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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페더럴 비전에 대한 비판- 웨스 브레덴 호프

페더럴 비전에 대한 비판- 웨스 브레덴 호프

2014-11-01 18:27:26


 

  이 글은 캐나다 개혁교회의 관점에서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 : 이하 FV) 에 속한 자들이 말하는 바를 규명하고 그것이 고백적인 개혁주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FV가 스킬더나 홀베르다 등을 통하여 배운 바를 단지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것이다. 2007년에 FV와 관련된 11명의 사람들이 페더럴 비전 공동 고백문(A Joint Federal Vision Profession) 이라 불리우는 고백서 같은 것을 발표했다. FV를 책임있게 다루려면  이 성명서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지만 이 선언문뿐 아니라  스스로를 FV로 여기거나 명백히 FV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쓴 다른 자료들도 검토해야 한다.  FV 옹호자들은 겉으로는 세일치 신조에 충성을 주장하지만 그들의 말은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은 세일치 신조가 가르치는 바를 노골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교리를 혼동하거나 최소화시킨다. 우리가 복음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FV 운도은 정통신앙으로 부터 이탈이며 탈선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클라스 스킬더 및 그 동료들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FV 인물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지  스킬더와 기타 해방파 개혁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르쳤던 바를 반복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어떤 타당성이 있어 보일수 있다. 어쨋든 스킬더와 다른 해방파 인물들이 종종 행위언약과 간은 용어들의 타당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언약의 통일성을 강조했고 모든 삶에서의 언약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동일하게 사실이다. FV 인물인 스티브 윌킨스는 "언약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하거나 그에게 덧붙여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또 다른 은혜의 방편)이 아니며 오히려 언약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 자체이다. 따라서 언약안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복들을 가져다 준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 언약에 대한 이렇게 과도하게 객관적인 태도는 필연적으로 사람이 은혜언약안에 있는 방법에는 오직 하나의 방법,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만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FV주의자들은 모든 언약 회원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말한다. 제프리 마이어는 모든 언약의 자녀들이 "교회 안으로의 그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용서받았고 칭의를 얻었으며, 양자됨을 얻었다"고 말할 정도까지 멀리 나갔다.

 

  스킬더는 은혜 언약에 대하여 두가지 구별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언약의 생동적인(vital) 측면과 법적(legal)인 측면이다. 이 구별을 사용하여 넬슨 클루스터만은 "모든 세례 받은 아이들이 법적으로 은혜 언약안에 있고 그리하여 모든 자녀들이 진정으로 그 약속들과 요구들과 위협들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이 세례받은 아이들중 어떤 이들은 믿음에 이르고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 안에서 은혜언약이 약속한 복들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은 법적으로 또한 생동적으로 은혜언약과 관계하지만 반면에 어떤 이들은 오직 법적으로만 은혜언약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이런 법적, 생동적 구별이 은혜 언약에 있는 자녀들의 위치와 책임에 대한, 뿐만 아니라 세례에서 표해지고 인쳐진 약속들의 특성에 대한 몇몇 "해방파적" 논의의 배경을 이루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네델란드 해방파 개혁교회들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1960년대에 있었다. 베버봐이크의 우스터호프 목사는 세례받은 모든 이들이 약속을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약속된 실체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그러면 세례받은 자녀가 불신앙으로 약속과 함께 그리스도의 다른 은택들을 잃어저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결국 1963-65 로테르담-델프샤븐 총회는 이것이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와 어긋난다고 판단하였고 1966년 아머스포트-웨스트 총회도 이 판결을 다시금 확증하였다.

 

  이 결론대로 신자의 모든 세례받은 자녀들이 은혜언약의 약속을 받는데 이것을 스킬더가 말한 은혜언약의 법적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녀들은 자라나서 믿음으로 약속을 받아들여야 하며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인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 등과 같은 것을 받는다. 오직 그러한 방법으로 은혜언약과 관계하는 사람들만이 참되게 그리고 구원얻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된다. 이것을 스킬더가 말한 은혜 언약의 생동적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킬더는 언약을 윌킨스나 다른 FV옹호자들이 하는 방법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기술한 적이 없다. 스킬더는 언약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데 " 언약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상호협약인데 그분에 의하여 세워지며 (그분의 은혜로운 사역의 덕으로) 두 당사자인 그분과 그분의 백성에 의하여 유지된다." 하지만 스킬더는 언약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언약신학에 있어서 FV주의자들과 스킬더가 어떤 유사점은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FV주의자들은 스킬더와 달리 고백적인 정통 개혁주으로 부터 벗어난 것이다. 

 

신율주의적 해석학

 

  신율주의(theonomy)는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 안에서 잠시 주목을 받았던 신학적 입장이다. 그 영향력과 인기는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신율주의는 기독교 재건주의(Christian Reconstructionism)의 한 요소이다. 기독교 재건주의의 목표는 성경적 기준에 따라서 사회르 개혁하자는 것이다. 신율주의는 모세의 시민법이 현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신율주의자들과 기독교 재건주의자들은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쓰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들은 율법은 지키는 것이 신자들의 개인적인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말했다. 비록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율법에 대한 무거운 강조는 때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교리에 있어서 칼빈주의이고 개혁주의라고 자부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통적 해방파 개혁주의 신학의 강조점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킬더, 홀베르다와 다른 해방파 신학자들이 구약시대의 모세 시만법을 신율주의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특히 해방파 전통은 스킬더에서 보듯이 기독교가 문화와 관계를 맺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문화의 변화(transformation)보다는 형성(formation)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강조점은 해방파가 신율주의적 기독교 재건주의자들과 다른 것이다.

 

  FV 운동의 핵심인물들이 과거에 신율주의나 기독교 재건주의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는 FV 옹호자들이 성경 해석의 이론과 방법(hermeneutics)이 신율주의자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많은 FV 옹호자들이 사용하는 성경해석학은 언약적 연속성에 대한 신율주의적 개념을 반향하고 있다. 개인적인 중생, 성경적 설교, 개인의 경건의 필요에 대한 그들의 옹호를 강조하려는 신율주의자들의 조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외형적, 표면적, 집단적인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가 바로 FV 지지자들이 대개 외형적이고 표면적이며 집단적인 선에서 성경적 종교를 재해석하는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워터스는 기독교 재건주의가 실패한 운동이며 그 옹호자들이 개신교 스콜라 신앙 고백주의에 굴복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FV 운동은 "문화변혁의 보다 큰 목표를 위하여 신율주의 프로젝트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부인하거나 평탄화함.

 

   율법과 복음의 명확한 구별은 항상 정통개혁주의의 특징이 되어왔다. 이 구별은 칭의 교리 안에서 작용한다. 성화 교리 안에서는 서술형(indicative,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명령형(imperative,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사이에 겹침과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이 늘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칭의 교리에서 율법과 복음을 함께 묶은 적이 없다. 칭의교리에서 율법과 복음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FV 옹호자들은 종종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거부하였다. 예를 들면 스티브 슬리셀은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은 틀린 것이다.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라고 말했고 릭 러스크는 " 루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요구는 율법의 범주에 들어가며 오직 우리를 정죄할 뿐이며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두 복음이며 어떤 조건이나 제약도 붙어있지 않고 우리에게 왔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이 율법 복음의 대립이 성경에 대한 자신의 언약적 접근과 근본적인 긴장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이 대립에 찬동하였다. 불행하게도 칼빈의 실수는 거대한 비극으로 자라났다." 고 말했다.

 

  이것을 평가하기 위하여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서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아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율법으로 부터 우리의 죄와 비참은 안다고 고백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안에서 구원에 있어서 율법 복음의 구별은 명백히 명시적으로 작용한다. 우르시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의 교리는 율법과 복음 두가지로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거룩한 성경의 요약과 핵심을 파악한다. 율법은 십계명이라고 불리우며 복음은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이며 믿음을 통한 값없는 죄사함의 교리이다." 해방파 주석가인 반 브럭헌은 율법과 복음이 구별을 다음과 같이 인식한다. "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그분의 요구를 우리에게 전하시며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신 일, 행하시는 일, 그리고 행하실 일들을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도르트 신조에도 작요하며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포착된다. 이렇게 세 일치 신조와 그 저자들은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이 구별을 단지 구속사적 기간들이나 혹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구별이 아니라 구원의 경륜에서 구별로 유지하였다. 이것을 거부하는 FV 옹호자들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스스로 위선을 드러냈다. 칭의와 구원의 기초에 있어서 율법 복음의 구별을 거부하는 것은 캐나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칭의교리를 재구성함

 

  칭의에 대한 개혁주의의 교리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근거하여,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FV 옹호자들은 이 공식화에 만족하지 않거나 그 용어들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오던 것과 다른 의미로 개정한다. 그들은 믿음이 칭의에 있어 결코 혼자이지 않으며 그것은 살아있고 역사하며 개인적으로 충성된 믿음이라고 덧붙인다.  FV 진영에서 영향력있는 인물인 노만 쉐퍼드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확언하면서도 선행 역시 칭의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 순종하는 믿음이 아닌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그리고 회개가 칭의에 포함된 죄사함에 필요하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계속하여 칭의의 상태안에 있는데 필요하므로 선행(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진 행위들)과 순종(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의 삶에서 성령에서 주시는)은 비록 칭의의 근거는 아니더라도 영원한 정죄로부터 구원을 위해 따라서 칭의를 위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의지하고(resting), 신뢰하고(trusting), 받아들이는(receiving) 것으로 이해되어 온 믿음(faith)이 쉐퍼드의 칭의 교리에서는 신실함(faithfulness)이 된다. 믿음에 대한 이런 재정의로 인하여 행위가 칭의의 도구의 일부분으로  뒷문을 통해 은밀히 들어온다.  비슷하게 릭 러스크도 바울과 야고보가 칭의에 대하여 동일한 것을 언급한다고 주장하면서 믿음과 행위를 칭의의 공동 도구인 것 처럼 말한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칭의와 마지막 날에 신자들의 입증(vindication)을 혼동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믿음의 주된 작용이 의지하고(resting), 신뢰하고(trusting), 받아들이는(receiving) 것으로 바르게 말한다. FV 옹호자인 제프 마이어스는 "신뢰"가 개인적인 충성된(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고 확언하였고 피터 레이하르트도 믿음이 신뢰라는 것을 확언한 이후에 "믿음은 신의를 지키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결혼에 있어서 약속한 맹세에 충성을 다하는 것" 이라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믿은 그 본질에 있어서 믿는 것뿐 아니라 또한 행동하는 것이다. FV 저자들은 칭의교리에 있어서 모호하고 혼동을 준다.

 

  분명, 벨직 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는 믿음이 열매를 맺을 것이고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칭의 교리를 공식화하는데 포함하지는 않는다. 의롭다하는 증거로서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행위를 어떤 식으로든지 칭의의 도구로 묘사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개혁주의의 가르침은 칭의의 도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스킬더도 벨직고백서 22, 23항에 대한 강의록에서 칭의의 유일한 도구는 믿음이라고 주목한다. 반 브럭헌도 의롭다하는 믿음의 본질에서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면서 루터가 믿음에서 "오직"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았다고 말한다. 반 브럭헌은 침된 믿음은 언제나 선행의 결과를 낳는다는 점으로 나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행위 이 두가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핵심 교리가 해방파의 유산에소 늘 명확하게 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개혁교회들 안에서도 기독교인의 삶에서 선행의 역활에 대한 혼동이 남아있다. 이런 혼동의 일부는 칭의와 성화의 차이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선언인 칭의에는 우리의 선행이 전적으로 어떠한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활동의 본성은 그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물론 성화에는 선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믿음의 열매에, 감사의 제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에 속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는 방법이나 방편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감사함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FV 옹호자들처럼 순종의 논의를 칭의로 가져오는 것은 혼동을 줄뿐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부인하거나 최소화함

 

  앞에서 다른 부분과 관련된 것으로 어떤 FV 옹호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거나 최소화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치에서 율법을 기키셨고 그분의 공로적인 율법지킴이 칭의 때에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공동 FV선언문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죄없는 삶이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복음에 충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특정하게 교리적으로 공식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이점에서 불편한 모호함이 있다. 이 교리에 대해 벨직 고백서 22항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위치에서 행하신 모드 거룩한 행위들과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킨다."고 분명히 말한다. FV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신학이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세일치 신조에는 그러한 신학이 분명히 있다. 이 신앙고백문서들이 그렇게 명확하게 공로의 언어를 말하고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확언하고 있음에도 FV주의자들이 세일치 신조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을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교리에 대하여 16세기 후반에 논쟁이 있었지만 17세기에 그 논쟁은 끝났다. 제네바 신학자인 프란시스 튜레틴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개혁교회들 안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확증하고 있다.

 

  노만 쉐퍼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는 행위언약 교리의 발전과 나란히 받아들여진다. 이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이 교리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기술된 타락전 언약(행위언약) 안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으며 또 행위언약의 교리가 필연적으로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위언약 교리가 없는 루터주의자들 역시 칭의교리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쉐퍼드의 주장과 달리 이 교리가 행위언약 교리를 강요하거나 필연적으로 그것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이 교리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고백적 전통에 있는 정통개혁주의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유아 성찬을 주장함

 

  유아성찬(paedocommunion)은 아이들이 신앙고백없이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아성찬 찬성자들은 언약공동체의 회원됨은 자동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을 준다고 주장한다. FV 옹호자들이 모두 유아성찬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수가 그 입장을 취한다. 공동 페더럴 비전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유아성찬을 페더럴 비전 신학의 기초 대들보로 간주한다." 교회로 부터 합법적인 권징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우리는 자녀들을 포함한 모든 세례받은 자들이 성찬에 초대되어야 한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벨직 고백서 35항은 "주의깊은 자기 성찰 없이는" 성찬에 나와서는 안된다고 경고하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제30주일에서  주의 식탁에 나오는 조건을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 고백서들이 이점에 있어서 너무도 명확하므로 캐나다 개혁교회나 해방파 전통이 다른 말을 한적이 없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후천년적 종말론

 

  대부분의 FV 옹호자들은 후천년적 종말론의 입장을 취한다. 미지막 때에 대한 이 견해는 매래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관점을 준다. 후천넌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이 보다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날이 올 것이며 그것도 이 시대에 올 것이라 믿는다. 후천년적 종말론은 공동 FV 선언문의 다음과 같은 확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구원받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언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할 것이라고 확언한다. 성경은 후천년적 종말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또한 해방파 전통안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변형된 형태의 후천년적 입장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무천년적 입장이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후천년설이 세일치 신조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진 적은 없다. 그러나 FV 옹호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정통신자들과의 교제에 대한 시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한 것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전천년설주의에 대한 다양한 세대주의적 견해는 벨직 고백성화 어긋난다. 세일치 신조는 정통 개혁주의 신자들 사이의 교제에 경계를 나타낸다.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누가 이 경계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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