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이란?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2014-11-16 20:36:42
예정론1: 그 얘기를 꼭 해야돼?
이제부터 예정론 시리즈를시작하려 한다.그렇다.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다.이것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꺼내기에는 그리 큰 인기가 없는 주제이다. 사실,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기 딱 알맞은 주제 아닌가? 5세기, 어거스틴은 자신의 편지에 “예정론은 설교의 유용성을 방해한다”는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누가 그런 방해꾼을 원하는가? 16세기,존칼빈은 설교자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나 천지창조를 설교하는것 만큼으로예정을 설교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파하였다. 우리는예정론을 이야기하거나 설교해야 하는가? 그답은“그렇다!”이다.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없다면 성경도 존재할 수 없다. 아브람은 갈데아우르에서 선택을 받았다(창12). 이스라엘은 지상만국 중에서 선택을 받았다(신4:37;7:6-8;시105:6).포로기 후 새로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선택을 받았다 (사 41:8-9; 42:1; 43:1-7; 44:1-2; 45:4). 예수님은예정을가르치셨다 (마 11:25-27; 13:11-16;막4:11-12;요6:37,66;10:26-30;14:1;17:6,9,벧전2:5-10).성경적 교리인 예정론을 우리는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618년부터1619년사이,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럽의 신학자,목회자,장로등이 모여 알미니우스 논쟁을 다루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논쟁에 답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계획하심으로 신구약 시대의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들은 이 신적 선택에관한 르침을 선포했고, 성경에 이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특별한 의도에 따라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도 이 가르침을 분별력을 갖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확고히 설파해야하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필요하게 탐구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영광과 생명력 넘치는 당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함이다.”(도르트신조1.14항) 이 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정을 말하고 설교해야 하는지,그 방법론을 위한 기본적 원리들을 살펴보려 한다.
1,분별력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로마서 9장은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서 구분되어 크리스천 회중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믿는유대인들은 약속의 자녀들인 반면 믿지않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일 뿐이다(롬9:3;6-8). 바울은 이같은 개념을 또 다르게 묘사하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바다에 모래 같을지라도 소수의 남은 자 무리들이 있다는이야기를 한다(롬9:27).이것은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때,어떤 대상들이 이를 듣는지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강퍅하여 예정론을 비웃는 사람들인가? 아니면그 진리를 참되게 궁구하는 이들 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믿는 자들의 회중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믿음이 강해져 그와 같은 교리의 깊이와 규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또 다른 이들은 믿음이 약해져 의심과 걱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차이점들을 지닌 성인들에게 말하는가? 아니면 청중들속에 어린아이들도 섞여있는가? 그런 회중들에게 말할 때,그 속에는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참된 신자들도 있고,마치 위선자들 마냥 믿는 척만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명심하라.
2.경외감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9:20-21에서 경외감을 갖고 예정론을이야기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권이 없느냐” 이것은 바울이 9장에서 논하는 내용의 절정 부분이다. 그는 옛 언약 백성들,자신의 동료 유대인이 보이는 불신앙을 말하면서 논의를 펼쳐간다(vv.1-5). 바울이 언급한 첫 번째 반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졌는지의 여부였다(v.6). 바울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신 이래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 과 진실로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들” (v.6), 그저 아브라함의 외적인 육신의 자녀인 자들과 아브라함의 약속의 참 자녀들(vv.7-8)사이의 차별점을 이야기 한다. 그는 역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문제로되돌아가 말한다. “그가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v.11).그 다음 반론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 하나님 의행위가 불공평하다 것이다.그 반론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v.14)라고 답한다.
그는 어떤 사색적인 것이 아닌 성경의 인용을 통해 답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말로 결론을 짓는다(v.18).하지만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v.19).이 같은 반론이 들리지 않는가? 예정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는 교리이다. 이같은 반론에 바울은 어떤 철학적 답변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이다. 이것이 바울의 답변이다(vv.20-21).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신비에 쌓인 주제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했듯이,우리는 이 교리를 경외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로마서9-11을 바울이 어떤 식으로 마감하는지 주목해 보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함과 같으니라”(롬11:33).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논할 때 “항상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 모두를 억제해야 하며,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하는 지점에서 말할 때, 우리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놀라움으로 끝을 맺게될 것이다” 라고말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하나님은 실패하셨다.”,“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다루신다.”로마서9장에서 바울은 예정은 인간의 지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런 반론들을 저지한다고 강조한다.“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v.20).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토기장이에게 그 권이 없느냐?”(v.21).그 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다.“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v.21)을 만들 수 있으므로,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영화로우시다. 결국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 영화로워지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하고자 하사 멸하기로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vv.22-23).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 드리기 위한 행위인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3-4).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그것은 하나님 의은혜를 풍성하게 드러내기위함인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엡1:6).사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차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서1:12과 14절을 통해 두 번이나 더 반복하여 이 송영을 노래한다.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그것이 로마서 11장36절로 ‘번역’될 수있는 것인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아멘”(롬11:36).
4.우리의 안위를 위해....
마지막으로, 예정을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로마서 9장에서 우리와 세계를 위한 어떤 안위를 찾을 수 있는가?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구속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세계로 되돌아가 논의를 진행해 간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복음을 바로 우리 앞에,개인의 역사에 정치시킨다. “이 그릇은 우리니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24)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나 불공평하신 분으로 비난하지 말라.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시는 하나님이라 참소하지 말라. 그 분을 믿으라.하지만,여전히 반론하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예정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을입은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정에대한 이야기는 복음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분의 영광을위해 예정하셔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때 “나의(하나님의)백성”이 아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내 백성”,“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신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롬9:25-26).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로마서의 순서를 따르라. 먼저그리스도와 복음에대해 고민하라.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 서가르치는 바대로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한 다음 죄와 싸우라. 8장까지 등장하는 십자가와고 고난 아래서 그대는 9장,10장,11장을 통해미리 아심을 배우게 되고, 그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안위가 되는지 알게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정론을말해야 한다. 예정에 대하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위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예정론2: 그 얘긴 언제 해야 하는거지?
크리스천들은 예정을 말하고 설교해야 하지만,“ 자, 여러분 이제 예정론을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를 매우 어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예정론은 불신자,혹은 신자들에게 마저도 공격적인 느낌을 받게한다. 나는 그런 어색함을 갖는 사람이 없기바란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에게는 예정론이라는 진리에대해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사랑 안에서그 진리를 말할 때 더 성숙한 지혜로움을 가져야 한다(엡4:15).예정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몇가지 전제를 알고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이 교리를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림을 그리려면 캔버스가 있어야 한다.예정론은 그림 물감이다.그 그림 물감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색 칠 할 캔버스로 시작하는 것이다.
1.자신이 죄인임을 알자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한 뒤에 예정론을 이야기하라. 야곱 알미니우스의가 르침에 대한 응대를 위해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도르트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회의에서 선조들은 1조1항에서 이렇게 말한다.“모든 인간은 아담안에서 죄를 지어 그 저주 아래에 놓였으며,영원히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멸망받게하시고 죄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을 공의롭지 못하다 할 수 없다.”(도르트신조1.1)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죄를 지었다 뜻이다.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v.12).13-14절에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범한 이후로 모세의 지 도아래있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법을 범하기 전에도 모 든사람들은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담 때문이다. 아담, 죄, 죽음이라는 전개 과정에 주목하라.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았다. 우리가 이해할 것은 아담의 행위가 아담 이후의 모든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아담은 믿음의 선조들이 말했던“공인(publicperson)”이요, 만인의 대표자였다. 대통령이 우리의 대표자이므로 중요한 인물이듯이, 아담은 오래 전 에덴 동산에서 우리를 대표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인 이다 그러므로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그 한사람의 죄로 인해“사망”이 세상에 들어와“모든 사람에게 미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 죄를 짓기도 전에 사망이 이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는가? 마지막 부분이 핵심이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언제 범죄하였는가? 바로 아담이 범죄했던 그 순간이다. 한사람의 죄 안에 모든 이들의 죄가 포함되었다. 따라서,우리는“허물과 죄로죽은 상태”(엡2:1)로 태어난 것이며, “죄악 중에 출생하고 모친이 죄중에 잉태한”(시51:5)존재들이다. 아담의죄와 그 죄에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창세기2:15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 로마서5:15-19은 다시 한번 연속적으로 아담과 예수님 사이의 크나 큰 차이점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죽음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죄,저주,죽음.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이 세가지 어휘를 점진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태초에 “한사람” 아담이 있었는데,그의 행위는 세가지 용어로 묘사된다. 즉,그는 “범죄하였고(sinned)”, “불법을 행했으며(trespassed)”, “불순종하였다(disobedient)”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을선언하셨다. 그리고 이 심판으로 인간은 “정죄”되어 영적이고,영원한 육체적 “죽음”을 맞았다.
2.하나님의 공평하신 정죄를 알자
이것은 사람들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한다. 그렇지 않은가?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까닭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그리스도와 함께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천국에 갈수 있는 동등 한기회가 있다.”이렇게도 질문한다.“성실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다문화적이고 다원적인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현대적 반론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 이것은 오래된 반론으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죄성에서 나오는 반론인 것이다.오히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증언한다. 성경은 우리 죄로 인해“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함”(롬3:19)이라고 말씀한다.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23)고 말씀한다.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 (롬6:23)이라고도 선언한다. 그러므로,하나님이 인간들을 멸망받게 하시고 죄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을 공의롭지 못하다 할 수 없다.하나님의 공평하신 정죄를 알 고나서 예정을 말하라. 하나님은 오직 정의만을 행하시 는최고 재판관이시다.
3.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난 후에 예정을 말하라. 앞서서 도르트신조 1.1항을 언급했는데,이제 예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1.2항을 살펴보자. “그러나 ,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도요한은 자신의서신을 읽는 이들에게“사랑하는자들아,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4:7)고 교훈했다.그리고 다시 말하기를“사랑하는 자들아,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v.11)라고 하였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원인이다. 그는“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v.7)이므로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께 난 자로 당신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사랑을 주신다(v.7).그러면서 요한은 그 궁극적인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v.8).
4.하나님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
예정을 말하기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요한은“하나님의사랑”(v.9)을이야기한다. 하나님에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것이다.신학자들의 표현대로, 이 사랑은 하나님 안에 내적이고(ad intra), 자연스러우며(amor naturalis), 필연적으로(amornecessitas)존재하였다가 이후에 하나님께로 자발적으로(amorvoluntaries)나타났으며 그 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외적으로(adextra)드러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났음을 안다.그러나,그 속에 담긴 뜻을 되새겨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체험하기 이전에 어떠한 사랑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일서4:9-10에서 하나님과 그 독생자에 대해 읽으면서 그 본질을 잠깐 엿볼 수 있다.하나님이신 그 분은 성부,성자,성령으로 영원하고도 자기충족적으로 존재하신다. 창조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삼위 사이의 관계 속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셨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 은그 시작점이 있고,친구를 향한사랑도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그러나,요한이 말하는 것은 시작점이나 출발점이 없는 항상 존재해온 사랑이다. 요한복음17장을 보라. 예수님은 22-23에서 교회의 연합을 위해 성부께 기도하면서,2 3절 말미에 그 목적이무엇인지 밝힌다.“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 이것은그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성부께서 그 분을 사랑하셨다는 뜻인가? 그 사랑은 예수님의 세례 중에 나타났다. “이는내사랑하는아들이라”(마3:17).
이 사랑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요한복음 17:24에서,예수님은 당 신백성들이“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기도하신다. 끝으로 요한복 음17:26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이 는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함이니이다”라고말씀하신다.이것은 삼위일체이신 당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고 자기충족적 사랑임을의미하는 것이다. 토마스 맨튼(ThomasManton)은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시거나 사랑하지 않으신 적은 없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를 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오랜 친구는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 분은 사랑 받을만한 때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기 전부터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분 이셨다. 맨튼이 한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완벽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뜻이다.그러므로,요한일서4장에 따르면이 사랑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전형적 모범인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성령의 교통 속에 서성자를 향한 성부의 친밀한 사랑이다 .영원한 성자는 성부의 총체적 사랑의 첫 대상이시다. 존오웬(JohnOwen)은성자는 “성부의 깊 은곳에 계시며, 그 사랑으로 영원히 결합된 상태로 계시다”고 말한다.
5.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예정을 말하기 전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성삼위 하나님 사이의 영원하 고내적이며 자기충 족적 사랑은 “세상에 자기 독생자”를 보내심으로“우리에게 나타난 바”되었다(요일4:9).“하나님의사랑이세상에 나타났다”는 말이무슨 뜻인가?“세상”을 뜻하는헬라어‘kosmos’는 요한의 글들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어휘는 피조세계를 의미한다 (요 1:3, 10; 17:5, 24;21:25).이것은 일반적으로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둘째,그 지위를 잃어버린 인간세계(요3:16,17,19;4:42;8:23;9:39;12:47;12:31;13:1;16:11;18:36;요일4:14)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세계를 이를 때 이 어휘를 사용한다(요1:10,29;4:42;6:33,51;12:19,46-47;14:17,19;16:20;17:21,요일2:2;3:1) 이 세상은 예수님(요7:7)과 제자들(요15:18-19;요일3:13,17)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하다. 죄로 인해 인간은 마땅히 정죄 받을만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해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신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에서 건지신당신의 특별한 백성을사 랑하신다.“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제임스패커(J.I.Packer)는이를 이렇게 설명한다.“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신다…그러나 전적으로 보면 일부만을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예정론의 측면에서 이 모든 서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그 것은 예정론을 말할 때, 먼저 성경적인 가르침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가르침이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그 분의 깊고도 높은 사랑 등을 이르는 것이다.그런 가르침 이후에야 예정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것이다.
예정론3: 왜? 누군 믿고 누군 믿지않는거지?
이 예정론 시리즈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일을행 하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확고한 기본적이고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진리들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진리들이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사랑이시라는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경적이요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는다.예정론을 오해하고 조롱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 교리를 온화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이번 글에서 나는 또 다른 기본적 진리들의 토대를 마련해 보려한다. 이 진리들은 예정과 관련하여 그 대상과 의미, 시기와 이유 등 실제적인 주제들로 인도해줄 것이다 .인간의 죄,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등을 알고 있는데도,왜 누군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누군가는 믿지 않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두개의 반응이 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18,36) 예수님께서 오천명(여자와 어 린아이들을 제외하고계수한 인원)을 먹이시고 난 후 무리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가룟 유다를 포함 한제자들만 남게 되었다. 예정의이유를 살펴 보면서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과 예정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이야기해 보자.
1.믿음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발견하게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 든신념,소망을 내려놓고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모든 것을,자기자 신이 아닌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을 말할 때 복음을 “받는다(receiving)”다고하거나, 좀더 인격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embracing)”고도 표현했다(도르트신조1.4항). 이것은 중요한 부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믿음을 어떤 정신훈련이나 하나님,혹은 예수라는 천상의 존재와 연결되는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받는다”,“영접한다”등의 말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는가? 믿음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 말은 인격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받되 그 분이 나의 모든 것 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허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다. 요한복음1:11-12에서 요한은 이렇게 진술한다.“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묘사가 자기 자신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해주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받고영접하고있는가?
2.왜 믿음이 필요한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요3:16),영생을 얻으며(v.16),구원얻을 수 있기(v.17)때문에 그믿음은 필수적이다. 바꿔 말하면,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정죄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니,사실상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우리 머리위에 임하였다(v.36). 믿음이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세상에 속한 우리가 죄악의 처지와 그가운데 행하는 일, 임박한 정죄 등을 위한 치료책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히11:6),그것은중요한것이다.
3.믿음의 복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저를”(v.16),“아들을”(v.36)믿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것은 믿음의 복들에 관한 것이다. 복(단수)은 예수님 당신이시고,복들(복수)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정죄와 진노에 대비하여 영생의 복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우리가 정죄와 진노,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다는 뜻이다.예수님을 받고 영접할 때 우리는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바울은 이렇게 말한다.“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9).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즉,영원한사망,혹은정죄)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다음 찬송가의 가사를 보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4.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이 하나님의 예정 사역과 연관되는지 설명해 보려한다. 다음의 의문을 설정하여 설명을 이어가 보자. 만약, 믿음이란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이라면 ,믿음이없이는 멸망할 수 밖에 없을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을 받는 것이라면,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초두에 그리스도를 받는 모든 자,곧 그를 믿는 모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고 설명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앞서 발생하는 일을 언급하며 심화된 내용을 설명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3). 여기서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요한복음3:6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난다는 것인데,즉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요 한복음1장과 3장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죄성안에 불신앙의 원인과 잘못이 포함되었음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리 없고,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야고보는 이렇게 진술한다.“사람이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니라”(약1:13).
불신앙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엡2:1-3). 우리의 본성은 훈련되지 않은 개와 같아서 사납고 통제불능이며 본능대로 행동한다.우리는 그렇게 본성과 실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훈련받지 않은 개는 따로 달리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다. 그 개는 그냥 달리고 싶을 뿐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우리를 예수 안에 믿음을 놓으려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반면,믿음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당신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살리신다 (엡2:4).에베소서2:8-9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함이니라”.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29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뿐아니라 그 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누가는 사도행전13:48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모 든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해 놓고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물을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받지못하는 이들도 있다.왜 그런가?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받는 선물같은 것도 아니요, 이 어른들이 저 어른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에받는 것도 아니다.
5.믿음의 영원한 근원
누구는 믿고 또 누구는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 님당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주시는 것을 인하여 찬송하는데(v.3), 여기서 그 모든 신령한 복은 예정의 복(vv.3-6),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복(vv.7-12),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인치시는 복(vv.13-14) 등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v.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v.4) 사랑 안에서 예정하시는 복(v.5)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v.5)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이라거나 혹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 은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의지에 따른선택인 것이다. 11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얻은 이들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소유와 그 유익을 우리가 물려 받는다는뜻이다. 우리 는어떻게 그 기업을 물려 받았는가? 11절은 계속해서,“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내가 진리와 믿음에 대해 씨름하고있을 때 말 그대로 외면하던 구절중 하나였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기로 예정하신 까닭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를 물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역사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의미하 는바가무엇인지 알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목적하신 바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퍅한 마음을 누끄러뜨리시는 하나님
“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면, 아무 것도 할수 없는 사람에게 이를 고민할 필요성이 없는 것 아닌가?” 이 의문이 바로 일반적인 반론,혹은오해이다.그 답은 영원한 예정을 하시는 하나님은또한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분이시기도하다는 것이다.믿음이 어떠함에 상관 없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당신을 믿게 만드신다.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 잠시의 믿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행전13:48을 기억해 보라. 바울은“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말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지만,어떻게 이방인들은 때맞춰영원한 작정으로 믿음을 얻게 되었는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16장에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16:14).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기로 루디아를 예정하셨고,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도르트신조가 놀라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 까닭이다.“그 결정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퍅한 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누그려뜨리시는 은혜를 베푸사 믿음을 얻게하신다.”(1.6항)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영접하는 필수적인 방법인 믿음을 요구하시는데,또한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은혜를주시어 돌같이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 아들을 믿게하시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그리고 이것은 그런 역사를 하실 수 있고 기꺼이 행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놀라운 격려가아닌가?
예정론4: 예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낸다는거지?
그리스도인은 예정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예정을 말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규칙을 제공해준다. 또한,왜 누구는 예수를 믿는데,또 다른 누구는 예수를 믿지 않는지에 대해 예정론과 연관성을 살펴보았다.하지만, 경건하고 호의적인 형제나 자매들이 예정론은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교리 같다고하는 말을 종종 듣지않는가? 혹은 그 교리는 모든 영적 열심을 흡수해 버리는 메마른 스펀지같다는 말도 하지않는가?그런 사람들은 예정론이 너무 이지적이고, 너무 생기 없으며,너무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예정론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준 진리이다. 그러므로,이 진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위로를 받아야 하며 구령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해 야한다. 하지만, 어 떤이유로 선택의 교리가 영화로운가? 예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의 말을 통해 그 이유 다섯 가지를 알아보자.
1.불변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불변성 때문이다. 에베소서,혹은 다른 어떤 성경에서도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셨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선택은“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도르트신조1.7항)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항상 확고 부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의 특징이 바로 불변성이다”(히6:17-18).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바꾸신다 주장했던 자들은누구인가? 17세기,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선택을 가르쳤다. 이들 추종자들이 도르트회의에서 어떻게 선택의 교리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다양한 종류가있 다.일반적이고 명확한 선택이 있는가 하면, 특별하고 불명확한 선택이 있다. 결국 후자의 경우 불완전하고 취소가능하며 비결정적이고 조건적이며 상대적인 선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이르는 선택이 있고,구원에 이르는 선택이 있다. 따라서 구원을 위한 결정적 선택이 없을지라도 의로워진 믿음을 얻게되는 선택도 있는 것이다.”(도르트신조1항오류의거부2절)
우리는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아버지는자녀에게 한 약속을 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므로 역시 변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고서 그들이 참된 구원을 받았으나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선택은 그 불변성 때문에 영화로운것이다.
2.영원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영원성때문이다. 예정은“창 조전에”(엡1:4)일어났다. 우리는 투표를 위해 투표소를 찾거나 부재자 투표를 하곤한다. 어떤 일에 참견할 권리도 가질 수 있다.그러나, 성경은 만물이 있기 전에 오직 하나님만 계셨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창조전에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으셨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므로 그 분의 계 획역시 영원했다.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계획은 은혜로운 계획이었고,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딤후1:9)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영화로울 뿐만 아니라 영감어린 가르침이다.영원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특별히 당신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사실을 깨달았는가?
3.은혜로움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은혜로움 때문이다. 바울은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심에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엡 1:4) 영원한 사랑이다. 우리를 예정하신 원인은 그분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엡1:5).때를 맞춰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사랑을 알았고,그 분의 예정하신 사랑으로“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엡1:5)이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 앞서서 “그 사랑하시는 자”(엡1:6) 성자를 향한 사랑에 기인하는것 이었다. 도르트 신조는 이런 이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당신의 의지는 주권적이고 선하며 기뻐함으로 가득한데,이에 따라 순전한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다.”(도르트신조1.7항) 하나님께서 친히 이 영원한 은혜를 시작하시고 수행하시며 목적한 바대로 이루시는 것이지,우 리는 그 주체자가 아니다.“하나님께서 선택”(엡1:5)하셨고,“예정”(엡1:5)하셨으며,“그 뜻의 목적대로”(엡1:5)이루신 사건이다.‘목적’(eudokian)이라는 단어는‘선하신 기쁨’(NIV;NKJV),혹은‘온유한 의도’(NASB)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임의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아니라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에 그뿌리를 두고있다. 모세가 신명기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히고 있듯이,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월등히 많아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면,왜 하나님은어떤 이는 선택하시고 다른 이들은 선택하시지 않았는가?
좀 더 개인적으로 말해보자면,하나님은 당신은 선택하시고 당신 외의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당 신안에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거룩함 또는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도르트신조1.9항) 등의 전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에베소서1:4이말하고 있듯이,하나님께서는“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그리고 그이유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해,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것이다. 에베소서1:5-6을 다시 읽어보자.“우리를 예정하사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우리를 예정하심은 당신의 아들들로 삼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에 예정하신 것이 아니란 뜻이다. 한 설교가가 하나님께서 퍼레이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방송중계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있다.그 위치에서 하나님은 믿는 자든 믿지않는 자든 당신 앞을 지나는 모든 인간들을 보실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 선택을행하신다. 에베소서1장은 이것 을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시간이 시작되기전(beforetime)에 선택하신 것이며,시간이시작된 후(intime)에 그 믿음을 보시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를 선택해주신 것을 깨닫게될 때,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은 진정 영화로운 사역이 되는 것이다.모든 인간들 중에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가슴 깊숙한 곳에서 찬양이 솟아나오는 것이다.“빚에 억눌린 자에게 이 얼마나 크나 큰 은혜인지, 날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도다!”
5.명확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의 송영은 ‘우리’에게 복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엡1:4).불특정한 무리를 언급하지 않고 나와 당신같은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복주셨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특정한 어떤사람들,곧“믿음과 믿음의 순종으로 믿고 보존되 는 사람들’(도르트신조1항오류의거부1)이 예정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예정의 명확성이란 개인적이라는 뜻이다. 만약 예정이 불명확하고 집단적이라면, 우리 자신들이 예정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그러나,특정한사람들을 명확하게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칼빈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을 저술한 목적을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열정을 북돋으며, 그 감사와 열정을 우리 안에 가득히 채우는 것”에있다고 말했다.
6.그리스도 중심성
끝으로,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것은 그리스도중심적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중심성은 우리 개혁파 신자들이 그 지식에 충분히 자라나야할 영역중 하나이다. 선택의 교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잊은 채로,우리는‘예정’을 너무나 자주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에베소서 1장의 예정,1-3장의선택교리,4-6의 우리의 삶의 방식 등을 말하기 전에 바울은 그 모든 것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삼았다.그 결과는 어떠한 가? 우리는“그리스도 안에서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v.3)를 찬양하게 되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v.4)“그 사랑하는 자안에 서 우리를 복주셨다”(v.6)고 말한다. 도르트신조는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과 교제하기로 결정하셨다. 즉, 선택하신 자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 칭하시며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는데,그뿐 아니라 성자의 교제안에서 그들을 강력히 보존해주신다.”(도르트신조1.7항)
이것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선택의 거울과도 같다는 의미이다.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강력한 사랑에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의심에 쌓여있다면, 유일한 치료책은 마치 거울을 응시하듯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그 러면그 분의형상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선택받은 자신을 보게될 것이다.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택의 교리는 얼마나 영화로운가? 하나님의영광을 드러낼 때,우리는 찬양과 거룩함으로 이 교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묵상할 때,우리는 이렇게 찬양할 수밖에 없다.“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엡1:3),“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v.6).그리 그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게 된다. 심판 받을수 밖에 없는 죄인의 무리로 부터 우리는“그 앞에서거룩하고흠”(v.4)이없어야한다.하나님께서 우리를생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예정론5: 내가 선택받은 자 맞을까?
예정론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나는 택자인가?” 이 질문은 확신에 대한 문제를 보여준다. 16세기 로마가톨릭의 트렌트 공의회는 자신이 택자란 사실을안다고 말하는 자는 성급한 가정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선언했다.“이생에서는 영광에 이르는 불변적 선택이 맺는 열매나 의식,혹은 어 떤확실성 따위를 가질 수 없다.어느 때나변할 수있고 불확실한 조건만이 존재한다.”(도르트신조1항오류의거부7) 그들은 우리 신자들 이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 불확실성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당신은 자신이 택자임을 확신하는가? 이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것은 믿음과 구원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아두자. 즉,어떤 절망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려는 의도에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우리 모두가 던지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다.
1.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인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있다. 이것이 선택의 확실성에 관한 첫번째 답변이다.예를 들어,베드로후서2장을 주의깊게 살펴보라. 베드로는 자신을“종”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예수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지칭한다(v.1).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편지를 받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규정한다.“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v.1) .이것은 놀라운 말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한 때유대계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망을 잃을까 두려워 이방인크리스천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기를 거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실에 대하여 바울은갈라디아서2장에서 자신이베드로를 면전에 두고 책망한 이야기를들려주기도 한다. 베드로는자신의 행동으로 말보다 큰소리로 복음을 부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그는 이방인 크리스천들보다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더 높은 계층의크리스천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사도들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말이다.또한,“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v.3)이신 하나님에 근거하여 우리는 “정욕을 인하여세 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게된 것”(v.4)이다. 9절에서 베드로는 교훈과 경고를 하면서도,“옛 죄를 깨끗케하심”을입 었다고 말한다.이런 모든 이유로 인해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v.10).무슨 말인지알겠는가?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고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그것을 ‘굳게하는 것’이다.
2.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우리가 서 있는 단계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기본적으로 안전한 곳에 서 있지만,신자로서 우리 각자는 그 관계성에 있어 실제 어떤 단계에 있는지 인식해야 한다.우리는 저마다 다른 단계에서 전능하신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경험을한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객관적 현실과 이에대한 주관적 체험은 다르다. 우리의 믿음의 객관성은확실한 반면 매순간 그 객관성에 대한 체감은 할 수도있고,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를 도르트신조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양한 정도와 여러가지 방식으로 때에 맞춰 당신 백성들을 선택하시지만, 그 선택하심이 영원 불변하다는 점만은 확실하다”(도르트신조1.12항).우리 는성장해야 한다. 베드로후서1:5-7은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 성숙의 정도는 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조부모 수준일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부모 수준일 수도있다. 혹은10대 수준일 수도, 심지어 젖먹이 수준일 수도 있다. 베드로 가5-7에서 말하고 있는 수준들이 우리 안에서 높아져야 하고, 만약 그러할 때,“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 가되지 않게”(v.8)되는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성장함에 있어 우리는 침체될 수도 있고, 역동적이 될 수도 있다 .베드로가1:9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다시 보라. 베드로는 참 신자 조차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하심을 잊을”수 있다 고말한다. 베드로의 말 속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개개인마다 다르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나의 성장이 다른 사람의 성장과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왜 그런가? 도르트 신조의 말을 들어보자.“참신자들은 자신들의믿음의 분량에 따라 확신할 수 있고,또 확신한다”(도르트 신조5.9항;롬12:3).우리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있고,우리는 서로 다른 정도로 서로 다른 인생의 때에 그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3.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표지
그렇다면, 나 자신이 점점 더 성숙해지고 확신이 자라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표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우리는 선택의 확신을“하나님의 비밀하고 깊은 것을 호기심으로 탐구하여”(도르트신조1.12항)찾을 수 없다. 확신은 추측이 아닌 계시의 문제이다. 선택의 표지를 하나님에게서 찾지말고 그분의 말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의 표지를 뭐라 말하는가? 다시 한번 도르트 신조를 보면 아주 유용한 답을 발견하게 된다.신자들은“영적 기쁨과거룩한 즐거움을 가지고 하나 님말씀에 나타난 썩지 않는 선택의 열매, 곧 참 믿음,충성스러운 경외심,죄에대한 경건한 애통,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등을 스스로 보게되는 것”(도르트신조1.12항)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을 천국으로 끌어 올리거나 우리안에 있는 그 무엇을 찾게하지 않고 성경 앞으로 인도해 주었다. 베드로가예수 그리스도께서 “신기한 력”으로“그 보배롭 고지극히 큰 약속 우리에게 주셨다”(벧후1:4)고 말하는 이유가여기에 있는 것이다.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은베드로전서1:1에서 언급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인 것이다.도르트신조1.12항에서 맨처음 “그리스도 안에서 참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 다음 표지는 “충성스러운 경외심”이다. 이것 은마치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이 보여주는 존경심과 같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당신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존경심으로 듣고 또한 그 인도해주심대로 따른다. 세번 째표지는“죄에대한 경건한 애통”이다.우리는 당신의 율법에 대항하고 불순종하여 하늘아버지를 슬프게했다는 것을 애통해한다. 도르트신조에서 언급하고있 는마지막 표지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이다.이 표현은 마태복음5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나타나고, 또한 베드로후서에도 등장한다.“이러므로 너희가 힘써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지식에 절제를,절제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경건에 형제우애를,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선택의 교리를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믿음과 회개,거룩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을거라고 약간 조롱섞인 비난을 한다.그런데,베드로의 말은 이 조롱섞인 주장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같은 비난은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또는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하지 않겠느냐”(롬1:8).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6:1).하나님 자녀에게 선택교리는 육신적 확신을 의미하지 않는다.삶 속에서 이 육신적 확신의 유혹을 경계하라. 육신적 확신은 신중함보단 경망스러움을 낳고,열심보단 굴종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참되고 영적인(즉,성령이만드시는)확신은 경건을 위한 더 큰 동기를 부여한다.확신은 겸손을 결과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찬송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생각과 언행에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발현시키고 ,구세주와 그 백성들,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으로 인도한다.
4.결론
자신이 택자임을 확신하는가? 위대한 영국 찬송작곡가 존뉴튼은 이 확신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노래로 답하였다.
진정알고자했던것
자주일어나는사나운생각
나는주님을사랑하는가?혹아닌가?
나는주의것인가?혹아닌가?
만약주님을사랑한다면왜나는이러한가?
왜내겉모습은어둡고생기가없는가?
주의이름을단한번도들어보지못한이여
단언컨대이보다더나빠질수있으랴!
그리스도의사랑을깨달았다했는데
내마음은굳어있고
기도는일이요짐이되어버렸으며
소소한일상들이고통을주네
눈을돌려내안을살피니
모두어둠,공허,황량함뿐
불신앙과죄로만가득
내가주의자녀가맞는것인가?
기도하고듣고읽을진대
죄가나의행위와섞여있네
참으로주님을사랑하는그대여
내게말해보라
주님사랑이그대와함께하는가?
뉴튼의 노래가 자신의 것처럼 들리는가? 하나님과 함께 서있는 것은 마치 망망대해에 높이 솟아있는 바위 위에 서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 당신의 디딘 발이안전함은 그 바위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망망대해 위에 솟아있는 바위에 서있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을 다시 말한다.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당신을 놀라게 할 수도있다. 불안감을 느낄 수있다. 그러나,바위에서 서있을 동안 당신은 바위가 미동도 하지 않고, 파도에 휩쓸리는등의 위협 따위는 없을 것이란 것을 알게될 것이다.믿음을굳게하라.
예정론6: 선택과 유기를 통해 뭘 배울 수있는 거지?
Decretum horribile.이 말은 존 칼빈이 유기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한말로 그뜻은 ‘무서운 결정’이다(기독교강요3.23.7). 우리는 지금까지 놀라운 은혜로 삼위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 중에 일부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질문,즉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인류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개혁파 신학은 일반적으 로‘이중 예정’으로 알려진 교리를 고백한다. 도르트신조는 이교리를 정의하면서,“ 성경은 모든인류중 일부만을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그 선택에서 제외하신다는 점을명백히 밝히고있 다”(1.15항)고 하였다. 이 가르침이야말로 매우 엄중한 고백이다.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일으키는두 가지 실제적 다툼을 언급하기 앞서 성경적 가르침에 우리 마음을 집중해보자.
1.과연 성경적 교리인가?
성경은 우리 믿음의 기초이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교리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여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성경적인 것인지 살펴보는 이유는 이 교리를 부인하는사람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말씀들을 확인해 보려한다. 첫째,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교훈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 는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3:35). 그러나,무리를 향해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요3:36).그들은 왜 주님을 믿지 않았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3:37)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마음이 굳어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은천부께서 당신에게 구원할 자 얼마를 주시고 다른 이들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즉,어떤 이들은 선택을 받은 반면,나머지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아마도 로마서9장이 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대한 가장 유명한 성경 말씀일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장에서 야곱과 에서라는 역사적 인물들을 대조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곧야곱은선택하시고 에서는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신학적 확증을 선언한다. 이 쌍둥이 형제는 모든 인류에게 참된 예로작용한다.
셋째, 데살로니가전서 5:9에서 바울은 어둔 시대를 살고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하신 것이라 ”.자신들이“평안하고 안전하다”(살전5:3)고 스스로 위로하는 자들을 성경은 밤과 어둠의 자식으로 묘사하거나(살전5:5),우리가 사는 시대에 잠든 자들이라고 말한다(살전5:6-7). 그들 은노하심에 이르게된 자들이지만, 우리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 넷째, 베드로는 베드로전서2:4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하는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7절에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지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이 시편118편의 말씀 곧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예수님을 거부하였다고 언급한다. 8절에서는 이사야8장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선언하며,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그로인해 넘어지는이유는 그렇게 하기로 이미 정해져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베드로전서1:23-25에서 말씀하는 복음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유다서4절은 거짓교사들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서 교회에 사용되었다고 증거한다. “이는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이니”.그렇다면, 이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성경적인 것인가? 답은 그렇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을때 우리는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구원받기로 선택되었으며, 그와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시키기 위해 선택한 특정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구절들은 또한 선택하지 않으신 사람들도 있음을 말하고있다. 바로 여기에 이 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특징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간과하심(Preterition)이란 당신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실 때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에서 제외된다는 개념이다. 정죄는 하나님께서제외된 들을 영벌하시는 실제적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간과하심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해서, 선택과 유기는 병렬적인 관계가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적극적으로 선택하시는 반면 당신의 그 은혜를 거두셔서 죄인들을 그 죄 가운데 남겨두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게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에 대해 비방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이 크리스천의 삶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종종 발생하는 두가지 공통의 목회적 문제제기를 말해 보려한다.
2.선택과 유기는 무서운 교리?
삶이 반은 비어있는 유리잔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기의 교리를 듣고는 쉽게 의심에 빠져 살아가기도한다. 그러나, 이 교리를 듣고서 힘겨워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첫째,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 영혼의 확신, 양심의 평화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종을 열망한다. 그러나,그런 이들 조 차항상 완벽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기는 그들의 마음과 정신의 확신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안에 은혜가 일하도록 주신 수단을 영구히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구한 수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성례,기도이다. 둘째, 어떤 지속적인 죄와 싸우는 신자들이 있다. 하나님과 더 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죄로 인해 고통중에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유기에 대해 듣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시거나 상한갈대(즉,고통중에 있는 신자)를 꺽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마지막 셋째, 유기의 교리를 듣고서 두려워 떨어야할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그런 부류는 신자들이 아니라 육신의 쾌락과 세상에 대한 관심에 완전히 빠져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라면,두려워 떨어야 한다. 그러나, 그 교리를 들었을 때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가 생긴것이다.
3.우리 아이가 죽는다면?
두번째 실제적인 문제는 유기와 유아 사망의 관계이다. 도르트신조는 유기의 교리에 집착하는 자들을 다음과같이 풍자하고 있다. “신실한 자들의 자녀들이 무죄한 상태에서 그 어미품에서 빼앗겨 지옥에던져진다”(도르트신조 결론). 이런문제 제기는출산중 유아사망률이 25%나되고, 세미만의 사망률이25%나 되었던 17세기에 아주 커다란 논란거리였으며, 또한미국 산부인과대학(ACOG)에 따르면 오늘날 의료 과실로10-25%정도의 유아가 사망하는 입장에 처해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유기의 교리 는유아사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성경은 신자인 우리에게 우리 자녀들이 ‘언약’의 자녀들이라고 가르친다. 적어도 믿음의 부모밑 에 있는 아이들은 거룩하다 할 수있는데(고전7:14), 그것은 그 아이들이 무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리하여 부르신 백성들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셨다(창17:7). 다윗은 자기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눈물과 금식을 멈추었다.그 러면서 아들이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품게되 었다(삼하12:23).그 곳이 어디인가 묻는다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라 말할수 있다. 다윗은 언약의 한 일원으로 자신의 어미의 태속에 있을 때하나님께서자 신을 조성하시고 아셨다고 기도했다(시13:9).
신약으로 눈길을 돌려봐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자녀들에 관한 이 관점을 이어받아 이야기했으며, 결코 이를 폐기하거나 무효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 을금하지 말라. 천국이이런 자의 것이니라”라고 하셨다(마19:14). 오순절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믿는 자들과 그 자녀들에게 있다고 설교했다(행2:39). 바울은에베소서 6:1에서 자신의 편지를 읽고 있는 언약공동체안에자녀들도 포함된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일 때 죽은 사람 모두가 천국에 간다는 뜻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신자들의 자녀들에 대한 확신을 주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나머지사 람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있다. 스펄전이나 찰스핫지, 워필드같은 위대한 인물들은 모든 유아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개인적 믿음을 피력했다.그렇다면, 낙태로 죽은 생명들,과실 치사한 생명들, 혹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불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은혜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며, 당신께서 정당하게 행하신다고말해야 한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우리가 온전히 선하시고 완전한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우심뿐만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 자비로 인해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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