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가 말하는 1세기 유대주의- 김원호
2014-10-04 01:00:33
톰 라이트가 말하는 1세기 유대주의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바울"을 통하여 1세기 유대주의는 개혁주의가 생각하였던 구원을 얻기 위한 구원론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공동체 안에 머물기 위한 교회론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바울의 서신서는 구원 받은 백성이 어떻게 이방인을 자신들의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다음 글을 통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톰 라이트는 칭의라는 개념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1)의 관점에서 읽혀지면 안되고 대신에 1세기 유대주의2)의 상황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Wright contends that the idea of justification must not be read in the light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but instead in the context of first-century Judaism( Paul, pp. 19, 32, 35, 116, 120, 124, 129.)
1세기 유대주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3)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칭의는 하나님의 종말론4)적인 정의로서 미래와 현재의 것이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의 맴버5)가 될 것이냐 에 관한 것이다. 샌더스의 의미로 말한다면 "진입"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름"6)의 문제인 것이고 누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일반적인 신학 용어를 사용한다면 교회론7) 이상의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며 교회 이상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 In Sanders’ terms, it was not so much about ‘getting in,’ or indeed about ‘staying in,’ as about ‘how you could tell who was in.’ In standard Christian theological language, it wasn’t so much about soteriology as about ecclesiology; not so much about salvation as about the church.(Wright, Paul, p. 119.)
1)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이 개혁주의에 잘못된 영향을 주어 현재의 개혁주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여기에는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전제와 이를 근거로 개혁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논쟁 이전에 성경 자체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도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성경 해석 전체를 부정하면서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2) 1세기 유대주의?
1세기 유대주의가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주의 개념이 아니라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이라면 전통적 개혁주의의 성경 해석은 전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1세기 유대주의에 관하여는 이미 칼빈도 외경등을 참조로 하여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며 여기에 추가된 쿰란 문서의 경우는 에센파의 자료이면서 아직도 해석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미리 결론을 내리고 이를 근거로 성경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3) 관계 형성?
톰 라이트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과의 관계가 이미 제대로 형성 되어있는 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럼 아담의 죄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와 관계없이 오신 분이라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칭하는 것은 성경이 틀렸다는 말인가? 톰 라이트는 아담의 죄는 이미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운데 암묵적으로 해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4) 종말론적 칭의?
칭의라는 용어보다는 vindication(옳음을 드러냄)이라는 용어를 톰 라이트가 칭의의 문제를 말할 때는 의로움의 현재적 완료가 아니라 종말론에 옳음이 드러난다(vindicate)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Wright, JVG, p307)
이는 은혜로 구원 받고 공로로 완성한다는 로마카톨릭이 말하는 구원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새 관점은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약에 모든 사람이 있는 상태이고 이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완성을 위한 펠라기우스적인 인간의 공로가 추가되고 평가에 의하여 종말에 확정된다는 개념이기에 항상 구원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고 오직 은혜가 아닌 부분적인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멤버? Identity?
자녀의 개념이 아니다. 멤버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의 개념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은 칭의에서 중요한 개념이지만 연합 개념이 없는 맴버로서 만족하는 개념이다.
6) 머무름의 문제?
만약 아담의 죄의 문제가 아직 해결 되지 않은 상태라면 머무름(staying in)의 문제 이전에 진입(getting in)의 문제가 우선이 될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문제가 진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머무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 머무름의 상태가 은혜 안에서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만약에 유대인이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렀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오심은 속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이 된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님의 속죄를 유월절 만찬을 통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변질시켰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속죄의 보혈 개념이 아닌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희생으로 개혁주의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7) 교회론에 관한 문제?
1세기 유대주의가 구원론을 넘어선 교회론에 관한 것이라면 톰 라이트는 유대 교회를 신약 교회의 원조라고 말하는 것이랑 다름없다. 톰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유대교회와 현재의 신약교회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버전으로의 업 그래이드 개념이다. 즉 유대됴회가 신약교회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세대주의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비슷하며 또 다른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이러한 개념의 교회론은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전통적 개념의 회중교회가 아니라 피조계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우주적 교회론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보편구원론으로 귀착되는 미셔널 처치의 교회론이다.
결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맞다면 믿음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맴버 즉 회원(Identity)의 개념에서의 교회론으로는 맴버가 되기 위한(회원가입?) 요구조건이 불분명하다.(요구조건이 없다면 맴버의 의미가 있는가?) 멤버가 된 후에 자격 박탈의 규정이 애매하다. 인간이 선하다는,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아담의 죄는 이미 나하고는 상관없는 문제가 되었고 어떠한 종교를 가지던 간에 간디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이 너무 자의적이며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기준이 막연하며 종말에 심판의 기준이 모호하기에 새관점이 맞다면 심판에 대한 불공평의 항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어지럽다.
톰 라이트의 개혁주의 용어 사용의 문제점-김원호
2014-10-04 01:02:35
톰 라이트의 개혁주의 용어 사용의 문제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에서 인용)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은 성경에 대하여 개혁주의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정통 개혁주의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정통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의 조직신학 교수인 John Fesko는 자신의 글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에서 칭의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있다.
칭의에 대한 새관점의 주장
1) 새관점론자들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를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은 율법주의에 대립된 믿음을 통한 칭의 즉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 안에서 의로운 상태에 있는 유대인의 교회론이나 공동체 즉 1세기의 교회에 있어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는 지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The new perspective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how Jews and Gentiles can co-exist in the first-century church. p13/22)
2) 새관점에서는 칭의를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극치의 날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Justification is a declaration that God, who is faithful to His covenant promises, which is a display of His righteousness, makes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to vindicate His people. p13/22)
칭의 용어에 대한 칼빈( 개혁주의)의 해석
1) 개혁주의에서는 톰 라이트의 앞의 주장과는 달리 바울이 구원론에 관하여 다루고 있고 이는 교회론과 종말론에 긴밀하게 엮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The Reformation, on the other hand,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soteriology, which are intermeshed with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p14/22)
2)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명확히 인정하시는 것이다.
(justification is when God declares a person as righteous bas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p14/22)
톰 라이트의 몇가지 문제점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용어인 칭의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복음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erminster Theological Seminary: WTS philadelphia)의 역사신학 교수인 칼 투루만(Carl. R. Trueman)은 새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소위 새관점 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재조명은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조와 교리들로 굳건히 서있는 개신교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칭의에 대한 서구 전통 전체를 부정하며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it seems to me that the current rev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formulated by the advocates of the so-called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hing less than a fundamental repudiation not just of that Protestantism which seeks to stand within the creedal and doctrinal trajectories of the Reformation but also of virtually the entire Western tradition on justification from at least as far back as Augustine. Trueman, “Martin Luther,” p. 1.)
존 페스코(J. V. Fesko)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교회에 대하여는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치명적인 이유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신학의 여러가지 유형 중의 한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he new perspective is quite lethal to the church.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lethal is that it is presented as a variant of evangelical theology.)
국내 출판사에서도 한 가지로 톰 라이트를 소개할 때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서술을 붙인다. 사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더 이상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는 서구의 패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라는 교단은 이미 이단(Federal Vision Heresy, Auburn Avenue Heresy)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상태이다.
2)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서구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 있는 개혁주의 해석을 전부 부정하고 있다.(Yet,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reject the very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that goes as far back as Augustine.p14/22)
새관점 주의자들은 칭의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정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있다.
(Not only do new perspective advocates reject the historic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ut they also reject the historic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canon-Wright, Who Was Jesus?, p. 83~4).
3) 새관점이 교회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복음주의) 용어 사용에 있다.
새관점 옹호자들은 성경, 죄, 칭의, 공로, 믿음과 같은 복음주의 용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복음주의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most harmful to the church is its use of terminology.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use terms such as Scripture, sin, justification, works, faith, and gospel, but have given them entirely different meanings. p14/22)
새관점이 아무런 해가 없고 마치 개혁주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톰 라이트가 더 이상 개혁주의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새관점이 정통주의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It is this use of orthodox nomenclature t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seemingly harmless and has some within Reformed circles thinking that Wright is no foe of the Reformation.p15/22)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개인적 칭의는 정통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가 아니다.
톰 라이트는 공동체적 칭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가끔 강의에서는 개혁주의의 개인적 칭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이 말은 항상 일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칭의가 의의 전가(Imputation)에 근거한 칭의냐 아니면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종말에 확정될 유보적 칭의냐인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톰 라이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만약에 후자라면 (메이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단성을 가리기 위하여 정통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Similarly, Douglas Wilson writes that “while Wright’s emphasis on corporate justification is important and necessary, the way he stresses it is a cause for concern. But in a taped lecture of his, I heard him explicitly say that he was not denying the Protestant doctrine of individual justification. Given his overall approach, this is consistent.”[62] Yet, one must ask, Does Wright mean justification in the sense of imputed righteousness or as eschatological definition? If it is the former, then he is inconsistent; if it is the latter, then this is precisely the danger of which Machen speaks—orthodox nomenclature that veils liberalism.-p15/22)
실은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칭의라는 용어는 믿음과 더불어 확정되는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극치의 날에 확정되는 종말론적 의미(유보적 칭의)를 가지고 있다. 훈련된 신학자나 신약학자들은 쉽게 이 용어의 변질을 파악하겠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It appears that it is the latter because Wilson calls Wright “an outstanding exegete,” who “does not shy away from showing how the text conflicts with ‘standard’ interpretations.”[63] The trained theologian or New Testament scholar will readily identify this shift in nomenclature, but the person in the pew who reads Grant’s review or Wilson ’s general approbation may not. (p15/22)
이러한 용어 사용에 있어서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복음이나 죄, 칭의, 믿음 등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뜻이 있다면 우리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진짜 성경이 말하는 예수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Wright’s views on gospel, sin, justification, and faith stand behind his preaching, then we must wonder if Wright’s Jesus truly is “the biblical Christ.”(p15/22)
결론
John Fesko가 말하는 톰 라이트의 위험성은 복음주의가 아닌 사람이 복음주의를 표방하며 복음주의 안에서 복음주의의 용어를 사용하며 복음주의자인 것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나 집단이 적과 싸우는데 있어서 패배 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눈에 보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이단 중의 하나는 신천지일 것이다. 신천지가 무서운 이유는 오랜 기간 동안 교회 내에서 신뢰를 얻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인들을 빼간다는 것이다.
새관점은 분명 복음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기독교에서 벗어나 유대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성서유니온, IVP, 에클레시아북스등 여러 복음주의 출판사에서 자랑스럽게 톰 라이트의 책을 출판하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안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진행되고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자로 생각하고있는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교인들에게 "당신이 그동안 잘못 믿어 왔오"라고 말하는 이단적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이러한 출판사들의 문제는 정통용어를 사용하며 이단성을 숨기는 톰 라이트와 너무나도 닮은 꼴이기에 이러한 출판사들이 발행하는 톰 라이트의 책을 복음주의 책인줄 알고서 읽고 실족하는 이들이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주의와 율법- 김원호
2014-10-04 01:09:06
율법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있다.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은 바울이 서신서들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으려고 한다는)율법주의 개념으로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고 유대인들은 이미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을 주장하는 제임스 던의 바울 해석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은 톰 라이트가 자신의 저서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율법과 유대주의에 대하여 전통 개혁주의와 다른 관점 즉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을 말하고있다.
1)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적 행위로 의롭게되려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전통적 개혁주의의 해석과 같이) 율법주의로서 율법을 해석한다면-그리고 바울이 율법주의 개념으로서 유대인을 책망하고있다고 생각하게되면 - 우리는 율법과 바울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으로) 반항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된다.
2) 대부분의 (정통 개혁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유대주의를 마치 유대주의가 오랜 이단적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적적 행위로 인하여 의롭게되고 구원을 얻으려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고 톰 라이트는 주장한다.
3) 샌더스는 “유대주의 안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언약적 그림 안에서 행하여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4)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대주의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이 (율법적 행위로) 반응하는 모든 것을 앞선다.
5) 따라서 유대인들은 (정통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감사하는 뜻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약 백성이 되고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 머무르고자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언약 안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Judaism in Paul’s day was not, as has regularly been supposed, a religion of legalistic works-righteousness. If we imagine that it was, and that Paul was attacking it as if it was, we will do great violence to it and to him. Most Protestant exegetes had read Paul and Judaism as if Judaism was a form of the old heresy Pelagianism, according to which humans must pull themselves up by their moral bootstraps and thereby earn justific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No, said Sanders. Keeping the law within Judaism always functioned within a covenantal scheme. God took the initiative, when he made a covenant with Judaism; God’s grace thus precedes everything that people (specifically, Jews) do in response. The Jew keeps the law out of gratitude, as the proper response to grace—not, in other words, in order to get into the covenant people, but to stay in. Being ‘in’ in the first place was God’s gift.
-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p. 19;
바울이 서신서들,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책망하였던 내용이 톰 라이트의 주장처럼 행위를 통하여 의를 얻고자 하는 펠라기우스적 유대인에 대한 책망이 아니었다면 전통적 개혁주의는 물론 종교 개혁을 통하여 형성된 개신교는 이제껏 모두 루터의 잘못된(?) 성경 해석을 근거로 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톰 라이트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처럼 “우리가 이제껏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라고 주장하는 톰 라이트가 맞다면 (절대로 맞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맞다고 가정해보면) 개혁주의는 다음가 같은 몇 가지 교리의 변화를 수반하여야만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속죄의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세상 권세를 대표하는 로마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시는지 본을 보여주심으로서 즉 정치적 희생을 당하심으로서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지를 예수님께서 손수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 정부에 대항하여 희생되셨던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부활시켜주셔서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으므로 이제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본받으면 살아가야할지를 전하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위치는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보혈 즉 피흘림의 속죄개념이 아니라 단지 희생의 개념으로 바뀐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인류에 들어온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하여 이미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하여 정리가 되었으므로 이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을 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미 임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맞다면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의 속죄를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3)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의 중심은 십자가보다는 유월절 만찬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것은 이스라엘이 순종치 못함으로 인해서 실제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포로생활을 청산시키고자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포로생활의 청산은 바로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며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청산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있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공생애 사역이 바로 유월절 만찬을 통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의 청산이라고 말하고있다.
4) 구원의 대상이 달라진다.
새관점의 근거는 아브라함 언약이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된다는 전재 아래서 구원이 대상이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게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 보낸 자들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작정의 대상에 한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정치적 희생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선포되었기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이다.(Universalism-만인구원론)
이는 이머징 처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되며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머징 처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기초가 되고있다.
5) 교회론이 달라진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모인 회중적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연계시키고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개인을 대상으로하는 회중적 교회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대상으로하는 우주적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땅에는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머징 처치의 이론과 같이 결국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는 회중적 교회가 아닌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 주장하는 우주적 교회론을 기초로하게되는 것이다.
6) 지옥의 개념이 없다.
모든 이들이 신앙고백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새관점의 개념에서는 지옥은 실제하는 곳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전락된다.
이머징 처치 운동을 하는 랍벨이 자신의 저서 “Love Wins”를 통하여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톰 라이트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오히려 카톨릭의 연옥의 개념을 부활시키고있다.
7) 믿음의 성격이 달라진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정치적 희생(?)으로 죽으셨는데 이를 부활시키심으로
이 땅의 권세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 아래 굴복 시킴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의 왕이 되셨다는 것이다.
새관점의 믿음은 예수님의 정치적 희생을 통하여 왕이 되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
8)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역사적)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로 귀결되어야한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실체가 되는 교회의 그림자인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의 해석대로라면 교회는 이스라엘 유대 공동체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
결국 유대 공동체가 교회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추기]
새관점에서 말하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새관점에서는 율법 안에 은혜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을 은혜가 있는 약속의 언약으로 보고 있다.
만약에 율법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면 율법에 은혜나 약속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The idea is that Second Temple Judaism was gracious and forgiving, not legalistic and harsh.) 율법 안에 은혜가 있고 그 안에 용서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와 달리 율법을 은혜의 성격으로 보는 것은 새관점이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가 보는 바와같이 율법에 엄격한 행위적 요구가 있다면 이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아야만 하는데 의의전가 개념을 부정하는 새관점에서는 어쩔 수없이 율법을 은혜적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이 은혜 언약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완전한 순종의 개념을 완화 시켜서 율법을 자의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법으로 격하시킨다.
Failing to observe the law would place one outside of the covenant. If that person repented and went back to observing the law, God would be gracious and merciful and receive that person back into the covenant. The idea is that Second Temple Judaism was gracious and forgiving, not legalistic and harsh.(POSTED BY D.A. BOATMAN POSTED on JANUARY 18, 2012 Covenantal Nomism)
[추기]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말하는 율법의 요구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의 역활과 요구는 새관점에서 말하는 율법의 역할과 요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순종이며 인간에게는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율법의 역할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반면에 새관점에서 보는 유대인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의인이고 율법의 역할은 언약 백성들을 언약 안에 계속 머물게함으로서 의인의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게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는 설령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언약에서 벗어났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들어와서 율법을 지키면 언약 백성으로서의 의로운 상태가 유지되기에 율법 안에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며 전통적 개혁주의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경직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율법에 대한 관점은 예수님의 역활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새관점의 율법관은 율법의 역활이 예수님께 이끄는 몽학선생 역활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성경의 핵심이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에 있는 것이다.
"바울에 관한 새관점" 을 "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보다도 언약과 율법을 성경의 핵심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보다는 다만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목적만 이루면 되기에 혹시 순종을 못했더라도 예수님의 역할이 아니라 본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회개나 다시 율법을 행함으로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보는 하나님의 행위 언약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죽음 즉 피를 흘리지 않고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은 이미 본질적으로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에 새관점이 보는 관점과는 달리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지 않고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보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인간은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서 율법의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야만 우리가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상태를 의로운 상태로 보고 있는 것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다르다.
또한 언약백성이 된 상태를 의로운 상태로 보고 있기에 율법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할 만큼 경직되어있지도 않고 만약 율법을 범하여도 회개하고 다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면 언약 안에 있는 의로운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요구를 통하여 모든 이를 예수님께 종속 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 시키는 것으로서 율법이 예수님께로 연결되어야 할 필요성마져 차단 시키는 개념이다.
(마이클호튼이 본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also holds that the average Jewish person may sin and yet remain in the covenant through repentance, renewed obedience to the law, and (according to some major rabbinical sources) the "merit of the fathers"-the faithful deeds of the patriarchs. The condition for remaining in the covenant is not, then, successfully fulfilling all of God's commandments-it is not legalistic perfectionism-but freely intending to obey them. The fact that covenantal nomism provides for transgressions and does not require perfect obedience means, for Sanders and others, that it was after all a religion of grace.(Paul and Covenantal Nomism Michael S. Horton)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와 율법- 김원호
2014-10-04 01:20:04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란 무엇인가?
언약적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새관점 주의자들은 언약 안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표현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있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기에 율법은 이미 은혜를 내포하고있는 율법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고자 한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의 언약 안에 머물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에는 은혜가 내포되어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고 말하는 전통적 해석을 부정한다.
하지만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은혜는 전통적 성경해석에서 말하는 은혜하고는 성격이 다르다.
전통적 성경 해석에서 말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나타나며 이 은혜는 결과적으로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은 것을 말하지만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에서 말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가 아니라 그냥 성부 하나님의 의만을 말한다.
이러한 은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역할을 부정하는 결과는 가져오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부정함으로 인하여 구속을 통하여 나타나는 삼위일체 개념을 부정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톰 라이트가 종종 사용하는 재판장의 비유를 통하여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죄인이 무죄 선언을 받는 것은 다른 이가 대신 죄값을 치렀기에 무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재판장이 자신의 의를 힘입어 일방적으로 죄를 사하고 무죄를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부정되고 없어지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역할틀 하나님과 동격이 아닌 신성이 없는 선지자도 할 수 있는 역할로 예수님의 역할을 격하시킴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있다.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는 전통적 개혁주의가 말하는 은혜와는 성격이 다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은혜는 언약을 통하여 율법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의 의-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의)에 의한 것이고 이는 전통적 개혁주의 성경 해석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값 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는 다른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언약적 율법주의란 제2유대성전 시기 동안에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할례를 받은 후에는 (구원의)언약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다면 언약 바깥으로 쫒겨 나가게 되지만 그가 회개하고 다시 율법을 지킨다면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그를 언약 안에 받아주신다.( 결국 구원의 조건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기에 불완전한 은혜이며 Pelagius적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를 택하고있는 톰 라이트는 제2성전시기의 유대주의는 은혜롭고 관용적이지 결코 법률적이고 엄격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2) 율법을 주셨는데 이 율법은 다음의 두가지를 의미한다
3) 선택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4) 순종에 대한 요구다.
5)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며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신다.
6) 이 율법은 속죄의 수단이 되며 속죄의 결과는
7) 언약 관계를 유지하거나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다.
8) 순종이나 속죄, 혹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선택과 궁극적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말하고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비성경적인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주요 개념이기 때문이다.
(참조 출처)
POSTED BY
D.A. BOATMAN
POSTED on
JANUARY 18, 2012
Covenantal Nomism
You’ve probably never heard this term before, and to be honest, I didn’t hear of it until recently. Covenantal Nomism is the idea that Second Temple Judaism, which would be the time from the construction of the second temple until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70 AD., taught that you are in the covenant from birth/circumcision. Failing to observe the law would place one outside of the covenant. If that person repented and went back to observing the law, God would be gracious and merciful and receive that person back into the covenant. The idea is that Second Temple Judaism was gracious and forgiving, not legalistic and harsh.
The structure of covenantal nomism as stated by E.P. Sanders is this:
(1) God has chosen Israel and
(2) given the law. The law implies both
(3) God’s promise to maintain the election and
(4) the requirement to obey.
(5) God rewards obedience and punishes transgression.
(6) The law provides for means of atonement and atonement results in
(7) maintenance or re-establishment of the covenantal relationship.
(8) All those who are maintained in the covenant by obedience, atonement and God’s mercy belong to the group that will be saved. An important interpretation of the first and last points is that election and, ultimately, salvation are considered to be by God’s mercy rather than human achievement.
What does this have to do with anything? This is one of the leading concepts in the unbiblical doctrine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NPP). You can read more about the NPP in my post on the N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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