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2014-05-17 19:24:51
로마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1.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로마 교회에 선교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언급하였듯이 다른 사람이 세운 터 위에 건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지인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고린도 지방에 어느 정도 선교를 마쳤기 때문에 그 다음 목적지를 서쪽으로 잡고 유럽의 끝 지방인 서바나까지 가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다음 지역은 인접한 로마지방인데 그곳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으므로 바울은 로마를 지나서 서바나로 가서 선교를 하려고 한 것이다. 다만 바울은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 교회를 들러서 그들과 교제를 나눌 뿐 아니라 자신의 서바나 선교를 그들이 지원하여 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고린도 지방에 머물면서 미리 로마 교회에 이런 자기 뜻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로마 교회에 자신이 지금까지 이방에 전했던 복음을 다시금 선명하게 설명하여 알림으로써 그들과 믿음의 교제를 분명히 하고 또 동일한 복음의 연대 속에 그들의 선교 지원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대면하지 못한 로마 교회이기에 다른 서신서 보다 복음에 대하여 더 체계적이고 정교한 진술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로마서라는 위대한 계시의 편지가 탄생하게 된 계기이다.
2. 그러므로 로마서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도라고 말하면서 그런 권위를 가지고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이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에 약속된 그 아들이 누구이신가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구약에 아들에 관하여 약속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복음이 되는가? 그것은 복음에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3,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후에 즉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한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그들의 불의와 불경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에게 보였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불의이다. 이것은 진리를 억누르는 불의이다.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그 진노는 우선 그들을 마음에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자기 정욕을 따라서 더러운 가운데 잘 지내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이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는데 이것이 바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4.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른 점은 그들에게 율법이 명시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들은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들의 빛으로서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자부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방인에게는 없는 명시적인 율법이 있으니 그렇게 자랑하고 자부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율법의 요구를 저버렸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책망한다. 결국 바울의 결론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율법아래 있는데 율법은 그들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만든다. 이 말은 율법이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으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고 심판에 합당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 이렇게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고 율법으로는 단지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말한다.
5. 이렇게 절망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쁜 소식을 마련하셨으니 그것이 곧 복음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죄를 범하기 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율법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길이 막혀버렸다. 이것이 인간의 절망적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을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이 아닌 다른 길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길을 마련하신 것이다. 절망적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곧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심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이며 동시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금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
6. 바울은 앞에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였는데 바울은 이 진리를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도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이 시편에서 말한 복도 바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여 이어온 진리인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 여기신 것이다. 바울은 지금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일종의 약속인 것인데 어떤 약속인가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약속이고 이 약속이 믿는 자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7. 그러니까 믿음이란 약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약속이 없다면 믿을 것이 없으므로 당연히 믿음도 없는 것이다. 약속이 먼저이고 믿음이 나중이다. 그러나 약속은 언제나 믿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하여 약속이 성취되도록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말은 이 약속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은혜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지지만 반드시 그 은혜의 대상인 사람의 믿음으로 요구한다. 그러니까 믿음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는 율법에 속한 유대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이방인에게도 그러하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셨으니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듯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의롭다 여기시며 또한 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게 하신다.
8.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한다.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에 들어갔으니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란 말이다.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시작이며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므로 더욱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이제 시작이고 신자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데 이르는 것임을 의미한다.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구원의 시작이지 아직 완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진노에서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9.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죄는 아담만 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그래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렇게 죄는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이 있었는데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죄인데도 죄인 줄 잘 몰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이 없을 때인 아담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을 하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으로 범죄를 더하게 하신 것은 사람을 멸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코자 하심이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베풀고자 하심이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한다.
10.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냐고 반문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죄에 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목적이고 복음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당연히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연합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된 것으로 말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신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자신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각성을 가진 자로서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지체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
11. 바울은 죄가 신자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신자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도 신자는 죄와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신자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죄에게 굴복하면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의에 이르게 된다. 죄와 순종은 공존할 수 없다. 죄에 굴복하면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죄와 싸워야 한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고 죄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사람에게 사망이 된 것이 아니라 죄가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이다. 이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지만 문제는 사람이 육신에 속하여 곧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곧 죄의 종노릇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가 선하고 의로운 것은 알면서도 율법의 요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 속에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죄라고 말한다. 그래서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12.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다음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율법을 범해도 정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으므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한 자가 된다. 또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몸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 예수를 죽은 자에게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13.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빚진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가진 신자들의 의무를 뜻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만일 육신대로 산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오직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즉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죄의 행실을 죽여야만 살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지 법적인 신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실제적인 인도함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법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대신하는 법적이고 실제적인 상속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셨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14.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란 말을 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바울이 거론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란 무엇인가? 앞의 문맥으로 보아서 그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고난일 것이다. 신자가 육신을 좋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살려고 할 때, 즉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할 때,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신안의 죄와의 싸움이고 외적으로는 세상을 거스르는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신자는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핍박과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과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의롭게 살려는 자는 고난을 받는다고 말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영광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이다. 바울은 피조 세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피조세계는 허무함 가운데 굴복하여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허무함 가운데 피조세계가 굴복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 세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해야만 이것이 이루어지므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등장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피조물뿐 아니라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몸의 속량이 되는 때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때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속량될 때, 그 때가 바로 피조물들이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때이다.
15.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하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그 아들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들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이다. 하나님은 예정하신 자들을 역사 가운데 부르셨으며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여기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물론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예정의 목적이고 부르심의 목적이며 구원의 목적이다. 누가 하나님의 이런 예정과 부르심을 막을 것이며 대적할 것인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상속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요,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자들이니 누가 이들을 정죄할 것인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세상의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무엇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16. 바울은 신자들이 장차 도달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말하고 그 영광의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자가 없다는 놀라운 확신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한편에는 유대인 동족들을 향한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의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며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는데 정작 그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문제로 인하여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한다. 먼저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미리 알고 계신다. 그러면서 바울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예로 들면서 오늘도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택하심을 얻은 자 외에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구원의 신비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는 이스라엘의 택하신 자라도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의 택하신 자들도 돌아옴으로 유대인과 이방인가운데 하나님이 택하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 전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이스라엘도 긍휼을 얻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다.
17.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의미는 당연히 앞에서 바울이 길게 설명한 내용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요약하면 첫째는 하나님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준비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복음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준비하셨는데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순종치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그러므로" 란 "하나님이 이렇게 이방인들을 위하여 특별히 복음을 준비하여 주셨으니" 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복음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바울은 말하는 것이니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하여 사람은 어떻게 언약적으로 반응할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이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적 행동이라면 믿음은 사람 편에서의 언약적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당연히 포함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의 요지는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요구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인 것이다. 신자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는 이 세상의 가치관, 생각을 거부하여야 하며 끊임없이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인 것이다.
18.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한 후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한 지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몸에 각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각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일이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가르친 것이 첫 번째가 신자간의 관계라면 둘째는 세상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교훈의 공통점은 곧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사람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세상의 원리와는 너무나 다른 가르침이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놀라운 교훈이다. 그리고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하라는 것이며 세상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높이거나 지혜 있는 체하지 말고 도리어 낮은 체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에게 악을 당하더라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도모하여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한다. 오히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과 동일하다. 결국 이렇게 하는 것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이 세상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자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19.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는 일과 관련하여 이번에는 세상의 권력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신자는 가져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된다. 그러므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바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난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으로 난 권세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계하는 권세이다. 그러니까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바울은 권세자에게 복종하라는 권고에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막거나 훼방하는 권세라면 신자는 그 권세에 복종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권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난 것이 아닌 불법한 권세이기 때문이다.
20.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훈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관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용납하고 그 의견을 비판하지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모든 것을 먹을 만큼 장성한 믿음을 가진 자고 있지만 채소만 먹어야 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 이 교훈에서 바울은 위대한 교훈을 도출한다. 그것은 신자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신자는 주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위대한 삶의 지침이 제시된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신자들은 주를 위하여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바로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문제나 날의 문제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자백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신자들도 각 사람이 자기 일을 직고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서로 비판하지 말고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신자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신자들은 서로를 기쁘게 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 구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을 담당하신 것을 신자들은 본 받아야 한다. 구약의 기록은 신약의 신자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니 그것은 신자를 위로하고 인내하게 하며 소망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인내와 위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시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으니 신자들도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21.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간결하나 위대한 진술로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과거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비밀인데 이제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록된 선지자들의 글에 복음의 비밀이 나타났는데 이는 모든 민족이 듣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 나타난 복음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하여 계시된 것이란 의미이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자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으시기를 찬송함으로 편지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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