세워진 개념이다. 기독교는 보편적인 종교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따라서 하시는 것이며, 그 외에 어떤 기준이나 제한을 두지 않는다. 남녀의 차별이나, 나이에 따른 구별이나, 인종, 신분, 지위, 국적, 언어에 전혀 제한을 두지 않는다. 교회의 보편주의는 어떤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모든 민족” “열방”으로 나가라고 되어 있다.

 

보편성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된 것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때부터다 (행 2:11, 17, 21, 39; 10장 11절). 교회의 원리가 되는 보편성의 성경적 기초가 되는 오순절의 성령선물은 교회의 첫 출발에 나타난 보편적인 축복이었다. 오순절은 성령의 보편적인 선물이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차열없이 내려주셨음을 보여준다. 물론, 언약의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한 것이요, 약속하신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온 모든 민족을 향한 축복이다. 창세기 12장부터 17장에 이르는 동안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차별이 없이 모두에게 내리셨음을 보여주셨다.

 

구속역사의 흐름을 놓고서 볼 때에, 오순절 날은 바벨탑 사건이 반대로 역전되어서 선포되었다고 본다. 인류를 흩어버리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다시 통일하시고자 동일한 말을 주셨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언어로 흩어버린 것은 사람에 대한 심판이었다. 오순절 날은 정 반대의 날이 되었다. 각기 다른 언어이지만 이날 성령이 부어주신 것은 오직 복음 하나 뿐 이었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이나 다 복음 안에서 서로 다른 언어가 통합되었다.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육체위에 부어졌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다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부족의 언어와 모든 민족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반항적인 죄인들의 심령에도 내려주신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주신 약속의 성취과정이다. 구원역사의 중대사건이 일어났다. 오순절 날에 무려 3천명이 회개하는 일대 사건이다. 최초로, 회개와 성령의 부어짐이 동시에 발생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겨져서 결코 없어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엄청난 은혜의 날이었다 (고후 3:3). 나는 한국교회에 이런 날이 다시 오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 집회처럼 다시 회개하고, 행복을 회복하며 갱신과 회복의 축복을 얻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서 가능해진 일이었기에, 성령의 갱신사역을 기대한다.     

 

그러나 곧바로 사도 바울은 유대 전통주의자들의 배타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고 만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따로 모이는 회당이라는 집회장소가 있었다. 사도들은 그곳과 새로운 교회와의 연계성에 주목하였다. 문제는 교회의 보편성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가 보편적이기에 사도행전 15장에서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예루살렘에서 모인 사도들과 장로들의 총회는 유대인들이 구별해 오던 모든 종교적인 계율들을 이방이들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하므로서 위대한 복음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던 바울 사도가 참가한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다. 또한 고난 속에 있던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헌금을 보태준 사건도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적대적인 분리의 장벽이 무너졌다. 그 후로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도 교회의 보편성이 광범위하게 강조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2:13, 갈 3:28, 엡 2:14-16, 골 3:11 등이다.

 

최근 신학에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보편성의 질적인 측면이 더욱 더 강조되는 추세이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외적으로 들어나는 차별철폐보다도, 내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연계된 측면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 보편성의 근본은 기독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된 구원과 모든 충만함을 항상 피력하면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164회나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하나님의 충만함이 들어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나오는 “충만함” (pleroma)이란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일컫는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곳으로서, 모든 것들을 지배하시고 채우신다. 교회는 모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가득 찬 곳이다 (엡 3:19). 에베소서 4장 13-15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도 바울이 질적으로 교회의 보편성을 말하는 가를 알게 된다. 그 의미는 바로를 충만을 해석하는데서 나오는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점차 장성하여서 모든 성도들은 결국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간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에 연계되어진다는 말이다. 

 

3. 보편성의 질적인 측면

 

교회가 과연 어떤 영적인 특징을 가지는 곳인가? 이미 앞에서 설명한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의 원리에서처럼, 개신교 진영에서는 교회의 보편성을 은혜의 선물이자 의무조항이 동시에 함께 내포되어있다고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보편성을 받기도 했고, 동시에 목표로서 이루어나가야 하는 의무도 갖는다. 교회 보편성의 기초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고 말씀에 의해서 영생을 주시기로 택한 자들을 교회에 불러 모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전 인류 가운데서 민족이나 인종이나 성별이나 언어를 초월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하나의 믿음, 곧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언약을 제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통일된 신앙을 주시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참되고 신실한 마음이다. 이것은 질적으로 동질의 것이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1문답에서 강조되어져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독교의 보편성과 진리는 항상 함께 결부되어져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교회의 보편성이 두가지 내용으로 압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편적 교회는 모든 나라로부터 부름받은 자들로 구성되어진다. 한가지 진리는 다양한 지역에, 나뉘어진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종교라는 묶음에 서로 결합되어있다는 진리이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보편성의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상하관계로 묶여진 행정조직과 교회정치를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심조직에 한가지로 연계되어야만 한다고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사법적인 해석이라고 본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는 성경에 위배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교회의 보편성이란 “교황중심주의적인 행정과 정치 조직체라는”의미이며, 그 머리에 위치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교회가 중심에 있을 뿐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런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보편성의 원리를 지켜나가고자 할 때에 항상 조심해야할 부분은 교회를 따로 설립하여서 자신들만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파주의와 분리주의적인 이탈현상이다. 기독교를 빙자하여 세워진 이단들은 거의 다 분리주의자들이다. 한국에는 유난히도 많은 분리주의자들이 교회라는 간판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다. 더구나 분리주의자들은 기성 교단과 교회를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우월의식을 내세우면서, 외형상 매우 건실하게 보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벗어난 이단들과 분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충만함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을 본받으려 한다. 모든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삶을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한쪽 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단이요, 불건전한 사이비 분파주의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외시키지 않았으면, 교회가 어떤 사람들을 거부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계층이나 소유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인다. 이단과  거짓 복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기준을 정해 놓으셨다. 사람들이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세워질 수 없다.

 

 

4. 보편성에 대한 도전들

 

교회의 보편성은 선물이자 동시에 의무이다. 우리가 보편성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항상 새로운 도전들과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여야 한다.

 

첫째, 에큐메니즘 운동이 보편성을 지켜줄 것이라는 허상을 걷어야 한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들이 제기되면서 가장 많이 논쟁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교회일치와 연합운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상에 건전한 교회들이나 불건전한 교회들이나 서로 일치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매우 힘들고 여럽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 에큐메니즘 운동이 일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피해를 목격하고서 반성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다른 나라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서로 자주 모이고 연락할 수 없었으나,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보자는 일치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로서 보편성과 정치적인 교단과 교파의 일치운동은 서로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수평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 운동은 수직적인 보편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에큐메니즘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미혹이다. 서로 타협하고, 서로 협상을 거듭하면서 조각난 교회들을 한 테두리에 묶으려 하는 것은 일종의 업적과 성취를 향한 영웅적인 과시욕에서 나온 것이다. 사업 목표처럼 교회의 보편성을 가장 우선해야할 최선의 가치라고 주장하면서, 그 열매로서 교회일치 운동의 열매를 맺으려 할 것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의 운동을 펼쳐야 할때이다. 즉, 모든 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열심히 연합하고 하나되려는 노력을 하면서, 최종의 목표가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치도, 평화도 도모할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보편성의 원리 안에 이미 담겨있는 것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편견과 차별을 삼가야 한다.

 

 참된 교회는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나 편견을 없애야 한다. 편파적인 안목은 사람의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보편성의 원리를 붙잡는 교회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는 단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참된 교회는 원리와 본질 면에서 두 개, 세 개, 여러 개로 나뉘어질 수 없다. 교단과 교파로 분열되어 있더라도 본질상 하나일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다 전체 교회에 연계되어서 하나의 참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은 공동체이다. 한국에서 인종적인 차별이나 성별이나 예배 참가자들에게 전혀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현대 한국 교회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에서 22절에서 교회가 하지 말아야할 일들, 차별에 관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부자들과 고위층들은 건물의 중앙에서 비싼 고급음식을 즐기고, 노예들과 하층 서민들은 밀려나서 문 밖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먹어야 하는 현저한 차별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계급이 엄격하게 존재하던 시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서는 문화가 다른 계층적인 분리가 일상적인 풍경처럼 벌여졌다. 먹는 것부터 서로 달랐지만, 그마저도 차별이랄 것도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사도는 단호했다.  전세계 어디를 가든지 부자 동네가 따로 있다. 겉으로는 안보이지만, 그 속이 다르다. 소비문화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유명한 회사 제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곳이 따로 있다. 부유층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색다른 곳에서 차별화를 즐기고 살아간다.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시대이므로, 자유함을 약용해서 각자 자기만 배불리 먹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만 좋은 곳에서 남달리 즐기는 생활을 하는 것도 은밀하게 차별주의를 향유하는 행동일 것이다.

 

셋째, 분리주의와 분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교회가 특수한 계층에만 귀속된다면, 보편성의 원리를 상실하고 만다. 지금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각종 이단들과 불건전한 사교집단들은 보편성을 던져버리고, 자신들만의 분파주의에 사로잡혀있는 분리주의자들이다. 유대인들의 분리주의와 우월주의는 종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 기독교 이단들과 불건전한 사이비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던지고 자신들의 가르침에만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고 있다. 건전한 형제교회들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자신들의 우월의식을 자랑하는 교리를 내세우면 틀림없이 분리주의자들이다.  교회가 전통과 신앙유산을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어떠한 특정한 사건에 근거해서 교파와 교단을 만드는 것도 보편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의 사상에 동조하거나 동참하면 서로 동지로 여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과 가르침 뿐이요, 나머지는 다 헛된 속임수일 뿐이다 (골 2:8).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분파주의자들이다.

 

넷째, 교회 본질을 벗어난 성장주의와 혼합주의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보편성이 없다고 한다면, 어느 교회라 하더라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교회의 보편성과 신앙의 동질성을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미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도 바울이 직면했던 문제점들이었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무작정 다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신앙을 검토하고, 복음에 입각해서 건전한 검증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보편성을 잃어버리면서까지 문화적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은 성장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교회 성장학이 가져다 준 치명적인 피해 중에 하나가 혼합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