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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니우스의 창조론- 박찬호

이레니우스의 창조론- 박찬호

2013-10-22 19:13:43


이레니우스의 창조론
Irenaeus' Doctrine of Creation

박찬호
Chan Ho Park

백석대학교 신학과
Department of Theology,
Baekseok University, Seoul
EMail : chanho@bu.ac.kr


(Received December 24, 2010,
Accepted January 15, 2011)


[Abstract] Irenaeus' doctrine of creation has a present implication to contemporary Christian discussion on creation and redemption. Gnosticism was an antithesis to Irenaeus' theology in general and is still a danger to our Christian faith. While Irenaeus refutes gnosticism, he gives a constructive system to biblical teachings of creation. Via the idea of the Son and the Spirit as two hands of God, Irenaeus can evade the neo-platonistic mediation theology of creation.


I. 들어가며
II. 영지주의
III. 저스틴 마터와 이레니우스
IV. 이레니우스의 삼위일체론적 중재론
V. 오리겐과 이레니우스
VI. 나가며


I. 들어가며

지금의 프랑스 동남부에 위치한 리용(Lyons)의 감독 이레니우스(Irenaeus, c. 125-202)는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 이전의 교부 가운데서 오늘의 신학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부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레니우스의 사상은 단순히 초대 교회 기독교 교훈의 역사적인 유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지역의 서머나(Smyrna)에서 태어났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Polycarp, AD 69-155)의 제자였는데 폴리캅이 부활절 일자 문제로 154년 로마에 갈 때 동행했으며 로마에서 공부한 후 남 고울(Gaul)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 되었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재위 161-180)의 박해 때인 177-178년에 선임감독 포티투스가 90세의 고령으로 순교하자 그 뒤를 이어 리용의 감독이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그의 이름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평화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 논쟁을 좋아하는 소심한 교리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성실한 목회자요 사도적 진리에 대한 위대한 증언자였으며, 날카로움과 비판력 강한 철학자라기보다는 경험 많은 설교자였다.

이레니우스는 2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사람이었는데, 2세기 후반부의 교회는 대외적으로는 아직 박해를 받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영지주의의 위협과 몬타누스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 두 도전에 대항하여 당시의 교회는 (1) 신앙의 표준(rule of faith)을 발전시켰으며 (2) 감독 제도를 강화했고 (3) 신약의 정경 확립 작업을 서둘렀으며 (4) 개별적으로 분리된 교회가 유기적인 단체가 되게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몬타누스주의보다 영지주의가 훨씬 중대한 문제가 된다고 판단하였는데 그의 현존하는 작품이 대체로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반면에 몬타누스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동정적인 이해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레니우스는 정통교회와 몬타누스주의자들 사이에 극단적인 투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몬타누스주의자들에 대해서 성령의 기적적인 힘을 믿는 그들의 믿음, 그들의 도덕적인 엄격성을 찬양하면서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경건한 자극과 예언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무조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이단들에 대항하여>(Adversus Haereses, Against Heresies)라 불리는 이레니우스의 저작은 <거짓된 거짓 영지의 간파와 타도>(Detection and Overthrow of the Pretended but False Gnosis)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정확한 라틴어 번역으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책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2권은 주로 발렌티누스주의 영지주의를 중심으로 영지주의의 이단성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음 2권은 정경인 성경을 토대로 하여 건설적인 교훈을 진술하고 있으며, 마지막 5권은 부활과 종말에 될 일을 설명하고 있다. 

1세기가 사도들의 시대였다면 2세기 전반은 속사도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레니우스가 활동했던 2세기 후반은 변증가들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과는 그 방향을 달리한 사람이었다. 변증가들이 이 시대에 기독교 철학자들로서 대외 사상을 다루었다면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정통 신앙을 계승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교회에 가르치기에 힘쓴 신앙의 의식적 계승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 정통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는 영지주의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반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창조와 구속이 분리되는 것은 일종의 영지주의적 성향인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도 영지주의의 위협은 교회 안에 상존하고 있다. 창조주와 구속주를 분리하려 했던 영지주의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반론을 통해 우리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


II.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창조를 열등한 신의 작품으로 보고 물리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부터 날카롭게 구별하여 입교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숭고한 신적인 존재와 연합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지식을 제공하였던 다양하고 널리 퍼져 있던 종교적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지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혼합주의 운동으로 그럴만한 흥미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니이브(J. L. Neve)는 초대 교회 시대에 영지주의가 발흥하게 된 이유를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고대 세계는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어 버렸으며 따라서 무서운 기근, 즉 구원의 결핍으로 인해서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2) 고대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도입한 유익하고 갱생시키는 감화력을 기뻐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만족을 하지 못하였다. (3) 당시의 이지적이고 개화된 사람들은 기독 교회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철학적 사상과 원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4) 이교의 정교하고 신비적인 종교의식에 친숙했던 사람들에게 교회의 예배는 이상하게도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영지주의는 단일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여러 사상이 혼합된 운동이요 그러하기에 그 주장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지주의의 특징을 들라면 이원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지주의 이원론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하에 형성된 시리아 사상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페르시아의 이원론은 신화적인 것이었으며 두 가지 상반되는 원리, 즉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지주의에 있어서는 이러한 빛과 어둠의 신화적 이원론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다. 즉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물질의 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와는 태초부터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에서 정신적 원리 가운데 일부가 물질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이 시작되었으며, 또 죄와 고통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이원론 하에서는 물질 세계는 죄악시되었고 일반적으로 구약의 야훼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던 물질 세계의 창조주(demiurge)는 비록 전적으로 악하고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열등하고 적대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결국 영지주의의 주된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물질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빛의 세계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에 대하여 콜린 건톤(Colin E. Gunton, 1941-2003)은 창조론과 관련하여 4가지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피조된 세계의 기원을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는 다른 열등한 신성에로 돌리고 있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기껏해야 비물질적인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알리신 하나님에 의해 그 사역이 교정 받아야만 하는 열등한 신일 따름이다. 둘째로, 영지주의는 첫째 주장의 결과로서 창조의 중재를 주장한다. 물질세계의 창조는 최고의 신의 성취일 수 없기 때문에 모종의 위계질서에 있어 하등의 존재에 의해 중재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셋째로, 영지주의에는 창조와 구원 사이의 절대적인 이원론이 존재한다. 넷째로, 어떤 면에서 창조론의 토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주의의 악에 대한 설명이다. 세상이 물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악이 있으며 그러므로 악의 원천이 피조된 바로 그대로의 세계에서 발견된다.

한 마디로 영지주의는 물질세계의 선함과 실재성에 대한 헬라 철학의 의심 위에 세워진 기독교 이단이었는데 건톤에 의하면 지금도 교회 안에 남아 있다. 현대 영성신학의 대가인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  )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A Conversation in Spiritual Theology)에서 이러한 영지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영지주의는 종교의 혈관 안에 있는 바이러스이며 대략 매 세대 새 상표를 달고 아주 새로운 것인 양 광고를 하며 계속해서 재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잘 관찰해 보면 홍보사만 갈아치운 옛 것임이 판명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지주의는 단지 지나간 세대의 이단적인 종교 사상이 아니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영지주의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가득하다.” 한 마디로 “영지주의는 우리에게 창조의 불편함이 없는 영성을 제안한다.... 영지주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는, 적어도 나 자신 안에서 내가 감지하는 신성의 불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도 없는 영성을 제안한다.”

신학의 주요한 두 과제는 비판적 과제와 건설적 과제다. 신학의 비판적 과제는 하나님 및 우리 자신과 세상에 관한 믿음을 기독교 자료, 특히 성경 메시지의 중요한 규범에 비추어서 검증하는 것이다. 이 비판적 과제는 연대기적 순서상 첫 번째로 이루어졌다. 즉, 기독교 신학은 사도들의 가르침 이후에 교회 내에서 거짓 교훈에 대항하여 복음을 변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단은 정통의 어머니다.” 또한 “신학자는 자신이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이단자에게 빚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다른 말로 해서 이단(거짓 교훈)이 없었다면 신학이나 정통(올바른 가르침)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도 기독교회로 하여금 그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교회에 위대한 신학적 성취를 가져다주었다.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은 건톤이 요약한 영지주의의 네 가지 특징에 대한 반대를 통해 형성되었다.


III. 저스틴 마터와 이레니우스

건톤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3-165)를 이레니우스의 위대한 사상적인 선조로 소개하고 있다. 저스틴은 플라톤주의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개종 이후에도 플라톤주의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저스틴은 플라톤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 가운데 형상 없는 질료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저스틴은 그러한 표현에 대한 표준적인 플라톤주의를 수정하고 심지어 극복하고 있다. 저스틴은 결코 악의 근원을 물질에 돌리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물질과 접촉하실 수 없기 때문에 창조에 있어 로고스의 중재를 필요로 하셨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저스틴은 창조의 과정 자체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질서한 물질의 형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저스틴에게 플라톤적인 모델은 더 이상 어떠한 중요성도 지니지 않는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우리가 물질적인 육체 안에 갇히기 이전에 우리의 영혼이 익숙한 형상들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중재자들인 반면에, 기독교 신학은 지성의 신성과 같은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가르쳐져야만 한다. 비록 저스틴은 자신의 철학 선생에 대항하여 하나님께서 물질과 지성의 창조주라는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고, 물질과 지성 모두가 이미 존재하며 하나님에 의해 형성된다는 플라톤주의적 세계 안에 여전히 머물러있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의 영향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스틴의 중요성은 우리로 하여금 발전의 과정 중에 있는 전통의 어떤 부분을 보게 해준다. 신학은 인간의 지성이나 성경본문, 또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완제품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제시되는 질문들로부터 형성되며 한 세대에 의해 주어진 대답이 또 다른 세대에 의해서 보완되고 교정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간다. 새로운 인식론적인 요구를 실현하는 가운데 새로운 존재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저스틴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상황적인 필요에 의하여 최초로 철저하고 포괄적인 기독교 창조론을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이레니우스이다.


IV. 이레니우스의 삼위일체론적 중재론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적 구원 개념을 적절한 창조 신학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름 아래 묶어질 수 있는 그러한 이단들의 형태를 통해 그 자신 직면하게 된 위기 가운데 창조론에 관한 그의 위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영지주의는 구원을 지식의 분여와 같은 용어로 이해하였으며, 그러한 종류의 지식은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 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는 구원을 성육신의 결과로 보았으며 주님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에 중심을 둔 공동체에서의 생명의 열매로 보았다. 이러한 생명은 하나의 결과로서 육체 안에서의 생명의 중요성을 포괄하는 것이다.

건톤이 보기에 이레니우스의 관심사 가운데 두 가지가 후대의 발전을 위하여 중요하다. 첫째는 물질을 포함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다는 그의 강한 확신이다. 피조된 세계 전체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긍정적인 태도의 기초에는 기독론이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안에서 인간적인 육체적 실체를 취하셨다면 창조된 어떤 것도, 분명 물질적인 어떤 것도 영지주의의 마니교적인 해석에서와 같이 비실체적인 것이나 반(半)실체적인 것, 또는 근본적으로 악한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

두 번째 이레니우스의 창조 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이레니우스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셨음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무로부터 창조 교리를 가리친 첫 번째 사람은 아니였다. 제랄드 메이(Gerald May)가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of Antioch)나 다른 사람들이 이레니우스보다 먼저 그런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무로부터 창조를 철저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말이지 사람은 무로부터 어떤 것을 만들 수 없고 단지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부터만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있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하나님 자신은 창조의 실체를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존재하게 하셨다” (Against the Heresies, 2.10.4). 이레니우스는 창조라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어야 하는데 만일 무엇이 있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모종의 제한을 가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유와 전능성과 상충되게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2.5.4). 이레니우시의 전능성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라는 사실에 호소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헬라의 신들은 전능하지 않으며 운명이나 우연이나 필연성에 굴복하는 존재들이다. 이레니우스의 하나님은 기독교적 이유들 때문에 전능하시다: 예수의 성육신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이것은 존재하도록 요청된 일들의 창조를 위하여 다른 도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독특한 탁월성이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은 만물의 형성을 위하여 적절한 동시에 충분하다” (2.2.4).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개념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가운데 나타내셨던 자유로운 관계가 지닌 함축성을 고려하는 곳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기독론이 이러한 특징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톤은 삼위일체론에 주어진 또는 주어지지 않은 자리가 어떤 창조론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 창조론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그 형성에 있어 거의 삼위일체론적이지 않은 창조론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있어왔는데 그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창조론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훼손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측면이 결정적이다. 첫째는 삼위일체론적인 모체(matrix)가 이레니우스로 하여금 중재의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레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두 손인 성자와 성령을 통해 창조하셨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이레니우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아닌 존재들과 관계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 측면은 동일한 실체의 다른 면, 즉 피조된 우주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자유를 드러내준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을 통해 창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그 자신과 세계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의 신들이나 신플라톤주의의 일자와 다르다. 즉 성부와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두 손을 통해 창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존재의 등급(degrees of being)이라고 하는 헬라적인 교리를 극복한 중재의 신학이다. 이러한 설명에서는 성자와 성령이 신적인 것과 피조 세계 사이를 중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중간적인 존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다른 것, 즉 피조된 질서라고 하는 단지 두 가지 존재의 등급만이 존재한다는 고전적인 기독교의 존재론이 여기에서 역사 속에 등장한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진실로 실재적이다. 하지만 창조는 계속해서 자신의 ‘두 손으로’ 붙들고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실재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유와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선함의 확증이라고 하는 이 양자를 함께 주장할 수 있었다. 다음의 본문은 이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보여준다.

우리를 만드시거나 우리를 형성하신 분은... 천사들이 아니었다.... 주님의 로고스 이외의 그 어떤 누구나 만물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어떤 능력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자신의 손을 소유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들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 그들 안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만물을 만드신 말씀과 지혜, 성자와 성령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4.20.1).   

따라서 이레니우스에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확립할 수 있는 확신과 이유를 부여해준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총괄갱신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는 창조와 구속의 경륜은 모든 피조된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드러내준다.


V. 오리겐과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c. AD 185-254)은 이레니우스 다음 세대에 속할 뿐만 아니라 이레니우스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오리겐의 성취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다. 오리겐을 보다 위대한 철학적인 세련됨으로 인하여 이레니우스보다 한 걸음 더 진전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창조론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을 유지하는데 실패한 것 때문에 한 걸음 퇴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건톤은 후자의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건톤은 오리겐이 이레니우스와 다른 점을 세 가지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오리겐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영지주의의 반론들 가운데 어떤 점에 대해서 보다 동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 세계에서 행운과 불행이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는 것은 창조의 선함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우선적인 반론을 제공한다고 영지주의는 주장한다 (On First Principles, 2.9.5). 오리겐은 신학자의 임무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라고 고소당하실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5.4). 둘째로 오리겐은 헬라의 철학적 전통, 특별히 기독교 시대의 초기 시대에 발전된 플라톤주의에 대한 종교적 해석에 대해 훨씬 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오리겐의 신론은 그의 창조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레니우스와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건톤이 보기에 오리겐의 하나님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학급의 크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와도 같아 보인다. 이러한 오리겐의 생각은 필로(Philo, BC 20-AD 50)와 유사하면서도 구별되는 두 단계 창조론으로 인도한다. 첫 번째 단계는 필로에게 있어서 플라톤의 형상들이 지니는 존재론적 상태와 유사해 보이는 로기카(logika), 즉 영들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오리겐의 주장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점은 분명하다. 첫째, 오리겐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라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둘째, 어떤 존재는 다른 존재보다 고상하고 그래서 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신플라톤주의에서와 같이 분명한 존재론적 위계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심의 영원한 대상이 로기카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오리겐에 따르면 로기카가 이전에는 그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관상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이들 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자신들의 자유를 남용하였으며 그래서 그러한 자유의 방향을 재조정함을 통해서만 그들은 신적인 것과의 연합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겐은 우리의 세계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 창조의 목적 또는 기능은 다분히 교육적이다. 즉 타락한 영들이 일자와의 연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한 훈련을 위하여 이 세계는 창조된 것이다. 오리겐은 나중에 만유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르친 것 때문에 정죄받았지만 그의 신학에 있어서 이것이 주된 문제는 아니다. 오리겐의 신학의 주된 문제는 오리겐의 종말론이 이레니우스와는 대조적으로 복귀(one of return)이다. 물질 세계는 종말론적인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영들이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원래적인 신적인 연합과 재통합을 성취하게 되면 불필요한 것이 된다. 이러한 종말론은 물질 세계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창조되었다는 복귀(return)의 종말론이다. 이것은 이레니우스와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이레니우스의 기독론적인 정향은 물질세계가 인류의 구속에 동참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훨씬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레니우스의 기독론은 세계로부터의 하나님의 완벽한 구별과 개입 양자를 확증하게 하였지만 오리겐에게 있어서는 멀리계신 성부 하나님은 플라톤적인 방식으로 중간 세계의 창조를 필요로 하였으며 물질 세계는 영적 세계보다 덜 실재적이고 덜 중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오리겐은 이레니우스의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주장을 여러 중요한 점에 있어 타협하고 말았다. 첫째, 영원한 창조라는 개념은 하나님과 창조 사이에 중간 세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사한 것임에 분명하다. 둘째, 두 단계 창조는 물질 세계의 중요성을 격하시키고 말았다. 물질 세계는 주로 또는 단지 ‘영적’ 구원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셋째, 가능 세계의 다양성이 가지는 가능성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오리겐은 우주의 순환적인 이론으로 보다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으며, 보다 중요하게 이 세계의 유일성을 의문시하게 되었다. 

   
VI. 나가며

이레니우스는 자신의 시대에 만연하였던 영지주의 이단의 성향과 치열하게 논쟁하였고 기독교적인 창조론의 바른 방향을 정립하였다. 삼위일체론적이고 기독론적인 정향을 통해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 및 플라톤주의의 중재의 신학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두 손으로서의 성자와 성령을 통한 창조를 주장함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통한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할 수 있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물질 세계의 선한 창조를 확언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성경은 기독교적인 종말론적인 비전 가운데 분명하게 물질 세계를 포괄하고 있다 (롬 8:21). 하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는 이러한 주요한 기독교 창조론의 특징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적인 성향의 가르침들이 끊임없이 기독교회를 괴롭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을 통한 바른 교정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잘못된 영성의 추구, 그리고 이원론적인 윤리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 가운데 있는 영지주의적 성향은 반드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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