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즐거움(1)- 매튜 헨리
2014-06-28 13:44:50
신앙생활의 즐거움
최선의 삶
매튜 헨리
목 차
제임스 패커의 서문( 번역 생략)
독자에게 드리는 말
서 론
교리에 대한 설명
신앙의 즐거움은 참된 신앙의 본질과 많은 특정한 사례들에서 입증됨
신앙의 즐거움은 신자들이 누리는 위로와 특권에서 입증됨
4. 교리는 경험에서 더욱 입증됨
5. 즐거운 여행의 비유로 이 교리를 설명함
6. 반대에 대하여 이 교리를 옹호함
7. 교리의 적용
독자에게 드리는 말
[17] 박식한 헨리 모어 박사는 경건의 큰 비밀을 설명하면서 동물적인 삶과 신적인 삶의 차이점을 크게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알면 경건의 비밀을 깨닫는데 분명히 큰 도움이 된다. 사람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죄와 비참의 원인은 오직 영혼이 신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동물적 삶에 내어 맡긴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구원자의 계획은 바로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은 이런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동물적인 데가 있지만 하나님의 종교는 모두 영적이고 신적이다. 헨리 모어 박사는 “기독교는 동물적인 삶이 패배하고 신적이 삶이 승리한(2권 7장)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의 역사이며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혁명이 우리 영혼에 일으킨 것 보다 더 큰 것을 알지 못한다. (신적인 삶과 동물적 삶) 이 둘 사이에는 싸움이 있다. 즐거움보다 더 강력하게 (삶을) 끌어당기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신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신적 삶에 대한 즐거움이 동물적 삶에 대한 즐거움보다 말할 수 없이 더 좋고 더 가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이 책에서 최선을 다해 입증하였다. 사람들이 이것을 납득한다면, 우리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18] 이 논문의 요지는 지난 해 나의 일상 사역에서 여섯 번에 걸쳐 설교한 것인데, 거기서 왜 우리가 경건하여야 하는지, 그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제 5권을 끝내고 제 6권을 시작하려는 때에 이제 출판을 준비하는 기회를 얻었다. (출판을 하는 것이) 내가 바라던 일이었음을 여기서 고백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즐거움에 대한 교리는 내가 오랫동안 애착을 가지고 언제든지 말하려고 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출판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귀한 영혼을 널리 구원하는 일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출판에 관한) 친구의 요청이나 나의 의도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튜 헨리
1714년 5월 31일
서 론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언 3:17)
[19] 성경에는 종종 참된 신앙과 경건이 나타나 있고 특별히 잠언에는 지혜의(잠언 1:2,7,20 ; 2:2,10,: 3:13; 이름과 특징을 따라 (참된 신앙과 경건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지혜가 인간 본성의 최고의 발전이며 사람의 삶을 인도하는 가장 훌륭하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은 지혜를 구하며 어느 정도의 지혜를 가진 인류와 그들의 탐구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가장 오래전에 최초로 발견한 것 중의 하나인데 하나님께서 바람을 억제하시며 비를 명하실 때 - 사람 외에 모든 피조물을 창조의 법과 정하신 규칙아래 복종시키셨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에게 창조의 법으로(욥28:25-28) “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며, 악 곧 죄의 악에서 떠나는 것이 깨닫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와 명예를 독차지 하는 세상의 위인들은 지혜로운 체 하는 자들이며 자신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20] 이웃들은 세속적 지혜의 열매를 거두는 그들과 그 후손을 칭송하고 그들의 말에 동의할지 모르나, ‘그들의 길은 어리석다.’(시편 49:13,18) 곳간에 곡식이 가득하고 주머니에 돈이 가득하니 내 영혼아 편히 쉬라고 말하는 미련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시는 때가 올 것이다.(누가복음 12:20 ; 예레미야 17:11)
세상의 배운 자들은 지혜를 구하며 자신들을 겸손하게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 자처한다. 많은 지혜로운 원리와 규칙들이 그들에게 나왔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으로 사람의 가장 큰 의무와 관심이 창조주를 아는데 있으며 창조주와 사귀는데 있는 것을 아는데 실패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하나 미련하게 되었으며’(로마서 1:22)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고린도전서 1:21) 그러나 참된 신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고린도전서 1:30)가 되었으며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로새서 2:3)가 그들에게 감추어지지 않고 주어졌다. 신자들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최고로 여기고 자신들의 관심을 거기에 두며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자신들을 맡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가장 참된 지식의 말씀인(잠언 9:10)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을 다스린다. 사람은 신앙을 갖기 전에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선을 떠날 때 지혜도 그치게 된다.(시편36:3)
이제 우리에게 이 참된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도록 권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혜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지혜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르도록, 위대하신 하나님은 여기에 오셔서 솔로몬을 통하여 충분히 설득력 있고 위엄 있는 이야기로 우리를 설득하신다. [21] 우리에게 명백한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득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해주신다는 것은 놀라운 겸손이다. 하나님은 신적인 명령과 율법의 속박으로 하시지 않고(시2:3)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호세아 11:4)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은 ’힘들지 않은‘(요한1서 5:3) 그의 말씀으로 귀한 약속을 하시고 우리를 지혜로 초대하신다.
유익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정교사이다. 일단 유익하다고 확신하면, 사람들은 그 무엇에 의한 것 보다 더 동요된다. 모든 사람은 유익한 것을 추구하며 따라서 유익한 일 자신을 헌신한다. “ 누가 뭐든지 유익한 것을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공통적인 질문이다. 모두가 행복하면 모두가 편할 것이다. 이제 신앙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영원한 진리 자체로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지혜라고 불릴만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것을 가르치며 복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말하자면 지극히 거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이 참으로 복된 것이다. 여기서 “지혜를 찾는 자가 복되다”(잠언 3:13)는 하나의 원리가 정해지는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영혼에 심겨진 지혜의 습관과 원리를 찾는 자이며, 부지런히 찾아서 마침내 값비싼 진주를 발견한 자이다. “ 명철을 얻는 자가” 그는 참된 것을 얻는 자이다. 명철을 얻는 사람은 원어로 지식을 생산, 혹은 지식을 낳는다는 의미로 Qui profert intelligentiam 이라고 말한다. 자신 안에 훌륭한 원리를 가지고 자신과 남의 유익을 위하여 비축되고 구비된 원리를 시용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하기 위하여 행복의 개념, 행복의 본질, 행복의 요소,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22]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에 대하여 저지르는 오류를 의심해볼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극도로 오해하면서 교만을 복되다 하고(말라기 3:15)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탐욕을 복되다하기 때문이다.(시편 10:4)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규칙에서 우리가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자들과 몫을 함께 탐내지 않기 위하여, 또 시험에 빠진 시편 기자처럼 말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세상의 외적인 번영을 부러워하고 그들이 행복한 자라고 말하였지만 경건한 백성의 참된 행복을 바라보았을 때, 결심하여 말하길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가 복되다고 하였다.(시편 144:1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께서도 진리를 따라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지혜를 찾는 자가 복된 자이다.”
신앙인의 행복은 다음과 같이 입증된다.
1. 신앙으로 얻어지는 참된 행복으로부터 입증된다.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다.”(디모데전서 4:8)는 말씀처럼 경건은 범사에 유익이 된다. 신앙으로 우리가 실패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실패가 아니라 마지막에 말할 수 없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지혜의 은사를 찾는 자는 은보다 더 좋은 지혜라는 상품을 얻을 것이며, 정금보다 더 좋은 것을 거기서 얻으며, 지혜가 보석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욥의 시대부터 신앙의 유익은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살 수 없고 그 값을 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욥기 28:16,19) ‘지혜의 오른 손에는 장수가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그 날의 길이 줄어들지 않으며 [23]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는데‘(잠언 3:16) 그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이며 하나님께로 오는 명예이니 참된 부요이며 참된 명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래가고 영원하며 가난과 수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수고에는 다소간에 어떤 종류의 이익이 있지만 신앙의 수고에서 오는 그런 종류의 이익은 없다. 신앙의 수고를 하는 자는 그로 인해 큰 유익을 누릴 것이며 현세의 유익도 가치가 있고 영혼을 위하여 안락한 영예를 얻을 것이며 미래에는 말로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무한한 보상을 받는다.
2. 신앙인의 행복은 신앙에서 발견되는 초월적 기쁨으로 입증된다. 여기에는 기쁨을 완성하는 유익과 즐거움이 결합되어 있다. Omne tulit punctum, qui miscuit utile dulci. 세상에서 부를 얻으려 하는 자들은 즐거움을 포기할 작정을 해야 하며 즐거움에 탐닉하는 자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일에 만족하여야 한다. 탐욕이 많은 자들은 방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방탕한 자들은 탐욕을 부릴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신앙의 즐거움과 유익은 그렇지 않다. 거기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적 부요를 얻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충만한 위로를 누리고 하늘에 보화를 쌓으면서 영적 즐거움 가운데 거룩한 즐거움을 누린다. 영생토록 지속되는 양식을 위해 부지런히 수고하면서도 영혼은 편하게 쉬는 것이다. 이 글이 말하려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유익과 기쁨 ‘생명의 나무’라는 말과 결합되어 생명의 나무에 달려있는 유익과 기쁨을 부요하게 하고 즐거워한다. 생명의 나무처럼 유익하고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4] 먼저 우리가 확신컨대, 신앙의 길은 즐거운 길인데, 그 즐거움은 즐거울 뿐 아니라, 신앙의 길에만 국한되고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다시 말하면 그 즐거움은 어떤 생소한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의 내적인 선함에서 나온다. 또한 그것은 신앙의 최고의 즐거움을 나타내는 즐거움 그 자체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즐거움의 길들이며 번영의 날에 나오미가 자기 이름을 가지고 했던 말이다.(룻기 1:20) ‘ 나를 나오미, 곧 즐거움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곧 비통이라 부르라.’ 지혜가 반대로 말하는 것을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나를 마라라고 잘못 부르지 말고 나오미라 부르라. 통속 라틴어로는 Viae pulchrae 라고 하는데 그 길은 아름다운 길이고 달콤한 길이라는 뜻이다. 지혜의 길이 그러한데, 다시 말하면 지혜가 인도하는 길, 지혜가 명하는 길은 우리가 따르기만 한다면, 반드시 참된 즐거움과 만족을 얻는 것이다. 지혜는 말하길, 이것이 길이니 이 길을 따르라 그리하면 마침내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즐거움도 얻는다고 한다. 그 길은 복으로 가는 유일한 바른 길이고, 편하든지 험하든지, 기쁘든지 기쁘지 않든지 간에 우리가 가야만하고 머물러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은 여행자에게 큰 위로를 주며 그 길은 바른 길일 뿐 아니라 즐거운 길이고 하늘로 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잠언 2장 3,4절에서 솔로몬을 통해 말씀하시길, 우리는 명철을 불러 구하여야 하고 지혜를 얻으려 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찾고 또 찾아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수고와 비용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은 말하길 이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악인과 [25] 이방 여인의 길을 금하며, 금지된 감각적 즐거움을 멀리하게 한다. 감각적 즐거움을 금하며 경건과 수고를 촉구하는 것이 신앙의 길로 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하여 솔로몬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우리의 수고가 경건의 유익으로 풍성하게 보상받을 뿐 아니라 우리가 누릴 즐거움도 우리가 즐길 기쁨과 함께 풍성할 것을 확언한다.
두 번째로 덧붙여진 것은 지혜의 모든 길이 화평이라는 것이다. 화평은 종종 모든 선과 함께 있는데 여기서 화평은 안전과 보호의 유익을 가져온다. 많은 길들이 즐거워 보이고 그 길들은 깨끗하고 순탄해 보이지만 위험한 길이거나 적어도 안전하지 않고 도적들이 괴롭히는 길이다. 그러나 지혜의 길에는 거룩한 안전이 있으며 또한 거룩한 평안이 있고 그 가운데 걷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와 태양이 되시므로 선을 바라며 즐거워할 뿐 아니라 악의 두려움에서 안온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의 유익을 위해 지혜를 택하며 지혜의 길에는 즐거움이 있고 그 모든 길에는 화평이 있다고 그 구절의 앞부분과 같이 말한다.
1. 신앙의 마지막에는 화평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가는 길에도 화평이 있다. 일이 끝난 의인은 밤에 누울 때 평안함을 누릴 뿐 아니라, 재물이 더하고 평안에 들어가며 편히 누울 것이다.(이사야 57:2) 완전한 자를 보고 의로운 자를 주목하라 그의 마지막은 평안이다.(시편 37:37) 그것은 영원한 평안이며 그늘과 같은 평화이기도 한데, 의인이 하루 종일 일을 할 때 그들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일을 하니, 그 일은 의로운 일이고 평안으로 보상을 받는 일이며(이사야 32:17) [26] 그 즉시 의로운 결과를 맺을 뿐 아니라 그 마지막은 안정과 영원한 보장이다.
전쟁이 평화로 가는 길일수도 있다. Sic quaerimus pacem ‘이렇게 우리는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전쟁 무기에 새겨진 최선의 좌우명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들의 영광이란 그들이 평화를 추구할 뿐 아니라 평화를 누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며 그들을 지킨다. 그들이 아직 집에 오지 못한 나그네일지라도 그들에겐 평화가 있다.
평화의 길을 일지 못하다는 것이 육적이고 불경건한 세상의 비참이다.(로마서 3:17) 그들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하신다.(이사야 57:20,21) 화평의 아들이 아닌 자들(누가복음 10:4,5)에게, 평화의 말씀에 대한 은혜가 없는 자들에게, 어떻게 평화를 말하겠는가? 그들을 평화를 부르짖지만 그들이 가는 길과 목적지에는 참된 평화가 없다. 그들에게 해 줄 말은 ‘평화가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게로 돌이키라’는 열왕기하 9:18 말씀이다. 그러나 평화의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모든 자들에게, 평화의 왕을 섬기는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말한다. 그들은 평화로 가는 길을 경험하여 알고 있으며, 사랑과 화평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번성하고 화평할 것이다.
2. 모든 신앙의 길에 이 평화가 있을 뿐 아니라, 신앙의 특정한 길에도 평화가 있다. 몇 가지 행동으로 그리고 사례로서 그 평화를 살펴보라. 모든 은혜를 누리는 가운데, 모든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몸에 대해 말한 것이 그 모든 지체에게 참되며 평화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므로 우리들은 (앞서간)무리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간다.(아가1:8) [27] 그 길은 선하고 오래된 길이며 우리 앞서 하늘에 간 자들이 걷던 길이며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다. 이 옛 길을 따라가면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예레미야 6:16)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갈 때,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우리 앞에 간 사람들을 본다. 오직 이 길을 가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갈대아어로 Itirena ejuis pacifica 는 지혜의 여정은 화평이란 뜻이다. 지혜의 길은 정원을 거니는 것과 같지 않으니 정원은 기분전환과 재미로 걷지만 지혜의 길은 대로를 따라가는 것 같이 조심성과 인내를 가지고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신앙의 길에서 여행을 할 때, 그것은 목적을 가진 여행, 즉 죽느냐 사느냐는 목적을 가진 여행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거나 잃어버리지 말고 야곱이 그랬듯이(창세기 29:1) 서둘러 가야 한다. “그 때 야곱은 자기의 길을 갔다(난외의 주에는 서둘러 갔다)” 그리고 여호사밧이 그랬듯이 “주의 길을 따라”(역대하 17:6)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과 소망의 목적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비록 여행길이 멀지라도 집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길이고 화평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신앙과 경건의 이르는 길에는 다양한 경로들이 있고,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율법의 덜 중요한 문제에서 그렇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길이다. 모든 다른 길이 지름길은 아니지만 지름길이 아니라도 신앙에 필수적인 하나님의 진리와 법이라는 동일한 울타리 안에 있다, 그 길은 먹는 자든 먹지 않는 자든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로마서 14:6) 위로를 받는 화평의 길일 것이다. [28]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지혜의 길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의로우며 성령 안에서 화평과 기쁨임을 알게 될 것이다.(로마서 14:17)
3. 지혜의 모든 길에는 이런 평화가 있고, 순전하고 더럽히지 않은 신앙에는 이런 평화가 있으니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모두 시험해보면 그것을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고 반대할 자가 없다. 지혜와 신앙은 모두 한결같고 동일하게 평화와 희락의 금실로 짠 진정한 경건의 직물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 모든 길이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약간의 만족을 가지고 있는 척하나 그 즐거움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원리에는 보편적인 정직이 있으며(시편 119: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그리고 잠언 8:8에는 지혜가 ‘나의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느니라.’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실천에는 범사에 평화와 즐거움이 있으며 그 모든 길은 우리가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이다.
그러므로 경건의 교리는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나있다.
참된 경건 안에는 참된 즐거움이 있다. 혹은
경건의 길들은 기쁘고 평화로운 길들이다.
1. 교리에 대한 해설
[29] 여기서 우리가 제시한 것은 분명한 진리이며 거기에 설명이 필요한 것이 거의 없다. 그 의미를 파악한대로 단지 그 확실성에 이미 동의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충분하다. 감각적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을 알지 못하거나 다른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신앙의 즐거움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이해하지 어렵다고 누구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경건에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교리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할 것이며 그것을 어려운 얘기라고 할 것이다.
즐거움이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마음의 즐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를 바란다. 그 즐거움이란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 대한 정당한 존경인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대가 영혼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다면 참된 신앙과 경건의 길에는 참으로 풍성한 즐거움과 만족이 있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30] 그러나 경건에 대한 이해를 다소 도와주고 오해를 막기 위하여 먼저 내가 참된 경건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말하는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1. 위선자들에게 신앙의 즐거움과 기쁨은 매우 생소하다. 그들은 모두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에 생소한 자들이 참견할 수 없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위선적 경건은 결코 참된 즐거움을 가져오지 못한다. 배우는 그 역할이 결코 즐겁지 않더라도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즐거운 역할을 잘 소화해 내지만 본인은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집의 즐거움은 밖의 마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베일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과 통치아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경건의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다. 지혜가 그대의 마음에 들어와 경건을 소유하고 살아있고 활동력 있는 원리가 될 때, 그 때 경건은 그대의 영혼의 즐거움이 된다.(잠언 2:19) 사람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주는 위로에 당연히 이르지 못한다.
위선자들이 즐거워하는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만족이며 감각의 만족이다. 그래서 그들의 입은 영적 즐거움의 미각을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 즐거움을 알지 못하게 된다. 장사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지루해 한다(아모스8:5) 그러므로 정당하게 욥은 묻기를, 위선자들이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고 한다(욥 27:10) 그렇다. 그들은 피조물을 의지하며 창조주께 돌아가 쉬려고 하지 않는다.
위선자는 현저한 감정의 범람으로 신앙에서 화려한 즐거움을 찾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의 강을 조금도 맛보지 못한다. [31]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기뻐하는 자들이 있었고(이사야 58:2) 그에 대해 약간의 관념을 가졌고 그것을 놀라워하며 상상하고 기뻐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길로 가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돌밭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지만 말씀에서 지속적인 유익을 얻지 못한다.(누가복음 8:13) 헤롯은 요한의 말을 즐겁게 들었다(마가복음 6:20) 헤롯은 요한의 설교에서 동의할만한 것을 발견했고 자연적 양심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헤로디안의 일로 비판받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미사여구를 쓰는 에스겔 같은 설교자는 그들에게 악기와 잘 어울리는 ‘매우 사랑스러운 노래’였을 것이다.(에스겔 33:32) 그러나 동시에 그 설교가 그들의 양심을 다루고 그들의 죄악을 보여주면 그들은 모욕이라고 간주하였다..(예레미야 6:10)
신앙에 있어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영혼,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만이 그 즐거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연습은 유익이 별로 없으므로 (디모데전서 4:8) 즐거움도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비중생자에게는 짐이며 과업이다. 그에게는 공기를 마시는 일이 지극히 어색할 것이다. 그래서 공기를 들이마시고 보라 얼마나 즐거운가! 라고 말하는 대신에 ‘보라 이것이 얼마나 지겨운가!’ (말라기 1:13) 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친하게 사귀는 일이나 양심을 돌아보는 일에 즐거움이 없으니 이는 신앙고백과 그들이 불일치한 것을 비난하며 그 신앙고백이 거짓임을 책망하는 일들이 언제나 그들에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평화, 평화라고 부르짖지만 하늘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지 않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음으로 즐거움은 깨어지며 그들에게 신앙 자체는 고통을 줄 뿐이다. [32]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움이 되며 복음은 그들의 위선을 책망한다. 이런 고통과 곤란의 때에도 그들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몰래 죄를 짓는 시온의 죄인들처럼(이사야 33:14) 시온에서 편하게 지내며 자신들의 요새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위선자들에게 지극히 놀라운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아모스 6:1)
그러므로 위선자들은 잠시 위장을 한 후에 시간이 지나면 신앙을 던져버리고 신앙고백을 스스로 떠나게 되는데 이는 신앙이 그들에게 편하지 않고 지겹기 때문이다. 자기 사업을 즐거워하지 않는 장사꾼은 그것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듯이 그들은 신앙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신앙의 내적 즐거움이 없다면 누구도 신앙으로 인한 외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내적 즐거움의 결핍은 나무에 물이 없는 것과 같아서 그 잎이 곧 마르게 된다.(시편1:3) 위선자는 하나님께 항상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으며 그 요청을 오래 지속하지 않는데 그것은 위선자가 전능자를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이다.(욥기 27:10) 이것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신앙을 가장하는 위선자는 배교자가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을 결코 즐거워하지 않으며 신앙에 결코 진실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함없이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위선에 대해 조심하고 주의하자.(누가복음 12:1) 가짜 경건은 그 속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참된 기쁨의 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려는 것이다.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물을 저장하지 못할 쓸모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다.. 그렇다 그 웅덩이는 뚫어져서 물을 저장할 수 없으니 어떻게 그들이 생명의 샘을 파고 거기서 생수를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3] 그들은 결코 기대할 수 없으니 이는 그들의 신념은 자신들의 즐거움이며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호소하며 세상을 추구한다. 신앙을 가진 척하지만 사실은 신앙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신앙의 명예가 실추되어서는 안 된다.
2. 참된 신자도 자신들의 실수와 어리석음으로 경건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참된 경건은, 우리가 제대로 감화를 받고 바르게 이해하며 그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지극히 즐거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혜의 길은 항상 즐겁다고 주장하였지만 지혜를 따르는 자들도 가끔은 즐겁지 않고 지혜를 옹호하는데 곤란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혜를 따르는, 이 문제에서 마땅히 즐거워야 하는데(누가복음 7:35) (그렇지 못함으로) 오히려 지혜를 공격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고 지혜의 목적에 편견을 갖게 만든다. 그들은 길을 잃거나 길에서 벗어나서 그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혹은 흔히 그 길에서 누리는 위로를 받기를 거절한다. 그들은 불필요한 혼란으로 스스로를 방해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볍게 하신 멍에를 무겁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려고 만드신 멍에를 무섭게 만든다. 요나가 화를 내며 그랬듯이 그들은 이유 없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고뇌하며 자신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리고 그리스께서는 우리를 가볍게 하시려고 자신을 그런 고뇌에 빠뜨리신 것인데도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러신 것처럼 죽음에 이르듯이 영혼이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 때문에 참된 경건의 명예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경건한 슬픔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것은 경건의 본질과 의도에 반대되는 것이며 [34] 경건 위에 덧칠을 하는 것이며 경건을 뛰어넘으려는 것이다. 그런 슬픔은 차라리 하나님께 대한 노예적 두려움에서 나오는 미신적인 슬픔이라고 부를 만한데 이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섬기는 귀신과 야만적인 희생물에 대해 가지는 슬픔과 같은 것이며 경건의 유익에 대한 명예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니 그런 슬픔을 갖는 자들도 큰 손해를 입는 것이다.
만일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완전한 행복을 세상에서 찾는다면 혹은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지고 있어야 할 완전한 의로움을 자신들에게서 찾는다면 혹은 오직 하늘에서만 가지고 있어야 할 완전한 거룩함을 땅에서 찾는다면, 그들은 나날을 불안하고 고민하며 슬퍼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거나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으려 하는가? (누가복음 24:5,17)
오직 신앙, 참되고 순전한 신앙이 그 모든 규칙과 경우에서 명령하고 승리하게 하라. 그리하면 이런 눈물은 곧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신앙의 규칙과 명령 앞에서 자기 일을 하게하고 그 정당한 위치와 균형을 연습하게 하라 그리고 신자들이 복음의 특정 계명에만 몰두하게 하지 말고 더 이상 율법의 한쪽 돌판을 다른 것과 분리시키지 말게 하라. 신자들이 죄를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자신들의 의무가 되게 하라. 왜냐하면 신앙은 바로 그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그들의 슬픔이 이 교리의 참됨을 조금도 흔들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유지되는 한, 신앙의 이런 성격도 유지될 것이며 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참된 경건에는 즐거움이 있다. 참된 경건에서 우리는 위로를 누리며 만족을 누린다. 거기에는 utile 뿐 아니라 bonum juncundum도 있다. 그것은 영혼이 기뻐하며 쉼을 얻는 합당한 즐거움이다. [35] 영혼은 경건을 즐기고 기뻐하며 그 즐거움이 지속되고 반복되기를 소망한다. 사람의 기능들이 정당한 틀과 기질을 유지하며,, 더럽혀지고 타락하며 부패하지 않게 하라. 신앙의 연습은 사람의 기능들을 그렇게 만드는데 매우 적합하고 유익하며 이런 신앙의 즐거움은 그 즐거움을 손상시키는 어떤 것으로도 반감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 신앙의 길들은 바르고 즐겁다. 신앙의 길은 불법과 모욕으로 반감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죄는 즐거운 것처럼 가장하지만 그것은 의로운 것을 타락시키는 것이며(욥기 33:27) 도둑질한 물(잠언 9:17)과같이 즐거운 것 같지만 불의한 것이다. 그러나 경건의 즐거움은 우리의 정직한 본성에 합당한데, 이는 경건의 즐거움은 우리 본성의 순수하고 깨끗한 소망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경건은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이고 ,우리가 지독하게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선택할 길이다.
그 길들은 의로우니 이는 그 길들이 우리의 의로운 주님께서 정해주신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성적 창조물로 만드신 주님은 우리 존재에 적합한 법을 주시는 권위를 가지셨으니 주님은 자연적 양심과 기록된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행하라’(이사야 30:21)고 하셨다. 그 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고 허용하신 길일뿐만 아니라 그 길을 걷도록 요구하시고 명령하시는 길이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신으로 보내시어 주님의 명을 따라서 이 길을 걷게 하신다. 경건의 길은 의로우니 그 길은 우리를 위대한 목적지로 곧바로 인도하며, 이생에서나 영원에서 우리의 유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우리의 존재에 딱 어울리는 곳으로 인도하는 유일하게 바른 길이므로, 만일 이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길을 잃고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길은 또한 즐거운 길이다. ‘보라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즐거운가!’(시편 133:1) [36] 그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누리는 행복이니, 하나님은 택하신 그 길에서 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훈계하실 뿐 아니라(우리는 이것이 바른 길임을 확신할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편하게 쉬게 하실 것이다’(시편 25:12,13) 당연히 그들은 편하게 지내며 그들의 길을 선택하고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는 무한한 지혜를 누린다. 즐겁지 않으나 의로운 것이 있기도 하고, 의롭지 않으나 즐거운 것도 있지만, 신앙은 즐거우며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구절에서 신앙은 생명나무에 비유하였다. 지식의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실로 눈에 즐거워 보이고 먹음직스럽지만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즐거울 뿐 아니라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먹도록 허용된 ‘생명의 나무’ 이다.
신앙의 길은 쉽고 즐거운 길이다. 그 즐거움은 수고와 난관으로 방해받지 않으며 더구나 우리 자신의 본성의 타락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실로 그런 것과 싸우며 논쟁한다. 그 길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길이므로 신앙의 실천이 쉽고 더욱 즐거운 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요한일서 5:3)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의 의도는 더 깊은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겁거나 짜증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은혜롭고 즐거운 것이다. 그의 멍에는 쉽다.(마태복음 11:30) 거기에 사용된 말은 쉽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 멍에는 달콤하며 부드럽고 그 멍에는 목에 쉬울 뿐 아니라 목을 다치지 않고 목에 잘 맞아서 머리의 베게처럼 편하다는 뜻이다. 그 멍에는 감당할 만하며 매우 안락하다. 하나님의 길에는 불평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않으며 풍성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그 길은 지루하지 않으며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 마치 생명의 나무처럼 우리를 폭우와 폭풍에서 지키고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므로 [37] 우리는 큰 즐거움으로 그 그늘아래 앉으며 그 열매는 ’우리 입에 달 것이다.‘(아가서 2:3)
3. 신앙의 길은 유익하며 즐거우며 수고와 손해를 초래하지 않는다. 유익하지만 아직 즐겁지는 않은 것도 있고, 즐겁지만 나중에는 매우 손해가 되며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다. 죄인들이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에서 무슨 열매를 맺었는가? (로마서 6:21) 그러나 신앙은 즐거움과 유익을 함께 가져오니, 신앙의 즐거움은 잘 균형을 맞춘다면 수고나 손실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 세상이 주는 유익은 대개 수고와 힘든 노동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육체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에 종 된 자들은 거기에 코를 박고 세상의 부를 얻으려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슬픔의 떡을 먹는다(시편 127:2) 그들은 수고하나 영혼의 유익을 얻지 못하지만(전도서 4:8) 하나님께 종 된 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누리며 그 일에 보상도 받을 것이다.
진지한 경건의 연습에는 내세의 행복을 향한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생의 위로를 얻는 것이 많다. 다윗은 그것을 신앙의 특권이라고 말한다(시편 19:10)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이후 뿐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중에도 큰 상급이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대한 현세의 보상이다. ‘선인은 스스로 만족한다.’(잠언 14:14)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두르므로 주님의 길이 즐거운 길임을 아는 신자는 ‘주님의 길을 즐거워한다.’ (시편 138:5)는 말이다,
신앙의 규칙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더욱 친밀한 대화를 할수록, [38] 우리는 더 그리스도와 내세를 바라보고 살며 현세에서도 많은 위로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시편119:165) 사람은 큰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의 법을 사랑할수록 더 큰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것은 교회에 주신 약속이니 ’그의 모든 자녀들이 주의 법을 배우며(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자들은 제대로 배우며 제대로 행하기를 배운다.) 그들의 큰 평화를 누리리라(이사야 54:13) 는 예언처럼 평화가 강물처럼 모든 신자들을 따른 것이다.
셋째로, 나는 하나님의 법을 참된 기쁨이라고 부른다. 거짓된 지식이 있듯이(디모데전서 6:20) 거짓된 즐거움도 있다. 고대의 어느 사람( Damascen Orthod Fid 50:2)은 그 안에 진리가 있는 즐거움과 거짓으로 속이는 즐거움을 구별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즐거움을 사람의 주된 유익으로 삼는 것을 공공연히 낙인찍고 저주하였는데 그들이 저주한 즐거움은 마음의 즐거움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 감각적인 즐거움을 의미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의도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 철학의 다른 원리들은 매우 무신론적이고 불경건하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컨대,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은 참된 즐거움이며 그것은 신앙에 어울리는 즐거움이며 신앙의 충만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즐거움이다.
1. 신앙의 즐거움은 실제적이며 위선적이지 않다. 육신을 추구하는 세상은 세상의 즐거움과 감각의 만족에서 크게 만족한 척 가장한다. 그들은 ‘내 영혼아 편히 쉬라.’ 고 말하거나(누가복음 12:19) ‘내가 재물을 얻었다.’ 고 말하거나(호세아 12:8) 심지어 ‘나의 손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며(이사야 57:10)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다’고 말한다.(이사야 44:16) 솔로몬이 분명히 말하듯이 ‘악인은 마음의 욕망을 자랑하나 그 웃음의 끝은 곤고함이며 마음의 웃음은 슬픔이 될 것이다. (잠언 14:13) [39] 자기 배를 신으로 만드는 자들과 돈을 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우상을 섬기느라 모두 끊이지 않는 고통과 불안을 겪으므로, 그들의 즐거움은 단지 입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현재에 실망하고 불만족하며 더 악화될 것을 두려워하며 제멋대로인 욕망은 욕구가 만족되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죄책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자랑하지 못할 즐거움을 자랑할 때 그것이 거짓말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선택한 것에 실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즐거운 것 같고 행복한 것 같지만 자신들의 악을 깨닫게 되면 그들의 마음은 괴롭지 않을 수 없게 된다.(잠언 14:10)
그리고 우리가 말한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은 우리를 위로할 것이 우리의 괴로움이 되며 우리가 만족을 그토록 기대했던 것에 실망하게 된다. ‘우리가 말하길 우리의 침대가 우리를 편하게 할 것이라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쉬는 침대가 아니라 우리가 (잠을 못 이뤄)뒤척이는 침대가 될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찾아오면 침대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다 이 세상일들에서 진정한 즐거움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며 우리는 너무도 자주 위선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우리가 듣는 삶의 나날을 살기 원하지만 그 날들은 악한 날들이 될 것이며 우리가 의지하는 세월들에 아무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전도서 12:1) 그러나 경건의 즐거움은 견고하고 근본적인 즐거움이므로 꾸며진 즐거움이 아니고 금박을 입한 금이 아니다. 즐거움의 아들들은 재물을 상속하니 (잠언 8:21) 그것은 든든한 기초이며 튼튼한 갑판이며 결코 적지 않은 하나님의 위로이다.(욥15:11) [40] 반면에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은 그렇지 못한 허무한 것에 주목한다.(잠언 23:5) 세상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에게 없는 즐거움을 가장하지만 경건한 자들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이 가진 즐거움을 감춘다.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요한복음4:32)
2. 그 즐거움은 이성적이며 맹목적이지 않다. 그것은 영혼의 즐거움이지 감각의 즐거움이 아니며 오직 사람만이 누리는 즐거움이지 열등한 피조물과 공유하는 즐거움이 아니다. 신앙의 즐거움은 , 육체의 감각과 욕망을 만족시키는데서 나오는, 단순한 동물적인 삶을 사는 자들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러나 경건의 즐거움은 우리를 영의 세계와 결합시키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부분인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경건의 즐거움은 사람의 참된 즐거움이라 불리는 것이다.
동물도 우리가 가진 감각에서 느끼는 동일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그 동물들 중에는 그 감각이 더욱 정교해서 아주 고도로 발달된 것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처럼 이성과 양심이 가진 교정기능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없다. 깊은 곳에서 뛰노는 악어처럼 즐겁게 사는 자가 누구인가? 혹은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새들처럼 즐겁게 사는 자가 누구인가?( 시편 104:12,26) 그러나 땅의 짐승들보다 더욱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더 지혜롭게 지음을 받은 사람을 이런 것들과 비교하겠는가? (욥 35:10,11) 사람이 이성의 능력으로만 아니라, 신앙의 능력으로 모든 동물보다 품위 있게 지어진 것은 분명히 더욱 탁월한 본성인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 때, 다른 피조물처럼 넓은 세상의 즐거움에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낙원, 곧 즐거움의 동산(이것이 에덴의 의미)을 정해주시고 거기서 사람에서 합당한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셨다. 그 즐거움은 동산과 즐거운 나무들, 그 열매들이 실로 의미하는 것이지만, [41] 사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에서 누리는 영혼의 즐거움이다. 그 빛은 하나님의 불의 번쩍임이며 위에서 내려오는 숨결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새겨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천사와 함께 가졌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며 짐승과 함께 가졌던 즐거움을 제대로 경멸하기 전에는, 첫 번째 조상이 육신의 욕망에 빠짐으로 잃어버린 희락을 결코 되찾을 수 없다.
지혜의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간접적으로 몸에 영향을 미쳐 유익하게 한다. 그래서 말하길(잠언 3:8) 즐거움은 몸에 양약이 되며 골수를 윤택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 즐거움은 마음에 감취인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베드로전서 3:4) 근심이 많을 때에 영혼을 즐겁게 하는 위로이다. 그것은 감각적 즐거움처럼 비이성적으로 누리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이성적으로 누리는 즐거움이다.
신앙을 떠나서 즐거움은 없는데, 지적인 즐거움으로 가장하는, 배움의 즐거움이나 명예의 즐거움은 헤롯처럼 군중의 칭송가운데 위엄과 자신이 받는 존경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의 즐거움일 뿐이다. 그런 즐거움은 참된 영광이 아닌 헛된 영광으로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 영예를 받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며 그런 영예를 돌리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먹고 사는 것이므로 합당한 즐거움이라 부를 가치가 없다. 그것은 그런 즐거움으로 얻는 만족은 마음의 정욕이며, 육체의 욕망처럼 타락의 한 예이다. 신앙과 분리된, 학자가 누리는 즐거움은 실로 이성적이고 지적이지만, 그것은 단지 지식을 아는 마음의 즐거움이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즐거움은 아니다. [42] 어떤 사람보다 더 그런 즐거움을 누렸던 솔로몬도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와 우리에게 확언하기를 이런 종류의 지혜는 슬픔이 많으며 ‘지식을 더하는 자는 슬픔도 더한다고’ 말한 것이다.(전도서 1:18) 그러나 거룩한 영혼이 하나님을 아는데서 누리는 즐거움은 영적일 뿐 아니라 만족케 하는 것이므로 영혼을 만족케 하고 영혼의 최상의 감정에 적합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3. 그런 즐거움은 현란하거나 일시적이 아니고 지속적이다. 그것은 참된 즐거움이고 그런 이름에 합당하므로 생명의 나무처럼 우리에게 지속되며 풀처럼 시들지 않으며 곧 타버리는 촛불이 아니라 하늘의 진실한 태양처럼 빛을 낸다. 우리는 이 즐거움이 가장 가치 있으며 가장 오래간다고 생각한다.
감각적 즐거움은 사리지고 빛이 바랜다.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 듯이(요한일서 2:17) 세상의 욕망도 그러하다. 세상의 욕망은 처음에는 기쁘게 하고 만족케 하지만 잠시 후에 지루해지고 시들해진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탈 때’(전도서 7:6) 큰 불꽃과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만 잠시 후면 곧 검댕이와 재만 남듯이 어리석은 자의 웃음이 이와 같아서 그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변한다. 벨사살의 즐거움이 지독한 실망으로 변하였으니 ‘하나님이 즐거운 밤을 두려움이 되게 하신 것이다.(이사야 21:4). 죄악의 낙은 ’잠시‘일 뿐이고(히브리서 11:25) 그 ’즐거움의 끝은 고통‘일 뿐이다. 그런 즐거움이 한결같지 않듯이 그런 즐거움은 지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신앙의 즐거움은 늘 함께 하며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으며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움에 주름이 생기지 않으며 서리가 손상시키거나 폭우가 후려치지 못한다. 그 즐거움은 해아래 모든 것들에 일어나는 (전도서 9:1)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장애를 이기고 지속되는 즐거움이다. 신자들은 슬플 때에도 잠시 슬플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기뻐하며.(고린도후서 6:10) 항상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고린도후서 2:14) 때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면, 항상 즐거워하는 영혼을 (데살로니가전서 5:16)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즐거움은 하늘에 쌓은 보물과 같이 벌레가 먹거나 녹슬지 않으며 도적이 훔쳐가지도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즐거움은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므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요한복음 16:22) 기쁨이다. 그것은 영원한 즐거움의 시작이며 증거이고 맛보기이므로 그것은 사실상 언제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이 확신하기를 바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섬김으로 지내는 거룩한 하늘의 삶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사람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즐겁고 위로가 가득한 삶인 것이다.
신앙생활의 즐거움(2)- 매튜 헨리
2014-06-28 13:46:07
2. 신앙의 즐거움은 참된 신앙의 본질과
많은 특정한 사례들에서 입중 됨
[45] 이 교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지만 이 글의 주목적은 이 교리의 참됨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교리를 참된 빛 가운데 제시하게 하심으로 그대가 이 교리를 확신하고 진실하게 받아들임으로 경건한 삶은 즐거운 삶이라 고백하게 하며 그러한 삶을 살길 바란다!
즐거움은 매력적인 것이므로 기쁨을 낳으며 소망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강력하게 소망을 촉구한다. 신앙에 즐거움이 있음을 충분히 납득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신앙적 삶에 매혹될 것이다. 여기에 낚시 바늘이 없는 미끼가 있다. 그대의 환심을 사려하는 이 즐거움은 아무 고통이 없고 그 마지막에도 괴로움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초대하시는 즐거움이고 참으로 영원히 행복하게 하는 즐거움이다. 이런 즐거움에 그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46] 우리는 지혜의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해 오래 이야기함으로 우리 자신과 청중들을 즐겁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런 말이)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 우리는 모두 이런 진리에 믿음을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증거를 따를 것이다! 진리의 증거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나는 단지 두 가지만을 바라고 싶다.
1. 편견을 버리고 공정하고 정당한 태도로 근거에 귀를 기울이고 미리 판단하지 말라.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어리석으며 수치를 당한다.‘(잠언 18:13) 특별히 그것이 자신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관심이 있는 살고 죽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그럴 수도 있음을 기꺼이 믿으라, 그러면 나는 참된 신앙에 참된 즐거움이 있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의심 없이 입증할 것이다.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듯이 그대는 신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갖고 확신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관념은 신앙은 아주 우울한 것이고 즐거움이나 기쁨과는 결별하는 것이며 인생을 슬픔과 한숨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반대로 제시하며, 신앙은 기쁜 것이고 마음을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아마도 에스겔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 아닌가?” (에스겔 20:49) 라고 말하듯이 그 말이 역설이 아니냐? 고 말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깜짝 놀라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요한복음 1:46)라고 말한 나다나엘처럼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신앙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라고 말한다. 신앙에 즐거움이 있을 수 있으며, 신앙에는 반드시 즐거움이 있음을 믿으라.
신앙을 고백하나 신앙을 따라 살지도 않고 신앙의 모습도 없는 어떤 어리석은 자들을 보고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 어리석은 그들은 자신의 짐을 지거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결백을 입증하게 하고,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사실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47] 그러므로 그들 때문에 신앙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대적하는 자들이 가진 악한 견해나 신앙을 판단하거나 신앙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자들이 덮어씌우려는 오명을 따라서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앙을 멸시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말하거나 이 문제를 제멋대로 생각하며 남들이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 부당한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
2. 이것을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은 영이라는 사실을 고수하라. 이것이 내가 이 교리를 입증하기 위하여 규정하는 요청이다. 그리고 사람이 이성적이고 영생하는 존재이며 영적 세계와 관련된 영적 능력과 지위가 부여된 이성적이고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바란다. 사람에게는 감정과 성격을 가진 영혼이 있으며, 이것은 육체의 기능과는 다른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기능이며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우리의 기능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잘되는지 잘못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정말 잘되거나 잘못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현 상태는 영혼과 육체가 서로 분리되고 갈등하는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서, 육체는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며 육체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만 반면에 영혼은 영적 즐거움을 더 잘 즐기기 위하여 몸의 욕망을 굴복시키고 죽이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영혼과 육체, 이 둘 중에 어느 편을 들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지혜롭고 단호하게 당신이 이성을 따라서 행하며 이성이 가리키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임을 보이도록 하라. 이성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단지 타락하고 흐려진 본성과 상실된 감각을 따라 사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성은 고양되고 인도된다. 감각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행하라. [48] 그대를 만드시고 아시며 잘되기를 바라시고, 그대의 판단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이 이 문제에서 그대의 정서를 결정하시며 일하시도록 하라.
이제 우선적으로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 이 교리를 입증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신앙이 그 본질상 즐거운 것이지 아닌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신앙 안에는 타고난 즐거움이 있으며 그 즐거움은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즐거움이 스스로 말하게 하고 권고하게 할 것이다. 신앙의 특성과 균형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경건을 사랑하게 되는 일에 충분하다. 다음 12가지 경우에서 신앙의 즐거움을 보게 될 것이다.
첫째로, 신앙이라는 것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복음 17:3) 그런데 이것이 즐겁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의 신앙적 관심의 수단과 목적 모두에 관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찾고 받기 위하여, 아침 햇빛이 대기 중에 퍼지듯 신앙이 우리 영혼에 퍼지기 위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욥기38:14) 신앙에 감동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다. 그리고 신앙과 그 참된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은 영혼에 즐거움을 준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며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며‘.(전도서 11:7) 그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잠언 15:30) 이렇게 빛은 종종 기쁨과 위로를 나타내지만 어떤 빛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에( 고린도후서 4:6) 비교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을 발견하는 것인데,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49] 이것은, 그것 없이는 우리가 완성되지 않는 지식, 행복하고 , 영원히 복된 지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지식이 없이 천국이 어디에 이루어지겠는가? 그것은 타락으로 떨어져 버린, 정신착란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이며, 그것은 영혼이 갈망하고 그 안에 쉬는 지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둠에 앉아있는 자들은 신앙적으로 될 때, 큰 빛을 보기 시작하며(마태복음 4:16), 그 빛을 몹시 즐거워한다. 그것은 신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소경으로 태어났지만 그에게는 빛이 주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 즐거움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들에게 그들의 눈이 보므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은(잠언 22:17,18) ‘나의 지식에 너의 마음을 두라 이것을 네게 보전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니라’ 고 말하였다. ‘너는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잠언 24:13, 14)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다니라 지혜를 아는 지식이 네 영혼이 이와 같으니라’ 수학으로 증명을 하는 학식 있는 자들이 기쁨에 도취되어 ‘내가 찾았노라 내가 찾았노라고 소리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발견을 대단히 자랑하겠지만 지극히 높으신 자에 대한 지식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즐거움과 같은 것은 다른 배움에는 없는 즐거움이며 그런 즐거움은 우리의 영원한 평화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려진 그 즐거움은 적고 사소한 것이 아니며 의심의 여지가 없고 확실한 것이며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거나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 즐거움은 다른 지식에서 얻는 즐거움을 약화시키지만 그 즐거움은 크고 확실하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즐거움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만족시키며 거기서 우리의 영혼은 쉼을 얻는다. 하나님의 본성의 완전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끝없는 부요함을 아는 것,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목과 구원의 신비를 아는 것, 이것이 (영혼의) 양식이다. [50] 이런 지식은 영혼의 잔치이며, 진정한 양식과 음료이다. 그것은 천사도 알기 원하는 지식이다.(베드로전서 1:12) 하나님의 법을 아는 지식은 다윗에게 지극히 달콤하여 ‘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으니(시편 19:10; 119:103)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지식은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와 지식을 주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에게 기쁨도 함께 주신다.(전도서 3:26)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다른 세계를 모르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이 어떤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비록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을 가진 자가 있고 그런 지식이 지속적인 즐거움을 준다고 그들이 들었을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면 자기 자신의 (거짓된) 빛 가운데 살게 된다.
둘째로,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우리 영혼의 안식처이신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수용하기 위한 우리의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즐거움을 붙드는 우리의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주된 선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서 쉬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그런 모든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친근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사람을 받으시고 갚아주시니,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잠언 8:17) 세상에 대한 사랑을 반성하고 그것이 잘못된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영혼 안에서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참된 신앙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영혼에 괴롬을 주는 만큼, 영혼에 만족을 준다.
우리 기대에 응답하기에 전적으로 불충분한 세상을 버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기대에 응답하기에 충분하신 분을 의지하며, (영원한) 상속과 행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회복하고, 세상을 포기할 정도라면 (신앙의) 즐거움이 얼마나 클 것인가? [51] 언제 우리가 만족이 있는 곳에서 만족을 구하고 발견하기 위하여, 만족이 없는 곳에서 헛되이 만족을 찾았는가? (우리가) 거짓된 허무에서 그리고 양식이 아닌 것에 돈을 허비하는 것(이사야 55:2)에서 벗어나서 충만하신 하나님을 따라서 풍성하게 살며 그 안에서 안락을 즐겼는가? 다윗이 말한바 ‘ 내 영혼아 너의 평안함으로 돌아가라’(시편116:7)는 말보다 마음을 편하고 더 즐겁게 하는 것이 있는가? 너의 평안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라,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며 내가 가져야 할 것이다.(시편 16:2,5,6) 내 영혼이 주께 말하길,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그리고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시편 73: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유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우리는 신앙을 황홀경이나 도취하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거처로 삼으며 지극히 높으신 자를 자신의 거처로 삼는(시편 91:9)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고 편히 거한다. 아무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신자가 가진 즐거움을 상상하지 못한다. ‘주의 증거들로 나의 영원한 기업을 삼았사오니’ (시편 119:111)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되나이다. 아사 왕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게 할 때에 ‘그들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파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였다.(역대하 15:14,15) 그리고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52]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과 행위로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며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한 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기쁨으로 맺어진 혼인 언약으로서 (아가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나의 것이 되고 나는 그의 것이‘ 된 것이다.
셋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즐거움을 누릴 뿐 아니라, 믿음으로 겸손한 자유와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즐거움을 누린다.(시편65:4)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가는 것을 묘사되는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에서 무엇이 더 합당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어린애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의 품에 가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듯이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자기 왕에게 탄원하는 것은 특권이듯이,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은 즐거움인데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성도는 이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가 아이를 대하듯이 그들을 사랑하시며 다정하게 대하시고 (시편 103:13) 그들에게 즐거이 선을 행하시고 그들의 번성을 기뻐하신다. 비록 그들이 죄를 지어도 이미 그들과 화목하시고 그들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격려하신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징계하실 때, 성도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그 나라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임을 안다.(누가복음 12:32)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하여 자신을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예레미야 31:18, 20) 탕자라 할지라도 뉘우치면 하나님께 기쁜 자녀가 되므로 성도들이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53]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앙은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가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불변의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큰 위로를 받는데, 이는 우리가 갈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실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고 옹호하시는 변호자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종종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시키는 중보자의 무한한 지혜의 방법으로 영혼이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고 그 안에서 승리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우리가 할례파이다.’(빌립보3:3)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였다.(갈라디아 6:14)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믿음을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자기의 길을 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숙련되고 신실한 손에 우리의 영혼의 큰 관심사와 영원(이것은 분명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을 맡기는 기쁨과 만족이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이것을 한다. 전심을 다하여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며, 그래서 우리를 편안케 하시는 분에게 우리의 짐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가! 이것을 생각하고 바울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로마서 8:34) 라고 (신자의) 복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어떤 즐거움을 가지고 바울은 자신이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돌아보았는가? (디모데후서 1:12) ’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그가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죄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라면,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하나님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다. [54]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 곧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그리스도로부터 유익을 받으며,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돌리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보다 더 기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갈라디아서 2:20) 우리는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충만히 누리게 된다.(로마서 15:13)
네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모든 우리의 의식주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그것은 삶의 일상적인 도움과 편의를 받되, 가장 풍요롭고 가장 의미 있게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섭리의 결과이며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선물이므로 그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때문이다.(시편 34:8) 이것은 두 번째 원인을 넘어 첫 번째를 보는 것이며,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를 보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합당하고 쓸 만한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구하고 나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는다. 건강과 안심, 쉼과 잠, 양식과 의복, 우리의 경건에서 누리는 모든 만족, 우리의 거처에서 누리는 평화, 우리의 소명에서 누리는 성공, 우리가 매일 이런 모든 복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경험이며 즐거움인가! 우리가 신앙으로 가르침을 받고 이런 모든 것이 우리의 위대한 후원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런 복의 달콤함은 배가되고 크게 일어나게 되며 그 복들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디모데전서 6:17) 반면에 피조물 외에는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단지 열등한 피조물로서 살 뿐이다.
육신적인 불신자들은, 선한 사람들이 감히 가지려 하지 않는, 감각적 즐거움을 사용하는 자유를 자신들은 더 많이 누린다고 하며, 그 안에서 자기들이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즐거움의 절반도 못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이는 지나친 것이 자연스런 것을 억압하며, [55] 과도한 것이 배고픔이나 목마름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피조물을 그렇게 남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받는 위로를 상실하였으며, 그들은 순종하는 자녀처럼 아버지에게 감동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옥수수와, 포도주와 감람유를 주는 줄 알지 못한다.’(호세아 2:8) 그들은 피조물을 사용하지만 이사야 22:11처럼, ‘그들은 그것을 만드신 이를 앙망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일반적인 자비 가운데 언약적 사랑을 맛보는 것이 즐겁지 않은가? 우리의 식탁을 베푸시고, 우리 잔을 채우시며, 우리 집을 지키시고 우리의 잠을 편케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손길을 누리는 것이 지극히 즐겁지 않은가? 그들은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고, 기도로 그들의 즐거움에 부으시는 복을 불러오며, 찬양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하심에 영광을 돌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지속적으로 경외할 때, 풍성한 달콤함이 그로 인해 우리 삶에 모든 위로가 부어진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는 이생의 삶의 비참과 고난에서 쑥과 담즙(애가 3:19)이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생의 삶에서 즐거움과 위로의 꿀과 기름이 된다. 그것은 생명보다 나으며(시편 63:3,5) 지극히 만족스러우니, 추수의 즐거움보다 더한 기쁨을 가져다준다.(시편 4:6,7) ‘그때 열방은 즐거워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시편 67:5,6)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가?(스가랴 9:17)‘ 라고 외칠 때, 젊은 자들은 곡식으로 인하여 즐거울 것이다. [56] 이것은 물줄기에서 물 근원으로 인도되기 전에는, 우리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함을 암시한다.’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니(디도서 1:14) 그들이 깨끗할수록 그들은 더욱 즐거울 것이다.
다섯 번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던지며, 우리의 모든 길과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우리가 매어있는 무거운 짐에서 쉼을 얻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즐거움이다. 염려도 그런 짐인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이제 참된 신앙은 모든 길에 하나님을 인정하며(잠언 3:6)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이해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게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세상에서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판단과 섭리를 전적으로 인정함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맡기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선한대로 행하소서.’(사무엘하 15:26)
진정한 경건은 모든 일에 우리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며 기도자로서만 아니라 언약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시며,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진정한 경건은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관하여서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처분과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방법에 전적으로 조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며, 하나님의 비밀이 완성될 때, 마침내 형통하게 나타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이것이 얼마나 쉬운가? 이것은 괴로운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뿐 아니라 기쁜 소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두려움은 사라지며, 희망은 유지되고 솟아오른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57]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앙의 원리를 배운 사람에게 잘못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속수무책인 일로 계속하여 조바심치고, 바꿀 수 없는 섭리의 처분과 다투며 그리하여 죄를 짓고 슬픔에 빠짐으로 모든 짐을 배로 무겁게 하는 자들은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사는가! 그러나 한결같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르며,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신들의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즐겁게 광야 같은 세상을 여행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힘주심으로 궁핍하든 풍부하든 모든 상황에서 만족함을 배운 바울과 같은 삶이다..(빌립보 4:11, 12, 13)
신앙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마음에 편안함을 준다. 왜냐하면 환경이 비록 모든 면에서 우리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그 환경은 모든 일이 발생할 때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행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욥 23:14) 시인이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였을 때(시편 37:4,5) 그것은 신앙이 우리에게 항상 즐거움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의뢰하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바울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아뢰라.’고 우리를 격려하였을 때, 그가 확신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심령과 마음을 지키신다는 것이다.(빌립보 4:6, 7)
여섯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빌립보 3:1; 4:4) 이것이 기쁘지 아니한가? 그것은 우리가 즐거워하는 신앙의 특권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신앙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58]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즉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에 결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으로 신앙은 우리에게 항상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크시고,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하시며 세상을 다스리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법을 주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요 통치자이시므로 우리의 목숨과 인생과 마음과 우리 모든 길이 그의 손에 달려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자들은 스스로 두려움에 항상 처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생각으로 즐거워하는 자들은 확실히 그리고 마땅히 행복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즐거워 할 무언가를, 매우 당당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마르거나 멈추지 않는 기쁨의 원천이며 그들이 항상 찾을 수 있는 원천이다. ‘여러 날을 살면서 그 가운데 즐거워하는 자가 얼마나 적은가( 전도서 11:8) 이런 일은 사실이겠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들 외에는 그것을 참되게 아는 자가 결코 없다. 시편의 시인이 표현 듯이 그것은 넘치는 기쁨이며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는 권면처럼 그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완성되게 하려는 것이다.
열방이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신앙으로 돌이키는 회개는 종종 구약에서 그들이 거룩한 기쁨의 상태로 돌아온다는 관념으로 예언되었다.(시편 96:11, 97:1, 100: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땅을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들은 기뻐할지어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로마서 15:10)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누가복음 2:10)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사도행전 8:8) 그러므로 기쁨은 신앙에 필수적이다. [59] 그리고 하나님께 연합된 자들이 나누는 대화도 마땅히 즐겁고 기쁜 것이다. 그들은 ‘주의 빛 가운데 걷도록’ (시편 138:5), ‘주의 길을 즐거워하도록(이사야 2:5), 그리고 모든 것이 풍족한 가운데서나(신명기 28:47)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나(하박국 3:17) 마음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너를 받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의 일을 받으셨으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움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전도서 9:7)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즐거운 백성이 되는 것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신명기 26:11)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나날을 보내면서 즐거워하지 못하거나 지속적인 잔치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잘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자비는 한결같을 뿐만 아니라 매일 새롭고 새롭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찬양할 가치가 없는 것을 매일 찬양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실로 불쾌한 일이며 이치를 거스른 일이다. 그러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특별히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무엇이 있는가? 그 하나님께 우리와 만물이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하나님은 모든 찬양과 예배보다 더 높이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만물이 마땅히 찬양할 분이시다. 이스라엘 중에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도 선하고 지혜롭다고 찬양하지 않는 자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즐겁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있는 복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성도가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니,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60] ‘그의 천사들과 만군의 천사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러므로 나의 푼돈을 그런 보화에 던지는 것이 얼마나 즐겁겠는가!’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의 찬양을 받지 않거나 우리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에 주목하지 않는 분을 찬양하는 것은 결코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무를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지속적으로 드릴 때, 그것은 우리 입술의 열매이며 그의 이름에 드리는 감사(히브리서 13:15)이며, 우리의 찬양을 주목하시고, 받으시며, 기뻐하시고, 그 향기를 받으시며 (창세기 8:21) 찬양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반드시 자비로 맞아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스럽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지어주시며, 천한 것이라도 인정해 주신다.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외에 신앙에서 우리가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한다.(예레미야 13:11)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명예를 드러내도록 그의 기이한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베드로전서 2:9) 이보다 더 부족함이 없이 헌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시편 84:4) 그것은 선한 일이며, 그것 자체가 선이고, 우리에게 선하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의 명예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시편 135:3 ; 92:1)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 보다 우리에게 더 큰 영예가 없으며, 더 큰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땅위의 하늘일 뿐 아니라 하늘위의 하늘의 맹세와 약속이기도 하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찬송한다면’(시편 145:2)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장차 하늘에 갈 모든 자들이 지금 그들의 하늘을(하늘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61]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이 누리는 끔직한 쾌락과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하늘의 즐거움을 비교해보고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말해보라.
여덟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우리의 지나친 욕망을 교정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감각적인 즐거움이며, 마음의 질병이나 무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신적 즐거움이다. 불쾌하고 불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분명히 스스로 욕망의 종이며 감각적 만족에 빠진 자들이다. 그것이 결코 죄악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욕망의 고삐를 풀어주며, 그들의 마음의 쾌락을 억제하지 않는다. 술 취함과 부정함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 스스로 참된 즐거움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지속적인 고통과 불안을 준다.
육체적 욕망은 종종 너무 지나쳐서 육체에 짐이 되며 병이된다. 잔치처럼 충만한 것이 좋다고 하나, 충만한 것 이상의 어떤 즐거움을 얻을지 궁금하다. 욕망이란 빠지면 빠질수록, 변덕스럽고 골칫거리가 된다. 욕망은 충족되지만 만족하지는 않는다. 욕망은 점점 충동적이고 고압적이 될 뿐이다. 솔로몬이 종에 대하여 말하길(잠언 29: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 한다.’ 고 경고한 것은 육체에 대해 사실이니, 종이 마침내는 주인노릇을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도록 방임하면, 육체의 성향을 만족시키느라 영혼의 유익이 손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육체의 성향은 마치 강탈자나 폭군과 같이 될 것이며 강압으로 지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할 때, 그들이 택한 왕의 제도를 보여주시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듯이(사무엘상 8:18) [62] ‘그 날에 너희가 스스로 택한 왕으로 인하여 부르짖으나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욕망에 탐닉하게 되면, 혼란,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니 누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겠는가? 그들이 자신위에 세운 왕으로 인해 충분히 댓가를 치루고 있으니 누가 이들을 위해 울며 슬퍼하겠는가? (잠안 23:29) ‘술에 잠긴 자에게는 비록 그들이 즐거움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 사실은, 이런 즐거움 속에 사는 자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이며.(디모데전서 5:6) 그들은 큰 자유를 누린다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사실은 비참한 종노릇을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스스로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이니‘(디모데후서 2:26)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베드로후서 2:19) 만일 육체적 욕망이 이성과 양심의 모든 남은 것을 없앨 정도로 완전히 장악하지 않는다면, 고상한 능력(이성과 양심)은 율법이 주는 것(정죄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음으로 (육체적 욕망을) 방해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금지된 감각적 즐거움을 충만하게 누리는 자가 없으며 종종 즐거움을 망치는 이성의 제지와 양심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는 담벼락의 글씨가 벨사살 왕에게 보여주었듯이, (이성의 제지와 양심의 두려움은) 그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육체적 욕망과 정욕의 엄청난 세력을 꺾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으므로 죽여야 하고, 하나님의 법의 지시에 따라 영혼이 명령하는 능력에 조용히 굴복시켜야 한다. 이렇게 영혼 안의 선한 질서와 통치를 유지함으로 평화가 보존되는 것이다.
절제하고 온유하며 순결한 자들은 반드시 가장 안전하고, 건실하며 즐거움 삶을 산다. [63] 그들은 눈에 즐거울지라도, 금지된 나무는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규모 있는 삶이며 우리를 육체 아래 가두는 욕망의 종노릇이 아니라 주인 노릇하는 삶이며.(고린도전서 9:27) 욕망을 신앙과 바른 이성에 굴복시키는 삶이다. 뿌리에 도끼를 놓음으로 악한 습관, 기질 그리고 욕망을 깨뜨리며,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악한 행위를 쉽고 즐겁게 금하는 것이다. (로마서 8:13) ‘ 성령으로 육체의 행실을 죽이며 살리니, 즐겁게 살 것이다.
아홉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제멋대로인 욕망을 통제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고통의 대부분이 우리의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평, 모든 어려운 일들에 대한 조바심, 가상적 악에 대한 두려움, 남이 잘되는 것을 질투함, 자기에게 피해를 끼친 자에 대한 악의, 그리고 조그만 자극에 대한 분노로부터 나온다. 이것들이 영혼을 지배하며 우리 자신과 이웃들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망쳐버린다. 이것들은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며 자신을 남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쑥과 담즙 같은 이런 쓴 뿌리가 제거되며,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심을 배울 때, (마태복음 11:29) 우리 영혼은 쉼을 얻으며, 즐거운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은혜 중에 온유함의 은혜보다 현세에서 평안과 만족을 주는 것은 거의 없다.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며(시편 22:26)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마태복음 5:5), 풍성한 평안으로 즐거워할 것이며.(시편 37:11) 하나님 안에서 크게 즐거워 할 것이다.(이사야 29:19) 무절제한 욕망보다 즐거움을 더 약화시키는 것이 없다. [64] 왜냐하면 그것은 위로자이신, 은혜의 성령을 슬프시게 만들며 은혜의 성령을 떠나게 만들기 때문이다.(에베소서 4:30, 31)
사람이 자기 영혼을 다스리는 자로서자기 생각의 주인이 되며, 그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며, 화평을 유지한다면 사람에게 이보다 즐거운 것이 더 있는가! 온유함은 분노하는 자의 마음을 끊을 것이며, 온유한 자의 안식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열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로마서 13:10)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두 번째로 큰 계명이다. 우리의 모든 의무는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데 그 말이 짧은 말인 것처럼 사랑, 그 말은 달콤한 말이다. 보라 ‘ 거룩한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기쁜 일인가,(시편 133:1)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사람들의 눈에 다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위로가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16)
신앙은 우리에게 이웃에게 관대하며, 모든 일에 그들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자극하지도 말고 자극에 분노하지도 말며, 이웃의 약함을 참으며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고 친절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신앙은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자기 성질을 죽이며 영혼의 즐거움과 자제심을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무엇이 우리가 즐겁게 사는데 이보다 더 도움이 되겠는가?
사랑으로 우리는 친구를 즐거워하며 그들의 모든 위로 가운데 그들과 교제를 나누고, 우리 자신의 위로도 더하게 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데살로니가전서 3:9) 사랑함으로 우리가 남의 사랑도 받게 되니,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으랴? 사랑은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에 필수요소이며 마음이 숨 쉬는 달콤한 공기이며, 최선의 사회를 이루는 접착제이니, [65] 인간 삶에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양은 거룩한 사랑의 띠로 연합된 무리이며 잔잔한 물가에 푸른 초장에 함께 누우니, 거기에는 풍요와 함께 기쁨이 있다. 형제들에게 ‘위로를 받으며’(고린도후서 13:11) 신자로서 길을 즐겁게 가라고 권면하는 사도는 마음을 함께 하며 평안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을 행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기를 즐겨하는 영원한 마음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즐거움에는 신성뿐만 아니라 인간성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남을 안전하고 편하게 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욥이 누렸던 즐거움인데, 그는 ‘과부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고’, 소경의 눈과 저는 자의 다리와, 그리고 가난한 자의 아비가 되어주었으니 욥은 그들을 자기 양털로 따뜻하게 하여주었다.(욥기 29:13,15, 16; 31:20) 선을 행하는 선인이 누리는 즐거움을 우리의 구주께서도 ‘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확증하여 주신다.(사도행전 20:35)
열한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사귐을 누리는 참된 신자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며’(요한일서 1:3) 거룩한 대화와 교통을 계속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한다. 여기에 경건한 삶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며,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은혜의 전달을 받으며 경건하고 독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만족한 삶이 어디에 있는가?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 유익과 능력을 아는 것만큼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교제가 어디에 있겠는가? [66]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염려하시며 사람이 자기 일에 대해 친구에게 말하듯이 기탄없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며 위로하시니 하나님의 은혜를 귀중히 여기며 자기 영혼의 유익을 돌보는 사람에게 무엇이 더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들의 재판관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시편 141:6) 자신이 죄로 인하여 내던져진 것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달콤하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기 남편이 말할 때, 얼마나 즐겁겠는가, ’이것은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니 그가 나에게 말하는 도다!‘(아가 2:8, 10)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드릴 때, 우리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미스바에서 입다가 그랬듯이 ‘자기의 말을 다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여시고 허리를 굽혀 들으시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기도를 기뻐하시니‘(잠언 15:8) 기도하는 자가 지극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친구 같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곤고한 영혼에게 위로가 될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갖는 그런 담대함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그럴 수 없는) 자기 처지를 아는 영혼에게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명령과 섭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참된 교제를 누리듯이, 우리는 신앙의 연습으로 일상적 대화의 의무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를 누림으로, 기쁨이 영혼에 지속적으로 넘치게 된다. 우리가 의지하며, 우리의 모든 길을 의뢰하고, 그 손에서 우리에게 오는 모든 위로와 모든 고난도 함께 보려고 ‘우리 눈이 항상 앙망하는’ (시편25:15) 하나님을 소유하며, [67]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으로 준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사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판단하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 두려움, 기쁨, 생명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것이 하나님과 사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열두 번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나타날 영광을 한결같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표지로서 우리 앞에 영생을 놓는 것이며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고 ‘위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골로새서 3:1) 이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하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우리의 행복을 그 즐거움 가운데 두며, 그쪽으로 우리의 목표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니, 어떤 주제든 어떤 목표든지 이보다 더 즐거울 것인가! 우리는 가끔 영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 죄를 두려워해야하지만 신앙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 곧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요한일서 5:11)을 소망하며, 우리 의무를 다하도록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에 우리의 시민권을 가지며’(빌립보 3:20), 새 예루살렘과 거래하며, 더 좋은 나라 즉 하늘나라와 항상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 나라는 우리가 속한 나라요 우리가 기대하는 나라이며,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유와 최고의 애정을 보내는 나라이며, 우리의 머리와 집이 거기 있으며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나라이니, 바로 이것 외에 무엇이 기독교이겠는가? 우리 마음이 하늘의 체제에 있을 때, 우리는 마땅해 되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며, 우리가 하늘의 일에 헌신할 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사람이니 우리는 낮은 이 세상에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신앙이란 땅에서 하늘을 일을 하는 것 아닌가? [68] 만일 은혜와 거룩함이 성취된 영광과 행복 안에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영광과 행복이 시작된 은혜와 거룩함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풍성한 것은 당연하다. (미래에 이루어질) 비전과 결과에 그런 완전한 만족이 있을 것이라면, 성도의 즐거움에 세워진 믿음과 소망에도 상당한 만족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며’(베드로전서 1:8)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넘친다.‘고 말한다.(로마서 15:13)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성인 바, 그들은 하늘에서 난 자들이며 하늘로 가는 자들이고 하늘에 보물을 쌓은 자들이다. 모든 신자들에게 미치는 복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풍요하며,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확실한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이 그들이 받는 복의 특성이라면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것을 모두 비교해보고, 신앙의 즐거움이 의무일 때조차도 신앙이 실로 즐거운지 아닌지, 그리고 우리의 수고를 우리가 받을 삯으로 만드시며, 하나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두 개의 천국을(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천국) 은혜롭게 내려주시는 우리의 선하신 주인을 섬길지 말지, 이제 말해보라.
신앙생활의 즐거움(3)-매튜 헨리
인물별/메튜 헨리
2014-06-28 13:47:53
3. 신앙의 즐거움은 신자들이
누리는 위로와 특권에서 입증됨
[69] 탐구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신앙의 실천과 핵심 원리 안에 상당한 즐거움이 있음을 이미 발견했는데,(오 우리 모두는 경험으로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즐거움의 절반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앙에 수반되거나 신앙에 따라오는 위로는, 신앙 안에 내재해 있거나 신앙과 함께 오는 위로를 능가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의 열매가 화평이라면, 공의의 결과는 더욱 그러하니,.(이사야 32:17) 만일 경건의 규칙이 그 안에 달콤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경건의 위로는 어떻겠는가? 보라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복이 있도다!
거룩한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참된 평안과 기쁨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즐거움을 보살필 뿐 아니라 즐거울 이유를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첫째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즐거움을 보살피시며 [70]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을 위하여 얼마나 더 그렇게 하시겠는가?
1. 평화와 기쁨은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므로 그들은 정당하게 그리고 선한 명분을 가지고 그것을 취한다.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기쁨을 누리는 백성이 되도록 돌보시며 그들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신뢰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에서 종들이 누리는 즐거움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예가 되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뿐’ 아니라(로마서 5:1-3) 우리 자신의 양심에도 평화를 누리니, 위로부터의 평화만 아니라 우리 안의 평화도 누리는 것이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불안한 양심이 평화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내적인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란 가운데서도 개가를 올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의 복락뿐 아니라 현재의 즐거움을, 그리고 우리 가정의 행복만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의 행복도 보장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피와 보화의 큰 비용을(이렇게 말한다면) 지불하셨는가 생각해보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얻었고- 고통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즐거움을 얻었으며- 슬픔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기쁨을 얻었다. 우리에게 장미 면류관을 씌우시려고 그리스도는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그 영원한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에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찬양의 옷을 입게 하시려고 고통의 영을 입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민하신 정원이 우리에게 에덴의 정원이 되게 하셨으니, 거기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위하여 스스로 잡히시며 잡으러 온자들에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내가 고난 받기를 감수하니, 그들은 편히 가게 하라고 하셨다. [71]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가져오신 영원한 의로움-이것이 지혜의 길을 즐겁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조약의 기초이며 결과적으로 신자들이 누리는 모든 위로의 원천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누리는 영광의 모든 근원이므로 이스라엘이 각자 ‘주 안에서 내가 의로움과 능력을 누리나이다.’(이사야 4:24, 25)라고 말한 것이며 이스라엘이 ‘여호와 우리의 공의’(예레미야 23:6)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배웠을 때, 그들은 거룩한 곳에서 안전하게 거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피 묻은 손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즐거울 수 없고 단지 항상 두려워 떨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니,(에베소서 2:14, 17),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실 뿐 아니라, 먼데 있는 자에게나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 평화를 가르치시고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격려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요한복음 16:33) 보증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배반을 당하시던 밤에, 자신의 고난을 기념하시려고, 세우신 규례에서, 그리스도는 기쁨의 노래와 함께 위로의 설교를 하셨으니, 이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은혜의 소망’ (데살로니가후서 2:16)을 주시는 것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때, 평화와 위로가 우리에게 이르렀고 그 값이 지불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평화와 위로의 유익을 누리려고 스스로 고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책망을 받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보호하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라. [72]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잠시 슬픔에 빠졌지만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듯이’ (요한복은 16:20) 비록 그 자비가 지연될 지라도 그것은 패하지 않을 것이다.
2. 신자들에게는 평화와 즐거움이 약속되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유익이 모든 일에 구비된(사무엘하 23:5) 은혜언약 안에서 그 언약을 자신들의 모든 구원과 모든 소망으로 삼은 신자들의 위로와 만족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전달되고 상속된 것이다. 의로운 자들에게 빛이 심기어졌으니 때가 되면 다시 싹이 날 것이다. 언약의 약속은 구원의 우물과 같으니 거기서 신자들은 기쁨으로 물을 길으며- 위로의 젖가슴 같으니 거기서 믿음으로 젖을 빨고 만족할 것이다.(이사야 12:3 ; 66:11)
복음의 때를 가리키는 구약의 약속들은 대부분 이것을 그 때를 위해 준비된 축복이며, 그 날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이사야 35:1; 60:1) ‘광야의 메마른 땅이 즐거워하며, 백합화 같이 피며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 복음의 계획은 유대인들이 감당했던 무거운 예배와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서로 두렵게 만들었던 미신적 두려움으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킴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을 신장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으로 나아오기 쉽게 만듦으로써 이전 보다 더욱 신앙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시민이 가장 비천한 자라도 헌법에 보장된 유익을 누리듯이, 모든 개개 신자는 (하나님께서)교회에 주신 약속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 약속에 만족하며 그 약속 안에 있는 위로를 구할 것이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고 너를 잊지 않으리라.’ 혹은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믿는 자가 누리는 즐거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73] 이것은 평화의 길로 가는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며, 그것은 우리의 소망이 서있는 견고한 기초이며 거기서 우리 기쁨이 흘러나오는 충만한 원천이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며(베드로후서 1:4) 이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풍족한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 다른 모든 약속들을 통하여 이 약속이 성취된다.(이사야 65:14, 15)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나 너희는 주릴 것이요;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나 너희는 목마를 것이며; 나의 종들은 즐거워할 것이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며; 나의 종은 마음이 기쁘므로 노래할 것이나 너희는 마음이 슬퍼 부르짖을 것이다.’ : 그리고 교회의 신실한 이웃들에게 주어진 격려는 성취된다. ‘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
3.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약속된 것을 적용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 그릇에 포도주가 있어도 그것을 꺼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코디얼 음료를 만들었어도 그것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한 언약 속에 그들을 위하여 간직한 위로를 사용하도록 돕고 보살피게 된다.
이미 잘 알듯이, 신앙의 삶이란 매우 즐거운 삶이어야 하는데, 이는 무한한 지혜가 그렇게 만드는 모든 방도를 고안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이 풍성하며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의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나’ (이사야 5:4) 좋은 올리브가 풍성하게 넘칠 뿐 아니라, 등잔이 계속 타도록 기름을 전달하는 금관도 있다.(스가랴 4:12에서 선지자가 본 환상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피조물에게 낙원을 제공하실 때, 그 즐거움을 누리는데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74] 그 낙원에는 보기에 즐겁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들이 심긴 것 같이, 복음에는 두 번째 아담의 신실한 후손들을 위하여 준비된 낙원이 있으니 그것은 아브라함의 모든 영적 후손들을 위하여 예비한 젖과 꿀이 흐르는 즐겁고 안식할 가나안 땅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낙원에 두시고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듯이, 그는 신자들에게 모든 소유를 주시며 그들을 위하여 쌓아두신 모든 위로와 즐거움을 주신다. 에덴동산에서 순결함과 즐거움이 함께 하였듯이,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을 맞추니(시편 85:10) 우리가 이 복된 인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히브리서 4:3, 9)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탓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데 우리가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이 그 위로를 거절한 것이다.
신앙의 삶을 사는 자들은 넉넉히 즐거운 삶을 살 것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면 그것은 불쌍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 네 가지가 있다.
(1) 복되신 성령께서 위로자로 오셨는데, 그는 눈을 밝히시고, 확신을 주시며 거룩하게 하시는데, 그의 이름은 하시는 일로부터 나왔으니(요한복음 14:16) 바로 위로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해 오셨듯이, 하나님의 성령도 위로자로 오셔서 주 예수께서 예비하신 위로를 적용시키신다. 그리스도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 오셨다면, 성령은 평화를 선포하여 우리가 즐거움과 기쁜 소식을 듣게 하시며 꺾으신 뼈들로 즐거워하게 하신다.(시편 51: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성령의 사역은 그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 (데살로니가전서 1:6)이라고 할 수 있다. [75] 왜냐하면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는 그런 위로를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수면위에 운행하심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을 따라서 세상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의 성령이 사람들의 영혼에서 역사하심으로 비록 그들이 완전한 혼돈속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결과인 입술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창조하신다.’(이사야 57:19) 만일 성령이 창조하지 않았다면 그 열매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여야 한다.
위로자이신 성령은 교회가 고난을 받는 시대에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오셨을 뿐 아니라, 신자들이 겪는 세속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슬픔에 관하여 신자들을 위로하며 마지막까지 교회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로써 교회가 얻는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것 못지않게 우리에게 필요하며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한 감사를 (성령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항상 감사해야 한다. ‘그 자비가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속죄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보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속죄를 적용시키시려고 성령을 보내셨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기질을 이루시려고 성령을 보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자됨을 확증하고 구속의 날까지 인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은 우리의 선생이 되시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또 그는 위로자이시므로 우리 잘못을 바로잡으시며, 만사를 진리의 빛 가운데 놓으시고,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없애시고, 만사를 즐거움의 빛 가운데 놓으신다. 성령은 위로자이시듯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떡으로 이뤄진 이적을 잊어버린’ (마태복음 16:9) 제자들처럼, 우리는 위급할 때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76] 성령은 위로자이시듯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죄를 죽이시고 은혜를 강하게 하신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 보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없다. 성령이 위로자이시듯이 인도자이시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즐거운 길로,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 ‘우리 즐거움이 충만할 것’이라는 성경의 기록은 유일하게 채워지는 즐거움을 우리가 누린다는 것이며, 그 안에는 다른 즐거움의 빈자리도 채우는 즐거움이 있으며 그런 즐거움들의 결핍을 대신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더욱 즐거우며 전적으로 즐거움에 사로잡혀 마침내 영광의 왕국 안에서 완전한 즐거움에 도달하게 된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생소하더라도 즐거움으로 받게 하려는 것뿐 아니라, 그대의 기쁨이 충만하고 한결같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위로가 모든 성도에게 전달되는 통로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취한 두루마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먹고 소화하여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는 에스겔의 두루마리(에스겔 3“3)와 같이 입에는 꿀같이 달며, 그 두루마리의 인을 떼면 우리 입에 새 노래가 있게 될 것이다.(계시록 5:9)
성경의 빛은 눈으로 해를 보는 것 보다 더욱 즐거우며, 더욱 달콤하다. 그 빛이 전달되는 방식은 더욱 그러한데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식으로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즐거움은 다윗이 확신한 자비인데 우리가 의지할 것이며 [77] 계속적으로 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가 원할 때 언제나 의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코디얼 음료를 찾을 필요가 없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로마서 10:8) 너의 집에, 너의 손에 있으므로 그 말씀이 너의 입이나 마음에서 떠난다면 전적으로 너의 잘못이다. 또한 말씀은 닫힌 샘도 아니고 봉해진 우물도 아니므로,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는 자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그리고 거기서 영적 즐거움이 영적 감각을 훈련한 사람에게 빗에서 흐르는 꿀처럼 흘러가는 것을 쉽게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지신들을 인도하고 지배하도록 맡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그것은 ‘고난 중에 다윗을 위로했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니, 그 위로가 없었다면 ’다윗은 고난 중에 멸망하였을‘ 것이다.(시편 119:92) 그러나 다윗은 계속적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쁨을 누렸다. (시편 119:54)’주의 율례가 나의 나그네 집에서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 예레미야는 말하길,’내가 주의 말씀을 찾고 그것을 먹었으니, 주린 자가 양식을 먹음같이 혹 맛난 음식을 먹음같이 포식하였으니 주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주의 말씀이 나를 기쁘게 하며 나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다’고 하였다. (예레미야 15:16)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게 된다. ‘이전에 기록된 모든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우리가 인내와 성경의 안위로 말미암아 소망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로마서 15:4)
(3) 거룩한 규례는 우리의 위로가 발전되도록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도록 제정된 것이다. 친구가 서로 대화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인 것처럼, 법은 우리와 하나님과 교통을 위하여 제정되었으니. [78] 규례는 다른 세상에 연합된 영혼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교회에 많은 축제절기를 정해주셨으니 (금식도 있지만 단지 하루뿐이었다) 이는 그들이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려함이었다.(신명기 16:11)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제정된 하나님의 규례이다. 기도는 한나가 기도하였을 때, 자기 길을 가고 먹었으며 얼굴에 더 이상 슬픔이 없었던 것처럼(사무엘상 1:18)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우리 마음이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뿐 아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24)는 말씀처럼 약속을 구하며 하늘과 더욱 가까워짐으로써 우리 마음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의도된 것이다. 우리가 가까이 나아갈 은혜의 보좌가 서 있으니, 정해진 은혜의 중보자의 이름으로 우리가 보좌로 나아가며, 은혜의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고 모든 믿음의 기도에 약속된 평화의 응답을 주신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은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일 뿐 아니라 ‘때를 따라서 돕는’(히브리서 4:16) 위로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즐겁게 하시려고’(이사야 56:7) 지혜의 자녀가 거하는,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의도적으로 이끄신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즐거움을 위하여 고안된 복음의 규례인데, 그것은 즐거움을 표현할 뿐 아니라 거룩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고 배가시키도록 고안된 것이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가운데, 우리는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거운 소리를 발하는 것이다.(시편 45:2) 사도가 모든 신자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즐거움을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79] 술로 마음이 즐거워져서 부르는 술 취한 노래 대신에 천사의 노래로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즐거운 마음이 내킬 때) 너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라.’ (에베소서 5:19) 이 규례의 핵심은 다름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 감정을 움직이는 자연스런 수단인, 목소리와 곡조의 형식이 서로 어울리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지에 맞추어서 그런 특별한 규례를 만드시길 기뻐하신 것이니, 이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노래할 것이요’(야고보서 5:13)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준다. 헛된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을 억누르고, 즐거움을 바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즐거움을 제거하거나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늘의 즐거움으로 바꾸어 노래하라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고난 받는 자도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며 차꼬에 매인 바울과 실라처럼 그 즐거움을 노래하게 한다.(시도행전 16:25)
주의 날은 즐거운 날로 제정된 것이니, 그 날은 거룩한 안식의 날이요 거룩한 즐거움의 날이다. ‘이 날은 주께서 만드신 날이니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한 시편의 말처럼(시편 118:24) 그 날은 감사의 날이다. 안식일에 부르는 시와 노래는 ‘주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선한 일이로다.’(시편 92:1)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까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은 거룩한 승리와 지극한 기쁨을 위하여 정해진 것이므로 그 날에는 예배하는 행위로 무릎을 꿇는 것이 정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성찬은 영적인 축제이다. (솔로몬이 전도서 10:19에서 말하듯이) 축제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며 거룩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으로 얻으신 승리를 기뻐하며, [80]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의 것이 된 특권과 위로를 누린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즐겁고 기쁠 수밖에 없으며 ‘포도주보다 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게’ 된다. (아가서 1:4)
(4) 목사는 성도의 위로를 위하여 세워졌으며 성도들을 지혜로 인도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그들이 즐거운 길로 가도록 지시하며 성도들을 격려하여 그들의 길을 즐겁게 가도록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졌으므로(히브리서 3:1,2) 사람들 가운데 택하여 애곡하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그리고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이사야 40:1)는 말씀처럼 선지자들은 성도를 위로하는 일을 그들의 특별한 사명으로 가지고 있었다.
복음 사역자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주의 백성들의 즐거움을 돕도록 세워졌으니,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 되어 약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고 두려워하는 자에게 담대하라고 말한다.(이사야 35:3,4) 만군의 여호와의 성막은 사랑스러우므로, 성막에서 섬기는 자들의 책임은 성도들이 즐겁게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은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즐거움을 돌보시는데, 만일 성도들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둘째로, 신앙의 길을 걷는 자들이 받는 특권과 유익이 많은데, 그 특권과 유익은 성도들이 기쁨의 길을 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그런 유익과 특권들이 성도들에게 마련되었는데, 그것으로 성도들은 아주 귀하게 인정을 받으며, 은혜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보장된 그것들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81] 1.지혜의 길을 걷는 자들은 죄의 빚에서 해방되니 이것이 기쁜 일이다. ‘그들을 의롭다하시며 지옥과 땅을 이기고 스스로 서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그들을 정죄하겠는가?(로마서 8:33) 는 말씀처럼 성도들은 정죄를 면하게 되었다. 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가까이 계신다.(이사야 50:8) 그러므로 성도들을 변호하는 변호자가 고소자보다 가까이 있으므로 고소자가 그들을 고소하려고 옆에 서있을지라도 고소자와 그의 모든 고소를 던져버릴 수 있다.
분명, 성도들은 죄책감 아래서도 즐겁고 기쁜 능력을 누린다. 만일 양심이 깨어나면,‘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만일 죄가 제거되면 짐은 사라지고 상처는 치유되며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된다. ’소자야 안심하라‘ (마태복음 9:2)의 말씀처럼 중풍병자는 나음을 얻었고 죄의 용서를 받았다. 그러므로 죄가 신자를 해치지 못하며 하나님이 당신과 화목하심으로 선을 행하실 것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지지만 거기에는 덫이 없으며 두려움이나 놀람이 없이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아이가 태어나는 기쁨을 억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드러내듯이,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참되게 뉘우치는 자가 경험하는 고통은 즐거움을 가져오며 죄의 용서를 확신함으로 가는 만족은 더욱 달콤하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없는데, 회개하는 죄인의 고통을 여기에 비교할 수 있지만 일단 그들이 회복되고 다시 잘 접합되고 나면, 그들은 편안할 뿐 아니라 즐겁게 되는데 [82]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당신이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편 51:18) 라는 말씀처럼 용서받은 죄인이 받는 위로를 여기에 비견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뼈가 보존되어 그중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주여 당신과 같은 분이 누구입니까?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도 부러지지 않은 많은 뼈들 보다 하나의 부러진 뼈로 인하여 더 현저한 즐거움이 있으니 이는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보다 잃어버린 양이 집으로 돌아오면 더 즐거운 것과 같다. 그것은 죄 용서함을 맛본 자들이 아는 즐거움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을 위로하며 말할 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였다.(이사야 40:2) 그러한 즐거움은 죄의 용서를 느끼는데 있으며, 이것은 ‘그 거주민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이사야33:22)는 말처럼 우리에게 현세에서의 고난을, 특별히 질병으로 인한 고난을 가벼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또한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내 몸을 고치시고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등 뒤로 던지셨나이다.’ (이사야 38:17) 는 말처럼 병에서 회복되어 안전함과 평안함을 얻었을 때, 현세에서도 큰 은혜를 누리게 된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그것을 알면, 우리는 평안 가운데 나가고 들어오며, 우리에게 잘못될 것이 없으므로 기쁨 가운데 눕고 일어날 것이니, ‘ 그 죄가 사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로마서 8:16) 라는 말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2. 그들은 ‘자신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영’ (로마서 8:16) 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즐거운 일이다. 양자됨은 칭의를 동반하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받는 죄용서’ (에베소서 1:5,7)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더욱 위로의 확신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녀가 되는 일이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용서에 주어지는 동일한 증거와 동일한 증언은 우리가 이렇게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와 증언이 된다. 왕과 권세자의 자녀들이 그 관계에서 따라오는 명예와 기대를 생각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그들이 받은 양자됨의 즐거움, 곧 양자의 영(갈라디아서 4:6) 을 생각하고 기뻐하지 않겠는가? 성령이 우리의 양자됨을 증거하시므로 즐거움은 배가되며, 자신들이 본질상 나그네요 외국인이며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이렇게 크게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할 때 기쁨은 더욱 강렬해진다.
관계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이 세상의 즐거움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맏형제가 되시고, 모든 성도와 천사들과 함께 우리기 복되게 부르심을 받은 동일한 가족에 속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는 관계의 즐거움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관계를 소유하고 요구하는 즐거움은 우리가 ‘아바, 아버지’(로마서 8:15)라고 부르는데서 숨김없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두 개의 단어로 중복하여 부르는 이유는 선한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만족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영으로 이 즐거움을 증거하여 말하길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니’(시편 16:2) 하였듯이, 세상이 내 것이 되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이것을 우리 영혼에 증거하여 ‘그는 너의 하나님이시라 그가 너를 자기 가족 중 하나로 받으시고’ 라고 말하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런 관계를 만드셨음을 증거하니 우리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 찬다! 특별히 선지자들이 어느 곳에서 동일한 마음과 의식으로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84] (그가 종의 영이라고 깨달았을 때도 역시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양자의 영으로 우리를 위로하실 때 성령으로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호세아 1:10)이라고 그들에게 말한 것을 특별히 생각할 때에 우리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찬다.
3. 성도들은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것이 즐거운 일이다. 기도는 평화와 즐거움을 불러올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큰 특권이다. 기도는 신자에게 영예일 뿐 아니라, 위로이며,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위로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성도와 함께 하시므로 물고기 배속의 요나나, 깊은 곳에 있던 다윗처럼(시편 130:1 ; 61:2) 뜻밖에 닥치거나 어디서나 자주 부딪히는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도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염려와 슬픔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평을 쏟아내고 하나님 앞에 우리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반가워하신다.(시편 142:1,2) 결핍하고 두려워하며, 소원이 있는 사람이 그런 부족을 기꺼이 채우실 수 있는 분에게 호소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의 요청을 하나님께 알림으로 우리는 큰 힘을 얻는다. 우리는 권세자에게 나아가듯이 어렵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이키실지 누가 아느냐?” 라고 말한 니느웨 사람들처럼 확신 없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에베소서 3:12)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우리가 구한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알고’(요한일서 5:15)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가 사랑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을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지극히 높이 계시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에 주목하시고, 부드럽게 우리를 보살피시니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를 가질 뿐 아니라, 믿음과 겸손함으로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말씀드리고 [85]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담대해 성소에 들어가며’(히브리서 10:19,20) 율법아래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듯이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 사정을 더 잘 아시지만 우리를 통하여 우리 사정을 알기를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우리 마음을 토해 놓는다. 든든한 후원자를 가진 거지가 다른 사람들처럼 즐겁게 살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혜의 문설주에서 매일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잠언 8:43)는 말처럼 그들은 거지이지만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자비를 넉넉히 베푸시는 풍부한 후원자를 가진 거지이다. 의인의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하나님의 즐거움이 기도자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아가 2:14)
4. 성도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거룩하게 사용하니 이것이 즐거운 일이다. ‘주께서는 의인의 길을 아시며 그의 모든 염려를 아신다.(시편 37:23) 그렇다 주께서는 의인의 걸음과 서는 것을 정하시니, 그가 나아갈 때 성공과 뒤로 물러갈 때 실패도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의 일을 축복하시고 축복을 풍성하게 더하시나 슬픔을 더하시지 않는다. (잠언 10:27) 여기에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는 하나님의 축복은 즐거움을 더하시며, 위로도 함께 보태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적든 많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서 온 것이니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고 달콤한 것을 보라(누가복음 10:41) 그것들은 아버지의 손, 중보자의 손을 통해서 온 것이며 일반적 섭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약의 약속의 금빛 통로를 통해서 온 것이다. 믿지 않는 남편이 스스로는 거룩하지 않지만 믿는 아내를 통하여 거룩하여 지듯이, 다른 관계들에서 오는 위로도 그렇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에게는 [86] 모든 것이 즐겁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은 가진 것에 만족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므로, 의인이 가진 적은 것이 악인의 풍성한 것보다 더 나으며(시편 37:16) 채소를 먹으나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잠언 15:16,17)
5. 성도들은 모든 조건 속에서 자신의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이는 즐거운 일이다. 선한 양심은 놋쇠로 만든 벽일 뿐 아니라 끊임없는 잔치와 같다. 모든 종류의 음악을 연주하는 솔로몬의 악기의 곡조도 둥지 안에 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래의 곡조와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은 비록 ‘슬픔 속에서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므로’ 항상 ‘즐거워하였고’ 힘에 겹도록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을 때도(고린도후서 1:8, 12) 그는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양심의 증거를 기뻐하였다.
우리 마음으로 책망을 받고 공격을 당하며 우리 양심에 위배되는 것보다 다 고통스럽고 불쾌한 것이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우리의 일이 입증되고 옳다고 인정받으며(갈라디아서 6:4) 스스로 거리낄 것이 없는 것 보다 즐거운 일이 없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하게 되니 ‘만일 우리 마음에 정죄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대하여 담대하며(요한일서 3:2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예레미야 12:3)라는 말처럼 흠없는 우리 얼굴을 하나님을 향하여 들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안하게 호소할 수 있다. ‘너는 나를 책망하나, 나의 마음은 나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욥의 말처럼, 이것은 사람의 비난과 질책에서도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87] 바울이 ‘사람의 판단을 받는 일은 나에게 심히 작은 일이라고 것처럼, 우리 자신의 마음이 잘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즐거움이 된다. 깨어있으며, 분별을 잘하는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선한 양심은 우리 영혼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진지한 이교도들의 생각은 그들 사이에서 고소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변명하고 악한 것에서 최선을 찾을 뿐이지만, 악한 양심을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은(로마서 2:15) 마음을 가진 자들은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힘을 얻고 칭찬을 받으니 이는 그들의 칭찬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기 때문이다.
선인이 강력하고 위협적인 유혹에 성공적으로 저항하고 무절제한 욕망이나 열정을 제때에 억제하고 죽이며 혀가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할 때 제어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들이 누리는 거룩하고 겸손한 즐거움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영혼과 육체의 유익을 위하여 선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만일 하나님께서 선인에게 그 날의 의무가 요구하는 바를 따라서 매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면,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선인은 얼마나 달콤한 만족감으로 안식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받으신다는 것을 소망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즐거움으로 빵을 먹고 기쁨으로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전도서 9:7)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대한 보증과 맛보기를 누리고 있으니 이것이 실로 즐거운 일이다. 성도들에게 그것은 보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현재의 불완전 상태 가운데 (요한일서 5:13) 그 첫 열매를 누리게 한다. [88]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영생을 받을 것뿐 아니라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위한 표와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으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에베소서 1:13), 영생을 주시기로 인정하신 것이며 확정하신 것이다. 우리가 들어가는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하나님이 거기 계시므로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곳이다.(시편 16:11) 그러나 거기에 들어가는데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러하셨듯이, 광야에서 우리가 만날 좋은 땅의 포도덩이를 (미리) 보내주셨다. 만일 그것을 충만한 즐거움 대신에 보낸 것이고 충만한 즐거움은 그것으로 연기된다면, 그들에게 고통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충만한 즐거움의 보증으로 보낸 것이므로 그들에게 달콤함을 더하며 실로 즐거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정원에서 하루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식탁에서 한 시간은 지극히 즐거우므로 육신적 즐거움을 누리는 천 날이나 천 시간보다 낫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성취를 바라보고 베일 안에서 소망하는 복된 영원의 약속에 대한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의 증표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남겨진 안식을 지키는 것이므로 달콤하다.(사도가 그렇게 부르듯이, 히브리서 4:9) 복음의 잔치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을 영원한 잔치이기 때문에 즐거우며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감미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선하고 신실한 모든 종들이 들어갈 곳에 대한 우리 주님이 주신 기쁨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감미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할 복된 상태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89] 성도의 교통은 감미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자의 교회와 ‘총회’에서 우리가 누릴 것을 소망하는(히브리서 12:23) 기쁨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길을 여행하는 자는 비록 가끔은 그들이 좁고 어두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으며, 앞에 아무 빛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또 다른 때에는, 그들은 모세와 함께 비스가 산꼭대기로 인도되고 있으며 거기서 좋은 땅의 영광과 약속의 땅의 전망을 즐겁게 바라본다. 그러나 ‘너는 네 눈으로 그것을 볼 것이나,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명기 34:4)는 말처럼 우리는 모세가 가졌던 낙담이 아니라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너에게 주리라’(창세기 13:14, 15) 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즐거움을 가지고 약속의 땅을 바라볼 것이다. 그 땅을 곧 소유할 약속이 주어졌으니, 소망의 즐거움을 누리라.
신앙생활의 즐거움(4)- 매튜 헨리
인물별/메튜 헨리
2014-06-28 13:48:57
4. 교리는 경험에서 더욱 입증됨
[91] 신앙이 본질적으로 즐거우며 거기에 동반되는 위로와 특권도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했으므로, 다음에 우리는 그런 경우에 충분한 증거라고 인정되는 것에 호소함으로써 이 진리를 더 명백하게 만들려고 한다. 내가 시인컨대, 만일 우리가 (고린도전서 2:14 말씀이 암시하듯이) 감각적인 것 외에는 보지 못하며, ‘어리석게 보이므로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을 받지 않는’ 자연인이나 단순한 동물에게 호소한다면, 그런 것은 이 진리에 일치하기에는 너무 멀어서, (오히려) 이 진리와 반대되거나 모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 영적인 감각을 구비한 사람에게 호소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만적 인간은 알지 못하며 어리석은 자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시편 92:6) 따라서 우리는 회개한 죄인들, 위로받은 성도들의 증거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성령께서 방심하고 죄짓는데서 깨워낸 악인들이며, 그들은 성령께서 거룩한 평안가운데 쉬게 하신 경건한 백성들이다. [92] 이들이 이런 경우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호소할 경험에 대한 가장 충분하고 적절한 증거이다.
먼저, 죄와 악의 길, 악독과 불경건의 길을 걸었던 자들에게 물어보라,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들이 걸었던 길이 옳은 길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며, 그런 길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들어보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호소는 사도가 말한 대로 ‘ 너희가 부끄러워하는 그런 일들에서 무슨 열매를 맺었는가?(로마서 6:21) 라는 질문이다. 그런 일들의 마지막이 사망인데 무슨 열매를 마침내 맺었는가? 혹은 욥기 21:21처럼 ’ 그 달 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 이뿐 아니라, 그런 것들에서 최고의 쾌락을 누렸다 해도 무슨 열매, 무슨 즐거움이 있는가?
지나치게 날뛰며, 자기들 욕망에 굴레를 풀어버린 자들은 젊었을 때 젊은 자들과 즐겼으며, 자기 마음에 좋은 것, 자기 눈에 좋은 것을 따라갔으며, 감각을 만족시키는 무제한의 자유를 즐겼으며 쾌락의 이름하에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세상에서 취하였지만,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그것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그들 마음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감히 신앙의 즐거움과 다투려고 했던 그런 쾌락에 대해 이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이 말해줄 것이다.
1. 죄의 낙은 고통스럽고 불쾌한 쾌락이며, 그것을 자랑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부덕하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며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쾌락이며, 단지 영혼의 보좌를 저급한 감각에 굴복시키며 그것들이 명령하고 규칙을 주어야 하는 이성과 양심을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93] 그것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영혼의 질병이고, 말거머리처럼 언제나 달라고 부르짖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탐욕스러운 자가 세상의 재물에서 누리는 쾌락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그것은 단지 눈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뿐이니, 눈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요한일서 2:16) 그것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만족인가? 그러나 사실 거기엔 만족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가지려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은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은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은 염려와 곤혹스런 짐에 묶여서, ‘재물이 풍부함’ 때문에 자지 못한다.(전도서 5:10,11,12)
술 취함은 즐거운 죄로 통하지만 그것은 야만적은 쾌락이다. 왜냐하면 술 취함은 (악한)본성의 세력에 힘을 더하여 이성의 작용을 혼란시키고 영혼의 즐거움과 절제하는 힘을 잃게 한다. 그것은 참된 만족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이런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불꽃에 기름을 붓는 것일 뿐이다. ‘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잠언 23:25) 이것이 술 취한 자의 말이다.
다툼과 복수도 쾌락을 주는 죄악으로 가장하고 있다, est vindicta bonum vita jucundius ipsa ;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으며 다른 모든 죄들 중에서 가장 남을 괴롭히는 죄악이다. 그것들은 영혼에 불을 붙이며 영혼을 조급하고 무질서하게 만들어,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만들어 낸다. 다른 죄들은 그 요소가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여기서 나오는 욕망은 전쟁과 싸움이다.(야고보서 4:1) 그것들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전쟁일 뿐 아니라 참된 유익을 파괴하려 하며, 영혼에서 다투며 영혼이 누리는 평화를 교란시키고 지속적인 불안으로 영혼을 채운다.
[94] 자신을 그런 욕망들의 노예로 만드는 자는 세상에서 최대의 고역임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한’ 탕자의 비유에서 묘사된다. 거기서 탕자는 돼지의 신세가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누가복음 15:15) 죄의 쾌락에는 그런 모욕과 그런 불만이 있으니 ,이뿐 아니라 죄인들을 명령하는 지배자도 다양하고 그들 간에도 다툼이 있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속임을 당하여 다양한 욕망과 쾌락에 빠지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사탄에게 사로잡혀 그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이다.(디도서 3:3)
2. 생각해 보면, 죄의 쾌락은 매우 쓰라리고 고통스럽다. 죄에 ‘잠시 동안’ (히브리서 11:25) 낙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잠시는 곧 끝나고 그 잠시의 낙의 반대인 다른 잠시가 이어지는데, 그 달콤함은 사라지고 잔의 바닥에는 쓴맛만 남는다. 포도주는 색이 붉고 그 향은 그럴 듯하지만, 마침내 ‘뱀처럼 물고 독사처럼 쏜다.’(잠언 23:32) 죄는 이방 여인과 같이 아첨하는 것을 매혹적이지만 그 마지막을 쑥처럼 쓰다.‘(잠언 5:3,4)
양심이 깨어나서 죄인에게 말해주면 죄인은 매우 죄책감에 빠진다. 죄가 죄인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어 자신이 그 죄로 좌절하고 추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악이 자신을 징계하고 자신의 타락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의 마음이 모든 가증한 것을 혐오할 때,(예레미야 2:19) 그가 즐기던 죄의 낙이 어디에 있는가? 도둑이 발각되었을 때 수치스러워하듯이, 술 취한 자나 부정한 자들은 스스로 깨닫게 되면, [95] 나의 수치를 어찌할 것인가? 대책이 없으니 그 안에 누어야만 한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어떤 죄의 낙이 지속된다면, 분명 부정소득의 즐거움도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 보여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악이 죄인의 입에 달콤하며,’혀 밑에 그것을 숨길지라도‘ 뱃속에 들어가면 독사의 독이 될 것이다.(욥기 20:11) (불의한) 재물을 삼키는 자는 그것을 다시 토해내지 않을 수 없다.
솔로몬은 감각적 쾌락의 거품을 걷어내고 그 모든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도 헛되고 괴로운 것이라 선포하였을 뿐 아니라, 죄악 되고 금지된 쾌락에 현혹된 자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놀람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솔로몬은 내가 마음을 기울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고 자신이 빠졌던 방종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 는 사실을 알아내었다고 말한다.(전도서 7:26) 그러니 그런 즐거움이 신앙의 즐거움과 경쟁하거나 같은 수준에 놓일 가치가 있는가! 짐승과 같은 쾌락을 그만두려 하지 않고 천사가 누리는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는 자는 얼마나 무감각한 존재인가!
둘째로, 지혜의 길을 맛본 자들에게 그런 길들에 대한 경험을 물어보라.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욥기5:1) 네게 응답할 자에게 향하면 그들은 ‘지혜의 길은 즐겁고 그 행로는 평화’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감정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신 주인이시며 그를 섬기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며 완전힌 기쁨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96] 이 진리를 증거하는 것은 오래되고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주인과 자신들의 동료 종들 곧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고 있는 빚이다. 그들이 더 선명하고 더 경건하게 그 진리를 증거할수록 더 좋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시편 66:16) 열왕기상 8:56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의 영예에 대하여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즐겁게 하시려고 약속하신 좋은 말씀들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신앙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진실로 그렇다. 그들은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하여야 한다.(요한일서 1:1)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들의 황금률이 되게 하라.
신앙과 경건의 길들은 선하고 오래된 길이다.(예레미야 6:16) 이제, 네가 가야만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미 그 길을 가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 길에 가끔 드나든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자주 그 길을 갔던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오래전에 그 길을 갔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 길에서 영혼에 안식을 얻었는지 물어보라. 그러며 네가 물어볼 것이 별로 없어도, 그들은 경험상 기꺼이 다음 네 가지를 인정할 것이다.
1. 그들은 즐거운 신앙의 규칙과 명령이 바른 이성과 참된 유익에 매우 부합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가까우며, 자신들에게 합당하고 그들이 믿기에 대단히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은 바르고 합리적이고 매우 공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사람인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 그 율법에 동의하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율법은 선하고(로마서 7:16) 그 안에 놀라운 단정함이 있기 때문이다.
[97] 겸손과 온유, 진지함과 절제, 자족과 인내, 사랑과 자비에 관한 율법들은 우리가 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매우 합당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바른 본성, 우리 능력과 기능의 진보, 우리 마음의 평정, 우리 삶의 위로에 합당하며,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에 고유한 보상을 가져온다. 만일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유익을 이해한다면, 자신에게 의무를 지우는 권세가 없을지라도 이런 규칙을 따라서 행동할 것이며 이런 규칙들에 복종할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철저히 시험해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을 구속하는 쇠사슬이나 족쇄가 아니라 몸을 단장하는 장식과 같고 몸을 교정하는 속옷과 같은 것이다.
경험이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물어보면, 방종의 유혹을 받았을 때 절제하면, 남들처럼 아무도 모르게 부당한 유익을 취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잘못을 용서해주면, 자신들도 곤란하지만 가난한 자를 도와주면, 고난의 상황이 매우 심하지만, 고난을 참으면, 심한 분노가운데 참으면, 거기에 얼마나 풍성한 위로와 만족이 있는지 말해 줄 것이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전임자는 권력을 남용했지만, 자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않았을 때’(느헤미야 5:15) 느헤미야는 어떤 위로를 가지고 이렇게 생각하였는가? 사무엘은 어떤 즐거움을 가지고 ‘내가 누구의 황소나 누구의 것을 탈취한 적이 있느냐’고 호소하였을까? 바울은 어떤 기쁨을 가지고 ‘내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한 것이 있느냐? 고 말하였을까? 이런 의도를 가진 경험의 기록을 보려면 시편 119편을 읽으라. [98]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선하심과 즐거움, 공의로움, 탁월함 그리고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자가 누리는 풍성한 만족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증거의 모음이다.
2. 그들은 기도의 훈련이 매우 즐겁고 안락함을 발견하였다. 땅위에 하늘이 있다면, 기도의 훈련은 하나님의 법안에서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소통하며, 경건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며,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주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편 73:28)는 다윗의 경험에 동의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수록 더 좋으니, 그것이 최선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나의 영혼아 너의 안식이 되신 하나님께 돌아가라’(시편 116:7)고 말하며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나는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누리는 만족을 사람의 아들들이 누리는 모든 즐거움이나, 왕과 왕자들의 특별한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예식에 참여하는 율법에 따라서 7일을 지켰을 때, 그들을 함께 모여 또 다른 7일을 지키기로 상의하고 ‘즐거움으로 또 다른 7일을 지켰다.’(역대상 30:23), 이것이 히스기야 시대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엄숙하게 유월절을 지키면서 누렸던 즐거움이었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넘치는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지 못했다면, (마태복음 15:32)에서처럼 광야에서 그 섬김을 3일도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모세와 엘리아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을 짓되’(마태복음 17:4) 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간청하는 것은, 예식 가운데 하나님과 내적으로 교제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거기에 풍성한 만족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남편에게 ‘내가 즐거움으로 그의 그늘에 앉으며 그의 열매는 내 입에 달콤하였다’(아가서 2:3) 라고 말하거나 혹은 비코의 마퀴스와 함께 ‘ 이 세상의 모든 재물과 쾌락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한 시간의 가치와 같다고 여기는 자들은 그 재물과 함께 망할지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어떤 쾌락이나 활동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생명보다 나은’(시편 63:3,5) 그의 자비의 즐거움을 믿는데서 누리는 것 같은 참된 즐거움과 만족을 찾지 못했음을 인정할 것이다. 이것은 추수의 즐거움이나 전리품을 나누는 즐거움보다 그들의 마음에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엄숙한 의식을 준비하면서 울면서 ‘귀한 씨를 뿌렸다면’ 그들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시편 126:6)
3. 그들은 육체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그 가시를 빼내고, 그 두려움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신앙의 즐거움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신앙의 확신은 육체적 즐거움을 곧 정복할 것이며, 그것을 아주 소멸시킬 것이라는 영적 즐거움의 탁월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그래서 영적 즐거움은 무거운 마음과 상처 입은 영혼에 노래와도 같다. 육체의 고통이 영적 즐거움을 소멸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영적 즐거움이 육체의 고통을 정복하고 쓰러뜨리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영혼의 즐거움은 육체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완화제이다. [100] 거룩한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육체의 즐거움으로 지지받을 필요가 없듯이 육체의 고통으로 받는 억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하박국 3:17,18) 그들은 주 안에서 즐거워하며, 자신들의 구원의 주를 기뻐한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조차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만족할 만한 영적 즐거움을 주셨다.
이것에 대하서 우리는 순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영적 즐거움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쉽게 만들며, 그들의 교도소를 즐거운 과수원으로 만드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런 위로에 생기를 얻어서, 그들은 하늘에 더 좋고 더 영원한 것이 있음을 알기에(히브리서 10:34) 자기 재산이 약탈당하는 것을 인내로 받아드리며, 기쁨으로 감수한다. 바울에게 물어본다면,(고린도후서 7:5,6) 사방에서 환난을 당하고,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지만, 자신은 위로로 가득했고, 모든 환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 누렸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넘친 것 같이, 그리스도로 받는 위로도 넘친다고(고린도후서 1:5) 말했을 것이다. 바울은 고난스런 자기 길을 끝까지 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 길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이것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병상에서 혹은 임종에서 보여준 것을 살펴볼 것이다. 고통스런 밤이 그들에게 닥쳐왔지만, 하나님의 율례는 그 밤에도 그들의 노래가 되었다.(시편 119:54) 한 사람은 내가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평화를 누린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내가 약하고 죽어가지만 sat lucis intus ,내 안에 빛과 위로가 충만하다고 말한다. 육체의 즐거움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할 때, 육체의 즐거움은 우리를 저버린다. 병상에서 사람이 고통으로 훈계를 받으며, [101] 수많은 뼈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할 때, 떡과 맛있는 고기도 혐오하게 되며, 즐길 수 없게 된다. (욥기 33:19,20) 그러나 생명의 떡과 영적 고기는 모든 것 중에 가장 달콤한 즐거움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나이다.’(시편 119:50) 라는 말씀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다고 깨닫는다. 이것이 그들 모두를 병상에서 편안하게 해주었다.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안전하게 인도하신, 그리고 더 좋은 세상 밖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보여준 기쁨과 승리는 지혜의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현저하게 증거한다. 어떤 유명한 목사가 임종을 맞아 ‘내게 보이는 이 빛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건 햇빛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아니다 이것은 나의 주님의 빛이니, 오 나의 기쁨이며 나의 위로이며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밖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만한 영광을 보고 느낀다. 나의 장례식에서 그것을 설교하며, 내가 죽고 사라져도, 하나님이 사람을 친근하게 대하심을 알게 하라!’ 내 마음은 충만한 위로를 누린다.‘ 고 말하였다. 조셉 알레인 씨의 삶과 존 제인웨이 씨의 삶은 이런 현저한 예를 보여준다.
4. 그들은 신앙의 길로 가까이 갈수록, 그 길에서 더 좋은 발전을 하였으며, 거기서 더 많은 즐거움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신앙에서 가장 탁월한 즐거움이 나오는 것 같다. 신앙이 승리할수록, 기쁨도 더 커진다. 지혜를 따르는 자들이 겪는 불안과 불편은 즐거운 지혜의 길 때문이 아니라, 지혜의 길에서 그들이 벗어났거나, 지혜의 길에서 태만하거나 성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즐겁지 못하거나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다. [102] 만일 선한 사람들이 가끔 의기소침하거나 슬픔에 잠기는 것은, 그들이 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해야 하는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이나 신앙원리를 따라서 살지 않고 육체를 너무 사랑하며, 세상을 너무 갈망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소돔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뒤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나온 (세상)나라를 너무 의식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그들의 위로를 빼앗으며, 그들의 위로자를 슬프시게 하며, 그들의 평안을 교란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에 굳게 섰다면,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확고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염려와 고통 가운데서도 그런 의무를 행하는 것이 즐거운 일임을 알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거할 때, 가장 안락한 안식이 우리 영혼을 찾아오지 않던가? (요한계시록 1:10) 더 오래 지속할수록, 이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바로잡고, 더 많은 즐거움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 이것이 영적 즐거움의 탁월성이니, 많이 권장할수록 커지고, 사용할수록 증가되니, 그것은 싫증이 나거나 쇠퇴하지 않는다. 신앙의 길에서 처음에 발견되는 어려움은 점점 사라지고, 신앙의 결실은 더 쉽게 자라며 신앙의 즐거움은 더욱 달콤해진다. 하나님의 길에서 퇴보한 사람들- 처음 사랑을 떠났는데 어디서 넘어졌는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이후에 누린 즐거움보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을 때 누린 즐거움이 훨씬 더 크지 않았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자신이 간통을 범한 여자와 더불어 그 여자의 배교가, 길을 가시로 가로막았을 때, [103]‘나는 나의 본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니, 그 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다’고 말할 것이다. (호세아 2:7) 하나님을 떠남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앙생활의 즐거움(5)-매튜 헨리
인물별/메튜 헨리
2014-06-28 13:49:46
5. 즐거운 여행의 비유로
교리를 설명함
[105] 신앙의 훈련은, 성경에서 종종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비유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길이니 곧 대로, 왕의 대로인데 신앙인은 바로 그 길을 여행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흔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vistores 순례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하늘에 갔을 때, 그들이 집에 도착하였다는 뜻으로 comprehensores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들이 여행 중이었는데 그 여행을 끝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늘이 여행의 종착지이고 우리를 부르신의 상급이라면, 우리가 달려갈 길을 마치면 그것을 얻을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그 길은 결코 괴로운 길이 아니라 우리가 들었듯이 즐거운 길일진대, 그것은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제 우리가 이 여행을 즐겁게 하도록 도와주는 12가지 것들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지혜의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첫째로 훌륭한 사명을 가지고 가는 것은 여행을 즐겁게 만든다. 법 집행인에 의하여 죄수로 사는 사람은 [106] 어떤 편의가 주어진다 하여도, 즐거운 여행을 할 수가 없고 우울한 여행일 뿐인데. 그것이 바로 악인에게 해당한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파멸을 향할 뿐이며, 그가 있는 길은, 파멸로 직행하는 넓고 평탄한 길이다. 그가 계속 그 길을 간다면, 그의 모든 발걸음은 점점 지옥에 가까이 갈 것이며 그러므로 즐거운 여행은 불가능하다. 그 길을 즐거운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부당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그 길이 바르게 보여도, 거기에는 참된 즐거움이 있을 수 없고, 그 길의 마지막은 죽음이며 ‘그 발걸음은 지옥으로 내려간다.’(잠언 5:5) 왕위를 받으려고 먼 지방으로 가는 사람은, 그 여행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가 맡은 사명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기에 충분하다. 이 사명을 가지고 그들은 지혜의 길로 여행하고 진동하지 않을 나라를 바라보며 그것을 소망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브리서 11:8) 본토를 떠났지만, 신앙의 길로 출발하여 거기에 머무르는 자들은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며,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함을 안다. (마태복음 7:14) 그 길은 영원한 생명이며 생명의 의로운 길이니 (잠언 12:28)이는 그 길의 마지막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선한 백성들은 선한 사명을 가지고 가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높이고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나라의 유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의 의무를 귀중하게 여기는데 이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스럽게 하며 반드시 만족감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을 가지고 바울은 ‘아들의 복음 안에서 자신의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로마서 1:9)
[107] 둘째로 여행을 위한 능력과 힘을 가지는 것은 여행을 즐겁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약하고 병들고, 저는 자는 즐겁게 걷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걸을 때 마다 아픈데 어떻게 즐겁겠는가? 건강한 사람은 달리는 것도 즐겁지만, 약한 사람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힘들어 떨린다. 신앙의 길을 걷는 자들이 그들의 본성적 약함을 치유 받을 뿐 아니라 영적 능력을 힘입는다면, 신앙의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힘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의 힘의 능력으로(이사야 63“1) 여행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기 스스로 힘으로 그 길을 나아간다면, 그 길에서 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조그만 어려움에도 낙심할 것이고 곧 피곤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아가되, ‘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시편 71:16) 나아가며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새롭게 주시므로 그들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듯 민첩하고 활기차게 나아간다. 그들은 달려도 피곤치 아니하며, 걸어도 쓰러지지 않는다.(이사야 40:31)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함께, 그들의 마음을 넓히시므로, 그들을 걸을 뿐 아니라 주의 계명을 따라서 ‘달려간다.(시편 119:32)
옛 본성에 맞지 않고 즐겁지 않으므로, 옛 본성이 거절하거나 마땅치 않아하는 것이 새 본성에는 쉽고 즐겁다. 이런 새 본성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져서 새 생명과 활력을 주며, 속사람 안에 있는 모든 힘으로 그들을 힘 있게 만들어(골로새서 1:11) 부지런히 행하게 하며 고난 가운데 참으며, 인내하게 하므로 이 모든 것을 즐겁게 만든다. 그들은 ‘주안에서 그리고 주의 능력의 힘 안에서 강하니’(에베소서 6:10) 이것은 성도들의 영혼을 육신이 약할 때에도 자발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108] 심지어는 ‘다리를 저는 사람이 수사슴처럼 뛰게 만들며 벙어리가 노래하게 만든다.’(이사야 35:6) ‘나에게 힘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립보 4:13)
셋째로, 낯의 빛이 있으면 여행을 즐겁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둡고 침침한 밤에 여행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우리 주님께서도 ‘어두움에 걷는 자는 갈 바를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12:35)고 말씀 하셨다. (어두움에 걷는 자는) 옳은 길인지 틀린 길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길을 가기 불편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만일 사람이 밤에 다니면 그 안에 빛이 없으므로 넘어진다.‘(요한복은 11:10)고 하셨다. 이것은 종종 악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말이다.’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므로 어둠속에 행한다.‘(시편 82:5) 그들은 지속적인 위험가운데 있으면서도 지속적인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은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이다.’(데살로니가전서 5:5) 그들은 ‘이전에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주안에 빛이요’ 빛의 자녀로 걸어가는 자‘들이다.(에베소서 5:8) 진실로 빛은 감미로우며, 가만히 앉아있는 자에게만 아니라, 여행 중에 있는 자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어둠에서 나온 자들에게 빛은 배나 감미롭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것은 단지 우리 눈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1:79) 그것은 실로 평화의 길이니 이 빛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복음이 인도하는 빛 안에서 걷는 모든 자들은 반드시 복음이 주는 위로의 빛 가운데 걷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에서 대낮같은 빛을 얻는 즐거움에 더하여, 실패하거나 길을 가는 중 날이 저무는 위험이 없으니, 주님의 빛 가운데 걷는 자들이 모두 그렇다. 날개로 감싸듯이 의로운 태양이 그들에게 떠오르므로 더 이상 떨어지지 않으며 그들에게 ‘무궁한 광명’이 될 것이다.(이사야 60:20)
[109] 넷째로, 의지할 만한 지식과 성실함을 가진 인도자가 있다면 즐거운 여행에 도움이 된다. 여행자는 대낮에 가더라도 앞서서 길을 안내해 줄 사람이 없다면 길을 잘못 들거나 길을 잃을 수 있다. 특히 그 길이 우리의 길이 그렇듯이, 많은 샛길이 있는 광야를 통과하는 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록 그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아도, 지속적인 의심과 두려움에 빠질 수 있어서 여행이 불안해진다. 그러나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안전과 만족이 함께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빛이- 길을 찾고 지시해주는 빛-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계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한복음 16:13) 주목하여 인도하실 것이다.(시편 32:8)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광야에서 함께 하시며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따라서 걸으며 또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로마서 8:1,14)
신앙의 길을 그런 대로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여행자라도 가기서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려하기 때문이다.(이사야 35:8) 사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바보나, 악한 자는 길을 잃거나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 어리석은 자의 수고는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는 그가 어떻게 도시로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전도서 10:15) -그러나 (신앙의 길을 걷는 자는) 어리석고 연약하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다. 그들은 어리석다는 의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지만, 양심과 기록된 말씀을 따라 성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자신들을 포기하는 지혜로운 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성실하게 행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의지하였던 분이 그들을 권고하여 인도하시며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시는 분이심을 알 것이다.(시편 73:24) [110] 그들이 의심에 빠지거나, 실패의 위험에 있거나 길을 잘못 들었을 때마다, ‘이것이 길이니 이리로 가라.’는 (이사야 30:21) 음성을 들을 것이라고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즐겁게 여행을 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여행을 안전하세 지켜주고 인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 즐거운 여행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적국이 놓여있고 적들은 날뛰고 교묘하다. 길에는 강도들이 우글거리며 약탈하고 파괴하려고 기다리니 우리는 사자의 이빨사이로, 표범의 산으로 여행하는 것과 같다. 더 큰 위험은 혈과 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악함에서 나온다.(베드로전서 5:8) 시탄은, 세상과 육신을 가지고 우리를 불러 세워 삼키려고 한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지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즐겁게 우리 길을 갈 수가 없다. 이 여행자들을 인도하시는 영과 동일한 영이 또한 이들을 지키신다. 거룩한 영으로 거룩해진 자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는데.(유다 1) 흠없이 보존되며 하늘의 왕국에 이르기까지 보존되므로(디모데후서 4:18) 그들은 영생을 보증하는 증거인 은혜와 위로를 빼앗기지 않는다. -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존되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므로(베드로전서 1:5) 즐겁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여행 중인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주어진 보호의 증서이며, 그들에게 지속적인 평안의 원천으로서 거룩한 안전이 주어진다. 영원한 진리 자체로 인하여 ‘어떤 악도 그들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며(시편 91:10) 어떤 것도 실제로 파괴적인 악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나중에 유익으로 변하게 되는 악 외에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키시며 그들의 출입을 보존하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영원 그 자체를 멀리서 바라보며 지키신다. [111] 그리고 이런 약속과 모든 진실한 신자들에게 전달되는 은혜로서, 하나님은 독수리의 날개로 그들을 업어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신명기 32:11) 지혜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천사들이 있는데 그는 신자들이 가는 길에서 신자들을 품고(시편 34:7) 쉬는 장막을 그들 가운데 둘러치며(시편 34:7) 그 모든 길에서 지킨다. 야곱이 길을 갈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만났듯이(창세기 32:1) 신자들이 이렇게 보호를 받는다면 모든 일에 얼마나 쉽고 얼마나 기쁘겠는가!
여섯 번째,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동일한 길을 앞서 갔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뒤쫓는다면 즐거운 여행에 도움이 된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은 즐겁지 않은데, 신앙의 길에서 우리 앞서 진리의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좋은 모범으로 인도를 받고 격려를 받는다. 우리는 이제 ‘믿음과 인내로’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받는 여정의 은혜이다.)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을(히브리서 6:12) 좇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동일한 길을 걸으며, 곧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얼마나 많은 거룩하고,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규칙과 동일한 관점으로 자신들을 다스렸는가? - 그들은 우리가 사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살고 동일한 복된 소망을 바라고- 이로써 ‘선한 증거를 얻었다.’(히브리서 11:2) 우리는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서 간다.(아가서 1:8)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본을 따라감으로(야고보 5:10)우리의 길을 편하고 기쁘게 만들자. 그리고 길을 안내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길을 평탄하게 하는, 이스라엘에 앞서서 가던 광야의 구름처럼,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112] 인내와 기쁨으로 우리 앞에 놓은 경주를 달려가자.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 모두를 격려하는 예수를 바라보며 그의 발걸음을 따라야 한다.(히브리서 12:1) ‘나를 따르라’고 명하시는 그런 지도자를 따르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는가!
일곱 번째로, 선한 동료를 갖는 것은 즐거운 여행이 도움이 된다. 선한 동료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고 무엇보다도 여행의 지루함을 덜어준다.―amicus pro vehiculo. 비록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몇은 있고 그들은 지혜롭고 지극히 선하며 이웃보다 더 탁월하니, 이들은 지혜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들었으므로 우리가 너와 함께 가리니’(스가랴 8:23) 라고 기꺼이 말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지혜의 길을 대단히 즐겁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인내에 동반자로서’(요한계시록 1:9), 상호교제를 통하여, 서로를 소생시키는 많은 동료 여행자들이 우리에게 있다.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들에게 기쁨은 그들이 가는 모든 도시에서 사람 수가 늘어나므로 힘을 얻어 나아가고- 점점 숫자가 불어나서- 마침내 시온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듯이(시편 84:7),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구원받을 자를 날마다 더하시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함께 여행하는 자들은 친근한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즐겁게 만드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 힘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말라기 3:16) 라는 말씀처럼, [113]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에 주목함으로, 매일 서로를 권면하고, 경험을 나눔으로 기쁨을 더할 것이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기념 책에 기록하신다.
여덟 번째로, 지혜의 길이 그러하듯이 그 길에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이 있다면 즐거운 여행에 도움이 된다. 다윗은 이런 경험을 말하길(시편 23:2)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푸른 초장’으로, 부드럽고 잔잔한 속삭임이 귀에 음악 같이 들리는 ‘잔잔한 물가’로 자신이 인도함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들을 지나쳐 간 것이 아니라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엘림에 이스라엘이 진 친 것 같이(출애굽기 15:27) 그런 즐거움의 한 가운데 누워있었다.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복음의 규례는 이런‘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처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지극히 합당하다. 그들은 안식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이것들이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이다.(이사야 64::11) 복음의 규례에는 위로의 강이 있으니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하나님의 도성, 지극히 높으신 자의(시편 46:4) 장막이 있는 성소를 기쁘게 하니, 이 강가를 따라서 그들의 길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돌아서는 자들은 그 어리석음이 책망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즐거운 길을 떠나서 괴로운 길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평탄한 길을 떠나 굴곡지고 위험하며 레바논의 설산과(예레미야 18:14) 같은 길을 택하는 어리석은 여행자가 될 것인가?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는가? 이러므로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가 되며 ‘사람의 어리석음이 그의 길을 망치게 한다.’
아홉 번째로, 하늘이 맑으면, 여행의 기쁨이 배가된다. 비오고 바람이 부는 날씨는 여행의 즐거움을 상당히 감소시킨다. [114] 그러나 하늘이 청명하고 공기가 잔잔하며 고요하면 여행이 즐거운데. 이것이 지혜의 길을 걷는 자들의 행복이다. 그들과 하늘사이는 청명하고 그들과 의로운 태양사이를 끼어들어, 상쾌한 빛줄기를 가로막는, 죄책의 구름이 없으니 그들을 위협하는 진노의 폭우가 모여들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셨으므로 모든 것이 즐거운 것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미소 짓는데 우리가 어찌 우울할 수 있는가? ‘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평안, 우리에게 약속된 평안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러한 여행자들은 하루 종일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 행하기‘ 때문이다.(시편 89:15)
열 번째로, 여행 중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받는다면 그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하나님의 길에서 걷는 자들은 비용을 부담할 수단(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시편 34:10) 그들이 세상의 풍부한 재물은 없을지라도 - 그런 풍부한 재물은 아마도 여행자에게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될 것이다. - 그들은 훌륭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든지 기도로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가는 것이며,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약속을 바라고 믿음으로 은혜의 언약에 다가가는 것이니 이는 다함이 없는 보물을 끌어내는 것이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 창세기 14:18절처럼 우리의 멜기세덱이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여행자들이 길에서 기진하지 않도록 힘을 주시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를 주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활동을 위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넉넉한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 반드시 매일 매일 필요한 힘으로 그들을 먹이실 것이다. [115] 여행자들은 먹을 곳과 쉴 곳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리스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한낮의 열기를 피하여 쉴 곳을 주시고 밤에도 쉴 곳을 제공하신다.’오 나의 영혼이 너의 안식으로 돌아갈지어다.’
열한 번째로, 가는 길에서 노래를 부르면 그것은 여행에 즐거움을 더해줄 것이다. 이것은 여행에 피로를 덜어주며 영혼을 신나게 해준다. 순례자들은 이것을 사용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입에 새로운 노래를 주셨으니(시편 40:3) 그것은 하나님께는 찬양이요 자신들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뻐할 이유, 기뻐할 여유, 기뻐할 마음을 주심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주님의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크시다고 노래를 부를 것’(시편 138:5) 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노래를 부르며 시온으로 돌아올’ 때 (이사야 5:11)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리고 승리한 여호사밧의 군대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갔을 때 더욱 더 기뻐했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 대적을 누르고 즐거워하도록 하신‘ 연고이다.(역대기하 20:27,28)’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를 부르자‘! 이렇게 여행자들은 노래하며 서로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열두 번째로, 좋은 기대를 가지는 것은 즐거운 여행에 도움이 된다. 지혜의 길을 걷는 여행자들은 어떤 여행자들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즐거움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상태에서도 모든 것이 너의 것이고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처럼(고린도전서 3:22) 심지어는 세상 혹 생명, 죽음, 현재의 일, 장래의 일,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부를 수 있다. 전 피조물이 그들과 화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섬김에도 순종한다. 그들은 즐거움으로 [116] 불안이나 불확실이 아니라 겸손한 확신으로 -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자신들의 앞길을 바라볼 수 있다. 여행의 목적지를 예상하고 여행을 하는 것을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목적지로 바로 향하며, 그 목적지가 멀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발걸음이 더욱 목적지에 가까워져, 목적지가 몇 걸음 안에 있는 것을 알면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잠시 후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알며, 잠시 후면 집에 가서 안식을 할 것이니, 우리 길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우리가 하늘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되 영원히 형통할 것이다.
신앙생활의 즐거움(6)- 매튜 헨리
인물별/메튜 헨리
2014-06-28 13:50:40
6. 반대에 대하여 교리를 옹호함
[117] ‘나를 잠시 용납하라’ 엘리후가 욥에게 말하였다.(욥기 36:2)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대에게 말할 것을 보여주리라.’ -이 진리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에 반대하여 진리를 방어하기 위해 더 말할 것이 이것이다. 우리 모두는 경건을 옹호하는 일이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처에서 경건을 반대하는 밀이 있고, 그렇게 명백하고 분명한 진리가 없는데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왕자는 자기의 이익에 직접 반대를 하는 진리를 가리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안개를 일으킨다. 그러나 진리는 위대하며 승리할 것이다. 신앙의 즐거움에 대한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
첫째로, 신앙에 오명을 붙이는 대적들의 비난을 방어하는 것은 쉽다.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사도행전 13:8, 10) 힘쓴 마술사 엘루마처럼 하나님의 바른 길을 왜곡시키고 오명을 덮어씌우기 위하여 자신들의 길도 타락시키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자들이 있다. [118] 그들은 약속의 땅을,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며 정복할 수 없고 정복할 가치도 없는 땅이라고 악평을 하는 악한 첩자와 같은 자들이다. (민수기 13:32) 후대의 냉소자들은 신앙에 대해 악평을 한다. 신앙이 힘들고 단조로운 일이라며, 그들은 신앙을 무섭고 엉뚱한 색으로 입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건을 단념시키며 스스로의 불경건을 합리화하려는 거짓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는 무겁고 그의 계명은 즐겁지 않으므로, 신앙을 갖는 것은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떠나는 것이고 스스로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며,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주인이라고 하는 자이다.(마태복음 25:24) 예부터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길을 비방하고 신앙을 모략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말라기 3:14)―신앙에는 칭찬도 위로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만군의 주 앞에서 슬프게 행한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말한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부당한 표현을 주목하라) 신앙이란 사실 기쁘게 행하는 것인데, 마치 신앙이 슬프게 행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제 그들의 이런 중상모략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말할 것은 신앙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것이니’(베드로후서 2:12)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스스로 멸망한다.’(유다서 1:10) 우리가 아는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며 하나님과 신앙을 거짓으로 고소하는 자이니, 특별히 우리의 첫 조상에게(창세기 3:5) 마치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누릴 행복과 즐거움을 하나님이 시기해서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엄하고 부당하게 대하시는 분으로 속였다. 사탄은 여전히 동일한 방법을 사용해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의 능력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119] 그러나 우리가 알고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근거 없는 비방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며, 그 모든 행로가 화평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스스로 신앙의 친구이며 신앙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이 만든 경건에 대한 그릇된 설명을 배척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대적’(사무엘하 12:14)이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도 다윗이 그랬듯이 (대적에게) 비방거리를 주는 자들도 있다. 신앙의 친구라는 사람들의 집에서 신앙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가? 그들은 거짓 친구들이며 혹은 어리석은 친구들이고 지혜의 자녀라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방종으로, 신앙을 옹호하고 증거하는 대신에 신앙의 대의를 배반하였으며, 제거하려고 애써야 할,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확고히 하였기 때문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는 고백이 시큰둥하며 - 투덜거리고 기분이 언짢게 - 그리고 신앙의 훈련을 힘들고 고통스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그들 모두에게 영혼을 달콤하게 하며 편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무리 중에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약함에 대해 동정적이다. 신앙고백에서 우울하고 슬퍼하면서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한 영적 상태로 나날을 슬퍼하는 사람도 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 중에도 상당한 정도로 마음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니 자신의 짐을 스스로 져야 하므로 신앙이 비방을 받아서는 안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슬픈 영혼을 가진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경건에는 참된 즐거움이 있다.
[120] 그러나 (1) 하나님은 종종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잠시 동안 자기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보류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려고 (베드로전서1:6,7) 그들에게 얼굴을 숨기신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을 지나 땅이 결실을 맺게 하듯이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것을 고치시며,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잘못된 것을 죽이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더 가까이 겸손하게 모든 위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인도하시며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신다. 비록 잠시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시나(이사야 54:7) 그것은 단지 더 힘을 더하여 그들을 붙잡으시려는 것이고 다시 오실 때 그 달콤함을 더 크게 하시려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자비로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빛이 뿌려졌으니 다시 (싹이) 올라올 것이다.
(2) 그들에게 고통이지만, 여기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의로우신 손을 깨달아야 한다. 그 고통 안에는 죄가 있고 그것은 그들로 말미암은 것이다. 선한 백성이 그들의 신앙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그들은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 그들은 어둠으로 달려가며 빛에 대해 눈을 감는다! ‘나의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난다’고 다윗을 말했다.(시편 38:5) - 나 스스로 만든 죄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싸매지 않고, 연고를 바르지 않았다. 왜 그런가? 거기에 길르앗의 연고나 의사가 없어서인가? 아니다. 다윗은 그것이 자신의 어리석은 때문이라고, 즉 자신이 바른 방법을 행하지 않아서라고 인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말씀하시지만, 마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이 마음이 고통스러우며, 잔인한 압제를 당하면서도 모세에게 마음이 완악했던 것처럼(출애굽기 6:9) 그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의 영혼에 위로를 주었던 신앙을 비방하지 말고 [121] 위로를 거절한 자들이나 위로가 마련된 길을 택하지 않은 자들이 -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 길을 가지 않은 자들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 다윗은 자신이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고통과 요동 가운데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죄를 고하지 않고) ‘잠잠하였기’ 때문이라고 시인한다. 다윗은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내가 내 죄를 주께 고백하리라’ 말하였을 때, 그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시편 32:3-5) 신앙으로 섬겨야 할 하나님을, 자신들의 잘못을 찾거나 자신들을 대적으로 간주하거나, 자신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그리고 자신과 남에게도 모두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니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기를 속히 하시며, 마음이 바른 자에게 선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비록 그들이 연약함으로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책망하지 않으시며 죽을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돌이켜 살기를’ 바라신다.(에스겔 33:11) 하나님은 우는 자들의 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자기의 자녀는 물론이고 사람의 자녀가 고통하고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위로받고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신앙은 믿는다는 자들이 보여주는 불쾌한 삶을 보고 덮어씌우려고 하는 모든 비방에서 결백하다.
셋째로, 신앙의 길이 즐겁다는 진리를 신앙의 길에 따라오는 어려움을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시키려면 좀 더 수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신앙의 길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잘못된 증거를 중시하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분명하며 [122] 서로 충돌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게 하늘로 가는 길이 ‘좁은 길이며’ 핍박받는 길이며, 고난스런 길이라고 가르치셨으며 성경 도처에서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지혜의 길이 즐거운 길이라는 교리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길에 있는 즐거움은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불편하고 불쾌한 그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른 사람들이 꿈꾸는, 길에 있는 사자 같은 상상뿐인 어려움은 고려하지 않지만, (지혜의 길에는) 실제적인 위로가 있듯이 실제적인 어려움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경우에(어려움과 위로)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려고(시편 101:1)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을 압제하는 자리에 놓으시기 때문이다.(전도서 7:14)
우리는 상황을 실제보다 좋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감히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보기에는 즐겁지 않은 것도 신앙 안에서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유지하는 즐거움과 일치하며 조회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교리를 반대하는 모든 예외사항들을 제거할 것이다. Amicae Scripturtum lites, utinam et nostrae! 성경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서로 동의할 수 있다면 잘 될 것이다.
이 교리와 잘 일치하지 않는 듯한, 그러나 분명히 일치하는, 네 가지 사항들이 있다.
첫째, 신앙생활이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길은 즐겁다. 우리가 매일 죄를 슬퍼하고 우리의 다양한 연약함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죄는 우리에게 쓰라린 것이 분명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타락과 우리가 범하는 실제적인 잘못들을 혐오하고 증오해야한다. [123] 우리는 매일 새롭게 회개해야 하고 매일 밤 그 날의 잘못을 슬프게 반성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때에,
1. 우리가 지혜의 길을 가기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지체하거나 그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 길에 벗어나지 않고 제대로 간다면, 회개할 일이 없을 것이다. 제대로만 그 길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위한 다른 일들을 만들고, 신앙의 길이 즐겁지 않다고 불평하는데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만일 우리가 항상 주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리고 주님과 교통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회개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생수의 원천’을 떠나고 ‘부서진 저수조’나 여름의 실개천을 따라간다면,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이니, 우리 자신의 탓이다. 회개가 쓰라린 것은 우리의 신앙 때문이 아니므로, 쓰라림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죄의 길에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회개의 쓰라림은 천배나 더 나쁜 슬픔을 막기 위하여 필요한 참회의 슬픔이니 죄는 조만감에 슬픔을 낳게 마련이다. 회개가 쓰라리다면, 그것이 경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죄에서 온 것이라 말해야 한다. ‘네가 악하므로 고통이 미치느니라.’(예레미야 4:18) 만일 죄로 우리 마음이 슬픈 것이 필요하다면, ‘마지막에 우는’ 것 보다 지금 우는 것이 확실히 낫다.(잠언 5:11) 계속 뉘우치지 않는 것은 마음의 슬픔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처지로 미루는 것이다.
2. 회개에는 만일 그것이 정당하다면, 참된 기쁨이 있으니 회개에는 기쁨이 동반된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길, 그들이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복되다고 하셨다.(마태복음 5:4) 사람이 자신이 잘못하고 [124] 부적절한 짓을 저질렀다고 스스로 의식할 때, 마음이 아플 것이며, 그것은 회개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신앙은 쓰라림을 달콤함으로 바꿀 길을 발견한다. 신앙의 영향 아래서 나오는 회개는 유다가 그랬듯이 단지 고통과 두려움뿐이지만, 신앙의 행위로 이루어진 회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즐거움이며 영혼을 살리며 영혼에 유독하고 불쾌한 것을 배출시킨다. 우리의 신앙은 참회하는 자가 지나친 슬픔에 압도당하거나(고린도후서 2:7) 삼켜지지 않도록 보살필 뿐 아니라 - 세상의 슬픔처럼 슬픔이 죽음으로 역사하지 않도록 - 이 쓴 잔이 달콤하게 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율법아래서, 죄에 대한 희생물을 즐거움으로 가져오며, 제사장이 속죄하기 위하려 희생제물의 피를 뿌릴 때,(역대기하 29:24,25), 레위인들은 비파와 수금으로 노래하였는데, 이것이 주님께서 선지자들에 주신 명령이다. 징계를 받는 날 조차도 영혼에게는 속죄의 날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속죄함을 받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로마서 5:1) 속죄를 받음으로 우리는 속죄의 위로를 누린다. 친한 친구나 친척들의 죽음을 슬퍼할 때, 우리는 슬픔 안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는데 이는 슬픔이 우리 영혼에 가득한 비통함을 배출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죄를 슬퍼하는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에게 약간의 만족을 준다. 요나에 대해 생각해볼 때, 요나가 화를 낸 것이 즐거운 일이며 화를 낸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더군다나 자신이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할 때, 회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히브리서에서 동일한 말씀이 위로와 회개를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는 참된 회개에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125] 3. 회개 후에는 그 만큼 더 즐거움이 따르며, 회개에서 즐거움이 나온다. 시온에서 우는 자들에게 - 그런 슬픔은 경건한 것이다. - 하나님은 재를 화관으로, 슬픔을 기쁨의 기름으로 대신하셨다.(이사야 61:3) 죄를 자각하고 영혼이 겸비해질수록, 사죄의 위로를 더 누리게 되니, 이는 치료받기 위하여 상처를 입은 것이다. 영혼이 고통 받는 날이 가까울 때 희년의 나팔이 울리니, 이는 주님의 용납하시는 해를 선포하며, 해방의 해를 - 스스로 자신이 줄에 묶이고 매였음을 정말 자각하는 자들에게 - 선포하는 것이다. 참되게 뉘우치는 자는 울면서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찾는 것이며 주님을 하나님으로 찾아 그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주를 찾음으로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주님을 찾고 주님이 풍성하고 갚아주시는 분이심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망이 없는 자처럼 슬퍼하지 않으며, 죄의 용서에 대한 선한 소망을 가졌으니, 저주받을 죄를 용서받는 것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로, 신앙을 가지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며 고통을 감수하며 힘써 수고하는 것이지만(누가복음 13:24)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다.’ 우리가 이 길로 들어가려고 애를 써야하는 것은 사실이고 - 말 그대로 그것은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마태복음 11:12) 그리고 우리가 그 길에 있을 때, 우리는 ‘인내로 경주하여야 한다.‘ (히브리서 12:1) 우리 얼굴에 땀이 흘러야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듯이, 우리는 자신을 항상 지키되, 부지런히 마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일에서 게으름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영혼은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로마서 12:11) [12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이므로, 고난을 견디고, 일이 이룰 때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디모데후서 2:3)
그러나 이런 싸움 속에도 위로가 있다. 그 싸움은 실로 힘들고, 근심되는 일이지만, 만일 우리가 얼마나 그 일에 능력을 받았으며 격려를 받는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로 나타날 것이다.
1. 얼마나 우리가 그 일에 능력을 받았으며 우리 영혼이 그 일을 지속하고 그 일을 완수하도록 힘을 받았는가? 만일 우리가 혼자 남겨졌으며, 우리 힘으로 그 길을 여행한다면, 매우 힘들고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더 좋은 영혼과 우리 자신의 힘보다 강력한 힘으로 행하고 능력을 받는다면, 즐거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도록 하신다면(빌립보 2:13), 우리 일이 힘들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을 이루심으로(이사야 26:12) 우리를 위하여 참된 평화와 기쁨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수고로 데려가시며 우리 손에 힘을 주시고 우리 약함을 도와주신다면(로마서 8:26), 우리는 기도로 모든 수고에 때를 따라서 힘을 얻는데,특별히 기도하는데 약한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수고하면서 노래 부를 수 있다. 처음에 다니엘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인자와 같은 이가 다가와서 손을 대면서(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한) ‘평안해라, 담대해라.’ 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니엘에게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지극한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 주께서 내게 힘을 주시므로 내가 주께 말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다니엘 10:16-19) 하늘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지만, 독수리 날개를 타듯, 기쁨으로 인도된다면, 그 길을 즐거울 것이며, 주를 기다리는 자도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힘이 새롭게 될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패한 기질에는 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127]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그 일에 마음을 기울이며, 습관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인, 새로운 본성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은혜가 공급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힘이 필요한지, 우리가 무엇 무엇을 섬길 것인지 아시는 분, 우리에게 자비하시고, 말씀에 신실하신 분이 약속해 주신 은혜이다.(고린도후서 12:9)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편하게 해주지 않으셨지만 ’나의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말씀을 주목할 만하다. 바울은 이 말씀을 듣고 즉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의 약함과 비방과 고통을 즐거워하니 이는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 ‘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넉넉한 은혜는 지극히 힘들지라도 우리의 수고를 즐겁게 한다.
2. 얼마나 우리는 그 안에서 격려를 받는가?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일은 선한 일이며,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며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사랑의 원리로 행했던 일이니 이것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라헬을 위하여 봉사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요한일서 5:3) 부지런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역하며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며 - 그들의 주인의 눈이 그들 위에 있고, 그들의 신실함을 증거하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고 모든 사람이 보는데서 갚아주시는 것은(마태복음 6:6)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그들의 수고를 받으시며, 그들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선하고 자비로운 말씀’을 하신다. 보아스의 종들이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주인인 보아스가 다가와서 다정한 얼굴로 ‘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실지어다.’ (룻기 2:4) 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지극히 큰 격려이다. 이보다 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보상에 대한 기대는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는 우리를 격려하며 일을 즐겁게 하고 [128] 우리가 직면하는 작은 어려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이런 것을 보는 눈이 있었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이다.‘(히브라서 11:26)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듯이, 이런 유익을 기대하는데, 그 유익의 정도에 따라서 또한 즐거움이 있다. 우리는 수고해야만 하는데 그 수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구원이며 이루어졌을 때, 우리의 모든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는 분투하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도록 분투하여야 하며, 우리는 달음질하되, 썩지 않을 면류관, 하늘의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음질 하여야 한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향하여 달음질 하지 않으며,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싸우지 않는다. ’의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거둘 것이며.(잠언 11:18) 추수의 확신은 씨를 뿌리는 수고를 기쁘게 할 것이다.
셋째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감각을 즐겁게 하는 여러 가지 일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지혜의 길은 즐거운 것이다. 사랑하던 욕망을 죽이고 굴복시키며, 타락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미워하는 것은 실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인에게는 오른 눈을 뽑으며, 오른팔을 자르는 것과 같다.(마태복음 5:29). 포기해야만 하고, 멀리 해야 하는 금지된 쾌락이 있다. 육신을 만족시켜서는 안 되며, 육신의 욕망을 채워서는 안 된다.(로마서 13:14) 반대로, ‘몸을 쳐 복종하게 해야 하며(고란도전서 9:27)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마태복음 16:24), 매일 우리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신앙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망치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129]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부인해야하는 감각적 쾌락은 상당히 비열하며 실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1. 우리가 스스로 부인해야 하는 이런 쾌락은 상당히 비열하다. 감각으로 사는 무지한 사람들이 이런 괘락을 이제까지 중시하고 좋아할지라도, 믿음으로 살며, 신적이고 영적인 즐거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 쾌락을 일반적으로 경멸하였다. 더 낫고, 더 합리적이며, 고상하고, 합당한 복된 영혼의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 아니다. 애굽의 마늘과 양파의 맛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광야의 만나와 가나안의 젖과 꿀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한다.(민수기 11:5) 그래서 육욕적 마음을 가진 타락하고 악한 욕망은 야비하고 부정한 감각적 쾌락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람이 영적 즐거움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배우게 되면, 감각적 쾌락은 모든 달콤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한 것이 되므로, 그보다 탁월하고 훨씬 위대한 즐거움과 비교하여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장난감이나 놀이를 포기한다고, 어른에게 즐거움이 감소하겠는가? 아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니’ 그런 것은 지나갔고 그런 것은 유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더 어른답고 더 풍성한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을 배운 사람에게는 감각적 즐거움은 비천하고 보잘 것 없이 된다.
2. 감각적 쾌락은 실로 위험하다. - 그것들은 마음을 빼앗기 쉽다. 만일 마음을 거기에 기울이면, 그것들은 죄를 자각하는 불꽃과 하늘로부터 오며 하늘로 향하는 거룩한 불을 꺼버림으로 마음의 눈을 가리고 지식과 양심을 더럽힌다. [130] 그것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 위험이 있으니, 감각적 쾌락을 소중히 여기고 탐닉할수록, 우리를 많은 슬픔으로 찌를 것이며 파멸과 멸망에 빠뜨릴 것이니 감각적 쾌락에서 우리를 부인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떨어져 스스로를 조각낸 바위를 피하는 것이다. 파멸로 이끄는 대단위 위험한 길을 걸으면서 얻는 거짓되고 가장된 만족을 부인한다고 해서, 분명히 우리를 여행의 목적지에 이르게 할, 확실한 토대위에 있는 안전하고 행복한 길의 즐거움이 줄어들겠는가? 거칠지만 포장된 길로 여행하는 것이 부드럽지만 흘러내리는 모래 길 보다 더 즐겁지 아니한가? 위험이 있다고 알려진 곳에, 참된 즐거움이 있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위험이 없다는 것은 손실도 불편도 아니다. 자기 머리위에 날선 칼이 한 가닥 줄에 달려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잔치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없는 것처럼,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덫과 음모를 의심할만한 반복적인 이유가 있는 그런 오락에서 무슨 즐거움을 누리겠는가? 어리석은 여인은 실로 ‘훔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즐겁다고 말하나(잠언 9:17, 18), 거기에 죽음이 있으며, 어리석은 여인의 손님은 이미 지옥 깊은 곳에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부인하는 일이 어렵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러므로 타락한 마음이 그런 금지된 쾌락을 거절하기를 망설일지라도, 우리는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나발에게 복수하려는 욕망을 부인하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해야 한다. 나중에 이것은 우리에게 슬픔과 마음의 범죄를 막아준다.(사무엘상 25:31)
네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며(사도행전 14:22), 또한 감각적 쾌락을 부인해야 할 뿐 아니라 감각적 쾌락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을 때, [131] 우리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들었으니, 그런 핍박을 예상하고 준비하여야 한다. 속박과 고통이 그들에게 있고- 재산을 잃고- 남보다 뒤처지며 -비난과 모욕- 추방과 사형선고 - 이것이 신앙의 즐거움을 망치지 않겠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 그것은 아무리 심해도 가벼운 고통이니, 우리는 이것을 겪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로마서 8:18) 지극히 놀랍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잠시일 뿐이다.(고린도후서 4:17) 이 모든 환난은 단지 바깥사람인 몸과 몸의 유익을 상하게 할 뿐이고, 영혼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껍질은 깨뜨리지만, 알맹이는 상하게 하지 못한다. 용감하고 담대한 군인이 야전막사의 수고와 위험 가운데, 전쟁의 한 가운데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명예를 열렬히 추구하는 가운데, 왕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가운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왕국의 유익을 마음에 가까이 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에 대한 거룩한 열망으로 인도받는 사람들이, 나중에 고난이 영광으로 인도할 것을 알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즐거워하지 못하겠는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그리스도께 속하였기 때문에 모든 악한 거짓으로 매도당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인내할 뿐 아니라 즐거워하고 넘치도록 기뻐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서 크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11, 12)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디는 모든 비난은 잠시 후 우리가 받을 면류관의 진주가 될 것이다.
[132] 2.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넘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도 넘치게 된다.(고린도후서 1:5) 물이 불어날수록, 방주가 더 높이 떠오르듯이, 하나님을 인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그의 위로에 참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고난으로 불러낸 자들에게 부족함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요셉이 선한 양심으로 옥에 갇혔을 때 그와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욕을 받았으나 존귀하게 되었다.(사도행전 5:41)
이렇게 의를 인하여 참고 고난을 받은 자들이 경험한 특별한 지원과 기쁨은 고난이 빼앗는 즐거움보다 더욱 지혜의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왜냐하면 고난은 사람에게서 오지만,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의 고난을 당하나, 영혼은 즐거워하며, 그들은 잠시 고난을 당하나, 즐거움은 영원하니, 이러므로 ‘누구도 그들에게 즐거움을 빼앗을 자가 없다.‘
신앙생활의 즐거움(7)- 매튜 헨리
인물별/메튜 헨리
2014-06-28 13:51:49
7. 교리의 적용
[133] 신앙의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하여, ‘보라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욥기 5:27) 라고 엘리바스가 자기의 원리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가 말한바 ‘너는 들어보라 그러면 그것이 너의 유익을 위한 줄 알리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그것이 너 자신을 위한 것인 줄 알라, 그것을 너에게 적용하라, 너에 대하여 그것이 유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임을(시편 73:28) 믿으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듣고 알게 되는 오직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을 듣고 알게 된다.
이 교리에서 조언과 권고의 형태로 세 가지 추론을 끌어내려고 한다.
첫째로, 우리 모두는 지혜의 길로 들어가며 그 길로 걷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임을 납득하고 확신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 진리를 소개하고 입증하는데 주로 의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무를 행하는데 격려받기 보다는 위협을 당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죄와 어리석음의 길에서 떠나라고 당신을 위협을 하지만, [134] 나는 지혜와 거룩의 길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방식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복음 안에서 예비하신 잔치로 당신을 초대하는 것인데, 이 초대는 모든 나라(이사야 25:6) 모든 백성, 그리고 남은 자중에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니, 불신앙으로 스스로 거절하는 자를 빼고는 아무도 이 초대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 골수로 가득한 기름진 것들과 잘 걸러진 포도주가 있으며 - 감각을 즐겁게 하는 진미를 초월하는 무한한 영혼의 기쁨이 있는 잔치에 당신이 초대되었으니, ‘오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와서 지혜의 떡과 지혜가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잠언 9:5) 신앙의 삶이 이렇게 달콤하고 즐거운 삶인데, 왜 우리가 신앙을 갖지 않는가? 지혜의 길이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혜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가? 지혜의 길은 우리에게 신실하고 진지한 삶을 추천하며 우리가 모든 지혜의 규칙을 따라서 살도록 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버리고 지혜의 다스림을 받게 한다. 신앙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호평을 하기에, 이것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만일 우리가 신앙의 실천에 열심을 내고 신앙을 따라서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신앙은 우리를 정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젊은 당신에게 아직 젊을 때, 지금, 신앙을 선택하고 그것을 본업으로 삼으라고 간곡하게 권한다. 그러면, 확신컨대 신앙이 그대에게 즐거운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참된 경건에서 누리는 참된 위로를 확신케 하시며, 사람의 줄로 즐겁게 그리스도께 이끄시며, 사랑의 끈으로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게 하실 것이다! ‘나의 아들아 (솔로몬은 어린 제자에게 말한다. 잠언 24:13, 14) 꿀을 먹으라. 그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솔로몬은 제자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135] 그것을 진지하고 적당하게 그리고 조심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당신이 그것을 발견하면, 지혜의 지식이 당신의 영혼에 즐거움이 될 것이며 그것이 마음에 즐거움이 되어 영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할 것이다. 그리고 영적이고 이성적인 것들에 무관심하지 말고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이끌기 위하여 주신 감각적 즐거움들로 그것들을 간절히 바라게 하여야 한다.
젊음의 때에는 쾌락의 때이므로, 우리는 젊음이 즐거움을 누리라고 허락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즐거움을 누리고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참된) 즐거움은 덕과 경건의 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 있는 것이다. 당신이 즐거운 삶을 살려고 한다면, 늦기 전에 신앙생활을 시작하라. 빨리 시작할수록,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것이니 여행은 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최고이다. 당신이 즐거우려면, 오 젊은이여 너의 청년의 때에, ‘너의 청년의 때를 즐거워하라’(전도서 11:9)? 부패하고 육신적인 당신의 마음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이 명하신 길을 따라가라.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보다 너에게 유익한 것을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너의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지 말라, 눈은 ‘너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잠언 23:5)을 따라가기 쉽기 때문이다. 믿음을 따라서 살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은 너에게 유익한 것으로 인도할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믿음의 실상을 상속할 것이며 지혜의 보물을 충만하게 얻으며(잠언 8:21) 거기서 참된 만족을 누릴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권하려는 것은 지혜의 길을 따라서 걸으며 -진지한 마음으로- 너의 영혼과 영원한 상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 마음을 잘 절제하고, 잘 단장하며, 잘 제어하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으라.’(잠언 4:7) [136] 내가 그대에게 권하려는 것은 지혜의 길이 즐겁다는 것이니, 신앙의 삶을 사는 것 보다 너에게 더 유익한 것은 없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잠언 23:15, 16) 네 마음의 가득한데서 네 입술이 정직한 것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의 마음이 즐거울 뿐 아니라, 너의 마음도 즐거울 것이다. 내가 바라기는, 너의 영혼과 너의 사랑을 얻으려고 너를 설득하는 두 경쟁자를- 그리스도와 사탄- 살펴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며, 나중에 받을 위로에 대해 숙고하는 그런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인생의 전환기에 있으니, 바른 길을 택하라 그러면 영원히 바르게 될 것이다. 지혜가 말하길(잠언 9:4) ’어리석은 자는 내게로 돌이키라,‘ 그러면 지혜가 그의 어리석음을 고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말하길 ‘어리석은 자는 내게로 돌이키라,’ 그러면 어리석음이 그 어리석음을 이용할 것이다. 네가 옳다고 하는 자를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것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너의 영혼의 승리를 위하여 이 두 경쟁자 사이에서 잘 결정을 하라.
첫째로, 육신적 어리석음, 죄악된 쾌락을 분별하고 그것들을 버리라. 금지된 쾌락을 버리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신앙의 즐거움을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젊은 나이에 잘 어울리므로, 그것들을 추구하는 욕망은 매우 격렬하니, 환락, 운동, 오락, 맛있는 음식들은 젊은이에게 우상이 되어 ‘청년의 정욕’(디모데후서 2:22) 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러나 ‘악한 날’ 이 올 것이니, 그 때에는 늙어서 먹고 마시는 것에 맛을 느낄 수 없어진 바실래르가 말하듯이 아무 낙이 없을 것이다.(사무엘하 19:35) [137] 세월이 결국 너를 죽은 자처럼 만들 듯이, 명철, 지혜, 은혜는 지금 너를 청년의 정욕에 죽은 자와 같이 만들 것이다! 감각적 쾌락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행복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려는가? 그는 말하길, (전도서 2:2 ; 7:3) ‘내가 웃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미친 짓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냐 하였노라’ 그리고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하였다. 모세가 왕궁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왕궁의 즐거움이 주는 유혹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듯이. (히브리서 11:25) 그대도 동일한 선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악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는, 신앙의 즐거움을 진정으로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죄악의 즐거움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것들을 경계하라.
네가 살고자 한다면, 명철의 길로 행하며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잠언 9:6) 악한 자와 이방여인의 길을 조심하여, 그것을 피하고 그 길로 다니지 돌이켜 떠날지어다.’(잠언 4:14) 죄악된 즐거움을 비열하고 너를 낮추는 것으로 간주하라. 죄악된 즐거움을 더럽고 너를 해치는 것으로 간주하라. 그것들을 경멸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고 육체의 무늬가 있는 옷조차도 미워하라.
두 번째로, 지혜의 길이 주는 즐거움을 확신하고, 그것을 와서 누리라. 너는 아마도, 신앙을 우울한 것이란 편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했듯이(요한복음 1:46) ‘와서 보라’ 신앙에는 지금껏 네가 생각지도 못하던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 멀리서 신앙을 바라보면, 우리가 신앙과 가까워질 때, 분명히 발견할 신앙안의 있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순교자, 피터는 설교에서 이런 비유로 신앙의 즐거움을 설명하였다.(이 설교가 비코의 마퀴스가 회심하는 수단이 되었다.) 멀리서 춤추는 사람을 바라보면,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138]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잘 살펴보면 그들의 춤추는 걸움이 얼마나 규칙적이며, 음악과 어울리는지 알게 되고, 그 춤을 기뻐하게 될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춤추고 싶어진다. 와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라 그러면 그 멍에가 쉬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 있는 즐거움과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맛보라. 진지함과 자기부인의 즐거움을 맛보면, 그것이 방종과 교만의 즐거움을 훨씬 초월하는 즐거움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 기도, 찬양, 안식을 누림, 이런 즐거움을 맛보라, 그러면 이런 참된 즐거움을 위하여, 헛되고 육신적인 희락과 기꺼이 바꿀 것이다. 다음 네 가지 규칙을 따라서 이것을 맛보라.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기는 것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우리가 제일 되는 목적으로 정하고 추구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금껏 우리가 실패한 것은, 세상과 육신을 즐기는 것을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섬기는 일을 우리 본업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이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사람은 세상보다 나은 그 무엇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분명 사람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만드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이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우리의 본업이며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을 영접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로,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제일 되는 즐거움,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다.(시편 43:4)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이 가능한 존재로, 다른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보고 즐기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비열하고 더러운 감각적 즐거움을 우리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특히 그런 것들 때문에 모든 영적이고 영원한 즐거움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불쌍하게도 자신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39] 만일 우리가 이런 현재적 즐거움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분명, 영적이고 영원한 즐거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며, ‘고기 한 조각 때문에 장자권을 판’(히브리서 12:16) 에서가 저지른 불경한 죄악보다 우리는 더 큰 패역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2. 사람은 영혼이므로 우리 영혼에 가장 적합한 것이 우리에게도 가장 적합한 것이다. 우리를 이 땅과, 저급한 피조물과 연합시키는 육체를 비열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배워야 한다.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것은 흙이며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두 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자. 영혼은 우리의 귀한 부분이니 그것으로 우리는 하늘과 영의 세계에 연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즐겁게 하는 위로를 영혼을 위하여 가장 귀하게 여기고 좋아해야 한다. 이성적 즐거움이 사람에게 최상의 즐거움이다.
3. 최고의 즐거움은 남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잠언 14:10) 최상의 즐거움은 눈 밑이나 세상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으니 그런 즐거움은 가진 사람은 자기 가슴에 감춘다. 비록 웃거나,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더라도 그것을 즐거워하며, 그로 인하여 영혼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니, 그들에게 그가 누리는 만족을 알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하니,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시다.
4. 모든 것이 형통하며 영원한 형통으로 끝난다. 그 즐거움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감각적 쾌락은 시들고 희미해지며, 거기서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독침을 남기지만 [140] 신앙의 즐거움은 우리와 함께 하며, 오래 지속되니(이사야 64:6), 신앙의 즐거움은 바람에도 뒤집어지지 않고 날씨에도 변하지 않고, 영생토록 지속되는 양식이다. 당신에게 있었던 최고의 즐거움을 생각해보고, 그 즐거움이 당신이 죽을 때에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인지,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벗겨주고 그 고통을 줄여줄 것인지 생각해보라. 죄악된 쾌락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주지만, 신앙의 즐거움을 기억하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생생한 위로를 준다. 벨사살 왕처럼 흥청거리고 사는 자들은 벨사살이 ‘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힌 것처럼‘, (다니엘 5:6) (두려워하며) 죽음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히스기야의 헌신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히스기야가 잘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서 지극히 만족함으로 ’여호와여,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이사야 38:3) 라고 마음의 평안함을 가지고 말한 것처럼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둘째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조사해보라. 신앙의 즐거움을 우리가 충분히 보았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지혜의 길을 걷는 자들이 신앙의 달콤함을 맛보고 즐기게 하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니, 신앙을 힘든 것으로 만들거나 신앙의 즐거움을 수고로운 것으로 여기지 말라.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를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의무를 즐거워하고 우리의 수고를 노래하여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자신의 종들에게 즐거움이 되도록 의도하셨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더 즐겁기 위해서, 일곱 가지 지침을 제시하려고 한다.
[141] 1. 하나님의 선하심을 항상 생각하고 하나님이 인색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 것이 신앙에서 허술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오류이다.(시편 50:21)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과 같이, 죄에 친숙한 분으로, 일이 되던 안 되든 무관심한 분으로 생각했으니, 이것이 신앙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빠졌던 오류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 같이 인색한 주인으로 생각하였으니, 이는 마치 욥이 잠시 미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해롭게 할 기회를 찾고, 자기 발걸음을 세고, 자기 죄악을 감찰하고, 자기를 대적으로 대하시는 분(욥기 13:24; 14:16)으로 오해한 것과 같다. 마치 하나님이 잘못을 지나치게 지적하고, 범죄한 자에게 인정사정이 없으며, 조그만 잘못이나 불완전이라도 있으면 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대단히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보다 무엇이 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즐겨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니, 주께서 내 죄를 사하셨나이다.(시편 32:5)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의로운 손으로 드리는 섬김을 즐겨 받으신다. 하나님은 항상 꾸짖지 아니하시며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약함을 이용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선하게 대하신다. 우리의 영이 자원하는 것을 받으시며,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간과하신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을 대하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 알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며, 하나님과 얘기를 나누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하나님이 크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 아니신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속성과 화목 시키지 않으셨는가?(고린도후서 5:19) [14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와의 관계도 화목 시키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라,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즐거울 것이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굳게 거하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선포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하신 자비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복된 열매들에 친근하게 가까이 한다면 우리가 사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은 풍성하며, 넘치게 크고 귀하고, 우리의 처지에 잘 맞고, 모든 상황에 적합하다. 그것은 은혜를 주신다는 약속뿐 아니라 은혜의 약속이며 넉넉한 은혜이니, 이 약속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된다. 성경에 나타난 이 약속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약속들을 사용하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와서 그 약속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며 믿음으로 그 약속들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넣으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창세기 15:1)요, ‘나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창세기 17:1)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여호수아 1:5)고 하신 것은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신 말씀,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로마서 8:2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선한 것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시편 34:10)이라는 말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위로를 받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약속들은 구원의 샘물이니, 우리는 거기서 기쁨으로 물을 길어 올리며, 위로의 젖을 빨고 만족한다. 약속들은 순례의 집에서 우리의 힘이며 동시에 우리의 노래이다. ’은혜의 언약은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므로’(사무엘하 23:5), 그 안에서 우리의 몫을 모은다면, 우리의 모든 구원도 그러할 것이며. [143] 우리가 거기에 머무른다면, 우리의 소망과 기쁨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언약 안에서 지속적인 잔치를 누려야 하며, 즐거움으로 우리 길을 가야 한다.(시편 119:111)
3; 우리는 신앙의 문제를 신중하게 정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신앙을 즐겁지 않게 만들며, 신앙의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지 못함으로 다른 사람도 낙심시킨다. 신앙 자체가 즐거움인데, 신앙이 처한 환경을 가지고 신앙을 짐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때를 놓치고 일을 하거나, 자기 힘에 넘치도록 일을 만들며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떠안는데, 특히 처음 시작할 때에 그러는데, 이것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거나(마태복음 9:17) 짐승 떼를 하루에 과도하게 모는(창세기 33:13)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메어주신 것보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더 무겁게 만든다면 우리가 멍에를 끄는 것이 멍에를 즐겁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고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솔로몬은 (전도서 7:16) 너무 의롭게 되려고 하지 말며, 너무 지혜롭게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그런 것은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신앙에 싫증이 나게 만든다. 잘 하는 일 중에도 지나친 일이 있는데, 이것이 신앙을 즐겁지 않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정해주신 대로 신앙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의 길이 지혜의 길이 될 때, 그것은 즐거움의 길이 되는 것이니, 지혜는 사리분별을 잘하는데 있다. 지혜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평탄하고 규칙적으로 살도록 인도함으로, 우리의 일반적이고 특별한 소명, 곧 우리 신앙의 일과 세상에서 필요한 일들이 서로 방해하고 참해하지 않도록 보살피게 한다. 지혜는 우리가 일을 제때에 제대로 하도록 인도하여, 모든 일이 때를 따라 아름답고 즐겁게 되도록 하니, 우리가 지혜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 신앙의 일은 쉬워진다.
4.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비를 행하고 성도들 간에 영적인 교제를 하며 살아야 한다. [144] 만일 우리가 진정한 위로를 누린다면, 우리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린도후서 13:11)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 즉 기독교 안에 있는 위로를 근거로 하여 형제애를 강조한 것이다. (빌립보서 2:1) 신앙의 위로를 누리기를 소망한다면, ‘사랑으로 행하라’는 위대한 법에 순종하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즐거운지 보라. 우리가 형제를 더욱 기뻐할수록, 우리는 더욱 즐겁게 된다. 불화와 언쟁보다 우리의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 가운데 거하는 것이 내개 화로다‘(시편 120:5,6) 다투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거하는 것은 악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다툼의 경향이 있는 것은 더욱 악한 일이다. 신앙에 대한 비딱한 논쟁에 얽매이면, 우리는 신앙의 즐거움을 잃고 박탈당한다.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 배가될 것이다. 사랑 그 자체는 사랑의 자석과 같이 영혼을 유쾌하게 만들고 소생시킨다. 더구나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의 만족과 즐거움을 불러오니 그것은 지상의 낙원과 같다. 완전한 사랑이 다스리는 것 외에 낙원의 행복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가장 평화롭게 형제를 향하는 기질을 가지는 그때, 우리의 가슴에는 지고한 평안이 있게 된다.
5. 거룩한 즐거움을 힘써 훈련하며 찬양에 헌신하라. 기쁨은 찬양하는 마음에 있으니, 이는 찬양은 기쁨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찬양에 헌신하며 찬양에 힘쓰라. 하나님은 찬양을 우리의 의무로 주셨으며, 찬양으로 우리 의무의 모든 다른 부분들을 즐겁게 만드신다. [145]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찬양으로 가득하여야 하며, 기쁨과 찬양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의 영적 즐거움을 마음 한 구석에 밀어놓거나, 우리의 감사의 찬양을 우리 기도의 한 구석에 밀어 놓지 말고, 그것을 모두 발산시키라. 하나님 안에서 즐거운 삶을 살며, 우리가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하듯이,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즐거워하라. 위로하는 모든 물줄기가 우리를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게 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라.‘ 위로의 모든 마른 물줄기들이 우리를 샘물로 몰아가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것인데 빼앗긴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라. 더 자주 그리고 많이 감사를 드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하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며, 즐거움을 회복할 것이며 비록 그것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은혜롭게 받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기‘(데살로니가전서 5:18)를 배우기만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즐거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감사는 고난의 어려움을 반감시키며, 고난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사는 그런 탁월한 하늘에 속한 찬양의 일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우리의 즐거움에 배나 되는 달콤함을 불어넣는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 이름은 즐겁고, 만족을 주며, 아름답도다.‘(시편 135:3)
6.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의지하며 행하라. 만일 우리가 신앙 안에서 더욱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며, 그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한다면, 신앙은 더욱 즐거울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더욱 존귀할수록, 우리 일의 모든 부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종종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빌립보서 3:3)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며, [146] 우리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볼 때, 영생을 소망하며 즐거워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으며 위로가 있다.(요한일서 5:11, 12) 우리의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기며,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침묵시키며, 우리의 모든 슬픔을 상쇄하기에 충분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이르신 약속과 성취 안에 있다.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므로 우리가 자신에게서 위로를 찾지 않고, 모든 일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중보를 이용하는 것을 배운다면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임명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 은혜, 능력을 -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를 -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우주적 작용과 영향, 그리고 복음의 진전, 영혼의 회심을 즐거워 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고 즐거워 할 때,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욱 더 배가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즐거움이며 ‘영원한 평화’에 대한 즐거움이다.(이사야 9:7) 그리스도 외에 아무 짐도 없는 그 때, 우리는 가장 즐거운 기쁨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7. 장자 나타날 영광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하라. 믿음으로 하늘에 마음과 사랑을 쏟는 사람들은 여기서 땅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하늘로부터 불러온다. 비록 감지할 수 없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을 하는 거룩한 열망의 수증기는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의 위로라는 이슬로 다시 내려와서 우리 영혼을 물댄 동산같이 만들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의 목적지가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우리가 가는 길을 즐겁게 할 것인지 기대하라. 이것은 성도들을 넉넉히 만족시키며 [147] 땅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기름지게 한다.(시편 36:8, 9)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지금 하나님의 기쁨의 강을 마시게 하니, 하나님께는 생수의 샘이 있어서 거기서 모든 물줄기가 흐르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빛으로 빛을 보기를 소망하니 그 빛은 영원한 빛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한 안식을(히브리서 4:3) 자주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그 안식으로 들어가고 안식이 주는 위로에 참여한다. 우리가 그 복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에서 발견된 복에 대해 이야기하기만 한다면, 은혜로 말미암는 복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매우 견고해질 것이며 복에 대한 우리의 증거는 조금씩 확실해질 것이다. 우리가 아직 광야에 있지만 가나안의 즐거움을 예상하듯이, 우리가 여기 땅에 살지만 하늘의 즐거움을 예상할 것인데 어떤 즐거움도 이 즐거움에 필적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달콤한 기쁨이며, 우리가 장차 누릴 즐거움을 (미리) 빌려온 것이다. 그 즐거움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앙이 주는 위로를 상당히 빼앗기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때‘(로마서 5:2) 우리는 거룩한 영광을 최고로 누리는 것이다. 이 영광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기쁘고, 우리의 영광도 즐거워한다.(시편 16:9)
셋째로,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실로 지혜의 길이 즐거움이며 그 길은 평안임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경험했다면, 우리의 경험을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증거하고, 그 진리가 참됨을 입증하여야 한다. 신앙의 즐거움을 믿는 사람들로서 살되, 그저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본 사람으로 살라.(요한일서 1:1)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사도의 말을 빌리면, 베드로전서 2:3)는 말처럼, 실로 우리가 신앙이 즐거운 것임을 발견하였다면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것이다.
1. 모든 신앙의 훈련과 복음을 순종하는 모든 경우에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라. [148]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즐거울수록, 우리는 더욱 풍성한 신앙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실 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서 더욱 열심히 우리의 의무를 다하며 더 진지하게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모든 선한 일로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선행을 하는 모든 기회에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즐거움을 누리고 두 번 부름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실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즐거워한다면,(시편 105:3) 하나님이 ‘나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첫 마디에 얼마나 진지하게 우리는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나이다.‘ 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시편 27:8)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의 집으로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쁘겠는가?( 시편 122:1)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비를 행하도록 만들 것인데, 선을 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 영예를 돌리는 일을 한다면, 그것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의무를 다하는 일을 활발하게 만들므로, 우리 마음은 말씀을 듣는 일, 기도 그리고 찬양에 집중할 것이다. 음악을 즐거워하는 자들이 얼마나 거기에 몰두하는가!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몰두하면 얼굴과 몸짓에 얼마나 나타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움으로 섬기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이 우리의 진심이라는 것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는가? ㅍ’내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니‘ (시편 27:4)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이 되게 하라.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한결같고 지치지 않게 만들 것이다. 정말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에는 우리는 지루해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날마다 찾을 것이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우리의 일상으로 삼을 것이다. 만일 묵상과 기도가 달콤하다면, 그것이 우리의 매일의 일과가 되게 하며,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끈이 되게 하며, [149] 제단 뿔에 묶는 희생제물이 되게 하라. 이것으로 우리는 배교로 이끄는 모든 미혹에 대처해야 한다. 그렇게 좋으신 주인을 ,그렇게 좋은 섬김을 내가 그만둘 것인가? 그리스도를 떠나거나 그리스도를 좇는 일에서 돌이키지 않도록 간절히 사모하라.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세 개를 지으리다.‘(마태복음 17:4)’ 영생의 말씀이신 그 분을 떠나 우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2. 모든 대화를 즐겁게 하고 우울한 대화는 배척하라. 신앙의 길이 즐겁지 않은가? 신앙의 길에서 즐거움을 누리되,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 아직 죄와 진노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는 우울한 것이 당연하니, 시온의 죄인들은 두려워하고 놀랄 것이다. 그들에게는 기쁨은 금지된 열매이니 그들에게 무슨 평안이 있겠는가? ‘ 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하나님을 떠났느니라.’(호세아 9:1)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아 어둠에서 기이한 빛으로 불러냄을 받는 자들은 마땅히 즐거워하며,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일어나서 비추라 이는 너의 빛이 가까이 왔음이라.’(이사야 60:1) 의로운 해가 떠올라 우리에게 비추지 않는가? 일어나서 아침이 오는 것을 바라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에 주신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비추라. 우리의 빛이 가까이 오듯이 우리의 자유도 가까이 온다. 너의 목의 멍에가 벗겨지지 않았는가? 사로잡힌 시온의 딸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오 시온이여! 네 힘을 낼지어다.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너는 티끌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앉을지어다.’(이사야 52:1, 2) 헛되고 육신적인 쾌락은 모두 큰 죄이며 유혹이지만, (신앙의 길에서 나누는 ) 대화에는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진지한 경건과 매우 잘 일치할 뿐 아니라, 우리의 경건을 크게 증진시키며, 경건을 크게 단장하고 남에게 권장한다. 솔로몬이 말하길, ‘즐거운 마음은 좋은 약과 같고’(잠언 17:22) [150] 뼈를 기름지게 한다. 그러나 낙심한 영혼은 독과 같이 상하게 하며 뼈를 마르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며 영혼을 슬프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대화에서 즐거움을 보여주어 그들과 대화하는 자들이 신앙을 가져도 즐거움을 포기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하여야 한다. 확신컨대, 선한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누릴 자도 없으며, 그들의 기쁨을 격려하기 위해 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요나답이 암논에게 ‘당신은 왕의 아들인데 어찌하여 날마다 파리하여 가느냐?’(사무엘하 13:4)고 넌지시 말한 것과 같다. 우리는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즐거워하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의 풍족함으로 인하여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신명기 28:47)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대하시니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연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가? 그러나 즐거워하라, 그리하여 우리의 행복이 피조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보물이 땅에 있는 것도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면, 그 특권을 버리지 말고 그 특권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사용하라. 우리 마음에 주입된 주님의 즐거움이 우리의 모든 대화에서 널리 퍼지게 하라. ‘너의 길을 가며 기쁨으로 너의 떡을 먹고 너의 포도주를 마시라.(전도서 9:7) 만일 내가 줄여야만 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공정한 물을 마시라. 만일 네가 그리스도 예수 언에서 소망하는 선한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은 너의 수고를 받으실 것이니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너의 힘이 될 것이다.
3. 감각적 쾌락을 멸시하며, 죄악의 쾌락을 두려워하라. 우리가 하늘의 즐거움을 더 맛볼수록, 우리의 입은 땅의 즐거움에 대한 미각을 버려야 한다. [151] 가나안의 젖과 꿀로 잔치하는 사람들이 애굽의 마늘과 양파를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금지된 모든 쾌락을 멀리하라. 그런 쾌락은 미끼 안에 있는 바늘이나, 풀 속에 있는 뱀과 같고 많은 사람들이 부딪혀 쪼개지는 부드러운 물 아래에 있는 바위와 같다. 그래서 붉은 포도주를 쳐다보지 않을(잠언 23:31) 정도로 술 취하는 쾌락을 두려워하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마태복음 5:28) 않을 정도로 간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죄악된 쾌락은 잠시뿐이지만, 마침내 그것은 ‘뱀처럼 물며’ ‘독사처럼 쏠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즐거움이 죄악된 쾌락의 힘을 죽이든지, 아니면 죄악의 쾌락이 영적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감각적 쾌락이 합법적일지라도 그것에 거룩한 무관심을 유지하며,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눈이 태양을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다른 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고 인정하라. 만일 우리가 쾌락의 매혹되어 우리에게 부적절한 것에 유혹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런 것은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라고 당연히 말할 것이다. 우리는 결단코 웅덩이 물 때문에 생명의 근원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4. 마음으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자기 처지를 억울해 하고 불만을 가지며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기를 바람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부러움이 솟아난다. 선한 사람도 이런 죄에 대하여 경계를 받는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라.’(잠언 24:1, 시편 37:1) 신앙 안에 이런 모든 즐거움이 있고, 우리가 그 즐거움을 경험하였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것을 죄인의 가장 좋은 처지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죄인의 외적인 번성, 그들의 재물과 풍요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152] 그런 것들은 쾌락의 절정으로 끝날,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능력을 그들에게 제공할 뿐이다. 비록 그들이 ‘상아 침대’에 누우며 ‘긴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양 떼에서 어린 양을 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먹으며, 수금에 맞춰 노래 부르며, 포도주를 병으로 마시고, 좋은 기름으로 바를지라도, 영혼이 하나님과 편히 거하는 자는 그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영혼이 하나님과 편히 거하는 자는 생명의 떡, 참된 만나, 천사의 양식을 먹으며,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므로,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즐거운 소리를 들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만일 우리가 신앙의 즐거움을 맛본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죄인들의 죄짓는 자유를 부러워하지 말라. 우리는 그것 보다 무한히 나으며, 죄인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없으며, 둘 중의 하나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분명히 죄인들이 좋아하는 것이니, 왜 우리가 죄인들을 부러워해야 하는가? 죄인들의 즐거움은 노예로 만드나, 우리의 즐거움은 해방시키며, 죄인들의 즐거움은 영혼을 천하게 만드나 우리 즐거움은 영혼을 고귀하게 하고, 죄인들의 즐거움은 넌더리가 나지만, 우리 즐거움은 만족하며, 죄인의 즐거움은 하나님께 역겨운 것이지만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죄인들의 즐거움은 고통과 쓰라림 속에 끝날 것이지만, 우리의 즐거움은 영원한 기쁨으로 성취될 것인데, 왜 우리가 죄인들을 부러워하겠는가?
5. 우리의 영혼이 현재의 고난으로 인하여 약해지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우리 마음에 너무 많은 멍에를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 누리는 우리의 위로를 폄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위로로 충족함을 증거하라. 사람의 모든 무정함을 경감시키기에 넉넉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라.[153] 하나님의 미소로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핀잔에 안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현재의 고난이라는 두꺼운 구름을 뚫고 비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외적 조건이 어둠에 앉아있는 때에라도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제하는데서 참된 즐거움과 만족을 찾았음을 드러내야 한다. 그 즐거움은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쓰디쓴 고난의 잔을 고통스럽지 않게 만들 뿐 아니라 즐겁게 만든다. 그러므로 복 있는 바울처럼, 우리가 슬플 때에도 항상 즐거우며 우리가 연약하거나 비난받는 가운데서도 기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즐겁지 않고 슬플지라도, 나중에 평안의 의로운 열매를 맺을 때, 슬프지 않고 참된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이다. “연단을 받는 자는 복되다.‘
6. 신앙에서 우리가 발견한 즐거움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라.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받은 즐거움은 우리를 대단히 편안하게 하는데, 이 즐거움으로 우리는 능력을 따라서 성도들의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여야 한다. 그들이 무너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편안하게 함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즐거워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즐거움은 우리의 손도 열게 한다. 바울은 마게도니아 교회에서 이것을 보았는데, 마게도니아 교회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기꺼이 도왔는데, 넘치는 기쁨으로, 영적인 기쁨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고린도후서 8:2)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명하셨을 때,(신명기 26:11, 12), 하나님은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도 값없이 주어 그들로 배불리 먹게 하라고’ 명하셨다. [154] 특별한 때에, 이스라엘은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셨는데’(느헤미야 8:10) 그 때에 그들은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그들의 몫을 보냈으니’ 그 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그들의 힘이 되는 것이다. 자비를 베풂으로, 우리의 즐거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겁게 맛보며 장차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7. 다른 사람들이, 특별히 우리의 책임아래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맛본 신앙의 동일한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특별히 기쁨의 본질은, 다른 사람과 나누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더 많아지는 것이므로 신앙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기쁨을 대단히 배가시킨다. 우리가 듣는 좋은 소식이 공통의 관심사라면, 우리는 그들이 그 좋은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기를 원한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사람이 ‘함께 즐기려고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는데’(누가복음 15:6), 그리스도를 찾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발견한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나와 함께 즐기자고 말할 뿐 아니라 와서 그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자고 할 것이다. 비록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을지라도 모든 사람을 위한 충분한 방이 있으며, 비록 그렇게 궁핍하고 갈망하지 않을지라도 각 사람에게 충분하다. 삼손이 사자의 뱃속에서 꿀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 꿀을 부모에서 조금 가져다가 그들이 함께 맛보도록 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한날이 천 날보다 나은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로 초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위하여 하신 것이 무엇인지‘(시편 66:16) 그리고 만일 그들이 우리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을 위하여 우리와 동일한 것을 기꺼이 해주시는지를 말해줘야 한다. 안드레가 메시야를 찾고 대단히 즐거워하였을 때,(요한복음 1:41, 45) 그는 자기 형제 베드로가 올 때가지 기다릴 수 없었다. [155] 빌립도 친구 나다나엘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집에서 즐거움의 잔치를 맛본 자들은 음식 조각을 혼자서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신들의 영적인 것을 기꺼이 나누어줘야 한다.
8. 기꺼이 죽으며 이 세상을 멀리하라.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았으며 우리의 즐거움은 하늘에서 오는데 아직도 현 상태를 사랑하며 마치 우리 보물과 즐거움과 모든 것이 감각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에 싸여 있는 것처럼 그것을 떠나기를 싫어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감각적 쾌락은 우리를 얽어매고 여기에 잡아둔다. 이런 것들은 이른 바 좋은 집과 정원을 보면서 죽기를 싫어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떠나라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라’(미가2:10)고 부르시는데, 이런 것들이 어찌 우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하겠는가?
감각적 쾌락은 영적 즐거움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감각의 세계를 떠나서 영의 세계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나이를 먹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이르면, 육체의 즐거움을 더 이 상 즐길 수 없고 바실레가 그렇듯이 그런 즐거움은 말라버리고 맛도 잃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의 길을 걸으며 인내한다면 즐거움이 없어지는 그런 악한 날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히스기야가 그랬듯이 나이를 먹어도 땅에서 살아온 삶을 즐거움으로 회상하며 더 큰 즐거움으로 하늘에서 지낼 더 좋은 삶을 기대할 것이다. 우리가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날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한 기쁨과 감사 가운데 누리는 즐거움은 병들었거나 죽음 앞에서도 우리를 편안하게 해줄 것이다. 성도들은 영광 가운데 즐거워할 것이며 [156] 그들을 가두어 두고 무덤으로 데리고 가는 어둠의 침대에서도 크게 노래할 것이다. (시편 149:5) 우리가 신앙에 신실하다면, 신앙은 우리가 죽는 순간에도 생생한 위로를 주므로, 죽음의 고통을 경감하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며, 승리에 차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 말하게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지 않는 삶으로, 신앙의 즐거움의 경험을 증거하라.
마지막으로, 영광의 왕국에서 누릴 영적인 즐거움의 완성을 소망하라. 우리가 영광의 왕국에 가기 전에는 영적 즐거움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사랑하므로 우리의 즐거움도 부분적이다. 심지어 우리의 영적 즐거움조차도 여기에서는 얼룩지고 반감되며 눈물이나 두려움과 섞여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섞이지 않은 충만한 즐거움이 있으며, 끝도 없고 줄어들지 않는 즐거움이 항상 있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며 그 즐거움은 ’영원할 것‘이다.(이사야 35:10) (육신적) 길의 마지막에 있는 그런 즐거움과 비교하여 지혜의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어떠한가? 우리가 육체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 안에서 누리는 안락함이 그렇게 즐겁다면, 우리가 육체를 벗고 하나님 앞에 갈 때, 누리는 즐거움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하루와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보낸 몇 분이 그렇게 즐겁다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훨씬 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있는, 베일에 싸인 영원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어떻겠는가? 우리가 받을 상속의 전조가 그렇게 위로가 된다면, 그 상속 자체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은혜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은혜가 목적하며 나아가는 것은 즐거움의 완성을 위한 것이니, 그것은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다.’(요한복음 4:14) [157]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기다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흔들리지만, 하늘에서는 안식에 들어가는 사랑일 것이다. 오 언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예비한’ 그런 안식이 올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니, ‘오 언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마지막 유월절에서,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마시면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것으로 마시기를‘ 소망하며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6:29) 여기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매우 즐겁지만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낫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우며,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바라던 것이 거기에 준비되어 있다. 우리는 아직 고향집에 가지 않았지만 거기에 가기를 바라고, 거룩한 열망으로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며,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에 하늘의 부르심의 상을 위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분발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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