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 차녹의 신학- 이한상
2013-12-23 18:51:27
스티븐 차르녹(Stephen Charnock, 1628-1680)의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전능과 주권에 대한 이해(이한상 교수)
동락당 2011.06.24 17:27 http://blog.daum.net/vorgott/17449911
한국개혁신학회는 오는 12일(토) 오후 신반포중앙교회(담임 김성봉)에서 제82차 정기학술발표회를 개최한다.이번 발표에서는 이한상 교수(침신대)와 이남규교수(Apeldoorn)가 각각 "스티븐 차르녹(Stephen Charnock, 1628-1680)의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전능과 주권에 대한 이해 :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칼빈주의>의 개념의 생성과 성장 - 16세기 후반 하이델베르그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발표한다. 다음은 이한상 교수의 발표 전문.
스티븐 차르녹(Stephen Charnock, 1628-1680)의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전능과 주권에 대한 이해
: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한상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청교도들과 개혁파 스콜라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지적 속성에 관한 교리라는 테마의 하부 카테고리에서 하나님의 뜻(신적 의지, the voluntas Dei)의 외부적 표출을 다루었다. 이와 관련하여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스티븐 차르녹(Stephen Charnock 1628-1680)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은 중요한 테마였는데, 구속사를 통해 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이 주제가 큰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이라는 테마는 창조, 섭리, 그리고 예정 교리의 전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유용하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지성(intellect)이라는 영역에서 그러했듯이 전능하심과 주권이라는 두 속성 이해에 있어서도 신적 의지와 신적 지성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한다.
우선적 전제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본질(essence)과 단순성의 교리(the doctrine of divine simplicity)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의지(will)와 능력(power)은 사실상 동일시되어야한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신학과 종교개혁신학 및 청교도와 개혁파 정통신학에 있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신학적 공리(axiom)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지의 삼위일체 내부지향적 측면(ad intra)이 그분의 성품에 따라 스스로 의지함의 범위 내에 속해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형식적 구분(formal distinction)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현실태(all actuality)”의 근원인 반면에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가능태(all possibility)”의 근원이며 그 형이상학적 포괄 범위가 더 넓은 개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이러한 이중적 양상은 그분의 능력과 주권 및 소위 절대능력(absolute power)과 제정된 능력(ordained power)의 상호 연관성에 관해 본 논문에서 다루게될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본 논문의 연구대상이 될 퍼킨스와 차르녹은 모두 초기 및 후기 정통주의 신학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심화된 연구를 내놓았는데, 물론 이는 중세 후기사상과 종교개혁신학의 지적 유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신학자 모두 오컴주의적인 중세 후기 신학에서 종종 보이는 과도한 사변성 및 논리에 대한 집착은 피하고 있다는 점이 서론에서 우선 지적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이 두 신학자가 피조된 질서 내에서의 “적절한” 수준의 임의성과 하나님 스스로의 제한과 작정과 계획하심의 기초하에 진행된 “총체적인 언약적” 구도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자유와 초월과 주권을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시도는 중세시대 및 종교개혁기를 거쳐 청교도와 정통주의 시대에 이르도록 정통교리를 수호했던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 관심사였다. 우리는 이 언약적 구조가 초기 정통주의 및 전성기 정통주의의 맥락하에서 퍼킨스와 차르녹의 하나님의 전능성과 주권교리의 틀 내에서 어떻게 “발전”되어 나아갔는지를 살필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능력과 제정된 능력의 구분에 관한 중세신학의 여파로서의 이 언약구도적 공통적인 관심사가 유지되었는지 여부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 형성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며 관통하고 있는 중세 스콜라신학의 도구적 틀로서의 토미즘과 스코티즘 및 유명론이 서로 얽혀있는 변증법적 구도가 함께 언급될 것이다.
I. 퍼킨스의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에 대한 이해
퍼킨스 신학의 구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있어서 세 번째 카테고리에 해당된다. 이는 신적 지성 및 의지(첫번째와 두 번째 카테고리)와 더불어 외부적으로 발산되는(ad extra) 속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는 영원하신 계획(counsel)과 작정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대표작인 『황금 사슬』에서 퍼킨스는 하나님의 전능을 “모든 일을 가장 능력있게 수행하시도록 하는 그것”으로 정의한다. 물론 이에 대한 중세 스콜라신학의 전형적인 사고를 통해 여기서의 “모든 일(every work)”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이는 전능 개념을 초자연적(구원론적이고 구속사적인) 및 자연적(창조 및 섭리) 신학을 모두 포함하는 영역에 있어서의 “외부적 발산의 측면으로의 하나님의 자유”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퍼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거나 모순된 일들에 있어서의 “가능한”(상상할 수는 있지만 넌센스적인)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점은 퍼킨스가 하나님의 능력의 절대적인 측면과 실제적인(actual) 측면을 결합해서 개념을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와는 상반되게 퍼킨스는 하나님의 전능 개념을 “절대적”인 것과 “실제적인(actual)”것으로 오히려 구분하기도(결합하기 보다는) 한다. 즉, 절대 능력은 “그가 행하거나 행할 일보다 더 행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실제적 능력은 “그가 자유로이 의지(will)해서 모든 일들이 발생하도록 그 원인이 되시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스코투스주의와 중세후기 유명론의 절대능력과 제정된 능력에 관한 이해의 흔적이 여기서도 엿보인다. 예를 들면 퍼킨스는 대표작 중 하나인『A Reformed Catholike』에서 중세 카톨릭주의가 이 두 능력의 구분에 대한 오해를 일으킴으로써 유해한 미사 교리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칼빈도 하나님의 절대 능력 개념을 노골적으로 거절하지는 않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점은 칼빈과 칼빈의 후예들의 연속성 여부 파악의 견지에서 조사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어쨌든 퍼킨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종류의 능력이 하나님의 단순성(divine simplicity) 교리에 기초해서 볼 때는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퍼킨스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적 분류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에 비해서 지식(intellect)에 우선성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필연적으로 그의 전능성이 의미하게 되는 “작용적(operative)” 측면을 고려할 때의 하나님의 의지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전능성을 성부 하나님이 성자 및 성령과 교통하는 공통된 특질(property)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단순성 교리의 범위 안에서 존재하는 신적 전능성의 삼위일체적 기초를 보게 된다. 한편 하나님의 다른 여러 속성들에 관한 논의에서 그러한 것처럼 퍼킨스는 전능함으로부터 경건적, 구원론적, 그리고 언약 신학적 측면으로 다양한 교리적 적용점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신적 작정을 실행하기 위한 토대가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성육신교리를 포함하는 기독론적 논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성서의 모든 계시가 성취될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필수적 토대로 여겨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에 더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퍼킨스의 논의가 그의 신학체계에 따라 하나님의 외부적 사역의 전 영역을 다루는 섭리 교리에 대한 가르침과 오버랩되는 것을 보게된다. 그는 실천적 측면에서의 신자의 다양한 의무와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능함에 대한 논의의 내용과 궤를 같이 한다. 한편 퍼킨스가 내리는 섭리에 대한 정의는 모든 피조물을 향해 “하나님이 돌보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가장 자유롭고 강력한 행동”이다. 이것은 퍼킨스 신학의 구조에서 볼 때 하나님의 주권은 반드시 그의 창조와 섭리와 예정의 신적 계획(decree)에 따라 “신적 의지”의 실행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퍼킨스에게 있어 하나님의 주권, 지배(rule) 혹은 통치는 섭리의 두 번째 영역(지식이 우선 첫 번째 영역이 됨)으로서 “모든 것들을 명하고 선한 목적을 향해 인도하시는 것”이다. 선과 악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선에 대한 직접적 운용과는 별도로 “작용적 허용(operative permission)”과 악을 삼가도록 이끄는 두 측면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의 구별은 섭리의 실행적 측면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의 유형구분에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퍼킨스에게 있어 하나님의 주권은 그분의 실제적(제정된) 능력에 의한 신적계획(decree)의 실행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킨스는 그분의 주권을 드러내는 이 실제적 능력을 하나님의 의지의 교리에 비추어 절대적 능력과 사실상 동일시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 있는 절대적 의지(선하신 뜻 안에 놓인)와 율법과 복음을 통해 주어지고 있는 계시된 혹은 나타난(signified) 뜻에 대한 개념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는 또 다른 차원에서 퍼킨스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의 “절대성” 혹은 주권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의 외부적 사역을 통해 알려지는 그의 주권은 사변적 결정론이나 단순 인과론적 구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의 표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퍼킨스는 하나님의 능력과 관련된 그분의 주권의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측면을 아울러 강조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분의 절대적 능력인데, 이를 통해 그는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구속하도록 만들며 또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결정하도록 이끄신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운영(administration)은 성자에게 맡겨진다.”
요약해 본다면, 하나님의 전능과 주권에 관한 퍼킨스의 논의의 강점은 그가 하나님의 뜻의 영원적 측면과 시간적 측면 및 이의 구원론적 기초 위에서의 실제적 실행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설명하고 있는 점이라고 보여진다. 퍼킨스는 중세 이후 전통적으로 구분해서 인식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해 안에 내재되어 있던 통합적 측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개혁주의 전통 하에 확고히 머물고 있다고 판단된다.
II. Charnock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해
차르녹의 작품들은 주석적 작업과 논리적 혹은 교리적 관심사를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명확하고 세밀한 균형감각”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전능을 다루는데서도 이러한 특징은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우선 욥기 26:14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견해와 빌닷의 그것을 대조하면서 두가지 교리적 의미를 이끌어낸다.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그 본질과 성격에 있어서 무한하고 불가해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분의 능력은 창조와 섭리와 구속의 사역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르녹이 성경 본문 자체를 다루는 것과 이에 근거해서 교리적 논점을 도출하는 양상은 당대의 전체 신학적 장르를 대표하여 전형화시킬만한 청교도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설교적 강론의 전형임을 먼저 밝혀둔다.
A.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제정된 능력(Potentia Absoluta/Ordinata Dei)
차르녹은 자신이 설정한 첫 번째 논점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특징을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한다. 첫째, 차르녹은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 본문의 어원학적 기초에 따를 때 실제로 “행동할 능력”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신적 권위 혹은 주권과 구별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정의상의 문제는 potentia라는 용어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단순성 교리에 근거한 신적 본질과 능력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성을 갖는다. 차르녹은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의 본질의 상상할 수 없는 탁월함과 활동”인 동시에 “외부로 발산되는 효능적인 신적 본질(the divine essence efficacious ad extra)”이라고 본다. 따라서 차르녹에 따르면 신적 실체(divine substance)의 정체는 그 본질상 가장 단순한 존재인 동시에 피조물과 관련해서 그들을 향한 외부적 작용 속에서 능력을 배출하시는(emanation) 분이다. 아울러 순수한 영적 성품을 지니신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존재인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지닌 속성들의 최대의 일치성과 최대의 능력을 모두 소유할 수 있다. 물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로 이러한 신적 능력의 이중적 측면을 고려한 관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즉, 피조물을 향한 측면(즉, ad extra)에서 볼 때의 실제적으로 발생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아우르는 측면으로서의 potentiality가 곧 하나님의 전능이라고 이해될 여지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차르녹이 하나님의 전능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ad extra라는 어구를 직접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앞으로 다룰 논의들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이는 하나님의 속성 교리를 논하는데 있어서 차르녹에게는 사변적인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는 시초적인 혹은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발산될 대상과 외부적 활동의 범위와 관련되어 그것의 적절한 의미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분의 본질적인 전능성과는 무관한 이러한 외부적 능력의 측면에 있어서의 사실상의 “제한적” 요소들은 하나님의 의지(the voluntas Dei)와 관련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라고 하겠다. 아울러 차르녹은 이 전능함이 제일원인으로서의 하나님과 2차적 원인들로서의 피조물들간의 무한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피조물들에게 능력을 양도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러한 능력은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즉시적 창조”사역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물질을 상용해서 중개적으로 피조물을 만드는 “모든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피조물”이 행하는 2차적 창조 사역과 대비된다.
둘째, 차르녹은 하나님의 절대능력과 제정된 능력이라는 개념을 심도있게 탐구한다. 그에게 있어 이 두 용어의 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작업이다. 차르녹이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절대능력은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더라도 그 행함 자체는 가능한(possible) 능력이다. 제정된 능력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계획한(decreed) 능력인데 다시 말하면 이는 그 일을 실행할 것을 정하거나(ordained) 임명한(appointed) 일에 근거한 것이다. 이 두 능력은 별도의 능력이 아니며 다만 하나의 동일한 능력(one and the same power)이다. 하나님의 제정된 능력은 절대능력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could will)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면 그분은 자신이 의지하는(will) 모든 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구분을 시도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의지가 실행되도록 이끄시는 신적인작정(decree)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적 작정은 그분의 지혜와 의지의 기초 위에서 절대능력과 제정된 능력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 비록 하나님 안에서는 신적 행동을 야기시키는 능력과 그 행동 자체에 간격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능력은 제정된 능력보다 더 큰 “행동의 원리”(the principle of action)로서 실제 존재한다. 의지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절대능력은 그 범위(scope)에 있어서 실제적 의지함(actual willing)보다 넓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decretal will)은 신적 지혜를 포함한 다른 여러 속성들을 아우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의 정체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영혼의 심리학의 경우에서처럼 신적 지성과 의지의 관계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태도는 차르녹이 절대능력에 대한 중세 후기의 스코투스 학파적 관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실을 아울러 드러낸다. 즉, 피조된 세계와 질서로부터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 및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eternal decree)의 “절대성”을 동시에 보호하고자 노력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듯이 신적 능력의 토대를 고려하는데 있어서 토미스트적 요소들과의 적절한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의 모든 행동의 감독자이다. 그분의 의지는 명령하고, 그의 지혜는 안내하며, 그의 능력은 결과를 낳는다(effect). ... 하나님의 의지는 범사의 뿌리이고, 지혜는 원고(copy)이며 능력은 조성자(framer)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potentia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논의, 즉 내재적인(intrinsic) 혹은 본질적인 측면과 외부적으로 작용하는(externally operative) 측면에 있어서의 절대능력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유사한 답변을 가져다 준다.
아울러 우리는 차르녹의 이해구도에 있어서 그가 신적 지식과 신적 의지의 두 영역에 있어서의 일체의 불일치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확연한 규칙을 자신의 논의에서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차르녹과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에 따르면 (비록 진술 자체에 있어서의 논리적 혹은 문자적 측면으로 외형상의 불일치가 있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전능성에 있어서의 “자유”는 오직 그분과 피조세계에 대한 관계를 고려한 “영원한 작정”의 기초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중세후기신학적 의미에서의 “급진적(radical)”인 신적 자유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가 여부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인데, 결국 신적 능력과 지식 사이의 간격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정통신학의 신론체계를 수호하기 위한 근간으로서 하나님의 단순성 교리의 중요성이 재차 명백하게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피조세계와 관련한 외부적 측면(the ad extra dimension)을 강조한 청교도 신학의 전반적 흐름도 사실상 이러한 경향을 고무시킨 작업의 일환이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를 전제할 때, 17세기 개혁파 진영에 절대능력 개념에 대한 논쟁이 재부상한 구체적인 역사적 및 신학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리차드 멀러가 Petrus Van Mastricht(1630-1706)의 주장을 재인용한 분석에 의하면 당대의 다양한 신학사조 가운데에 세 부류의 잘못된 사상들이 횡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본질의 제한을 주장하면서 모순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무능력하다고 주장한 소시니안주의, 둘째는 절대능력을 모순된 일을 포함한 무제한적인 능력으로서 문자 그대로 이해한 Weigelian 열광주의자들, 셋째는 이미 피조된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불편부당함(indifference)"이라는 사고에 근거해서 유명론자 혹은 오컴주의적인 수준조차 뛰어넘는 극단적인 하나님의 자유를 주장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 그들이었다. 특히 데카르트주의자들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적절한 관계를 고려해야 할 뉘앙스는 전혀 없이 하나님의 “불가능성(impossibility)”을 논했다는 점은 그 ‘교묘함’ 때문에 개혁파 진영의 주요 공격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르녹의 논증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절대능력의 대상은 가능한 모든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모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 자신의 성질에 양립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특질에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선택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창조된 이후에 세상을 없애실 능력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 이후에 그것이 없어진다면, 세상은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없어졌다는 것도 영원히 진실인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진실이었던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창조된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그것을 작정하신 것도 영원히 진실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작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 자체의 성질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절대능력을 정의하는 영역에 있어서 모든 일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는 결코 하나님의 단순성 교리를 침범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시간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은 오직 스콜라신학 전통에 따라 신적 단순성에 근거한 순수 현실태(pure act)로 이해되는 하나님이 스스로 내린 영원한 작정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능력 혹은 변화시키는 힘(potency, 즉 하나님 스스로의 불변성과 대비되는)의 대상으로서 피조세계를 고려하는 견지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파 스콜라주의와 청교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개념의 절대성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그 능력의 자의성(arbitrariness)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의지와 의로움이라는 속성들을 통해 신적 능력을 바르게 설명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오직 그러할 때만이 하나님의 자유(divine freedom)의 의미가 모든 다른 신적 속성들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제대로 변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섭리, 창조, 그리고 구속에 있어서의 “제정된” 능력(ordained power)
그러므로 셋째로 우리는 절대능력에 대한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제정된 능력에 대한 차르녹의 설명을 살펴보아야 한다. 차르녹에게 있어서 제정된 능력 개념은 하나님의 의지적 행동이 ad extra적으로 나타날 가능한(possible) 혹은 행해질만한(factabile) 대상으로서의 피조물과 관련된 전능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죄와 악의 문제 및 “가장 자유로운 작인(agent)”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능력의 무한하심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준다. 절대능력과 제정된 능력의 구분 속에 후자적 의미에서 각 피조물에게 합당한 최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지혜와 작정된 의도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섭리적이고 도덕적인 측면 또한 함축되어 보존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차르녹의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논증의 두 번째 방향, 즉 하나님의 제정(ordination)의 범위를 설정해 줄 영원한 작정에 근거한 섭리와 구속 사역에서 드러나는 능력에 대해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혁파 정통주의와 청교도 신학자들에게 있어 제정된 능력(potentia ordinata Dei)라는 용어는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피조질서들의 관계로부터 추출된 은혜 언약 및 구속언약과 창조언약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 언약 이론의 배경 또한 중세 후기에 나타난 언약에 관한 논의의 여파와 전혀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차르녹 역시 언약사상의 테두리 내에서 섭리적이고 구속사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제정된 능력을 논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차르녹은 우선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통치는 하나님의 “지성(understanding)과 의지와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임을 재차 확인한다. 차르녹이 섭리 사역에 있어서 신적 지성 혹은 신적 능력 가운데 어느 한편에 우위를 두지는 않았지만, 능력은 지성보다는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이는 제정된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한 의지(omnipotent will)의 끊임없는 유효적 작용(efficacy)”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차르녹이 섭리 교리 이해에 있어서 이와 같이 신적 의지의 지성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언급하는 것은, 섭리가 응당 하나님의 주권과 서로 얽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이는 이 점에 있어서도 차르녹이 스코투스와 유명론자들의 주의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차르녹은 이어서 섭리 속에서 나타난 제정된 능력에 대해 논하는데, 특히 “자연적” 통치를 설명할 때 보존(preservation)에 있어서의 “유지하시는 능력(sustaining power)"과 모든 피조물의 움직임에 있어서 “함께 일하시는 능력(co-working power)으로서의 신적 능력의 작용을 다루고 있다:
자연(nature)이 어떤 일을 행하든 하나님은 자연 속에서 일하신다; 자연은 수단이고 하나님은 자연을 붙들어주시고(supporter) 지도하시며(director) 움직이신다(mover); ... 그 일들은 주관적이고 효과를 낳는 측면으로는 이차적 원인들(second causes)인 우리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애초부터 동시발생적인(concurrent) 것이다.
차르녹은 특히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능력을 “연속적 창조(continual creation)”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일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이 2차적 원인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신적인 “강력한 동시작용(concurrence)"이라는 것이다. 물론 피조세계내의 인과구조와 자연법은 하나님의 통상적(ordinaria)능력의 작용 속에서 비통상적(extraordinaria) 개입의 능력의 경우만을 제외하고 제정된 능력의 범위내에서 함께 적용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결국 차르녹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 구분을 통상적/비통상적 능력의 구분과 더불어 특히 섭리 사역과 관련되어서는 결합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차르녹의 실례를 통해 파악한 개혁파 정통주의 및 청교도 신학은 하나님의 의지의 주권성의 기초 위에서 창조 및 섭리와 관련한 하나님의 제정된 능력에 대한 논의를 할 때만이, 인과 구조와 소위 신적 “concurrence”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립하는 하나님의 절대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파 진영과는 대조적으로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지성”의 기초 위에서 그분이 가장 좋은 것(summum bonum)을 주시는 것으로 창조사역을 이해했다. 물론 여기서 알미니우스가 토마스주의적 입장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절대능력의 존재를 거부하며 오직 제정된 능력 개념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도 차르녹과 개혁파 정통주의 혹은 청교도 신학의 창조와 섭리 교리에 대한 이해가 알미니우스적 입장에 반대하여 비록 신학이론 형성의 토대로서 토미스트적인 인프라구조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투스주의 내지는 중세후기의 주의주의(voluntarism)에 대한 긍정적 수용을 그 특징으로 내보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나아가서 이러한 차이는 개혁파와 알미니안 진영의 하나님의 “자유” 개념에 대한 이해의 불일치와도 관련성을 갖는다: 영혼의 기질(psychological faculties)과 지성(그 범위에서 의지보다 넓은)과 의지의 변증법적 설명 구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차이가 그 불일치를 낳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차르녹과 개혁파 정통주의 진영은 신적 자유와 주권이 반드시 피조 질서 내의 임의성(contingency)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또한 스코투스와 중세후기 어거스틴주의적인 사상의 영향이라고도 하겠다.
한편 차르녹에게 있어서는 구속 사역 또한 하나님의 제정된 그러나 무한한 능력이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더불어 나타난 영역이다. 그는 여기서 삼위일체적이며 경건과 관련된 강조점들을 광범위한 주석적 토대 위에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기독론적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능력, 즉 성육신에 있어 신인성의 결합 및 구속사역과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에 대한 논의, 그리고 택자 개개인에게 그 구속사역이 적용되는 일에 대한 논의도 차르녹의 중생 및 성화 교리와 맞물려 예리하게 설명되고 있다. 특히 신자에게 최초의 은혜의 주입이 이루어진 이후 그를 보존하는 은혜로서 성화가 진행되는 삶을 가능케 하는 은혜를 작용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자안의 “계속되는 중생(a continued regeneration)”이라는 개념과 함께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전통적 청교도 신학의 주제인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
III.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차르녹의 이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decree)에 있어서 “절대성(absoluteness)”의 의미와 구속 언약(pactum salutis)
하나님의 의지의 실행과 유사한 맥락에서 청교도 신학자들과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하나님의 전능의 지배 혹은 권위(potestas, rule or authority)로서의 측면을 탐구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전통적인 절대능력과 제정된 능력의 개념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기초적 틀의 범위 내에서 합쳐지고 있는 혹은 수렴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우선 시편 103:19(“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에 근거해서 차르녹은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삼중적 주권(자연적 통치, 은혜의 통치, 영광의 통치)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의 토대는 하나님과 피조세계 사이의 자연과 은총을 아우르는 모든 차원의 언약적 관계의 양상에 놓여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진공 속에서 운행되는 형이상학적 혹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그 주권의 기초가 되는 그분의 시간 속에서의 일하심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 혹은 의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실질적인 교리라는 것이다. 아울러 청교도 신학자와 개혁파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놓여있는 언약적 측면을 신인협력적이거나 세미펠라기안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이는 바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중간지식(scientia media) 개념을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2차원인들과의 함께 일하심(divine concurrence)이라는 개념을 잘못 사용하는 일을 통해 드러났던 면이기도 하다.
차르녹의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특징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우선 작정의 실행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함이 “물리적” 능력이라면 주권은 그분의 피조세계와의 관련성에 있어서의 “도덕적 능력” 혹은 합법성을 담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이 주권의 절대성은 그 자체의 성격상 셀 수없는 수많은 가능한 대안을 가정할 수 있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대성은 다른 여러 신적 속성들―지혜, 의로움, 선하심 등―에 합치하여 발현되는 그의 계획된 단 하나의 작정상의 의지(the ordained decretal will)로 인해 통제된다. 즉, 제정된 능력 개념은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의 실행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르녹은 자유로운 작인(free agents)으로서의 인간과 그 영혼의 창조 및 모든 피조세계를 이차적 원인들로 삼으시는 일이 결코 신적 주권의 진정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차르녹이 하나님의 주권의 “제정된” 측면으로서의 성격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 “절대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조차도 토미스트적인 인과론적 구조의 범위 내에 해당되어 머물면서 결코 그 예외적 범주가 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이 신자이든 유기될 자이든 그 구조 안에서 인간의 책임성과 신적 통제라는 양 측면은 명백히 유지되고 공존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차르녹은 예정론, 기독론, 칭의론, 성화론, 은혜의 교리 등과 관련하여 알미니안주의적 구원론의 논의 구조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강한 개혁주의적 논조로 탁월히 옹호했는데, 이는 특히 구속사역과 관련된 신적 주권을 변호하는데 있어서 그 논의의 삼위일체론적 구조가 구속언약 및 그리스도의 중보자론과 맞물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과 직접 연결된다. 이러한 영원 속에서의 구속 언약론은 퍼킨스의 세대에는 아직 널리 퍼지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것은 삼위일체와 기독론적 토대의 변형을 꾀했던 여러 합리주의적 견해들에 맞서 하나님의 주권 교리라는 영역으로 일체적으로 수렴되는 언약신학적 및 기독론적 통합성의 토대 위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수호하고자 했던 차르녹과 전성기 정통주의신학자들의 노력임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자연과 은총과 영광의 세 영역에서 모두 드러나지만, 우리는 차르녹이 특히 기독론적, 언약적, 삼위일체적 토대 위에 전개되는 초자연적 은총과 관련된 측면(구속사역의 성취와 그 적용)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동시에 반영하는 작업을 통해 신적 주권의 “절대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았다. 아울러 그는 신인협력적인 신론 이해에 반대하면서, 독력적인(monergistic) 신론 이해를 위한 삼위일체적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있어서의 구속언약의 역할은 오직 영원과 역사 속에서 모두 존재하고 행동하는 “성서적”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IV. 정리 및 결론: 하나님의 전능 및 주권과 신자의 책임의 “역설적” 공존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에 관한 차르녹과 퍼킨스의 이해, 즉 보다 넓은 맥락에서는 청교도신학과 개혁파 정통주의의 이에 대한 관점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저변에 깃들어있는 중세 스콜라신학의 흔적을 다시 검토해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이차문헌을 통해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스코투스적인 관점은 특별히 별도로 존재하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능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절대능력과 상대능력의 구별은 인정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간 “언약” 개념을 강조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컴주의자들은 신적 제정의 범위를 뛰어넘는 절대능력의 극단적 수준설정을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피조질서와 관련되어 하나님 스스로 설정한 언약이라는 측면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 절대능력 개념의 성격에 수반되기 쉬운 자의성(arbitrariness)을 제한하고자 애썼다. 결국 양진영의 결과적 측면에서는 사실상 커다란 차이가 없는 듯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했고, 양 입장 모두 하나님의 전능을 단일하며 통합적이고 피조세계와 관련하여 창조, 섭리, 구속 사역 속에서 발휘되는 “작용적”인 능력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대체로 개혁파 정통 신학자들은 스코투스주의와 오컴주의 사이에서 절충적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토미스트적 인과구조와 함께 그 도구적 개념들인 “contingency”와 “divine concurrence”를 활용해서 스코투스적인 주의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주의적인 신학적 담론을 이끌어냈다. 이는 하나님 내에서의 지성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주의주의적 접근에 대해 편견없이 그것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17세기 신학의 큰 범주내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자이자 청교도 신학자인 차르녹과 퍼킨스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피조질서 간의 관계에 있어 급격한 분리나 신적 자유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양자간의 관련성을 설정하는 것을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외부적(ad extra) 실행작용을 통해서 주어지는 계시된 뜻(the revealed will)의 테두리 내에서만 그분의 비밀스런 뜻(hidden will)을 감지하고자 했다.
아울러 이러한 신적 능력 개념의 구분은 하나님의 의지 교리에 대한 핵심적 지적 유산이 신론의 핵심으로서 그 연속선상에서 후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보았다. “스콜라적인” 틀에 있어서의 연속성은 중세신학으로부터 개혁파 정통주의와 청교도의 그것으로 이어지고 있으되, 특히 영국에서는 대표적으로 퍼킨스와 차르녹을 통해 초기 청교도 혹은 초기 정통주의로부터 후기 청교도 혹은 전성기 정통주의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고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과 주권에 대한 가르침에서의 이러한 연속성은 석의적 토대 위에 놓인 정통신론의 근간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한 오직 하나의 그것(a simple one)이기에 그분의 의지 혹은 뜻은 불변토록 “단일한(single)” 것이라는 성경적 명제가 그것이다. 구원론적 관심사에 중점을 둔 하나님의 이 의지교리는 영원과 시간의 측면이라는 신적의지의 이중적 측면에 있어서의 합당한 균형과 긴장을 유지해냈다.
차르녹의 시대에는 초기 정통주의 시대에서 전성기 정통주의 시대로의 이동 가운데 퍼킨스의 시대의 논적들인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 진영 외에도 소시니안과 합리주의자 등 더욱 다양한 논적들이 출현했다. 따라서 차르녹의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교리 형성에 있어서 퍼킨스의 그것에 비해 그 구조적 및 내용적 상세화가 더욱 이루어졌지만, 교리 설명의 핵심에 있어서는 양자 모두 창조, 섭리, 예정과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관련하여 행하시는 능력과 주권에 중점을 두었다는 공통성을 가졌음을 우리는 발견했다. 그리고 전능 개념에 대한 중세후기적 이해들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상에서 절충적 혹은 중도적으로 “하나로서 수렴되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그분의 주권적 뜻의 절대성을 토미스트적 인과론의 틀의 배제없이 효과적으로 변호하고자 했다. 한편 전성기 정통주의에 더욱 활성화된 구속언약 개념의 발전을 통해 차르녹은 하나님의 전능과 절대주권을 더욱 충분히 강조할 수 있었고, 이는 기독론적 및 언약 신학적 측면을 강화시킴으로써 삼위일체신학의 틀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차르녹과 퍼킨스의 사상은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의 개념 구분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개혁파” 스콜라주의와 청교도적 경건을 정통주의기 개혁파 신학의 역사적 및 신학적 맥락 하에서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연속선 상에서의 변천은 발전인 것이지 결코 후퇴는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시 풀어서 설명한다면, 정통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전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는 오직 특히 피조세계와 교통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ad extra적 일하심의 측면과 관련된 삼위일체적 신학 체계와 결합된 하나님의 단순성 교리의 온전한 변호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더욱 견고한 추구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성기 정통주의 혹은 영국 청교도 신학의 절정기의 통상적인 신학적 주장의 형식적 틀인 설교적 강론의 사중구조(fourfold structure, 리-논쟁-실천)상의 마지막에 위치시킨 “실천적” 부분(practical part)과 관련되어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에서 강조한 면들을 보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즉, 차르녹의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에 관한 모든 논의는 궁극적 차원에서 볼 때 “교리 혹은 가르침”와 “경건”의 일치로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ologia nostra”인 동시에 “theologia ectypa”인)이라는 주제의 견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자 참된 종교(true religion)이기 위한 전제이자 필연적 결론으로 요청되어야 하는 신앙과 순종(faith and obedience)의 연결구조는 순례자로서의 신자의 전 생애의 국면에서 항상 요구되는 칭의와 성화의 당연한 산출물로서의 실천적 경건의 밑바탕이 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의 절대성에 관한 교리가 결코 경건의 성장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과의 연약적 연합(covenantal union)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온전한 삶을 지향하도록 이끄는 교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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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아폴로기아)
스테반 차녹- 손성은
2013-12-23 19:41:37
나는 신학교시절 때 거듭나지 못했었습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The New Birith 2부, 지평서원,2007)을 소개하면서
손성은 목사(45회졸업, 삼일교회 담임)
사실 되돌아보면 부끄럽고 뻔뻔스럽게도 여겨지는 일입니다. 저는 신학교시절에 거듭나지 못했었습니다. 신학교시절에 학우와 송도의 신학교 교정 한구석에서 깊이 시간가는 줄을 모른 채 나누던 대화의 주제는 주로 ‘믿음’에 관해서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안에 믿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믿음이란 진정 참된 믿음일까? 헌신을 한다고 하지만 왜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있는 것일까?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왜 자꾸만 기도하고 있는 나 자신을 의식하고, 나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소리를 듣고 있을 내 옆의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 당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아직 연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자라면 이런 어중간한 모습에서 더욱 확신이 있고 견고한 믿음으로 자랄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사역지로 나가게 되고 목회수련을 받는 현장에서의 모습은, 신학교시절의 나 자신과 별로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문제였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나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고 여전히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허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공허함이 실은 ‘거듭남’의 문제였었다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습니다. 사춘기시절 때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미 나는 거듭났었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부터 나 자신의 거듭남을 재검검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은 그런 나 자신의 재점검에 너무나 도움을 주었던 책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책을 도움을 받았던 것은, 거듭남이란 변화가 되는 것인데, 그 변화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제가 결정적으로 새롭게 깨닫게 되었던 것은, 거듭남이란, 단순한 생각이나 의지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이고, 이 마음의 변화란, 기질과 습성의 변화를 포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 이전에 내가 변화되었다면서 거듭났다고 확신하고 있던 나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변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스테판 차녹이 변화되었다고 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구도(seeking)의 과정에 있었던 셈입니다. 이때 ‘구도’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 것이 비슷한 어간에 접하게 되었던 피터 마스터스목사의 『영혼의 의사』(개혁과 부흥사, 2005)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래도 확신해 왔던 거듭났음을 부인하고 나 자신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자 결심하였던 것은 사춘기시절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어떤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하나님’이란 것이 모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또한 이런 ‘체험’에 기초해서 신학을 하기로 그 당시 목사였던 선친에게 신학하겠노라고 말씀드렸던 것은,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구원의 감격과 소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무척이나 존경하였던 아버지에게 형보다 더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형 에서의 복을 차지하고 싶다는 동생 야곱의 마음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위로는 형을 둔 차남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노라는 생각 그 깊은 곳에는 형을 이기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또한 ‘좋은’ 목사로서 인정받으면서 살겠다는 야망과 허영이 공존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야망이, 이런 허영이 저의 깊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믿는다 하나 여전히 믿지 못하고 헌신한다 하나 여전히 진정한 헌신에 이르지 못하는 저의 믿음의 실체였고 본질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저는 부인하는 모양만 있었고 십자가를 지는 시늉은 하였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부인하지도 십자가를 지지도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일반대학교를 다녔고 대학원을 다니다가 그런 학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 양 착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쥐꼬리만한 생활비를 받으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수련을 받는 것이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대단한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허영의 시장’에는 이런 인생도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었는데 믿음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야망과 허영을 감추기 위해서 믿는 척 해 왔던 그것을 믿음인 양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 자신에게 너는 분명히 거듭나지 못하였다고 날카로운 칼을 갖다 대면서 고발하였던 책이 바로 이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함께 이런 나 자신의 거짓된 거듭남의 상태를 지적해 주었던 책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Religious Affections』라는 책이었습니다. 이전의 ‘체험’이란 것이 거짓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참된 체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주님의 은혜를 맞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맛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의 일부가 인터넷상에 ‘손목사의 회심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저는 참된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한 후 이런 가르침을 가져오게 하였던 책자들을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스테판 차녹의 책도 그 일부가 번역되어서 제가 가장 충격적으로 읽었던 거듭남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부분도 곧 번역될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하지만 묘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지평서원과 연관된 어떤 분이 어떤 계기로 영국에 있던 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누는 이야기 중 스테판 차녹의 책이 번역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번역할 수 있겠느냐 제안을 하였습니다. 마침 번역자를 기다리고 있던 출판사에서 번역요청이 들어왔고 단숨에 번역을 끝내어서 출간된 것이 『(바로 알아야 할)거듭남의 본질』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스테판 차녹 (Stephen Charnock)은 1628년 런던에서 Lancashire 지방의 명문 가문에 출생합니다. 아버지 Richard Charnock은 런던의 변호사였습니다. 14세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훗날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William Sancrift의 지도를 받는데, 그 때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18세에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어느 가정의 목사로 목회를 시작했고, 시민전쟁이 발발하자 Southwark에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사역을 합니다. 1650년에 옥스퍼드대학교에 대학원 특별 연구생으로 등록하여 Thomas F. Goodwin (1600-1679)과 John Howe같은 청교도의 거목들과 함께 일하고, 1652년 옥스퍼드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1656년까지 옥스퍼드대학의 학생감 (proctor)으로 섬긴 후, 아일랜드 총독 Henry Cromwell을 수행하는 전속 목사로 일하기도 합니다. 1660년에 다른 청교도 목사들처럼 차녹도 목사직 수행을 금지 당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이 15년 동안 그는 연구에 집중했으며, 목사직이 회복되자 Crosby Hall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680년 7월 27일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판단력과 상상력이라는 두 날개를 달고, 열심과 근면이라는 두 바퀴를 가졌던 차녹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복지를 묵상하며 실천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명쾌하면서도 설득력과 십자가 복음에 기초한 감동을 갖춘 탁월한 설교자였던 그는 ‘하나님의 손이 빚은 설교자’라고도 불렸으며, 신학 저술은 청교도뿐 아니라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제가 그 일부를 번역한 거듭남에 대한 책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다룬 그의 책『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은 이 분야에 있어서 소위 압권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본질』은 스테판 차녹의 『The New Birith』라는 책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필요성을 다룬 뒤에 나옵니다. 차녹은 거듭남의 본질을 다룬 뒤에,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가 하는 그 과정에 대해서, 말씀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마지막으로는 거듭남의 근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조명합니다. 이 중에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부분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것처럼, 『거듭남의 본질』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모두 5부로 되어 있는데,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에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이라고 설명한 후 거듭남의 본질을 정의 합니다. 2부 ‘무엇이 거듭남인가’에서 거듭남이 아닌 것들을 지적한 후, 내외적인 변화로서의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와 은혜로운 습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등을 다룹니다. 4부 ‘적용’에서 참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과 영광 중에 완전하게 된다는 소망이 주는 위로 및 자기 점금을 위한 시금석을 다룹니다. 마지막 5주 ‘권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가는 새로운 피조물과 여전히 옛 사람을 벗지 못하고 사탄의 형상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 각각 권면을 제공합니다.
차녹은 거듭남과 관련된 다른 용어를 비교해서 오해를 제거합니다. 그에 의하면, 첫째, 영적인 변화인 ‘거듭남’과 영적인 활동인 ‘회심’은 다릅니다. 거듭남은 하나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며, 회심은 이 힘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으로 우리가 전환할 수 있는 원리를 받고, 회심은 바로 전환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거듭남이 원인이라면 회심은 결과입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수동적이지만, 회심에서는 능동적입니다. 둘째, 차녹은 거듭남과 칭의를 구분합니다. 칭의는 죄인의 상태에서 의인의 상태로 바뀌는 관계적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죽은 자가 생명을 가진 자로 바뀌는 실제적 변화입니다. 셋째, 차녹은 거듭남과 입양을 구분합니다. ‘입양’이 칭의에서 파생되어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로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주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 자녀됨의 본성을 줍니다. 또한 차녹은 거듭남과 성화를 구분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게 되는 습관인 ‘성화’도 거듭남과 다릅니다.
거듭남은 본성의 파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은 본성 속에 이미 새겨져 있던 그 무엇을 끌어내어 다듬는 것도 아니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은 죽어 있는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무 (無)에서 사람이 창조된 것 같이 새로운 창조입니다. 거듭남은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은혜에 의한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그 변화란 죄로 뒤틀린 기질이 벗겨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로 옷 입는 것이고, 이해력, 의지, 양심, 정서와 같은 곳에 있게 되는 전인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난 자는 죄의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로 이끌리는 은혜로운 습관을 가지게 되는데, 이 새로운 습관으로 인하여 옛 습관을 이기면서 역동적이고 지속적이며 자연스럽고 유쾌한 방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물론, 새로운 이 피조물 안에는 연약함과 남은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약함과 부패함을 점진적으로 극복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새롭게 창조하신 성령님의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의 거듭남에 대한 간증을 들으면 거듭남에 대해서 너무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성화’나 ‘이차적 축복’을 ‘거듭남’으로 오해시키고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기독교인들을 정의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3)고 합니다. 현대 교회는, 이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인의 정의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본적인 정의에 따라서 아직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받아들이고 세례를 베풀어서 일군으로 삼습니다. 현대교회, 특별히 한국교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서 다른 어떤 방법을 시도해서 개혁해가려고 한다 하더라도 미봉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덤을 평토장하고 회칠을 하는 것과도 같은 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것, 바로 이 책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입니다.
감사하게도 요즘 이런 방면의 책자들이 국내에서 많이 출간되고 있어서 관심을 조금만 기울여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이전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보다 훨씬 쉽게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시절에 거듭나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지만, 거듭남에 대한 책자들이 보다 더 많이 공급되어 있었더라면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저의 회심과 거듭남의 때가 좀 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 당시에 거듭나는 은혜를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 해 보고, 좀 더 일찍 거듭나서 그 모든 사역들이 참된 열매를 맺고 보다 더 풍성하지 않았을까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가장 합당한 때를 조정하시기에 우리는 오직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쉬워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바로 이 글을 씁니다. 신학교시절에도 아직 거듭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테판 차녹의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스테판 차녹의 [중생의 본질] 번역을 드디어 마쳤습니다. 지평서원에서 모두 5권으로 나눠서 출간하게 되는 차녹의 『새출생』의 두번째 장에 있는 내용인데, 중생의 필요성을 다루고 있는 1권에 이어서 이 2권은 그 중생의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중생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서는 아마도 첫 번째 책이 될 것입니다. 중생에 대해서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예 다루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의 회심의 문제에 대한 자극이 피터 마스터스목사의 회심의 모델에 의해서 되어졌다면, 그 모델에 근거해서 나 자신의 참된 회심을 추구해갈 때에 제일 도전이 되었고 참고가 되었던 책이 바로 차녹의 이 책, 그리고 이 부분이었습니다. 저의 회심이야기를 듣고 이미 이 책에 대해서 언급해 두었었지만, 이제야 저의 회심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이제부터 싸움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더욱 들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싸움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대신한 셈입니다. 이번 여름이나 가을께에는 나오게 될 이 책을 꼭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스테판 차녹에 대해서 간단한 그의 생애와 그의 저작들에 대해서 소개해 놓는 것도 그의 [중생의 본질]을 읽어가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번역하게 될 책은, 『믿음의 확신』(Assurance of Faith)입니다. 중생의 본질문제를 다루고 나면, 믿음의 확신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침 이런 주제로 역사신학적인 관점에서 요령있게 정리하면서 쓴 것이 조엘 비키(Jeol Beeke)교수의 책인데, 비키교수와 만나서 대담을 나누는 중에, 저에게 번역을 맡기겠다고 약속도 있고 해서, 좋은 출판사를 만나 한국에 빨리 그의 책이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차녹의 '중생의 본질'에 대한 논지가 어떻게 청교도들 사이에서 이해되고 있는지를, 존 오웬, 토마스 굿윈, 그리고 알렉산더 콤비 등의 신학들을 소개하면서 발견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 책은 영미신학과 유럽(특히 화란)의 신학을 잘 대비시키고 있는 책이기도 해서 한국교회가 청교도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더우기나 현대에 일고 있는 청교도신학에 대한 수많은 오해들을 제대로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비키교수가 최근에 발간한 『청교도약전』(Meet the Puritans) 이라는 일종의 청교도들의 생애와 저자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책(896페이지;Reformed Heritage Books, 2006)에 나오는 스테판 차녹부분을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손성은).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 1628-1680)
스테판 차녹은 1628년 런던의 캐더린 크리(St.Katherine Cree) 교구의 변호사였던 리챠드 차녹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차녹은 1642년 캠브릿지의 엠마누엘 칼리지에 들어가서 훗날 캔터베리대주교가 되는 윌리엄 샌크로프트(William Sancroft)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캠브릿지에서 지내는 중에 차녹은 중생을 체험하고 복음을 만민에게 전할 열망으로 가득해 집니다. 1646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1640년대 후반에 어느 가정에서 목사로서 얼마 기간 훈련을 받은 뒤 런던의 수돗크(Southwark, 이 단어는 특별하게 런던사람들이 ‘수돗크’라고 발음하는 것이 전통입니다)에서 목회를 시작합니다.
차녹은 옥스포드로 옮겨 뉴 칼리지에 등록해서(1650년), 1652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는 1654년에는 학생감(proctor)이 됩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는데, 특별히 성경의 원어와 개혁주의신학, 스콜라신학, 교부신학, 그리고 철학에 정통했습니다. 옥스포드에 지내는 중에 그는 대학 내의 토마스 굿윈에 의해서 집회를 가지는 교회에 속했습니다.
1655년, 차녹은 헨리 크롬웰(올리버 크롬웰의 아들이면서 아일랜드의 총독이었던)을 대동해서 군종으로 아일랜드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청중들이 그 시내의 모든 신사들과 상류사회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는데, 원고도 없이 했던 그의 설교는 심오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차녹은 1660년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왕정복고로 인해서 직위를 잃고 15년 동안 런던지역에서 생활비도 없이 살았습니다. 의료행위를 하면서 연명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네델란드와 프랑스지역을 순회하면서 설교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더블린성(Dublin Castle)을 되찾기 위한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부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1666년에는 런던대화재로 인해서 그의 연구실의 모든 책들이 전소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연구하고 글을 쓰면서 캘러미(Calamy)라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아주 대단한 학자이면서 또한 뛰어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인 경건생활과 성경의 원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고 합니다.
1675년, 차녹은 런던 비숍게이트(Bishopgate)거리의 크로스비 홀(Crosby Hall)에서 모임을 가졌던 비국교도 교회였던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의 교회에서 공동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1680년 사망할 때까지 봉사하였습니다. 만년에는 기억력과 시력이 떨어지면서 사역을 하기가 힘들었는데, 강단에서 긴 설교노트에 의존했고 그것을 읽기 위해서 확대경을 이용해야만 했었답니다. 그렇게 되면서 그의 설교는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가기에는 점점 힘들어져 갔지만, 목사들과 분별력이 있는 식자들은 마지막까지 그의 설교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의 생애에 그가 출간했던 유일한 책이 『악한 생각의 죄됨과 그 치료』(The sinfulness and Cure of Evil Thoughts)라는 설교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크리플게잇 실행(Cripplegate Exercises)에 실렸다가 리챠드 로벗츠(Richard Owen Roberts)에 의해서 청교도의 설교들(Purtian Sermons)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차녹 사후에 그의 옥스포드시절 친구였던 아담스(Richard Adams)와 빌(Edward Veal)이 원고를 준비해서 출간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대형 2절판크기의 두 권짜리로 출간되었는데, 그 뒤에는 약간 적은 8절지 크기의 다섯 권짜리로 재판되어 왔습니다.
최근에 재판되고 있는 그의 책들을 소개하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그리스도』 (Christ Crucified: A Puritan’s View of Atonement, CEP;207페이지; 1996). 모리스 로벗츠(Maurice Roberts)에 의해서 편집 소개된 이 판은 원판보다 훨씬 읽기가 쉽습니다. 신구약을 연결시키면서 차녹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의 요구를 완성시키셨나를 설명합니다. 특별히 유월절의 중요성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유일한 유월절(the Passover)이 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설교들은 주의 만찬(그 목적, 주제,합당치 못하게 참예하는 것, 자기검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그 자발성과 받아 들여질 만한 성격, 그리고 필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Divine Providence, IO;150페이지;2005). 역대하16장9절에 근거해서, 차녹은 깊은 통찰력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면서, 목회적이면서 경험적인 관심으로 다양한 적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섭리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존 플라벨(John Flavel)의 『섭리의 비밀』 (Mystery of Providence)이라는 책자 그 다음으로 압권입니다. 현재 판은 1864년 제임스 니콜(James Nichol)이 출간한 차녹의 『작품집』 (Complete Works)에서 취한 것입니다.
『중생론』 (The Doctrine of Regeneration, GM;306페이지;2000). 이 논문은 중생의 필요성에서 시작해서 그 본질과 그 저자(충분한 저자이시고 유일한 저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도구, 그리고 복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차녹은 바로 이런 말로 이 책을 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기다리기 전에 모세가 탄원하였던 것처럼 당신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오면 내가 무엇을 위해서 가야하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탄원하십시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Baker:1,149 페이지; 2000). 원래는 개인의 일기였던 이 부피가 두껍고 고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1681~1682년 니콜시리즈(Nichol series)로 출간된 그의 저작집의 1권과 2권으로 되어 있습니다(여기에는 섭리에 대한 그의 설교가 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건전한 신학과 심오한 사상의 보고이며, 하나님을 겸손하게 경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실제적인 무신론, 영으로서의 하나님, 영적 예배, 하나님의 영원성, 불변성, 편재성, 전지성, 지혜, 능력, 거룩, 선하심, 통치,그리고 오래 참으심 같은 강설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르고 있는 바로 그 책(the work)입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필독서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열 두 번째 강설은 150페이지나 되는데, 영어로 기록된 모든 문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 판에는 차녹의 생애와 성품에 대해서 흥미로운 얘기를 시밍톤(William Symington)이 그 서론에서 덧붙여놓고 있는데, 그의 인생의 마지막 3년을 차녹은 이 주저에 매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그는 신학대계를 작성할 의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52세로 소천하여서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더 이상의 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The Knowledge of God, BTT;604 페이지;1995). 차녹의 전집의 이 네 번째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죄의 확신, 불신앙, 불신자들의 비참, 불신자들의 표지, 주의 만찬의 목적, 주의 만찬의 참석자들, 주의 만찬을 합당치 못하게 받는 것, 자기검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우리의 유월절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죽으심, 그리스도의 죽음의 받아들여질 만함, 그리고 그 복종의 받아들여질 만함. 이 책은 심장하고 약간 반복이 심한데, 그러나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또한 체험적입니다.
『새출생』 (New Birth, BTT;544페이지;1996). 원래 차녹전집의 세 번째 책인 이것은 중생, 중생의 도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중생의 저자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정결케 하는 덕을 담고 있습니다. 약간 반복적인 면도 없쟎아 있지만, 이 책은 기독교의 근본교리에 대한 최고의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 (Truth and Life, BTT;592페이지;1997). 차녹전집의 다섯 번째이면서 마지막이 되는 이 책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 그리스도의 승귀,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믿음의 대상, 고난, 복음의 제거, 자비의 수용, 죽임, 약한 은혜를 승리가 되게함, 생각의 죄됨과 그 치료, 교회의 안정, 11월5일(영국의 구원된 것을 기념하는 해), 기도의 기쁨,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탄식함, 해산하는 여인들을 위한 위로, 중생한 자들의 죄, 죄의 용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감, 하나님의 최상의 자비하심의 대상으로서의 죄인의 괴수됨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니콜시리즈에 실린 차녹의 작품들에 대한 색인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중생은 영적인 변화(change)이며, 회심은 영적인 활동(motion)이다. 중생으로 하나의 힘이 부여되고, 회심은 이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중생에서 우리들에게 전환할 수 있는 원리가 주어지고, 회심은 바로 그 전환하는 것 자체를 말한다. 그 원리로서 우리가 자연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회심은 하나님에게 실제로 고정시키는 최종단계(terminus ad quem)로서의 우리의 행동이다. 중생은, 행할 수 있는 능력(pos s e agere)을 제공하고, 회심은 그렇게 주어진 것에 근거해서 실제로 행하는 것(actu ager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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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회심은 결과라고 한다면, 중생은 원인과 같다. 생명의 활동이 있기 이전에 생명이 생겨야 한다. 생명이 활동의 원인인 것이다. 언약에 있어서, 새 마음, 새 영, 그리고 그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과는 구분된다.(겔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또한 그것들은, 하나님의 길로 우리가 처음 들어서게 되는 것과도 구분되며, 우리들의 그 이후의 활동의 원인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I will cause you to walk in my s tatutes).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며, 우리를 회심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그 힘을 작동하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성상 죽어 있어서, 그들 위에 무거운 돌이 올려져 있는 상태이다. 중생은 그 돌을 그것이 올려져 있는 마음에서부터 굴려 없애버리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회심이란, 살아난 몸이 활동하게 되는 것처럼이나 자연스러운 일로서 중생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활동의 원리가 활동을 산출하는 것이다.
둘째, 중생에 있어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하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능동적이다. 마치 어린 생명이 자궁에서 처음으로 수태가 될 때에 그 생명의 유입을 위해서 아무런 공헌을 하는 것이 없지만, 생명이 유입된 이후에는, 그 생명이 능동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활동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피조물 편에서의 어떤 그 무엇에도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활성화된 이후에는 우리들이 그 분의 보시기에 능동적으로 또한 자발적으로 행하게 된다. 호세아 6장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살리시며…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고 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그 분 앞에서 행하게 될 것이며, 또한 ‘여호와를 힘써 알게 될 것이다.’
중생은, 피조물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인 반면에, 회심은, 그 하나님의 활동에 의하여 주어진 첫 번째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하게 되는 피조물의 활동이다. 이 첫 원리에서부터 모든 이후의 행동, 곧 믿는 것, 회개하는 것, 죄를 죽이는 것, 죄를 각성하게 되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 사람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원리가 주어지는 것에 있어서는 단지 수동적일 뿐이다.
이 모든 행동들은 그 첫 은혜의 유입을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의지의 작용인 것이다. 회심은 주님께 우리를 드리는 것이다(고후8:5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우리 자신들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그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전적이며 순전한 것이고, 주님 자신께로 말미암아서 가능한 것이다. 새롭게 된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다고 하지(롬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끌려진다거나 강제를 당한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의지 속에 있는 어떤 경향과 성질을 넣으시는 것은, 그것을 각성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하지만, 그 경향의 힘을 따라서 그 경향이 주어진 의지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며, 피조물의 활동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인도해 가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이에게 생명의 원리를 제공해 주며, 그를 손을 잡고는 인도해서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아이 안에는 이런 움직임의 원리가 있고 또한 그렇게 움직이고 싶은 의지가 있을 때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된다.
중생한 날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날이며, 그 중생으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시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그래서,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 피조물이 능동적이어야 하지만, 그 능동적일 수 있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나 자신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산불능의 자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먼저 영혼 안에 심겨 진 것이다.
스테판 차르녹(Stephan Charnock, 1628-1680) 의 거듭남의 본질 중에서 (지평서원)
중생은 왜 필요한가?(롬8:8)
스테판 챠녹(Stephan Charnock)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8)
주장 1. 구원에 이르는 상태와 지옥에 떨어질 상태가 있다.
영혼의 상태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한 가지는 구원에 이를 상태요, 다른 한 가지는 지옥에 떨어질 상태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어느 한 가지 상태에 속하게 되어 있다.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있고 성령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롬 8 : 8) 또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롬 8 : 13) 돼지처럼 죄 속에 뒹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탁월하고 고결한 대상에 영혼의 즐거움을 두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는 그 밖의 다른 상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성경은 전자(육에 속한 사람,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를 가리켜 어두움이라고 부르고 후자(성령에 속한 사람,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를 일컬어 빛이라고 부른다.(엡 5 : 8)
부패한 본성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다.(롬 8 : 8)
주장 2. 아담 안에서 죽었기에 다시 태어남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어떤 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행위언약) 아담 안에서 인류가 범죄했다고 말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 계약(행위 언약)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원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의 상태는 중립 상태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인간의 영혼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죄로 오염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하기에 양질의 교육을 받아도 사람 속에 있는 부패함은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시 58 : 3)
⑴ 선악의 분별도, 선을 행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엡 4 : 22) 여기에서 '유혹의' 라는 말은 - 악을 선이라고 나타냄으로써 우리를 속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고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이라는 말은 우리의 의지가 부패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욕심에 이끌린다는 것은 의지가 부패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꾸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는 고장난 시계와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기능들이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더 나은 기초에 근거해서 다시 만들어지고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⑵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을 받았지 육체를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활한 본성과 마귀적인 습성이 우리 안에 계속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오직 중생만이 자연적 출생으로 태어난 인간의 난폭성을 제거할 수 있다.
⑶ 선을 행할 수도 없는 무능력한 상태로 전락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움직일 수 없다. 또 건강하지도 않고 기력도 없는 사람은 맹렬하게 활동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를 결핍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 수 없다.
주장 3. 중생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중생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르신다. 그러므로 영혼 안에서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중생은 동일한 한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시는 것이다.(롬 8 : 9)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들 안에는 동일한 기질이 발견된다.(의에 주리고 목마름, 애통함, 상한 심령,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 하나님과의 평화와 하나님의 평화를 구함)
자아와 우리 자신의 이성과 우리 자신의 의지를 세워 놓고 그것들 앞에 절하고 그것들을 섬기는 것은 감각 없는 형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형상을 숭배하는 것보다 더 사악한 우상숭배이다. 만일 모든 우상 숭배가 금지되었다면 외면적인 우상 숭배는 말할 것도 없고 내면적인 우상 숭배도 똑같이 금지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자아를 앞세우는 것이 부패한(거듭나지 못한) 본성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신(하나님)으로 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타락한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본성을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본성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서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 : 3)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에 대해서(신 10 : 16) 줄기차게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롬 2 : 29)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불결함에서 변화를 받지 않은 채로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주장 4. 중생 없는 자에게 행복을 주시겠는가 ?
창조 직후 인간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특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지금의 그런 부적합함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중생(다시 태어나는)하는 것이다.
⑴거룩하신 분이 불결한 피조물과 교제하시겠는가 ?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갖추지 못한 어떤 사람을 천국시민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사람과 친밀한 방식으로 풍성한 교제를 나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춰볼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 : 7)
서로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는 두 개체 사이에 우호적인 교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한 쪽이 변하여 상대편과 같아지지 않는 한 말이다. 늑대와 양, 어둠과 빛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성이 바뀐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1 : 17) 그러므로 인간의 편에서 변화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⑵지혜로우신 분이 마귀의 자녀를 사랑하시겠는가 ?
거듭나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리라는 헛된 소망을 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겠다. 우리는 반드시 거룩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주장 5.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의 중생 때문이다.
중생에 관한 교리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와 선생으로서 이 세상에 널리 반포해야 했던 여러 가지 핵심적인 교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가지였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 사이에 특징적인 차이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무슨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겠는가 ?
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함이다.
지옥의 원인이 되는 죄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또한 죄의 결과가 되는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죄책(심판과 멸망)에서만 구원하시는 것이고 죄악 된 본성은 그대로 남겨 두시는 것이겠는가 ?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반쪽 구원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극히 위대하신 구주께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우리를 임박한 진노로부터 건져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진노를 초래하는 궁극적인 원인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그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딛 2 : 14)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처리하실 때 반드시 죄악 된 본성도 동시에 제거하신다.
⑵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다. (요일 3 : 8)
마귀의 일은 두 가지인데,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발생하는 비참이다. 그런데 만일 죄악 된 본성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마귀의 일은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것이다.
⑶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벧전 3 : 1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방하신 원인이었던 우리의 부패함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인가 ?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한 옷을 입혀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만일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본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피조물 안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죄의 오염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그 피조물을 하나님께 인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를 흡족하게 여기실 수 있겠는가 ?
주장 6. 중생이 필수적임을 알리시려고 성령께서 일하신다.
성령께서 임하신 목적은 중생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표명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하는 것이다.(딛 3 : 5, 살후 2 : 13)
만일 아버지 하나님과 어울리는 원리가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질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
하나님과 하나님 경배하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마음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
또한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속에 어떻게 거하실 수 있겠는가 ? (고전 6 : 19)
주장 7. 중생은 영혼의 모든 지체에 필요하다.
영혼의 모든 기능은 한결같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기능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회복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상태는 시계의 핀 하나가 고장난 수준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부분에 죄와 사탄이 짓밟고 간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딛 1 : 15)
주장 8. 중생의 절대적 필요는 우둔한 자도 깨닫는다.
사람의 지복(至福)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적인 이성도 우리가 지순(至純)한 왕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든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철학자 플라톤 - "원래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신적인 원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말되었다. 그런데 신은 다시금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신적인 본성을 가진 영혼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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