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좁은 의미의 중생인가? -벌콥 중생론을 중심으로
2014-01-12 22:36:30
1. 중생과 회심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중생을 회심을 포함한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로 사용. 17세기에도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않고 상호교환적으로 사용 (웨민고백, 도르트신경, 벨직고백서)
현대로 오면서 중생에서 하나님의 독자적 사역을 강조하기 위하여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기 시작. 왜냐하면 회심에는 인간의 협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을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여 중생을 새로운 생명이 발현되는 하나님의 독자적 사역으로 정의 이것을 논리적으로 더 세분하여 생명이 심겨지는 무의식적 단계와 심겨진 생명이 발현되는 의식적 단계로 구별하고 이 중생의 두 단계 모두 순간적 변화로 규정
comment * 개혁신앙의 전통에서 회심은 중생의 범주에 들어가던 것인데 현대 신학에 와서 중생과 회심을 분리한 것이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독자적 사역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 이런 분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중생론에 반영하려는 신학적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에 관련된 쌍방적 역동성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2. 부르심(internal calling) 과 중생
17세기에는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내적 부르심에 중생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부르심과 중생을 구별하기 시작, 그 이유는 무의식의 단계와 의식의 단계를 구별항려는 것임.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의식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데 중생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독자적 사역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면서 의식의 범주인 부르심과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섬이 생긴 것임 그래서 이미 제한된 의미로 사용한 중생을 논리성을 확보하기 의하여 다음과 같이 더욱 제한된 의미로 세분하게 되었음 중생의 1단계- 창조적말씀을 무의식적 차원에서 생명의 씨가 심겨지고 영적 귀가 주어짐
중생의 2단계- 복음의 말씀으로 의식적 차원에서 1단계에서 심겨진 생명의 씨가 발현되고 부르심을 듣게됨 바로 중생의 2단계가 바로 내적부르심이라 함 왜냐하면 부르심은 의식적인 들음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들을 귀가 심겨지는 1단계의 중생이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기 땨문에 중생의 개념이 더욱 세분하게 됨 그리고 중생의 2단계가 넓은 의미의 중생이 완결된 시점이라고 함. 사실은 2단계도 개혁전통보다 이미 좁아진 의미인데 1단계를 만들면서 넓은 의미가 되어 버린 것임
comment * 중생과 회심을 분리하면서 결국 중생을 2단계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에 이른 것임
그러나 부르심의 의식적 차원을 부르심을 들음으로만 국한시키고 중생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부르심의 의식적 차원에서 본질적 의미인 응답을 배제하였음. 이것은 회심을 중생의 범주에서 분리한
당연한 결과이다.
3. 회심(conversion)
중생과 내적 부르심은 자연스럽게 회심을 산출한다고 함. 그리고 회심은 의식적이고 단회적으로 일어나지만 급작스럽게 혹은 서서히 일어난다고 함 회심은 주로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인간이 협력한다고 표현함 중생시에 심겨진 새 생명의 원리가 회심시에 의식에서 활동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며 일반적을 내적부르심(위에서 중생 2단계)과 회심이 실제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앞에서 말한 2단계 중생과 회심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회심과 중생을 분리한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시도였음을 드러낸다.
comment *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 회심은 하나님의 주된 사역에 인간이 협력하는 것으로 말함.
중생과 회심을 분리한 신학적 의도가 여기에 있는 둣함. 중생과 회심을 분리하지 않았던 16세기, 17세기
전통에서 하나님의 단독사역, 인간의 협력이란 관점은 없었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였음.
결국 회심을 중생의 범주에서 분리함으로써 중생은 순간적인 사건이 되어버림
4. 전체적 소견
벌콥은 여러가지로 복잡하게 표현하지만 그가 정작 말하려는 중생론의 맥락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하나님은 부르신 자에게 들을 귀를 주신다는 것이고 (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서 부르심을 들을 귀가 없으므로) 이것이 중생이라는 것이고 죄인은 하나님이 주신 귀로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데(죄의 회개와 복음을 믿음) 이것이 회심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의 개혁신학이 처음부터 회심을 중생에 범주에서 분리한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도 조화되지 않고 개혁신앙의 전통에도 맞지 않는 신학적 전제였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경과 개혁신앙의 전통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으로 신생이 완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말하였는데 현대의 개혁신학은 중생을 회심과 분리함으로써 부르심과 응답을 분리시킴으로써 단지 부르심을 듣는 것으로 중생이 완결된다는 어색한 중생론을 만든 것이다. 내적소명이 본질과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만일 부르심에 응답이 아니라 단지 듣는 것으로 중생이 완결된다면 회심(회개와 믿음) 전의 중생자는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지 않은 것이고 아직 칭의 전의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회심전의 중생자는 구원받은 자인가 아닌가? 이런 이상한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에서 주어지는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이때 성령의 역사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중생에서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회심을 통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기까지는 아직은 생명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중생이 완결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죽은 자를 살린 것과 같은 중생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이다. 출애굽은 시내산 언약을 위한 수단이었지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출애굽 이후에 광야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음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공적이고 법적인 언약관계가 성립되었다.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대답을 요구하셨고 이스라엘의 대답을 확인한 후에 언약이 체결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양당사자의 쌍방성을 전제로 한다. 물론 시작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지만 반드시 인간편의 응답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협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에 내포된 정당한 요구인 것이디.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과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라서 우리는 회심을 중생의 범주로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회심을 통하여 죄인에게 믿음이 생기고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생명을 누리고 그의 의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시에 완결된다고 말해야 한다. 내적소명, 중생, 회심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용된 용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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