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하나님나라 복음- 김회권
2014-04-02 21:03:11
서론 하나님나라 복음의 긴급성
저자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망을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나라의 표상을 역사넘어 영원한 곳에 임하는 것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형성되는 (세상에 대한)대안, 대조, 대항 사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세상 질서와 긴장, 충돌을 일으키며 세상을 거룩하게 전복시키고 하나님의 통치 영토를 넓혀가는 공세적이고 세계적인 변혁동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 아래 교회는 기독교 시발후 첫 300년 동안 형성된 공세적인 하나님나라 표상이 흐려졌다고 주장한다. 즉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에게 살아있던 공관복음서의 역동적이고 변혁적인 하나님나라 표상이 권력기관화된 기독교회 이미지 안에서 증발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됫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지 않은채 단언하듯이 말하는 것은 독자의 납득을 얻기 힘들다.
저자는 한국교회에 하나님나라 복음이 실종되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이란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그리스도인은 마침내 온세계가 야웨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게 될 것을 굳게 믿는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하나님이 이 땅과 세상을 직접 다스리신다는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아니라 사람을 통한 간접통치임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나라를 단순히 하나님의 직접통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계시와 다르지 않은가? ]
저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는 인간을 죄와 악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하나님 아들의 순종을 통해 구현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나라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양두정치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다스림을 언급하지 않는 점이 이상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아들 하나님의 이름으 로 함께 다스리는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희생적 사랑과 섬김의 통치로 구현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다스림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섬김으로 구현딘다고 말하는데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는 점이 아쉽다.] 저자는 하나님나라 신학이란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신학이라고 정의하면서 성경에는 오직 하나님나라 신학만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하나님나라 신학의 명제는 다음과 같다고 제시한다.
첫째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이 하나님나라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강제나 억압이 아닌 사랑의 교제와 감복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그 통치가 꼭 감화와 감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순종하는 자에게나 불순종하는 자에게나 모두 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전자에게 구원으로 임한다면 후자에게 심판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순종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한 것은 그리고 결국 그가 범죄하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계획에 미처 예상치 못한 차질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통치가 창조목적이라면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지혜롭지 못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할 때 일어난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은 우리가 신뢰와 순종을 하나님께 드릴 때 경험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 통치위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나 구원이나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인간의 순종과 하나님의 통치간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신뢰와 순종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구현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셋째, 저자는 하나님 통치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현저하게 나타났고 그 절정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구현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100% 구현된 영토요 백성이었고 그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매개하고 구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의 왕이요, 그 나라가 그를 통하여 구현된 중보자로서 증거하지 그 자체를 하나님나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넷째, 저자는 하나님나라는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내주와 성령충만으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하나님나라 신학은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성령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믿는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하 신학은 삼위일체신학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 통치에 편입되는 일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내주가 없는 불신자의 세상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 ] 이어서 저자는 하나님나라 신학은 성령 강림과 성령 내주를 통한 변혁과 갱생을 강조하는 신학인데 이는 성부의 성자파송, 성자의 성부 증언과 순종, 성령의 성자 대리와 증언이 부단한 선순환과 상호침투를 일으키는 과정을 부각시키는 삼위일체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를 충분한 설명 없이 쏟아냄으로써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글 전개를 하는 것이 흠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하나님나라는 동심원적 확장구조를 이루며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나라는 먼저 개인의 인격과 삶에 임하고 그 다음이 인간관계와 가족에 임하고 교회에 임하고 일반 사회와 국가 그리고 온세계와 생태 마침내 우주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출발은 일차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개인은 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하나님나라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
저자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절대선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인도 다스리므로 그들 가운데도 하나님나라 임한다는 말인가?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가운데도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이방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구약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함으로써 인간이 죄와 악 그리고 고난과 죽음으로 부터 해방될 것을 알리는 소식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이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 인자의 도래를 학수고대한 역사라고 말한다. 아담에서 주어진 원시복음의 약속,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인류보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약속, 모세를 통해 주신 출애굽의 약속, 바벨론 포로 회복의 약속 등 인류사와 이스라엘 역사는 멸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개시를 알리는 복음으로 유지되고 존속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통해서 저자는 복음을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저자가 하나님나라 복음을 말하면서 하나님나라와 복음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저자는 이사야서 두군데를 인용하며 구약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죄사함의 복음(사40:1-11)과 하나님 통치의 복음(사52:1-12)이라고 말한다. 죄사함의 복음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죄악과 압제로 점철된 바벨로 감옥에서 복역이 끝이나듯이 인간을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어둠의 세력 곧 죄가 해결된다는 소식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복음이란 죄사함의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더 명시적으로 말하는 곳으로 저자는 다니엘 2장과 7장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두 단락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의 나라를 격파하고 이 땅에 도래한다는 점이라고 말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중 "때가 찼다"는 말은 다니엘서의 맥락에서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100%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이 땅에 임할 하나님나라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100% 순종으로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이 땅에 임한다고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어떻게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입양된 이스라엘의 죄와 죽음 그리고 부활과 갱생의 드라마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부활과 갱생이 필연적이듯이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대속적 죽음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의 부활과 갱생도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만을 대표한 분으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스라엘의 부활에 근거한 것 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저자는 이사야 52:7에 나오는 좋은 소식, 이것이 신약성경의 복음(유앙겔리온)인데 좋은소식의 핵심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의 통치소식이 좋은 소식인가 하면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모든 부당한 통치, 포로살이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대반전, 완전한 자기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하나님나라 통치의 소식은 동시에 회개를 요청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자유가 임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시람을 자유케 하신 후에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통치는 자유를 억압하여 통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주체성을 100% 살리신 후에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 건설에는 긴 시간이 걸리고 심지어 하나님나라 건설이 되지 않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하나님나라가 사람의 자발적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중대한 진리에 대한 저자의 좋은 통찰이 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저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사역을 실존적으로 맛본 사람들만이 하나님나라의 우주적 완성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나라의 현존이 안 느껴지는 것은 성령의 격려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나라의 현존이 느껴지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은닉성과 종말론적 유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너무 영적 개인적차원으로 설명하는 듯 하다.] 저자가 하나님나라에 대해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자유케 하신 후에 통치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자유케 하신후에 통치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케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은 아님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출애굽기 19장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나라임을 입증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100% 반영하고 실행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하면서 마찬가지로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라는 탁견을 제시한다. 저자가 사람이 죄에서 해방되고 속량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이라는 언급은 정당하고 정확한 지적이다. 이점을 다시 강조하여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사람을 지배하던 옛주인을 무력화하고 무장해제 시킨후 구원하신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자유가 곧 순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란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세례에 비견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이스라엘의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 것을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세례를 통하여 옛 자아가 죽고 새 자아로 사는 원리가 여기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옛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새 자아로 부활해야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옛 자아의 죽음이 자동적으로 순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지적해야 겠다.
저자는 이렇게 모세와 예언자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선 구원 후순종의 구조인데 이것이 가진 논리는 첫째 구원받은 사람만이 율법을 지킬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나라에서 율법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율법 순종과 하나님나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아쉽다. 과연 율법준수는 이미 받은 구원을 유지히기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구원은 율법준수 여부에 달린 것인가?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숙고하여야 한다. 물론 저자는 율법이란 구원의 감격속에서 언약을 지키고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백성 다움을 구현하기 위하여 부단한 율법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율법은 이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언약적 삶이라는 것이 율법준수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신자들이 순종해야 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이며 이 뜻에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율법주의라는 반발을 예상하면서 신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는 여전히 삶의 정황에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율법연구를 통해서만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사랑의 계명은 원리적 원론적인 제시일 뿐 그것이 구체화되지 않을 때 추상화 이론화 사변화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서 신자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조문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순종을 드리기 때문에 율법조문의 강요나 명령이 필요없는 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지만 이것 역시 모호하고 비역사적인 설명이 아닐까? 이어서 저자는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시기로 결정하면 하나님도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생각은 이단사상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결정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받은 구원보다 하나님은 더 크고 자유로우시고 의로우시다고 주장하면서 부단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이라는 조건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구원은 영 단번의 경험이지만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기 위하여 매우 긴 훈련의 시간이 필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출애굽 구원은 법적구원과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품성적 구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홍해사건이 법적 구원이라면 광야 생활은 품성적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의 실패와 징계가 구원을 잃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가 전멸한 역사적 사실은 저자가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저자는 로마서7:19-23의 본문은 성령충만을 받기 전에 바울의 내적으로 경험한 투쟁인데 이것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기로 결단한 자의 내적 투쟁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받은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율법준수의 의미를 구원의 유지를 위한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저자는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십계명같은 율법의 준수는 이미 끝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속하신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계명을 지킬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법주의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킨다는 말은 십계명을 위시한 세부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준수에 무능하였고 그래서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젠가 하나님의 율법을 이상적으로 순종할 사람과 그의 시대의 출현을 기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구약성경 중 이스라엘 백성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모든 말은 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순종하는 자가 나온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만방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나라의 잠재태이며 누군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나라가 구현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언약 말씀을 지킬 때 비로서 말씀은 세상을 바꾸고 재구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킬 때만 신자가 창조된 목적이 구현되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나의 순종여부에 달려있으며 언약백성이 율법을 지키려고 분투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고 강조하는데 이 부분은 하나님나라의 본질을 간파한 저자의 탁견이다.
저자는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죄사함과 부단한 율법성취를 통해서 경험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는 시정되어야 한다. 저자는 개인적 차원의 죄사함이 하나님나라로의 이주사건이며 율법순종은 하나님의 통치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신자안에서 벌어지는 두 법, 곧 사망의 법과 성령의 법의 싸움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싸움을 통해서 율법순종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말하면서 신자의 믿음은 당연하고 자명하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인간관계의 엮임속에서, 분투속에서 지켜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라는 확신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기 위하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고난은 옛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과 다른 사람이 받을 죄값을 고난으로 치르는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신자의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은 신자의 고난의 출처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언약적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저자는 하나님나라 신학은 하나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의식이야 말로 하나님나라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성령의 해방사역을 경험한 성도에게만 의미가 있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하나님나라라는 거대담론은 우리 각 개인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맛보지 못하고, 성령의 강력한사역이 임하는 거룩한 교제를 알지 못하며, 성령충만한 교회에서 성령의 바람에 흔들리고 제한되고 고양되어 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동아리는 엄청난 헌신을 하며 그 사람들의 급진적 투신이 모이면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선구원 후순종의 복음인데 이것은 부단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가야 할 부담을 안고 가는 구원이며 파편화된 개인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이룰 과업을 부여받는 구원이고 개인단위로 성령의 감화 감동과 그로 인한 율법 순종을 맛보는 구원이며 이상적인 순종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실체화된 구원이라고 말한다.
다윗과 시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
저자는 모세와 예언자의 메시지는 하나님나라 복음인데 그 첫 번째 메시지는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온 세상에 하나님 통치를 확장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과 그 부대 율법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부단한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여기서 저자는 순종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없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지만 당신의 능력 일부를 억제하셔서 마치 사람의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나라가 건축되지 않는 것처험 보이게 만듦으로서 사람의 순종을 유발하시는 것인데 이런 하나님의 역사 운행 섭리 때문에 인간의 순종은 너무 중요한 모멘텀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은 자유를 위한 속박인데 이는 진리에 속박된 사람만이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나라의 성장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시편은 하나님나라의 역동적 활동상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편의 주제는 단연코 하나님나라이며 시편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나라의 위엄과 영광을 노래하고 장차 나타날 하나남나라의 다양한 면모를 찬양하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진 현실에서 하나님의 통치권능을 다시 보여주기를 구하는 간청과 탄원이라고 말한다. 특히 시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인간의 기도,찬양, 항의, 탄식 ,불평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편에서 현실을 지배하는 세력은 악인이며 악인 때문에 고난 당하는 사람은 부재중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눈에 안보이지만 이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과 망명정부 같은 하나님나라를 믿고 그것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의인이다. 시편에서 부재중인 하나님나라에 속한 의인은 세 가지 경험을 하는 자들이다. 첫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 받고 강한 심판자에 의하여 추격을 당하는 자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고난을 겪는, 상대적으로 죄 없는 자들의 고난이다. 세 번째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범한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자의 경험이다. 이 세 번째 유형의 고난을 당한 자가 바로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이다. 시편은 부재중인 하나님나라, 은닉과 동면 모드로 역사 깊은 곳에 잠적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불러내는 제의를 주장하며 부재중인 하나님나라를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영적 상상력을 북돋아준다.
다윗과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복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처참한 죄로부터 완전히 재활, 복구 시키는 하나님, 인자와 긍휼로 면류관을 되씌우셔서 존엄한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이 우주와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명제가 참임을 입증하려면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증명의 부담이 있다. 하나님의 세계 통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천군천사의 민첩한 순종을 통해 구현되고 매개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나라 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는 통치력을 발휘할 수 없고 세상의 기득권 권력자들에게 밀려난 망명정부에 불과하다.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는 시민이 일정량 확보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신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사상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는데 이 만유통치의 중보적 구현자가 바로 천군천사이다. 하늘에서 구현된 통치를 땅으로 확장시키기 위하여 땅에서도 천군천사급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니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바로 하늘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땅에 확산시키려고 하나님이 택하신 지상의 천군천사였다. 하나님나라 신학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매개하고 구현하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유를 통치하신다는 이 명제를 공증하려면 여호와의 보좌 근처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소화하여 집행하는 천군천사들의 연합적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일부러 천군천사의 도움이 필요하게 만들어 두신 겸손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사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보다 천군천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천군천사들의 각론적 순종을 총적분하여 하나님 당신의 전능하신 통치를 입증하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군천사들의 순종이 모여 하나님의 통치를 100% 구현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으로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은 “사람” 천군천사들을 통하여 당신의 능력, 인자와 자비를 드러내기 원하시며 사람의 기도를 통해, 사람의 순종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다리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매개적 방법으로 즉 천군천사와 인간의 순종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당신의 능력과 자비를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결국 시편은 천군천사급 성도의 순종을 통한 하나님나라 복음을 이야기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천군천사가 반드시 일정 수 존재해야 한다. 성도들은 천사도 흠모하는 전도의 직분과 복음 사역을 위탁받은 지상의 천군천사들이다. 주기도문에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신적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누군가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성도들의 파편적 순종을 통해서 적분되는 전능하심이다. 천군천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말씀을 들어야 하고 납득해야 하며 체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천된다. 이 말씀 순종과 집행이 여호와를 찬미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결론적으로 다윗과 시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천군천사급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 복음이다. 즉 하나님이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신다는 이 명제를 참 명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음송하고 노래로 부르고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기도를 하며 마침내 그것을 육화시키는 성도, 능력이 있어서 말씀을 집행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수납하여 실시하는 도승지급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신학이다. 시편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천군천사들의 탄원합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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