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 김원호
2014-10-03 23:01:21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을 중심으로-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은 지난 20여년동안 별다른 특별한 비평 없이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으로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톰 라이트의 새 관점과 이머징미셔널 처치등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화란개혁주의(신 칼빈주의)가 이러한 신학들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비평을 받고 있다.
이번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에 대한 비평은 지면 관계상 처음 장단점을 중심으로 논하려던 의도에서 조금 벗어나서 비평 위주로 글을 정리 하고자한다. 내용상 좀 더 깊은 신학적 접근이 필요한 항목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결론 위주의 글들로 정리되었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전체 글의 형식은 주제별로 앞 부분은 "창조 타락 구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을 설명하고서 뒷부분에는 그 내용들에 대하여 비평하는 형식을 글을 작성하였기에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비평의 글 사이에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1. "창조 타락 구속"의 몇 가지 주요 논점들
1. 개인의 구원보다는 선한 창조세계의 회복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벗어나서 뭔가 새로운 세계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창조세계는 선하기에(88쪽) 이 창조계를 떠나 다른 곳에 간다는 생각은 영지주의 적이며 이 땅이 악하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며 비록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지만 이 땅의 선한 구조는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폐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구조를 새롭고 선하게 회복하신다는 것이다.(87쪽)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이 폐기 되고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이 새롭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 땅이 새롭게 회복되는데 있어서 이 땅의 선한 구조는 남아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문화의 구조를 이루게 되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문화명령)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의 구조를 회복해야하며 이를 위하여 이 땅의 문화를 변혁하는 일을 하여야(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한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이 땅의 문화의 구조가 선한지, 이 땅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과연 영지주의적인 것인지, 구조의 회복과 천국보존을 위한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는 문제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자한다.
2. 천국에서 문화의 연속성.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88쪽)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89쪽)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것은 피조계뿐만이 아니라 창조명령이라고 할 수있는 발전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는 문화명령을 포함한다(78쪽) 이러한 문화명령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발전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84쪽)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원래 계획되었던 발전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순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문화적으로 발전 시킨 것을 (천국에서) 폐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럼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에서 말하고 있는 문화명령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화물이 보존된다는 주장이 어떠한 논리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문화변혁운동에 집중 시킬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한지, 과연 그 근거가 되는 구조가 선한지 등을 살펴보고자한다.
3. 문화 변혁과 두 왕국
지금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는 문화변혁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였기에 (골1:20) 그리스도인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을 다시 수행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를 변혁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two kingdom)사이에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고 지금 시기는 마치 바벨론 유수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세상문화와 긴장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일에 집중하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알버트 월터스를 비롯한 신 칼빈주의자들과 톰 라이트, 이머전트들은 이러한 두 왕국 개념에 반대하며 이들을 이원론적 영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두 왕국을 주장하는 이들과 달리 이 땅의 문화의 선한 구조는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새 땅에서 보존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천국에 보존될 문화를 선한 방향으로 변혁하는 일에 동참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루어 가는 일에 집중하여야한다고 설명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들이 얼마나 성경적이며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4. 미셔널처치를 위한 기독교 세계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은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고있는 마이클 고힌과 뜻을 같이하여 선교라는 관점을 고려한 개정판을 새롭게 발간함으로서 미셔널 처치를 준비하는 관점에서의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다.(182쪽)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은 신앙인으로서 좀 더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와 주어야하며 이는 교회와 문화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교회론은 미셔널 처치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미셔널 처치에서 보는 문화에 대한 관점은 그동안 전통적 교회에서 보아왔던 관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알버트 월터스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한 연구는 전통적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혼란만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창조 타락 구속"이 말하고자하는 미셔널 처치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인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5.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가?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보편구원론(univeralism)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논술의 형태를 종합해볼 때 보편구원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구원의 기초가 되는 칭의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화에 대한 내용도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피조계의 구조와 방향을 개혁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또한 개혁주의의 공통된 기초가 되고있는 칼빈의 5대 강령에 관한 언급이 없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모든 피조계의 회복에 대하여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은 아직 알곡과 가라지가 나누어질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기다리고 있으며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놓여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으며 지상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하여도 지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럼 과연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지옥에 갈 사람이 없는 보편 구원론( Universalism)을 지지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6.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이 줄곧 개혁주의를 기초로 한 기독교 세계관인 것을 강조하지만 과연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개혁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후기에서는 이 책이 볼렌호벤과 도예베르트 철학의 입문서라고 밝히면서도 (182쪽) 개정판 서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의 특징인 네러티브와 미셔널 처치의 맥락에서 이 책이 사용되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지만 네러티브와 미셔널 처치는 더 이상 개혁주의의 범주에 들어가기 힘든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의 필수적인 요소는 칼빈의 5대 강령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5대 강령은 우선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가를 알아보며 일차적인 초점이 우리 인간에게 맞추어져있다. 그러나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주의의 기초가 되고 있는 칼빈의 5대강령을 제외시킴으로서 전적 부패한 자신과 인간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오직 문화라는 외부 세상에 만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고 있는 마이클 고힌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이 개혁주의 철학을 기초로 한 기독교세계관을 가르치기 위하여 쓰여진 책임을 말하고 있다.(181쪽) 이처럼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 의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주의 임을 자처하면서도 내용에 있어서는 개혁주의를 떠난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 논의를 위한 주요 주제들
1. 창조와 회복
창조와 회복에 관한 "창조 타락 구속"의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창조는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59쪽)
2. 창조의 범위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으로 피조물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 제도(152쪽)는 물론 인간의 규례까지도 포함 한다
3. 창조는 인간에게 맡겨진 발전 사역을 통하여 지속된다.(78쪽)
4. 인간의 문명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한 창조 사역의 발전 과정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사역이다.(81쪽)
5.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문화변혁운동은 창조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창조 사역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구속적 사역이다.
6. 하나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84쪽) 그리스도의 구속의 초점은 회복이며 범위는 창조세계 전체이며 창조 세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와 같은 넓이로 볼 수 있으며(119쪽) 회복은 인간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회복이 되어야한다.
7. 구속은 지금의 창조세계를 폐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개념이 아니다. (117쪽)
8. 구속은 창조 세계의 회복을 말하며 선한 창조로 인해 이 땅에 존재하였던 에덴의 상태로의 회복을 말한다.(p105)
이상의 관점들에 대하여 다음의 제목들로 논하고자한다.
a. 문화는 왜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6일 동안 지속되었고 그 다음 안식하심으로 창조 사역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아담에게 위임된 문화명령을 포함하여 타락 후에도 지속되고있는 각양 사회제도를 포함한 문화의 구조를 비롯하여 이의 발전 과정까지 모두를 하나님의 창조의 법아래 있는 창조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문화를 창조의 대상으로 보는 이유는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 전체의 주제는 문화의 회복이며 회복된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 성되고 보존되며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문화의 발전 과정에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약 문화가 하나님의 창조 대상이 아니라면 회복의 대상도 될 수 없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 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의미도 상실 될 것이다.
b. 문화물의 상당 부분은 타락 후에 명한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문화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방향이 잘못됨으로 원래의 선한 구조가 훼손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예를 통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의복의 경우를 예로 들면 옷은 아담이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셔서 입히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선한 작품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타락과 관련되어 있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덴의 상태로의 회복을 구속의 핵심으로 말하고 있지만 에덴에서는 의상이란 것이 없었다. 또한 추위를 막아주는 집과 건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땅에서 문화변혁 운동을 통하여 의상과 건축의 구조를 바꾼다 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보존된다면 그 곳은 에덴만도 못한 곳이 될 것이다. 물론 발전이라는 용어를 가미하여 에덴의 상태를 원시 상태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연 기관과 산업이 있다고 발전된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c.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의 폐기가 아니다?
"창조 타락 구속"의 배경이 되는 신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의 것이 회복되어 이 땅의 문화가 보존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땅에서의 문화 활동의 산물들이 천국에서 연속되지 못한다면 문화 변혁 운동에 대한 설득력은 상실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삼층천(고후12:2)에 갔다 온 다음에 자신이 갔다 온 천국에 대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고 또 자신이 갔다 온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늘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생각은 알버트 월터스의 말을 빌리자면 영지주의적인 것이다. 물론 죽은 후의 천국과 예수님의 재림 후의 천국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회복된 에덴과 같은 곳은 아니다. 이 땅의 연속선상에서의 에덴으로의 회복은 또 다시 타락할 가능성에 대한 해답이 없다. 회복이라는 개념이 에덴 이상의 것이 된다면 회복이란 용어가 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 이상의 것이기에 회복이란 용어는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회복(redeem)이란 구속(redemption)의 개념이지만 칭의의 개념까지 가기 위해서는 순종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사역을 하셨다.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회복(redeem)을 위한 소극적(수동적) 순종과 의(justification)를 위한 적극적(능동적) 순종(justification)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를 전가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수적인 요소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 타락 구속"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야 한다는 칭의 교리는 찾아 볼 수 없기에 소극적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회복의 개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곳이기에 이 땅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고 이 개념을 영지주의 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톰 라이트에게서 하나님 나라 개념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지만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지상적 회복을 통한 이 땅에의 하나님의 왕권 회복을 말하는 유대주의의 확장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d. 회복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속.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선한 창조 세계가 회복되어야 할 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이고 예수님의 순종의 의를 입지 않고는 회복 이상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순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에덴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의를 전해주기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의는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 모두를 통하여 이루신 의이기에 이러한 의를 전가 받은 사람은 에덴을 넘어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단순히 에덴으로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e.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회복만을 말하고 지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구속의 범위를 타락의 범위와 같은 넓이로 보는 것은(119쪽) 구속받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지옥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오직 현세적인 차원에서의 생각뿐이지 이 세상과 다른 차원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없어질 것에 대하여도 말하고(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1) 지옥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벧후2:4)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땅의 어느 것도 폐하여지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성과 속을 나누는 이원론을 배제하고 있으며 이 피조계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여졌기에 속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132쪽) 이와는 반대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SC) 교수인 반 드루넨은 우리의 존재만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제도와 활동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반 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34쪽)
f. 회복 이상의 새 하늘과 새 땅.
알버트 월터스가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창조 세계의 회복은 선한 창조로 인해 이 땅에 존재했던 에덴의 상태를 최종상태로 희망하고 있으며(105쪽) 그리스도의 구속의 초점은 회복이며 범위는 창조세계 전체로서 창조세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119쪽) 여기에 칭의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그리스도의 적극적(능동적) 순종과 소극적(수동적) 순종이 다 포함되어 전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으로 이루신 의를 힘입어야만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 칭함을 받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상태가 타락 전의 아담의 상태 이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의 상태 이상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죄 용서와 더불어 다시 에덴의 상태로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불순종 할 수 있는 타락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달된다면 우리의 상태는 다시 아담과 같이 범죄 할 수 있는 상태 이상의 범죄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순종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은 또 다시 에덴과 같은 범죄가 되풀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2. 구조와 방향
1. 문화물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하다.(144쪽)
2. 문화물의 본래의 구조가 선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방향이 왜곡되었다.(145쪽)
3. 문화물의 선한 구조는 천국에서 보존된다.(101쪽)
4. 그리스도인은 선한 구조를 회복하고 방향을 선하게 바꾸어야한다.(148쪽)
구조와 방향의 핵심 개념은 문화물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으로서 선한데 반하여 방향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핵심 개념은 "구조와 방향"에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7가지 항목으로 논해 보고자한다.
a. 구조를 창조물에 포함하여야 하는 이유
인간의 타락 이전의 창조 세계는 선하며 하나님은 버려질 잡동사니를 만드시지 않으며 만드신 것을 폐기하지 않으신다.(87쪽)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하여 명하신 사회적 구조도 포함되어 있으며 사람에게 위임한 문화 활동의 산물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선하게 보고 있다. 만약에 인간의 문화적 구조를 창조의 차원에서 선하게 보지 않는다면 문화물의 천국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행하는 문화변혁 운동이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회복의 범위에 구조로서의 문화물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b. 구조 자체에는 악이 없고 방향만의 문제인가?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구조는 타락 이전에 창조되어 선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언급되는 많은 문화의 구조가 타락 후에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죄성으로 인하여 허락하신 필요악의 구조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구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가정하더라도 필요악의 구조에서는 벗어날 수없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범죄와 더불어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손수 제작하신 의복이 죄의 구조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의상 자체를 아무리 선한 방향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에덴의 수준까지 가기 위하여 의상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손상되어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성 손상에 대한 개념이 없이 문화변혁만을 추구한다면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없어야할 것이다. 성경에는 천국에서의 결혼에 대한 바리세인들의 오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창조와 죄를 대비시키면서 인간의 성 행위의 선한 면을 매춘과 대비 시키고 있다.(98쪽) 만약 인간의 성 행위의 선한 면을 창조의 구조에 포함 시킨다면 결혼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변혁을 통한 선한 구조의 회복이 천국에서 보존되리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구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변혁의 결과물이 천국에서 보존된다고 하는 것은 천국이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Synergism)에 의한 합작품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고 다만 인간는 은혜만을 옷 입은 존재인 것이다.
c. 방향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창조 타락 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는 타락으로 왜곡된 방향을 구속으로 변혁한다는 성경적 비전을 제시한다. (12쪽) 구조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구조의 방향을 선하게 함으로서 회복의 가능성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타락 후에 형성된 구조를 타락 전의 상태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설령 아무리 완벽한 회복이 있다 하더라도 타락전의 구조가 될 수도 없고 타락 전의 구조로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방향의 전환을 통한 구조 회복의 논리는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타락으로 왜곡된 방향을 구속으로 변혁한다는 성경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으며(12쪽) 이를 성화의 차원에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143쪽) 실상은 한국의 경우에도 오랫동안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분들도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실토하고 있다.
d. 진단을 잘못하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방향을 결정하는 우리의 행함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행함의 문제 이전에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존재론에 대한 규정이 선행되어야한다. 구조와 방향의 접근 방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해결된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바울 서신의 대부분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존재론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칼빈의 5대 강령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외부적 환경은 존재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차적인 현상일 뿐인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받고 가인의 범죄로 땅이 손상 되었으며 노아시대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이 또 다시 훼손 될 수밖에 없었다. 구조와 방향의 전환은 인간의 존재가 구원받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아직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고려해야한다.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소극적 순종+적극적 순종)으로 이루신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다시 타락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 땅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이다.
e. 구조는 타락한 상태에서의 한시적인 것이다.
인간의 옷은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결혼 또한 이 땅에서만 있는 제도인 것이다.(마22:23~) 옷의 구조를 선하다고 할 수 밖에 없고 결혼의 구조도 선하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이러한 구조가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는 천사와 같다는 말씀(마22:30)까지 하시는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천사 같은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문화물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바울이 취하고 있는 성경적 관점에서는 구조가 바뀔 것을 말하고 있다. “썩을 것들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2~53)에서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에 대한 이원론적 구조가 있는데 이는 구조에 대한 것이지 방향에 대한 것이 아니다.
f. 윤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이 윤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문화물의 구조보다도 인간의 존재의 구조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구조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속하여 있지만 타락 이후의 손상된 구조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인간의 존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에 우리의 존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대신 그리스도가 안에 계실 때에만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을 바꾸어 “구조”를 문화물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의 죄 성에서 찾고 “방향"은 “구조로서의 죄 성”의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인 것으로 보면서 성령의 열매라는 방법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의 역할은 윤리의 영역까지 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근본적 문제 해결은 루터의 “이신 칭의” 개념과 “칼빈의 5대 강령”을 통해 표현되는 전통적 개혁주의로만이 가능할 것이다.
3. 문화명령
문화명령은 신칼빈주의의 행동의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문화명령은 창조명령이다.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 된 것이다.(117쪽)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페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하고 창조 명령의 차원에서 문화 변혁 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다시 시작된 문화변혁운동은 사람이 경영하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2. 창조 사역은 발전의 사역을 통하여 계속 진행 되어야한다.(78쪽)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 하여야한다.(81쪽)
3.문화물을 천국에서 보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시며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은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다.(84쪽)
문화물의 천국보존과 문화명령은 긴밀한 관계에 있고 많은 토론을 요하는 항목이지만 일단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항목을 통해 논해 보고자한다.
a. 문화명령을 창조명령으로 보고 있다.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후 이 땅을 다스리라고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 사역의 연장선상에서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제대로 완성 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회복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담이 못 다 이룬 창조적 문화 명령을 이어받아 문화 활동을 창조 사역의 차원에서 계속 수행하여 나감으로 아담에게 맡겨졌던 원래의 사명대로 문화를 회복하여야 하는 것이다.(Cornelius Plantinga Jr. Engaging God’s World. p32) 즉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시 시작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원래의 선한 구조가 회복되도록 바꾸라는 명령이다. 문화 명령에 의한 문화 변혁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문화 활동을 창조명령의 차원으로 보는 것이다.(78쪽) 이러한 문화명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문화물은 결국 천국에서 보존된다는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은 아담에게서 시작된 문화명령이 중단 없이 계속되어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협력하여 천국에서의 문화를 완성하여 간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문화 명령은 태초에 시작된 창조 사역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전체 그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예수님 재림 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현재의 이 땅이 폐기되는 새로운 땅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가 본래의 선한 창조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116쪽) 즉 이 땅에서 폐기되어지는 것은 없으며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문화 구조의 왜곡된 방향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문화 명령을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제3창조) 보고 있으며 문화를 사람이 경영하는 하나님의 일로 보고 있으며 미셔널 처치는 이러한 문화변혁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다. 미셔널 처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모든 피조계가 구속받았기에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아담이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임명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117쪽)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구속은 이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며 우리는 다만 창조 세계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하는 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120쪽) 구체적으로는 결혼, 성행위, 예술, 사업등과 같은 문화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변혁하여야 하고 구속의 유일무이한 초점은 회복이기에 이러한 문화 변혁의 초점은 회복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하나님 백성의 과업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신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195쪽) 하지만 계속적인 진행형의 창조는 과정신학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밖에 없고 피조계 차원의 구속은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자의적 만유내재신론(범재신론. Panentheism)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묶이시는 분도 아니시다. 이머징 처치는 진리의 점진적 완성과 인간의 참여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b. 문화물의 천국 영입을 말하고 있다.
카이퍼는 문화물이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입된다고 말하고 또한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한다.(송인규, 일반 은총과 문화적 산물 12쪽) 알버트 월터스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문화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폐기하지 않으신다(84쪽)고 말한다. 플란팅가는 우리가 현재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내세까지 보존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있다.(하나님의 두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0쪽) 톰 라이트는 현세적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세의 문화 활동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질 문화라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며(반 두르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1~24쪽) 현재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부가 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미래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surprised by hope) 신 칼빈주의의 입장과 매우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 교수인 반 드루넨은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 드루넨은 오직 우리의 존재만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제도와 활동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반 드루넨,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34쪽) 반 드루넨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의 근거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24~26)은 땅에 속한 왕들과 나라들이 장차 올 세상으로 문화적 산물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자 그리스도께 찬양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반 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78쪽)
오직 신자만이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되었기에(계21:27, 22:14~15) 여기서 말하는 나라와 왕들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고 하나님의 백성을 왕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묘사한 것(계3:12, 5:9, 20:4)이라고 한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반 드루넨의 해석은 같은 구절을 가지고 문화물의 천국 보존의 근거를 삼는 송인규(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 294~)의 해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신칼빈주의자들이나 새관점의 N.T.라이트, 이머전트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세계에 대한 소망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했다. 이 땅에서의 인간의 문화는 한시적이고 없어질 임시적인 문화라는 것이다.(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 25).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은 일반나라에 속한 문화생활과 활동보다는 교회 생활과 사역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라는 것이다..(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131~)
c. 문화의 발전이 창조의 발전인가?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문화의 발전 즉 인간의 문명화 단계를 창조의 발전으로 보고 있다.(81쪽) 쟈크 엘룰은 (알버트는 자크 엘룰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인간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결과로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인 "도시의 의미"에서 도시의 출발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을 피하여 하나님과 관계없이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의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서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함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하겠다는 의미에서 도시 문명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고서 문명의 발전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이클 호튼은 성경을 문화와 연관 시키고자 하는 관심은 그 특징상 현대적 강박관념이라 생각하고 문화 그 자체를 이성이나 경험이나 전통 못지않게 믿음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발견 할 수 있는 어떤 본질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 속에 있는 진리와 정의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문화의 배경이 되는 자연신학은 언제나 일종의 우상 숭배로 발전하기 마련이고 교회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206~쪽) 반면에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이와 반대로 문화물의 구조를 하나님이 창조 하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전통적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와 신학은 문화라는 주제를 진리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스텐리 그렌츠는 판넨베르크의 과정신학을 맥클라렌에게 전해주었다) 미셔널 처치의 탄생 배경에는 복음과 문화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츠진하여온 GOCN(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이라는 단체가 있는 것을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문화가 복음과 어떠한 관계 속에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d. 과정신학과 만유내재신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계의 구속을 위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의 존재가 피조계의 완성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종속된 사건이라는 판넨베르크의 자의적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과 같은 성격을 가지며 창조계의 점진적 완성을 위한 과정신학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인지 피조계의 회복을 위한 것인지의 차이는 그리스도가 피조계에 종속되는지의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라면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피조계에 대하여 종속되는 사건이 바로 진리가 피조계에 종속되는 사건이며 인간의 활동의 과정을 통한 피조계의 회복은 인간의 참여에 의한 진리의 점진적 완성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자들의 주장에 부합되는 것이다.
e. 문화변혁운동의 근거에 대하여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에덴을 초기 구석기와 같이 발전하지 않은 원시적 상태로 보며 문명의 발전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록 문화 형태는 죄로 인하여 손상되었지만 문화의 근본요소는 아직 선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문화는 회복될 것이고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이라는 속성에는 화석 연료의 사용이 필수적이고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산업과 엔진은 죽음이 전제된 화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알버트 월터스는 발전 과정에서의 도시화, 산업화 혹은 내연 엔진 등을 배척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문명의 속성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에서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의 기술로 스스로 해결함으로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에 대한 속성을 생각하지 않고 발전 자체를 구조의 선한 방향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f. 문화명령과 지상명령은 구별되어야한다.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서는 인간의 문화 활동을 천국에서 보존될 구속적 활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속사 시대의 문화적 활동은 일반적 활동이지 거룩한 활동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통해 긍정되고 보존되며 촉진되는 활동이지 구속적 활동이 아니다.(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7721쪽)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하는 가운데 바벨론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69)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시면서 성과 속을 구분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4. 이원론
플라톤적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구속적인 관점과의 구별됨은 필요하며 이는 특히나 세계관에서 예민한 부분이다.
1.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주로 신학이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만 거룩한 영역으로 보고 세속적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을 신앙의 영역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된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온 것이다.(p33)
2. 잘못된 세속주의적 이원론은 영지주의적인 플라톤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3.개혁주의는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다.(23쪽)
"창조 타락 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가 이원론에 대하여 반복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교회와 문화를 성과 속의 개념으로 분리하려는 사고방식을 깨뜨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의 중요한 주제는 그리스도인이 문화 변혁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으로의 패러다임의 사고전환을 위해서는 성과 속을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를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문화변혁운동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할 때 신앙 생활의 중심이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이동 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문화명령은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기 위한 창조 사역으로 보고 있기에 이원론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인 것이다.
a. 성과 속의 구분
플라톤적 이원론과 성경적인 성과 속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알버트 월터스는 이를 동일시하면서 구속적인 관점에서의 성과 속을 플라톤적 이원론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구속적인 관점에서의 성과 속은 거룩함이라는 구별됨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뜻은 구별되어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을 하고 나서야 애굽과 떨어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러한 구별됨은 성막에서도 이어지는데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 지성소는 속된 것과 철저히 구별되는 거룩한 장소였다. 지성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휘장이 갈라져 개방되었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엡2: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믿음과 관계없이 모든 피조계의 구속을 말하면서 이러한 구별을 플라톤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의 산물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것을 (마22.21)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 참여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b. 구속 영역의 범위에 대한 시각 차이가 있다.
알버트 월터스가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이원론은 주로 영역(sphere)에 대한 것이다.(32쪽) 이러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주로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의 범위에 대한 시각의 차이와 이원론의 기준을 영역의 관점에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통치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 구속 받은 영역이라고 보고 있지 않은데 반하여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피조계를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구속 영역은 물질의 영역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위임하여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창조하셨다는 문화의 영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c. 이미 그러나 아직
플라톤적 이원론의 개념에도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다른 구속적 관점에서의 성과 속의 이원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가 '이미 그러나 아직'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나뉘어져야하고 양과 염소가 구별되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세계로 양분되어야 할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천국이 이 땅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지옥은 어디에 있어야하는지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머전트들은 종종 톰 라이트의 설명을 인용하여 지옥을 쓰레기 소각장으로서의 게헨나로 설명하면서 지옥을 상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영혼 소멸을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처럼 모든 피조계를 구속의 영역으로 보는 것으로는 지옥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두 나라'라는 구별된 영역의 개념을 적용하여 두 영역의 긴장과 대립을 언급하고 있다.
d.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구분이 비 개혁적?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라고 한다.(23쪽) 그러나 개혁주의의 기초가 되는 칼빈의 5대 강령에서는 분명 선택에 의한 구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영역의 가장 기본은 사람이고 선택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있다. 교회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거룩한 곳이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의 형태를 취함으로서 거룩함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은 거룩함에 참여한 자들이다.
알버트 월터스가 "창조 타락 구속"을 통하여 말하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하고 다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기관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을 구속받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세상과 구별되는 곳으로서의 교회를 거부한다.
"창조 타락 구속"의 후기를 쓴 마이클 고힌은 이러한 개념의 교회인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고있으며 교회는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가서 문화를 변혁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5. 두 영역
교회와 문화의 관계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항상 주요 주제가 되어 왔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보는 두 영역의 관계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의 특성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사회 속의 문화의 기본 구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 놓은 창조의 영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시작된 창조세계의 회복은 먼저 문화의 구조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문화의 영역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회복되어야 할 영역인 것이다.
3. 이를 위해 교회는 문화의 선한 구조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수행하여야하며 서구 사회가 급속히 세속화 된 것은 문화를 외면한 두 영역이론에 물든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109쪽)
즉 문화를 교회와 대립관계(두 왕국, 두 영역)에 있지 않은 회복되어야할 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는 두 영역 이론을 이원론적 세계관의 변형으로 보고서 개혁주의 세계관으로서의 통합적 관점을 주장하고 있다.(38쪽) 두 영역이론에 대한 입장을 하나님의 두 왕국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a. 교회와 세상의 구분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은 미셔널 처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 문화의 영역을 교회와 구별된 세속의 영역으로 보고 있지 않다. 교회는 마치 베이스캠프와 같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전진 기지이기에 세상 사람들을 베이스캠프로 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교회를 전통적 교회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성도들의 모임이 아닌 선교적 훈련을 위한 기관(선교적 교회)으로 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의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은 전통적 교회인 보이는 교회로서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보이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시킬 수는 없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이 세상과 구별되는 구속받은 자녀들을 모으시고 손수 머리가 되셔서 이 땅에 세우신 몸 된 기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이 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가는 문화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안에 있지만 믿음과는 상관없는 곳이기에 구속받은 곳이 아니다.
'두 영역'개념은 구속받은 영역을 구분하는데 반하여 신칼빈주의 개념을 확대 적용한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을 구속받은 곳으로 여기며 '한 영역' 개념을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큰 실재이며 그 범위는 구속을 통해서 회복되는 세계 전체로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다르게 보고 있다.(신국원. 니고데모 안경 157 쪽)
b. 구속의 영역과 통치의 영역
두 영역에 대한 전제는 문화를 포함한 피조계 전체를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사단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인데 두 영역을 주장하는 책들은 대부분 하나님 안에서의 두 영역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사단의 영역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사단의 영역도 구속받은 영역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이러한 두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이 두 영역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구속받지 않은 통치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들은 영지주의자로 취급받을 것이다.(103쪽)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구원이 모든 피조계를 포함하며(184쪽) 예수님이 우주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기에 모든 영역이 통치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구속의 영역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피조계에서 구속의 영역과 통치의 영역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이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비난하는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단순하게 구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127쪽)
똑같은 영역에서 일을 하여도 하나는 자기 의가 될 수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기에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영역의 개념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개념을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상관없이 구속의 영역이 이 모든 피조 세계이면 이 피조 세계는 거룩한 곳이 되고 모든 사람은 믿음과 관계없이 혹은 어떤 신을 섬기든지 구속받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 피조세계 전체를 구속의 영역으로 보고 있기에 구속받은 문화 속에 들어가 믿음과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로 사람을 오게 하는 것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c.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은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준비되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훈련과 연습은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에서 요구되어지는 삶의 형태로 현재를 하나님의 구속받은 일원론적인 세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톰 라이트의 지금에 대한 생각과 같은 맥락에서 구조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문화변혁적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하나님의 전 세계적 통치를 의미하기에 이를 여과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기독교를 유대주의에 종속시키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합리화시켜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d.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가?
알버트 월터스는 이 창조계에 구속받지 않은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이원론자이며 영지주의자라고 비난한다.(103쪽) 반면에 구속받지 않은 사람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대상이 사람보다는 문화를 포함한 피조계이기 때문이다. 영역의 개념은 문화를 포함한 피조계를 대상으로 하지만 신앙고백은 행동의 주체가 되는 사람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신앙고백에 의한 관계성을 배제한 영역만의 이론으로는 "이미 와 아직"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는데 한계성이 있다. 지금 현재는 "이미 와 아직"사이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긴장 관계는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알곡과 가라지가 나누어질 것이며 양과 염소가 분리되고 지옥의 존재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신앙고백에 의한 관계성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곤 한다.
e. 사회의 세속화를 두 영역을 주장하는 교회로 책임을 돌리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서구 사회의 세속화를 '두 영역 이론'에 물든 교회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109쪽) 이는 마치 바벨론의 타락의 책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리는 것과 같다. 만약에 교회가 문화변혁 운동을 제대로 했다면 세계 제1,2차 대전이 예방되었을까? 만약에 교회가 이머징 처치처럼 유흥가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면 향락산업이 후퇴되었을까? 최근 선교 사역의 결과를 논할 때 문화와 타협하며 선교했던 열매들이 문화 속에 흡수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들을 종종 본다. 반면에 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결단을 요구했던 경우는 오히려 교회가 성장하는 결과들을 볼 수 있다.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열매로 하는 것이지 문화변혁운동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는 말씀처럼 두 영역의 싸움의 주체들이 있기에 세속 사회의 타락의 책임을 교회에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다. 오히려 교회의 책임이 있다면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한데 대한 것이다.
f. 일반은총의 영역도 구원의 영역인가?
"창조 타락 구속"에서 구조가 선하다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고 구조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는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이 땅에서의 한시적인 것이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화의 구조를 이룬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삶의 문화 구조의 기본인 결혼은 일반은총의 영역이지 하나님의 선한 창조 구조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화의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조 자체가 이 세상에서의 한시적이라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구조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기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폐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고(103쪽) 성도들이 교회의 영역만 선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은 거룩이라는 분리의 개념이 없는 영역만의 이론에서 생기는 오류인 것이다. 또한 구원과 관계없는 일반은총의 영역도 천국에서 보존될 구속의 영역에 포함시키려는 신칼빈주의적 주장이 혼란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일반은총에서의 구조까지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되리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g. 하나님과의 관계성
전통적 교회에서 창조세계를 선한 것과 나쁜 것으로 범주화하고 있다는 이원론에 대한 계속된 비난(132쪽)은 모든 영역을 거룩하다고 봄으로서 주권자와의 관계성을 영역의 개념으로 일원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영역에서 하는 일이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성립되어있지 않는다면 선하다고 할 수 없고 아무리 악한 영역이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일이 진행된다면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거룩함에 참여되어 성령의 내 주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어디에도 이러한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선의 절대적 기준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에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할 수 있기에 성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없이는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끊임없이 영역 이원론에 대한 비난만 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두 왕국 개념을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두 왕국은 영역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건인지 아니면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골1:20) 한 구절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원론적인 관점에서 20절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지 이를 확대 해석하여 모든 피조계가 (믿음과 관계없이)구속을 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가 "창조 타락 구속"을 통하여 자주 비난하는 성과 속의 이원론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각도로 생각해보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악하다고 하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불순종의 행동을 하는 것을 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하는 선이 있고 이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기에 교회의 영역을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원론적 영지주의라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에 교회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6.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의 연속선상에 있느냐 아니면 이 땅과는 전혀 연속성이 없느냐는 이 책의 전체 내용이 참이냐 거짓이냐의 중대한 문제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1.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이 없어지고 이 땅과 연속성이 없는 새로운 피조계가 온다는 말이 아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시작된 회복이 인간의 문화변혁운동을 통하여 발전되면서 이루어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는 도시화, 산업화, 내연 엔진들도 포함될 수 있다.(127쪽)
3. 이 땅이 버려지고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 전체를 새롭게 만드신다는 소식을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195쪽)
4. 천국은 본래의 선한 구조가 다시 회복되는 곳이며(117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어 놓으신 문화의 기본구조들이 회복되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이 되면서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곳으로서 우리의 문화물이 보존되는 곳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의 주제로 논해본다.
a.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의 문화가 보존될 수 있는 곳인가?
앞부분에서 설명하였듯이 "창조 타락 구속"의 배경이 되는 신 칼빈주의에서 주장하는 핵심요소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임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재의 피조계가 없어지고 새로운 피조세계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피조계가 변화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이 땅의 어떠한 것도 폐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만약 이 땅에서의 문화 활동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한시적으로만 필요한 운동이라면 문화변혁운동을 구속이라는 개념과 연계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사회변혁운동을 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사전 운동인 것이다.(하나님의 두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0쪽) 흔히들 마태복음의 천국이라는 용어가 하늘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을 호칭하기가 어려워 대신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상 시키는 마태복음에서의 “천국”(신약전체 37번중에 36번이 마태복음에서 사용되었다.)이라는 용어에 있어서 마태가 하나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해석이 잘못된 것임을 논증하는 최신 연구 논문도 있다.(Heaven and Earth in the Gospel of Matthew.”-Jonathan Pennington )
b.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이 발전되어 새롭게 되는 곳인가?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재의 피조계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피조계가 회복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 변혁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천국은 에덴의 완전한 회복이면서 원시형태의 에덴이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고도로 발전된 형태라고 말한다. 이는 문화물의 천국 보존이라는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선한 방향으로 문화 구조를 변혁시켜서 발전을 이루는 것이 가능한가에 의문이 가고 발전이라는 개념도 인간적이며 선의 기준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다시 타락할 가능성에 대한 해결책이 모호하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우리가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으로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기에 우리의 공로와 업적을 근거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c.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최종 목적지로서의 천국은 원래의 창조 세계로의 회복을 말한다. 물론 문화발전이란 것을 추가하고는 있지만 에덴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단순히 회복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공로에 힘입어 예수님의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이 모두 우리의 의로 전가되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기에 주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다시는 타락할 가능성이 없는 완전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 어디에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이신 칭의의 개념이 없다. 에덴 차원의 회복은 순종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기에 다시 타락 할 가능성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있지 않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회복이라는 단어로는 에덴을 넘어설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될 때에만 우리가 순종의 의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에만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다시는 타락의 가능성이 없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으로는 다시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답이 없다.
d. 안식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우리에게 어떠한 과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안식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인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으로 이루신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가(imputation)로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가 참여하여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주의 것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됨으로서 우리가 안식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율법에서 죽임을 당해야만했던 큰 죄 중의 하나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의 조건으로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의미와 같이 그리스도만의 영역을 범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안식이라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위대한 창조 세계의 행진을 위한 출발(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389쪽)이고 이는 안식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는 천국에서 문화가 보존된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천국의 완성을 위해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7. 복음의 의미
그리스도인이면 마땅히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복음은 전통적 교회가 그동안 전해왔던 복음과는 차이가 있다. 이를 살펴보고자한다.
1. 구원은 이제껏 우리가 생각하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나의 죄가 씻김을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에 대해서보다는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서 창조세계 전체를 온전히 회복시키기 위하여 방향을 재정립하는 능력이다.(38,183쪽)
2. 구원은 창조세계의 온전한 회복으로서 손상된 창조세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개인 중심에서 피조계 전체로 바뀌는 창조 세계 자체의 구원이다.(p184)
즉 우리가 지금의 창조계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창조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창조계가 변화되는 것이다.
3.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피조 세계 전체의 왕이 되신 하나님 나라를 전파(p185)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왕이심을 선언하는 소식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자한다.
a. 개인의 구원을 위한 복음이 아니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복음은 개인보다는 피조계 전체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복음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서 창조 세계 전체를 온전히 회복시키기 위하여 방향을 재정립하는 능력이고 창조 세계의 온전한 회복으로서 창조세계로 부터의 구원이 아닌 창조세계 자체의 구원이다.(183,184쪽) 즉 예수님께서 이 피조 세계 전체의 왕이 되셨다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185쪽)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미셔널 처치에 도입한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이 사회정의와 총체적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반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칭의와 영혼 구원만 이야기한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영안 양희송 묻고 답하다.247쪽)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주관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며 대안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성경을 더욱 본질에서 멀어져가게 해석하는 것이다.
마이클 고힌도 레슬리 뉴비긴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복음을 내세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으로 축소시키고 문화적 삶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은 이원론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열방에 빛을 22쪽)
b. 예수님이 왕이 되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셨다‘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왕이 되셨나(How God became King)"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정립한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와 비슷한 의미이며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184.187쪽)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스라엘의 기대와 소명을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을 만민에게 전하는 통로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187쪽) 즉 이스라엘을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와 같은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y)로 보고 있다.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의 구분이 없는 단일 언약론 적 성격을 나타냄으로서 하나님 나라 개념을 육적 이스라엘과 같은 선상에서 모든 민족에게 확대된 확장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187쪽)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실패한 역할을 선교적 교회(미셔널 처치)가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왕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184쪽) 이러한 복음을 들은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되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백성이란 개념 못지않게 자녀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왕이란 용어 못지않게 아버지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된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우리가 양자되었을 때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롬8:9)과 구별되는 양자의 영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아버지라(롬8:15) 부를 수 있다. 자녀의 개념은 성령의 증거로 가능하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만 거주하신다.(롬8:16)
c. 대속의 개념이 빠져있다.
전통적으로 보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으로 인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justification)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복 된 소식을 전하는데 반하여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대속과 칭의의 개념이 빠져있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가 사함을 받는 대속의 개념이 없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신 것인데 알버트 월터스가 자주 언급하는 톰 라이트는 마치 피고에 대한 재판장의 일방적 선언으로 피고가 무죄가 된 것이지 다른 이가 대신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피고에게 무죄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누가 대신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무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아담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 축복에 의하여 해결되었다고 보는 마이클 고힌의 생각과도 일치한다.(마이클 고힌, 열방에 빛을 79쪽) 하지만 칭의의 문제는 창세기 12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 총장인 로버트 고드프리(W. Robert Godfrey)는 “성경의 권위”와 “이신 칭의"가 종교 개혁 시작 이래로 공격을 받아왔는데 특히 “바울에 대한 새관점”에 의한 최근의 공격은 치명적인데 이는 학문적이고 경건해 보이는 옷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에 답하다. 추천사 중)
d.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의 복음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성경해석은 톰 라이트의 새 관점인 언약적 율법주의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187쪽의 내용이 새관점의 내용이다) 자신은 여러 곳에서 톰 라이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톰 라이트 복음을 구약 이야기의 완성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으로서 유대 공동체의 최종적 완성으로 봄으로서(184,187쪽) 유대 공동체를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되는 선교적 공동체로 보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이 후기를 쓴 마이클 고힌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같이 성경을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개념애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셔널 처치는 이머징 처치의 한 부류로서 이머징 처치의 대표격인 브라이언 맥클라렌도 톰 라이트의 도움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예수에게서 답을 찾다. 포이에마173~)
8. 이야기 신학
"창조 타락 구속"에서 성경을 보는 방식은 전통적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고자한다.
1."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세계관은 성경의 기본구조를 이야기로 보고 있다.(20쪽)
2. 하나님의 선교라는 커다란 이야기 하나로 모든 성경 말씀을 획일화 시켜서 기독교세계관을 정립하여야한다.(p186~192)
후기를 쓴 마이클 고힌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의식해서 인지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에 덧붙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자들인 레슬리 뉴비긴, N.T.라이트, 브라이언 왈쉬(Brian Walsh),리처드 미들턴(Richard Middleton)의 저서들을 통하여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다.(p21)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성경의 기본 골격 구조를 이야기로 해석하였기에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인 미셔널 처치의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본다.
a. 포스트모더니즘 방식의 해석학이다
"창조 타락 구속"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식을 도입하여 성경을 이야기로 본 세계관의 책이다.(20쪽)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성경을 상황화(Contextualization)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동료이자 제자인 리차드 미들턴과 브라이언 왈쉬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성경을 명제적 진리로 보지 않고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것처럼 성경을 이야기로 보는 방식은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406, 407쪽)
이들은 알버트 월터스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으며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보다도 1년 먼저 같은 맥락의 “그리스도인의 비전"을 출간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후에(1995년) 출간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 Biblical Faith In Postmodern Age)”을 통해 자신들이 개혁주의 진영을 떠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정작 알버트 월터스의 사상에 가장 충실했던 이들이 개혁주의 진영에서 떠나 포스트모던 신학에 앞 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알버트 월터스와 동일하게 성경을 이야기로 해석하였던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기를 쓴 마이클 고힌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의식해서 인지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에 덧붙이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자들인 레슬리 뉴비긴, N.T.라이트, 브라이언 왈쉬(Brian Walsh),리처드 미들턴(Richard Middleton)의 저서들을 통하여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깨달았음을 고백하면서(21쪽) 포스트모던 미셔널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전제로 성경을 이야기 형식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에 크레이그 바르톨로뮤와 함께 “세계관은 이야기다" “성경은 드라마다"와 같은 책을 저술하였다.('성경은 드라마다'는 성경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미셔널 처치를 위한 책이다.)
b. 명제적 진리를 거부한다.
성경 말씀을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로 해석하면 성경은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관계없이 절대화되어야 하지만 성경을 이야기로 풀어 해석한다면 성경을 모든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을 말씀이 아닌 이야기 형식으로 볼 경우에는 루터의 “이신 칭의”와 “칼빈의 5대 강령”과 같은 명제적 진리를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 형식(narrative)은 절대적인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를 배제하면서 얼마든지 자유로운 해석과 적용이 가능하기에 알버트의 제자들에서 다양한 결과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을 이렇게 점진적으로 상황화하다가 나중에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진리마저도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c.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한다.
톰 라이트는 다른 세계관에 도전할 수 있는 기본 구조를 이야기라고 보면서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펼쳐나감으로서 포스트모던 신학으로서의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NPP)”을 기술하고 있다.(톰 라이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p77~) 알버트 월터스도 마찬가지로 “창조 타락 구속"을 저술하였을 때 톰 라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하였는데(p19,192) 톰 라이트의 세계관은 이야기라는 요소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d.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앙고백(미시담론)이 없는 세계관(거대담론)이 가능한가? 개인의 신앙고백을 위한 전제인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이스라엘의 존재론과 유대 율법주의에 대한 해석이 인간의 존재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만 행위의 잘못에 대한 회개밖에 없는 것이다.
이야기 형태의 해석학은 인간의 존재론이 아닌 행위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지식을 통한 윤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바울이 해석하는 율법과 복음은 행위의 한계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를 보게 하는 논리인 것이고 복음은 우리의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형식의 해석학은 존재론보다는 행위론에 촛점이 맞추어져있기에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구원과는 관계없는 윤리방식의 행위론만을 말하고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죄인인 것이고 성경은 우리의 죄의 행위 이전의 죄인의 상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 칼빈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대상을 인간보다는 피조물로 초점을 바꿈으로서 인간의 존재론보다는 행위에 대한 분야로 관심사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9.문화의 회복을 위한 교회(미셔널 처치)
아마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을 일반교회에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다음과 같은 다른 관점으로 인하여 상당한 혼란이 있을 것이다.
1.알버트 월터스는 자신의 세계관의 논의가 결국 문화 전체에 연관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창조 타락 구속"을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저술하였다.(p34) 중세나 신정국가를 제외하고는 교회와 문화는 항상 서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신정국가였던 화란에서 시작된 교회와 문화의 연합관계는 도여베르트의 철학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체계적으로 정립되면서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가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과 공동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된 것에는 두 분의 관심사가 문화라는 주제에 맞추어져있기 때문이다.
2. 교회라는 선교적 공동체의 정체성은 문화변혁 운동에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은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가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변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역을 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p183) 이러한 문화변혁 운동이 교회라는 선교적 공동체의 존재목적인 것이다.(p188)
3. 미셔널 처치는 그리스도의 몸(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목적에서 선교적 기능을 하는 곳(incarnational church)이다.(p185,188) 기독교가 개인 구원보다는 사회 공동체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한다. 교회의 일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잘못된 이원론적 사고이며 영지 주의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문화를 포함한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기에 사회 속의 문화 구조를 변혁시키는 모든 문화 활동이 성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사회 속의 문화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해야한다. 이러한 기능을 위한 교회가 미셔널 처치다.
그럼 미셔널 처치가 전통적 교회와 어떻게 다른지 다음 몇가지를 통해 분석해 보고자한다.
a. 미셔널 처치는 문화변혁을 위한 기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복음과 문화라는 주제로 형성된 미셔널 처치는 문화를 위한 복음이라는 주제로 설립된 GOCN(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이 배경에 있다.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루터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크레이그 반 겔더( Craig VanGelder)는 선교적 사고(missional thinking)와 문화 변혁적 접근(transformationalist approach to culture)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선교의 선교적 원칙은 근본적으로 문화변혁(transformational approach to culture)자체라는 것이다.
b. 교회를 기능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목적에서 선교적 기능을 하는 곳(incarnational church)으로 보고 있다.(p185,188) 미셔널 처치라는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성령의 사역을 하는 곳이다.(p18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의 성령은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선교가 교회라는 선교적 공동체의 존재목적인 것이다.(p188) 전통적 교회에서는 선교가 교회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 한 가지인데 반하여 미셔널 처치에서 말하는 교회는 선교를 하는 기능적 기관으로서 교회의 본질 자체를 선교로 보고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전통적 교회가 아무리 선교에 집중(mission focused church)한다 하더라도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c. 미셔널 처치는 이스라엘의 선교적 사명을 이어받은 곳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교회의 선교이기에 하나님께서 선교를 통하여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선교 또한 창조물의 회복에 있다. 그러므로 창조물의 회복의 일꾼(worker)이 되어 하나님의 선교가 우리의 선교가 되어야한다는 논리 (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The Kuyper Lectures for 1981 Delivered at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Grand Rapids: Eerdmans, 1983, p68)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교회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선교적 정체성과 역할을 이어받은 공동체이고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결정적 행동방식이다.(마이클 고힌 열방에 빛을-신국원교수의 추천사중에서-고힌도 이스라엘을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와 같이 선교적 공동체로 보고있다)
이와같이 미셔널 처치의 본래적 기능은 이스라엘의 선교적 기능을 이어받은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이스라엘을 선교적 공동체로 보고 있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선교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교를 다시 시작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선교적 기능을 다시 시작하게끔 한 것이고 교회가 선교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구원을 위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미셔널 처치를 위한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서 문화 속에 희생적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문화를 변혁시켜야 하는 것이다.
d.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영역이 아니다.
미셔널 처치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변혁의 가능을 수행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위한 것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곳이 아니다.
미셔널 처치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각 교회마다 제자 양육 훈련 프로그램이 있다. 이러한 훈련은 문화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 위한 것이다.
e. 교회 개념의 변질을 초래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체를 임무로 하고 있다. 즉 외부적 문제들에 대한 조직적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사회 참여와 교회의 사회참여는 구분되어야하지만 신 칼빈주의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불분명하다. 반 두르넨은 자신의 책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에서 교회가 마치 바벨론 포수로서의 이스라엘과 같으며 이 세상을 바벨론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미셔널 처치 운동에 앞장 서 여러 저술 활동을 하고있는 크레이그 반 겔더(Craig VanGelder)는 선교적 사고(missional thinking)와 문화 변혁적 접근(transformationalist approach to culture)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선교의 선교적 원칙은 근본적으로 문화변혁에 있다는 것이다.
3.논의를 통하여 본 결론
a. 칭의가 없다.
"창조 타락 구속" 패러다임은 피조계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회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참여로 문화가 발전되면서 완성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피조계의 구속만으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손상으로 인하여 추락한 신뢰는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다. 오직 유일한 방법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것이다(고후1:2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에게 전가되는 칭의의 두 가지 요소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소극적 요소: 죄를 용서했다는 하나님의 선언. 우리는 죄 아래 있기에(롬 3:10,19,20) 용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우리 죄가 용서되었다.
2.적극적 요소: 칭의와 죄 용서가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이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계산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존중했기에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한다.
우리가 의를 얻었다는 것은 타락 이전 순전한 상태로 돌아가서 이제는 새롭게 의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우리가 돌아간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이다. 아담은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의를 얻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상태로 옮기는 것이 아니기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 명령을 이어받아 다시 문화변혁운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면서 또한 신앙고백에 의한 의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b. 보편구원론을 향하고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은 개인의 구원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이를 위한 문화변혁운동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의 문제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이면서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신 칼빈주의에서는 피조계를 통치의 영역 중에서 구속받은 영역을 따로 구분하여 구속받은 영역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플라톤적 이원론의 산물이라고 보면서 이는 복음을 내세적이고 개인적인 구원만을 위한 것으로 축소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생각이라고(88쪽) 비판하고 있다.
마이클 고힌은 창세기1장에서 11장까지 저주라는 용어가 다섯 번 사용되었고 12장에서는 복이라는 용어가 다섯 번 사용됨으로서 아담의 저주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으로 바뀌었다고 보고(열방에 빛을 86쪽)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였듯이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열방에 빛을 85쪽) 이는 아담의 범죄가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의 선언을 통해 해결된 것으로 보고 있는 톰 라이트의 새 관점과 같은 것이다.
미셔널 처치의 원조인 칼 바르트는 구원의 선택과 유기의 대상이 아담의 개별적인 후손이라는 개념을 반대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향해있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보고 있고 개인의 선택을 그리스도의 선택에 종속시킴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과 유기가 다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은총. 106쪽)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하나님은 택자를 회복시킬 뿐만이 아니고 역시 모든 창조물을 회복시키신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선교는 적절히 구분될 수가 없고 이러한 영향이 현대의 선교에 그대로 나타난다.(Snoeberger,"History,Ecclesiology, and mission, Or,Are We Missing Some Options Here?,"9)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인류에게 선택과 유기의 심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원 사역을 전하는 것이고 후기를 쓴 마이클 고힌도 이러한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전하는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칼빈주의와 미셔널처치의 배경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선택만을 이야기 할 뿐 유기의 대상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기에 결론적인 보편구원론(universalism)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c. 지옥이 없다?
지옥에 대한 언급이 있으려면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하고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려면 구분의 기준이 되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신칼빈주의는 톰 라이트의 새 관점이나 이머징 미셔널 처치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칭의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알곡과 가라지가 나누어 질 수가 없고 천국과 분리된 지옥의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피조계에 대한 것이고 이 땅에 버려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전제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믿음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또한 천국에 대한 개념이 이 땅의 연속선상에 있다면 지옥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지 막연하다.
몇 해 전 대표적 이머전트인 랍 벨이 자신의 저서"사랑이 이긴다(love wins)"를 통해서 지옥이 없다고 말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대립되는 개념이기에 이 땅의 연장선상에서 천국이 설명되어진다면 지옥도 이 땅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랍 벨은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쓰레기 소각장의 불을 지옥 불과 연관 시키면서 지옥을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d. 구속 개념의 한계
"창조 타락 구속" 전반에 걸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는 죄에 대한 개념에 촛점을 맞춘 '대속'이나 '속죄'라는 용어보다는 회복이라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일 것이다.
구속이란 개념은 창조로 인하여 형성된 구조가 타락으로 인하여 왜곡된 방향으로 손상되었지만 이를 변혁하여 원래의 선한 구조를 회복한다는 방향전환의 개념이다.( 12쪽)
하지만 기독교를 구속과 회복의 개념만으로 정리하는 것은 기독교를 윤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없는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율법의 역할을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몽학선생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내면의 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겠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이 율법이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되어 진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외부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회복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대속(atonement)이란 용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의의 전가, imputation)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이신칭의)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회복 개념의 구속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믿음을 통한 구원보다는 일을 통한 구원의 사고를 가지게 됨으로서 펠라기우스적 공로주의로 귀결되고 이는 종교 개혁의 중심이었던 루터와 칼빈에서 떠나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e. 결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 문제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 칼빈주의 계통의 "창조 타락 구속"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중요 통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 문제는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하여 접근하여야 하고 주체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실 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적인 접근은 우리가 우선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일차적으로 애통하며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하고 이차적으로 내가 주체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희생적 참여를 통하여 쓰임을 받을 경우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문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필요악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우리 가운데 있는 본질적 악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이 병들면 증상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증상을 없앤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원인을 치료하면 증상은 없어지기 마련이다. 사회문제는 환자에게 나타나는 증상과 같아서 원인적 접근을 하여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원인은 정확한 진단이 필수적이다.
이 글의 비평은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이 과연 제대로 된 진단인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가장 제대로 된 진단은 성경을 이야기가 아닌 명제적 진리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서 성경을 통하여 사물을 보는 것임을 생각해보며 이글을 마치고자한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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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그리스도인의 비전, 황영철 옮김, IVP,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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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양혜원 옮김. Ivp. 2009.
맬컴 워츠, 개혁교회란 무엇인가. 윤석인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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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부흥과 개혁사. 2012.
"창조 타락 구속" 패러다임의 문제점- 김원호
2014-10-04 01:17:13
창조 타락 구속 패러다임의 문제점
-알버트 워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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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호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우리가 속하여 있는 교회 뿐 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사회 제도를 포함한 이 세상의 문화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어떠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사회 문화에 참여하여 하는지를 “구조와 방향"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여 정립한 것이다.
콘스탄틴 시대 이후(AD313~) 교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상황(Christendom)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보이는 현대(Post-Christendom)에 와서는 교회가 어느덧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교회를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사회를 속된 곳으로 여기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원론을 부정하는 패러다임을 토대로 기독교 세계관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문화를 "구조와 방향"의 이중적 개념으로 분리하고서 구조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영역인데 반하여 방향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 방향의 전환을 통한 선한 구조 회복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러한 회복의 궁극적인 목표는 타락 이전의 에덴의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더불어 타락 이후에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어진 본래의 선한 구조를 회복하는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문화변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선한 창조 구조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문화 구조를 이루며 천국에서 보존된다는 개념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이제껏 문화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는 것이며 다시 한 번 더 문화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며 자기중심적이고 교회 중심적이었던 기존의 신앙생활 방식을 점검해보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문화에 대한 입장은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을 보여 왔고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주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여러 가지 논의할 점들은 제공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원인 분석을 통하여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 주장하는 주요 주제를 7가지 항목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이와 같은 7가지 항목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결론을 맺고자한다.
서론적 주제들
1. 인간의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사회적 환경으로 바꾸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창조 차원의 명령이므로 이로 인하여 형성된 문화물의 본래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하다.(144쪽)
2. 하나님의 창조 구조는 선하다.
사회제도나 예술 활동을 포함한 문화물의 원래의 구조는 문화명령에 의하여 인간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었기에(145쪽)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구조의 회복을 위하여 문화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여야한다.(148쪽)
3. 구원은 선한 창조 구조의 회복이다.
일반적인 구원에 대한 개념은 개인적인 차원의 죄 사함과 더불어 이 세상과는 다른 천국에 대한 약속이 보장된다는 개념과는 달리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개인보다는 피조계의 차원에서 이 세상의 회복(redeem)을 약속하는 구속(redemption)을 말하고 있다.
4. 구조의 방향 전환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왜곡된 구조의 방향을 구속적으로 변혁한다는 성경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으며(12쪽) 그리스도인은 선한 구조의 회복을 위하여 구조의 방향을 선하게 바꾸어야하며(148쪽) 이는 성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보고 있다.(143쪽)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된 것이다.(117쪽)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이원론적 페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하고 창조적 문화명령을 토대로 하는 구속적 차원의 문화 변혁 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참여로 인하여 발전된 인간의 문명은 하나님의 창조적 발전이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보존되어질 것이다.(81쪽)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문화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며 아담에게 맡겨진 원래의 사명인 문화명령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회복되어야 할 창조의 구조에는 문화, 예술, 각양 사회제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5. 회복된 문화 구조는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전의 창조 세계는 선하며 하나님은 버려질 잡동사니를 만드시지 않으며 만드신 것을 폐기하지도 않으신다.(87쪽) 또한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되지 않고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다.(84쪽)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시작된 회복이 인간의 문화변혁운동을 통하여 발전된 것들이 보존되는 곳이다. 이러한 발전에는 도시화, 산업화, 내연 엔진들도 포함될 수 있다.(127쪽)
6. 교회는 문화변혁을 위한 선교적 교회(미셔널 처치)가 되어야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를 주제로 저술되었으며(p34) 교회라는 선교적 공동체의 정체성은 문화변혁운동에 있으며 선교적 교회는 세상의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가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변혁을 통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역을 하는 곳이다.(183쪽)
이러한 문화변혁 운동이 선교적 공동체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188쪽) 이러한 개념의 교회를 미셔널 처치(선교적 교회)라고 하며 미셔널 처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차원에서 선교적 기능을 하는 곳(incarnational church)이다.(p185,188)
7. 이원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주로 신학이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만 거룩한 영역으로 보고 세속적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을 신앙의 영역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된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온 것이다.(p33) 잘못된 세속주의적 이원론은 영지주의적인 플라톤 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개혁주의는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다.(23쪽)
이상과 같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7가지 주요 주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자한다.
7가지 주제에 관한 논의
1. 인간의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a. 인간의 문화 활동도 창조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리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며 인간이 행하는 문화 활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사역을 위임받아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에게 명하여진 문화 사역을 통하여 완성되어졌을 것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문화구조가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b. 하나님의 창조는 현재 진행형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현재 진행형으로 보고 있다. 원래는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의 문화 활동을 통하여 발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되어질 예정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잠시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아담이 실패했던 창조적 문화명령을 구속의 차원에서 계속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c. 문화명령이 창조의 영역에 속하는가?
문화명령을 창조 사역의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창조의 시작인 에덴과 창조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발전이라는 단계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같은 차원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문화명령을 통하여 에덴으로부터 발전된 형태이며 인류의 타락으로 잠시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다시 시작된 문화명령의 수행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진다는 것이다.
창조의 시작인 에덴과 창조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문화명령에 의하여 연결되어야 할 부분이기에 문화 명령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창조명령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덴에서의 과제였던 순종의 문제는 창조적 발전이라는 문화변혁운동으로 대체되었고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과 같은 차원으로 격하되어버렸다.
2. 하나님의 창조 구조는 선한가?
a. 창조물의 구조는 타락 후에도 형성되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문화물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하다(144쪽)고 하지만 실제로 언급되는 문화 구조에는 타락 후에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으로 인하여 허락하신 한시적인 필요악의 구조도 많이 포함되어있다. 의복의 구조만 보더라도 아담의 옷과 같이 타락 후에 생겨난 구조를 선한 구조라고 할 수 없고 에덴으로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적용된다면 없어져야할 구조인 것이다.
b. 일반 은총과 구속의 나라.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창조사역과 연관되어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한 명령은 언약의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구조다.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행위언약은 일반은총을 위한 노아 언약과 구원을 위한 모세 언약으로 이어진다. 노아 언약은 일반 나라에 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모세언약은 구속의 나라에 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속의 나라는 가나안 땅 안에서의 구조로서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현재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노아 언약의 대상과 모세 언약의 대상이 다르듯이 가나안 땅 안과 밖의 차이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할 구조가 다르다. 약속의 땅 가나안 밖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나라의 시민으로 처신해야할 의무가 있었듯이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은 교회 밖에서 두 나라의 시민으로 처신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반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118쪽)
c. 노아 언약 아래 있는 구조
사회의 문화를 구성하는 일반 구조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경의 가르침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의 사역 동안에 국가나 가족, 학교나 벤처기업을 설립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리하셨다. 일반은혜 아래 있는 노아 언약에 속해있는 구조는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보존을 위한 것이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의 한시적인 것이다.
3. 구원은 선한 창조 구조의 회복인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구원은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의 말씀과 같이 전통적으로 개인에게 적용되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a. 인간보다는 피조계
멸망 받을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이를 결정하는 구원의 문제는 어느 기독교인이나 첫 번째 관심사일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완전한 순종으로 얻으신 의가 나의 의가 됨 으로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믿음과 관계없이) 모든 피조계가 구속되었기에 또 다시 구원을 위한 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b. 구원보다는 구속.
구원(salvation)의 의미 가운데에는 이 멸망 될 피조계로 부터 벗어나(구조, rescue)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반하여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이 피조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redeem)된다는 의미의 구속(redemption)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데 반하여 구속은 피조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기에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구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c. 회복될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피조계가 정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에서 땅이 있을 동안(창 8:22) 한시적인 유용성을 가지고 언급하는 부분과 충돌이 되기도 한다.
또한 천국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만으로는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기에 보편구원론의 성격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문화변혁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문화의 구조를 미리 선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며 이러한 문화 활동의 결과물들이 창조적 발전을 통하여 구속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b. 순종이 빠진 발전.
문화물의 구조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변혁운동을 에덴의 발전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차원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문화구조를 이루기 위한
4. 구조의 방향 전환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인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신앙생활의 분야로 문화 구조의 방향 전환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자한다.
a. 구속적인 차원에서 사회변혁 운동을 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사회 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나님의 창조명령이라고 보고 있기에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속되다고 보는 이원론적 사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문화 환경의 구조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 시키는 필연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에덴이 순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수 있느냐이다. 에덴은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는 택한 동산이었고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는 택한 백성이었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한 순종의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요구되는 기본 조건인 순종은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되셨고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순종을 전가 받아야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를 만족 시킨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별된 곳이고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의의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톰 라이트의 새 관점과 마찬가지로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의의 전가와 칭의의 교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냥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모든 피조계가 구속을 받았으니 변화된 삶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c. 방향이 전환된 구조가 영구적인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독려하는 문화 활동은 문화의 산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구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많은 문화물의 구조가 우리의 타락함으로 인한 한시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구조의 방향전환의 결과물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물의 구조를 선한 방향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들이 천국에서 보존되지 못하고 폐기된다면 문화변혁운동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5. 회복된 문화 구조의 결과물들이 천국에서 보존되는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문화물의 천국 보존"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이러한 개념을 지지하는 많은 표현들을 하고 있고 또 이 땅의 창조적 결과물들이 발전적으로 보존된다는 전제 가운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만약에 이 땅에서의 문화 활동의 결과물들이 천국에서 보존된다면 이 땅에서의 문화 활동에 대한 자세와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 될 것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이 세상 문화를 변혁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차원에서 사명을 가지고 감당하여야 할 것이냐 아니면 이 세상 문화를 구속과는 관계없는 일반 은혜의 차원에서 참여 할 것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a. 문화물의 천국영입의 근거들
문화물이 천국에 영입될 것이라고 주장되는 여러 근거 구절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해석의 불명료함으로 인하여 명확한 근거가 되고 있지 못하기에 논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근거라고 주장되는 구절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4 )"라는 구절일 것이다.
"만국과 땅의 왕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와서 천국 문화를 이룬다는 것인데 이 구절을 근거로 문화의 전체 구조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고 또한 달리 해석하는 이들도 있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절이다.
또한 하나님은 버려질 잡동사니를 만드시지 않으며 만드신 것을 폐기하지 않으신다는 신칼빈주의의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불명료하기에 "나라와 왕들"에 대하여만 좀 더 논의해 보고자한다.
b. ”나라와 왕”들의 두 가지 해석
나라와 왕들에 대한 해석은 "창조 타락 구속" 의 전체적인 내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절이기에 대립되는 두 가지 해석을 살펴보고자한다.
먼저 송인규 교수는 요한계시록의 "나라와 왕들"(계21:24)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는 “비구원적 결산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송인규, 일반 은총과 문화적 산물294쪽) “비구원적 결산론”은 불신자들이라고 여겨지는 “나라와 왕”들이 최후의 심판 이전의 상태에서 천국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신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자신들의 문화물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최후의 심판 이전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여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난점은 “나라와 왕들"이 구원 받은 이들이 아니라 구원과는 관계없이 정치적 결산을 하기 위한 과정으로 천국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나라와 왕들"이 비구원자로서 일단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교수인 데이비드 반두르넨(David VanDrunen)은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나라와 왕”들은 창세기 17장 6절에서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는 말씀과 같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와 왕들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기초로 하여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고(창15:6)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나라와 왕들은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나라와 왕들”은 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나라와 왕들이 아니라, 태초에 인류에게 예정된 원래의 운명이 영광스럽게 성취되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올 세상을 다스릴 영원한 구속의 나라가 되는 신자들이라고 보는 것이다.(반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11쪽).
이러한 해석은 송인규 교수가 “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에서 “나라와 왕들"이 비 구원자들이라는 전제에서 그들이 가지고 올 문화물이 천국에 유입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 세상을 보존하는 일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의 문을 여는 일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c. 천국에서 보존될 문화물의 범위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구조가 선하므로 회복된 문화물의 구조는 보존될 것이라는 언급을 자주한다. 또한 각양 사회제도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구조로 회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난점들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가장 기본적인 가족제도는 결혼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천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0) 또한 많은 부분이 인간의 타락과 연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시적(옷, 국가, 경제 활동 등)이라는 것을 좀 더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6. 교회는 문화 변혁을 위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a. 마이클 고힌과 미셔널 처치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공동 집필자인 마이클 고힌은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대표적인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미셔널 처치의 기본 틀을 제공한 레슬리 뉴비긴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관여하면서 기독교세계관을 미셔널 처치를 위한 기본적인 개념으로 정립하는데 앞장서며 활동하고 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이러한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책으로서 전반적인 내용이 마치 "미셔널 처치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미셔널 처치의 패러다임에 부합되고 있다.
b. 미셔널 처치에 부합되는 특성들.
다음과 같은 점들은 미셔널 처치와 같은 패러다임의 양상을 보여준다.
1. 자녀보다는 백성의 개념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구속의 대상이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개인적 차원보다는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골1:20) 의미에서의 피조계 전체이기에 피조계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문화변혁 운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는 것이다.
2. 분리 개념의 구원보다는 회복 개념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미셔널 처치의 개념과 같이 개인이 이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피조세계의 회복에 참여함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서 선포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3. 교회는 사회변혁을 위한 기능적 기관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신앙생활의 내용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품으로 준비되어지거나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변혁을 위한 사회에 맞추고 있다. 하지만 본질적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체를 임무로 하고 있다. 즉 외부적 문제들에 대한 조직적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사회 참여와 교회의 사회참여는 구분되어야하지만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미셔널 처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구분이 불분명하다.
7. 이원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가?
a. 이원론의 개념이 영역의 관점으로 제한되어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선하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피조계의 영역을 선한 영역과 악한 영역의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표현할 때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개념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완성과 미완성의 개념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인한 구원의 완성과 미완성이라는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
성경에는 분명히 순종과 믿음의 문제를 언급하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히3:18)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과 믿음은 영역의 이론만으로는 설명될 수없는 다른 성격의 개념이기에 영역의 차원에서의 이원론에 대한 부정을 근거로 전개하는 논리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b.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능한가?
세계관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shifting of paradigm)을 위한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논리는 주로 영역의 개념만으로 제한되고 있다. 이는 사람과 문화를 포함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의 문제는 문화나 피조계와 영역의 개념과는 달리 개인의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이기에 개인적인 믿음과 관계없이 전부 의로운 상태로 보고서 모두에게 같은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에게도 같은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c. 일반은총의 영역이 구속의 영역인가?
피조계에는 구속의 여부와는 관계없는 일반은총의 영역이 존재하지만 이를 이분법적인 이원론으로 접근하여 악한 영역으로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반은총의 영역을 구속의 영역으로 보는 것도 문제일 수밖에 없다.
피조계의 모든 영역이 구속의 영역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영역이지만 구속과는 관계없는 일반은총의 영역도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피조계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반은총의 영역은 특별은총의 영역과는 달리 구원과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고루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있는 곳이다. 이 일반은총의 영역은 구속의 영역이 될 수도 없고 동시에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악한 영역이라고 할 수도 없는 단순한 통치 영역의 한 부분인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전통적 교회가 일반은총의 영역을 선하지 못한 악한 영역으로 생각한다고 하며 이를 영지주의 적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는 전통적 교회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선입관이나 아니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과장하여 해석한 잘못된 논리하고 할 수 있다.
구조와 방향이라는 개념의 많은 부분이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해있기에 구속과 관계없는 일반은총의 영역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영역으로 분류하고서 이를 기초로 문화 변혁적 기독교 세계관을 정리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론
1. 개혁주의 신학을 기초로 하고있나?
개혁주의의 공통적 기초는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고 성경 전체의 기초적 개념은 이신칭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이신칭의와 칼빈의 5대강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
2. 포스트모던 신학과 맥락을 같이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공동 저자인 마이클 고힌은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 형태인 이머징 미셔널 처치를 위한 신학자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도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패러다임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또한 대표적인 새 관점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들의 신학은 공통적으로 개인의 신앙고백에 의한 이신칭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결국 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보편구원론의 입장과 일치를 보이고 있다.
3. 실종된 지옥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지옥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천국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천국을 에덴의 발전된 형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 창조적 발전의 개념 대신에 순종과 불순종이 개념이 들어간다면 순종에 대한 천국과 불순종에 대한 지옥의 개념이 정립되어야하고 천국과 지옥은 에덴과 불연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톰 라이트는 지옥을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항상 불이 붙어있는 쓰레기 소각장으로서의 게헨나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머전트(Emergent)인 랍 벨(Rob Bell)은 현재 우리가 삶 가운데 당하는 고통이 지옥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타락한 천사들이 있는 어두운 구덩이로서의 지옥(벧후3:4)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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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문화물의 천국보존 논리
1. 무엇이 문제인가?
로마서8:18-24은 피조물의 회복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이 인간이 만든 문화물도 포함되느냐는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재 조건이 된다.
“창조 타락 구속" 에서는 인간의 문화물도 하나님의 창조물의 범위에 포함시키고서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있다.
이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사회적 환경으로 바꾸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창조 차원의 명령이므로 이로 인하여 형성된 문화물의 본래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하다.(144쪽)”
즉 문화물의 근본 구조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의하여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구조 자체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구조의 방향에 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이 잘못된 방향을 문화변혁운동(cultural transformation)을 통하여 제대로 된 방향으로 바꾸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의 환경 가운데 형성된 문화물이 천국에서도 보존된다면 신앙생활은 삶의 전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하지만 회복될 피조물의 범주에 문화물을 포함 시키면서까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무리한 가정을 근거로 논리를 전개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리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며 인간이 행하는 문화 활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 사역을 위임 받아서 하는 창조 행위로 보고 있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에게 명하여진 문화 사역을 통하여 완성되어졌을 것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문화구조가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되기에 부적합한 모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3. 문화명령에 대한 해석이 모호하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SC)의 조직 신학 교수인 John Fesko는 제사장이시며 왕이시며 선지자이신 예수님이 두번째 아담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첫번째 아담을 제사장이며 왕이며 선지자로 보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아담의 역활은 문화명령보다는 예수님의 사역과 같은 맥락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는 문화명령보다는 대 위임령(Great Commision- 마28:19-20)에 있다고 할 수있다.
4. 문화명령보다는 대위임령에 근거할 때 문화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로 오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으로 완성된 구원을 전파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의 타락 후에 인간은 도시를 건설하는 사람들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문화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지는 도시 건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반대의 길을 간 사람들의 결과물이다.
예수님의 대위임령은 예수님에 의하여 회복되어진 관계를 근거로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5. 일상의 삶과 신앙생활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근거로하여야한다.
자연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법이 아니라 창조 언약을 근거로한 법이다.
자연법은 은혜언약을 근거로한 것이 아니라 행위 언약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에 의한 요구를 예수님의 언약적 충성(헤세드)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안에서 행하는 것은 이미 자연법이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6. 이원론적 논리가 아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기존 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삶을 살고 있다고 전재하면서 신앙생활에 일상에서의 문화생활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p33)
이 부분에 대하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교수인 반두르넨의 “하나님의 두나라 국민으로 살기”( 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에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7.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원리를 따라야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자신들의 성경해석이 개혁주의 성경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마이클 호튼은 “언약신학(21쪽)”에서 개혁주의 성경 해석은 분명하고 중요한 것을 가지고 어렵고 덜 중요한 것을 해석한다고 말한다.즉 최소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문화명령이라는 애매한 해석을 근거로 성경 전체를 해석하고서 이를 근거로하여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를 전개하고있다.
즉 애매하고 덜 중요한 것을 근거로하여 성경 전체의 중요하고 명확한 것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8. 결론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에 근거한 문화변혁운동을 신앙생활의 근거로 삼기 위하여 문화물을 하나님의 창조물 즉 피조물의 범주에 놓고서 새하늘과 새 땅에서 문화물이 선한 구조를 근거로하여 회복될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고있다.
이는 불분명한 철학적 논리의 산물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성경을 이러한 세계관 운동의 교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문화물의 구원을 말하면서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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