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도전(The Challenge of Jesus)- 톰 라이트
2014-10-01 19:03:07
예수 연구의 도전
요한복음 1:18절에 증거하듯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기독교는 말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논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도전
예수께서 전한 메시지의 중심이 하나님나라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상 완전히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다음 두가지 점을 믿고 행동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주 처움부터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의 피조물들 안에 있는 문제를 다루시기로 의도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단순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믿음이고 둘째는 이스라엘의 이런 소명이 이스라엘 역사가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말하면 선택과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두가지 신념을 일세기 정황속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이 무슨 뜻이 되겠는가? 이런 신념을 가졌을 때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어려움은 만일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의 통치에서 해방시키신다면 그것이 어떻게 언제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가라는 의문이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의문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는 쿰란 공동체처럼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이원론적 입장이고 둘째는 이방의 통치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는 헤롯 왕과 같은 방식이고 셋째는 무력투쟁을 지향하는 열심당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속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서 우리는 그 분의 소명과 강령이 얼마나 놀랍고도 극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은둔주의도 타협주의도 열심당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를 보면 그는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정의가 지금 자신의 모습과 사역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고 말씀하고 행동하셨다. 예수님의 왕국 선언 메시지가 가진 주요 요점들은 포로기의 끝, 새롭게 되는 백성을 부르심, 임박한 재난에 대한 경고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기나긴 포로 생활이 이제 마침내 그 끝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설교는 유대교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즉 포로에서 회복된 백성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하나님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었다.
상징의 도전
예수님은 제2 성전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의 일반적인 상징(안식일, 음식규례, 민족과 땅, 성전들을 암시적이지만 분명하게 공격하였다. 그 상징들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시대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나라 도래 이전에 속한 것이었고 이제는 시대에 걸맞지 않으므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말론이요 윤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상징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버리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이것이 상징적인 프락시스를 통해 표현되었을 때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도전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강령이 그들에게 조상들의 전통을 떠나 다른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충돌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동시대 유대인들의 충돌과 갈등은 종말론적인 신념과 기대가 다르기 때문에 야기된 정치적인 강령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예수님은 진정으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였는가?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자기 소명의 일부로서 죽을 것을 의도하였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는가? 제2성전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은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이전에 선언했던 것을 성취하는 자, 곧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스스로 메시아라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예수님이 이런 과업을 성취하려고 의도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예수가 참된 메시아라고 하는 신념은 아주 이른 초대 기독교부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래서 바울의 때에 벌써 그리스도(Christos) 라는 단어가 예수의 이름에 함께 붙여져 사용되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예수의 메시아됨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수의 부활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분이 진전한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 기간중에 시종일관 자신의 소명이 이스라엘의 메시야 였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추어졌던 그 분의 주장이 예루살렘에서만 공개되었고 말로 가르치신 것 보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더 두드러졌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아주 혁신적으로 재정의한 하나님나라 개념에 잘 맞는 새롭게 정의된 메시아관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포로에서 회복되는 참된 백성, 즉 진정한 하나님나라 백성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그 나라와 백성 그리고 이 메시아는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예수님이 새롭게 정의한 메시아 개념은 예수님이 전파한 왕국 선언과 잘 부합된다. 예수님은 야훼의 백성을 대표하는 분으로서 포로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언약을 새롭게 하고 죄를 용서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가져다 주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메시아로서 소명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신념은 십자가와 관련된 그 분의 소명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자기 소명의 일부로 사실 그 정점으로 이해하였고 그소명에는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운명이 함께 묶여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정점에 도달했다고 보았고 자신이 이 결정적 시점에 이스라엘의 운명을 메시아로서 이끌어야 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옛 선지자들처럼 완악한 이스라엘에게 야훼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적들과의 물리적 전쟁을 포기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소명이자 과업이라고 이해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이 빛이되는 길이고 이스라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빛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인 자신이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 되는 소명을 성취하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소명을 이해한 방식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마지막 상징적 행동으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며 동시에 승리의 상징인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정당화 해준 것이 바로 부활이었다. 십자가를 부활의 사건에 비추어 보자 그 십자가는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소명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이해를 따라가면 십자가는 세상의 악과 고통을 다 쌓아놓고 한번에 처리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승리가 이 세상의 삶속에서 실행되지 않고 다만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게에 대하여 가졌던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야 비로서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과업의 자리에 바르게 도달할 수 있다.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십자가에 대해 더 알면 알수록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 자신의 소명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
예수는 하나님이었는가?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란 것을 알았는가? 예수 시대 유대인들의 생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고 피조물과 친밀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부르셨음을 믿었다. 이 두가지 믿음인 유일신론과 선택 혹은 창조와 언약은 철학적 요구나 형이상학적 숙고끝에 도달한 추상적인 전제가 아니라 특정 역사를 거쳐 발견되었으며 그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 역사는 바로 아브라함 족속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2 성전기의 유대적 저술의 두가지 특징은 야훼께서 포로시대에 이스라엘을 버리신 후에 시온으로 다시 돌아오신다는 기대와 야훼의 즉위와 그 왕위를 공유할 존재에 대한 전통이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 유대교 신앙의 토대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메시아의 지상적이고 군사적인 승리를 다니엘 7장의 왕위 등극과 같은 모습으로 즉 에스겔 1장의 병거 환상의 발전된 형태로 보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모든 증거들을 통해 볼 때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유일신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이 경배받아야 할 분이라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창조와 구원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예수를 통해 실행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메시아라는 단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대교는 죽은 사람은 모두 부활할 것으로 기대했고 적어도 의로운 자는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다. 부활은 낙심한 제자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예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죄악된 세력에 대한 낯설지만 영광스러운 승리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런 복합적인 믿음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신 야훼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구원행위를 성취하였기에 어떤 식으로든 그가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의 인격적인 현시이며 화신이라고 선포하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부활은 이런 사고 과정을 시작하는데 결적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부활 자체만으로 예수가 신적 존재임을 뜻하지는 않았다. 사무엘 7장의 다윗 언약 사건을 초기 기독교의 눈으로 읽으면 성전은 결국 실체를 가리키는 표지판이고 그 실체는 바로 다윗의 부활된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발견하게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방식은 사람이 지은 건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인데 바로 그 인간이 메시아이고 부활은 그 메시아의 특징이 될 것이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추론했던 방식일 것이다.
예수의 근원적인 목표는 믿음을 통한 자신의 소명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야훼께서 시온에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한 전승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전승은 한 인간적 존재가 신적인 왕위를 공유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공생애와 죽음을 통해 이 전승들을 실행에 옮겼고 이를 통해 그는 야훼의 시온 귀환을 구현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인간적인 소명의 일부로서 믿음으로 파악하고 기도로 유지하고 싸움중에 시험을 받고 의심속에 고뇌하고 행동으로 옮기면서 자신이 이스라엘과 세계를 위하여 성경을 따라서 오직 야훼 그 분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고 야훼 그 분만이 되실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소명은 그가 아버지로 알고 있는 분께 이스라엘의 성경에 나온대로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것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 출애굽의 백성들에게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귀환과 구속을 체현한 것이다. 서구 정통주의는 너무 오랫동안 지나치게 고매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 상을 주장해왔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런 관점을 전재로 하여 예수를 그 안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기독론 문제에 접근한 경향이 강하다.
부활절의 도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놓여있다.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지 않는 초기 기독교의 형태는 어디에도 없다. 부활은 아주 초기 교회부터 예수의 신성의 증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이 부활이 주는 첫 번째 의미는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 자체로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생각되었다. 유대교 안에서 도래할 하나님나라는 이방 제국의 전복과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이었다. 그것은 심판과 구원을 위한 야훼의 시온 귀환이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가 일세기 유대인들이 상상했던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예수의 몸의 부활 사건 때문이었다. 부활의 믿음은 기독교 운동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핵심적 추진력이었다. 일세기 유대교에는 죽음 후의 삶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지만 부활은 다시 육신을 입는 것을 가리킬 뿐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또한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부활은 포로상태에서 위대한 구원, 즉 언약의 갱신을 나타낸다. 부활은 새 시대의 도래를 암시했다. 그러나 새 시대는 일세기 유대인들이 기대한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예수의 부활뿐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새로운 정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다시 정립하기 시작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과 이야기와 상징과 신학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었다는 것 뿐이다.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인 기대는 이방 나라를 무찌르고 성전을 세우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촛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고 따라서 하나님도 오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참으로 메시아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이 믿음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계관과 신학을 재조정한 것은 극도로 놀라운 일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방을 향하여 예수가 메시아라고 선포하였다. 만약 부활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을 놓쳐버릴 만큼 바울은 아주 철저하게 부활을 자신의 사상과 삶에 결합시킨 초기 그리스도인의 본보기였다. 그에게 부활은 단지 새로운 종교적 체험이나 죽은 후 삶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에게 부활은 성경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으며 시시대가 현시대의 중간에 침투해 둘어왔음을 의미했다. 바울에게 부활은 성경의 전체 내러티브가 마침내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새시대의 도래는 두 단계의 사건, 즉 메시악사 먼저 부활하고 마침내 메시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부활은 이스라엘을 자기 죄에서 즉 포로 상태에서 구원하리라는 약속의 성취였다. 따라서 부활은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으며 그 날들의 끝에 부활절에 시작한 사망에 대한 승리가 결국 완성될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형성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부활에 대한 이런 고백이다. 애초부터 중요한 주장은 예수의 부활이 그가 참으로 메시아였음을 중명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
우리는 어떻게 일 세기를 산 예수님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복원 작업에서 형편과 과제가 전혀 다른 우리 자신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을까? 우리가 속한 포스트모던니즘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는 현실의 붕과, 자아의 해체, 거대담론의 죽음이다. 이것은 의심의 해석학을 계몽주의 이후 서구 세계가 간직해 온 모든 것에 무자비하게 적용한 결과이다. 이런 엄청나고 소용돌이치는 문화 운동과 긴장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존재를 부인한 채 다만 우리가 안정감을 느꼈고 또 모더니즘적 복음을 전했던 현대를 견지하려고 애써왔으며 여전히 견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문화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다. 우리의 문화 안에서 이 절망적인 순간을 통과하여 다른쪽을 열려있는 길을 보기위해 성경적, 기독교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누가복음 24:13-25)에서 이 부분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라는 대목에서 요점을 붙잡아야 한다. 포로 상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한 이 말은 시편 43편의 기도를 반영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들의 희망을 철저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파괴한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포로 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은 아직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으며 이방인들이 여전히 세상을 지비해고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이 처럼 절망한 제자들에게 그 낯선 사람(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다르게 하며 역사적인 전례와 예언적인 약속과 시판 기자들의 시도안에 그들이 줄곧 몰랐던 지속적인 주제와 패턴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이스라엘이 자신의 대적을 물리쳐 세상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세워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과 신원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위한 자신의 구원 목적을 성취하시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이고 기도와 소망의 세계였다. 그것은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담지자인 이스라엘에 촛점을 맞추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남은 자의 사명이 궁극적으로 나타나게 된 존재인 이스라엘의 참된 왕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선지지달의 글에 대한 그들의 마음의 둔함과 믿음의 결핍은 순전히 영적인 무지만이 아니었다. 이는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머리와 가슴에 정확한 이야기를 접하고는 새롭고 엄청나고 놀랍고 감동적인 가능성이 그들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놀라운 성경의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말해온 이야기가 의미있으며 특별히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이 말한 이야기의 위대한 절정으로 의미가 있다는 사싫을 강조하고 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계시며 또 그 활동이 이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메시아 예수께 촛점이 맞추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우리에게 시편 42, 43편의 역사적 형태(historical version)를 제공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는 메시아 그 자신이 고통의 자리, 이스라엘과 참으로 모든 세상의 깊은 고통 가운데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내려가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는 고난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고난받는 자가 되었으며 포로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로써 시편 43편 3절을 재현하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수천년 동안의 기도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산과 주의 장막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이 자난 부활절은 창조의 한주가 끝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날이된 것이다. 포로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질서가 도래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내어쫒긴 인류의 포로 생활이 끝난 것이다. 이 세로운 세계질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되지는 않지만 그들은 이 세계가 이미 여기 있으며 자신들이 그 나라의 수혜자일뿐 아니라 대시이며 또 증인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선교에 관해서는 어땋게 말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할 것인가? 만약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문화의 죽음의 기능을 한다면 우리는 많은 이들은 우리 자신이 낙망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더전에 대한 대답은 두려움에 떤 채 모더니즘의 품속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우리는 모더니즘의 대단히 이기적인 오만과 어리석음과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들어야 하며 또한 포스트모던 세계 밖의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부활하기를 기도하면서 사역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예수님과 세계의 이야기를 진정한 거대담론(meta-narrative)으로, 즉 치유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이야기로 전하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로 사는데 익숙해짐으로써 철저하게 헤체된 자아로 다시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오만한 모더니스트들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은 그 표적을 제대로 가누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너니즘 그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할 수는 없다. 우리의 과제는 실제적으로 우리 문화 안에서 우리 시대를 위해 부활에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기도 한 과격한 의심의 해석학은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적이다. 그것은 창조적이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계시되고 있다. 그 어떤 의심의 해석학도 자신을 내어주는 이 사랑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절망하여 엠나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같은 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둔한 자들이여!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이제 그가 자신의 세상 안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백성들 안으로 그가 참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자신의 죽음으로 단번에 영원히 악을 처리하셨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그는 이제 용서와 죄의 회개와 그 시대의 질서가 되는 새로은 인간 가족을 창조하시기 위해, 그래서 전쟁과 성과 돈과 권력의 지배에 도전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성령을 통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세상의 빛
우리가 예수님을 그 분이 살았던 일세기 유대교 맥락에 단단히 위치 시킨채 그 분의 메시지가 독특하고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상황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볼 때 우리 시대와의 관련성을 찾기가 더 힘들다고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염려는 아무 근거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독특함에서 출발하여 그 분을 따르는 길로, 그 분의 복음의 메시지와 사역으로 우리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유일무이하고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메시지에서 어떻게 우리 시대나 혹은 다른 시대의 교회의 소명에 이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몸의 부활은 온전한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20장 1, 19절에서 부활절을 주의 첫째 날이라고 반복하여 말하면서 독자들이 부활절은 하나님의 새창조의 첫째 날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었다(tetelestai)"는 외침은 하나님이 창조의 첫 역사를 마치셨던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로 돌아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제 부활의 아침은 하님의 새 세상의 아침이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세가지 명령은(요한복음 20:19-23)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증거와 사명, 제자도 및 우리의 세계를 재형성하는 일의 맨 앞에 위치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든 세대가 직면하는 도전 즉 세상의 빛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세가지 명령 (1)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 성령을 받으라 (3) 죄를 용서하면 사해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과 함께 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님 안에서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며 그 새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며 그 빛은 이제 어둠을 비추고 어둠을 이긴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부활절과 마지막 위대한 완성 사이의 밝은 중간기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을 누렸던 이유는 자신들이 새 창조의 첫날에 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위대한 모범이나 큰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주적 역사의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이고 사실이었다. 신약의 요점은 에덴동산은 현재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임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절과 완성의 날 사이에 살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재형성의 역사를 세상에 가져오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일 , 즉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일과 하나님이 만들기 원하시는 미래의 세상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세상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나머지 현 세상은 소멸될 것이며 미래의 세상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현 세상과 다가올 새 세상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 나머지 살제 우리의 노력으로 현 세상에 하나님나라르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의 부활이 보여주는 것은 이 세상과 올 세상 사이에는 불연속성뿐만 아니라 연속성도 있다는 것이다. 연속성이 있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이 부활절과 오순절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이루어진 것,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진 모든 것은 이미 미래의 새로운 세상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종말의 시작과 종말의 끝 사이에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보이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도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된다. 예수님은 터(foundation)이고 우리의 사명은 그 위에 건물을 짓는 것이다. 그 터는 유일무이하고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다. 만약 다른 터를 놓으려고 한다면 배교행위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해야한다"고 말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위하서 예수께서 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유일무이하며 절정이며 결정적이다. 이 사실은 역사적 예수를 부단히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당화 시켜준다.
터는 그 터위에 세워질 건물을 위한 패턴과 형태와 기초를 제공하여 준다. 우리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일을 성취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사명은 예수의 유일무이한 성취를 대라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일무이하고 오직 한번만 작곡되는악보를 노래하고 연주하는 음악가와 같다. 보냄의 명령과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은 언제나 함께 간다. 새 창조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며 우리는 산 청지기가 되어 동산을 돌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형상의 담지자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형성해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성취를 실행해야 한다.
이 관점은 우리가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서를 읽도록 해줄 것이다. 복음서는 우리가 그 위에 건축하도록 부름받은 터에 관하여 말해줄 것이며 따라서 그 위에 지을 건물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지었듯이 교회도 세상을 위해 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자기 동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른 것 처럼 우리 시대 사람들을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우리 자신의 메시지로 전환하는데 도움이 될 열쇠는 무엇인가? 그 열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유일무이한 지위와 소명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소명이다. 이것은 세상에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런 것처럼 오날날도 인간은 이 소명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니체와 프로이드는 돈과 권력과 성이 규범이 되고 이것들이 소명을 대체한 세상을 묘사하였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님의 기인한 섭리 아래 오만한 현대성의 타락을 지적하고 있다. 세상을 형성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신의 타락상을 목도해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메시지를 우리 시대를 향한 메시지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 열쇠는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류의 소명과 세상의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소명 사이에 평행관계(parallel)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 지음을 받았듯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청지기직을 세상에 반영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 예수님은 터를 놓았으며 우리는 그 위에 지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용서하기도 하고 그대로 있게도 할 수 있는 신적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과 심판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그의 선포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면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분야에서 어디에서 사람의 계획이 유배(exile)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분별하며 겸손하고도 대담하게 권력자들은 패배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 인간이 되는 새로운 길이 드러났음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상징적으로 행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상징들이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상징 제작자(symbol maker)와 이야기꾼(story teller)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과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표지와 초청이 될만한 진정한 인간됨의 본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죄의 용서와 심판을 선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일에는 십자가를 지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는 천부권이기도 하지만 낯설고도 우울한 주제이다.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은 세상의 아픔과 혼란을 공유하고 짊어지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우는 일은 우리의 삶과 패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길은 고통당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길이요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길이기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이 그 곳에 전달될 수 있다. 하나님 역시 고통중에 있는 세상의 교회 안에서 지금 탄식하고 계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고통 중에 있는 세상 속에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소명을 받아들일 때 우린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메시아적 소명을 따라서 두 팔을 벌려 세상의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는 길임을 알게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분야가 고통을 받고 있기에 그 분야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세가지 명령 (1)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 성령을 받으라 (3) 죄를 용서하면 사해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소명에 충직하고 신실하다면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산 것 처럼 우리도 세상을 위해 살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믿는다면 성령은 우리를 이런 참된 인간이 되도록 만드실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세롭게 만드는 중에 고통 가운데 서서 기도할 때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되는 것뿐 아니라 동방교회가 신화(divinization)라고 말한 것의 참된 의미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오만하게 들린다면 성령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참된 앎으로 부름을 받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을 알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본질적인 인간의 과제중 일부이다. 우리는 사랑을 지식의 기본 모드로 취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히고 충만한 지식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할 때 사랑받는 사람의 독특성을 확실하 알게되며 열정적으로 그리고 동정적으로 삶과 내가 사랑하는 것에 관여하게 된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세계를 위해 우리가 사랑의 인식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과제를 위한 열쇠가 아니라면 무엇이 열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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