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

탈보수신학의 토대로서의 판넨베르크신학- 김원호

탈보수신학의 토대로서의 판넨베르크신학- 김원호

2014-10-04 01:27:23


탈보수주의 신학의 토대로서의 판넨베르크 신학

김원호(dent4834@hanmail.net)

1. 왜 판넨베르크인가

이번 자료를 정리하고자 생각하게 된 동기는 나의 일생에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신앙적 확신의 기초가 뿌리 체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면서부터이다. 아니 오히려 지금 나의 신앙의 기반이 잘못되었다고 뒤흔들고 있는데 이를 뒤늦게 감지하고서 당황해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료정리를 한다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나는 비록 짧은 삶을 살아왔지만 지금도 루터의 이신칭의와 칼빈의 정통주의 신앙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비록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감사하면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믿음이 잘못된 것이며 성경을 보고있는 나의 잘못된 렌즈를 깨끗이 하거나 아니면 다른 렌즈로 바꾸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를 통틀어서 혼란스럽지 않은 시기가 없었지만 요즘은 전쟁도 별로 없고 모든 것이 표면적으로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평화로운 시기라고 생각되지만 내면의 혼란은 어느 시대 못지않다고 생각된다.

요즘 미국에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첫째로 위선자(hypocrite)을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더 심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요즘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오고 있다.

지금 정통 신앙에 뿌리를 둔 대부분의 교회들은 더 이상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고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를 더욱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현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고자 신학계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 노력의 결실(?)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교회의 형태가 이머징처치인 것이다.

이러한 이머징처치의 확장은 이제 어느 누구도 예외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출판물을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들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뉴스엔죠이 기독신문에서의 신문 1면의 제목이 지옥불 논쟁, 미국은 후꾼, 한국은 썰렁이었다. 랍 벨의 사랑이 이긴다 라는 책의 출간 기념 좌담회에서 나온 말을 가지고 한 것이다. 그 이유를 좌담회에 참석한 한 목사님이 한국교회목사들과 교인들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하도 이상한 책들이 많이 나오기에 책은 읽지 않아도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위로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은 없다. 우리나라도 그 영향권 안에 이미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머징처치의 보편화는 나름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적합한 하나의 모델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머징처치의 근본을 형성하고 있는 신학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신학적인 문제가 많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머징 처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지만 마즈힐교회(랍 벨이 사역하였던 마즈힐교회와는 다른 마즈힐교회)의 담임목사인 마크 드리스콜은 이머징 처치와 이머전트 빌리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이머전트 빌리지는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더그 페짓, 랍 벨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형성해 나가는 교회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통상 이머전트 빌리지를 이머징교회로 칭할 수밖에 없는 용어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통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탈보수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교회를 이머징 교회로 칭하고자한다.

현재 이머징 처치의 대표적인 인물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신앙에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 세 사람을 든다면 톰 라이트, 리처드 포스터, 스탠리 그렌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톰 라이트는 현재 이머징 교회가 그의 신학을 이머징교회의 기초신학으로 채택하고 있을 전도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고 리처드 포스터는 레노바레운동을 통해서 남가주대학의 교수인 달라스 윌라드와 함께 이머징 교회가 교회로서의 영성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많은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스탠리 그렌츠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오랜 친구이면서 멘토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이머징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맥클라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이 세 사람 외에도 많은 유명한 영적 거장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머징교회의 모양을 갖추어 나가는데 도움을 주었고 또 현재도 도움을 주고 있지만 먼저 거론한 대표적인 이 세 인물의 신학적 특성은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 세 사람이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공통점을 가지면서 서로 보완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를 흔히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혼재하면서 과도기적인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또한 신학적으로도 모더니즘의 신학인 전통적인 보수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인 탈보수신학의 불안한 대립과 조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머징 신학의 특징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는 이러한 신학을 기반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새로운 교회 형태로 자리잡아가려는 모험적 시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신학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으로 자리를 잡아가는데 가장 선두주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고 그와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개념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바로 스탠리 그렌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스탠리 그렌츠는 55세의 나이로 2005년에 일찍 생을 마감하였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을 논한다면 스탠리 그렌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스텐리 그렌츠는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사람인 판넨베르크 밑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했으며 그의 신학사상은 바로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좀 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다시 정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때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스텐리 그랜츠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이머징 신학을 형성하는 데 기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관점에서 톰라이트의 신학을 점검해본다면 많은 면에서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톰 라이트는 본인 스스로 판넨베르크를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톰 라이트와 판넨베르크는 캐나다 벤쿠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와 여러 가지로 연관되어있고 리젠트 칼리지는 현재 이머징 신학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에 이러한 전체 그림 속에서 본다면 어떻게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톰 라이트의 신학이 서로 연관되어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20세기에 바르트 이후 몰트만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신학계의 거장이기에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그를 논한다는 것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을 테지만 현재 나의 신앙을 뒤 흔들고 있는 톰 라이트의 신학을 알기 위해서는 판넨베르크를 알아야하는 일이 필수적인 일이라 생각되어 부족한 모습이 보일지라도 과감히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톰 라이트의 신학을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이번 기회에 톰 라이트도 좀 더 집중적으로 분석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판넨베르크와 톰 라이트를 동시에 연구 분석하는 것은 너무 무리수가 따르고 또한 산만해질 가능성이 있기에 이번은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을 하고자한다.

2. 판넨베르크는 누구인가

판넨베르크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해있지만 과거에는 독일에 속해있던 슈테틴이란 곳에서 1928년에 태어났다. 청년시절 예기치않은 신비적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그런 다음 칼 바르트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58년부터 독일의 부버탈 대학교수로 취임한 이후 1961년 마인쯔 대학교수로, 그리고 1967년이후로 1993년 은퇴 시까지 뮌헨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임했다. 판넨베르크는 40여년 동안 수많은 소논문과 책들을 내며 세권짜리의 조직신학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일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 있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인 1945년 1월 초에 군대징집을 몇 개월 앞둔 학생으로서 학교를 마치고 기차 대신에 걸어서 두 시간 걸리는 집으로 걸어가던 중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지는 해의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빛 속으로 녹아버리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이는 판넨베르크 자신에게 있어서 인생의 중대한 경험이었고 평생에 판넨베르크 신학에 영향을 미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다행히 종전 직전에 군 입대를 하면서 피부병이 도져서 군 후송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포로로 잡혀 있다가 종전 후인 1947년부터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그때 평생을 신학자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후원하여주는 장학금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게 된 계기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모두 읽을 수 있었고 그 때 칼 바르트의 사상이 철학적 깊이가 결여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칼 바르트의 신학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에 대한 이러한 실망은 나중에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윤곽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판넨베르크는 중세 스콜라주의에 관하여 박사논문과 교수자격 논문을 주제로 택하면서 신앙과 이성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판넨베르크는 성서주석과 조직신학, 철학, 교회사 등을 연구하면서 전혀 신학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유대인의 역사와 구약에 대하여 정통한 게르하르트 폰 라드를 만나면서 자신의 신학의 어두운 장막이 거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사로서의 계시”를 근거로 한 보편사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폰 라드의 역사 신학에서 개념이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고 폰 라드를 만난 후 10년 만에 결실로 나타날 수 있었다. 또한 폰 라드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승에 관한 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판넨베르크는 역사는 곧 성서 주석의 핵심단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1961년 출간된 “역사로서의 계시”는 당시 지배적인 신학이었던 불트만 학파의 실존주의 신학과 바르트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적 계시사상과는 확실하게 선을 그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중세 신학사를 강의하면서 헤겔 사상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신학은 최소한 헤겔 철학과 동일한 수준으로 발전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헤겔 철학은 판넨베르크 신학의 철학적 기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확실한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시기는 1980년대 초였는데 이는 1967년도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미래의 힘”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이러한 미래의 힘이라는 개념에서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고 현재를 과거의 결과가 아닌 미래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형성되면서 모든 역사의 과정을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루터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독일 개신교와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신학자로서 지구적 차원과 기독교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화적 영광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단순히 독일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의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로마의 문화유산 속에서 학문적 정립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면서 신학을 하게 되었다.

3. 판넨베르크 신학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들

판넨베르크가 “역사로부터의 계시”라는 개념의 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불트만이나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실존주의 신학이 이성과 신앙을 분리시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신앙이 이성을 기초로 하는 과학적인 방법과 분리되어있는 분야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도록 열려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판넨베르크는 전통의 전승이라는 역사개념으로 현재와 과거가 모든 역사 속에서 내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적 연결의 중심에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라는 미래의 선취적 현재라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현재의 모든 현상들은 종말론적 미래의 현재적 결과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교의학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교의학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교의학은 절대불변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적 사고의 붕괴를 초래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교의학의 변화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판넨베르크 신학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기초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교의학의 변화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역사적이고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이에 대한 철학적 신학화의 과업을 통해서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조화시키며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해내었던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확보되지 않은 진술들은 자의적 상상력의 생산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자신의 진술의 차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교의학은 모든 시대의 불변하는 명제적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정통 기독교의 권위적인 교의학에 대하여 반발하게 되었으며 신학은 종교 현상과 전승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른 경쟁적인 종교들과 함께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탈보수신학자들인 톰라이트나 스탠리 그렌츠, 맥클라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현실은 반드시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져야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학술적 교류가 가능한 것이 되어야했기에 전통적 신앙고백에 의한 신학보다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출발하는 자연과학적 신학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당연히 판넨베르크의 교의학은 역사적인 질문과 검증의 과정들을 거쳐야만 했었고 신앙은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을 위한 수단으로 추락되었고 더 이상 역사신학이 신앙을 위한 지식으로 성립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위한 수단으로 추구되는 신앙은 신앙고백이 전제가 되는 전통적 기독교와는 다른 양상의 기독교의 형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데 바로 오늘날의 이머징신학을 비롯한 탈보수신학들이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서 전통적 신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기독교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고백이 아닌 지식에서 출발하는 신학은 일반 자연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호소력을 가지면서 좀 더 설득력 있게 신학을 몰락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에 반하여 신앙 고백을 기초로 하고 있는 정통 신학은 점점 더 입지가 작아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교리를 양보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신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로서의 계시

판넨베르그의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있는 세속화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세속화라는 개념은 현실의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배제된 시대적 상황을 일컫는다. 이러한 세속화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세속화의 출발이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출발하여 16,17세기의 종교전쟁과 더불어 급격히 증가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종교전쟁은 종교개혁의 원치 않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고 교리를 중심으로 한 서로간의 싸움은 종교가 더 이상 사회의 인간학적 기초가 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종교는 그 자리를 자연법에 내 주게 되면서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된 게토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사회는 자연법과 더불어 더욱 세속화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사회 안에서 더 이상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아무런 의미도 가질수 없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진리로 여겨지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결국 서구사회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 커다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현실에서 외면되었던 기독교를 슐라이어마허가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한 신학을 다시 정립함으로서 기독교를 몰락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허마허가 이성을 기초로 정립했던 신학은 결국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부분을 제하여 버리는 자유주의의 모습으로 문제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개념으로 칼 바르트가 초월적 개시의 신학을 정립하였으나 이 또한 현실에서 신앙을 제하여 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칼 바르트 역시 사회 현실에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한 답을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결국 종교는 개인의 영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정치제도뿐만이 아니라 교육제도마저도 종교에 대하여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에서 볼 때 판넨베르그에게 있어서 신학함이란 이러한 세속화에 대하여 반대급부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했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신학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 만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바르트와 불트만은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키는 실존주의 신학을 함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로서의 하나님 이해를 추구한다. 하나님은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결코 제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세계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계시의 개념으로 현실을 규정하고 계시기에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 역사의 개념과 계시의 개념을 진리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계시의 개념의 통합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히브리사상과 형이상학적 계시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그리스 사상의 통합함으로서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자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헤겔의 사상 속에는 미래라는 지평이 상실되어있었지만 판넨베르크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지평을 드러냄으로서 헤겔이 한계를 보였던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경험 가능한 하나님 인식과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두 가지 관계의 조화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이었고 또한 신학이 계시에 근거하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결론 하에 완전한 계시는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결국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 하에서 종말론적 지평을 분명히 설정하고서 미래적 관점에서 현재를 재구성하는 신학을 함으로서 현실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속화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보편사

판넨베르크 신학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보편사라는 개념에서의 신학이다.

역사라는 개념의 독일어에는 Historie라는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의 개념이 있고 또 하나는 Geschte라는 주관적 개념의 역사가 있다. 바르트는 물론이고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역사는 이러한 Geschte의 개념으로 진술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보편사는 Universalgeschte이다.

세속화라는 말은 이러한 보편사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개념이기에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이 세계 역사 가운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의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규정하고자 보편사 신학을 하게 된 것이다.

중세에는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었기에 하나님 중심으로 현실과 기독교 세계를 자연스럽게 연관시킬 수 있었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현실은 르네상스와 더불어 인간 중심으로 인문학이 발달되면서 신중심의 문화보다는 인간 중심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인간이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현실과 기독교 세계의 자연스러운 분리는 오히려 기독교의 고립을 초래했고 더 나아가 판넨베르크가 자연법이라고 규정짓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중심의 문화로 인하여 기독교는 존립의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기독교의 공동체성을 강조한 배경에는 기독교가 개인구원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한 개인의 종교로 축소되면서 사회 공동체로부터 외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사회 속에서 보편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연과학과의 소통이 가능하고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적용이 가능한 신학을 구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동기에서 알 수 있듯이 판넨베르크의 신학의 대표적인 특징은 보편사라는 개념이다. 또한 20세기 들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과 더불어 기독교의 고립은 가속화 되었지만 정통주의는 물론이고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 신학 마져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라고 생각하였기에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신학이 이러한 공백을 메꿔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보편사적인 신학을 하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비록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인간 중심의 삶의 양식을 통해서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며 또한 종말론적인 완성을 이루실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에서 보편사적인 신학을 전개해 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보편사적 신학을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믿음을 근거로 하는 명제적 접근법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판단에서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채택하게 된다.

역사비평에 있어서 대표적인 신학자는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등이 있고 톰 라이트 또한 이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중의 한 사람이다.

기독론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아닌 아래로 부터의 기독론이다. 판넨베르크에게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권위주의적인 접근방법이고 초대교회의 전승과는 다르다고 생각되었기에 이러한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신학함의 출발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위로부터의 신학은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모던적인 방법이고 이는 역사적 실증주의를 기초로 하는 방법이 아닌 성경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방법이었기에 이러한 방법으로는 기독교를 사회적으로 고립되는데서 탈출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기독교가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러한 믿음을 기초로 한 명제적이고 권위적인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반발로 역사적 실증주의라는 학문적 기초를 통하여 신학을 하고자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논리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은 방법론에 있어서는 헤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헤겔적인 방법론을 택한 이유는 보편사적 신학을 함으로서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보편사가 외면된 신학은 역사가 없는 신학이 되고 역사가 없는 신학은 신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방법론은 자연과학이나 철학과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수는 있지만 신앙고백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선포되어지는 케리그마 신학과는 확실히 출발점이 다르기에 많은 면에서 정통 신학과 다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일반 학문에 대하여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설명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주었다.

판넨베르크의 그리스도 이해는 존재론적이 아닌 인식론적 접근방식이다. 인식론적 접근방법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신분이 어떠한 분인지 상관하지 않고 눈에 보여 지고 경험되어지는 인간 예수에서 출발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가시는가를 인식해가는 과정으로서 예수님을 인식해나가는 방법이다. 이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과정으로서의 과정신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 될 수도 있기에 매우 위험한 방법인데 판넨베르크는 과감하게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다는 생각은 존재론적인 개념이고 이미 그리스도가 탄생과 더불어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이셨고 또한 이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신 분이신 데도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감하게 무리수를 두면서 아래로부터의 방법론인 인식론적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보편사적 신학을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하여야만 했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방법이고 톰 라이트 또한 이러한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예수가 탄생과 더불어 신성을 가지셨다는 인식은 믿음을 전재로 하는 것이었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여야하는 입장에서는 예수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인식할수 없었던 것이고 이는 대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존재까지로 수정해야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식론적 접근방식은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고 우리는 이러한 증명을 통해서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접근방식은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신성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는 논쟁에 휩싸이게 되고 오히려 과정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완성되어져가는 과정으로서의 인식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접근방식은 판넨베르크가 대표적인 과정신학자인 화이트 헤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신의 현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판넨베르크가 사용하고 있는 신의 현현 개념은 플로티누스의 유출 개념과 유사한 헬레니즘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데서 기존 정통주의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히브리적인 사고에서 출발한 신학이 위로부터의 신학이라면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신학방식은 다분히 헬레니즘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신학인 보편사적 사고에서는 예수의 신성이 예수의 인간성에서 발견되어져야하기에 예수의 인간성이 우선이 되어야하고 이러한 생각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론은 예수가 하나님으로 종착되기에 인간이 신적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실체현재” 즉 하나님 자신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한다는 헬레니즘적 사고를 통하여 인간과 신이 같이 하나가 된다거나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합한다는(deification) 알렉산드리아적 해석 방법을 채택하고 있기에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관상기도의 기초를 마련하여준 결과가 된 것이다.

교회론

판넨베르크의 교회론의 모형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에 두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현재를 과거의 결과가 아닌 미래의 선취적 결과로 보듯이 교회 또한 과거의 전통에서 모델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라는 공동체의 모형(provisional)으로서 현재의 교회가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머징 교회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의 형태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원하고 있기에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있는 미래로부터의 선취적 결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으로서 이머징 교회의 형태를 갖추어나가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강력히 갈망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에서는 미래에 우위성을 둔 현재와 미래의 결합으로서 미래로부터 오고 있는 현재적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에서 교회론이 정립되고 있기에 모더니즘과와 완전한 단절을 위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한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판넨베르크 자신이 모던적 교회의 몰락에 대한 대안으로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택하면서 판넨베르크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교회론은 종말적 사건이 전 세계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를 생각하여야하기에 이 세상과의 분리할 없는 보편사적 교회론으로 정립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모던적 정통교회들이 이 세상에서의 어쩔 수 없는 분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제도권 속에서의 교회로는 세계의 최종적 미래로서의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앞에 겸손히 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성도나 교인들만의 단체로서 이해하는 것은 협소할 수 밖에 없고 교회를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모든 곳으로 범위를 넓혀야 만 보편사로서의 교회론이 정립될 수 있는 것이고 교회를 최종적으로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구원관

판넨베르크는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 신학을 하는 사람이고 또한 기독교신학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타종교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길을 열어놓는 태도를 취한다. 즉 타종교 안에서도 유일한 참 하나님의 신성 및 영원한 힘에 대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면 그러한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과의 연합에 기초한 구원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애매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타종교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고 또한 연합이라는 용어를 구원과 연관 시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방식은 관상기도를 기본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방법이고 또한 타 종교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함으로서 관상기도를 통하여 타 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신학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전통적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구원의 문제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며 죄인의 개념과 죄용서의 개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기에 구원을 용서받은 의인으로서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이러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경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전제로 한 신학이 아니라 역사적 실증주의를 기초로 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한 까닭에 죄인의 개념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4. 판넨베르크 신학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

판넨베르크는 기존 정통주의 신학과는 달리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하고 있기에 많은 부분에서 기존 정통주의 신학과는 다른 양상과 결과들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알아야하는 이유는 현재 일반화 되고 있는 톰 라이트를 비롯한 탈보수신학들이 공통적으로 판넨베르크와 같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신학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판넨베르크에게서나 아니면 톰 라이트와 같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출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을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비슷한 양상으로 문제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수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떠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하는가가 결정이 될 것이다.

판넨베르크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방법으로는 예수의 부활 이전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로서의 신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애써서 외면하는것은 보편사 신학을 하기위해서는 어떨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인식론적 접근방식으로는 예수가 부활 이전에는 인성만을 드러내시고 계시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도라는 신앙관이 나오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생각에는 예수님은 인성을 가진 존재로서 어떻게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델이고 예수의 삶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합일이 가능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표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모델로서 본받아 따르는 삶을 살면 하나님과의 합일에 대한 가능성이 매우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개념에는 그전에 인간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죄인인가를 무시하고 있고 또한 구원의 개념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개념은 무시되고 그 대신 하나님과 합하여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개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죄인으로 인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사람으로서의 예수의 개념에서 찾고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신분으로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는 존재론적 개념을 가지고 예수가 이해된다면 우리와 예수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판넨베르크나 톰 라이트와 같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전념하는 이들은 예수가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애써서 외면하면서 자신들이 전재한 인간 예수에서 출발하여 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지금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 방법론의 이론적 배경이 예수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방법에서 나온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방법의 하나로 제시 된다면 이는 명분을 앞세운 잘못된 논리이기에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기독교인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맥클라렌이 리차드 포스터의 레노바레 운동을 통해서 배운 제자도의 개념이 이렇게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인식론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100% 신성과 100% 인성을 인정하는 칼케돈 기독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되고 판넨베르크도 여기서 자유할 수가 없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위하여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함으로 해서 역사비평학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이러한 역사성에 근거한 예수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을 통하여 회의주의자들과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이전에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마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교회론

판넨베르크의 교회론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더불어 성령의 강림으로 회개하고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전통적인 개념이 아니라 마지막에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에서 출발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선취적으로 예기된(proleptic) 미래의 결과로서의 현재적 교회를 말하고 있다. 즉 그 뿌리를 과거가 아닌 미래에 두고있다.

이러한 교회론은 자연철학과 과학을 기초로 한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속 에서 상호 소통하기 위하여 보편사적으로 정립된 개념인 것이다.

보편사 개념에서 출발한 교회론에서는 그리스도가 통치가 모든 곳에 미치므로 모든 곳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에서의 교회의 개념은 신앙고백을 한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제한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반하여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교회론에서는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신앙고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 이미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다는 톰 라이트의 주장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게서 이러한 교회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그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진리가 변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교회론에 있어서 기독교 전통의 정체성과 순수성은 보존되어야한다고 하지만 교회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인 역사적 연구와 학문적 연구가 선행되어서 끊임없이 교회론이 재정식화(Reformulation)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 교회들이 성경을 근거로 끊임없이 개혁(Reformed)되어야하는 것과는 달리 판넨베르크는 변화의 기준을 성경보다는 역사적 연구와 학문적 연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전통적 교회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혁(reform)과 다른 재정식화(reformulation)는 현대의 탈보수신학들이 성경보다는 역사와 학문연구에서 변화의 근거를 찾고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재정식화 의도는 전통적 기독교 진리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기독교 전통과 근원의 의미와 타당성을 현대적 상황 속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그 현대적 적용을 발견하고자하는데 있다. 그러나 재정식화에 있어서 위험성은 역사적 연구를 근거로 성서의 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까지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 전통이 지니는 오직 성서라는 기본원리까지도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로서의 계시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에서는 모든 현실을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선취적 결과로 해석하고있다. 이는 현실의 모든 것이 종말에 가서야 확실한 평가가 내려진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의 모든 것은 종말의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판단도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근대 모더니즘에서 성경을 명제적으로 보고 성경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입장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에서는 역사가 지속되는 한에서의 계시의 점진성과 지속성의 가능성을 전재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진성과 지속성의 개념에서는 성경은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이야기로서 간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지금 이 시대에서는 이 시대에 맞게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를 통한 삶의 현실 가운데 지속적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러한 계시를 바탕으로 진리를 완성시켜나가야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계시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아서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전통적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의 명제적 진리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더 나아가 타종교에 대하여서도 기독교가 관용적인 태도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말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타종교에도 선한 믿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원주의보다는 포용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가능성의 개념은 에큐메니컬의 원동력으로 사용 될 수 있다. 혹시 판넨베르크가 학생시절 WCC에서 장학금을 받고 스위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에큐메니컬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었나 추측해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판넨베르크가 전개하는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에는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내재하여 계신다는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의 전체역사를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완벽히 참여되는 신적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종말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성령님은 힘의 장 개념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를 완성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역사라는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역사(Historie)가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역사(Geschte)인 것이고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힘의 장(Dynamic Field)에 포함되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 또한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만유내재신론 가운데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만유내재신론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부분은 판넨베르크가 과연 범재신론(만유재신론, 만유내재신론 Panentheism)자인가하는 문제이다. 물론 만유내재신론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범신론(pantheism)과는 달리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미래의 힘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삼위일체 및 하나님나라 안에 만물을 포함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 역사에 활발하게 개입하시고 계시다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 자신은 만유내재신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세계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자체에 포함시킴으로서 삼위일체적 삶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적인 힘의 장(divine force field)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신학을 전개하는 체계의 핵심에는 신적인 힘의 장(divine force field)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판넨베르크가 범재신론자라는 것에 대한 논란이 바로 신적인 힘의 장이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기에 이 신적인 힘의 장 개념을 이해하면 판넨베르크가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역사로서의 계시의 개념과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라는 개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범재신론의 개념에서는 몰트만과 공유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신학에 과학과 역사라는 개념을 적극 도입함으로서 몰트만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진리는 영원하고 절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나이테와 같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종말에 가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진리를 나이테에 비유하면서 변화하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는 진리의 논리를 전개한 것은 판넨베르크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에 멕클라렌도 만유내재신론자인가는 좀 더 연구해 봐야할 문제이다.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전체 조직신학을 진리를 이루어가는 힘의 장(force field) 개념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모든 지적인 개별현상까지도 하나님의 유효한 임재가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장(field)개념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에서 신앙은 검증 가능한 하나님 경험을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며 세상에 대하여 기독교의 선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힘의 장 개념 가운데 핵심이 되는 사항은 예수의 부활사건이며 이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사건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경험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범재신론을 시사하고 있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시간의 역사 안에 계시고 또한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상호 내재 가운데서 인간의 종교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적 실재에 참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범재신론의 전형적인 특징인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 내함성(in-ness)을 보여주는 항목이다.

관상기도의 원리도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의 한 가운데는 (플로티누스가 언급한)일자를 만날 수 있는 참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참 자아는 내면의 빛 혹은 내면의 불꽃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개인의 내면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개념에서 하나님과 세계의 존재론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이 세계와 더불어 불변하기도하면서 동시에 변화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지만 그 본질은 시간 가운데 일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이 제한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시간의 역사와 더불어 자신이 완성되어 가신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주장을 일부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세계가 하나님나라로 완성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이고 세계가 하나님 나라로 완성됨으로 인해서 하나님 자신도 완성되어 가시기에 반드시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본질의 완성이라는 개념과 필수적으로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역사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가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를 완성시키는 존재로서의 삼위일체적 범재신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필수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되어지는 논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유한한 세계를 내포해야한다는 범재신론적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개념에서 시간은 영원과 대립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은 영원의 한부분으로서 나타나는 현시라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유출된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의미는 삼위일체가 하나님나라 안에 충만하게 성취되면서 참된 무한이 현실태로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만 판넨베르크는 플로티누스의 일자(한분이신 절대자)를 삼위일체라고 규정하고 헤겔이 주장하는 초월적인 현실태가 세계 역사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는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미래도 자기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 즉 신플라톤주의의 거대한 존재의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 미래의 삼위일체적 일자로부터 유출되어 다시 그에게 복귀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플로티누스나 위-디오니시우스, 헤겔등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판넨베르크가 헬라 철학적 사고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이해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삼위일체 이해이다. 즉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이 바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완성이라는 만유내재신론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이해되어지는 삼위일체는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개념보다는 이 세계에서 경험되어지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이다. 이러한 경륜적 삼위일체의 현실화가 역사의 과정으로 드러나고 경험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 이해는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역동적인 마당(dynamic field)으로서의 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성령이 인격(person)이나 정신(mind)이 아닌 창조, 생명을 주는 동력(creative and life-giving dynamic)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장이라는 개념은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 차원에서는 자칫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자도 아니며 정신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세 위격의 통일을 힘의 장이라는 개념에서 설명하며 이 힘의 장의 내적 구조로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물론 판넨베르크는 양태론자가 아니고 삼위의 위격들은 그 힘의 장의 본질적 내적구조 자체로 이해되고 있고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존재론적 삼위일체보다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이해되어야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륜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의 활동 가운데 완성되어가는 이 세계의 창조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삼위일체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필연적이며 삼위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필연적 존재로 이해된다.

역사 가운데서 세 위격들 모두의 활동은 점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구체화시킨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은 역사가 종말에 치달으면서 점차적으로 현실적이 되어간다. 즉 내재적 하나님의 자기 현실화의 과정에서 절대적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이라는 동적인 특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하나님의 되어 가심이라는 역동성은 진리도 완성되어진다는 역동적인 개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모던적 기독교가 변치 않는 명제적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지는 것이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진리는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완성되어진다는 개념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물론 과정신학자들이 말하는 완성되어지시는 하나님과는 차이가 있지만 어느 정도는 같은 맥락에서 설명되어지고 있고 과정신학자들과의 차이는 이러한 존재의 완성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판넨베프크는 자의적 만유내재신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만유내재신론의 개념에서는 이 세계의 완성은 곧 하나님 자신의 완성이기에 모든 창조세계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영원 가운데 내재하신다는 개념이 성립된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데 종교에서 적합한 이론이 될 것이고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신플라톤주의에서 관상기도가 유래한 것을 보면 관상기도의 배경에 만유내재신론의 사상이 깔려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동일하다면 이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 되고 이러한 사실과 연계되어 하나님의 신성은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 도래가 아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가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판넨베르크는 화이트헤드와 같은 과정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이 세계의 실존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이 스스로 이 세계를 창조하시겠다고 선택을 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의 완성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필연적인 과제가 되었고 자의적 만유내재신론으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를 경륜적으로 이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판넨베르크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자의적) 범재신론자 혹은 만유재신론자, 만유내재신론자(Panentheism)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범신론, 만유신론(Pantheism)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5. 톰 라이트에게서 볼 수 있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특성들

톰 라이트는 자신이 신학 하는 논리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관점으로부터 전개해 나가고 있지만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론이 거의 판넨베르크의 신학하기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판넨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부터 출발된 신학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렌즈를 제거하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검증된 역사적 자료로부터 출발하여 판넨베르크와 같이 보편사적 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와 차이가 있다면 판넨베르크는 철학과 자연과학을 통하여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성경을 재해석하면서 성경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있고 전통적으로 인정되었던 명제적 진리마저도 수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정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는 톰 라이트의 신학을 살펴보면서 톰 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신학의 문제점이 판넨베르크와 동일한 문제인 것이 드러나게 되면 톰 라이트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톰 라이트의 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명제적 기준이 될 수 없는 교의학

판넨베르크는 교의학이 모든 시대의 불변의 명제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각 시대에 맞는 교의학의 재정립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바로 톰 라이트다.

톰 라이트는 심지어 성경의 저자들까지도 사실적 예수가 아니라 주후 1세기의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형태로 자신의 렌즈를 통하여 예수를 재해석하였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하는 많은 작업 가운데 하나는 그 당시의 역사적 자료와 전승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그대로의 예수를 재발견함으로서 성경에 의하여 각색된 예수에 대한 개념을 이 시대에 맞게 재정립하여야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가 이 시대에 어떻게 다시 정립되어야하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라이트의 개념은 성경의 저자의 생각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맞지 않는 그 시대의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성경 저자를 통하지 않고 성경 자체가 재해석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한 예로 바울을 통하여 각색된 예수를 보지 않고 역사적 자료에 의하여 개관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적 예수를 찾아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을 거쳐야지만 타 종교와의 대화는 물론 인간의 현실의 문제에 대한 실제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판넨베르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톰 라이트는 실행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재 기초화된 신학으로 정립된 기독교는 우리의 일상에 실질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에 오랫동안 권위적으로 일상에서 분리된 기독교를 강요한 전통적 기독교에 대하여 철저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머징 교회는 이러한 톰 라이트의 신학을 응용한 교회의 형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접근방식(역사와 신앙의 통합)

판넨베르크가 보편사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출발점으로 삼았던 개념인 역사로서의 계시는 유대 역사에 정통한 폰 라드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는 폰 라드가 정리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보편사적 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는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에 있어서 판넨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승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한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하는 신학은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교류가 불가능하고 또한 이성에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앙을 분리하여 신학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없으며 현재의 신앙의 비극은 지난 300년 동안 서방세계가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킨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 기독교가 역사와 신앙을 연합시키는 것은 타협이라고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분리의 시작은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판넨베르크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와 신앙의 통합된 세계가 인간의 삶에 더욱 진실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고대에는 이러한 통합된 세계가 형성되었음을 기억하면서 고대-미래 개념의 신학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머징 처치에서 볼 수 있는 고대-미래 예배의 개념이 이와 같이 역사와 신앙의 연합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정통 기독교가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킨 계몽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결과 현세적 일상의 역사와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기에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머징교회가 전통적 교회와 일상의 영역에 대한 개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와 신앙의 분리를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 기독교가 과연 일상을 신앙의 영역에서 분리시켰는지는 지극히 톰 라이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고 전통적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톰 라이트가 특히 이신칭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것은 이신칭의의 교리가 기독교를 개인주의적이고 내세 지향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머징 교회는 계몽주의에 기초한 모더니즘적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로 역사와 신앙을 연합시킨 탈보수주의의 형태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의 개념을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

톰 라이트에게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 신학적 특징은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연구는 판넨베르크가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에 두었던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던 사실에서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비평학자들과의 대화를 할 수 있어야지만 보편사로서의 신학을 정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톰 라이트도 주관적으로 해석된 예수에 관한 자료로는 실제의 예수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가능하지 못하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으로 성경에서 묘사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실제의 모습으로서의 예수에 관한 기술로만이 역사와 신앙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톰 라이트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킨 정통 기독교의 사고방식을 폭군적인 사고방식으로 나타난 분열된 세계의 모습이라고 규정하고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과학적인 기초를 근거로 하여 그동안 잘못된 렌즈(?)를 통하여 형성된 계몽주의를 기초로 한 보수신학에 대하여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는 작업을 하며 믿음을 근거로 하여 묘사된 예수가 아닌 실증주의를 기초로 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신학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관점에서 예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톰 라이트와 옥스포드 대학의 동창이며 오랫동안 우정을 과시했던 마커스 보그가 성경을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재편집 하면서 성경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방법론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없다.

물론 톰 라이트는 마커스 보그 만큼 성경을 부정적인 자료로 보고 있지 않기에 일반적으로 톰 라이트를 복음주의자라고 칭하고 있지만 커다란 맥락에서 보면 마커스 보그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와 여러 가지 의견의 차이를 가지고서 “예수의 의미”라는 책을 공동 저술하였지만 이 두 사람은 조그마한 차이 못지않게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커다란 공통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 유사성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톰 라이트의 신학이 유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두 사람의 신학적 배경이 되는 환경과 이를 해결하고자하는 동기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2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관심사가 신앙과 교회로부터 멀어지면서 유럽사회에서, 특히 독일에서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판넨베르크는 신학이 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학문적 체계를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으로 신학적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전통적인 모더니즘적 기독교가 쇠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사람들에게 학문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정립하고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새 관점으로 신학적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역사라는 개념을 신학의 중심에 두고서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이성적으로 호소력을 가진 세상의 지식을 기반으로 신학을 정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정통 기독교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바탕에서 형성된 명제적 교리를 중심으로 신학을 형성하여왔기에 정통적 기독교와 이 두 사람은 서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구조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고대 미래 예배

이머징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고대 미래 예배의 개념이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에서는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교의학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교의학의 변화개념이 결국 톰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이머징신학의 고대 미래 영성에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모더니즘의 명제적 교리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으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에 근거를 둔 이머징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미래 예배의 개념이 모더니즘의 명제적 교리를 배제하는 대신에 오히려 신플라톤주의에 뿌리를 둔 관상적 특징을 나타내는 영성이 근대의 명제적 교리를 대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유출 개념에서의 역사는 신적 본질의 현현이기에 신앙과 역사가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과 역사를 하나로 연합 시키고자하는 시도는 고대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신앙과 역사를 분리시킨 계몽주의 이후의 신앙이 모더니즘이라는 불행을 가져왔다고 생각되었기에 다시 고대의 신앙을 따라서 역사와 신앙을 하나로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에는 자연히 헬라적인 철학을 도입할 수밖에 없기에 헬라사상에 기초한 관상적 영성에 자연스럽게 접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로 부터의 기독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판넨베르크는 믿음을 기초로 한 명제적 교리를 근거로 형성되었던 신학은 더 이상 보편성을 가질 수도 없고 또한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보편사적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채택한 방법론으로 역사비평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역사비평의 방법론은 성경을 기록된 그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하에서 재분석하면서 그 당시의 성경 외적인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성경을 다시 자리매김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명제적 진리들을 지금 시대의 문화적 상황에 맞게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비평적 방법은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되었고 성경의 근본을 뒤흔들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부족한 자료와 편협된 해석으로 많은 부분에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톰 라이트는 대표적인 역사비평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와 함께 예수의 의미라는 책을 공동저술하면서 그들과 같이 성경을 믿음의 관점이 아닌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이러한 관점으로 형성된 나름대로의 신학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방법론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위로부터의 방법이 아닌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인 보편사적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판넨베르크가 정립한 예수의 인간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의 신성이 발견되어지기까지의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 속에서 동일한 신학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위로부터의 신학은 권위주의적인 접근방법이며 초대 기독교 전승과는 다른 것이기에 이를 기초로하는 신앙고백이 신학함의 출발이 될 수 없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도 신학 함에 있어서 권위주의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초대 교회의 전승과는 다르다는 전제하에 신앙고백이라는 전제를 철저히 제거해버린다.

톰라이트는 신앙고백이 전제가 되는 God 라는 표현을 배제하고 신에 대한 용어를 전부 god로 바꾸어버린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신앙고백이 전제가 되어야하기에 그리스도라는 용어 대신에 이성적으로 용납이 되는 예수라는 용어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또한 위로부터의 존재론적 기독론이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성육신의 신학이기에 인간 나사렛 예수의 삶을 통하여 제시되는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연합의 의미를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탈보수 신학이 대체적으로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인간 나사렛 예수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하는 것은 인간 나사렛 예수의 삶이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라는 결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탈보수신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죄를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신학이 아니라 죄에 대한 개념은 없고 다만 인간 예수의 삶을 본받아서 예수님이 사신모습과 같이 살아갈 때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능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신학을 전개하기에 전통적 기독교의 구원관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편사적인 접근 방법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는 또 다른 것은 바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객관적인 예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이미 신앙고백이 전제가 되어있기에 신약의 저자들을 통해서는 사실적 예수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믿음을 전제로 보는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는 행위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의 생애 후에 한참 지나서 자신들의 문화적 환경의 필요에 따라서 성경을 기록하고 있고 성경은 주후 1세기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성경의 기록을 지금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라이트는 주후 1세기의 것으로 인정되는 남아있는 기록들을 바탕으로 예수에 관한 사실을 재 발견하여야하고 이렇게 재발견된 사실을 근거로 지금 이 시대에 맞게 성경이 재해석되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톰 라이트에게 있어서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불행한 계몽주의의 산물이기에 2000년 가까이 잘못 만들어져온 교리들을 전면 재검토하고서 수정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논리에 입각한 새로운 성경주석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판넨베르크가 보편사적 신학함의 출발로 삼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탈보수 신학의 주축을 이루어가는 톰 라이트의 신학이 판넨베르크와 무관하다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판넨베르크가 지적받고 있는 신학적인 많은 면들이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론

판넨베르크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선취적 형태로서의 교회를 진술하고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토대 위에서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모더니즘의 명제적 교리를 기초로 하는 전통적 교회형태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보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으로 교회론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물론 개인보다는 공동체적이고 내세보다는 현세적 교회론을 정립하고 있는 면에서는 판넨베르크와 공통점을 보이고 있지만 톰 라이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이라는 신학의 세계가 루터의 칭의교리를 부정하고 있기에 칭의 면에서 본다면 판넨베르크가 이신칭의를 소외시켰다면 톰 라이트는 이신칭의를 전면 부정하면서 새관점 학파와 같이 전혀 다른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이신칭의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기독교 교리의 제정식화를 통하여 기독교 진리를 현대적 상황에 맞추어야한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은 톰 라이트의 기독교 교리의 재정식화에 길을 열어준 것이다. 톰 라이트는 성서의 문서들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메시지까지 전면적으로 상대화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대문화에 맞추어 성경의 교리를 재정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정식화를 통하여 톰 라이트의 교회론이 전통적 교회론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지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데 반하여 톰라이트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교회를 개혁(Reforming)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정식화(Reformulation)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정식화 작업은 성경을 통한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연구를 통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으로 심지어 토대가 되어야할 성경까지도 재정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성경과 교회를 재정립시킬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넘어가야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자료들을 기록했던 사람들의 객관성과 그 자료들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객관성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료들을 가지고 성경의 저자들이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재정식화된 교회의 구성원은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고백을 통한 거듭난 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개념에서 좀 더 확장되어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교회 즉 하나님나라에 속할 수 있는 것들의 집합이기에 정통 기독교에서의 교회론 과는 많은 개념의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판넨베르크가 보편사적 개념에서 정식화한 교회론은 기존의 제도권의 교회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나라로까지 개념을 확장 시키면서 교회론을 재정식화(Reformulation)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재정식화된 교회론에서는 신앙고백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일단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하기에 구원의 개념도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재로 현재 톰 라이트의 신학을 기반으로 세워지고 있는 이머징 교회(emergent village)에서는 이러한 신학을 기반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기에 기존 전통교회의 구원관과는 다른 구원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의미

톰 라이트는 지금 이렇게 교회가 하나같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루터의 이신칭의 개념에 있다고 말한다. 이신칭의로 말미암아 신앙이 개인의 문제와 내세의 문제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면서 공동체적이면서 현세적인 사회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참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할 방법대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최후 심판은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심판은 천국과 지옥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심판은 구원의 문제인 것이다.

톰 라이트가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이 아니라 판넨베르크와 같은 인식론적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연구를 하면서 예수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신성을 일단 배제하고 본다. 예수의 신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학문과 이성을 근거로 하는 보편사의 개념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머징 신학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제자도와 관상기도의 개념이 예수의 인성에서 출발하여 신성에 이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면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밑바닥에 깔려있다면 톰 라이트의 신학을 좀 더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제공하기 위하여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셨다면 전통적 기독교의 기독론은 전부 잘못된 것이 되는 것이다.

6. 결론적 평가

보편사신학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이다. 웃사가 궤를 붙들었을 때 죽임을 당했다. 물론 웃사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궤는 이미 하나님의 방법대로 옮겨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전통적 기독교의 문제는 마치 궤가 우마차에 실려 가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고 궤가 떨어지려고 할 때 손으로 직접 잡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보편사 신학은 마치 웃사가 궤를 잡는 모습을 연상 시킨다. 이 세상에서의 교회는 어짜피 문제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교리마저도 보편사적 신학을 통해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웃사의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도 알아야한다. 그러나 보편사 신학에서는 죄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고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참 두려운 일이다.

만유내재신론

판넨베르크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자신의 삼위일체의 개념에 도입시킴으로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삼위일체적 하나님에 포함시켜서 하나님의 존재의 완성으로서 종말론을 전개하고 있다.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에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내포하면서 완성되어지기에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내면의 세계의 하나님의 불꽃이라는 개념이나 하나님의 빛이라는 개념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뿌리의 가장 꼭대기에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래서 관상기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가 되는 하나님과의 합일이고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플로티누스가 말하고 있는 절대자로서의 일자인 것이다.

관상기도가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도입이 된 시기는 플로티누스의 일자 개념을 도입하여 기독교적인 일자 개념으로 다시 정립한 위디오니시우스 부터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종교개혁때 까지만 해도 바울의 제자인 디오니시우스라고 잘못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위디오니시우스전집에서 한결같이 언급하고 있는 관상기도를 성경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디오니시우스가 아닌 가짜 디오니시우스를 뒤늦게 알게된 것으로 인하여 위디오니시우스가 정립한 관상기도가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관상기도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루터도 위 디오니시우스가 진짜 바울의 제자인 디오니시우스인줄 알고 관상기도에 긍정적이었다가 종교개혁의 과정 속에서 바울의 제자인 디오니시우스가 아닌 것이 밝혀져서 그 다음 부터는 위(Pseudo-가짜)디오니시우스라고 칭하고 있지만 이미 그가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근거로 한 일자 개념에서의 관상기도를 기독교에 충분히 도입시킨 후였기에 너무 늦게 발견되어졌던 것이다.

종교개혁 후에는 개신교에서 관상기도를 제거하여 버렸고 위 디오니시우스의 저서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관상기도를 도입한 퀘이커교도의 전통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개신교에 접목되어 개신교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며 판넨베르크도 플로티누스의 일자 개념을 자신의 삼위일체 개념에 접목시킴으로서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배운 스탠리 그렌츠를 통해서도 이머징교회에 관상기도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을 중심으로 한 이머징 교회는 멕클라렌의 멘토 이면서 친구였던 스텐리 그렌츠를 통해서 관상기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문이 열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형성되었으며 더불어 맥클라렌 자신이 가장 존경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리차드 포스터의 레노바레 운동을 통해서도 이머징 처치에 관상기도가 도입된 된 것이다.

비록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개념으로 역사와 철학 속에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신학을 정립하고자 만유내재신론에 의한 신학을 정립하였지만 그의 인간적인 노력은 관상기도와 같은 많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와 신앙의 분리

판넨베르크와 톰 라이트는 역사와 신앙의 분리가 정통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정통 기독교의 여러 가지 문제는 역사와 신앙의 분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 그 외적인 많은 문제들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기초가 잘못되어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기초에서 사람들의 여러 가지 부족함으로 인하여 잘못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초를 다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좀 더 정확한 제대로 된 진단을 하여야한다. 예를 들면 급격한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를 중심으로 한 경제구조의 변화, 농수산업 등의 1차 산업보다는 공업과 서비스업 중심의 2,3차 산업으로 구조적 변화에 따른 불안정하게 바뀌는 경제구조,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관심의 변화, 시간과 공간이 갈수록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문화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다. 자크 엘룰이 지적하였듯이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제하여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고자 사람들이 만든 문화가 도시문화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도시문화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세계가 점점 도시화되면서 생기는 교회의 공동화를 교리를 바꾼다거나 성경을 재해석하여 이제까지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구나하고 진단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방법이다.

지금 성경의 기초를 바꾸고자하는 시도는 마치 근대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 자유주의의 유형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과학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모순이 많은지가 속속 드러나고 있고 ( 김명현 교수의 성경과학세미나 참조) 오히려 칼 바르트가 원역사 (사실이 아니 신화와 비슷한 사화(적 성격을 띤 역사 Urgeschte)라고 주장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창세기가 신비로울 정도로 과학적이기에 성경의 한 글자나 한 점만 바꾸어도 완벽한 신비는 무너진다는 사실을 김명현 교수의 성경과학세미나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톰 라이트는 믿음을 기초로 한다는 사실이 매우 주관적이어서 신뢰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믿음을 기초로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과학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이는 바로 과학과 이성을 기초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성령의 역사를 기초로 하는 고차원의 신앙이기에 판넨베르크나 톰 라이트와 같이 이성을 기초로 하는 저차원의 인간 본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성적인 신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겸손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영지주의문서

톰 라이트가 기준으로 제시하는 주후 1세기 전후의 역사적 자료에는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많은 영지주의 문서가 있었고 이러한 영지주의 문서들은 이레니우스의 활동과 더불어 많은 문서들이 소각되거나 땅 속에 묻히게 되었는데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가 바로 그 당시 땅속에 묻혀있던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한동안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다빈치코드도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를 기초로 하여 제작했던 것이다. 톰 라이트가 참고로 하고 있는 역사자료에는 영지주의 문서가 많이 포함되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가 영지주의 문서인가는 성경을 기준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는데 톰 라이트는 오히려 그 당시의 문서들을 기준으로 성경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영지주의 문서가 톰 라이트의 신학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많이 참조하고 있는 쿰란 문서가 특정 에세네파의 문서일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면서 에세네파의 특성을 무시한 체 1세기 문서를 일반화하는 것은 분명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재미있는 예로 성서 유니온에서 출간된 톰 라이트의 저서 “The challenge of Jesus"를 ”Jesus 코드“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것을 보아서도 톰 라이트의 저서가 얼마나 도발적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에 있어서 불분명한 자료들과 더불어 자신의 해석이 절대적이라는 확신으로 성경을 재단하고 있는 톰 라이트의 작업을 신뢰하기가 쉽지가 않다.

구원의 개념

정통 기독교에서 흔한 논쟁 중에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한 것인가?”라는 이슈가 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의 신학의 개념으로는 이러한 논쟁이 주제가 될 수 없다.

판넨베르크가 이해하는 성령은 힘의 장(dynamic field)의 개념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점진적으로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완성이라는 개념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논쟁은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완성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개념에서 결론이 미리 날 수는 없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보편사라는 개념으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에 개인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거나 아니면 언급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판넨베르크의 신학논리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개념이 빠져있다. 물론 톰 라이트도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다.

정통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구속사와 연관 시켜서 구속경륜이라는 개념으로 인류의 죄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다루는 것에 비하여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보편사적 신학을 공동체적인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전개하고 있기에 개인의 죄의 고백이나 구원의 문제와 같은 정작 중요한 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관점으로 신학을 하고 있는 톰 라이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고 또 관상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비주의자들도 동일하게 죄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죄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만의 문제로 취급할 때 신학은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사회학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작 기독교 윤리문제로 인하여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심각한 고민 끝에 신학을 하고 있는 판넨베르크나 톰 라이트, 리차드 포스터등 탈보수주의 신학자들이 개인의 죄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를 실종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하여는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이성을 기초로 한 신학의 한계

슐라이어마허가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를 사회에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구속사와 보편사를 결합시켜서 성경의 많은 부분을 재해석하거나 제거해버리는 우를 범하였듯이 판넨베르크도 이성에 기초하여 구속사와 보편사를 결합시킴으로서 또 다른 자유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구속사와 보편사를 결합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자연과 역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자의적)만유내재신론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관상기도에 대한 접근을 한층 수월하게 했으며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실증주의적 접근법을 택함으로서 성경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새로운 기초를 놓음으로서 톰 라이트와 같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접근법으로 “새관점학회”라는 새로운 기초의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마크 드리스콜이 맥클라렌과 더그 패짓, 랍 벨을 중심으로 하고있는 emergent village의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존재론적 Vs 경륜적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탈보수신학의 접근방법에 의한 대표적인 차이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에서든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에서든지 아니면 우리의 자아의 정체성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든지 존재론적 접근을 통한 이해와 경륜적 접근을 통한 이해의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탈보수신학이 예수님을 경륜적으로 이해함으로 인하여 성경을 통한 교리적인 적용과 해석이 전부 경륜적인 성격을 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고자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존재는 무엇을 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정체성이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론적 정체성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존재론적 정체성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의 신학적 진술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무엇을 하였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셨는가를 행위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믿음이라는 선입관을 제거하는 작업을 철저히 하고 있기에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셨다는 존재론적 성육신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행적을 토대로 경륜적 기독론을 정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판넨베르크도 마찬가지이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행위의 실패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진짜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유대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존재론적인 방법이 아니라 행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것이고 율법을 이러한 행위적 접근방법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녀는 행위에 관계없이 존재론적으로 자녀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보다는 율법을 통하여 종의 개념으로 다가섰던 것이다.

톰 라이트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치 행위에 의하여 자녀가 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과 같이 이상한 논법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심판을 받는 것은 자녀로서 선택되어 지느냐의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인데 톰 라이트는 구원의 문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독론을 존재론으로 접근 한 것이 아니라 경륜적인 행위에 근거하여 접근하고 있기에 구원의 문제도 존재론적이 아닌 경륜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작이 잘못되었으니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이해되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네베르크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질 때 철학과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 보편사 신학을 한 것이다. 심지어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에 있어서도 논리적 설명을 위해 창조적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인본주의적인 해석이다.

말씀이 이해되어지지 않을 때 억지로 풀지 말아야하지만 더 나아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설명을 하려고 인위적인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면서까지 억지로 교리를 만들어갈 때 너무 많은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까지 하면서 신학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논리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판넨베르그의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이나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으로 생각해본다면 종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세계는 점 점 더 나아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톰 라이트는 현실의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라고 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개념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은 그러한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고 톰 라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훈련으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개념이 사람이 이성적으로 이해를 하여 깨달을 수 있다는 개념과 일치한다면 보혜사 성령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성도라는 의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고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란 말인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던 3년간의 시간동안 베드로는 이성적으로 예수님을 이해하였고 누구 못지않게 철저한 제자훈련을 받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음으로 인해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하고 자기 자리에 돌아간 베드로를 친히 찾아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시고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다. 성령으로 거듭난 베드로가 사역했던 과정이 인간의 이성적 논리와 훈련으로 가능했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톰 라이트의 신학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개념은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 하는 일은 자기의 일이지 결코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일은 성령에 의하여 부르심 받고 쓰임 받는 가운데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지 결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은 톰 라이트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삶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지 결코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져가는 것은 아니다.

판넨베르크는 윤리 문제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기독교 윤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기독교윤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할 때 실현 가능한 것이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를 때 실행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예수를 본받아서 실현 가능한 윤리는 기독교라는 이름 대신에 타종교의 이름으로 교체만 해 주어도 얼마든지 비슷한 윤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7. 맺는말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가 생각이 난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는 본체인 하나님나라에서 파생된 이차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 나라의 본체의 한 면을 보여주는 세계이기에 이 세계를 근거로 하나님 나라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의 창조주이시기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기준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만 우리의 세계를 기준으로 하나님나라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성경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난 판넨베르크는 성경을 간접적인 계시로 격하시켜버리면서 주관적인 역사를 계시의 차원으로 올려놓는다. 톰 라이트는 더 나아가 주관적인 역사 속에서 객관적인 역사를 찾으면서 그 역사를 가지고 성경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무모한 불장난인가?

하나님의 유일한 직접적인 계시인 성경을 기준으로 이 세상을 봐야하는데 오히려 거꾸로 이 세상을 기준으로 성경을 재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명확한 것은 종말에 하나님나라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명제적 결론들을 불확실성으로 희미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서 유일한 기준 마져도 해체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적 실증주의에 길을 열어 줌으로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정당성을 부여해 줌으로서 성경에 대한 신뢰를 더욱 잃게 만들었다. 물론 판넨베르크가 의도한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 가운데는 정통 기독교에서 미쳐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면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철학과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보편사 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시도할 수 없었던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요즘 탈보수신학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밀라드 에릭슨은 자신의 복음주의 조직신학 제3권을 판넨베르크에게 헌정한다고 할 정도로 판넨베르크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밀라드 에릭슨은 판넨베르크의 제자인 스탠리 그렌츠에 대하여 심각하게 비난을 서슴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판넨베르크 자신의 신학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여 탈보수신학의 기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지금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이머징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판넨베르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성경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던 판넨베르크에게 분명한 잘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탈보수신학자들은 더 이상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고 판넨베르크가 이러한 탈보수 신학의 길을 열어주고 토대를 마련하여 주었다는 사실이 성경을 기준으로하지 않는 신학함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 이러한 불협화음은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불협화음은 바로 성경을 신학함의 온전한 근거로 삼느냐 아니면 성경을 불완전한 것으로 삼느냐의 대립일 것이다.

이번 자료정리를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반드시 성경만을 기초로 하여 성경을 기준으로 성경에서 출발하여야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며 우리의 신앙의 위치를 다시 점검해보고자 한다.

참고도서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349-462.

마커스 보그.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존 쿠퍼, 김재영역,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2006, 425-460

박찬호, 판넨베르크 신학 비판, 웨스트민스터출판부,2003,

최성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신학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한국조직신학회, “교회론” 대한기독교서회, 2010, 329-355,

Stenley J. Grenz "Reason for hope" The systematic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 second edition

판넨베르크, 오성현 역, “기독교 윤리의 기초”, 한들출판사, 2008,

__________,정용섭 역, “사도신경 해설” 한들출판사, 2009,

__________,유진열 역, “인간이란 무엇인가?” 쿰란출판사, 2010,

___________,김영선 정용섭 조현철 공역,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권, 은성,2003,

톰 라이트, 이진섭 박대영역, Jesus 코드,성서유니온선교회,2006,

_________, 박문재 역,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3,

브라이언 맥라렌, 이순영 역, 저 건너편의 교회, 낮은울타리,2002,

브라이언 맥클라렌, 정성묵 역, 기독교를 생각한다, 청림출판사, 2011,

교회와 문화 제 25호, 한국성경신학회, 도서출판 나눔과 섬김,2010,

교회와 문화 제 27호, 한국성경신학회, 도서출판 나눔과 섬김,2011,

김세윤, 김세윤 교수의 신학세계, 이레서원, 2009, 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