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세미나> 최경환
2014-06-30 15:15:23
<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세미나> 1
2014년 6월 19일 100주년기념교회
1. 복음주의 소장파 윤리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데이비드 거쉬(David P. Gushee)는 휘튼 컨퍼런스의 한 강연에서 그동안 복음주의는 왜 사회윤리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냐고 한탄한다. 로마 가톨릭과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그동안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기독교사회윤리를 발전시켜 왔는데, 왜 복음주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미국의 시민사회 역사에서 복음주의가 사회적 참여라든가 실천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행동과 실천을 추동시키는 이론적 근거, 즉 사회참여의 신학이 있었느냐고 물을 때에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20세기 초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복음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두려움으로 작동해서 사회참여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또한 미국의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큰 공헌을 했던 마틴 루터 킹이나 도로시 데이 같은 영웅적 모델들은 신학적인 성격이 달라 복음주의에서 포용하기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양심의 아이콘이었던 독일의 본회퍼 역시 미국의 세속신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복음주의 운동가의 롤모델이 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20세기 미국의 복음주의가 적극적인 사회참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첫째 이론의 부재, 둘째 롤모델의 부재로 설명할 수 있다.
2. 하지만 1960년 이후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소위 복음주의 그룹(아주 넓게 정의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제외한 개신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신학)를 하나 둘씩 내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크게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받은 신칼빈주의자들 흔히 신칼빈주의자로 분류되는 일군의 학자들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문화적 칼빈주의자들이다. 주로 이들은 『리폼드 저널』(The Reformed Journal)의 편집인들, 칼빈대학 인문 사회과학 교수들, 그리고 미국개혁교단과 관련된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모버그(David Moberg),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루이스 스미즈(Lewis Smedes), 스티븐 몬스마(Stephen Monsma), 폴 헨리(Paul Henry), 그리고 공공 정의 연합회(Association of Public Justice)의 제임스 스킬런(James Skillen)과 카나다의 기독교 학문 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의 리차드 미들톤(Richard Middleton)과 브라이언 왈쉬(Brian Walsh), 그리고 폴 마샬(Paul Marshall)과 같은 학자들이 개혁파에 근거한 정치철학과 사회참여의 신학을 구축하고 있다.
과 시카고 선언과 로잔언약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그룹을 꼽을 수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 다루게 될 그룹은 후자다.
3. 미국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시민권운동과 반전운동, 그리고 사상적으로 실존주의와 비판이론이, 신학적으로는 해방신학이 보급되면서 일종의 내적 갈등과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2008년 촛불집회라든가 세월호 사건을 접하게 되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하다. 분명 사회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고, 이건 아니다 싶은데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신념은 사회적 이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몰랐던 것이다. 진보적인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1968년 WCC 웁살라 총회를 통해 선교에 대한 급진적인 견해를 채택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든가 “선교는 곧 인간화이다”(Mission is Humanization)라는 정식을 통해 사회참여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 기독교가 정치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빵이 먼저냐, 복음이 먼저냐’라는 논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1974년 로잔언약을 통해 둘 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4. 복음주의는 역시 회심(conversion)의 경험이 중요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는지가 행동에 중요한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J. Sider)는 필라델피아의 메시아 칼리지에서 가르치면서 도심 흑인 교회를 통해 미국 흑인들이 겪는 인종 차별과 가난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1973년 칼 헨리, 짐 월리스, 사무엘 에스코바 등과 함께 주말 집회를 열어 사회적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며, 마침내 ‘복음주의적 사회 참여를 위한 시카고 선언’을 탄생시켰다. 또한 이 모임은 1974년 로잔 대회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는 동등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한다. 1977년 마침내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을 출간함으로써 총체적 복음의 기수로 우뚝 서게 된 사이더는, 이후 팔머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신학 교수로 재직해 오면서 “사회 참여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을 창설하였고, 현재까지 「그리스도인의 양심 선언」, 「물 한 모금, 생명의 떡」,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이상 IVP) 등을 포함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이더가 인용한 시카고 선언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의를 요구하심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의한 미국사회에 대하여 그분의 정의를 선포하거나 보여주지 않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이들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옹호하라고 요구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미국교회가 인종차별에 개입해 왔으며 인종의 피부색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한 개인적 태도와 제도적 구조를 지속해온 데 대해 복음주의 공동체의 분명한 책임을 통감한다. 우리는 동료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우리 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불의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도 안에서 회개를 표명하기를 요구한다.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28쪽)
이후에 사이더는 WCC에도 관여하게 되지만 WCC가 지나치게 사회적 이슈에 함몰되는 한계를 지적하고, 복음주의의 기본적인 정서를 확실하게 붙잡는다.
5. 사이더의 ‘총체적 복음’(wholistic gospel) 개념을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한 『복음전도와 사회운동』(Good News and Good Works)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사회참여의 신학적 근거와 성서적 전거를 파악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책이다. 사이더는 1장에서 한 지붕 밑에 사는 한 가족이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분열되었는지를 소개하면서 사회참여 신학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이더는 개인주의적 복음전도, 급진적 재세례파, 주류 교회일치 운동, 세속적 기독교로 유형을 나눠서 각각의 신학적 특징과 근본적인 쟁점들을 설명한다.
5-1. 개인주의적 복음전도: “역사적으로 교회의 사명은 오직 복음전도이다” Arthur Johnston.
죄를 사회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구원 역시 개인의 칭의와 중생에 국한된다.
현재의 사회적 정의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연속성은 전혀 없다.
“나는 이 세상을 파선한 배라고 생각한다.” D. L. Moody. 멸망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이 유일한 사명.
세상은 회심한 개인들이 사회 속에서 선한 행동을 할 때 변화된다.
“남아공, 북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들은 중생한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50쪽)
비판:
5-2. 급진적 재세례파 양상: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온전한 실존은 교회의 주된 임무이다. 복음이 다른 구조들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는 주된 사회 구조는 기독교 공동체이다.” J. H. Yoder. ‘존재로서의 선교’ Mission as Being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제자와 시민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킬 때 무엇을 따르겠는가? S. Hauerwas. 급진적 제자도
비판:
5-3. 주류 교회일치 운동: “구원은 베트남 국민의 평화, 앙골라의 독립, 북아일랜드의 정의와 화해라고 할 수 있다” 1973년 WCC 방콕 총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선교지에 가신다” (보프).
신칼빈주의자들에게 복음전파와 선교는 창조질서의 온전한 회복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음전도 행위의 범위에는 창조질서 안에서 죄의 보편적 현존과 직면하는 복음의 능력이 지는 충만함을 표출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R. J. Mouw, Political Evangelism, 89.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회와 세상 신자와 불신자와의 접점, 즉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한 강조.
비판:
5-4. 세속적 기독교 양상: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사회복음의 신학 혹은 기독교 복음을 윤리적인 당위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자유주의자들. 1968년 WCC 웁살라 총회의 의제는 Mission is Humanization이었다.
후기 본회퍼의 세속화 신학의 영향, the church for the other
비판:
6.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사이더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동시에 그리고 함께 강조하는 ‘총체적 선교’ 혹은 ‘총체적 복음’을 주장한다. 죄와 복음과 구원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소명과 부르심은 동시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소명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어떠한 순간에도 둘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이더의 ‘총체적 복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그가 지속적으로 성서를 통해 자신의 신학적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역과 운동을 통해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더의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토대 위에 짐 월리스는 미국 사회에 새로운 정치적인 변화의 움직임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7. 그렇다면 이러한 지형도 안에서 공공신학은 무엇이며,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일단 공공신학은 아직까지 그 내용과 정체성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미완성의 신학이다. 공공신학의 가장 큰 약점은 ‘공공성’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함의로 인해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공공성’(public)이라는 말은 사회학이나 정치학, 그리고 행정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공공신학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싶다.
7-1. 우선 기존에 기독교사회윤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주제들을 전유하면서 동시대적인 사회적 이슈들과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방식이다. 공공신학에서 공공성의 개념이 사용되는 첫 번째 용례는 복음, 교회, 신학이 항상 세상과 관련이 있다는 통찰, 구체적으로 공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즉 복음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에서의 삶, 실재 그리고 인류애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이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와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전통적으로 신학에 많은 주제와 이슈들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후버는 교회가 항상 사회와 정치라고 하는 환경으로부터 초연하게 떨어지려 하면서도 실제로는 얼마나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혀냈다. 교인이라는 멤버쉽은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와 시민이라는 존재양식과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으로 자신이 알든 모르든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공신학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기독교의 복음은 다양한 방식과 형식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세상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교회와 세상, 교회의 정치,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공공신학을 정의하는 것은 공공신학이 기존의 사회윤리나 정치신학, 그리고 기독교세계관과 무엇인지 다른지 설명하지 못하고 실천에 있어서도 다소 모호한 참여를 만들어낼 수 있다.
7-2. 공공신학은 보다 엄밀하게 사회과학적이고 정치철학적인 언어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공공신학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이후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신학의 제반 문제들을 다룬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근대적인 시민사회의 출현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탄생, 그리고 이들이 광장에 모여 토론과 비판을 통해 정치적인 주체로 재탄생되는 일련의 과정을 학제간 연구를 통해 규명하는 작업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만약 6-1과 같은 방식으로 공공신학을 정의한다면, 사이더의 ‘총체적 복음’도 분명 공공신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공신학이 보다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따져 묻는다면, 즉 현대적인 공론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공적담론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묻는다면, 사이더의 신학은 공공신학의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기서 공공신학의 활동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민주적인 삶을 떠받치고 있는 규범적인 이상을 ‘공론장’(public sphere)와 연결시킨다. 공공신학의 이러한 형식은 또 다시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시민종교’라고 불리는 형식의 공적 종교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위한 투쟁과 변호라는 활동적인 성격으로, 또는 대화를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원탁토의’라든가, 민주주의 서비스에 내재된 긴장과 갈등을 극복하는 것, 공적인 정책을 만들고 수행하기 위한 직접적인 참여와 공적인 의견을 내 놓는 것 등이다. 이 부분은 보다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8. 간단히 말해, 공공신학에서 말하는 공공성의 개념은 매우 다양한 의미의 층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정의하기 위한 통합적이고 기술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공공신학’이라는 표현 역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공공신학이라는 개념의 복합성은 공공성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의미나 사용에 상응한다. 공공신학에 대한 단일한 의미나 권위 있는 개념규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공공신학으로 향하는 단일한 규범적인 접근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신학자들과 서로 다른 기관에서 자기 나름대로 공공신학은 어떠해야 한다고 규범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서로 다른 점들을 포함하고 있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9. 만약 공공신학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그들은 공공신학이 관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면서 동시에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대답은 매우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신학자들이 공공신학의 어떤 특별한 형식을 가지게 될 때, 이는 어떤 사회학적인 근거라든가 그들이 처한 사회 구성체로서의 상황, 맥락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회적 위치의 실재는 신학이 작동할 때 어떤 특별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적 친화성’을 만든다. 신학자들은 공공성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선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는 사회학적으로 기술되고 연구될 수 있는 어떤 근거 위에서 공공신학을 접근하게 된다. 물론, 이와 반대로 공공성에 대한 개념을 선택함에 있어 그들의 신학적 관점(신앙적인 확신)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들이 왜 서로 다른 신자들과 교회들이 같은 조건 속에서 그리고 동일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공공신학을 실현하는지를 말해준다.
10. 일반적으로 복음주의가 공적인 가치를 외면한 채 개인의 사적인 신앙에 함몰되어 공공선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비판은 단순히 복음의 가치가 보다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유효하지만, 구체적으로 복음이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자신의 목소리를 합리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해, 때로는 엄중한 비판의 무게를 견디면서, 어떻게 적응 혹은 접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짐 월리스가 최근에 공공선에 관심을 두고 기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공신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이는 사회과학적인 분석과 정치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리차드 마우,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제임스 스킬런과 같은 학자들이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11. 그렇다면 공공신학에 ‘신학’은 있는가?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 그 틀은 신칼빈주의의 세계관과 대동소이하다. 즉, 공공신학의 기본적인 논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한 공공선(common good)에 집중해서 기독교와 세상이 서로 중첩되는 영역에 어떤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에토스를 제공해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조금 더 확장하면, 공적인 학문의 영역에서 신학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선택해야 하고,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방법으로 신앙의 확신을 만들어야 하며, 이러한 논증이 정합성, 일관성, 논리적 합리성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은 보편성을 추구함으로 일반 세속 학문이나 문화와도 공명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세속의 언어로 번역하고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12. 여기에 공공신학의 딜레마가 존재하는데, 공공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기독교 전통과 언어를 상실하면서까지 세상과의 소통과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신학이 소통과 번역의 과정이 거쳐야 한다면, 이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특수한 종교 전통과 거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실천들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의 장으로 편입되기 위해 보다 추상적인 단계로 축약되거나 축소될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방법론을 비판한다.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위탁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추상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 공동체에 대해서 정직하지도 않고 비판적인 태도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학문의 영역에서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전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적 지침들이 구체적인 현장의 필요와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보편적인 담론 속에 편입될 수 있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세미나> 2
로날드 사이더,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2, 3부
2014년 6월 26일 100주년기념교회
1. 1980년대 한국기독교학생운동의 고민은 ‘어떻게 변혁의 시대에 책임있는 기독청년으로 살아갈 것인가?’였다. 당시 진보적인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총기독학생회(Student Christian Association, 일명 스카)는 농촌선교, 빈민봉사, 공부방교사, 통일운동 등을 통해 사회 변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초한 계급투쟁과 해방신학을 그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복음주의 청년들에게는 너무도 낯선 운동이었다. 반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보수적인 청년들은 그 대안으로 기독교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였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었고,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틀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교회와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만 치중되었던 대다수의 기독청년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끄집어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이후 이 두 진영의 운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냈다.
2. 일단 한 때 사회운동과 변혁에 열심이던 총기독학생회는 현재 거의 아사상태에 있다. 여타 다른 캠퍼스선교단체도 마찬가지겠지만 총기독학생회 역시 IMF 이후 활동이 거의 정체된 상태에 있고, 회원유치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학적인 이유로는 이들이 교회와 성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반면 기독교세계관 진영에서는 다른 한계를 드러냈는데, 하나는 진보진영과 마찬가지로 성서를 통해 세계관 훈련의 부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학문에 대한 이론적 담론 투쟁에서의 패배이다. 진보진영의 기독학생운동에서 대한 분석과 비판은 차지하고,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교세계관 운동만 보면, 이들은 그동안 철학적이고 사상사적인 이론으로 기독청년들을 의식화시켰다. 이 당시에 나온 대부분의 기독교세계관 책들은 철학적인 논의, 그 중에서도 인식론과 존재론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과연 그들이 말하는 ‘지성의 제자도’가 학문적으로 엄격했는가를 물어 볼 수 있다. 현재 기독교적 학문 혹은 세계관은 이론의 담론 투쟁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외면당했다. 이는 기독교세계관이 근대와 탈근대의 접점에서 세속적인 학문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할 능력이 부족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낼 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현재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기독교사들 사이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필요성으로 귀결되거나, 주류 학문적 담론과는 다른 대안적인 목소리를 내자는 당위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이론적인 공부와 학습을 통해 기독청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의 철학적 토대와 근거를 제시해줬다는 분석 자체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본인은 두 그룹 모두 기독교 고유의 언어이자 세계관인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부족했다는 점은 실패의 원인으로 꼽고 싶다. 필자는 그동안 기독교세계관에 관한 그 어떤 책에서도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와 문제의식을 읽어 본 적이 없다. 최근에 기독교세계관은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비로소 성서의 내러티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브라이언 왈쉬와 리차드 미들톤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세계관>이나 마이클 고힌의 <세계관은 이야기다>와 <성경은 드라마다>, 혹은 제임스 사이어의 <코끼리 이름 짓기>를 보라.
복음주의의 처음 출발이 그랬듯이 이들은 머리가 먼저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고 손과 발이 움직이는 자들이다. 복음주의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성서(의 이야기)를 통한 마음의 변화이다. 따라서 그동안 복음주의 진영에서 사회참여에 실패한 것은 성서를 통한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역시 복음주의는 성서를 들이대고 성서의 이야기를 제시해야 설득이 된다.
3. 그런 점에서 사이더의 ‘총체적 복음’은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의 가슴에 불을 옮겨다 주었다. 해방신학과는 신학적 견해가 다르고 에토스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과 유사한 사회적 참여와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강력한 힘은 바로 성서에 있었다. 실제로 사이더의 책을 읽어보면 예전에 해방신학자들이 성서를 주해했던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더는 복음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해방신학자들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한 결론을 도출한다. 그리스도의 사회참여에 대한 정당성을 성서로부터 도출하는 사이더의 탁월한 글솜씨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설득을 당한 것이다.
4. 사이더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를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협의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보다 큰 맥락과 그림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단지 사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영역에 걸친 공적이고 우주적인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 이뤄지는 혁명적인 공동체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독특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 스스로를 대항문화적인 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로 규정한다 (117쪽).
5. 사이더는 구원에 대한 성서적 어원을 추적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권자이심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구원은 여사 가운데 발생하고,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이고, 공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해명 이전에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구원은 “물질적인 번영, 재판 체제 가운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한 의, 그리고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130쪽). 신약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그리고 새롭게 회복된 공동체는 구원의 핵심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포하신 나라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가치, 행동, 그리고 관계의 완전한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132쪽). 예를 들어, 삭개오가 불의하게 얻은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는 행위를 통해서 불의한 관계들을 바로 잡을 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9)고 선포하셨다. 육체적인 회복 또한 구원의 일부이다. 예수님이 치료하시는 기적 중 네 번의 한 번꼴로 구원하다(sozo)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는 구약에서 구원이라는 용어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완전함을 뜻하는 샬롬(shalom)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Christian Mission에서 “구원은 ... 도덕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87)라고 말했다.
누가는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료할 때(눅 7:3), 타락한 여인을 용서하실 때(눅 7:50), 귀신들린 사람을 회복시키실 때(눅 8:36)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136쪽). 결국 구원은 영생, 용서, 치료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6. 바울에게 구원이란 “십자가의 희생, 칭의의 경험, 중생, 그리고 성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새로운 나라의 실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것의 궁극적인 우주적 회복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36쪽). 바울이 말하는 의로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의의 ‘법정적 칭의’를 뜻하기도 하지만, 용서, 성화, 그리고 새롭게 구속받은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이 이 물질계를 온전하게 회복하실 것이라는 비전을 담고 있다 (140쪽).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은 모든 피조물의 온전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머레이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인류와 자연 사이에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영과 물질의 이원론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신약 기자도 눈에 보이는 물질계를 망각한 채로 혼 혹은 영이 구원받게 된다고 예견하고 있지 않다” (146쪽)
7. 구원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1) 그렇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는 말인가? (만인구원설) 2)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역사는 연속적인가 불연속적인가? 3) 앞으로 생태계가 회복되고 환경문제가 해결되며, 비서구권에서 민주주의가 수립됨으로 인권이 신장되면 그것을 구원이라 볼 수 있는가?
8. 속죄의 유형과 제자도
도덕적 유형 | 대속적 유형 | 고전적 유형 | |
예수의 역할 | 선생과 모범 | 대속적인 역할 | 악의 정복자 |
핵심 |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가르쳐주고 그 모범이 되는 행동들에까지 우리의 지식을 넓히고 이해하는 것 | 하나님의 사랑과 의의 화목이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심으로 성취되었다 | 악의 세력을 무찌르는 것 |
결과 |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을 통해서 우리의 가리워진 마음들이 가르침을 얻는 것 | 용서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 구원의 사회적, 보편적 측면만 강조 |
장점 | 믿음에 요구되는 윤리적 측면을 잘 설명 | 성경적 지지와 죄에 대한 진지한 숙고 | 십자가가 현대세상에서 삶을 파괴하는 비인간화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
단점 | 세상의 악에 대한 무지, 하나님의 용서와 변화의 능력에 대한 무지 | 십자가와 제자도 사이의 연결을 단절, 복음은 그 이상이다. | 죄의 핵심이 불의한 사회구조에 있다고 생각 |
9. 성경적인 회심은 과거의 죄에 대한 후회, 용서의 경험, 세례, 그리고 점점 성장하는 제자도의 삶, 이 모든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회개와 회심은 하나님과 이웃과 맺은 우리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162쪽). 사이더는 회심이 사회적 책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사회적 죄를 포함한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163쪽). 현대 복음주의의 비극은 바로 이 부분을 놓쳤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물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죄를 어떻게 알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가? 18세기 이전에는 노예제도가 사회적 죄라는 것을 몰랐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인종차별이 죄라는 것을 몰랐던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특별히 그것이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뭔가 다른 인식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은 과연 동시대적인 에피스테메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는가?
10. 사이더는 성서적 해결책으로 예레미야 22:13-14과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난한 자와 익명의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를 통한 사회적 실천이 하나의 사회적 죄를 인지할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할 수 있다. 그래서 사이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회개와 회심이 이웃, 사업체, 고용주, 고용자를 포함해서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의 근본적으로 변화된 관계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교리는 비성경적이고 우리의 삶은 불순종으로 가득 찬 것이다” (167쪽).
11. 역시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럼 기독교의 회심이 사회적 죄에 대한 자각과 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면, 이것은 결국 어떤 특정한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편견이 복음 이전에 작동한 것이 아닌가? 이 점에서 있어서 사이더는 “회심자들이 회개해야만 하는 죄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핵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윤리적 상대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의 수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174쪽)고 말한다. 결국 사이더는 죄를 규정하는데 성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비로소 회심이 자유주의와 값싼 은혜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12. 사이더가 다양한 예를 통해 제시하는 것처럼 회심의 능력은 실제로 선교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생활 양식을 변화시키고 사회경제적인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이들은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불의하고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되는 사례들을 우리들을 실제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호세 보니노는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가난한 사람(사회적 혼란으로 수차례 추방되고 위협받은)이 자유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자 하는 결단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한다 (181쪽). 흑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이 한 상에서 밥을 먹고, 백정이 교회의 장로가 되어 지도자가 되는 사례들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급진적인 사회변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복음이 근원적으로 근대화와 세속화를 추동시키는 원인이었다는 분석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회심이 진정 성경적인 방향으로 일어날 때는 폭발적인 실체가 되어 사람들, 가족들, 그리고 열방을 변화시킨다” (184쪽).
<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세미나> 3
로날드 사이더,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4, 5부
2014년 7월 3일 100주년기념교회
1. 사이더의 공헌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신학과 언어 속에서 사회참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성서를 통해 균형감 있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복음전도의 중요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확고한 방향제시와 종말과 궁극적인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복음주의의 중심사상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심을 교리적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220~232쪽까지의 논의는 탁월하다. 이 부분을 확장해서 복음주의의 사회적 교리에 대한 연구를 보다 구체적으로 진척시켜야 한다. 이미 개혁신학과 해방신학과의 대화를 모색한 책으로는 존 드 그루시의 <자유케하는 개혁신학>(예영)이 있다.
2.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도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이더의 주장은 개인적인 회심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순진한 발상을 배제하면서도, 마음의 변화를 통해 선한 영향력이 사회로 흘러넘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서 교회의 역할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은 그가 아나뱁티스트의 세계관에 보다 친화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가 교회이고자 할 때, 교회가 사회를 둘러사고 있는 장벽을 초월하는 새로운 실재의 유형을 보여줄 때, 교회는 모든 사회적 질서에 누룩처럼 퍼져나간다” (283쪽). 교회 안에서 인종과 계급과 성별을 초월한 하나님의 비전을 구현하지 않고서 사회를 향해 변혁을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체 모순이며, 진정성이 결여된 윤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우리를 봐라”라며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대우를 받으며, 자발적인 나눔과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고,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우리들을 보라고 당당하게 외쳐야 하는 것이다.
3. 사이더가 비록 전문적인 성서신학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제시하는 성서해석과 그 결론을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성서에 근거한 사회참여의 근거에 공감을 갖고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더의 성서해석과 적용에는 문제점이 없을까?
성서로부터 윤리를 끄집어 낼 때에는 다양한 해석학적 중간과정이 필요하다. 성서와 현실을 단순하게 일대일로 접목시켜서 행동지침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자칫 성서의 본래 의도를 무시하거나 오늘의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채 우격다짐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일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한 결과를 성급하게 현실에 적용하려는 욕망은 오늘날 복음이 다양한 권력투쟁과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고 고민하지 않는 처사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이후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신정국가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서적 이상을 세속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또 다시 신정국가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과도한 욕망으로 확장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성서의 세계와 오늘의 현실을 보다 정밀하고 세밀하게 연결시켜 줄 해석학적 연결고리와 사회분석이 필요하다. 물론 사이더가 전문적인 성서윤리학자가 아니기에 이런 작업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크리스토퍼 라이트라든가 리차드 헤이스 같은 전문 성서학자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사이더의 성서해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분명하다. 흔히 요더리안들이 성서의 내러티브를 해석의 전거(example)로 사용해서 직접 사회윤리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세기 미국의 기독교윤리의 패러다임을 장악하던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에서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말함으로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는 사회윤리를 끄집어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요더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성서적 현실주의”(Biblical Realism)를 주장했다.
구약성서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내러티브를 생 날 것 그대로 현대의 상황에 가져와도 상이한 내러티브들 사이에서 어떤 접합점이 생겨날 수 있는데, 이 때 신비한 실존적인 접점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더가 아모스의 목소리를 통해 타락한 법률 체계가 부패한 경제적 불의로 연결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오늘날 사법적인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즉시 떠올릴 수 있다. 때론 복잡한 해석학적 이론들을 들이대서 윤리적 메시지를 끄집어내는 것보다 내러티브의 실존적 부딪침이 훨씬 강력할 수 있다. 이야기의 힘은 그만큼 위대하다.
질문1) “기독교세계관이 기독교인의 공론장 참여에 주는(참여하거나 하지 못하게 망설이게 하거나 하는) 실제 효과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동성애 퀴퍼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에서 기독교세계관은 어떤 방식으로 참조가 되고/하고/혹은 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점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가설은 이렇습니다: 공공영역에서 공연되는 동성애 퀴페를 보며 동성애자를 존중하지만 그들의 성적실천과 퍼포먼스는 너무 과하다 라거나, 범죄라는 인식은 구체적 폭력을 실행하는 혐오 근본주의 그룹과 달리, 성적지향과 (공적)수행을 분리시키는 관념론자이자 신앙적/공공적 실천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방관자" 아비투스로서 한국복음주의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양비론, 중도, 중간자적 포지션, 두려움과 같은 성향들이죠. 어떤 교리적 확신이나 신학적/기세적 결론이 확실하게 주어지기 전에는 잘 움직이지 않죠. 인권은 존중해야할 것 같은데 동성애는 죄라서 적극적으로 지지도 못하겠고. 이것은 시민사회에서도 드러나고 중간계층 아비투스와도 동형적인 태도 일수 있구요. 이런 상태는 끊임없는 기세 공부를 추동함으로써 복음주의그룹을 (근본주의보다) 지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실천을 유예하고 방관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담론장으로서 공론장을 활성화시키지만 공공선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서의 공론장에는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현준)
질문2) '총체적 복음'을 받아들인 쪽의 실천이 '경실련'과 같은 (기독)사회운동과 공명선거캠페인이었는데, 복음주의권이 '사회참여'를 지향하더라도 사회해방보다는(완전한 인간/사회해방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단 전제 위에) 온건한 개혁 정도로 스스로의 위치를 제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량적'이라는 판단도 많이 받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적인 세계관/사회운동과의 접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이광욱)
대답) 김현준의 문제제기는 복음주의자들이 실재로 사회참여에 대한 당위와 정당성, 그리고 이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할지라도 구체적인 현장과 자리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으로 결국 보수적인 행동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성경(혹은 세계관 교육)을 통해 사회참여에 대한 동기부여는 부여받지만, 실제로 약자의 편에 서거나 제도의 개혁을 외치지는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광욱의 문제제기가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사회변혁과 대안을 외치던 김진홍 목사라든가, 서경석 목사가 민주화 이후 보수세력의 선봉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대선 후보자들의 종교적 성향이나 종교의 공공성에 대한 이슈들과 쟁점들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성세대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신앙체계를 특정한 이슈(낙태, 동성애 등)로 환원시키는 동안 다음 세대는 이러한 ‘문화전쟁’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더 나가서 기독교신앙이 정치,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신자를 양자택일의 선택으로 과도하게 밀어붙임으로 무리한 선택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부모 세대들은 한 때 ‘문화전쟁’에 투신했지만, 정작 이후의 자녀 세대들은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형성과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은 새로운 신앙을 찾아 유랑하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러한 세대간 분열은 이미 근본주의를 극복하고 교파를 초월해 하나의 공동전선으로서 신복음주의를 형성하던 시기부터 그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 복음주의 사회참여를 위한 시카고 선언에서 기성 세대를 대표하는 칼 헨리와 당시 젊은 복음주의자들 그룹에 속해 있던 로날드 사이더, 짐 월리스는 이미 냉전을 겪으면서 사회적 상상이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월리스는 Christianity Today를 떠나 Sojourners를 만들고 새로운 담론 투쟁으로 들어간다.
한국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가 보다 현실적이거나 구체적인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단순한 구제와 봉사의 사역을 넘어서 변혁과 해방의 사역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투쟁의 자리에 서지 못하고, 국가주의의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신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의 습관’이 형성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복음주의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일까?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변혁모델의 다양성과 일치를 향한 신학적 모색- 신원하 (0) | 2023.05.04 |
---|---|
사회적제자도와 대안적 성경읽기 -최경환 (0) | 2023.05.04 |
대안 공동체의 ‘르상티망’(ressentiment) - 최경환 (0) | 2023.05.04 |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로날드 사이더 (0) | 2023.05.04 |
신앙생활의 즐거움- 매튜 헨리 (0) | 2023.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