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개혁과 교회개혁- 손성은
2013-12-23 19:42:30
부흥과개혁제3차카페포럼발제원고
2005년8월7일
자아개혁과 교회개혁
I. 서론
한국교회의 터가 무너지고 있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내외부의 비판과 함께 커지고 있습니다. 한편 반가우면서도 이 교회개혁의 논의가 쇼나 프로그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소리들도 함께 들려옵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오늘 모임이 바로 그런 비판과 경고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믿습니다. 역사적인 교회개혁운동, 혹은 부흥운동이 모두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저도 오늘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두를 떼고 싶습니다. 시편기자의 탄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시편11:3입니다. 시편기자가 그 답을 모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사회는 총체적으로 부패해져 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이고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하는” 사회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뒤덮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그렇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않아도 실감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시편기자의 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4절에 강조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7절)고 합니다.
저는 시편기자의 답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회심”이고, 또 하나는 “부흥”입니다. 그 두 마디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감”(Returning to God)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말들을 압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2-3). 예레미야의 선포의 핵심이 이것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롐2:13). 호세아 선지자는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로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음을 반복하면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아4:6,8,9,10,11,5:4,5 등)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답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같으면서 실상은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에게 멀어지는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개혁을 논하면서 단순한 프로그램이 되고 쇼가 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거짓되게 돌아오는 것과 그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교회개혁에 대한 논의가 참된 기초를 형성하게 될 것이고 흔들리는 터를 새롭게 세워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발제를 통해서, 첫째, 회심 없이는 부흥과 교회개혁은 없다는 점과, 그 회심과 부흥을 위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아개혁과 교회개혁의 모델이 무엇이며, 구체적인 그 모델의 적용이 우리의 현실교회에 어떻게 가능한 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회심 없이는 부흥도 없고 교회개혁도 불가능합니다.
원리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너무나 진부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가 없도록 먼저 개념정의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A. 개념정의
“회심”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되 개인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들이 개인을 넘어서서 집단적인 역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회심”과 “부흥”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주도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해서 반응하게 되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아개혁”이라 하고,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교회개혁”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회심과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그것에 부응하게 되는 자아개혁과 교회개혁은 바로 그 역사에 의해서 감동된 사람들의 역사, 곧 나의 역할이 강조된 표현이고 정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정의는 “회심-부흥/자아개혁-교회개혁”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와 나의 반응이라는 두 차원, 두 측면에서 동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 이런 개념정의가 요청되는 것일까요? 바로 가짜회심과 가짜부흥을 참된 회심과 참된 부흥에서 구별해내기 위해서 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회심과 부흥을 인간의 힘으로 일으키려고 할 때에 그것이 가짜회심과 가짜부흥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식상한 얘기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구분은 좀 더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또한 이런 이해에 기초할 때에, 우리의 할 일로서의 자아개혁과 교회개혁의 논의가 더욱 심도 있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허공을 치는 교회개혁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구분에 대한 논의는 필요할 것입니다.
B. 기질과 습성의 변화로서의 회심, 그리고 부흥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도 일종의 “개혁”을 추구합니다. 이 세상과 자기가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도덕관이고 구원관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대안제시가 인간중심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예가 “회심”에 대한 이해입니다. 유교에서는 “회심”을 자기훈련의 반복에 의해서 성품과 체질이 변화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반복적인 훈련에 의해서 좋은 습관이 형성되는 것이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선비가 공부를 한다는 것과 무술인이 쿵푸를 하는 것이 근본적인 면에서는 이렇게 반복적인 훈련에 의한 습관의 형성에 있습니다. 마음이 변해서 새사람이 된다는 것의 기본은 바로 이런 반복적인 자기훈련입니다. 불교에서 “도를 닦는다., 혹은 “마음을 닦는다. 는 말도 표현상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주 유사한 기본전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힘과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과 변화의 철학은 서양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기본이 이런 반복적인 자기훈련을 통해서 일종의 “덕”(德,virtue)을 형성하는 것이 “윤리”(倫理, ethics)입니다. 어떤 “덕”이 가장 덕다우냐는 그 기준을 논의하는 것이 덕의 도, 곧 “도덕”(道德, morality)이 되는 셈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회심, 곧 사람의 변화에 있어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반복적인 자기훈련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지”입니다. 곧 의지로 인한 자기결심입니다. 동서양 고금의 모든 철학과 종교의 근본적인 가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적 결심으로 자기변화가 가능하고 곧 인간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오직 성경만은, 다른 주제들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만, 이 회심에 있어서도, 그들 동서양고금의 철학이나 종교와는 전적으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 자신의 반복적인 자기훈련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변화가 가능할지는 몰라도(이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구원에 이를 정도로 근본적인 근원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예로 들라면, 예레미야서 13장23절의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을 들 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그 피부를 변조시키려고 무던 애를 썼습니다만, 그 부작용 때문에, 또한 애를 많이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스스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동서양고금의 철학과 종교의 노력이 바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반복적인 자기훈련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세상사람들의 종교와 철학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회심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지적인 결심과 반복적인 훈련으로서 어떤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신학이 바로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입니다. 이런 철학이나 종교, 혹은 부흥신학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강한 의지를 가진 자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일반적인 소위 상식들이 모두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의지는 구원에 이르고 약한 의지는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회심관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반대하는 것이 성경의 회심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의지로서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지 자체가 타락하여서 그런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인간의 의지에게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의지의 타락뿐만 아니라 의지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시14:1,51:1참고)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에게는 회심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자기개혁”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개혁이 가능한 사람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에 의해서 자신의 전적 무능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전적 타락과 무지와 무능을 발견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자신의 새롭게 하려는 의지와 노력조차도, 자신이 보기에 가장 아름답고 의롭고 거룩하게 보였던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의 의에 비춰서 가장 더럽고 추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발견 자체가 “은혜”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그런 발견 자체가 그 사람이 지혜롭고 똑똑하고 아니면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발견은 단순한 지적인 통찰이나 이해가 아닙니다.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찔러 쪼개고 그 본질과 밑바탕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통회와 회개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걸고 자신의 죄인됨의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모든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고 지금까지 자기에게 걸어왔던 모든 희망과 기대가 산산히 부서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이 생깁니다. 돌아가도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 돌아갈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서게 될 때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새로운 기질과 습관입니다. 이 기질과 습관은, 나의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주어지는 덕으로서의 습관과 기질과는 다릅니다. 나의 의지로 인해서 형성하게 되는 습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에게 덧입혀 주시는 습관이요 기질입니다. 이것이 주어질 때에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고 평가하게 되고 새롭게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일러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라고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의입니다. 이 정의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으면 그 교회는 무력한 교회가 됩니다. 부패한 교회가 됩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고 빛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기개혁”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자기개혁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어서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에 있는가. 아닌가를 확증하는 표시가 바로 “내” 혹은 “우리”안에 그리스도의 내주와 교제를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내적으로 누려지지 않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바울사도는 지금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전적으로 돌아서라. 어중간하게 돌아서지 말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증”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요구되는 것이 “자기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화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날마다 지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참된 회심의 표와 참된 부흥의 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개인적으로 누려지고 있는 것이 참된 회심의 표라면, 그것이 교회 내에서 성도들과 누려지고 있는 교회가 바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기준이 아니라, 바로 이런 누림과 사귐이 부흥의 참된 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심과 참된 부흥의 표를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지만,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제가 빠진 것들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고 결격사유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과 부흥에 대한 기초지식을 전제로 해서, 논의를 더욱 개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회심, 곧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기질과 습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으로서의 회심이 자아개혁과 교회개혁을 위해서 함축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음 항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B. 대안적 삶과 사회건설로의 부르심으로서의 회심
회심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첩경입니다. 회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지만, 회심은 그 구원을 즐거워하며 자족하는 삶으로의 부르심이 아니고 그 구원을 살아가도록 하는 삶으로서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대안적 삶으로서의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안적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안적 삶이란,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 철학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한 바울사도가 곧 이어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고 한 것이 바로 대안적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안적 삶을 그리스도인 개개인으로서 적용할 수 있고 교회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저는 교회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곧 대안적 사회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급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안적 삶으로서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그 대안 속에 세상의 종교와 철학적 가치를 끄집어 들여올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과연 대안적 삶과 교회로서의 모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모델이 성경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델이 우리의 자기개혁과 교회개혁의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개혁의 모델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는 앞에서 회심과 부흥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새로운 기질과 습관을 부여받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회심이 되고 가짜부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참된 회심이요 참된 부흥이라면, “어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참된 회심이요 참된 부흥인가?
너무나도 쉬운 질문입니다. 쉽게 답이 나올 듯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답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 혹은 “거룩의 하나님”으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맞는 답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함축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우리의 심상 속에는 어떤 부분에서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고 다른 부분은 무시되고 있는 면을 고려할 때에 그 균형을 잡고 올바른 성경의 하나님을 말할 때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A. 윤무적 삼위일체의 하나님(Perichoretic Triune God)
삼위일체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도 삼위일체 신앙에 대해서 이해하는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부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자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골고루 강조한다고 하면서도 그 삶의 스타일을 살펴보면 삼위의 한 분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쉬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잃어버린 아버지”(The Forgotten Father)라는 제목의 책으로 성부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각의 삼위 하나님을 강조하기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한 분되심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그 신앙패턴이, 인간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창조주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와는 삶이 연결되지 않는 멀리 존재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하기 쉽습니다. 성자 하나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면,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 대속의 완전함을 강조하다가, 성령의 은사와 활동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길을 던지곤 합니다. 성령 하나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은사주의운동의 수많은 병폐들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하나님의 “삼위”에 대해서 강조하다 보면, 자칫 삼신론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결국, 각 개체의 존재 하나하나의 유일성을 강조하다가 개인주의적 사고유형의 사회를 양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상대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그 반대로 “일체”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그 “일체”를 빌미로 인해서 집단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유형을 낳고 결국은 절대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돌아가려고 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질문이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결국은 엉뚱한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성경적인 이방신들이라면 그 엉뚱함을 금방 눈치챌 수 있지만, 소위 성경적이라고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조차도 주의하고 조심해서 분별력을 갖고 성경적인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적인 균형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내재적 관계를, 고대교부들, 특별히 갑바도기아 교부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은, “윤무”(perichoresis)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peri(둘레)”와 “choresis”(춤)의 합성어인데, “원형을 이루는 춤”, 우리말로는 “강강술래춤”을 연상케 하는 표현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각각 다른 분이면서도 일체되심을 표현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완벽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으려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윤무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교회개혁의 논의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 문제를 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볼 “윤무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함축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하나님이 바로 인간창조의 원형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곧, 그러한 윤무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곧, 인간이 그렇게 윤무적 관계를 가진 채로 창조되었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참되게 인간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회심은 타락한 인간이 참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부흥은, 타락한 인생들이 집단적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과 참인간이 된다는 것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없이 참 인간됨이 있을 수 없고, 참 인간됨이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무적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하나님이시고, 또한 우리의 개혁의 모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개혁이 지향해야 할 스타일과 목표를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은 참인간이 되는 것이고, 참인간들로서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교제를 누림과 동시에 참인간이 되며 그 참된 관계의 회복이 바로 우리들의 개혁의 지표가 되고 스타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모든 것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적용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회심과 부흥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교제의 누림이 참된 회심과 부흥의 표시입니다. 셋째,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윤무적 삼위일체의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넷째, 윤무적 삼위일체의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참인간이 되는 것이고 참인간으로서의 관계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원리가 오늘 교회개혁포럼을 통해서 교회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적용을 위한 일종의 전제가 될 것입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그 대안을 저는 세 가지로 나눠서, 첫째, 삼위일체의 성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성육하는 교회, 둘째, 성령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춰서 하늘과 땅의 교통을 추구하는 교회, 성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춰서 종말론적 교회라는 항목으로 교회개혁의 구체적인 적용을 시도해 보고, 그런 적용이 과연 앞서 정리한 네 가지 원리들에서 어긋나지 않는 지를 검토해 봄으로서 본 발제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각각의 항목들이 삼위 하나님의 개별적인 활동이라는 면에서 삼위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B. 성자 하나님(땅)과 교회개혁 – 성육하는 교회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육하셨습니다. 땅(아마다)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흙(아담)이 되셨습니다. 교회개혁은 바로 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육해야 한다는 것은 땅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땅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 땅 자체가 더렵혀진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통해서 땅의 분배문제를 교회가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한국교회의 첫 번째 개혁대상임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구약을 살펴보면 그 사회에 악이 팽배해질 때에 땅이 더럽혀진다고 합니다(예, 레18:24). 사회가 음란할 때에 땅이 더럽혀 집니다. 공의롭지 못할 때에 땅이 더럽혀집니다. 그렇게 땅이 더럽혀졌을 때에 그 땅을 더럽히는 거민들을 토해낸다는 것이 성경의 희년사상입니다. 희년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균형 잡힌 실천입니다. 성자와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 가운데에 참된 희년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초대교회가 그것을 누렸습니다(행2:43-47, 4:32-35).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오염시켰습니다. 현대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이 땅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가 부동산관리문제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땅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부동산투기형태의 부당이익을 노리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기도원, 교회묘지, 수양관 등).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한국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부당이익들을 사회나 (연약한 교회?)로 환원해야 합니다. 그런 부당이익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던 것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서 정직해야 합니다.
부동산관리문제의 정직성과 더불어서 동산관리의 투명성이 요청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투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영국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회재정을 정기적으로 교회외부의 공공기관에서 감사를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사회가 교회를 향해서 그런 감사를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교회의 권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저는 한국교회도 그런 일이 생길지 두렵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타 교단, 혹은 타 교회에 자기교회의 재정을 감사할 수 있도록 위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동산관리문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들이 많습니다. 교회재정운용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동산, 부동산의 문제, 곧 돈의 문제를 개혁하는 것은, 한국교회개혁의 일차적인 선결문제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한국교회가 돈의 문제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곧 그것이 우상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우상을 깨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개인적으로는 자기개혁이요, 교회적으로는 교회개혁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교회개혁의 동기가 언제나 성육하는 교회로서의 자기개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의 고통에 참여하는 마음, 곧 성육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의 문제, 부의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해결이 아니라, 주시는 부와 물질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물질을 잘 관리함으로 인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부분을 언급합니다.
성육하신 성자를 따라서 땅을 치료하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그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없이는 말의 잔치이고 사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는 자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부흥하는 교회는 이 세상의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땅의 음란과 불의를 치료해가는 교회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는 부흥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땅을 치료하는 문제는 교회의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과 장애우들에 대한 의식, 남북통일문제, 동남아지역평화문제와, 교회연합문제, 교회내 여성문제 등도 재고하게 합니다. 또한 돈의 헌금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리고 헌금문제는 예배와 정치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그것을 다음 항목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B. 성령하나님과 교회개혁-하늘과 땅을 잇는 교통하는 교회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은 예배입니다. 하지만 실상 예배만이 아니고 교회정치도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져야 하는데, 교회에서 먼저 하늘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 이뤄지도록 하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예배의 개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예배의 모든 행위와 순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예배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회심”의 감격과 즐거움으로 구원이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는 교제와 사귐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와 찬양단, 기도와 헌물, 성찬과 세례 등등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예배의 개혁이 가능해 질 수 있는 대안으로서는, 저는 언약공동체 형성과 신조교육의 강화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배가 고백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성령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이 체험되는 예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하도록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예배자들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국청교도의 전통에 의하면, 신조교육을 통해서 함께 언약을 맺으면서 서약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께 언약을 맺은 자들로서 예배를 드립니다. 실상, 그것의 원형이 세례(혹은 침례)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교회는 해마다 이런 언약을 재체결하기도 합니다. 이런 언약체결을 통해서 이런 예식이나 신조들의 의미가 좀 더 진지하게 검토되고 회복되도록 시도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갱신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게 된 목사들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자기들의 신조고백을 재 다짐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각 교단들이 현재 고백하고 있는 그 고백이나 신조들의 의미를 참으로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없이 또 다른 개혁의 깃발을 내어 건다고 하는 것은 교회개혁을 프로그램으로 삼는 것이고 쇼이며, 또한 교회개혁을 빌미로 해서 경건을 위장하는 위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교단들의 신조를 가정의 부모들이 숙지하고 자녀들에게 교육시킬 수 있기까지 한국교회가 훈련되어지고 쇄신될 때 한국교회개혁은 그렇게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각 교단들이 그 교단이 형성된 근본정신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최소한 말로 고백하는 그 정신 자체를 실천하게 될 때에 모든 교단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부흥의 운동기에 그런 역사들이 많이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와 정치문제를 고려하면서 이것을 성령하나님과 관계시켜 논의해 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는 예배의 정신과 교회행정이나 정치의 정신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은혜롭게”(?) 드렸는데, 그 “은혜로운” 예배후의 제직회나 당회, 혹은 노회나 총회는 그렇게 “은혜롭지 않게” 진행되는 예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배와 회의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예배나 회의가 모두 같은 신앙으로 고백된 언약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면, 이런 이원화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은혜”라는 빌미로, 회의의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된다든지, 마땅히 있어야 할 비판들이 금지된다면 그것은 “거짓된 은혜”일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회의는 “정당한 비판”을 허용합니다. 그것을 또한 겸허하게 듣는 심령이 또한 성령충만한 “회의”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권징”이 논의되고 함께 기도하게 되는 회의, 그런 곳에 “교권”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장로와 목사의 갈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장로와 목사가 공히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성령충만한” 정치와 예배가 가능해 질 것입니다.
이런 교권의 문제는, 특별히 교회개혁의 모델이 되는 윤무적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려할 때에, 구체적인 도전이 됩니다.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중들이 모두 윤무적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을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회중을 섬기도록 허락하신 은사나 직무가 비인간화되어지는 것은 은사의 타락이고 직무의 타락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고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성경적인 개혁이 될 것입니다. 참인간이 되는 길, 참인간으로서 교제하는 길이 이것입니다.
C. 성부 하나님(하늘)과 교회개혁 – 종말론적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론적 긴장의 삶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았으되 아직 완전치 못한 자로서, 회심하였으되 여전히 성화되어가야 할 사람으로서 자아를 개혁해 가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남은 삶의 평생토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때로는 거룩과 경건의 삶에 진전이 더딜 때도 있고, 어느 한 순간의 하늘의 영광이 지상에 임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끝이 아닙니다. 아직 끝이 많이 남았습니다. 내일 주님이 오실 지라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매진하는 것이 또한 필요합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겠노라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그 영광을 성자에게로 돌렸고 성자는 그 영광을 성부에게로 돌렸습니다. 교회개혁도 또한 그 영광을 성부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개혁이 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언제나 그 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면서 해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개혁이라는 너무나도 당위적인 요청조차도 그 방법과 스타일을 하나님께 의뢰하면서 시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개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이 표현되는 교회개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교회개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상교회는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향해서 모든 것을 진행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교회개혁을 시도해 갈 때에, 교회개혁은 개혁이지 결코 혁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하게 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개혁을 위한 개혁은 참된 개혁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교회질서를 파괴하면서 그것이 교회개혁이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개혁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개혁을 시도하면서 그 열매를 내가 거두리라는 욕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은 종교개혁 당시부터 회자되어 왔습니다.
결코 교회개혁은, 한 번 유행하고 말 어떤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도 유행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10년 주기로 어떤 프로그램이 유행하다가 시들해지곤 합니다. “교회개혁”이라는 그렇게 되고 말 프로그램일 것인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오늘 포럼에 참석한 우리도 그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할 것입니다. 개혁은 젊음의 한 객기가 아니고 평생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일신 우일신입니다. 유교가 제창했던 그런 삶의 자세만 아니고 복음이 담긴 그런 자세, 복음으로 변화된 그런 자세가 바로 개혁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의 모습으로 대를 이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V. 결론: 대안사회를 향한 의식화운동을 제안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향하여 대안사회를 이뤄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이것에 있습니다. 비록 소수인 듯해도 남겨두신 칠천 명이 있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남은 자를 그루터기로 사용하셔서 새 시대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꿈을 잃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다 배도의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비록 나 한 명만 남는다 하더라도 이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나는 사람들을 설득시켜 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인의 “의식화운동”입니다. 비밀스러운 하나님나라의 동지의식을 가진 자들을 “포섭”합니다. “불온선전물”인 성경을 퍼뜨립니다. 그 안의 내용을 암송하고 또한 되새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합니다. 온 세상이 보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으로만 확실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통치를 선전합니다. “왕이 오신다.” 는 이사야의 선전이 그러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우리의 선전과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개혁운동은, 이런 의식화운동입니다. 잠자고 있는 교회의 의식을 깨우는 운동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신의 영광을 누릴 수 없는 운동입니다. 욕 듣기 쉬운 운동입니다. 허망하게 무너져 버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하여서도 그렇게 청춘과 젊음을 바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명을 바칠 수는 없는 것입니까? 더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모든 세상의 가치를 뒤엎어버리는 이 복음의 위력과 능력을 알지 못해서입니까?
한국교회에 교회개혁이 화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전략이 모색되어야 할 때입니다. 개혁의 모델이 논의되어야 할 때이고, 그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윤무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개혁의 모델로 제시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을 그 터가 무너지게 되면 의인이 어찌할꼬? 하는 질문에 답으로 제시해 보았습니다. 새로운 답이 아닙니다. 오래되고 오래된 답입니다. 선지자들의 답입니다. 신조로 돌아가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서 답은 오직 하나 오직 하나님께서만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델을 검토하면서 대안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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