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회의 분파들
개신교 전통 아래 있는 우리는 서방교회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고대에 서방교회와 함께 있던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당시에는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방 교회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가 있었고 또 단성론자들의 교회가 있었다. 초기 교회의 기독론 논쟁에서 유대교 전통에 영향을 받은 에비온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신성을 부인한 반면 영육 이원론을 가진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영적 실체인 신이 악한 물질인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부인한 가현설을 주장하였다. 사실 이 두가지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지만 기독교 정통은 이 두가지 주장을 모두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는데 이런 주장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충돌을 일으키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이것을 설명하려한 초기의 시도가 2위1체 개념이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런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당시에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한 사람들을 단성론자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복음을 제일 먼저 받은 소아시아 지방 그리고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의 교회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양성론 교리가 확립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지금도 현존하는 이집트의 콥트 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교회가 바로 7세기경 이슬람에 정복을 당하고도 2000년 역사를 가지고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단성론자들의 교회이다. 이렇게 고대에는 서방교회, 동방교회와 더불어 단성론자들의 교회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와함께 언급할만한 교회가 바로 아일랜드 교회이다. 이 교회는 로마 당시부터 존재하였는데 4세기에 그레고리가 선교사를 아일랜드에 보내어 세워진 교회인데 선교사들이 수도원을 만들었고 아일랜드 교회는 자연속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따라서 신부가 아닌 수도사들이 신앙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아일랜드 교회는 인접한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종교와 문화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교회는 7세기에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 교회로 편입되었지만 7세기 이전에는 로마교회와 다른 기독교가 아일랜드에 존재하였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어거스틴과 서방신학
2014-09-24 16:14:01
초기 교회의 모든 신학적 논쟁과 교리의 확립은 동방교회가 주도하였고 서방교회에는 이렇다할 만한 신학이 없었다. 그런데 4세기에 등장한 어거스틴으로 말미암아 서방신학이 등장하였으니 어거스틴은 서방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었다. 당시 군사력으로 세상을 정복한 로마제국에서 가장 발달된 것이 법과 행정, 건축이었고 철학은 주로 헬라에 의존하였다. 로마 사회에서는 군인과 정치가로 출세하기 위한 실용학문으로 수사학이 발전되었다. 어거스틴은 바로 수사학을 공부한 수사학 선생이었다. 어거스틴은 출세의 욕망을 따라간 사람이었지만 진리에 대한 열망도 있었고 그래서 그는 진리추구의 열망과 세상적 쾌락추구 가운데 갈등과 방황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던 그가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기독교를 만나고 급작스런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기독교에 입문한 어거스틴은 서방 기독교의 틀을 만든 사람이 된다. 서방 기독교의 신앙과 전통은 모두 어거스틴에서 시작되었다.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론인데 여기에는 그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원죄와 원죄유전론을 주장하여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이런 인간론을 가지고 바울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스도사였던 루터도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 어거스틴 식으로 바울을 해석하여 은혜나 믿음을 울법이나 행위와 반대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어거스틴 동시대에 펠라기우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였다. 어거스틴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하포의 주교가 되어 이후 수많은 신학적 교회적 논쟁에 개입하게 되고 그 결과 어거스틴은 신학논쟁에서 현실적이고 목회적인 입장에 서게된다. 그에 반해 수도원 생활이 주된 경험인 펠라기우스는 이상적이고 수도원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이 두사람이 인간론이 다를 수 밖에 없다. context의 차이이다. 신학과 교리에도 context가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다. 펠라기우스가 이상적 인간론이라면 어거스틴은 현실적 인간론이다. 역사에서 언제나 적응성이 강한 현실론이 우세하고 설득력이 있다. 결국 어거스틴은 논쟁에서 이겼고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두번째는 어거스틴의 교회론이다. 도나투스 논쟁을 통해 그의 교회론이 발전하게 된다. 배교한 성직자의 성찬 집례가 유효한가라는 도나투스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현실론이 도나투스의 원칙론을 이긴다. 어거스틴은 성례전이 성례전 집례자에 의해 유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제장한 예식이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을 결국 성직자들의 윤리적 기준을 낮춘 결과를 낳고 말았고 서방 신학의 교회론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에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 원인에 대한 논쟁에 대응하기 위하여 신국론이란 책을 쓰는데 여기서 그는 로마는 실제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로마 멸망의 원인은 기독교 탓이 아니라 로마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이 공인한 로마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인가? 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이 질문에 어거스틴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누고 보이지 않는 교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하고 보이는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후 서방 신학의 교회론이 된다. (16세기에 아나밥티스트들은 참 신자로만 구성된 교회론을 주장하고 믿음을 고백한 성인에게만 세례를 주고 유아세례를 거부하였는데 이것은 서방교회의 전통적 교회론에 대한 도전이었다.)
어거스틴 신학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중요했고 그의 인간 이해는 자신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다. 신학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주장이 우세한 것은 그의 신학이 대단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 적합성이 있는 신학이 우세를 점하기 마련이다. 이후 어거스틴의 신학은 중세 교회 신학에 중요한 축을 지배하게 된다. 신학 논쟁에서 현실론이 이긴다는 사례는 동방교회에 성상논쟁에서도 발견된다. 원래 성화나 성상은 로마의 이교도의 신전과 신상문화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황제는 이교 신전들을 기독교의 예배당으로 제공하는데 당시 이교 신전들의 건축 양식이 바로 바실리카 양식이었기 이후 기독교 건축 양식의 주류가 된다. 일체의 성상을 반대하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레로 3세가 로마 제국안에서 성상을 제거하려고 하자 성상 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결국 현실주의자인 성상옹호론자가 승리하였고 이후 이루 성상은 존경으로 하나님은 흠승이라는 구별로 성상홍호가 합리화 된다. 성상논쟁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겪는 인간의 어려움을 반영한다. 감각적 대상에 대한 욕구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려 하였고 우상을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기독교도 신상없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거스틴과 다른 신학을 가진 펠라기우스는 교회사에서 잊혀진 켈트 기독교 출신인데 이제 21세기에 이르러 영성신학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새로운 인간론이 등장하고 수도원 신학에서 출발한 펠라기우스적 인간론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들은 구원론 보다는 창조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령, 창조, 자연, 긍정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어거스틴 이전에는 동방 신학이 주도했는데 어거스틴 부터 서방신학이 발전하면서 신학이 헬라어가 아닌 라틴어로 기록된다. 어거스틴은 라틴어에 능통했지만 헬라어를 잘 몰랐는데 만일 어거스틴이 헬라어는 잘 알아서 동방신학에 친숙했다면 새롭게 자기 신학을 전개하기 보다는 동방신학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헬라어를 몰랐고 동방신학의 전통이 단절되면서 서방신학이 그을 통하여 등장한 것이다. 16세기의 에라스무스는 헬라어에 정통하였고 동방 신학을 알게 되면서 어거스틴의 인간론이 아닌 펠라기우스적 인간론에 동조하게 된다.
[추기] 2014. 10. 2
다음은 스터어링 p. 렘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
아우구스티누스( 354-430)의 철학적 견해에 있어 서양 사상은 위대한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는 이전에 상반된 사사 조류로 보였던 철학적 전통을 모아서 비록 불완전하나마 효과적으로 종합하였다. 그는 고백론과 같은 초기 저술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를 충실히 고수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건전한 기독교적 교리는 플라톤을 연원으로 하는 철학적 전통과 역사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가 본 플라톤은 다름 아닌 플로티노스가 본 플라톤이었으며 그기 플라톤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설은 플로티노스의 일자의 설이었다. 이리하여 플라톤적 전통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이용됨으로써 플라톤은 기독교의 교리와 일치한다는 신념이 확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나 인간을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유출물이라고 보는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창조는 하나님의 존재의 형식적인 본질로 부터 결과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유력한 권능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라고 보았다.
고대에 플라톤, 플로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세사람은 모두 플라톤 전통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적 전통과 유대교적 기독교전통을 탁월하게 결합시켰다. 플라톤, 플로티누스, 아구수티누스는 비록 플라톤적 전통의 역사상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지만 서로 다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간략하게 말한다면 플라톤이 인간의 자연적 소질과 능력의 이상적 실현을 명확하게 해주는 정신적 가치의 직관에 대한 역사적 전거라면, 플로티누스는 유한한 존재들의 표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만물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정신적세계 안에 각기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에 대한 역사적 전거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인이나 민족의 생명의 온갖 변화를 초월하여 지헤롭고 선한 한 정신적인 권능자가 있다는 신앙에 대한 역사상의 전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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