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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 - 김원호

이머징 처치의 신학적 뿌리- 김원호

2014-10-04 01:24:50


이머징 처치의 신학적 뿌리

 

김원호(dent4834@hanmail.net)

 

 

 

1. 이머징 처치란?

 

이머징 처치는 스타일, 신학, 조직, 목회실천등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스펙트럼이 매우 넓기에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머징 처치를 짧게 정의하고자 이머징 교회의 저자 에디 깁스의 설명을 인용한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에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그들의 문화를 이용하여 다음 세대, 미래 세대에 접근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자하는 교회운동 혹은 예수님의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자주 사용하게 될 emerging 과 emergent를 구분하지면 emerging은 주로 새로운 문화 속에서 교회와 선교적 관점에서 기존의 전통적으로 행하여졌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데 중점을 둔다면 emergent는 우선적으로 신학적인 변화에 중점을 두고서 관심을 가진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머징 처치가 전부 이머전트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에 이번 주제에서는 주로 이머징 처치의 중심부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머전트 빌리지(Emergent Village)를 중심으로 하여 이머징 신학를 논하고자하지만 신학에 중점을 둔다는 면에서는 차라리 “이머전트 빌리지의 신학적 뿌리”라고 하는 것이 혼돈이 없을 수 있겠지만 통상적으로 이머전트 보다는 이머징 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수 있기에 이머징 처치의 신학적 뿌리라는 제목으로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현상을 논하고자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머징 처치 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지만 이 주제에서 다루고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 이머전트 신학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오늘의 주제는 주로 서구사회의 이머전트 신학에 한정하여 논하고자한다.

 

2. 왜 이머징 신학을 논하는가?

 

ⅰ) 현재 이머징 처치에 대한 연구가 사회 각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ⅱ) 포스트모더니즘(탈기독교, 탈 전통적 문화)에 대한 문화적 적응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ⅲ) 이머징 신학이 모더니즘의 신학과는 구별되는 탈보수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기존 전통적 교회와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ⅳ) 이머징 처치에서 채택하고 있는 관상기도를 비롯한 신비주의적 방법이 기존 전통적 교회에서도 일반화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3. 모더니즘 교회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

 

ⅰ) 1950년대부터 시작된 후기 기독교(post-christendom)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탈보수주의의 형태로 교회 안에서 다원주의와 급진적 상대주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ⅱ) 계몽주의와 종교개혁을 기반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진리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어떤 주장도 무시되며 기독교를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Ⅲ) 모더니즘 시대에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전통적 교회는 하나의 제도로서의 특권을 상실하면서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ⅳ) 급격히 변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들에 대하여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4. 변화하고 있는 특징적 사회 현상들

 

ⅰ) 제 2차 세계 대전 후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ⅱ) 서구 중심이었던 사회가 국제화를 넘어서 지구촌화되어가고 있다.

ⅲ)프린트 문화가 전자문화로 바뀌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고 있다.

ⅳ) 기업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국가기업에서 다국적 기업들과 같은 국제 경제로 국가 간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

ⅴ) 과학과 종교의 수렴현상으로 인하여 종교도 과학과 같이 보편성과 합리성이 강조되고 있다.

ⅵ) 종교 활동의 주체가 베이비 붐 세대(1946년-1964년생)에서 X 세대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다.

ⅶ) 1960년대 유럽 신학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바르트, 불트만 중심의 초월적 실존주의 신학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과 몰트만의 종말론적 신학을 중심으로 일상에서의 합리성이 강조되는 신학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ⅷ) 제1,2차 세계대전 후 인류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가운데 상호 화해와 평화 공존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면서 종교개혁 이후에 분열의 한 가운데 있던 교리적인 문제와 특히 그 가운데 더욱 이슈가 되고 있는 대속과 이신 칭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전통적 교리의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한 에큐메니컬을 추진하는 과정 중에 전통적 기독교의 칭의를 중심으로 한 명제적 교리를 소외 시키는 방향으로 신학의 중심이 이동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ⅸ) 이러한 외적 변화 가운데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전통적 교회들의 급격한 쇠퇴를 보고있다.

 

5. 포스트모던 세대들의 종교적 특징들

 

ⅰ) 모더니즘 교회의 특징인 전통과 권위와 권력을 부정하는 가운데 제도주의의 환상을 버렸다.

ⅱ)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는 내면 중심의 이기주의적 영성을 추구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ⅲ) 신비적, 시각적, 예식적,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감각적인 고대교회에 대한 환상을 가지며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의 전통(향, 초, 기도예식, 신비롭고 경이로운 분위기)으로 복귀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ⅳ) 감각적 영성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타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지 않다.

ⅴ) 더 이상 부모의 종교를 따르려하지 않는다.

 

6. 이머징처치의 내적 특징들

 

ⅰ) 건물 중심의 교회보다는 예수 따름의 윤리를 기초로 하는 하나님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ⅱ) 믿음보다는 모델로서의 예수의 삶을 따라감으로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실천한다.

ⅲ) 교회로 오라는 개념보다는 세속공간을 변화시키기 위해 침투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선교적 교회를 지향한다.

ⅳ) 하나님나라 개념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보다는 생애(버림받은 자를 환영, 이방인들을 초대, 정치적 권위에 도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ⅵ) 서신서보다는 복음서에 비중을 둔다. (요한복음 제외, 바울보다는 예수)

ⅶ) 모더니티의 산물인 성과 속의 분리를 극복하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현실 공간에서 하나님나라를 추구한다.

ⅷ) 교회의 본질을 구원의 문제보다는 행함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

ⅸ)성경에서의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관상 등의 신적 존재를 경험함으로서 진리를 알아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신비주의적 경향을 나타낸다.)

ⅹ) 신학적으로는 톰 라이트에 아주 많이 의존해 있으며 그 다음은 실천신학으로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와 선교학자인 레슬리 뉴비긴과 데이비드 보쉬 등을 따르면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세상에서의 영성을 추구한다.

ⅺ) 에큐메니컬이라는 20세기의 과제를 이루는데 있어서 이전에 분열의 핵심에 있던 명제적 교리들을 제거함으로서 개신교 내에서의 교단 간의 갈등을 해결해 나갈 뿐만이 아니라 카톨릭적 관상기도의 도입을 통해서 카톨릭과의 대화는 물론 타 종교에 대하여도 포용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서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고자하는 종교 간의 상호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7. 이머징 처치의 특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ⅰ) 르네상스와 더불어 종교개혁이 있었듯이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환에 따른 종교적 변혁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이머징 처치는 이러한 개혁에서 주체적 위치를 확보하려고 스스로 자신들을 종교개혁자들과 비교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이머징 처치의 신학은 종교개혁시기에 카톨릭에 대항했던 개혁주의처럼 전통적 교회에 대항하고자하는 커다란 도전이기에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현상들이다.

ⅱ) 프로그램이나 스타일의 변화를 통한 교회 성장운동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본질적인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갱신운동이다. (전통적 교리를 바탕으로 교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성장이 아니라 교리의 변화를 통하여 교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ⅲ) 많은 이머징 처치들이 상징, 그림, 양초, 향, 춤 등을 사용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ⅳ)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경을 믿음을 바탕으로 한 명제적 교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유대 문화 속에서 나온 하나님나라 이야기로 보고 있다.(명제적 진리가 나올 수 없다)

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대속교리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따름의 삶을 강조함으로서 펠라기우스적인 행위구원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ⅵ) 고대-미래 운동을 통하여 고대 교부들의 모습을 본받는 가운데 금욕주의와 수도원운동을 재연하고 있다.

ⅶ) 행위중심의 교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인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전통적 교회와의 대립이 마치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문제로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게 했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을 재연하고 있다.

 

8. 이머전트 빌리지 사람들

 

1) 어윈 맥마너스

 

최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교계 지도자 중에 12위로 올라서면서 로버트슐러 목사나 릭워렌 목사보다 앞섰던 LA에 있는 모자이크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코뿔소 교회가 온다”의 저자이며 나이트클럽을 빌려서 침투 적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설교 내용 중에는 전통적 교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많이 있다. “나의 목표는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을 위한 재촉매자가 되는 것이다”그는 "예수 그리스도 운동의 가장 큰 원수는 기독교(즉, 그리스도인들)"라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는 싫고 예수는 좋다고 하는 이머전트들이 흔하게 하는 말들과 일맥상통하는 말들이다.

 

2) 토니존스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의 대표적인 차세대 청년사역자로서 렉티오 디비나를 적극 보급하고 있다.

 

3) 브라이언 맥클라렌

 

이머전트 빌리지의 대표로서 이머징교회 운동의 가장 핵심에 있는 인물이다.

톰 라이트, 리차드 포스터, 스탠리 그랜츠의 영향을 받아 이들의 신학을 토대로 이머징 신학을 다시 정립하였다.

 

4) 더그패짓

 

이머징 처치 운동에서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마크 드리스콜의 정 반대편에 있는 자유주의자로서 모더니즘에서 형성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속죄론은 그리스 로마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 하며 기독교 교리는 역사적 문화의 산물이기에 교리는 시대적 문화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본다.

 

5) 랍벨

 

맥클라렌과 함께 이머전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최근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였다고 믿으며 동정녀 탄생, 성육신등을 부정하며 대속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속죄를 담당 하실 수 없는데 랍 벨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 랍 벨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고 있기에 누가 옳고 그르냐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누가 옳게 사느냐가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9. 이머징 신학의 뿌리들

 

1) 포스트모더니즘

 

ⅰ) 이머징신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스탠리 그렌츠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스탠리 그렌츠는 이머징교회의 선두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친구이면서 멘토로서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다시 정립함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이머징 신학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ⅱ)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이머징 신학으로 적용되고 있는 부분은 철학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적 신학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점진적인 계시의 완성으로서의 현재적 경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 “역사로서의 계시”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 개념으로서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 개념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ⅲ) 이머전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모더니즘에서 형성된 전통적 개신교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개혁과 더불어 형성된 전통적 교회의 명제적 교리를 해체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ⅳ)스탠리 그랜츠는 진리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점진적으로 증가되며 종말에 완성된다고 주장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는 진리가 만들어져야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이머전트들이 실행에 옮기고 있다.

 

2) 역사적 예수 연구

 

ⅰ) 톰 라이트의 신학의 특징이라고 하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E P. Sanders의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인데 신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톰 라이트의 신학은 이머징 신학의 토대로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 관점에서 보는 성경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일정 시간이 지난 그 당시의 유대 문화 속에서 기록되었기에 사실적 예수보다는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 가운데 기록된 성경이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상황 속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고 다시 재해석되어야한다고 주장하고있다.

ⅱ) 톰 라이트의 이러한 방법은 이머징 신학의 골격을 제공한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인 합리적 사고방식으로서의 아래로부터의 신학과 특성을 같이하며 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적 교회의 위로부터의 신학과는 반대되는 접근 방법이다.

ⅲ)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80년 이전에는 주로 성경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된 방법이었지만 이와 달리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성경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 있어서 전통적 교회가 2000년 가까이 해오던 해석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함으로서 보수주의 신학에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ⅳ) 이성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은 예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연구 방법의 결과들은 예수의 삶을 모델로 하여 행위에 중점을 두는 윤리로서의 기독교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ⅴ) 예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행위를 구원과 연관 시킬 수밖에 없는 펠라기우스주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또한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가운데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신과 같이 되고자하는 신과의 합일의 방법으로서의 관상기도를 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와같은 신비주의적 방법으로 종교로서의 형태를 갖추어가게 되는데 바로 이머징 신학의 특징이 예수를 따르는 삶과 관상기도를 통한 신과의 합일에 있다.

ⅵ) 이성적 분석 방법인 역사적 예수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이머징 신학은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성을 다루고 있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속죄교리가 나올 수 없고 또한 전통적 교회의 칭의 교리를 수용할 수가 없다.

ⅶ) 이머징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의 보혈로 인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후 1세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수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연구하고 그러한 삶을 따라가고자 하는 모델로서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하고 있다.

ⅷ)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새 관점 학파(new perspective on paul: N.P.P)의 대표적 인물인 톰 라이트는 전통적 교회의 칭의 개념을 부정하고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을 아담의 범죄에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개념으로 축소해 버렸고 또한 예수의 역할은 아담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민족주의적 죄를 짊어진 것으로 해석함으로서 전통적 속죄교리를 바꾸어 놓았다.

ⅸ) 인간이 원초적 죄인이라는 죄에 대한 개념이 없기에 인간이 생각을 바꾸면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다고 하며 선행을 배풀 수 있는 인간적 능력과 의지를 심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전통적 교회가 말하는 불신에 대한 심판과는 다른 행위에 대한 시판을 말하고 있다.

ⅹ)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하여 다시 해석되고 있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성경해석을 수용한다면 전통적으로 교단 간의 통합의 걸림돌이 되었던 대속과 칭의 교리로 인한 교단간의 견해 차이가 더 이상의 의미가 없기에 칭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머징신학은 교단은 물론 종교 간의 통합의 가능성을 가지고서 실질적인 종교 간의 대화를 추진할 수 있게 여건이 된 것이다. 최근에 이머전트 빌리지의 홈페이지(emergentvillage.org)가 모든 종교와 영성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patheos.com과 연계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와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인 것이다.

 

3) 고대-미래 영성

 

ⅰ) 이머징 처치의 영성의 특징은 고대-미래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이머징 처치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관상기도를 중심으로 한 영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이머징 처치에서 행해지는 영성 방식의 실질적인 모델인 레노바레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ⅱ) 레노바레 운동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개신교에서 일반화된 QT(Quiet Time 성경묵상)의 방법론과 관상기도가 병합된 것으로서 개신교 신비주의인 퀘이커교에서 행해지던 것이 퀘이커교도인 리차드 포스터를 통하여 레노바레 운동으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고 현재는 영성 신학자인 달라스 윌라드와 함께 이머징교회 운동을 뒷받침하면서 개신교의 영성의 한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ⅲ) 고대-미래 운동은 이머징 교회 운동의 뿌리를 고대에 두고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계몽주의와 더불어 시작된 개혁주의적 개신교의 교리들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ⅳ) 고대-미래 운동은 주로 2-7세기의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게서 모델을 찾고 있으나 주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클레맨스나 오리게네스 혹은 펠라기우스, 아리우스등의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아 죄의 문제를 인간의 행위로 해결하려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와 위(爲, Pseudo)디오니시우스의 관상적 영성을 도입하고 있다.

ⅴ) 고대 교부들의 영성을 고루 본받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강조한 교부들만을 본받고 있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아타나시우스나 이레니우스, 아우구스투스보다는 인성에 초점을 맞춘 클레맨스, 오리게네스, 펠라기우스등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대속과 칭의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교리를 확립한 아타나시우스보다는 자유의지를 강조한 아리우스나 금욕주의적 교부, 수도원 운동 등에 비중을 둠으로서 신성에 의한 대속교리를 수용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인성의 본을 따르고자하는 펠라기우스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ⅵ) 초대 교부들이 행하였던 관상기도의 개념 속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신 예수님이 관상적인 삶을 사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영지주의적 사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관상기도에는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예수님의 보혈 없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ⅶ) 고대에 형성된 관상의 맥은 알렉산드리아학파-플로티누스-위 디오니시우스-수도원운동-마이스터 에크하르트-아빌라의 테레사-십자가의 성요한, 로욜라의 이냐시오-퀘이커교-리차드 포스터의 레노바레운동-이머징처치등의 과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고 로마카톨릭의 토마스 머튼이나 헨리 나우웬과 같은 카톨릭 영성가에 의하여 더욱 일반화 될 수 있었다.

ⅷ) 관상기도는 1962-65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카톨릭이 타 종교와 대화하는 방법으로 공식 채택되었기에 세계종교를 서로 이해하고 하나가 되자고 하는 이머징 처치가 고대 영성에서 관상기도를 도입하는 이유가 로마 카톨릭의 이유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있다.

 

10. 전통적 복음주의 교회와 차이를 보이는 이머징 신학의 특징들

 

1) 죄의 개념

 

톰 라이트에 의하면 죄의 문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원초적 타락보다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범죄에 비중을 둠으로서 인간이 생각을 돌이켜 의지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한다고 하지만 종교개혁과 더불어 최초의 조직신학 책인 신학강요를 쓴 루터의 친구이면서 동료였던 멜란히톤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상실되었으며 지금 인간에게 있는 의지는 더 이상 자유의지가 아닌 노예의지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머징 신학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도 인간의 원초적 죄를 윤리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2) 대속

 

이머징 신학에서는 인간의 원초적인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에 그나마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죄의 문제를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한 행위에 의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정통기독교의 대속교리를 아동학대로까지 묘사하며(스티브 쵸크-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머징 지도자) 대속교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의미와 대립된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속죄의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대한 희생으로서의 속죄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희생적 십자가는 언급을 하여도 피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다.

 

3) 십자가

 

톰 라이트는 십자가를 대속을 위한 보혈의 개념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범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희생되셨다는 개념이고 하나님의 용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에서 본 것이다.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것과 같은 저항하는 죄를 짓지 말고 희생적으로 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4)하나님나라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에 의한 하나님의 주권의 회복으로서의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의 승리로서의 부활에 의한 하나님나라의 선포개념이다. 하나님나라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이 주체가 되셔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워지는 나라인데 이머징 신학에서의 성령은 죄의 문제가 다르게 해석 되고 있기에 사람이 주체가 되고 성령은 단순히 사람을 도와주시는 분(또는 힘)으로 해석되고 있다.

 

5) 지옥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전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기에 지옥 또한 이 땅에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머징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영원한 불못이 아니라 단지 예수살렘 밑에 있는 쓰레기 소각장으로서의 게헨나의 개념으로 축소되어버렸고 대체적으로 이곳에 버려질 자는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지옥에 버려질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6) 성령의 사역

 

캘빈의 구원론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핵심사상이 놓여있고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은 성도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데 있다. 그러나 이머징 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제외시킨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반면 전통적 개혁교회에서 생각하는 죄의 속성은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만드는 것이기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인하여 노예에서 자유케 된 성도를 그리스도께 이끄신다.

성령은 주체적으로 성도 안에서 사역을 하시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 성도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성령이 주체가 되는 열매로서의 선행을 행하게 하는데 이머징 신학에서는 사람 자신이 주체가 되고 성령은 사람을 도와주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머징 신학에서 말하는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용어는 죄의 개념과 더불어 떠나신 성령이 십자가의 보혈과 더불어 다시 임하신다는 개념이 아니기에 성령사역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성령세례의 개념도 없다.

 

7) 보편구원론

 

종교개혁과 더불어 최초로 조직신학을 저술한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은 하나님에 대한 논술과 동시에 인간의 원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에게 있는 의지는 자유의지가 아니며 노예의지이고 자유의지는 아담의 범죄 이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는 반대로 이머징 신학에서는 인간의 죄론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고 이를 최대한 축소시키고 있다. 인간의 죄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이머징 신학에서의 구원론은 당연히 보편적 일 수밖에 없고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구속을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맥클라렌과 랍벨등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가 필요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맥클라렌은 하나님나라에는 외인들이 없다고 주장하며 지옥에 대한 교리를 제외시킴으로 보편구원론을 지지한다.

 

11.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들

 

1)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모더니즘에서의 전통적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

 

2) 전통적인 기존 교회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단지 전통적 교리나 교회 조직의 부패등과 같은 내적 현상의 문제인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같은 외적요인의 문제인가?

 

3) 이머전트들은 이머징 처치의 당위성을 주로 전통적 교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모더니즘적 교리에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데 과연 전통적 교리나 조직의 내적 현상에 문제가 있다면 전통교회의 명제적 교리가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실천신학의 문제인가?

 

4) 교리보다는 단지 교회 조직의 구조적 문제 즉 부패와 종교 집단화와 기복 신앙 등의 문제라면 교리까지 바꾸려는 이머징 신학이 과연 옳은가?

 

5) 전통적 교회의 내적인 문제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외적인 문제라면 이머징 처치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6) 전통적 교회의 교인 수 감소가 단순히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에 따른 문제가 아닌 인터넷을 비롯한 문명의 발달과 도시화와 산업화에 의한 생활환경의 변화가 주원인이라면 과연 근본적으로 교리까지 바꾸려고 하는 이머징 처치만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한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 또한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7) 자크 엘룰은 자신의 저서 “도시의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발달하게 된 도시 문화의 종국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면서 도시문화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상실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는데 이머징 신학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해 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이머징 신학이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8) 이머징 신학에서 채택하고 있는 톰 라이트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고 철학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학문을 기초로 정립되고 있는데 믿음을 전제로 하여야만 하는 신앙이라는 초월적 명제가 이성적 합리주의 안에서 다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한다.

 

9) 교리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처하는 교회들은 이머징처치(emergent) 운동에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하는데 꼭 교리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머징 신학의 의도는 문화를 핑계로 전통적 교리를 부정하려는 자유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는 않은가?

 

10)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명제적 진리를 거부하고 있는데 과연 명제적 진리를 기초로 확립되어야만 하는 전통적 교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양립될 수 있는가?

 

 

11) 이머징 처치는 많은 부분을 복음주의자라고 불리우는 톰 라이트의 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전통적 교회가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대속과 칭의교리를 양보하면서까지 이머징교회와 대립됨이 없이 같은 복음주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12) 이머전트 빌리지는 최근 세계 모든 종교와 영성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patheos.com과 홈페이지를 연계하여 운영하면서 세계 모든 종교 간의 이해와 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는 타종교로 신앙을 바꾸어 탄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서 타종교를 이해시키는 것은 물론 타 종교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서적들을 보급하고 있고 또한 타종교인과의 결혼(Interfaith marriage)을 장려하며 적극 지원하고 있다. 과연 모든 종교 간의 대화와 연합을 추진하는 이머전트 빌리지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고자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13) 한국은 대체적으로 이머전트 빌리지 와는 별로 관계가 없고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으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출판되는 영성과 관련이 있는 기독교 서적의 대부분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머전트 빌리지와 손을 잡고 있거나 혹은 적극 지원하고 있는 서적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14) 이머전트 신학의 방향성은 어느 한 단체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제 1, 2차 세계 대전 후에 인류의 평화 공존이라는 과제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론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이기에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시대적 현상임을 생각하면서 전통적 교회가 직면해야할 앞으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 김원호

2014-10-04 01:28:50


이머징처치 미셔널 처치

-미셔널처치의 신학적 뿌리를 중심으로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번에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를 논하고자하는 이유는

1.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북미교회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돌파구가 필요한상황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상황 속에 순응하는 이머징처치와 미셔널처치의 출현이다.

3. 새롭게 출현한 이머징 미셔널처치(emerging missional church:EMC)가 과연 어떠한 신 학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4. Emerging missional church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새관점이 과연 개혁주의와 잘 조화 될 수 있는가.

5. 이번 논의에서는 이머징 처치이지만 개혁주의 신학의 바탕에서 출발한 마크 드리스콜의 마스힐 처치와 팀 켈러의 리디머 장로교회는 제외하고 논하고자한다.

6. 이머징 처치는 선교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측면이 부각된 교회 형태인 반면 미셔 널 처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적 교회형태를 부각 시킨 면에서 다소 다른 특수성 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기본적인 토대는 같기에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emerging miss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 이머징처치

 

A. 형성된 배경

 

1.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출발했다.

2. 전통적 교회의 쇠퇴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 기존 전통적 교회는 기독교 중심사회(christendom)에서 형성된 형태이기에 이미 기독교 가 사회의 주변으로 소외된 상황(post-christendom)에서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요구되어졌다.

 

B. 특징들

 

1. 이머징 처치의 과제는 해체와 재건이다. 이머징 교회의 대표적인 리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기독교 신앙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다가가려면 “재부팅”이 필요하다고하면서 재부팅을 하기 전에 교회는 모더니즘 시대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체와 재건을 위해서

2. 기존 전통적 교회의 건물 중심의 제도적인 예배방식을 탈피한다.

3. 신비적이고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영성을 추구한다.

4. 성경을 결코 변하지 않는 근본된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네 러티브나 스토리의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서 절대적 진리가 상실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 을 신앙에 그대로 접목 시키고 있다.

5. 단순히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를 변화시키는 외형적인 교회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신학의 변화에 비중을 둔다.

6. 초대교회에서의 영성을 앞으로 다가올 세대의 영성으로 다시 복귀시키는 고대-미래 영성 을 추구한다.

7. 구원의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8. 복음의 의미가 전통교회와 다르다

“이머징 교회”의 저자 에디 깁스와 라이언 볼저에 따르면 이머징 처치는 톰 라이트의 작 업의 틀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복음(the good news)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돌이키 시고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하여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심으로서 이 세상을 회복 시키셨다는 것이다. 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다( in and through Jesus, God became King of the world)는 것이다.

 

C. 이머징 처치의 구성요소들

 

1.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영국의 인 도 선교사였던 레슬리 뉴비긴이 동기가 되어 남아공의 선교학 교수인 데이비드 보쉬, 근원 적 혁명의 저자이면서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하워드 요더의 영향을 바탕으로 탈보수신학 자인 스텐리 그랜츠와 로저 올슨을 중심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상황에 적용되는 신학 이 정립되었다.

 

2. 신학적 구성요소는 새관점 학파(the new perspective on paul:NPP)의 영향을 가장 많 이 받았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톰 라이트(N.T. Wright)가 있다.

 

3. 영성부분에서는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차드 포스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달라 스 윌라드의 제자도와 함께 관상기도 신비주의를 교회의 영성부분에 많이 활용하고 있다.

 

D. 전통적 교회들과의 논점이 되고 있는 개념들

 

1. 포스트모더니즘

 

전통적 교회가 성경을 명제적 진리로 해석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을 하나의 스토리나 네러티브로 해석함으로서 1세기 유대인의 제2성전시기에 쓰여진 성경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탈보수적으로 재해석되어야하고 주장한다. 탈보수주의 신학에서 진리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기에 보수진영에서는 missional church를 신자유주의 신학을 근거로 한 교회형태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2. 새 관점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바울에 대하여 해석되어오던 것과는 달리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였던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salvation by works of the law)이 아니고 은혜에 머무르기 위함이었다고 재해석한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서신서는 이방인들도 이제껏 구별된 민족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율법(ethnic badge)이 없이도 예수를 믿음으로 유대인의 언약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한다.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속죄의 개념

 

전통적 개념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을 속죄하기 위한 것인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는 이러한 속죄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새 관점에 의하면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새 관점이 말하는 죄는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이방 민족들에게 전하여야하는데 그들이 자신들에게 은혜의 상징으로 주어졌다고 하는 율법을 이방민족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방민족에게 전하지 못한 민족주의가 바로 이스라엘의 죄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과 (죄를 씻어내는 보혈이 아닌)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범죄를 용서하는 화해의 표시이기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가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상징인 것이다.

 

b. 세례의 개념

 

전통적 개념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는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의롭다고 선언한 것으로 해결된 것이기에 세례는 속죄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개념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공동체 안에 참여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c. 공동체의 개념

 

전통적 교회가 말하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개념으로서 이 땅에서는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의한 수평적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세례가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의식인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으로 교회의 개념이 공동체의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참여함으로서 공동체의 확장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어간다는 개념이기에 전통적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관상기도

 

이머징처치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초대교회의 영성으로 돌아가고자 어거스틴 이전의 초대교회의 영성을 미래의 예배형태로 도입하는 “고대-미래“ 개념의 영성과 예배를 이야기한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던 시기 이전의 여러 가지로 혼탁한 상황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기 시작한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속죄의 개념이 없이도 가능하기에 속죄의 개념이 없는 Emerging missional church는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타종교와의 교류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개발되고 있다.

 

2. 미셔널 처치

 

미셔널 처치의 기원은 이머징 처치의 기원과 구별되지 않고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배경이 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라는 주제에 집중이 될 때 이머징 처치의 좀 더 특화된 부분이 미셔널 처치라고 할 수 있고 이머징 처치는 선교라는 주제만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A. 형성배경

 

항상 서구 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기독교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특히 GOCN: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대책을 내놓은 결과로 탄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30여년을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영국 성공회 주교인 레슬리 뉴비긴의 경우 그가 영국에 다시 돌아왔던 시기의 영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기독교가 거의 변방으로 밀려난 상태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레슬리 뉴비긴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를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공개적인 토론을 이끌어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GOCN의 멤버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결과 현대교회의 위기는 바로 모더니즘을 바탕으로한 교회의 영적, 신학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서 후기 기독교 사회(post-christendom)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더 이상 기독교 사회(Christendom)에서 형성된 전통적 개혁 신학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신학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고 이에 레슬리 뉴비긴이 제안한 "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에 근거를 두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서구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위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과정이 되었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목적이 된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일단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한 문화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문화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여주지 않기에 이러한 문화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회가 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미셔널 처치에서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시작된 건물 중심의 교회인 christendom(AD313~최근)의 시기는 끝난 것으로 간주하여 지금을 후기 기독교사회(post-christendom)로 보고 앞으로 새롭게 등장하여야할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침투적으로 들어가는 선교적이면서 성육신적인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B. 미셔널 처치의 개념

 

GOCN을 중심으로 성경을 재해석한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내시는 혹은 선교적인 하나님(a sending or missionary God)으로 재 정의하게 되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의 보내시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를 이 세상에 보내신다는 개념으로 교회를 선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에서 유래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정의하게 된 것이다. 즉 교회는 목적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에 보내지는 과정이 되어야만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를 삼위일체적 교회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세상으로 보내지는 우리 자체가 교회(being the missionary)이기에 우리가 교회에 간다(going to church)는 개념은 christendom의 유산이라고 간주하기에 정통적 교회가 아무리 선교에 역량을 집중한다 하더라도 missional church가 될 수가 없고 단지 선교에 집중하는(mission focused) 전통적 교회가 될 뿐이기에 교회 자체가 세상 속으로 보내져야지만 (Unchurched church)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기존 전통적 교회는 건물로 상징되는 외적인 형태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라는 의미에서 attractional church라고 하는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는 세상 속으로 향하는(extractional) 원심력을 가지고 성육신적으로 보냄을 받았다고 하여 incarnat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역할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대속의 생애를 보내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새관점에서 말하는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확장을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에 의미가 있고 언약공동체의 확장을 위한 성육신(incarnation)인 것이기에 미셔널 처치의 영성은 확장의 개념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렇게 확장되는 교회는 전통적 개념에서 말하는 교회의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라는 개념에 가까운 교회인 것이고 모이는 장소는 일상의 삶이 이루어지는 생활영역(venue)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organic church)

이머징 처치의 저자인 댄 킴벌에 따르면 미셔널 처치는 “주일뿐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으며 같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격려하고 가르치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보냄 받은 무리들”이라고 정의하고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명제적 진리를 요구하는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게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비슷한 명칭을 사용하기도하는데 missioal church와 같은 개념으로 incarnational church, mission-shaped church. emerging missional church(emergissional church),post-christendom church, post-congregational church, organic church등 다양하게 불리우지만 다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C. 특징들

 

 

1. 기존 건물 중심의 교회들과는 달리 세상 속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모임을 만들어가기에 일정한 외형이 정해진 것은 없다. 모이는 형태에 있어서는 주일의 개념은 없고 평일에 자유롭게 주로 생활의 영역(unchurched)에서 모인다. 또한 클럽이나 스포츠센타등 활동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이머징처치의 특징인 고대미래영성의 개념을 적용하기도하고 향과 미로걷기를 예배의식에 사용하기도 한다.(영국의 mission-shaped church인 Fresh expression group의 경우 new monasticism의 개념으로 홈페이지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 전통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것(missional church에서는 이를 old perspective라고 함)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에 기초한 제자도적인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충성하셨던 모습을 본받는 것이며 방법론적으로는 예수님의 보냄 받으심(incarnation)과 같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충성하셨던 모습을 본받아 예수님의 제자로서 같은 모습으로 충성하는 제자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Faith in Jesus)에서 예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of Jesus)을 따르는 것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3. 새로 오는 교인들에게 이전(old conventional role)과는 달리 신학의 변화(theological shift)에 따른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틀(the new community paradigm)을 요구하며 이에 대한 훈련으로 제자도의 삶을 가르친다.

4. 신앙의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이기에 MC에서의 영성은 개인이 아닌 관계 형성의 확장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고 개인의 구원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MC의 영성은 개인을 위한 자아개선이나 영적 제자도, 개인적 헌신의 삶이 아니고 이 세상을 위해서 성령에 의해서 공동체적 믿음을 형성해가도록 예수를 닮아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의 터전은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장소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셨듯이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temple spirituality)움직이는 곳에서의 영성인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신앙의 중심이 외적 건물로 이루어진 기존 교회가 아니라 삶의 현장이 바로 교회고 성전이라는 것으로 예배와 영성에 있어서 Unchurched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있다.

5. 이전의 christendom의 양식에서 벗어나 성경을 서술적이고 역사적(a consistent narrative-historical reading of the new testament)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마제 재해석함으로서 성경을 새로운 이론적 틀(paradigm)에서 다시 보도록 한다.

6. 신앙의 대상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이동됨으로서 모든 교파를 하나로 통합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지향한다.

 

D. 이머징 처치와의 연관성

 

이머징 처치의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에 의하면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머징 처치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좀 더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 미셔널 처치는 선교라는 실천의 형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형태인 것이다. "emerging church" "emerging worship"의 저자인 댄 킴벌은 이머징 처치에 깊이 관여하여 활동하고 있는 Vintage Faith 교회의 목사로서 또한 missional church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으면서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emergissional church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영국의 mission-shaped church인 fresh expression group의 경우 전형적인 이머징 처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머징 처치의 경우 emergent의 선두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스스로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missional church에서는 톰 라이트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을 정도로 톰 라이트의 새 관점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다만 외형적으로 missional church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Tim Keller목사의 리디머 장로교회는 비록 missional 이라는 용어를 이미 1990년대 초에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emerging church가 아닌 또 하나의 missional church의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이 교회 마져도 톰 라이트에게서 자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 미셔널 처치운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들

 

1. Organic church (www.organicchurch.com)

2. Communitas (www.communitas.org)

3. 3DM (www.weare3dm.com)

4. fresh expression (www.freshexpressions.org.uk)

5. friend of missional (www.friendofmissional.org)

 

3.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

 

A. 새로운 관점

 

미셔널 처치의 출발은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Post-christendom의 상태에 있다는 전제하에 christendom의 영역에 속해있는 기존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신학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신학적 관점을 기초로 하여 시작된 것이다. 이는 christendom에서의 개혁신학이 어거스틴부터 시작되었다고 규정함으로서 어거스틴 이후에 형성된 개혁신학을 해체하면서 emerging missional church(EMC)의 기초가 될 새로운 관점으로 신학의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NPP(the New Perspective on Paul)신학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운동의 중심인물인 마이클 프로스트는 이머징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The road to missional)에서 missional 운동은 바로 NPP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작품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EMC는 이전의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르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성서를 분석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의 결실로 만들어진 NPP를 기초로 하여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현재의 EMC의 모습이고 선교적 교회 신학(the theology of missional church)은 기존의 개혁신학과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갖으면서 다가올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으로 자리를 잡으려하고 있다. NPP의 대표적인 인물인 톰 라이트(N.T.Wright)를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칭할 때의 복음주의는 개혁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용어이며 이전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의 신학자인 것을 다음 그림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www.postost.net/)

 

B. 대연합(the great convergence: the emergency and the new perspective)

 

현재 영국에서 missional community 운동을 하며 다가올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an evangelical theology for the age to come)이라는 사이트(http://www.postost.net/)를 운영하고 있는 Andrew Perriman에 의하면 앞으로의 교회는 성경이 재해석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을 기초로 한 이머징 미셔널 실천(emerging missional praxis)운동이 기본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missional church의 시작은 NPP와 관계없이 레슬리 뉴비긴으로부터 시작되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발전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Post-christendom에서의 새로운 신학의 모델을 찾고 있는 중 이성과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며 역사나 자연과학의 학문과 소통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접근법으로 결실을 맺은 NPP가 자연스럽게 접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역으로 생각해보면 NPP라는 신학을 통하여 만들어질 교회의 형태는 기존 christendom의 교회 형태를 가지고는 불가능하였기에 NPP가 필요로 하는 공동체적인 교회형태와 이머징 처치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접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그림이 이를 요약해서 잘 보여주고 있고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사람들은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기존의 개혁신학과 전통적 교회가 소멸되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http://www.postost.net/node/338)

 

이러한 변화는 다소 후퇴되는 경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정립되었던 보수적인 신학이 앞으로는 역사적 시각에 맞추어 새롭게 정립된 새 관점으로 바꾸어질 것(Question 1)과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이머징 신학을 통한 변화(Question 2)를 수반하면서 종국에 가서는 Emerging missional church의 실천적 교회형태인 missional church 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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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ostost.net/node/353)

 

즉 새관점과 이머징 형태의 교회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의 출현은 동시에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현대 복음주의의 사망을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그림에서 emerging missional church는 교회의 형태적 변화보다는 신학의 변화에 핵심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라는 emerging missional church의 표면적인 명분은 현대교회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는 추세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회가 성육신적(incarnational)으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좋은 성경적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는 실재의 내용에 있어서는 전통적 관점과 전혀 다른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에 전통교회를 더욱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교회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원초적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무리의 형태이지만 새 관점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속죄하심으로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방나라에게 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와 더불어 주어진 율법을 민족주의적으로 이방인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죄로 인하여 바벨론 유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언약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용서되어서 우리에게까지 문이 열리게 되었기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의식인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된 무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개념보다는 공동체의 개념이 적용되며 이방인과 유대주의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죄로 인한 바벨론 포로생활을 청산시키는 용서와 화해의 개념이고 전통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보혈에 의미가 있기에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Emerging missional church와 새 관점의 밀접한 관계성 때문인지 Emerging missional church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의 홈페이지에서는 예외 없이 톰 라이트의 서적들을 추천도서에 올려놓고 있다.

 

C. Attractional vs Incanational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교회가 emerging missional church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성장이라는 당면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Emerging missional church는 기존 christendom에서의 전통적 교회를 모이는 교회 즉 Attractional church라고 규정하며 자신들은 이와 반대인 세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in not of) 원심적인 교회로서 무교회(Unchurched)주의에 가깝기에 실상은 교회성장이 아니라 christendom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건물 중심의 외형적 교회를 해체(?)하는 운동인 것이기에 외형적 건물을 중시하는 전통적 교회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혀 다른 개념이 있기에 전통적 교회가 missional church로 전환한다는 것은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해체의 순서를 밟는 것이다.

 

D. 죄의 인식

 

Emerging missional church가 세상 속으로 침투해들어가서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셨고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며 이 땅에 하나님 즉 그리스도의 나라를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펠라기우스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통적 신앙에서 고백하는 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것이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인데 반면에 새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 죄는 단순히 “역기능”과 “장애”일 뿐인 것이고 이는 우리의 노력과 훈련을 통하여(disciplines)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다분히 펠라기우스적인 인식인 것이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전통적 관점으로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고 새 관점으로는 우리가 죄를 짓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후자는 연습과 훈련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고 이는 개혁주의 신앙에서 말하는 전적부패(Total depravity)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머징 신학이 신 자유주의라고 불리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전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시행착오를 하면서 점 점 더 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던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 믿음보다는 제자도

 

전통적인 관점에서 신앙고백 후의 성도의 삶은 자신의 옛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것이고 대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며 자신은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faithfulness)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삶이어야하는 반면 새 관점에서는 은혜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었다 하더라도 공동체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성실히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에 방법론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교본으로 하여 자신이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는 것인데 새 관점에서는 율법조차도 은혜의 원리로 해석하고 있기에 자신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니라고 하며 이는 율법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F. 성육신(incarnation)의 의미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성육신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담의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속죄(the Atonement))의 개념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인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 의미하는 성육신(incarnation)은 이스라엘의 배타적이고 민족적인 이기주의에 의하여 언약공동체가 확장이 안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징계로 유배생활을 하는(the Exile)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으로 해석되고 있기에 missional church가 사용하는 incarnational의 개념은 전통적 개념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 개념으로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속죄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에 우리가 incarnation 의 개념으로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적용이 될 수 있고 missional church가 incarnation church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죄에 대한 속죄의 개념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G. 교회의 의미

 

전통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아담의 죄로 인한 나의 죄를 사함 받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함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는 교회공동체인데 반하여 새관점에서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언약공동체의 확장 개념이고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흔히들 사용하는 Unchurched church에서 전자의 church는 기존 전통적 개념의 교회이고 후자의 church는 새로운 공동체 개념의 교회인 것이기에 똑같은 교회(church)의 명칭이 missional church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H. 세례의 의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담의 죄로 인한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서 내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의식임에 반하여 새 관점에서의 세례의 의미는 이스라엘로 제한되었던 언약백성의 공동체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보혈의 의미가 아님)되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죄 값인 바벨론 유수(the Exile)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공동체의 문이 자신에게 열릴 수 있었음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에 참여하는 신분(identity)이 주어지는 의식인 것이다. 새 관점에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언약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이 주어졌다는 것이지 전통교회에서 말하는 칭의 개념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I. 예배의 의미

 

전통적 교회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고 부수적으로 믿는 자들의 신앙의 향상과 믿지 않는 자들에 전도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전통적 교회와 달리 전도를 제 일차 목표로 하고 있기에 모든 예배의 형식과 용어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재조정되어있고 예배 자체를 missional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 전통적 교회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4. 결론

 

주로 missional church의 NPP(the new perspective on paul)와 관련된 부분을 분석한 것은 실제적으로 여러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NPP의 신학으로 취할 수 있는 교회 형태로는 전통적 교회와는 다를 수밖에 없고 NPP의 실천신학적인 입장에서 필연적인 결과로 나온 형태가 missional church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기존 전통적 교회가 교회 성장이라는 방법론적으로 missional church의 형태를 도입하자고한다면 이는 NPP가 무엇이고 missional church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함으로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NPP의 신학이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기 전에 이미 대표적인 NPP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책이 복음주의 출판사를 통하여 널리 보급됨으로 인하여 이미 NPP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무너진 상태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NPP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반가운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어거스틴으로부터 출발된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는 입장의 교회에게는 전통 교리를 부정하는 신학이기에 충격적인 도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 전통적 교리와는 달리 Missional church 운동의 근거인 Mission of God (Missio Dei)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심을 드러내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시작되었다는 개념으로서(hypercovenantalism) 새관점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이론이기에 missional church 운동은 바로 NPP라는 신학을 기초로 한 공동체를 이 땅에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소 예외라고 할 수 있는 팀 켈러의 리디머 장로교회조차 최근 톰 라이트의 강연을 리디머센터에 유치하면서 적극 지원하였던(2010,3) 일을 생각해보면 복음주의를 기초로 한 미셔널 처치라 하더라도 새 관점에서 결코 자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기존 전통적 교회의 미셔널 처치로의 전환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미셔널 처치 운동을 통하여 기존 전통적 교회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많은 부분이 있다는 점을 다루지 못한 것과 또한 미셔널 처치 운동의 다양성을 폭넓게 다루지 못하고 NPP라는 한 가지 사실에 너무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소 아쉽기에 양해를 구하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Faith of Leap, The: Embracing a Theology of Risk, Adventure & Courage (Shapevine) Alan Hirsch, Michael Frost 2011

Missional Spirituality: Embodying God's Love from the Inside Out

Roger Helland, et al 2010

Untamed: Reactivating a Missional Form of Discipleship (Shapevine)

Alan Hirsch, Debra Hirsch 2010

The Forgotten Ways: Reactivating the Missional Church

Alan Hirsch, Leonard Sweet 2006

Missional Communities: The Rise of the Post-Congregational Church (Jossey-Bass Leadership Network Series) Reggie McNeal 2011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Gospel & Our Culture) edited by Darrell L. Guder. 1998

Introduction the missional church: Alan J. Roxburgh and Scott Boren (BakerBooks) 2009

The missional church in perspective: Craig Van Gelder & Dwight J. Zscheile

(BakerAcademic) 2011

Report of the Special Committee to Study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 report adopted by the 259th synod of the reformed church of the united states.

An explanation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for friends of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by Dr. bryan chapell president and professor of practical theology,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새로운 교회가 온다 ,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저/ 지성근 역/ ivp.

선교적 교회론, 신현수지음/CLC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란?- 김원호

2014-10-04 01:47:19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선교적교회)란 무엇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본 미셔널 처치에 대한 연구자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세일치 신조(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돌트신조)를 고백하는 칼빈의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미셔널처치에 대한 정리의  동기와 목적

 

 1. 최근 한국교회는 교인 수의 외적인 감소로 인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새로운 문화적 적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서구의 새로운 교회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있다. 하지만 서구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고있는 이머징처치 형태의 미셔널 처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없이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새로운 선교적 교회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미셔널처치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자칫 개혁주의의 신학에서 떠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에 이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자한다.

 

 2. 2013년 올해는 세계 교회협의회(WCC)의 부산 총회가 개최되는 해이기에 어느 해 보다도 WCC의 특징적 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해이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보수교단에서 WCC의 신학에 문제를 제기하고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번 글의 주요 주제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이번에 정리하고자하는 미셔널처치가 바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정립된 교회 형태이다. 미셔널 처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통하여  WCC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출발한 미셔널 처치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3. 기독교 세계관과 미셔널 처치가 어떠한 관계인지를 살펴보고자한다. 미셔널 처치는 최근  서구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머징 처치로서 이 시대의 문화에 적응하는 선교적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고있다.  이는 100여년 전 신정 국가였던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를 배경으로하여 형성된 도여베르트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이 현재의 문화형태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라는 주제로 만들어진 미셔널 처치와 접목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알버트 워터스(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은 원래 선교적 목적이지도 않았고 단순히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의 개념으로 정립된 신칼빈주의의 형태를 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술이었다.

"창조, 타락, 구속"의 2005년 개정판은 선교적 관점에서 초기의 저술을 수정보완하여 미셔널처치 운동의 한 가운데 있는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과 함께 선교적 관점에서 개정판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세계관은 자연스럽게 미셔널처치로 귀결될 수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세계관은 당연히 개혁주의적 복음으로 귀결되어야한다는 전통적 교회의 신학적 개념과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미셔널처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여야한다는 의무감에서 이 글을정리하게 되었다.

 

 4.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초가 되는 신율주의(언약적 율법주의)가  요즘 출판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있는 톰 라이트 계열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NPP)'과 같은 신학적 특성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톰 라이트에 대한 관심이 미셔널 처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 대하여 호의적인 목회자가 바로 미셔널 처치를 추구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서 톰 라이트의 신학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있는지 미셔널 처치와의 관계성 가운데 살펴보고자한다.

 

 5. 미셔널 처치는 이 시대의 가장 경계해야 할 교회 형태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개념과 이신칭의의 개념이 없는  신학이 바로 새관점 신학이고 언약적 율법주의이며 신율주의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기초개념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바로 신율주의의 성격을 가진 WCC의 선교개념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약화된 신학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following)의 대상인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기독교는 하나의 윤리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미셔널 처치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안이 될수없다. 최근 미셔널 처치를 시작한 한 목회자는 한국에서 미셔널 처치는 제 3기의 교회형태라고 주장하고있다.  제 1기는 한국전쟁을 통과한 목회자들이 주도하였던 시기였고 제 2기는 한국전쟁 이후의 목회 세대들이 주도하였던 시기라면 이제는 그 위에 제 3기의 교회 형태로 미셔널처치를 구현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교회의 변혁이 아니라 교회의 변질인 것이다. 외형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효용성을 강조하면서 모범을 보여주느라 애쓰고 있지만 정작 문제는 신학이 다르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개혁주의라고 주장하지만 속죄 개념의 십자가가 빠지고 이신칭의가 빠지고 칼빈의 5대 강령이 빠진 교회가 개혁주의 교회의 범주 안에 들어갈수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셔널 처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셔널처치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는 이머징 처치가 무엇이고 또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초를 이루고있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한다.

 

 

 1. 이머징 처치

 

 

 A. 이머징처치란 무엇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기독교계의 이슈가 되면 자주 듣는 교회 용어 가운데 하나는 아마 이머징 처치일 것이다. 이머징 처치를 간단히 설명한다면 전통적 개념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상황에 순응하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형성된 교회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상 이전 것과의 연속성을 갖는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니라 이전것과의  불연속성을 뜻하는 해체와 재건이라는 속성을 가지고있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모더니즘에서 형성된 명제적 교리 중심의 외적인 교회 구성요소들을 해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성에 맞게 교리를 비롯한 교회의 외적 구성요소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번의 전통적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의 구성요소들을 갖출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요소들로는 전통적교회의 외형이 형성되기 이전인 어거스틴 이전의 고대의 예배형태와 어거스틴,루터, 칼빈과는 전혀 다른 새관점들이 있다.

 

 

 B. 이머징 처치의 주요 특징들

 

해체와 재건

 

이머징 처치는 모더니즘 교회에 대한 해체와 재건을 전제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해체와 재건은 단순히 외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신학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실질적인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이머전트 빌리지(emergent village)의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기독교 신앙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다가가려면 반드시 “재부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부팅을 하기 전에 교회의 구성요소 가운데 모더니즘 시대에 침투된 바이러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체와 재건을 전제로 하여 시작된 이머징 처치는 기존 전통적 교회들이 고수해왔던 건물 중심의 제도적인 예배방식을 탈피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신비적인 영성을 추구할 수 있도록 외형을 변화 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등의 윤리를 도입하고 탈보수주의 신학자였던 스텐리 그랜츠(판넨베르크의 제자)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윤리신학도 자연스럽게 이머징 처치에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황화(contextualization)

 

전통적 교회가 성경을 명제적 진리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던 것에 반하여 이머징 처치는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진리를 개인과 상황에 맞추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성경을 상황화(contextualization)시켜 해석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드라마나 스토리로 보고서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을 하는 신학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성경은 이야기다. 성경은 드라마다. 성경을 거대담론(metanarrative)로 보아야한다’등이다. 실례로 대표적인 새관점 신학자인 톰 라이트가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의 하나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이다. 미셔널처치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도 마찬가지로  ‘성경은 드라마다(Drama of Scripture)’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경우 성경을 네러티브나 스토리로 봄으로서(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인 Paul In Fresh Perspective에서 새관점 학자인 샌더스나 던이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성경을 네러티브나 스토리로 해석하지 않는 우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시대적 문화에 맞추어 상황화(contextualization)시켜 주관적으로 해석하고있다. 이는 성경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 명제(absolute proposition)의 진리로 보는 기존 전통적 개혁주의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경우 자신이 성경을 거대담론으로 봄으로서 만들어낸 새로운 관점이 또 하나의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우를 범하고있다)

 

실존주의 기독교 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창세기의 전반부(1-11장)를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historie)와 다른 역사(geschte)인 원역사 (Urgeschte)로 해석하고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책’으로 보았다. 또한 성경을 100% 하나님이 기록한 책이면서 동시에 100% 사람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보는 개혁주의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있기에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자유로움을 보여주고있다.

 

성경의 해석의 자유로움을 보이는 상황화는 특히 실존주의 배경을 가진 칼바르트는 물론이고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슈바이처와 톰 라이트를 통해서도 활발한 모습을 볼 수있다.

 

특히 전통적 성경해석을 탈피하고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자들과 문화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레슬리 뉴비긴과 대표적인 이머전트인 브라이언 맥클라렌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있다.

 

이머징미셔널 처치는 칼 바르트와 레슬리 뉴비긴, 톰 라이트, 브라이언 맥클라렌등을 통하여 성경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에 맞추어  상황화하여 해석함으로서 나오게된 결실인 것이다.

 

WCC의 25인 위원회에서 칼바르트와 같이 활동하며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을 WCC의 기본 선교 개념으로 도입한 레슬리 뉴비긴이 미셔널 처치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칼 바르트의 영향으로 성경을 상황화 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성경을 상황화 시켜 해석함으로서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는 신학의 모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미래 예배

 

이머징처치 형성의 동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기존 전통적 교회의 성장의 정체 내지는 후퇴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이 시대의 교회의 위치가 사회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사회 중심부에 있었을 때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전통적 교회의 형태는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의 국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형성된 건물 중심의 교회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사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온 형태(Christendom)로 존재해 왔었지만 현재와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상황에서는 교회는 더 이상 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중심부에 있지 않다(Post-christendom)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의 교회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이전인) 고대의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하고 예배 또한 고대의 초대교회의 예배 형태로 되돌아가야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E.Webber)는 자신의 책 예배학을 통하여  고대-미래 영성(ancient-future spirituality) 개념의 예배를 포스트 모더니즘에 도입하여야한다고 말하고있다.

 

이는 성경을 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인)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였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고대의 신플라톤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미래의 예배와 영성의 방법론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알레고리적인 주관성을 바탕으로 해석함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기반을 둔 관상기도와 같은 신비주의에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길을 열어주게된 것이다. 

 

이처럼 경험을 중시하는 관상기도와 신비주의적 방법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에서 (성경 말씀인)계시보다는  (신비적)경험에 치중할 수밖에 없기에 절대적 진리가 상대적이고 경험적으로 수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필요조건을 자연스럽게 충족시켜주는 방법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미셔널 처치인 Fresh expression의 경우 예배를 드리는 형태에 있어서 향과 고대 의상, 고대의 분위기를 내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가미한 독특한 예배를 드림으로서 고대-미래 개념의 예배와 영성을 나타내고있다.(www.freshexpression.com) 

 

 

 새관점

 

교회가 아무리 외적인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 근거가되는 신학적 기반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기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머징 처치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있는 브라이언 맥클라렌(Brian Mclaren)은 펜넨베르크의 제자였던 스탠리 그렌츠 로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을,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로부터는 신비주의적 영성을, 존 하워드 요더로부터는 기독교 윤리를, 데이비드 보쉬로 부터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그리고 톰 라이트로부터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을 도입함으로서 이머징 처치의 신학적 기반을 다질 수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은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형태를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신학형태로서 이전 전통적 교회의 신학적 틀과는 다른 신율법주의 즉 언약적 율법주의인 것이다.

 

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 이하 새관점)은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전통적 교회가 해석하였던)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되었던 율법주의로서의 율법이 아니고 유대인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하여 은혜의 상징으로 요구되어진 윤리 규범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율법을 (폐기가 아닌)완성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셨고 자신의 희생적인 삶을 통하여 선교적 사명을 가진 백성이 어떻게 삶아가야하는지 하나의 지침이 되는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새로운 율법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신율법주의라고하기도하고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수님의 사역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맺으신)언약을 완성하는 같은 성격을 가지고있다고하여 단일언약론이라고하기도하고 또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으신)언약을 이루기 위한 율법이라는 의미에서 언약적 율법주의라고도한다.

 

이러한 새관점은 믿음을 통한 신앙고백에 의한 칭의와는관계없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요구되어지는 윤리규범으로서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으로  해석되어지는 신학은 사회으,필요를 채워줄 수는 있어도 교회의 존립에 기본이 되는 ‘이신칭의’의 개념이 상실될 뿐만이 아니라 칼빈의 5대 강령을 소멸시키면서 다른 복음이 되어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머징 교회”의 저자 에디 깁스와 라이언 볼저는 이머징 처치는 “톰 라이트의 작업의 틀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을 만큼 톰 라이트의 신학이 이머징 신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이머징 신학의 기초가 될 수있었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더니즘과의 불연속성이다. 이머징 신학이 해체와 재건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요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서는 모더니즘과의 불연속성은 필수적인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모더니즘에서 신학적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성경을 1세기의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해석을 해냄으로서 어거스틴 이후에 형성된 개혁주의의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는 새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자신의 저서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이다. 이 말은 이제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던 (전통적 개혁주의) 복음이 틀렸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비롯하여 이제까지 해석되었던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어거스틴이나 루터의 경우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에 너무 비중을 두고서 성경을 해석하였고 특히 루터는 카톨릭에 대한 반발로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생각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는 이머징 처치의 리더들도 톰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이제까지의 잘못된 신학을 제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 해석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고 기존 교회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사상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사복음서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이신칭의를 전하는 바울’의 신학을 따로 분리하여 해석하였던 알버트 슈바이처나 루돌프 불트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있을 것이다.

 

톰 라이트가 정리한 (언약적 율법주의로서의)하나님나라 개념은 전통적 개념의 (그리스도의 구속 영역으로서의)하나님 나라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오히려 다드(C.H.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톰 라이트의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문화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부터 연속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문화변혁적 구속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셨던 문화 변혁에 대한 사명을 이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하는 일은 내세까지 보존될 것이라는  플란팅가(Cornelius; Engaging God'sword, 109-113)의 말을 그대로 톰 라이트 자신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톰라이트와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구속을 "회복된 창조"라는 개념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은 태초에 아담에게 맡겨졌던 원래의 사명, 곧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 처음 세우신 계획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새창조를 꾸미는 것을 목표로 문화를 발전 시키는 사명을 가지고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구속은 예수님의십자가에서의 구속이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신칼빈주의 개념을 확대 적용함으로서 (개인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전통적인) 개인 구원의 개념을  없애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의 구속 영역이 됨으로서 이제 모든 피조계는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연속성에서 이 땅에서의 문화를 이루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일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이러한 새 하늘과 새땅의 문화적 완성을 위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문화 변혁적 구속 사역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한다는 것이다.

 

구속의 완성이라는 개념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살아가는 자세는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한 도리로서 성도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기독교 윤리

 

고든 콘웰 신학교 교수인 데이비드 웰스(David F. Wells)는 자신의 저서 “용기 있는 기독교(The courage to be Protestant)”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실종된 대표적인 것 3가지로 전통과 권위와 권력을 들고 있다.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상황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회 윤리라는 개념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버팀목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전통과 권위와 권력의 실종은 이전 문화의 주역이었던 선조들에 대하여 더 이상 존중하지 않겠다는 표시이며 동시에 사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이나 순종의 부담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구조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있고 또한 선과 악의 기준마져도 상실 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것이다. 이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특히 전통적 기본 구조 가운데 외형을 유지하고있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마켓팅 개념이 도입된 전통적 기독교는 실용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요구되는 사회윤리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교회 체질 자체가 변질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주요 구성 요소에서 윤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윤리는 인간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데 반하여 사회의 중심부에 있던 전통적 교회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함으로서 비난은 자연히 교회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대한 대안을 이머징 처치가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머징 처치가 도입한 기독교 윤리의 개념에서 많은 부분이 전통적 개혁주의 의 신학과 충돌을 일으키고있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실질적 리더인 이머전트 빌리지의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자신의 친구이자 맨토였던 스탠리 그렌츠로부터 판넨베르크의 탈보수주의 신학의 특성인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적인 기독교 윤리를 도입하였으며 메노나이트인 존 하워드 요더로부터는 재세례파 개념의 윤리를 도입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한 윤리 개념을 이머징 신학에 접목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성의 윤리 개념은 개인 구원에 집중되어있던 구속사적 성경해석을 사회구원의 개념으로 전환시킬 수있는 메타네러티브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길을 열어주게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진리의 판단 기준을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에 두면서 동시에  관심사는 사회 구원으로 향해있는 양면을 구사하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양면을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성경을 메타네러티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메타네러티브 즉 거대담론은 성경을 주로 개인에게 적용하는 미시담론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성경의 관심사를 주로 공동체나 사회에 적용함으로서 개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결론적인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보다는 주관적으로 해석, 적용이 가능한 하나의 이야기로 보자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포스트모더니즘 상황에서 개인을 사회와 연결 시켜주기 위해서는 성경을 메타네러티브로 보는 것이 필수적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는 성경을 사회 구원을 위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고 있는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이 성경을 미셔널 처치 개념으로 재해석하는데 사용한 기본 개념으로 메타네러티브를 사용하였듯이 복음이 전해져야 할 최종 목적지를 (명제적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가 아닌 모든 피조 세계로 보는 미셔널 처치에서 메타네러티브 관점에서의 성경해석은 필수적인 것이다.

 

거대담론으로서의 메타네러티브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인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도 즐겨 사용하는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자인  “포스트 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의 저자인 리차드 미들턴과 브라이언 왈시등이 주로 사용하는 성경을 보는 개념인 것이다.

 

성경을 명제적 진리로 볼 경우에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교훈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기에 성경을 메타네러티브로 보는 것은 성경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될 경우에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하나님은 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독교가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되어 버릴 경우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이  윤리화된 기독교이다. 윤리화된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이러한 역할로 그려진 예수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성인의 수준으로 전락하게된다.

 

윤리화된 기독교는 사람들의 행위를 요구하게 되고 요구되어진 행위에 집중하는 기독교는 펠라기우스적인 행위구원론의 형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윤리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인 이머징 처치는 기독교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칼빈주의의 일반은총 개념을 확장시켜서 적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신칼빈주의에서 말하는 바와같이)  모든 피조 세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받은 피조계를 다스리는 문화명령을 이어받아서 피조세계의 완전한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 교수인 반 드루넨(David VanDrunen:)은 자신의 저서(Living in God’s Two Kingdom)에서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이머징 처치는 문화 변혁적 구속관을 가지고 문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고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의 개념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며 구속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담이 타락 전에 받은 문화 명령과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피족계의 완전한 회복을 위하여 문화를 변혁 시키는 일에 참여해야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 관점과 이머징 처치가 말하는 문화 활동에의 참여는 단순한  윤리의 개념을 넘어서는 구속사역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리더인 맥클라렌은 메노나이트인 기독교 평화주의자 존 하워드 요더로부터는 문화 혁명적인 사회구원론을 도입하여 그리스도인이 사회윤리 개념을 접목하였다.

 

이머징 처치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은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이다. 마치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범신론(Pantheism)적 사상을 배경으로 활동하고 있듯이 이머징 처치에서는  만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재해 계신다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가 신비주의적 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만유내재신론의 개념을 배경으로한 것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스텐리 그랜츠(Stanley Grenz)를 자신의 친구이자 맨토로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만유내재신론적 윤리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포스트모던 신학자였던 스텐리 그랜츠는 판넨베르크의 제자로서 판넨베르크가 주장한 과정신학적 만유내재신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모든 진리는 만물의 완성의 과정과 같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진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만유내재신론은 하나님이 스스로 만물을 자신의 존재와 연결하였다고 하여   자의적 만유내재신론으로 부르기도한다.

 

이머징 처치의 만물에 대한 내재신론적 관점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신칼빈주의의 구속 개념과 결합되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윤리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사상은 화란개혁주의 신학자인 플란팅가(Plantinga; Engaging God’s World)가 표현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은 새 하늘과 새 당에서 그대로 본존 될 것이다”라는 개념으로 이 땅에서 이미 실현된 하나님 나라(Realized Kingdom of God)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기독교 윤리에 대한 책이며 이는 다드(C.H.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적 개념이 적용된 것으로서  미래적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재적 적용 개념에서 정립된 것이기에 전통적 개혁주의에 속해있는 성도들이 이러한 개념이 없이 톰 라이트의 책을 읽는다면 많은 혼돈과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the good news)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회복 시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 선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서 선교적 삶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스라엘이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선교적 사명을 예수님을 본받는 삶으로 감당해야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말하는 윤리적 삶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유대인의 선교적(?)공동체와 동일한 것으로 보기에 선교가 전제된 윤리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바탕으로한 이머징 처치의 선교적 윤리를 교회론으로 정립한 것으로서  신정통주의 철학자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의 교회론을 접목시켜서 윤리와 선교와 교회의 개념이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윤리와 선교와 교회가 합하여진 이머징 미셔널에서 보는 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의 개념은 전통적 교회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죄에 대하여는 이스라엘이 원래는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선교적 공동체인데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함으로서)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개념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가야지만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지 희생적 모범(?)을 보여주셨다는 것이고 

 

구원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인간이 근원적인 아담으로 부터 전가받은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믿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적 공동체(미셔널 처치)의 일원이 되어 제대로된 선교적 삶을 살아갈 때 그 공로가 인정되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오는 삶의 형태는 자연스럽게 행위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행위 구원론적 성격으로 인하여 윤리적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이냐 따름의 대상이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에 대한 개념이 전통적 교회와 다름으로 인하여 생긴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속죄 개념의 보혈의 의미도 아니면서 또한 의의 전가 개념도 없는 전혀 다른 복음인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아담의 죄는 창세기 11장 까지(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의 문제이고 아담의 죄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맺으실 때  이미 해결된 것으로 보고 예수님의 희생은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보면서 죄에 대하여는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에 범죄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일단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 대신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삶이 표준이 되어서 이러한 삶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하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며  행위에 대한 요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값 없이 주셔야지만 성립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행위가 요구되는 알미나안적 복음인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정하는 면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거된 것을 부정할 경우에는 우리가 그 부족한 부분을 윤리적 행위로 보충하여야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인 되었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복음의 개념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던 아담의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다( in and through Jesus, God became King of the world)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톰 라이트가 말하는 기독교 윤리 개념인 것이다. 

 

이머징 처치가 미셔널 처치의 선교적 개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와같은 구원론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은 전통적 교회 개념과 다른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곳으로서의 교회 개념이 아니라) 모든 피조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속 영역이기에

 

교회의 역할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믿음과 관계없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미셔널 처치의 선교 개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미셔널 처치에서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고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의 구속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신앙고백이 아닌 삶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일반은총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배경에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창한 신칼빈주의로서의 일반은혜 개념이 자리잡고있다. 일반은혜는 피조세계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이러한 영역을 신앙의 영역으로 보면서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대한 거부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 세계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의 화란은 국민의 90%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카이퍼가 화란을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 국민에게 자연스럽게 적용할 수있었던  개념이 일반은혜의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화가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지역에서 모든 문화의 영역은 물론 피조계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머징미셔널 처치는 카이퍼의 일반은혜 개념을 가지고 레슬리뉴비긴이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을 모든 피조세계에적용시킨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일반은혜를 기반으로 형성된 이머징 처치는 미셔널 처치의 신학으로 문화를 접목시킨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인 것이다.

 

이머징미셔널처치가 일반은총을 기반으로 했다고하더라도 구속에 대한 개념이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느냐의 차이로 인하여 전통적 교회와 이머징 미셔널 처치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특별은혜와 일반은혜의 구별은 성경의 계시로 구분되는 분야인 것임을 볼 때 일반은혜는 성경의 계시와 무관할 수도 있는 분야인 것이다.

 

즉 특별은혜는 하나임의 계시의 말씀과 믿음을 통한 죄사함의 구속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일반은혜의 남용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이 격하되고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C. 이머징 처치의 특징적 구성요소들에 대한 고찰

 

 

 포스트모더니즘

 

 

 이머징 처치의 발생동기와 형태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교인 수의 감소는 충격적이었고 이를 가장 심각하게 경험한 사람은 바로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30여년을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던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고 그가 영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의 영국의 상황은 인도 못지 않게 다원화가 진행되어있었고 교인 수는 급격하게 감소되어서 영국의 상황이 또 하나의 선교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러한 문화적 상황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규정하고서 2차 대전 직후 1921 창립되어 1959년 WCC와 통합된 국제선교회(IMC)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전략을 연구하게되었다. 1952년에는 독일 빌링겐에서 칼 바르트, 라인홀드 니버등이 참여한 25인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선교전략에 대한 연구 토의를 거듭하던 중에 1932년 칼 바르트가 처음 연구하여 제안하였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을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의 선교 전략으로 채택하고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기초로하여 교회 통합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인 개념에 대한 정립을 시작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미셔널 처치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레슬리 뉴비긴이 노년에 심혈을 기울인 GOCN(Gospel on Our Cultre Network)의 결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외의 인물로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고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으로dml 페라다임의 변화를 촉구하는 “변화하는 선교”라는 책을 저술한 남아공의 선교신학자 데이비드 보쉬(David J. Bosch)가 있었다. 그외에도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황을 신학적인 면에서 접근한 인물로는 독일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을 이머징 신학에 접목을 시킨 스탠리 그렌츠(stanley Granz)가 있으며 그는 이머전트 빌리지의 대표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에게 친구이면서 멘토로서 이머징 처치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윤리적인 면에서는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가 있고 알미니안 신학자인 로저 올슨(Roger Olsen) 등이있다.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과정인 해체와 재건을 위하여 꼭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는새로운 신학이다. 바로 이 새로운 신학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이다. 이 새관점은 1970년대 중반 샌더스(E.P.Sanders)에 의하여 처음 발표 되었지만 지금은 주로 톰 라이트가 주도하고 있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신학이다. 

 

이 새관점 신학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율법을 전통적 개념과는 다르게 재해석하고있다.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는 근거로는 쿰란문서인 사해사본(Dead Sea Scrolls)과 타나임(Tannaim)문헌, 묵시문학(Apocrypha), 위경(Pseudepigrapha)등 성경외의 역사적 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연구해본 결과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율법에 대한 개념이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율법에 대한 개념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율법을 유대인이 구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였다는 의미에서 율법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였고 또한 바울이 서신서에서 주로 말하였던 개념이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한 개념이었는데 톰 라이트등 “역사적 예수 연구”하는 사람들이 연구해 본 결과 율법은 유대인들이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요구조건을 내세우시지 않고 오직 은혜로만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기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은혜를 누리기 위한 규범으로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죄를 사하시는보혈의 의미보다는  모델로서 행함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접근법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그동안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고 했던 전통적 방법을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 새관점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으로 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새관점 신학은 이성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적 신학을 정립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방법론이기에 스텐리 그랜츠에 의하여 도입된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이 새관점과 같은 성격으로 자연스럽게  이머징 신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새관점 신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선교적 공동체로 규정하고 율법을 은혜의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서 믿음과 칭의가 기독교에서 차지하던 자리를 없앰으로서  그동안 기독교 내에 있어왔던 분열의 원인이되었던 구원과 칭의에 대한 불협화음이 제거되었다고 생각되어  WCC가 1952년 독일 빌링겐 총회에서 채택한 구원과 믿음의 개념이 재거된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missio Dei) “가 새관점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에큐메니칼의 방법론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 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속죄의 개념

 

전통적 개념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는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던 아담의 죄를 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아담으로서 자신의 의를 믿는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시킴으로 우리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인데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러한 전가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관점신학에 의하면 아담의 범죄 문제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고로 은혜 가운데 이미 해결된 것이다. 

 

 새 관점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 은혜의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모든 민족에게 전해야하는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이를 성실히 수행했여야했는데 오히려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준 율법을 타 민족과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예수님의 희생정신으로 로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희생됨으로 인하여 새로운 율법적 모범을 보여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교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던 것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출하셨는지를 되새긴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불러 놓고 같이 유월절 식사를 하신 것은  출애굽하였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 생활(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사역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였다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선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던 이스라엘의 범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개인적으로 참 이해가 않되는부분이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죽으신 사건은 (마카비우스 사건과 같이 열혈당을 비롯하여)이스라엘 민족들이 힘으로 로마에 저항함으로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가 없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죽으심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일종의 무저항주의고 또한 예수님의 희생은 (유대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과 (죄를 씻어내는 보혈이 아닌)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이스라엘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은 민족주의적인 범죄를 용서하는 화해의 표시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가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반복하여 달리 설명한다면 전통적 개념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서 죄인되었던 우리를 속죄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에서 명하신 성소에서  속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이 사함을 받아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은혜?)언약 가운데 (죄를 대신 갚아주는 것과는 관계없이 재판장이 일방적으로 무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이)해결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희생되신 것(보혈의 개념이 아니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에 맺은 언약을 이방인에게 전파하여야하는데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가진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않음으로서 그 벌로서 받고 있는 바벨론 포로생활(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있다)을 청산하시고 새로운 방법론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이것이 새관점이 말하는 복음이다) 모든 사람과 민족에게 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전하는 복음도 이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전가(Imputation)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가교리의 의미가 있기에  예수님께서  두번째 아담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는 단순히 십자가 희생이라는 소극적 희생의 의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심으로 이루신 적극적 순종으로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키심으로 말미암은 적극적 의까지도 우리에게 전가 되었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범죄한 죄인이 단순히 죄값을 치룬 것만으로는 적극적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죄 값만 치루신 것이라면 이러한 소극적 의미로서의 회복이라는 개념으로는 에덴동산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고 에덴에서와 같이 언제든지 다시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약한 존재밖에 안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적극적 순종에 의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될 때만이 더 이상 범죄할 수 없는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방법도 있을 수 없고 행위로서 이러한 수준까지 오르려는 방법은 논리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율법의 의미

 

“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서는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율법주의라는 개념으로 바울이 율법을 해석하였다는 것을 잘못된 이해였다고 단언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이제껏 복음을 잘못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기술한 쿰란 문서등 역사적 자료를 연구분석하여 보았더니 유대인이 율법을 지켰던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salvation by works of the law)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맡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서신서의 내용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 대하여 질책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제껏  자신들을 이방민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민족의 상징으로 율법을 사용하였던 것에 대한 질책과 더불어 이방인들도 이제 유대인과 같은 율법이 없이도 새로운 규범을 보여주신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 유대인의 언약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한다. 

 

율법이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예수님의 역할은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또 다른 ㅜ방법을 제공하신 분으로 해석되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본을 받고 따르라는 또 다른 율법으로 해석되기에 이러한 해석을 신율주의 혹은 언약적 율법주의라고한다.

 

세례의 개념

 

새관점은 구원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에 세례의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 개념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부패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상징적인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는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의롭다고 선언함으로서 해결된 것이기에 세례는 속죄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개념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공동체 안에 참여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일수밖에 없는 것은 구원의 의미가 다른데서 오는 교회의 의미의 차이와 구속의 범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세례를 받고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구속받지 못한 세속의 영역에서 하나님나라 개념의 구속영역인 교회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모든 영역이 구속의 영역에 속해있기에 세속의 영역에서 구속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개념이 아니고 이미 구속의 영역에 있었지만 그동안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구성원이 되었다(즉 identity를 얻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

 

전통적 교회가 말하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개념으로서 이 땅에서는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나라를 3가지로 분류해볼수있는데 첫째는 통치영역으로서의 권능의 왕국과 두번째는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은혜의 왕국과 세번째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영광의 왕국을 생각해 볼수 있다.

 

"이미 그러나 아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받은 은혜의 왕국은 "이미"의 개념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의미한다. "아직"의  의미는 극치의 하나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이미 그러나 아직"의 의미 가운데는 성과 속의 영역이 혼재해 있는 것이다. 이는 흔히 헬라 플라톤 주의에서와 같이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할 수있는 거룩과 속됨의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구속영역으로서의 은혜의 왕국인 것이다. 이는 구속받지 못한 세속의 영역과 구별되어야하지만 성과 속을 구별하는 것에 대한 신칼빈주의적 반발로 인해 많은 혼돈이 있는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새 관점에서는 믿음의 고백과는 상관없이  모든 피조계를 구속의 영역으로 보는 관계로 세상과 구별된 조직으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유기체적 교회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기능적인 조직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모든 이머징 처치는 미셔널 처치의 개념이 성립된다고 볼수있다.  이머징 처치가 처음 소개될 때 나이트 클럽이나 술집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것을 보여준 것은 그냥 상식을 깬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관점 신학으로 본다면 자연스러운 상식인 것이다.

 

영성(spirituality)

 

이머징 처치가 전통적 교회와 다른 또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신비주의적 영성을 도입한 예배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영성의 방법으로는 관상기도와 미로걷기, 향, (????)등을 들 수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의 기본 개념은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에서 온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는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개념을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적용하여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을 하나님의 불꽃이나 내면의 빛등으로 표현하고있다. 관상기도는 바로 인간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는것을 도형화하여 예배의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미로걷기인 것이다.

 

미로는 달팽이 모양과 같이 빙글빙글 돌면서 걸어들어가면 가장 한 가운데 중심으로 향하게 되고 다시 계속 걸으면 바같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이머징 처치의 대표격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영성 부분에서는 리차드 포스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개신교 신비주의 계통의 퀘이커교도인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잊혀진 제자도"의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와 함께 레노바레 운동을 하면서 관상기도를 자연스럽게 개신교에 도입하면서 그 훈련방법으로 카톨릭의 트레스 디아스 운동을 이머징 처치에 도입시켰던 것이다.  

 

이머징 처치는 초대교회 예배학의 권위자인 로버트 웨버(Robert E. Weber)가 개념을 정립한 “고대-미래”(ancient-future) 개념의 예배와 영성을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고대의  관상기도는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주로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관상기도가 일반인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속죄의 개념이 없이도 신적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과 칭의에 대한 부담 없이 타종교와 자연스럽게 교류와 대화가 가능하기에 타종교와의 대화의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의 경우는 1962년부터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타 종교와의 대화의 수단으로 관상기도를 개발하기로 결정을 내린바있다.

 

 2. 미셔널 처치

 

이머징 처치는 우리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는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지만 미셔널 처치의 시작이 되는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missio Dei)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미셔널 처치가 이머징 처치의 모체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머징 처치를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라고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한 레슬리 뉴비긴과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개념에서 본다면 미셔널 처치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윤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셔널 처치는 레슬리 뉴비긴이 노년에 협력하면서 형성한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구체적으로  윤곽을 그릴 수 있었으며 미셔널 처치에 대한 작업이 구체화된 것은 1990년대 말에 나온 미셔널처치에 대한 책(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Gospel & Our Culture) edited by Darrell L. Guder. 1998)에서 윤곽이 드러나게된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이머징 처치와 구별되는 또 다른 형태의 교회가 아니라 이머징 처치의 다양한 형태중의 한가지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미셔널 처치를 보는 사람들은 미셔널 처치를 이머징 미셔널 처치(Emerging missional church:EMC)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부르기도한다.

 

 

 a. 형성배경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의 급격한 숫적 감소는  기독교의 존립의 위기를 가져오게되었고 이를 가장 먼저 심각하게 인식한 

 

레슬리뉴비긴이 주축이 되어서 WCC를 중심으로 선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 분석 결과 항상 서구 사회의 중심이었던 기독교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게되었고 교회의 위치가 이 전과는 상황이 달라진데 비하여 교회는 여전히 사회의 중심부에 있는 것처럼 아무 감각이 없이 이 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제는 이 전과 다른 모습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하게된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개념적으로는  이미 50여년 전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방법론으로 윤곽을 잡았지만 이를 교회론으로 정립하는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레슬리 뉴비긴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1980년대에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을 중심으로 모여서 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내놓은 결과로 탄생된 교회가 미셔널 처치인 것이다. 

 

GOCN이 내놓은 “미셔널 처치”의 개념이 완성되는데 있어서는 칼 바르트, WCC, 레슬리 뉴비긴, 데이비드 보쉬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특히 30여년을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영국의 성공회 주교였던 레슬리 뉴비긴의 경우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인도에서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영국에 다시 돌아왔던 시기의 영국의 기독교 상황은 기독교가 더 이상 사회의 중심에 있지 못하고 그야말로 거의 변방으로 밀려나 존립 자체에 위기를 맞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레슬리 뉴비긴은 칼 바르트, 라이홀드 니버등이 참여한 WCC의 52인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에큐메니컬의 방법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를 어떻게 확장 발전 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공개적인 토론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생각해낸 방법은 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방법보다는 에큐메니칼에 촛점이 맞추어져있었고 노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조직한 GOCN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문화적 상황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좀 확대해석 할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논의가 레슬리 뉴비긴이 몸담고 있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시작되면서 1932년 칼 바르트가 처음 사용하였던 용어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1952년 독일 빌링겐(Willingen)총회에서 모여서 에큐메니컬을 위한 구체적인 교회의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성과 자연과학과 소통할수있는방법론으로 개발된 역사적 예수 연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방법과 더불어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등 여러 가지 신학적인 발전과 보완 과정이 있은 후 최근에서야(1990년대)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미셔널 처치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수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특별 은총의 개념으로 이 사회에 확대 적용한 신칼빈주의적 특성을 그대로 나타낼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신칼빈주의는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속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의 구속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모든 피조계 전체를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보고 있기에 교회를 구속영역의 최종영역으로 보는 전통적 교회와 달리  이 사회의 문화적 상황을 수용하는 개념이기에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적 기초를 이룰 수 있는 개념으로 선택되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서구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위기를 잘못된 교회론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이 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신앙의 최종 목적이 된 결과로 말미암아 교회의 부패와 변질이 생겨났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일단 수단과 과정이 아닌 목적이 된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한 문화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문화는 더 이상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여주지 않기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셔널 처치와 같이 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론 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선교(Misdio Dei)" 개념은 신칼빈주의처럼 모든 피조계를 하나님의 구속영역으로 보기에  교회 밖의 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 개념을 정립하기에 가장 적합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 주창자들은 교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건물 중심의 교회 (christendom:AD313~최근)의 시기는 이제 끝난 것으로 간주하고 지금을 후기 기독교사회(post-christendom)로 봄으로서 앞으로 새롭게 등장하여야할 교회는 건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침투적으로 들어 갈 수있도록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선교하는 성육신적인(incarnational)교회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b. 특징들

 

 

 1.건물 중심의 교회보다는 삶의 현장을 중심으로 모인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역동성의 성격을 갖는다. 출발이 성부하나님이시며 최종 목적지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세계가된다.

 

기존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외쳤어도 그들에게 교회로와서 복음을 듣고 배우라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이기에 말씀이 선포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로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로  모여서 몸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미셔널 처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이 모든 피조계의 회복에 있으므로 그

 

있기에 전통적 교회와는 다른 개념의 교회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 즉 선교적 교회는 그 기초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를 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a sending or missionary God) 정의하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보내시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를 이 세상에 보내신다는 개념으로서  교회를 선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에서 유래된 세상에 보냄 받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세워진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는 최종적인 목적지가 될 수 없고 이 세상에 보내지는 과정이 되어야만 하며 이 세상에 보냄 받았다는 의미에서 미셔널 처치라는 용어 대신에 보냄받은 교회(sending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하고 혹은 선교적으로 해석된 삼위일체의  개념을 적용하여 삼위일체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한다.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온 교회는 우리 하나님의 성도들 자체를 유기체적인 교회로 보았기에 (being the missionary) 우리가 교회에 간다(going to church)는  개념은 christendom의 유산으로서 잘못된 개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정통적 개념의 교회가 아무리 선교에 역량을 집중한다 하더라도 미셔널 처치가 될 수가 없다. 단지 선교에 집중하는(mission focused)교회가 될 뿐이기에 교회 자체가 세상 속으로 보내져야지만 (Unchurched church)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달리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기존 전통적 교회는 건물중심의 형태로 모임을 유지하는 관계로  모이는 교회(attractional church)라고 하는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는 세상을 향하는(extractional) 원심력을 가지고 성육신적으로 보냄을 받았다고 하여 성육신적 교회(incarnat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성육신적이라는 의미는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해석함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선교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 데 따른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세상으로 보냄받았다는 것이고 이러한 보냄받음의 방식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와 같다는 뜻에서 성육신적 교회(incarnat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저자인 댄 킴벌에 따르면 미셔널 처치는 “주일뿐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으며 (세상 사람들과)같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격려하고 가르치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보냄 받은 무리들”이라고 정의하고있는데 이는 세상속은 보냄받은 교회 혹은 성육신적 교회로서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있는 것이다.

 

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기존 건물 중심의 조직화된 교회들과는 달리 세상 속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모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이는 형태에 있어서는 주일의 개념에서 자유로우며 주일보다는 평일에 자유롭게 삶의 영역(unchurched venue)에서 모인다. 

 

또한 클럽이나 스포츠센타등 활동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이머징 처치의 특징인 고대-미래 개념의 영성을 적용하기도하고 향(incense)과 미로걷기를 예배의식에 사용하기도 한다.(영국의 mission-shaped church인 Fresh expression group의 경우 새로운 수도원적 삶(new monasticism)이 적용되는 고대-미래의 영성을 홈페이지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주일의 개념이 희박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개념의 차이에서 생각해 볼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개념이 구속영역을 성도의 유기체적 연합의 범위를 넘어서 모든 피조계로 확장한데 따른 개념의 차이로 인한 것으로 볼 수있다.

 

2. 계시에서 경험으로

 

미셔널처치는  삶의 현장을 중심으로 모임이 만들어지기에 기존 건물 중심의 교회에서 전문 교역자의 말씀이 선포되며  말씀을 중심으로 모임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모임의 기준이 말씀이라는 계시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 서서히 이동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계시에서 경험으로의 중심 이동이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모임의 분위기를 위하여 여러가지 성상이나 향을 사용하기도 하고 신적인 경험을 하기 위하여 특정한 행동방식들을  도입하기도 함으로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플라톤주의적인 성과 속의 이원론적 원리가 다시 신앙의 형태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미셔널 처치의 근본 원리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보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성과 속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들의 모임의 형태에서는 성과 속을 나누는 신플라톤주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이론과 실제 형태의 모습의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3.믿음에서 따름으로

 

전통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것(missional church에서는 이를 old perspective라고 함)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기초한 제자도적인 실천적 삶을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충성하셔서 이 세상에서 성육신의 삶을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충성하셨던 모습을 본받아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충성된 모습으로 제자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를 믿는(Faith in Jesus)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충성(faithfulness of Jesus)을 본받아 따르는 것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율법주의라는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를 싰기 위한 보혈에 촛점이 맞추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삶을 살았기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시려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언약적 율법주의로서의 해석 때문이다.

 

미셔널 처치는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의 입장을 취하고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루터의 이신칭의도 부정하는 것이며 칼빈의 5대 강령도 적용할 수없는 새로운 관점인 것이다. 이는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기존 전통적 관점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기에 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이제껏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셔널 처치가 유니테리언의 교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유니테리언과같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같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성부 하나님만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했다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  칸트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소멸 시킬 수가 있다. 죄 사함과 칭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대표적인 실존주의자인 칸트의 실존주의적 생각은 실존주의 신학자인 바르트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도출해 낼 수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예수님을 따름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하나님으로 볼수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신데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면 예수님은 성부하나님보다 열등하신분으로 전락되며 이는 초기 기독교의 아리우스파와같은 몬쟁을 불러 일으킬 이단이 될 소지를 갖게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4장21절 이하)에서는 두 언약에 대하여 말하면서 분명히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약속을 받지 못하고 자유있는 여자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만이 유업을 이을 자로 묘사되고있다. 하지만 언약적 율법주의는 단일언약을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시내산에서의 언약에 종속시키고있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보는 것은 바로 약속의 자녀에게서 나신 둘째 아담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성장에서 확장의 개념으로

 

 

  미셔널 처치의 원리는 교회 자체의 성장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 개념이기에 그들은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전문 요원들을 훈련 시키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미셔널 처치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을 훈련 시켜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특히 새롭게 참여하는 교인들에게는 이전(old conventional role)과는 달라진 신학의 변화(theological shift)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요구되고 있다.  미셔널 처치 운동은 이전과는 다른 신학적 페러다임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이들에게 미셔널 처치에 대한 개념을 교육 시키면서 동시에 미셔널 커뮤니티(Missional community)를 어떻게 운영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훈련과 연습이 요구되는 것이다. 미셔널 커뮤니티는 구성원들에 대한  훈련을 통하여 공동체 확장을 위한 리더들이 양성되어야 만 공동체가 확장되며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 오는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틀(the new community paradigm)에 대한 교육을 하여야 하며 훈련을 통한 제자도의 삶을 가르쳐야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본을 보이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원리를 공동체에서 실천하여야하고 이러한 실천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훈련을 강조하였듯이 많은 훈련을 필요로하는 것이다. 이렇듯 미셔널 처치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서의 제자도에 대한 훈련은 공동체의 존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기에 항상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5.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미셔널 처치에서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모든 피조 세계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 받음으로 인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는 생각하면서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를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운동을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반 두루넨의 두왕국 국민으로 살기)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문화활동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정화를 거쳐서 보존된다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문화활동을 하는 주된 부류는 화란 개혁주의(신칼빈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이머징미셔널 처치가 있다. 

 

 이는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개념과 일맥 상통하며 현재적 하나님나라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서의 개념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완성의 개념으로 보기에 천상의 개념을 부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개념은 두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는 이 땅에서 죽은 자가 들어갈 낙원의 개념을 천상에서의 하나님나라로 보지 않고 다만 잠자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잠자는 자들이 새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부활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죽은 성도들은 천상에서 주의 얼굴을 보고 낙원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리모델링이 아닌 이전것 과는 관계가 없는)이 준비되어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에 있어서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은혜의 왕국과 (재림 후 천년왕국으로서의)영광의 왕국을 구분하지 못하고 택함 받은 이스라엘인 (통치 영역으로서의)권능의 왕국을 은혜의 왕국에 포함시킴으로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루신 은혜의 왕국을 영광의 왕국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이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으면서도 또한 에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믿음의 고백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과 피조세계가)구속 상태에 있다고 여기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이것이 그들의 복음이다)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6. 개인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화두는 메타네러티브이다. 이 메타네러티브의 관심사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메타네러티브 개념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은 별로 의미가 없다. 개인은 다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윤리 규범만 필요할 따름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교회에서는 기존 교회의 부패는 개인 중심적 신앙에서 연루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대의 많은 교회가 실용주의로 빠지면서 기복 신앙과 비지니스가 교회를 집어 삼키곤 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교회의 부패는 개인 중심의 신앙보다도 상업이 극도로 발달되고 있는  실용주의 사회에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든 책임은 개인 중심의 신앙형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포스트 모더니즘에서의 교회인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성경을 거대담론으로 봄으로서 관심의 중심을 개인에게서 공동체로 돌리고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개인보다는 공동체에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는 것은 미셔널처치의 레슬리 뉴비긴의 경우도 복음주의자들이 칭의는 이야기하는데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한 것과 또한 자신의 영혼구원에만 관심있고 (성경에서 말하는?) 총체적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복음주의자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생각해 볼수있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부분이 개인의 구원과 신앙고백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종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듯이 바울의 서신서의 많은 부분이 개인의 신앙고백에 촛점이 맞추어져있다. 그래서 이머징미셔널처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복음서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고서  예수님을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분이라는 데 촛점을 맞춘다. 다만 개인은 하나님 나라 개념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는데로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그동안 바울 복음을 연구하면서 사복음서의 예수님과 서신서에서 말하는 바울의 복음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전제하에 많은 연구를 하였던 슈바이쳐나 불트만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자신의 많은 논리의 근거를 슈바이쳐와 불트만에서 가져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하는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성경에 대한 접근법이 같았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서신서의 바울과 복음서의 예수를 서로 대립시켜 놓고서 서신서를 통하여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을 전적으로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의 기대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이러한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 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처럼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반면 브레데와 같이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하고있다.  또한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이란적인 영지주의적 성격의 실존주의적 개념에서 예수를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 함으로서 복음서를 유대교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율법을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있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은 슈바이처와 불트만과 같이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슈바이처의 후기유대교적 메시아 개념과 불트만의 영지주의 성격의 실존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유대교와 예수를 연결 시킨 언약적율법주의 개념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은 공동체라는 전제가 없는 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고 언약적율법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의 미셔널 처치는 반드시 공동체를 전제로 한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것이다.

 

 

 7. 이머징 처치로서의 미셔널 처치

 

이머징 처치의 실질적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머징 처치를 전부 미셔널 처치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미셔널 처치는 이머징 처치의 여러가지 형태 중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이머징 처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 좀 더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 미셔널 처치는 선교라는 실천적 주제에 촛점을 맞추어 형성된 이머징 처치라고 할 수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머징 미셔널 처치(emerging missional church)라고 부르고 있다.

 

"이머징 처치“ (emerging church)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의 저자인 댄 킴벌은  본인이 직접 이머징 처치에 깊이 관여하여 활동하고 있는 (Vintage Faith 교회의) 목사로서 또한 미셔널 처치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기에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이머지셔널 처치(emergissional church)라고 부르고있다.

 

조직적으로 커다란 그룹을 형성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미셔널 처치(mission-shaped church)인 프레쉬 익스프레션(fresh expression group.www.freshexpressions.org.uk)의 경우는 향을 사용하는 것이나 고대-미래 예배의 형태를 도입하면서 활동 영역이나 예배 형태에 있어서 전형적인 이머징 처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인 기반을 볼 때 이머징 처치의 경우 이머전트 빌리지(emergent village)의 선두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본인 스스로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인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접목 시킴으로서 공통적으로 신율법주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c.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특징들에  대한 신학적 고찰

 

미셔널 처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가지 신학적 특성들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들의 신학이 전통적 개혁주의신학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유대 공동체를 언약을 맡은 선교적 공동체로 보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기초로하고있다. 선교(mission)는 하나님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땅한 기본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선교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에 적용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개념을 제한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으로 제한하는 것은 경륜적 삼위일체의 다양한 개념을 손상시킬 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다양한 면들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있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개념마져도 손상 시킬 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를 구성하는 기본 골격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듯이 이스라엘 공동체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는 선교적 공동체로 보고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감당해야했던 선교적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못하였기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어떻게하여야 선교적백성으로 살수있는지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분으로 보고있다. 즉 예수님도 선교적 관점에서 성육신하셨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몸된 교회도 예수님의 선교적 역할과 같이 성육신적인 선교적 교회가 되어서  세상 속으로 보냄받아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위에 세워지는 전체적 그림은 신율법주의 즉 언약적 율법주의 라는 바탕위에 그려지는 그림인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대표적인 언약적 율법주의로는 톰 라이트가 중심이 된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이 있다.

 

“하나님의 선교”(Mssio Dei)는 1932년에 칼 바르트에 의하여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1952년 독일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WCC(IMC)총회에서 레슬리 뉴비긴이 의장으로 있었던 25인 위원회에서  에큐메니컬을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어 WCC 의 기본 선교 개념이 된 것이다.

 

이렇게 최종 목적지를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에서의 구속의 개념을 확대적용 시킨 것이다,

 

이렇게 선교의 대상이 모든 피조물에게 확대된 것은 100여년 전에 신정국가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화란 개혁주의를 모든 다양성이 공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인 현대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서 부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100여년전 화란은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신정국가이었기에 화란 개혁주의 즉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가 별 문제없이  정착될 수있었지만 카이퍼의 제자였던 도여베르트의 영역주권론을 기독교인이 별로없는 지역에 까지 확대 적용시킴으로서 십자가로 인한 구속의 영역과 통치의  영역의 구별이 없이  구속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하나님나라 개념이 신앙의 고백이 없는 통치의 영역까지 확대시켜 버린 것이다.

 

북미에서 미셔널처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있는 곳인 칼빈 신학교와 북미 개혁교단(CRCNA)의 경우 카이퍼의 후예인 신칼빈주의자들이 깊이 관여되어있는 것을 보면 미셔널처치 운동과 화란 개혁주의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수있다. 

 

그 중에 칼빈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의 경우 개혁주의자가 아닌  레슬리 뉴비긴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화란 개혁주의와 연계시켜서 미셔널 처치로서의 기독교 세계관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최근에(2005년) 기독교 세계관운동의 대표적인 저자인 알버트 워터스와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 Biblical Basics for a Reformational Worldview_Albert Wolters)”을 같이 저술하면서 화란 개혁주의를 기초로한 도여베르트의 기독교 세계관을 세계관과 선교의 접목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관점으로 개정판을 출판하게 된 것을 보면 카이퍼의 일반은총과 도여베르트의 영역주권 개념이 결국 미세널 처치로 종결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의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의 개념을 선교적인 관점에서의 삼위로 보며 교회를 선교의 수단이며 과정으로 보고서 선교의 최종 종착지가 교회 대신에 세상 즉 모든 피조계를 선교의 최종 목적지로 보고있는 것이다. 즉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경유지인 것이지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도록 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생각인 것이다.즉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몸의 개념이 신칼빈주의에서와 같이 모든 피조계로 확대되는 것이고 이는 모든 피조계를 구속받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이제껏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성도 중심으로 모여 예배하는 곳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선교적 교회는 개인의 신앙고백을 전재로하는 전통적 교회와 기능만 다른 교회가 아니라 본질이 다른 교회인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서의 최초의 교회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보고 있다.(엄밀히 말한다면 미셔널 처치의 처치 개념은 공동체의 개념이다.) 즉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방 민족에게 전해야할 선교적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최초의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y)로 봄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주의로서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것이 바로 새관점이다.)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이제껏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한  율법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주장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즉 바울이 말한 것은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한 질타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과 같이  새 관점(NPP)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 이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음으로서 이에 대한 징계로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었으며  이 바벨론 포로생활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시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incarnation)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베벨론 포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감당하시고자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톰 라이트의 주장)이스라엘의 바벨론 포수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서 어떻게 선교를 해야하는지 예수님께서 몸소 로마군인에게 (역시 톰 라이트의 생각)희생되는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물론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새관점은 구속에 대한 개념 보다는 희생에 대한 개념이지만 미셔널은 신칼빈주의의 구속 개념을 새관점의 희생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서 비슷하지만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WCC와 레슬리 뉴비긴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개념을 가지고 (구속영역을 확대 적용한) 신칼빈주의를 (톰 라이트의 새관점으로서의) 언약적 율법주의로 바꾸어 버림으로서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 개념의 이머징 처치인 미셔널 처치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 것이다.

 

신칼빈주의 개념에서 출발한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이(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편승하여) 신자유주의로 대체되면서 신칼빈주의에서의 교회론(attractional church)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미셔널 처치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진 미셔널 처치의 교회론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은 단일언약론을 기초로한 교회론을 근거로하기에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미셔널 처치는 이미 개혁주의의 노선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속해있는 이 곳이 개혁주의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창조 타락 구속의 공저자인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이 스스로 철저한 개혁파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이클 고힌 스스로 얼마나 교묘히 개혁주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성육신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아담으로 인한 죄가 아닌 선교적 공동체로 택함받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은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로마의 황제를 왕으로 섬기고9 있던)이스라엘의 죄악을 감당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정치적으로) 희생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희생당하셨던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God became King;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하나님이 현세적으로 왕이 되셨다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개혁주의에서는 원래 하나님이 왕?이셨지 왕이 되셨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개념을 피조계의 모든 영역에서의 왕으로서 현세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이러한 과정의 논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모이는교회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선교의 미셔널 처치는 단일 언약론의 성격을 가진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기초로한 교회일 수밖에없는것이다. 

 

이러한 새관점의 개념을 수용하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가(imputation)개념에서 생각해 볼 때 새관점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닌)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우리에게 전가된(Imputation) 아담의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아담의 범죄로 인한 문제는 (창세기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즉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언하심으로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의의 전가(Imputation)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무죄선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이기주의(선교적 사명을 외면, 은혜의 율법을 이방인과의 구별수단으로 사용, 로마황제를 섬기는 것 등)로 포로 생활하는 것 등을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같이 바벨론 포수의 이스라엘(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바벨론 포수생활을 하고있었다고 주장한다)을 용서하신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다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선교적 관점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이스라엘의 선교는 계속될 수 있었고 바울의 서신서들은 전통적 해석과 달리 이방인을 이스라엘 선교적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으로의 해석은 단일언약론의 성격을 가진 현재의 미셔널 처치의 하나님의 선교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이기에 톰 라이트의 새 관점은 바로 미셔널 처치의 기본적인 신학적 기반이 될수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방법을 통하여 주후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를 선교적 공동체로 해석함으로 가능했던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보는 유대교에 대한 해석과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WCC에서 레슬리 뉴비긴을 중심으로 개발된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GOCN에서 수용하고 정립하면서 미셔널 처치라는 교회론을 만들어 내었기에 이스라엘을 선교적 공동체로 해석하고 있는 새관점(NPP)이 자연스럽게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반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의 새 관점(NPP)으로는 신약에서의 교회(missional church)를 언약공통체인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볼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율주의 성격의 단일 언약론을 기초로하는 신약의 교회 형태인 미셔널 처치가 이루는 공동체(missional community)가 구약에서의 최초의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y)인 유대교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적 현상은2000년 가까이 신약의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잘못된 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오해에서 기인한 결과물들이라는 것이고 또한 히틀러가 범한 유대인학살(Holocaust)도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인 “우리가 이제껏 성경을 잘못 이해하였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는지 생각해 볼수있는 사건인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윌리암 데이빗 데이비스(William David Davis)는 주위에 절친한 유대인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경우처럼 2차 대전 중 유대인을 보호해주면서 유대인들의 희생은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으로 5년간(1942-1947)의 집필과정을 거쳐서 “바울과 랍비 유대교”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고 이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한 신율법주의의 성격을 갖는 논문으로서  새관점(NPP)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단일언약론으로 해석하게 해 줌으로서 구약의 유대교와 신약의 교회를 단일 성격의 공동체로 규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에서 생각해 볼수있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였던 칭의(Justification)의 개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칭의론”의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레스에 의하면 칭의 교리는 지난 16세기 동안 서구교회의 균열을 만들고 이 균열을 지속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등장과 더불어 더 이상의 교회 분열이 없어야한다는 생각에 교회 분열의 핵심이 되었던 칭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배제시키는 쪽으로 교회와 신학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최근에는 WCC 총회에서 더 이상 칭의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전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더불어 형성된 칭의 교리”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기에 칭의 교리를 배제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선택되어질 수밖에 없는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칭의 교리는 율법을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율법주의와 대립될 수밖에 없기에 칭의 교리가 배제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신율주의 신학만이 자연스럽게 유대교와 접목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을 은혜의 상징으로 해석하는“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을 최초의 선교적 공동체로 보는 미셔널 처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대립관계가 아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연결된 공동체로 보는 관점이기에 인류의 더 이상의 갈등과 분열을 막고자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단일 언약론을 기초로하고있다.

 

앞부분의 하나님의 선교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이 없는 단일 언약론의 성격을 보이고있다. 예수그리스도의 희생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선교적 사명을 완성하는데 촛점이 맞추어져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표현하고 있듯이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은 하갈에게서 난 종으로서의 언약이고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로서 유업을 받을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 종과 자유자를 대비시키고있다.

 

 종과 자유자는 완성을 위한 연속된 과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고 이삭의 자녀와 이스마엘의 자녀는 분명히 다른 줄기인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음을 분명히 밝히시고 계신다.(롬9:8)

 

하지만 미셔널 처치의 선교적 교회론은 이런 구분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선교적으로 일하신다는 개념이지 종, 자유자, 첫째 아담, 두번째 아담, 육체를 따라 난 자, 성령을 따라 난 자등의 구분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으로 모든 구별을 통일 시켜버린다. 즉 단일 언약론을 따르고있기에 이러한 단일 언약론은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법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신약을 새로운 율법의 개념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일언약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톰 라이트(N.T,Wright)가 있으며 그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개념이 언약적 율법주의로서의  미셔널 처치의 기본 골격을 받쳐주고있는 것이다.

 

 

3. 새로운 관점

 

미셔널 처치는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크리스텐덤(christendom) 이후의 상태에 있다고 전제하고서 지금의 크리스텐덤의 교회형태로는 더 이상 기독교의 존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서 기존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신학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신학적 관점을 도입하여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 주창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정신인 해체와 재건에 가장 적합한 신학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을 선택하고있는데 이는 어거스틴으로 부터 시작된 개혁주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앞으로의 세대(for the age to come)에 가장 적합한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운동의 중심인물인 “새로운 교회가 온다”(the Shaping of Things to Come)의 저자인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자신의 저서(the road to missional)에서 미셔널 처치 운동은 새관점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작품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기본 신학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새관점(NPP)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던 전통적 방법과 달리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를 근거로 성경을 해석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을 사용하였기에 학문이라는 관점으로서의 신학이면서 동시에 이성과 자연과학과의 소통이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론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전통적 방법과 달리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접근 방식으로서(이성적으로 설명이 되면 더 이상 신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실존주의 신학자(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바르트, 불트만등)들과 맥락을 같이 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초창기 주창자였던 슈바이처와 불트만의 연구를 토대로함은 물론   실존주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에게서 받은 영향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은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을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다면 신앙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논리이지만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인간적인 생각이라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논리인 것이다. 즉 믿음이 아니라 불신이 바탕이 된 신학적 논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이전의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르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성경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서 또 다른 형태의 자유주의(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의 결실로 만들어진 새관점(NPP)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현재의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모습이고 새 관점으로서의 선교적 신학(the missional theology)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출발한 루터와 칼빈의 줄기가 아닌 고대로부터 출발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과의 관계성을 애써서 부인하려고한다.

 

NPP의 대표적인 인물인 톰 라이트(N.T.Wright)를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칭할 때의 복음주의는 개혁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용어이며 톰 라이트가 복음주의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톰 라이트 이전에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성경을 부인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톰 라이트는 성경을 확고히 세웠던 학자였기에 붙여진 칭호인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이전 복음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새관점신학자인 것이다.

 

 

4. 대연합(the great convergence: the emergency and the new perspective)

 

 

현재 영국에서 missional community 운동을 하면서 다가올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an evangelical theology for the age to come)이라는 사이트(http://www.postost.net/)를 운영하고 있는 Andrew Perriman에 의하면 앞으로의 교회는 성경이 재해석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을 기초로 한 이머징 미셔널(emerging missional praxis)운동이 기본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미셔널 처치는 NPP와 상관없이 WCC를 중심으로 레슬리 뉴비긴과 데이비드 보쉬의 영향 하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 관점을 WCC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선교라는 기본 틀이 같다는 점을 살펴보면 새 관점이 자연스럽게 미셔널 처치의 기본 신학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그림이 이를 요약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주창자들은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기존의 개혁신학과 전통적 교회가 소멸되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의 그림과 같이 새관점과 이머징 처치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의 출현이 의미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현대 교회의 퇴출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교회가 전통적 교회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서의 신학과 교회의 변화는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겠지만 결국에는 이전에 정립되었던 보수적인 신학이 역사적 시각에 맞추어 새롭게 정립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질 것(Question 1)과 역사적 변화의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관점으로 형성된 신학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이머징 신학을 통한 변화(Question 2)를 수반하면서 종국에 가서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실천적 교회형태인 미셔널 처치 운동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머징미셔널처치에 대하여 설명되는 위의 그림은 성경을 명제적 진리로 보지않고 네러티브로 봄으로서 이를 역사적 상황 에 맞추어(contextualization) 새롭게 해석한 새관점(NPP)에 이머징 신학을 접목시킴으로서 이머징 미셔널 운동(emerging and missional praxis)이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단순한 교회의 형태적 변화가 아니라 신학의 변화에 핵심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라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존립 근거에 대한 표면적인 명분은 현대 문화에서의 전통적 개념의 교회가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는 추세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회가 성육신적(incarnational)으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좋은 성경적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는 실제의 내용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관점과는 전혀 다른 새관점이라는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전통적 교회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전통적 교회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새로운 형태가 되는 것이다.

 

 

5. 모이는(Attractional)교회 vs 성육신적(Incanational)교회

 

미셔널 처치를 전통적 교회와 구별할 수있는 가장 두드러진 외적인 형태가 바로 모이는 형태의 교회냐 아니면 성육신적으로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냐 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주창자들은 교회가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교회의 존립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방법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상관없이 1932년 칼 바르트에 의하여 정립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에 의하여 성립된 변화된 교회론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 하나님의 선교"에서 이야기하는 교회는 교회의본질 자체를 선교와 동일시하는 개념이지만 전통적 개념의 교회는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는 될 수있어도 교회 자체가 선교기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기존의 전통적 교회가 미셔널 처치의 형태와 같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성육신적(incarnational)교회의 형태로 변화를 추구한다면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상황적 대처가 아니라 WCC의 “하나님의 선교”논리를 수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전통적 개혁주의의 길을 떠나서 새 관점(NPP)으로의 신학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기에 이는 앞부분에서 논의한 대연합(the great convergence)의 과정에 돌입하는 것이며 개혁주의를 기초로 한 자신의 이전 모습과는 대립되는 형태로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혹은 교회 성장을 위한 대안으로서 미셔널 처치로의 전환이 선택되어진다면 이는 미셔널 처치의 속성인 기존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닌  무교회주의(Unchurched church)로 인하여 교회를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해체의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육신의 의미를 선교적 관점으로만 제한함으로서 성육신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잘못되게 해석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가져올 수밖에 없는 결과일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선교적 관점보다는 구속 사역을 위한 피 흘림이 중심이 되어야할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에서 자유 할 수 없었기에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속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은 필연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가능할 수있는 조건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격이실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선교적 공동체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삶을 위한 것이라면 구태여 성부하나님과 동일한 위격이신 성자하나님이 직접 감당하실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오히려 성육신을 선교적 의미로만 제한 시킨다면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위격이 성부 하나님과 차이가있다는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것이고 이는 초대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위격을 성부 하나님과 차등이 있다고 주장했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받아야했던 것과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단순히 선교적 개념으로의 삼위로 이해한다면 니케아 공의회에서의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과 같은 성격의 논쟁이 재연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구속사역의 개념이 적용된 성육신의 개념이라면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적용될수있는 개념이기에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성육신적이라고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구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성육신적으로 세상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또한 구속에 대한 개념이 없기에 아무 개념없이  성육신적 교회(incarnat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적절하지 않게 사용하고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한 요한복음 20:21의 한 구절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는 공동체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과정이 수반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은 생략하고 단순히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논리에 부속품처럼 말씀을 끼워놓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에있어서 그가 예수님과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없었던 때문이고 그가 성공적인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인하여 거듭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요20:21절에 이어서 따라오는 말씀은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신 후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상태가 죄에 대하여 깨끗함을 입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가능한 경우인데 이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하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한 죄사함의 과정이 있었기에 성부하나님과 동등하신 성령 하나님의 내주 하심이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신자의 삶은 더 이상 사람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이 주체가 되심을 선언하는 것이고 사도행전이 성령의 사역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 가운데 성령의 내주 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새관점에서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보다는 도덕적으로 회개하는데 더 비중을 두고 있으며 회개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한 후에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윤리적 제자도의 삶을 강조함으로서 성령께서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 원인과 동기가 되신다는 개혁주의적 입장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시기에 단순히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힘을 실어주는 수단이 되실 수 없는 분이시이며 우리가 주체가 되는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고 사람의 일일 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성육신적 삶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될 때 하나님의 사역이 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마음을 먹고서 훈련과 노력으로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삶은 아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하나님나라는 신인 협력(Synergism))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 하면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ㅜ리가 주체가 되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사단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면서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숨은 그림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고 이러한 결과를 우리가 사단의 종 노릇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 할 수 없고 이러한 일 또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근거로 내 세우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우리의 역할이 새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공로(work)의 개념이 적용된다면 이는 우리가 전적 부패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로 인한 것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무시한 사단의 계략에 참여하는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다.

 

 

6. 죄의 인식

 

 

앞 부분에서 잠시 언급한 죄에 대한 인식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가에 대한 인식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사단의 종이 되느냐의 갈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인 것이다.

 

인간이 전적 부패한 존재가 아니라면 주어지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일에 협력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간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한 공로가 인정이 된다는 것이고 이러한 결과로 만들어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에 의한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하나님같이 높은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어떠한 상태의 죄인이냐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기독교 교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율주의를 기초로하고있는 새관점신학과 이머징미셔널 신학도 인간의 공로를 기초로하는 신인협력(synergism)을 인정한다면 오직 하나님만의 열심(monergism)을 인정하는 개혁주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죄의 전가)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의의 전가)는 것이다.

 

반면에 신율주의 성격을 띤 언약적 율법주의로서의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에서 시작된 인류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마치 재판장이 일방적으로 죄없다고 선언한 것과 같이) 이미 (선언에 의하여)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통적인 죄의 개념과 달리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말하는 죄는 이스라엘이 선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을 죄를 말하고 있다. 즉 해위가 문제가 있어서 죄인이 된 것이다.

 

전통적 개념에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면 새관점에서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수용하고 있는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의 내용은 아담과는 관계없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를 말하고 있다.. 즉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방인에게 전하지 않고 언약 백성으로서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라고 준 모세의 율법을 자신들의 민족적  욕심을 위하여 (은혜로 주신 율법 특히 음식법, 할례법, 절기법 등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여야 할 선교적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로마 황제를 우상으로 섬기는 죄를 범하였던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예수님은 따름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행위를 잘못한 것에 대한 것이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는 어떠한 행위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길을 제시해 주신 분이 되신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나오는 또 다른 개념은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행위가 요구되는 미셔널 처치의 특성상 자유의지에 대한 긍정적 생각은 필수적이다.

 

미셔널 처치가 성육신적으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개념은 인간이 전적 부패한 존재라는 칼빈주의적 개념과 달리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펠라기우스적 생각에서 나온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죄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는 제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진 생각에서 새관점을 수용하는 미셔널 처치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선교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존재의 의미와 교회의 의미도 바꾸어버림으로서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해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죄는 행함 이전에 존재론적인 죄에 대한 것이기에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행함에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죄 사함과 더불어 거듭남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심으로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되는 것이다.

 

반면에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가 아니기에 거듭남의 개념보다는 회개와 행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방법론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윤리적인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 신앙에서 고백하는 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존재론 적인 것이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새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 죄는 단순히 “역기능”과 “장애”일 뿐인 것이고 이는 우리의 노력과 훈련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전통적 관점으로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인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의 기반을 이루는 새 관점에서는 우리가 죄를 짓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고 오직 성령의 전적인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공로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반하여 새관점에서는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가고 공로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로서 성육신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로를 이루기 위한 삶이 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공동체가 톰 라이트의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톰 라이트의 저서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도는 성령이 우리의 주체가 되셔서 성령에 의한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삶이고 이는 바로 우리가 어떠한 상태의 죄인이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떠한 것인가의 차이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에서의 생활이 구원받은 자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미셔널 처치의 생활은 구원 받을 자로서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7. 교회의 의미

 

전통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아담의 죄로 인한 나의 죄를 사함 받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함으로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반면 새관점에서의 교회는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구속사역과는 관계없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통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수생활을 종식시킴으로 율법에 대한 실패에서 자유케된 것과 그 대안으로  율법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본을 보이신  희생정신을 본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서 우리의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믿을 전제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더불어 앞으로의 행함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전통적 개념의 교회와는 달리 기능적인 요구가 주어지는 무리들의 모임인 것이다.

 

이러한 모임의 형태는 일보다는 성도의 교제가 더욱 강조되는 코이노니아 개념의 교회보다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더 적합하기에 미셔널 처치라는 용어보다는 미셔널 커뮤니티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의 교회는 개혁주의에서 생각하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몸된 교회라는 개념보다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기 위한 수단과 과정으로서의 기능적 교회이기에  교회 자체에 최종적인 의미와 형태를 부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몸된 교회이기에 안식의 주인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쉼과 안식이 허락된 곳인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의 교회는 일한 것을 약속하는 기능적 교회이기에 예수님의 의미가 쉼과 안식을 주시는 분이 되실 수 없는 것이다.

 

모세 율법에서 안식일을 범한 자는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을 죄인된 인간이 침범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일은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이기에 우리의 일이 추가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미셔널 처치에서와 같이 교회 공동체가 일할 것을 요구하는 기능적인 곳이 된다면 그곳은 더 이상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교라는 일이 요구되는 선교적 교회는 일할 것이 요구되는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와 특성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기에 결국 미셔널 처치는 이스라엘이라는 유대교의 연장선상에 있게 되는 것이고 이는 WCC가 개발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만드는 일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교회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존재론적인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무리의 형태이지만 새 관점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속죄하심으로 세우신 교회가 아니다. 

 

새관점으로의 미셔얼 처치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방나라에게 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와 더불어 주어진 율법을 민족주의적으로 이방인과 구별하  는 수단으로 사용한 죄로 인하여 바벨론 유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선교적 언약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 잘못된 행위가 용서되어서 우리에게까지 문이 열리게 되었기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개념이 아닌) 십자가 희생을 믿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의식인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된 무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개념보다는 공동체의 개념이 적용되며 전통적 기독교가 유대교와 전혀 별개로 움직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새관점에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죄로 인한 바벨론 포로생활을 청산시키는 용서와 화해의 개념이고 전통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보혈에 의미가 있기에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셨고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 즉 그리스도의 나라를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인간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죄에 대한 인식과 차이를 보이는 펠라기우스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8. 믿음보다는 제자도

 

인간이 얼마니 부패한 죄인인가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신앙생활은 자연히 하나님의 주권과 더불어 나 자신은 죽고 오직 내 안에 성령님께서 내 삶의 주체로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반인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삶을 요구하기에 신앙생활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정통교회와는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즉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따름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유형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예수님을 따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에 따름의 방법론으로 제자도가 도입될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제자도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게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도입된다면 물론 긍정적으로 볼 수 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하여 방법론으로 도입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될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신앙고백 후의 성도의 삶은 자신의 옛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것이다.  대에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며 자신은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faithfulness)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삶이되는 것이다.

 

 반면 새 관점에서는 은혜(?)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었다 하더라도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쉼과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실히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자신의 저서(Simply Jesus)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묻는 말에 가장 간단히 대답한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분이라고 언급하였듯이 새관점을 기초로하는 미셔널 처치의 방법론으로는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교본으로 하여 자신이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가 되는 것이다.  새 관점에서는 율법조차도 은혜에 머물기 위한 원리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최종적 구원을 얻어야하는  펠라기우스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훈련방법론이 정립이 도히어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자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것이다. 자녀는 아버지께 어떻게 행하여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지지 않고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안될 것이다.

 

전통적 교회들이 부패하며 윤리가 실종되어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새 관점과 이머징 미셔널 처치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새 관점에 의한 삶이 윤리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관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면 윤리를 얻으려다가 구원을 놓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9. 세례의 의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개혁주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담의 죄로 인한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서 나의 죄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음으로서(이신칭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되고자하는 의식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새 관점에서의 세례의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모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의식인데 이는 구원받았다는 사실보다는 최종적 구원을 받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Identity)을 얻었다는 의식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다소 복잡한 개념이다)  이스라엘로 제한되었던 언약백성의 공동체가 그리스도께서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죄 값인 바벨론 유수(the Exile)의 문제를 (최후의 만찬의 의식을 통하여) 해결하시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보혈의 의미가 아님)되심으로서 공동체의 문이 자신에게 열릴 수 있었음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에 참여하는 신분(identity)을 획득하는 의식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에서 전하는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전통적 개념의 “이신칭의”가 아닌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지 바울이 전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미셔널 처치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서 최종적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즉 새 관점에서 세례를 통하여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언약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이 주어졌다는 것이지 전통교회에서 말하는 칭의 개념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현세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세례라는 성례 자체를 (현세적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대속의 개념이 없기에)통치영역과 구속 영역의 구분이 없는 현세적 하나님로만 보고 있기에 단순히 회개와 더불어 육체적 세례를 통해서 (Identity를 얻는 것과 같이) 현세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상태는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초월할 수가 있는데 예수님과 더불어 제자의 삶은 산 베드로가 인간의 힘으로는 실패를 하였어도 베드로가 진정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으로서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새관점이나 미셔널 처치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베드로의 상태를 (이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세례가 없는 물세례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주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성령 세례는 오직 성 부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힘입어 깨끗하여진 후에야 거룩하여질 수 있고 성부하나님과 동등하신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없기에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 성령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름만 성령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실은 스스로를 위장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속죄의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성경적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고 성령 세례가 없는 육체적 세례만으로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가 세례를 통하여 현세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최종적 구원을 선을 행함에서 찾는다면 이는 유일한 의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대신하는 또 다른 의를 이루기 위한 행함이 되기에 결론적으로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는 개혁주의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10. 예배

 

예배의 형태에 관한 부분이  미셔널 처치가 개혁주의 교회와 비교될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일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이 세상과 구분된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의롭다고 구별된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림으로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일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형태에는 물론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참석할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참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단지 참관자(observer)일 뿐이지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예배는 믿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는 개혁주의 교회와는 달리 예배가 드려지는 시간과 장소, 사람의 구분이 없으며 오히려 예배를 선교적인 관점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드려지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에 성경에서는 어떻게 예배가 드리지기를 원하는지 살펴봄으로서 미셔널 처치의 예배형태를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시작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것이 최초의 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예배드릴 수가 없었고 출애굽을 하고서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에 앞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을 하였다는 것은 세속사회로 상징되는 애굽과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속과의 구별이 필요하였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세속의 더러운 것에서 구별되시고 분리되신 분으로서 죄로 오염된 우리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없기에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을 거룩하게하기 위하여 세속으로부터의 구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출애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서야 섬김을 받으셨던 것은 거룩에 참여하고자하는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고 다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일 뿐인 것이다.

 

아직은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부터 경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경계를 정하시고 그 경계를 넘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서는 자는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도 죽음을 면할 수 없도록 하신 것이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의 경계마져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심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그 길이 바로 피의 제사이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길이 되셨던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 말하는 언약은 피로 완성되는 과정을 생략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심으로 인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성막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삶의 한 가운데 실현 시키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임께서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서 백성을 만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삶 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피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반복되는 행위의 죄에 대한 임시 방편의 해결책으로는 인간이 가지고있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막에서의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하여 깨달을 수밖에 없게되었고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상태로는 단번에 영원히 드려지는 피의 제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수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죄라는 문제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단순한 행위만의 문제였다면 단번에 드려지는 영원한 제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였던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경험을 통해서 깨닫도록 하고자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가 하나님보시기에 악하므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머징미셔널 처치에서와 같이 인간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 갈수없기에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오직 은혜에 비추어 볼때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막의 제사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죄라는 문제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가벼운 행위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존재론적인 불가항력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야만 인간은 오직 단번에 영원한 제사들 드리신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성부 하나님과 동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면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예배는 세속과 분리가 되어 드려져야한다.

 

미셔널 처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출애굽을 하였던 것과 같이 예배의 첫 번째 조건인 분리가 없다. 미셔널 처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교회를 최종 목적지로 보고 있지 않기에 세속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흩어지는 성육신적 교회이기에 세속의 영역 속에서 세속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린다. 어떤 때는 스포츠 센타에서 예배드리기도하고 어떤때는 나이트 클럽에서, 혹은 가정에서 예배드리기도한다. 분리의 의미를 가진 거룩의 개념이 없는 행위인 것이다. 이는 마치 출애굽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려하거나 시내산에서의 경계를 무시하고 거룩한 땅을 밟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보혈이 없이 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꼭 삶의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려한다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예배드려야하며 다만 불신자들이 참여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틀을 깨끗이 준비한 후에야 시내산에 모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그들을 준비시켜야할 것이며 예배의 시간이 전도나 교제의 시간과는 구별되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피의 제사가 있어야한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에만 의존할 뿐 언약을 완성 시키는 피의 제사가 없다.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인간이 탐욕과 우상숭배, 심지어는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를 우상으로 섬긴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섬기는 죄를 용서하기 위한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새관점이 해석하는 유월절의 의미는 출애굽하기 전날 애굽에서 문설주에 바른 피로 인하여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이스라엘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해석한다. 보혈의 의미를 떡의 의미로 왜곡되게 중심이동을 시킴으로서 전혀 다른 해석으로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구약을 해석하기에 이스라엘을 선교적 공동체로 보는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잘못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피의 제사가 아니라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의 의미로 바뀌어 버림 것이다.

 

셋째로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구별되는 거룩한 영역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지만 삶의 현장과는 철저하게 분리되어있는 장소였다.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분리된 성소의 개념 마져도 무너뜨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성막이었다. 

 

신약에서는 지리적 구별보다는 영적인 구별을 중요시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분리되어야 할 성소마저도 거룩의 개념이 없는 교회로 만들어 감으로서 예배를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열린 예배로서 스포츠센터나 나이트클럽이나 아니면 직장이나 가정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참 좋고 신선한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보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분리의 개념이 훼손되는 것이며 거룩한 교회가 세속과 구분되는 분리의 개념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막이 이스라엘 회중 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과 구별이 되었듯이 예배는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과 구별되는 가운데 드려져야 되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에서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고 이차적으로 믿는 자들의 신앙의 향상과 믿지 않는 자들에 전도하는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전통적 교회와는 달리 선교를 제 일차 목표로 하고 있기에 모든 예배의 형식과 용어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재조정되어있고 예배 자체를 선교적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 전통적 교회와의 많은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1. 의의 전가.

 

 

칭의의 개념은  종교개혁에서 가장 핵심되는 용어였고 교회의 존립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선교적 공동체로 보고있는 미셔널 처치와 새관점은 그들이 행위의 잘못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있기에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행위를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였던 죄값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로 인하여 형벌을 받은 것이기에 더 이상 치뤄야할 형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에서는 다른 분이 대신 죄값을 치뤘고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논리 조차 성립되기 힘든 것이기에 미셔널 처치와 새관점에서는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제대로 살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개념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의 상태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다. 단순히  제대로 행동해서 에덴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이미 범죄한 죄인이 똑바로 행동한다고 아무일 없었듯이  원위치 될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그 이상으로 회복될 수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에덴의 상태 이상이므로 단순히 죄값을 치룬다고 들어갈 수있는 곳이 아니다. 오직 누군가에 의해서  그 이상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의의 전가라는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소극적 순종과 적극적 순종에 의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십자가 상에서 치루신 소극적 순종의  피값만 우리에게 전달 된 것이면 우리는 범죄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태로는 또 다시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서 이루신 적극적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 되어야지만 믿는 우리가 단순히 아담의 범죄하기 전의 에덴의 상태 이상의 상태 즉 온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의 적극적 순종으로 이루신 것이기에 이러한 적극적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야만 다시는 범죄할 수 없는 완전히 의로운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의의전가 즉 칭의교리를 인정하지 않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이며 잘못된 생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인간의 죄는 존재론적인 성격이 있기에 죄인이 행위에 의하여 의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더군다나 거룩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의 적극적 순종에 의한 의와 소극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가 없이는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형태로도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의의 전가가 없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신학은 이와같은 치명적 결함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2. 죄의 문제 해결 없는 회복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단지 영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생태계의 회복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윤리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정책을 수행하는 WCC는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각국의 정치 경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된 인간들에 의하여 이차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원인이되는 죄에 대한 개념이 없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상은 죄의 문제(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 노아시대 사람들의 타락등)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머징미셔널 처치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기에 잘못된 진단에 의한  단순한 윤리적 행위를 통하여 생태계의 근본적인 회복이 가능할지 의문이 간다.

 

물론 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자연에 대한 회복을 기대하면서 책임감있는 존재로 살아가야하지만 자연의 회복은 우리의 행동에 의하여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가 존재론적인 문제이듯이 자연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접근이 있어야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우리의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새 관점에서의 현세적 하나님 나라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단지 어떠한 행함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주권적 역사가 없이는 죄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의 종이기에 우리가 주체가 되어 윤리를 행한다는 것은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톰 라이트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삶을 살면 된다고 하지만 이는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무지에서 나온 생각인 것이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미셔널 처치의 방식은 예수님 앞에서 온갖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바리세인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13. 그리스도와 안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안식에 들어가게끔 하는 것이다.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쉼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안식에 들어온 구원받은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시는 성화의 과정이고 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는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대속 되었기에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미셔널 처치에서 말하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안식에 들어간다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피값으로 사셨다는 개념이 없기에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하는 또  다른 요구가 주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 최종적인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안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시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안식의 장소이지만 미셔널 처치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공동체는 단지 그리스도를 왕의 개념으로만 보고 있기에 일할 것이 요구되지 않는 자녀의 개념은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서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자신들의 의를 이루려고 했던 잘못을 범하였듯이 미셔널 처치에서도 자신들이 들어간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로 스스로 의를 취하려고 하는 유대인과 같은 방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하고서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공격했던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같이 현재의 전통적 교회가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고 하면서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부정하는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가 유대인들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초인 새관점에서는 예수를 믿고 (현세적)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결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선교”라는 미션을 요구하는 곳이 되었고 이는 결코 안식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 땅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기에 이 하나님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 있는 이들에게 속한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바깥에 있는 자들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데 미셔널 처치에서 말하는 교회는 이러한 전통적 개념의 교회가 아니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지 않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 자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왜곡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들어가고 공로로 최종 구원에 이르기에 결코 안식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하셨고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만이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기에 안식의 개념에 있어서 미셔널 처치와 전통적 교회와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결론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미셔널 처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면서 다름과 같은 결론들을 내리고자한다.

 

 

1.카톨릭으로의 회귀

 

 

미셔널 처치의 최종적 형태는 반(semi)펠라기우스적인 카톨릭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이 있다.

 

미셔널 처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마치 카톨릭의 연옥을 연상케한다.

 

즉 이 땅에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연옥에서 공력을 더 쌓아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개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미완성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론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의 미셔널 이머징 처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의 일반은총론을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으로 탈바꿈 시킴으로서 나온 형태인 것이다.

 

미셔널처치 운동을 하고있는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고있는 알버트 워터스( Albert Wolters)와 같이 연합하여 1985년에 출간한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 의 개정판(2005년)을 재발간하면서 미셔널 처치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결론으로 주장하고있다.

 

신칼빈주의의 일반은총론은 국민의 90%이상이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이었던 신정국가였던 화란에서 나온 개념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지금 상황에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도입하고서 여기에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을 기초로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접목시킴으로서 기독교의 모든 교파를 미셔널 처치로 통합하려고한다.

 

여기에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장 방해가 되어왔던 루터의 이신칭의 개념이나 칼빈의 5대강령을 제외 시킴으로서 카톨리과의 연합에 방해가 되었던 요소도 제거하고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글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앙고백 대신에 기독교적인 윤리가 필요하고 그리스도의 의보다는 자기 의가 필요하며 칼빈의 5대 강령보다는 알미니안적인 자기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게 된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미셔널 처치의 그림은 카톨릭과 연합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을 거의다 제거한 그림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개념은 결국 카톨릭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WCC의 작품

 

 

미셔널 처치의 탄생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레슬리 뉴비긴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미셔널 처치의 탄생의 틀을 만들어 준 것은 몇 가지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정립된 시기외 레슬리 뉴비긴이 선교사역을 마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을 절실히 느낀 1970년대의 시간의 차이에 대한 의문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IMC (나중에 레슬리 뉴비긴의 주도로 WCC와 통합)배경에서의 시대적 상황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황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것이다. 또한 로이드 존스의 활동을 통해서 본 영국의 상황은 이미 전쟁 전부터 서점가에서 기독교 관련 서적을 제대로 구경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는 이미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속이 비어있었던 상태였다. 이처럼 영국에서 기독교가 황패화되기 시작하였던 이유를 찾아본다면 오히려 산업화에 따른 관심의 변화와 이미 19세기 유럽을 휩쓸고 있었던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연과학에 의한 인간 사고의 논리적 요구를 기독교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분석해 볼수도있다.

 

또 영국에서는 로이드존스의 웨스트민스트교회의 활동과 더불어1950년대에 회복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상황이 1960년대에 와서 오히려 제임스 패커와 존 스토트를 중심으로 영국국교로의 통합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로이트 존스목사가 교단에서 탈퇴하는등 영국교회들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1970년대는 로이드존스뿐만이 아니라 통합을 무리하게 추진 하였던 제임스 패커마져도 영국에서 소외되어야만 하는 기독교 내부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있었던 것이다.

 

세계 제1,2차 대전 전에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은 이미 영국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기독교의 쇠퇴가 있었으며 그나마 명맥을 유지 할수있었던 화란도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된 신칼빈주의의 채택으로 일반은총론과 영역주권론등으로 일상에서의 신앙생활을 활성화함으로서 그나마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 할 수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기독교 내부와 외부의 여러가지 환경적 요인들은 기독교인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를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한 가지 개념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무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미셔널 처치의 형성배경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다른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한다.

 

세계 제2차대전이라는 상황은 인류의 분열과 갈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안겨주었는데 인류의 평화 공존이라는 숙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칭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빌리자면 인류의 비극은 종교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한 가운데는 칭의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톰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유럽은 종교개혁 후에 30년 전쟁을 비롯하여 종교간 갈등으로 인한 국가간의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전쟁은 세계 대전으로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특히 2차 대전에 있었던 홀로코스트는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 시키기 위하여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며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는 사실을 부각 시켰던 것이고 이러한 방법론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2000년 동안에 계속 되어왔던 유대인 혐오 사상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들의 존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기에 십자가를 통한 칭의의 개념을 바꾸어 놓지 않고는 유대인들의 생존은 항상 보장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특히 히틀러의 홀로 코스트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반으로한 유대인 혐오사상을 없애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대립 관계가 아닌 보완 관계로 연결하면서 유대인의 위치를 교회의 원줄기로 가져다 놓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인 영적 이스라엘은 이 땅의 이스라엘 민족의 연장선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육적인 아브라함의 혈통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흔히들 이야기하는 신율법주의 개념이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예수님을 또 하나의 새로운 율법의 개념으로 보는 육적 이스라엘의 연장이며  육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인 것이다.

 

예수님의 위치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멜기세댁 계통의 대제사장으로 오신분이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속죄의 개념에서 피를 흘리신 분으로서 믿음으로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일 언약론을 기초로한 신율주의나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율법에 대하여 실패를 했었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시며 산상수훈과 같은 새로운 계명을 주시면서 이제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라고 주신 새로운 계명을 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위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경배받으실 주님의 위치에서 이정표의 위치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는 속죄의 개념이 아닌 희생의 개념으로 이해되며 이방인들은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본받는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과 대립 관계에 있는 개념이 아니고 현재의 교회는 유대교의 연장 선상에 있으며 다만 유대인은 아직도 율법을 지키려고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삶의 요구는 율법과 대립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이므로 더 이상 유대인을 적대시 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유대교가 현재의 기독교의 원조가 되는 샘이 된  것이다. 

 

바로 미셔널 처치는 신율주의 즉 언약적 율법주의를 전하는 교회이기에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말하였던 것과 같이 2차 대전 후 최대 과제인 칭의 개념의 퇴출은 자연스럽게 미셔널 처치를 통하여 이루어져가는 것이다.

 

칭의 개념의 퇴출은 자연스럽게 에큐메니컬의 동력이 될 수 있고 카톨릭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가 유대교와의 연합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예로 2차 대전 중 유대인들을 보호해주며 주변에 유대인 친구가 많이 있었던 영국의 윌리암 데이비드 데이비스(William David Davis)는 유대인 친구가 받는 고통을 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대적인 관계를 해결하고자 5년간(1942-1947)의 준비를 거처 ‘바울과 랍비 유대교’라는 책을 저술하였던 사실을알 수가 있다.

 

또한 칭의를 말하는 바울과 랍비 유대교의 관계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으며 톰 라이트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으로 바울의 칭의 개념을 없애면서 바울을 친유대주의자로 각색시켜버린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친유대주의적 학문연구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한 새관점 학파들 뿐만이 아니라 WCC를 중심으로한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서도 확장되고있었다.

 

흔히들 WCC 는 프리메이슨의 300인 위원회 산하기관이라는 주장이 인터넷 검색에서 넘쳐나고있는 것도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닌것 같다. 영국 성공회의 주교 대부분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자료들이나  WCC의 역대 총장들이 전부 프리메이슨이라는 이야기는 신학의 본질마져 혼란스럽게 만들고있다.

 

만약 WCC가 프리메이슨의 산하기관이라면  WCC에서 개발한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기초로한 미셔널처치와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의 에큐메니컬운동이  프리메이슨의 의도와 연관이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다.

 

 

3. 신칼빈주의의 일반은총

 

 

칼빈대학교에서 도덕신학을 가르치는 Calvin P. Van Reken은 “Christians in this world: pilgrims or settlers?”에서 미국에 정착한 화란 개혁주의자들이 초기에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있다가 차츰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로 관심사가 변화한 것을 이야기하고있다.

 

이러한 관심의 변화는  이 땅에서의 모든 피조세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속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1인치도 쓸모없는 땅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근거로하여 피조 세계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이 이머징 미셔널 처치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문화의 경계를 허물게 만들고, 카이퍼의 일반은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서  세상 문화에 대하여 너무 경계를 허물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과 같은 신학자가 레슬리 뉴비긴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화란 개혁주의자인 알버트 워터스(Albert Wolters)의 기독교 세계관과 접목시킴으로서 복음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을 (변질된)복음인 미셔널 처치로 귀결시켜버린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가능했던 것은 전통적 교회들이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발로 하나님 나라라는 한왕국의 이론으로 논리를 전개한 신칼빈주의의 헛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이렇게 최근에 신칼빈주의(화란 개혁주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다양하게 제기되면서 신칼빈주의 논의들이 사실 칼빈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머징 미셔널 처치와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처치에 길을 열어준 것에 대하여 반성하면서 신칼빈주의는 앞으로 루터의 두 왕국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학을 가르치는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은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에서 신 칼빈주의는 “창조의 선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수직적 관계는 무시하고 피조세계를 너무 수평적으로 해석했고 또한 특별은총을 일반은총의 개념에 편입시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지나치게 모든 피조세계로 확대시키는 부족함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반드루넨은 오히려  루터의 두 왕국 모델을 통해서 신칼빈주의의 변혁주의 모델을 극복하고 보다 더 종교개혁적이면서 시대에 적절한 공적신학을 제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반은총의 개념에 있어서도 칼빈의 일반은총과 카이퍼의 일반은총은 개념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있다.

 

칼빈의 일반은총은 신앙과 관계없는 일반 영역이 유지되기 위하여 죄를 억제하는  양심의 법을 주신 것이나  창조세계의 유지를 위하여 재앙을 어느 정도 제한해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은혜를 말하고 있지만 카이퍼는 이러한 일반은혜를 하나님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의 영역으로 확대 해석함으로서 구속의 개념인 특별은총이 구속과 관계없는 일반은총으로 변질되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카이퍼의 이러한 일반은총의 개념은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 되었고  언약적 율법주의인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에 대한 신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구속과 관계된 특별은총의 영역을 전부 없애버리는 작업을 함으로서 일반은총이 특별은총을 대체하는 이머징미셔널 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나라는 구속의 영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4. 신인협력(synergism)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요구되는 삶의 행위는 천국의 완성에 인간의 공력이 남는다는 것이고 또한 행위로서 천국의 완성에 협력함으로서 이는 결과적으로 신인협력(synergism)을 의미하게된다.

 

믿음에 대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의 신인협력의 개념과는 달리 하나님 백성으로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요구되는 공력으로서의 신인협력의 개념은 천국을 완성하는데 인어서 인간의 힘과 노력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즉 천국의 완성이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천국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 대등한 위치에서 일한다는 것이고 이는 사단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하는 교만을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나가는 것이 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인간의 너력은 결과적으로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우리에게 임할 새하늘과 새 땅의 극치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의 연장 선상에서 이 땅의 완성과 더불어 임할지 아니면 말씀과 같이 창세 때 예비된 이 땅과는 연속성이 없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개념인지에 따라서 공력의 개념도 달라질 것이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문화의 연속성이 보장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의 문화가 전혀 연속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는 대부분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결과작으로는 우리의 문화 활동을 비롯한 공력이 보존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전통적 개념을 부정하는 입장이 될 것이다.

 

 

 

5.이성에 맞는 합리주의적 신앙

 

 

이머징미셔널처치의 출발에는  합리주의적 (  cartesian)  논리와 경험적 (체험적)사고가 배경으로 자리잡고있다. 

 

19세기 유럽의 합리주의로 인한 기독교의 몰락에 대응하고자 화란에서 개발된  신칼빈주의는 합리주의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일반은총론과 영역주권론등의 합리주의적 논리를 도입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신칼빈주의는 (손상된)이성을 근거로 역사적 예수연구라는 방법론과 신정통주의의 합리적 실존주의 성격의 하나님의 선교개념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성을 종합한 가장 합리주의적 사고의 결정체로 바로  미셔널 처치라는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탄생한 이성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실존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이 이머징 미셔널 처치라는 논리적 교회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머징 미셔널 처치가 개혁주의 교회와 이렇게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 또 다른 원인은 톰 라이트와 같이 성경을 명제적 진리가 아닌 네러티브로 기록되었다고 보면서 각 시대적 상황에 맞게 성경을 상황화(contexturalization)하여 해석하여야한다는 논리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WCC는 이 상황화의 논리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용할 수 있었고 데이비드 보쉬의 “선교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로 “바울에 관한 새 관점”등의 결과물들을 도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이러한 상황논리에서 나온 개념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인류의 화합과 평화공존이라는 논리로 일반인들에게 더욱 지지를 얻는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인류의 비극은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죄성과 같이 모든 문제를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이라는 더 큰 문제를 낳음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머징 미셔널 처치”와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아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가 아닌 인간의 상황 논리 가운데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실존주의적인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가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회의 성장율이 감소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돌파하고자하는 것일 수 있으나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전혀 다른 페러다임에서 나온 것이기에 개혁주의를 포기하지 않고는 선택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북미에서는 미국 장로교회(PCA)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교단 가운데 몇몇 교회들이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과 같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패드럴 비전”(Federal Vision혹은 Auburn avenue theology))이라는 교회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이들의 모습은 명백히 이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명칭을 어번 에비뉴 이단(Auburn Avenue Heresy)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페드럴 비전의 신학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과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의 교회들은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성직자와 성도들이 다같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이 무엇이고 개혁주의와 어떻게 다르며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머징 미셔널 처치“가 무엇인지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어야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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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홍병룡 옮김. 복있는 사람, 2011.

 

미셔널 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 김원호

2014-10-04 01:51:50


미셔널 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

-미셔널처치(missional church, 보냄받은 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중심으로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본 미셔널 처치에 대한 연구자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칼빈의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칼빈의 개혁주의를 신학의 기초로 하고 있는 전통적 교회의 입장에서 본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글은 이러한 입장에서 쓰여졌기에 다소 신학적 보편성이 결여되어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 글을 본다면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이머징 미셔널 처치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하여 논해야만 하는 이유 몇 가지를 정리해 보고자한다.

첫째로 현재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혼돈의 한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교인들의 수적인 감소로 인하여 교회 존립의 위기가 초래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과 대책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기존 개혁주의의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는 잘못된 대안들이 선택되어지기도 하고 이로 인하여 전통적 교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신학마저도 흔들릴 수 있는 위기 상황이 초래되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영성을 강조하다가 신비주의로 기울어지는가하면 다른 쪽에서는 성경을 지나치게 상황화(contextualization)하여 해석하다가 이신칭의를 비롯한 구원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교리마저도 폐기해야하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한다. 침체의 돌파구를 마련하기위해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새로운 모습들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진단이 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사전에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번 연구 자료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한 자료를 정리 해본다.

둘째로는 현재의 문화적 상황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규정하고서 이에 맞추어 신학도 필연적으로 변화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더니즘에서 기반을 이루고 있는 신학이 꼭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해체와 재건의 과정을 거쳐야하는지 검점해 보아야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상황화 된 탈보수적인 신학적 해석이 얼마나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또는 과연 문제가 없는 신학인지 점검해 보고자한다.

셋째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신학이 어떠한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모습으로 변형된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며 이러한 교회(이머징 처치, 미셔널 처치 혹은 보냄 받은 교회)는 기존의 전통적 교회와 어떤 면이 다른지 살펴보고자한다. 다만 이번 논의와는 관계없이 예외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인 미셔널 처치의 모습을 보여주는 팀 켈러의 리디머 장로교회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음 기회에 논의하고자 한다.

넷째로 본 자료의 주요 주제가 미셔널 처치이지만 미셔널 처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이머징 처치는 무엇이며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면서 우선 이머징 처치에 대한 간단한 정리와 함께 이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1. 이머징 처치

 

A. 형성된 배경

 

이머징 처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해체와 재건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기존 전통적 교회의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주창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일반인들이 예수에 대하여는 관심이 많지만 기존 전통적 교회는 싫어한다는데 대한 고민의 결과로 만들어낸 교회가 이머징 처치라는 것이다.

또한 현제의 전통적 교회는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된 건물 중심의 교회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이는 교회가 항상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온 형태로 존재해 왔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교회가 더 이상 사회의 중심부에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태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현재의 상황을 후기 콘스탄틴 시대(post-constantinism)라고 규정하고서 현재 대부분의 교회의 기초가 되고 있는 교리가 어거스틴부터 시작된 콘스틴틴시대의 신학(reformed theology from augustinus)이기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면서 동시에 후기 콘스탄틴 시대인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된 개혁주의 신학이 더 이상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서 후기 콘스탄티니즘에 적합한 신학을 만들어 낸 것이 현재의 이머징 미셔널 신학인 것이다.

 

B. 특징들

 

이머징 처치는 모더니즘 교회에 대한 해체와 재건을 전제로 시작되는데 이러한 해체와 재건은 단순한 외형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신학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실질적인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기독교 신앙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다가가려면 반드시 “재부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재부팅을 하기 전에 교회의 구성요소 가운데 모더니즘 시대에 침투된 바이러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체와 재건을 전제로 하여 시작된 이머징 처치는 기존 전통적 교회들이 고수해왔던 건물 중심의 제도적인 예배방식을 탈피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추어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신비적인 영성을 추구하게 된다. 또한 성경을 네러티브나 스토리로 봄으로서(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인 Paul In Fresh Perspective에서 새관점 학자인 샌더스나 던이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성경을 네러티브나 스토리로 해석하지 않는 우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시대적 문화에 맞추어 상황화(contextualization)시켜 해석함으로서 성경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 명제(absolute proposition)의 진리로 보는 기존 전통적 개혁주의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성경을 상황화하여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보고 있는 칼 바르트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서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레슬리 뉴비긴이나 데이비드 보쉬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경향들이다. 이와 같이 이머징 처치는 단순한 외형만의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신학에 변화가 있기에 이머징 처치의 신학은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성에 있어서는 초대교회에서의 영성을 앞으로 다가올 세대의 영성으로 다시 복귀시키는 고대-미래 영성(ancient-future spirituality)을 많이 사용 한다. 이는 교부시대에 주로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였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신플라톤주의로 복귀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서 관상기도와 같은 신비주의에 자연스럽게 접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게된 것이다.

“이머징 교회”의 저자 에디 깁스와 라이언 볼저는 이머징 처치는 “톰 라이트의 작업의 틀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만큼 톰 라이트의 신학이 이머징 신학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자신의 저서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이다. 이 말은 이제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이 틀렸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비롯하여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어거스틴이나 루터의 경우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에 너무 비중을 두고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생각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는 이머징 처치의 주창자들도 마찬가지로 이제까지의 잘못된 신학을 제거하고 새롭게 새로운 관점에서 시작하여야한다고 기존 교회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the good news)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faithfulness) 이루어 가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돌이키시고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하여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심으로서 이 세상을 회복 시키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던 아담의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다( in and through Jesus, God became King of the world)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이미 해결 되었기에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됨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인 예수님의 의의 전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새관점이 정통교리와 충돌을 보이는 가장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은 속죄 교리인 개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교회 형태에 있어서도 전통적 교회와 다른 공동체적 구원에 관심을 두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교회형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C. 이머징 처치의 특징적 구성요소들

 

a.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머징 신학이 형성되는데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있는데 그는 30여년을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WCC에서 칼 바르트 라인홀드 니버등이 참여한 25인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으면서 활발하게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또한 칼 바르트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칼 바르트가 최초로 사용한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missio Dei)개념을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기초로 자리잡게 한 인물이다. 그 외의 인물로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페라다임의 변화를 촉구하는 “변화하는 선교”라는 책을 저술한 남아공의 선교신학자 데이비드 보쉬(David J. Bosch)가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신학적인 면에서 접근한 인물로는 독일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을 이머징 신학에 접목을 시킨 스탠리 그렌츠(stanley Granz)가 있으며 그는 이머전트 빌리지의 대표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에게 친구이면서 멘토로서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윤리적인 면에서는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가 있으며 알미니안 신학자인 로저 올슨(Roger Olsen) 등이있다.

고든 콘웰 신학교 교수인 데이비드 웰스(David F. Wells)는 자신의 저서 ‘용기 있는 기독교’(The courage to be Protestant)에서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는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 실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교회의 전통이 의미가 없어진 것이며 성직자의 권위도 실종되었으며 교회의 외적인 형태로서의 조직의 힘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는 바로 기존 전통적 교회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구성요소들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붕괴로 인하여 그동안 전통적 교회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위에 열거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모양의 교회를 만들어가며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새로운 교회인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기본 틀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b.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과정인 해체와 재건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필요한 새로운 신학이고 바로 이 새로운 신학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이다. 이 새관점은 1970년대 중반 샌더스(E.P.Sanders)에 의하여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톰 라이트가 주도하고 있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신학이다. 이 새관점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전통적 개념과는 다르게 해석함으로서 신약을 전부 재해석하는 것이며 그 근거로는 쿰란문서인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외에도 타나임(Tannaim)문헌, 묵시문학(Apocrypha), 위경(Pseudepigrapha)등 성경외의 역사적 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접근법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그동안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고 했던 전통적 방법을 탈피한 새로운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새관점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로 만들어진 새관점은 이성과 자연과학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사적 신학을 정립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방법론이기에 스텐리 그랜츠에 의하여 도입된 판넨베르크 신학이 새관점과 같은 성격으로 이머징 신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새관점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선교적 공동체로 규정하고 율법을 은혜의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서 WCC가 1952년 독일 빌링겐 총회에서 채택한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missio Dei)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WCC의 레슬리 뉴비긴과 데이비드 보쉬와 함께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의 이머징 신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관점이 말하는 주요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속죄의 개념

 

전통적 개념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된 것을 속죄하기 위한 것인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는 이러한 속죄(the Atonement)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새 관점에 의하면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새 관점이 말하는 죄는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이방 민족들에게 전하여야하는데 그들이 자신들에게 은혜의 상징으로 주어졌다고 하는 율법을 이방민족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방민족에게 전하지 못한 민족주의가 바로 이스라엘의 죄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과 (죄를 씻어내는 보혈이 아닌)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범죄를 용서하는 화해의 표시이기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가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상징인 것이다.

달리 설명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서 죄인 된 우리를 속죄하기 위한 것(의의 전가:Imputation)인데 반하여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가운데 해결된 것(재판장의 선고)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희생되신 것(보혈의 개념이 아니다)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에 맺은 언약을 이방인에게 전파하여야하는 선교적 사명을 가진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않음으로서 그 벌로서 받고 있는 바벨론 포로생활(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있다)을 청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전가(Imputation)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된 것이고 또한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새 관점에서는 전가(Imputation)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예수님을 아담과도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결국 새 관점에서는 전가(Imputation)개념을 인정하지 않기에 속죄를 위한 희생이 아담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선교적 사명을 다하지 않은 민족적 이기주의에 대한 것으로 봄으로서 이스라엘을 선교적 공동체로 보는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의미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바울에 대하여 해석되어오던 것과는 달리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였던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salvation by works of the law)이 아니고 은혜에 머무르기 위함이었다고 재해석한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서신서는 이방인들도 이제껏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이방민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민족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율법(ethnic badge)이 없이도 예수를 믿음으로 유대인의 언약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한다. 율법을 언약 백성으로서의 은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석함으로서 그동안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전통적 해석과 대조를 이룬다.

 

 

세례의 개념

 

전통적 개념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부패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상징적인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는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의롭다고 선언함으로서 해결된 것이기에 세례는 속죄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개념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공동체 안에 참여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

 

전통적 교회가 말하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개념으로서 이 땅에서는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이 땅에 완전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의한 수평적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 관점에서는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공동체의 개념과 연계시키고서 공동체의 수평적 확장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완성시키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행해지는 세례의 개념은 전통적 개념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세례가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의식인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으로 교회의 개념이 공동체의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참여함으로서 공동체의 확장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어간다는 개념이고 이러한 공동체를 교회와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있기에 전통적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c. 영성(spirituality)

 

이머징 처치의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부분인 영성부분에 있어서는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머징 처치는 레노바레에서 리차드 포스터와 동역하고 있는 제자도의 권위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와 함께 관상기도를 비롯한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교회의 영성부분에 많이 도입하여 활용하고 있다. 이머징 처치는 초대교회 예배학의 권위자인 로버트 웨버(Robert E. Weber)가 개념을 정립한 “고대-미래”(ancient-future) 개념의 예배와 영성을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관상기도는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주로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관상기도가 일반인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속죄의 개념이 없이도 신적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속죄와 칭의에 대한 부담 없이 타종교와 자연스럽게 교류와 대화가 가능하기에 타종교와의 대화의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의 경우는 1962년부터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수단으로 관상기도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머징 처치의 영성에 관하여는 이 글의 방향성과 다른 방향이어서 좀 더 상세한 내용은 신비주의와 관상기도라는 주제로 논의가 되어야할 것이다.

 

 

2. 미셔널 처치

 

이머징 처치는 우리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는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지만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시작이 되는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missio Dei)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미셔널 처치가 이머징 처치의 모체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볼 때 미션이라는 주제 한 가지만으로는 시대적 문화의 필요성을 다 채울 수 없기에 문화적 다양성을 좀 더 수용하면서 발전되어온 형태가 이머징 처치인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실제적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대인학살(holocaust)이라는 비극을 더 이상 막고자하는 동기가 좀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주변에 유대인 친구가 많이 있었던 영국의 윌리암 데이비드 데이비스(William David Davis)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대적인 관계를 해결하고자 5년간(1942-1947)의 준비를 거처 ‘바울과 랍비 유대교’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근거가 되는 새 관점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48년에 소집되면서 세계교회의 통합과 교류(ecumenical)라는 목표로 개발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Missio Dei)의 개념에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선교적 공동체”로 규정함으로서 미셔널 처치의 모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가 선교적 개념의 공동체가 된 상태에서는 유대교가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a. 형성배경

 

항상 서구 사회의 중심이었던 기독교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던 사람들이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을 중심으로 모여서 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대책으로 내놓은 결과로 탄생된 교회가 미셔널 처치이다.

GOCN이 내놓은 “미셔널 처치”의 개념에는 칼 바르트, WCC, 레슬리 뉴비긴, 데이비드 보쉬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특히 30여년을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레슬리 뉴비긴의 경우를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도에서의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영국에 다시 돌아왔던 시기의 영국의 기독교 상황은 그야말로 거의 변방으로 밀려나 존립 자체에 위기를 맞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레슬리 뉴비긴은 칼 바르트, 라이홀드 니버등이 참여한 WCC의 52인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에큐메니컬의 방법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를 어떻게 확장 발전 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공개적인 토론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논의가 레슬리 뉴비긴이 몸담고 있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시작되면서 1932년 칼 바르트가 처음 사용하였던 용어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1952년 독일 빌링겐(Willingen)총회에서 모여서 에큐메니컬을 위한 구체적인 교회의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역사적 예수 연구(Quest for Historical Jesus)와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등 여러 가지 신학적인 발전과 보완 과정이 있은 후 최근에서야(1990년대) 좀 더 체계적으로 미셔널 처치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존 개혁주의의 전통은 이전 시대인 모더니즘에서의(christendom) 신학이고 권위와 권력과 전통이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post-christendom)에서는 더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형성된 교회론 만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구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위기를 잘못된 교회론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이 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신앙의 최종 목적이 된 결과로 말미암아 교회의 부패와 변질이 생겨났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일단 수단과 과정이 아닌 목적이 된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한 문화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문화는 더 이상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여주지 않기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셔널 처치와 같이 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론 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바로 여기에 가장 적합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 주창자들은 교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건물 중심의 교회 (christendom:AD313~최근)의 시기는 이제 끝난 것으로 간주하고 지금을 후기 기독교사회(post-christendom)로 봄으로서 앞으로 새롭게 등장하여야할 교회는 건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침투적으로 들어가는 선교적이면서 성육신적인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b. 미셔널 처치의 개념

 

GOCN이 새롭게 교회론을 정립하기 위하여 채택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를 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a sending or missionary God) 정의하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의 보내시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를 이 세상에 보내신다는 개념으로 교회를 선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에서 유래된 세상에 보냄 받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는 교회는 목적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에 보내지는 과정이 되어야만 하며 보냄 받았다는 의미에서 즉 교회는 목적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에 보내지는 과정이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셔널 처치라는 용어 대신에 보냄받은 교회(sending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하고 선교적으로 해석된 삼위일체 개념에서 삼위일체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한다.

또한 세상으로 보내지는 우리 자체가 교회(being the missionary)이기에 우리가 교회에 간다(going to church)는 개념은 christendom의 유산으로서 잘못된 개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정통적 개념의 교회가 아무리 선교에 역량을 집중한다 하더라도 미셔널 처치가 될 수가 없고 단지 선교에 집중하는(mission focused)교회가 될 뿐이기에 교회 자체가 세상 속으로 보내져야지만 (Unchurched church)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전통적 교회는 건물로 상징되는 외적인 형태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attractional church)라고 하며 이에 반하여 미셔널 처치는 세상을 향하는(extractional) 원심력을 가지고 성육신적으로 보냄을 받았다고 하여 성육신적 교회(incarnat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머징 처치의 저자인 댄 킴벌에 따르면 미셔널 처치는 “주일뿐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으며 (세상 사람들과)같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격려하고 가르치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보냄 받은 무리들”이라고 정의함으로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성육신적 교회의 속성을 그대로 표현 해주고 있다.

 

c. 특징들

첫 번째로는 기존 건물 중심의 조직화된 교회들과는 달리 세상 속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모임을 만들어가며 일정한 외형이 정해진 것은 없다. 모이는 형태에 있어서는 주일의 개념이 없으며 주일보다는 평일에 자유롭게 주로 생활의 영역(unchurched venue)에서 모인다. 또한 클럽이나 스포츠센타등 활동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이머징 처치의 특징인 고대-미래 개념의 영성을 적용하기도하고 향(incense)과 미로걷기를 예배의식에 사용하기도 한다.(영국의 mission-shaped church인 Fresh expression group의 경우 새로운 수도원적 삶(new monasticism)이 적용되는 고대-미래의 영성을 홈페이지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것(missional church에서는 이를 old perspective라고 함)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기초한 제자도적인 실천적 삶을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충성하셔서 이 세상에서 성육신의 삶을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충성하셨던 모습을 본받아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충성된 모습으로 제자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를 믿는(Faith in Jesus)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충성(faithfulness of Jesus)을 본받아 따르는 것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새로 오는 교인들에게 이전(old conventional role)과는 달라진 신학의 변화(theological shift)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요구되고 있다. 미셔널 처치는 구성원들에 대한 제자 훈련을 통하여 공동체 확장을 위한 리더들이 양성되어야만 공동체가 확장되며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 오는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틀(the new community paradigm)에 대한 교육을 하여야하며 훈련을 통한 제자도의 삶을 가르쳐야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에서 제자도에 대한 훈련은 공동체의 존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기에 항상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신앙의 중심이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향하여 있다. 미셔널 처치에서의 영성이 개인보다는 관계성에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공동체의 확장이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원을 개인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히려 구원을 개인이 미셔널 공동체(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로 영성은 개인을 위한 자아개선이나 영적 제자도, 개인적 헌신의 삶이 아니고 이 세상을 위해서 성령에 의해서 공동체적 믿음을 형성해가도록 예수를 닮아 가며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성의 터전은 콘스탄틴시대의 산물인 전통적 교회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장소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셨듯이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이는 곳(temple spirituality)에서의 영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신앙의 중심이 외적 건물로 이루어진 기존 교회가 아니라 삶의 현장이 바로 교회고 성전이라는 것으로서 예배와 영성에 있어서 무교회(Unchurched)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있다.

 

d. 이머징 처치와의 연관성

 

이머징 처치의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에 의하면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머징 처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 미셔널 처치는 선교라는 실천의 형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형태인 것이다. "이머징 처치“ (emerging church)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의 저자인 댄 킴벌은 이머징 처치에 깊이 관여하여 활동하고 있는 (Vintage Faith 교회의) 목사로서 또한 미셔널 처치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으면서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이머지셔널 처치(emergissional church)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국의 미셔널 처치(mission-shaped church)인 프레쉬 익스프레션(fresh expression group)의 경우는 활동 영역이나 예배 형태에 있어서 전형적인 이머징 처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머징 처치의 경우 이머전트 빌리지(emergent village)의 선두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본인 스스로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톰 라이트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을 정도로 톰 라이트의 새 관점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다만 외형적으로 미셔널 처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팀 켈러(Tim Keller)목사의 뉴욕 리디머 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는 비록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운용되고 있지만 교회 형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톰 라이트에게서 자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 미셔널 처치운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들

 

1. Organic church (www.organicchurch.com)

2. Communitas (www.communitas.org)

3. 3DM (www.weare3dm.com)

4. fresh expression (www.freshexpressions.org.uk)

5. friend of missional (www.friendofmissional.org)

6. Missio Dei Communities(www.missiodeicommunities)

 

3.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

 

미셔널 처치를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교회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몇가지 주된 개념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교회와 어떻게 다른지 논하고자한다.

 

a.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인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이나 이머징 미셔널 신학의 출발이 되는 기본적인 뿌리가 되는 개념으로서 이전에 1600년 가까이 발전되어왔던 개혁주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이해 없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탈보수적인(Postconservative) 신학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1932년도에 칼 바르트에 의하여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1952년 WCC의 독일 빌링겐(Willingen) 총회에서 에큐메니컬을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어 레슬리 뉴비긴과 남아공 선교 신학자인 데이비드 보쉬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저서인 "하나님의 선교"에 의하여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고서 삼위일체의 개념을 선교적인 관점에서의 삼위로 보며 교회를 선교의 수단이며 과정으로 보고서 교회 대신에 세상을 선교의 최종 목적지로 보고 있다. 즉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방 민족에게 전해야할 선교적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최초의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y)로 보며 구약을 선교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서 신약에서의 예수님과 바울을 개혁주의와는 다르게 새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새 관점(NPP)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 이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음으로서 이에 대한 징계로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 바벨론 포로생활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시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연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은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로마의 황제를 왕으로 섬기고 있던)이스라엘의 죄악을 감당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정치적으로) 희생당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죽으셨던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God became King;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하나님이 현세적으로 왕이 되셨다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개혁주의에서는 원래 하나님이 왕이셨지 왕이 되셨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개념을 현세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이러한 과정의 논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닌)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우리에게 전가된(Imputation) 아담의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아담의 범죄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심으로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의의 전가(Imputation)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무죄선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예수님의 희생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이기주의(선교적 사명을 외면, 은혜의 율법을 이방인과의 구별수단으로 사용, 로마황제를 섬기는 것 등)로 포로 생활하는 것 등을 용서하신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다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이스라엘의 선교는 계속될 수 있었고 바울의 서신서들은 이방인을 이스라엘 선교적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으로의 해석은 현재의 미셔널 처치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이기에 미셔널 처치에서의 새 관점은 바로 미셔널 처치의 기본적인 뿌리가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방법을 통하여 주후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를 선교적 공동체로 해석함으로 가능했던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보는 유대교에 대한 해석과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WCC에서 레슬리 뉴비긴을 중심으로 개발된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GOCN에서 수용하고 정립하면서 미셔널 처치라는 교회론을 만들어 내었기에 이스라엘을 선교적 공동체로 해석하고 있는 새관점(NPP)이 자연스럽게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반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의 새 관점(NPP)으로는 신약에서의 교회(missional church)를 언약공통체인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는 것이다. 즉 신약의 교회 형태인 미셔널 처치가 이루는 공동체(missional community)가 구약에서의 최초의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y)인 유대교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2000년 가까이 신약의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잘못된 것이었고 또한 히틀러가 범한 유대인학살(Holocaust)도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인 “우리가 이제껏 성경을 잘못 이해하였다”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윌리암 데이빗 데이비스(William David Davis)는 주위에 절친한 유대인 친구들이 많이 있었기에 전쟁 중 유대인 학살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희생은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으로 5년간(1942-1947)의 집필과정을 거쳐서 “바울과 랍비 유대교”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고 이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재해석한 것으로서 새관점(NPP)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였던 칭의(Justification)의 개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칭의론”의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레스에 의하면 칭의 교리는 지난 16세기 동안 서구교회의 균열을 만들고 이 균열을 지속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등장과 더불어 더 이상의 교회 분열이 없어야한다는 생각에 교회 분열의 핵심이 되었던 칭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배제시키는 쪽으로 교회와 신학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최근에는 WCC에서 더 이상 칭의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전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더불어 형성된 칭의 교리”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기에 칭의 교리를 배제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선택되어질 수밖에 없는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칭의 교리는 율법을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유대교와 대립될 수밖에 없기에 칭의 교리가 배제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탈보수주의 신학만이 자연스럽게 유대교와 접목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을 은혜의 상징으로 해석하는“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기초로 하여 이스라엘을 최초의 선교적 공동체로 보는 미셔널 처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대립관계가 아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연결된 공동체로 보는 관점이기에 인류의 더 이상의 갈등과 분열을 막고자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b. 새로운 관점

 

미셔널 처치는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크리스텐덤(christendom) 이후의 상태에 있다고 전제하고서 지금의 크리스텐덤의 교회형태로는 더 이상 기독교의 존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서 기존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신학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신학적 관점을 도입하여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 주창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정신인 해체와 재건에 가장 적합한 신학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어거스틴으로 부터 시작된 개혁주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앞으로의 세대(for the age to come)에 가장 적합한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운동의 중심인물인 “새로운 교회가 온다”(the Shaping of Things to Come)의 저자인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자신의 저서(the road to missional)에서 미셔널 처치 운동은 새관점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작품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기본 신학으로 사용되어지는 새관점(NPP)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던 전통적 방법과 달리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을 사용하였기에 학문이라는 관점으로서의 신학이면서 동시에 이성과 자연과학과의 소통이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론은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접근 방식으로서(이성적으로 설명이 되면 더 이상 신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실존주의 신학자(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바르트, 불트만등)들과 맥락을 같이 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초창기 주창자였던 슈바이처와 불트만은 물론 실존주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에게서 받은 영향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은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을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다면 신앙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논리이지만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인간적인 생각이라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논리인 것이다. 즉 불신이 바탕이 된 신학적 논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이전의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르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성경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서 또 다른 형태의 자유주의(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http://www.postost.net/)

 

이와 같이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의 결실로 만들어진 새관점(NPP)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현재의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모습이고 새 관점으로서의 선교적 신학(the missional theology)은 앞의 그림과 같이 기존의 개혁신학과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갖고서 다가올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으로 자리를 잡으려하고 있는 것이다.

NPP의 대표적인 인물인 톰 라이트(N.T.Wright)를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칭할 때의 복음주의는 개혁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용어이며 톰 라이트가 복음주의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톰 라이트 이전에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성경을 부인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톰 라이트는 성경을 확고히 세웠던 학자였기에 붙여진 칭호인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혀 복음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그에게 일방적으로 복음주의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소 객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c. 대연합(the great convergence: the emergency and the new perspective)

 

현재 영국에서 missional community 운동을 하면서 다가올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an evangelical theology for the age to come)이라는 사이트(http://www.postost.net/)를 운영하고 있는 Andrew Perriman에 의하면 앞으로의 교회는 성경이 재해석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을 기초로 한 이머징 미셔널(emerging missional praxis)운동이 기본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missional church의 시작은 NPP와 상관없이 WCC를 중심으로 레슬리 뉴비긴과 데이비드 보쉬의 영향 하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 관점을 WCC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선교라는 기본 틀이 같다는 점을 살펴보면 새 관점이 자연스럽게 미셔널 처치의 기본 신학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그림이 이를 요약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주창자들은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기존의 개혁신학과 전통적 교회가 소멸되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http://www.postost.net/node/338)

앞의 그림과 같이 새관점과 이머징 처치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의 출현이 의미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현대 교회의 퇴출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교회가 전통적 교회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과 교회의 변화는 다소 후퇴되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정립되었던 보수적인 신학이 앞으로는 역사적 시각에 맞추어 새롭게 정립된 새 관점으로 바꾸어질 것(Question 1)과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이머징 신학을 통한 변화(Question 2)를 수반하면서 종국에 가서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실천적 교회형태인 미셔널 처치 운동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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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ostost.net/node/353)

 

또 다른 방법으로 설명되는 위의 그림은 성경을 네러티브로 보고서 이를 역사적 상황에 맞추어(contextualization) 새롭게 해석한 새관점(NPP)에 이머징 신학을 접목시킴으로서 이머징 미셔널 운동(emerging and missional praxis)이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교회의 형태적 변화보다는 신학의 변화에 핵심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라는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표면적인 명분은 현대교회가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는 추세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회가 성육신적(incarnational)으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좋은 성경적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는 실제의 내용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관점과는 전혀 다른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결과적으로는 전통교회를 더욱 허물어뜨리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d. 모이는(Attractional)교회 vs 성육신적(Incanational)교회

 

미셔널 처치가 전통적 교회와 구분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의 외적인 형태가 바로 모이는 형태의 교회냐 아니면 성육신적으로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냐 일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주창자들은 교회가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교회의 존립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방법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질적 근거로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에 의하여 변화된 교회론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만약에 기존의 전통적 교회가 미셔널 처치의 형태와 같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성육신적 교회의 형태로 변화를 추구한다면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상황적 대처가 아니라 WCC의 “하나님의 선교”논리를 수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새 관점(NPP)으로의 신학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기에 이는 앞부분에서 논의한 대연합(the great convergence)의 과정에 돌입하는 것이며 개혁주의를 기초로 한 자신의 이전 모습과는 대립되는 형태로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혹은 교회 성장을 위한 대안으로서 미셔널 처치로의 전환이 선택되어진다면 미셔널 처치의 속성인 무교회주의(Unchurched church)로 인하여 교회를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해체의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육신의 의미를 선교적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잘못되게 해석하였기 때문에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선교적 관점보다는 구속 사역을 위한 피 흘림이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의 육신이 죄에서 자유 할 수 없었기에 구속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은 필연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속사역의 개념이 적용된 성육신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구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성육신적으로 세상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또한 성육신적 교회(incarnat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한 요한복음 20:21의 한 구절은 구속사역의 확장을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는 공동체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기 위한 여러 가지 과정이 수반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은 생략하고 다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논리에 부속품처럼 말씀을 끼워놓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가 예수님과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성령을 받고 거듭나는 과정이 없었던 때문이고 그가 성공적인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받고 거듭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요20:21절에 이어서 따라오는 말씀은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신 후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셔널 처치의 신학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새관점에서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보다는 윤리적으로 회개하는데 비중을 두고 있으며 회개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한 후에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윤리적 제자도의 삶을 강조함으로서 성령이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 원인과 동기가 되신다는 개혁주의적 사상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시지 단순히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힘을 실어주는 수단이 되실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주체가 되는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고 사람의 일일 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성육신적 삶은 우리의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삶은 아닌 것이다.

 

 

 

e. 죄의 인식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기독교 자체가 필요치 않을 것이지만 인간이 어떠한 상태의 죄인이냐에 따라서 기독교 교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관점이 개혁주의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죄의 전가)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의의 전가)는 것이다.

반면에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로 인한 인류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이미 (선언에 의하여)해결된 것이고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방인에게 전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에 의하여 은혜로 주신 율법 특히 음식법, 할례법, 절기법 등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며 로마 황제를 우상으로 섬기는 죄를 범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 의한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거듭남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하는 반면에 새관점에 의한 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거듭남의 개념보다는 회개의 개념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윤리적인 개념으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교회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원초적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무리의 형태이지만 새 관점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속죄하심으로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방나라에게 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와 더불어 주어진 율법을 민족주의적으로 이방인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죄로 인하여 바벨론 유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선교적 언약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용서되어서 우리에게까지 문이 열리게 되었기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개념이 아닌) 십자가 희생을 믿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의식인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된 무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개념보다는 공동체의 개념이 적용되며 이방인과 유대주의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죄로 인한 바벨론 포로생활을 청산시키는 용서와 화해의 개념이고 전통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보혈에 의미가 있기에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나오는 또 다른 개념은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미셔널 처치가 성육신적으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개념은 인간이 전적 부패한 존재라는 칼빈주의적 개념과 달리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펠라기우스적 생각에서 나온 개념인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셨고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 즉 그리스도의 나라를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죄에 대한 인식과 차이를 보이는 펠라기우스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전통적 신앙에서 고백하는 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것이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셨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 죄는 단순히 “역기능”과 “장애”일 뿐인 것이고 이는 우리의 노력과 훈련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전통적 관점으로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인데 반하여 새 관점에서는 우리가 죄를 짓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고 오직 성령의 전적인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공로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반하여 새관점에서는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가고 공로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로서 성육신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로를 이루기 위한 삶이 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공동체가 톰 라이트의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톰 라이트의 저서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도는 성령이 우리의 주체가 되셔서 성령에 의한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삶이고 이는 바로 우리가 어떠한 상태의 죄인이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떠한 것인가의 차이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에서의 생활이 구원받은 자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미셔널 처치의 생활은 구원 받을 자로서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f. 믿음보다는 제자도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신앙고백 후의 성도의 삶은 자신의 옛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것이고 대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며 자신은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faithfulness)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삶이어야하는 반면 새 관점에서는 은혜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었다 하더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성실히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자신의 저서(Simply Jesus)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묻는 말에 가장 간단히 대답한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분이라고 언급하였듯이 새관점을 기초로하는 미셔널 처치의 방법론으로는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교본으로 하여 자신이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며 새 관점에서는 율법조차도 은혜의 원리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펠라기우스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들이 부패하며 윤리가 실종되어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새 관점과 이머징 미셔널 처치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새 관점에 의한 삶이 윤리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관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면 윤리를 얻으려다가 구원을 놓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g. 교회의 의미

 

전통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아담의 죄로 인한 나의 죄를 사함 받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함으로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참여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인데 반하여 새관점에서의 교회는 구속사역과는 관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서 우리의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서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교회라는 개념보다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더 적합하기에 미셔널 처치라는 용어보다는 미셔널 커뮤니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의 교회는 개혁주의에서 생각하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몸된 교회라는 개념보다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기 위한 수단과 과정이기에 교회 자체에 최종적인 의미와 형태를 부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선교적 교회는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와 특성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기에 결국 미셔널 처치는 유대교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로서 WCC가 개발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의도하는 목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h. 세례의 의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개혁주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담의 죄로 인한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서 내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되고자하는 의식임에 반하여 새 관점에서의 세례의 의미는 이스라엘로 제한되었던 언약백성의 공동체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보혈의 의미가 아님)되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죄 값인 바벨론 유수(the Exile)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공동체의 문이 자신에게 열릴 수 있었음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에 참여하는 신분(identity)을 획득하는 의식인 것이다. 새 관점에서 세례를 통하여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언약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이 주어졌다는 것이지 전통교회에서 말하는 칭의 개념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현세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세례라는 성례 자체를 (현세적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현세적으로만 보고 있기에 단순히 회개와 더불어 육체적 세례를 통해서 (Identity를 얻는 것과 같이) 현세적 하나님나라에 들어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진정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으로서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새관점이나 미셔널 처치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베드로의 상태를 (이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속죄의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성경적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고 성령 세례가 없는 육체적 세례만으로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가 세례를 통하여 현세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최종적 구원을 선을 행함에서 찾는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대신하는 행함이 되기에 결론적으로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는 개혁주의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i. 예배

 

예배의 형태에 관하여는 미셔널 처치가 개혁주의 교회와 비교될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일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이 세상과 구분된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의롭다고 구별된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림으로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일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형태에는 물론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참석할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참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단지 참관자(observer)일 뿐이지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예배는 믿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는 개혁주의 교회와는 달리 예배가 드려지는 시간과 장소, 사람의 구분이 없으며 오히려 예배를 선교적인 관점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드려지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에 성경에서는 어떻게 예배가 드리지기를 원하는지 살펴봄으로서 미셔널 처치의 예배형태를 평가해 보고자한다.

예배의 시작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것이 최초의 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예배드릴 수가 없었고 출애굽을 하고서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에 앞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을 하였다는 것은 세속사회로 상징되는 애굽과의 구별을 의미하였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속과의 구별이 필요하였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세속의 더러운 것에서 구별되시고 분리되신 분으로서 죄로 오염된 우리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서야 섬김을 받으셨던 것은 거룩에 참여하고자하는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다고 할 수 없고 다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경계를 정하시고 그 경계를 넘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서는 자는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의 경계마져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심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그 길이 바로 피의 제사이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길이 되셨던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 말하는 언약은 피로 완성되는 과정을 생략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심으로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성막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삶의 한 가운데 실현시키신 것이다.이는 삶 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피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죄라는 문제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단번에 드려지는 영원한 제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였던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경험을 통해서 깨닫도록 하고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라는 문제는 다스릴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함으로서 오직 단번에 영원한 제사들 드리신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은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면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예배는 세속과 분리가 되어 드려져야한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출애굽을 하였던 것과 같이 예배의 첫 번째 조건인 분리가 없다. 미셔널 처치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교회를 최종 목적지로 보고 있지 않기에 세속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지는 성육신적 교회이기에 세속의 영역 속에서 세속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린다. 분리의 의미를 가진 거룩의 개념이 없는 행위인 것이다.

마치 출애굽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려하거나 시내산에서의 경계를 무시하고 거룩한 땅을 밟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보혈이 없이 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인 것이다. 꼭 예배를 드리려한다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 받은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하며 다만 불신자들이 참여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틀을 깨끗이 준비한 후에야 시내산에 모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그들을 준비시켜야할 것이며 예배의 시간이 전도나 교제의 시간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리의 문제는 전통적인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미셔널 처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팀 켈러의 리디머 장로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피의 제사가 있어야한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만 의존할 뿐 언약을 완성 시키는 피의 제사가 없다.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인간이 탐욕과 우상숭배, 심지어는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를 우상으로 섬긴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섬기는 죄를 용서하기 위한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소에서 흘리는 피의 제사와 연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의 청산과 연관 시키는 것이다.

새관점이 해석하는 유월절의 의미는 출애굽하기 전날 애굽에서 문설주에 바른 피로 인하여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이스라엘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해석한다. 보혈의 의미를 떡의 의미로 왜곡되게 중심이동을 시킴으로서 전혀 다른 해석으로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WCC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구약을 해석하기에 이스라엘을 선교적 공동체로 보는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잘못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로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구별되는 거룩한 영역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성소의 개념 마져도 무너뜨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성막이었다. 신약에서는 지리적 구별보다는 영적인 구별을 중요시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는 성소마저도 선교적 개념이 없는 모이는(attractional) 교회로 해석함으로서 예배를 스포츠센터나 나이트클럽이나 아니면 직장이나 가정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참 좋고 신선한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보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분리의 개념이 훼손될 수 있으며 거룩한 교회가 세속과 구분되는 분리의 개념이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성막이 이스라엘 회중 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과 구별이 되었듯이 예배는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과 구별되는 가운데 드려져야 되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에서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고 부수적으로 믿는 자들의 신앙의 향상과 믿지 않는 자들에 전도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지만 미셔널 처치에서는 전통적 교회와 달리 선교를 제 일차 목표로 하고 있기에 모든 예배의 형식과 용어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재조정되어있고 예배 자체를 미셔널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 전통적 교회와의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j. 죄의 문제 해결 없는 회복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단지 영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생태계의 회복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윤리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정책을 수행하가는 WCC는 단순히 기독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각국의 정치 경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된 인간들에 의하여 이차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개념이 없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계의 파괴는 죄의 문제(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 노아시대 사람들의 타락등)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인간의 죄의 문제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기에 이러한 단순한 윤리적 행위를 통하여 생태계의 근본적인 회복이 가능할지 의문이 간다.

새 관점에서의 현세적 하나님 나라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주권적 역사가 없이는 죄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한다는 사실은 죄의 문제가 자신이 주체가 되는 윤리의 문제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무지에서 나온 생각인 것이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미셔널 처치의 방식은 마치 쓰나미를 손으로 막으려는 것과 같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k. 그리스도와 안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안식에 들어가게끔 하는 것이다.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쉼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시는 성화의 과정이고 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는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대속 되었기에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미셔널 처치에서 말하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기에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에 또 다른 요구가 주어지는 것이고 결코 쉼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시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안식의 장소이지만 미셔널 처치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지도 않고 그리스도와는 관계없는 공동체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서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자신들의 의를 이루려고 했던 잘못을 범하였듯이 미셔널 처치에서도 자신들이 들어간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로 스스로 의를 취하려고 하는 유대인과 같은 방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하고서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공격했던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같이 현재의 전통적 교회가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부정하는 새관점과 미셔널 처치가 유대인들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예수를 믿고 (현세적)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결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선교”라는 미션을 요구하는 곳이 되었고 이는 결코 안식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 땅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기에 이 하나님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있는 나라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히11:16)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하늘의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의 도성에 예비하고 계신 것이다. 반면에 미셔널 처치에서는 은혜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공로로 최종 구원에 이르기에 결코 안식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하셨고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만이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기에 안식의 개념에 있어서 미셔널 처치와 전통적 교회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결론

 

미셔널 처치가 개혁주의 교회와 이렇게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 원인은 톰 라이트와 같이 성경을 명제적 진리가 아닌 네러티브로 기록되었다고 보면서 각 시대적 상황에 맞게 성경을 상황화(contexturalization)하여 해석하여야한다는 논리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WCC는 이 상황화의 논리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용할 수 있었고 데이비드 보쉬의 “선교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로 “바울에 관한 새 관점”등의 결과물들을 도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이러한 상황논리에서 나온 개념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인류의 화합과 평화공존이라는 논리로 일반인들에게 더욱 지지를 얻는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인류의 비극은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죄성과 같이 모든 문제를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이라는 더 큰 문제를 낳음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머징 미셔널 처치”와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아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가 아닌 인간의 상황 논리 가운데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실존주의적인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가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회의 성장이 감소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돌파하고자하는 것일 수 있으나 “이머징 미셔널 처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전혀 다른 페러다임에서 나온 것이기에 개혁주의를 포기하지 않고는 선택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북미에서는 미국 장로교회(PCA)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교단 가운데 몇몇 교회들이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을 받아들임으로서 “패드럴 비전”(Federal Vision혹은 Auburn avenue theology))이라는 교회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이들의 모습은 명백히 이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이들에 대한 명칭을 어번 에비뉴 이단(Auburn Avenue Heresy)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페드럴 비전의 신학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과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의 교회들은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성직자와 성도들이 다같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이 무엇이고 개혁주의와 어떻게 다르며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머징 미셔널 처치“가 무엇인지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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