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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월리스, 『하나님 편에 서라』 -최경환

짐 월리스, 『하나님 편에 서라』 -최경환

2014-07-25 00:31:13


<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세미나> 5

짐 월리스, 『하나님 편에 서라』

 

2014년 7월 24 100주년 기념교회 교육관

최경환 연구원 (현대기독연구원)

 

[1] 만일 신앙인들이 계급적, 인종적, 국가적 충성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전 지구적 정체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스도인이 정말로 자신을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다른 정체성은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헌법 위에 그리스도의 법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우어와스 같은 평화주의자는 미국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충돌을 일으킬 때 비폭력적인 행동(무조건적인 전쟁반대)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지침이라 말하고 있다.   

 (47)

 

[2] 보수적 정치 철학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관념은 개인의 책임에 대한 촉구이다. 개인의 도덕적 행위, 결혼과 자녀 양육, 노동 윤리, 재정 투명성, 봉사, 긍휼, 안전과 관련된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여기에 속한다. (47) 그리고 진보적 철학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관념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촉구이다. 이웃 돌봄, 경제 정의, 인종 간의 평등과 성평등, 사회적 정의, 약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 등이 여기에 속한다. (48) 공동선은 두 관념 안에 있는 최선의 요소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로워야 한다. 정부는 공적 봉사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섬기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3] 짐 월리스는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만큼이나 공동선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탐욕 대신 가치를 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49) 가정과 공동체, 인간 번영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과 공동체이다. (51) 여기서 신앙이 맡아야 하는 역할은 정치에 도전하며 공적 영역으로 하여금 신앙에서 유래한 가치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른 신앙이나 다른 영적, 세속적 도덕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지혜가 공동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51) 

 

[4] 신앙은 가장 나쁘고 가장 지배적인 사회적 서사를 전복시킬 수 있으며, 만연한 우상숭배에 도전할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을 외면하게 만드는 거짓말을 폭로해야 한다. 신앙 공동체는 공적 영역을 지배하려 들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 가르침과 영감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 사회의 점증하는 종교적 다원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진리를 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52)

 

[5] 우리가 공동선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여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교리를 더 잘 이해한다거나 종교를 더 열렬히 추종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참된 삶을 사는가, 누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 있는가, 누가 이웃 사랑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가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신앙을 공적으로 더 잘 증언할 수 있다. 우리는 기회와 공정성, 긍휼, 성품, 헌신, 양육, 소망이라는 더 나은 가치의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53)

 

[6] 월리스는 언론이 정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정치에 책임을 묻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앙 공동체가 예언자적이며 목회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이슈에 대한 언론의 천박하고 불쾌한 행태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대단히 신학적이고 영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우상들’을 찾아내서 그 정체를 폭로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정사와 권사’에 대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혁명』을 참고하라. 

 

 

[7] 기독교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58) 교회는 우리 모두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해야 하며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하라고 촉구하신다. 이것은 이 세상의 이기적인 왕국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안이다. (58) 우리가 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 내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먼저 이 나라에 놀라고 그 다음에는 이 나라에 끌린다. 교회의 가시성(visual church)과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alternative life style)에 고전적인 책으로는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가 있다. 하우어와스는 이러한 본회퍼의 교회론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거로 삼고 있다. 

 (59) 목회자의 책무는 예측불가능한 공동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것, 다른 누구도 소망을 주지 못하는 곳에 소망을 주는 것이다. (60)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만 충성을 바치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왕국을 전복하며, 예기치 못한 일들을 만들어 내며,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끄집어낸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과 지역, 국가, 세계에 새로운 소망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주변의 세상은 이처럼 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소망의 사역을 갈망하고 있다. (61)

복음은 결코 제국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나라에 살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높이고 모든 나라로 하여금 그 원리에 입각해 자신들의 최고 가치를 존중하라고 촉구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200) 

 

[8] 모든 개인에 대한 근본적 존중은 모든 정치 체제와 정부가 지켜야 할 필수요건이다. 그리고 인간이나 시민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가치를 깎아내릴 때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들의 존재를 약화시킨다. 각 시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권리는 그가 속한 국가의 건국이념을 진술한 문서에 담긴 정치적 약속으로부터 도출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들의 지위로부터 도출된다. (293) 우리의 사회 생활, 더 나아가 정치적 삶의 목적은 그저 우리 각자가 혼자 살아가지 않고 좋은 관계, 삶을 지속시키는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기 위함이다. 개인의 분리와 자립을 강조하는 현대의 자유지상주의적(liberatarian) 관점은 이러한 성경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분명히 민주주의에 관한 성경신학은 우리를 개인적 선뿐만 아니라 공동선으로 이끈다. (296) 우리는 오늘날 개인의 권리가 최상의 가치이며 정부를 그 주된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에 직면해 있다. 자유지상주의자인 로버트 노직(Robert Nozic)은 개인의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국가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개인의 소유와 권리를 침해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국가의 기능과 역할은 최대한 축소되어야만 하고,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시장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 정부관에서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태도는 두드러진 기독교적 덕목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이웃을 돌보는 것도 그와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긍휼과 사회정의는 기독교의 근본 가치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이 두 가치를 실천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 역시 정의와 가난한 이들의 보호를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다. (366)

 

[9] 시장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인간의 본성과 죄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와 모순을 이룬다. 정부 규제를 적으로 삼을 때, 공공 안전이나 공동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이해하는 환경 보호 등을 무시한 채 시장은 마음껏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쁜 정치학일 뿐만 아니라 나쁜 신학이기도 하다. (367) 신앙인들은 정부에 결코 궁극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지만 정부가 일꾼으로서 중요하고 온당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 당국에 대한 평가와 판단 기준은 정부가 사람들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지,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고 있는지, 긍정적이며 평화로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지,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 특히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여부다. 

 

[10] 최선의 정부는 견제와 균형을 그 특징으로 삼아야 한다. 좋은 정부의 윤리는 투명성과 책임과 봉사다. (372) 우리는 투표가 민주주의의 시작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는 시민들이 공동체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하고, 선거 승리라는 편협한 목적을 넘어서 우리 모두가 더불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공적 이슈를 중심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296)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저 또 한 번의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치운동이라는 것이다. (313)

 

[11] 세상에서 공의와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참된 예배의 행위이기도 하다. (암 5:21-24) 정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정의는 깨어진 관계를 바로잡고 고치고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를 행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된다. (380)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의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불공정하고 잔인하고 불의한지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어떤 깨어진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세상을 아프게 하는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바로잡는 법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382)

 

[12]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나사렛 선언’은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핵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복음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면, 그것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자신이 온 목적을 선포하신 말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억압당하고 예속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정의와 자유의 약속이 예수님의 사명을 밝힌 나사렛 선언의 핵심이다. (95) 예수님이 맨 처음 하신 일은, 그분의 오심이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리는 전령이었고 사람들을 향해 그들 자신의 삶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바꾸는 이 변화에 동참하라고 촉구하셨다. (96)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 이곳에서 이 새로운 질서의 전조이자 이 질서가 실현되는 공동체로, 이 질서를 위한 촉매제로 살아야 한다. (98) 

 

[13] 만약 속죄만 다루는 복음을 말하는 미국 교회들이 흑인민권 운동에서 잘못된 편에 섰고 아직도 정의의 문제에 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단지 그들의 실천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학도 무언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114)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교회들처럼 정의의 편에 선 교회들은 언제나 정의를 그저 복음의 함의가 아니라 복음의 필수 요소로 이해했다. 신약성경에서 회심은 두 가지 움직임, 즉 회개와 따름, 신념과 순종, 신앙과 제자도, 개인적 회심과 사회 정의를 통해 일어난다. 이 모두가 하나님 나라로의 회심이라는 성경적 전망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속죄만 다루는 신학과 그런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에 해당하는 정의의 전망을 놓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그들의 복음은 너무 작고, 너무 협소하고, 너무 이분법적이며, 궁극적으로 너무 사적이다. 그리고 결국 성경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복음의 메시지는 세상이 바뀔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따라서 그런 복음은 너무 백인적이고, 너무 특권적이고, 너무 남성중심적이고, 너무 미국적인 복음이 되고 만다. (115)

 

[14] 성경과 교회사에서 회심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체적이었다. 우리의 시대나 우리의 문제와 관련해 복음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언제나 핵심적인 문제다.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돌이켜 무엇을 행하는가가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정짓는다. (121) 

 

[15] 자유, 환대, 긍정, 평등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매력적이었으며, 첫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가치의 본보기가 되었다. (191)

 

[16] (마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은 잘못된 교리나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하자. 여기서 영원한 심판은 우리가 우리 가운데 있는, 그리고 세상 가운데 있는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기초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진정한 예수님을 어떻게,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133) 

 

[17] (눅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이 비유는 사랑이란 이웃의 범위를 결코 제한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예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모든 종류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모든 종류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모든 사회는 경계 – 그 자신과 ‘타자’ 사이의 장벽 – 를 만든다. 예수님은 이웃 사이에 용인된 경계라는 우리의 관념을 제거하신다. 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비난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율법을 준수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해한 대로 규정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두 사람 다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피범벅의 몸을 만진다면 그들은 ‘부정해질’ 것이고 여리고에 도착한 후에는 이것이 그들에게 문제가 될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윤리는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규칙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은 윤리적 행동의 최소한의 범위를 상정하는 것이다. 때로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벗어나야만 하는 윤리적 순간이 우리에게 직면하기도 한다. 법이 상정한 윤리적인 테두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도전해야 할 때도 있다.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 열망의 윤리학이 필요)

 (171) 신앙인들이 실천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신학적 현실은, 우리의 이웃이 지리적 인접성에 따라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그러므로 이제 소비재 상품을 위한 공급망이라는 이 피로 얼룩진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일 때다. (178)

 

[18]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실천하신 모든 것에 반대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일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공동체나 집단이 괴롭힘과 증오의 대상이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공격하는 이들에 맞서 그들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212) 우리가 모든 해답을 찾기 전에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거나 모욕하는 모든 사람에 맞서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213)

 

[19] (하트송 교회 이야기) 이슬람 센터의 새 건물이 아직 건축 중이었기에 하트송 교회는 이슬람 센터의 회원들에게 그 이듬해 라마단 기도예배를 위해 예배당을 내주었다. 지역 주민을 위한 하트송의 바비큐 파티에서는 이제 할랄 고기를 내 놓고, 두 회중은 연합으로 노숙자 급식과 지역 아동의 학습 지도를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 (230) 나는 종교 사이의 중대한 차이를 흐릿하게 만드는 순진한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종교 전통에서는 나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고, 특히 이웃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고 믿는다. 우리가 모든 점에서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237)

 

[1] 짐 월리스의 초기 저작인 『회심』과 『부러진 십자가』는 1970년대 냉전시기 미국에서 시민운동과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절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도전이었다. 월리스의 초기저작인 『회심』은 복음주의 특유의 정서를 사회참여의 에너지로 전화시킨 획기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즉, 기존에 복음주의에서 강조하던 회심의 내용을 사회적 각성으로 연결시켜 사회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만든 것이다. 

 본회퍼, 헨리 나우웬, 쟈크 엘률과 같은 신학자들의 영성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사회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짐 월리스는 자신의 보수적인 신앙 전통(플리머스 형제단)을 기반으로 급진적인 사회운동에 적극 동참함으로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을 만들어 냈다. 30년 가량 꾸준하게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국가를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와 사회적 약자를 향한 구제 활동은 젊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결국 버락 오바마의 당선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2] 그런데 『가치란 무엇인가』와 『하나님 편에 서라』에서 짐 월리스는 이번에 비해 국가의 역할을 보다 강조하고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선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종교가 국가의 영혼을 돌봐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종교공동체와 가정을 공공선을 배양하고 양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단위로 상정한다. 물론 여전히 국가의 비도덕성을 질타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국가에게 높은 도덕성과 영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권력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결집된 정치적 힘이 모인 것이고, 이러한 힘의 동력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의 습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 놓쳤던 부분은 바로 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를 강조함으로 정치로부터 윤리(도덕)을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오히려 다양한 인정욕구와 욕망들이 끊임없이 분출되는 에너지들을 조절, 조율하면서 자연스럽게 경합을 일으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성과 도덕적 감수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커 파머가 지적한 것처럼 교실과 교회는 이러한 영성을 교육하기에 가장 중요한 장소일 수 있다.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2012.

 짐 월리스는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공정한 절차나 형식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과 열정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3] 짐 월리스의 급진적인 정치적 결단과 선택, 그리고 구체적인 현실참여는 그동안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있어서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월리스의 과감하고도 적극적인 사회참여, 종교와 이념을 넘어선 타자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모습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적잖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지난 20-30년간 사회참여의 신학을 어느 정도 구축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이슈와 현장에 직면해서는 판단과 선택을 유보함으로 결과적으로는 보수적인 기성교회의 우산 아래도 들어갔다는 비판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그동안 복음주의자들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을 보호하고 돌봐야 한다는 당위와 함께 이웃을 섬기는 교회,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은 많이 했지만, 정작 그 이웃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전혀 묻지 않았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에게 타자담론은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이 삭제된 채 너무나 추상화적인 일반명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짐 월리스가 이웃의 이름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호명한 것은 그를 다른 복음주의자들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