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종교개혁
2014-11-05 15:21:11
칼빈이 제네바에서 쫒겨나서 스트라스부르크로 피신하였을 때 그는 마틴 부처의 요청으로 스트라스브르크에 있는 프랑스 피난민들의 목회를 담당하였다. 킬빈에게 배운 이 사람들이 나중에 프랑스로 들어가 칼빈주의를 형성하였다. 종교개혁은 대부분 중산층의 상공인들이 지지층이었는데 프랑스도 마찬가지 였다. 프랑스에서는 일부 귀족과 신흥 부루주아들이 종교개혁을 지지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개신교를 지지하는 부르봉 왕조와 왕권의 정치적 라이벌이며 철저한 카톨릭 지지자인 기즈 가문사이에 정치적인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부르봉의 앙리, 기즈의 앙리 그리고 나바르의 앙리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 부르봉과 지즈의 앙리는 죽고 나바르의 앙리만 살아남아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게 된다. 이 때 나바르의 앙리는 개신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카톨릭 교도가 절대 다수인 프랑스에서 왕이 되기 위하여 부득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기즈 가문이 지지하는 카톨릭 교도들이 개신교도들을 대학살하는 성바돌로뮤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후 앙리는 낭트칙령을 반포하여 기샌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허용한다. 낭트 칙령이후에 종교적 자유를 얻은 개신교도들을 위그노라고 부른다.
그러나 태양왕 루이 14세는 카톨릭을 지지하면서 낭트칙령을 철회하고 개신교도들을 핍박하게 되는데 이 때 다수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탈출하면서 프랑스에서 개신교 세력을 거의 소멸된다. 프랑스 경제를 쥐고 있던 상공인들인 위그노가 탈출하면서 프랑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에 되는데 프랑스는 이 와중에 1776년 미국 독랍전쟁을 지원하게 된다. 영국과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을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에 군대와 자금을 대규모로 지원하였다. 미국 독립전쟁이 성공한 주요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적극적인 지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로 인하여 경제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는 붕괴하고 프랑스는 근대 시민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위그노 핍박이나 미국혁명의 지원은 모두 왕권을 강화하려던 루이 14세의 왕권 강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이러니하게도 루이 14세의 왕권강화책은 오히려 왕권을 영구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득세한 카톨릭 세력은 18세기에 파리 외방선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해외선교를 전개하였다. 당시에 중국의 북경에는 예수회에 의하여 카톨릭이 이미 전파된 상태였는데 예수회는 조상제의와 같은 전통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카톨릭이 북경울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북경을 통하여 조선으로 들어온 카톨릭은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조상제의를 수용하는 카톨릭에 조선의 유학자들이 호감을 보인 것이다. 나중에 정약용을 배교하게 되는데 이는 카톨릭이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교황과 알력을 빚고 있던 프랑스 왕이 교황권을 약화시키려고 의 교황의 친위대격인 예수회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예수회가 조상제사를 수용한 것을 우상숭배라고 몰고갔기 때문이다. 남인과 중인들을 중심으로 퍼져있던 조선의 카톨릭 교도들도 조상 제사문제로 대규모 핍박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 군대가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다.
카톨릭의 종교개혁
2014-11-12 01:14:09
종교 개혁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위클리프나 후스이래 100년 가까이 중세 사회의 불만이 누적된 상태에서 루터가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때가 무르익은 것이고 민중들의 자각이 성숙한 것이다. 종교개혁이 계속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카톨릭은 완전히 붕괴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중간에 그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 이유는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종교 개혁 진영의 자체 분열이다. 특히 종교 개혁1세대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차이로 결별하게 되고 게신교 진영의 군사적 도움을 받지 못한 쯔빙글리는 카톨릭 진영과의 카펠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에라스무스, 멜랑히톤 킬빈 등은 이런 분열을 막으려고 힘썻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는 카톨릭 진영의 반작용으로서 자체적인 개혁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루터는 황제가 초기 공의회를 소집했듯이 교황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일 귀족들이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촉구하였다. 루터에 대한 파문장에 평신도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구한 죄목이 들어있다. 결국 교황은 1540년에 스스로 공회를 소집하였는데 이것이 트리엔트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에서 카톨릭은 기존의 교리를 재 확인하고 루터의 교리를 정죄하였으니 교리적으로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다만 각 지방의 교회들에서 성직자들이 무지하고 부패한 것이 종교 개혁의 주요 원인으로 판단하고 각 교구마다 사제 양성학교를 만들어서 일정한 실력을 잦춘 성직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주교들을 교구에 상주시키고 성직자들이 주기적으로 순회 감독하도록 하여 부패를 억제하였다. 또한 교황 친위대를 자처한 예수회의 등장으로 교황의 권위가 상승한 것이다. 카톨릭의 이런 자체 개혁은 개신교 진영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개신교 진영의 확산이 저지된 상태에서 양 진영의 영주들 간에 1555년 아우스브르크 협약까지 거의 20년가 양진영의 영주들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아우스부르크 화약에서 영주의 종교에 따라서 그 지역의 종교를 카톨릭이나 루터파중의 하나로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서 칼빈파는 인정받지 못한다. 칼빈파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것은 30년 전쟁이 끝나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이니 칼빈주의는 등장한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인정된 것은 1789년 미국의 제2차 수정헌법의 등장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18세기 말에야 개인의 종교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영국의 종교개혁
2014-11-05 16:29:13
16세기 초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는 유럽의 최강자인 스페인과 친선관계에 있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선린정책으로 자기 아들 아더를 스페인의 왕녀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아더가 결혼 4개월만에 죽자 헨리 7세는 왕위계승권자인 아더의 동생 헨리 8세를 다시 케서린과 결혼을 시킨다. 이렇게 스페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헨리 8세는 원치않는 결혼을 강제로 하게 된 것인데 여기서 태어난 소생이 공주인 메리 튜더였다. 그러나 자신과 케서린 사이에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자, 헨리 8세는 당시 로마 교항에게 자신이 원치 않았던 캐서린과의 결혼을 최소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캐서린은 당시 스페인 왕이며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알5세의 숙모였으므로 카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헨리 8세의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부터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결별을 불러올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한다. 그는 로마에 항소를 제한하였던 옛 법령들을 부활시켜 성직자들을 국왕의 권위 아래 두고 로마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을 통제하며, 종교문제에 대해 왕을 자문하던 토마스 크랜머를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당시 대륙에서 발생하고 있던 종교개혁이 잉글랜드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캐서린과의 이혼을 계기로 교황의 권력에 대항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로마와의 최종적 결별은 1543년에 발생하였다. 영국 의회는 헨리8세의 명령에 따라 로마로 흘러가던 자금을 봉쇄하였으며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메리 투더는 왕위 계승자의 위치를 박탈당했다. 또한 의회는 왕을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지명하였다. 이런 법령에 반대하였던 당시 대법관 토마스 모어는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다. 케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한 후 헨리 8세는 앤 볼린과 결혼하였는데 여기서 태어난 공주가 엘리자베스이다. 그런데 앤 볼린 사이에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자,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간음누명을 씌워 죽이고 제인 세이모와 결혼하여 마침내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게 된다. 이런 카톨릭과 분열의 와중에서도 종교 개혁은 아직 생각하지도 못하였으며 분열을 정당화하는 정도의 이론적 배경만 있었을 뿐이다. 잉글랜드에서 근본적인 종교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크랜머였다. 크랜머는 엉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하고 각 교회마다 영어 성경책을 비치하도록 하였다. 헨리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 재위 기간에 교회의 개혁은 큰 진보를 가져왔다. 평신도들에세 성찬식의 잔이 주어졌고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되었으며 각종 성상들은 철거되었다. 그리고 크렌머가 작성한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가 출판되어 잉글랜드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나라 말로 된 예배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에드워드 6세는 6년간의 짧은 재위 후 사망하였고 후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운 메리 튜더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메리 튜더는 일생동인 충실한 카톨릭 지지자였다. 그녀에게 종교개혁은 자기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대적이었다. 따라서 개인적 확신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메리는 카톨릭을 다시 수복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스페인의 필립2세와 결혼하여 카톨릭 지지 세력인 합스부르크가와 유대를 결속하고 잉글랜드내 개신교들을 억악하기 시작한다. 1554년 잉글랜드는 공식적으로 교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서약하고 헨리8세와 에드워즈 6세 재위시에 이루어졌던 조치들을 대부분 철회하였다. 수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하고 유배와 망명을 당하였다. 토마스 크랜머도 이때 죽임을 당하였다. 메리 튜더는 1558년에 병사하였고 이복동생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메리가 개인적 정치적 이유로 카톨릭적이었던 것처럼 엘리자베스도 개신교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극단적이기 보다는 중도적 노선을 따라 교회의 통일을 이루고 잉글랜드 전체에서 공통의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과 극단적 개신교 양측을 배제하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포용적 종교정책을 추구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교리적 기초인 39개 신조는 이런 포용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시절에 잉글랜드에서 축출된 카톨릭 지도자들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할 음모를 꾸몄고 이로 인해 카톨릭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메리 스튜어드도 처형된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청교도들의 등장이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하자 메리 튜더의 핍박을 피해 제네바로 망명을 했던 개신교 지도자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이들은 망명 기간동안 츠빙글리와 칼빈의 개혁 신앙을 제대로 배우고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의 중도적 종교정책에 불만을 품고 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한 종교개혁을 열망하였는데 국도교들이 이들을 조롱하여 퓨리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여왕 중심의 국교도와 의회중심의 청교도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종교전쟁으로 발전한다.
재세례파 운동
2014-11-05 14:14:12
종교개혁 역사에서 스위스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취리히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칼빈,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가 전부 스위스에서 활동하였다. 독일에서 루터의 뒤를 이른 멜랑히톤은 루터와 달리 에라스무스를 추종하였다.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인간론 특히 인간의 이성의 역할에 대한 견해차이로 결별했던 사이인데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히톤은 에라스무스를 선호하였다. 이는 멜랑히톤의 인문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가 카톨릭과 우호적 관계를 시도한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멜랑히톤뿐 아니라 츠빙글리나 칼빈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종교개혁에서 에라스무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에라스무스는 카토릭을 비판하면서도 정면대결은 피한 사람이다. 에라스무스에 영향을 받은 멜랑히톤은 포용적 태도를 가지고 구원의 본질적 교리외에는 카톨릭과 타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루터교 엄수파는 이것을 반대하였고 이것을 아디아포라(비본질적인 것) 논쟁이라고 한다. 이 논쟁으로 인하여 루터 진영은 루터교 엄수파와 멜랑히톤을 좇는 필립파로 분리된다. 성만찬 교리에서도 멜랑히톤은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지 않고 칼빈과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칼빈, 츠빙글리, 멜랑히톤, 이 세그룹이 개혁파(Reformed)를 형성하게 되고 루터교 엄수파는 루터교를 형성하여 개신교는 개혁파와 루터파로 양대 진영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칼빈파가 우세해지면서 칼빈주의가 개혁파를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킬빈주의는 개혁파를 구성한 세 그룹중의 한 그룹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개혁파, 루터파에 이어 종교개혁의 제3의 세력이 등장하였으니 그들이 바로 재세례파이다. 재세례파의 등장은 츠빙글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츠빙글리는 원래 스위스 용병의 종군 목사였는데 나중에 용병이 악한 제도라고 비판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에 스위스 대부분의 카톨릭 성직자들이 내연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수도원이나 성당이 사생아로 넘쳐나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이 문제도 거론하여 사생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의 결혼 제도를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편찬한 헬라어 신양성경을 탐독하였으며 카톨릭의 비성경적 전통을 반대하였다. 성경해석에서 루터가 성경에서 금하지 않은 것은 다 허용된다고 본 반면에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명하지 않은 것은 다 금지된다고 해석하였다. 츠빙글리의 이런 엄격한 성경해석에 영향을 받은 일단의 젊은이들이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츠빙글리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이들은 성경에서 유아세례를 명하지 않았으므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세례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바로 스위스 형제단 혹은 재세례파라고 불리게되는 종교개혁의 제3의 분파로 등장하게 된다. 재세례파의 세력은 무섭게 확산되었고 루터파나 개혁파와도 신학적 견해에 점점 큰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이들은 이신칭의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이신칭의는 출발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산상수훈을 따라서 제자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평화주의를 내세웠다.
독일에서 토마스 뮌처가 지도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루터는 초기에는 농민전쟁을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자기를 정치적으로 후원하는 영주편을 들어서 농민전쟁을 불법으로 정죄한다. 이것은 정교유착을 통해 시작된 루터 종교개혁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는데 그래서 재세례파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일체의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병역을 거부하게 된다. 결국 재세례파는 카톨릭, 개혁파, 루터파 모두로 부터 대규모 핍박을 당하게 되어 20년 동안 약 3만명이 화형, 수장등으로 살육을 당하게 되니 이는 기독교가 또 다른 기독교를 대량 학살한 슬픈 역사로 기록된다. 이후에 뮌스터 봉기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호프만이란 자가 주의 재림이 임박한 환상을 보았다며 핍박 가운데 처한 재세례파 사람들을 선동하여 독일 북부의 뮌스터에서 무력 봉기한 사건이다. 결국 루터파와 카톨릭의 연합 군대가 이들을 철저하게 진압하고 이들에게 광신도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고 핍박을 정당화하게 된다. 특히 카톨릭은 뮌스터 사건을 악선전하여 개신교 진영을 악평하는 도구로 유포하였는데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칼빈은 당시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기독교강요 초판 헌정사에서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유그노가 재세례파와는 다른 건전한 신자들임을 변호하였다. 칼빈 자신도 재세례파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뮌스터 사건은 재세례파에게 오명을 준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재세례파 역사의 주류는 아니었고 대단히 예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재세례파 운동은 스위스에서 발원하여 독일을 거쳐 네델란드로 전파되었는데 네델란드에서 메노 시몬스라는 재세례파의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그는 뮌스터 사건을 반대하면서 반전, 평화주의를 주장하면서 재세례파 운동을 이끌었는데 재세례파중에 지금도 이어져 내려온 유력한 분파가 바로 메노 시몬스가 지도한 메노파 곧 메노나이트이다. 아마쉬 공동체도 매노나이트에 속하는 분파이다. 재세례파는 물세례, 불세례 그리고 피세례라는 세가지 세례를 말하는데 이는 그들의 순교의 역사를 반영한 세례관일 것이다. 제자도, 평화주의, 정교분리 이런 급진적 사상들이 모두 재세례파에서 나온 것이다. 제자도를 주장한 본회퍼도 메노나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재세례파는 일방적으로 핍박을 당한 분파였으므로 종교개혁의 다른 분파와 달리 그 역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역사적 기록도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17세기 정통주의 시대
2014-11-12 13:27:50
16세기가 루터 칼빈등 종교적 천재들이 등장한 세기라면 17세기는 이런 천재들의 작업물을 정리하고 주석하며 집대성하는 시기였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신학자들이고 그들이 관심은 학문적이고 교리적이었다. 이들은 영성보다는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업은 지성화하고 도그마화되기 시작한다. 루터파 정통주의는 루터의 신학을 정립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것은 루터가 반대하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루터교의 신학과 교리는 탄생하였지만 정작 루터의 영성과 경건은 배제되었다.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에 30년 전쟁이 독일에서 터졌다. 1555년 아우스부르크 협약이후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간에는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왔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보헤미아 지역을 카톨릭화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다시 카톨락과 개신교 진영간의 전쟁이 독일 영토내에서 발발하게 된 것이다. 카톨릭 진영인 신성로마제국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가담했고 개신교 진영인 보헤미아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가담하여 국제적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은 30년간이나 진행되어 독일을 황폐하게 만들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전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진행되던 이 시기가 바로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였다. 세상은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데 개신교 신학자들의 관심은 목회보다는 교리와 신학이었고 일빈 민중보다는 지성인들과 신학도들을 위한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정통주의 시대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것이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1675년 야콥슈패너는 경건에의 열망이라는 소책자에서 독일교회의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신학교 개혁을 언급한다. 참된 설교자를 신학교가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17세기 정통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이 삶의 지침이 아니라 신학을 위한 자료가 되어버렸는데 경건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이추상적 사색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을 반성하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을 체험하자는 운동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인데 이런 일은 교회사에서 이 때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 말씀을 사색과 신학의 대상이 아닌 몸으로 살아내자는 운동이다.
독일에서 경건주의가 등장하던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청교도 운동이 일어난다. 메리 튜더의 핍박을 피해서 스위스로 피신하였던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칼빈과 불링거에게 개혁신학을 배우고 에리자베스 시대에 돌아오게 된다.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로 성공회는 중도노선을 취하게 되는데 돌아온 개신교 지도자들은 성공회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고 복식이나 사제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교도들과 대랍하게 된다. 국교도들이 이들을 조롱하여 퓨리턴이라고 부르면서 청교도가 영국에 등장하게 된다. 주로 옥스포드 출신의 국교도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고 주로 캠브리지 출신의 중산층 시민계급인 청교도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게 되는데 이 두 세력의 갈등은 영국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드디어 찰스 1세때 성공회 주교인 윌리엄 러드가 대대적으로 청교도들을 박해함으로 왕당파와 의화파로 갈라진 국교도와 청교도간의 내전이 일어나고 크롬웰이 지도한 의회파가 승리하게 된다. 의회파의 승리는 영국이 입헌군주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청교도는 성공회에 남아있으려는 비분리파와 성공회를 떠나려는 분리파로 나뉘게 되고 분리파들은 박해를 피해 네델란드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도했던 신정사회를 꿈꾸며 자신드링 정착한 한 곳은 언덕위의 도시(city upon a hill) 이라고 불렀다. 이후 성공회의 감독정치를 반대하였던 청교도들은 간접민주제 방식의 장로 정치제도를 택한 장로파와 직접민주제 방식의 회중교회를 택한 독립파로 갈라진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2014-11-07 15:49:00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르러 프랑스보다 잉글랜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1502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딸 마가렛 튜더와 결혼하게 되고 여기서 제임스 5세가 태어난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조카인 셈이다. 그런데 스코틀랜드가 다시 프랑스와의 전통적 동맹관계로 회귀하면서 제임스 5세는 프랑스 기즈가의 메리 로렌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 태어난 딸이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와 사촌 조카인 메리 스튜어드이다.
제임스 5세 시기에 독일에 유학하였던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루터 및 다른 개혁가들의 사상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스코틀랜드내에서 개신교 세력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패트릭 해밀튼(1504-1528)인데 그는 비텐베르크를 방문하고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루터 교리를 설교하다가 1528년에 화형을 당했다. 당시 유명한 개신교 설교자였던 조지 위사르트(1513-1546)는 카톨릭측의 박해로 화형을 당하게 되는데 이 일에 반발한 개신도들이 성 앤드류의 비튼 성을 점거하고 봉기를 일으킨다. 이 일에 위사르트의 친구였던 존 녹스가 연루되는데 그는 체포되어 프랑스 노예선에서 19개월 중노동 형을 받다가 잉글랜드의 중재로 풀려나 잉글랜드로 가서 에드워즈 6세 재위 시절에 궁정 목사를 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메리 튜더가 즉위하자 녹스는 스위스로 망명하여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또 취리히에서 불링거에게 개혁신앙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1542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사망하였을 때 왕위 계승자는 아직 어린 딸 메리 스튜어드뿐이었다. 스코틀랜드과 관계 개선을 기대하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자기 조카 손자인 메리 스튜어드를 자기 아들 에드웨드 6세를 결혼시키고자 하였고 개신교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이 계획에 찬성하였으나 친프랑스파인 카톨릭 교도들은 메리 스튜어드를 프랑스로 보내 교육시키고 프랑스 왕자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메리 스튜어드는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인 프란시스 2세와 약혼을 하고 프랑스로 가게돤다. 이에 스코틀랜드 독립운동가들과 개신교도들은 크게 반발한다. 왜냐하면 이 결혼으로 스코틀랜드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영구히 예속이나 합병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로 간 메리 스튜어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2세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의 왕비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여왕직은 명목상일뿐이고 실제로는 메리 스튜어드의 모친인 기즈의 메리(메리 로렌)이 스코틀랜드를 섭정하였다. 메리 스튜어드는 엘리자베스의 왕권을 부인하고 자신이 잉글랜드의 합법적 왕임을 주장함으로써 사촌인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기즈의 메리 섭정하에서 스코틀랜드의 게신교도들은 계속적인 핍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버티어 1558년에 교회를 조직하고 존 녹스의 귀환을 요청하게 된다. 결국 메리 스튜어드와 프랑스 왕의 결혼에 반발하던 스코들랜드 독립운동가들과 개신교도들은 반란을 일으킴으로 내전이 발생하는데 이때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존 녹스가 개신교 진영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녹스는 우상숭배를 하는 불의한 통치자에 폭력으로 맞설 수 있다는 혁명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내전에 영국이 개입하고 프랑스 세력이 물러감으로써 개신교 진영은 승리를 거두고 스코틀랜드는 본격적으로 개신교 국가로 변하게 된다. 1560년에 녹스가 초안한 칼빈주의적 신앙고백이 국가의 신조로 채택되고 의회는 교황의 관할권을 폐기하고 미사를 금지시켰다. 녹스는 칼빈이 만든 교회정치 체제인 장로교 체제를 국가 전체에 적용하는 제일 권징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는데 이를 계기로 스코틀랜드 개신교는 장로교라는 정체체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특징은 일차적인 관심이 신학이나 예배의식보다는 교회정치를 개혁하는 것이었는 점이다. 당시 장로교 체제는 교구마다 화중이 동의한 목사와 장로가 있고 이들이 규율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후일 출교권을 가진 당회로 발전하게 된다. 대도시의 토의 회의에서 노회(presbyteries)가 생겼고 목사 단체와 회중 단체들 위에 대회(synods), 그 위에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었다.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2세가 병사하면서 과부가 된 메리 스튜어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후에 스코틀랜드로 귀국하게 되는데 그녀는 여전히 카톨릭을 신봉함으로써 녹스와 대립하였다. 메리 스튜어드로 인하여 한때 개신교 진영에 갈등과 분열도 있었지만 결국 메리 스튜어드는 몰락하고 잉글랜드로 피신을 하였다가 원수지간이 되었던 엘리자베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1567년 녹스는 메리 스튜어드의 아들 제임스 6세의 대관식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개신교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사후 왕권을 계승하여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킹제임스 번역 혹은 흠정역이라 불리우는 영어성서 번역본을 만들었다. 녹스가 죽기 수일전에 프랑스에서는 성 바로로뮤 축일 대학살 사건이 벌어졌는데 녹스는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이 비슷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투쟁이 불가키하다고 역설하였다. 1572년녹스가 죽자, 녹스의 사역은 앤드류 멜빌(1545-1623)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앤드류는 글래스고우와 성 앤드류스 대학의 교육 개혁자였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제도의 완성자였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 - 배덕만 (0) | 2023.05.07 |
---|---|
교회의 보편성과 분리주의- 김재성 (0) | 2023.05.07 |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 (0) | 2023.05.07 |
페더럴 비전에 대한 비판- 웨스 브레덴 호프 (0) | 2023.05.07 |
무천년설을 반대함- 김 삼 (0) | 2023.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