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 강휘중
2014-07-07 17:53:33
이레나이우스(Irenaeus)의 ‘recapitulatio’에 대한 소고
강휘중, 20121135)
서론
2세기 경 기독교는 이단들의 위협에 직면했다. 가장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였는데, 이들은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로마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지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바실리데스(Basilides)와 발렌티누스(Valentinus)였다. 이들의 사상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중심적인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영을 중시하고 육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왜곡하고, 구약의 정경성을 무시하고, 인간의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고 영의 구원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기독교적이고 반성경적인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나이우스, 터툴리안(Tertullian), 히폴리투스(Hyppolytus) 등이 등장하여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였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이레나이우스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구약과 신약은 연속적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레나이우스의 신학을 대표하는 용어는 ‘recapitulatio’이다. 이레나이우스는 ‘recapitulatio’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속의 행위를 설명하였다. 이하에서 필자는 이레나이우스의 생애와 그의 저서를 통하여 나타난 사상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2. 이레나이우스의 생애와 그의 저서를 통하여 살펴본 사상
1) 이레나이우스의 생애
이레나이우스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보통 주후 135-14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본다. 출생지로 소아시아의 서머나(Smyrna)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이레나이우스가 그의 책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서 당시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을 보았다고도 하고, 그의 설교를 들었다고도 하기 때문이다. 이후 이레나이우스는 갈리아-또는 Gaul-지방의 리그두눔(Ligdunum)(현재의 Lyon)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했다. 이레나이우스는 리그두눔의 감독으로서 교회를 이끌었고 , 켈트족에게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교회의 평화의 일치를 도모했다. 이레나이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히에로노무스(Hieronymus)가 그의 책 『이사야서 주석』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정확한 시기는 모른다. 202년 리그두눔에서 발생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 때 순교했을 것이라고 추축하는 견해도 있다.
2) 이레나이우스의 저서에 나타난 그의 사상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레나이우스의 저서는 ‘소위 영지주의에 대한 고발과 논박’으로 알려진 『이단 논박』과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으로 알려진 『에피데익시스』(Epideixis) 두 권뿐이고 다른 책들은 다 소실되었다.
『이단 논박』은 5권이 한 책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책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와 그 앞선 단계로 여겨졌던 모든 이단들을 반박했다.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지식-을 말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참되고 완전한 지식을 사도들에게 선포했고, 사도들은 그 지식을 성경에 기록하였다고 했다. 1권에서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의 제자였던 프톨레마이우스(Ptolemaeus)의 제자들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여기서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상식 이하의 허황된 비밀이라고 전제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무너뜨릴 있다고 했다. 2권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창조주-신 위에 있는 ‘플레로마’(πλήρωμα) 세계에 대한 발렌티누스의 생각을 반박하며, 신으로부터 유출된 씨앗인 ‘에온’(αἰών) 사상 등을 논박한다.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은 이러한 사유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분이라고 하며 발렌티누스의 사유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나머지 세 권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옹호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창조와 구속은 연관이 없고,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잔인하고 악한 신으로 보아서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여기에 대하여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의 구원이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계속됨을 주장함으로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일치성을 주장했다. 이것을 위해서 이레나이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연속성을 유형론적으로 이해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유형론적 관계가 그 예이다.
『이단 논박』은 원래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원본은 없고 라틴어로 된 완전한 번역본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에 반해 『에피데익시스』는 아르메니아 번역본만 남아 있다. 책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주로 마르키온(Marcion) 이단에 대하여 자신의 신학을 기술하고 있다. 『에피데익시스』는 요리문답집 형식으로 변증적인 책인데, 이미 신앙을 가진 자들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책은 영지주의자들을 논박하기 위하여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단 논박』보다 덜 조직적이고 덜 독창적이다. 책에서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과 창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자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며,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와 성육신, 예언의 성취, 그리스도교를 다루고 있다.
이상 두 권의 책, 『이단 논박』과 『에피데익시스』에 나타난 이레나이우스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을 반대하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참된 지식을 언급하고, 그러한 영지주의에 물들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3.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
1) 용어 recapitulatio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가 선결 문제로 등장한다. 라틴어 ‘recapitulatio’를 한국어로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한철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대기독교사상』에서 ‘recapitulatio’를 ‘총괄갱신’(總括更新)으로 번역하였다. ‘recapitulatio’는 영어로는 ‘recapitul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엡 1:10에 나오는 헬라어 ‘anakefalaiwsasqai’의 명사형인 ‘anakefalaiwsις’를 번역한 것이다(개역개정판은 이를 “통일”로 번역하고 있다). 한철하는 “어떻든 그 어원적인 뜻은 ‘총괄하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개념을 한 제목 하에 둔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인류가 다 포괄되었다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대표로 그의 구속 사업을 이루셨다는 ‘대표설’(representative theory)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recapitulatio’를 ‘총괄갱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단 논박』 3권 18편 1장에 나오는 이레나이우스의 언급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는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들의 오랜 출현을 자기 자신 안에서 총괄하셨다.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집약적으로 구원을 확보하셨으며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에게서 상실되었던 것을 그리스도에 있어서 다시 찾기 위함이다.
한철하가 ‘recapitulatio’을 ‘총괄갱신’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조병하는 “이제까지 교회사 자료의 번역관정에서 ‘총괄갱신’으로 번역된 단어는 훗날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발전된 신학사상인 전적인 타락을 전제한 단어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recapitulatio’을 ‘총괄갱신’으로 번역한 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recapitulatio’를 대다수의 책들은 ‘총괄갱신’으로 번역한다. 따라서 필자는 되도록, ‘recapitulatio’를 라틴어 그대로 사용하되, 참고문헌에서 소개된 것일 때는 ‘총괄갱신’으로 표기한다.
2) recapitulatio의 내용
(1) 창조주 하나님과 recapitulatio
‘recapitulatio’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지만, 그 자신은 아무 것에도 소유되지 않는다. 둘째로, ‘recapitulatio’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창조자와 창조된 자의 관계로 본다. 셋째로, ‘recapitulatio’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유비적으로 바라본다. 즉 아담은 시작과 완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원하고 전능한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이며 오직 한 분이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였고, 또한 하나님은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피조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보았다..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아들과 성령을 하나님의 ‘두 손’이라는 은유법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즉 하나님은 아들과 성령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따라서 ‘두 손’인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과 이 세상의 중간자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과 관계할 때 가지는 양식이다. 이레나이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전체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두 손’인 아들과 성령과 함께 행하는 사역의 연속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세계로 이루어진 세상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고한 신적 존재와 불완전한 세상의 오류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에온들을 상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이 세상의 창조주를 구별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창조 자체가 실수이며, 세상은 악한 신이 만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악한 신과 그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구약성경이라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창조는 구원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오히려 창조는 구원과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창조는 세상과 인간의 구속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창조와 구속을 연속적으로 보는 것은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의 주요한 사상이다.
창조와 구원에 대한 이레나이우스의 또 다른 이해는, 구원은 ‘하나님을 바라봄’(the vision of God)이라는 것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단 논박』 4권 20편 5-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명이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은 하나님에게 참여함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에게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함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에게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하심을 기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게 될 것이다.
또한 4권 20장 7절에서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지구상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부어 주신 하나님이 이러한 피조세계를 통하여 잘 드러나 보인다고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 즉 말씀을 통하여 생명이 부여된 존재들을 통하여서는 그분의 모습이 더욱더 확연히 보이지 않겠는가.
영지주의자들이 물질세계가 악하고 불완전한 것이고 실수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이레나이우스는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물질세계는 선한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물질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레나이우스의 이러한 생각은 구원은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 분야에 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recapitulatio’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진다. 즉 구원은 인간의 영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철하가 ‘recapitulatio’를 ‘총괄갱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2) 그리스도의 구속과 recapitulatio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에서 창조는 중요한 요소지만,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두 손 중 한 손인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시작이었으며, 이것은 마지막 때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귀속됨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recapitulatio’는 연속적이며 발전적인 것이다. ‘recapitulatio’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성취며, 이 성취는 역사 내의 시간의 연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recapitulatio’는 그리스도가 모든 원수를 그의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하여 아버지가 만물의 주가 될 때까지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련된 ‘recapitulatio’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장’이라는 개념은 이레나이우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삼위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였고,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을 통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즉 인간은 아들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여기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이다(엡 4:13). 따라서 ‘recapitulatio’는 새로운 성장이며 마지막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recapitulatio’에서 성장은 아담과 사탄,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두 측면에서 더 자세히 고찰해볼 수 있다. 첫째로, 아담과 사탄의 관계이다. 창조는 사탄과 인간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사탄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었지만, 사탄은 인간을 유혹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한 목적-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계속 성장하는 것-을 빨리 달성하여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뒤집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 이로써 인간의 성장은 저지당했다. 여기서 인간의 타락을 바라보는 이레나이우스의 독특한 관점을 알 수 있다. 이레나이우스는 타락은 인간이 본래 가졌던 완성을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성장이 저해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서 처음 계획했던 것을 지속적으로 수행해나간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dispensation)는 일련의 연속적인 언약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아담 언약, 노아 언약, 모세 언약, 그리스도의 언약이다. 이레나이우스는 모세 언약과 그리스도의 언약에서, 율법의 제의법은 폐지되었지만, 도덕법과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언약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신약성경이라는 의미로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이레나이우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책은 구약성경을 가리킬 것이다. 따라서 이레나이우스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주장하며 양자의 극단적인 대립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의 이론들을 배격했다. 이런 점에서 이레나이우스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영지주의 사상과 달리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지금 구원의 사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으로서 인간들 가운데 거주한다. 이런 점에서 이레나이우스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recapitulatio’로 보았다.
둘째로, 이레나이우스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유형적으로 보았다. 이레나이우스는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육체를 입고 두 번째 아담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가 참 인간인 성육신으로 오지 않았다면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없으며 그의 고난과 죽음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아담은 파괴를 가져 왔으나, 두 번째 아담은 세상과 인간을 치유하고 자기 안에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켰다. 따라서 ‘recapitulatio’는 그리스도가 인간을 갱신시켜서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성육신 사건은 세상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면서 창조의 완성이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첫 아담과 다른 방향으로 옛 아담의 역사를 반복하며 갱신한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사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 아들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recapitulatio’는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였다는 것과 그 결과 인간은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사탄에 의하여 소외된 본래적 형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레나이우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최초의 승리는 부활이 아니라 성육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악에 대한 승리의 시작이지만, 그리스도의 ‘recapitulatio’는 최종적 완성이 있을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recapitulatio’도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서 마지막 때에 완성된다.
이러한 성육신의 ‘recapitulatio’는 로고스 신학과 연결되어 로고스의 성육신 속에서 구속적 요소가 결부된 ‘구속적 성육신주의’(redemptive incarnation)를 나타낸다. 이레나이우스는 말씀(로고스)인 스승이 사람이 되지 않고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다.
(3) 성령과 recapitulatio
이레나이우스의 성령 이해는 창조와 구원과 관련된다. 그는 『에피데익시스』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성적이시므로 그분의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아름답게 하셨다. 성령은 다양한 피조세계에 질서와 형태를 주셨다.
이러한 성령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완의 연합을 이루는 데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지 않고는 구원이 없고,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아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인간의 역사가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의 역사가 되도록 역사를 인도한다.
(4) 교회와 recapitulatio
이레나이우스는 교회의 중요한 역할은 ‘recapitulatio’라고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그의 몸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장의 가능성이 있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레나이우스는 교회를 구원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기구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recapitulatio’를 진행시킨다. 이레나이우스는 세례보다 성찬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는 『에피데익시스』3장에서 세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서 우리가 다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숙명적 인간의 자녀가 아니고 영원하고 영속적인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장한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입는 새로운 인간이 되며 우리 몸의 머리가 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 성찬에 대하여 이레나이우스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양을 공급받는다고 하였다. 『이단 논박』 5권 2장 3절에서 이레나이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준비된 혼합된 잔과 빵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만찬,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고, 이것들에 의해 우리 육신이 주님의 몸과 피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그분에게 속한 자가 되기에 우리 육신이 성장하고 굳세어지는데, 어떻게 그들은 육신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레나이우스는 ‘recapitulatio’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recapitulatio’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단 논박』 3권 17장 절은 세례와 성찬을 통한 교회의 ‘recapitulatio’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세례에 의해서만 우리의 몸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연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성만찬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썩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부활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5) 종말과 recapitulatio
이레나이우스에게 있어서 창조와 완성은 연결되어 있다. 그는 현재의 교회의 시대는 인류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의 시대로 보았으며, 아들의 왕국은 완성의 시작이면서 교회 시대와 미래의 영원한 완성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recapitulatio’는 종말과 자연히 맥이 닿아있다.
그런데 이레나이우스에게 있어서 천상의 왕국은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recapitulatio’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면서 전체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recapitulatio’는 미래의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도가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그가 성육신으로 시작한 모든 사역을 갱신하며 완성시킬 것이다.
(6) 정의(正義)와 recapitulatio
이레나이우스는 구원과 관련하여 ‘정의’와 ‘부정의’를 부단히 사용하고 있다. 정의는 그리스도가 인간을 찾아와 자기의 제자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정의로운 일이며, 부정의는 배교하는 사탄이 인간에게 폭군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레아니우스는 『이단 논박』 5권 1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교가 부당하게 우리에게 압제를 가했고, 우리가 본래 전능하신 하나님께 속했을 때에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소원하게 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있어서 강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그분 자신의 제자들로 삼으시면서 [우리를 개심시키셨습니다]. 비록 처음에 배교는 그것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탐욕을 부려 붙잡으면서, 우리에게 압제를 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정의의 속성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면서, 그분에게 속한 자들을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화함에 의해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얻으시는 것이 적합하므로 설득에 의해 그분에게 속한 자들을 배교로부터 구조하시면서, 그분은 배교 그 자체에 공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따라서 공명정대한 것의 기준도 침해받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의 오랜 옛날 창조도 사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recapitulatio’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여 도로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행동에 그리스도는 순종하고 사탄의 압제에는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고 사탄의 부정의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부정의를 순종과 대속으로 꺾는다.
4. 결론
이상에서 필자는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 신학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 신학은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그릇된 이분법적인 사상에 대항하여 나온 독창적인 사상이다. 비록 ‘recapitulatio’ 신학이 덜 조직적이고 신학적으로 미분화적이지만, 영지주의자들처럼 물질과 영혼, 창조와 구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분리하지 않고 연속적이고 통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창조와 구원, 창조세계, 그리스도의 성육신, 성경의 정경성에 대하여 성경적인 가르침을 당대 믿음의 공동체에 올바르게 전달해주었다.
이레나이우스의 ‘recapitulatio’ 신학은 현대의 교회에도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recapitulatio’ 신학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구원만을 중요시여기는 구원관에 넓은 시야를 제공해준다. 비록 구원의 중심에 인간이 놓여있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인간을 둘러싼 세상이 총괄적으로 포함된다. 구원을 인간 영혼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길 경우 피조세계를 등한시 여기는 내세적 신앙이나 피조세계를 욕망하는 세속적 신앙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피조세계에도 미칠 경우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환경을 구속적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청지기의 자세로 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려야 한다. 셋째로, ‘recapitulatio’ 신학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역사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시야를 제공해준다. 하나님은 창조와 더불어 인류에 대한 구속을 펼쳤으며 그 완성은 종말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와 완성의 중간 시대를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재에서 종말을 소망하는 삶이지, 종말로 도피하는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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