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기도문의 하나님나라 복음- 정현구
2014-04-07 22:57:58
주기도문에는 주님의 모든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다. 주기도문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부분은 하나님에 관한 기도이고 다른 한 부분은 사람에 관한 기도이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부터 매일 그리고 평생 간구해야 할 제목을 알려주신 것인데 여기에 담긴 핵심 간구 내용을 잘 알아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흐름이 보이고 기독교란 종교의 수준과 깊이가 보이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의 시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가르쳐 준다. 하늘에 계신으로 표현되는 초월적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아버지로서 이 세상에 내재하는 분이시다. 우주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 이 우주속에 들어오셔서, 더 나아가 기도하는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록 내게 귀를 대고 있을 만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해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초월자가 아니시라면 우라기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능력이 부족하고 또 내재하는 분이 아니라면 능력이 있어도 내 기도에 관심을 기울이실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초월자이면서 내재자이실 때 비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부른 뒤에 나오는 기도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완전히 거룩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을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기도자의 바른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요약자주 :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과 관계없이 거룩하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는 것은 성경적 사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에 의해 훼손되기도 하고 거룩히 여김을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은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한다는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기도가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다. 사실상 주 기도문중 간구의 기도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 간구를 풀어쓰면 하나님이 왕이 되어 이 땅을 다스려 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의 통치와 다르게 은혜의 통치이다. 이 기도문은 이런 자비로운 통치, 은혜의 통치, 하나님의 헤세드가 있는 통치, 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이어서 기도하는 내용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앞의 기도 "나라가 이루어지이다"와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는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누가복음의 내용이 마태복음에서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두개의 진슬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결국 전반부 세가지 기도의 핵심은 "나라가 임하소서 즉 하나님이 다스려 주소서" 라는 것이다.
(요약자주: 여기서 '땅에서도' 란 말은 언약백성이 사는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라는 의미일 것이다.)
주 기도문의 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담은 앞부분과는 뚜렷이 구별되며 사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주기도문은 이 두 부분을 연결하여 두 부분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전반부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로 끝나는데 후반부는 갑자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시험에서 건져주소서" 라는 간구로 넘어간다. 여기서 전반부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땅"은 단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세상이 아니라 그 땅은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자가 살고 있는 그 곳, 기도자의 실존적 현실의 땅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과 통치가 이루어져야 할 땅이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라는 기도는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받는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는 기도는 사람간의 갈등과 문제로 얽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며 또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란 기도는 사람을 넘어뜨리는 유혹이 많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주 기도문의 기도의 흐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다스리게 해주소서' 이다. 결국 주기도문이 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렇게 주기도문이 구하는 전반부 기도인 ' 하나님이 나를 다스려주소서"와 후반부 기도인 "내 삶의 땅을 다스리게 해주소서"는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원리가 된다. (요약자주: 저자는 이렇게 주기도문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후반부의 내용이 과연 기도자의 다스림을 구하는 기도인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후반부의 기도의 내용도 하나님이 다스림을 구하는 것이지 기도자가 다스리겠다는 기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후반부는 전반부의 하나님의 나라가 기도자가 거하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주 기도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기도이다. 왜 하나님의 다스림이 기도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바로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는데 그 뿌리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불순종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인 뿌리를 해결해야 참된 응답이 주어지기에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대신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선과 악을 구분짓는 입법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행위이다. 인간 죄의 뿌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한 것과 반역적 독립선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인간 문제를 푸는핵심은 그 뿌리를 뽑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주 기도문은 기도의 진짜 응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했더니 내개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일에 대해 염려한다면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나의 경제적 현실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살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경제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죄의 용서"에 대한 기도도 마찬가지로 그 기도의 응답은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사람의 은혜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갈등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도의 내용은 두가지인데 첫째는 위로 하늘의 다스림을 받는 것, 둘째는 아래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핵심내용이자,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신앙생활이란 '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가 딛고 있는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사는 것' 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며 이렇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광장히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음을 알 수 있다. 창조세계는 어마어마하며 볼수록 기가막힌 세계인데,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가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만들었으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다. (요약자주: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였지 인간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으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은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작은 왕들로 만든 것이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할당한 일정한 영역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긴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능력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왕노릇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 기도문대로 사는 것에 달려있다. 주 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게 하는 기도이다.
십계명을 보면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가 사람에 관한 계명이다. 첫 네계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살게 해주소서' 라는 뜻이니 이것은 주기도문의 전반부 내용과 같다. 또 5-10계명에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온갖 문제가 다 들어 있는데 이 계명을 지켜사는 삶이 바른 삶인데 그것은 삶의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하려 다스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십계명의 정신도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우리의 삶, 우리가 사는 땅을 다스리며 사는 것을 가리킨다.
구약에는 언약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언약궤를 발판삼아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중에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둔 의미이다.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언약궤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보다는 자기 힘으로 왕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언약궤를 가져오고 언약궤를 위한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사모하고 구하였음을 보려준다. 다윗이 지은 수많은 시편이 보여주듯이 그는 상황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감정까지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울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다윗은 진작부터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 기도문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텍스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시는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하나의 작은 이야기에서 더 큰 본질 적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 우주적 역사까지 나선형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첫째가 이집트에서 살았던 역사이고 둘째는 광야에서 역사, 셋째는 가나안 땅의 역사이다. 이집트에서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던 한 번의 구체적 역사이지만 영적으로는 온 세대를 통틀어 죄와 죽음의 노예 노릇을 하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ㅍ 출애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광야의 역사는 여전히 자아가 주인이 되어 방황하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나안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놓으신 후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게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오히려 가나안 땅은 죄가 관영한 곳 가장 어두운 인간의 역사가 있는 곳이었다. 이것에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죄가 관영하여 땅이 토해버릴 만큼 어둡고 지옥같은 땅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된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어느 땅에 머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어느 땅에 머물든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바로 주 기도문이 성취된 것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사는 땅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이다.( 요약자주 : 하나님나라에 대한 매우 탁월한 시각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우리에게 복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천국의 원리를 가르친다. '심량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치는 것이다. 그 중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는 구절은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잘 알려준다. 온유한 자란 성품이 온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 유순한 사람이다. 그 온유한 사람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가 주어진 현실을 다스리며 왕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다른사람도 다스릴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역사는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분노의 다스림을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교훈을 많이 했는데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현실의 땅에 속한 모든 문제를 다스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와 갈등에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그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림으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한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앉히시니'라는 말은 왕의 의자에 함께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사도신경에도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는 고백이 나오는데 이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 보좌에 함께 앉아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지금도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신자들도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시듯이 신자들로 영적으로 그리스도 옆에 앉아서 다스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주어진 삶의 땅을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지금 이곳에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다양한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염려를 감사로, 문제를 기도로 바꾸며 사고를 만나도 절망하지 않고, 상처를 입어도 오히려 치유되며, 주어진 삶의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 하나님께 구한 것이 '듣는 마음'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마음인 것이다. 실제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스림을 받았을 때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것도 채워주신 것을 본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가르치셨는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이것은 주 기도문의 전반부의 기도의 내용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기도하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주 기도문의 후반부에 나오는 기도처럼 삶의 현실에서 왕처럼 다스리며 살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신구약 성경에 흐르는 큰 줄기는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하고 다스림을 받는 만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려 주셔서, 내가 딛고 있는 땅과 역사를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런 기도자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그 사람이 사는 땅에 임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역사가 일어나고 그 역사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확장되는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고 삶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부터 하나님나라가 일어난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잘 깨닫고 이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요약자주: 저자는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고 그 통치가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진리를 잘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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