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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배제와 포용-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미로슬라브 볼프

2014-07-07 16:14:39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 

 저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1996년

 

 요약: 김수진(iphoton@hanmail.net) 

 배제와 포용은 좋은 책인데 비해 쉽게 읽히지 않는 책입니다. 책의 말미에 강영안 교수님의 해설이 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그래도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의 방향은 자신의 언어로 요약하는 것보다도 주제의 흐름과 연결을 살리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주제와 핵심어(keyword)를 놓치지 않으면서 책 전체에서 볼프의 목소리가 살아나도록 노력했습니다. 원래의 책보다는 술술 읽히도록 글을 다듬었습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자신의 언어로 표현은 하되 좋은 부분과 문장은 대부분 그대로 두었고, 민감한 철학적 진술은 살짝 뜻이 비껴가도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어서 최대한 살려 두었습니다.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풍성한 논의를 하는 책이라 중심에서 다소 벗어난 곁가지에 해당하는 논의는 일부 건너뛰기도 했습니다. 3장 ‘포용’의 마지막 소 단락 ‘두 팔을 벌리신 하나님 아버지’는 글이 매우 훌륭해서 대부분 그대로 실었습니다. 4장 ‘성 정체성’은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중요한 문장 위주로 글을 추렸습니다. 중간 중간에 한글만으로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부분에 원서를 참조하여 영어 원문을 추가하였습니다. 볼프의 주장과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분리하기 위해 해당 학자의 이름은 괄호 안에 넣었습니다. 요약본에서 이상한 부분이나 수정해야 될 부분이 있으면 위의 메일 주소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요약본이 나오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대구 기윤실 가치독서모임의 서선희, 강신영, 최성훈, 윤진환, 박현주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목차

서론: 십자가, 자아, 타자(3~6)

1부

1. 거리두기와 소속되기(7~10)

2. 배제(11~14)

3. 포용(15~29)

4. 성 정체성(30~35)

2부

5. 억압과 정의(36~39)

6. 기만과 진실(40~43)

7. 폭력과 평화(44~47)- 3 -

 

 

 

서론: 십자가, 자아, 타자

 

세 도시의 이미지 

 사라예보, 로스앤젤레스, 베를린의 세 도시는 극심한 문화적, 민족적, 인종적 투쟁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 도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문화 간의 충돌로 인해, 인종이나 민족, 언어, 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적인 분쟁과 첨예한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다. 적대적인 문화 집단 간의 충돌은 많은 서구 국가에서 사회적 삶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민족적, 인종적 갈등의 문제는 정체성과 타자성이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다. 

 

타자 없는 세계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쟁을 촉발시켜 폭력이 가득한 세상을 만든다. 곳곳에서 자행되는 다양한 문화적 ‘청소’는 우리로 하여금 정체성과 타자성을 사회 현실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핵심 주제로 삼도록 요구한다. 우리가 주로 관심 갖는 인권, 정의, 생태적 행복과 같은 주제와 더불어 정체성과 타자성에 대한 주제 역시 중요하다. 네 가지 주제는 모두 상호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최근의 정치철학적인 논쟁들은 그 관심이 보편에서 특수로, 전 지구적인 것에서 지역적인 것으로, 평등에서 차이로 이동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관심이 이동한 까닭은, ‘보편성’이라는 것이 주어진 ‘특수성’ 안에서만 가능하며, 전 지구적 관심은 지역적으로 추구해야만 하고, 평등에 대한 강조는 차이에 주의를 기울일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이의 정치(정체성의 정치)’는 우리에게 개인이나 집단의 독특한 정체성, 그들을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시키는 특징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Taylor). 차이의 정치는 두 가지 근본적인 확신에 기초한다. 첫째,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의 특수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둘째, 정체성은 일정 부분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받게 되는 인정(recognition)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인정하지 않거나 잘못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며, 일종의 억압이 되어 그 사람을 거짓되며 왜곡되고 축소된 존재 양식 안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Taylor). 경제적, 기술적 발전에 의해 각종 문화들이 뒤섞이고 있는 현상 때문에, 오늘날 ‘종족적’ 정체성이 강력한 힘을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문화적 이질성이 권력과 부의 극단적 불균형과 결합할 경우 더욱 심각해진다. 우리 세계의 미래는 정체성과 차이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사회적 구조, 사회적 행위자 

다음은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격화되는 갈등의 문제에 관한 대표적인 해법이다. 각각의 접근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바람직한 사회상을 추구한다. (1) 보편주의적 접근(보편적 가치를 보호하는 사회): 차이의 확산을 통제하고, 보편적 가치(종교적 가치나 계몽주의의 가치)가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가치만이 사람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보장할 수 있다. 공동의 가치 없이 차이만 주장할 때는 풍성하고 유익한 다양성이 아니라 혼돈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전쟁을 야기할 수 있다. (2) 공동체주의적 접근(특수한 공동체적 정체성의 복수성(plurality)을 증진하는 사회): 우리는 자신을 더 작은 규모의 토착 문화의 수호자로 여기며, 공동체적 특성을 기리고 다름을 장려해야 한다. 보편적 가치의 확산은 평화와 번영이 아니라 억압과 권태로 귀결될 뿐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해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는 사회): 우리는 보편적 가치와 특수한 정체성을 탈피하고, 개인의 급진적인 자율성 안에서 억압으로부터의 도피처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새 정체성을 획득하고 옛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계속해서 ‘더 크고 자유로운 자아’, 제멋대로이며 별난 방랑자, 모호하며 분열되어 있고, 언제나 움직이며 움직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 자아를 창조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  세 가지 해법은 많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사회적 구조(social arrangements)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해법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개인과 집단들을 수용하기 위해 한 사회가 어떻게 구조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주장을 제시한다. 이런 제안에는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지만, 그 주된 관심은 사회적 행위자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다. 나는 이 책에서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나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다름을 수용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타자와 조화롭게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나는 자아가 특정한 상황 하에 놓인다는 상황적 자아(situated selves)를 전제한다. 자아는 하나 이상의 혼종적(hybrid) 정체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고, 한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어떻게 타자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까?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과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사회적 구조에 대한 논의를 삼가는 이유는 그런 논의를 매우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장이 그것에 대해 독특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를 다루는 것은 신학자의 일보다 경제학자, 정치학자, 사회철학자 등에 걸 맞는 작업이다. 신학자들은 사회적 구조에 집중하기보다 정의롭고 진실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상상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적 행위자를 길러 내고 그러한 행위자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는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적 행위자에 대한 지속적인 신학적 성찰이 필요한 까닭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성이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바우만(Bauman)은 근대성의 주요한 특징은 “도덕적 자아에게 묻던 도덕적 책임을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관리되는 초개인적 행위 구조로 옮기거나, 또는 관료주의적인 ‘통치자 없는 통치’ 속에서 떠돌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티는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인간관계를 “단편적”이며 “단절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탈과 책임 회피”를 조장한다. 근대성과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바우만의 평가가 옳다면, 사회적 행위자와 그들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성찰은 시급한 과제가 된다. 

 

십자가의 중심성 

요더(Yoder)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고 한다. 그는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회 윤리에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주장한다. 세상 속에서의 삶에 대해 십자가가 갖는 함의를 다룬 최근의 연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몰트만의 작업이다. 십자가에 관한 몰트만 사상의 주요 주제는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당한 고통은 단지 그분의 고통이 아닌,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고통으로, 예수님은 그들과 연대하시며 자신의 몸과 자신의 영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Moltmann). 십자가는 죄에 대한, 이 땅 위의 불의와 폭력에 대한 신적 속죄라고 주장한다. 희생자와 연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나는 여기서 특별히 원수를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며 그들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 안으로 받아들이신다는 주제를 더 발전시키고자 한다. 몰트만은 십자가와 삼위일체 신학의 사회적 함의를 주로 하나님의 연대라는 주제에서 도출한다. 즉, 하나님이 희생자들과 더불어 고통당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박탈당했던 권리를 돌려주셨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나는 하나님의 자기 내어줌이라는 주제에 담긴 사회적 함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즉, 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이들을 악에 넘겨주지 않으시고, 속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받아들이시고자 그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  예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롬 5:6)라는 주장이 신약 성경의 근본적인 주장이라면, 몰트만의 ‘연대’라는 주제는 ‘자기를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더 중요한 주제의 하위 주제가 된다. 특히 연대성이 단지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면, 연대성은 자기 내어줌이라는 주제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고통당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이와의 연대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이의 모범을 따라 악에 맞서 싸우는 이들만이 그들 편에 서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연대의 주제는 자기 내어줌이라는 포괄적인 주제 안에서 온전함을 드러낸다. 존슨(Johnson)은 자신을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이시며 그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의 행위이자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결론 내린다.  자기 내어줌이라는 주제의 중심성을 확인하는 또 다른 좋은 방법은 교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의식인 세례와 성만찬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롬 6:3).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갈 2:20).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변화되기 위해 “그들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그분을 기억한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고 십자가에 의해 요구되는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몰트만은 자신을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내어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고 강조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 성찰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를 내어 주시는 사랑에 기초해야만 한다. 그런 성찰의 모든 핵심 주제는 철저히 자기를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점을 통해 사유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그리고 적대적인 상황 하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맺어 가는 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스캔들과 약속 

이 세상이 완벽한 사랑의 세계가 되지 않는 것은 서로가 자기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자기 내어줌에 대해 착취와 무자비함으로 대응한다.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기를 내어 주었지만 우리가 착취당하고 희생당한다면 우리는 모두 그것을 반대할 것이다. 십자가의 궁극적인 스캔들(scandal:걸림돌)은, 자기 내어줌이 긍정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있다. 당신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고 당신을 파괴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희생하지만, 가해자의 권력을 안정시켜 줄 뿐이다. 자기 내어줌이 서로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지만, 실패의 고통과 심지어 폭력도 예상해야 한다. 폭력이 몰아칠 때, 자기를 내어 주는 행동은 곧 어둠에 가려진 하나님 앞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될 뿐이다. 자기를 내어 주는 행동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 어두운 면이 바로 십자가의 스캔들이다. 이 스캔들을 우회하는 기독교적인 방법은 없다. 십자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거부하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뿐이다. 십자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한 제자들은 바로 스캔들 속에서 약속을 발견했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면서, 하나님의 어두운 얼굴 앞에서 슬퍼하고 항변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과 함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분의 빈 무덤 속에서 그들은 절망의 부르짖음이 기쁨의 노래로 바뀌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구속받은 세상 위에 ‘비칠’ 것이라는 증거를 보았다. 십자가의 길이 고통스럽고 자주 실패한다는 사실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스캔들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십자가는 더욱 이상한 스캔들이 되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내적 논리가 근대성의 기본 정서와 심층적으로 어긋나는 두 가지 상호 연관된 믿음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첫째, 근대성은 세계의 균열을 고칠 수 있으며 세계는 치유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근대성은 역사의 종말에 이성의 힘으로 낙원에 이를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 반면 십자가는 악이 고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오기 전에는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둘째, 근대성은 사회적 통제(‘알맞은 계획’)와 합리적 사고(‘결정적인 논증’)라는 쌍둥이 전략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에 반해, 십자가는 궁극적인 구원이 ‘계획’과 ‘논증’으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이라는 ‘약함’은 사회적 통제보다 ‘더 강하며’, 이 ‘어리석음’은 합리적 사고보다 ‘더 지혜롭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소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부활에 기초한 십자가의 약속이다. 

 

주제와 단계

 3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는 권고에 나온 서로 “받아들임”(welcoming)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포옹’(embrace)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다. 포옹은 다음의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어내는데 매우 적합하다. 

 (1)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상호성(신론)

 (2) 십자가 위에서 ‘경건하지 않은’ 이들을 향해 팔을 뻗으신 그리스도(기독론),

 (3) 두 팔을 벌리고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구원론)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재조정하려는 의지는, 그들의 인간성을 인식하려는 목적을 제외한 그들에 대한 그 어떤 판단보다 중요하다. 포용하려는 의지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그 어떤 ‘진리’보다, 그들의 ‘정의’에 대한 그 어떤 판단보다 우선한다. 이 의지는 무차별적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세계를 ‘선과 악’ 이라는 도덕적 범주로 구별하려는 시도를 초월한다.  2부(5-7장)에서는 사회철학뿐만 아니라 성경의 예언서와 서신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중요한 세 주제인 진리, 정의, 평화를 다룬다. ‘포용하려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나는 기만과 불의, 폭력에 맞서는 싸움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맥락 안에서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진리와 정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곧바로 나는 포용, 즉 온전한 화해는 진리를 말하고 정의를 행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내어주는 ‘은총’과 진리 및 정의에 대한 ‘요구’ 사이에는 비대칭적 변증법이 존재한다. 은총이 우선한다. 포용하려는 의지는 무차별적일지라도, 포용 자체는 조건적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변증법으로 인해, 7장에서는 비폭력을 주장하는 동시에, 구속받기를 끝까지 포기한다면 그런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실 특권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포용을 실천하기 위해 타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1장). 4장에서는 ‘정체성’과 ‘타자성’ 사이의 가장 포괄적이며 근본적인 관계(젠더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포용의 신학’이 성 정체성과 화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규명하고자 했다. 이 책의 전개 형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우선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사상가들과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가들과 비신학적 대화를 한다. 이들을 일차적인 대화 상대로 삼은 까닭은 이 두 사유의 형식이 현재의 문화적 논쟁에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목할 만한 형식은 ‘성경 신학’적 접근이다. 대부분의 장에는 몇 개의 핵심 성경 본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해석을 하여 ‘포용’과 다양한 하위 주제들(‘배제’, ‘회개’, ‘용서’, ‘정의’, ‘진리’, ‘평화’ 등)에 관한 성찰을 하였다. 

 

 

1부

1. 거리두기와 소속되기

 

공모

 제국주의 시대에 문화의 양심이어야 했을 예술가들은 그들이 내세웠던 인문주의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팽창에 공모했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식민지의 교회가 ‘외국인의 교회’가 되어 원주민 고유의 문화를 짓밟았으며, 원주민을 하나님의 길로 이끌지 않고 백인 남성, 주인, 압제자의 길로 이끌었다(Fanon). 기독교가 제국주의 발전에 공모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공모 자체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행동 양식이다. 우리는 주변의 문화에 압도당한 나머지 문화 속에 내재된 악을 분별하지 못하며, 그 결과 그 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커녕 그 악을 우리 나름대로 변형하여 제공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자행해 온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가 존재한다.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그리스 문화와 라틴 문화를, 동방과 서방을 가로지르던 경계선을 종교적으로 다시 확인하고 강화한 것일 뿐이다. 문화의 노예로 전락한 교회는 어리석게도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갈등 상황에서는 문화에 대한 과도한 헌신은 교회에 악영향을 미쳐 화해를 가로막고 반목의 공범자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 이런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회가 문화의 영역과 지나치게 얽혀들어 그 관계가 집단적 증오와 편협한 태도를 부추기는 당파적 정치(partisan politics)의 영역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의 인종적, 문화적 공동체에 함몰되어 화해의 사역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문화적 정체성을 신성화하고, 이를 통해 살인과 같은 잔혹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배신할 때도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자기 의를 버리고 자신이 속한 문화에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로부터 돌이켜서 문화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사람들과 문화 집단을 갈라놓고 악의적 갈등을 조장하는 ‘신종족주의’에 직면한 기독교 공동체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는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나는 문화로부터 거리두기(distance)와 문화에 소속되기(belonging)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떠나라

 아브라함은 모든 가문과 모든 문화의 하나님이신 그 분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가족적 관계를 끊고 본토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다. 아브라함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후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만큼이나 본토를 떠날 수 있던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이 속한 문화적 배경을 초월하여 모든 문화의 하나님께만 궁극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 주어진 문화 속에서 기독교는 올바른 방식으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의 근간을 문화와 사회적 배경에서 우선적으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정체성의 핵심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모든 충성의 대상을 재조정해야 한다. ‘떠남’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정체성의 필수 요소다. 오늘날의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브라함 식의 떠남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 양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의 떠남은 너무 목표 지향적이고, 너무 직선적이며,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너무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너무 초연하며(too detached),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들뢰즈(Deleuze)의 ‘유목’(nomad)과 아브라함의 ‘유목적’(nomadic) 삶을 대조해보라. 들뢰즈의 ‘유목’은 언제나 길 위에 있으면서 고정된 장소를 가지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언제나 떠나고, 언제나 도착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유목은 도달할 목적지가 없으며 출발지점도 없다. 도착지는 언제나 출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이든 인간이든 떠남을 지시할 안정적인 주체조차도 없다. 시냇물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게 떠날 뿐이다. 이에 비해 아브라함은 일상적인 삶의 흐름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부르심과 그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은 적극적인 행위자, 안정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아브라함의 떠남은 출발점(그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 있었고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떠남은 일시적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특정한 장소로부터의 떠남이다. 들뢰즈의 ‘유목’처럼 출발지와 목적지에 관한 지각이 없는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끊임없는 방랑일 뿐이다. 동시에 사방으로 흘러가는 물은 시냇물이 아니라 결국 모든 움직임이 죽은 듯 정지된 늪일 뿐이다. 들뢰즈는 인간 행위자라는 개념을 상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행위자로서 행동한다. 주체성, 의도성, 목적 지향성 없이 삶의 흐름에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의 ‘유목’으로는 악행에 저항하고 거부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당신의 관계망 안에 머물라”라는 충고로 아브라함의 떠남을 지적할 수 있다. 분리와 독립은 추구해야할 선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악으로 보는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스스로를 분리하고(“떠나”) 자신의 독립과 영광을 확보하고(“큰 민족”) 자신에게 저항하는 이들을 진압하고(“저주하리니”) 자신을 찬양하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고(“복을 내리고”) 마침내 자신의 권력을 세상 끝까지 확장하기(“땅의 모든 족속이”)를 갈망하는 남성의 전형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초월만을 강조하고, 내재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분리되고 정복하는 남성적 ‘나’의 초월성은 신적 ‘나’의 위압적 초월성에 의해 승인을 받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초월적 자아가 ‘남근적’이며 파괴적이라고 주장한다. 분리되고 폭력적이던 자아를 끌어내려서 그것을 관계망 속에 자리 잡게 하고, 그 내재성(immanence)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이다. 켈러(Keller)는, 새로움은 초월적인 부름에 응답하는 분리하는 주체들의 영웅적 역사로부터 나오지 않고, “관계의 장과 더불어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의 견해와 다르게 아브라함의 떠남은 관계성의 부인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정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근대적 주체가 아니다. 근대성에서는 ‘타자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해방’을 추구한다(Lyotard & Gruber). 반면 아브라함은 가장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묶여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유랑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라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유랑하는 초월성에 대비되는 내재적 타자가 아니다. 만약 그녀가 내재성을 상징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공통된 초월성이 가지는 내재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조상들과의 관계의 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들의 떠남은 유대 민족의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새로움, 저항, 역사는 모두 초월을 필요로 한다. 

 

버리지 않고 

 사도 바울의 시각은 민족성이라는 특수성을 벗고 다문화성이라는 보편성으로, 땅의 지역성으로부터 세계의 포괄성으로 나아갔다. 그는 유대 민족의 토양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진 특수성과 하나님의 보편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한다. 첫째,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토라(Torah)를 상대화한다(relativize).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요구하는 하나 된 인류의 가족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토라는 “한 분 하나님 뜻의 최종적이며 영구적인 표현”일 리가 없다(Wright). 여전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토라는 언약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다. 둘째, 바울은 평등을 위해 혈통을 폐기한다. 약속은 믿음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그러므로 은총에 따라 주어질 수 있다(Wright). 셋째, 바울은 이 땅의 모든 가문을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 분 안에서 하나다(갈 3:28).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에 대한 바울의 해법은 독창적이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한 분이심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인류의 평등을 뜻한다. 인류의 평등은 한 분 하나님의 축복에 모두가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음을 내포한다. 평등한 접근은 혈통에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혈통적 약속의 성취인 동시에 하나님께 접근하는 특권으로서의 혈통의 마침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탄생에 의해 민족에 속하게 되는 권리를 대체한다. 그 결과 모든 민족은 평등하게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게 되며, 그 누구도 권리에 따라 그분께 나아가지 않고 은총에 의해 나아간다.  보이어린(Boyarin)은 바울의 해법이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 근거하는 것이며 차이를 희생시키고 평등을 주장했다고 비판을 가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조상 아브라함보다도 모든 공동체적, 육체적 연관성으로부터 훨씬 더 분리되어 있으며, 초월적인 한 분 하나님께만 연결된 추상적 초월성만을 가진(남성적?) 주체가 되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평등과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이와 특수성을 섣불리 포기해 버렸으며, 그리하여 평등을 공허하고 보편성을 추상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것은 특수성의 제거로 귀결되어, “종족적 충성을 깨뜨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또한 제국주의적이며 식민주의적 관행의 씨앗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울의 보편주의는 가장 자유적이며 관용적인 형태일 때에도 강압적인 동일성 담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Boyarin).  메시아는 몸과 분리된 초월성에 바탕을 두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육체가 고통당하시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첫째, 기독교 공동체의 토대인 십자가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는 여러 다른 ‘몸들’을 한 몸으로 연합하신다. 그 연합은 그 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하나의 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자기 폐쇄적인 단일성으로 남아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열어 다른 이들이 자유로이 그 안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신 그 몸을 상징한다. 단일한 인격적 의지와 단일한 비인격적 원리나 법칙은 차이를 억압하고 흡수함으로써 통일성을 강요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메시아는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통일성을 만들어 내신다. 십자가는 다자를 위해 일자가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이다(The cross is the self-giving of the one for many). 여기서 통일성은, ‘몸들’의 특수성을 지워버리는 ‘신성한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 사이의 적대감을 무너뜨리는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결실이다. 바울의 관점에서 분리하는 벽은 ‘차이’라기보다 적대감이다. 단일한 의지를 강요하거나 단일한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으로는 적대감을 제거할 수 없다. 적의는 오직 자기 내어줌을 통해서 소멸할 수 있다. 평화는 십자가로, 그리고 피로 이루어진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 주심으로써 만들어진 공동체를 일컫는 핵심적 명칭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분화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백성을 이룬다. 몸에 새겨진 차이들은 제거되는 게 아니라 한 데 모아진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참여하는 이들의 분화된 몸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삶을 살아간다. 바울은 몸의 특수성으로부터 영혼의 보편성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분리된 몸들로부터 상호 연관된 몸들의 공동체, 즉 다수의 개별적인 지체들을 지닌 성령 안에 있는 한 몸으로 움직였다.  성령은 몸에 새겨진 차이를 지워버리시지 않으며,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한 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성령이 지워 버리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고착화된 ‘차이’와 ‘사회적 역할’사이의 상관관계다. 바울 식의 보편주의는 각 문화는 그 자체의 문화적 특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바울은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더 광범위한 가족 안에서 모두가 정당성을 얻게 하기 위해, 각 문화에서 궁극성을 제거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화로부터 ‘떠나야’ 한다. ‘떠남’은 ‘본토’와 ‘친척’을 버려야 했던 아브라함과 달리 자신의 문화를 버리는 것이 아니며 더 이상 공간적 범주도 아니다. 이제 그것은 한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적 공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참된 기독교적 ‘떠남’에는 단지 거리두기의 노력과 투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누리고 있는 안식과 기쁨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부름에 응답할 때, 한쪽 발을 자신의 문화 바깥에 두지만 다른 한쪽 발은 그 안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한다. 그들은 거리를 두지만 거기에 속해 있다. 그들의 차이는 문화에 내재(internal)한다. 그들의 내면성-그들의 내재성(internality)과 소속되기- 때문에 몸에 새겨진 특수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의 차이-그들의 초월성과 거리두기- 때문에 보편성이 긍정된다.  거리두기와 소속되기는 필수적이다. 거리두기 없는 소속은 파괴적이다.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 자신의 배타적 정체성을 주장한다면 배제의 욕망이 생길 수 있다. 반면에 소속 없는 거리두기는 고립적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면 거꾸로 타자의 정체성에 의존하는 덫에 걸릴 수 있다(반의존성:counter-dependence). 고립적인 ‘소속 없는 거리두기’는 파괴적인 ‘거리두기 없는 소속’으로 변질된다. 문화에 대한 거리두기는 그 문화로부터의 도피로 퇴보해서는 안 되고, 문화 안에서의 생활 방식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에 의해 이루어진, 아브라함이 보여줬던 원초적 혁명을 창조적으로 재전용(re-appropriation)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약속(창 12:1)을 바울은 세상을 상속할 것이라는 약속(롬 4:13)으로 고쳐 말한다(Wright). 바울이 가능하게 한 것은 버리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떠남은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자리 잡은 다양한 민족의 수많은 몸 안에서 실천된다. 

 

 문화, 보편성, 공교회성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하신 미래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치기 때문에 자신의 문화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둔다. 만약 그리스도인은 버리지 않고 떠날 수 있으며, 그들의 거리두기는 언제나 소속을 포함하고, 그들의 소속은 언제나 거리두기의 양상을 띤다고 가정해보자. 이 거리두기는 두 가지 중요한 공헌을 한다.   첫째, 거리두기는 우리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지듯이, 종국에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폐적인 세상을 깨뜨리신다. 성령은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인격’(catholic personality), 즉 종말론적 새 창조의 개인적인 소우주가 되어 가도록 하신다. 보편적 인격이란 자아에 갇혀 있지 않고 타자성에 의해 더 풍성해진 인격으로, 다수의 타자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그 안에 반영된 인격이다. 보편적 인격은 보편적 공동체(catholic community)를 요구한다. 모든 교회가 함께 하나의 전 세계적 공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처럼, 주어진 문화 속에 자리 잡은 각각의 지역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 공동체다. 보편적 인격과 보편적 공동체는 보편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암시한다.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문화로부터 거리를 두게 될 때, 우리는 자폐적인 통일체로서 자신의 문화에 갇혀 있지 않고, 문화적 유동성(fluidity)과 혼종성(hybridity)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둘째, 새 창조의 성령에 의해 만들어진 거리두기는 모든 문화 속의 악에 대해 심판을 요구한다. 보편적 인격이 모든 타자성을 통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안에는 평화로운 종합을 가로막는 융해하기 힘든 관점들이 존재한다(Mouw). 살인과 강간, 파괴, 국가주의적 우상, ‘인종 청소’와 같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악한 행위들을 구별하고 심판해야 한다. 심판은 자신의 자아와 문화 안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성령이 만들어 내시는 거리는 자신과 문화 안의 집단적 정체성들이 빚어내는 자기기만, 불의, 파괴성에 눈뜨게 하고 모순을 발견하게 한다. 참된 보편적 인격은 복음적 인격, 즉 복음에 의해 회개에 이르고, 복음에 의해 형성되며, 세계의 변혁에 참여하는 인격이어야 한다.  자아와 타자 안의 거짓, 불의, 폭력에 맞서는 싸움은 거리두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문화 안에서 고착화된 상식과 편견의 늪에 빠지지 않고, 한쪽 발은 그들 자신의 문화에, 또 다른 쪽 발은 하나님의 미래에 디디고 있어야 한다. 악에 대한 싸움에서 복음적 인격은 공교회적 공동체(ecumenical community)를 필요로 한다. 자신이 속한 문화와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그리스도의 공교회적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우선시해야 한다. 우리 문화가 우리 신앙을 전복했음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를 심판할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다른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 문화의 목소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갈등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중개자가 아니라 전쟁의 공모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로부터 스스로 거리두기가 어려우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미래에 기초하여 갈등을 풀어나가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문화의 지배적 견해를 되풀이하고 그 관습을 모방할 때가 많다. 문화에 내재된 고유한 편견의 울타리를 넘고 반대편에 있는 갈등 당사자들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2. 배제

 

 타자를 제거하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는 배제의 가장 강력한 은유다. 이 장에서 다룰 배제는 ‘저기 그들’인 타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여기 우리’인 자아에 관한 것이다. ‘인종 청소’와 같이 집단이나 다른 공동체로부터의 배제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자리 잡은 자아로부터의 배제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포함의 미심쩍은 승리

 ‘인종 청소’에 대한 서구의 전형적인 반응은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비근대적’이고 ‘비서구적’인 것으로 도덕적이지도 않고, 문명화되지 않은 ‘비유럽적인 야만인’에게나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근대는 배제하기보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포함이 진보를 이룬 역사였다. 근대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럽의 획기적인 전환이기는 하지만, 유럽이 비유럽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포함의 승리’라는 근대의 이야기에 모순이 있다. 근대성은 비유럽의 타자를 야만적으로 정복하고 식민화하고 노예로 삼았던 과거를 문명의 빛의 확산이라는 신화로 정당화한다. 근대성을 단순히 포함의 진보로만 여겨선 곤란하다. 포함의 진보를 가져온 것은 끈질긴 배제의 실행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포함의 역사 이면은 배제로 점철되어 있다. ‘인종 청소’라는 은유로 표현되는 배제는, ‘지금’의 문명에 반대되는 ‘그때의’ 야만성, ‘여기’의 선함에 반대되는 ‘저기’의 악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배제는 문명 안의 야만성이며, 선한 것들 사이의 악이고, 자아의 벽 안에 있는 타자에 대한 범죄다.  배제에 대항하여 포함의 프로그램을 계속한다면 나아지리란 순진한 낙관과 달리, 배제는 ‘선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이자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성인 경우가 많다. 니체(Nietzsche)는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악의 부재를 실현하기 위해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폭로했다. 푸코(Foucault)는 문명사회에서 “정상화의 권력”은 이분법적 구분(광인/정상인, 비정상/정상)과 강제적 배치(밖/안)라는 이중적 억압전략을 통해 배제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적 자아는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니체와 푸코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도덕적’이며 ‘문명화’된 자아가 타자를 ‘비도덕적’이며 ‘야만적’으로 인식하는 배제의 체제에 많은 경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경계를 혐오한다. 억압적인 경계를 규정짓지 않고 허물어 버린다면 맞서 싸우는 대상은 알 수 있지만 맞서 싸우는 목적을 모를 수 있다. 범주와 규범적 기준 없이 배제를 야기하는 정체성이나 관행을 구별할 수 없다. ‘경계 없음’이란 ‘지능을 갖춘 행위자가 없음’을 뜻할 뿐 아니라 이것은 결국 ‘생명 없음’을 의미한다. 경계의 부재는 비질서를 만들어 내며, 비질서는 배제의 종식이 아니라 생명의 종식이다. 일관되게 포함을 추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경계 없는 혼돈과 경계가 존재하는 억압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포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지닌 내적 모순은 배제에 대한 투쟁이 두 가지 위험에 봉착했음을 드러낸다. 배제의 관행에 대한 반대가 새로운 형태의 배제를 만들어낸다. 즉, 우리의 ‘도덕적’이고 ‘문명화’하고자 하는 열의가 우리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볼 수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억압적 경계를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경계를 소멸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배제의 억압적 경계에 대한 구분이 사라지고, 배제에 대한 투쟁은 스스로 붕괴되어 비질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배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배제를 악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판단과 관행 속에 있는 배타적 경향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구별, 배제, 판단 

 구별(differentiation)과 배제(exclusion)을 분간하는 것은 배제와 판단(judgement) 사이를 구분하게 하고 배제하지 않는 주체의 모습을 알게 해준다. 구별이란 상호의존의 패턴을 낳는 ‘분리하고 결합하는’ 창조적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타자성을 유지한 채 서로가 연결된 상호 의존의 형식 속에 있는 것으로 배타적이지 않다. 인간이 가진 정체성은 분리됨의 표시이며 하나의 장벽이 되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 다리가 되어 준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구별 짓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한 결과다. 배제(exclusion)란 ‘분리’를 지워버리며 ‘결합’을 거스르는 요소이다. 이것은 상호의존을 벗어나 극단적인 독립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태도이며 상대방을 추방, 동화, 종속시켜야할 열등한 대상으로 보는 폭력과 유기(내버려 두는 무관심)의 모습으로 일어난다. 구별의 창조적인 과정의 일부인 경계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경계 없이 개별적인 정체성도 존재할 수 없으며, 개별적인 정체성이 없으면 타자와의 관계도 존재할 수 없다. 구별은 긍정적인 선이며, 배제는 악이다. 구별과 배제를 구분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로티(Rorty)가 신념과 욕망이 우연적이라 주장한 것과 달리 시간과 변화에 의해 궁극적으로 우연적이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변화될 수 없는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당한 ‘구별’과 정당하지 않은 ‘배제’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며 적절하게 판단하고, 배제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판단이 흐려지는 성향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식해야한다. 

 

자아와 그 중심

 배타적이지 않은 판단을 내리는 방법은 자아의 중심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믿음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옛 자아의 중심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것이다. 자아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이다. 중심을 재설정하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고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중심은 ‘중심을 벗어난 중심’(de-centered center)으로 자아를 열어놓고, 타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타자를 수용하게 한다. 이 중심으로 배제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며 배제에 맞서는 싸움을 해야 한다. 배제에 대한 저항은 포용의 실천이다. 

 

배제의 구조와 원동력 

 죄는 배제의 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은 죄라고 이름 붙여진 행동을 재명명(re-naming)하시고 죄인과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재창조(re-making)하셨다. 예수님은 정결하지 않은 음식은 없다고 말씀하셨고, 여성들이 지키고 있는 정결 규례에서 ‘부정하다’는 경계를 제거하셨다. 이러한 재명명을 통해 사회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는 ‘부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이분법의 논리를 무력하게 하셨고 왜곡된 배제의 체계를 폐기하셨다. 부정한 대상을 정결하게 하는 재창조를 통해 생명을 구속하고 회복시키셨다. 예수님은 재명명과 재창조의 방법으로 배제의 세상을 정죄하셨다. 악의 원천은 사람의 외부적인 요소에 있지 않고, 내적인 마음에 있다. 거짓으로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은 죄의 핵심적인 모습으로 마음에서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세상에서 타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원하고 배제하고 격리하는 논리이며 전체주의적이므로 위험하다.  배제의 첫째의 유형은 살인과 추방으로 나타나는 제거에 의한 배제로 동화에 의한 배제도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유형은 지배에 의한 배제로 타자에게 열등한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하여 그들을 예속시키며 착취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세 번째 형태는 유기에 의한 배제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이해관계와 같이 합목적적이지 않은 대상에 대한 무관심과 격리로 나타난다. 배제의 관행이 작동하는 밑바탕에는 언어와 인식작용이 있다. 타자를 비하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는 타자와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이러한 왜곡어법은 배제하지 않는 것을 도덕적으로 나쁘게 보이게 하여 배제를 정당화하며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고 심지어 도덕적 의무로 인식하게 한다. 배제의 언어와 인식작용은 무지에서 비롯된 원인이 아니라 고의적인 오해다. 타자에 대한 명백한 것을 인식하기를 거부하고 이득이 되는 것을 알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배제는 증오와 무관심과 같은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동반한다. 무관심이 초래하는 폐해는 증오가 초래하는 폐해보다 크다. 증오와 무관심의 원인은 개인적, 집단적 증오의 투사이며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낯설음에 불편함을 느끼게 때문에 타자를 박해한다. 이러한 배제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무죄하며 강하다는 환영을 음미한다. 또한 우리는 기존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불안하게 하고, 상징적인 문화적 지도를 교란하는 모든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배제하기도 한다. 타자를 있지 말아야 할 내적, 외적 ‘오물’로서 느끼는 것이다. 배제에 관한 두 가지 설명과 더불어 우리는 단지 현재의 상태를 좋아하거나 우리의 모습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타자가 가진 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배제하기도 한다. 

 

조작된 순수

 유죄한 가해자와 무죄한 피해자로 나뉘는 게 보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죄한 사람과 무죄한 사람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어제의 희생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오늘의 가해자가 내일의 희생자가 되는 기나긴 범죄의 역사 속에 있다. 폭력의 세상 속에서 폭력의 본성 자체는 가해자뿐만 아니라 희생자가 방어적인 반응의 형태로 폭력적인 행동을 촉발하게 만든다. 순전히 무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서로 잘못을 범하고 피해를 입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비극적이며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죄의 연대성 안에 갇혀 있다. 모두가 가해자이며 모두가 피해자이다. 그러나 ‘죄안의 연대’(solidarity in sin)는 죄의 동등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모든 죄는 동등하지 않으며 죄책에는 불균등성이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가 모두 무죄하지 않으며 제3자(방관자나 활동가) 역시 무죄하지 않다. 제3자 역시 갈등 속에서 자신의 투쟁과 이익, 기대를 투사하거나 분쟁과 갈등의 현장을 내버려 둠으로써 유기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자신은 선하다는 ‘순수’(purity)와 타자는 악하다는 ‘타락’(corruption)의 이분법적 논리로 구분하려는 행위 자체가 타락을 수반한다. 그 누구도 무죄함이란 없다. 죄안의 연대성을 인정할 때 얻는 이득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자기 의를 깨뜨려 주며, 우리가 임의로 정해 놓은 선의 이름으로 악을 영속화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우리는 ‘순수, 타락’의 양 극단의 입장에서 자아와 타자를 바라보는 배타적인 세상에 맞서 죄를 폭로해야 한다. 받을 자격 없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경륜이 도덕적 보상의 경륜보다 우월함(the economy of undeserved grace has primacy over the economy of moral deserts)을 깨달아 선악이 엇갈리고 교차하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두고 화해의 사역을 추진해야 한다.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 그들을 무죄한 사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을 행하는 사람임을 알 때조차도 그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배제의 힘

 사람들의 행동이 사회적 환경과 과거에 입은 피해에 의해 결정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세상은 가해자들이 원하는 세상이다. 우리의 의사 결정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외적 제약, 압력, 속박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윙크(Wink)에 따르면 악의 힘은 제도적인 동시에 영적인 초인격적 체제의 작동 방식 전반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제도적, 공동체적 문화의 배타적인 분위기 아래서 ‘배경으로 흐르는 악의 불협화음’이 연주된다. 이것은 일상적인 강도가 낮은 악이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국면으로 전환되어 ‘인종 청소’와 같은 거대한 악으로 변모할 수 있다. 공적 여론을 결정하는 공동체와 사람들의 허위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이 잔혹극을 빚어낸다. 악이 행복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행복에 관한 거짓말이 분명한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현실을 형성할 수 있다. 악의 능력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왜곡된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도착된(perverse) 진리에 있다.  우리는 이토록 배제의 체제에 순응하며, 심지어 이 체제의 열정적인 포로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악의 분위기에 의해 우리의 자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악은 우리의 영혼에 교묘히 파고들어, 악에 맞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세운 바로 그 요새에서부터 우리를 지배한다. 개별적인 악은 우리가 미워하는 바를 행하게 만들고 철저히 식민지화한다. 왜 우리는 식민지화하는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아의 구조 안에 배제의 논리와 공명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몰트만(Moltmann)은 그것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에서 찾았다.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자아 구조 자체에 정체성을 향한 욕망이 새겨져 있다고 보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자아의 경향이라고 설명한다.  정체성의 형성과 절충은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상호작용하는 사회 속에서 재화의 희소성으로 인해 다수의 행위자들의 주장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자기 경계에 대한 위협이 발생하여 자아의 건전한 자기주장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건전한 것이 되려면, 반드시 타자가 자아 안에 거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타자를 통합시키고 싶어 하고 폭력의 수단을 쓴다.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나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대신, 내가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타자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타자가 자아의 구조에 위협이 된다는 것과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에 대립하는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배제가 왜 이토록 쉬운지를 설명해준다(Gestrich).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의 역동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분리는, 타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정체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배제로 변질된다. 정체성에 대한 욕망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죄에 희생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타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자아를 배제하는 것은 자아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타자로 하여금 배제의 죄를 범하게 한다.  배제의 체제와 자아의 배제적인 성향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성령은 자아의 요새로 들어가셔서 자기를 내어 주는 자아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심으로써, 그것의 중심을 해체하시고 그 의지를 자유롭게 하셔서 성령의 힘인 포용으로 배제의 힘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신다. 성령은 자아가 무력함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조, 문화, 자아 안에서 배제의 체제와 맞서 싸울 수 있게 한다. 

 

가인의 공격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배제의 구조와 역동, 힘을 잘 설명해준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가인은 ‘그들’인 동시에 ‘우리’다. 제물을 바칠 시기가 되어 형인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을 바쳤지만 가난한 아벨은 ‘가장 좋은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아시고 아벨의 제물을 존중하셨다. 가인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아벨 모두를 자신의 삶에서 배제했다. 끝내 궁극적인 배제 행위인 살인을 저질렀다. 가인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아벨과의 관계 속에서 구축되었다. 그는 아벨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대했다. 하나님이 ‘아벨’을 ‘더 낫다’고 선언하셨을 때, 가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하거나 아벨을 제거해야 했다. 도착된 자아가 그 거짓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벨을 배제한 것이다. 죄를 범하는 것은 악한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기를 거부하고 죄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그는 자신의 배제 행위를 통해 자신을 모든 관계로부터 배제시켰다. 소속되기는 불가능해졌고 거리만 남았다. 이 이야기의 위대함은, 가해자에 대한 분명한 심판과 ‘무고한’ 희생자의 분노로부터 그를 보호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가차 없이 그를 정죄하는 동시에, 은혜롭게 그에게 보호의 표지를 주셨다. 구별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은총이다. 하나님은 가인 자신이 시작한 배제의 순환에 가인을 내어 주지 않으셨다. 

 

 

3. 포용

 

 분쟁과 갈등의 상황에서 ‘우리 대 그들’의 배타적 대립이 일어난다. 사회적 세계의 다양한 구성 요소가 가져다주는 풍부함은 사라지고 노골적인 배제의 양극단이 나타난다. 갈등의 당사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배제로 이어지는 이러한 양극성(polarities)의 논리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일까? 적대감으로 위협받는 세상에서 그것을 극복할만한 의지와 용기, 상상력이 뒷받침된다면 노골적인 양극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양극성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 자기 내어줌을 실천하고, 그런 사랑의 맥락에서 진리와 정의를 위한 싸움에 동참할 때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 이 장에서 나는 ‘우리 대 그들’ 의 배타적 양극성을 극복하고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이장의 핵심 논제는, 하나님이 적대적인 인류를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받아들이신 일이 인간이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이 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장의 중심이 되는 네 개의 단락을 통해, 배제에서 포용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네 가지 계기라 할 수 있는 ‘회개’, ‘용서’,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기억의 치유’를 분석할 것이다. 그런 다음 성공적인 포용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를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용의 정치적 의미를 제시한 후 포용 이야기인 탕자 이야기(눅 15:11-32)를 신학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이 장을 마무리할 것이다. 

 

해방의 모호성

 근래에 사회적 현실을 설명하는 신학적 성찰의 주요한 범주는 ‘억압’과 ‘해방’(liberation)이라는 상호 연관된 개념이었다. 이 범주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지지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존엄성과 정의는 지난 3세기 동안 가장 강력한 사회적 이념이었던 자유의 관점에서 해석된다(Taylor). 근대성의 틀 아래에서 자유의 관념을 중심으로 삼아 사회적 삶을 조직하는 두 가지 주요한 비전은 자유주의적 기획과 사회주의적 기획이다. 전자가 말하는 자유라는 개념은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성을 계발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가장 신성한 선이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서 다른 시민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존중된다. 이 양도할 수 없는 자유가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 부인되거나 주류 문화에 의해 탄압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억압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행하거나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굴레가 해체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말한다. 후자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시작된 기획으로 소극적인 개념의 자유를 넘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곧 자유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비참한 가난과 문맹 속에서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당하는 억압을 대가로 점점 부유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억압이라고 부른다. 무력함을 영속화하는 구조와 개인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립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갖도록 해주는 구조로 대체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자유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세워진 모든 사회적 프로젝트는 ‘억압’과 ‘해방’이라는 안정적인 짝을 통해 작동되는 경향이 있다. 억압은 부정적인 것이며, 해방은 그것의 거부이고, 자유는 이를 통해 얻는 긍정적인 결과다. 수많은 구체적인 갈등 상황에 억압과 해방의 범주를 적용해본다면 당사자들의 상황을 도식화하기에 안성맞춤이 될지도 모른다. 서로가 각각 타자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며, 모두 저마다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억압과 해방이라는 도식을 모조리 포기할 수는 없다. 폭력에 고통당하는 압제의 실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해방이라는 범주는 평화를 추구하기보다 싸우기에 적합한 도식이다. 억압과 해방의 범주로만 사회적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심히 우려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갈등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순수 대 타락’ 으로 나누기 힘들만큼 대단히 혼란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 얽히고설킨 개인들의 역사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과 비난받을만한 사람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쪽이 더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더 약해서 잔인해질 기회가 더 적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 ‘억압/해방’의 도식은 승리한 쪽에 속한 압제자의 해방만을 가져온다. 희생자가 해방될 때 그들은 불의를 행했던 과거의 압제자와 역할이 바뀌었을 뿐, 이제는 새로운 압제자가 되어 폭력을 자행한다. ‘억압/해방’의 범주는 갈등의 양상에서 화해를 이루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 ‘억압받는 사람/억압하는 사람’을 우리의 사회적 참여를 규정하는 전반적인 도식으로 삼는 태도에 대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사회적 목표는 자유가 아닌 사랑이다(Gutiérrez). 오히려 자유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한 과정일 뿐이다. 자유란 곧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바로 순전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Moltmann). 그러나 자유보다 사랑을 우선시한다고 해서 압제받고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는 프로젝트를 포기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해방 프로젝트를 변화시키는 것, 사회적 행위자들의 관계를 이데올로기화하고 그들의 반목을 영속화하는 경향으로부터 그 프로젝트를 해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거대 내러티브여, 안녕(Adieu)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자유에 대해 우선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보편적 해방의 추구를 비판한다. ‘거대 관념’(grand idea)이나 ‘거대 내러티브’(grand narrative)는 자유를 보편적 역사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역사의 방향이 그렇게 흐른다면 보편적이고 최종적인 해방이 실현될 것이라 약속한다. 근대성이 ‘거대 내러티브’ 안에 포함된 자유의 약속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이야기가 성공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Lyotard). 첫째, 모든 거대 내러티브는 실패했다. 지배적인 거대 내러티브인 자본주의는 약속과 달리 빈곤과 부의 양극화를 낳았고, 다른 거대 내러티브인 사회주의는 국가적 통제와 관리를 통해 평등사회를 꿈꾸었지만 권력의 집중과 독점의 폐해를 보여주었다. 둘째, 거대 내러티브들은 보편적 해방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특수한 관점으로 기술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인권 선언서는 시민의 보편적 이상을 선언하지만 특정한 문화적 실체의 이름으로(“우리 프랑스 국민들은…”) 공포된다(Lyotard).  리오타르는 거대 내러티브가 실패한 주된 이유는 그것이 내포하는 보편성(universality)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들과 하위문화들―“언어 놀이들”(language games))―은 본래부터 다원적이며 이질적이고 비교 불가능하다. 거대 내러티브는 이들 사이에 최종적 화해를 달성하려고 하며, 따라서 작은 내러티브들인 “언어 놀이들”의 풍성함을 억압하고 단일한 틀에 끼워 맞추려 한다. 언어 놀이들을 “전체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보편 주의적 망상일 뿐이며, 그 끔찍한 대가는 공포에 의한 지배다(Lyotard). 리오타르는 정의의 이름으로 거대 내러티브의 전체성에 맞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각각의 언어놀이들이 지닌 이질성의 자율을 인정해야 한다는 리오타르의 호소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의 주장은 보편적이지 않은 정의라는 이름을 표방하지만, 자유라는 계몽주의의 거대 내러티브와 대단히 비슷해 보인다. 모든 해방의 거대 내러티브를 지워 버리고자 했던 리오타르는 결국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기획을 적당히 결합한 것처럼 보이는 ‘반(反)거대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그쳤다. 리오타르의 해방 관념을 둘러싼 더 심각한 문제는 수많은 언어놀이들 중에서 어떤 것이 타당한 것인지 판별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없다는 것이다(Habermas). 우리는 “사회가 이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아무런 ‘이론적’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Rorty). 논증으로는 차이를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싸움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싸움을 “놀이”로 해석하며, 모든 놀이는 “평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규칙을 바탕에 둔다. 하지만 리오타르의 뜻과 달리, “평화롭게” 놀이하는 것은 불의를 영속화하고 강자가 만들어 놓은 상황을 찬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리오타르는 거대 내러티브가 작은 내러티브에 가한 폭력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결국 크고 작은 독재자들이 그들의 수많은 희생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막을 수단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해방이라는 거대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난 후 거꾸로 된 해방, 즉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해방이 그 추한 머리를 들었다.  체계적인 전체화를 통해 최종적 화해를 이루려는 태도가 지닌 문제점을 폭로한 점에서 리오타르는 옳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과 달리 언어놀이의 비교불가능성은 보편적이지 않다. 비교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지역적·임시적·부분적이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하나의 공통된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 놀이는 침투성이 있으며 그들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다(Reese-Schäfer).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가로막는 불편한 사실은 새로운 이해와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또 새로운 갈등과 불일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화해는 우리의 어떤 내러티브로도 실현할 수 없고 순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올바른 물음은, 어떻게 최종적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 화해의 부재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자원이 필요한가이다. 해방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으로부터 우리는, 억압에 맞서는 투쟁에 동참해야 하지만 최종적 화해를 이루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억압을 영속화할 뿐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해방 프로젝트가 지닌 내재적 한계(해방의 모호성)를 통해 우리는, 억압에 맞서는 투쟁을 할 때 ‘압제받는 이들과 압제하는 이들 사이의 화해’라는 비전을 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투쟁은 ‘역할이 바뀐 불의’로 귀결될 것이다. 근대적 해방 프로젝트와 그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은, 책임 있는 신학이라면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가운데 최종적이지 않은 화해 추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최종적 화해의 프로젝트가 명백히 잘못되었다면, 최종적 화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 ‘새로운 피조물’ ‘새 하늘’과 같은 기독교적 은유는 보편적이며 영원한 평화와 행복―샬롬―을 내포한다. 최종적 화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여기서 최종적 화해에 관한 세 가지 간단한 단서만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최종적 화해는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둘째, 그것은 묵시적 파국(apocalyptic end)이 아니라 이 세계의 종말론적인 새로운 시작이다(Moltmann). 셋째, 최종적 화해는 완벽한 사랑이신 하나님께 의존하기 때문에 자폐적 ‘전체성’이 아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적이지 않은’ 최종적 화해에 대한 소망을 배경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적대감과 억압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평화를 위해 싸운다.  나는 여기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다스림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 얻어 낸 자원을 활용해, 되돌려질 수 없는 화해라는 전망에 기초한 최종적이지 않은 화해를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a non-final reconciliation based on a vision of reconciliation that cannot be undone)을 옹호하고자 한다. 나는 자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야기에 이끌려 타자를 자신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타자의 타자성에 비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정(readjustment)할 준비가 되어 있기만 하다면, 타자와의 화해에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청결한 마음의 정치

 갈등의 토양에서 증오와 복수는 재생산된다. 분쟁 지역에 속한 많은 어린이들은 ‘지하드’ ‘전쟁’ ‘십자군’ ‘복수’ ‘증오’와 같은 말을 이름에 새기고 삶의 경험 속에서 엮으며 자라고 있다.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삶에 새겨진 증오를 주의 깊게 지워내고 폭력적인 관행을 제거해야 한다.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억압이 만연한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예수님은 억압당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희망을 밝히셨으며, 압제자들을 향해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사람들의 회개의 필요성을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삼으셨다. 회개란 심층적인 도덕적·종교적 의미를 지닌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압제자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희생자들에게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선포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특징은 억압받는 이들에게 주신 소망과 그들에게 요구하신 급진적인 변화 사이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왜 회개하라는 부르심의 대상이 압제자들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을 포함하는가? 왜 그들의 죄와 용서를 말씀하시는가?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물질적·심리적 도움도 필요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비인간적인, 증오로부터 해방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이 회개해야 하는 까닭은 그들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전망에 걸맞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회개의 대상과 죄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시지는 않으셨다. 여기서 죄란 산상수훈에서 설명하신 제자도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Gnilka). 그분의 메시지에 나온 두 가지 두드러진 주제인 ‘부’와 ‘폭력’에 대한 가르침은 회개의 사회적 연관성을 잘 예증해준다. 부와 원수에 대한 미움에 몰두하는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회개해야 할 죄다. 억압에 무력하게 짓밟힌 희생자들의 회개해야할 것은 시기와 적대감이다. 시기와 적대감은 지배자들의 폭력적인 관행을 지배적인 가치와 관행으로 바꾸어 놓는다. 지배적 가치와 관행은 그 아래서 고통당하는 이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그 힘이 깨어질 때만 바뀔 수 있다. 회개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죄된 가치와 관행의 유혹하는 힘에 저항하고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희생자가 회개한다는 것은,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는 조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가치, 싸우는 수단을 압제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회개는 희생자에게 능력을 주고 압제자에게서 능력을 빼앗는다. 회개는 희생자들이 압제자들을 모방하거나 비인간화하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희생자들을 ‘인간화’한다. 회개는 결코 지배 질서에 대한 묵인이 아니며, 옛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라는 피난처를 만들어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옛 세계의 변혁을 가능하게 한다.  희생자들은 가해자가 자신의 영혼에 입힌 상처의 결과에 대해 회개할 필요가 있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자주 압제자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스스로 원수의 거울 이미지(mirror image)가 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그런 반응에 대해 책임이 없다거나, 그런 반응이 해방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반응에 대해 변명하고자 했던 마음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이런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으면, 희생자의 온전한 인간적 존엄성은 회복될 수 없으며 필요한 사회적 변화 역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폭력이 치욕과 증오를 만들어내는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자아를 형성할 자유라는 내적 영역은 한 사람의 인간성의 성역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증오가 솟구쳐 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을지 몰라도, 희생자는 자신을 위해 증오 키우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오늘 희생자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그들이 가해자가 되어 자기기만 속에 스스로 희생당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행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고 할 것이다(Lamb). 물론 지배질서가 변하려면 특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보다 훨씬 많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통찰력이 보여주듯이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도 필요하다. 그 뿐 아니라 강고한 지배적 가치와 관행은 특권을 가진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깨져야 한다. 복음서는, 압제자들에게 회개가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는 욕망을 정화하고 길을 바로 잡는 것 이상을, 심지어는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것 이상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압제자들의 진정한 회개는 과다한 보상이라는 ‘부당함’(injustice)으로 이어지며, 이는 애초에 일으킨 부당함을 상쇄하고자 하는 시도다. 여기서 제시한 관점에 따르면, 희생자의 죄인 됨과 회개에 관한 이야기는, 희생자를 탓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희생자가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의해 형성되고 따라서 참된 사회적 변혁의 기획에 동참할 능력을 갖춘 사회적 행위자를 만들어 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회 구성원의 성품이 중요하다는 점은 예수님의 신학적 주장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교훈이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자신의 마음의 정결함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참된 계시적 의미를 지닌 말은 압제하는 이와 압제받는 이들 모두가 회개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주장이다. 예수님은 “압제받는 이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시는 마음과, 압제받는 이들도 회개해야 한다는 인식을 모두 가지고 계셨다. 그분이 염두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해 기본적인 태도와 행위를 급진적으로 재정향(re-orientation)하는 것이었다. ‘청결한 마음의 정치’(politics of the pure heart)가 없다면 모든 해방의 정치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용서의 실천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을 정당화하고, 또 타자를 공격한다. 참된 회개는 어려운 것으로 기독교 전통에서는 회개를 인간의 가능성에서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짓는다(공동기도서). 우리가 가해자이든 희생자이든 참된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특징짓는 크고 작은 악의 그물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끌어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면서 남을 비난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회개의 걸음을 내딛는다면, 화해로 이르는 여정에서 이미 먼 길을 걸어간 셈이다. 그 다음 단계는 용서다1). 1) 나의 주장은 회개와 용서 사이에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먼저 회개를 하고 나서 용서해주거나 용서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신학적으로는 용서가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회개가 일어나기 전에 용서가 이미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Kyle A.Pasewark). 여기서 나의 관심은 화해의 과정 각 단계의 순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환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단계’라는 용서는 쉽지 않다. 희생자는 용서하기 보다는 복수심에 사로잡히거나 냉정하게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어 가해자가 용서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용서는 “받은 대로 갚아 주라는 식의 도덕률”에대한 도전이다(Smedes).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 상호 배제라는 자동 작용에 갇혀, 용서하거나 회개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미움이라는 악한 교류 속에서 하나가 된다. 복수의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폭력은 복수를 지속시키며, 복수는 폭력을 지속시킨다(Shriver). 끊임없이 돌아가는 복수의 회오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회적 현실의 구조 자체와 얽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편파성의 곤경’(the predicament of partiality)에 있다. 사회적 행위자들의 관점이 서로 불일치한다. 즉, 갈등 상황에 갇혀 있는 양측은 자신들이 취하는 행동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동의에 이를 수가 없다. 한 쪽이 말하는 정의는 다른 쪽에서 실질적인 불의가 될 수도 있으므로, ‘정의로운’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렌트(Arendt)가 말한 ‘불가역성의 곤경’(the predicament of irreversibility)에 있다. 이미 한 행동은 시간이 흐름 속에서 취소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 하나님조차도 결과를 바꾸어 놓으실 수 없다. 아렌트는 불가역성이라는 곤경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나는 용서가 편파성의 곤경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반작용이 아닌”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Arendt)로서의 용서는, 기억에 남은 과거가 지닌 힘을 깨뜨리고 정의에 대한 확신에 찬 주장들을 초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의 회오리가 멈추게 만든다. 이것이 용서의 사회적 의미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억압이라는 불의에 대해서는, 복수라는 모방적 불의가 아니라 용서라는 창의적 ‘불의’로 맞서 싸워야 한다.  복수와 용서의 틀을 대신하여 정의에 기댄다면 어떨까? 정의는 원래의 상태를 정확히 회복시켜 줄 수 없을뿐더러 엄격한 복원을 추구하는 정의의 틀에서는 화해가 불가능하다. 그러한 정의를 추구할 때 오히려 갈등은 심화되고 ‘악행을 향한 충동’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정의를 대체하지 않는다. 용서는 단순히 희생자의 분노를 배출하는 행위도 아니고, 가해자의 변화나 잘못의 시정을 요구하지 않은 채 그저 뉘우치는 가해자의 비통한 마음을 달래는 행위도 아니다. 반대로, 모든 용서의 행위는 정의를 드높인다. 용서는 정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용서받고 기꺼이 용서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정의를 불의로 왜곡시키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치열하게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  저주 시편은 분노의 물길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을 허락하되, 예전적(ritual) 기도라는 튼튼한 구조를 통해 흐르게 한다(Barth). 저주 시편은 복수의 노예가 되는 데서 벗어나 용서의 자유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꾸밈없는 분노를 꺼내 놓음으로써, 불의한 적과 복수심에 불타는 자신을, 정의를 사랑하시며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게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빛 아래서는 미움이 물러나고 용서라는 기적의 씨앗이 심겨진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원수를 인류공동체로부터 배제함과 동시에 나 자신도 죄인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중적인 배제를 극복하지 않으면―원수를 기괴한 비인간성의 영역으로부터 공유된 인간성의 영역으로, 자신을 교만한 무죄함의 영역으로부터 공통된 죄인의 영역으로 옮겨 놓지 않으면―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의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물 수 없다.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영원히 승리할 수 없음을 안다면, 우리는 가해자의 인간성을 재발견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 낼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죄보다 크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인됨을 재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에 대한 우리의 분노는 용서로 바뀌며, 용서는 다시 모두를 위한 정의를 찾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정말로 용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의로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메아리다. 하나님의 용서만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서다. 왜냐하면, 우리도 용서를 해야 하지만,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용서하거나 계속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막 2:7) 용어 때문에 회개와 용서가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행동이라고 잘못 생각해서도 안 된다. 

 

타자를 위한 공간: 십자가, 삼위일체, 성만찬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의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동시에 드러내는 궁극적인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자신의 몸을 가해자를 위한 용서의 기도로 바치셨던 사건이다. 행동의 불가역성과 판단의 편파성을 벗어나는 길은 용서라는 능동적 고난에 달려 있다. 용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용서는 배제와 포용 사이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배제가 만든 상처를 치유하며 적대감의 분리하는 담을 허문다. 그러나 용서를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남아 있다. 서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직 평화가 아니다. 평화란 단순히 접촉의 부재에 의해 지탱되는 적대감의 부재를 훨씬 넘어서며, 전에는 원수였던 사람들 사이의 사귐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용서하는 것을 넘어 그런 사귐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십자가의 핵심에는, 타자가 적으로 남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자신 안에 가해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그리스도의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그리스도와 죄를 범한 타자 사이의 관계의 절정인 포옹에 이르는 통로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는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해 두고 원수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신다. 십자가의 약함과 순진함은 “적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능함”(Nietzsche)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적대감의 결과들을 거부하는, 적대감을 향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폭력의 세상에서 십자가는 여전히 걸림돌이다. 십자가는 십자가의 신학보다 세상에서 더 심층적으로 불편함을 일으킨다. 만약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간의 적대감을 극복하는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며 소외된 인류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드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융합이나 혼합 없이 서로 안에 함께 내재(co-inherence)하신다(perichoresis(페리코레시스), 상호 내재성(mutual interiority)). 삼위일체의 ‘위격’과 ‘관계’를 동일하게 바라보기 보다는(Ratzinger), 삼위일체를 ‘상호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편이 낫다(Moltmann). 삼위일체의 자기 폐쇄적이지 않은 정체성을 지탱해 주는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 안에’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인류는 하나님께 원수가 된 사랑받는 타자다. 하나님이 원수를 끌어안으려 하실 때의 결과는 십자가다. 자신의 영원한 포용 속에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위격들이 타자인 우리를 끌어안으신다.  성만찬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공간을 만드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해 들이신’것을 기념하는 예전적 시간이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면서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찢기신 그 몸과, 언약을 깨뜨린 우리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해 흘리신 그 피를 기억한다(고전 11:24-25). 하나님의 은총의 중심에 새겨진 규칙은, 우리가 은총의 실행자로 재창조되기를 거부하지 않을 때에만 그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도 행해야 한다. 성만찬을 행할 때 우리는 이것을 재연한다. 그리스도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받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고통 받음으로써 받아들이신 모든 이를 받아들인다. 가톨릭 신학과 정교회 신학에는 성만찬의 신비를 둘러싼 ‘보편적 인격’(catholic personality:종말론적 새 창조의 인격적 소우주)에 관한 성찰이라는 오랜 전통이 있다. 성만찬에서 만찬을 받은 개개인이 “온전한 그리스도”를 받기 때문에 각 사람은 ‘교회적 개인’(ecclesial person)이 되며 모든 사람이 각 사람의 존재 안에 내재하게 된다(Zizioulas). 지지울라스 사상의 유기체론적 성격―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하나인 동시에 전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각 지체 안에 계시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적 개인’이나 ‘보편적 인격’이라는 사상은 심오하고도 유익하다. 떡을 뗌으로써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참여할 뿐 아니라 교회라는 수많은 지체를 가진 몸에도 참여한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각 지체가 다른 지체에 대해 외부적이지 않다고 말해 준다. 보편적 인격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라는 경계까지도 초월하게 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이 백성이 마침내 모이게 될 그 때를 고대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보편적 인격으로 조금씩 변화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자아를 타자에게 내어주고 타자를 자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이루신 일이며 그리고 우리 역시 행하도록 요청받는 그 일을 경축하는 것이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갈등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자기 내어줌과 용납함을 실행하도록 능력을 부여받는다. 우리가 포용해야할 타자는 교회 공동체 내의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외부의 원수까지도 포함된다. 우리가 이들을 용서하고 ‘형제’와 ‘자매’라고 부를 때 그들도 이 포용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서로를 포용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부활의 신비를 살아낸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두 팔에 끌어안긴 우리는 원수를 향해서도 팔을 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포옹 안에서 더불어 기뻐할 수 있다. 

 

낙원, 그리고 고통의 기억

 회개하고 원수를 용서한 후에, 자신 안에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문을 열어둔 후에, 정말로 그들을 끌어안고 화해의 과정이 완결되기 바란다면 자신이 당한 악을 잊어버려야 한다. 종말론적인 ‘잊어버리기’는 ‘진리’와 ‘정의’의 문제를 하나님이 이미 처리하셨으며, 가해자가 누구인지 밝혀졌고 심판을 받았고 변화되었고, 희생자들이 안전하고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가정하는 망각이다.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안전하기 위해 악행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온전한 구속을 얻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놓아 주어야만 한다. 잊게 되기를 바라는 이들만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하기’와 ‘기억하지 않기’는 역사적 기억이라는 틀 안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서로 얽혀 있는 두 방식이다(Assmann). 그러므로 잊기 그 자체가 우리의 적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잊을지, 무엇을 기억할지, 또 언제 그렇게 결정할 권리를 우리에게서 빼앗으려는 이들이 우리의 적이다(Todorov). 타자가 자신에게 가한 죄를 여전히 기억한다면 타자는 구속받지 못한 채 갇혀 있으며, 우리 역시 화해를 이루지 못한 관계 안에 매여 있게 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악에 대해 나 자신이 구속받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구속받지 못한 과거가 기억을 통해 구속받은 현재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설령 온 세상을 개조하고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 해도 구속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현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과거를 구속하지 못한다면 나도 타자도 구속받을 수 없다.  의지나 생각, 행동을 통해서는 과거를 구속하기란 불가능하다. 의지를 가지고 과거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는 작업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영원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니체가 말한 “창조적 의지”조차도). 생각을 통해 과거를 구속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결코 모든 고통을 구속할 수 없으며, 대부분의 시도는 성공적일수록 고통 자체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Lévinas; Surin; Tilley). 설령 생각으로 악을 부인할 수 있다 해도, 고통을 제거할 수 없다. 현재에 당면한 고난을 대하는 적합한 반응은 오직 행동뿐이다. 그러나 행동이 현재의 고난과 관련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지라도, 과거에 경험한 고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리쾨르(Ricoeur)는 악에 관한 생각은 난제이며 악의 도전에는 행위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행위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자기가 겪은 과거의 고난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알 수 없는 의문(“왜?” “왜 나란 말인가” “왜 내 사랑하는 아이란 말인가?”)에 대해서 “애도의 일”(work of mourning)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도의 일을 수행한 후에도,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물음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애도의 단계를 거친 후에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궁극적으로 기억하지 않기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오직 기억하지 않기를 통해서만, 어떤 생각으로도 떨쳐버릴 수 없고 어떤 행동으로도 지울 수 없는 고난에 대한 애도를 종식시킬 수 있다.  요컨대, 과거에 대한 구속 없이는 최종적 구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신정론도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성찰을 통해 과거를 구속하려는 모든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하지 않기’가 없다면 최종적 구속은 불가능하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대안은 천국 아니면 공포의 기억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만약 천국이 아우슈비츠를 바로 잡을 수 없다면,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억이 천국의 경험까지도 폐기될 것이다. ‘만물이 새롭게’ 창조될 때 ‘옛 것’이 다 지나가되 그것에 대한 기억까지도 폐기될 때에야 비로소 구속이 완성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에는 이처럼 구속을 가능하게 하는 망각이 암시되어 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인데, 그 이유는 “다시는 사망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21:4) 때문이다. 다 지나간다는 것은 경험뿐 아니라 기억으로부터도 사라진다는 의미인데, 이점은 요한계시록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에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43:17 참고).  하나님께서는 기억을 어떻게 다루실까? 하나님은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것을 너무나 잘 기억하신다(계 18:5).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그것을 잊어버리신다. 하나님은 그것을 죄악이라 부르시고 용서하신 후, 잊기 위해서만 죄악을 기억하신다. 왜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동시에 잊어버리시는가? 범죄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중요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또 다른 기억,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억 때문이다. 죄악의 기억을 잊어버리시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은 하나님의 품 안으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망각은 가해자들에 의해 재빠르게 악용될 여지를 주며, 희생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루시는 것이 아닐까?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극악무도한 악을 자행한 가해자 역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죄인이며 그들 역시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가해자가 심판을 받고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구속받은 미래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어떻게 하나님이 잊으실 수 있는가?’라고 묻는 대신 ‘어떻게 하나님이 희생자를 잊지 않고 그들의 기억을 치유하실 수 있는가?’라고 묻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말한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여, 전에는 어려웠지만 이제는 쉬운 일이 된, ‘기억하지 않기’를 행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원수를 구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원수였던 이들이, 현재의 매순간을 구속받지 못하게 막는 구속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유롭게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포옹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메시아가 영광 중에 오시지 않았기에,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의 고난의 기억을 계속 살아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기억하기는, 언젠가 우리가 받은 상처와 당한 악행에 대한 기억을 잊게 할 바로 그 구속의 소망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지금 기억하는 것은 그때 잊을 수 있기 위함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사랑하기 위해 그 때 우리는 잊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 오기도 전에 손에서 기억의 방패를 내려놓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타자를 그리고 과거에 원수였던 이들까지도 팔을 벌려 끌어안기 위해 신중하게 기억의 방패를 옆으로 옮겨 두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창세기의 잘 알려진 이야기에서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과의 화해에 이르는 어려운 여정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의 말처럼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기” 때문이다(41:51). 그러나 이 여행이 끝나기까지는 많은 기억하기가 필요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가한 고통을 기억했으며, 형들도 미묘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그것을 기억하게 만들었다.(42:21-23; 44:27 이하). 그가 증오와 복수를 거두고 돌아오는 여정을 안내한 것은 그가 아직도 기억

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기억을 ‘배경으로 후퇴시키기’라는 말이 올바른 용어일지도 모른다2)―이었다. 자신이나 자신의 후손이 이 소중한 선물을 간직하고 싶었기에 요셉은 그 소원을 자신의 아들 므낫세―‘잊어버리게 하신 이’―의 이름에 새겨 넣었다. 잊어버리기에 대한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므낫세의 존재는, 고통을 상기시킴으로써 고통에 대한 기억의 상실에 주목하게 한다. 필수적인 기억하기와 함께 섞여 있는 이 이상한 잊어버림 덕분에 희생자인 요셉은 가해자인 형들을 끌어안고(45:14-15) 형들과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46:1 이하).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의 악행을 잊으실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기억의 핵심에는 잊어버림에 대한 역설적인 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류의 죄를 잊으신다. 즉, 하나님은 인류로부터 죄를 취하셔서 하나님 자신에게 두셨다. 인간은 어떻게 역사에서 일어난 공포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간” 2) 이 단락 전체에서 내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공포의 기억을 ‘배경으로 후퇴시키기’ 혹은 ‘지양하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배경으로 후퇴시키기’와 ‘지양하기’는 역사 안에서 공포의 기억을 다루는 적합한 방식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억하지 않기를 종말 이전에 실행하는 방식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종말론적인 기억하지 않기는 공포를 완전한 망각으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후에 나타날 새로운 세상의 한가운데 보좌가 세워질 것이며, 그 보좌에는 “세상 죄를 지셨고” 또한 그 기억을 지워버리신 어린 양이 앉아 계실 것이다(계 22:1-4; 요 1:29). 

 

 포옹의 드라마 

 포옹의 움직임을 구성하는 네 요소는 ‘팔 벌리기’, ‘기다리기’, ‘팔 모으기’, ‘다시 팔 벌리기’다. 포옹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네 요소가 모두 있어야 하며, 네 요소가 끊어지지 않고 차례로 이어져야 한다. 첫 두 단계인 ‘팔을 벌리고 기다리기’에서 멈춘다면 포옹은 실패할 것이며, ‘팔 모으기’인 세 번째 단계에서 멈춘다면 사랑의 행위인 포옹이 억압의 행위가 되고 역설적으로 배제의 행위로 변질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 요소는 하나의 통합된 움직임의 네 가지 필수 단계다. 

 1막: 팔 벌리기. 팔을 벌리는 것은 타자에게 손을 내미는 몸짓이다. 첫째, 팔 벌리기는 타자의 부재는 고통을 안겨주며, 기대하던 타자의 존재는 기쁨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부재의 고통과 기대하던 현재의 기쁨은 모두 자아가 팔을 벌리기 전부터 타자가 이미 자아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둘째, 팔 벌리기는 자신 안에 타자가 들어올 공간을 이미 만들어 두었으며,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가 나 자신의 밖으로 나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팔을 벌림으로써 자아는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타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셋째, 팔 벌리기는 자아 안에 타자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틈과 균열이 있음을 암시한다. 자아의 경계선을 통과할 수 있어야만 타자를 향한 욕망이 충족될 수 있고, 자기를 비워서 만들어 낸 타자를 위한 공간이 채워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팔 벌리기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의 몸짓이다. 벌린 팔은 타자를 향해 들어오라고 말하는 초대의 몸짓이상으로, 그것은 타자의 문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2막: 기다리기. 팔을 벌려 뻗은 다음에는 타자를 만지기 전에 멈추어 기다려야 한다.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들고 자신의 밖으로 나간 후에 자아는 욕망을 “지연”시키고 타자의 경계선에서 멈춘다. 타자를 포옹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더 나아가기 전에 자아는 타자 안에 욕망이 생겨나기를, 타자가 팔을 벌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자아는 타자로 하여금 자아를 향해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타자에게 포옹하라고 강요하거나 조작할 수는 없다. 폭력은 포옹의 정반대이며 오히려 포옹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포옹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아가 타자를 욕망하듯이 타자가 자아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포옹이 일방적으로 시작될 수는 있어도 상호성 없이는 이루어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신호다. 

 3막: 팔 모으기(closing the arms). 팔 모으기는 상호성에 바탕을 둔 포옹의 목표, 포옹 자체다. 포옹한 각 사람은 타자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자아 안에서 타자의 존재를 느끼고 자신의 존재가 느껴지게 만들어야 한다. 포옹의 행위는 자아의 행위인 동시에 타자의 행위이기 때문에 양면적이다(Hegel).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상호적인 주고받기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호 관계 외에도 부드러운 접촉이 반드시 필요하다. 타자를 팔로 너무 꽉 안아서 그를 무너뜨리거나 동화시키는 것은 배제와 다를 바 없다. 또한 자신과 타자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고 나 자신의 경계선을 굳건히 지키며 저항해야 한다. 포옹은 자기 고립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동화에 의해 구별이 없어져 버리는 소용돌이에 저항할 수 있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포용에서 자아의 정체성은 보존되는 동시에 변형된다. 타자의 타자성을 타자성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일부를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아의 정체성 안으로 받아들인다. 포용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이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레비치(Gurevitch)는 “이해하지 않는 능력”―“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타자와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타자를 “이해하지 않을 때”, 자아는 타자에 관해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음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Gurevitch). 포용의 한가운데서 물음으로서의 타자의 등장은 타자의 불투명성을 감추어 두는 것을 생산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즉, 이 거부는 곧 새롭게 더 나은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아는 그 자신과 타자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해하지 않는 능력이 없다면 참된 포용은 불가능하다. 

 4막: 다시 팔 벌리기. 포옹에서 몸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타자를 둘러싸는 팔이다. 포옹은 자아들이 혼종적 정체성의 바탕이 된 상호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내가’ ‘우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전체주의적인 것이 되어선 안 된다. 타자의 타자성이 보존될 수 있도록 타자를 놓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타자의 존재가 남긴 흔적에 의해 더 풍성해진 자신의 정체성이 보존될 수 있도록 자아는 자신 안으로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마지막 단계의 타자를 놓아 주는 그 팔은, 타자의 존재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자아의 경계를 열어젖히고, 타자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첫 번째 단계를 실행하는 바로 그 팔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타자가 대응하기를 기다리고, 세 번째 단계에서 타자의 몸을 둘러싸는 바로 그 팔이다. 포옹의 마지막은 이미 다른 포옹의 시작이다. 포옹 자체는 종료가 되는 행동이지만, 타자를 향해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자아의 움직임은 끝이 없고 순환적이다.  성공적인 포옹의 네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유동적인 정체성이다. 혼종적인 문화 속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경험들이 뒤섞인다.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는 중첩되는 사회적 영토에서 살아간다. 둘째, 비대칭적 관계다. 동등한 사람들의 상호 포용은 자아와 타자가 인정을 획득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인정을 이미 전제하는 자기 내어줌의 결과다. 비록 자기희생은 상호 포용이 주는 기쁨에 대한 무관심과 적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길(via dolorosa)이기는 하지만 포용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평등성과 상호성은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셋째, 결과의 비결정성(underdetermination)이다. 포용의 구조 안에는 기다림과 부드러운 접촉의 과정이 있기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포옹이 일어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포옹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포옹 자체의 매력이다. 마지막으로, 포옹에는 위험이 존재한다. 이 위험은 비대칭성과 구조적 비결정성에서 비롯된다. 나는 팔을 벌리고, 타자 즉 원수를 향해 자아를 움직이지만, 내가 오해를 받을지 경멸을 당할지 심지어 괴롭힘을 당할지, 아니면 타자가 나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화답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구원자가 될 수도 있고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포용은 은총이며, “은총은 언제나 도박”이다(Smedes). 

 

 계약, 언약, 포용

 포옹이 지닌 비대칭성과 결과의 체계적인 비결정성으로 인하여 포옹의 행위는 우발적이고 불안정한 도박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예측 가능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포용의 무모한 ‘은총’을 어떤 형태든 상호 구속적인 ‘율법’으로 보충해야 한다. 혹은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율법’에 포용의 ‘은총’을 끼워 넣어 ‘율법’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안에서부터 계속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높은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은유 중 하나는 ‘계약’이라는 은유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삶을 본질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이해하며, ‘계약’이 사회적 삶의 중심 은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은 피해에 대한 두려움과 안락함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들에게 “안전과 이익”을 제공하는 “계약”을 맺는다(Sullivan). 계약은 각 사람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계약적 상호작용의 산물로 시민 사회가 출현한다. 계약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계약은 과업 지향적이다. 과업이 종료되면 관계도 해체된다. 둘째, 계약은 제한된 헌신만을 요구한다. 계약은 그것이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진술한 것에 대해서만 강제력을 지닌다. 셋째, 계약은 엄밀하게 상호적이다. 쌍방이 동의해야만 양측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분리된 개체로서의 개인은 욕망에 따라 자신이 수행할 역할을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다. 사회적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꼭 맞게 설계된 계약은, 사람들의 참여를 안정화하는 동시에 유동성을 유지하게 해준다. 계약은 현대 사회의 전형적인 질서를 위한 완벽한 구성 원리인 것처럼 보인다(Bauman). 계약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계약이 없다면 전통에서 벗어나 있으며 분화된 사회 속에서의 삶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계약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서술적 규범’은 제시해줄 수 있을지언정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전망은 제시해주지 못한다. 계약의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삶을 잘못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일 뿐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다. 둘째, 여러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관여하는 경우는 명확히 명시된 항목과 조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웃에 대해 이행해야 할 의무 중에는 이웃이 나에 대해 상응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효화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의 관계는 엄격하게 상호적이지는 않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핵심적 은유로서 ‘계약’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서로 뒤엉켜 있고, 그들의 상호작용은 도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의 핵심 은유인 계약이 지닌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써 ‘언약’을 복원해야 한다(Bella; Sullivan). 상거래가 아니라 종교적 헌신이라는 영역에서 기원한 언약이 인간 삶의 공동체적·도덕적 차원을 더 잘 표현한다. 언약에는 자율과 소속감, 개인적 참여와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인이 모두 공존한다. “언약”은 “자발성과 동의라는 핵심 요소”를 아우르며, “관계의 본질과 역사로부터 도출되며” 결코 “미리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는 의무를 만들어낸다(Selznick). 제한적이며 상호적인 참여를 규정하는 계약과 달리, 언약은 끝이 열려 있으며 도덕적으로 규정된 관계를 만들어 낸다.  언약이 억압이 아니라 정의의 언약으로, 기만이 아니라 진실의 언약으로, 폭력이 아니라 평화의 언약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그 언약 자체를 도덕적으로 구축해야 하는가 하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언약 그 자체는 아무런 도덕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곳에서 오는 본질적 가치에 의존해야 한다. 언약이라는 형식적 개념보다는 이런 본질적 가치가 훨씬 더 많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언약적 국가관에 따르면 인간 상호 간의 언약은 “하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언약에 기초하며 그 언약에 의해 보존 된다”(Moltmann). 언약의 도덕적 기반은 언약을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며 보편적 구속력은 십계명에 표현되어 있다. 언약은 그것이 도덕적 범주이기 때문에 유용한 정치적 범주가 될 수 있으며, 그 핵심에 있어서 신학적 범주이기 때문에 도덕적 범주가 될 수 있다.  “거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전제적인 정부―의 지나친 구속과 통제도 위협적이지만, 현대 사회는 서로 간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력함 때문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서로 언약을 지키는 능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정부가 국민과의 언약을 어기는 경향과 씨름하게 될 것이다. 즉, 사회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자들로 구성될수록, 리바이어던―엄격하게 조직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장치―의 필요성이 더 커진다(Sullivan).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국민이 “상호 간에 맺은 언약에 의해” “권위”를 국가에 이전하고, 그렇게 해서 “거대한 리바이어던”을 탄생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아래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평화와 보호를 리바이어던에게 맡기고 있다”(Hobbes).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만장일치로 권력을 이전하는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끈질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자기들끼리 언약을 만들고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리바이어던은 자신의 권력과 힘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만인의 의지”를 만들어 내고, 이로써 “국내의 평화와 국외의 적에 대항하는 상호 원조”를 보장해준다.  이와 같은 부정적 인간론에 비해 언약은 더 긍정적인 인간론을 전제한다. 몰트만이 주장했듯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언약을 맺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기초가 된다. 인간은 언약을 맺을 수도 있고 깨뜨릴 수도 있다. 성경에는 이 두 ‘능력’이 공동체적 삶에 늘 등장한다. 인간은 언제나 이미 언약을 깨뜨린 존재로서 언제나 이미 언약 안에 있다. 사회적 문제에 관한 신학적 성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은 단순히 국민과 국가 사이가 아니라 언약을 맺는 사람들의 내면에 위치시킨다. 첫째, 새 언약은 언약을 깨뜨리는 끈질긴 패턴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둘째, 새 언약은 십계명의 언약의 약속을 어떻게 ‘마음’에 새겨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

제를 제기한다(렘 31:31 이하).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는, 사람들에게 언약을 맺고 지킴으로써 폭군에게 저항하라고 설득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세운 언약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사람들을 길러 내고, 그들이 배제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부서지기 쉬운 언약을 강화하고, 깨어진 언약을 고치며, 언약이 완전히 폐기되는 것을 막기 위해―어떻게 언약을 갱신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아 안에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심으로써 언약을 갱신하신다. 각 사람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한쪽의 관점을 초월해 다른 쪽의 보완적 경향을 고려하는 것”을 넘어(Assmann & Assmann), “타자의 정체성에 변화를 기울이고, 변화하는 타자를 위해 자아 안에 공간을 마련하고, 타자의 유동적 정체성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재협상한다는 것”을 뜻한다(Welker). 언약의 각 당사자는 자신의 태도와 정체성을 상대편의 태도와 정체성에 대해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재조정이 없다면, 도덕적 구속력만으로는 다원주의적 맥락에서 언약에 대한 압력을 충분히 다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언약을 지탱하고 갱신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아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타자의 존재에 비추어 자아를 재조정해야 한다. 둘째,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어 주어야 한다. 십자가는 언약의 상대편이었던 인간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양으로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여러 관점이 충돌하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관점에서 언약을 어기지 않은 사람들이 깨어진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고자 할 때에만 언약이 유지되고 갱신될 수 있다. 깨어진 언약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희생적인 것이다.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자아의 일부가 죽겠지만 오히려 참된 공동체적 자아로 갱신되고 타자 없이 홀로 있지 않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으로 빚어진다. 셋째, 새 언약은 영원하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 주신 결과로 언약은 ‘영원성’을 얻는다. 하나님의 참여는 철회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언약은 파괴할 수 없다(Assmann). 그와 비슷하게, 모든 

특정한 정치적 언약은 “상대적으로 무조건적”이기 때문에(Selznick) 폐기될 수 있지만, 더 광범위한 사회

적 언약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이며 따라서 ‘영원하다.’   상호 보완적인 정체성의 재조정, 언약을 깨뜨리지도 않은 사람에 의한 언약의 회복, 언약이 폐기되도록 내버려두기를 거부하는 태도 등은 새 언약에 관한 기독교 신학과 유비를 이루는 사회적 언약의 주요 특징들이다. 이것은 화해라는 관념과, 역동적이며 상호적으로 조건 지워지는 정체성이라는 관념을 결합하고자 하는 은유다. 새 언약이란 계속해서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하나님이 끌어안으신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 언약은 적대감이라는 조건 아래서 우리가 서로를 끌어안는 방식이다. 포용은 언약의 내적 양상이며, 언약은 포용의 외적 양상이다. 

 

두 팔을 벌리신 하나님 아버지

 탕자에 관한 이야기(눅 15:11-32)의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은 아버지가 소원해진 아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과 그 아들을 자기 집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주제를 통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를 파고들 것이다.  둘째 아들. 둘째 아들의 욕망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방식은, 그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개인이 되기 위해 가부장적인 집이라는 한계를 탈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세상 속에 그대로 머무는 ‘착한’ 아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배반하는 ‘나쁜’ 개인이다. 이런 식의 근대적 해석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에 실패하고 부당하게 가족들을 그 실패에 끌어들이는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자아가 타자성으로서의 자신을 구축함으로써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근대적인 불안한 ‘청소년기’를 배경으로 읽기에는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성인기’에 도달한 자아를 전제해야 한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요구하고 떠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미 잘못을 범했다(Brettschneider; Bailey). 첫째, 그는 나누고 줄이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늘리는 것이 기본 정신이었던 고대의 가족 유대를 깨뜨렸다(Pöhlmann).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가족과의 언약을 전적으로 불이행했다. 그의 계획은 스스로 ‘아들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둘째 아들의 떠남은 개별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분리 행위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자아가 자아일 수 없는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끄집어내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단절시키며, 스스로를 그들의 원수로 만드는 배제 행위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단절시켰고 자신의 참된 자아로부터 소외되었다.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을 밀쳐낸 결과 역설적이게도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스스로 ‘아들이 아닌 사람’이 되고자 했고 아직 먼 나라에 있는 그에게 ‘아들이라는 신분’은 단지 기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현재를 규정하는 기억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아들이라는 신분에 대한 기억은 소망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실패를 되새기게 해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19, 21절). 그는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대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버지. 이 이야기의 첫 번째 놀라움은 유산을 요구한 둘째 아들의 대담함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떠나도록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점이다(13절). 건전한 이성과 존경할만한 전통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Fitzmyer). 그러나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국면은, 아들이 떠나도록 허락한 아버지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놓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찾다가 마침내 ‘저 멀리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아버지의 마음이 ‘먼 나라’에 있던 아들과 여전히 함께 있었음을 말해 준다. 스스로 ‘아들이 아닌 사람’이 되려고 했던 둘째 아들의 시도가 둘째 아들의 정체성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아버지 역시 아버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교섭(re-negotiate)해야 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넘쳐난 아버지는 달려가 두 팔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20절). 포용이 일어나기 위해 아무런 고백도 필요하지 않았다. 관계는 도덕적 공적에 기초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도덕적 행위에 의해 파괴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아들은 ‘귀환 전략’을 세우며 이와는 다른 순서를 예상했다. 즉, 아버지에게 돌아감―고백―일꾼으로 받아들여지는 순서를 생각했다(18-19절). 그러나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가 그 순서를 바꾸었다(“그러나”, 20절). 아들은 용납(acceptance) 받은 후에 고백했다(21절). 그러나 용납은 중단 없이 고백으로 이어졌다. 관계는 도덕적 올바름에 기초하지 않지만, 아들이 떠난 후 관계는 죄에 의해 상처를 입었고 고백에 의해 치유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포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악행에 대한 고백이 이뤄져야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귀환 전략을 두 번째로 가로막았다. 첫 번째 방해는 무조건적 용납을 실현했으며, 두 번째는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먼 나라에서 실패한 후 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아들’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를 끌어안으시는 아버지 때문에 순전한 기쁨을 맛본 아들의 정체성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자신의 전략에 따라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에 비추어 스스로 구축했던 정체성(“품꾼의 하나”, 19절)을 말씀드린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그의 전략을 중단시킨다(“그러나”와 “어서”, 22절: 두 단어는 개역개정판에서 생략되어 새번역을 따름―역주). 자신을 끌어안은 아버지에게 했던 고백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에서의 그의 정체성은 그의 손을 떠나 아버지의 손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림으로써 탕자의 정체성을 재구성했다.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했다. 그런 다음, 탕자가 우리 눈앞에서 변화되었을 때, 그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아들’을 ‘그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아들’로 상징적으로 재창조한 다음 그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아들의 변화의 비밀은 아버지의 무조건적 용납의 비밀과 동일하다. 즉, 아버지는 아들―“잃어버렸고 죽었던” 아들(24, 32절)―이 자신의 마음의 포용으로부터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첫째 아들. 첫째 아들에게 탕자는 더 이상 그의 동생이 아니다. 아버지와 달리, 첫째 아들은 동생이 먼 나라에 있는 동안 그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죄에 의해 더럽혀진 동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정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으신 후에 첫째 아들은 스스로 ‘아들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했다.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관계를 유지하는 한,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배제할 것이다. 둘째 아들은 그가 형제로서 마땅한 처신을 못했기 때문에 ‘형제가 아닌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그래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처신했기 때문에― 반항했던 둘째 아들과 인연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아버지가 아닌 사람’이 되었다(신 21:18-21;Bock).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형제는 너무나 닮았다. 둘째 아들의 예상과 첫째 아들의 요구는 동일한 논리를 따른다. 첫째 아들은 사회적 삶을 떠받치는 기본적인 규칙만으로 판단의 준거를 삼았다. 자신의 동생을 배제하고 포용하는 것에 관해서도 분명한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 아들은 사회적 유대를 보존하기 위해 규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규칙 위반에 대한 그의 분노는 아버지와 동생으로부터 그를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몇 가지 중요한 규칙을 어기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노예처럼 일했다고 주장하지만(29절), 자신이 재산의 나머지를 상속받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위해 일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삼켜 버렸다고 주장하지만(30절), 동생이 ‘삼켜 버린’ 것이 동생에게도 속한 것이었음을 말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점은, 동생이 저지르지 않은 악까지 동생에게 덧붙여 말한다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는 부도덕을 암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Bailey) 동생의 ‘방탕한’ 삶에 대해 그는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삼켜 버렸다’고 몰아붙인다(30절). 규칙에 대한 집착―나쁜 규칙이 아니라 유익한 규칙!―은 자기 의와 다른 사람들을 악마로 취급하는 태도를 부추긴다. 규칙이 계속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도덕의 모호함과, 사회적 행위자와, 그들의 상호 작용의 복잡성을 축소시켜야 한다.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호성과 복잡성을 고려하지 못하여 양극성(polarities)의 잣대로만 판단하게 한다. 그 결과 규칙을 어기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안에’ 있게 되고, 규칙을 어긴 사람은 전적으로 ‘바깥에’ 있게 되는 배제가 일어나게 된다. 다시 아버지. 이 이상한 아버지는 누구인가? 자신의 아들을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갈등을 견디지 못하는 감상적인 늙은이인가? 탕자를 끌어안고(20절) 화가 난 그의 형을 달래려는(28절) 비합리적인 충동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허비한 둘째를 다시 ‘아들’로 만들고, 화가 나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 첫째를 다정하게 “얘야”라고 불러야할(31절) 필요에 포로가 된, 불행하고 심지어 불쌍하기까지 한 인물일 뿐인가? 거의 행동으로 가정이 파괴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가정의 보호자로서는 미쳤다고 볼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했던 대표적 인물인가? 이런 이미지는 분명히 틀렸다. 이런 이미지는, 첫째 아들의 비뚤어진 관점을 취해 아버지를 그의 상대역으로 이해할 때만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거울 이미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예전에 누리던 모든 특권을 회복시켜 주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라.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다면(31절), 둘째 아들은 유산을 다시 받지 못할 것이다. 그가 준 가락지는 아들이 모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는 상징이 아니라 아버지의 너그러움의 상징일 뿐이다(Fitzmyer; Nolland). 아버지가 탕자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탕자는 떠나기 전처럼 단지 아들인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다(32절). 단순히 포옹과 살진 송아지를 나누는 식사로 과거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아버지가 가정의 질서를 전적으로 제쳐 두었다면,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그 질서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떠오르는 첫째 아들을 ‘아들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Pöhlmann). 아버지와 첫째 아들과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았다. 탕자의 포옹도, 첫째 아들의 분노도, 첫째 아들이 ‘항상’ 아버지와 있으며, 그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이’이고,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 ‘다’ 그에게도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아버지는 ‘가정’의 질서를 전적으로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계속해서 떠받치고 있다. 아버지가 한 일은 질서를 ‘다시 질서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질서의 ‘의무’ 안에 또 다른 ‘의무’―돌아온 위반자를 가족의 유대로부터 추방하는 대신 그를 끌어안고 그를 다시 아들로 삼아야 할 ‘의무’―를 집어넣었다(32절). 우리에겐 유익한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뜨린 사람을 다시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다. 이미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기뻐할 뿐만 아니라 돌아오고 싶어 하는 이들과도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  아버지의 ‘새 질서’가 그토록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것이 첫째 아들이 규정한 양자택일을 중심으로 구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가 무질서와 분열을 택하는가, 혹은 규칙을 어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당신이 ‘안에’ 있다거나 ‘바깥에’ 있다는 식의 태도를 거부한다. 그의 태도를 지배한 것은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이었다. 어떤 규칙이든 그것을 적용하기 전에, 그는 아들들에게 아버지이고 아들들은 서로에게 형제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이 “먼 나라”에서의 탕자의 삶을 해석하는 방식 사이에 범주와 관련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첫째 아들은 도덕적 범주를 적용해 ‘선/악’의 관점에서 동생의 떠남을 해석한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행동에 담긴 도덕적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관계적 범주를 사용해 ‘잃어버린/찾은’ 그리고 ‘(그에게) 살아 있는/(그에게) 죽은’이라는 관점에서 아들의 떠남을 해석한다. 관계가 도덕적 규칙보다 우선한다. 도덕적 공적은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관계는 도덕적 공적에 기초하지 않는다.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는 행동이 얼마나 훌륭한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관계의 우선성은 도덕적 규칙이 ‘배제’와 ‘포용’을 통제하는 최종적 권위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대한 거부일 뿐만 아니라, 아들들로부터 고립된 채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지 않겠다는 거부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들의 변하는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정하며, 그에 따라 그들의 깨어진 정체성과 관계를 재구축한다. ‘자기 구성적’ 정체성과 ‘강요된’ 정체성, 차이와 길들이기라는 양자택일을 거부함으로써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은 형제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 아버지는 두 아들 가운데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파괴할 수 없는 사랑이 그를 이끌어 주고, 유연한 질서가 그를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고정된 규칙과 안정적인 정체성의 세계는 첫째 아들의 세계다. 아버지는 이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때문에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근본적으로 아버지는 규칙과 주어진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그리고 두 아들의 삶은 너무나 복잡해서 고정된 규칙에 의해 규제될 수 없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너무나 역동적이어서 단번에 최종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규칙과 질서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질서를 파괴하기보다 계속 재조정함으로써 그 질서가 배제의 질서가 아니라 포용의 질서가 되도록 지켜 나간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아 안에 타자의 타자성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범죄한 타자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하며 그들로 하여금 고백할 수 있도록 환대의 조건을 이루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사랑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4. 성 정체성

 이리가레이(Irigaray)는 젠더의 문제가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이며,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인종적 차이와 갈등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존슨(Johnson)은 성 정체성 자체가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에 의해 형성되므로 젠더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고 말한다. 성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 어느 편을 들든, 성 정체성과 젠더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남자의 하나님의 갈빗대로부터’(Out of a Rib of Man’s God)

 니체(Nietzsche)는 하나님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자가 창조된 것은 남자의 갈빗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갈빗대로부터였다. 니체의 경구는 우리가 여자라고 말할 때 의도하는 뜻이 단순히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그 일차적인 행위 주체는 남자들임을 강조한다. 둘째, 이 경구는 ‘여성성’(femininity)의 내용은 남자의 신, 남자의 이상과 관계가 있으며 ‘여성성’이라는 부차적인 이상을 환기시키는 것은 ‘남성성’(masculinity)이라는 높은 이상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신(their gods)의 갈빗대로부터 여자들을 재창조해 낸다.  아래에서 나는 성 정체성의 구축과 이를 구축하는 데 하나님이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님과 젠더, 더 정확히는 삼위일체와 성 정체성이다. 포이어바흐(Feuerbach)는 신이 특정 사회 집단의 문화적 이상을 짜 맞춰 놓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자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피조물인 동시에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재창조하는 ‘재료’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이익과 이상을 하나님께 투사(project)하지만,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만든 투사 이미지가 아니다. 인간은 그들의 부인할 수 없는 문화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바탕 하에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물음은 하나님의 본성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와 그들이 구축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젠더-신적인가? 인간적인가? 

 나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구원받았고, 평등하게 성령으로 충만하며, 평등하게 보내심을 입었음’(Van Leeuwen)을 당연히 여긴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성 정체성과 차이다. 남성과 여성이 열등한지, 우월한지, 평등한지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주는 하나님에 관한 언어는 남성 혹은 여성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가 아는 유일한 인격적 피조물인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성(duality)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남성적 혹은 여성적 은유, 혹은 남성적인 동시에 여성적인 은유를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적 구별을 전적으로 초월한 존재이시지만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우리의 언어가 필연적으로 젠더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에 관한 언어가 지닌 구체적으로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내용은 다 오르지 피조물의 영역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여성과 구별된 남성으로 혹은 남성과 구별된 여성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관념 속에서 우리 스스로 끼워 넣었던 여성성 혹은 남성성에 관한 내용들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젠더에 의해 규정된 하나님에 관한 언어는 우리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특정한 구성 방식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성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 정당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런 태도에 저항해야 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적 아버지’와 이리가레이의 ‘신적 여성’을 살펴보면서 위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칼 바르트는 인간 아버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고,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를 관찰함으로써 한 남자가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유비를 통해’ 인간의 이미지를 가진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로부터의 유비를 통해’,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함으로써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젠더를 초월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는 인간이 자기 자손과 맺는 구체적으로 부성적인 관계에 상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간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절대로 읽어낼 수 없다. 아버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어쩌다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책임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간 어머니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도 배울 수 없다. 역으로 하나님 어머니로부터, 한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어머니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도 배울 수가 없다. 하나님에 관해 남성적 은유를 사용하든지 여성적 은유를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특정한 젠더에 대한 모범이 아니라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에 대한 모범이시다.  하나님의 특징과 역할은 어머니와 여성보다 아버지와 남성에 더 부합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부성성과 하나님의 남성성으로부터의―위로부터의―논증이 아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즉 인간 아버지와 인간 남성의 특징으로부터의 논증이다.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은 우리가 모성과 여성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보다는 부성과 남성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더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부성’과 ‘모성’, ‘여성성’과 ‘남성성’은 다 피조물의 영역에서 가져온 개념이며, 따라서 문화적 조건에 제한을 받으며 변화하는 개념이다.  포이어바흐의 종교 이론을 뒤집으려 했던 칼 바르트와 달리 뤼스 이리가레이는 ‘신적 여성’에 대해 이런 주장을 펼친다. 그는 ‘투사된’ 신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성부와 성자, 성령에 관해 이야기하는 고전적 삼위일체 교리에는 여성이 부재함을 지적한다.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으며,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그런 삼위일체 교리에는 ‘그녀’로 하여금 여자가 어떤 사람이 되도록 자극하는 지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대신 여성은 ‘율법을 만드시는 하나님 아버지 등’의 남성적 초월에 대해 부재함으로써 억압당한다(Irigaray).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반론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여성적 은유로 표현된 삼위일체 교리에 ‘그녀’로 하여금 여자로서 어떤 사람이 되도록 자극하는 지평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적 은유로 표현된 삼위일체 교리에는 ‘그’로 하여금 남자로서 어떤 사람이 되도록 자극하는 지평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젠더에 명백한 신적 지평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신과 여신이 있어야 한다. 이리가레이에게 하나님이란, 주체를 “완벽한 인물, 그 주체 특유의 이상적 자아상, 다함이 없는 자아 완성의 본보기”에 투사한 것이다(Grosz). 그리고 주체는 본질적으로 젠더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신적 ‘투사’ 역시 젠더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남자’가 독특한 ‘남성적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을 무한자와 관계를 맺은 유한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여자 역시 ‘그녀의 완벽한 주체성을 상징하는’ ‘여자 하나님’, ‘여성적 삼위일체, 즉 어머니, 딸, 성령’이 필요하다(Irigaray). 만약 우리가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의 하나님이신 기독교 전통의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리가레이가 제안하는 젠더에 의해 규정된 신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에 관한 언어가 성 정체성의 구축에 관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젠더의 존재론적 근거로 삼은 다음, 즉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대한 특수한 이해를 취해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한 다음, 그 투사가 우리의 사회적 관행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젠더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 설정은 하나님이라는 관념에도 젠더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무엇도 구체적으로 여성적이지도 않고 남성적이지도 않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그 어떤 요소도 한쪽 성에 한정된 의무나 특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성으로서의 성질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적합하게 하나님을 재현한다고 주장하거나(LaCugna), 여성이 본성적으로 더 관계적이므로 관계성과 사랑의 힘으로서의 신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주장함으로써 한쪽 성에 특권을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은 성으로 구별되는 몸(sexed body)이 지닌 구체성을 근거로 삼는다. 성으로 구별되는 몸은 성 정체성의 내용이 아니라 근거이다. 나는 성으로 구별되는 몸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유전자, 호르몬, 외부와 내부의 생식기 등과 연관된) 생물학적 범주로서의 ‘성’(sex)과 (학습된 특징, 개성, 행동 양식 등과 연관된) 사회적 범주로서의 ‘젠더’(gender) 사이의 구별을 단순히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다(Stoller). 이러한 구별은 유용하다. 개인의 연령대에 따라 그리고 시공간에 걸친 각 문화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의 관념이 크게 다른 까닭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성 정체성이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것은 주어진 문화 안에서 발생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성 정체성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성으로 구별되는 몸의 안정적인 차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젠더의 유동성은 성으로 구별되는 몸의 안정성에 의해 제한을 받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첫째, 성으로 구별되는 몸이 성 정체성의 형성에 제한을 가한다. 몸은 젠더의 구성에 관해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성적인’ 경우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여성이 살아내는 여성성과 남성이 살아내는 여성성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Gatens) 성으로 구별되는 몸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내용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단순히 성으로 구별되는 몸으로부터 성 정체성의 내용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런 식의 해석은 다 특수한 문화적 해석이다. 성으로 구별되는 몸은 그 자체로서 언제나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협상되고 재협상되는 성 차이의 기초이다. 둘째, 성으로 구별되는 몸의 안정성은 성 정체성의 유동성을 가능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두 젠더를 이야기하고 그들의 변하는 정체성에 관해 고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으로 구별되는 몸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하며, 이런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미리 규정하려는 태도를 거부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에는 아무런 본질도 없으며 변하지 않는 여성성과 남성성 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성 역할과 성 정체성의 끊임없는 창조와 재창조에 직면해 있다(Van Leeuwen).  지금까지 나의 주장은 이중적이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에 비추어 성 정체성의 내용을 도출해 내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찾아내는 모든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하나님께 투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성 정체성의 내용은 성으로 구별되는 몸에 기초해 있으며(자연), 그처럼 성으로 구별되는 몸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문화). 

 

 삼위일체적 정체성

 존스(Jones)는 하나님의 실체는 철저하게 다층적이며, 철저하게 관계적이며, 무한히 활동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피조물의 차원에서 논하는 ‘순수한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 사상은 이리가레이의 ‘동일자의 논리’(logic of the same)의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는 복합적인 정체성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최선의 자원을 제공하지 못한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는 ‘동일자의 논리’와 너무나 가깝다.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활용한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 종속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복합적인 성 정체성 관념을 계발하기 위해 요제프 라칭거(Ratzinger)와 몰트만(Moltmann)의 삼위일체 사상을 논의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라칭거에게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은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이 관념에서 출발했지만,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대화라는 현상을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 즉,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칭거는 위격을 관계(relation)로, 더 정확히는 관계됨(relatedness)으로 정의한다. 관계로서의 위격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관념에 대한 그의 재해석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성자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라칭거는 “성자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시고(5:19), 성자는 아들로서, 아들인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부와 완전히 하나이시다”라고 말한다. 성자에게는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성부와 일치를 이루시며 그분과 ‘하나’이시다.” 뿐만 아니라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하는”―구속이 필요한 인류를 위하는―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분의 실존은 “전적 개방성”(complete openness)이다. 성자의 존재를 정의하는 “전적 개방성”의 두 가지 상호 연관된 양상은 현재 우리의 논의 목적과 관련해 중요하다. 첫째, 전적 개방성은 전적으로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을 요구한다. 성자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성부께 드린다. 그리고 그들과 성부 사이를 중재하는 인류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다. 둘째, 전적 개방성을 위해서는 자아 안에 타자가 전적으로 들어와 있어야 한다. 성부께서 성자 안에 너무나 철저히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성자는 “성부와 일치를 이루신다.” 성자는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힘으로 서 있지 않으신다. 그분의 ‘나’는 아버지의 나다. 올바르게 이해했을 때, ‘타자에게 자아를 내어줌’과 ‘자아 안의 타자의 존재’라는 개념은 심오하고 중요하다. 개인이 결코 그저 자신일 수 없으며, 사랑 안에서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 안에 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두 개념은 ‘동일자의 논리’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공하는 복합적이며 역동적인 정체성 이해를 제시한다.  라칭거는 전적인 “자기 내어줌”과 전적인 “타자의 존재”를 고집하느라 두 가지를 손상시켰다. 첫째, 그는 성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한다. 만약 전적인 자기 내어줌이 성자의 자아를 구성한다면, 내어줌을 행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둘째, 라칭거의 주장은 삼위일체 내에서 성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성부가 전부라는 불평등한 근본적인 서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성자가 아무것도 아니고, 성부가 전부라면, 자신을 내어 주시는 성부의 행위는 성자의 자아를 ‘식민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말하자면, 성자는 자신의 밖으로 밀려남으로써 해체되고 만다. 라칭거는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설명하는 대신, 그분의 존재 전체를 “성부의 말씀”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성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이 대화는 독백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자는 대화에 참여하는 분이 아니라 복화술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교리가 “신약 성경 이야기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선포하며, 그 관계는 교제의 관계이고 세상에 대해 열려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몰트만은 신적 위격들이 자기 폐쇄적인 개인이 아니며 다른 위격들에 의해 그들의 특수한 위격적 정체성 안에서 규정되는 점을 강조하지만, 위격을 관계로 환원하기를 거부한다. 관계로서의 위격 개념은 “위격의 삼위일체적 관념을 해체하며” “관계의 상호 인격적 관념을 제거 한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위격’과 ‘관계’ 모두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그 둘을 상호적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신적 위격 사이의 관계는 대칭적이며 평등하고 계층적이지 않다. 만약 성부가 ‘기원’(origin)이고, 성자가 ‘나셨고’(generated), 성령이 ‘나오셨다’(proceed)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다. 삼위일체 안에서 “구성”(composition)의 차원과 “생명”(life)의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Moltmann). 전자는 위격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고, 후자는 그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성의 근원으로서 성부는 위격 사이의 상호 관계를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로 구성하신다. 모든 위격은 권능에 관해 평등하며 영광에 관해 평등하다. 삼위일체의 ‘자기 내어줌’과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로부터 자신을 내어주고 타자를 받아들인 후에도 그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자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삼위일체의 ‘자기 내어줌’과 위격들의 ‘상호 내주’라는 개념을 통해 대립적인 ‘동일자의 논리’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적 위격이 자기를 내어 줄 때도 이제 더 이상 (라칭거가 설명하는 성자처럼) 자신을 해체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은 각 신적 위격이 다른 위격들의 ‘영광’을 구하고 다른 위격들을 위해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이 된다.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주할 때도 역시 (라칭거가 설명하는 성부처럼) 다른 위격을 식민화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내주(indwelling)는 타자의 정체성이 자기 폐쇄적이며 고정적인 ‘순수한 정체성’으로서가 아니라, 개방적이며 역동적인 ‘비정체성을 지닌 정체성’(identity-with-non-identity)으로서 보존되는 것을 전제한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융합이나 혼합 없이 서로 안에 함께 내재(co-inherence)하심)는 ‘자기를 내어 주는’데서 기인한 신적 ‘상호 내주’를 지칭하는 용어다. 전통적으로 페리코레시스는 주로 신적 일치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세 위격은] 뒤섞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붙어 있기 위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전혀 융합되거나 뒤섞이지 않은 채 서로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둔다.” 페리코레시스는 정체성에 관한 사유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원이다(Plantinga Pauw). 페리코레시스는 ‘비정체성’이 ‘정체성’ 안에 내주하고 이러한 내주에 의해 구성되는 역동적 정체성을 암시한다.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능력을 통해 성자와 성령이 그분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부이시다.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다. 

 

성 정체성

지금까지의 성 정체성에 대한 나의 주장은 두개의 주장과 하나의 제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성 정체성의 내용은 성으로 구별되는 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사회적 교환을 통해 정해진다. (2)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모범을 결코 제공하지 않는다. 제안: 삼위일체 위격 사이의 관계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내용이 사회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정해져야 하는가에 관한 모형이 되어야 한다. 신적 위격의 정체성의 특징과 그 관계의 성격 안에 규범성(normativity)을 위치시켜야 한다. 신적 위격의 정체성과 관계에 대한 전망에 통제받는 상태에서 젠더에 대한 사회적 구성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규범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모형으로 남성과 여성이 특정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그들의 관계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그들의 구성 관념을 정해 나가는 절차다. 성경에 나오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명시적 진술이나 이야기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모형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에 자리 잡고 있는 사례들이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성경적 이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성 정체성과 역할에 관한 특정한 문화적 신념에 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는 제한적인 규범의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환원 불가능하지만 변화하는 성 정체성을 지닌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화의 약속을 지탱해주시는 분은, 바로 모든 인간이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된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젠더에 관한 성경의 세 가지 핵심적 진술에 대해 살펴보자. 세 진술 모두 암시적 혹은 명시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창 1, 2장; 고전 11:2-16; 엡 5:21-33). 나는 종속적 관점을 문화적으로 조건 지워진 것으로 보아 무시할 것이며, 이 진술들을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평등주의적 이해라는 틀에서 해석할 것이다. 또한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갈라디아서 3:28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주장이 담고 있는 평등주의적 주제의 관점에서 이 진술들을 바라볼 것이다. 남자와 여자.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한다(27절).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 속에서 존재한다. 창세기 2장은 이 이원성이 성에 따라 구별되는 그들의 몸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23절). 남성성과 여성성의 내용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둘 사이의 경계도 흐릿할 수 있지만, 남성과 여성의 표지는 인간의 몸에 지울 수 없게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성 차이는 인간 실존의 빼앗을 수 없는 특징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종말에 이르면 몸의 특수성과 차이가 제거되어 젠더의 뚜렷한 두 가지 형태가 사라질 것이란 논리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워지는 것은, 성으로 구별되는 몸이 아니라 그것과 결부된 문화적인 배경에 자리 잡은 규범(culturally coded norms)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순수한 영혼 혹은 젠더가 제거된 ‘개인들’의 추상적 통일이 아니라 성으로 구별되는 몸과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서 위격이 관계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는 것과 비슷하게, 한 젠더가 다른 젠더로 변형되어서는 안 되며 두 젠더가 새로운 종합으로 바뀌어서도 안 된다.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과 성 정체성의 역동적 구성을 강조할 때,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원성을 지지할 때 언제나 불평등을 인정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질성을 거부하면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을 긍정하는 동시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 공식적으로 보증되는 때조차도 여성의 열등함을 포함시키면서 그것을 영속화시키는 사회적 관행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젠더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자신의 정체성에만 배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한쪽의 젠더가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져올 수 있고 성 정체성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성 정체성은 다른 젠더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각 젠더의 개별적 전인성(wholeness)은 두 젠더를 중성화하거나 종합하지 않고 각 젠더를 다른 젠더에 맞춰 재조정함으로써 협상하는 관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장 11절의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는 한 젠더가 다른 젠더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바울은 그 근거를 육체적 창조에서 찾는다.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12절). 이 구절은 창조 안에서 위계질서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창조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 안’에서 성에 따른 몸의 차이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의존하는 근거가 된다. 상호의존을 표현하는 이중 부정(‘~없이 ~없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만나는 정체성의 본질에 부합하는 복합적이며 역동적인 성 정체성의 이해를 정확히 제시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구별되는 위격은 자신 안에 거하는 다른 위격의 내주에 의해 내적으로 구성된다. 각 위격의 정체성은 다른 위격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다른 위격의 존재는 각 위격의 정체성에 있어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삼위일체 교리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이중부정 논리 역시 다른 젠더가 ‘없다면’ 한 젠더의 정체성을 생각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한 사람이 여자라는 말은, ‘남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남자라는 말은, ‘여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남성의 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관념은 성 차이를 긍정하는 동시에 하나의 성 정체성을 언제나 다른 성 정체성의 내부에 위치시킨다.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은 보존되며, 각각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언제나 타자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삼위일체의 삶의 특징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에 있다. ‘자기 내어줌’은 자아의 상실이 아니라 자아의 긍정을 전제한다. 첫째, 자기 내어줌은 자아에 몰두하기를 포기하고, 타자를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흠이 없게’ 만들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 그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둘째, 자기 내어줌은 타자를 위해 자기를 열어젖히고 

타자가 자아 안에서 공간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적대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은 위험하고도 어려운 사랑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행에 저항하여 우리는 자기를 내어주어야 한다. 자기 내어줌에 있어 결코 성공을 확신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원의 약속을 소유한다. 왜냐하면 자기 내어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구별되지만 역동적인 성 정체성이 평화롭게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자기 내어줌이 지닌 힘을 통해서다. 

 

 누구의 갈빗대?

 니체는 여성이 남성이 지닌 이상(남자의 신, 그의 ‘이상’의 갈빗대로부터)으로부터 만들어진 남자의 창조물이라고 했다. 남자는 창조주이자 구속주(redeemer), 명령하는 자인데 비해, 여자는 질서의 강요를 간절히 바라는 혼돈, 구속을 기다리는 죄의 본성,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비합리성을 지닌 존재로 여겼다. 니체의 주장과 달리 나의 주장은 남성과 여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갈빗대’와 십자가에 달리신 이의 ‘상처 난 옆구리’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의 핵심인 삼위일체와 십자가의 교리에는 성 정체성에 관한 사유를 위한 자원이 존재한다. 첫째, 인간은 평등한 존엄성을 지닌 환원할 수 없는 젠더의 이원성 속에서 존재한다. 니체의 말과 달리 남자는 온전하지 않으며 여자는 부족하지 않다. 여자는 순종하는 한편, 남자는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명령하고 둘 다 순종한다. 둘 다 온전하면서 둘 다 부족하다. 둘째, 성으로 구별되는 몸에 기초한 성 정체성의 구성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니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각각의 정체성은 그 자체의 ‘창조’와 ‘구속’을 위해 타자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셋째, 각 성 정체성은 그 자체로 ‘타자의 정체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각 정체성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타자의 정체성을 아우르며, 두 정체성 모두 서로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젠더 간의 평등한 존엄성에 대한 긍정, 성 정체성을 구성할 때의 대칭성, 자아 안의 타자의 존재―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에 의해 작동한다. 서로가 자기 내어줌을 하는 것이 가장 완벽하고 바람직한 목표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면서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으로 끌어안으셨던 것처럼 적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서로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은 좁고 험하며 어려운 길이다. 서로 내어줌의 모범은 신적 위격들의 영원한 포용에 있다. 

 

 

2부 5. 억압과 정의 

 

정의에 맞서는 정의 

 우리는 나름의 관습과 가치 구조를 갖고 있으며 정의에 대한 관념도 사회마다 다르다. 정의에 대한 관념들이 충돌할 때, 한 쪽의 정의는 다른 사람의 야만성이 되고 사회는 혼돈에 빠지며 폭력으로 인하여 위협을 받는다. 정의는 통합과 연대를 위한 토대를 형성하므로 정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물음은 “누구의”, “어떤” 정의인지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 의하면 정의란 수많은 제약 속에 만들어진 이 세상의 것이다. 보수적인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사회는 각각의 도덕적 탐구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의 숫자만큼 많은 수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정의의 관념은 특정한 문화와 전통에 달려 있고, 평화는 문화와 전통 사이의 정의에 달려 있다고 전제한다면 결국 문화 사이의 폭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평화를 가장한 불의한 폭력을 벗어나는 길은 존재하는가? 정의와 또 다른 정의가 경쟁할 때 의로운 판단이 가능한 곳으로 나아갈 길이 존재하는가?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정의 

 고전적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의는 유일하며 보편적이고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서 사회와 문화에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민족을 위한 정의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문화들 사이에서 하나님처럼 정의에 대해 무오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은 다양한 문화와 전통, 이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특수성을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선의를 품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정의에 관한 심각한 의견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하나님의 정의 자체를 구별해야 한다. 정의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설명은 특수하며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정의로운지 잠정적으로만 판단해야 한다.  17세기의 격렬한 종교전쟁을 뒤로 하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합리주의적 이성에서 해법을 찾았다. 합리주의적 정의론은 사회 제도와 관계를 뛰어넘어 독립적이며 초연한 객관성을 가지고 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면 무엇이 정의로운지에 관해 동의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이라 여겼다. 칸트(Kant)는 문화로부터 독립적인 순수이성에 의해, 선험적으로 주어진 당위로부터 정의가 도출되며 이는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다고 보았다. 칸트가 주장한 핵심은 자율적인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자율적 인간으로, 객체가 아닌 주체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하며 그럴 때 정의가 실행된다는 것이다.  롤스(Rawls)는 칸트와 달리 이성의 명령만을 정의의 근거로 삼지 않고 합리성이라는 관념을 제안했다. 합리성이란 합리적인 사람들이 협력을 위한 공정한 조건을 제안하고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는 한 자신도 그것을 기꺼이 지키고자 하는 태도로서 모든 사람의 관점에서 판단내릴 때 무엇이 정의로운지 결정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체계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중첩되는 합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정의를 보장하는 합의가 된다. 롤스의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설명은 중립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심층적으로 대립하는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체계들을 하나로 묶어 내려고 했던 롤스의 제안은 그 자체로 특수한 포괄적 체계에 속한 정의 관념으로 귀결된다. 자유주의적 정의론은 다른 이론들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보편적인 이론이 아니라 다른 정의론과 경쟁하는 정의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설명이다. 정의는 차이의 특수성을 제거하지 못했다. 이성은 우리가 사회와 문화의 토대 위에 있으므로 정의가 특수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전망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특수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언제나 보편적일 수가 없다. 

 

많은 이름, 많은 정의

 정의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주장은 스스로 보편성을 주장하는 모든 정의론이 본질적으로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맹목적이어서 개별성과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다. 정의가 더 거대하고 강력할수록 더 많은 불의가 생겨난다. 보편적 정의에 대한 대안으로 데리다(Derrida)는 해체가 곧 정의라고 주장한다. 해체는 정의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맹목적인 체제를 부수고 개별적인 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정의 자체는 하나가 아니며,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을 가진다. 정의는 차이를 극대화하는 이점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통의 최소화를 요구한다(Caputo).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긍정해야 하며, 타인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말아야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주장은 보편적 정의에 대한 보편적 관념을 해체하고 있지만 그들이 해체한 것을 다시 조립하여 자유주의자들의 보편적 자유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정의론의 비일관성을 가지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은 어렵다. 이는 주체라는 개념을 포기할 때 사회적 행위자의 안정적 정체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의는 차이에 의해 전복되지 않을 것이다. 

 

전통 안에 있는 정의 

 매킨타이어(MacIntyre)는 정의와 정의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통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합리적 토론을 위해 사람들은 자기가 발을 딛고 있는 전통 안에 있어야 한다. 물론 원칙적으로 전통 사이의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최선은 정의와 정의 간의 경쟁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불일치를 더 건설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 하지만 미세 조정된 지적 불일치는 당장에 갈등의 긴박한 현장에서는 그들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강화함으로써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매킨타이어는 특정한 문제와 관련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틀을 제공하는 더 큰 전통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들이 충돌하여 한 전통이 다른 전통에 대해 승리할 때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나는 정의의 문제에 관한 갈등에서 전체적인 승리 대신 점차적인 수렴과 합의를 추구하는 것을 제안한다. 

 

중첩된 영토, 기본적 헌신

 사람은 사회적인 자아로서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정의에 관해서 성경적 전통과, 성도와 죄인들이 지녀 왔던 신념들과 실천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전통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문화적 세계에서 중첩되어 살아간다. 기독교 전통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흐름과 특정한 교회가 속한 문화로부터 나온 흐름이 합류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순수하지 않고 혼종적(hybrid)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전통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배경이 되는 ‘역사 이야기’는 하나의 일관된 전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신념과 실천들과 같은 기본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전통은 부차적인 현상이며 우리는 늘 기본적 헌신들과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그 전통을 점검하고 재형성해 가야 한다. 혼종성을 제거하고 일관된 전통을 세우는 작업보다 기본적인 헌신들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인 헌신들로 무장한 채 현대 문화의 세계 속에 과감하게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사회적 영역을 공유할 때, 우리는 부분적으로 서로의 전통 속에서 살아가며, 서로의 신념을 나눈다.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관점이 뒤섞여 불일치를 이루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신념과 실천을 유동적으로 만들며, 변화와 풍성함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갖게 하고 정의에 관하여 부분적인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 

 

정의, 헌신들, 차이들 

 일관된 전통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혼종성을 제거하는 것보다 다른 전통들에 대해서도 특수성을 인정하며 서로를 향해 개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딪히고 합류하는 과정에서 배제가 강화될 우려도 있지만 다른 관점들과 경험들이 뒤섞여 전통을 풍성하게 만든다. 갈등의 상황 속에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는 “확대된 사고”(enlarged thinking)를 실천해야 한다. 아렌트(Arendt)가 말한 “확대된 사고”란 관점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의 문제를 성찰할 때 우리의 인식을 풍성하게 하고 교정하도록 돕는다. ‘이중적 보’(double vision)란 타자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확대된 사고로 자신이 속한 세계의 전통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재발견하게 한다. ‘이중적 보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포용에 신학적 근거가 있다. ‘이중적 보기’의 실천은 예수에 대한 믿음의 인식론적 측면이다. 정의에 합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 안에 타자의 관점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와 싸우는 삶

‘이중적 보기’에 대해 세 가지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첫째,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갈등 상황에서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서로 다른 정의와 가치가 충돌하고 그 결과로 배제가 만연한 세상에서 ‘이중적 보기’는 유효한 대안이 될 것인가. 갈등상황에서 정의에 관해 합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의한 타자에 대한 포용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조건적이고 무차별한 포용의 의지를 갖고 행해야 한다.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정의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정의가 없다면 진정한, 그리고 지속하는 포용도 있을 없다.  둘째, 명백한 불의를 직면한 순간에도 ‘이중적 보기’를 실천해야 하는가. 불의가 미쳐 날뛰는 상황에서 정의에 관한 합의를 찾아가는 끝없는 과정은 악용되어 압제자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희생자에게는 

한숨을 끌어내지 않을까. 정의에 관해 합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불의를 저지르는 인간의 성향을 결코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의에 도달하기 전에 판단해야 하며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정의에 관한 성찰은 정의의 실행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이중적 보기’는 불의에 맞선 싸움에 참여하기 전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 가운데 행하는 실천이다. 불의에 맞서는 투쟁 중에 불의를 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의식을 길러야 한다. ‘이중적 보기’를 통해 우리의 이해를 재조정하고 불의한 행위를 회개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이중적 보기’를 하는 동안에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가.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과 똑같이 정당하게 보는 중립적인 태도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성경의 예언자적, 사도적 전통은 이것도 저것도 옳다는 중립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정의가 유일한 정의다. 중립성은 불가능하며 처음부터 강한 자들의 관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약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중적 보기’를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강자들이다. 

 

정의를 추구하고 타자를 포용하는 삶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정의를 이룰 수 없다. 사랑은 정의의 내용 자체이다. 정의의 정신을 표현하는 오래된 원칙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준다(수움 쿠이케suum cuique)는 원칙이다. “정의는 불평부당(impartial)하다”는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을 따르면 하나님의 은총은 불의하다. 하나님의 은총은 정의의 추상적 원리가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관계가 정의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평등하게 대하시지 않고 편파적으로 모든 이를 대하신다.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 각자의 개별성에 주목하신다. 동등화하고 추상화하는 정의는 불의한 정의이며 어떠한 정의 체계에 기대어 완벽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계산하고, 동등하게 만들고, 법을 만들고, 보편화하는 순서로 행동해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 사랑은 불의가 없는 정의를 가능하게 한다. 완벽한 정의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다. 사랑의 세계는 ‘권리’, ‘정당한 자격’, ‘평등’, ‘상벌’이 존재하지 않는 초월된 정의의 세계다.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 무엇도 완벽한 정의일 수가 없다”(Reinhold Niebuhr). 악한 세상에서 정의의 추구는 사랑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의를 추구한다면 궁극적으로 포용을 추구해야 한다. 억압의 세계에서 포용은 정의에 대해 기여를 한다. 포용은 정의가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 사이의 차이와 개별성을 유연하게 적절히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불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통해 궁극적인 화해에 도달하게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 가해자에 대한 제어와 처벌과 같은 불의에 맞서는 행동들은 필요한 것이지만 포용하려는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포용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화해하고 포용할 때만 구속을 발견하고 정의가 실현된다. 우리의 정체성은 서로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함께 어울리는 풍성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정의에 대한 이해를 엄격하고 초연한 판단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의 바탕 위에 두어야 한다. 맹목적인 공정성에 대한 추구를 뛰어 넘어 차이와 개별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을 지녀야할 필요가 있다. 참된 정의는 언제나 포용에 이르는 길 위에 존재한다. 

 

모국어와 재산의 공유

 포용이 정의를 완벽히 뒤덮는 것은 종국에야 가능하지만 오순절 사건은 정의가 포용에 이른 순간이다. 바벨탑의 건축이 중심으로 집중하고 동질화하고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적 기획이라면 오순절은 문화적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사회, 문화적인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소통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정체성을 이해했던 것이다.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그들은 급기야 재산을 공유했다. 사랑 안에서 무아지경에 이른 정의가 구현되었다. 그러나 오순절의 정의는 구제를 담당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과부들을 소홀히 하는데서 갈등이 발생한 것으로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오순절의 정의가 무효화 되고 있을 시점에 공동체 전체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상처를 입은 헬라파 출신의 전담자 일곱 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로운 자들로서 상처를 입힌 쪽의 과부들까지 돌보았다. 관점을 뒤집고, 타자의 관점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았다. ‘이중적 보기’의 실천을 통해 정의를 추구했다. 우리에게는 포용의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라는 웅장한 전망이 필요하다. 웅장한 전망뿐만 아니라 포용의 의지를 가진 작은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우리 자신 안에 타자의 관점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진실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타자를 끌어안아야 한다. 

 

 

 

6. 기만과 진실 

 

과거를 위한 축배

 우리는 과거에 억압받은 상처로 인하여 과거를 알고 싶어 한다. 단순한 호기심 충족의 차원을 넘어 가해자의 악행이 은폐되지 않길 원한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며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알게 된 것을 기억에서 지운다면 그것은 가해자의 죄책을 없애주는 일이다. 미래의 악행에 대한 방벽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기억하기는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한다. 그 기억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도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기억할 때, 우리가 가하고 당한 모든 고통의 기억이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축복의 잔을 들 때마다 우리는 사탄의 저주가 야기한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구원은 기억 속에 있다. 알게 된 것을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기억을 선포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억 역시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세상의 권세가 그들에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을 보았고, 압제의 실상을 공공의 광장에서 대담하게 외쳤다. 사람들이 ‘바른 것’이 아닌 ‘부드러운 말’과 ‘거짓된 것’을 듣기 원하는 이유는 억압과 기만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억압자는 기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한다. 기만의 덮개가 제거될 때 억압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벌거벗는다. 과거의 상황이 어땠는지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기억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그것을 크게 선포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볼프에 대한 반대 

과거의 기억에 대한 나의 주장에 대해서 다음의 두 가지 이의 제기가 나올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알기로 선택한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기억이 증오를 영속화할 위험이 있고 기억은 가해자에 대한 일종의 복수일 수가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저 기억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는지 아니면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는지 화해를 추구하는지 아니면 복수를 추구하는지가 중요하다. 구원은 단순하게 기억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기억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 아닌가? 기억이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먼저 기억 자체가 구속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둘째, 우리는 기억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기억 자체는 우리가 그 기억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기억할 가치가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는가? 관점에 따라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보고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 희생자의 숫자에 관한 논란처럼 기억은 선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구체적인 기억은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신념뿐만 아니라 개인적, 집단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해석의 문제가 개입되므로 사실과 사건에 대한 역사의 재구성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위의 두 가지 이의 제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기억’과 ‘역사’의 용어 사용에 대한 첨언을 하겠다. 과거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역사’)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거의 기억(‘기억’) 사이의 구별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유동적이다. 모든 역사적 재구성은 특수한 정체성과 이익에 의해 규정되며, 과거의 기억은 과거에 관한 신화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역사’는 사회적 ‘기억’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며, ‘역사’만큼이나 ‘기억’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실제로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존중해야만 한다. 아래에서 나는 ‘기억’보다 ‘역사’에 더 초점을 맞출 테지만, 탐구할 주제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런 지식과 그런 기억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전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어난 일을 그대로 말하기 

 근대 역사가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온전히 그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객관적이고 진실한 단 하나의 진리를 알아낼 수 있는 확실하고 유일한 관점과 방법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역사와 지식 전에 대한 근대의 합리적 방법론은 미신과 편견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자 했고 순수한 합리적인 방법과 통일된 학문을 통해 의견 일치를 이룬다면 평화가 올 것이라 여겼다. 중요한 문제에 관해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근대적 합리론의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럴듯해 보인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정확한 심판을 내리실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고 판단은 항상 오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문화와 전통에서 형성된 제한된 지식으로 인해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안다. 확실하고 유일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오히려 파편적인 지식일 수밖에 없다.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의 토대, 해석되지 않은 경험, 세상에 대한 완벽하게 명료한 해석, 순수한 중립적 입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한 사실’에 접근할 수 없으며,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엄밀하게 재구성해 낼 수 없다.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것은 고귀한 관심일 수 있지만 ‘객관적 진리’는 성차별, 인종차별이나 공산주의가 행한 과오처럼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일 수 있다. 

 

진리의 체제들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에 대한 입장은 진리란 계시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생산되는 것이란 입장이다(이하 대부분은 푸코(Foucault), 역사학에 대한 부분은 볼프(Volf)의 주장). 진리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권력에 의해 생산된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권력 투쟁의 수단에 불과하며 진술은 참으로 혹은 거짓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다.” 진리를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제약이 필요하며” 그 제약의 수단을 갖기 위해 사회적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이 앞서고 그 다음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권력에 의해 생산된다. 사회적 투쟁의 무기로서의 진리 관념을 역사학에 적용해 보자. 중립적이고 포괄적이 되기 위해 역사가들은 잘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를 침묵하게 만들고, 차이를 배제한다. 보편적인 것을 이해하고자 하면서 특수한 것들을 왜곡한다. ‘전체적 지식’을 추구하면서 지나치게 큰 일반화라는 장화를 신고 섬세한 짜임과 차이로 이루어진 사회적 삶을 마구 짓밟는다. “삶에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항상 존재하여” 다른 모든 지식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지식의 추구는 그 대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것이 선언되고 믿어지는가이다. “진리의 체제”(the regimes of truth)가 존재하여 지식이 참으로 혹은 거짓으로 걸러내는 기능을 한다. 진리로 통과되는 것만이 진리로 인정된다. 지식이 권력에, 권력이 지식에 연루되어 있어, “진리의 게임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없다.” 지식은 폭력이고 진리는 실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생산되고 구성되고 덮어씌운(is imposed) 것이다.  복잡하게 뒤얽힌 사회적 관계 속에서 특정한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합의하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 우리의 욕망과 이익,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욕망과 이익, 공격과 고통의 공통된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찾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는 것을 보게 하고,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게 만든다. 푸코의 말대로 진리가 덮어씌워지는 것이라면 지식에 관해서 획득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권력에 관해서는 획득이 있을 수 있다. 푸코는 개인의 의식을 바꾸는 것보다 진리를 생산하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체제와 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진리의 힘보다 ‘권력의 진리’가 더 강하다. 말의 힘보다 총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갈등의 상황에서 논증은 폭력에 의해 무력해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써 인간의 영역에서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하기를 원해야 한다.

 

 이중적 보기

 근대적 이상은 지식을 권력투쟁에서 해방시키고 대결의 폭력을 무장해제하는 것이었고 갈등 당사자들이 인정할만한 “사실적 진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법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처한 입장과 관점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사실에 바탕을 둔 진리는 세워 질 수 없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표는 “권력의 진리”로 법률, 의미, 진리라는 관념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의 표현들이나 경쟁하는 힘들 간의 대결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진리라는 관념의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의 표현들”을 폭로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을 왕좌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중적 보기란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동시에 자신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모든 곳으로부터” 즉,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면서 바라보시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여기로부터” 바라보면서 “거기로부터” 바라보는 이중적 보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타자성을 약화시키지 않고 그들의 입장을 지키도록 허용할 수 있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자신의 입장을 잠시 유보하고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다. 자신이 취했던 타자에 대한 입장을 재점검하여 왜곡된 부분과 기만의 요소를 들춰낸다. 둘째, 우리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그곳에서 살아야한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목표는 “우리가 그들 모두가 서로를 왜곡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언어, 공통의 인간 이해”를 획득하는 것이다(Taylor). 

 

진실과 포용 

 진리를 찾으려는 관심과 마음이 필요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는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자기를 추켜세우는 자기기만과 권력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와 결별해야 하며 우리 정체성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우리의 실천을 개혁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 진리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타자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시작하고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지와 더불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리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 두려움 없이 진리를 외치기 위해, 진실한 삶이 필요하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진실성을 넘어서서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동반해야 하며 타자에 대한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의지를 발휘해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사람을 죽이는 지식이 될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진리도 없을 것이며 평화도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사귐에 대한 포용의 의지를 통해 합리성 사이의 갈등을 풀 수 있다. 

 

진리와 공동체 

 진리를 위해 포용이 필요하다. 공동체 속에서 진실 말하기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성을 띤다. 첫째, 진리는 명백히 드러난다. 진리란 실재를 따르는 것으로 말은 실재에 상응해야 한다. 둘째, 인간 상호작용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목적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적절히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진리는 공동체를 지탱하지만 기만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진실은 신뢰를 지탱하고 거짓말은 신뢰를 파괴한다. 진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해야 한다. 진실에 대한 관심과 신뢰에 대한 관심은 상호보완적이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공동체가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중요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진리에 의존하며, 진리는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진실한 전사들의 투쟁에 의존한다. 

 

빌라도 앞의 예수: 권력에 맞선 진리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권력의 진리”에 맞서 “진리의 권력”을 옹호하신다. 가이사의 권력이 폭력에 기반 한다면 진리의 권력은 비폭력적인 증언에 기반 한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이 보거나 들은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리 이외의 것을 슬며시 끼워 넣거나 조작을 가하지 않고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다. 증인의 의무와 능력은 진리를 말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것, 즉 타자의 타자 됨을 지켜주는 데 있다. 예수님은 폭력의 권력을 거부하셨고 진리를 증언하셨다. 듣는 자는 진리에 속해야 하며, 진리에 서야 한다. 진리의 증언을 듣는 것과 더불어 진리에 속한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진리, 자유, 폭력 

 예수님, 가야바, 빌라도 사이의 대면에서 드러난 ‘진리’와 ‘권력’의 전근대적인 접촉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나 자신의 자아보다 진리가 중요하다. 개인적, 공동체적 이익을 넘어 진리가 중요하다. 둘째, 타자의 자아는 나의 진리보다 중요하다. 진리를 위해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하지만, 나의 진리를 위해 폭력으로 타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진리는 비폭력의 기반 위에 있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와 비폭력에 대한 이중적 헌신의 열매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바라본 절대적인 진리에서 한 발 벗어나 자아로부터 타자로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다시 자아를 성찰해야 한다. 모두의 관점에서 공동의 역사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7. 폭력과 평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백마를 타신 이 

 예수님은 가이사의 세계에서 진리와 정의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빌라도의 “권력의 진리”가 가이사의 칼의 열매라면 예수님의 “진리의 권력”은 가이사의 칼에 대한 대안이었다. 우리의 본성은 가이사의 칼에 맞서 무력하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비폭력을 따르기는커녕 폭력이 난무한 세계에서 부활의 메시아를 본능적으로 붙잡는다. 자아의 내적 세계를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붙잡지만 자아의 외부에 있으면서 이익과 권력이 충돌하는 자리에서는 백마를 타신 권능의 메시아를 바란다.  정의가 이루어지고 진리가 존중되는 세상은 가이사의 칼로 가능하지 않다. 폭력을 없애고자 했던 칼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며 악순환에 갇히게 된다. 가해자 자신들이 내세우는 진리와 정의는 억압과 기만일 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중에도 현실 세계의 곳곳은 사회적 부조리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고, 진리와 정의의 심각한 불일치가 영속화되고 있다. 우리의 질문은 진리와 정의의 통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이사의 통치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할지, 심판자로서 백마를 타신 이의 군대의 일원으로 그 깃발 아래 모여 폭력을 모방하는 행동을 해야 할지, 아니면 두 가지 다 포기하고 종교 이외의 방면에서 평화를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폭력에 맞서는 이성

 보편적 이성에 기초한 근대의 합리적 방법론은 문명화가 진전됨에 따라 야만성을 벗어나 평화로운 공존으로 나아가리란 믿음이 있었다. 계몽주의의 낙관적 전망에 따르면,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모든 비합리적, 반사회적 충동은 점차 억제될 것이며, 사회적 삶으로부터 폭력은 점점 제거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폭력이 여전히 일어나는 것은 문명화 과정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이며, 우리가 더 발전을 이루어야 함을 상기시켜 주는 현상이다. 칸트(Kant)는 폭력이 점차 소멸되어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적(cosmopolitan) 사회가 실현될 것을 예견했다. 엘리아스(Elias)는 사회의 근대적 조직화가 본능을 억제하게 만들어 공격성과 폭력성이 감소할 것이라 보았다. 수많은 규칙과 규제에 의거해 국가가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함으로써 개인의 삶에 지속적이고 일정하게 압력을 행사하여 예측 불가능한 폭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이 폭력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관념은 순진한 신화에 불과하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폭력 자체를 감소시키지 않았고, 불규칙한 폭력만 감소시켰을 뿐이다. 근대 사회들을 보면 공격과 잔인성, 그리고 이런 것들을 즐기는 태도가 줄어들지 않았다(Dürr).  폭력이 점진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근대적 합리론의 시각에서 보면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아직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전근대적 야만성의 찌꺼기가 비합리적으로 분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Bauman). 바우만은 근대적인 관료주의 문화가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근대성에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을 만한 효과적인 장치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근대의 도구적 합리성의 정신과 그에 따른 근대적, 관료주의적 형태의 제도화가 홀로코스트 식의 해법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것을 ‘합리적’으로 만들었다. 바우만은 근대적인 ‘문명화’ 과정이 사회적 삶에서 폭력을 몰아내는 대신, 똑같이 파괴적이며 살인적인 일을 계속 수행하는 새로운 장소에 재배치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국가의 관료제와 기술은 야만성의 규모를 유례없는 가공할 수준으로 확대해 놓았다. 근대의 도구적 이성은 평화의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다. 문명과 야만적 잔인성은 반대말이 아니다. 문명은 ‘의료 위생, 숭고한 종교 사상, 아름다운 미술, 세련된 음악’뿐만 아니라 ‘노예제, 전쟁, 착취, 포로수용소’도 의미한다

(Rubenstein).

 

 전쟁하는 사람들, 호전적인 신들

 비서구 세계에서 종교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공적 삶에 다시 개입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순간에 종교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라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고 있다. 벡포드(Beckford)는 종교가 사회적 제도로서보다는 문화적 자원으로서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서구에서 과거와 같은 강력한 종교 독점이 사라졌고 종교의 탈규제화가 일어났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종교는 다른 사상이나 가치와 결합하여 사회적 갈등의 국면에서 논쟁을 야기한다. 다양한 사회 집단 간의 갈등에서 종교적 상징이 활용되어 전쟁에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변질될 수 있다.  한스 퀑(Hans Küng)은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 간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가 공적 삶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점과 ‘가장 광적이며, 가장 잔인한 정치 투쟁은 종교에 의해 채색되고 영감을 입고 정당화된 투쟁’이라는 이중적 가정에 기초해 ‘종교에 맞서서는’ 결코 평화를 촉진할 수 없으며 ‘종교를 더불어서만’ 평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종교 간의 평화는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서 확립될 수 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화해는 종교 간의 대화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본다. 하지만 종교 간의 평화가 확립되어 화해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종교 전쟁 정도 밖에 막을 수 있을 뿐, 사람들 사이의 전쟁과 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불관용이 전쟁을 조장하는 모든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로 인한 마찰보다, 전쟁을 벌일 때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가 동원된다. 만약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평화라면, 종교 간의 화해보다 폭력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를 비판하는 일이 시급하다.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많은 종교는 비폭력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지닌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비폭력을 옹호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상황에서는 폭력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는다. 종교의 대변자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는 동시에, 자기 나라 군대가 보유한 폭력적인 무기를 축복한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비폭력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비폭력의 원칙이 언제든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으로 환원되고 만다. 폭력의 사용을 도덕적으로 승인하기 위

해 종교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는 원칙이 없다면 종교는 호전적인 정치인과 군인들에 의해 악용될 것이다. 

 

우주적 테러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근대적 이성과 고대 종교를 모두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Deleuze)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는 것은 불타는 유황 못에 빠지는 것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 첫째, 새 예루살렘은 전체주의적이다. 절대적인 사법적, 도덕적 통치가 이루어져 독재 체제보다 철저한 방식으로 권력에 의한 내부 지배가 이루어진다. 새 예루살렘에는 숨을 곳이 없으며 항소할 상위 법정도 없다. 모든 것에 대해 최종적인 심판자인 하나님의 판결이 내면화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지옥과 다를 바가 없다. 둘째, 온 우주가 사망의 어두움 속에 둘러싸인 후에야 예루살렘의 밝은 빛이 비칠 수 있다. 즉, 세상이 멸망되는 우주적 테러와 동시에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와 거룩함을 실현하기보다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복수심에 의해 꿈꾸는 우주적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들뢰즈의 두 가지 반론은 기독교의 천국은 지옥과 구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 진리와 정의의 실행을 가장한 우주적 테러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와 밧모의 요한이 그린 요한계시록의 그리스도는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대조를 이룬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예수님은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종국에 세상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우주적 테러의 실행자이다.  들뢰즈는 ‘흐름으로서, 자아의 안과 밖에서 다른 흐름들과 관계를 맺는 흐름의 다발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나’로 여기기를 멈추라’고 권한다. 그는 통일성보다 다양성에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주적 테러에 대한 들뢰즈의 세 가지 해법은 명확한 단계를 따른다. 나를 부인하고(주체 없음), 억압적인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판단하기에 의한 경계설정 없음), 판단의 체계를 거부하고 판단하지 않기(테러 없음)가 이에 해당된다. 첫 번째 단계는 ‘나’를 긍정하지 않으면 ‘나’를 부인할 수도 없으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단계는 경계가 없다면 혼돈만이 남을 뿐이다. 설령 첫 번째, 두 번째 단계가 성공적으로 이행되었다 하더라도 판단의 부재는 폭력의 부재가 아닌 폭력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Sartre). 판단의 체계로부터 기인한 테러보다 아무런 판단이 존재하지 않을 때의 테러가 더 나쁘다. 판단의 체계 없이 억압과 기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판단을 초월하려는 시도는 폭력을 제거하기는커녕 폭력을 왕좌에 앉힌다.  폭력의 문제에 대한 들뢰즈의 해법은 문제가 있지만 그가 기독교에 가하는 비판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 폭력을 조장하는 데 연루된 것은 그저 개별적인 차원에서 인가, 아니면 핵심적 차원에서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라는 기독교의 이미지는 근원적으로 억압적이며 전례 없이 폭력적이지 않은가? 들뢰즈가 제기하는 진지한 물음은, 판단의 테러 없이 테러에 대한 궁극적 심판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one can have ultimate judgement against terror without the terror of judgement). 즉 기독교 신앙은 진리와 정의에 관한 판단을 긍정하면서 폭력을 부인할 수 있는가?

 

폭력의 악순환 끊기 

 폭력은 신약성경의 핵심주제는 아니지만 구원의 드라마는 폭력으로 시작해 폭력으로 끝난다. 폭력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사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 드라마 전체의 폭력에 대한 태도를 성찰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검을 취하되(눅 22:36), 사용하지 말라고(마 26:52) 하신 것 등 예수님의 몇 가지 말씀을 골라내거나, 칼을 가진 국가는 하나님의 일꾼이지만(롬 13:1-5) 그리스도인들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한다는(롬 12:19) 바울의 가르침이나 세례 요한이 군인들에게 그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눅 3:14)만을 성찰해서는 폭력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얻을 수 없다. 이 본문들은 중요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폭력과, 재림의 순간에 백마를 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폭력에 대한 내용을 가장 핵심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네 가지 방식으로 폭력에 도전하셨다. 첫째, 십자가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복수의 원리를 무저항의 원리로 바꾸라는 자신의 명령에 대한 궁극적인 모범이 되셨다. 그분은 폭력을 받아 흡수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리셨다. 둘째, 십자가는 희생양 기제를 폭로한다. 기만과 억압의 세상에서 그분의 진실성과 그 분의 정의 때문에 그분은 불의한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지라르(Girard)에 따르면, 복음서는 희생양 기제의 가면을 벗기는 기능을 한다.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한 예수님의 싸움의 일부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것은 가이사의 칼로써 대변되는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대한 반대였다. 비폭력을 테러 체제와의 전투에서 더 큰 전략의 일부로 삼아 창조적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것을 새로운 세상의 토대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만과 억압에 맞서는 싸움이 필요하다. 넷째, 십자가는 기만과 불의의 사람들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포용이다.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불의하고 기만적인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지셨고 이러한 속죄를 통해 우리를 포용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은혜와 포용의 장소로 바꾸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희생양이 되셨다. 계몽주의는 보편적 이성이 폭력을 점진적으로 소멸시킬 것으로 보았고,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거대 내러티브에 맞서 미시적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께서 타자를 포용하기 위해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폭력을 기꺼이 흡수하려는 태도이다. 그렇다고 폭력에 맞서는 무기로 이성과 담론의 유용함을 거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포용의 의지를 가진다면 이성과 담론을 폭력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백마를 탄 자

 요한계시록에서 백마를 타신 이는 악을 행하는 이들에 맞서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 비폭력이 언젠가는 폭력을 몰아낼 것이라는 환상과 달리 현실 세계에서 그것은 고난의 길이다. 이성에 끈질기게 호소하는 것으로도 폭력은 세상에서 제거되지 못한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야겠다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원해야 하고, 타자를 포용하겠다는 생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타자를 포용하기를 원해야 한다. 폭력적인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달리 현실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악을 행하다가 결국 자신을 구속하려는 모든 노력을 무력하게 만들 지경에 이르는 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가 개입하는 시점이다. 악행에 분노하지 않는 하나님은 불의, 기만, 폭력의 공범이 될 것이다. 악을 행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테러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악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두 팔을 벌리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메시아의 강력한 끌어당김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의와 기만의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방법이다. 백마를 탄 자의 폭력은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의 결론은 폭력인가? 심판은 그들의 손에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기만과 불의, 폭력을 종식시킴으로써만 정의와 진리, 평화의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다. 심판의 목적은 죽은 듯이 고요한 최종적 폐쇄가 아니라, 차이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며 평화롭게 끌어안는 영원한 춤이다. 세상의 종말은 폭력이 아니라 끝없는 비폭력적 포용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온 우주를 다스리는 보좌에 앉으신 이는 어린양이다. 장차 올 세상은 적의를 정복하고 원수를 끌어안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폭력을 감당하신 그분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어린 양의 통치는 ‘칼’이 아니라 그 분의 ‘상처’에 의해 정당화된다. 통치의 목적은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하는 것이다. 

 

십자가인가? 칼인가? 

 하나님만이 폭력을 행사하실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방할 의무보다 더 앞서는 의무가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을 의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시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되게 할 의무다.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고 백마 탄 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는 안 되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라가야 한다. 고통당하는 메시아와 공의로 심판하는 백마를 탄 자는 서로 하나다. 그 둘은 피를 흘리게 하는 폭력의 공모자가 아니라, 비폭력을 촉진함에 있어서 협력자다. 역사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확신은 역사 가운데서 벌어지는 폭력을 거부하는 전제조건이다. 진리의 추구와 정의의 실천을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의 세상에서 비폭력과 용서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대체하거나 이전(transfer)하는 것이다. 아틀랑(Atlan)은 하나님의 폭력이 사랑의 하나님의 한 양상이라고 주장했다. 폭력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법은 폭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때만 정당하다(Atlan). 폭력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theologization of violence)은 비폭력 정치의 전제조건이다. 하나님은 폭력의 세상에서 불의와 기만에 대해 분노하여 칼을 휘두르시는 분이다. 인간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폭력을 행하거나 그렇게 되도록 묵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칼을 휘두르기를 거부하신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그것은 오히려 은밀하게 폭력을 조장하고 번성하게 한다.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수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의 가능성, 평화의 가능성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하듯이 성경에서 보는 평화의 전망은 희망적이다(사 11:1-9). 평화의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이시므로 폭력은 인간의 운명이 아니다. 성경적 전망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라는 과업을 부과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마음을 굳게 하여 복수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순환을 끊어야 한다. 폭력의 세상에서 비폭력을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미쳐 날 뛰는 폭력을 폭력적인 수단으로 막아야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를 따라 비폭력을 고수하는 대신 백마 탄 자를 따라 폭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에서 그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해선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칼을 들어서 ‘정당한’ 폭력을 사용해야할 경우에도 그 폭력은 종교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배제와 포용 해설- 강영안

2017-09-08 01:06:03


 

강영안 교수님 강연 내용 정리

2012.10.25.(목) 정리: 이주일

 

✻ 완벽한 녹취는 아니고, 내용이 대체적으로 빠짐없이 포함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남의 책으로 이야기하려니까 편하진 않아요. 철학자들은 보통 죽은 사람들 책으로 이야기하는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 사실 죽은 사람들 책이 훨씬 익숙하거든요. 미로슬라브 볼프는 살아 있고 저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려요 (웃음) 제가 85년에 박사학위 했는데, 볼프는 86년. (웃음) 

 

우리가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디 가나 배척 받거나 칭찬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처음 서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것을 보면, 기독교인은 공식적으로 배척 받는 종교였죠. 순교하고. 나중에 국교가 되면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때 신앙은 수용이 안 되었지만, 기독교인은 어디서나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짐 월리스가 쓴, IVP모던 클래스, . 이게 9번째 책이네요. 제자도, 사회참여. 여기 보면 이야기가 잘 나와 있습니다. 병자를 돌본다든지, 장례 치르지 못한 시체를 장례 치러준다든지. 어린 아이들, 고아들을 돌본다든지. 그런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고 타자를 위해 섬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 수많은 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초기 교회 때 그리스도인이 어딜 가나 칭찬을 받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타인을 위한. 선교 120년 지난 지금 와서 보면 부끄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을 비난할 때 쓰는 몇 가지 형용사, 자기 중심적, 배타적, 이기적 이런 단어죠. 직장 동료로부터, 이웃으로부터, 타종교로부터 그리스도인이 이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학자에 따르면, 6.25를 기점으로 삼는데, 6.25 이후에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의 오리엔테이션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잠시 10년 전에 한국 교회의 신앙의 실천과 전통적 종교에 대해 글을 쓰느라고 들여다 본 적이 있는데, 윤채호 선생의 경우, 유교는 사람이 왕으로 태어났다고 하면서 거지로 만드는 종교인데, 기독교는 사람이 거지로 태어났다고 하면서 왕으로 만드는 종교다. 타락을 두고 하는 이야기겠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면서 결국 아주 고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기독교다. 그래서 나라를 건질려면 유교로 안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 두번째, 길선주 목사의 경우,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따른 종교는 썩은 동아줄과 같다. 절벽에 떨어져서 기어 올라 살아야 하는데, 유교, 선교, 도교는 썩어서 더 이상 타고 올라갈 수가 없다. 기독교는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다. 그래서 개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 유교나 도교 보다는 불교 영향을 받은, 샤머니즘화된 불교.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조용기 목사입니다. 그의 설교를 들여다보고, 동영상 보고 했는데. 장점도 많지만, 요약하면, 내세지향적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타당한 신앙. 지금 여기서 곧장 문제를 푸는 그런 신앙의 오리엔테이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는 주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산기도를 갔을 때, 내일 기도와서 내 설교를 듣는 사람이 다 문제해결을 받고 가게 해 주옵소서. 이게 늘 드리는 기도였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와 기도할 때, 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게 가정의 문제, 돈의 문제, 질병의 문제. 온갖 종류의 문제가 해결 받았습니다 하면서 나가는. 그런 방식의 설교, 교회의 오리엔테이션이 생긴 것이. 그 이후에 순복음교회 영향을 받지 않은 장로교도 영향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도 있지만, 거의 순복음화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걸 1950년으로 잡을 수 있고, 1960년으로 잡을 수도 있고.

 

저는 종교는 사회 속에서 두 가지 기능이 있지 않나 하는데, 개인의 욕구를 해결하고. 또 그 욕구를 넘어서 그걸 초월하고자 하는 방향. 그래서 다른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있겠죠. 현대 한국 개신교는 초월이 약화되고 개인의 욕구가 최대화된 것이 아닌가. 욕구 중심의 기독교는,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달라고 할 때, 대부분 나이 많은 분들, 어머니, 아버지는 주로 자식들의 취직이나 건강, 가정의 평화. 이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죠.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첫번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가 앞서고 삶에 처한 상황들 보고, 시험, 악에서 피하게 해 달라.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것과 대부분의 제목이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대해 배타적인가. 다른 생각, 다른 교회. 남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배타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는가 보면, 자신이나 자기 집단.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타자는 이 때 배제가 되고, 이익이 될 때는 동반자이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무관심한 존재가 됩니다. 기독교에서 타자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 철학에서 타자가 매우 중요한 존재로 다루어졌지만,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타자는 거의 사실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볼프의 책이 지금부터 한 16년전에 나오면서, 타자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이미 어쨌든 이 책을 다 읽은 분은 저의 강의가 필요 없습니다. 책이 쉬운 책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꼼꼼히 읽지 않고서는 절대 끝까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읽었다면, 몇 가지 뼈대만 오늘 이야기하는거라.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읽지 않은 분들은, 크게 도움이 될까 조금 의심이 됩니다. 그러나 읽지 않은 분들도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고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진 마시고, 끝까지 들어보시고, 어렵긴 하지만 대단히 유익한 책이 되리라 생각하고. 대강 한 번 예고편 보는 것처럼, 조금 들어보고 스스로 저의 이야기에 승복을 하면, 저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게 하면 아마 이 책을 잡고 공부를 하게 될 것이구요. 아마 관심을 일으켜주지 않으면, 오늘 이걸로 볼프와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웃음) 모르겠습니다. 그건 저한테 달려 있기도 하고,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갈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나와 남 사이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한 세대와 뒤따라오는 세대 사이에, 한 지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 한 종족과 다른 종족 사이에, 한 문명과 다른 문명 사이에 있어왔던 투쟁과 갈등이 문제 상황으로 등장합니다. 갈등이 있으면 싸움이 있고, 죽이고 복수가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삶은 갈등의 악순환으로 신음하게 되는 거죠. 이 땅의 삶은 홉스가 말한 용어를 쓰면, 하나의 시민 상태. 국가가 있는 상태로 말하지만, 사실상 자연 상태로 되돌아온 것 같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책 서두를 보면, 첫 구절이 혹시 우리가 도덕으로부터 속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도덕의 희생자가 아닌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당히 도덕화되고 문명화된 상황에 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도 전쟁으로 인해서 심각하거든요. 지난 역사가 인간에게 준 교훈과 교육의 효과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볼프가 목도한 것이 1990년대에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 있죠? 볼프는 내 고향 크로아티아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갈등의 악순환에 사로잡힌 상황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 책은 그 결과이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전쟁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그 대안은 급진적입니다. 이 책을 보면, 정치적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저 뿌리까지, 래디칼, 그 말 그대로 밑뿌리까지 내려가서 뒤흔드는 그런 논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볼프가 내세운 대안이 급진적이 아니었다면, 볼프의 선생님, 유르겐 몰트만이 볼프에게 하지만 채트닉을 끌어안을 수 있겠는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채트닉은 크로아티아 사람을 무참히 죽인 전사들을 말합니다. 포용, 아니 포옹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선생 몰트만에게 던지는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인간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는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일이 있을 때, 양보하고 용서하고 할 때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갈등이 발생하는데, 나와 남을 구별하고 그것을 토대로 내 쪽에 속하는지 저 쪽에 속하는지, 편을 가르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죠. 갈등 상황은 심각한 상황으로 가지 않고, 대개 소멸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말의 싸움이 생기고, 심지어 무력이 생기죠. 그래서 홉스의 자연 상태가 발생하는 겁니다. 홉스는 자연권이라고 부르는데, natural right 이것은 자연 상태, 즉 전쟁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호모 호미니 루프스 Homo homini Lupus 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법을 정하는 겁니다. 실정법의 토대가 되는 법을 홉스는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natural law 이 자연법의 첫번째 조항이 상호조약입니다. 서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 그렇게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를 불러오는, 그러기 위해서 모든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고, 생존권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그것을 사회적 언약이라는 말로 표현했죠. 그렇게 해서 평화를 가능케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홉스가 법을 이야기한 것처럼, 칸트도 법에 호소하죠. 이 전통은 에라스무스로 가고, 휴고 그로티우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인데요. 칸트는 국제법에 따르고, 하나의 강제적 기구로 국제 연합을 제안했죠. 유엔이 만들어진 것은 칸트의 영원한 평화론에서 제안한 것을 따랐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철학자, 키가 150센티밑터 밖에 안 되는 철학자가 유럽과 미국을 설득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적 방식, 홉스나 칸트의 해결 방식은 니것과 내 것을 구별하는 겁니다. 나의 영토와 너의 영토, 나의 민족과 너의 민족, 나의 종교와 너의 종교를 구별하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만큼 너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런 해결 방식은 개신교, 카톨릭 문제를 해결할 때, 국가의 수장이 가진 종교가 그 영역의 종교가 되는 방식과 동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영역을 분리하고 그것을 존중하자. 근대적 방식은 영역의 존중과 그 분리를 존중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극단적 배제나 극단적 포용을 지적하면서, 배제와 제거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습니다. 20세기 유럽 상황이나 위의 경험을 보면, 법을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1990년대는 볼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발칸반도, 구 유고슬라비아죠. 인종 청소가 발생한 비참한 경험이 있었구요. 카톨릭, 이슬람, 정교회 등 종교적 차이가 나쁘게 작용한 경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청일 전쟁에서 전쟁터가 되었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30여년 동안 일본의 영토가 되었고, 한국 전쟁의 경험을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이 근대적 대안이 되는가. 근본적 물음을 묻게 한 사건이죠.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나라와 나라,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 그 라인홀드 니버의 주장이 현실적인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여전히 20세기는 전쟁을 경험한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남한과 북한 여전히 군사적 대립 상태가 유지되고 있구요. 이런 상황에서 아마 하나의 대안은 법과 도덕에 대한 냉소주의자가 되는 것인데요. 아까 제가 레비나스 말 소개한 대로, 우리가 도덕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성의 토대 위에 법을 세웠는데, 도덕은 여전히 연약하고 법은 불의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정치는 곧 전쟁의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치가 이런 수단으로 여겨지는 한, 진실이나 정의, 평화를 기대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레비나스를 따라 과장해서 말하자면, 근대는 정치를 전쟁 기술로 봐서 평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볼프의 신학적 논의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눈 앞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의 정치적 프로그램은 대안이 될 수 없고, 포스트모던의 정치철학도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할 때, 즉 리요타르 등은 일치하려 하지 말고 차이를 만들라. 차이를 강조하고 차이화를 강조하는 철학도 해결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볼프는 스스로 묻고 있는 것이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를 닮아 따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취할 수 있는 삶의 관점과 내용은 무엇인가. 여기서 양 극단이 있을 거에요. 하나는 라인홀드 니버처럼, 심지어 동생인 리처드 니버로부터 비판 받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취할 것인가. 또 한 극단은 재세례파 존 요더처럼, 평화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예수 십자가의 관점과 만물의 회복을 기대하는 관점은 이 물음에 어떤 관점을 열어주는가. 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볼프는 매우 현실적인 물음을, 매우 이론적이면서 실천적 함의가 담긴 방식으로 여러 성경의 네거티브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두 부분인데, 배제, 포옹, 포용, 성 정체성을 다루는 게 한 부분이구요. 그 다음은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가치, 특히 정치 신학에서 다룰 중요한 개념, 진리, 진실이라는 개념, 정의라는 개념, 평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어느 부분에서나 볼프의 신학적 이해의 탁월성이 드러납니다. 첫째 부분은 볼프 정치신학의 지향을 보여주구요. 둘째 부분은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관점에서 진실의 문제, 정의의 문제, 평화의 문제를 각각 다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전에, 볼프의 신학함의 특이함에 대해서 세 가지 포인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볼프의 논의 방식은 다루는 주제에 대한 한편으로는 근대적 관점을 보여주고요.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을 드러내서 비판하고, 그러면서 포스트모던적 해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성경의 내러티브로 되돌아가는 것이 볼프의 신학하는 아주 특이한 방식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방법을 이처럼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 신학자를 저는 보지 못했어요. 신학자 가운데 모더니즘을 곧장 따른 경우가 많았죠. 70년대 60년대는 대개 모더니즘을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아니면 아예 아주 포스트 모던적인 신학자가 있었는데, 볼프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다양하게 섭렵하면서, 포스트모던으로 모던을 비판해요.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생각할 정도로 전개하는데, 그리고 다시 벗어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전개를 합니다. 

 

어릴 때 신학을 공부한다고 잠시, 저의 첫사랑은 신학이었습니다. 아니 문학이었을 거에요. 첫사랑은 아니네요. 시 쓰고 소설 쓰고 그런 걸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신학에 발을 들였는데, 처음에 벌코프의 조직신학이었어요. 신의 존재, 신의 공유적 속성, 비공유적 속성, 그 다음에 삼위일체가 나오더라구요. 왜 이렇게 나오나 몰랐어요. 나중에 철학을 보니까, 철학의 영향 때문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습관이 다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이런 관심이 있는데. 볼프는 철학과 신학 사이에 왔다갔다하는게 아니라,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그런 눈으로 보면, 성경은 아주 래디컬하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물음을 주고, 그 물음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다시 물음을 얻는, 그러다가 래디컬한 대안을 준다는 것이죠. 이런 방식을 세 가지로 말하면, 대화하고 대결하고 대안을 찾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상당히 어떤 문제, 주제를 다루더라도 볼프의 신학하는 방식을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볼프의 신학 방법은 대화론적이다. 동시에 성경의 내러티브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성경 신학적이다. 부인이 성경 신학자니까.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외교적 수사인지(웃음) 모르지만, 확실히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두번째, 볼프의 신학함의 특징은,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볼프의 논의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셨습니다. 그 내어주심, self-giving은 희생자와 억울한 사람만을 생각할 수 있는데, 볼프는 그리스도의 내어주심은 가해자의 죄책조차 짊어지신 사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품으시는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볼프는 폭력에 대한 도전을 보게 됩니다. 인간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 르네 지라르, 발음이 좀 이상하죠? (웃음)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는 희생양 만들기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을 지라르에게 동의하죠.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볼프는 예수가 폭력을 스스로 받음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었다. 지라르와 같은 해석이지만, 지라르는 대속적 희생은 받아들이지 않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깨뜨린 사건이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폭력의 악순환을 완전히 끊어버린 종교다. 볼프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는 폭력을 예수님이 수동적으로 당할 뿐 아니라 사탄의 세력을 쳐서 이긴 사건이라고 보는 거죠. 승리자 그리스도, Christus Victor 볼프는 이걸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피해자, 기만과 불의의 가해자도 받아들인 사건이다. 이 부분은 자세 이야기 못합니다만, 해당 부분을 읽어보시면, 신학적 사유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예수는 구세주일 뿐 아니라,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가 삶의 중심이 됨으로써,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이해하죠. 다시 말해서, 중심의 재설정을 통해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실과 정의와 평화의 선결조건이라고 말하죠. 여기서 설명을 더 하자면,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참된 주체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죠.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주체, 역사의 창조자 주체 그 개념이 아니고, 포스트모던적인 라캉의 깨어진 주체, 아니면 데리다의 타자의 타자라든지, 그런 방식으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레비나스의 주체에 가까운 개념을 내세웁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밥먹고 걸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de-centered subject 중심에서 밀려나서 변화된 자기의 모습으로 주체를 다시 규정하는 방식, 그것을 중심의 재설정이라 볼프는 표현을 하고 있죠. 그 중심의 재설정을 통해서 타자를 향해 개방된 주체, 개방된 자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타자의 개방된 타자는 타인을 개방된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세번째, 볼프의 신학하는 방식, 볼프의 관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볼프는 자기가 논의하는 신학이 곧장 현실 정치에 적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학을 오바마가 실현하시오. 이명박 대통령이 실현하시오라고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볼프의 주장은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사도들의 가르침 때문에 이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현실 정치에 그 주장이 곧장 적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그것이 현실적이고 그것이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세상의 일원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대안적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야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실과 정의, 평화뿐 아니라 배제와 포용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이 다루는 배제, 포용, 성 정체성, 진리, 정의, 평화 이 여섯 개 주제인데요. 다 아까 이야기한 방법, 뭐였지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통해서 래디컬한 대안을 찾아내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게 다 깔려 있습니다. 이게 제가 발견한 볼프의 신학함의 아주 기본적인 특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볼프는 두 가지를 대비시키는데요. 여섯가지 주제를 다룰 때, social arrangement 사회적 배치, 구조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볼프가 칼 맑스의 노동 철학을 박사 학위에서 다뤘지만, 이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하지 않고, social agent 의 문제로 왜 그러냐 하면 통로가 종말론적이다라는 겁니다. 크리스챤들의 아이덴티티 변화 없이는, 이 신학이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길이 좀 울퉁불퉁할 수 있는데요. 바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근대성의 문화란, 포함의 문화라고 보는데, 배제된 것을 동일자로 포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이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자신들의 관리 영역으로 흡수하고 통합한, 그 역사가 근대의 역사잖아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팽창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포함시키는 과정이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과정에서 아무 상관 없던 그 지역들이 들어오긴 하는데, 그렇게 들어온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기보다는 적대적 타자의 관계에 놓게 되고, 동일자의 타자로 흡수하기 전에도 여전히 타자로서 배제하게 된 그런 역사를 보게 된 것이죠. 일본이 내선일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는 일본, 선은 조선, 조선과 일본을 하나로 만든다고 하면서 포함을 시켰지만, 사실상 우리의 말, 우리의 이름 다 없애고 일본어 교육시키고 일본어 말하게 하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 전통 조선을 배제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이것이 하나의 근대의 과정이라 볼 수가 있는 것이죠. 포함을 향한 일관된 충동은 분리하는 모든 경결을 무너뜨리고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외부의 형성을 중성화하고자 한다. 유럽 최근세사에서는 이렇게 동일자로 흡수하는 것과 반대로, 극단적으로 배제의 결과를 취하기도 하는데, 발칸반도 전쟁에서 크로아티아를 배제하고, 히틀러의 나치즘, 국가사회주의처럼 유대인이나 집시나 그런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죠. 그런데 그 방식을 보면 첫째, 연결된 이음새를 잘라낼 수 있는 것이죠. 극단적 독립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태도,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외부의 민족을 제거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자와 나 사이의 정당한 분리를 지워버리는 분리의 부정. 이것이 종족 사이에서는 종족 살상으로 나타나고, 종교 사이에서는 타종교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살인으로 귀결되죠.

 

볼프는 아주 긴 호흡으로 그 대답을 전개해요. 아주 뛰어난 솜씨의 퀼트를 전개하는 것처럼, 여러 과제를 통해서 여러 면들을 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탁 요점을 짚자면, 나와 타인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죠. 볼프 특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모던적이고 또 포스트모던적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내가 중심 타자가 주변화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중심에 서고, 물론 각자가 다 그렇게 설 수 있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가 아닌 타자는 내 주변에 서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데카르트의 방식에 대해, 포스트모던적 대안은 리처드 로티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 교수였는데, 나중에 철학 교수를 팽개치고 인문학자가 되어서 버지니아 대학에서 교수하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은퇴한 미국의 대중적인 철학자가 된 사람인데요. 로티는 자아와 타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벽이 있는 존재라고 봐요. self-creation. 볼프의 책에 이 용어는 안 나오지만, 로티의 사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과 타인과 연대하는 것, 특히 타인의 고통과 연대하는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로티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타인과 연대해야 하는가. 이유는 하나, 내가 타인으로부터 잔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에요. 그러니까 나와 타인의 관계는 우연한(contingent)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라고 로티의 책 이름이 달려 있는데, 여기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볼프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의 형성 계기로 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아이덴티티는 타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분리와 연결이 중요합니다. 분리를 긍정하고 동시에 연결을 긍정하는 방식이죠. 나와 타인은 다른 몸을 가진 개체로서 타인과 분리됩니다. 내가 앉은 노종문 간사와 내가 다른 것은, 다른 공간을 차지하잖아요. 그러나 비키세요 하고 나를 밀치고 여기 설 수 있어요. 안 그러겠지만 (웃음) 내가 차지하는 공간과 노종문 간사가 차지하는 공간이 다르죠. 몸이 다르니까. 그런데 몸을 경계짓고 있는게 뭡니까. 경계짓는 경계선이 뭐죠? 이 피부가 나와 타인을 경계지어줍니다. 성관계는 침투하고 하나된 관계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그것도 외벽과 외부, 피부와 피부의 접촉이지 피부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않아요. 주사바늘만 침투해 들어가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거지. 피부를 침투해 들어갈 수 없어요. 침투해 들어가면 일종의 폭력, 피부의 경계선을 통해 구별됩니다. 이 분리는 근본적 분리입니다. 우리가 다른 몸의 자루를, 불교 스님들은 똥자루라고 하죠. 그래서 남을 대신해 자줄 수도 없구요, 남을 대신해서 먹어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어요. 내가 배고프면 내가 먹어야 하고, 내가 졸리면 내가 자야 하고. 내가 목마르면 내가 마셔야 해요. 이 분리가 인간의 근본적 사실이에요. 그걸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타인을 분리하고 철폐하거나 무시하거나 방치해서 연결을 없애버리는 것은 죄라고 보는 것이 볼프의 관점입니다. 분리와 연결을 긍정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다. 나와 타자는 그런 관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크로아티아 사람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피해자고, 볼프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세르비아인은 가해자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선한 사람입니다. 물론, 니체는 피해자와 약자를 비난하죠. 그러나 볼프는 피해자와 가해자는 둘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물론 차이도 있죠. 이런 식으로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포함과 배제와 도식이 작용한다면, 폭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볼프는 피해자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수용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주장합니다. 몰트만은 그렇지만 채트닉도 포용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볼프는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도 거기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악인도 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하나님이 보호하신 일도 십자가 이전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가인을 받아들여주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볼프는 가인 자신이 시작한 배제의 수단에 가인을 내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포옹에 대해 가인은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가는 삶을 살았죠.

 

3장에서 훨씬 심화되는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지금 이야기가 절반을 넘는 것 같은데, 최대한 짧게 해보겠습니다. 포용을 이야기하는 단계에서는 4가지가 중요합니다. 첫번째가 회개이고, 용서이고, 세번째가 포용이고, 네번째가 망각입니다. 포용의 단계가 회개한 것, 잘못한 것에 대한 회개. 누구나 회개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 남을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게 아닙니다. 죄책의 억압과 운명에 대한 완고한 신념으로부터의 해방, 스스로 가두어 놓은 무감각함과 반항이라는 장치에 대해 해방되는 것이죠. 용서가 그렇게 쉬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용서가 쉽지 않은 까닭은 해를 입을 때,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은 항상 대적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엎지른 물을 대야에 다시 담을 수 없는 겁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서, 볼프는 편파성의 공격, 불가역성의 공격이라고 합니다. 편파성의 공격은 한 번 해를 입으면, 저쪽 편에 대항하는 하나의 편을 만들고 빠져나올 수 없다. 불가역성의 공격은, 한 번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 이 두 공격으로부터 상대방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죠. 가해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죠. 복수를 하지 않으니까, 저스티스를 실행 못한 거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게 최소한의 저스티거든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injustice 라는 거에요. 그것은 폭력을 가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creative injustice 라는 것이죠. 창조적 불의, 용서를 해야 회복할 수 있다.

 

세번째 단계가 회개, 용서, 포용입니다. 포용을 보여주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경우인데. 이레나이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데 볼프는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의 완성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종말에 가능한다. 볼프는 니체를 따라서 과거에 대한 구속 없이는 최종적 구속이 가능하지 않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과거를 건져내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죄악을 잊기 위해서만 기억하신다. 그렇다면 희생자의 외침은 어떻게 해야 하나? 볼프는 일단 그렇다고 긍정하는데, 메시아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들의 외침이 살아있게 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기억하기는, 언젠가 잊게될 소망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포용의 한 예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아주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주 자세하게 탕자의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세하게 다루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만 (웃음)

 

볼프에게, 가해자의 정의냐, 피해자의 정의냐. 가진자의 정의냐. 이런 것이 포스트모던 정의 개념이죠. 매킨타이어의. 볼프는 여기에 대해 한편으로 동의해요.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역사와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이중적 보기라는 건데요. 한나 아렌트한테 빌려온 용어인데요. 볼프의 논의는 현대 철학자들의 논의에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이중적 보기는 이 입장에서도 볼 수 있고, 저 입장에서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실천하자는 것이죠. 여기서도 십자가가 중심에 있는데요. 이중적 보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변화가 형성되는가. 볼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의에 대한 판단과 불의에 대한 싸움을 타자의 눈으로 보며, 내가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위치 바꾸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모르겠어요. 이게 얼마나 가해자에게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정의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중적 보기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불의에 대해 싸울 수 있겠는가? 볼프는 중립성의 관점을 의심하고, 강한자의 관점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약한 자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강한 자는 논의와 선전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고, 약자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자를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라인홀드 니버 등 사랑과 정의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에, 볼프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월터스토프와 볼프가 오래 같이 지냈죠. 예일에서 은퇴한게 2002년, 2003년에 노털담에 왔다가. 그 어간에 월터스토프가 예일에서 은퇴했는데요. 볼프가 2003년에 예일에 갔는데, 몇년은 같이 지내며 토론했습니다. 월터스토프가 Right and Wrong을 냈구요. 또, Justice in Love를 냈어요. 이것이 대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볼프도 같은 개념입니다.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 불편부당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편애하시는 분이라고 나오잖아요. 불편부당하지 않죠. 억울함을 신원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인데. 사랑 없이 정의가 없다. 아이덴티티와 정의의 문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초연한 태도만 강조하던 것에서, 관계의 지속을 추구하고,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으로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오순절 이후 헬레파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예로 드는데, 헬라파 사람들이 배제당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겠다. 먹이는 일, 거기서 집사, 일꾼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스데반이 대표적이죠. 빌립.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 하나도 없어요. 다 헬라파입니다. 7명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과부들 뿐만 아니라, 모든 과부들을 돌보도록, 그런 방식으로 한 것이 정의로웠다. 헬라파 사람 3명, 히브리파 사람 3명. 이게 아니라 헬라파 사람만 뽑은 것이죠. 그것이 더 정의로웠다. 

 

둘째는 진실입니다. 사실에 근거를 두는 것이죠. 진실을 권력 투쟁에서 해방시키는 것. 그게 모더니즘의 목표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표는 법률이나 의미, 진리라는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과 그 대결을 폭로하는 것. 푸코는 지식이 곧 권력이다. 사실 칸트는 감히 알려고 하라. 아는 것이 해방이니까. 그러나 푸코는 지식이 사람을 통제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이런 상황에서 지식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거기로부터와 여기로부터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 바깥으로 넘어가야 한다. 평범한 진리로 알고 있는 것이 추악한 편견의 산물임을 알고 있다. 둘째,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야 하나? 진실을 보고 들어야 하기 때문에, 내 편에만 있어서는 진실을 볼 수 없으니까. 왔다갔다 하기. 이중적 보기의 실천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진실을 보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서강대에 오면, 진리에 순종하라는 말이 나와요. 진리에 순종할 마음이 있어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볼프는 그것이 진실한 성품의 결과라고 봅니다. 진실한 삶, 그런데 진실한 삶은 동시에 사랑을 요구합니다. 볼프에 따르면, 사람을 포용할 의지, 공동체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성경은 진리를 행한다. 그런 말을 잘 써요. Doing Truth, 진리를 항상 행함의 관점에서 보잖아요. 그래서 볼프는 진실과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에메트라는 말이 원래 아만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것인데, 견고하고 튼튼하고 그래서 신뢰할만하다. 그래서 진실이라는 것은 신뢰할 만하다. 포도나무가 신뢰할만하다 참되다 그것은, 농부의 수고에 열매를 반드시 준다.

 

마지막 평화의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볼프는 평화에 대해서도 근대적 시각과 포스트모던 시각, 들루즈. 우리나라는 들뢰즈라고 하죠. 들뢰즈가 비판한 것을 다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폭력의 순환을 끊고, 진리와 정의를 위한 예수님의 싸움, 불의를 끊어 안는 하나님의 포용을 보여주는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볼프는 예수의 다른 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예수의 백마를 타고 진멸하는. 폭력의 다른 면을 봅니다. 거기서 폭력과 예수의 또다른 면을 드러내죠. 말탄 자의 폭력에 괴로움을 당할 자들은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린 사람들. 이들에게서 말탄 이는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는 이입니다. 물음은 왜 이들을 심판하는 것이 폭력적일까. 볼프의 답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누구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기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의 강력한 끌어당김을 끝까지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거죠. 볼프에 따르면, 십자가는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백마를 탄 예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만과 불의, 폭력.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폭력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오직 폭력을 하나님만이 행하시도록 하는 데 있다. 사람이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게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할 의무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정당한 행동을 가지고 폭력을 할 수 있나? 볼프는 하나님만이 폭력을 독점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고 백마탄 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는 안 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아래 모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해설 초두에 썼습니다만, 이 책은 쉽지 않고 두고두고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책상에서 편하게 쓴 책이 아니라, 가슴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대화하면서, 문제를 철저하게 따져가는 그런 학자입니다. 

 

볼프는 오순절 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났고, 자기는 목사 아들이라는 게 그렇게 창피스러웠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치하였으니까. 학교에서도 창피를 주고, 그러다가 자형, 나이는 같아요. 쿠스믹인데. 고든 콘웰 선교학 교수인데,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신학을 하게 되고 미국에서. 오랜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