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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

2013-12-24 01:14:06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19)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19. Old and New Terminology

 

이 중요한 일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조사해 보기 전에, 우리는 이 단어들의 용법을 먼저 정의해 보아야 합니다. “중생”이란 단어는 제한된 의미와 더불어서 좀 더 넓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행동으로서 깨어나게 함(quickening)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첫 번째 신적인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것이며, 어둠의 왕국에서 그의 존귀하신 아들의 왕국으로 옮겨놓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 중생은 출발점(starting point)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법 가운데서 태어나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에게로 오셔서, 그의 영혼 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나게 됩니다(born again). 이 변화는 우리들이 죄에 죽어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하늘의 삶을 위해서 다시 태어나게 될 때에 끝나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것이 이 단어의 일반적인 용례였지만, 현재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논의에서 이 제한된 의미를 채용하겠습니다(which we therefore adopt in this discussion). 이 두 용례의 차이에 관해서 정리하자면, 이전에는 은혜의 역사가 일반적으로 영혼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표상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역사 자체는 의식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홀리죠이: 카이퍼가 여기서 분명히 중생이란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정리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 두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린 아이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 직접 보고 겪은 일에 대해서는 아주 어린 유아 때의 일도 기억 못합니다. 만일 어린 시절에 대해서 회상해 보라고 한다면, 높은 의자에 올라앉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시작해서는, 어엿한 소년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아가던 때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들로부터 자기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의 기억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자기 부모와 가족, 그 때와 장소들,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회상하는 것과 남들에게 들어서 회상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동일한 차이점을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로마천주교의 방식을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자기 자신의 회상에서 이끌어 내어 묘사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새 생명이 심겨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무지한 상태에서 단지 엄청난 영적 혼란기를 겪고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서만 기억하다 보니, 중생(regeneration)에서부터 은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죄의 각인과 믿음을 가지게 된 날로부터 날짜를 계산해서 그 이후 성화 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기술은, 다소 부정확한 바가 있어서, 현재의 우리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남용해서 결국 구원의 역사가 처음으로 활동하는 기원이 마치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죄인은, 말씀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그 위협과 약속으로 설득되면서, 회개하고 구세주를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덕적 설득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면서 새 생명의 영광스러운 원천을 희미하게 해 버립니다. 진리를 이렇게 혐오스럽도록 변질시켜버리는 것에 반대하면서, 마코비우스(Maccovius)는 도르트 총회 시절 때부터 이미 중생(regeneration)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러한 다소 비판적인 방법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랐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중생, 오직 그러고 나서 믿음.” 그리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교리의 발전과 일치되는 바였습니다( 홀리죠이: 이런 글을 보면, 카이퍼가 중생 이후에 믿음이라는 공식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계속되는 번역에 관심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주관적인 방법을 포기하게 되면 곧 생명의 첫 번째 심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무슨 일을 시작하셨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그러면 분명해 지는 것은, 회개란 죄의 각인에 뒤따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이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또한 말씀을 듣는 것은 열린 귀가 필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으로 데려오시는 것으로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의식적이면서 비교적 협동적인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하나님의 원래적인 행위가 있고나서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곧 그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첫 번째 원리를 심으시는데, 그 하나님의 행위에 있어서는 이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첫 번째 은혜와 두 번째 은혜를 구분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은혜란 죄인 속에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 곧 그 죄인의 알지도 못하는 중에 일어나는 새 생명의 창조를 일컬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은혜란, 중생된 사람 속에 그가 온전히 인식하면 동의한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역사를 일컬었습니다(홀리죠이: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영문을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This led to the distinction of the first and second grace. The former denoted God's work in the sinner, creating a new life without his knowledge; while the latter denoted the work wrought in regenerated man with his full knowledge and consent. 이런 표현을 보면, 중생한 사람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냐 어쩌냐 하면서 시비를 붙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을 잠시 막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중생하였는데도 아직 회심하지 않는 자, 곧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카이퍼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퍼가 개혁주의신학자가 아니든지,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든지....^^ 이 두 개중의 하나입니다. )

 

첫 번째 은혜는 자연스럽게도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완전하게 일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스코틀랜드신학자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역사를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 fides potentialis)으로 시작하시는데, 그것은 믿음이 실제로 행사되는 것(faith-exercise, fides actualis)과 또한 믿음이 능력으로 행사되는 것(faith-power, fides habitualis)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외현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제가 은혜의 첫 번째 활동을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심겨짐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생명의 새로운 원리”가 심겨짐을 의미하든지, 두 경우 모두 은혜의 역사가 믿음이나 회개 혹은 통회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먼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들을 수 없는 자들이 듣게 되고, 죽은 자들이 깨어나게 된 뒤에 일어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홀리죠이: 왜 이런 구절들이 눈에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구분이 독일관념론의 영향일까요? 오, 주여!)

 

서로 다른 단계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전체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연속적인 단계들(successive stages)이나 이정표들을 주목해 봅시다.

 

1.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는 것은 보통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불리는데,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이 심겨지는 단계입니다. 이 신적인 행위는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속에서 작용합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예에서 모태에서조차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나 다른 심오한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우리들은 어릴 때에 죽은 유아들의 구원문제로 하여금 이런 하나님의 행위는 아주 어릴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2. 심겨진 생명의 원리를 보호하는 것. 이 단계에서는, 죄인의 의식에 관한 한,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 생명의 원리를 받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실제 회심하기 전에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잃어버린바 된 사람들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초기에 이들은 때론 거룩한 기질이나 놀라울 정도의 일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의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보배들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습니다. 새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수여받은 사람에 의해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수여자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 묻어 있는 씨앗과도 같고, 재 밑에 숨어있는 불꽃과도 같습니다. 나무를 태우는 것은 아니지만 불길이 있기는 합니다. 지하에 숨어 흐르다가 마침내는 지표면으로 터져 나오는 지하수와도 같습니다.

 

3. 말씀과 성령에 의한 내적이고 외적인 부르심.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행위인데, 보통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것은 귀먹은 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들을 귀가 생겨난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죽은 자가 아니고 죽은 상태에서 깨어나 있지만, 여전히 누워서 뒹굴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일어나는데,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만 아니라 믿음 자체, 곧 그 능력이 발휘되고 행사되는 것도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그것 자체로서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가 없고, 숨 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성령의 내적 역사하심은 신적이며 또한 상호 일치되는 작용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을 활성화시켜서 그 부르심이 효과적이 되고, 마침내 (죽었다가 살아났지만)잠자고 있던 사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4.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죄의 확신(conviction of sin)과 칭의를 낳습니다. 이것들은 믿음의 동일한 행사의 다른 두 면입니다. 이 일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다시금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주관적으로, 죄의 확신과 마음의 깨어짐이 먼저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잃어버린바 된 상태를 깨닫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의 용감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계속되는 매 행위에 의해서 그는 더욱 깊이 자신의 비참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고, 자신의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으로부터 더욱 넘치도록 받게 됩니다.

 

죄의 확신이 믿음보다 앞서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느냐와 관계없이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는 믿는다.”고 할 수 있을 때, 그는 동시에 완전히 잃어버린바 되었었고, 또한 완전히 구원함을 받은 자, 곧 주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이러한 믿음의 행사가 회심에서 일어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그 심겨졌던 생명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믿는다고 말하며 느끼면서도 언제 믿기 시작하였는지 회상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시면, 당장에 믿음은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When a man says and feels 'I believe', and does not recall it, but God confirms it, faith is at once followed by conversion). 새 생명의 심겨짐은 믿음의 첫 번째 행위 이전에 일어나지만, 회심은 그 다음에 오게 됩니다. 회심이란, 죄인이 자신의 잃은바 된 상태를 보게 되었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에 따라서 행동하게 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에서야 옛사람이 죽기 시작하고, 새사람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이것이야말로 실제의 회심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원리상 사람은 단 한 번 회심하게 됩니다. 곧 임마누엘 되시는 분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그 순간 말입니다. 그 후에는 날마다 자신을 변화시키며, 때로는 자신의 뜻과 성령의 뜻 사이에 오는 갈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인간의 활동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 주여 나를 돌이키소서! 내가 돌이키겠나이다. 하지만, 중생에서 그리고 믿음의 첫 번째 행사에서 그는 수동적이지만, 회심 시에는 은혜가 그로 하여금 능동적이 되게 합니다. 회심되면서 또한 회심하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치가 못합니다.

 

6. 성화....

 

7. 영화...

 

이것은 어떻게 은혜의 작동이 하나의 체인처럼 서로 연결되어서 함께 돌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은혜의 역사는 죽은 자를 깨우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번 심겨지게 되면, 조용히 꾸물거리고 있는 생명이 부르심에 의해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깨어나게 되면, 자신을 새로운 생명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서 자신이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어서는 새로운 그 생명이 회심에 이르게 합니다. 회심은 성화로 흘러갑니다. 성화는 죄를 섬기던 삶을 죽음에 넘기게 되면서 그 쐐깃돌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영화가 전 인격 속에서 신적인 은혜의 역사가 완결시킵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계속되는 것이 이전에 진행되던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했으면서도 일찍 죽은 유아들은 죽을 때에 죄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마치 흰머리를 갖고 사반세기를 산 분과 똑같이 말입니다. 두 번째 그리고 나머지까지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 첫 번째는 없습니다. 첫 번째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전체 역사는 하늘을 위해서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단계들은 측량기사에게 좌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계들에 대한 지식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억압시키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숨쉬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실은 가장 건강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런 단계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중생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도 연중론은 깊이 공감합니다: 홀리죠이).

 

성경이 이러한 옛날의 용어에 대한 단계들의 배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답으로 제공할 수 있겠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see) 수 없느니라";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중생으로부터 은혜의 모든 작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셨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이요, 그러고는 생명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20)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20. Its Course

 

앞장에서부터 예비적인 은혜는 사람들마다 다르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인생의 초기에 중생되어지는 많은 사람들과 더욱 나이가 들어서 거듭나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 아니라, 화란개혁교회의 상황에서 볼 때는 어린 시절에 거듭나게 된 사람들의 숫자가 많고, 성인이 되어서 거듭나게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콥의 조직신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시각인데, 아직도 20~30퍼센트의 인구가 교회에 출석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는 달리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

.....

 

 그리고 이것은 예비적 은혜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짓습니다. 그래서 이젠 중생 그 자체에 대해서 논의하겠습니다. 우리는 중생으로부터 흘러나와서 회심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은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을 예비적 은혜라고 한다면 부적절합니다(We might speak of the grace that flows from regeneration and prepares the way for conversion, but this would improperly be called preparatory grace, 홀리죠이: 이 문제는 아래 댓글에서 로빈슨크로소님이 질문한 것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는 카이퍼의 말인군요^^ 계속되는 카이퍼의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중생한 영혼이면서 여전히 꾸물정거리는 생명을 깨어나게 (해서 회심에 이르게)하는 모든 것은 예비적 은혜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해당됩니다. 그러한 의미로 그 단어(홀리죠이: 예비적 은혜)를 사용하는 것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저주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권장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요약해 봅시다. 육체적 생명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결합이 해체될 때 육체에는 죽음이 옵니다. 육체와 영혼이 재결합되어질 때에만 이 죽음이 폐지됩니다. 영적인 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생명은 영혼과 성령의 생명적 원리가 서로 결합할 때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런 결합을 무효화시켜버리게 되면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은 그 영혼과 성령의 생명적 원리를 재결합시키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 전에는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이런 재결합을 앞서는 그 어떤 것도 모두 예비적 은혜입니다. 그 재결합이 있게 하는 것인 첫 번째 은혜, 곧 역사하는 은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예비적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결합을 효력 있게 하도록 역사하기 시작하실 때, 예비적 은혜는 종료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성령의 예비적 은혜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21)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21. Regeneration the Work of God

 

“듣는 귀와 보는 눈, 그 모두를 주께서 만드시는도다”-잠언20:12

 

“듣는 귀와 보는 눈, 그 모두를 주님께서 만드시는도다.” 성령께서 이렇게 증거하시는 것은, 중생의 모든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홀리죠이: 이 절과 이어지는 다음 절을 특별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순중론자들이 얼마나 카이퍼를 읽어보아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귀와 눈이 멀었습니다. 단지 막대기나 돌멩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한 지경에 있습니다. 돌멩이나 막대기는 부패하거나 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전적으로 죽어있고 가장 가공할 만한 파멸의 희생물입니다.

 

이 중생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이러한 엄격하고 타협불가한 절대적 고백이 우리들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떤 방식이로든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제 몫(사자의 몫)을 차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들마다 죄의 본질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의심할 바 없이, 죄는 아주 나쁜 것이다. 공포스럽고 두려울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서 선한 것이 남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고결하고 덕이 있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을 수 없다. 아주 악마같은 사람들, 감옥에 갇혀 있는 흉악범들, 강도들이나 살인자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있는 존경스러운 신사들과 숙녀들, 사랑스러운 소년들과 소녀들, 매력적인 아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이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기 이웃들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전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경외심을 드리고자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애매모호한 점도 없도록 합시다! 불쾌한 진리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런 방법이 상냥한 사람들 가운데서 현재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이런 것을 인정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는, 앞으로 계속해서 고백하는 바가 되겠지만, 본질상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누워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에 더욱 합당한 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손상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인이 단지 돌멩이나 나뭇가지밖에 안된다는 식의 주장은 반대합니다. 인간으로서 그는 전혀 손상된 것이 없고, 그의 존재는 이전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의 본성은 부패하였고, 그의 부패한 본성 가운데서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를 일상적인 질병으로 죽은 어떤 사람의 몸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몸은 인간 유기체의 모든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눈이 그 눈을 움직이게 하는 근육과 함께 있습니다. 귀는 그 안에 있는 모든 들을 수 있게 하는 기관들과 더불어 있습니다. 사후시신검사를 해 보게 되면 심장, 신장, 간장 등 모든 기관들이 완벽하게 정상적입니다. 죽은 시신은 얼마간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이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잖아”라고 말할 뻔 하게도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본성은 죽음의 부패성을 갖고서 부패해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바로 죄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는 이전 그대로 온전합니다. 인간의 몸이 지니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본성은 부패해 있습니다. 너무나도 부패해 있어서 죽어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아니라, 실제로 죽은 것입니다. “죽었다”는 용어로 의미할 수 있는 모든 의미에 있어서 그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없으면 죄인은 전적으로 무익합니다. 만일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귀라면 무슨 소용이 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하면 그 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십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님께서 모두 만드셨도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 듣지 못하는 귀와 보지 못하는 눈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백하기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어떤 작용도 제일 먼저 죄인을 깨어나게 하는 것, 곧 보지 못하는 눈을 보게 하고, 듣지 못하는 귀를 듣도록 고쳐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 이것을 간단히 말해서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the faculty of faith)이 심겨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속에 있는 사람이 그의 눈을 열자마자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머리카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둠의 왕국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지게 됩니다. 여기서 “옮겨진다.”는 것은, 실제로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고, 장소가 실제로 변화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생명이 죽은 자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며, 그래서 보지 못하였던 자가 이제는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이런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기본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니, 그 이후의 넓은 의미의 중생에 대해서도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

 

(홀리죠이: 다음 대목은 우리가 카이퍼의 중생론을 '가정적 중생론'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인해줍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무척 바쁜데, 이 대목이라도 반드시 저녁까지는 번역해 놓겠습니다, 오, 주여, 우리의 편견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이 놀라운 중생의 역사는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유아들과 성인들 속에서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유아들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이 은혜의 역사가 유아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성인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만,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성인들 속에서의 은혜의 역사를 관찰할 때에는 회심과 중생이 너무나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 두 개를 구분해 낸다는 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무의식적인 유아들의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자벳의 아들 요한의 경우에서처럼 말입니다. 이런 유아의 경우에는 혼동이 일어날 의식적 활동이란 것이 없습니다. 중생이 순수하고 뒤섞이지 않은 채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 속에서 일어나는 중생과 회심 사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과 같이 여전히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경우에는 단지 수동성 이외의 다른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태아가 무언가를 경험하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가 그에게 행하여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지만, 자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협력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에 있어서 사람은 중생을 일으키는 자(worker)도 아니요 협력자(coworker)도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수동적일 뿐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홀로 일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역사는 단지 중생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이 철저하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이런 말을 바로 이 문단만 들으면, 중생은 하나님께서만 역사하시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중생이 바로 “좁은 의미의 중생”임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이 넓은 의미의 중생, 곧 회심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카이퍼가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인이 여전히 허물과 죄로 죽어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그 안에서 시작되기 전에도 그는 이미 선택되고 예정되었고, 의롭게 되고, 성화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또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 가운데서 바울사도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던 바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물론 중생한 사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존재하기도 전에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기쁨 가운데서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며,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새 출생에 앞서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의롭다 하심조차도 새 출생에 앞서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식 속에 있는 영원한 작정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우리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이뤄지는 때에 우리들의 의식 바깥에서 이뤄진 일들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에 우리의 의식에 계시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들이 이미 존재하였던 것이며 준비되어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생시키시는 죽은 죄인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미 사랑스럽고, 선택된 자이며, 의롭게 되어 있고, 이미 입양된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만을 깨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하시지, 의로운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지, 의로운 사람을 불러서 회개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은 우리들 자신의 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에 그렇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전히 중생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이 의롭다는 것조차도 못 느낍니다(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의롭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선택을 믿지도 않는다고, 슬프게도, 때론 말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이루시는 일들 자체를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식의 심판대 앞에서 그렇게 하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의 최고심판대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그것을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믿기도 훨씬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는 의롭다고 판단 받았는데,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 것을 느끼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신비, 곧 왜 어떤 사람은 구원에 이르도록, 다른 사람은 멸망에 이르도록 버려둠을 당하는가 하는 것에 우리 중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신비가 아무리 놀랍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생에 있어서는 그런 신비에 우리는 직면하지 않습니다(홀리죠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카이퍼와는 달리 한국의 많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이나 연중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중생이 신비이기 때문에 이것을 파고드는 연중론을 알미니안주의니,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니 왜곡비평하고 있는 것은 실로 카이퍼를 모르는 비극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중생시키시고 다른 사람은 안 시키는 것은, 고정된 불편의 법칙을 따라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사람들을 중생시키시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나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행위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irresistable). 어느 누구도 “나는 거듭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거나 그 역사에 거치는 것을 놓는다거나 그 중생이 일어나기에 힘들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로운 역사를 당신 자신의 방식으로 효력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신실하게 당신의 택한 자들을 보존하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힘을 다해서라도 그들 중의 한 명이라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들과 귀신들이 힘을 합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 택한 자들 중의 한 명을 하나님 당신의 구원하시는 능력으로부터 훔쳐가려고 해도 그것은 헛된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거미줄을 한 숨에 걷어 내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모여 소동하는 모든 것들을 보고 웃으십니다. 강력한 전동장치를 구비한 전기송곳으로 강철판을 꿰뚫는 것보다도 더욱 소음도 없이 그러면서도 별 노력도 하지 않는 듯이 위엄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렇게 하시고 싶어 하는 누구라도 그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셔서 선택하신 자들의 본성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늘의 천체에 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 곧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 별처럼 빛나는 창공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능력의 장엄하심 때문에, 한 명도 버림받지 않게 됩니다.” 영생으로 예정되어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에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이런 구절들도 주의해서 보면, 좁은 중생을 나타내는 것이지 넓은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이라는 말을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의 역사가 도덕적인 역사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곧, 조언이나 권면을 수단으로 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생의 넓은 의미, 곧 회심까지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예를 든다면, 도르트 신조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의 의미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중생은 영혼 속에 일어나는 도덕적 활동이 아닙니다(홀리죠이: 어떤 이들은 연속적 중생론이 이런 도덕적 활동으로서의 노력과 애씀을 강조하는 것처럼 폄하, 왜곡, 호도하고 있는데, 만일 연속적 중생론을 그렇게 보려면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르트신조까지도 그렇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연중론은 도르트신조와도 일치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중생은, 죄인의 의지가 부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교훈이나 지시사항 몇 개 정도 주어서 그것들 중에 하나를 올바르게 선택하여 될 수 있는 정도, 곧 지식의 부족이나 오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조언이나 충고 같은 것은 사가랴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신자된 부모들의 수천의 유아들에 대해서 도르트 신경이 올바르게 고백하고 있는데, 그들은 주 안에서 죽은 자, 곧 중생한 자로 가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이것을 ‘가정적 중생론’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을 너무나도 몰라서 하는 일입니다. 카이퍼의 중생론이 ‘가정적 중생론’이 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논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유아세례의 “근거”로서 중생한 자로 가정한다는 논리 때문입니다. 정통개혁교회에서는 언약에 근거해서 유아세례를 베풀었는데, 카이퍼는 유아의 중생을 가정해서 베풀 수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를 구분해서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의 죽은 유아들의 중생을 가정하는 것은 개혁신학에 일치되는 바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중생하기는 하였지만 훗날 회심에 이르게 되는 자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중생하기는 하였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개념이 나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하였지만 넓은 의미의 중생, 곧 회심은 하지 않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을 ‘신자’니 아니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카이퍼를 몰라도 너무나도 모르는 짓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로, 유아들에게 일어나는 중생(그 좁은 의미에 있어서)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인들의 경우는 회심을 포함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다음의 추론은 반박될 수 없습니다.

 

1. 모든 사람은, 유아들을 포함해서, 허물과 죄로 태어납니다.

 

2. 이들 중에 많은 유아들이 의식적인 자각을 하기 이전에 죽게 됩니다.

 

3. 이들 중에서 많은 유아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임을 교회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4. 죄 중에 죽어있었기 때문에, 중생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5.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려면 그들이 중생했다고 해야 합니다. 자의식을 가지지 않은 자들 가운데서도 중생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반박 불가능한 진술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본질과 성격은 여전히 자의식이 없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중생을 고찰할 때에 가장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전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알지 못하고 있어서 어떤 개념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고 선포되는 복음에 대해서 들은 적도 없고, 그래서, 교훈이나 경고, 권면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영향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중생이란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행위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마치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영혼이 어머니와는 전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창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전에 지식이 전혀 없는 중에라도 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중생시키는 것입니다.

 

그 중생의 행위가 무엇으로 구성되고 있느냐는 것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시길,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것처럼 성령으로 나는 이도 그러하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비를 최상의 신중함으로 조사하는 것이 요구됩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카이퍼는 중생이 신비이기 때문에, 조사하는 것을 전혀 금지시키고 있지 않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최상의 신중함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중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중생의 신비를 정도 이상으로 파헤치는 것으로 연중론을 곡해시킵니다. 계시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계시 그대로의 신비를 이해하자는 것이 연중론의 입장입니다. 이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카이퍼는 여전히 연중론편입니다). 자연의 왕국에서조차 생명과 그 기원의 신비는 거의 우리들의 지식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가장 학식이 풍부한 의사라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서 거의 무지합니다. 단지 존재하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홀리죠이: 생성의 신비 자체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연중론은, 바로 이 발전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앞서는 그 생명의 주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가장 무지한 시골뜨기 소년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는 파헤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관찰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합니다. 단지 그 생명이 존재하고 난 뒤에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들의 두 번째 출생의 신비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의미로 적용됩니다. 생체사후검사는 태아와 그것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이런 일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생명이 존재하고 나서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이것조차도 확실한 것은 아니고 또한 불확정적입니다. 얼마나 많은 옛 본성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가를 어떤 확실한 기준으로 이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위선이 있는 것일까요? 설명되지 않는 상태는 없을까요?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방해물은 없는 것일까요? 이 점에 있어서 경험이란 그래서 소용이 없습니다. 순수하고 단순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것의 발전만을 계시하는 것이지,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그 기원에 대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이 주제에 대한 유일한 진리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그 신비는 계시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려져 있습니다. 적합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중생에 효력을 미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감할 수 있다면, 그것을 촉진시키거나 아니면 방해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충분히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 속한 것으로 남겨두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첫 번째 창조(곧 육체의 출생)의 신비 그 이상의 것을 해결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영혼의 창조의 신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22)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21. The Work of Regeneration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앞 장에서 우리는 중생이란 하나님의 실제 활동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사람은 이전의 교회의 고백을 따라서 말하자면, 전적으로 수동적이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외경심을 품고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들에게 감춰져 있어야 할 너무 깊은 것을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제거하고 또한 우리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생은 성례에 의해서 의전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전을 통해서 죄인의 무능력이 제거되고, 하나님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대항하느냐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주의자들이 이렇게 주장합니다(홀리죠이: 어떤 사람들은 연중론을 비판하면서 연중론을 주장하는 것이 이런 류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나 알미니안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터무니없는 비난입니다. 이 점을 카이퍼가 지적하면서도 아랫 글에서 어떻게 죽었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능력이 주어지는데에 대해서 설명하는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연중론을 곡해하는 분들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1)중생은 이해하는 바를 단순히 인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2)기질이나 성향이 간단히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원치 않는 의지를 작동시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일치시키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홀리죠이: 카이퍼의 이런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같은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속 설명이 됩니다).

 

3)중생은 자아(에고)의 변화도 아니면, 4)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자아(에고)가 전혀 혼란을 겪지 않고 성격도 변화되지 않으며 단순히 악한 자아(에고)가 그리스도의 의의 빛과 그 반사 가운데에 놓이게 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중생이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의 두 오류는 처음의 두 오류처럼 단호하게 반박되고 또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중생하면서 사람이 다른 자아(에고)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곧, 우리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변화되거나 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한 자아(에고)입니다. 동일한 인격(person)이고, 동일한 인간인 것입니다. 죄가 비록 엄청나게 사람을 부패시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는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사람됨에 있어서는 모자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구성요소들, 곧 다른 존재와 구분시켜주는 그 모든 것이 죄인 속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부패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한 것은 그 인간의 본성(nature)입니다.

 

본성과 존재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증기엔진으로 비유하자면, 존재는 엔진 그 자체를 말하고, 그 본성은 증기가 실린더 속에 들어가게 되자마자 나타나는 그 활동(actio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존재란 그를 인간으로 만드는 그 무엇을 말하고, 본성은 그의 존재의 성격을 드러나게 하는 그 무엇을 말합니다.

 

죄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파괴시켜 버린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존재, 그의 자아(에고), 그의 인성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깊이 부패했다는 것은 단지 그의 본성에만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 곧 회복이라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회복이 새로운 출생에 의해서 효력을 갖게 됩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심겨짐이 아니라 발현을 나타내는 ‘새로운 출생’을 카이퍼가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심겨짐’에만 국한시켜서 중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견고하게 유지되게 하십시오. 중생에 있어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 자아, 혹은 인성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재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최상으로 만족스럽게 중생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은 접붙이기(grafting)라는 흥미로운 원예방식으로 제공됩니다. 좋은 포도나무의 갓 나온 가지를 야생포도에 성공적으로 접붙이게 되면 그 야생포도나무는 좋은 포도나무가 됩니다. 이러한 기술이 모든 과일 맺는 나무와 꽃식물에 적용됩니다. 좋은 것들이 야생적인 것들에 접붙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야생의 것은 결코 좋은 것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야생의 배와 장미는 발육저하상태에 머물러 있고, 꽃이나 열매가 나와도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원사로 하여금 아주 좋은 향기 나는 배나무의 가지를 야생의 배에 접붙여보게 하십시오. 아름다운 재스민 향내의 장미를 야생장미에 접붙이게 해 보십시오. 배나무는 과즙이 풍부한 배를, 장미는 참으로 놀라운 장미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접붙임의 기적은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이롭게 여겨졌습니다. 사실 그것은 경이롭습니다. 접붙여지는 나무 몸통은 완전히 야생적인 것입니다. 야생 그대로의 뿌리로 땅속의 물기를 빨아들이고, 그 물기를 그 야생의 세포들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하지만 그 조그만 접붙여진 가지는 그 물기와 극적인 힘을 유익한 그 무엇으로 전환시켜 야생의 것이 좋은 열매와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야생의 나무 몸통이 그 본성의 혁신(the reformation of its nature)을 그 접붙인 곳의 아래에 있는 가지로 말미암아 강력하게 저항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야생의 본성이 강력하게 스스로를 주장하여 그 물기가 가지 끝으로 이르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야생의 가지의 저항력을 약화되게 하면서 그 물기가 가지 끝에 이르게 되고 그럼으로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될 수 있습니다. 야생의 나무 몸통의 야생의 힘을 자꾸 약화시키게 되면, 접붙임은 점점 그 몸통의 뿌리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젠 그 몸통이 이전에 야생이었는가 하는 점조차도 잊어버리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처음에는 아무런 차이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접붙여놓은 것만 보일 뿐입니다. 똑같은 보금자리에 눕혀 있는 쌍둥이가 한 명은 중생했고 한 명은 중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도 관찰하기가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중생한 아기가 중생하지 않은 아기보다 그 기질상 더 못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정확하게도 똑같습니다. 둘 다 동일한 야생의 나무 몸통에서 뻗어 나온 것입니다. 가지 자르는 칼이나 현미경도 조금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아이에게 행하신 일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분명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중생의 씨가 물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류는 죄의 문제에 있어서 이단인 마니교도들의 주장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마니교도들은 죄를 하나의 미생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관점은 중생의 씨앗을 일종의 지각할 수 있는 생명과 거룩의 세포 정도로 여기게 합니다.

 

중생의 씨앗은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 존재 안에 두 명의 사람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 이전과 이후에 오직 한 사람, 하나의 자아(에고), 하나의 인성만 존재할 뿐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곧 중생 이전에는 옛사람이요, 중생 이후에는 새사람인 것입니다. 완전한 의와 거룩으로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태어난 자들은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씨앗은 그 분 안에 머뭅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홀리죠이: 이 글만 보면 카이퍼가 중생을 말하되 ‘넓은 의미의 중생’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보면 카이퍼가 의미하는 바는 ‘좁은 의미의 중생’인 것이 분명해집니다. 이런 맥락을 살피지 않고, 중생을 헷갈리는 박사들이 많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자아(에고)나 인성(personality)의 본성은 진정으로 변화하는데, 새로운 본성이 원리상으로 넣어지는 방식으로 변화합니다. 실제적으로 여전히 옛 본성을 통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홀리죠이: 보라, 보라, 보라!). 접붙여진 나무는 두 개의 나무가 아닙니다. 단 하나의 나무입니다. 접붙여지기 전에는 야생의 장미였습니다. 접붙여진 후에는 개선된 것입니다. 새로운 본성은 그 물기를 옛 본성을 통해서 빨아들여야 합니다. 접붙여졌다는 사실 외에는 그 나무 몸통은 여전히 야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 이전과 같이 중생 이후에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적인 씨앗의 바깥에 있는 자들로서 간주하는 한, 우리는 죽음의 한 가운데 여전히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잘못된 견해를 피하기 위해서 또 다른 반대편 잘못으로 뛰어드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한 몸통 속에 붙어 있는 쌍둥이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중생 이전과 이후의 자아(에고)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중생해도 사람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죄인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고 단지 그를 외래적인 의의 영역(the sphere of extraneous righteousness)으로 옮겨졌을 뿐이라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카이퍼의 이 놀라운 통찰!).

 

야생의 나무 몸통을 전혀 다르게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진 그 접붙여진 나뭇가지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가장 전문적인 식물학자라 하더라도 이런 능력을 갖춘 섬유질이나 액체를 발견해 낼 수 없습니다. 단지 아는 것은, 모든 나뭇가지가 그 나름대로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의 형성적인 능력으로 다른 나뭇가지나 나무에 동일한 본성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런 사실이 바로 중생의 역사에 적용됩니다. 우리의 존재, 자아(에고), 인성의 가운데에서, 우리의 본성, 기질, 존재의 양상, 그리고 존재함이, 그 인상과 형태, 성격, 그리고 영적인 성질을 우리들의 삶과 활동과 대화에 분여하면서(imparting) 우리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전통제적인 중심은 본성상 죄로 넘치고 사악합니다. 그 가장 좋은 형태들 속에서조차도 의롭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의지적으로든 의지하지 않든지 우리는 우리들의 존재, 활동, 대화에 우리들의 그 의롭지 않은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와 성장에 따라서 자아(에고)의 이러한 본성이 우리의 존재의 대리석을 사악하고 죄로 가득 찬 인간의 형상으로 다듬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성 속에 포함되어 그 본성을 보여주는 형상대로 말입니다. 중생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이 전통제적인 중심에 하나의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 본성, 이 형성적인 힘을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존재와 활동, 언어생활은 전혀 다른 계명, 생명의 법칙과 통치에 의해서 지배됩니다. 이 새로운 형성적 힘이 우리들 속에 다른 인간, 새롭고도 거룩한 인간, 곧 의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를 조형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5월에 접붙여진 나무는 한 달 내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지낼 수 있습니다. 그 본성상의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활동이 일어나기만 하면 그것은 새로운 본성, 접붙여진 그 본성을 따라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But this change is not completed at once. The tree grafted in March may remain inactive during that entire month, because there is as yet no working in its nature. But this is sure: as soon as there is any action it will be according to the new, engrafted nature. )

 

중생에서도 그렇습니다. 새롭게 접붙여진 생명이 오랫동안 잠재된 채로 있습니다. 땅속에 묻혀있는 뿌려진 곡식씨앗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그 새 생명의 본성을 따라서 생명이 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새사람의 생명의 배아를 심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새사람의 모든 완전한 것이 잠재된 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곡식 낟알에서 곡식의 모든 것이 나오는 것처럼 그 생명의 배아에서 새사람의 모든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우리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서, 개혁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중생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획을 다음과 같은 단계로 제시하였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1) 당신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새사람을 계획하셨습니다. (2) 특별한 사람에 따라서 조정하시면서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3) 우리의 존재의 중심 속에 이 새사람의 배아를 심으십니다. (4)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와 이 배아적인 생명이 결합되도록 효력있게 하십니다. (5) 이 결정적인 생명의 배아 속에 하나님께서는 형성적인 능력을 부여하시고, 당신의 정하신 때에 그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자아는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됩니다.

 

(홀리죠이: 카이퍼는 자신의 설명이 개혁교회에서 계속 지지되어 왔었던 것을 마지막에 정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중론의 주장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연중론이 개혁주의신학과는 다르다는 비판을 하는 것일까요? 4-23에서 제시하는 카이퍼의 설명을 들으면, 그런 사람들은 더욱 입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23)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23. Regeneration and Faith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1:23)

 중생에 대해서 앞에서 설명된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홀리죠이: 카이퍼의 중생론에 대한 예상되는 반대에 대해서 반박하는 여기에서 연중론과 어떻게 카이퍼의 중생론이 연결되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대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상징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상적으로만 살펴보면 우리들이 금방 살펴보았던 중생에 대한 설명 그 자체를 수정하는 것처럼 보이는게 분명합니다. (홀리죠이: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이 앞의 설명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학한다는 분들도 말이지요. 제법 자신들은 똑똑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레 미제라블~). 이 장에서 설명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중생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대사들을 통해서 말씀이 가르쳐지게 하십니다. 이 선포에 의해서 부르심(the call)이 그들에게 이르게 됩니다. 그들 중에 택함 받은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은혜의 때(time of love)가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부르심과 더불어서 내적인 부르심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카이퍼는 분명히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하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중생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도자의 중요함이 드러나게 되고, 또한 이미 좁은 의미의 중생을 받은 자가 넓은 중생에 이르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도 동일한 의미의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바울이 거룩한 세례에 대해서 “중생”의 씻음이라고 한 것과 완전히 조화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회심하게 된 직후에 곧장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들의 선조들은 고백서(24항)에서 “우리는 이 참된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 속에 생기게 되는데, 이 믿음으로 사람을 중생케 되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이델베르그문답(65)에서도 가르칩니다.: “이런 믿음은 복음의 가르침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데, 그러한 사실을 성례를 통해서 확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도르트신경 3장과 4장의 17항에 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하심에 따라서 이러한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을 연장하시고 또한 지속시키시는데, 방편의 사용을 배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용하셔서 무한하신 자비와 선하심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시도록 선택하신 꼭 그것처럼, 앞서 언급했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우리들이 중생되어질 때 복음의 사용을 결코 배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중생의 씨앗과 영혼의 양식이 되도록 제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들과 그들을 잇는 교사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에 대하여 사람들을 교육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고 모든 교만함을 버리도록 하는 동안 결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다스림 속에 있는 복음의 거룩한 훈령들을 무시하지 않게 한 꼭 그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중에 밀접하게 결합시켜두신 것을 분리시켜서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교훈들의 방편을 사용하여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우리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이러한 복이 더욱 놀랍도록 자주 우리들 속에서 역사하며, 더욱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진전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우리가 반대하고 있다는 의심을 모두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우리는 이 견해에 가장 깊은 공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단지 이런 입장표명에 있어서 성경과 믿음의 상징들(신조들)은 언제나 그 신비스러운 배경, 중생의 배후에 있는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그 신비가 없이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그 헤아려보는 것이 불가능한 신비를 가리킨다는 점을 고려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도르트신조는 이 신비스러운, 헤아려 볼 수 없는, 그리고 놀라운 배경을 가장 정교하게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제 3장과 4장의 12항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서 그렇게 최상으로 경축하면서 새로운 창조라고 명명하고 있는 중생입니다; 죽은 자에게서 부활하는 것이요, 살아나게 하는 것이며, 우리들의 협력이 전혀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외적인 복음의 가르침에 의해서 효력이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설득이나, 하나님께서 부분적으로 역할을 담당하지만 중생하게 되거나 회심하게 되는 것, 그리고 중생하지 않거나 회심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힘에 달리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분명하게도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가장 능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놀라우며, 경이롭고, 신비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저자가 되시는 분에 의해서 영감된 성경대로 창조나 죽은 자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보다 효과에 있어서 결코 모자라지 않은 것이어서, 이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도, 오류가 없도록, 그리고 효과적으로 중생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적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새롭게 된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영향을 입은 것만 아니라, 이러한 결과로서 실제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스스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받은 은혜에 의해서, 믿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2항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자들 속에서 당신의 선하신 기쁨을 성취하실 때, 혹은 그들 속에 참된 회심을 일으키실 때, 복음이 외적으로 그들에게 선포될 수 있게 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성령으로 강력하게 조명하셔서 그들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그 동일하신 중생케 하시는 영의 효력 있는 활동에 의해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속에 침투해 들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닫혔던 문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 받지 못했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십니다. 그 의지 속에 새로운 성질을 불어넣으셔서 지금까지는 죽어있었지만 살아나게 하십니다. 악하고 불복종하며 움츠려들기만 하던 의지를 선하게 하시고, 복종하게 하시고, 쉽게 순종하게 만드십니다. 움직이게 하시고 강하게 하셔서 좋은 나무와 같이 선한 행실의 열매들을 낳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하이델베르그문답은 8문답에서 이것을 다룹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는 것 외에는” 또한 (벨직)고백서 22항에서는, “우리는 이 위대한 신비의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올곧은 믿음을 불러일으키셔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공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함을 믿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도르트에서 “중생케 하시는 영의 효력에 의해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하나님께서 침투하심”(His pervading the inmost recesses of man by the efficacy of the regenerating Spirit)라고 불렀던 이 신비로운 배경은, 우리가 “새로운 생명의 배아를 심기 위하여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가시는 신적인 작용”(the divine operation which penetrates the center of our being to implant the germ of the new life)이라고 부르는 것과 분명하게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비스러운 활동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초한 보편적인 고백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작용하는 성령님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질문이 생깁니다. 이 중생하시는 행위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앞서느냐 아니면 동시에 일어나느냐, 그것도 아니라면 뒤따르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잘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외면상으로는 불일치되는 것 같은 것에 대하여 해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일을 죄인들의 마음속에 말씀의 선포 이전에, 병행해서 혹은 그 후에 행하십니다. 내적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과 연합되어질 수 있고, 혹은 외적인 부르심 그 이후에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부르심에 앞서는 것, 곧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주어서 듣게 해주는 것에 앞서는 것은, 말씀의 선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포에 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만일 회심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의 의식적인 은혜의 활동을 "중생“이라고 보면서, 그 신비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벨직신앙고백서(24항)과 함께 “말씀을 들음과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사람 속에 생기는 믿음이 그 사람을 중생시키고 또한 새사람으로 만듭니다” 고 말할 수 있고(may) 또한 말해야 합니다(must).

 

하지만, 이 은혜의 역사 속에서, 성례의 주장하는 바에 따라서, 새 생명의 기원(origin)과 그것의 지지(support),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룩한 유아세례의 성례를 위해서 주신 것과 거룩한 성찬의 성례를 위해서 주신 것 사이에 구분을 해야 한다면(홀리죠이: 여기서 카이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인 바로 유아세례의 근거로 삼는 중생의 적용을 보게 됩니다. 이런 적용을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중론은 이런 적용까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곧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이후로 곧장 끝나버리고,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것은 ‘성화“라고 부르게 됩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카이퍼는 순간적 중생개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는 가운데 행하신 것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행하신 것 사이에 다시금 구분한다면, 그때 중생은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행해진 일들을 가리키고, 반면 회심은 이렇게 심겨진 생명이 우리들이 의식하는 가운데 깨어나는 것에 적용되는 용어입니다.

 

지금까지 것을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다음의 세 가지 계속되는 단계들을 거치게 됩니다.

 

첫 번째, 첫 번째 단계의 중생으로서 주님께서 죽은 심령 가운데에 새로운 심령을 심으시는 것.

 

두 번째, 두 번째 단계의 중생으로서 새롭게 출생한 사람이 회심에 이르게 되는 것

(홀리죠이: 이 두 번째 중생이 회심이면서도 또한 넓은 의미의 중생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세 번째 단계의 중생으로서 회심이 성화에 이르게 되는 것.

 

이 각각의 단계들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일을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깨어남, 회심, 그리고 성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일들 각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이것만이 다를 뿐인데, 깨어남에서는 하나님 홀로 일하셔서 사람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습니다. 회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활동하지 않으심을 보시고는 우리들을 활동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성화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서 스스로 일하도록 하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더욱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중생의 첫 단계, 곧 깨어남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방편 없이 일하시고, 두 번째 단계인 회심에 있어서는 방편 곧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시며, 셋째 단계인 성화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방편으로 삼으시는데 더하여 또 다른 방편을 사용하십니다(He uses means in addition to ourselves, whom He uses as means).

 

지금까지의 내용을 압축요약하자면, 부패한 죄인을 새로운 인간으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의 포괄적인 행위이신데, 깨우심(quickening), 회심(conversion), 성화(sanctification), 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여기서 카이퍼는 분명히 회심을 중생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개혁주의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가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성화는 존머리가 주장하는 확정적인 성화로 볼 때, 연속적 중생론에서 말하는 넓은 의미의 중생을 그렇게 넓힌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연속적 중생론에서 주장하는 중생개념을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을 위해서는 단지 마지막 두 개, 곧 회심과 성화만을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회심과 성화를 효력있게 발생케 하는데 사용되도록 지정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첫 번째 것은 되도록 개인적인 묵상의 주제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첫 번째 때에는 사람이 수동적이고 하나님은 능동적이며, 또한 그때에는 신적인 작용의 위대함이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이나 대립이 있지 않습니다. 벨직신앙고백서 17항에 따라서, 오직 회심과 성화를 언급하자면, 말씀을 듣는 것에 앞서는 것으로서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주는 것이 인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도르트신조 12항), 회심 이전에 일어나는 그 역사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일에 있어서는, 회심과 성화가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리게 되는 일을 뒤따라서 일어나며, 또한, 적절한 의미로, 중생이 오직 죄인의 죽음 시에 완결된다는 점이 부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백되어야 할 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두 사실을 상충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나폴레옹의 전기를 쓰면서 그의 출생만을 언급하는 것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더욱 자세하게 그의 출생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언급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꼭 그렇습니다! 저는 중생의 두 부분 곧 회심과 성화를 언급하거나 아니면 회심을 앞서고 있는 것 곧 깨어남을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상호모순이 아닙니다. 정확도에 있어서의 차이점일 뿐입니다. 중생에 대해서 말할 때 마지막 두 개를 가리키는 것이 더욱 관습적이고 실제적이지만, 세 단계, 곧 깨어남, 회심, 그리고 성화 이 세 개를 가리키는 것이 더욱 포괄적입니다(It is more exhaustive, with reference to regeneration, to speak of three stages - quickening, conversion, and sanctifications; although it is customary and more practical to speak only of the last two) (홀리죠이: 여기서 카이퍼는 한국교회내의 개혁주의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중생 용어사용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것이 관습적이고 더욱 실제적이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 개혁주의신학자들이 이런 글을 보는 지 무척 궁금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목적은 더욱 완벽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의 목표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기초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래서, 윤리주의자들, 합리주의자들, 초자연주의자들을 흉내 내면서 그 기초석 위에 휘어진 벽들을 쌓아올리는 짓들을 멈추는 것입니다.

 

완벽한 치료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그 깨어난 죄인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듣게 되는가” 하는 것만 아니라, “어느 분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는가.” 하는 것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의 자녀들이 이 점에서 무시되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더욱 요청됩니다. 1618년 도르트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고려되었는데, 우리 자신들은 이 유쾌한 의무(this pleasant obligation)를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실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중생의 첫 번째 단계, 곧 깨어남의 단계를 말하지 않으면 도대체 빠져나올 곳이 없는 혼란과 복잡함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존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 의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죽은 자녀들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두려운 사실을 피하기 위해서 자녀들이 부모의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들의 세례에 대한 전체개념을 혼돈스럽게 하는 잘못입니다. 세례식 때 선포하는 공포문을 너무나도 혼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의 한 단계로서 깨어남을 회심과 성화와 구분하게 되면 곧 빛이 환하게 들어옵니다. 깨어남은 말씀과는 독립되어 일어나는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이며, 흔히 두 번째 단계인 회심과는 여러 날의 간격을 두어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아들 속에서조차도 당신의 일을 수행하실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since quickening is an unaided act of God in us, independent of the Word, and frequently separated from the second stage, conversion, by an interval of many days, there is nothing to prevent God from performing His work even in the baby, and the apparent conflict dissolves into beautiful harmony: 홀리죠이: 분명히 깨어남 곧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 곧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점을 카이퍼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오, 주여, 한국의 개혁신학자들로 하여금 이 구절을 보게 하옵소서!).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갈등이 아름다운 조화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직 회심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자들로 간주함으로 그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문제성 있는 메소디즘의 방향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홀리죠이: 카이퍼는 그 당시 메소디즘이 문제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문제를 고려할 때 특별히 자녀양육의 면에서는 그 문제성 있는 메소디즘의 주장에 귀기울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귀가 여태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도대체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믿음”에 관한 질문을 다루면서 우리들은 동일한 구분을 이 점에 적용할 수 있게 충분히 준비되었습니다. 믿음의 기능적 구조물이나 기관(the organ or the faculty of faith), 믿음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the power to exercise faith), 그리고 믿음의 활동(the working of faith)을 구분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셋 중의 첫째는 곧 믿음의 기능적 구조물(the faculty of faith)은 중생의 첫 번째 단계, 곧 깨어남에서 심겨집니다; 믿음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power)은 중생의 두 번째 단계, 곧 회심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활동(working)은 중생의 세 번째 단계인 성화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도르트총회에서 고백한 것에만 주목해 보십시오: “사람 속에 일하셔서 사람들이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께서 믿기를 원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행위 또한 산출하신다”(He who works in man both to will and to do produces both the will to believe and the act of believing also, 도르트신조 3~4장, 14항).

 

이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면 더욱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듣고 또한 믿게 될 때 또한 이러한 믿음의 활동(working)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기능적 구조물(faith-faculty)이 심겨지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고 하셨을 때 이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홀리죠이: 한국에서는 요한복음3:8의 말씀을 중생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데, 지금 카이퍼는 중생의 1단계를 이해하는데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비를 인정하면서도 계시된 말씀에 기초해서 이렇게 중생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더욱 이 점을 분명하게 카이퍼가 시도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24)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24. Implanting in Christ

 

“우리가 그와 한 나무가 되었으면”(Having become one plant with Him, "우리가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롬6:5)

 

중생을 잃어버린바 된, 사악하고 불법한 죄인들 속에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로 논의했다면, 이제 우리는 더욱 성스럽고 미묘한 질문, 이러한 신적인 행위가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를 다루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충분히 다루지 않는 중생론은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형제사랑을 제거해 버리고 또한 영적인 교만을 산출하기 때문에, 이 점이 첫 번째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사도는 선언하기를,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시니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카이퍼의 주: 사도바울이 여기서 선언하는 것은 그가 다른 자아(에고)를 가지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자신의 것인 자신의 자아(에고) 안에 더 이상 자신이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한 성도가 임마누엘 되시는 분과 신비적인 연합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헛된 상상일 뿐입니다. 중생한 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성되어진 것 외의 어떤 다른 생명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분명하면서도 강력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한 나무가 됨”이란 성경의 표현(카이퍼의 주: 최소한 “그와 함께”라는 말이 원어에 있다면 말입니다)과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표현은 그 최상의 풍부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취급되어야 하는데 모두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비유어입니다. 우리들은 비유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표현하는 메타포들에 매여 있지만, 그것들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위 비교의 세 번째 용어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비유는 실제로 일치되는 것(a real conformity)을 표현합니다. 영적이면서 시각적인 세계 속에 신적으로 표현되는 사고의 일치(a unity of thought)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true) 포도나무라”, 곧, “다른 모든 포도나무는 단순한 비유이며, 참되고 진정한 포도나무는 바로 나 자신뿐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비유를 설파하실 때 너무나도 신중하시게 선택하셨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여진다(grafted)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곧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5장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어떤 사람이 하나의 가지가 되는가 하는 문제조차도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일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15:3에서 그는 단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은 말라버리게 되고 불태워질 것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로마서6:5에서도 예수께로 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로마서11:17~25절에서만 부분적으로 다룰 뿐입니다. 앞의 구절에서는 예수께로 오는 것을 예수와 함께 한 나무가 된다고 하였을 뿐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접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뒤의 구절에서는 감람나무가지가 잘려지고 돌감람나무 가지가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려져 나간 가지가 원감람나무에 회복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사람이 심겨지는가 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적용 가능합니다. 물론, 로마서11장에서 바울사도는 그의 특징적인 담대함을 보여주는 표현과 스타일로 비교를 위하여 자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실제 농예법으로는 좋은 가지가 야생등걸에 접붙여지는 반면, 여기서는 야생의 가지가 좋은 등걸에 접붙여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대담한 표현인데 그래서 우리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그는 우리들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스도 안에 일반적으로 심겨지는 것(the general implanting in Christ)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모든 것입니다.

 

자세히 주목해 보십시오. 이 비유가 너무 지나치도록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죄인 된 사람들의 개개인의 중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실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한 번 심겨지게 되면 그로부터 끊겨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것이 사도바울의 의미하는 바라고 한다면, 뒤따르는 사건들도 그의 말 속에 암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말로 자기 자신의 다른 가르침들을 비난하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이하게도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은혜의 언약 안에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위치를 자신들의 잘못으로 상실해 버리게 되었다가 오는 세대들을 통해서 그 은혜의 바깥에서조차도 보존함을 받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에서 그들을 위해서조차도 은혜 속으로 다시금 들어오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11:17~25이 개인의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좋은 감람나무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로부터 끊겨지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끊겨지는 자는 그에게 결코 속한 적이 없었던 자입니다. 우리들은 성도의 견인을 믿지 않습니까?

 

요한복음15장에 보면 포도나무에서 잘려지는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서 저의 의견에 반대를 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첫째, 사도바울 당시에 배교했던 유대인들이 다시금 접붙여진 적이 결코 없다는 어려움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둘째, 칼빈과 함께 우리는 잘려나가는 가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같이 원래의 가지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던 자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고 하신 말씀과 모순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15장이나 로마서11장은 어느 것도 그 제한된 의미에서의 개인적인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6장은 한 가지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접붙여짐이란 개념을 소개하지 않으며 또한 이런 “한 가지가 되는 것”이 완성되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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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가 연중론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견, 바빙크가 컴퓨터사용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시대착오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빙크가 지금 이 시대에 살면 전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일 것입니다.

 

진지하게 판단해 보려면, 바빙크의 글 자체를 세세히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그 검토를 위해서 몇 가지 바빙크의 글 자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두 그의 책 '개혁교의학' 4권에 나오는 것입니다. 페이지 표시는 영문번역판의 것입니다. 먼저 바빙크는 "중생"이란 단어를 정의하면서 이런 구분을 분명하게 해놓고 시작합니다.

 

77쪽. Regeneration in the restricted sense further requires a distinction between the activity of God by which he regenerates, and the fruit of that activity in the person who is being regenerated; in other words, between active and passive regeneration.

 

이 두 가지가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분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구분이

 

아버지의 말씀하심과 우리가 그 말씀을 듣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과 그 이끄심에 우리가 따르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것과 그 허락하심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

효력있는 복음의 제시와 그 제시에 담겨진 구원을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

씨를 능동적으로 뿌리는 것과 씨가 수동적으로 뿌려지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

 

이런 구분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앞의 것을 설명하는 것이 78쪽에서 87쪽까지입니다.

 

그리고 나서 87쪽의 [44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arlier we made a distinction between active and passive regeneration. Up until now we dealt with the former; now the latter is the focus of discussion.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중생사역을 다루었으니, 이제부터는 인간 안에서 이뤄지는 수동적인 그 결과로서의 인생의 반응을 다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빙크가 설명하는 것은 Becoming Spiritual Persons 곧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447항] 전체의 내용인데 신구약성경 전체를 훑어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한 뒤에 [448항]에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Surveying this work of the Spirit from Gen.1 to Rev.22 and specifically focusing on his regenerative activity, we need not refute the opinion that regeneration is totally or in part a human achievement and exists solely in the moral improvement of one's life and conduct."

 

중생이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도덕적인 변화나 성취라는 견해를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빙크를 알미니안주의에 물든 것이라고 비판해야 하는 것일까요? 세미-펠라기안주의자라거나, 조금 봐주어서 세미-어거스틴주의자라고 폄하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이 중생의 역사에서도 강조하는 이가 바로 바빙크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능동적인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어떤 개혁신학자들이 중생의 이런 협소한 의미만을 강조하고 제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성경의 언어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면서, 중생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빙크의 중생의 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칩니다.  

 

95쪽, For that reason it(ie.the seed of regeneration) cannot sin or die, but lives ,works, and grows, and in due time manifest itself in deeds of faith and converion.

 

그러면서 다음 장 곧 2. Faith and Conversion으로 넘어갑니다. 이 2장에서 중생과 관련된 언급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

 

99쪽, The internal calling, accordingly, does not happen justt once and stop when it has called the new lfie into being, but it continues idefinitely.

 

흥미로운 것은, 바로 2장안에 믿음이 먼저냐 중생이 먼저냐는 너무나도 고전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문장입니다.

 

125쪽, God can bring the person whom he regenerated according to his will to faith and repentance either suddenly or gradually, but always remains the same gracious omnipotent God, who works both the willing and the working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보십시오. 바빙크는 분명히 순간적으로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지만 점차적으로도 하실 수 있되, 그 하나님은 언제나 전능하신 주권자이심을 바빙크는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중론을 강조하는 홀리죠이가 인정하면서

연중론이야말로 이렇게 순간적인 중생도 인정하고 점차적인 중생(연속적 중생)도 인정한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홀리죠이는 바빙크주의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중생문제에 있어서 바빙크야말로 연중론주의자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더욱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바빙크의 중생론에 대해서 바빙크의 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빙크가 중생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능동적 중생과 수동적 중생, 곧 하나님 편에서의 중생의 역사와 그 역사에 의한 인간의 반응이란 면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능동적인 중생의 역사를 설명하는 중에, 중생이란 “즉각적이고 또한 저항불가한 것”(immediate and irresistible)이라고 하면서, 이 표현들이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중에 irresistible한 것에 대한 설명이 81쪽에 나옵니다.

 

“In the second place, if the operation of God's Spirit in regeneration is absolutely independent of the human will, it may be called 'irresistible.' Augustine already stated: 'Aid must be given to the weakness of the human will in order that divine grace may be inexorably and invincibly effective.' Materially the Augustinians and Thomists among Catholic theologians, such as the Jansenist, also agreed with this position, for they assume an essential distinction between 'sufficient' and 'efficacious' grace, seeing the former as conferring the capacity and the latter as conferring the actual willing and accomplishing, and hence taught an infallible activity of efficacious grace. But Rome firmly rejected this doctrine."

  

곧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생론을 설명하면서, 구분하였던 것 그 구분, 곧 눈의 시력을 갖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그 구분을 바빙크가 정확하게 인정하면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 대표적으로 로마천주교라고 합니다. 로마천주교 안에서 철학자 파스칼이 속했던 잔센주의자들은 예외라면서 말입니다.

  

이런 중생의 설명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이론과 바빙크의 중생이론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카이퍼의 중생론이 비판을 받는 것은 중생론 자체라기보다는 그 중생론을 유아세례에 잘못 적용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구분이 없으면 그들의 중생론에 대한 천박한 이해에 머무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