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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의 일반은혜론- 유해무

카이퍼의 일반은혜론- 유해무

2013-05-30 21:37:50


1996,8,29

 

“한치라도 主의 것”: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혜론과 한국교회에서의 수용에 대한 평가

 

유해무

 

 

 우리 교회(‘고려파’)의 역사에서 ‘일반은혜’에 관한 소개는 박윤선교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는 ‘칼빈주의’의 주요 원리들를 소개하면서, 그 중에서 일반은혜를 언급한다. 그는 일반은혜란 신자나 불신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은총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카이퍼를 인용한다. 은혜는 인간의 전적부패를 전제로 하며, 특수은혜는 구원과 중생을 위한 은혜요, 보통은혜는 죄성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작용을 하며, 이 때문에 인류 사회에는 모종의 질서와 정의가 보존되어 있다. 나아가 보통은혜의 적극적 방면이 있는데, 죄세를 제재하면서 창조된 재능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존하신다고 부언한다. 그는 칼빈을 인용하면서, 칼빈(1509-1564)과 카이퍼(A. Kuyper, 1837-1920) 간의 연속성을 인정하고 있다. 즉 인간의 성품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나, 부패의 완전한 발동을 하나님의 은혜가 제재하고 있음을 두 사람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짧은 요약을 기초로 삼아서, 우리에게 소개된 일반은혜는 주로 카이퍼의 이론이며, 칼빈과 카이퍼 간의 내용적인 연속성도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카이퍼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양자간의 연속성의 의미를 추적하고, 또 우리 교회 내에서의 일반은혜의 의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I. 카이퍼의 일반은혜론

 

1. 박윤선이 말하고 있듯이,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고백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 일반은혜론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이퍼의 생애를 개관하여 보면, 일반은혜론은 비교적 후기에 정리되었다. 그에 의하면, 칼빈주의적인 예정론과 이와 연관된 은혜의 특수성은 은혜의 배타성을 뜻한다. 이런 은혜 이해는 성도들에게 세상과 성별되는 삶을 살게도 만들지만, 또한 세상 도피적인 삶의 가능성도 항존한다. 게다가 은혜를 받은 자만이 올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없는 세상이 교회보다 나을 때도 있다. 그는 이런 현상이 현실적으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카이퍼는 일반은혜를 연재하면서 三部作을 구상했다고 밝힌다. 먼저 그는 은혜란 구원은혜로서 개별적이라는 기조를 가진 역사적 개혁신학의 회복을 시도했다. 이 특별은혜는 하나님의 자녀인 개인의 영광된 구원을 다루기 때문에, 그는 이 특별은혜를 교회의 심장(cor ecclesiae)인 선택론과 연관시켜서 전개했다. 그런데 특별은혜는 언약은혜와 일반은혜의 배경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인은 결코 개별자가 아니다. 택자는 언약의 교제와 공동체의 일원일 수밖에 없는데, 그는 유기체인 교회의 일원이다. 이 은혜는 언약 안에서 유기적으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언약론이 없는 선택론은 결함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이 언약의 배경은 태초의 창조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개인이 포함되어 있는 공동체는 인류에 다시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은혜의 면에서 특별은혜와 언약은혜는 훼손되고 파괴된 창조를 보살피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은혜를 카이퍼는 일반은혜라 부른다. 그는 이것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한다. 즉 성령과 선택, 성자와 언약, 성부와 창조 사역의 통합이 특별은혜, 언약은혜 그리고 일반은혜의 이 삼부작으로 가능하여 진다. 여기에서 유기체 사상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는 역사에서 유기적 통일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기독론적이거나 구원론적인 신학을 거부함에서도 나타난다. 이 모든 은혜의 주목적은 죄로 손상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이다. 물론 창조도 하나님의 영광을 겨냥한다. 그러나 완성에서 예정에 의한 창조의 원래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창조의 계획이 연속되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일반은혜이다.

 

 이와 같이 일반은혜는 개혁신학의 독특성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카이퍼의 주장이다.(II, 274. 언약과 창조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은혜는 다만 개인주의적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의 대표적인 예로 카이퍼는 감리교를 든다.(II, 627). 사회적 관심과 창조에 관한 관심은 언약과 훼손된 창조를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접근한 개혁신학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이퍼는 개혁신학 안에서도 이런 위험은 상존한다고 본다. 즉 언약 고백이 없는 선택이란 언약중보자인 성자를 경외함이 없이 성령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이퍼의 일반은혜는 개혁신학의 독특성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개혁신학의 역사를 교정하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교정의 대표적인 예가 예정론이다. 카이퍼는 택자들의 구원에만 급급하는 예정론은 일반은혜의 포괄적인 사역을 도외시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개혁교의학에서 예정론은 주로 신론, 기독론과 구원론에서 취급되지만, 대개 반복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를 카이퍼는 예정론이 오직 특별은혜 및 택자들의 구원과 직결되어 취급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특별은혜가 작용하는 터전인 언약을 고려하지 않고 예정론이 취급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原子論的’인 예정론을 거부한다. 그는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선택론에서 다루려고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한 백성을 선택하셨고, 한 족속이요, 한 머리의 한 몸이며, 영적 유기체를 택하셨다. 유기체 만이 창조의 상태를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란 오직 택자들의 구원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이 사용하는 방편일 뿐이요, 이 유일한 목표를 위하여 성자가 중보자로서 한 방편이 되셨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과 전체로서의 창조와의 유기적 관계는 아예 무시되고 말것이다. 그러나 카이퍼는 택자만이 주인공이요, 불택자들의 운명은 무시하거나 이차적인 관심사로 전락시키는 개별주의적인 예정론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특별은혜 뿐만 아니라, 일반은혜도 예정에 포섭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택자들의 구원과 회복 가능성은 바로 인간 창조 자체에 기초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파는 이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예정론 안에 일반은혜를 포함시키지는 못했다. 즉 일반은혜는 창조에 근거하여 가능하며, 궁극적으로는 창조 작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성경적인 용어를 통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작정’이라는 용어를 보다 더 선호한다. 작정이라는 말은 위와 같은 통념적인 이해를 해소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능가하는 뛰어난 포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예정론의 관심은 예정의 대상인 인간이 아니라, 한 작정 안에서 선택과 창조가 지닌 관계이다. 즉 인간은 타락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타락으로부터 회복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타락 이후 계속될 파괴를 제어하는 장치로서 일반은혜도 그 한 작정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제어하는 장치인 일반은혜는 타락 뒤에 비로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창조가 지닌 가능성에 접목되어 있다. 그의 이 말은 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논리적 순서이다. 특별은혜만이 작정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혜도 하나님이 취하신 하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전체 역사를 포섭하며, 하나님은 작정에서 개인과 교회를 포함하는 창조를 겨냥하신다. 그리하여 전체 역사에서 창조로부터 당신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2. 이처럼 은혜라는 말 자체는 인간의 죄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타락의 수렁과 이로 인한 인성의 부패를 인정함도 일반은혜론의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다. 카이퍼는 일반은혜는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죄의 포악성에 관한 고백에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마귀 뿐 아니라, 하나님도 만난다. 항변파나 로마교는 죄의 심각성을 무시한다. 즉 그들은 타락 이전의 인간의 ‘本性’(natuur)을 출발점으로 삼기때문에 인간의 선성을 말한다. 그러나 카이퍼는 일반은혜의 출발점을 타락 또는 그 이후로 보면서 타락한 본성을 문제로 삼는다. 이에 반하여 재세례파는 세상을 악하다고만 보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신자의 소명을 무시한다. 이 양 협곡을 그는 일반은혜론으로 헤쳐 나아가려고 했다.

 

 ‘시민적 의’의 존재를 로마교와 개혁파는 공히 인정한다. 다만 이 사실에 대한 해석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즉 로마교는 이런 능력은 부분적으로 부패된 본성에서 나온다고 보는 반면에, 개혁파는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일관된 부패의 작동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일반은혜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은혜가 일차적으로 행하는 중요한 작용은 타락과 부패의 제어이다.

 

 카이퍼가 일반은혜의 출발점을 타락 후로 잡을 때, 그는 로마교적인 인간론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본성의 전적 타락을 고백하며, 로마교와는 달리 본성에 의한 공로를 부인한다. 로마교는 타락으로 인간이 창조시에 받았던 ‘原義’는 상실했지만, 본성 자체는 타격을 받지 않았고, 비록 연약하여 져버렸지만 본성의 순응에 의한 공로(meritum de congruo)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로마교는 이런 식으로 역사적인 타락의 의미를 무시하고서 인간의 본성을 창조 당시의 원래적인 본성으로만 접근한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타락의 타격과 창조 당시의 인간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만 일반은혜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I, 132. 인간은 피조 당시에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고, 거룩하고 의로웠는데, 이것이 원의를 이루어졌다.(I, 151. 그런데 로마교는 원의가 인간의 본성에 속했던 것이 아니라, 본성에 부가된 초본성적인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런 원의와는 상관 없이 모종의 ‘本質’(wezen)로 존속하다가, 초본성적인 원의요 내용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시되는 자질들을 부가적으로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락으로 인간은 죄인이 되고 본성에 부가된 원의는 상실되었으나, 본성 자체는 순수 본성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본성 자체는 은혜와는 무관하다. 이에 대하여 개혁파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으로 부패되고 손상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카이퍼는 타락 이전의 아담도 은혜로 살았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구원 은혜는 아니지만, 하나님에 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보존 은혜를 언급한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도 은혜 바같에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고백은 로마교를 대항할 뿐 아니라, 루터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즉 부분적으로 루터(1483-1546)나 Flacius Illyricus(1520-1575)는 죄인은 인간이 아니며 ‘木石’(stok en blok)으로 보았다. 이런 양 극단적인 주장들을 반대하면서 카이퍼는 인간의 본성(natuur)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의 구분을 도입한다. 즉 본성은 가변적이지만, 본질은 항존적이라는 구분이다. “인간의 본질에 속한 모든 것, 곧 바로 인간 자체를 구성하는 것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서와 같이 죄인에게서도 동일하게 존속한다. 변한 것은 그의 본질이 아니라 본성의 작용이다. 인간은 본질에서는 손상받지 않았고 본성에서 부패되었다.” 카이퍼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의 문제로 설명하는데,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되었고, 본성의 완전성에서 하나님의 모양이었다. 따라서 죄인도 타락 이전의 아담처럼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성의 완전성과 연관된 모양의 관점에서는 죄로 인하여 형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다만 ‘일반은혜’로 인하여 형상의 적은 부분들 만이 남아 있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회복되어 이후에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본다. 택자와 불택자를 막론하고 타락 뒤에 죄를 제재하는 은혜가 곧장 등장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적은 잔여물, 또는 불씨’가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과 본성에 관한 이런 구분이 묘하게도 로마교신학자의 비판을 받게 된다. 비판자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비판자는 본질과 본성이 대비적이지 않고, 본질의 대비語는 우연적인 것, 부가적인 것이라면서, 카이퍼가 본성이라는 말을 곧 바로 본성의 작용이라는 말로 바꾸는데서 본성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증거를 찾는다. 또 그는 인간이 죄로 본질은 손상당하지 않았으나, 본질은 부패했다는 카이퍼의 말은 자기 모순적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대하여 카이퍼는 본질은 존재를, 본성은 작용을 말하며, 이는 존재와 행위의 구별과도 유사하다는 식으로 답변한다. 그러나 카이퍼의 이런 식의 해명과 구별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며, 스스로 혼란한 모습을 보인다. “인간의 본성을 인간의 본질과 같은 말을 이해한다면, 죄가 인간의 본질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았으며, 본질의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의 전적 부패란 있을 수 없다.” 물론 카이퍼는 루터파를 대항하여 이 말을 한다. 이런 비판의 시도는 필시 로마교의 입장과 근접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카이퍼는 자신의 입장과 로마교의 분명한 차이를 들어내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카이퍼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의 선도 행할 수 없다’는 말을 로마교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한다. 이 말은 영적인 무능력과 구원을 얻게 하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뜻이지, 시민적 선에 관한 언급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민적 의도 하나님의 도움 바같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이 근본적으로 로마교적이어서, 타락 전에도 인간은 구원을 얻게 하는 선을 본성에 부가적인 은사인 원의로서만 소유한다는 명제로 발전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즉 죄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본성에는 시민적 의가, 부가적인 은사에 비로소 영적인 선의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역할을 자연스럽게 분담시키는 이원론이 펼쳐질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교는 연약해진 본성에서 시민적인 선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이퍼는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고수하면서 이런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인 일반은혜로 인하여 시민적인 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에 관한 해명을 시도하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이런 유(類)의 해명의 가능성을 거부하며 시민적인 선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인 일반은혜의 고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루터파나 재세례파를 대항하여 죄인은 연전히 인간이라는 주장을 위하여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구별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식의 구별이 로마교식으로 인간 내의 어떤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행위인 일반은혜를 도입한다고 볼 수 있다. 선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에서 카이퍼는 제삼의 규범으로서 법을 도입하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과 규율에 순응하면, 선을 행하는데, 선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다. 이처럼 루터파와 재세례파를 대항하여서는 타락 후의 본성의 ‘잔여물’을 말하고, 로마교를 대항하여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일반은혜을 주장하는 데에서 카이퍼의 일반은혜론의 양면성과 동시에 애매성이 있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해석의 도구가 로마교에서는 본성의 가능성이라면, 카이퍼에게는 일반은혜라는 개혁신학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능성보다는 죄와 그 결과의 억제하는 일반은혜라는 하나님의 행위가 그의 대안이다.

 

3. 카이퍼는 재세례파(Anabaptist)식의 도피 사조를 경고했다. 로마교의 인간론은 인간의 선성에 기초하여 필시 낙관주의로 발전될 수 밖에 없고, 반면에 재세례파는 창조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때문에 비관적이고 도피적이다. 이 경향에 대해서 카이퍼는 창조/재창조의 도식으로 대항한다. 일반은혜의 등장으로 심판과 永死는 이후로 연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와는 상관 없이 애초에 작정하신 대로 인류는 존속하고 발전한다는 뜻이다. 이 일반은혜로 인하여 구원은혜와 택자들의 성화도 가능하여진다. 그리고 이것은 사탄의 궤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은혜에 의한 창조의 보존을 통한 재창조가 아니라, 재세례파식으로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면, 이런 심판 연기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또 그는 개혁파 신조들이 말하는 잔여물을 때로는 ‘본성의 빛’(licht der natuur; lumen naturale)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타락한 인간 가운데도 어느 정도 선이 있고, 신자 가운데도 어느 정도 악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래도 호감이 가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 가운데서 타도록 유지하시는 본성의 빛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이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국 일반은혜 때문이다(롬 2장). 즉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지금도 기록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일반은혜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원래의 영적인 사역을 완전히 중단하시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일반은혜의 기능은 ‘본성적인 신지식’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이 본성적인 신지식은 일반은혜와는 달리 죄와 부패를 억제하는 기능은 없다. 그는 또 ‘종교의 씨와 신의식’(semen religionis et sensus divinitatis)도 일반은혜 덕분에 타락한 인간 속에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카이퍼에 의하면, 이런 측면을 무시하는 재세례파의 입장은 필시 세상 도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향은 옛사람을 완전히 부인하고서 새로운 창조를 말하며, 실상은 창조를 무시하는 이원론이다. 재세례파는 유기체 개념을 알지 못하며, 인간관은 전적으로 원자론적이다. 재세례파는 개별자들의 집합인 교회만이 거룩하고 세상은 죄로 가득 찼다는 이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죄악시하라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죄로 가득 찬 세상에 자비를 가지시고, 죄와 저주를 억제하신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개혁파는 이 경향과의 투쟁에서 “아주 단호하게” 일반은혜를 주장했다. 카이퍼가 일반은혜의 출발점을 타락 후로 삼는 것은 對로마교적인 발상이요, 일반은혜가 죄를 억제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잔여물이 있다는 주장은 對재세례파적인 경계이었다.

일반은혜에서 사상의 안정을 찾은 그는 기독교계를 세상 내의 활동에로 불러 모았다. 일반적인 재세례파적인 경향과 당대의 경건주의적 경향과 이와 유사한 사조에 대한 경고였다. 특히 ‘민초들’(kleine luyden)로 형성된 개혁파 신자들의 정치 참여를 겨냥하고 있었다. 카이퍼는 일반은혜론이 개혁신학과 칼빈주의를 다시 흥왕시킬 것이다라고 까지 말한다.

 

4. 카이퍼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일반은혜와 연관시킨다. 하나님은 거룩과 주권으로 모든 죄를 대적하신다. 만약 죄에 대하여 거룩만이 지배한다면, 일반은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 가운데서도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인내하심으로 일반은혜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래 참는 중에 죄에 대한 진노를 연기하시고, 의의 징벌을 일정 기간동안 유보하신다. 이로써 일반은혜가 개입하며, 역사도 계속되고 특별은혜를 위한 공간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카이퍼가 일반은혜를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시키면서 특히 성부의 사역으로서의 일반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카이퍼는 일반은혜을 때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성령은 피조물을 원래의 목표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만든다. 성령은 완성의 길을 방해하는 죄를 대항하여 택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전체가 이 목표에 도달하게 역사하신다. 전자의 사역은 구원사역이라면, 후자는 자연적인 삶의 실현에 있다. 창조주 성령은 은사를 주며 생명의 불씨가 불로 켜지게 하며, 또한 만물을 보존한다. 그는 만약 성령의 사역이 오직 구속받은 자들을 죄로부터의 구원함에만 국한된다면, 즉 죄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창조와 인간의 본성에 미치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강조한다.

 

5. 창조와 일반은혜의 관계는 예정론에서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창조 자체에 뿌려진 ‘배아’들이 일반은혜의 억제를 통하여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심겨져 있는 씨들이다. 예정론에서 특별은혜와 일반은혜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카이퍼는 양자를 항상 구별한다. 특별은혜는 개별적이고, 택자들에게 주어지지만, 일반은혜는 본성 또는 인류 전체를 겨냥한다. 양자는 상호 분리가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일반은혜가 없으면 택자들이 출생할 수 없으며, 선택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별은혜는 일반은혜를 전제하며, 전자는 후자가 서 있는 광범위한 터전이다. 그러므로 후자 없이는 전자가 작용할 수 없으며, 이 규정 하에서만 택자와 불택자의 반제(antithese)가 성립된다. 카이퍼는 특별은혜와 일반은혜의 관계를 성자와 연관시켜서도 설명한다. 즉 창조중보자로서 성자는 일반은혜를, 구원중보자로서는 특별은혜를 운용하신다.

 

 죄와 저주의 억제가 지금까지는 일반은혜의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카이퍼는 이것을 일반은혜의 소극적 역할이라 부른다. 카이퍼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은혜의 적극적 역할을 전개한다. 일반은혜는 소극적으로는 죄의 전면戰을 제재하면서, 이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적인 자질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타락한 본성과 이 본성이 행할 악한 작용 사이에 개입하시고, 이 작용이 어느 정도까지는 당신의 뜻에 부합하게 되도록 일반은혜를 통하여 일하신다. 그것은 일반은혜의 풍성한 시혜인데, 인류의 삶을 점차 진보시키며, 이 진보로 인하여 인류를 더 풍성하고 완전한 발전에로 이끈다. 일반은혜의 양면적인 작용을 그는 다시 항구적 작용과 진보적인 작용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항구적인 면은 하나님이 다양하게 본성의 저주와 마음의 죄를 억제하시는 면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진보적인 면은 하나님이 진보로 통하여 인간의 삶을 고난에 대항하여 점차로 풍성하게 만들며, 내적으로는 보다 풍성하고 완전한 발전에 이르게 하심을 말한다. 일반은혜의 항구적 작용에서 하나님은 인간 바같에서 일하신다. 그리고 카이퍼는 항구적 작용을 다시 두가지 측면들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님은 먼저 ‘자연’ 안에서 죄의 파괴력을 제어하사 죄가 세계를 단번에 파괴하는 것을 막으신다.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죄의 파괴력을 제어하사 시민적 의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가능하게 하신다. 죄에서 제어되는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이 작용은 항구적이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일반은혜가 인류를 보존하고 또한 운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작용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요 동역자로 일한다.

 

 카이퍼는 이 발전적인 측면을 두가지 면에서 말한다. 한편으로는 억제라는 항구적인 작용의 덕에 ‘내적으로’ 시민적 의, 가정, 본성적인 사랑, 덕, 공적인 양심의 강화, 법질서, 상호 신뢰 등이 인류의 삶에 스며든다. 또 ‘외적으로’ 자연 정복, 발견과 발명 등이 삶을 풍부하게 만들며, 빠른 정보 교환과 교통의 발전, 문화와 과학의 진보 등으로 삶의 질이 향상된다. 그러나 카이퍼는 이 외적 발전이 반드시 내적 발전을 도모하지는 않으며, 도리어 외적 삶의 발전이 내적 삶의 열악이 공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로써 일반은혜를 통하여 새로운 주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문화이다. 이것도 예정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원 전에 구상되어 역사의 흐름에서 집행되어진다. 이제는 인간의 본성과 창조세계가 동시에 이런 과정에서 발전된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심어두신 것이 발전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계역사를 통하여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진 모든 문화를 포함한다. 일반은혜에 의한 이런 발전은 하나님이 세계의 발전을 위하여 행하시는 큰 사역에 불가분의 요소를 이룬다. 일반은혜의 문화적 측면을 카이퍼는 다시 구별하여 설명한다. 일반은혜의 고립된 작용을 통하여 특정 시대에 구체적인 지역에서 제한적인 족속들을 위하여 발전하다가 소멸되거나 약화된 경우로서 카이퍼는 이를 일반은혜의 ‘특별 행위’라 명명한다. 舊아메리카, 중국, 일본, 인도 및 부분적으로 이슬람圈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 포섭되어 이후 18세기동안 꽃을 피우면서 전인류에 봉사하고 있는 문화권이 있다. 그는 이를 일반은혜의 ‘보편 행위’라 부른다. 고대 바벨론, 에집트, 그리스와 로마에서 예비되다가, 기독교를 거쳐서 그의 당시에 유럽과 미국에서 발전되고 있던 문화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보편적 인류의 발전이란 그리스도 이전에는 없었다고 말한다.

 

 또 카이퍼는 하나님 형상론을 새롭게 해석한다. 카이퍼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되었다는 사실에서 형상의 ‘사회적 요소’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요소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으며, 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실 때에 인간의 본성에 보다 높은 인간적 발전을 위하여 무수한 ‘배아’를 심어두셨다. 그런데 이 배아들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발전되어 진다. 인류에 포함된 각 개개인은 이 발전에 고유한 기여를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카이퍼는 인류를 유기체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이런 창조질서는 일반은혜를 통하여서만 발전될 수 있다. 이로써 그는 하나의 문화철학을 창안했다. 카이퍼의 일반은혜론은 그의 세계관이다.

 

 카이퍼의 일반은혜론은 일차적으로 제세례파적인 세상 도피의 기독교를 겨냥하고 있다. 특히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남아 있는 잔여물이나 시민적인 의에 관한 언급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필시 로마교적인 본성/은혜의 도식에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이런 낙관적인 인간론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본성에 관한 이해에서 로마교와는 달리 타락한 이후의 부패된 본성임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때로는 본성에 관한 분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행위인 일반은혜가 죄를 억제함으로 전면적인 파괴가 연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혁신학자답게 그는 이 모든 것을 포섭하는 하나의 포괄적인 작정론을 시도했다. 이런 식으로 두 전선을 형성한 다음에 확보된 일반은혜론으로써 그는 문화론을 전개한다. 주로 일반은혜의 긍정적인 발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를 위하여 그는 형상론도 재해석하고, 기독론적인 문화사도 한번 그려본다. 이 배경에는 기독교화된 유럽 중심의 문화적인 승리가 깔려있다. 카이퍼의 일반은혜론의 의도는 대로마교적인 대항보다는 재세례파적 경향에 대한 경고와 이런 경향에 젖어있던 당시의 화란 개혁파 신자들을 기독교문화의 건설에로 불러 모우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개혁 당시의 개혁자들과 재세례파를 자주 비교했다. 후자의 무리는 로마교적 이원론은 아니지만 또 다른 그릇된 이원론에 빠져서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포기했다. 카이퍼는 자기 당대의 개혁파의 민초들을 계몽하여 특히 정치적인 사명을 고취시켰다. 그 결과로 그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면서 수 많은 기독교적 기관들을 직접 설립하여 활성화시키는 지도자가 되었다.

 

 

II. 평가

 

1. 카이퍼와 칼빈. 칼빈은 그리스도를 몰랐던 많은 이방인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보편적인 부패 가운데서도 악한 본성을 정화시키지 않지만 인간 가운데서 폭발하지도 않게 제어하는 모종의 은혜의 좌소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카이퍼는 칼빈의 이 발언을 기초로 하여 일반은혜론이 개혁신학 특유의 교의로 본다. 이 은혜는 카이퍼식으로 표현하자면, 일반은혜의 부정적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타락과 부패 속에 있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일반은혜라 부른다. 이로써 인류는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며,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구체적 개인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주시는 능력과 덕을 본성의 일반적인 은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은사들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는 그것의 소유자의 구원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주신 일반은혜는 위대한 법률가, 철학자, 웅변가, 의사, 수학자와 시인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들이 받은 이 은사들을 성령의 우주적인 사역의 관점에서 보았다. 교회 밖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런 은혜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것들의 유익을 얻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보호하시지만, 특히 교회를 파수하시며 통치하신다. 또 당신 백성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운행하신다. 이것은 일반은혜가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또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들의 마음에 ‘종교의 씨’를 두셨을 뿐 아니라, 전체 세상 건축작업에 당신을 계시하셨고, 나아가 날마다 여기에서 당신을 제시하신다고 말한다. 창조에 나타난 당신의 속성들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당신을 아는 지식과 행복에로 초청받는다. 이것을 우리는 일반계시와 일반은혜가 가진 초청의 작용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롬 1:19),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변명하지 못하도록 은혜를 주신다. 이 본문은 사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왜 인간들이 은혜를 제시받으면서도 결국은 심판에 처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칼빈은 카이퍼의 주장처럼 일반계시와 일반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위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대로 수용하면서 인간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도 불신자들 위에 있다고 해석한다. 그는 이생의 삶을 내생과 비교하면서, 이생을 단지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멸해야 한다고 까지 말한다. 이는 내생의 영복을 이생의 향락으로 망각하거나 이르지 못할까 염려함에서 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충만하며, 만약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를 범하게 된다. 또 하나님은 선물들을 우리의 패망이 아니라 안녕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다만 순례한다면, 이 여정을 지연시키지 않고 돕도록 이 세상의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칼빈의 입장은 이처럼 종말론적이다. 특히 카이퍼가 말하는 일반은혜의 문화적 측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문화 사용과 즐김이지 문화 건설이라는 측면은 없다.

 

2. 칼빈은 이 점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물로서의 자질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칼빈 역시 피조된 신지식을 종교의 씨(I,iv,1)라거나 피조된 법지식을 법의 씨(II,ii,13)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 속에 고유한 습성적인 자질(habitus)을 상정한다. 이런 주장에 근거하여 개혁신학에서도 인간의 내면에 선천적인 신지식이 있다는 주장이 다시 등장했다. 이 점에서 카이퍼의 주장에 중세식의 ‘본성과 은혜’의 도식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처음부터 본성적인 신지식을 언급했지만, 차차 이를 일반은혜 안에서 취급한다. 또 종교의 씨는 죄인 속에서 일반은혜 덕에 존속한다. 여기에 카이퍼의 주장에 내용적 모순이 있다. ‘본성’적 신지식과 일반‘은혜’가 동일시됨으로써,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본성과 은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카이퍼는 재세례파의 세상 도피 경향에 반대하여, 인간의 형상을 본질과 본성으로 二分하면서, 형상의 잔여물을 말한다. 물론 타락한 인간에게 남아 있는 불씨나 잔여물은 개혁신조들에서 언급되어 나오지만, 카이퍼는 이것들에 대한 해석을 특히 재세례파에 대한 경계를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로마교적인 인간관에 접근하게 된다. 타락 후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카이퍼는 타락의 영향을 받지 않는 형상의 어떤 부분을 상정했다. 그런데 이 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주장과 연관되고, 불가피하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체론적 유사성을 전제하게 되었다. 즉, 카이퍼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체론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일반은혜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로마서 1:18절 이하와 2장에서는 타락한 인간의 어떤 가능성 자체를 말하기 보다는 현 상태에서 변명할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의도적인 거부를 꾸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을 깨닫게 하는 것은 선교사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주석역사에서 신학자들은 빈번하게 ‘존재의 유비’에 근거하여 본문에서 창조주와 인간의 본체론적 유사성을 주장했다.

 

 물론 카이퍼가 전통적인 로마교식의 존재의 유비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지는 않다. 그는 분명히 일반은혜의 출발점이 타락 후라고 함으로 로마교식의 순수 본성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렇지만 그가 인간 안에 모종의 본유적 의식과 신지식을 말하는 것은 틀림 없다. 이로 인하여 그의 일반은혜론은 하나님의 직접 행위로서의 일반은혜를 원래의 의도 대로 지속적으로 강조하지 않게 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계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로마서 1장과 2장을 읽게 되면, 본의 아니게 존재의 유비의 잘못을 범하게 된다. 카이퍼는 이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본성의 빛이나 잔여물을 통하여 인간의 선성을 귀결시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인격적인 지속적 계시 행위가 강조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와 은혜. 일반은혜론의 논의 역사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유적 사역으로서의 은혜에 대한 이해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거의 무시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롬 5: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계시의 불가분의 관계를 카이퍼식으로 특별은혜와 일반은혜로 구별하면서 일반은혜가 전혀 다른 성질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즉 일반은혜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구세주로서 은사들을 주시사,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인정하게 한다(행 14:16 이하, 17:30; 딤전 4:10). 또 재창조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인이시요 만물을 당신의 손에 잡고 계신다(요 1장; 엡 1장; 골 1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카이퍼가 성자와 일반은혜를 연결시키는 경우는 있다. 카이퍼는 두 은혜의 주체인 성자를 창조/구원중보자로 구분하는데, 이 또한 성경적이지 않다. 이보다는 카이퍼가 일반은혜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나 선하심과 연관시키는 것도 기독론적인 은혜 이해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사를 성령의 우주적인 사역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이 또한 옳지 않다. 또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이원적으로 특별은혜는 성령의 특별사역, 일반은혜는 성령의 일반사역으로 구분하는 것도 기독론적 성령 사역에 관한 이해에서 벗어나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신지식과 찬양에로의 초청이며, 이 신지식이 없는 곳에 하나님은 문책한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받는 은사는 가히 ‘도적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예정론의 확대. 카이퍼가 개혁신학의 특징을 예정론으로 보면서, 이 예정론이 개별주의적으로 발전되었고, 예정의 범위 또한 제한되게 취급되었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합당한 비판이다. 그의 예정론 이해는 개혁신학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시도이다. 특히 그가 개별적 선택보다는 교회적 선택을 강조한 것이나 창조와 예정을 연관시켜 설명한 것은 카이퍼의 신학적 탁월성을 보여준다.그러나 우리는 카이퍼의 예정론에 대한 교정 자체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지적된 대로 은혜가 기독론적이라면, 예정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고 확대시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엡 1:4 이하). 그리고 그리스도는 만물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다(골 1:15-20). 그러므로 예정을 그리스도 없이 언급할 수는 없다. 굳이 카이퍼식의 일반은혜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정론의 확대는 성경적이다.

 

 

III. 결론

 

1. 교회와 성도들은 나그네와 행인된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한다(히 11:13; 벧전 2:11).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반제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교회와 성도가 이 반제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뿐이다(요 15:18). 이 반제적 태도는 이 세상에서 도피하라는 명령은 아니다(요 17:14-15). 그러므로 순례(칼빈)라는 말보다는 나그네가 합당한 성경적 표현이다. 우리는 나그네이지만, 이 세상의 주인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창조 전체는 다 선하다(딤전 4:4-5). 또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선한 세상 가운데서 성도들은 소금과 빛의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사역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나그네임을 망각하거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대망이 식어져서는 안 된다. “이 나그네의 모습을 중심으로 삼지 않은 일반은혜론에는 세상化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고전 3:1)는 말씀은 세상적인 의미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고전 6:12, 10: 23). 그러므로 만물에 대한 종말론적인 즐김의 유보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과 문화를 정복하려는 의욕은 세상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정복되는 불행으로 끝날 것이다.

 

 이점에서 박윤선이 언급하는 식의 칼빈과 카이퍼의 연속성은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반은혜’가 아주 자연스럽게 정착,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카이퍼가 말하는 칼빈주의의 독특성의 하나로서 등극한 ‘일반은혜론’은 정작 칼빈이 말하는 나그네로서의 성도의 삶을 묘사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반은혜’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우리가 쓰는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라는 용어들도 때로는 칼빈의 사상과는 내용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이와 동시에 우리는 카이퍼의 일반은혜론의 한 기초가 되었던 인간 타락의 문제를 다시 고려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정복은 인간 속에 있는 정복욕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흔히들 생태학적 위기는 창세기 1:26-28절을 정복의 관점에서만 해석한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지배는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대인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마 20:25). 예수님이 가르치신 지배의 원리는 낮아짐과 섬김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개괄하여 보면, 교회가 약세에 처했을 때에는 관용을 요구했지만, 교회가 권력을 잡게 되면, 그 관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간의 부패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없거나 무시된다면, 성경적인 다스림의 원리인 섬김(엡 5:21)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세상 도피적인 재세례파적인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는 일반은혜론과 이에 입각한 문화적 사명에 관한 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함으로 한국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기관 설립으로 연결되었고, 이의 결과로 우리는 학교와 병원 등의 기관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문화 건설과 이를 통한 정복을 목표로 하였지만, 일반은혜의 기조에 있는 인간의 부패에 대해서는 얼마나 심각하게 고려했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카이퍼는 로마교를 대항해서는 타락의 심각성을 말하지만, 재세례파적인 도피를 대항해서는 인간 속에 남아있는 잔여물을 부가시켰다. 결과적으로 그는 로마교와는 지속적인 긴장 가운데서 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간 속의 자질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사라 하며, 다른 편으로는 인간 본성의 자질이라 하는 애매성을 지녔다. 이에 반하여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문화를 원용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문화건설은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고백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인간을 기대하지 않았다. 카이퍼도 이를 고백했지만, 칼빈과는 달리 난관적인 면도 동시에 나타내 보였다. 중생된 인간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기독교 서구세계의 승리에 대한 당당한 확신이 기독교적 기관들을 통한 기독교문화의 창달과 더 높은 승리를 구가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성도들이 받는 모든 은혜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이 받는 일반은혜도 하나님의 행위이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여부를 떠나서 은사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운영하는 여러 기관들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종류의 불미스러운 잡음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전적 부패란 일반은혜가 비로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은혜가 가르쳐 주는 우리의 본성적 모습이다. 이 여러 기관들의 출발점은 결코 일반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본성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섬겨야 한다. 만약 우리의 삶을 ‘문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일반은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은 그의 소유권 쟁탈전에 소집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3. 하나님의 영광. 이것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즐김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신이 주신 선물들을 즐기면서 당신을 찬양하고 영광돌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더불어 하나님의 일반은혜도 있다. 그러나 카이퍼식의 일반은혜론에 근거한 기독교문화론은 그 한계를 드러내었고, 세속화는 그가 섬긴 교회와 그가 세운 자유대학교를 삼켜버렸다. 잘못된 일반은혜론에 근거한 기독교문화관은 우리를 ‘세상화’시킬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주님이시요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잡으신 영광의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에 복종하면서, “만유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서 한 치도 없다”는 카이퍼의 고백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Soli Deo Gloria!