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에 대한 바른이해 -김영우 목사
2014-09-02 16:24:55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 개혁운동으로 탄생한 개혁주의는 칼빈 중심으로 세워진 신학이어서 일명 칼빈주의(Calvinism)라 한다. 이에 대해 핫지(Charles Hodge)는 개인이름(칼빈)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여 개혁주의로만 명칭하기도 했다.
1. 개혁주의란
(1) 독일 남부 스트라스부르크 (1500년대)와 팔라틴 개혁주의
(2) 스위스 취리히, 제네바
쯔빙글리가 기초하고, 칼빈이 발전, 그의 제자들이 전파한 사상이다.
레삼(Robert Letham)은 <신학사전 New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정의하기를
"16세기 개혁자들 중에서 취리히의 쯔빙글리와 볼링거, 스트라스부르크의 Bucer 와 피터마터 버미글리, 제네바의 Farel, Calvin, Beza, Franc, Durkheim, 아만두스 폴리누스 등이 저술하고 시행간 것들과 그들이 작성한 신앙고백을 개혁주의라 부른다.”고 했다,
레이드(William Stanford Reid)는 <복음주의 신학사전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루터파와 재세례파로부터 칼빈주의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서 쯔빙글리가 기초를 놓고 그 위에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정립한 신학과 성경주석을 통해서 발전시킨 기독교 신학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칼빈이 만든 것이 아니다. 캐톨릭이 통합신학을 지향했다. 1200년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캐톨릭과 헬레니즘(Roman Catholic & Hellenism)을 하나로 통합,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통합한 것이 스콜라의 교사들이 정립한 스콜라 신학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프랜시스 쉐퍼처럼,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여, 철학 - 신학 -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중세신학은 Vatican 체제를 위한 것이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과 이슬람세계에서 캐톨릭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s)가 이런 경향에 대해 반기를 들고 전통보다 성경을 우위에 두었다.
독일에서 <독일신학 Theologia Germania>(저자미상)이 캐톨릭의 금서였는데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 나온다. 루터가 이 책을 스승을 통해 읽게 되고 공감하였다. 그래서 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것이다. 이 개혁에 찬성하는 이들이 유럽 전 지역에 삽시간에 퍼지게 되었다. 이런 경향들 속에 하나님께서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깨어나게 하셨다. 특히 스위스와 독일 남부 지역의 민중들이 새로운 신학과 신앙에 대해 갈망하며 영적 각성을 하였다.
스위스는 도시국가체제 운영, 강력한 왕권 속에서 벗어남, 민중들의 자기 결단, 의지가 프랑스나 독일보다 넓어가다.
독일 남부 지역은 스위스와 가까워서, 강력한 신앙운동에 대해 봄바람 속에 중세기 암흑기 지나 새로운 시대 여명기에 스위스와 독일 남부 지역 민중들이 깨어났다. 이런 새로운 신앙을 정리, 체계화, 학문화 하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 개혁자들, 대표가 요한 칼빈(1509-1964)이었다.
이렇게 볼때 개혁주의는
(1) 16세기 스위스와 독일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2) 그 주 무대는 제네바요 주역은 John Calvin
(3) 그에 의해 정리되고 연구된 신학 작업의 영향 속에 형성, 발전되어온 교회와 신학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개혁주의란? 1500년대 스위스와 독일 남부 지역의 민중들에게 일깨워 주신 캐톨릭의 오류를 깨닫게 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이다.
2. 개혁자들의 주요 교리 (Reformed doctrines)
개혁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을 일부 수용하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다
***일반 기독교와 공유한 것:
1) 초대교회(570년까지) 교부들의 신앙을 이어받다 Early Church Father(Latin, Greek) 교부들의 저술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의회에서 채택한 신앙고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1) 사도신경, 200년 경 저자 미상의 신앙고백, 500-600년대 최종판
사도들의 신앙을 담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부활, 재림,
(2) 니케아 신경, 325, 삼위일체 관계 규정, 성자는 성부와 동일(homo-ousia)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똑같은 신이시다. 381년 Constantinople에서 이를 다듬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 함
(3) 칼케돈 신경, 451년, 네스토리우스, 아폴리누스, 유티케스 등이 예수가 인간이 아니다고 주장한 극단적인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배격하고 양성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고백신성이 인성 안에 혼합, 호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
(4) 아타나시우스 신경, 5세기 저자 미상, 삼위일체에 대한 확실한 결론, 성부 성자 성령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분, 성자는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고 재림시며 심판하실 것이다. 동방교회는 이 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방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시지 성부의 영은 아니다, 서방교회는 성령은 하나님의 신이면서 예수님의 영이다, 한국교회 신학성부께서 성자를 경유하여 성령을 보내주심,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자 성자의 영이시다
1453년 동서가 갈라질 때, 성령론이 중요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왔다고 했고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ilioque) 오셨다고 고백한다. 고백된 신앙노선을 개혁주의는 기본으로 삼는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 성경 기초
(2) 초대교회 신앙 기초
2) 개혁운동의 5가지 슬로건 수용
오직 은총 Sola Gratia (구원은 은혜, 공로주의 배격) / 오직 믿음 Sola Fide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 / 오직 그리스도로 Solus Christus (그리스도만으로, 마리아나 성자로 통하는 것이 아님) /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바티칸의 결정, 교리, 전통이 아니고 신앙의 기준은 성경만) /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이것은 루터도 그대로 받아들임, 이를 칼빈이 수용 이런 기초가 보수 전통 신앙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3. 개혁주의 교리의 특색
1) 제한 속죄 구원론의 특징:
야곱 알메니우스 (1560-1609, 49세)가 칼빈(1509-1564, 56세)의 구원론을 적극 반대하였다. 1618-1619년 네덜란드 돌트(Dort)에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심의 검토하여 칼빈주의 구원론 5대 교리를 확정한 것이 돌트신경(일명 TULIP)이라 한다.
(1)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2)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 선택
(3)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죄
(4)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총
(5)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2)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Sovereignty of God –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를 발전시켜 정리함
(1) 창조
(2)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징벌
(3)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4) 마지막 심판의 과정에서
(5) 구원,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뤄지심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천명한다. (엡 2:8, 롬 11:36)
“너희가 그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롬 11:36)
내가 믿는 신앙(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의 해설)한 것이 기독교 강요가 되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떻게 이뤄지나?
from top to bottom 칼빈 (하나님의 통치, Lordship) 우주적 체계, 사회와 국가, 망원경
from bottom to top 루터 (구원론), 현미경적 시각에서 망원경으로 올라감,
3)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예정하신 구원론,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
예정론은 Martin Bucer 가 만든 것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든 것으로 비평을 받았다.
156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통치자가 요리문답을 만들게 하다. 여기에 예정론은 뺐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예정과 선택을 어거스틴이나 멜랑히톤처럼 믿는다.
평자들은 인간을 마치 하나님의 정해진 프로그램에 맞춰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로 만든다면서 운명론자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예정론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로서 신적 구원의 확실성을 담보해 준다.
4) 언약신학 (covenant formula, I am your God, and you are my people.)
제네바의 베자에 의해 철벽이 된 예정론보다 구원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온건한 주장이 독일 남부 지역과 스위스 자치 도시에서 개발, 그게 바로 언약신학이다. 언약신학은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로 성찰하면서 인간은 믿음을 통하여 이 언약에 참여하는데 구속 계시의 점진적 발전 과정과 통일성이 그것을 가리켜 준다고 하는 것으로서 구약의 각종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체결되는 새언약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Zwigli, Bolinger, Calvin,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 에임스, 코케이우스, 롤록, 카트라이트(장로교의 아버지), 클로펜부르크, 윗시우스, Jonathan Edwards, Herman Barwinck, 게할더스 보스(프린스톤 성경신학자) 등이 언약신학자들이다.
5) 일반 은총(마 5:43-48)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달리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인류전체에게 보편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호의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일반은총에 대한 세 개의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은 신자들은 물론 불신자들에게도 자연적인 은사를 주셨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나 변호사 또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억제하고 계시다. 죄 때문에 인간은 원래 의도되었던 만큼 선하지는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또한 일반은총으로 인하여 그들은 악하게 될 수 있는 정도로까지 극악해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가 어떤 때는 신자보다도 더 낫게 행동하는 것같이 보이는 이유이다. 인내, 용기, 동정심 등의 미덕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간 누구에게도 그 영향이 전적으로 상실되지는 않는다.
3) 하나님은 불신자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유익이 되는 긍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사회가 질서 있게 돌아갈 수 있도록 인간들에게 사회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을 고취시킨다. 일반은총은 죄악으로 상처입고 왜곡된 사회가 전적으로 부패하여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일반은총의 주제는 세상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며 봉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세사오가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실천해야 하는 은혜의 모형이다. 일반은총은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면서 공동의 목적을 추구할 때 그들과 긍정적인 연계를 발전시킬 것을 장려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연합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일반은총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 또는 예술 작품들을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 그리고 때로는 초월의 세계 또는 은혜에 대한 암시로 받아드리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이유이다.
일반은총은 신자들로 하여금 (아브라함 카이퍼가 “대립관계”라고 불렀던)이 세대에서의 마찰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이 싸움은 두개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영적 권세 사이에 있는 것으로서, 중요한 점은 이 두 권세가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람 사이에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은총의 가르침은 교회로 하여금 다양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는 여러 가지 목적을 교회의 사역에서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음식 공급 사역, 원목의 병원 사역, 목회자의 결혼 상담 등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명의 일부이며, 그것은 심지어 이 사역의 수혜자들이 신자가 아니거나 신자가 되지 않더라도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소망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것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전체적인 사명 아래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사역을 행한다. 그리고 교회는 한 사역의 가치를 다른 사역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다양한 것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이러한 사역들은 모두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사명 안에서 그 자체의 고귀함과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전체적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정의 없는 은총은 참다운 은총이 아님)교회는 한 사역의 가치를 다른 사역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다. 전체적인 사명 안에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오셔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셔서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 가지고 오심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교회 가정 넘어서서 세상 정부, 사회의 각 영역에 역사할 수 있을까 이를 고민. “세상에 단 일평 인치도 그리스도와 무관하는 것은 없다.” He is the Lord in every walk of life. 각 분야에서 주님의 Lordship을 강조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워 20대 초 목회하면서 자유주의적으로 함, 한 모범 성도(삐쩨 집사)의 지적 “목사님은 지성적이고 훌륭하나 목사님의 설교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음. 더욱 고민, 자기를 반성, 한 사람의 삶을 두고 보니 그 여집사님의 지적에 공감. 왜 물음, 자유주의적인 점 지적,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어 보세요. 그는 기독교 강요를 읽고 무너졌다. 기도로 결심, “주님, 저는 이제부터 네덜란드 교계의 화목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네덜란드 교회가 자유신학으로 다 죽었습니다... Dutch Reformed Church 시작,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교육위해 자유대학 설립, “영역의 주권” 하나님의 sphere (정치영역, 경제, 가정, 교육, 교회 등 각 영역은 서로 동등하다. 이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일 수 없다. 이 영역은 동등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각 영역에 영향력을 미침) 정부가 교육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침범한 것이다. 자유대학 인가를 받고 기독대학 운영하여 제자 양성하다.
이런 일을 할 때 신학적 이론이 일반 은총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특별하나, 신자와 불신자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반 은총이다)
6) 창조 - 타락 -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
창조-타락-구속 기독교 세계관 vs 학문-과학-예술 세속세계관
Cornelius Van Til 탕자가 실패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심정, 탕자의 회복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 것, 칸트의 이론으로, Post modernism으로 되지 않는다.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을 창조, 타락, 구속의 세계관으로 봐야 살 길이 보인다.
= 카이퍼의 일반은총 인식을 세상으로 가져오는 것을 발전시켰다.
그리스 사상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Form(형상) - Matter(질료)로 실체가 구성되어 있다.
플라톤는 관념과 현실(Idea, Reality)을 구분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실체 안에 두 요소(Form, Matter)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체 = Idea (이데아), 현상 = Reality
비너스는 이데아적인 여자의 모습을 만들고 싶은 것을 바랬다. 소크라테스가 독백을 마신 것은 이 현상적인 육체에서 벗어나 보고 싶었다. 밝고 질서있고 자유로운 길인 이데아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를 아는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이다. 현상으로부터 자유, 구원, 불교의 원리와 비슷 (인도와 유럽은 아이리언 계통, Veda 는 그리스어 보다는 말과 같다), 삼라만상(셀 수 없을 정도의 만상, 현실, 현상에서 벗어남, 출가, 해탈) 색시공, 공시색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중요, 의상과 원효가 중국 유학중 밤에 해골바가지 안의 물을 마심, 원효는 일체유심론, 토종 불교사상가, 의상은 유학 계속 가다) 마음을 공부, 마음먹는 것이 중요하는 것을 아는 것이 지식이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현상계(something to see)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이해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인간과 세계를 보는 관점은 창조 creation - 타락 fall - 구속 redemption이다.
1. 세상은 하나님께 속했다. 개혁주의 현대신앙문서 (58개 항목)
2. 타락함으로 자생적 능력 상실 (철학 사상 모든 것이 헛되다)
인간이 할 수 없다. 죽음에 이르는 냄새밖에 없다.
3. 구속이 절대 필요
7) 그 밖에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교리들이 개혁주의의 특색으로 간주되고 있다 (John Leith)
-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 우상숭배에 대한 신랄한 비판
- 역사 속에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목적
- 거룩한 신자의 생활
-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생활
-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 권징과 훈련된 생활
- 조직된 교회의 중요성과 목회적 관심
- 예배와 생활의 단순성
다른 신학보다 칼빈주의는 더 다양한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신앙 내용들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돌트 신경,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 등에 잘 담겨져 있다. 개혁의 여러 유파들 가운데 주류는 역시 루터파와 칼빈파라 할 수 있는데 개혁에 임하는 양파의 입장에 차이가 있다.
루터파는 성경이 분명하게 명령하는 것이나 금지하는 것은 실행하되 그 밖의 것들은 성도들의 양심에 맡긴다는 입장인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루터파보다 엄격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이는 설혹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성경이 이미 분명하게 명령하거나 금지한 것들을 적용하면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보고 그 외의 갓들은 성도들의 양심에 맡긴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루터의 개혁을 소극적인 개혁이라 하고 칼빈의 개혁을 적극적인 개혁, 혹은 철저한 개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4, 문명의 흐름과 개혁주의
19세기 네덜란드 신칼빈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문명의 흐름에서 개혁주의가 최고봉을 장식한다고 보았다.
(1) 그리스 로마적 이교문명
(2) 로마 카톨릭 문명
(3) 칼빈주의로 표현을 극한 기독교 문명
(4) 이슬람 문명
이 위력적인 네 문명들 중에서 칼빈주의가 가장 발달한 문명이다.
우리는 고대문명의 발생지를 흔히 네 곳으로 잡는다. 아시아의 (1) 중국 (2) 인도 서남 아시아의 (3) 바벨론, 북아프리카의 (4) 이집트가 그것이다.
(1) 중국문명은 보편 윤리적 측면에서 볼때 세계의 다른 문명들에게 별로 뒤질 것이 없다. 1970년대 초 키신저 미국무장관이 ‘竹의 장막’이라는 중국에 들어가 모택동과 주은래 등 공산지도자들을 만나고 와서 중국 지도자들에게 철학과 경륜이 있다고 했다. 노자의 無爲自然이나,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중국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 우람하고 찬란했으나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했다. 따라서 流水일 필요가 없었다. 湖水로 만족했다. 중국은 그저 자기만 그냥 서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2) 인도문명은 그와 달랐다. 중국문명보다 動的이었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뻗었고, 동남아로 흘러갔으며, 서남아시아를 넘나보았다. 불교로 갱신된 인도문명은 중국의 도교와 관념ㄹㄴ적 사고를 같이 하면서 국외 영향력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3) 이집트와 바빌론은 중국이나 인도보다 훨씬 力動的인 문명이었다. 양 문명은 중국, 인도 문명처럼 자기 모습을 고수하지 않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으로 탈바꿈하였다. 오늘날 서양 문명의 할아버지가 이집트, 바벨론 문명이라면 아버지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다.
(4) 히브리 문명은 오랫동안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으나 기독교적 성취를 통해서 삽시간에 그리스 로마 문명에 필적하였다. 히브리 사상으로 두 축은 ①유대주의와 ② 기독교 정신이다.
유대사상은 選民主義를 강하게 표방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유대인을 主로 확신하고 나머지 민족들은 모두 客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항상 자기들이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세계 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지배, 세계의 에너지 시장 지배, 세계의 식량시장 지배, 세계의 금융지배, 세계의 정보 통신의 발신원과 정보 통신망 지배를 획책하고 있다. Freemason 같은 비밀결사까지 불사하면서 세계지배에 혈안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유대사상보다 보편성을 곁들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300여년 전에 지중해 연안 제국을 통합해 사람들의 생각을 지역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바꾸어 준 이들이 있었다.
알렉산더 왕을 필두로 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 헬라인들의 세계 정복은 남다른 데가 있었 다. 강자로서 군림하고자 하는 전래의 정치, 군사적 야욕보다는 어떤 이상을 펴고자 하는 꿈 때문에 정복에 나선 측면이 있다. 이 꿈이 무엇이었나? 헬라제국 건설이었다.
헬라문화의 보급에 대한 비전이 그들로 하여금 정복전쟁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대사상을 최고 가치로 생각했던 것처럼 헬라인들은 헬라 문화를 최고의 가치로 믿었다. 유대인들이 종교적 선민의식에 젖어 있었다면 헬라인들은 문화적 우월의식에 빠져 있었다. Plato 같은 이도 자기가 헬라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렇게 지중해 연안에 헬라인에 의한 보편주의가 등장했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은 헬라인들과 같은 문화적 보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계 모든 거류민이 동포라는 사상, 이 사해동포주의는 헬라인의 산물이었다.
수 백 년간 헬라의 지배를 받으며 헬라문화에 익숙하게 된 일부 히브리인들이 자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되묻게 되었다. 새롭게 열리는 세계와 자기들 유대인의 관계를 재정립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족적 편협성 안에 감금되어 있는 신적 특수성이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으로 열려있는 신적 특수성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사고가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일부 유대인의 보편적 사고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관찰에 의하자면 그렇다는 것일 뿐 그것의 논의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
이처럼 깨어난 유대인의 보편주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전개에서 오래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유대 선민주의의 시조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벌써 萬民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강한 나라는 만민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는 한시적 나라였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해 돋는데에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다” (시 50:1)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를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비록 그 만민이 이스라엘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할지라도 종족, 신분, 계층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은 유대사상을 극복, 완성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월등한 사상체계와 삶의 질을 약속하면서 등장한 기독교 문명은 헬라문명과 더불어 서양문명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세의 카톨릭 스콜라 사상은 기독교 정신과 헬라교 사상을 한 지붕 아래 동거케 하려고 웅대한 사상적 복합구조물을 만들었다. 이제 스콜라 신학의 노력 속에서 예루살렘은 아테네를 발아래 두고 한 식구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결국 하늘발문명과 세상발 문명을 통합고 그 명주가 되려는 카톨릭 바티칸의 꿈은 바벨탑 신세가 되고 말았다. 르네상스와 교회개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로미 카톨릭의 헤브라이즈뫄 헬레니즘의 통합 시도를 박살낸 교회개혁은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칼빈, 쯔빙글리에 의해 주도됐으나
루터는 문화 배척론
쯔빙글리는 문화 수용론
칼빈은 문화 변형론,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중 칼빈의 것이 가장 설득력있었다.
막스 베버가 앞의 두 인문들보다 칼빈의 영향력을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主因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개혁주의는 로마 카톨릭과 더불어 서양인들의 사고와 삶에서 결정적 작용을 하는 두 지렛대가 되었다.
(1) 희랍의 이교철학
(2) 로마 카톨릭
(3) 이스람교(사라센세력)
(4) 칼빈주의
네 사상의 세계관들이 자취를 뚜렿하게 자리 매김을 했다.
5. 국가 민족의 성숙의 표지인 개혁주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프린스턴신학교 교수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스토운재단 주최로 [칼빈주의 강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민족생활은 유년기로부터 성숙기로 발전한다. 민족이 성년기에 이르면 국민은 스스로 자각하여 그들의 권리를 위하여 미래 사건의 진로를 제시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단계에 까지 도달한다. 칼빈주의가 일어나므로 민족이 성년기에 도달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나라에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가 꽃피워졌다면 그 민족이 성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문명의 흐름은 우리에게 민중이 깬 곳에서 개혁주의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개혁주의는 학자난 권력층, 엘리트의 산물이 아니다. 일반 대중에 의해 이루어졌다. 16세기 제네바는 John Calvin의 지도를 받고 있었지만, 그가 가담하기 전에 벌써 시민들의 각성이 있었다. 그 일반 백성들이 종교적 정치적 깨달음 아래 교회를 개혁하고, 시민정부를 세웠다. 그들의 요청에 응한 칼빈이 거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개혁신앙과 의회민주정부를 학문적으로 정립 발전시켰던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마틴 루터가 활동한 독일은 16세기 당시 제후 국가였다. 거기에 제네바 같은 민중의 자각은 없었다. 민중은 자신들의 종교나 정치 생활에 대한 실제적 권리, 곧 자결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봉건제후 아래서 농노와 같이 살고 있었다. 루터가 바티칸을 향해 개혁의 봉화를 들었을 때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일반 민중이 아니었다. 정치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바티칸에게 불만을 품어온 일단의 제후들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며 개혁에 지지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게르만(독일,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 루터교
작은 나라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콧트랜드, 영국의 한때, 미국) - 칼빈주의
라틴계 - 프랑스, 스페인, 폴투갈, 이태리 - 캐톨릭
칼빈주의가 영향을 미친 나라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정치가 실시되고 교회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정부나 교회는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 자신의 것이었다.
1500/1600년대 중간지대인 작은 나라들이 칼빈주의로 남과 북보다 더 민주주의가 잘 되고 인권, 강소국이 됨
스위스에 명품에 해당하는 산업국, 장사를 잘 하는 네덜란드 (Dutch pay 계산은 정확하게) 칼빈주의가 잘 하는 나라는 국가가 성숙, 민중의 자각, 시장 경제, 높은 도덕성, 윤리
카톨릭이나 정교회 쪽을 보면 민중은 볼모로 잡힌 존재였다. 고위 성직자들이 교회를 전횡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국가의 각종 자원을 나누어 가졌다. 이렇게 되지 민중은 무지한 채 노예같이 일만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리석고 연약한 민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교계제도나 제의 중심, 또는 성물-성상 숭배에 빠뜨려 더욱 몽매하게 만들었다. 이건 성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짓들이었다.
구약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출범시 벌써 성경을 주셨다. 이 성경의 백성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거기에 백성의 상하 구별이 없었다. 모두가 평등하였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셨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사랑과 관심 참여와 누림의 대상에 너나가 따로 없었다.
개혁주의는 이렇게 카톨릭교회나 정교회와 달랐을 뿐 아니라 개혁의 동반자인 루터주의와 같지 않았다. 그래서 개혁주의가 가는 곳에 국가 민족의 성숙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인권이 존중되고 사랑정의가 실현되었으며 민주정치와 시장경제가 발전하였다. 문명의 흐름에서 개혁주의는 진정 우월과 성숙의 표지였다.
칼빈주의가 선교사를 통해 100년 후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오다
한국의 70%는 칼빈주의 장로교이다.
20세기에 와서 백인계가 아닌 유일한 칼빈주의자는 한국교회
Church is the heavenly venture.(교회는 천국의 기업이다)
한국교회는 새벽부터 불을 켜고 주여, 주여, 주여 부르짖는 칼빈주의 교회이다. 백인은 이런 열정이 없다.
1907년 평양신학교가 설립되고, 성령의 폭탄이 같은해(1907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한 후 길선주목사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전국 교회 순회하며 증거했다. 독립운동서 서명, 장대현 교회 새벽기도 운동, 돌아가실 때도 새벽기도 드리고 별세하셨다.
이 신학의 핵심에 개혁주의, 칼빈주의가 있다. 나라와 교회가 살길은 복음이요, 칼빈주의(개혁주의)이다.
- 김영우 목사(총신대 재단이사장/예장합동 기독신문주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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