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

카이퍼 이후 칼빈주의 학문적 계승자들 -정성구

카이퍼 이후 칼빈주의 학문적 계승자들 -정성구

2014-09-02 16:16:13


카이퍼 이후 칼빈주의 학문적 계승자들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총장, ICSK원장

 

카이퍼 이후 자유대학의 5명의 창설교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외에도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카이퍼의 교의학 과목을 이은 헬만 바빙크(H. Bavinck) 박사의 경우를 살펴보자. 바빙크 박사는 월필드, 카이퍼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캄펜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라이덴대학에서 ‘츠빙글리의 윤리학’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바빙크 박사는 모교인 캄펜신학교 교수를 하다가 카이퍼의 부름을 받아 자유대학교의 교수로서 생애를 보냈다. 그의 대표작은 4권의 ‘개혁주의 교의학’(Gereformeerd Dogmatiek)(1895-1901)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토대를 쌓았다. 바빙크는 카이퍼와 마찬가지로 다작가였다. 그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책 80종을 썼다. 바빙크는 교의학자로서 카이퍼보다 더 섬세하고 정밀하게 개혁신학 체계를 완수했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신앙노선을 그대로 따르면서 개혁주의신학자로 대성했고 그의 저작은 후일 개혁주의 교의학의 거의 표준적인 교과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실천신학자 비스터벨트(P. Biesterveld), 경제학에서 디펜호르스트(P. A. Diepenhorst)가 있다. 그는 자유대학에서 ‘칼빈과 경제’란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신약해석학의 대부 흐로쇄이데(F W. Grosheide) 등도 뺄 수 없고, 구약학의 거물 알더스(G. Ch. Aaldes) 그리고 기독교 교육학자로서 카이퍼의 사상체계를 액면 그대로 물려받은 워털 잉크(J. Waterink)는 칼빈주의 교육운동의 모델이었다. 그리고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정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한분은 콜라인(H. Colijn)이 있다. 그는 칼빈과 흐룬 그리고 카이퍼의 사상을 정통으로 이어받아 반혁명당 당수가 되었고 후일 수상에 올랐다. 

 

그리고 최근까지의 각계각층에 나타난 카이퍼의 효과는 대단하다. 물론 카이퍼의 사상을 비판한 학자로는 스킬더(K. Schilder) 박사가 대표적이라면, 헬만 도예베르트 박사를 중심으로 그 후에 기라성 같은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많이 일어나 각계각층에 칼빈주의적 세계관 건설에 앞장섰다. 이는 한 사람의 사상적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보여준 사례이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자유대학교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인사라는 사실이다. 필자가 지난 40여 년 동안 직접 만나서 교제하고 관련했던 분들 중으로 살펴보면 대게 다음과 같다.

 

카이퍼 사상을 가장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학자로는 헬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 박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가 주도하는 신칼빈주의 운동의 환경에서 자라왔고 1917년 헬만 바빙크 아래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는 법조계, 관계, 학계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1923년에 정치 원론으로서의 ‘칼빈주의적 영역주권사상’을 발표했다.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 연구원의 정기 간행물인 ‘기독교 정치학’의 편집책임자로 있었다. 

 

그의 수많은 저작 중에는 ‘기독교철학’ 수립의 대저인 ‘법개념의 철학’(Wijsbegeerde der Wetsidee, 1935)을 발표함으로 칼빈주의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같은 해 도예베르트 박사는 볼렌호번 박사와 함께 칼빈주의 철학회(De Vereniging voor Calvinistische Wijsbegeerte)를 창설하고 개혁주의 철학(Philosophia Reformata)이란 잡지를 내면서 칼빈주의 사상을 체계화, 조직화 하였다. 그 후 칼빈주의 세계관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도예베르트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도예베르트 박사의 사상을 비판적 시각에서 보는 이도 없지는 않지만, 카이퍼의 사상을 따라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왕권을 높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명을 일으키는 기독교 세계관을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칼빈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삶의 이론을 정립한 20세기의 최대의 기독교 철학자였다. 

 

카이퍼의 계승자 중에는 도예베르트와 함께 기독교 철학을 이끈 볼렌호번(D. H. Th. Vollen hoven, 1892-1977) 박사가 있다. 필자는 그의 생애 만년에 그와 이웃에 살면서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1911년 자유대학에 입학해서 1914년까지 신학을 공부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아들인 H. H. 카이퍼 교수, 헬만 바빙크에게 배웠다. 그러다가 1914년 철학으로 바꾸었다. 1918년에 ‘유신론적 관점에서 본 수리철학’(De Wijsbegeerte der Wiskunde van Theistisch Stanpunt)으로 철학박사가 됐다. 그도 도예베르트와 함께 카이퍼의 노선을 따라 칼빈주의 영역주권 사상을 심도 있게 체계화했고 ‘칼빈주의와 철학의 개혁’, ‘철학사’ 등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기고 후학들에게 카이퍼 사상을 전수했다. 

 

그리고 미술사 교수로서 현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로끄마꺼(Hans R. Rook maaker,1922-1977) 박사를 들 수 있다. 로끄마꺼 박사는 화란의 칼빈주의적 예술 평론가이자 자유대학교의 미술사 교수였다. 그는 프란시스 쉐퍼와 함께 라브리운동의 선구자이며 화란의 엑크엔빌(Eek en Wiel)이란 라브리 회관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술과 인생과 철학을 강의했다. 로끄마꺼는 칼빈주의적 예술 평론가로서, 삶은 종교이고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예술가의 모든 예술적인 행위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섬기든지 우상을 섬기든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표현방식은 작가의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란 것이다. 그의 주저인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Modern Art and the Death of Culture, 1970)에서 그는 칼빈주의 세계관으로 예술과 인생을 보는 눈을 열게 했다. 필자는 그와 더불어 라브리에서 약 4년 동안 사귐과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공학자로서 칼빈주의적 철학자가 된 정치가인 가우즈바르트(Bob Goudzwaard, 1934) 등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지만 모두가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에 기초한 사람들이다. 이들 말고도 화란에는 기라성 같은 학계, 정계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지만 여기서 모두 거명할 수 없다. 

 

한편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이 북미주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미국의 칼빈대학, 돌뜨대학(Dordt College), 트리니티기독대학, 캐나다에는 리디머대학(Redeemer college) 킹스유니버시티대학, 기독교학문연구원 등 많은 대학들은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을 학교의 지상목표로 삼고 있다. 북미주에서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을 실천하거나 학문적 대가를 이룬 사람은 에반 라너(E. Evan Runner)이다. 그는 미국의 걸출한 칼빈주의 철학자, 칼빈대학의 철학교수였다. 그는 휘튼대학,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자유대학교에서 도예베르트와 볼렌호번에서 사사하고 북미주에 칼빈주의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다. 1956년에 ‘개혁주의 학문 연구회’, 1967년에는 ‘기독교 학문 연구회’를 주도 했다. 

 

또 골든 스페이크만(Gorden J Spykman, 1926-1993)은 목사로 칼빈대교수로서 북미주에 종횡무진 활동하면서 칼빈주의적 학문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자유대학을 졸업하고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북미주에 정착시키는데 앞장섰다. 그 외에도 스프롤(R.C.Sproal). 반틸(C.Van Til). 눗슨(Knutsen) 등 많은 학자들이 카이퍼의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의 영향 아래서 활동했다. 특히 금세기의 최고의 전도자이며 사상가이며 라브리 운동의 창시자인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 1912-1984)도 카이퍼의 칼빈주의 운동의 한 열매였다. 그는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현대의 세속화된 문화와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하고 하나님 중심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설교로 강연으로 힘있게 외쳤다. 필자는 이 분들과의 주안에서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눈을 뜨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